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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한 컷

by 이성근 2015. 11. 7.

 

 

시에 대한 결례

 

                              황명걸

 

한때는

시 한 줄 뽑아내기 위해

막소주로 눈이 멀어도 좋았다

 

또 한때는

시상 하나 떠올리기 위해서

전찻길에 대자로 눕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시를 버려도 아깝지 않았다

 

지금 나는

평생을 바쳐 매달린 시작 중에서

건질 것이 별로 없어

속상하고, 화도 나고

허전하고, 헛되기만 하다

 

 

 

재회

                             고은

 

내가 네 번째 감옥에서 나온 뒤

그러고도 연금당한 날

나는 열 살쯤의 아이로

돈 천 원짜리에 새 한 마리를 그렸다

그것을 다른 돈과 함께 썼다

 

6년이 지났다

1998216

새 그린 천 원짜리가

나에게 돌아왔다.

 

경기도 안성에서 썼던 것이

바다 건너

제주도 KAL호텔 앞 술집에서 나에게 돌아왔다.

-야 네가 웬일이냐

 

-오랜만이다.

 

 

아르바이트

                                   박후기

 

나는 아르바이트 소녀,

24시 편의점에서

열아홉 살 밤낮을 살지요.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면 좋겠지만

굳이 앞날을 계산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바코드로 찍혀 있는,

바꿀 수 없는 앞날 인 걸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봄이 되면 다시 나타나는

광장의 팬지처럼,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지요

화장만 고치고 나오지요

 

애인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요,

우린 컵라면 같은 연애를 하지요

우린 뜨거운 물만 부으면 삼 분이면 끝나거든요

 

가끔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엄마 아빠도 힘들게

엄마 아빠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아르바이트는

죽을 때까지만 하고 싶어요

 

 

 

전국적으로

                              김용만

 

어떤 이들은 전국의 땅덩이를

돈으로 힘으로 차지했다지만

우리 형제들은 가난 때문에

몸뚱이 하나로 전국을 차지했다

 

시골 사는 용택이 형님

서울 사는 용구 형님

부산에 사는 이놈과

대전 사는 해숙이

군산 사는 복숙이

그리고 막내는 광양

 

우리 여섯 남매

전국적으로 흩어져

보고 싶어도 살기위해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산다

 

자식 낳아 이리저리 다 뺏기고

오늘도 흙 파고 살며

전국적으로 몸이 쑤시는

어머니는

어디에 열차 사고

어디에 불만 나도

이놈 저놈 맘에 걸려

전국을 걱정하며 살지만

 

우리는 가난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그야말로 전국을 점령했다

 

새벽길 2

 

사흘 굶어서도 구걸하지 않으면

그는 나의 하느님이다

 

인력시장에 나가도 찾는 이 없는 새벽

일당 삼만 원짜리도 퇴짜를 맞고

돌아오는 길

 

거친 꿈들이 저당 잡힌 거리

새벽하늘이 붉다

 

날마다 시를 쓴다

 

시를 쓴다

종일 서서 나는 시를 쓴다

일 년 열두 달

목장갑 까뒤집어 땀을 닦고

손비비며

망치 움켜쥐고 시를 쓴다

 

온몸으로 시를 쓴다

 

책상도 없이

종이도 없이

종일 서서 시를 쓴다

 

몸뚱이에 시를 쓴다

 

상처난 것들의 향기

 

                           조태진

 

빛나고

반듯한 것들은

모두 팔려가고

상처난 것들만 남아 뒹구는

파장 난 시장 귀퉁이 과일 좌판

 

못다 판 것들 한 웅큼 쌓아 놓고

짓물러진 과일처럼 웅크린 노점상

잔업에 지쳐 늦은 밤차 타고 귀가하다

추위에 지친 늙은 노점상을 ㅏㄴ났네

 

상한것들이 상한 것들을 만나면

정겹기도 하고 속이 상하는 것

-아저씨 이거 얼맘니까?

-떨이로 몽땅 가져가시오!

 

떨이로 한 아름 싸준 과일

남 같지 않은 것들 안고 와

짓물러져 상한 몸 도려내니

과즙 흘리며 피우는 진한 향기

꼭 내 몸 같아서

식구들 몸같아서

배어 물다 울컥했네

 

                               실천시선 225   '일과 시' 동인 아홉번째 시집 '못난시인' 중에서

 

 

 

마음이 먹는 밥

                                  류경일

 

학교 화장실 문에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 적혀 있다.

 

책은

마음이 먹는 밥이라서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먹어도

참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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