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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근 .현대사 이야기

22년 부산시청 4.3과 여순 동백이 피엄수다

by 이성근 2022. 8. 13.

제9연대 대량학살계획에 대해 기록한 미군보고서 (1949년 4월1일) 

제9연대는 폭도들에 대하여 상당히 성공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저항을 발본색원하기 위하여 제 9연대는 모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분명히 야산대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계획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9연대가 점령했던 기간 동안 섬 주민들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출처: NARA(RG319, Entry(NM3) 82, Box1416)-제주 4.3 평화재단 

그림 :현아선 作 종이에 연필 /2021  (이하 같음)   한라산으로

5.10 단독선거 실시를 앞두고 일2부는 집과 마을을 두고 한라산으로 숨어들었다. 튜표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검은연기(다랑쉬 굴)

1948년 12월18일  굴 하나를 발견한 진압군은 굴 안으로 슈류탄을 던졌다. 사람들이 안나오자 불을 피우고 입구를 막아 버렸다. 43년 후 공개 된 굴 속에는 11구의 유해가 있었다.

찾지 못한 내동생

4.3에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이 많았다. 기다림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반 백년 지나고 보니, 잊는 것보다 기억하기가 더 힘드노라 했다.

뿌리

4.3은ㅇ 사람만 앗아간게 아니었다. 제주의 산과 들도 잿더미가 되었다. 섬 곳곳에 핏빛 강이 흘렀다. 제주의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보듬어 기억하는 침묵의 증인이다. 

짓눌린 사람들

겉모습만 닮는 것이 아니다. 너무 깊은 슬픔도 대물림이 되고 너무 깊은 고통도 유전이 된다.  화가 되어 심장에 박힌 억울함은 깊은 병이 되어 대물림 된다. 4.3의 고통이 그러하다 .

ㅣ잃어버린 마을

4.3으로 제주 중산간 마을 95%가 사라졌다. 대부분 재건되지 못했다.  페허가 된 마을에 제주의 역사가 사라지고, 제주 고유의 전통이 사라지고 켜켜이 쌓인 시간들도 사라졌다.

막내 태식이 -박금만 作

1949년 1월13일, 여순항쟁 부역혐이자 120여 명이 총살 후 불태워 졌다. 17살 태식이더 거기 있었다. 태식의 형이 몰래 현장을 찾았다. 이미 불에 타 엉킨 시체더미에서 막내 태식이를 찾을 수 없었다

신전마을(추석없는 마을)

1949년 어느 날 순천 신전망ㄹ에 빨치산 무장대가 들이닥쳤다. 14살 어린 부상병의 치료를 명령하여 목숨을 위협했다. 얼마 후 이 일은 경찰에 알려졌다. 마을은 불태워지고 주민들은 죽었다. 

사건이 현재화-임재근

미군정이 촬영한 18장의 사진에는 골령골 주변 모습이 없다. 어렵게 사진 한장ㅇㄹ 찾아 냈다. 총을 든 이들과 끌려 온 사람들, 그  뒤로 보이는 산의 모양이 일치한다.

미군이 남긴 기록과 사진 -임재근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 재소자들이 북한군에게 석방될 가능성을 막고자 수 천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도 있다.  이런 정치명령은 의심할 여지 없이 최고층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찬효 작
수장-이세진 스님 -이수진 作 2020

무장대 지도부로 활동하다 어렵게 목숨을 지킨 이세진 스님, 예비검속 때 다시 체포된다. 제주시 산지 포구 앞바다에서 몸에 무거운 돌을 매단 채 수장 당했다.

북촌 합동 제삿날-이수진 作 2022

제주도 동쪽 해안마을 북촌, 매년 음력 12월 20일이면 온 마을이 제사를 지낸다. 74년 전 그 날 400여 명 마을주민이 군경토벌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중 80여 명은 어린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