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속성을 악역으로 인격화하다 3.31 시사인
돈이 많아서 처벌을 피해온 재벌은 애초에 돈을 축적하는 방법 자체가
세간의 도덕률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다. 사이코패스 3세는 재벌 내
예외적 인물이 아니라 재벌의 속성을 인격화한 악역이었다.
“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직장 제공과 세금 납입으로 우리 경제를 도약시킨 세계 최고의 기업 총수를 사소한 재단 지원을 이유로 들어 구속하는 특검의 수준이 이렇게 형편이 없는 것인가?”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된 직후부터 스마트폰 메신저를 타고 장년층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작자 미상 메시지의 일부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이고 우리의 주린 배를 불려줬으니 범죄 혐의가 있더라도 불구속 수사의 특혜를 줘야 하는데, 제 손으로 뭘 생산해보기는커녕 책상물림으로 법전이나 살펴보던 특검이 감히 구속 수사를 했다. 국민의 손으로 검사의 기소 독점을 깨야 한다.’
문득 1999년 보광그룹 탈세 사건 관련 조사를 받으러 대검찰청으로 출석하던 홍석현 회장을 위해 도열해 “사장, 힘내세요!”를 외치던 <중앙일보> 기자들이 떠올랐다. 2005년 삼성 X파일 수사 때에도, 2008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매각 사건 수사 때에도 여지없이 자사의 회장을 위해 몸을 던지던 그들. 그나마 <중앙일보> 기자들은 제 고용주를 지킨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일평생 삼성에 고용되어본 적도 없는 저들은 왜 메시지를 옮기며 “부회장님, 힘내세요!”라 외치고 있을까?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 신진물산 기획조정실장은 범죄를 덮기 위해 갖은 편법을 동원한다.
2010년대 대중문화 속 사이코패스 재벌 3세들이 안심하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배경에는 이런 자발적인 복종의 정서가 깔려 있다(<시사IN> 제494호 ‘사이코패스 재벌이 왠지 친숙한 이유’ 기사 참조). 알아서 복종하고 염려하고 용서하는 이들의 존재가 재벌에게 어떠한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그것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것이라는 확신, 내야 할 세금을 안 낸 것은 ‘고용창출’의 공으로 용서받고, 하청업체를 부당하게 쥐어짠 것은 ‘국가경제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용서받고, 이도 저도 아니면 ‘치열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려면 선장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용서받을 거라는 뒤틀린 확신이었다.
대중문화 속 재벌 3세들의 악행은 단순히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개인적 층위의 강력범죄에 그치지 않는다. 극중 재벌 기업들이 기업을 운영하고 수익을 창출하고 부를 축적하는 과정은 하나같이 아래를 향한 착취와 편법에 기반을 둔 것으로 묘사된다. 3세들의 폭력과 살인 같은 사이코패스 강력범죄 옆에 이러한 기업 범죄들이 나란히 배치된 것은 흥미로운 관점을 암시한다. 이 둘은 사실 별개가 아니라 같은 맥락 위에 있다는 관점 말이다.
영화 <베테랑>(2015)을 보자. 화물노조에 단체 가입했다는 이유로 임금이 밀린 채 국동화물에서 해고당한 화물트럭 기사 배철웅(정웅인)은 원청기업 신진물산 앞에서 일인 시위를 벌인다. 고용주인 국동화물 전 소장(정만식)에게 항의해봤으나, 그가 해고는 ‘본사’가 결정한 것인데 왜 자기에게 따지느냐고 말했기 때문이다. 조태오(유아인) 신진물산 기획조정실장의 호출을 받고 달려온 전 소장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말한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조태오의 대꾸는 차갑다. “큰일 날 소리 하시네. 내가 왜 대표예요, 이 양반아.”
신진물산의 사업 방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청업체를 실질적인 지배하에 두고 군림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가입을 억압하고 해고하는 궂은일은 전부 하청업체에 맡김으로써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청업체는 원청기업이 지시한 사안이라는 핑계로 책임에서 달아나고, 원청기업은 자사 직원이 아니라 하청업체의 직원이라는 핑계로 책임에서 벗어난다. 조태오의 사이코패스 같은 범죄가 있기 전에, 신진물산의 사이코패스 같은 경영이 먼저 존재했다.
ⓒSBS 화면 갈무리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 속 남규만(남궁민) 일호그룹 상무는 모든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긴다.
사이코패스 범죄 전에 사이코패스 경영이 있다
조태오의 범죄가 터진 이후 그것을 덮기 위해 신진그룹이 동원하는 수단 또한 편법으로 가득 차 있다. 사건을 보도하려는 언론에겐 광고로 협박해 입을 틀어막고, 경찰 수사는 회사의 고문으로 스카우트해온 전직 경찰 고위 간부가 ‘친정’에 압력을 행사해 저지하며, 경찰 가족을 찾아가 뇌물을 건네며 사태를 무마하려 든다. 그래도 수사를 멈추지 않는 서도철(황정민)을 잠재우기 위해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 조직폭력배들을 고용한다. 이 모든 시도에도 끝내 수사를 저지하지 못하자 그룹 내에서 천대받던 방계 라인인 최 상무(유해진)에게 죄를 뒤집어써줄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에 관여한 그 누구도 양심의 가책이나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데, 입을 열어 범죄를 증언한 인물은 스파링 중 조태오의 분풀이 상대가 되어 발목이 부러진 채 해고당한 비정규직 수행원(엄태구)뿐이다. 언론사나 전직 경찰 간부처럼 돈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신진그룹의 폭력을 대리 수행할 때, 버려짐으로써 돈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진 이만이 입을 열 수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베테랑>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SBS 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2015~2016) 속 일호그룹도 그 성장 과정이 남규만(남궁민) 상무의 성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극중 일호그룹은 대기업으로 크기 위해 경쟁사의 공장을 폭발 사고로 위장해 아예 날려버린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후에도 일호그룹은 자사의 과실로 생긴 사고를 하청업체 탓으로 돌린다. 하청업체 영원전기는 일호그룹의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단가를 후려쳐 전선을 생산하다가 불량제품을 대량 만들게 되고, 이로 인해 일호전자의 전자레인지가 폭발 사고를 일으킨다. 그러나 일호그룹은 전자레인지에 사용된 전구가 불량인 탓에 생긴 사고라며 하청업체인 미소전구에 책임을 전가한다.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 사실은 더 참담하다. 3년 전 일호전자의 냉장고가 전선 불량으로 고장을 일으켰을 때에도 일호전자는 배상 책임을 냉각기를 만드는 하청업체에 뒤집어씌웠고, 하청업체는 문을 닫았다. 남규만이 환락 파티를 벌이다가 사람을 죽이고 그 죄를 애꿎은 이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처럼, 일호그룹은 비자금 조성을 위해 제품 생산에 들어가야 할 돈을 다른 호주머니에 넣다가 사고를 일으키고는 그 책임을 애꿎은 하청기업에 전가한다. 괜찮은 기업에 어쩌다가 미치광이 3세가 등장한 게 아니라, 애초에 양심 없는 경영으로 성장한 회사이기에 양심 없는 3세가 등장했다.
우리는 돈이 많아서 처벌을 피해갈 수 있고, 그렇기에 세간의 도덕률을 따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재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베테랑>과 <리멤버-아들의 전쟁>에 묘사된 신진그룹과 일호그룹은 애초에 그 많은 돈을 축적하는 방법 자체가 세간의 도덕률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다. 하청업체와 상식적이고 건강한 거래의 파트너로서 관계 맺는 게 아니라, 돈의 힘으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때로 해고 같은 부당한 일을 대리시키며 문제가 터지면 책임을 전가하는 식의 착취 대상으로 바라보는 원청. 그러니 조태오와 남규만은 단순히 재벌 내 예외적인 3세가 아니라 재벌의 속성을 인격화한 악역인 셈이다. 우리가 조태오와 남규만을 사이코패스라 부를 때, 우리는 사실 재벌을 사이코패스라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엔 착한 재벌 현실엔 사악한 재벌 16.12.30
한때 기업은 꿈과 낭만, 자아실현이 가능한 청춘의 일터로 묘사되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리해고나 대기발령, M&A는 악역이나 하는 명백히 나쁜 일이었다
재벌 2세, 3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자리,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라는 사람들의 입에선 뻔히 예상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튀어나온다. “전 모르는 채로 진행된 일입니다.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에, 그게, 모르겠습니다”. 12월6일, 박근혜 게이트 관련 국정조사 자리에 불려 나온 대기업 총수들은 뇌물 증여 혐의를 비롯한 각종 의혹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계속 무능을 연기했다. 회삿돈 수십억원이 막후 권력자의 주머니로 왔다 갔다 하는데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기업 회장, 무엇을 물어봐도 연신 ‘송구하지만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처참한 한국어 회화 실력을 뽐내기 시작한 기업 부회장.
ⓒMBC 화면 갈무리 1990년대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장삼이사들은 혀를 끌끌 찼다. 살아남기 위해 멍청한 척을 하는 뻔뻔함도 한심하지만, 만에 하나 저게 연기가 아니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모두를 감쌌다. 오로지 상속자란 이유만으로 거대한 경제주체의 사령탑이 되어도 좋은 걸까? 분노와 경악 속에 국정조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더 이상 기업은 꿈을 이룰 수 있는 무대가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한때 기업이 꿈과 낭만과 자아실현이 가능한 청춘의 일터로 묘사되던 시절도 있었다. 20여 년 전 온 나라를 차인표 신드롬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를 살펴보자. 주인공 강풍호(차인표)는 서울백화점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유학 중 급히 귀국해 경영에 참여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업자이자 공동 경영인이었던 정한수(김진태)와 그의 아들 정도일(천호진)의 견제에 하마터면 경영에서 밀려날 처지에 놓인다. 심지어 연인 고은채(이승연)를 정도일에게 빼앗기며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풍호는 여러 사람의 조력과 지지를 받으며 위기를 극복한다. 백화점 상무(박영지)부터 구두 매장에서 근무하는 말단 직원(권해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급의 조력자들을 두루 살피며 성장한 풍호는, 경쟁자 도일이 회사 지분을 경쟁사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증거를 입수해 제출함으로써 회사를 위기로부터 구해내고 도일을 쫓아내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다.
아버지를 잃고 사악한 이들에게 왕위를 위협받던 왕자가, 중신으로부터 시종에 이르는 여러 조력자들을 두루 곁에 두고는 그 힘으로 일어서 끝내 왕국을 지켜낸다는 동화 속 왕위 계승 서사가 고스란히 기업 위에 투사된 것이다. 그렇기에 정당한 승계권을 위협하는 이는 반드시 사악해야 하고 무엇인가 능력이 결핍된 인물이어야 한다. 탐욕으로 가득 찬 악역 도일이 불임으로 설정된 것은 그가 결실을 볼 능력도 결여된 채 제 것이 아닌 걸 탐내는 인간임을 상징하는 장치다.
ⓒSBS<미스터Q>에 등장한 주인공은 회사를 지켜내면서 승계권을 위협하는 악역을 쫓아냈다.
물론 여기에 진정한 사랑의 승리가 빠지면 안 된다. 의류 매장 직원인 이진주(신애라)와 풍호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재벌 2세와 평범한 서민의 연애는 은채와의 사랑 없는 정략결혼으로 제 입지를 굳히려던 도일의 선택과 극적 콘트라스트(대비)를 이룬다. 풍호는 심지어 색소폰을 불고 오토바이 타고 손가락을 까딱이느라 바쁜 와중에도 진주를 괴롭히던 친오빠 이치한(김기호)을 징벌하는 정의로움까지 뽐낸다. 이로써 풍호는 정의롭고 진실하며 제 사람을 진심으로 챙기며 정당한 상속권을 이어받아 기업의 미래를 설계하는 완벽한 왕자님으로 완성된다.
정리해고와 무한경쟁이 판치는 ‘또 하나의 가족’
IMF 시기에 방영을 시작한 허영만 원작의 드라마 SBS <미스터Q>(1998)의 무대가 되는 라라패션은 각종 루저들이 좌절을 딛고 일어나 재도전할 기회를 움켜쥐는 재기의 무대다. 오해, 사생활 문제, 사내 정치 실패, 면접 실패 등을 이유로 대기발령 됐다가 개발과에 유배된 일군의 루저들은, 낙담하는 대신 어떻게든 동료들과 힘을 합쳐 재기하려고 노력한다. 그런가 하면 극중 최고의 악역인 황천방 전무(명계남)가 제 야욕을 채우기 위해 추진하는 일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직원들을 해고할 기회를 노리는 것과, 다른 회사와 인수합병을 해 제 지위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합리적인 기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여겨지는 정리해고나 대기발령, M&A 같은 일들은 1998년만 하더라도 악역이나 하는 일, 명백히 나쁜 일이었던 것이다. 회사에는 직원에게 대기발령 처분을 내리는 걸 안쓰러워할 줄 아는 어른 나승태 상무(박영지)가 있고, 그와 개발실 직원들의 활약을 통해 황천방을 쫓아내고 일터를 지킬 수 있었다.
ⓒ시사IN 이명익 12월6일 열린 박근혜 게이트 국회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대기업 총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IMF 체제 초기였으니 가능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 이전만 해도 한국인에게 직장이란 한번 들어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곳이었고, 연봉제가 아니라 호봉제가 적용되는 공간이었다. 회사는 이러한 고용 안정을 제공하는 대가로 권위를 획득해, 직원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제 혈족에게 기업을 세습하며 오너 중심의 독단적인 의사 결정을 정당화했다. 안전한 울타리를 지키는 가부장과 가부장에게 순종하는 가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부장제 가족 모델을 닮은 이 경제체제는 한때 두웨이밍 하버드 대학 교수가 주창한 ‘유교 자본주의’라는 용어로 개념화되기도 했다. 대기업들은 제 임직원들을 ‘가족’이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흔적은 대우의 오랜 슬로건이었던 ‘대우가족’의 기억이나, 아직도 임직원 전용 쇼핑몰을 ‘삼성가족구매센터’라 이름 붙인 삼성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모두 하나로 뭉쳐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다시 안정적인 직장과 경제성장이 보장된 유교 자본주의 성공신화의 궤도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한국인들은, 실제 삶 속에서 정리해고와 기업의 줄도산이 이어지는 걸 목격하면서도 <미스터Q>가 주는 위안에 기꺼이 채널을 맞췄다.
그때도 사람들은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 대충은 짐작했을 것이다. 회사는 ‘실력이 우선’이라는 말로 호봉제를 철폐하고 연봉제를 도입해 회사 안에서 무한경쟁을 유도하고, 경쟁력 강화라는 이유로 큰 회사가 작은 회사를 집어삼키는 걸 정당화했다. 평생직장은 고사하고 평생 비정규직, 무기 계약직, 파견노동 등 불안정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여전히 충성을 요구하고 오너 중심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및 경영권 세습도 이해하라고 윽박지르는 기업 사이의 불화도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미래까지 염려하기엔 당장 처한 IMF 체제가 너무 힘들었고, ‘다시 또 시작해. 이제 한 번 쓰러졌을 뿐. 늘 그래왔잖아. 세상 끝에 발이 걸려도 다시 또 일어나 이렇게 뛰어가면’ 된다고 노래하는 김민종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사이코패스 재벌이 왠지 친숙한 이유 17.3.9
드라마 속 사이코패스 악역의 태반이 재벌 2∼3세다. 모자랄 게 없는 그들이 사람을 죽이고 폭행과 강간, 마약을 일삼는 설정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는다. 돈이 있기에 쉽게 용서받는 현실을 보면 낯설지 않은 까닭이다.
옛날이야기로 시작해보자. 2000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가 개봉했을 때만 해도 영화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젊고 잘생겼으며 학벌 좋고 돈도 잘 버는, 성공한 상류층 백인 남성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천 베일)이 툭하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설정 자체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친구의 명함이 자신 것보다 더 근사하다는 이유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도끼를 휘두른다. 자기가 실패한 레스토랑 예약을 친구가 성공했다는 이유로 죽인다. 나아가서 ‘그냥’ 사람을 죽인다. 모든 걸 다 가진 청년이 뭐가 부족하다고 저러는 걸까?
1980년대 레이건 시대의 사회분석과 여피 문화의 공허함에 대한 통찰, 심리학적 분석을 더한 영화평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때는 전 국민이 IMF 관리 체제를 통과하느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허덕이던 2000년이었다. ‘오렌지족’에 대한 사회적 질타가 있던 1990년대 초·중반이었다면 몰라도, 당장 경제적 어려움만 해결되면 더 바랄 게 없을 지경이 몇 년째 계속되던 당시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내가 저 돈이 있으면 세상 걱정 하나 없을 텐데 공허라니 그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라며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은, 영화 제목을 다시 한번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쪽을 택했다. 아, 사이코라 그런가 보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천 베일·왼쪽)은 성공한 상류층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17년이 지나, 우리는 사이코패스 악역 중 태반이 재벌 2·3세인 시대를 살고 있다. 어려서는 새의 날개를 꺾으며 놀더니 자라서는 사람을 죽이며 노는 KBS <남자 이야기>(2009)의 채동건설 대표 채도우(김강우)부터 시작해, 복수심에 눈이 멀어 살인·협박·정보통신망법 위반을 저지르고 다닌 SBS <유령>(2012)의 세강증권 대표 조현민(엄기준), 1인 시위를 벌이던 운수노동자에게 체불 임금을 받아가려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싸워보라고 시키는 영화 <베테랑>(2015)의 신진그룹 기획조정실장 조태오(유아인), 20부작 내내 마약과 살인과 폭행과 강간을 일삼던 SBS <리멤버-아들의 전쟁>(2015~2016) 속 일호생명 상무 남규만(남궁민), 툭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손찌검을 하더니 끝내 15년 전 저지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져 구속되는 tvN <기억>(2016)의 한국그룹 부사장 신영진(이기우)까지.
가장 최근 이 리스트에 합류한 재벌 3세는 엄기준이 연기하는 SBS <피고인>(2017) 속 차명그룹 부사장 차민호다. 살인 혐의를 벗기 위해 우발적으로 쌍둥이 형을 살해하고 형의 신분을 빌려 살아가는데 그 사실을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쾌속의 살인 행보를 선보였다.
불행히도 2017년의 우리 중 그 누구도 “돈도 있겠다, 권력도 있겠다 뭐가 아쉽다고 사람을 죽이고 다니냐?”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재벌 3세 사이코패스 악역이 조금 질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있을지언정, 재벌이 사람을 죽이는 설정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다.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피고인> 사이의 17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이 된 걸까?
처벌 피할 수 있으니 안 때릴 이유가 없다
자기 아들이 클럽에 갔다가 종업원들에게 맞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손수 전기충격기와 쇠파이프를 든 장정들을 데리고 북창동으로 쳐들어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이 2007년에 일어났다. ‘회장님’이 몸소 나서 청계산과 북창동을 왕복하며 밤새도록 꼼꼼히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김 회장이 법정에서 제 범죄 사실을 무용담 들려주듯 당당하게 증언하자 더 큰 충격이었다.
SBS <피고인> 속 차명그룹 부사장 차민호(엄기준)는 살인 혐의를 벗기 위해 연쇄 살인을 저지른다.
“권투하듯이, 아구를 몇 번 돌렸지”라거나 “내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서 애들 시켜서 대신 때리게 했거든” 따위 증언은 자신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수감 기간 중 건강을 사유로 병원에 입원해서 보낸 시간을 빼면 실제 감옥 체험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김 회장이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그에겐 대형 로펌의 거물급 변호사들을 고용할 돈이 있고, ‘대기업 회장에게 실형이 가해지면 국가경제에 큰 타격이 올 것’이라는 논조로 지원사격을 해줄 보수 언론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1996년 8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그마저도 1년1개월여 만에 사면되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또한 배임 및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은 2000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승연 회장도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은 1994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지 않았던가? 설령 실형을 선고받더라도, 신병을 이유로 형 집행정지되고 병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으리라. 비슷한 시기, 사위에 대한 집착과 오해로 애먼 사람을 살인교사하고도 멀쩡하게 VIP 병실에 입주한 채 때때로 외출까지 일삼은 영남제분 전 회장의 아내 윤길자 사례도 있었으니까. 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돈이 있어 모자란 것이 없으니 사람을 해칠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돈이 있어 처벌을 피해갈 수 있으니 사람을 해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재벌이 사이코패스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쩌다 예외적인 한 명이 사고를 친다고 하기에는 사례가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2010년 <베테랑>의 모티브가 된 SK그룹 계열사 M&M 최철원 대표의 맷값 폭행 사건이 벌어졌고, 2014년에는 그놈의 마카다미아 때문에 기내에서 사람을 때리고 고성을 지르더니 결국 비행기를 회항시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등장했다. 심지어 운전할 때 기사가 감히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게 싫다며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접은 채 운전할 것을 강요하고, 폭언과 욕설을 일삼으며 “사람을 종이컵보다 더 쉽게 버리”느라 1년에 운전기사 40여 명을 갈아치웠다는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은 사임도 하지 않았다. 경영철학이 ‘사람을 존중하고 성장하게 하는 경영’인 회사의 후계자가 벌인 일이다.
대중문화 속 재벌이 백마 탄 왕자와 청춘의 꿈을 실현해줄 무대에서 차츰 사람을 체계적으로 말살하는 공간으로, 나아가 평범한 우리와는 도덕 체계가 다른 사이코패스적 인격체로 그려지게 된 내막이다. 돈이 있기에 사회적 합의로 도출해낸 윤리규범을 따라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 돈이 있다는 이유로 ‘사회지도층’이라는 호칭을 부여받고 더 쉽게 용서되는 존재들. 우리는 수많은 베이트먼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추적자 더 체이서> <황금의 제국> <펀치>는 박경수 작가의 ‘권력 3부작’으로 꼽히는 드라마다. 개천의 용이 거악과 다투는 모습을 그리는데 마지막에 제작된 <펀치>에서는 개천의 주민들 역할이 사라진다.
정직한 자본가? ‘못 찾을걸요” 17.2.24
KBS <야망의 세월>은 건설회사 사장이었던 이명박을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이명박 정부 때 SBS 드라마 <자이언트>가 기획되었을 당시 ‘자본가 우상화’ 드라마가 또 제작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2010년 초, 배우 김명민의 팬덤은 일대 소란을 겪었다. 차기작을 고르던 김명민이 검토하고 있다는 신작의 시놉시스가 어딘가 탐탁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개발의 광풍이 전국을 휩쓸던 1970~1990년대 건설 현장을 배경으로 맨주먹으로 일어선 한 남자의 성공담”이라는 시놉시스 한 줄 요약은 어딘가 불온해 보였다. 건설회사 사장이었던 이명박을 일약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만들고 정계까지 입문하게 만든 KBS <야망의 세월> (1990)과 지나치게 닮아 보인 게 문제였다. 하필이면 YTN, 연합뉴스, KBS, MBC가 각각 친MB 성향의 낙하산 사장이나 이사장을 맞이하며 언론과 방송사의 언론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되던 시절이었다. 드라마의 방영 예정 시기 또한 때마침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가뜩이나 KBS <수상한 삼형제>(2009)가 시위대를 비난하고 진압 경찰을 옹호하는 내용을 반복해서 방영해 방송가의 노골적인 정부 편들기 움직임마저 의심되던 마당에, 정직하게 일해서 성공한 건설회사 사장의 일대기가 만들어진다고 하니 사람들이 움찔한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SBS 화면 갈무리 SBS <자이언트>는 한국의 폭력적인 개발사를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드라마였다.
김명민의 팬들은 정권을 찬양하고 개발독재를 긍정하는 드라마에 김명민이 출연해선 안 된다는 의견을 모았다. 한 인터넷 포털에서는 김명민의 출연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이 진행되었다. 디시인사이드 김명민 갤러리에서는 이런 작품에 김명민을 캐스팅하려 든 몰지각한 제작진을 성토하는 누리꾼들의 글이 줄을 이었다. “돈과 권력의 부정한 거래가 빈번히 오가고 그 결과 부실 공사가 횡행하는 업계의 부조리 속에서, 불의에 맞서 싸우며 양심과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내면서도 성공하는 주인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우리 모두가 안타깝게 기다리는 이상적인 기업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담당 PD의 간곡한 해명에도 여론은 바뀌지 않았고, 김명민은 다른 작품 촬영 일정과 겹친다며 주연 자리를 고사했다. 담당 PD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문제의 드라마는 개발독재 시기의 논리를 온몸으로 체화한 채 늘 권력의 편에 서서 이권을 쥐려고 했던 사악한 군 출신 자본가 조필연(정보석)과, 그에게 정의로운 방법으로 복수하기 위해 한평생 이 악물고 달려온 이강모(이범수)가 주인공인 드라마, SBS <자이언트>(2010)였으니 말이다.
대중의 의심은 주로 ‘대통령 고무 찬양’ 의혹에 집중되었지만, 강모의 모델이 이명박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후에도 여전히 <자이언트>를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힘과 이권의 논리 위에 국토의 폭력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그 시절에도 반칙을 하지 않고 정직한 방식으로 성공한 건설기업인이 있었을 거라는 가정 자체가 한국의 기업사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법했다. IMF 관리 체제와 그 이후 점점 심해진 소득 양극화에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사람들은 ‘국민 성공시대’를 약속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오래지 않아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산업재해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 노동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 <카트>, 철거민의 억울함을 그린 영화 <소수의견>(맨 위부터).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산 소고기 수입의 검역 기준을 대폭 완화하며 “질 좋은 고기를 들여와 일반 시민들이 값싸고 좋은 고기를 먹는 것”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서, 고통 분담은 함께했는데 과실은 회생에 성공한 기업이 독식하고 노동자 대중에겐 불안정한 일자리만 돌아갔던 ‘IMF 극복’의 서사를 떠올렸다. 위험 분담은 ‘값싼’ 고기를 먹어야 하는 ‘일반 시민들’이 하고, 그로 인한 수출시장 개방의 과실은 기업들에게 돌아가는 기업 중심의 언어.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 모두에게 자신이 경험한 샐러리맨의 신화를 가능케 해줄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정작 당선 직후 국민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대하는 그것에 가까웠다. 반(反)기업 정서는 갈수록 높아만 갔다.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 모델로 한 조필연
한국의 폭력적인 개발사를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을 근사하게 해낸 <자이언트>였지만, 그조차 실존 인물만으로는 해낼 수 없었다. 유인식 PD가 “아직까지도 우리 모두가 안타깝게 기다리는 이상적인 기업가의 모습”이라고 말한 바 있듯,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을 모델로 삼은 조필연과 달리 이강모는 그 모델이 없었다. “자료 조사를 하면서 경실련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관행이니 이권이니 다 마다하고 양심적으로 성공한 기업가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분이 한참 생각하더니 ‘못 찾을걸요’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강모는 모델이 없다. 그냥 (중략) 어딘가에 있다고 믿고 싶다(유인식 감독 ‘강모가 이룬 것이 정말 승리일까’, <텐아시아> 2010년 12월9일 기사).”
<자이언트>가 그려 보인 서사에 함께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던 이들은, 동시에 한국 사회 어딘가에 강모 같은 선량한 자본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대신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자본가들, 우리 사회 크고 작은 조필연들을 향해.
조필연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 중 백혈병을 얻어 사망한 황유미씨와 그 유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은 <또 하나의 약속>(2014)에도 있었고, 일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와 존엄을 되찾기 위해 까르푸와 이랜드리테일과 맞서 싸운 노조의 이야기를 다룬 <카트>(2014)와 JTBC 드라마 <송곳>(2015)에도, 재개발 이익을 노리는 토건 마피아들의 수익 사업에 국가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동참했다가 사망 사고를 불러일으킨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소수의견>(2015)에도 있었다. 조필연이 그랬듯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은 정치권력과의 결탁이나 공권력의 동원, 언론 플레이로 묻어버리는 이들. 이들은 심지어 영화가 개봉할 때 자사 직원의 입을 빌려 영화에 대한 악평을 남기기도 했다.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한 뒤 삼성전자는 자사 블로그에 홍보팀 부장의 명의로 글을 올렸다. “예술의 포장을 덧씌워 일방적으로 상대를 매도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일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외압설까지 유포하며 관객을 동원하고 80년대에나 있었던 단체관람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서 이 영화가 단순한 영화가 아닌 투쟁 수단으로 변질된 것 아닌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물론 댓글 난에는 기업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이들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정직한 자본가가 한 명이라도 있지 않을까 간절히 찾았던 <자이언트>의 절박한 희망이 배신당하는 순간, 우리는 삼성이라는, 까르푸라는, 이랜드리테일이라는, 삼성물산, 대림건설, 포스코건설이라는 이름의 조필연들이 우리 삶을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기업이 정리해고를 부끄러워하고 청춘들의 자아실현을 독려하는 공간으로 묘사된 지 20년 만에, 한국의 시민들은 자본과 기업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현실에도 드라마에도 신화는 없다 17.1.2
드라마 <국희>는 기업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기대를 동시에 만족시켰다. 반면 <영웅시대>는 재벌 창업주를 ‘황무지에서 신화를 만들어낸’ 인물로 표현하면서 논쟁을 일으켰다. 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 주인공이 주는 달콤한 환상으로도 시대 전체가 느끼는 불안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개인의 삶은 여전히 고용불안과 무한경쟁의 정글로 내쳐진 상태였다. 국가가 IMF 관리 체제를 극복했다고 말하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시절, 사람들은 서서히 나의 행복과 국가·기업의 행복이 서로 무관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내 삶은 변함없이 고통스럽고 불안한데 고통을 분담하자던 재벌들은 나날이 승승장구했다. 2000년대 중반쯤 들어서면, 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 또한 천천히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처럼 혈연 대신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라간 이들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재벌이 유사 가장이자 울타리를 제공하는 왕국일 수 있었던 시절의 향수는 점점 그 효험을 잃었다.
IMF 관리 체제 한가운데에서 방영을 시작한 MBC <국희>(1999)는 크라운제과의 성공 사례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었다. 빵 표면에 식용 글리세린을 발라 빵의 변질을 막고, 크래커 사이에 땅콩크림을 넣어 만든 샌드과자로 선풍적 인기를 끌며 일어난 기업이라는 설정은 실제 크라운제과의 전신인 영일당의 역사를 가져왔다.
ⓒMBC <국희> 화면 갈무리 MBC 드라마 <국희>(위)의 주인공 국희는 정의로운 기업인이 되어 기업을 탄탄하게 이끈다.
그러나 국희(김혜수)의 인생 역정은 정성희 작가의 창작이었다. 친일파 양부에게 독립군 친아버지를 잃고 재산도 모두 빼앗긴 천애의 고아. 정직하게 먹고살아보겠다고 제빵 기술을 배워 일어났으나 자신의 특허를 도둑질해간 양부 탓에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재기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친일파 양부가 죗값을 치르도록 만드는 국희의 일대기는 실제 크라운제과의 역사나 해방 후 한국 기업들의 성장 역사와는 큰 연관성이 없었다.
<국희>가 창작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제공한 서사는 단순히 기업의 성공담이 아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축적한 양심 없는 상대 기업(과 친일파 잔존 세력) 때문에 고통받던 선량한 주인공(과 시청자인 나)의 성공담’이다.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악이 패배하고 마침내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이들의 무의식이 <국희>에 호응한 셈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주체인 친일파 양부 송주태(박영규)가 국희보다 먼저 더 큰 성공을 거둔 기업인으로 그려지는 건 의미심장하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제과시설을 인수해 성장한 풍강제과는, 작은 빵집에 불과한 태화당의 비법을 도둑질해 먼저 특허를 내는 비양심적인 회사로 그려진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성공을 자랑하는 기업이 온갖 범죄와 편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설정은, <국희>가 아이러니하게도 기업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에 힘입어 성공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소시민 국희가 기업인이 되어서도 정의를 구현해 태화당을 성장시키고 나아가 풍강제과를 인수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기업인이 다 부패한 것이 아니라 권선징악을 이루어낸 사례도 있었다’는 판타지를 제공했다. 마치 양심적이고 선량한 정치인에 대한 판타지가 기존 정치권에 대한 혐오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국희>는 기업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기대라는 양가감정에 기반을 둔 성공작이었다.
ⓒMBC <영웅시대> 화면 갈무리 MBC 드라마 <영웅시대>(위)는 재벌 창업주들의 일대기를 그렸지만 방영 내내 논란이 일었다.
반면 같은 방송사에서 2004년 방영을 시작한 대하드라마 <영웅시대>도 실제 기업을 모델로 삼아 폐허가 된 조국에서 맨주먹으로 일어선 기업인들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었지만 방영 내내 여러 가지 잡음에 시달려야 했다. 현대와 삼성을 모델로 삼은 세기그룹과 대한그룹의 성장기는 <국희>에 비하자면 집요할 정도로 실제 사건을 흡사하게 모사하는 데 공을 들였다. 드라마 첫 회부터 천사국(김갑수,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모델로 함)의 투신자살 장면으로 시작해 현대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삼성의 사카린 밀수와 같은 한국 기업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고스란히 드라마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노동자는 없고 신화론적 재벌 인식만
판타지를 그릴 공간은 축소되고 실제 역사의 비중이 늘어났으니, 재벌 창업주들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는 마치 실제 역사에 대한 작가의 코멘트처럼 작용했다. 재벌들을 국가경제를 위해 이바지한 선량한 주역으로 그리고, 개발독재를 주도한 박정희의 여러 과오를 측근들의 잘못인 것처럼 축소하는 역사 왜곡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델이 된 회사로부터 모티브만 따와서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켰던 <국희>와 달리 <영웅시대>는 논쟁적인 반응을 피할 수 없었다. 이환경 작가는 시청자들이 사극을 보듯 편안하게 드라마를 봐주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러기에는 작품이 다루는 소재 자체가 달랐다. 이미 사라진 봉건왕조의 흘러간 역사를 다루는 사극과,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국가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재벌의 역사를 다룬 드라마를 동일 선상에 놓기는 어려운 노릇 아닌가.
그 무렵 이환경 작가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재벌은 노동자의 권익이 전무하던 시대에 정권의 비호하에 이뤄진 집단이고 사라질 확률이 높다”라며 “나는 노동자 출신이다. 애써 그들을 미화할 이유가 전혀 없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동의하지 못했던 것은 <영웅시대>를 ‘황무지에서 신화를 만들어낸 인간 중심주의’라고 설명하는 세계관 자체였다.
재벌이 개발독재와 정권의 비호 속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억누른 대가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서사를 창업주 개인과 몇몇 가신들이 일궈낸 ‘신화’라고 인식하는 세계관은 인간 중심주의라기보다는 신화론적 인식에 가까웠다. 재벌을 미화할 의도가 없다는 작가의 말은 아마 진심이었으리라. 재벌의 성장사를 묘사하는 그의 관점 자체가 이미 ‘맨주먹으로 성공을 일궈낸 몇몇 영웅들의 시대’로 당대를 축약하는 세계관에 갇혀 있는데 굳이 추가로 미화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회사는 다시 성장가도로 복귀했는데 내 생활과 일자리는 예전 같지 못한, ‘내’가 없는 경제 회복에 불안해하던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노동자’ 없는 재벌 신화인 <영웅시대>가 전달하고자 했다는 꿈과 희망은 잘 와 닿지 않았다. 당장 텔레비전을 끄면 구조조정의 압박과 불안정 노동의 물결이 내 목줄을 죄는데,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 취업길을 뚫어내는 드라마 속 박대철(유동근·현대건설 재직 시절의 이명박을 모델로 함)의 신화가 내게 힘이 되긴 어려운 일이었다.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 기업들이 묘사되는 방향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재벌과 개발독재 시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가상의 세계 안에 반영된 기업 묘사 또한 함께 달라진 것이다. 환상이 고갈된 자리에, 자본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만 날로 선명해지고 있다. 텔레비전 밖에서나, 텔레비전 안에서나.
CJ·SK 총수들의 찜찜한 특별사면 과정 17.120
CJ와 SK의 최고경영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독대한 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출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대가로 총수 사면을 받았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2015년 7월24일 박근혜 대통령과 손경식 CJ그룹 회장이 독대했다. <시사IN>이 입수한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을 보면, 이날 독대와 관련한 박 대통령 지시(7-24-15 VIP-①, 그림 1)가 확인된다. ‘<CJ>’ 문구 옆에 ‘1. 영화광고 3분 2. 문화체육 기금-통일 한류 20억~50억 30억+30억 3. 투자 조기 시행’이라고 적혀 있다. 같은 해 11월 CJ그룹은 미르재단에 8억원을 출연했다.
2015년 12월27일 박 대통령 지시 사항(12-27-15 VIP-①, 그림 2) 메모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4. CJ 정서 나빠짐. 이재현 회장, 올리브영, 도울 길 생길 수 있음, 서향희.’ 이 메모로부터 5일 전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변호인을 통해 상고장을 제출했다. 2013년 7월 횡령·배임·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 회장은 건강을 이유로 형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계속 연장하고 있었다. 메모 4일 전 이 회장은 CJ올리브네트웍스 보유 지분 전량을 자녀와 조카에게 증여했다. 재판 결과를 보고 지분 승계를 서둘렀다는 해석이 나왔다. ‘서향희’는 박 대통령 동생 박지만씨 부인인 서향희 변호사로 추정된다.
같은 날 박 대통령의 두 번째 지시(12-27-15 VIP-②)는 ‘재상고→기각→형 집행정지 신청(재수감 검찰 결정). 2년6개월. 2년3개월. 며칠 전 모친 뇌경색’이다. 이 회장의 파기환송심 판결(징역 2년6개월)과 남은 형기(2년3개월), 같은 시기 이 회장의 어머니 손복남 고문이 뇌경색으로 입원한 것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CJ그룹은 2016년 2월 K스포츠재단에 5억원을 출연했다. 이 회장은 2016년 7월19일 8·15 특별사면을 앞두고 재상고를 포기했고,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는다. 2015년 7월 박 대통령을 독대한 손경식 회장은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이 회장 사면이나 재판과 관련한 부탁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런 얘기는 전혀 없었다”라고 답했다.
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던 ‘중대 경제범죄자 사면권 제한’은 2015년 광복절 특사로 최태원 SK 회장이 사면되면서 이미 깨졌다. SK 역시 2015년 7월24일 박 대통령과 독대했고, 이후 양 재단에 출연했다.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을 보면, 수감 중인 최 회장을 대신해 나온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과 독대한 박 대통령은 ‘1. 정유 과잉공급. ↓중국, 자급자족 IT↑’ ‘2. 노인회장-생산적 노인. 132만명’을 언급한다(7-24-15 VIP-①). 박 대통령은 또 같은 날 SK와 관련해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에게 ‘워커힐 100억 적자. 중국 매수 희망. 관광공사. 면세점. 고급’을 언급한다(7-24-15 VIP -②).
특검, 삼성에 이어 CJ와 SK도 정조준
특검은 김창근 의장이 당시 독대를 앞두고 최 회장의 사면을 부탁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지난 1월13일 최순실·안종범·정호성 등의 재판에서도 김창근 의장이 사면 하루 전인 2015년 8월13일 ‘하늘같은 이 은혜 영원히 잊지 않고 산업보국에 앞장서 나라 경제 살리기를 주도하겠다’라며 안 전 수석에게 보낸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공개되었다. 최 회장 사면 5일 뒤 SK그룹은 ‘저소득 노인용 주택·복지 혼합동 아파트 건설사업’ 재원 마련 1000억원 기부 증서를 국토교통부에 전달했다.
SK그룹은 2015년 11월 미르재단에 68억원, 이듬해 2~4월 K스포츠재단에 43억원 등 총 111억원을 출연했다. 2016년 2월 박 대통령과 최 회장이 독대했고 면세점 규제 완화가 추진됐다.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형이 확정돼 수감 중이던 최재원 SK그룹 부회장도 광복절 가석방으로 같은해 7월29일 출소했다. 박영수 특검의 칼날이 삼성뿐 아니라 총수 사면·면세점 특혜 등 의혹이 제기된 다른 대기업으로 향하고 있다. / 특별취재팀 (주진우·차형석·천관율·김은지·김동인·전혜원·김연희·신한슬 기자)
재벌 개혁, 그룹 해체가 능사일까? 17.1.20
대선 후보들이 일제히 재벌 개혁을 주장하며 ‘경제민주화’ 의지를 밝혔다. 한국 사회를 바꾸려면 대표적 기득권인 재벌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벌 개혁이 개악이 되지 않게 하려면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들이 일제히 반(反)재벌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4대 재벌(삼성·현대차·SK·LG) 개혁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하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라고 공격했다. 문 전 대표가 지난해 4대 재벌 경제연구소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 경제를 살리는 데 여전히 재벌 대기업이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몇 달 전부터 “재벌 체제 해체”를 공언하고 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전은 자칫 ‘내가 재벌에 더욱 적대적이다’라고 과시하는 경연장이 될 수도 있다.
재벌은 한국 사회의 대표적 기득권이다. 경제 부문은 물론 정치·사회 부문에도 유착과 매수를 통해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바꾸려면 재벌 체제 역시 바꿔야 한다. 다만 변화의 방향은 현재보다 우월한 쪽이어야 한다. 선거판의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재벌이라는 앙시앵레짐을 철저히 ‘타도’하겠다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시사IN 신선영 2014년 6월5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노숙 시위를 하고 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는’ 재벌 총수
재벌은 ‘창립자 일가’가 여러 대기업을 하나의 그룹으로 운영하는 기업집단을 의미한다. 쌍용자동차나 GM코리아처럼 단독으로 운영되는 업체는 대기업이지만 재벌로 불리지 않는다. 총수 일가는 주요 기업에 다수 지분을 확보한 뒤 그 기업들이 다른 계열사에 지분을 갖게 하는 방법(순환출자)으로 그룹 전체를 일관되게 지휘한다.
총수 일가가 직접 가진 지분은 그룹 전체 주식 가치의 5% 내외다. 흔히 재벌 일가를 ‘오너(소유자)’라 부르지만, 전체 계열사 차원에서는 극히 적은 지분을 가졌을 뿐이다. 5% 소유로 100%를 지배하니 재벌 그룹을 가리켜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는” 시스템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배권을 상속시키기 위해 경제범죄에 가까운 짓도 서슴지 않는다.
재벌 개혁(해체)은 대체로 총수 일가의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는’ 체제를 종식시키자는 것이다. 주로 총수 세력 이외 다른 주주들(소수 주주)의 경영 개입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식이다. ‘소수 주주’는 국내 소액 투자자는 물론이고 수백억 달러를 운영하는 거대 해외 펀드까지 망라하는 개념이다. 그동안 재벌 총수는 주주들에게 당장 배분할 수 있는 돈을 장기 투자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다. 소수 주주의 권한이 강화되면 총수가 함부로 투자하는 행태를 차단할 수 있다. 그룹 차원에서 움직이던 기업들이 각각 자사 주주들을 위해 운영되는 독립 대기업으로 해체될 것이다.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 원장은 “30대 재벌 체제를 깨고 300대 기업 체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연합뉴스재벌 개혁 의지를 밝히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재벌은 중소기업 약탈, 저임금, 비정규직 확산, 노동조합 탄압 등의 원흉으로 지목되어왔다. 재벌을 해체하면, 대기업들이 하청 중소기업에 납품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고 정규직화에 앞장서며, 노동운동을 용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재벌 해체(개혁)는 대기업 주주, 하청 중소기업, 노동자 등 거의 모든 이해관계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과제다. 야권의 주요 공약이 될 만하다.
한국 경제 생태계에서 대기업의 위상
다만 재벌 대기업을 건드리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공식적인 재벌 그룹의 정규직 외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소득, 소자영업자들의 생계가 대기업에 사슬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홍장표 부경대 교수 등 산업생태계 연구팀이 국내 최대 신용평가사인 한국기업데이터의 자료를 활용해 추적한 연구(<거래 네트워크로 본 한국의 산업생태계>)에 따르면, “대규모 기업집단에 소속된 소수의 대기업들이 (기업 간) 거래 네트워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은 1차 협력(하청)업체들로부터 부품을 매입한다. 1차 협력업체 역시 다른 중소기업(2차 협력업체)으로부터 중간재를 공급받는다. 대기업을 근원으로 하는 원·하청 연쇄고리는 때로 10차 협력업체 이상까지 복잡하게 뻗어나간다. 산업생태계 연구팀이 표본으로 활용한 5만4114개 기업(2011년 기준) 가운데서는 45.5%에 해당하는 2만4600여 개 업체가 대기업 중심의 거래 네트워크에 편입되어 있다. 극소수 대기업에 납품하는 업체가 전체 중소기업의 절반 정도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삼성전자·LG전자 등이 포함된 전자 업종의 경우, 대기업 협력업체가 모두 8809개에 달했다. 현대차·기아차 등 자동차 업종의 협력업체는 5886개다. 적어도 ‘삼성이 망해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한국 경제에서 재벌 대기업들의 비중이 작지는 않다.
재벌 해체 이후 독립 대기업들의 경쟁력은?
기업집단의 장점은 계열사끼리 서로 지원하면서 사업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거나 빠르게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첨단산업에 뛰어들 때도 유리하다. 그룹의 유명 브랜드를 내거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다. 그룹 내에 축적된 판매 조직을 활용할 수도 있다. 삼성전자는 삼성전기, 삼성SDI 등 계열사로부터 부품을 조달받기 때문에 애플과 달리 여러 규격의 제품을 유연하게 선보일 수 있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비교우위다. 대기업이 그룹에서 독립하는 경우, 경쟁력이 더 강해질 것 같지는 않다.
또한 독립 대기업에서는 소수 주주의 권력이 강해질 것이다. 재벌 일가의 의지를 떠받드는 다른 계열사의 지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재벌 일가는 산하 계열사를 사실상 자신들과 후손의 소유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해당 기업 자체의 성장·발전에 관심이 많다. 일가의 사회경제적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기업 내에 쌓인 자금을 주주들에게 배분하기보다 그대로 유보하거나 투자에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최근 낸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삼성전자는 매출액의 7.5%를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글로벌 차원에서 최고 수준이다. 같은 시기 애플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4.4%에 불과했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뒤 주주들의 힘이 강력해졌다. 소수 주주들의 최고 목표는 기업의 성장보다 금융수익 확보다. 재벌 해체의 조짐이 보이면 신속하게 대기업 주식을 매집해놓는 것이 좋다. 주가가 올라 큰 재미를 볼 수 있다. 다만 해당 기업 노동자나 하청업체들까지 좋아할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재벌은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인가?
재벌은 이른바 ‘천민자본주의’의 표상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비정상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증거로 활용된다. 선진국에는 재벌 같은 기업조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룹(기업집단) 경영은 세계적으로 보편적 현상이다. 대다수의 글로벌 우량 기업들은 ‘복합기업 그룹(conglomerate·재벌처럼 여러 업종의 기업이 집단적으로 운영되는 형태)’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 보잉, 듀퐁, GM(이상 미국), 바이엘, 지멘스(독일), 르노(프랑스), 네슬레(스위스) 등이 있다. 가족경영 체제로 성공한 독립 대기업도 많다. 미국의 월마트, 일본의 도요타, 룩셈부르크의 아르셀로미탈, 스페인의 산탄데르 은행, 프랑스의 PSA 푸조 시트로엥, 독일의 BMW 등이다. 한국의 재벌처럼, 가족이 ‘복합기업 그룹’을 경영하며 자녀에게 승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미국의 포드, 이탈리아의 피아트, 독일의 베르텔스만, 일본의 산토리, 프랑스 루이비통, 스웨덴 악셀 존슨, 캐나다의 파워코퍼레이션오브캐나다 등이다. 정경유착 등 한국적 부작용을 빼고 기업 운영 형태로만 보면, 재벌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다. 그룹 경영과 독립기업 혹은 가족 경영과 ‘월급 받는 피고용 경영자’ 가운데 어느 쪽이 나은지에 대해서는 국제 학계와 실무 측에서 일치된 견해가 나온 바 없다.
한국 재벌의 ‘소유 없는 지배’도 비판 대상이다. 그런데 이것도 한국 재벌만의 현상은 아니다. 주식회사 제도 자체가 문제다. 주식회사에서는 20%든 30%든 다수 지분만 확보하면 경영 지배권을 통째로 갖는다. ‘소유 없는 지배’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의 <경제민주화… 일그러진 시대의 화두>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차등의결권(경영자의 주식에 일반 주주의 주식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을 부여) 제도를 통한 ‘소유 없는 지배’가 자행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슐츠버그 재단이 지분 0.6%로 100% 의결권을 행사한다. 워런 버핏은 (버크셔해서웨이에서) 자신의 1주에 대해 200개 의결권을 갖는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기업은 창업자가 1주에 10개 의결권을 행사한다. 구글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차등의결권은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월스트리트식 경영 간섭에 제한받지 않고, 장기적인 기업 전략의 수립 및 경영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싫다면 구글에 투자하지 말라’고 말했다.”
재벌을 해체하면 노동자와 중소기업의 형편이 나아질까?
재벌이 양극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압도적 시장지배력을 무기로 하청 중소기업들을 약탈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들은 혁신에 투자해야 할 잉여이익을 재벌에 빼앗긴다. 자사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다. 결국 대기업과 중소기업, 양 부문 노동자들 간의 격차가 계속 벌어진다. 정론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견들이 등장하고 있다. 정승일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하 새사연) 이사는 재벌 시스템 자체로 인해 약탈이 자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산업생태계 연구팀’이 선도 기업(원청 대기업)과 공급 기업(협력업체)의 영업이익률(2011년)을 정리한 그래프(오른쪽 표)를 제시한다. 원청 대기업이 하청 협력업체를 심하게 쥐어짤수록 양측의 영업이익률은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실제로 건설, 유통, 통신, 시스템통합(SI) 등 내수 서비스업에서는 원청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반면 협력업체들의 그것은 바닥을 기고 있다. 반면 수출 제조업에서는 양상이 크게 다르다. 전자 업종의 경우,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1차 협력업체에 비해 미세하게 높을 뿐이다. 자동차 업종에서는,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1차 협력업체보다는 조금 높지만 2, 3차 협력업체에 비하면 오히려 낮다.
정승일 새사연 이사는 이런 현상을 업종의 차이 때문으로 해석한다. 수출 제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그래서 본사는 물론 협력업체의 능력까지 향상시키려고 노력한다. 협력업체들의 기술 수준 및 품질관리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원청인 삼성전자와의 납품 단가 협상 등에서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반면 종합건설사인 삼성물산이 수주한 업무는 전문 건설업체인 1차 협력업체들을 거쳐 여러 차례 하청된다(다단계 하청). 협력업체들은 하청 비용을 낮게 불러야 일을 맡을 수 있다. 유통, SI 같은 업종도 비슷하다. 내수 서비스업의 핵심적 경쟁력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인건비 저하를 통한 비용절감 능력(하청 약탈)이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모두 재벌 계열사다. 그러나 하청업체와의 관계에서는 크게 다르다. 재벌 여부가 아니라 업종에 따라 약탈 강도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정승일 새사연 이사는 원·하청 문제의 대안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 지원 및 노동조합 강화 등을 제안한다(42~43쪽 기사 참조).
한편 재벌에 대한 경제력 집중을 해체해서 ‘30개 그룹을 300개 독립 대기업으로’ 만들면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와 임금이 오르고, 해외로 나간 생산공장들이 복귀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탄압이 중단될까? 재벌 계열사에서 독립 대기업으로 바뀐 쌍용자동차, 르노삼성자동차, 한국GM 등이 하청업체나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친절하다는 증거는 없다. 주주들을 위해 운영되는 독립 대기업들이 재벌 계열사와 다른 행태를 보이기는 할 것이다. 주주들은 위험한 장기 투자보다 당장의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선호한다. 비용을 줄여야 주가와 배당금이 높아지는 판국에 협력업체 납품 단가를 올리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질 나쁜 헤지펀드 주주라면 단기 수익에 예민한 기관투자가들을 업고 독립 대기업에 이사를 침투시킨 다음, 정리해고 및 연구개발 투자 취소 등으로 비용을 줄여 주주 가치를 높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회사를 쪼개거나 다른 기업과 합병시키면서 자산 매입·매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떼돈을 벌기도 한다. 정부가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 정책을 강행하려 하면 ISD(투자자·국가소송제)로 맞설 수도 있다.
정확한 문제 분석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삼성 공격에 대한 우려를 ‘민족주의 관점’에 따른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대기업 경영 관행의 문제다. 주주 가치 높이기냐, 기업의 성장이냐는 대기업 경영진의 선택에 따라 고용과 테크놀로지 등 국가경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총수 일가와 기업집단을 분리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일가의 범죄는 법치주의에 따라 엄하게 단죄하되 수많은 글로벌 우량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그룹 경영을 한국에서만 포기할 이유는 없다. 총수 일가를 혼내주기 위해 그룹 분리를 선택한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클 수 있다.
재벌 일가와 소수 주주(외국계 펀드 포함) 가운데 양자택일할 문제는 아니다. 국가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대기업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부터 구상한 다음 구체적인 재벌 개혁 방안을 만들어가면 된다. 투자와 혁신을 추진하고 하청 중소기업과 함께 성장하며 비즈니스의 핵심 자원인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생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경영 주체라면, 해외 자본이든 국가든 은행이든 상관없다.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들도 착취와 불평등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한 바탕 위에서 적절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삼성이라는 이름의 역설적 시스템 1 .20
삼성그룹 이건희 일가는 독특한 ‘금융자산가’다. 보통의 금융자산가들은 기업의 배당률과 주가 상승에 집중하지만 그룹의 경영자이기도 한 이들은 위험한 장기 투자를 감행한다. 그런 과감한 투자 덕에 삼성이 성장할 수 있었다.
삼성그룹 이건희 가족은 기본적으로 금융자산가다. 일가(이건희 직계)가 그룹의 3대 축인 삼성물산·삼성전자·삼성생명 등에 직접 보유한 주식만 현금으로 25조원에 이른다. 시가배당률을 단지 1%로만 가정해도, 일가에겐 3대 회사로부터 한 해 2500억원 규모의 소득이 발생하는 셈이다. 다른 계열사에도 만만찮은 주식 지분을 갖고 있다. 일가는 금융자산가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건희·이재용·이부진 등 일가의 대표자들은 각각 핵심 계열 기업의 최고 경영 책임자다. ‘금융자산가 겸 경영자’인 것이다.
ⓒ삼성전자 제공 2010년 1월9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가전전시회(CES 2010)를 찾아 가족과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전업(專業)적 금융자산가라면 자신이 투자한 기업의 배당률 인상과 주가 상승을 기대할 뿐이다. 금융자산가에게 기업은 ‘현금 주머니’에 불과하다. 고용된 경영자라면, 높은 보수를 받으며 임기를 무사히 마치면 된다. 그러려면 주주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주주들에게 수익을 나눠줄 수 있는 ‘위험 장기 투자’나 새로운 첨단산업으로 해당 기업을 몰아갈 필요가 없다. 이에 비해 ‘금융자산가 겸 경영자’인 이건희 일가는 매우 독특한 행태를 나타내왔다.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지금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통해 ‘금융자산가 겸 경영자’의 ‘빛과 어둠’을 살펴보기로 하자.
‘위기 경영’의 시작,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경영권을 상속받은 것은 1987년이다. 6월 항쟁으로 개발독재의 시대가 종료되기 시작할 때다. 그가 물려받은 삼성은 국내에서 명실상부한 1위 그룹이었다. 그러나 세계시장에서는 2~3류 가전제품 업체로 통했다. 상속자의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 삼성그룹의 매출 실적이 1988~1993년 다섯 해 동안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마침 1987년 7~9월에 절정을 이뤘던 노동자 대투쟁으로 평균임금 수준이 두 배 이상 증가하면서 ‘수요 주도 호황’이 한창 진행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이건희의 야망은 국내 최고 기업집단의 수장이 아니었다. 그는 삼성을 미국의 GE나 IBM, 독일의 폭스바겐 같은 세계적 기업으로 발전시켜 아버지(삼성그룹 창립자 이병철)를 뛰어넘고 싶었다. 1942년생인 이건희는, 한국이 세계 최저 빈곤국에서 야심만만한 개도국으로 성장하는 기간에 청·장년기를 보냈다. 이 세대의 공통 의식 가운데 하나는 미국 등 서방세계에 대한 열등감과 부채의식이다. 그중 일부는 지금도 미국과 박정희, 그 딸을 숭상한다. 도심으로 뛰쳐나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종북 세력 척결’을 외친다. 이건희는 이런 세대 의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쟁과 극복의 대상을 국내 기업이 아니라 선진국 기업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선진국 기업을 이기려면 삼성 제품의 질을 대폭 개선해야 했다.
ⓒ삼성 제공 1993년 6월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룹 경영진 200여 명을 긴급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주문했다.
이건희의 이런 기질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1993년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그해 봄 월드 투어에 오른 이건희는 미국 캘리포니아 전자상가를 방문했다가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다. 상점 진열대에는 소니, 파나소닉 등 일제 가전제품들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삼성 제품은 먼지로 덮인 채 구석 선반의 아래쪽에 처박혀 있었다. 이건희는 다음 행선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 방송팀이 제작한 30분짜리 비디오테이프를 본다. 삼성 세탁기 덮개가 닫히지 않아 그 가장자리를 직원들이 깎아내고 있었다. 그는 삼성그룹의 핵심 경영진 200여 명을 켐핀스키 호텔로 부른다. 6월7일 시작된 3일 동안의 연설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윽박질렀다. ‘다 바꿔야’ 제품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00년까지 월드 클래스의 기업이 되지 못하면 망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대로라면) 삼성전자는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 (…)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 이제 7년밖에 남지 않았다.”
이후부터 ‘위기’는 이건희의 말버릇이 된다. 삼성전자가 기록적 실적을 거둘 때도 ‘위기’라고 부르짖었다. 해외 언론들이 그의 경영 행태를 ‘영구적 위기론(perpetual crisis)’으로 부를 정도다.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위기론이 폭력적이고 노골적으로, 또한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니며 실현된 것은 2년 뒤(1995년 3월) ‘애니콜 화형식’ 사건이다. 당시 이건희는 직원들에게 선물로 지급한 애니콜 휴대전화 중 다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삼성 구미공장 운동장에 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애니콜 휴대전화 등 불량 제품 15만 대를 쌓았다. 곧이어 장정 몇 명이 해머를 휘둘러 애니콜들을 부수고 불구덩이에 처넣었다. 남은 제품은 불도저로 깔아뭉갰다. ‘행사’ 직후 이건희는 ‘다시 불량품이 나온다면 같은 일을 되풀이하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질(을 개선하는) 경영’이 당시의 삼성 직원들과 한국 경제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경제 시스템을 중저가 제품 대량생산에서 고부가가치 고급 제품 생산으로 혁신하자는 것이다. 주력 시장을 국내에서 해외로 옮기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추적자’인 삼성이, 이미 선진국 기업들의 고급 제품들이 점유하고 있는 세계시장에 도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선진국 기업보다 더 많은 자금을 더욱 선도적이고 효율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2~3류의 텔레비전 제조업체에 불과했던 삼성전자가 불과 20년 만에 매출액 기준 세계 최대 전자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대규모 투자로 전자산업 생태계의 상층으로
이건희가 경영권을 상속한 이후 삼성은 대규모 투자를 여러 차례 감행했다. 장기적으로 큰 수익을 기대하지만 자칫 회사를 거덜 낼 수도 있는 규모의 자금이었다. 그 덕분에 1990년대 초·중반 이미 LCD 패널과 플래시메모리(전원이 없는 상태에서도 메모리에 데이터가 계속 저장되는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다. 6~7년 뒤인 2002년에는 ‘낸드 플래시메모리(하드디스크를 대체할 정도의 고집적 성능으로 휴대형 기기에 적합한 메모리)’를 개발해서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2000년부터는 이차전지(노트북·휴대전화 등 고기능 디지털 기기에 장착 가능한 가볍고 장시간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전원)를 양산하게 되었다.
ⓒ연합뉴스 2011년 9월22일 이건희 회장이 ‘메모리 16라인 가동식 및 20나노 D램·플래시 양산’ 행사에서 시제품을 전달받고 있다.
당시 삼성의 투자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일단 수억~수십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야 개발할 수 있는 ‘부품’들이다. 워낙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국내외 다른 기업들은 설사 자금력이 있다 해도 투자하지 않았다. 이런 부품들이 결국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삼성이 평판 LCD TV 부문에서 세계 1위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중반이지만, 그 핵심 부품인 LCD 패널은 1990년대 초반에 양산되었다. 이차전지와 플래시메모리는 이후 스마트폰의 핵심 부품이 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에 대한 구상을 현실로 옮기는 데 쓰인 필수적 기술이었다. 2012년 삼성전자는 핀란드 노키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모바일폰 생산업체로 떠오른다. 1990년대 초·중반부터 감행한 대규모 부품 투자들이 10~20년 뒤, 삼성이 완제품(TV·스마트폰 등) 시장에 뛰어들면서 천문학적 수익으로 꽃피게 되었던 것이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2013년 3월28일)의 샘 그로발트 기자가 설명한 삼성의 사업 전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성전자가 새로운 산업에 진출하는 경우, 처음엔 해당 산업에서 핵심적이지만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부품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예컨대 마이크로프로세스나 메모리칩이다. 그 부품을 다른 완제품 생산 기업에 판매한다. 이런 과정에서 삼성은 해당 산업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게 된다. 이후 삼성은 완제품으로 생산 영역을 확장하면서, 관련 플랜트와 기술에 (다른 기업이 삼성에 대적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자금을 투자한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판매에서 세계 1위로 부상한 직후인 2012년, 자본 지출로 215억 달러를 썼다. 같은 기간 애플의 두 배다. 삼성은 기술에 크게 베팅한다.”
삼성전자는 매출 기준으로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의 1인자이지만 그 핵심 부품인 디스플레이, 플래시메모리, 마이크로프로세스, 카메라 등에서도 세계 최고다. 심지어 스마트폰 완제품 부문에서 삼성의 경쟁자인 애플은 마이크로프로세스 등 삼성에서 만든 부품을 매입하는 데 총비용 중 15% 내외를 쓴다.
이런 부품 생산능력은 엄청난 비교우위다. 삼성전자가 세계 1위 스마트폰 업체로 떠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생산 기종이 제한된 애플이나 다른 회사와 달리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제품을 시장의 수요에 맞춰 유연하고 신속하게 내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삼성이 디스플레이나 플래시메모리 등을 외부에서 조달하는 형편이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 같은 부품 공급 능력은, 삼성이 글로벌 차원에서 이뤄지는 생산의 피라미드에서 상층으로 올라섰음을 의미한다. 이 글로벌 피라미드의 하부에는 개발도상국의 조립공장들이 있다. 바로 위에는 만들기 크게 어렵지 않은 부품을 개발·생산하는 중·선진국의 각종 기업이 활동한다. 최상부에는 대규모 투자와 고도의 기술력을 겸비해야 양산 가능한 부품 생산능력을 무기로 전체 생산을 글로벌 차원에서 기획·지휘하는 소수의 초국적 기업이 존재한다. 그 대열에 삼성이 들어갔다.
ⓒ사진공동취재단 2015년 7월17일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대표이사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안 통과를 선언했다.
한국이 지금까지도 일본에 무역적자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대다수 산업에서 일본이 기초 기술과 부품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대미 수출품을 생산하려면, 일본만이 만들 수 있는 중간재(부품)를 수입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본은 글로벌 생산 피라미드에서 한국보다 상위에 있다. 이를 극복하기는 매우 힘들다. ‘종속 자본주의’ 같은 살벌한 용어들이 등장하는 이유다. 삼성은 적어도 일부 첨단산업 부문에서 ‘종속’을 극복해낸 것이다.
‘인내하는 자본’이라는 재벌의 역설
이처럼 삼성이 세계적 거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력적인 ‘투자 베팅’의 결과다. 더욱이 남들이 ‘삼성의 발전 단계’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새로운 산업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삼성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이 LCD 패널, 플래시메모리, 이차전지 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할 때 세계의 다른 기업들은 해당 기술들의 잠재력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선진국 기업 경영자들은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단번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투자하는 모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플래시메모리 등에 거금을 투자해봤자, 해당 시점에서는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다. 설사 성공한다 해도 본격적으로 수익을 회수할 때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삼성만 해도, LCD 패널에 투자해서 평판 LCD TV로 성공할 때까지 15년 정도가 걸렸다. 1990년대 초·중반부터 플래시메모리와 이차전지에 투자한 돈도 2000년대 후반에야 갤럭시 시리즈로 대박을 쳤다. 영국·미국처럼 주주의 힘이 강한 국가에서라면, 대규모 자금을 장기 투자하고 수익이 나올 때까지 ‘인내’하는 경영자는 주주에 대한 배신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되어 직위를 상실하기 일쑤다. ‘고용된 경영자’라면, 10년 넘게 걸리는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 성과가 나올 때쯤이면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코노미스트>(2011년 10월1일)는 이건희의 삼성을 ‘인내하는(patient) 자본’이라고 불렀다. “삼성은 인내심이 강하다. 삼성의 경영자들은 단기 이윤보다 장기 성장에 더 관심이 많다. 피고용인들에 대한 동기부여(고임금)도 잘 한다. 삼성그룹은 전략적으로 사고한다.” 그렇다면 삼성이 ‘인내하는 자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이코노미스트>는, 진보 성향의 한국인들에겐 납득할 수 없는 답변을 내놓는다. “이건희를 중심으로 형성된 컬트(a cult of personality around Mr. Lee) 덕분이었다. (…) 삼성의 인내와 대담성은, 이건희 일가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일가의 삼성그룹 통제는, 계열사들이 서로의 지분을 보유하는 거미줄처럼 복잡한 구조에 의해 지탱된다.”
결국 ‘재벌 시스템’ 덕분이라는 이야기다. 이건희 일가가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총지분 중 실제로 보유한 몫은 5% 내외에 불과하다. 그러나 계열사가 계열사를 소유하는 복잡한 지분 구조 덕분에, 이건희 일가는 전체 그룹을 지배할 수 있다. 이 같은 재벌 시스템은, 주주들이 원해도 이건희를 삼성에서 쫓아내기 힘들 정도로 굳건하다. 이건희 일가가 주주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삼성전자의 장기 성장을 위해 대규모 자금을 불투명한 사업에 투자할 수 있었던 이유다.
ⓒ시사IN 신선영 1월12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소환되어 피의자 신분으로 뇌물 공여 및 위증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물론 이건희의 목적은 일가의 영광, 공명심, 상속, 야수적인 승부욕, 애국심, 일자리 창출 가운데 하나이거나 모두일 수 있다. 금융자산가인 이건희가 금융 수익보다 삼성전자 자체를 키우려 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이 회사를 자신과 일가의 소유물처럼 생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정경유착과 다양한 불법·탈법적인 수법을 동원한 경영권 상속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기가 어떠했든 이건희는 선진국 기업 경영자들이 엄두를 낼 수 없는 모험적 장기 투자를 지속해왔고 그 결과가 지금의 글로벌 대기업 삼성전자다.
‘주주 가치 제고 선언’의 덫
이건희의 마지막 모험은 2010년 ‘5대 신수종 사업’ 발표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 삼성도 어찌될지 모른다.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이건희는 위기론을 천명하면서 “다시 시작할” 사업으로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발광다이오드(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등을 제시했다. 모두 삼성이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갖지 못했으며 막대한 자금 투자가 필요한 신산업이다. 2020년까지 200억 달러(약 24조원)를 투자할 계획이었다.
이런 와중에 2014년 5월 이건희는 쓰러지고 만다. 일가는 3세(이재용)로의 상속을 위한 그룹구조 개편을 본격화한다. 2015년 7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은 이건희 일가의 손을 들어줬다. 2016년 하반기, 삼성은 다시 치명적인 위기를 맞는다. 합병 당시 국민연금공단의 결정에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삼성 측이 그 대가로 최순실씨의 딸인 승마 선수 정유라씨에게 수백억원대 자금을 지원한 혐의도 포착되었다. 엘리엇은 이를 틈타 삼성의 경영 체질을 바꿔놓으려 하고 있다. 경영권 상속을 도와주는 대신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과 앞으로 벌어들일 잉여현금흐름(기업이 벌어들인 수익 가운데 세금·영업비용·설비투자액 등을 제외한 현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주주에게 내놓으라는 것이다. 지난해 11월29일 삼성전자 이사회는 ‘주주 가치 제고 선언’을 통해 엘리엇의 제안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대세’에 맞춰 주주 가치를 중시하는 기업으로 변화해갈 수 있다. 국내외 수많은 개혁적 경제학자들과 금융투자 업체들이 갈망하던 흐름이다. 그러나 투자보다 주주 가치를 중시하는 삼성이 일반 시민과 노동자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삼성은 앞으로도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새로운 산업 영역에 진출해서 글로벌 1위로 치고 올라가던 발전 패턴을 지속할 수 있을까. 글로벌 경제에서 한국은 지금도 선진국이라기보다 ‘추적자’ 지위에 머물고 있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해야 하나 17.3.25 한국경제
주요 대선주자들이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건물이나 땅에 부과되는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를 올리겠다는 게 핵심이다. 국토보유세를 신설, 연간 15조원의 세금을 더 거둬 이를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으로 나눠주겠다는 급진적인 공약도 있다. 이들은 보유세 강화의 근거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동산 보유세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낮다는 점을 든다.
보유세 강화에 찬성하는 전문가들은 주택, 토지, 건물 등 부동산 자산이 일부 소득 상위 그룹과 소수 법인에 집중되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부동산 보유세를 높이면 계층·지역 간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재벌과 대기업의 부동산 투기 방지, 내수 활성화 등의 효과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수의 부담이 다수의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논리다.
반면 부작용을 우려하는 전문가들은 조세 저항에 따른 내부 혼란을 우려한다. 또 취득세 양도소득세가 상대적으로 높아 전체 세금 부담은 선진국에 비해 낮지 않다고 지적했다. 보유세는 전체 조세 체계 안에서 신중하고 균형감 있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에 미칠 악영향도 우려한다. 부동산을 보유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고착화되면 부동산경기 급랭, 내수경기 침체, 불황 장기화 등의 현상이 연쇄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찬성 - 상위 10%가 전체 토지 65% 차지…모든 토지 합산해 보유세 부과해야
(전강수-대구카톨릭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경제학 박사.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위원장_)
年 15조 稅收 증가…전국민에 토지배당 분배를
지난 2월5일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됐다. 2015년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4.2%를 차지하고, 소득 상위 10%가 48.5%를 차지해 소득집중도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2000년에 비율이 각각 9.0%, 36.4%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위계층에 대한 소득 집중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2015년 현재 한국의 소득집중도는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은 미국 수준에 육박했다.
하지만 이것도 불평등의 실상을 과소평가한 수치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부동산 소득(매매차익+순임대소득)의 대부분이 통계에서 누락됐다. 토지+자유연구소의 연구에 의하면 2015년 부동산소득은 356조원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그해 국내총생산(GDP)의 22.8%에 해당한다. 이것을 넣어 소득집중도를 다시 계산한다면 집중도가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박원석 전 정의당 의원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토지자산은 개인의 경우 상위 10%가 전체 토지의 65%를 차지하고 법인의 경우 상위 1%가 전체 토지의 75%를 차지해(2013년 현재 가액 기준) 소득보다 훨씬 심한 불평등을 드러낸다. 최근 재벌·대기업의 토지 소유가 급증했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2008~2014년 6년 사이에 상위 1% 기업이 소유한 부동산 가치는 546조원에서 966조원으로 77%나 증가했고, 상위 10개 기업이 소유한 부동산 가치는 180조원에서 448조원으로 147% 폭증했다. 이는 재벌·대기업이 종합부동산세 감세로 인한 보유세 부담 완화와 법인세 감세로 인한 사내유보금 증가를 틈타 토지 투기에 몰두한 결과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만악의 근원이 돼 버렸다. 부동산은 공직자 부패의 온상이자 기득권층의 부당 치부 수단이 됐고, 계층 간·지역 간 불평등의 근원이자 경제 불안정과 고비용·저효율의 원인이 됐다. 이를 그냥 두고서는 불평등 해소와 공정사회 건설은 요원하다.
더불어민주당의 대선주자인 이재명 성남시장이 기본소득 공약을 발표하면서 국토보유세 도입과 토지배당 지급을 약속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다. 국토보유세 도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합부동산세를 폐지하고 지방세인 재산세는 현행대로 유지한다. 국토보유세는 국세로 하고 토지에만 부과한다. 지금까지 토지 과다 보유자의 세 부담을 낮추고, 보유세를 왜곡시킨 용도별 차등과세를 원칙적으로 폐지하고, 모든 토지를 인별 합산해 누진과세한다. 또 현행 보유세제도의 과다한 비과세·감면은 원칙적으로 폐지한다. 단, 국토보유세 납부액 중 재산세 토지분은 환급한다. 제도가 완성될 경우 약 15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국토보유세 세수 증가분은 모든 국민에게 n분의 1씩 토지 배당으로 분배한다.
공정사회정책연구회 산하 토지주택·기본소득위원회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국토보유세와 토지 배당을 동시 도입하면 전체 가구의 95%가 혜택을 누리며, 재정관리 강화로 확보할 재원으로 지급할 생애주기별 배당과 특수 배당까지 더해서 계산할 경우 전체 가구의 97% 이상이 혜택을 본다. 모든 기본소득 배당은 지역상품권으로 지급하기 때문에 골목상권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성화 효과도 두드러질 것이다. 토지 과다 보유자의 세 부담이 증가하겠지만 불평등 해소, 재벌·대기업 토지 투기 방지, 골목상권 활성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고 전체 가구의 95% 이상에 혜택을 안겨줄 묘책을 시행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국토보유세와 토지 배당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이 토지 과다 보유자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하는 첩경이다.
반대 - 국내 부동산 취득세·양도세율 높아…보유세 강화·거래세 완화 함께 논의를
(김덕례-주택산업연구원 주택정책실장 –가천대 도시계획학과 박사. 국토연구원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원. 국토교통부 수도권 심의 평가 위원. 한국주택학회 이사 및 운영위원장)
주택구입 등 꺼려…세수증대 효과 미미할 수도
5월9일 장미 대선을 맞아 각 정당 대선주자들이 다양한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부동산 보유세다. 보유세에는 지방세인 ‘재산세’와 국세인 ‘종합부동산세’가 있다. 대선주자들은 대부분 보유세 강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 보유세 실효 세율을 두 배로 올려 세수가 증가하면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는 후보도 있다. ‘국토보유세’를 신설해 15조원의 세금을 더 걷어 국민에게 기본소득세로 나눠주겠다는 후보도 등장했다. 기존에 세금을 내던 사람들에게 더 걷거나 없었던 세금을 만들어 걷겠다는 정책이다.
임대소득과세를 도입할 때 시장에서 벌어진 혼란을 되새겨 보면 새롭게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은 신중하게 펼쳐야 한다. 당시에도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을 걷겠다는 임대소득과세의 명분은 충분했다. 과거 정부는 추가로 걷는 세금 규모와 징수 대상이 많지 않다며 지속적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했다고 설명했지만 조세 저항은 매우 거셌다. 결국 임대소득과세는 유예됐고, 정책 발표 직후 곧바로 철회하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현재 대선주자들이 강조하는 조세 신설이나 보유세 강화는 나름대로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작용에 대해 충분히 논의했거나 다양한 계층의 눈높이에 맞춰 진단했다고 보기에 미흡하다.
보유세가 강화되면 당장 세금은 더 걷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주택이나 토지를 보유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국민은 조세 회피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부동산 매물이 급증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세금 부과 대상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 목표했던 세수 증가를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국내에는 아직 공공임대주택 재고가 충분하지 않다. 전체 782만 임차 가구 중 78.2%에 해당하는 612만가구(2014년 주거실태조사)가 다주택자가 공급하는 민간 전·월세 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이런 여건에서 보유세가 강화되고 새로운 조세가 신설돼 세금 부담이 늘면 어떻게 될까. 일시적으로 증가한 세수로는 현재 전·월세를 사는 600만가구에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할 수 없다. 서민을 위해 도입한 부동산 보유세 강화 정책은 전·월세 가구의 주거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주택이나 토지 소유주에게 보유세를 더 걷겠다는 정책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명분이 없으면 거센 조세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부동산 보유세 비중이 다른 나라보다 낮을 순 있지만, 취득세와 양도소득세 등 거래세는 다른 선진국보다 높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 보유세 강화만 따로 논의하지 말고 거래세 완화와 함께 균형된 시각에서 논의해야 한다.
조세정책은 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계층 간 먹이사슬을 따라 연쇄적 파급효과를 일으킨다. 한쪽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다른 쪽의 복지를 확대하겠다는 논의도 위험하다. 프랑스의 창문세가 자주 회자된다. 프랑스 정부는 세수를 확충하기 위해 창문세를 신설했는데, 세수는 늘지 않고 사람들이 창문을 없애버리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현재 제기되는 보유세 강화 정책도 주택과 토지에 대한 건전한 투자와 관련 산업의 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세금은 납세자의 지급 능력을 고려하고, 납세자의 편의에 맞춰 최소한의 비용이 드는 경제성을 갖춰야 한다고 언급했다. 대선주자들이 주장하는 부동산 보유세 강화 정책이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조세원칙에 부합하는지 엄밀하게 따져볼 일이다.
토지 가액 상위 1%, 전국 땅의 46% 보유 331 중부일보
토지 가액기준 상위 1%가 46%의 토지를 보유한 반면 국민 70%는 땅 한 평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의당 정동영 의원은 30일 국세청 자료를 기초로 경실련과 함께 토지보유 실태를 분석한 결과 부동산 거품 발생으로 생겨난 불로소득의 편중 심화로 토지를 보유한 사람과 보유하지 않은 사람의 자산 격차가 심각한 상태임을 밝혀냈다.
‘개인별 토지 보유 현황(2004년 기준)’정부자료에 따르면 가액기준 개인 상위 1%가 37.8%, 상위 5%가 67.9%, 상위 10%가 82.5%를 소유했다.
10년 후인 2015년에는 상위 1%가 47.7%, 상위 10%가 84%를 소유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 50년간 발생한 불로소득 6천700조원 중 상위 1%가 2천550조원, 상위 5%가 4천390조원, 상위 10%가 84%인 5천546조원을 챙겼다.
정권별로는 1964년부터 1997년까지 33년 동안 2천185조원이 상승했다. 1998년부터 2007년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이전 33년보다 2배 높은 4천337조원이 상승했다. 이 기간 상위 1%가 차지한 불로소득은 1천652조원으로 과거보다 2배로 자산격차가 심화되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3조원으로 가장 낮았다. 개인 상위 1%의 불로소득은 1인당 33억4천만, 가구당 100억원 규모였다. 상위 2∼5%는 7억을 챙겼다. 기업이 보유한 토지 면적과 금액이 급격하게 상승, 가액기준 2004년 330조원이던 법인소유 토지가격은 지난해 1천268조원으로 2.8배 상승했다.
특히 재벌 등 상위권의 집중이 심화되었다. 국세청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3천398억에서 6천236억으로 두 배 상승했다. 정 의원은 ”우리사회 불평등과 격차의 원인 그리고 ‘헬조선’의 근원을 밝혀내고 있다”며 “‘땅과 집’ 등 공공재를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이용한 과거 실패를 바로잡고 ‘한국병’을 정확하게 진단 확실한 처방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재벌과 한국 재벌 17.3.6 매일신문(대구)
1870년 이후 미국의 산업은 대기업이 주도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전 세계에 기부를 가장 많이 한 나라이기도 하다.
자동차 왕 포드는 1914년 최저임금 5달러, 일일 8시간 노동, 주5일 근무 등 그 당시 획기적인 노동정책을 펼치고 인종차별을 없앴으며, 장애인을 고용하는 등 지금도 하기 어려운 정책을 솔선수범하였다. 그의 경영 철학은 기업을 통한 사회봉사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있었다.
철강 왕으로 불리는 카네기는 19세기 미국의 철강 산업을 엄청난 규모로 발전시킨 주역이며, 당대 최고의 자선사업가이기도 하다. 카네기 공과대학 설립, 카네기 연구소, 카네기 재단을 통해 미국공과대학 교수를 위한 연금,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고, 전 재산을 바쳐 전국에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세계에서 도서관이 제일 많은 나라가 미국이다. 억세고 야성적인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여준 것은 카네기 도서관 덕분이다. 석유로 돈을 번 록펠러는 53세에 세계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그가 다니는 병원 벽에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표어를 보게 된다. 전 재산을 바쳐 전국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주었고, 그의 사업 철학은 ‘신뢰를 생명으로 하라’였다.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현재 미국은 물론 세계 제일의 부자이다. 자산 97조원의 이자만으로 1분에 500만원을 번다. 하루 기부한 돈이 50억원이나 된다. 전 재산 99%를 사회에 내어놓고, 재산을 물려주면 장래를 망친다며 자식에게는 1%만 주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미국 제2의 부자로 전 재산 71조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1%만 자식에게 준다는 유언을 이미 남겼다. “나머지 99%를 다른 사람이 쓴다면 엄청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미 기부한 돈이 35조2천억원이 넘는다. 페이스북은 2004년 미국 하버드생인 마크 저커버그와 그 일행이 시작한 세계 최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회사이다. 저커버그는 주식 99%를 사회에 기부하기로 했다.
미국 100대 기업은 이미 재산 50%를 사회에 기부했다. 현재 미국의 100대 기업 중 90%가 자수성가이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100대 기업 중 90%가 대물림이고 자수성가는 10%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재벌 생성 과정은 너무나 부끄럽다. 정경 유착, 부동산 투기, 독점 상품, 문어발 기업 확장, 일감 몰아주기, 내부 거래, 단가 후려치기, 하청 회사, 대형마트, 편의점, 빵집, 식당, 커피, 문구, 의류, 골목 상권까지 싹쓸이하였다. 우리나라 7대 재벌은 현금 600조, 부동산 960조, 주식 57조원을 보유하고 있어 재벌이 망하면 한국이 망하는 갑질 재벌공화국이 되어 있다.
이건희 회장 보유 주식이 15조3천억원, 1년 수익이 4조7천억원이다. 지난해 정몽구 회장 주식 배당 수익이 한 달 770억원이었다. 다른 재벌도 유사하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유산 600억원을 받아 재산이 8조원으로 늘어났고, 세금 60억원을 냈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우리나라를 세계 10대 무역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는 정부의 절대적인 뒷받침이 있었고, 열악한 환경에서 값싼 노임으로 일해준 국민이 있었고, 국산품 애용 운동으로 재벌 상품을 팔아주는 국민이 있었다.
늦었지만 한국 재벌도 미국 재벌과 같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세계 유례 없는 족벌 체재로 형제간의 재산싸움이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고, 대우의 경우 분식회계 41조원, 은행대출 10조원의 빚을 국민 혈세로 물어주었다. 롯데는 300억원 비자금, 6천억원 탈세, 삼성은 최근 이재용 부회장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어 국민을 크게 실망시키고 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은 우리나라 부패와 재벌들의 정경 유착 비리의 복사판이다./ 송일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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