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를 찾기 위해 떠난 나들이었다. 표면적으론 '녹색도시부산21'이 주관한 국제협력사업이었지만 지난 한달 일요일도 없이 일에 묻혀 지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좀은 지쳐 있었다. 사실 이번 탐방은 처음부터 갈 생각을 접어두고 있었는데, 이래저래 기회가 된 것일까 동참하게 되었다. 어쨌든 자리를 마련해 준 주최 측에 고마음을 전하며 2박3일의 일정을 쉬엄쉬엄 옮겨보고자 한다. 미리 말씀드리건데 실린 사진은 크든 작든 마음대로 퍼 가셔도 된다. 특히 이번 탐방에 동행이 되어주신 분들에게는 ....
스마트 폰은 로밍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공해상으로 접어들자마자 통화는 차단되었다. 물론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전화벨을 울린 사람도 있다만,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걸지도 받지도 않았으면 한다. 언제부터인가 이게 없으면 안절부절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생활의 단절이랄까. 하기사 나 조차도 출근 때 충전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되돌아와서 챙겨가곤 하는 것이 몇 번째다. 아무튼 여행이라면 꾸욱 눌러 폰을 끄자. 그 마음으로 11월8일에서10일 주말을 이용하여 큐슈의 익숙한 지역을 다녀왔다.
날씨는 청명했다. 간만에 북항 수역을 꼼꼼히 들여다 보았다. 과연 북항재개발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할 까.
북항대교를 지나며 격앙된 영도 사람들의 외침도 기억했다. 그리고 아치섬과 태종대 등대와 주전자섬을 차례로 살폈다. 이런 그림은 부산에서 손꼽을 정도다. 마치 손톱끝의 메니큐어처럼, 육지 속의 섬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더 빛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륙도 해상을 벗어나자 잠시 동안 망망대해처럼 남쪽바다가 하늘을 이고 무한정 열려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마도가 시야에 또렸히 들어왔다. 바다는 조용했다. 원래 이 바다는 거칠고 포악하다. 한일간 수많은 사연이 바다 아래 너울 거리고 있다. 후쿠시마 이후 또 일본의 우경화로 인해 불과 40여 킬로미터에 불과한 거리지만 더 멀어만 보인다. 하지만 한 때 이 바다에도 선린우호가 만선의 깃발처럼 휘날리던 적이 있었다.
두모포 왜관에서 1678년 초량왜관으로의 이전과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전까지 약 200년, 그림같은 시절이 있었다. 출처: 부산초량왜관 연구회 손성국
대마도를 스치고 약 한시간 반 쯤 지나자 큐슈 후꾸오카(福岡) 하카타만(博多灣)이 시야에 들어 왔다. 후쿠오카 라는 지명이 통용되기 시작한 때는 에도시대(1603~1868)이후이며, 시의 이름으로 결정된 것은 메이지시대(1868~1912)부터라고 한다. 연원은 이곳 시민들이 즐겨찾는 마이즈루 공원이 위치한 곳에 첫 영주였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1601년부터 7년 간에 걸쳐 성을 축조하고 난 이후 부터이다. 부산과 가까워서인지 일본내 어느 곳 보다 자주 오게 되다 보니 시나브로 낮이 익은 곳이 됐다.
그런데 후쿠오카에서는 유독 항구의 이름을 ‘하카타항’이라 부르고 역(驛)도 ‘하카타역’이라고 부른다. 이는 예부터 2개의 마을이 합쳐진데서 유래하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 서쪽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후쿠오카’라는 마을(현재의 오호리 공원 주변)이며, 또 하나는 동쪽의, 현재의 텐진과 하카타역이 있는 ‘하카타’라는 마을이다. 이 지역은 항구를 중심으로 상업의 중심지였다. 어쨌든 이 두 마을이 합쳐져서 하나의 도시를 이루게 되었고, 이렇게 하나의 도시가 된 이후에 도시 이름을 ‘후쿠오카’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터미널 도착 후 입국심사를 위해 외국인 심사 창구에서 여권을 제시하고 지문 등록과 안면 사진촬영을 마치고 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2008년 11월 20일부터 일본은 자국에 입국하는 외국인의 지문을 날인하고 얼굴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외국인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이라며 많은 인권 단체가 항의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누구도 큰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입국 할 때 지문을 채취하는 제도를 처음 시행한 나라는 미국(2004년)으로, 당시 브라질 정부는 미국의 지문 날인 요구를 비난하며 브라질로 입국하는 미국인들에게 지문과 사진을 찍도록 했다. 브라질의 조치에 모욕감을 느낀 미국인들이 항의했지만, 브라질은 '상호주의'를 내세워 조치를 강행했으며, 2004년 미국인에 대한 지문날인과 사진촬영을 허가한 브라질 연방법원의 Julier Sebastiao da Silva 판사는 판결문에서 '미국의 조치가 야만적이며 인권을 위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며, 외국인에 대한 차별과 과거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악몽을 떠오르게 한다'고 밝힌바 있다.
20인승 승합차로 사가현 다케오로 이동한 다음 다케오 올레 시작점인 다케오역에서 시 담당자들과 만나 코스를 의논했다. 여기서도 전체 일정을 고려, 동선은 절반 정도만 걷는 것으로 했다. 코스는 JR다케오온천역 > 시라이와 운동공원> 키묘지 절(貴明寺)>이케노우치 호수 입구 > 펜션 피크닉 앞 도로 A코스 > 산악유보도 > A코스 정상> A.B코스 합류점> 다케오 신사 내 3000년 녹나무 10.6km> 츠카스키 3000년 녹나무 였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여전히 호기심과 설레임이 묻어 났다. 이 길에 대한 이야기는 http://blog.daum.net/bgtkfem/158 참조하시길 바란다.
키묘지 절 입구에 있는 종, 가스통이다. 전쟁 당시 물자가 귀해 종으로 대신 것이라 했다
키묘지(貴明寺)는 500년 전에 창건된 절로서(솔직히 그런 느낌은 안 들었다) 1574년 다케오의 영주 고토 다키아키라가 세운 선종절이다. 이 절집은 우리나라 대처승처럼 내외가 있는 절인데 주지는 전직 학교 교장 출신이다
규슈올레를 걸으시는 분들은 차 한잔 드시고 가세요 라고 써 붙인 안내문이 한국 방문자에게는 반가운가 보다 . 하기사 우리나라에서도 선뜻 이런 배려는 드물다. 부산 해운대 장산에 있는 원각사가 그런 곳이다.
관련 글 :http://blog.daum.net/dkfemsea/617(녹나무)
처음 왔을 때도 궁금했던 이 재첩들의 출처였다. 어디서 왔을까 ?
이케노우치호수는 1625년 만들어 졌다고 한다. 주변은 요양시설이 가득하다
여기서도 멧돼지의 출몰이 잦은 편이라고 했다. 상위 포식자가 없다. 또 먹이자원인 참나무과의 가시나무류가 많다
호타루노아케(반딧불호수)
일행이 잠깐 숨을 헐뜩인 산악유보도
투구꽃과 양치식물들
습한 기후로 일대의 식물상은 한반도 남부 도서지역과 비슷하다.
늘 그렇듯 수고로운 걸움 끝에는 이렇듯 시원한 전망이 있어 피로를 지운다
산 정을 앞 두고 마지막 고비
사쿠라산이 시원스레 솟았다. 시내서 보면 마치 말의 귀처럼 닮았다.
2012년 왔을 때 이 산에 올레마운틴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정상에서 내려 가는 길은 최근 변화가 있었다. 너무 급경사여서 우회길을 냈다.
우회로에서 건너다 본 다케오시가지
다케오신사(武雄神社)는 서기 735년 창건했다고 한다. 신사 입구에는 초서로 心자를 형상화 한 연못의 연화교가 있고 다리를 건너면 석재로 만든 도리이가 있다. 그리고 돌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부부의 화합과 산모의 순산을 돕는 회나무 한쌍이 있어 부부나 연인들이 즐겨 찾는다고 했으나 이번 방문에도 눈여겨 보지 못했다.
배전으로 향하는 돌계단 참도(參道)와 히젠도리이가 있다. 1617년 제22대 다케오영주 니베시마의 의해 재건된 것이라했다.
신사 잎에는 좌우에 석등과 신사를 수호하는 벽사인 ‘고마이누’가 있다. 본전에 다케우치스크네의 주신을 비롯하여 우리에게도 익숙한 신공황후,무웅 등을 모신 신사다. 나라 당시에는 큐슈의 종사로 번성하기도 하였다. 신사 내에는 고문서 등이 일본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신사 옆에는 작은 신사가 두 개 더 있다.
청정한 대숲을 지나면 3천년 녹나무의 영역이다.
방문자들의 표정은 예외 없다, 놀라움과 신비감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의 다른 지역은 미군의 공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 되는 등 불안한 시절을 보낼 때 이곳 만은 건재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이 일부 그려진 애니메이션으로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 이 있기도 하다. 다케오 시민들은 그런 위험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을 3천년 녹나무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녹나무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늘푸른 키큰 나무로 20m 크게 자라며 수령은 1000이 넘는다. 이렇듯 일본에는 있는데 우리는 왜 1000년 된 녹나무가 없을까. 제주에 있는 노거수도 다케오 신사에 비하면 그 수령을 견주기가 먼 먼 손자뻘에 불과하다. 생각컨데 희귀성에 더해 고약한 시절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부러움과 경외감이 동시에 든다.
어쩌면 다음 방문은 순전히 이 녹나무를 보기 위한 탐방일 수도 있겠다. 그냥 이 나무가 좋았다. 그래서 블로그 이름도 녹나무라 했던 것이다.
학명은 Cinnamomun camphora SIEB 속명인 Cinnamomun은 계피의 그리스명이다. 한자명으로는 장( 樟) , 樟腦木, 樟樹, 香樟 이며 가시나무류와 함께 과거 선박, 농기구 등 다용도로 널리 사용되어 온 목재이기도 하다. 자생지인 제주도에서는 녹나무 특유의 냄새가 귀신을 쫒는다며 집안과 집주위에는 심지 않았다. 제삿날 조상의 혼이 깃들지 못함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무의 생김새는 수피는 암갈색으로 세로로 약간 깊게 갈라지며, 어린가지는 녹색에서 자갈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달걀형~타원형으로 가죽질이며 양면에 털이 없으며 가장자리에 물결모양의 톱니가 있다. 잎의 길이는 6~10cm이며 주맥외에 양쪽에 1개씩 3개의 맥이 뚜렷한데 봄에 나는 새잎은 적갈색이다. 이 잎을 자르거나 비비면 장뇌향이 나오는데 얼핏 파스 냄새같다. 꽃은 원추꽃차례로 어린 가지의 잎겨드랑이에 달리고 흰색에서 황백색으로 변한다. 콩알만한 둥근 열매는 검은색으로 익는다.
목재는 장뇌(camphor)를 함유, 살충의 효과가 있고 잘썩지 않으므로 방부효과도 있다. 장뇌와 장뇌유는 수목의 기 부위에 함유되어 있으며 뿌리와 줄기 쪽에 많고 나무의 나이가 많을 수록 함유율이 높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대기 중의 오염물질 흡착이 높아 가로수로 권장하기도 한다. 한편 녹나무 잎을 따 두었다가 잎차로 달여 마시기도 한다니 ...
녹나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루에서도 등장한다. '토토루' 란 주인공 중의 한명인 메이가 만나, 이름붙인 곰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닌 귀엽게 생긴 동물을 말하는데, 마당에서 놀고 있던 메이가 눈앞을 지나가는 작고 이상한 동물을 보고 놀래면서 를 쫓아가 숲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큰 나무속으로 들어 가는데 그 나무가 녹나무다. 신선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대표적인 미술품이 교토 법륭사에 있는 백제 관음상이다. 7세기 초에 백제 27대 위덕왕이 일왕에게 보낸 불상이다. 기록에는 허공장 보살(虛空藏菩薩 )이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구다라 관음 이라고 부르고 있다. 구다라는 ‘큰나라’라는 말로, 일본에서는 백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또한 녹나무로 만들었는데 220cm 의 팔등신 몸매에 알 듯 모를 듯한 신비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오른손을 가볍게 펼쳐 앞으로 내밀고, 왼손으로는 호리병을 살짝 쥐고 있다.
일본사람들이 나라(奈良)에 오는 이유는 오직 이 불상을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말로는 “일본이 침몰해도 이것만은 남기고 싶다.” 라는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도쿄 국립 박물관은 백제 관음상의 모조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을 정도로 백제 관음에 대한 인기가 높다.
일제 강점기 (1910-1945) 때에 중국 미술을 전공하고 호류지 미술 고문으로 있던 세이치 미즈노 교수가 백제 관음을 조각한 녹나무(樟)가 한반도에서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 조각상이 일본에서 만들어 졌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917년에 후지와라 게네스케가 저술한 성덕 태자 전력(傳曆)에 구세관음상과 백제 관음상이 백제 왕실에서 왜 왕실로 보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치 유신 때 견외 사절단과 함께 세계를 여행하고 미구 회람기를 집필한 도쿄 대학의 사학자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삼나무, 전나무, 녹나무, 피나무의 종자를 신라로부터 일본에 가져다 심었다고 반론하기도 하였는데 백제관음상 소개 그림 옆 지도에 나와 있는 붉은 색 지대가 녹나무 서식지다.
사쿠라산 이 어둑살 속에 우뚝하다. 3000년 녹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고 하니 시간 구애받지 말고 보자는 의견이 많아 문화회관 뒤 언덕 츠키사키 녹나무를 보러 갔다.
이미 어둠이 내린 가운데 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현장을 찾으니 어둠속에서도 그 풍채며 위용이 드러났다. 다들 놀라워 했다. 하면서 오길 잘했다고...
다케오신사의 녹나무는 바라다 볼 뿐이지만 츠키사키녹나무는 벼락맞은 상태에서 내부가 빈 상태를 들락거라며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3000년 녹나무는 다시 잎을 내어 살아 있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 녹나무 안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사진출처: 김맹기 한국생태기술연구소
아쉽게도 카메라가 어둠을 밝히면서 피사체를 담아낼 여력이 없어 몇 명만 담았다.
츠카사키 녹나무를 보고 벳부로 급히 이동했다. 호텔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간보다는 한참이나 지났지만 모두들 흡족했고 도착하기 까지 모두들 잠에 빠졌다.
다다미방이 있는 좀 오래된 호탤에서의 늦은 저녁은 첫 1박이기에 맥주 한 잔을 반주 삼아 마시고 일정을 마쳤다.
음식은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다만 가이드가 자랑? 하던 료칸이라는 데는 동의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좁고 작은 노천탕에서 몸을 담구고 피로를 씻어 냈다. 밤 늦도록 바다를 보면서
노래출처: 아름다운 음악여행
Vincent / Don Mcl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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