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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기후 리바이어던과 그린 리바이어던

by 이성근 2023. 10. 3.

 

<기후 리바이어던> 지구 미래에 관한 정치 이론 (조앨 웨인라이트, 제프 만 지음·장용준 옮김) 앨피 202309

원서 : Climate Leviathan: A Political Theory of Our Planetary Future (2018)

조엘 웨인라이트 (Joel Wainwright)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로 정치경제, 환경 변화, 사회이론을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탈식민지화 개발: 식민지 권력과 마야Decolonizing Development: Colonial Power and the Maya, 지리적 불법복제: 오악사카, 전투적 경험주의, 지리적 사고Geopiracy: Oaxaca, Militant Empiricism, and Geographical Thought, 마플의 기억Memories Of Marple등이 있다.

제프 만 (Geoff Mann)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교 지리학과 교수이자 신경제사고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다. 지은 책으로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었다: 케인스주의, 정치경제학, 혁명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Keynesianism, Political Economy and Revolution, 위기 이후의 화폐와 금융: 불확실한 시대를 위한 비판적 사고Money and Finance After the Crisis: Critical Thinking for Uncertain Times(공저) 등이 있다

우리 중 누가 살아남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급속한 기후변화 상황에 처한 세계의 정치 미래를 조망한 책. 다가올 수십 년 동안 우리 삶의 모습이 변화할 것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사실에 익숙한 사람들조차도 그저 미래가 현재보다 조금 더 더울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값비싼 홍수보험과 더 많은 냉방과 매연으로 인한 항공기 지연 등이 일어날 뿐, 현재와 유사한 세계가 펼쳐지리라 생각한다. 산호초만 사라질 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미래는 판타지다. 그런 세계가 실현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2050년의 세계, 또는 2100년의 세계는 그저 2022년보다 조금 더 뜨거워진 세계가 아닐 것이다. 인간 사회의 재조직을 수반하지 않는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단 하나도 없다. 종으로서 인간은 거의 확실히 다음 세기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하는 지구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의 문제에서 가장 불확실한 점은, 누가 살아남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하는 문제이다. 기후변화는 국민국가가에 대한 하나의 위협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 집합체를 조직하는 방법으로서의 국민국가 자체에 위협이 된다. 본질상 지구적 문제이다. 기존 국민국가 중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국가들의 기후변화에 관한 대응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의 대응, 또 그들의 노력에 대한 대중적 대응은 미래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결과가 최소한이나마 민주적이기를 바란다면, 국가들과 엘리트들이 미래의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할지 등등의 문제를 고민하고 고찰해야 한다. 기후정의를 위한 운동들이 미래의 정의와 자유, 공정을 보장해 주길 바란다면, 현재의 위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부터 연구하고 그 분석에 의거해 사회를 변화시킬 일을 체계화시켜야 한다

출현 가능한 네 가지 미래 경로

국민국가 토대의 제로섬 영토주권 배분이 급속한 기후변화에 직면해서도 계속될 수 있을까? 그 세계가 자본의 속박에 그대로 묶여 있게 될까? 주권과 자본이라는 이 두 질문은 네 가지 경로로 향한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지구적 기후변화가 제기하는 소위 집단행동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형태의 행성적 주권을 조직하여 자본주의 강화에 전념하는 떠오르는 지구적 질서를 가리킨다.

기후 마오는 비슷하게 지구적 규모의 해결책을 대변하지만 비자본주의적 질서에 전념하는 것이다.

기후 베헤못은 맹목적 애국주의 자본주의와 민족적 정치에 고취된 지구적 협정으로서 기후변화가 국가자본에 제기하는 위협을 부인(비난할 수 있을 때까지만)한다.

기후 X는 우리가 지구적 기후정의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운동들의 집합체에 부여한 이름이다. , 비자본주의적 정치경제를 구축하고 현재의 주권 논리를 거부하는 다층적 규모의 유대를 구축하는 운동이다.

목차

서문

한국어판서문: 우리 미래를 둘러싼 판타지

1

1. 우리 시대의 홉스

2. 기후 리바이어던

2

3. 적응의 정치

4. 정치적인 것의 적응

5. 녹색 자본주의?

6. 행성적 주권

3

7. 파리 이후

8. 기후 X

미주388

 

책 속으로

지구적 위기 상황에서 주권의 안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뜨거워지는 지구는 리바이어던을 깨울 만큼 강렬한가?” 아니면 리바이어던이 자비를 간구할까?”--- p.44

홉스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재적이고 헤게모니적인 세계 구상이 새로운 종류의 주권자,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요구하고 추정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46 이것은 역설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상당 기간 동안 헤게모니를 장악한 채로 남아 있는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는(보통 폭력적 결과를 불러온다) 극도로 불공평하고 명백히 모순된 사회적·정치적 질서들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p.80

인간 사회는 어떤가? 기후변화에 관한 동시대의 논의에서 적응은 사회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을 동시에 가리키고, 그래서 그 은유의 진화론적 뿌리는 모호해진다. 분석 단위는 무엇인가? “사회가 적응한다고 할 때, 무엇이 자연선택의 역할을 하는가? 유전자는 무엇이고, 개체군은 무엇인가? 여기서 그 진화론적 은유의 정치적 가치는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p.157

현재의 목적으로 볼 때 불평등 논의에서 빠진 것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연이다. 차이를 심화하고 악화할 게 확실한 기후변화는 너무나 미흡한 관심을 받아 왔다. 불평등을 심화하는 자본의 경향은 기후변화에 맞선다는 난제에서 핵심이 되는데, 의미 있는 대응이란, 초국적 동맹, 초계급적 협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노력에 치명적이다.--- p.216

이미 진행 중이고 분명 악화될 것이 뻔하지만, 해수면 상승과 심화하는 가뭄 같은 가속화하는 환경 변화들은 기후변화가 요구하는 정치적 변화를 스스로 간청하지 않는다. 행성적 주권을 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대량이주와 갈등의 유령들(그리고 현실)에다 지구공학의 약속이 합해져야 하는 경우다.--- p.305

아도르노는 잠재적으로 급진적인 새로운 권력형식이 도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주권에 반할 정도로 급진적인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사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비주권적일 수밖에 없다. 너무 신성해서 다른 식으로 존재할 수 없는 통치 원리나 영토 폐쇄란 없기 때문이다.--- p.375

 

그린 리바이어던: 기후위기와 AI 시대에 인간의 자유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마크 코켈버그(Mark Coeckelbergh) / 김동환, 최영호 저 | 씨아이알(CIR) | 202308

Mark Coeckelberg버밍엄대학교(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벨기에 출신의 기술철학자이다. 2007년에는 네덜란드 생명윤리학회상(Prize of the Dutch Society for Bioethics)을 받았고, 2014년에는 기술철학 석사 프로그램 최우수 강사(Best Lecturer of the Philosophy of Technology Master Programme)로 임명되었다. 20174월에는 벨기에 기술선구자 50(Top 50 Belgian tech-pioneers) 중 한 명으로 임명되고, 최근에는 유네스코(UNESCO) 세계과학 기술윤리위원회(World Commission on the Ethics of Scientific Knowledge and Technology)에 임명되는 등 기술철학자로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있다. 기술철학 분야, 특히 로봇공학과 정보통신기술(ICT)의 윤리에 관해 수많은 논문과 책을 집필하였으며, 2015년부터 빈대학교(University of Vienna)의 미디어와 기술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목차

1장 녹색의 멋진 신세계 A Green Brave New World

기후변화와 AI를 자유에 관한 정치적 문제로 다루기

2장 리바이어던 재장전 Leviathan Reloaded

취약한 문명에 대한 홉스식 문제로서 기후변화와 AI

3장 대심문관을 위한 빅데이터 Big Data for the Grand Inquisitor

루소와 넛지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성과 자유에 대한 논의

4장 기후 생존자를 위한 역량 Capabilities for Climate Survivors

적극적 자유, 공동선, 윤리

5장 인류세 속의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s in the Anthropocene

집단 행위성, 기후 정의, 기후 프롤레타리아의 반란

6장 집단 확대 Enlarging the Collective

정치과학과 정치적 통일체에 대한 덜 인간중심적 개념

7장 시적-정치적 프로젝트 The Poetic-Political Project

생태학적·기술적 위기의 시기에 자유철학적 사고와 실천에 대한 도전

참고문헌

찾아보기

기후위기가 불러 올 '괴물의 시대'에 대비하기

<기후 리바이어던>, <그린 리바이어던>을 읽고

한국 정치는 여전히 작년 대선의 연장전을 치르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세계의 시간은 묵묵히 내달리고 있다. 기후변화도, 인공지능 개발도, 강대국들 사이의 합종연횡도 몇 달 전이 몇 년 전처럼 느껴질 만큼 빠르게 전개된다. 그럴수록 세계의 시간과 다시 엇나가는 한국 사회 현실이 더욱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식사회의 일각은 그래도 세상의 빠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서점에서 감지되는 출판계의 풍향이 그러하다. 여전히 잘 팔리는 책은 투자안내서나 자기계발서 따위이지만, 한국어 지식세계가 가난해지지 않도록 어려운 형편에도 안간힘을 쓰는 출판인들이 있다.

최근 그런 노력의 결실로 나온 두 신간 번역서가 눈에 띄었다. 공교롭게도 두 책 모두 제목에 '리바이어던'을 달고 있다. 하나는 각각 미국과 캐나다의 사회과학자인 조엘 웨인라이트와 제프 만이 공저한 <기후 리바이어던: 지구 미래에 관한 정치 이론>(장용준 옮김, 앨피, 2023)이고, 다른 하나는 벨기에 출신 철학자 마크 코켈버그의 <그린 리바이어던: 기후위기와 AI 시대에 인간의 자유는 어디까지 가능한가>(김용환, 최영호 옮김, 씨아이알, 2023).

'리바이어던'이 무엇인가?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유명한 저작 <리바이어던: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진석용 옮김, 나남, 2008)에서 국가의 기원을 논하며 이 신화 속 괴물을 다시 불러냈다. 홉스는 '욥기'에 나오는 또 다른 괴물, 베헤모스를 혼란스러운 무정부 상태의 비유로 들면서, 리바이어던을 베헤모스에 대적시켰다. 무질서라는 괴물에 맞서려면,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괴물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억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그래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후변화와 인공지능 등장의 시대에 '리바이어던'을 제목에 다시 등장시킨 두 저작이 동시에 나왔다(국역본만이 아니라 원서 출간 시점도 비슷하다). 이는 우리 시대가 근대 국가가 처음 대두한 17세기만큼이나 심대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전에 없던 혼란 속에서 많은 이들이 새로운 권력의 부상, 혹은 홉스의 비유에 따른다면 새로운 괴물의 등장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 리바이어던, 기후 마오 그리고

우선 웨인라이트와 만의 <기후 리바이어던>은 사회과학서의 탈을 쓴 심란한 디스토피아 예언서다. 긴 분량에 걸쳐 풍성한 학문적 논의를 담고 있기에 이는 너무 피상적인 평가일 수 있다. 그러나 책 전체를 꿰뚫는 네 가지 미래 시나리오의 기본 정조는 확실히 어둡다. 심지어는 공저자들이 대안으로 추천하는 마지막 시나리오조차 이 분위기에 압도된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일단, 기후위기의 존재를 둘러싸고 논쟁하거나 기후변화를 완화하려고 시도할지 말지 옥신각신하던 시기는 일찌감치 지났다고 단언한다. 이미 기후붕괴는 시작됐고, 재난이 일상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기후위기 완화보다도 이에 대한 적응이 더 급박한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위기에 대한 '적응'이 쟁점이라는 것은 곧 생존 자체가 어려운 과제인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다. 생존이 도전 과제인 시대, 이것이야말로 홉스적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다.

웨인라이트와 만이 제시하는 첫 번째 시나리오는 이 홉스적 상황에서 정확히 홉스적인 결말이 실현되는 경우다. 책 제목이기도 한 '기후 리바이어던'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 중요한 전제는 지구 자본주의가 어쨌든 별 도전을 받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며, 기존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 즉 미국, 서유럽, 일본이 계속 패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두 저자는 이 상황에서 세계 각국의 기후위기 완화와 적응 노력을 조정하는 전 지구적 주권체로서 21세기 리바이어던, '기후 리바이어던'이 출현하리라 전망한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이미 2010년대에 파리 협정을 통해 그 맹아를 선보였다. 중심부 국가들은 자국 자본의 지속적 축적을 위협하지 않는 방향에서 전 지구적 기후변화 대응 노력을 조정, 할당하려 했다. 물론 기후위기가 급속히 확대되는 상황에서 파리 협정의 태평한 분위기가 그대로 지속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때 이미 선보인 구조는 더 강력한 기후위기 대책을 통해 보다 노골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가령 기존 기후체제를 대체하는 강대국 주도의 새 기후체제가 각국에 경제활동의 방향과 규모를 지시하거나 심지어 인구 허용치를 정해주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탈탄소 노력이 늦춰져 위기가 더욱 급속히 전개될수록 기후 리바이어던은 더 광범하고 강력하게 정당성을 인정받으며 대두할 것이다. 그러나 기후 리바이어던은 기후위기 적응의 이름 아래 북반구와 남반구의 격차와 모순, 각국 내부의 계급 불평등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기존 리바이어던(국민국가)과는 달리 민주적 대의-책임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 주권체, 기후 리바이어던은 역사상 가장 뻔뻔하게 이런 억압과 수탈을 자행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이것이 유일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다른 전망들이 있을 수 있다. 이 책이 제시하는 두 번째 시나리오는 얄궂게도 이름이 '기후 마오'. 마오쩌둥의 그 '마오'. , 기존 중심부 국가들에 대한 도전을 이끄는 중국을 중심으로 국가자본주의 국가들의 동맹이 지구적 기후위기 대응을 주도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에는 북반구-남반구 관계가 사뭇 달라지겠지만, 민주주의의 발전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기후 리바이어던 시나리오에서 그나마 명맥은 남아 있던 민주주의의 허울조차 기후 마오 시나리오에서는 억압될 것이다. 그냥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진핑 체제가 지구 전체로 확장된 모습일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아예 진지한 지구적 기후위기 대응 자체가 지체되는 상황이다. 홉스가 국가 출현 이전의 무질서를 베헤모스라 칭했던 것처럼, 두 저자는 이를 '기후 베헤모스'라 이름 붙인다. 이 경우에는 지구적 주권체 같은 문제적 기구는 출현하지 않지만, 대신 자국의 이해, 더 정확히는 자국 자본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며 협력과 조정을 거부하는 주요국 정부들 때문에 기후재난이 극대화될 것이다. 차기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당선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어쩌면 기후 베헤모스야말로 가장 유망한 시나리오일지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마냥 온갖 끔찍한 미래 가능성은 다 나온 셈이다. <기후 리바이어던>은 여기에 마지막 시나리오 하나를 보탠다. 그리고 이를 '기후 X'라 부른다. 이는 자본주의에 맞서며 국민국가의 테두리 안에 갇히지 않는 아래로부터의 기후위기 대응 노력들이 서로 연계하고 협력하여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 상황이다. 비록 기후 리바이어던이 그 머리를 드러내더라도 기후 X가 함께 전개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하나의 경로로 쉽게 닫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다른 세 시나리오에 비하면, 모호하기만 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희망'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괴물을 피할 수 없다면, '필멸의' '민주적' 괴물을!

<그린 리바이어던>도 어쩌면 비슷한 분위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결론에서 받는 느낌은 좀 다르다. 우선 이 책의 저자 코켈버그부터 소개하자면, 최근 인공지능의 현황과 전망을 비판적으로 짚은 그의 저작들이 집중적으로 소개됐다. <AI 윤리에 대한 모든 것>(신상규 외 옮김, 아카넷, 2023), <인공지능은 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가>(배현석 옮김, 생각이음, 2023) 등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AI 윤리에 대한 모든 것>은 인공지능을 둘러싼 숱한 쟁점을 요령 있게 정리한 책으로, 이 분야에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안성맞춤이다.

코켈버그의 다른 책들처럼 <그린 리바이어던> 역시 인공지능을 다룬다. 그런데 기후위기와 함께 다룬다. 이 점이 돋보인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모두 우리 시대의 거대한 현안인데, 둘을 따로 다룬 책은 산처럼 쌓여 있어도 함께 다른 책은 보기 힘들다. 한데 코켈버그는 여기에서 예외다. <그린 리바이어던> 말고 <AI 윤리에 대한 모든 것>에서도 코켈버그는 "문제는 기후야, 바보야!"라는 장으로 끝맺는다.

말하자면 코켈버그는 <기후 리바이어던>의 저자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기후위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공지능 때문에도 21세기판 리바이어던의 등장을 피하기는 힘들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고 보면 <그린 리바이어던> 쪽이 <기후 리바이어던>보다 더 암울하지 않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실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암울하다기보다는 숨 막힌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린 리바이어던>이 무엇보다도 '질문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섣불리 답을 내놓는 책이 아니라 쉴 새 없이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어쩌면 코켈버그의 의도 자체가 독자에게 기후위기와 인공지능의 시대에 제대로 묻고 따지는 법을 가르치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그는 21세기 리바이어던의 등장이 자칫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지는 않을지, 그럴 위험이 있다면 과연 이를 피할 대책이 있을지, 줄기차게 캐묻는다.

우울하게도 코켈버그가 내놓는 잠정적 답변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엘리트들에게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관리를 맡기는 플라톤식 대안도, 가장 조심스러운 방법으로 사람들이 사회와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게 만드는 '넛지'형 대안도 현재에 비해서는 자유를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정점에 이르렀던 자유에 관한 특정한 이해는 황혼을 맞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코켈버그는 이 대목에서 물음의 방향을 바꾼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자유의 관념으로 보면, 확실히 미래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 관념이 과연 자유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자유 관념은 정말로 숱한 부작용을 감내하면서까지 지속되어야 할 값어치가 있는가?

코켈버그는 현대의 자유 관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아니 어떤 상황에서는 더 소중한 다른 가치들이 있다고 답한다. 예를 들면, 평등, 정의, 공동선 등이 그런 가치들이다. 실은 자유조차도 지금은 무시되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많은 이들이 현대판 리바이어던의 등장으로 위축되리라 염려하는 자유가 '간섭받지 않을' 자유, '소극적' 자유라면, 자유의 여러 얼굴 중에는 삶을 함께 꾸려가기 위한 역량과 상상력, 가능성을 뜻하는 자유, '적극적' 자유도 있다.

코켈버그는 적극적 자유에 더 주목하자고 권한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시대에 더 많은 이들의 적극적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소극적 자유는 오히려 제한할 수도 있다고 설득한다. 예를 들면, 지난 코로나-19 팬데믹을 돌이켜보자. 그때 소극적 자유의 침해를 이유로 의무적 마스크 착용에 저항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마스크 착용 의무화 덕분에 바이러스 확산 범위와 속도가 통제됨으로써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시대에는 이런 복잡한 선택의 상황이 더 거대한 형태로, 일상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코켈버그는 기후위기에 맞서고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21세기 리바이어던의 등장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려 한다. 더 나쁜 혼돈을 막기 위해 이런 괴물이 필요함을 받아들여야만 할 수 있으며,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처음부터 괴물의 '필멸성'과 한계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마치 자본과 함께 등장한 근대 국가가 오랜 대중투쟁의 개입을 통해 민주주의의 무대라는 또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처럼, 21세기 리바이어던 역시 근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중의 참여와 자치가 관통하는 자기제한적 기구로 길들이자는 것이다.

"AI는 새로운 리바이어던이 될 수 있다 AI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자유와 자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 만약 리바이어던이 필요하다면, 계속해 필멸의 신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민주적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더 포괄적이고 참여적이며 자유를 자치와 역량 개발로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기관이다. 바라건대, 민주적이지만 충분히 강력한 그 괴물은 너무 많은 소극적 자유를 빼앗으려는 시도를 자제하고, 인간과 비인간을 위한 적극적 자유, 역량의 실현, 번영, 그리고 선한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린 리바이어던> 210-211)

굳이 <기후 리바이어던>과 비교한다면, 기후 리바이어던과 기후 X를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둘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필멸의' '그린'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편적 돌봄의 정치를 향해

여기에 몇 마디를 덧붙이자면, 코켈버그는 흔히 '자연'이라 불리는 비인간 주체들을 정치에 포함시키자는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 등의 논의를 검토하고 이를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공동체주의에 접목시키면서 적극적 자유를 중심에 둔 정치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무능과 타인에 대한 의존"(205)에 근거함에 바탕을 두고 관여(engagement)와 돌봄(care)에 몰두하는 정치다.

, <그린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뜻밖에도 선량한 괴물, '그린' 리바이어던과 마주하는 결말은 불가능하지 않다. 기후위기 시대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면서 비록 소극적 자유는 일정하게 제한하더라도 다른 사회적 가치들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는 미래는 충분히 '가능하다'. 너무 늦지 않게, 우리가 보편적 돌봄의 정치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대척점에 미지의 엑스(X)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1651년 펴낸 책 리바이어던의 표지. 홉스는 이 책을 통해 근대국가의 주요 이미지를 정초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이야기를 최근 자주 듣습니다. 기후위기 시대의 정치 이론을 논한 조엘 웨인라이트·제프 만의 기후 리바이어던’(앨피), 벨기에 출신 기술철학자 마크 코켈버그의 그린 리바이어던’(씨아이알)이 국내 출간됐습니다. 최근 방한한 영국 정치학자 존 던은 칸트가 아닌 홉스의 평화개념을 강조하더군요. 허물어지는 국제질서, 기후위기·인공지능의 위협 등 혼란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황에 빠져들지 않도록 우리를 제어할 정치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새삼 절실한 과제가 되고 있는 것이겠죠.

기후 리바이어던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정치적 경로를, 주권과 자본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삼아 네 가지로 가릅니다. 기후변화에 대해 행성적 차원의 주권을 조직해 대응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경로는 기후 리바이어던’, 전지구적 차원에서 기후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만 비자본주의적·권위주의적 경로는 기후 마오’, 자본주의에 매달리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없는 경로는 기후 베헤못등입니다. 리바이어던, 베헤못, 마오 같은 이름들만 봐도 어떤 체제인지 감이 온달까요.

다만 마지막 경로의 이름에는 별다른 표상이 없습니다. 경제구조 측면에서 자본주의’, 정치구조 측면에서 국가등 오래되고 익숙한 길을 거부하는, 아직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엑스’(X)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혼란이 커질수록, 오래되고 익숙한 길은 미래를 더듬어나가기 위한 출발점이 됩니다. 다만 그 대척점에 항상 엑스를 남겨놓는 일의 중요성도 함께 새겨봅니다.

누가 괴물을 만들까

고교 시절 늑대처럼 서로 물고 뜯는 자연상태를 넘어서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다고 배웠다. 홉스라는 학자는 국가를 리바이어던에 비유했다. 리바이어던이 뭔지 사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 같은데 가물가물했다. 나중에야 바다 괴물이란 걸 알았다. 질서와 평화를 준다는 국가를 왜 괴물에 비유했을까.

그걸 깨우친 곳은 교실이 아닌 현실이었다. 초등학교에 등교할 때마다 손을 가슴에 얹고 태극기를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반공 궐기대회에 동원된 우리는 무찌르자 공산당, 찢어 죽이자 김일성을 외쳤다. 독재가 뭔지 모르고 추앙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엄청 슬펐다. 충성을 바쳐야 할 국가가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광주항쟁을 거치면서다. 국가가 형제자매를 총칼로 쏘고 찔러 죽인 충격을 받고 충성을 바칠 수 없었다.

국가는 때때로 괴물이 된다. 인류를 전쟁으로 내모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국가가 그랬고 시민을 총칼로 짓밟은 군사독재가 그랬다. 국가가 뭐길래 이 모양인가를 파고드니 복잡했다. 괴물 국가가 아니라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나라를 갈망했다.

다시 괴물이 되나

입대해 다분히 이념적인 복무신조를 외우며 군대는 누구의 것인지 생각했다. 국군을 국가의 군대로 보면 국가를 장악한 전두환 명령에 따라 시민을 죽인 일이 또 벌어질 것이다. 국군이 국민의 군대라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진보 시민이든 보수 시민이든 가리지 않고 지켜야 한다. 북한은 여전히 주적일까를 얘기했다. 그렇다면 북한과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사람은 적이다. 김일성을 만나려 했던 노태우와 김영삼은 물론 그 이후 김정일을 만난 김대중과 노무현, 김정은을 만난 문재인과 트럼프도 쏴 죽일 적일까.

21세기에 들어서자 역사투쟁이 등장했다. 전향한 운동권이 뉴라이트의 선봉에 섰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가 정통성을 한참 과거로 끌고 가려 하더니 지금은 윤석열 정부가 그런다. 국민을 통합시킬 상상력은 부족하고 집권 기반은 초라하니 엉뚱하게 과거를 끌어대 편을 가른다. 옹색하다. 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든 자유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핍박받는 동포를 지키려 애썼다면 다 고마운 조상이 아닌가.

동의할 만한 가치를 만들지 못하며 서로 반대하는 부정경쟁은 엉뚱한 주제, 과도한 논쟁, 소모적 결과로 상태를 악화시킨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양비론이나 냉소를 쏟아내는 것도 도움이 안 된다. ‘부정경쟁을 넘어 가치와 비전을 창출하는 긍정연대를 생각하자. 국가든 정치든 목표가 무엇인가. 국가권력 강화인가, 정치 자체의 영향력 확장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국가든 정치든 시민 안녕과 행복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출산율이 1.052였던 2017년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한국을 집단자살 사회라고 경고했다. 출산율 0.78이라는 통계를 본 외국 학자는 한국은 망했다고 했다. 20232분기 출생율이 0.7로 최저다. 어떤 이들은 국가의 자살이라고 한다. 무한 성장과 인구 확장을 원한다면 저출산은 망조. 애를 낳아 개고생하고 싶지도 않고 후세를 이런 헬조선에 살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기후위기 상황에서 인구 감소는 적정국가로 전환할 계기다. 창의적 상상력을 위한 교감이 절실하다.

한통속 부정경쟁

시민의 생명, 안전부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비롯한 권리 목록이 있다. 사회적 권리를 확장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표자를 뽑아 권한을 위임하고 국가에 위탁해서 간접적으로 보장하는 방법이다. 시민 스스로 힘(자력)이 아니라 대표자나 국가라는 타인의 힘(타력)에 의한 보장이다. 둘째는 권리를 시민 자신이 직접 확보하는 것이다. 시민이 스스로 뭉치고 주장해서 확보하는 자력에 의한 방식이다.

진보든 보수든 정치인들은 권리는 국가에 의해서 보장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표를 받아 당선되려 제가 여러분 권리를 보장하겠습니다라고 호소한다. 수많은 공약이 다 그런 메시지다. 이렇게 남이 대신하면 시민은 충분한 기여감과 자기 효능감을 느끼기 어렵다. 정치인은 리바이어던을 차지하려는 경쟁 속에서 권력 그 자체를 향한 욕망에 빠지기 십상이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작동하는 권력의 운명이다.

보수와 진보가 다른 것이 있긴 하다. 운동권이었다가 국민의힘 같은 보수 계열로 전향한 사람들은 자기 정당성을 위해 과거를 부정한다. 운동권 아닌 척한다. 너무 세게 부인하다 보니 과거에 경멸했던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앙한다. 더불어민주당 계열로 들어간 사람들은 자기 정당성을 위해 과거를 자랑한다. 여전히 차별받는 시민과 친한 척한다. 과거 경력을 내세워 민주투사였다는 정통성을 자랑하다 지나치면 항일투쟁으로 거슬러 올라 족보를 만든다. 국민의힘 계열이든 민주당 계열이든 채우지 못한 지금 여기에서 내적 결핍이 역사투쟁을 부추긴다.

돼지 똥물이나 소 똥물도 강이나 바다에 못 버리게 하는데 방사능 오염수는 당연히 안 버려야 한다. 애초에 핵발전도 줄이고. 그런데 여기에 과학으로 치장한 주장을 들이대고 친일·반일 역사까지 얹어 아우성이다. 패거리의 부정경쟁으로 엉뚱하고 과도하며 소모적인 싸움으로 삶의 비전이 안 보이는데 애 낳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생길까.

긍정연대를 위한 교감

국가의 공백이 있다. 이민과 난민에게 그렇다. 이주민은 국가가 그어놓은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국가에서만 권리가 보장되면 국적을 바꾼 사람들 권리를 내팽개칠 수 있다. 유럽에서 늘어난 이주민 혐오 정치가 그렇다. 국경 사이를 떠도는 난민도 그렇다. 기후위기는 국가가 채울 수 없는 치명적 공백이다. 하나의 국가가 아무리 탄소를 줄여도 지구적 차원의 기후위기를 해결 못 한다. 국제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세계는 움츠러든다. 신냉전으로 국가들이 패거리로 나뉘고 전쟁까지 일으키며 지구적 협력이 나고 있다.

시민이 권한을 위임하고 말면 국가는 군림하는 괴물이 된다. 자력에 의한 시민 권리 확장이 중요하다. 정치의 수준은 시민의 수준이다. 정치가 개판이라고 냉소에 그치는 것은 책임을 다 못하는 것이다. 노조의 수준은 조합원 수준이다. 노조가 썩었다며 뒤돌아서는 것은 책임을 다 못하는 것이다. 저마다의 세계관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유튜브와 OTT를 흐르며 빌보드 차트와 아카데미상에 올라 세계를 누비는 K컬처에 비춰봐도 정치문화는 너무 초라하다. 괴물이 돼가는 국가와 상대를 물어뜯어 적대와 혐오의 좀비를 만드는 부정경쟁에 희망이 없다. 유일한 출구는 시민사회를 새로 구축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도 다시 열릴 것이다.

이권, 인권, 권한, 권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나마 기성세대보다 젊은 세대가 노조를 이익집단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반갑다.(한국노동연구원의 <청년세대의 노동운동과 일터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실리주의 노조를 선호하는 경향은 청년세대보다 기성세대가 강한 것으로 조사됐다.) 컨베이어 벨트나 담 없는 플랫폼에 접속해 일하는 사회공장은 전통적 노사갈등과 달리 클라이언트(고객)와 갈등이 문제고 직장내 괴롭힘은 사이버 불링처럼 다르게 나타난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시민의 가능성을 읽는다. 이익에 중독되지 않고 모두의 권리를 생각하는 노동시민을 만나면 설렌다. 동료 시민과 더 많이 교감하며 시민사회를 새로 구축하자. 곁의 일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개념이 다른 노조를 상상하자. 희망은 서로를 위한 교감과 상상력에 있다.

조건준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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