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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스크랩 또는 퍼온글

성덕대왕신종과 만파식적

by 이성근 2021. 1. 2.

성덕대왕신종 용뉴.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에밀레1000년을 넘어 마음을 울리는 소리엔 비밀이 있다

한국의 고대 범종, 특별하다

성덕대왕신종1200여년 전 통일신라시대 경주에서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종에 1000여자의 명문이 남아 있어 제작 시기와 취지, 만든 사람들, 당시 정치·사회상도 보여준다. 명문과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성덕대왕신종은 771년에 제작됐다. 신라 36대 혜공왕(재위 765~780) 때다. 혜공왕은 종의 주인공인 성덕왕(재위 702~737)의 손자이자 경덕왕(재위 742~765)의 아들이다. 종 제작은 원래 성덕왕이 죽은 후 효성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한 경덕왕 대에 시작됐다.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창을 기원하면서다. 석굴암, 불국사도 바로 이 경덕왕 대의 작품이다. 하지만 경덕왕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했다. 그러자 혜공왕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할아버지를 기리는 종을 완성한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은 당시 봉덕사에 내걸려 불교 의식구로 사용된 범종(梵鐘)이다.

 

국내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종은 통일신라시대 범종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종은 오대산 상원사의 상원사 동종’(국보 36)이다. 성덕대왕신종보다 40여년 앞선 725년에 만들어졌다. <삼국사기>에는 이미 6세기에도 종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들어 특히 많이 제작된 종은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 종들 가운데 성덕대왕신종이 주목받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우선 가장 크다. 입구 지름이 223, 전체 높이 369, 무게는 무려 18.9t에 이른다. 두께는 11~25. 종 앞에 서면 그 웅장함에 압도된다. 1200여년 전에 이 거대한 종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거대한 도가니, 1000도가 넘는 고온을 유지할 시설, 엄청난 양의 밀랍, 장인들. 만드는 과정을 상상하면 종은 새롭게 다가온다.

 

종의 재료는 합금기술이 적용된 청동이다. 구리와 주석이 약 8 2 비율이며, 납과 아연 등도 조금 포함됐다. 제작기법은 밀랍을 활용한 밀랍주조법이다.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지만 까다로운 첨단기법이었다. 그 유명한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28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78·83) 등 삼국·고려시대 명품들이 이 기법으로 주조됐다.

 

조형적 아름다움도 자랑이다. 누가 봐도 당시 중국, 일본 종보다 조형미가 뛰어나다. 꼭대기의 용뉴(종을 매다는 용모양의 고리)부터 맨 아래 종 입구까지의 형태, 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무늬가 섬세하다. 한 마리의 용을 형상화한 용뉴의 용은 세밀하게 새겨진 비늘, 날카로운 이빨, 생동감 넘치는 발 등으로 역동적이다....

도재기 경향신문 선임기자 2018.7.20.

 

 

KBS 역사스페셜 에밀레종의 진실 /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우리 것, 우리 종, 우리 문화

....종의 양식은 한국종(korean bell)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갖게 한 외형이다. 중국종이나 일본종과 비교해 한국종이 지닌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중국종의 외형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이다. 중국종의 특징인 가사문을 벗어던지고 그 자리에 비천상을 올려놓았다. 연뢰와 연곽, 천판과 하대 등으로 종을 장식함으로써 비천상은 가사문의 결박을 풀고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나팔모양의 중국 종에서 탈피해 우리만의 독자적 디자인인 배흘림 모양은 우리문화의 풍성함의 상징이며, 그 안의 비천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두 번째는 용뉴이다. 중국종과 일본종이 두 마리의 용을 붙여놓은 형태를 고집하는 반면 신라종은 등에 대나무를 지고 종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용을 형상화하고 있다. 황수영 박사의 주장대로 문무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용을 통해 전달했다는 호국의 정신이 그대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나아가 울림의 본체인 종을 매달고 있을뿐더러 그 소리를 온 누리에 퍼뜨려 파도, 즉 모든 고난을 평화로 만들겠다는 염원이 용뉴에 스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 범종은 용뉴로 인해 무게 중심이 약간 한쪽으로 쏠리게 되는데도 중국종의 쌍용에서 단룡으로 넘어간 것은 만파식적 재료가 될 대나무를 가지고 나타난 용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종을 만드는 장인의 뛰어난 상상력과 예술적 감각은 만파식적을 용과 일체형으로 만들고 힘찬 앞 발 하나는 앞으로, 하나는 뒤로 역동적으로 배치하면서도 무게의 안배를 잃지 않았다. 음통이라고 알려진 만파식적은 당시의 문양인 연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만파식적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차연희기자 korinf.com

KBS 역사 스페셜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중

선덕대왕신종과  문무왕, 그리고 만파식적은 시대의 아픔을 설화형식으로 빌어 표현하고 종소리로 새시대를 열고자 했던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나아가 고구려, 백제 유민의 사무친 원한을 풀어주고자는 울림이 신라인의 겸허한 성찰의 소리이자 패자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통합의 소리... 역사 스페셜 나레이션

세속의 번뇌망상 잊게 해주는 천상의 소리

 

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긴 여운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

예로부터 에밀레종 별칭 유명

성덕대왕 왕생극락 염원담아

지금도 타종 가능한 신라 범종

8세기 통일신라 불교 조각 반영

한국의 범종은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 긴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마치 맥박이 뛰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러한 범종의 긴 공명을 우리는 맥놀이 현상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맑고 웅장한 소리를 지니고 있어 누구라도 이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 주는 오묘한 천상의 소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성덕대왕 신종이 지니는 공명대가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처럼 소리와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상원사 종보다 약 반세기 뒤인 771년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현재까지 유일하게 손상 없이 그 형태를 유지해 온 아직까지 타종이 가능한 신라 종이기도 하다.

 

원래의 종이 있던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경주 북천(北川) 남쪽의 남천리에 있던 성덕왕의 원찰(願刹)이었다. 성덕왕이 증조부인 무열왕(武烈王)을 위해 창건하려다 아들인 효성왕(孝成王)에 의해 738년에 완공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景德王)이 이 절에 달고자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혜공왕대(慧恭王代)인 대력(大曆) 6(771) 12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러운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있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된 이후 여러 번에 걸쳐 그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2에는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 5(1460)에 영묘사(靈廟寺)로 종을 옮겨 달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중종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이 경주 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아 군인을 징발할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가 경주 부윤의 동헌(東軒)을 수리하면서 동부동 옛 박물관 자리에 진열관을 열게 되었고 이때 첫 사업으로 봉황대 아래에 있었던 성덕대왕 신종도 옮겨 가게 되었다. <고적도보해설집(古蹟圖報解說集)>에는 이 때를 1916년이라 하였으나 국립박물관의 유물대장에 의하면 1915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19158월에 동부동 옛 박물관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오랜 기간 구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75527일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종의 세부 형태를 살펴보면 몸체의 상부 용뉴()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는 굵은 음통(音筒)이 부착되어 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따르고 있다. , 뒤의 발을 서로 반대로 뻗어 힘차게 천판을 딛고 있는 용의 얼굴은 앞 입술이 앞으로 들려 있으며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이빨, 정교한 비늘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역동감이 넘친다.

 

머리 위로는 상원사종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뿔이 솟아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용의 목 뒤에 붙은 굵은 음통에는 대나무처럼 중간에 띠를 둘러 4단의 마디로 나누었는데, 각 단에는 연판 중앙에 있는 꽃문양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붙은 앙복련의 연판을 동일하게 부조하였다. 그리고 음통의 하단과 용뉴의 양 다리 주위에는 음통의 연판과 동일한 형식의 연꽃 문양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처럼 잘 보이지 않는 종의 천판 부분에까지 섬세하게 문양을 새기고 있는 것은 이 종이 세부까지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천판의 용뉴 주위를 둥글게 돌아가며 주물의 접합선을 볼 수 있으며 여러 군데에 쇳물을 주입하였던 주입구의 흔적도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종의 몸체 중앙부를 돌아가며 희미하게 주물선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성덕대왕 신종이 용뉴 부분의 천판까지를 한틀, 그리고 워낙 종이 크다보니 하나의 틀로 몸체 전체를 제작하기 어려워 몸체를 반으로 나누어 접합한 뒤 주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흔적이 남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범종은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섬세한 용뉴 조각과 문양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사형주물법이 아니 밀랍주조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에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거대한 종을 만들면서 동원된 밀납의 양은 엄청났을 것이어서 이 종이 당시로서도 국가적인 사업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작품이란 것을 잘 말해준다.

 

종의 몸체 상대(上帶)에는 아래 단에만 연주문이 장식되었고 대 안으로 넓은 잎의 모란당초문을 매우 유려하게 부조하였다. 상대에 붙은 연곽대(蓮廓帶)에도 역시 동일한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한편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는 상원사종(725)과 같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연밥(蓮顆)이 장식된 둥근 자방(子房) 밖으로 이중으로 된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대부분의 신라 종이 돌출된 모습의 연뢰를 지닌 점과 달리 이러한 납작한 모습으로 장식된 종은 이후 8세기 후반의 일본 운주우지(雲樹寺) 종이나 일본 죠구진자(尙宮神社) 소장 연지사(蓮池寺) (833)에도 계승을 이루며 나타난다. 성덕대왕 신종은 이 뿐만 아니라 주악천인상과 종구(鐘口)의 모습 등이 다른 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柄香爐)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비천상 대신 공양자상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공양자상은 연꽃으로 된 방석 위에 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두 손으로 가슴 앞에서 향로의 손잡이를 받쳐 든 모습이다. 머리카락(寶髮)은 위로 묶은 듯 하며 벗은 상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천의가 휘감겨져 있고 배 앞으로 군의(裙衣)의 매듭이 보인다. 연화좌의 방석 아래로 이어진 모란당초문은 공양자상의 하단과 후면을 감싸며 구름무늬처럼 흩날리며 장식되었고 머리 위로는 여러 단의 천의 자락과 두 줄의 영락이 비스듬히 솟구쳐 하늘로 뻗어 있다. 공양자상이 들고 있는 향로는 받침 부분을 연판으로 만들고 잘록한 기둥 옆으로는 긴 손잡이가 뻗어있으며 이 기둥 위로 활짝 핀 연꽃 모습의 몸체로 구성된 모습이다.

 

최근 마모된 공양자상과 병향로의 모습을 복원해 본 결과 비슷한 시기의 중국 석굴이나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향로와 향합(香盒)을 양손에 각각 나누어 들고 있다는 점이 새롭게 확인되어 근래 제작된 신라대종에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였다. 성덕대왕 신종의 공양자상은 비록 얼굴 모습이 많이 마모되어 세부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세련된 자세와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천의, 모란당초문의 표현은 통일신라 8세기 전성기 불교 조각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범종 부조상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힌다.

 

[불교신문3276/2016225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1915년 이전의 경주 봉황대 기와 건물이 성덕대왕 신종과 종각이다. 중종 원년 1506년부터 1915년까지 봉황대에 있었다.

절에서 내려와 중생과 함께 한 1200년 세월

산과 같이 무뚝한 저 종에서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나올 수 있을까. 영롱하고 맑다는 표현만으로는 그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그려낼 수 없다. 낭랑하고 깨끗하면서 웅혼하며 거룩하다. 사람은 한평생 수많은 희로애락을 경험하지만 저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듣는 이가 몇이나 될까.”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을 예찬한 글 가운데 일부이다. 신라시대 조성된 신종은 1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차례 거처를 옮겨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1975421일 오전 11. 옛 국립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에서 성덕대왕신종 이운식이 열렸다. 당시 불국사 주지 월산스님의 집전으로 고별제를 거행한 뒤 30번의 타종을 진행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아쉬워하며 1시간 가까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덕대왕신종은 광목으로 포장한 후 합판을 대고, 그 위에 통나무 목재로 포장을 했다. 손상 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갖춘 신종은 40톤 짜리 대형트레일러에 옮겨 실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운했다. 1915년 봉황대에서 이전한 후 61년 동안 경주시민들에게 법음(法音)을 전한 신종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긴 것이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주요 기사로 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모았다. “신라의 숨결 에밀레종이 이주한다”<경향신문> “에밀레종 61년만에 이사”<동아일보>

 

이때 22톤에서 25톤 정도로 추정되는 신종을 새 박물관에 걸 수 있는 종각 걸고리를 만들기 위해 포항제철에서 특별히 철괴를 제작했다. 종의 무게를 감당하려면 최소한 50톤은 돼야 했다. 거센 바람에 종이 흔들리는데, 멈춰 있을 때보다 2배 이상의 힘이 필요했다. 앞서 포항제철에서 빌린 28톤 무게의 쇳덩어리를 걸어 시험했는데, 열흘만에 휘어져 새로 조성했다. 1975년 성덕대왕신종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전했지만, 종각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방 9칸의 목재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지만, 경주문화원 한켠을 외롭게 지키고 있을 뿐이다.

 

정양모 전 관장은 그의 저서에서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신성하고 위대한 종을 어떻게 하면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하여 새 박물관으로 모셔가서 새 종각에 달 수 있을까 큰 걱정이었다면서 그래도 경주의 남녀노소 모든 시민이 한 마음이 되어 스님도, 시장님도, 경찰서장님도, 우체국장님도 누구나 발 벗고 나서서 몇년 기획하고 몇달 준비하여 무사히 종을 옮겼다고 이전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신종을 옮긴 후 타종을 녹음할 때의 일화가 전한다. 직접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신비한 종소리를 전해주는 한편, 1000년이 넘은 신종을 수시로 칠 수 없기에 녹음하기로 한 것이다. 박물관 옆으로 수많은 차량이 오가고, 관람객도 많아 한밤중에 녹음을 진행했다. 문제가 생겼다. 종소리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개구리들이 우는 것이 아닌가. 결국 직원들이 박물관 근처 논두렁에서 작은 돌을 하나씩 들고 있다 종소리가 작아질 때 논으로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도록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덕대왕신종의 아름다운 소리를 녹음했다. 정양모 전 관장은 “(녹음을 한 얼마 뒤) 불국사 월산스님에게 개구리, 맹꽁이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하니, ‘종소리에 개구리, 맹꽁이 소리가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더 자연스럽죠라고 했다고 옛 일을 밝혔다.

 

성덕대왕신종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이 선친 성덕왕의 명복을 빌고, 공덕을 후대에 전하려고 조성한 범종이다. 높이 3m33cm, 구경(口徑, 종 아래 지름) 2m27cm의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다.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는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로 평가 받고 있다.

 

경덕왕때 조성을 시작해 혜공왕 재위 당시인 771년에 완성됐으며, 서라벌 봉덕사(奉德寺)에 걸었다. 왕실은 물론 백성들에게 위안과 안심의 불음(佛音)을 전했으나, 수해로 봉덕사가 폐사되어 조선 세조 6(1460) 경주 영묘사(靈廟寺)로 이전했다. 46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506, 중종 원년에 경주읍성 남문 앞 봉황대(鳳凰臺)에 종각을 세우고 옮겨 달았다.

 

성문을 열고 닫을 때와 정오에 종을 쳤다고 한다. 시계가 희귀했던 시절, 백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렇다면 왜 영묘사에 있던 종을 경주읍성 남문 밖으로 옮겼을까? 시대적 정치적 상황을 살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연산군을 퇴출시킨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성리학을 장려하면서 유교정치의 복원을 통한 개혁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불교와 도교를 배제하고 탄압하는 정책을 추구했다. 그 결과 1518년에는 도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고, 한양에 절을 새로 짓지 못하게 했다. 국가차원에서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불교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그 과정에서 성덕대왕신종은 절이 아닌 저자거리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중종 즉위 첫해에 종을 이전한 것으로 보아, 한양이나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탄압 받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경주시 노동동 평지에 있는 봉황대는 5~6세기 신라 고분(古墳, 옛무덤)으로 지금은 사적(事蹟)으로 지정돼 있다. 무덤보다는 야트막한 산으로 느껴지며, 1950년대만 해도 봉황대 주변에 민가(民家)가 밀집해 있었다. 고분에 큰 나무들이 여러 그루 자랐고, 정상까지 오솔길이 선명했다. 지금은 봉황대 표지석과 몇 그루의 나무가 무덤과 호흡을 같이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가는 모습

400년 넘게 자리를 지킨 성덕대왕신종은 1915년 또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경주 시내 중심에 있는 경주부 관아자리였다. 지금 같은 최첨단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기에 사람의 힘으로 옮겼다. 경주부 관아자리는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으로, 지금의 경주문화원이다. 경주문화원 전시실에는 1915년 성덕대왕신종 이전 모습을 담은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비포장 흙길 위에 둥근 나무를 잇대어 이동을 쉽게 했고, 그 앞으로는 밧줄을 연결한 큰 도르래를 사용하는 장면이다.

 

그렇게 옮겨진 성덕대왕신종은 60년간 울렸다. 정양모 전 관장은 그의 저서 <너그러움과 해악>에서 신종의 아름다운 소리를 이렇게 전했다. “(경주)시내 한복판에서 매일 새벽이면 종이 울렸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경주시내에 차가 그리 많지 않았고, 새벽이면 더욱 조용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다. 겨울 종소리와 여름 종소리는 다르다. 겨울 종소리는 차고 맑으며, 여름 종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럽다.”

...이하(생략)

 

불교신문 이성수 기자 2016.07.11.

 

그녀의 가벼운 천의가 몸에 두세 번 말려 하늘거리고

흐르는 구름과 함께 타원으로 공중을 나는 모습은 완전히 조선만의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처럼 음악적인 종소리가 그림으로 표현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 독일 미술사학자 에카르트 조선미술사

 

聖德大王神鍾之銘

 

朝散大夫兼太子司議郞翰林郞金弼奧奉敎撰

 

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視之不能見其原大音震動於天地之間聽之不能

聞其響是故憑開假說觀三眞之奧載懸擧神鍾悟一乘之圓音夫其鍾也稽

之佛土則驗在於罽膩尋之帝鄕則始制於鼓延空而能鳴其響不竭重爲難

轉其體不褰所以王者元功克銘其上群生離苦亦在其中也伏惟

聖德大王德共山河而幷峻名齊日月而高懸擧忠良而撫俗崇禮樂而觀風

野務本農市無濫物時嫌金玉世尙文才不意子靈有心老誡四十餘年臨邦

勤政一無干戈驚擾百姓所以四方隣國萬里歸賓唯有欽風之望未曾飛矢

之窺燕秦用人齊晉替覇豈可幷輪雙轡而言矣然雙樹之期難測千秋之夜

易長晏駕已來于今三十四也頃者 孝嗣景德大王在世之日繼守

丕業監撫庶機早隔 慈規對星霜而起戀重違 嚴訓臨闕殿以

增悲追遠之情轉悽益魂之心更切敬捨銅一十二萬斤欲鑄一丈鍾一口立

志未成奄爲就世今 我聖君行合 祖宗意符至理殊祥異於千

古令德冠於常時六街龍雲蔭灑於玉階九天雷鼓震響於金闕菓米之林離

離乎外境非煙之色煥煥乎京師此卽報玆誕生之日應其臨政之時也仰惟

太后恩若地平化黔黎於仁敎心如天鏡獎父子之孝誠是知朝於元舅之賢

夕於忠臣之輔無言不擇何行有愆乃顧遺言遂成宿意爾其有司辦事工匠

畵模歲次大淵月惟大呂是時日月替暉陰陽調氣風和天靜神器化成狀如

岳立聲若龍音上徹於有頂之巓潛通於無底之下見之者稱奇聞之者受福

願玆妙因奉翊 尊靈聽普聞之淸響登無說之法筵契三明之勝心居

一乘之眞境乃至瓊萼之叢共金柯以永茂邦家之業將鐵圍而彌昌有情無

識慧海同波咸出塵區幷昇覺路臣弼奧拙無才敢奉  聖詔貸班超

之筆隨陸佐之言述其願旨銘記于鍾也翰林臺書生大奈麻金符皖書

 

 其詞曰

紫極懸象 黃輿啓方 山河鎭列 區宇分張 東海之上 衆仙所藏

地居桃壑 界接扶桑 爰有我國 合爲一鄕 元元聖德 曠代彌新

妙妙淸化 遐邇克臻 將恩被遠 與物霑均 茂矣千葉 安乎萬倫

愁雲忽慘 慧日無春 恭恭孝嗣 繼業施機 治俗仍古 移風豈違

日思嚴訓 常慕慈輝 更以脩福 天鍾爲祈 偉哉我后 盛德不輕

寶瑞頻出 靈符每生 主賢天祐 時泰國平 追遠惟勤 隨心願成

乃顧遺命 于斯寫鍾 人神獎力 珍器成容 能伏魔鬼 救之魚龍

震威暘谷 淸韻朔峯 聞見俱信 芳緣允種 圓空神體 方顯聖蹤

永是鴻福 恒恒轉重

 

翰林郞 級飡金弼奧奉 詔撰

待詔大奈麻姚湍書

 

檢校使兵部令兼殿中令司馭府令

修城府令監四天王寺府令幷檢

校眞智大王寺使上相大角干臣

金邕

檢校使肅政臺令兼修城府令檢

校感恩寺使角干臣金良相

副使執事部侍郞阿飡金體信

          判官右司祿館使級飡金忠得

          判官級飡金    忠封

          判官大奈麻金   如芿庾

          錄事奈麻金   一珍

          錄事奈麻金    張幹

           錄事大舍金   ▨▨」

 

 大曆六年歲次辛亥十二月十四日鑄鍾大博士大奈麻朴從鎰

              次博士奈麻朴賓奈

           奈麻 朴韓味 大舍 朴負缶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판독자 : 남동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명 해석문

성덕대왕신종의 명

조산대부 겸 태자사의랑 한림랑인 김필오가 왕명을 받들어 지음.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설을 열어서 삼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런 종을 내걸어서 일승의 원만한 소리를 깨닫게 한다.

대저 종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에 상고해보면 카니시카 왕에게서 증험할 수 있고, 중국에서 찾아보면 고연이 처음 만들었다. 텅 비어서 능히 울리되 그 반향이 다함이 없고, 무거워서 굴리기 어렵되 그 몸체가 주름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왕자의 으뜸가는 공적을 그 위에 새기니, 중생들이 괴로움을 떠나는 것도 그 속에 있다.

 

엎드려 생각컨대 성덕대왕께서는 덕은 산하처럼 드높았고 명성은 해와 달처럼 높이 걸렸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풍속을 어루만지고 예절과 음악을 받들어 풍속을 관찰하셨다. 들에서는 근본이 되는 농사에 힘썼으며, 시장에서는 남용되는 물건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문재(文才)를 숭상하였다. 아들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고 나이 많은 이의 훈계에 마음을 두었다. 40여 년 동안 나라에 임하여 정사에 힘써서 한 해라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게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방의 이웃나라와 멀고 먼 나라가 오로지 왕의 교화를 사모하는 마음만 있었지 일찍이 전쟁을 엿보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나라와 진()나라에서 사람을 잘 쓰고 제()나라와 진()나라가 교대로 패업을 완수한 일을 가지고 어찌 나란히 말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돌아가실 날은 예측하기 어렵고 죽음은 쉽게 찾아온다. 돌아가신지 지금까지 34년이다.

 

근래에 효성스런 후계자인 경덕대왕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때 큰 왕업을 이어 지켜 뭇 정사를 잘 보살폈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이 일어났으며 거듭 아버지를 잃어 텅빈 대궐을 대할 때마다 슬픔이 더하였으니, 조상을 생각하는 정은 점점 슬퍼지고 명복을 빌려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여졌다. 삼가 구리 12만 근을 희사하여 1장이나 되는 종 1구를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문득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의 우리 성군께서는 행실이 조상에 부합하고 그 뜻이 지극한 도리에 부합되어 빼어난 상서로움이 과거보다 기이하며 아름다운 덕은 현재의 으뜸이다. 온 거리의 용이 궁궐의 계단에 음덕의 비를 뿌리고 온 하늘의 천둥이 대궐에 울렸다. 쌀이 열매달린 숲이 변방에 축축 늘어지고 연기가 아닌 색이 서울에 환히 빛났다. 이러한 상서는 곧 태어나신 날과 정사에 임한 때에 응답한 것이다.

 

우러러 생각컨대 태후께서는 은혜로움이 땅처럼 평평하여 백성들을 어진 교화로 교화하시고 마음은 하늘처럼 맑아서 부자(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성을 장려하셨다. 이는 아침에는 왕의 외숙의 어짐과 저녁에는 충신의 보필을 받아 말을 가리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행동에 허물이 있으리오. 이에 유언을 돌아보고 드디어 옛뜻을 이루고자 하였다. 유사(有司)에서 일을 준비하고 기술자들은 밑그림을 그렸다. 때는 신해년(771) 12월이었다.

 

이때 해와 달이 교대로 빛나고 음양의 기운이 조화롭고 바람은 따뜻하고 하늘은 고요한데, 신성한 그릇()이 완성되었다. 형상은 산이 솟은 듯하고 소리는 용의 소리 같았다. 위로는 유정천의 꼭대기까지 꿰뚫고 아래로는 귀허(歸墟)의 밑바닥까지 통하였다. 그것을 본 자는 기이하다고 칭송하고 그것을 들은 자는 복을 받았다.

 

원컨대 이 오묘한 인연으로 존엄한 영령을 받들어 도와서 두루 들리는 맑은 소리를 듣고 말을 초월한 법연에 올라감에 과거현재미래를 꿰뚫는 뛰어난 마음에 계합하고 일승의 참된 경계에 머물게 하며, 나아가 왕손들이 금으로 된 가지처럼 영원히 번성하고 나라의 왕업이 철위산처럼 더욱 번창하며, 모든 중생들이 지혜의 바다에서 함께 파도치다가 같이 세속을 벗어나서 아울러 깨달음의 길에 오르소서.

 

신 필오는 졸렬하여 재주가 없음에도 감히 성스런 왕명을 받들어 반고의 붓을 빌리고 육좌의 말에 따라 그 서원하는 뜻을 서술하며 종에 명을 기록하노라. 한림대 서생인 대나마 김부환이 쓰다.

 

그 사()에 이르되,

 

하늘에 천문이 걸리고 대지에 방위가 열렸으며, 산과 물이 나란히 자리잡고 천하가 나뉘어 뻗쳤다. 동해 가에 뭇 신선이 숨은 곳, 땅은 복숭아 골짜기에 머물고 경계는 해뜨는 곳에 닿았다. 이에 우리나라가 있어 합하여 한 고을이 되었다.

크고도 크도다 성인의 덕이여! 세상에 드물 만큼 더욱 새롭다. 오묘하고도 오묘하도다 맑은 교화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능히 이르게 하였다. 은혜를 멀리까지 입게 하고 물건을 줌에 고루 젖게 하였다. 무성하도다 모든 자손이여 안락하도다 온갖 동포여. 수심어린 구름이 문득 슬퍼지니, 지혜의 태양에 봄이 없구나.

 

공경스럽고 효성스런 후손이 왕업을 이어 기틀을 베풀었다. 풍속을 다스리되 옛 것에 따르니, 풍속을 옮아감에 어찌 어김이 있으랴. 매일 부친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항상 모친의 모습을 그리워하였다. 다시 복을 닦고자 하늘종으로서 빌었다.

 

위대하도다 우리 태후시여! 왕성한 덕이 가볍지 아니하도다. 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출현하고 영험스런 부응이 매양 생겨났다. 임금이 어질매 하늘이 돕고 시절은 태평하고 나라는 평안하였다. 조상을 생각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그 마음을 따라 서원을 이루었다. 이에 유명을 돌아보고 이에 종을 베꼈다.

 

사람과 귀신이 힘을 도와 진기한 그릇이 모습을 이루었다. 능히 마귀를 항복시키고 물고기와 용을 구제할 만하다. 위엄이 동방에 떨치고 맑은 소리는 북쪽 봉우리에 울렸다. 듣는 이나 보는 이가 모두 믿음을 일으켜 꽃다운 인연을 진실로 씨뿌렸다. 원만하게 빈 속에 신기한 몸체가 바야흐르 성인의 자취를 드러내었다. 영원히 큰 복이 되고 항상 장중하리라.

 

한림랑인 급찬 김필오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대조인 대나마 요단이 쓰다.

 

검교사 병부령 겸 전중령 사어부령 수성부령 감사천왕사부령이자 아울러 검교진지대왕사사인 상상 대각간 신 김옹

검교사 숙정대령 겸 수성부령 검교감은사사인 각간 신 김양상

부사 집사부의 시랑인 아찬 김체신

판관 우사록관사인 급찬 김충득

판관 급찬인 김충봉

판관 대나마인 김여잉유

녹사 나마인 김일진

녹사 나마인 김장간

녹사 대사인 김▨▨

주종대박사 대나마 박종일

차박사 나마 박빈내

나마 박한미

대사 박부부

 

대력 6(혜공왕 7) 세차 신해(771) 1214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해석자 : 남동신

...몸체에서 눈길을 확 잡는 것이 있으니, 하늘을 날고 있는 인물상인 비천상이다.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은 여러 비천상들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선녀 같은 인물이 연꽃무늬 방석에 무릎 꿇고 앉아 활짝 핀 연꽃 모양의 향로를 받쳐든 모습이다. 돋을새김된 꽃무늬가 마치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인물을 감싸고, 천의(天衣)가 휘날린다. 다른 종들의 비천상은 대부분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지만 이 종의 비천상은 공양모습을 형상화한 공양비천상이다....

도재기 경향신문 선임기자 2018.7.20.

...용의 목 뒤에는 꽃무늬가 돋을새김된 대나무 모양 장식물이 있다. 종소리를 더 은은하게 유지하는 과학적 장치인 음관(음통)이다. 음관은 중국·일본 종에는 없다. 성덕대왕신종, 나아가 한반도 고대 종에만 유일하게 있는 특별한 장치다. 종 몸체 윗부분과 아래 입구에는 둥글게 띠가 둘러졌는데, 띠 속에도 고대 장식무늬인 식물덩굴무늬(당초문)가 꽃들과 어우러져 있다....도재기 경향신문 선임기자 2018.7.20

1200년 을 거르지 않고 올림을 내다.

신라 종은 천년을 간다는 말이 바로 상원사종이나 성덕대왕신종같이 천년을 두드려도 파손되지 않는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신라의 제철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무게가 12만근, 현재 무게 18.9톤의 대종 그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기술로도 쉽지 않은 일을 1,200년 전에 해냈다는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을 제작할 때 적용한 기술이 밀랍주조법이라고 하는데, 벌집과 송진을 녹인 밀랍으로 종의 원형을 만드는 기술을 가리킨다.

 

일제시대 일본의 종 제작기술을 들여오면서 사라졌던 이 기술은 한 장인의 노력으로 복원되어 실제 종 제작에 사용되고 있지만, 20톤에 달하는 대종을 만든 당시의 기술은 거의 신비에 가깝다고 한다. 지금은 기중기를 이용해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지만 8세기의 신라에는 인력이나 축력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종을 제작하는 방식처럼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면 한자리에서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쇳물을 녹이는 도가니도 지금의 용광로처럼 크게 만들 수 없었으므로 당연히 4사람 정도가 들어 옮길 수 있을 정도의 소형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쇳물을 붓기 위해서는 정확도와 안전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6명이나 8명은 불편했을 것으로 보인다.일체형으로 만들어야 하는 밀랍주조법의 틀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서라도 만들어 냈다는 집요함이 눈에 선하다. 더욱이 펄펄 끓는 쇳물을 단기간 내에 틀에 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먼저 들어간 쇳물이 굳는다면 다음 쇳물과 일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균열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종은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을뿐더러 장인의 손에 즉시 부서졌을 것이다. 미리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쇳물이 끓는 도가니를 옮겨서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부어야 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쇳물은 2-30% 여유분을 더 용융했을 터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덕대왕신종을 만들기 위해서 몇 개의 도가니를 사용했는지 사뭇 궁금해진다.더욱이 중요한 것은 84:16 내외의 종에 들어가는 구리와 주석의 최적 혼합 비율을 찾아냈으며 혼합주조시 생기는 불순물도 완벽히 제거했기 때문에 1,200년간의 타종에도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성덕대왕신종이 만들어지기 전에 상원사 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상원사종을 만들면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은 확보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상원사종은 높이가 167cm이지만 신종은 375cm이며, 무게는 상원사종이 1.25톤인 반면 신종은 18.9톤이다. 충분한 기술을 확보되었겠지만 외형적으로 몇 배 커진 만큼 무게를 감당해내기에 쉽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록에 따라 추측해 보건데 종 제작에 들어가 완성을 보기까지는 적어도 2-30년은 걸렸을 것이다. 경덕왕이 737년에 붕어하고 종의 완성이 771년이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수십 번 실패를 거듭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위대한 유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명문에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많은 장인들과 참여했던 백성들의 피와 땀이 녹아든 신라문화, 나아가 우리문화의 한 송이 꽃이 찬연하게 피어오른 것이다.... 차연희기자 korinf.com

안양시 석수동 중초사지 마애종각

상원사 동종 (성덕왕 24년 <서기 725년) -시주 휴도리 休道里

開元十三年乙丑三月

八日鐘成記之都合鍮

三千三百鋌▨▨普衆

都唯乃孝直歲道直

衆僧忠七沖安貞應

旦越有休大舍乇夫人

休道里德香舍上安舍

照南乇(?)匠仕大舍

 

개원 13년 을축(725) 38일에 종이 완성되어서 이를 기록한다. 들어간 놋쇠가 도합 3,300정이다. (사주?)는 보중이며, 도유나는 효이며 직세는 도직이다. 뭇 승려는 충칠·충안·정응이다. 단월은 유휴대사댁 부인인 휴도리와 (이하 미상)

 

상원사 동종은 원래 안동의 문루종(門樓鐘)이었으나, 예종 1(1469)에 상원사로 옮겨진 것이다.

상원사 동종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종의 배 앞뒤에 새겨진 정교하고 환상적인 비천상일 것이다. 비천은 무릎을 세우고 허공에 뜬 채 수공후와 생()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천의 자락이 상승 기류를 타고 위쪽으로 가볍고도 유려하게 휘날리는 모습은 실로 환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비천을 떠 올리고 있는 영지버섯 모양의 구름은 무중력 상태를 느끼게 해주고 있으며, 천의의 띠 끝부분의 인동(忍冬) 문양은 비천의 장식 효과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비천이 연주하는 수공후 등의 악기는 우리 고유의 악기가 아니라 서역 계통의 악기이다. 이런 악기의 등장은 비천상의 표현 형식이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상원사종의 비천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이다. 그런데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이 공양의 상을 취하고 있는 데 반해 상원사종의 비천상은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 형식을 취하고 있어 양자간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천상은 종신(鐘身)뿐만 아니라 종의 위쪽의 띠 안 반달형 권역 속에도 새겨져 있다. 피리와 쟁()을 연주하고 있는 작은 비천상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아래쪽 띠에도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각각 취악기, 피리, 장고, 비파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또한 유곽(乳廓)의 띠 아래 부분과 좌우에도 생과 요고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비천상은 상원사 종 장식문양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불교신문 2270/ 10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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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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