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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실체 없는 유령, 지역주의-만들어진 현실

by 이성근 2013. 12. 31.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1만5000원

 

지역주의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견해는 이렇다. ‘대부분의 유권자는 지역주의에 이끌려 투표한다’ ‘지역을 둘러싼 편견은 옛날부터 존재했으며 그 핵심은 영남과 호남 사이의 갈등이다’ ‘지역주의는 망국적인 고질병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이상의 주장 모두를, 필자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지역주의는 실체 없는 유령이라는 것이다.

우선 사실의 차원에서 지역주의는 과장됐다. 영·호남 갈등을 핵심으로 하는 지역주의는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영·호남 갈등이 역사적으로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전통적으로 영남이 권력을 독점했고 호남은 차별받았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 중앙정치 무대에서 이뤄진 특정 지방 차별의 대상은 호남이 아니라 서북이었다.

지배적인 견해에 따르면 호남은 다른 지역이 호남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갖고 있다고 보고, 다른 지역은 호남이 연고에 이끌려 특정 후보나 정당에 몰표를 던진다고 본다. 과연 지난 선거에서 이런 구도의 지역주의가 실제로 작동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한국 정치에서 반호남주의가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동원된 것은 박정희와 김대중이 경합했던 1971년 대선에서다. 당시 정권은 김대중 후보를 ‘호남 대통령’으로 낙인찍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실제 개표 결과는 영남권에서 박정희 후보의 득표율 감소와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 증가로 나타났다. 실제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갈등을 권위주의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작하고 호도했다는 얘기다.

표면적으로 영·호남의 정치적 거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다. 지역에 따라 투표 행태가 확연하게 갈리는 지역 구도가 이 시기에 등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투표에서 지역 구도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영·호남 사이 상호배제적 지역 감정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 그런가. 선거 결과는 계층이나 이념적 차이에 따른 투표 행태와 지역적 차이나 지역적 요구에 따른 투표 행태가 맞물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두 투표 행태는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기존 정당의 이념적·계층적 차이가 미미한 경우 실제 투표 결과는 지역적 편차의 확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제도권 정당의 이념적 ·계층적 차이가 크지 않았던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투표가 지역 구도를 띤 것은 한국 정당 체제의 한계 탓이지 ‘지역 감정’ 탓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견해다.

 

‘지역주의 망국론’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만들어진 현실’이라고 할 때, 반드시 물어야 하는 것은 누가 그러한 현실을 만들어냈느냐는 질문이다. 저자는 진짜 문제는 지역주의 자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지역주의 탓으로 돌리면서 개혁 과제를 회피하는 집권 세력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좁은 이념적 범위 안에서 조직되고 계층적 차이에 의해 차별화되지 못한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에도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이런 구조와 조건에서 만들어진 하층 배제적 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이런 변화를 추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제기해야 할 질문은 여기에 있지, 지역주의 때문이라고 흥분하면서 정작 중요한 개혁 과제를 억압하는 데 있지 않다.” 저자의 결론이다. 주간경향 정원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