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해안 갈맷길 700리 구포팔대72경을 찿아 세번째 시민그린워킹, 송정 해운 삼포를 지나 광안리까지 답사를 했습니다. 계절별로 네 번을 걸었습니다만 언제나 다름 맛을 보여줍니다. 송정 바다 위로 쏟아지는 햇살 한자락이 폭포수 쏟아져 포말이 이는 것 같습니다.
평일 송정바다는 한가롭습니다. 빛의 대비가 인상적인 날이었습니다.
늘 느끼는 바지만 송정의 모습도 급변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한적한 갯가 시절의 송정과 80년대 개발의 손길이 서서히 몰려 올때의 정경입니다. 송정이 이런 모습이었다면 기장지역의 포구들은 초가지붕에 돌담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을 듯 합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지나치게 방어적인 해안정비로 대부분 원형을 잃고 말았습니다. 고약한 심보는 촌은 촌다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곳 역시 사람사는 곳임에도 거기는 옛것이 온전히 보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아마도 도시에서 희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는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획일화 되고 일등 중심의 경쟁시스템이 지겨워 졌기에 그렇게 되기 이전의 사람살이며, 정취가 그리워서 일 것입니다.
출처:해운대구청
구덕포로 향하는 길입니다. 낮에는 괜찮은데 해지고 어두워지면 걷기가 민망한 곳입니다. 아베크족들이 사랑을 나누는 곳입니다. 아마도 운전을 할 줄 안다면 저도 이곳을 찾았을 지 모를 일입니다. 자가용의 보급이 일반화 된 이후 보편화(?) 된 현상입니다. 어쨌든 이런 길을 자동차에게 빼앗기고 사람들은 길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길은 사람을 위한 것이고 도로는 자동차를 위한 것이라고 까지 했습니다. 길과 도로가 같은 말임에도 이런 구분이 생겼다는 것은 자동차와의 공생을 인정하고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를 통해 문제를 극복해보자는 말로 들립니다. 여름, 아니 주말만 되어도 이 길은 지나다니기 짜증스러워 집니다. 차 될 곳이 없어 주차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 관할 자치단체는 이런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아예 주차 구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연 사람들은 주행중인 차량과 정차중인 차량 사이를 경계하며 빠져나갑니다. 우습게도 그렇게 주차를 해놓고 해수욕장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만스런 말이란 것이 야 이거 심하네 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모두들 자동차가 빚어내는 혼잡과 오염, 위험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악순환을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아니면 자동차를 너무 사랑하든가. 그래서 그 결함은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어떤이는 혼잡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로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동차에 문제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밖의 것에 문제를 전가합니다.
자동차로 말미암아 해안을 비롯하여 교외 곳곳이 사방팔방 조각났고, 가위질 당했습니다. 속삭임 같은 새들의 노래 대신, 파도소리 같은 솔바람소리 대신 자동차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에 풍경을 잃고 소리를 빼았겼습니다. 볼프강 주커만(Wolfgang Xuckermann)이 쓴 End df Road (1992) 에 보면 "...자동차 엔진이 자연세계에 가하는 것은 폭력이다. 엔진은 끊임없는 폭발과정에 의해 추진되고, 이 폭발은 세계 전역에서 들린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15분간의 침묵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인간 정신에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정적(靜: 고요할 정, 寂: 고요할 적)의 경험을 잃어버렸다. 우리에게 현대세계는 진실로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편 적어도 수백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해안의 물리적 시스템이 지난 십수년 사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훼손 당한 이후 교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옛 지도를 살펴보며 일대의 지형을 비교하면, 모래해안이었던 곳은 자갈밭이 되었고, 몽동해안이었던 곳은 암반지대로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형태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해안지형의 변화는 거기에 터 잡고 살던 해양 생물과 육지부와 맞물리는 전이지역의 식생대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은하횟집 앞 구덕포의 역사를 말해주는 수령 300년의 소나무가 있습니다. 특이하게 뿌리가 드러나 누운채 세월을 버텨온 와송입니다. 구덕포는 조선말 동래군 원남면의 아홉포구 중의 하나로서 함안조씨 일가가 정착하여 형성한 마을입니다. 매년 음력 정월14일과 유월 14일 자정,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 뒤 용왕제에 이어 거릿대 장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거릿대 장군제는 길 가에 서 있는 장승이나 나무 등에게 지내는 제사로 구덕포에서는 마을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이 나무를 장군나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은성횟집 뒤편 삼포길로 불리우고 있는 곳 중의 한 곳인 청사포로 가기위해 동해남부선이 지나는 철길 아래 담장길을 지나고 있습니다. 불과 60m에 불과하지만 이런 길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줍니다. 포근합니다.
돌담길이 끝나는 곳에서 우측으로 꺽어지면 굴다리가 있고, 이 굴다리를 통해 청사포로 가는 언덕을 오릅니다. 해운대구가 만든 삼포길은 이런 포구와 만나는 길이 없습니다. 유감입니다. 어차피 예산을 들여 길을 조성할 계획이었다면 이런 소재들을 연결함을 통해 지나치게 많은 숲길을 조성해서 숲의 파편화를 촉진시키기 보다 오히려 숲과 마을을 살찌우는 고민이 요구됩니다. 그 고민이라는 것은 '개발따라잡기'식이 아니라 자족과 자급의 관점에서 마을을 에워싼 생태적 연속성과 자연적 경관의 보전, 그리고 그 마을의 전통과 공동체, 마을의 특성이 환경적이고 지속가능성을 견지한 방식으로 엊그제 벡스코에서 가졌던 슬로시티의 추구이자 제가 생각하는 슬로시티의 상입니다.
굴다리를 빠져 나와 다리 길이 만큼의 철길 옆으로 이동 한 다음 약 20m 정도 언덕을 오르면 두 개의 길을 만난게 되는데
능선길 대신에 초병들이 이용하던 참호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나름대로 시민 또는 지역민의 편의를 위해 길을 넓혔지만 무리하게 확장하다 보니 침하가 우려되는 현상도 발견합니다. 덧되었기 때문입니다.
굴다리로부터 500m 남짓한 두번째 갈림길, 여기서 일대의 해안을 조망합니다.
청사포와 송정해수욕장이 보이고, 구덕포 가는 길에 보았던 수평적 바라보기에서 내려다 보는 방식으로 바다를 조망합니다. 사실 부산의 해안 곳곳이 바다외 연결되어 있음에도 이제 바다를 관조할 수 있는 것은 이렇듯 개발이 보류된 곳에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바라볼 공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배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은 일상적 추구와 거리를 두고 자아를 찾는 일입니다.
지난 한해 부산에 길걷기 바람이 불어 그린웨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공공근로 일자리 창출의 일환으로 산자락 곳곳에 길이 열였습니다. 지역민의 건강증진과 명품길(?) 발굴을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왜곡된 길걷기의 상징입니다. 이 산자락만 하더라도 정상부로 부터 시작해서 해안까지 여섯 개의 길이 있습니다. 두개는 차량과 기차가 다니는 길이라면 나머지 네개는 사람이 다니는 길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이산이 가진 생태적 균형이 길로 인해 파편화되고, 그로 인해 야생은 격리되거나 단절되고 훼손은 확대됩니다. 그게 못마땅한 일입니다. 위에 길은 최근, 물론 오솔길 정도의 흔적은 있었겠지만 해운대구가 역부러 삼포길이라 하여 조성한 길이고, 아랫길 역시 오솔길이었는데 최근 확장되었습니다. 우측 솟대가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해월정사를 앞두고 무덤을 지남니다. 길에서 만나는 무수히 많은 무덤들, 무심히 지남니다만 이날 답사에 동행했던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는 같이 나누어 들을 법 하여 옮기어 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함니다. 예컨데 아버지와 떨어져 살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다 모친이 돌아가시고 어느듯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지만 이 친구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성장하다 보니 부자간의 정은 물론이고 아예 원망과 저주에 가까운 생각들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런 세월이다 보니 자식된 역할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기 위해 갔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처음이자 마지막 유언을 부탁합니다. '제발 화장하지 말고 묻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아들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다며 빨리 처리(?)하고 지우고 싶었던 마음이 강했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장례를 치루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하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왜 모자로부터 떨어져 혼자 어렵게 살았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어머니도 침묵했던 사연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친구가 아주 갓난아기 때 집에 불이 났고, 아버지가 아들을 구하는 도중에 서까래에 깔려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참혹한 화상을 입었던 것입니다. 어찌어찌 하여 생명은 건졌지만 화상으로 흉칙하게 변해버린 몰골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사람 드문 시골로 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도 빠짐없이 꿈에 등장하는 장면은 불길 속의 자신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화장하지 말고 묻어 달라고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또 부모의 자식 사랑을 다시 생각합니다. 가슴이 저려 왔습니다. 저 역시 자식을 키우는 아비로서 정작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짧을 때가 많습니다. 많고 많은 무덤들 무심히 지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 생전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애닯은 사연들이 이땅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 사연들 이 봄날 붉게 붉게 꽃으로 피어나 자취없이 집니다. 그 숲에 두견이 쑥꾹새 밤새워 울음을 탑니다.
숲이 끝나는 곳에 도로가 해월정사 앞을 지나 갑니다. '해월정사'라는 절 이름은 성철스님께서 직접 지으셨다고 하는데, 넓고 푸른 해운대의 바다와 해운대의 아름다운 달빛의 불지를 의미한다고 해서 해월정사라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35년 전 1970년대 중반, 성철스님의 상좌인 천제스님이 성철스님이 무리한 수행 끝에 몸이 안좋아 요양할 거처를 찾다 이곳 봉훈관터가 좋다하여 세웠었다고 합니다. 적광전 뒷편 수묵벽화가 인상적이고, 일반 사찰(?)에서 보이는 시설들, 예컨데 전형적 배치인 산신각이나 칠성각, 심지어 단청조차도 없고, 절 입구 현판도 한글로 달았습니다. 그럼에도 성철스님이 머문 곳이라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해월정사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기념관의 성격이 강한 절로서 그 유품들이 봉헌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해월정사를 지나 한국교회 교육관 앞을 따라 내려 갑니다. 삼포길로 곧장 가면 청사포를 만날 수 없기에 기존의 길을 이용하여 청사포로 향합니다.
1970년대 청사포 전경입니다. 지금처럼 해안가에 모텔이나 횟집따위가 들어서지 않은 것으로 보아 토지의 이용이 자연순응형의 소박한 모습입니다. 공유지의 상실입니다.
길의 우측편에는 300년 수령의 소나무들이 마을을 굽어 보고 있습니다. 원래 마을 이름은 신기마을 입니다. 달맞이길에서 해월교 밑 청사포 가는 길에 처음 만나는 마을인데 동해남부선 철길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자지명을 한글로 하여 새터마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옛날 청사포에서 혼인한 자식을 마을 테두리 안에서 새살림을 내어 주었는데 그렇게 한집 두집 늘어나면서 규모가 크져 신기마을이라 하였는데 요즘은 그런 구분 없이 통털어 청사포라 합니다. 이 마을 골목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방금 뽑아올린 쪽파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내다 팔 것이 아닌, 집에서 먹고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 했습니다. 텃밭을 보아하니 파 사이 상추가 심구어져 있습니다.
청사포 등대입니다. 청사포란 이름의 유래와 관련하여 안내판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청사포는 부산 해운대와 송정사이의 포구로서 사람들이 찾지않는 한적한 곳이다. 이곳에는 15m높이의 수령 300여년이된 소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서있다. 옛날 이곳 마을에 정씨 부부가 고기잡이를 하고 살고 있었는데, 이들 두 부부는 남달리 금술이 좋아 , 지아비가 고기를 잡으러 나가면, 그 부인은 바위 위에 앉아 남편이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한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소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고기잡 나간 남편을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고, 수년을 그렇게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바닷물을 가르고 푸른 구렁이(용왕)가 여인 앞에 나타나 물길을 인도하여 남편을 상면케 하였다. 남편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 애틋한 정때문에 용왕이 이들을 용궁에서 살게한 것이었다.
이 전설이 유래가 되어, 청사포(靑蛇浦)였는데,그후에 사(蛇;뱀사)자를 고쳐 사(沙;모래사)자로 바꾸어 지금의 청사포(靑沙浦)가 되었다고 합니다. 금슬좋은 부부에 꽃힙니다. 다들 처음엔 너무도 사랑이 지극하여 만나서 헤어지길 반복하길 싫어 한집에 살다가 시나브로 무덤덤해집니다. 대화도 줄고, 남편은 남편대로 마늘은 마늘대로 말 꺼내기가 어려워 집니다. 권태기가 오면 더 그렇지요. 하여 생각합니다. 오늘은 꽃 이라도 한송이 사들고 가보자. 그리고 오늘 어땠어?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오늘 내 사랑을 받아줘 라고 해 본다면 ^^
청사포 끝입니다. 인근 횟집의 이름도 끝집입니다. 바다로 함몰하는 끝자락, 소가 누운 형상의 와우산 꼬리입니다. 등짝에는 달맞이 고개 상가와 아파트들을 걸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들이 송정이며 해운대 곳곳에 붙어 있었습니다.
왜 ? 포스트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AID아파트 재건축 문제로 달맞이의 경관이 손상받는 마당에 그 뒷편까지 그런 곳이 된다면 ...
청사포 백등대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를 만났습니다. 거기 누군가 매직으로 바다새를 옮겨 놨습니다. 이땅의 어느 곳 / 누구에게도 마음붙일 곳이 없어/ 바다로 온거야/ 너무 많은 것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예 까지 온거야 / 너무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온거야 / 아, 어떻게 설명할까...
별로 할말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저 시를 읽고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홍등대 넘어 공수 시랑산 자락이 보입니다.
그리고 300년 수령의 소나무를 바라다 봅니다. 청사포 전설을 간직한 채 묵묵히 이 포구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구덕포 300년, 청사포 300년 그리고 송정의 소나무들 일대 해송림이 제대로만 지켜 졌다면 300 해송림이라 이름 지어졌을 법 합니다. 발길을 돌려 미포로 향합니다.
동해남부선 철길입니다. 삼포 구간 세번의 철길을 건넙니다. 머잖이 이 철로도 폐선이 될 것입니다. 그림을 그려 봅니다. 미포에서 송정까지 철길을 따라 걷고 송정에서 공수포 ~시랑대~ 해벽포(동암) ~사자바위~오랑대~서암~신암~대변~월전~죽성 황학대가 연결된다면 제주 올레 뺨치는 한국 제일의 해안길이 되리라. 시방 그런 길을 만들고자 관계부처며 부산시 등을 상대로 열심히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난 겨울 부산 해안 7백리 조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철도부지의 이용에 대한 결정은 시작도 되지 않았습니다. 소유권을 가진 철도청이 그냥 내어 줄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관할 지자체인 해운대구도 꿈이 많습니다. 현재 부산시가 용역을 수행중이지만 다른 장난들을 하지 못하게 시민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이 구간 만큼은 손대지 말자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만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여볼 예정입니다.
삼포길인데 삼포가 빠지는 것은 뭐라 말해야 할지? 미포 또는 문텐로드로 가기 위해 금오횟집 뒷편 피라칸사 울타리길을 돌아 솔숲으로 이동합니다.
달맞이에서 청사포 또는 청사포에서 달맞이나 미포가는 길을 찾기 위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헤메는 곳이 이 지역입니다. 금오횟집을 기준으로 삼포길을 가려면 해월교 까지 오르막을 길 약 400m 이동해야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청사포는 빼고 간다면 몰라도 성가신 일입니다. 반면 금오횟집 뒷편 피라칸사 울타리길을 이용할 경우 170m 정도 내려가면 문텐로드와 연결됩니다.
여기서도 두 갈래길입니다. 21차 시민그린워킹은 우측 윗길을 이용할 계획입니다.
그 길에 양지꽃이며, 진달레, 사스피레가 꽃을 피우거나 피울 태세입니다. 아마 다음주면 만개한 이들을 만나지 않겠나 싶습니다. 아니 더 많은 꽃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3월 말이면 봄꽃들의 개화가 사방에서 터지기 때문입니다.
문화공연과 시인들의 시낭송이 있을 달맞이 어울마당입니다. 물론 점심도 여기서 먹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오후 1시부터 오후 일정이 시작됩니다. 차들이 오가는 달맞이길과 병행하여 이어지다 약간 숲으로 들어갔다 다시 달맞이길로 나오게 되는 구간으로 약 800~900m 거리입니다. 길 한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를 만나면 두 팔로 안아보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도 곁드리면 나무도 기분좋아 할 것입니다.
문텐로드가 끝난 곳에서 미포로 향한 길,
강원도 고성 거진에서 최근 이곳으로 이식된 수령 500의 향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왜 살던 곳을 버리고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 왔는지 궁금합니다. 거기선 살 수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해운대로 이사를 왔는 것일까? 아님 팔려 왔던가?
상전벽해입니다. 1960년대 달맞이 고개며 와우산 골프장, 그리고 10년 단위로 해운대 해수욕장의 일대의 변화를 담아 보았습니다. 해운대이기에 남아 있는 흔적들입니다. 관심받지 못한 지역들은 옛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긴 상전벽해는 우리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동백섬을 기준으로 오늘과 비교하면 그 변화는 극명합니다. 그런데 비참한 사실은 오늘날 해운대 주변의 내놓라는 고가의 고층아파트 거주자 대부분이 부산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처:해운대구청
달맞이 섹스폰하우스에서 흐린 날의 해운대해수욕장을 바라다 봄니다, 이곳에서의 조망은 해수욕장 전체와 동백섬, 그리고 이기대, 오륙도 까지 펼쳐집니다. 인근 해월정에서 달과 해맞이를 합니다. 그리고 달맞이길 좌우로 18개의 화랑이 있어 눈을 즐겁게 해 줍니다. 해운대가 가진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한마디로 놀기 좋은 곳입니다. 달맞이가 있는 중1.2동을 비롯하여 신시가지쪽과 좌.우동 전체가 호텔이며, 모텔, 식당, 유흥업소가 널려 있습니다. 관광특구입니다. 문제는 돈이겠지요. 한 두끼 정도야 가능하겠지만 지갑이 가벼운 서민이 늘 놀 수 있는 곳은 못됩니다. 이지역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이 있습니다. 부산의 강남이라고 하듯 해운대는 학군에서 환경,교통,문화 이제 의료까지 딴 곳을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족이 되는 지역입니다. 한마디로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합니다. 부산의 다른지역민들이 선망하는 동네이자 쳐다보면 배 아픈 동네가 이곳입니다. 지난 해 주간지 '시사인'이 그런 현상(?)을 메인기사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정작 불만은 이런 동네에다 행정이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은 열패감에 빠지게 만드는 정책입니다. 부산시 고위공무원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해운대입니다. 안 봐도 척입니다. 해운 최치원이 이꼴을 봤다면 뭐라 했을까 궁금합니다.
미포오거리에서 미포쪽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이 장면, 해운대를 기억하는 이유중에 하나입니다. 영화 '해운대'에서 해일이 몰려오는 장면을 여기서 찍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곳을 부산 100경에 추천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때 아쿠아리움을 추천했던 사람의 의견이 강했든지 아쿠아리움이 100경에 들었습니다. 쩝 입니다.
미포 표지석 옆에서 해무 자욱한, 그리고 힘차게 밀려오는 파도와 마주하고 섰습니다.
미포입니다. 형성시기는 정확히 일수 없는데 임진왜란 후인 것으로 추정합나다. 와우산이 바닷가로 흘러내린 서남 해안가에 자리 잡았는데, 미늘, 미포, 미암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소꼬리에 해당됩니다. 포구너머 동해남부선이 짧은 터널을 지나는데 그곳을 고두말이라 합니다.
미포의 등대입니다. 아담한 포구에 어울리는 등대입니다.
동백섬 뒷편 키재기를 하고 있는 고층건물군들입니다.
부산웨스틴조선호텔까지 1.55km , 해수욕장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심심하지 않는 길입니다.
동백섬 순환길 옆 암반지대에 인어상이 있습니다. 황옥공주라 합니다. 1974년에 설치한 인어상은 1987년 태풍 셀마로 유실된 것을 1989년에 다시 설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 모습과 뒷태가 차이가 납니다. 글래머 라고 해야 할까요. 보통 인어상은 미끈한데, 뚱뚱한 인어도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여성들이 S라인에 목을 매는 요즘, 건강한 여성상으로 재해석되어지길 바래봅니다.
동백섬 순환테크가 얼마전에 놓였습니다. 단점이라면 해안 접근성이 고려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암반 해안 어디를 막론하고 테크깔기가 유행인 점을 우려하고 경계합니다. 넘치느니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간 정말 인공성이 배제된 자연 해안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가 안될까 걱정스럽습니다.
21세기 해운대구가 자랑하는 해운대 12경 중의 하나인 누리마루입니다. APEC 정상회담이 벌어졌고, 반세계화를 외치던 시위대가 이곳으로 오려다 전 경찰청장이던 어청수씨의 컨테이너성벽 작전에 가로막혀 수영2호교에서 대치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무튼 19세기 이전 해운팔경은 동백섬 남단위에서 바라보는 경치인 해운대상(海雲臺上) ,석양의 오륙도를 뒤로 하 여 고깃배들이 돌아오는 한적한 풍경인 오륙귀범(五六歸帆), 장산에서 흘러 내리는 양운폭포(養雲瀑布), 신라 51대 진성여왕이 어릴적에 천연두를 앓아 해운대에 와서 온천욕을 하고 씻은듯이 나앗다고 전하는 구남온천(龜南溫泉), 간비오산 봉수대의 봉대점화(烽臺點火),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바라본 해지는 우산낙조(午山落照), 현 해운대도서관 자리에 있었던 연못에서 흘러내리는 장지유수(長旨流水),춘천천에서 고기가 뛰는 모습을 말하는 춘천귀어(春川歸漁) 입니다. 현존하는 경치는 굵은 글씨들입니다. 대신에 요트경기장, 벡스코, 아쿠아리움, 광안대교 등을 넣어 12경이라 선전하고 있습니다. 시대상의 반영 입니다.
내친김에 전국 시도의 팔경을 소개하자면
지역 | 내용 | ||||||||||||||||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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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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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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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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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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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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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 |||||||||||||||||
대전광역시 | • 대전8경 : 계족산, 구봉산, 대정호, 보문산, 식장산, 엑스포, 유성온천, 장태산 | ||||||||||||||||
부산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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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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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 • 강화팔경 (전등사, 보문사, 연미정, 갑곶돈대, 마니산, 광성보, 초지진, 적석사) | ||||||||||||||||
전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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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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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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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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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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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젠다 넷
송정해수욕장으로부터 동밷객섬까지 8.97km 입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라 이곳에 대한 언급은 피하겠습니다. 다만 왜 동백섬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나 하면 청사포하고 비슷한 상황인데, 여기서는 기다리다 죽었고, 그 자리에 동백꽃이 피어 났다하여 그랬다는 전설인데...ㅇ
동백사거리에서 운촌항을 지나 수영만 요트경기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구간 중 자동차의 주차로 보행이 썩 좋지 못한 곳입니다. 보행로가 있기는 한데 건물쪽에 있습니다. 건물이 입지할 때 고려하지 못한 지점입니다. 요즘같은 길걷기 붐이 일어날 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수의 길걷기 참가자 보다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우선한 조치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이 경제가 영업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운촌항 등대입니다. 이곳 역시 엄청난 변화를 거치고 있습니다.
운촌은 동백섬옆 수영강으로 흐르는 춘천의 오른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앞 수영만에서 4월10월 멸치잡이가 성행했다고 합니다. 어로가 이루어지는 밤, 횃불을 따라 몰려드는 은백색 멸치떼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며, 수영만이 매립되기 전 수심이 얕았던 이곳에는 백합이 지천이었 합니다. 지금의 동백사거리에서 수영방념 우측 소나무 동산이 경술국치 당시의 박영효 별장이있어 별당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1960년대의 운촌 일대와 2003년 매립이 이루어 지던 때입니다. 출처: 해운대구청
수영만 요트경기장입니다. 부러움이 넘쳐 납니다. 서울이나 외지인들이 와서 요트를 타고 부산 해안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안한 적이 있는데, 요트가 일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홍보외 프로그램이 적용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용 가격대 역시 서민적이어 야 할 것입니다.
송정에서 수영만 요트경기장 까지 12km 입니다.
우동항을 지나 수영2호교를 건너 갑니다.
아파트 뒷편 진조말산과 첨미대가 있습니다. 가능한 저 곳을 거쳐 갈 예정입니다 . 해운팔경이있듯 수영팔경의 흔적을 찾아 볼 필요가있습니다.
수영팔경은 운대귀범(雲臺歸帆), 봉대월출(烽臺月出), 진두어화(津頭漁火), 남장낙안(南場落雁) ,장산낙조(長山落照), 백산만취(白山晩翠) ,재송직화(裁松織火), 연산모종(蓮山暮鐘) 인데 운대귀범의 운대는 해운대의 해(海)자를 뺀 말로서 조선 중기 동백섬 서쪽 마을을 운대리(雲臺里)라 했는데, 지금의 해운대쪽에서 수영만으로 돌아오는 돛단배의 감회어린 정감을 말한 것입니다.
봉대월출은 봉수대로 떠오르는 달과 어우러진 경관을 말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해운대 장산의 한 줄기인 간비오산(干飛烏山)의 봉수대를 봉대라 블렀으며, 지금의 수영(좌수영성지)에서 바라보는 달뜨는 위치는 간비오산인 봉대 너머 였던 것 같습니다. 이 봉대 넘어 동쪽에서 달이 뜨면 주위의 산은 달빛 아래 산 그림자가 묵화(墨畵)를 보는 듯 수영 앞바다는 달빛어린 은물결로 일렁인데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두어화(津頭漁火) 에서 진두는 배로 건너다니는 나루를 말하며, 어화 고기잡이배에 켜는 등불이나 횃불을 말합니다. 그림을 그리자면 나루터 저 멀리로 바라다 보이는 고기잡이배의 불빛의 장관을 두고 이르는 말로서, 그 진두는 오늘날 민락동 수영2호교 부근(좌수영지도에 표기되어 있음)에 있었던 포구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남장낙안은 남촌(南村) 앞 백사장을 남장(南場)이라 했으며, 그 남장은 지금의 광안(廣岸)동 이며, 그 광안의 안(岸)을 편안할 안(安)으로 고쳐 광안이라 쓰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광안리해수욕장에 기러기떼가 날아 내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니. 아 어저버 입니다.
1990년대 초 수영강 하류의 모습 출처:해운대구청
백산만취(白山晩翠)는 현재 부산 MBC의 뒷산을 말하는데 이 산의 정상부를 백자대 (白紫臺)라 불렀는데, 그 유래는 앞바다와 수영강의 안개가 산을 휘감고 있어 하얗게 보였고, 때로는 흰구름이 이 산을 덮고 있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학이 많이 찾아 들었다고 하여 백학산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산은 남쪽으로 나아가 바다로 빠지는 자리가 판자처럼 길다랗게 내밀린 곶(串 : 육지가 바다 쪽으로 내밀린 반도보다 작은 곳)이 되어 널구지라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 널구지를 <경상도지도>의 ‘경상좌수영영지도형(慶尙左水營營地圖形)’에서는 '판곶리'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백산이 길게 내밀린 주위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해질녘 무렵이면 백산의 푸르름과 산의 굴곡, 노송에 앉아있는 백학, 바위그림자가 바다로 드리워져 뛰어난 경관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흔적은 죄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1970년대 초 재송동의 정경 출처:해운대구청
재송직화는 재송마을의 베짜는 베틀 주위의 불빛을 말한 것으로, 재송리 아낙네들은 부지런해서 베를 짜는 베틀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낙네가 밤으로 베를 짤 때면 베틀 윗머리에 등잔불을 밝혔는데, 그 등잔불이 이 집 저 집으로 밝혀졌으니 수영강 건너편 수영에서 바라볼 때면 소나무 사이로 일렁이는 여름날의 반딧불처럼 아름다이 보였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조에 보면, ‘재송포는 동래현에서 동으로 10리 떨어져 있는데 소나무 수만 그루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재송포는 오늘날 수영의 옛 비행장, 지금은 센텀시티 쯤으로 사구가 형성되어 육지가 된 곳입니다.
연산모종(蓮山暮鐘)에서 연산은 금련산에서 유래된 말로 금련산은 수영의 주산이 되며, 모종은 저 멀리 사바세계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를 말합니다. 이 산에는 옛 절로 알려진 마하사ㆍ반야암ㆍ바라밀다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마하사만 남아있고, 반야암과 바라밀다사는 마하사 입구의 맞은편 언덕에 축대만 남아있는데, 옛날 이곳 마하사에서 울려퍼지는 해질녘의 범종소리가 사바세계로 은은하게 울려 퍼졌고, 그 은은한 모종소리를 수영에서 들음으로서 삿된 마음을 지우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 세월이 무심합니다. 어찌 이렇듯 흔적을 찾을길 없이 말끔히 바뀌었을까. 민락동 수변공원을 돌아서면 2003년 태풍 매미가 밀어 올린 바위덩이 한 개가 스텐드에 얹혀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안은 더욱 공고히 요새처럼 콘크리트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한다면 인긴이 지나치게 해안 가까이에 접근 함으로써 발생된 필연적 피해입니다. 원래 자연의 속성을 아는 경험 많은 촌로들은 해안 너무 가까이에 살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그들의 영역임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그 존중이 오만의 세월이 된 것은 불과 20~30년 안짝의 일입니다.
광안리 동쪽 입구입니다. 예까지 15.27km 21차 시민그린워키워킹이 끝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22차는 광안리~이기대~신선대~유엔공원~우암포(동) 장고개~영가대까지 예정되어 있습니다. 4월10일 입니다.
후기
팝인라이프 빅밴드의 금관4중주단이 들려주는 연주, Wonder Land by Night와 Cherry Pink Mambo 등이 잠깐 오르막길의 땀을 씻어주며 맛있는 점심 반찬으로 제공되었고 김헤영 시인이 동백섬을 낭송했습니다.
점, 점, 섬이 되어가는 여자
손끝을 놓아버리면
시퍼런 몸 속 바다로 수잘될지도 몰라
붉은 동백꽃이
알몸으로 태양을 받아들이는 섬
동백꽃 입술에 물든 남국의 끈적이는
파도 내음이 후욱 풍긴다 뜨거원진
당신의 숨소리, 날 삼켜보실래요
점,점, 꽃이 피어나는 오후
지운경 시인의 달맞이길
와우산 15곡도
해운데 미포에서 곡절 많은 인생길처럼
열다섯 번이나 구부러지며 송정까지 가는 길
어디론가 화살처럼 날아갈 듯 당겨진 수평선과
망부송 전설보다 푸른 청사포 앞바다
눈길 가는 곳마다 그리움 만나는 이 언덕
하늘도 그리워서 해가 뜨고 달이 뜨겠지요
벚나무 가지마다 뭉게뭉게 꽃구름 일 때
계수나무 꽃향기 은은하게 퍼질무렵
초록의 유효기간이 지나 녹이 스는 가을날
아니, 춘하추동 어느 때나
이 길은
달 밝은 밤이면 그을리며 걸어가는 길
달은 그리움의 얼굴이다
세월은 말 못하는 벙어리 앞 못 보는 장님이지만
세월이 바로 그리움입니다
사람도 세월이라 그리움 때문에 살아가는 것
달빛 속에는
온 세상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신선 시인의 요트선착장에서
은빛 철책선 따라 정겨운 통로에 서면
긴 혓바닥 푸른 물살에 드리우는 선착장
파도가 설레일 때마다
요트들은 어제의 속도를 달랜다
좌우로 마주한 눈빛들은
간밤 별들이 흘린 자국
다소곳이 하얀 이마로 반짝인다
바람이 불어도 미동하지 않는 배들
먼 나라의 아귀나무숲을 그리워한다
수평선 너머 출렁이는 파도의 축억을 떠 올리며
쏜살같이 내달리는 속도감
돌아앉은 광안대교의 교각에 부딪혀 요동칠 때
비로소 느린 세상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날아오르는 바닷새와 만난다
은은한 햇살이 잠재우는
수영만 이물에서 낮달이 뜨고
돌아오지 않는 배들을 기다리며
보드카 뜨겁게 부푼 가슴을 어루만진다
선창에 목을 내민 캔커피들이
깡통을 기울이며 물때를 점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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