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심장을 가진 청춘의 시인 고은
“별 하나가 꿈이 되려면 굶주렸을 때 밥 한숟가락만큼 절실해야죠”
‘20세기 세계문학사상 최대의 기획’이라는 [만인보(萬人譜)]의 고은. 1958년 등단한 이래 53년간 시, 소설, 평론 등의 저서를 150권 이상 세상에 내놓았고, 국내외 문학상 15개, 훈장 2개를 수상했으며, 세계 25개 국어로 번역서가 출간된 작가.
하지만 시인 고은의 청춘은 절망에 가까웠다. 수차례의 자살 시도가 있었고, 10년간 승려의 삶을 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소년 시절 품었던 꿈을 놓지 않았고, 시대의 언어가 되고자 소망한 대로 어느덧 세계의 시인이 되었다. 고은은 팔순의 나이에도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청춘이라고 고백하며 ‘그래도 품어야 할 우리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생에 있어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우리 세대의 절반 가까이가 죽었습니다. 남쪽과 북쪽을 통틀어 500만 명 이상이 단 3년 만에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그때 내가 10대 후반이었는데, 너무나 많은 죽음을 봤어요. 좌익이 점령했을 때는 우익이 죽었고, 우익이 돌아오자 좌익이 죽었죠.내 고향에서만도 이 죽음의 재앙이 세 번 되풀이되었어요. 군인들이 와서 시체를 파내서 옮기라고 했는데, 그 작업을 하고 나면 보름 동안 씻고 또 씻어도 시체 냄새가 몸에서 없어지지 않았어요. 살아남아 기쁜 게 아니라 죽음이 내게 눌어붙어 있었지요.
죽음이라는 게 뭡니까? 삶이 없어지는 허무 아닙니까. 나의 초기 세계를 허무주의라고 이야기하는데, 유럽의 허무주의나 노장사상의 허무같이 대단한 게 아니에요. 삶에서 그냥 무(無)와 만난 거지요. 같이 뛰놀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지고, 세상의 의미 있는 것들이 전부 의미를 잃는 것. 거기에 시인의 꿈같은 게 차지할 자리가 있을 리 없었어요.
곧이어 정신착란이 왔고, 집을 뛰쳐나갔다가 잡혀오고 또 떠나고 그랬어요. 그러는 중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지요. 이런 얘기는 가능한 한 하지 않기로 했는데 말이지…….
● 그 과정에서 얻은 지혜가 있다면
승려가 되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었어요. 길을 나섰다가 만난 떠돌이 스님을 따라간 것뿐이었어요. 한 쇠붙이가 자석에 들러붙은 셈이지. 시간이 흐른 뒤 그 스님의 스승인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밥 안 먹었지? 배고프겠다." 그러시고는 밥을 주시더니 "문자가 너무 많다. 버려야 한다." 하셨죠. 그때부터 선(禪)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전쟁과 고향의 비극이 만든 외상(外傷)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서서히 치유되어갔어요.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과 같은 지혜를 얻은 건 아니에요. 내 생각에는 원래부터 존재하는 지혜는 이 우주 안에 없습니다. 저기 높은 곳에 지혜가 있고 나는 어리석으니까 그 지혜를 섭취해야 한다, 이따위 지혜를 나는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가 후회하고 시행착오를 일으키고 오류를 범하면서 지혜를 만들어 내는 거지요. 살아가면서 지혜가 하나씩 들러붙는 거예요. 오랜 세월이 흘러 조가비에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지혜는 후회에요.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후회와 잘못에서 나오는 성찰이지요. 그래서 나는 어리석은 쪽을 택하고 싶고, 어리석은 쪽이 훨씬 진실하다고 생각해요.
고은 2시집 해변의 운문집 1966
●환속을 했고 그때부터 지독한 불면증을 10년동안 겪었습니다
-승려 생활을 하면서 시를 조금씩 썼는데, 그 가운데 ‘폐결핵’이라는 시를 친구가 막 생겨난 시인협회에 보냈어요. 그 시가 조지훈의 천거를 받게 되어 1958년 등단했지요. 지금은 시인의 길과 종교의 길을 충분히 함께 갈 수 있지만, 그때는 그게 허용이 안 될 때였어요. 강화도 마니산에 올라가 밤을 새며 고민하며 통곡을 했지요. 그러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예술의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했어요.
예전에 효봉 스님이 나를 보면서 '너는 여기 오래 못 있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스님이 나를 세상에 내보려고 하나 보다 싶어서 원통해하며 혼자 엉엉 울었는데, 그 말이 맞았던 겁니다. 아무 준비 없이 세상으로 나왔어요.
10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지만 그것 자체가 나를 완성시킬 수는 없었어요. 어느 정도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기간 동안 어떤 하나의 체험을 한 건 사실이지만 진리를 깨친 그런 상태가 아니었죠. 다시 옛날의 죽음이 달라붙기 시작했어요. 떼어지지가 않았어요. 삶이 죽음의 부속품처럼 여겨졌죠. 그때 찾아온 불면증이 10년간 이어졌어요. 잠을 못 잔 상태에서 낮에 사람을 만나니 흐릿한 물체로만 보였고, 인간을 혐오하게 됐어요. 소주를 몇 병 먹어도 그냥 취할 뿐 잠은 오지 않는 가혹한 불면증이었습니다. 또 다시 죽음을 결행하기를 몇 번, 그렇게 힘들게 살아갔죠.
● 고뇌를 겪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둘려주고 싶은 말이라면
-고뇌하는 청춘에게라, 음……, 어떤 삶이나 고통을 가슴에 품고 있지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행복하기만 한 삶을 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낙원이 아니라 고난 위에 서 있어요. 생이 죽음 앞에 있는 것처럼 말이지. 이 세계는 근본적으로고(苦)의 세계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 나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것에 가책을 느끼지요. '아직까지 살아서 너희들을 바라보고만 있어, 아무것도 감당하지 못한 채.' 그러고는 돌아앉아 가슴 아파합니다.
●-본격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1960년대 후반 내내 무교동 술집에서 거의 매일 술을 마실 때였어요. 통행금지에 걸리면 주모에게 통사정해서 거기서 자기도 하고 그랬죠. 1970년 11월 어느 날이었었는데, 술집 바닥에 버려져 있는 신문에 한 노동자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어요. 항상 죽음에는 관심이 많았으니까 눈에 띈 거죠. 본격적으로 그 죽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이 죽음이 뭔가? 내 죽음과 어떻게 다른가? 그런데 전태일의 죽음은 개인의 단순한 생의 포기가 아니었어요. 거대한 사회 현실의 모순이 들어 있었죠.
그전에는 현실 참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을 바보처럼 여기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전태일 이후로 내가 바뀌기 시작했어요.나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그 당시 대학생들, 지식인들을 전부 각성시킨 사건이었죠. 하나의 죽음이 우리 시대 전체에 가혹하게 경종을 울린 거예요.
아무런 이론도 의식의 토대도 없이 그냥 거리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나는 누군가가 열어젖힌 시대의 대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작은 존재였어요. 물론 시대의 언어가 되고 싶은 시인의 간절한 꿈은 있었지만.
그러면서10년 이상의 심각한불면증이 없어져 있었어요. 정말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내 몸 안에 있는 깊은 골짜기에 갇혀 있다가 뛰쳐나오면서 그리 되었을 거예요. 잠을 자면서 새로 태어나는 최초성을 다시금 맞이할 수 있었어요.
●시를 쓰고 세상과 소통하면서 힘들고 부끄러웠던 어린시절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지
-16세기 임진왜란 때 어떤 엄마가 굶주림의 극한에 가자 애기가 병아리로 보여 삶아 먹은 적이 있었어요. 이처럼 엄마의 모성까지 마비시키는 게 굶주림이에요. 우리가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는 건 처절한 굶주림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지요.
어릴 때 고모 등에 업혀 엄마가 바다에서 해초 뜯어오는 걸 매일 기다렸던 기억이 있어요. 해초를 밀기울에 버무려 먹는 게 밥이었죠. 그때 고모한테 '고모 별 따줘. 먹으면 배부르겠다' 그랬어요. 별을 밥으로 만난 거예요. 나중에 시를 쓰게 되면서 사람들이 별을 꿈의 오브제라는 둥 그러면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별을 밥으로 여긴 게 부끄러웠고, 열등감이 마구 느껴졌죠.
그런데 70년대 후반에 오면서 그게 자랑이 된 거예요. 절실함에서 나와야 진정한 꿈 아니겠어요? 별 하나가 꿈이 되려면 굶주렸을 때의 밥 한 숟가락으로 여겨질 만큼 절실한 삶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요.
●시인 고은의 가장 큰 자취로 20세기 세계문학사상 최대으 rghlr이라고 평가받는 ‘만인보’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1970년대를 '노동자(전태일)의 죽음으로 시작해 노동자(YH 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으로 닫힌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1970년대 후반 영등포에서 노동학교 교장을 했었는데, 친구들, 선배들을 데려다가 노동자들에게 무료 강의를 하게 했죠.
그러다가 1980년에 내란 음모죄로 잡혀 갔는데, 나처럼 내란에 안 어울리는 사람까지 엮어서 간 거죠. 나야 술이나 한 잔 먹을 줄 알았지 무슨 내란을 하겠어요? 내란음모 외에도 서너 개 법을 함께 적용시켜서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 특별사방으로 데려갔어요.
같이 갔던 문익환 목사는 육군참모 총장 정승화가 갇혔던 방에, 나는 김재규가 갇혔던 방에 들어갔어요. 방이 개미굴처럼 되어있어서 어디에 누가 있는지도 몰라요. 헌병이 지키는데 철장도 없고, 삼십 촉짜리 전구를 끄면 암흑이었어요. 죽을 때 통일을 외칠까, 민주주의를 외칠까, 짧은 시를 읊고 죽을까 그런 걸 생각하며 살아야 했어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 상황이었어요. 책 하나 볼 수 없었고 오줌 싸는 통 하나만 있었지요. 현재의 삶이 박탈되어 버리자, 과거가 현재의 자리를 대신해주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 술을 많이 마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기억났고, 이웃집 아저씨나 건넛마을 누구처럼 과거에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 아무 의미가 없는 과거의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이 내 기억 속으로 들어왔어요.
또 후회가 되는 일도 많이 생각났어요. 할머니한테 좀 더 예쁜 애기가 되어드릴 걸, 할머니가 나를 예뻐할 때 왜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이런 과거의 결핍들이내 속에서 마구 솟아나왔어요.
만약 내가 다시 산다면 이 얼굴들을 재현하고 싶다, 시로 그 얼굴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어요. 메모도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단지 구상을 하는 것 자체가 생에 힘을 줬어요. 항문에서부터 불길이 솟아올라 내장을 거쳐 올라오면서 비굴함은 물러가고 당당해졌어요.
●시를 통해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은 무엇인지
-그렇죠. 화엄은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는’ 거예요. 아니, 나는 세계나 네가 먼저 있으므로 내가 있게 되는 것이죠, 관계가 존재의 앞이지요. 가령 혼자 있으면 ‘나’라는 말도 필요가 없지요. ‘나’는 수많은 관계의 산물입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집에 가기 위해 타는 버스를 생각해보세요. 내가 태어나기 전 조상들은 또 어떻습니까? 수많은 우주 갈래에서 온 게 나입니다. 나는 많은 관계의 귀착점이자 무한한 관계가 전개되는 출발점이에요. 어디에 ‘나’만 뚝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요. 그만큼 우리 존재는 불완전하고 임시적이에요. 이런 점에서 ‘관계’는 우리 삶의 총칭이에요.
죽음에서 시작한 1950년대의 허무주의와 1970년대 이후 거리에서 찾은 방향성, 이 두 가지를 아울러서 지금은 화엄이 나의 지향점이 되었어요.
[만인보] 역시 내가 꿈꾸는 화엄의 한 표현입니다. [만인보]는 현실을 떠나간 사람들을 재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손을 잡게 하는 작업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누군가와 관계 맺기에 서툰 세대 아닙니까
-지금은 다른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려야만 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시대이지요. 몇 대 1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학교에서 주입시키는 공부를 하고, 요샛말로 스펙을 쌓는데 세월의 전부를 보내는 이들이 진정한 우정을 쌓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지요.
우정이 뭡니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친구는 '너 대신 내가 대신 죽겠다', 이런 의미라지요. 그러니까 서로의 죽음을 대행해서 먼저 죽어가는 존재가 친구인 거죠. 기가 막힌 의미 아닌가요? 그런데 우리는 '네가 없어야 내가 있는 거야', '내가 합격하기 위해서는 네가 떨어져야 해', 이렇게 살아가지요. 이 시대의 사상 담론에서 '우정'이나 '환대'에 대한 이론이 구축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울대에서 몇 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너희들에게서는 피 냄새가 난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너희는 중고등학교 때 적어도 몇 명을 죽이고 여기 온 거야. 걔네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너희는 아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경쟁은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다고 끝나지 않아요. 언제 운명이 달라져 죽음을 향해갈지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우정을 나누겠습니까. 잠깐 1950년대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당시 한국 사회의 핵심 정서는 실존주의였어요. 실존주의는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는 것이지요. 이때의 존재는 철저한 단수입니다. 일례로 신문에 활자 하나가 거꾸로 잘못 찍혀 있을 때의 그 비복수성, 예외성을 실존이라고 부를 정도였죠. 전쟁의 폐허 속에 살아남은 젊은이들에게 단독자로서의 실존주의는 참으로 매혹적이었어요.
그러다가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왔고, '나는 반드시 누구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있다'는 연대의 시대로 건너갔지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고독한 단독자'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요. 1950년대로의 회귀인 것이지요. 혼자만의 골짜기에 갇혀서 사는 이들은 타인의 아픔을 보지 않아요. 가령 이라크는 고대 문명이 남아 있는 인류의 보고 아닙니까? 거기에 폭탄이 투여되는 것을 방송에서 보도하면서 '크리스마스이브의 불꽃놀이 같다'는 표현을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말잖아요. 풍경으로만 보는 거예요. 폭탄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 문명의 파괴에 대해서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는 무감각한 개체가 되어가는 겁니다.
●지금 시대가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힘든 현실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요
-이게 우리가 지적하고 규탄하고 그런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실컷 이렇게 살아보는 거지요. 나는 어떤 걸 치를 때는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이 시대를 견뎌내고 죽으면 그 다음에 누군가는 원하는 시대를 살 수도 있는 것이죠.
아마도 21세기 중반쯤 가면 지구의 문화 혁명이 무섭게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는 인류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위한 공공의 가치를 찾을 거예요. 인류학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지독한 이기주의에 갇혀 있지만 '아, 이게 아니구나'하면서 무서운 폭발력으로 공동체를 지향하는 날이 올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좀 놔두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든 당대에서 최상의 완벽한 해답을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긴 과정 속에서 한 점을 찍고 있을 뿐이죠. 우주의 티끌로 잠깐 있다가 가는 것이지요.
●삶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아닙니다. 인생을 그렇게 의미 없이 끝내서는 안 되겠지요. 앞서 한 내 말은 시대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거나 서로를 질책하지 말라는 말이지, 반성과 노력 없이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인간화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특히 지구 전체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변하고 있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살펴봐야 해요. 인간을 제외한 생태계는 배고플 때 먹을 뿐 그것의 양을 확대해서 소유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소유를 하고 자기 욕망을 연장시키고 확대를 합니다. 바로 이 탐욕이 비인간화의 원인입니다. 미국의 부, 일본의 부, 재벌의 부가 차곡차곡 쌓여 가면 뭐 합니까? 다른 한 편에서는 피 흘리는 빈국과 빈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학생들에게도 자주 "너는 앞으로 너 혼자 잘살지 말고 네가 밀치고 온 사람들에게 보상해야 돼. 타자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해."라고 말합니다.
절망을 딛지 않고서는 희망의 구체성이 없어요. 희망은 혼자 무지개처럼 떠 있는 게 아니고 절망을 토대로 생기는 거죠. 삶이 죽음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힘, 이상, 꿈, 희망은 반대쪽의 가장 무서운 어둠 속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걸 통절하게 느끼며 살아가야 해요.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d tleosms 감성 조치 메말라버린 걸까요
-지난 몇 천 년 동안은 시의 시대였지요. 그런데 이제 시가 지겨워진 때가 온 거예요. 그래서나 같은 사람이 시인을 하고 있는 지금은 '시인이라는 것들은 어디 변방에 가서 혼자 울든지 말든지 해라', 이런 시대이지요. 그렇다고 시가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조금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1960년대 하수도 시설이 온전치 않았던 시절, 분뇨차가 와서 똥을 빨아들일 때 베토벤의 월광곡을 틀었어요. 그 냄새 나는 속에서 말이지요. 이게 베토벤을 모독하는 걸까요? 오히려 베토벤인지뭔지 아무것도 모르던 서민들이 클래식을 들을 수 있었던 기회였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참혹한 과정을 겪으며 베토벤이 대중화됐어요. 시도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시가 온갖 문화 형식 속에 들어있습니다. 광고 한 구절구절이 시 아닙니까? 김소월의 시도 어디 대중가요에 쓰이고 그러지요. 이렇게 가도 돼요. 요즘 사람들이 시를 자주 안 읽는다고 해서 시가 죽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옛날 우리 시의 조상들이 시를 많이 누렸으니까, 이제쯤은나 같은 시인들이 조금은 쓸쓸하게 구석에서 혼자 시를 읊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희망의 메시지 부탁드립니다
중동 지역에서 6만 년 전의 화석이 나온 적이 있어요. 조사를 해 보니 소년의 유골이었어요. 그런데 그 유골 이마 옆에 히아신스 꽃이 있는 거예요. 6만 년 전의 엄마는 지금의 엄마가 아니었지요. 거의 동물 비슷한 존재였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자식이 죽었을 때 그 옆에 히아신스 꽃 하나를 꺾어 놓아두고는 슬퍼하면서 '지금보다 더 좋은 데로 가거라.' 염원했을 겁니다. 이것 자체가 시에요. 그 마음의 기껏 일부를 활자화한 것이 오늘의 시랍니다. 시는 인간 누구에게나 다 있는 거예요. 자기 안에 이토록 아름다운 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군산북중학교 교사 시절
한국전쟁 때 고은은 군산항 부두에서 검수원을 했다. 이 시절 고은은 부두에 정박해 둔 배와 부두 사이에 나 있는 틈으로 몸을 던져 최초의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일본인 항해사에 의해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1951년) 한편, 고은은 같은 해 군산북중학교 국어 및 미술교사를 하기도 했다. 중학교 졸업을 하지 못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교사를 할 수 있었다. (1951년)
승려 시절
고은이 승려 생활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10년 후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을 때, 그가 단식 수행하고 있던 산속까지 혁명의 영향이 미쳤다. 서울로 올라온 고은은 불교신문을 만들게 되었는데 남는 자투리 지면에 시를 싣곤 했다. 그러다 승려 생활 10년째가 되던 1962년 환속 선언을 했다
결혼 그리고 아내
고은과 아내 이상화와의 결혼식은 1983년 수유리 안병무 박사 집 앞마당에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비밀리에 거행됐다. 주례는 함석헌 선생, 사회는 리영희 교수, 축시는 ‘고은이 장가간다네’를 쓴 문익환과 고은의 운명적 친구인 백낙청이 맡았다. 고은은 아내 이상화를 영감의 원천, 영혼의 발상지, 종교, 여신(女神)이라고 주저없이 칭한다
딸 차령이가 어렸을 적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고은. 그는 이제 가족을 ‘사회의 가장 신성한 단위’라고 정의한다. "내가 쓴 1행짜리 짧은 시가 있어요. '절하고 싶다 저녁연기 자욱한 먼 마을'. 집들마다 밥하는 연기가 피어오를 때의 그 경건함 앞에서는 진심으로 절하고 싶어지지요.“
고은의 서재
책 속에 파묻혀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이 안 가지만, 고은의 서재에는 책상이 세 개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책상마다 쓰임이 다르다. [만인보]는 이 책상에서 쓴 책, [나는 격류였다]는 저 책상에서 쓴 책, 이런 식이다. 고은은 많을 때는 하루에 60편의 시도 쓴다.
시인 고은 “늘 언어에 배고프다 … 술없이 취할수 있는 게 문학의 맛 아닌가”
[나재필의 feel]'시대의 대문호' 고은 시인
▲ 고은 시인은 23년에 걸쳐 세계문학사상 최대의 기획이라고 찬사를 듣는 연작시집 만인보 30권 4001편을 썼다. 그는 찾고 또 찾아도 늘 언어에 배고프다고 말했다.
벼린 펜끝, 벼린 가슴이 시(詩)에 녹는다. 그 문자의 묵직함은 단연코 세상을 울린다. 그리고 묻는다. 왜 고은 시인이 한국문단을 넘어 지구촌의 문웅(文雄)이어야만 하는지를….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인 고은(83) 시인과의 인터뷰는 바람 좋은 날, 김완하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와의 선문답(禪問答) 중 이뤄졌다. 김 교수는 고은 시인의 수제자다. 고은 시인은 경기도 수원시 광교산 자락에 산다. 광교산은 고려 고승 진각국사 혜심과 현오국사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다. 30년간 안성에 둥지를 틀고 현대문학사에 거대 족적(足跡)을 남긴 후 2년 전 수원으로 이주했다.
-시인이 된 계기는.
"한국전쟁의 참혹상에 충격을 받고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10년 넘게 지독한 불면증을 앓았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던 17살, 무작정 한 스님을 따라나섰고 이후 10여년을 불교에 귀의했다.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조지훈 선생의 천거와 미당 선생의 단회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인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됐을까.
"아마도 장례 지내는 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난) 무덤을 참 좋아했다. 고향 군산부터 통영, 제주도 어디든 공동묘지는 단골집이었다. 제주도 사라봉 무덤은 그 숫자까지 꿰고 있다. 새 무덤이 오면 톡톡 다독거려주고 무덤 옆에 누워 잤다. 그냥 편안했다. 사람들이 귀신 들렸다고 했을 정도다."
-시인에게서 넘치는 흥(興)은 도대체 어디서 발원하는 것인가.
"난 술로도 취하지만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다. 땅이 춤을 추는 걸 형상화한 한자가 바로 흥(興)이다. 나 또한 이 땅,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일부로 구성된 존재인데 자연히 지신의 취기가 나에게 올라와서 술을 안마셔도 취흥이 난다."
그는 이를 두고 오르가슴(高揚) 상태라고 했다. 수많은 시들이 유성우처럼 쏟아져 뜬눈으로 그 시들을 받아들인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솔직히) 술꾼인가.
"술꾼인 것은 사실이다. 1983년 감옥에서 나왔을 때 너무 힘들어 술을 다시 시작했다. 폭음을 시작하니 몸이 망가지고 주변 사람들도 떨어져 나가더라. 이때 리영희 교수(행동하는 지식인 표상)와 자주 어울려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곯아 떨어져 자다보니 옆에 리 교수도 있었다. 의형제까지 맺었다. 하하."
-아마도 10월이 되면 가장 난감한 예술인 중 한명이 되곤 한다. (사실) 노벨상 거론이 지겹거나 섭섭하지 않은가.
“난 가만히 있는데, 10년 넘게 세상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한다. 언론에서는 불발, 고배, 아쉬움 등의 기사가 실린다. 하지만 노벨상에 대한 내 소회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시로 쓴 민족의 호적부, 만인보(萬人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 연작시집은 20세기 세계문학사상 최대의 기획이란 찬사를 듣는다. 쓰게 된 사연이 있나.
“1980년 대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서 지냈던 경험이 만인보의 씨앗이다. 그 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밖에 나가면 세상사람 하나하나의 시를 써야겠다고 구상했다. 유년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만났던 인간 군상들을 연작으로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30권 4001편이 잉태됐다."
-무려 23년 만에 탈고했다. 느낌이 어땠나.
"아, 끝냈구나 싶어 몸이 가벼웠다. 하지만 세상과 약속한 만인보는 끝났어도 마음 속 만인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옥살이할 때 국어사전을 달달 외웠다는 게 사실인가.
"맞다. 창문도 없는 특별감방엔 담요와 오줌통, 천장의 전구만 있었다. 숨 막히는 큰 관(棺) 같았다. 12일간 단식했더니 일반실로 옮겨줬다. 이때 국어사전을 공부할 자유를 얻었다. 이후 사전을 한 장씩 씹어 먹으며 외웠다. 달달 외우고 나니 언어력이 생겼다. 만인보 언어의 바탕이다. 나는 언어의 거지다. 공기에 들어 있는 새로운 언어를 끊임없이 찾는다. 찾고 또 찾아도 늘 언어에 배고프다. 시인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백지 아닌가."
시인은 1980년 5·18 광주항쟁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이후 갖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1982년에야 8·15 특사로 사면된다. ☞ 피부질환 치료 전후사진 보기
-일기가 재밌다. 1200원 꾸고 1만원 빌려주고 하는 소소한 일상에, 성욕까지도 언급된다.
"30대 중반(1970년대)부터 일기를 써왔다. 문단 초년시절 우연히 김구용 선생의 일기장을 보게 됐다. 덧없는 하루하루를 뭐 하러 시시하게 적고 있느냐고 핀잔을 줬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먼지의 기록이나 시간의 파편들이 제법 의미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에 갔을 때 말고는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일기는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서도, 누구 몰래인 것도 아니다. 삶의 자동서술일 뿐이다.”
-한번 펜을 들면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문이지만) 시란 무엇인가.
“으음 글쎄, 시(詩)란 시 그 자체다. 시의 형태가 중요한 게 아니다. 시어들은 낱낱의 문자가 아닌 살아있는 생물이다. 시의 마음이 삶과 죽음을 동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시로 태어나서 죽을 때도 시로 마감한다.”
시인은 지난 2000년 6월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는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행했다. 당시 만찬석상에서 시인은 '대동강 앞에서'라는 시를 낭독했다. 그는 “당시의 감격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남북 간 긴밀한 교류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며 “당장 내일 모레 통일이 되지는 않겠지만 통일은 우리 민족의 염원이기에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은 민중과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실천하는 양심과 지성의 대명사다.
-인문학 실종시대다.
"안타깝다. 인문(人文)은 우리의 근원을 알아가고 어디로 가야할지 깨닫는 과정이다. 시집간 아낙네가 친정 갈 때의 기쁨처럼. 이 시대는 인문학이 필요 없는 것처럼 여기지만 이럴 때일수록 책을 통해 인문의 근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안성 장미골을 떠나게 된 이유는.
“난 80년간 떠돌이로 살았다. 시의 밑바탕이 된 것도 방랑벽이다. 전북 군산(옥구)에서 태어났고 외가(外家)는 충남 서천이다. 옛 고향은 지금 고층아파트가 꽉 들어찼다. 낯선 타향이 돼버린 것이다. 그중 안성은 내 문학의 저변(底邊)을 이룬 곳이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몇몇 지자체들이 자기 지역에 와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권유가 있었다. 특히 수원시가 공을 들였다. 리모델링한 집으로 초청했고, 내가 응했다.”
-문학에서 장소가 중요한가.
“우리는 오랫동안 농경생활의 관성으로 제자리에서 정착생활을 해왔다. 사립 밖이 저승이었다. 그것이 심해지면 지역감정으로 고착되기도 한다. 다산이 20년 가까이 귀양살이하면서 커다란 세계를 만들었듯이 문학에도 순환의 피를 공급하는, 땅의 피란 게 있다. 괴테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문학을 완성한 곳은 바이마르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서부 캘리포니아 사람인데 뉴잉글랜드 대표시인으로 각인된 사람이다. 역시 미국 시인 로빈슨 제퍼슨은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연인과 함께 가서 살아 캘리포니아 시인으로 알려졌다. 장소는 향기를 머금고, 그 향기는 족적을 남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그 꽃'이란 시는 절창(絶唱)이다. ☞ 스테로이드연고끊는 확실한방법
"인생이란 무엇인가? 철이 들고 깨닫고 보면 지나온 세월에서 후회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동안 안 보였던 일, 못 보고 스쳐 지나갔던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이 없으면 안 보인다. 마음이 어두우면 안 보인다. 철이 들고 깨달으면 그때부터는 다 보인다. 결국 멈추면 보인다. 바쁜 삶이지만 잠시라도 여유를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라."
시인은 담대했다. 그 담대함 속에는 이미 '노벨문학상'을 타고도 넘칠 따뜻한 시심(詩心)이 그득했다. 봄으로 가는 길목, 겨울이 낮게 숨어 있었다. 충청투데이15. 3.4
천상이 아니라 지옥에 발 디딘 언어가 시(詩)요
나는 영원한 불완전동사
김형수 선생님을 서울대학교에서 뵈니까 느낌이 상당히 새롭습니다.
고 은 나는 사실은 들의 사낸데 어떻게 요즘은 이따금 학교의 사내가 돼 있네.
김형수 제가 1959년생 올해 나이 마흔아홉 살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전 해에 등단하셨습니다. 이후 참으로 긴 시간을 변화무쌍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으니 저희 세대로서는 그 궤적에 대한 가닥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에 어디에 쓰기를 “한국문학사에서 고은이라는 이름은 한국정치사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자만큼 범람했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쏟아 놓은 방대한 텍스트를 개괄하기가 이만 저만 어려운 일이 아닌 까닭입니다. 우선, 과거의 윤곽을 대충 잡아 가면서 다음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 은 나는 1958년에 우리나라 시단에 처녀작을 보이고 시인이라는 공인이 된 것이죠. 지금까지 50년 세월을 보냈는데, 이 50년은 또 생각해 보면 근대시 100년의 절반이죠. 절반 이전의 선배들의 시세계를 등에 지고 그리고 그 절반을 살아 온 셈이죠. 공교롭게도 김형이 말씀하신 것처럼 1959년생이라니까 생각이 나는데, 1958년에 러시아의, 그때는 소비에트지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세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갖게 되는 명예로운 해였죠. 그러나 그 사람은 그 당시 체제의 그늘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세울 처지가 아니었고. 그래서 우리는 시인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드러내는 것보다 드러내지 못할 때 더 강렬한 언어라는 것을 처음 알았죠. 그게 바로 1958년입니다. 그 시절 『닥터 지바고』니 이런 것 떠들고 이럴 때 처음 문단에 나왔는데. 나는 사실은 과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때, 이전에 내가 만났던 체험도 없었고 기억할 만한 놀라운 시세계를 만난 다음도 아니고 무작정 시인이 됐어요. 말하자면 엄마도 아빠도 없이 나온 고아였죠, 고아로서의 시인인데, 때마침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에서 얼마 안 됩니다.
1953년에 휴전이 됐고, 그 여파는 10년 이상 갔는데 그 폐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서, 그 벽돌 조각이 있고 억새풀 돋아 있고 도시는 다 없어져 버렸고 산은 초토가 되어서 낮아지고 그럴 땐데, 인간의 마음 자체도 폐허가 들어 있죠, 외부의 폐허와 내부의 폐허가 함께 있는 그런 데서 어떻게 나 같은 게 살아남아서 숨을 쉰 것이죠. 그 숨, 폐허에서의 호흡, 이게 아마 내 시의 출발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런 점에서 나는 참 과거가 없네. 음. 50년 전에 그때 기껏해야 읽은 게 고향에서 신석정의 『촛불』인가 원두막에서 보다가 말고. 나는 서당에 다녔으니까 한자를 배웠고 『시경』 몇 줄 알았는데, 그건 문학이 아니라 문자를 배운 것이고. 이렇게 하다가 무지몽매한 상태로 내 시의 운명을 시작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 그런 점에서, 우주를 우리가 이해할 때 카오스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참 작은 카오스에서 태어난, 어디로 걸어갈지 모르는 막막한 아이였죠.
김형수 제가 선생님의 문학을 통해 평소에 느끼던 두 가지를 지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과거가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카오스를 산다’는 것인데, 이 두 대목은 저한테 굉장히 깊이 박혀 있거든요. 제가 더러 평론가적 기질을 발휘하여 선생님의 어떤 지점을 기념비화시키려고 하면 그때마다 선생님은 쐐기를 박으신 것 같아요. “나는 어떤 곳에도 기념비로 남고 싶지 않다. 가차 없이 떠나겠다.” 그런 점에서 유목민적 영혼을 가지신 분이 아닌가…….
고 은 그래요?
김형수 시에서도 언제나 화자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아니라 훌훌 털고 이동해 다니는 자거든요. 아주 젊은 시기나 지금이나 공통되게 그런 행인의 정신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고 은 참 아픈 데를 침이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말씀입니다. 나 어렸을 때 그림을 그렸는데 늘 기차, 타 보지 않은 기차, 그때는 증기기관이라 하얀 연기가 나오고 칙칙폭폭하는데, 기차를 그렸고, 또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를 그리고, 아니면 철새가 여기서 이쪽으로 가는 새를 그리고……. 아버지가 한번은 “너는 왜 떠나는 것만 그리느냐. 집을 한번 그려 봐라.” 그래서 ‘아! 그렇구나. 집을 한 번도 못 그렸구나’ 하고 집을 그려 봤어요. 집이라고 초가삼간, 부엌이 있고 방 두 칸 있고 울타리 좀 있고 뒤에 조각달 하나 있고 나무 하나 있는 이런 것이겠지요. 기억인데, 그런 것 몇 번 그리다가는 잊어 버리고 다시 기차를 그리고, 배 그리고, 새 그리고, 어디를 떠나는 것을 그리게 되대요. 이거는 내 생래적인 나그네성, 지금 얘기하는, 요새말로 하면, 유목개념 같은 것이 여기에 적용될지 어쩔지 모르겠지만. 그것 말고 근원을 생각해 보면 인류, 인간 자체가 사실은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입니다. 적어도 우리 할아버지는 아프리카에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직립인간으로 두 발로 처음 섰습니다.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 그게 우리 할아버지 아닙니까. 그 할아버지가 서 가지고 거기서 살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니까 먹을 것을 찾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걸어가고 떠나가고 이동한 것 아닙니까. 손님이 된 것이죠. 그게 나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바다 건너서 가고, 인도까지 가고, 유럽 가고, 슈메르 이렇게 해서 중앙아시아에서 시베리아 건너서 북부여, 동부여 된 것 아닙니까. 남쪽에서도 기어 올라가서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필리핀이나 대만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이 섞여서 한반도에서 만나서…… 그런 그들의 손자 아닙니까, 내가. 나는 나그네의 피요, 나 자신이 떠돌이고 집시고 유목민의 아주 머나먼 원정으로서의 인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 천 몇백 년, 2천 년이나 3천 년 농업정착민으로 살 때 밑으로 가라앉았겠죠. 때때로 보름달이 떠올 때라든지 바람이 불 때라든지 폭풍이 불 때 눈보라가 칠 때는 옛날 근원으로서의 움직임, 동작의 욕망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나그네로서. 그런 것이 여전히 소멸하지 않고 계승돼서 내 핏줄에도 맺혀진 것으로 해서 내가 유목민적인 세계에서 아직도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는 나그네의 운명이 시에 그려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형수 지금 말씀하시는 바들이 선생님의 시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들입니다. 언제나 떠돌아다니는, 멈추지 않는, 성을 쌓지 않는 영혼을 가졌다는 것, 또 조금 전에 ‘카오스’라고 말씀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저희들이 1980년대를 거치면서 한때 상당히 등한시하기도 했던 문제인데, 적어도 한국 시사(詩史)에서 ‘모호함에 가득 찬 직관과 영감의 영토’를 처음 만들어낸 것이 선생님의 「문의 마을에 가서」 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비유를 빌린다면, 옛날에 언어와 언어들이 갈라지기 이전에 생명체들이 내던 소리, 숲에 천둥 번개가 치고 동식물이 우짖고 그러면서 최초의 생명체들이 소통했을 것 아닙니까, 그때 서로의 모국어로 규정되기 이전에 소통되던 언어의 건강성을 시가 고집해야 한다면 그 영역이 선생님 시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 은 그런데 나는, 언어는 물론 내가 한때 좋아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도 있고, 거의 존재를 압도할 만큼 미치게 만들었던 언어이론이겠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근원언어에 늘 닿아 있고 싶죠. 우리가 쓰는 근대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우리가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 이전의, 언어 이전의 그들의 언어, 말하자면 자연언어이겠지만 새소리도 있겠지만 그것과 아주 근접했을 때 인간의 언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그냥 말하는 의태어, 의성어까지도 내포해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언어의 시작, 그것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지금의 언어만을 가지고 살면 이것은 언어가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관계의 텍스트가 돼 버린다, 이것은 나는 싫다, 그래서 나는 근원으로 늘 잇대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과거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었던 과거를 찾고 싶은 허영이 있죠. 그런데 이것이 내 시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 내가 판별할 수는 없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남아 있는 생애 동안 어떻게 시를 통해 구현될지 어렴풋하게나마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김형수 언제나 일관되게 맞춤법의 질서에 구속되지 않는, 문장이나 화법의 체제랄까 제도랄까 하는 것을 계속 무너뜨려 버리는, 말씀으로 하실 때도 그렇고 글로 쓰실 때도 그렇고 그런 점이 아마 가장 뚜렷한 선생님의 독보성이라 봅니다.
고 은 나는 아직 영원한 불완전동사 같아. 나는 완전한 종결성, 이것은 참 어떨 때는 거의 저주스러워요. 예술이나 시를 완성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영원한 미궁으로서의 미완성성, 예술은 시는 미완성으로밖에는 안 되는 것, 그 마지막의 숙명 거기까지 가고 싶어. 그런 것이지. 아! 이것은 완성됐다, 다음의 세계로 완성을 향해서 지향하자는 이런 사무적인 행위는 나는 못 견디겠어.
김형수 말씀 듣는 중에 퍼뜩, 지금 활약 중인 21세기의 시인들, 우리 문단에 새로 출현한 젊은 목청들이 선생님의 왕년이라 할 시절의 감수성에 퍽 가까이 닿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 젊은 친구들에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여쭙고 싶은데, 이제부터 궁금한 몇 가지를 되도록 실감이 닿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단에 갓 데뷔 하셨을 즈음에 한국시의 기본형이라고 할까 하는 것을 서정주적인 것과 김수영적인 것, 이렇게 나누어볼 수 있을까요?
전후시대, 그 폐허의 동질성
고 은 그 당시에는 살아남은 자들이 기어 올라와서 서울에서 만났죠. 참 좋은 시인들이 빨리 죽어 버렸고, 또 다른 지역으로 가 버렸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어디로 가지 못한 존재이기도 하죠. 살아남은 것의 가치가 아니라 어디로 못 갔다는 가치부정적인 존재이기도 하죠. 거기 간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분들, 그런 것이 모였을 때는 시에 대한 일정한 규정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냥 왔어요. 서로 다 거지가 되어서. 그럴 때 이전의 식민지 때부터 있었던 언어가 있었고, 폐허에서 용출한 언어가 만나서 아주 당연하게 충돌을 했죠. 그게 지금 이야기하면, 좋게 얘기해서 서정주를 얘기하지만, 서정주로 표상이 안 됩니다. 또 거기에 여러 가지 있지 않습니까. 이쪽에 이런 것이 있었는데, 만나면서 둘 다 온전하지 못했죠. 만나서 충돌하면서 얘가 옳고 얘가 그르고 이런 것이 아니라 둘이 옳으면 둘이 옳아 버리고 둘이 그르면 다 글러 버렸어요. 거기서는 규정이 안 되는 것이죠. 이를테면 시의 문학사, 시사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죠. 시작이니까. 폐허에서. 그럴 때 나도 거기에 끼여들었습니다. 나는 육당 최남선을 압니다. 만났으니까. 근대시의 시작 아닙니까. 그리고 춘원 이광수의 부인은 만났죠. 춘원 이광수는 북쪽으로 가서 못 만났고. 나는 근대문학의 시작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 왔어요. 거기에 다 있었습니다. 그런 게. 있다가 세상 떠나기도 하고 정리되기도 하면서 이렇게 왔는데, 그런 것이 막내 같은 아이로서 기웃거려서 근대시 속에서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까 나중에는 터가 잡히죠. 당연히 나는 그때는 서정주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얘기하면. 지금 말씀하시니까. 두 개로 나누어서 이야기할 때. 그러나 나는 육체적으로 먼저 만난 것은 김수영입니다. 내 고향에서 김수영과 함께 만주에서 연극운동을 하던 배우가 있는데 ―김수영도 배우였습니다, 눈도 크고 그러니까― 그 사람 때문에 김수영이가 고향에 왔어. 그때 내 시를 보고 이것은 어떻다고 해 주려고 했는데 고향 선배가 이 사람은 추켜올리지 마라, 추켜올리면 곧 시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혼내 줘라, 그랬는데 혼내지도 않고 날 보고 그냥 떠났습니다. 나중에 김수영이가 나를 만났을 때 그 얘기를 해 줘서 알았죠. 그때 네 물건이 괜찮았는데 나는 너를 칭찬하려고 했는데 못하게 해서 왔다, 술 먹으면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런 다음에 서정주를 만난 겁니다. 서정주 만난 것은 처음에는 내가 몸으로 만나지 않았죠. 그때 나는 승려였으니까. 비구승 대처승,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신문도 창간하고, 불교신문도 할 땐데, 공간을 편집할 줄 모르니까 구멍이 생기면 거기다 무엇을 집어넣어야 하니까, 내가 뭘 생각나는 것을 썼어. 어떤 사람이 보고 누가 썼냐고 그래. 내가 그냥 공간 메우기 위해서 썼다니까 이 사람이 나를 나중에 서정주에게 데리고 간 거야. 작품 몇 개 있냐고. 무조건 나를 끌고 가서 만난 거야.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그 이전에 내 친구가 문학에 밝은 화가가 있었어요. 수채화 하는 화가인데 내가 「폐결핵」이라는 시를 하나 썼는데 걔한테 줬어요. 너 읽어 봐라 하고 줬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걸 가지고 전쟁 직후에 한국시인협회가 처음 창립이 됐을 때 거기다 보냈어. 최초로 창간호에 신인으로 나온 거야. 나와 상관없이 내 친구가 보낸 거야. 조지훈 시인이 시를 본 것이야. 그래서 난 조지훈과 서정주 둘에 의해서 문단에 나온 것이죠. 하지만 내 문학은 처음에는 못 알려질 뻔했습니다. 시집 하나가 책으로 나오려다가 불타서 없어져 버렸어요. 나는 첫 시집이 둘째번 시집입니다. 『피안감성』이라는 게. 그 이전에 뭐라고 했더라……. 아! 『불나비』, 공초 오상순 선생이 서시를 써서 프로메테우스의 불나비 뭐 해서, 오상순 보면 그 시가 있습니다. 그것을 서시로 해서 했는데 인쇄소가 불나서 첫 시집이 다 없어요. 그게 모더니즘입니다, 그때는. 그러고 나서 그것이 끝나니까 말하자면 김수영적인 것이 아니라 서정주적인 것으로 돼 가지고.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형용 지을 수 없는 그런 시대였죠.
김형수 바로 그 시절 이야기입니다. 제가 어디에다 쓰기를, 고은은 서정주와 김수영으로부터, 서로 충돌하는 두 선배로부터 후배로서는 유일하게 동시에 사랑받았지만 서정주의 시에는 근대적 이성이 부족해서, 성찰하는 자아가 부족해서 그 시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또 김수영에게는 이성의 도구, 인식의 도구로서의 언어만 있었지 그 속에 파란과 신명이 들어 있지 않아서 그 역시 폄하했다, 그런 점에서 서정주적인 것, 혹은 김수영적인 것과 뚜렷이 선을 그으면서 출발했다, 이랬는데, 엉터리 진단은 아니었는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고 은 거의 정확합니다. 다만 한 가지 거기에 덧붙일 것은 김수영이 열정 덩어리였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떠올리는, 태양과 같은 열정은 아닌데 월광, 달빛과 같은 열정이 있죠. 그런 것이 김수영에게 있었죠. 그 사람의 언어에는 폭력성이 있지 않습니까. 내던지는 언어들이 많거든요. 곰살궂게 언어 하나 골라서 여기다 집어넣을까 말까, 활자 문선공이 그러하듯이 이런 김춘수처럼 수작하지 않습니다. 김수영은 확 던집니다. 일종의 이백과 같은 스타일인데 나는 그 점에서 김수영을 높이 평가합니다. 시는 편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점에서 교정을 미치게 보고 퇴고를 미치게 하는 방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공을 엄격하게 하는 이런 것은 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시는요, 문법이니 어떤 규율이니 시스템이니 이런 것을 전부 다 불태워 버리는 행위죠. 그게 시거든요. 그런 점에서 나는 김수영의 야만성, 자기가 위선적이면서도 위선을 가장 부정하는 모순, 이런 것을 참 좋아해요. 서정주는 언어를 일부러 아주 각고해서 가져 오지 않습니다. 탁! 가야금 줄에 닿으면 화음이 나와요. 그 무서운 재능이 있죠. 이런 점에서 시는 참 좋죠. 그런데 그게 좋다고 해서 그들에게 나는 예속되고 싶지 않죠. 그래서 나는 둘 다 발길로 차고 싶은. 삼거리 주막 같은 데서 한 잔 먹고 나의 길을 괜히 떠돌았어.
김형수 그 시대의 문학을 ‘전후문학’이라 했지 않습니까? 전후시대, 전후라는 표현이야말로 저희들이 문학수업을 시작할 때 제일 많이 접한 표현인데, 지금 생각해도 궁금하고 신기한 것 중 하나가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유학도 많이 갔다 오고 외국을 늘상 이렇게 국경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살고 있단 말입니다. 당시에는 그러기가 아주 어려웠을 땐데 오히려 당시가 한국문단이 국제 감각을 더 크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유럽하고 동시에 호흡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갖는데요.
고 은 참 좋은 지적을 했고 그때를 긍정적으로 의미부여를 한 것 같은데 이런 점을 얘기할 수 있겠죠. 우리는 식민시대를 이어 온 세대입니다. 식민지 일부를 자기화시킨 삶을 가지고 있고. 그때는 적어도 중국을 갈 수 있었습니다. 북경. 이육사가 북경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이광수의 『무정』이란 소설은 바이칼 호수까지가 무대입니다. 이르쿠츠크. 거기는 실제로 조선공산당의 국제적인 근거지가 된 데 아닙니까. 그렇게 우린 세계를 가지고 있었죠. 대륙을 가서. 물론 태평양을 건너서 미국 간 것은 이승만과 안창호밖에 없었지만. 이렇게 갈 수 있었는데 그런 기억을 가진 사람이 해방돼서 분단돼서 갇혔죠.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고 GI가 와서 헤밍웨이가 오고 이렇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때 우리는 이전의 공간을 허구로서도 가져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 공간이 너무 폐허니까, 서로 죽이고 했으니까. 어디로 가야 하는데 갈 데가 없죠. 그러면 가지 못하는 유럽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향토시인 이철균이라고 있는데 이 사람은 거기서 제가 무슨 파리도 모르는데 ‘아! 지금은 파리에 안개가 끼었겠지’ 하면 그 말에 우리는 아주 녹아들었어. 파리에 그냥 안개가 끼어 있는 것처럼 느꼈어. 파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때죠. 그러면서 들어오는 것이 사르트르였고. 사르트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2차 대전 후에 유럽의 폐허에서 만들어진 싹인데 문학이고 그게 오니까 우리 폐허의 동질성이 생겨 버렸죠. 참 이것은 전혀 낯선 것이지만 우리에게 맞는 정신의 교사 혹은 정신의 위안부라고 느꼈죠. 전혀 프랑스가 낯설지 않습니다. 명동에는 ‘세느’라는 다방이 있었고 심지어 청계천을 우리는 ‘세느강’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1980년대로 가면 구역질나는 그런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언어 자체가 내가 살아 있는 세계인의 존재로서 기호가 됐죠. 다 그랬습니다, 그때는. 실제로 현실에서는 각박하게 ‘순자’가 ‘에레나’가 됐잖아요. 패티김이라는 가수도 생겼고. 순자 옥자라는 우리 처녀들 이름이 에레나로 바뀌었어요, 현실에서. 그러니 우리 역시 청계천이 세느강이 된 것이죠. 그런 막막한 자아상실 속에서 자아를 견뎌 왔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네요. 그게 아마 1950년대 1960년대 초반까지의 우리 자화상, 슬프다면 슬프고 살아남기 위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형수 지금 말씀하신 그런 내용들은 누구의 어떤 에세이나 논문에서도 분석되지 않았던 것인데 저는 선생님의 저작물 중에서 『1950년대』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실감을 아주 깊이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전후라고 하는, 저희들이 문학에 관심 갖기 시작하면서 수없이 만났던 그 용어의 정서적 실체는 이것이다 하는 것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제게는 아주 인상 깊은 책인데, 그 책을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끼는 책입니까?
발에 사슬을 찬 인간들이 저벅저벅 걸어 가는 고통이 시
고 은 나는 책을 몇 권 쓰기는 썼죠. 지금 140권이 된다, 146권이 된다 하지만 수량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버트란트 러셀이 너는 얼마나 썼냐고 그러니까 내 저작물은 내 신장만 하다, 가만히 나도 그 얘기를 어디서 보고 나서 보니까 나도 내 신장 정도는 돼요, 전집이. 사실 누락된 것도 많습니다만, 지금은 더 불었겠지만, 그래서 많이 쓴다는 소리를 듣잖습니까. 이게 좋은 얘긴지 나를 짓궂게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고전시대나 낭만주의 시대나 서구의 문학을 보면 스케일이 큽니다. 괴테 같은 경우는 편지 같은 것만 해도 전집이 규모가 크고, 시, 소설, 『파우스트』까지 하면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빅토르 위고도 『레미제라블』 한 권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가 아마 나보다 많은지 조금 적은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많이 쓴 사람이고. 소설도 희곡도 비평, 정치평론하면 엄청나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은 우리는 근대문학을 하면서 간과한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첫째로 식민시대의 물적인 기반이 강고하니까 우선 시인들이 단명합니다. 김소월이 서른둘에 죽었고 윤동주는 서른도 못 채우고 죽었고 이상도 마찬가지고. 쓸 만한 촛불들은 곧 꺼져 버리고 꺼져 버리고 그랬습니다. 실제로 또 오래 산 사람이라고 해도 고월 이장희가 사십 몇 편밖에 안 남았습니다. 20편 남긴 사람, 이런 것으로 근대시를 이어 온 것이 우리 시의 역사 아닙니까. 이런 데 익숙하니까.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옥중에서 남겨 동생이 나중에 한 것, 그것 몇 편 됩니까. 그 시가 아주 냉혹하게 이야기하면 얼마나 유치합니까. 시의 높은 단계까지 못한 시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죽은, 그의 남겨 있는 작은 것이 강력하게 가슴에 와서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기회에,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문학을 시의 세계를 파악할 때 이제까지 익혀진 시인들의 얼굴에 의해서 척도를 만들지 말고 세계 문학의 난바다에 떠 있는 이 시들의 풍경을 자기화시켜야 되겠다는 점에서 나는 한국의 근대 시사를 거부하죠. 그 점에서는.
김형수 『1950년대』를 읽으면서 비극을 인식하는 능력의 부족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는 장면을 봤습니다.
고 은 지금도 일관된 생각이에요. 우리 문학에 비극정신의 지속적인 결핍은 여전히 지적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죠. 누군가와 술 먹고 이야기하지만 시인에게는 불운이 있어야 합니다. 불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런 방은 불운이 아니죠. 세속적인 행복 속에 잠겨 버린 것인데 이건 시인의 태도가 아니죠. 두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시는 시인의 운명을 저주한다고. 근대언어지만 풀이하면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가 쓴 시는 그 시인을 저주하고 시인의 운명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시인에게 끊임없이 비극을 요구하는 그런 작품일 거란 말이죠. 그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고. 내가 『시경』 세계나 이런 것보다 『초사』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황하의 시경’보다 양자강의 옛날 초나라 ‘굴원의 시사’를 좋아하는 이유가, 비극이 담겨 있는 탓입니다. 『시경』은 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도 있지만 비극이 없습니다. 나는 『초사』 쪽을 좋아하죠. 고대 그리스의 비극정신은 그것이 서구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완충지대에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동양에서 가져 와야 한다고 생각하죠. 나는 그래서 비극정신이야말로 시의 고향이라고 늘 생각하네요. 그런 점에서 나는 베토벤을 좋아하고, 모차르트의 천상의 기가 막힌 것보다 지옥에 발 디딘 베토벤의 인간의 언어가 더 좋은 것이죠. 그렇다고 모차르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 하늘의 유치원 같아. 나는 거기 말고 발에 사슬이 잠겨 있는 인간들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고통, 거기에 연관되는 정신으로 시 써야 한다는 것인데. 아! 모르겠어.
김형수 여쭙기가 조금 그렇기는 한데, 좀전에 이 대담을 시작할 때 좌석 정돈을 하는데 이쪽 면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귀 때문이시죠? 예전에 제가 청년위원장 시절에 작가회의에서 일하다가 선생님께 말씀 올릴 때 가끔씩 느낀 건데, 귀를 다치셨지 않습니까? 제가 어디서, 귀를 한 번 다치신 이후에 1980년에 또 잡혀 들어가 고생한 이야기를 읽었어요. 캄캄한 먹방에서 많이 고문을 당하고 어둠 속에 던져졌는데, 거기에서 선생님은 먹방의 절망 속에서 ‘기억이 나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세계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신성하다는 것을 신봉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만인보』를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어느 구절을 읽고 가슴에 아주 깊이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만인보’라는 어휘는 우리 사회에서 고유명사처럼 선생님 시 말고도 여러 곳에서 씁니다.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무슨 만인보라고 해서 고유명사화가 되다시피 했는데, 바로 그것을 생각하게 된 이야기, 왜 만인보를 시작하고 만인보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이런 말씀 듣고 싶습니다.
고 은 아까 귀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은 귀에 두 개의 사연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후세대로 살아남았을 때 난 이 세상의 소리가 다 듣기 싫었어. 나는 죽음을 많이 봤어요. 얘가 얘를 죽이고 얘가 얘를 죽이고 이런 것을 많이 보고 그 송장을 내가 수습하고 그랬는데 그때 인간의 소리, 어떤 풍경 이런 게 정말 싫었어. 그래서 청산가리를 귀에 집어넣었어. 내가 이 세상 소리는 새소리도 싫었어. 도랑물 흘러가는 소리도 징그럽게 싫었어. 청산가리를 집어넣었는데 한쪽을 집어넣고 이쪽을 집어넣으니까 본능이 움직였어. 뜨겁고 아프니까. 이쪽은 고막은 안 건드리고 흘러나왔어. 흘러서 여기만 태웠어. 여기는 넣은 게 고막이 녹아 버렸어. 그게 더 들어갔으면 청신경이 죽고, 청신경이 죽으면 목숨을 잃는 것이죠. 본능적으로 이렇게 하니까 고막만 녹이고 나온 거야. 여기가 시커멓지. 흉터가 오래갔죠. 지금은 없어졌는데, 하나의 귀로 살아남았는데 다시 청산가리를 집어 넣을 용기는 없어요. 자살미수도 그런 건데, 한번 하면 이어지지 않아. 의지는 늘 단절돼. 지속이 안 돼. 의지는 순간이고 섬광이고 그래요. 그러고 있다가 나중에 1979년에 카터 방한 반대 데모를 내가 주동했어요. 안국동에 사는 윤보선도 내가 강제로 데려오고. 1979년이니까 저항도 지쳐 있었어요. 안 하려고 하는 것을 욕해서 오게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잡혀갔는데 조사할 때 조사에 응하지 않는 불복종 운동을 했어요. 말을 안 하니까 패는 것이죠. 말 잘하는 게 함석헌 선생이야. 다 이야기해 줘. 참 순둥이들이야. 우리 문익환 목사도 조사받을 때 다 얘기해 줘. 미주알고주알. 장충동에서 미리 안 한 이야기도, 하려고 한 것까지 다 해 줘. 그래서 내란음모가 성립된 거야. 그렇게 이뻐. 우리가 다 그런 형인데 나는 그때 거부한 거야. 아이! 이 새끼들 안 돼. 얘기 안 하겠다고. 그때는 폭력이 와서 여기가 깨진 거예요. 그 다음에 YH사건으로 또 들어갔죠. 그래서 백기완 씨가 고발하라고. 그런데 그때는 고발 이런 의미가 없을 때야. 들어가서 멀리 들리던 것이 완전히 파열이 돼서 안 들렸어요. 그러다가 박정희가 죽고 나서 나와서 수술한 것이 내 피부로 만든 인조고막이지. 이걸로 지금 유지하는 거야. 그 얘기는 그렇고. 아까 무슨 이야기 하다가?
김형수 귀에 얽힌 이야기를 하셨으니 이제 『만인보』 이야기로 넘어가시면 됩니다.
고 은 그러고 육군교도소에 가서도 치료를 받았어요. 하나 남은 것을. 이쪽은 놓아두면 죽으니까 이쪽은 인조고막을 다시 했어요. 감옥에 있을 때. 나는 생명의 은인이 많습니다. 갚을 수가 없는 은혜인데…… 그럴 때 육군교도소에 들어가는데 보통 형무소 감옥처럼 양쪽에 방이 있는 게 아니고 미로입니다. 특수감방인데. 여기서 죽어도 모르고 외쳐도 몰라. 메아리가 나오는 덴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김재규 정보부장이 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처형된 그 방이에요. 문익환 목사는 그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방에 있고 그랬는데. 그 방이 작은 방이죠. 한 평반 정도 되는 방인데 창이 없습니다. 철장은 그래도 쇠로 된 창이 있는데 이거는 무창입니다. 30촉짜리가 꺼지면 사진을 현상할 수 있는 암실 같은 곳인데 입관된 시체 같은 느낌이 들어요. 숨 막혀요. 자! 내가 어떻게 여기서 사나. 이미 나 떠나보낼 때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너는 죽어 했으니까, 몇 놈은 죽는지 알고 있고. 아 이렇게 죽는구나! 죽을 때 마지막 몸짓까지 미리 예상을 했어. 껄껄 웃고 죽을까, 민주주의 만세 부르고 죽을까. 뭐 할까. 그러다가 아무 표정 없이 죽겠다는 결론까지 내렸어. 왜냐하면 껄껄 웃고 죽으면 신화가 어떻게든 전해지겠지. 만세 부르면 그것도 있겠고. 그런데 그런 것도 좀 거짓 되는 느낌이 들고 해서 그냥 가만히 죽겠다 이렇게까지 결론을 낼 정도로 살고 있었는데, 그래도 생명이니까 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고 아! 내가 살아 나가면 뭘 해야겠다고 하니까 그 동안 살아온 것,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해서 후회가 엄습해. 별의별 것이 집중적으로 악마처럼 나를 괴롭혀. 이런 것을 내가 어떻게 문학으로 승화할 수 있을까. 살아 나가면 이런 것을 해야겠다는 것이 몇 가지 꼽아졌는데 아직 다 못했습니다. 『백두산』하고 『만인보』인데 그때는 그런 것을 생각만 해도 그 자체가 힘이 돼요. 존재의 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실 기억은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죠. 20미터 짜리가 기억에서는 수백미터 짜리로 잘못돼 있잖습니까. 그렇지만 불확실하지만 기억에 내 힘이 생겼어요. 그래서 나는 아! 나에게도 과거가 있구나. 과거의 힘에 의해서 현재의 힘이 만들어지는구나, 위안을 받아가면서 고향사람, 떠돌 때 만났던 사람이 하나하나 나타나더라고. 나는 그 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에서 죽을 때 처형 직전 5분 동안에 지나온 생애가 다 집약됐다고 하는 것을 어디서 읽어 봤거든.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때 아! 얘도 그랬겠구나 하는 것이 느껴지더라고. 그런데 이것을 나중에는 시간이 있으니까 형상화한다는 생각이 생겨. 기억이 희미했다가 기억을 재생시켜서 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오는 게 『만인보』의 시작이죠. 그때는 죽고 싶지 않더라고. 죽는 모양, 어떻게 죽어야겠다는 것도 다 버리고 살고 싶어. 그러면서 군사재판 받고 있다가 국내에서 석방운동해서 기어 나왔지. 그래서 『만인보』 썼는데, 모르겠어, 네 권 남았는데 2008년 2~3월에 끝내려고 합니다. 일단 30권으로.
위악(僞惡)으로 위선을 깨뜨리다
김형수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이제 1980년대 문학이 펼쳐지는데, 제 기억 속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는 일이 미국의 긴즈버그 시인이 한국에 왔을 때 낭송하시던 모습입니다. 저는 두 분의 움직임이 아주 섬세한 동작까지 다 생각납니다. 국제적인 교분이랄까, 선생님이 외국 시인하고 만나서 문학행사를 하신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까?
고 은 그것이 처음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여권이 없어서 못 나가니까. 사실, 긴즈버그는 우리와 상관없이 다른 데 왔습니다. 이 사람이 전두환 정부에서 만든 얘들하고 놀아 보니까 어쩐지 냄새 날 것 아닙니까. 우리한테 수소문해서 왔어. 그래서 만나게 된 것이지. 창비에서 둘이 시 낭송회를 만든 것이지. 아! 여기다 했는데 우리가 너무 전투적이니까 위화감이 됐죠. 그 이후로 긴즈버그가 날 좀 좋아해서 미국 시단에 소개하고 하니까, 그 친구인 게리 스나이더가 서부에 있고, 긴즈버그는 뉴욕에 있으니까, 서부에 있는 스나이더에게 연결해서 하고. 그렇게 되니까 로버트 하스가 날 이렇게 하고 해서 그들이 내 세계 시단의 창이 된 것이죠. 긴즈버그는 내 영어판 시집의 서문을 쓰고 바로 죽었어요. 나는 미 8군 방송에서 죽은 것을 알고. 긴즈버그는 현대시사에서 ‘들의 사나이’죠. 전통의 오소독스는 거절하고 늘 들판에 있었던 사람이죠. 미국 비트의 제1인자고, 샌프란시스코 사는 로렌스 퍼링게티와 하고 잭 케루악, 스나이더 다 이렇게 해서 하는데 지금도 현존하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나는 비트 제너레이션과 육체화됐어요. 내가 나이가 많으면 형이고 내가 나이가 어리면 동생이고, 이렇게 돼버렸죠. 우리는 스나이더도 나와 형제 시인이라고 하고, 자기 시에도 나를 많이 노래하고 그렇죠.
김형수 그 낭송회 때 언어는 잘 몰라도 굉장한 에너지가 전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의도 여성 100인회관에서 행사를 끝내고 한강 가에서 뒤풀이를 할 때 그 바람 속에서 맛보았던 ‘시의 모국어 초월성’에 대한 느낌이 지금도 굉장히 강하게 뇌리에 인화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두 분이 쌍으로 갈기를 휘날리는 것을 목격한 셈인데, 선생님께서도 그 분과 상호 간의 느낌을 주고받으셨는지, 그 야성성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고 은 긴즈버그는 미국의 금기인데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시고, 심지어 라디오에서도 금지시킵니다. 지금은 미국하면 앨런 긴즈버그 그렇게 돼 버렸죠. 죽으면 세상은 합법화시키는 것 같아. 윤이상처럼. 죽고 못 오면 지금 아무나 이야기하고 예술제까지 하지 않습니까.
김형수 죽고 나면 위협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살아남은 이들이 정당한 평가를 시작하는 것 같아요.
고 은 그뿐이 아니라 죽음은 또 하나의 삶이야. 죽은 다음의 명예가 진정한 명예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돼요. 살아서 붙어 있는 명예라고 하는 것은 속절없는 것이고. 죽은 뒤에 이름 좀 기억했다가 몇 십 년 지나면 없어지고 소멸돼야지. 그래서 다음에 명예도 계속 와야 하고.
김형수 상당히 위악적인 몸짓과 언행으로 위선적인 교양과 매너, 체제를 뭉개고 깨뜨리려 하는 두 분이…….
고 은 사실은 김수영도 그렇습니다. 일부러 ‘종삼’ 가고. 그걸 또 과시하고 그렇죠. 다른 사람들은 종삼 숨어서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거는 가지 않고도 갔다고 하고 그러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시인에게는 일정한 위악성이 있어야 해요. 그것 참 좋은 것입니다. 일종의 좋은 의미에서 현학성인데 삶을 아주 올곧게 거짓 없이 좋은 곧은 길만 간다면 거기에는 예술이 없습니다. 어쩐지 거짓과도 만나야 하고 어쩐지 타락과도 자기 몸을 섞어야 되고 이러면서 뭐가 돼요. 그런 점에서 시는 순정을 파괴하는 행위인 것 같아요. 순정, 순결함, 영혼은 순결한데 순결하지 않으면 영혼이 아니죠. 이 순결을 모독하고 내던지고 이러는 일 자체가 시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죠. 사실은 베토벤이 이런 말을 한 것을 봤는데요, 두 개념이 따로 분리되면 음악이 아니다. 이를테면 제1악장이 끝나면 바로 제2악장인 것이지 제1악장과 제2악장은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식이겠죠. 그런 얘기를 한 것을 보면 우리 언어는 어디 가서 매듭이 있고 새로운 매듭이 있고 이러면 재미가 없을지 몰라.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이 언어야. 진주 남강에 등, 유등축제에서 가듯이, 삼천포 어디 가서 가 버리듯이, 파도에 파묻혀 버리듯이.
김형수 선생님, 사실 저는 이 자리에 오면서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방향 하나만 정해 놓고 아무 준비도 안 했습니다. 그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방향이란 최근 젊은 작가들이 움직이는 색다른 활력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경청하는 것인데요, 요즘 젊은 시인들은 저희들 때보다는 많이 자유롭습니다. 저희들은 1980년대의 사변들 속에 꽁꽁 묶여 있어서 문학사 안에서 숨쉴 겨를이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가파른 길을 통과하려면 신발도 묶어야 하고, 그렇게 한 달음에 통과해 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젊은 시인들은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고 은 지금이 더 어려울 것 같아요. 갇혀 있을 때는 내 머리를 부딪쳐 버릴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부딪칠 벽이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더 순 무소속이야. 무소속처럼 막막한 것이 없거든요. 이데올로기도 없죠. 뭔가 새로 자기가 설정한 꿈의 도식도 안 만들어지죠. 순전히 자기 내면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잖아요. 내면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무궁무진하지 않습니다. 무궁무진하려면 내면을 외면화시킬 수 있는데 외면화 못 시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시인들이 우리보다 결코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고. 나는 우리가 상상력을 많이 이야기 하는데 1990년대 이후 상상력이라는 말이 트렌드가 돼 버렸는데 나는 의심스러워요. 이렇게 지껄이는 개념으로서 상상력이라는 것이 무책임하게 귀신처럼 떠도는가. 상상력이라는 게 무서운 이야기인데. 자기 이기주의를 만드는 장치로서 상상력이라면 이런 것은 가차 없이 내버려야겠다. 그리고 타인의 심장소리까지 기어 들어가지 못하는 상상력, 사회의 어둠이나 꿈까지 닿아 있지 못한 상상력, 이런 것 가지고 어떻게 문학을 하는가. 나는 도저히 실천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데까지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력한 불만이 섞여 있는 과제, 이런 게 나는 지금의 젊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비춰 주는 경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행복한가. 나는 우리가 1970년대, 1980년대는 이른바 거대 명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얘기하면 옹졸하지만 민족이라는 것도 큰 것이었고 거기에 내 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고결한 가치였고, 또 자유 해방 또 나중에는 분단을 없애는 통일이 거대한 것이었는데, 지금 그런 이야기 하면 진부하고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무궁무진한 세계, 우주를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죠. 그때의 거대 명제가 오늘날 없고 지금 미시적인 개체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을 개탄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렇다. 1970, 80년대에 있었던 거대 명제는 오늘의 미시 명제를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지금의 사람들이 갖는 자기들의 여러 가지의 정서나 사색이나 번민, 고민을 그 전보다 왜소해졌다고 얘기하지 않고 바로 옛날에 있었던 거의 호황하기까지 했던 실현될 수 없었던 허황한 무지개가 있었던 것은 이 작은 세포들을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그 거대와 미시는 하나다, 연결하고 싶어. 옛날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 개탄하지 않고, 바로 이런 자잘한 풍경을 위해서 그때는 커다란 그림이 불완전하지만 그려졌다, 이렇게 그냥 이야기해서 연속시키고 싶은 것이죠. 과연 지금의 현행의 시 세계가 과연 이전의 그런 것을 재해석하고 있는가, 현재화시키고 있는가는 모르겠습니다. 별도의 문제인데, 어쨌든 나는 지금의 풍경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놀다가 견딜 수 없으면 돌이켜서 다른 것을 지향하겠죠. 그래서 나는 자연의 흐름에 맡겨둔다고 생각해요, 문학사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다 하나 덧붙일 것은 나는 시는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는 것은 근대 개념으로서의 문학을 다 아우르는 것 아닙니까. 무슨 서정시, 서사시, 극시가, 서사시는 소설이 되고 극은 영화가 되고 드라마가 됐는데 나는 이게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그렇게 분화해서 다른 데 살림 차리고 독립해서 장르를 만들어 줬으니까 이제는 떨어 버리고 자기의 원조로 돌아가고 싶어. 시는, 앞으로 시는, 문학의 한 장르가 아니라 문학에서 떨어져 나와서 오히려 철학과 가깝고 세상의 울음과 가깝고 세상의 꿈과 가깝고 이런 것이었으면 좋겠어. 문학의 양식이 아닌 가지만의 어떤 것을 찾고자 해. 나는 강연도 그렇고 그런 이론을 발표하고 싶습니다. 나는 소설 따위 다른 장르하고 놀고 싶지 않아. 그전에 어떤 상가 집에서 김수영이가 소주 먹고 있을 땐데 저쪽에서 소설가들이 섰다 하고 있었는데 소설가 이 새끼들하고 놀지 말아, 시인끼리 놀자 해. 시인끼리 노니까 또 행복하더라고. 그 생각이 나는데, 시는, 내 이론은, 앞으로 문학으로부터 독립시켜서 온전한 자기 모습,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행위로서의 시, 문학 이런 것 아니고, 이야기 이런 것 말고. 나는 그래서 시를 문학에서 독립시켜서 잘 가꾸고 싶어요. 그게 에드워드 사이드가 얘기한 것처럼 후기 생에서 내가 할 일, 시를 시로서 세우고 싶어요, 다른 것에 속해서 하나의 장르가 아니고. 시 자체의 창조적인 존엄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하고 좀 가깝게 하고 싶어요. 철학 쪽에, 문학예술이 아니라.
시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형수 요새 출판 시장에서도 시라는 장르가 상품으로서의 매력이 현저히 줄어서 순전히 소설만으로 출판시장이 구성되고 있는데요.
고 은 출판이라는 것이 부르주아 행위입니다. 부르주아 형식으로서 소설이 독립된 것이니까. 우리가 거기에 가서 구차하게 놀 필요 없어. 김소월처럼. 윤동주 시 읽히는 것도 좋지만 안 읽히는 외딴배도 필요해요. 게토가 필요합니다. 빛은 게토에서 나와요. 타협 불가능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무서운 수령, 심연, 정신의 경계겠죠. 심연에 담겨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고 아무 데나 가서 놀고 그러면 그쪽의 물건이죠. 자기의 본심이 있죠. 인간의 영혼과 정신, 본성은 문학과 또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시를 독립체로, 앞으로 굳이 이론화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요.
김형수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정돈해 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성을 쌓지 않고 길을 뚫는 자의 영혼을 던져서 혼돈의 미광(微光) 속에 직관과 영감이 가득 흐르는 언어를 세상에 내놓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맞이했던 우리들의 세계인데, 선생님의 언어가 우리 사회에 닿는 자리에서 ‘기인적’ ‘기행적’ 혹은 ‘파문’ ‘파계’ 같은 경탄의 언어들이 터져 나오곤 했으니, 선생님의 문학적 궤적은 말 그대로 우리 시대의 ‘윤리적 규범에 대한 거부’를 일상화시키는 과정이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근대의 저항자 랭보를 비유하고픈 욕망이 생기는 걸 어찌할 수 없습니다. 지구 전체를 지배했던 유럽 근대의 교양과 근대적 체제, 사회제도 이런 것과의 전면충돌을 서슴지 않으며, 기독교적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만들어낸 거대한 체제를 ‘신성모독’적으로 가로질러 버린 랭보가 그러면서 일으켰던 마찰음을 들려 주었던 것처럼 선생님께서도 우리의 답답하고 지난한 체제, 이 답답한 분단 상황 속에서 그러나 계속 일거수일투족이 한 차례도 안정되지 않게 충돌하면서 지나오신 것이 아닙니까? 분단 상황에서 형성된 상식적인 것과 계속 마찰을 일으키면서 지나와서 마찰이 선생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랭보 같은 경우는 조금 쉬웠을 것 같은 느낌도 한편으로 있습니다. 유럽에는 문화적 교양 속에 담긴 위선과만 충돌하면 되지만 우리는 수많은 정치적 주류들이 묻혀 있기 때문에 분단의 질곡과 계속 부딪치니까 거기서 겪는 고통 때문에 저희들도 어떨 때는 기형화된 듯이 느껴지고,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야 될지.
고 은 우선 하나 우리가 개관할 필요가 있네요. 우리가 만세 부르고 해방됐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갈라져 버리는 시점에 있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문학을 해 왔죠. 식민시대의 문학은 그래도 민족의 통합된 정서 안에서 구박을 받으면서 우리 문자로 좀 남겨 놓은 것이 있죠. 한자로 남긴 것도 있고 일본말도 남겨 놓은 것도 있고 그런 것을 합해서 우리 근대문학의 총칭 대상이 되겠는데, 1945년 이후에 우리는 갈라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문학은 남쪽의 한국의 문학이고 저쪽은 북한 사람들의 문학인데, 우리 문학은 다행스럽게도 작가에게 문학을 맡겨 줬습니다. 전쟁과 강압적인 반공체제가 있었지만 이것을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으면 그냥 놔두는 문학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놔두는 문학은 안 되죠. 요구하는 문학이었죠. 이쪽은 다양한 문학인데, 저쪽은 이론적인 문학이었다고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요즘은 많이 풀어져서 다원화되긴 했지만, 그러나 참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우리 민족이 역사가 발전해서 통일된 다음에 문학사를 쓸 때 지금의 분단문학사처럼 풍부하고 다양한 문학 텍스트가 어디에 있을까. 만약에 해방되어서 하나로 살아왔으면 얼마나 심심한 문학일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문학의 가능성, 그때 우리에게 남기는 역사적인 생명이 막 용출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분단시대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분단문학은 이 모순을 이미 넘어설 만한 힘이 있다. 북한도 우리가 없는 것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북한이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고 이 두 가지가 얼마나 부잡니까. 문학의 갑부라고 생각하죠. 동북아시아에서. 아마 중국 문학, 일본 문학에서도 20세기 후반 문학에서 이렇게 역동적인 다양성을 못 가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고요. 그러나 이것을 더 이상 유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정치행위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필요하다. 그럼 지독하게 갈라섰으니까 이제는 갈라서는 것은 의미가 없어. 그 점에서 나는 해체주의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노력 안 해도 해체가 됩니다. 자기 해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만나게 됩니다. 그때 진정 통일의 문학이 된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우리의 당위는 의도적인 것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통일도 하나의 점이 아니라 선이다. 어느 점 여기서 통일되고 분단이고 통일이다 이게 아니라 어떤 것이 분단이고 끝나고 어떤 것이 통일인지 모르게 선으로 이어지는 과정, 이렇게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문학도 아마 그런 자연성, 어떤 의미에서는 비역사성 이런 것이 개입되지 않을까. 그럴 때 농익은 문학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반도고, 민중문학이라고 해도 좋고 한국문학이라고 해도 좋고 어떤 지역의 문학이라고 해도 좋고 이 문학에 대한 희망은 절망이 거기에 못한다고 생각하죠. 다만 이것이 라틴 아메리카 문학이 20세기 문학을 이끌어 가는 것처럼 뛰어난 가능성이 앞으로 있을 수 있는가. 그건 통합되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죠. 합하면, 그것은 양쪽의 축구팀이 합해서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합한 사회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통합 에너지 말고, 그때 그 시간이다, 나는 그래서 시간에 의미를 많이 부여합니다. 공간보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시간을 사느냐가 중요하지. 아까 유목처럼 난 여기서 살고 난 유럽에 살고 난 심지어 스페인령 대서양 쪽 카나리아 제도에 가서 살고 싶어요. 그러면서 나의 시간에 들어 있는 것, 시간의 진실을 이끌어내는 것, 이런 것을 하고 싶죠. 그래서 내 조국은 시간 속에 있습니다. 내 고향도 공간의 어떤 지역이 아니라 시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젠 아파트만 들어서니까 조국도 공간도 없어요. 다 똑 같아요. 시간 속에 자기가 보존하고 있는 문어로서의 시간, 거기에 아마 근원이 들어 있지 않을까. 중언부언하네.
김형수 차차 또 삶에 대해서, 옛 경험들에 대해서, 미래에 대한 구상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고 은 아까 기억을 얘기했습니다만 역시 문학이라는 허영은 내일입니다. 내일 없이는 문학할 수가 없어요. 나는 너무 상투적으로 내일을 많이 노래했는데 그런 것 말고 이제 좀 철이 들어서 내일을 노래하는 문학 좀 하고 싶어요. 나는 미래 없이는 못 살겠어. 그래서 나는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의 이 생도 사실은 내생이야. 내생으로 살고 싶어. 미래는 최고의 역사야, 최고의 미학이고. 그것이 하루만 남았다고 할지라도. 그 미래는 태양 그 뒤에 있는 어떤 암흑이지. / 사이버 문학광장 웹진 2016. 5
시인이 말하는 그의 년보는
1933
8월 1일(호적에는 4월 1일로 잘못 등재됨) 군산시 미룡동 138번지(그 당시는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부락)에서 아버지 고근식(高根植) 어머니 최점례(崔點禮)의 장남으로 태어남(음력 6월 10일 아침 10시). 본명 은태(銀泰).
1950년의 6·25 전쟁 중에 이름의 끝자는 떼어내고 은(銀)이라고 자칭한 이래 오늘에 이름.어린 시절은 <암사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이는 사람들을 보면 유난히 부끄러움을 탔기 때문. 당숙이 집에 와도 두 손바닥으로 새빨개지는 낯을 덮고 있다가 도망치기 일쑤였음. 중농(中農)과 빈농(貧農)의 변전이 심한 가운(家運). 9세까지 이 마을 저 마을의 서당을 전전하며. 백수문(白首文)부터 동몽선습, 소학, 논어 등을 익혔음.
1943
미룡국민학교 입학. 그해부터 조선어 교과과목이 폐지되어 일본어만으로 수업. 그러나 마을 머슴 대길이 아저씨로부터 <언문>을 배웠으므로 탄금대인(彈琴台人)의《의지할 곳 업난 청춘》을 주룩주룩 읽다가 종조부한테 혼나기도 했고, 신식 연애소설 따위를 마을 아저씨들을 통해서 빌려다가 탐독. 일본 이름 다까바야시 도라스께(高林虎助).3학년 때 일본인 교장 아베(安部)가 장차 무엇이 되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육군대장 해군대장이, 또 여학생은 간호부가 되겠다 했는데 나는 천황이 되겠다고 해서 그 때문에 천황모독죄의 퇴학처분을 간신히 넘기는 대신 3개월 동안 하루 3시간씩 썩은 보리에서 덜 썩은 보리를 가려내는 악취 속의 강제 작업을 했음. 고독을 체험.그림과 작문에 재미가 생겨났음. 이 무렵의 마을 동무 이관전.
1945
8·15해방으로 월반(越班), 단번에 동급생이 하급생이 되어서, 허약체질로 주눅이 든 처지에서 해방되었음. 학교 친구 문수원, 고근상 등.
해방 직후 새로 부임한 권모(權某) 교장이 친일파라 해서 교내 동맹휴학을 하는데 주모자의 하나로 되었음. 최칠봉, 고재영 교사의 사랑을 받음.
1년 뒤 신설된 군산 사범학교 입학시험에서는 성적은 단연 우수 했으나 동맹휴학사건 때문에 품행문제로 불합격 처분을 받고 다음해 군산중학교에 5백 명 중 수석으로 입학. 그러나 이후 공부를 싫어하고 선생을 무시했음. 급장 부급장 따위를 내놓고 미술부에 들어가 교내전에서 1등상을 받기도 했음.
어느 날 저녁 10리길의 학교와 집 사이의 길에서 시집《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를 습득, 그 시집을 밤새도록 읽고 가슴이 찢어 질 것 같은 문학적 충격을 받음.
이광수, 노자영 등을 열심히 읽기 시작함. 몇 번 출분(出奔)했으나 그때마다 아버지한테 잡혀서 집으로 돌아왔음.
해방 직후에는 특히 반탁(反託) 동맹휴학, 단정(單政)반대 동맹 휴학을 즐기고, 새벽에 상급생의 지시에 의한 벽보 붙이기 심부름 등에 참가했음. 강 건너 장항 제련소의 굴뚝에서 늘 영원감(永遠感)을 체험함.
1950
6·25전쟁으로 4학년 휴학. 이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기 시작함. 3개월 동안 인공 치하. 밤에는 인민군의 명령으로 비행장 강제노동, 미군의 함포사격, 폭격 등으로 파손된 활주로 복구작업을 하고 낮에는 집에서 노동. 이때 한 마을의 선배 김기호와 함께 그는 효성(曉星) 나는 호성(湖星)이라는 호를 쓰며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음.
9월 수복 전후 동족상잔의 참극에 의해서 정신착란 상태가 지속 되면서 그때까지의 농촌적 순결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함. 가출사건이 빈번해 짐.
1·4후퇴로 서해 선유도에 부산행의 피난선을 버리고 기착하여 멀미를 가라앉힌 이래 아버지와의 피난살이에서 문학 지망의 은사 김종숙(金鍾淑)과 함께 하루에도 몇 10편의 습작 시를 지음. 그 무렵까지의 시 원고를 정리하여 <아름다운 전설>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그 뒤의 입산(入山) 당시 불살라 버렸음.
피난에서 돌아와 군산의 미(美) 제21항만사령부 운수과 검수원, 군산 북중학교 국어 및 미술교사 (그 당시에는 교사 자격이 없이도 ×동(童) 운운해서 특채될 수 있었음) 따위를 하다가 옥구 대야(大野)에 가서 엿장수도 했음. 이병기, 신석정, 백양촌, 김수영 등을 만남.
자학증상이 깊었으며, 군산항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일본인 항해사가 건져 냈음. 화장도 하고 다녔음. 두 귀에 청산가리를 넣어서 고막이 녹았으나 하나는 구제.
고향의 문사(文士) 전학배(田鶴培)?옥배(玉培) 형제에게 심취. 그들을 찾아가서 밤새 우는 일이 많았음. 학업 계속을 거부하여 가정불화. 지방의 선배 문인 목련(木蓮 宋基元)과 감격적으로 만남.
1952
불교 승려가 됨. 법명(法名) 일초(一超). 효봉(曉峰)스님의 상좌가 된 이래 12년 동안 수선(修禪)과 만행(萬行). 목포 유달산 암굴의 거지대장 수제자가 되어 거지 의발(衣鉢)을 전수받음. 구걸 행각에 한동안 몰입. 훨씬 뒤 청담(靑潭)스님과 함께 한 서울 등지에서의 탁발행각(托鉢行脚)도 이때 길들여짐.
1957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감. 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교무 및 주지 대리 등 역임.
《불교신문》을 이행원(崇山)과 함께 창간, 초대 주필이 되고 그 신문에 논설, 시문 등을 발표함.
1958
시 <폐결핵>을 친구인 나병재(羅丙哉)가 투고해서 조지훈 등의 천거로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발표되면서 시단에 나옴.
이어서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泉隱寺韻> 등이 서정주의 단회(單回) 추천으로 발표되었음. 구자운, 박희진, 박재삼, 이형기, 김관식 등과 친교. 화단의 신인 김창렬, 나병재, 김서봉, 안상철, 하인두, 박서보, 등과도 교류, 박고석, 전봉초 등과도 자주 만남. 친구인 시인 백종구, 화가 나병재의 결혼 주례를 비롯, 승려 시대의 결혼 주례가 1백여 회.
비가 오면 조계사 마당에서 벌거숭이로 뛰놀았는데 그럴 때는 다른 승려들도 벌거숭이로 따라나섰음.
1959
첫 시집《불나비》40편의 시가 인쇄 도중 화재로 전소되어 작품을 다 잃었음.
해인사에서 단식 21일, 용맹정진의 수행이 잦았음.
첼리스트 조현진(趙顯瑨)과 친숙.
1960
시집《피안감성彼岸感性》출간. 해인사 승려 혜정(慧淨)과 대구의 독일어 교사였던 시인 송영택이 시집 출판에 도움이 되었음. 오상순(吳相淳)과 동숙. 전후문협(戰後文協) 결성에 참가.
1961
장편소설《피안앵彼岸櫻》출간.
《반야심경해의般若心經解義》《불교의 길》(선학원) 출간, 각각 등사본.
전국승려대회 지도위원, 중진회의 등을 탈퇴하고 평 승려로 돌아감. 도우회(道友會) 회장 피선. 그러나 교단 혁신운동을 위한 청년 승려 단합을 서두르다가 그것이 단순한 종정 하야(下野)를 위한 음모로 오판되어 징계회의에 회부되기도 함.
강연 행각. 이때부터 10여 년간 '가짜 고은'이 전국 각 지역에 출몰함.
1962
한국일보에 환속선언을 발표하고 환속, 그동안 품수(稟受)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반환. 중생제도에 대한 환상이 강해서 그 때문에 현실에서의 좌절이 몇 번 있었음.
숄로호프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그동안 써둔 원고들을 불질러 버리고 절망에 빠짐.
폭음의 주란(酒亂)과 퇴폐. '가짜 고은'도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는데 경주, 김천 등지에서는 한글 백일장 심사위원장, 한시대회(漢詩大會) 심사위원, 서울에서는 모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행각을 함. 이 때문에 본인에게 피해가 막대했음. 5여 년 뒤에 하나는 제주도에서 체포되고 다른 하나는 10여 년 뒤에 서울에서 경찰과 합동으로 체포하여 훈방.
《세계전후문제작품집 - 한국전후문제시집》에 <고은집高銀集>을 수록. 구상(具常)과 친교.
1963-66
제주도 기류. 처음에는 제주해협에서 투신자살을 뜻했으나 만취한 상태에서 자살이 포기됨.
제주시 화북동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금강고등공민학교를 개교, 교장 겸 국어 미술 교사로 있으면서 무료수업으로 3년간 1회 졸업생까지 배출. 폭음. 어느 때는 만 3일을 자지 않고 마시기도 했고 술취해서 공동묘지에서 잔 일도 허다함. 최현식, 김종철, 이영복, 문성선, 박만영 들이 그때의 벗.
장시 <니르바나> 발표. 서울의 김수영(金洙暎)이 자주 격려를 함. 불면증 심각, 허무주의에 침윤, 반주로 소주 4홉짜리 한 병이 거의 다반사. 바지란 바지는 다 가위로 잘라서 반바지를 만들어 입고 다님. 서울의 신동문(辛東門)이 늘 보살펴 주었음.
서귀포와 마라도에 사로 잡힘. 한라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가까스로 구조됨. 김현 등이 찾아옴.
시집《해변의 운문집》출간.
1967
서울행을 결심, 15일 동안 송별회 술을 마시고 제주도를 떠남. 민음사 박맹호와 만남. 윤호영의 도움으로 홍릉에서 기거.
수필집《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 시집《신, 언어의 마을》 출간.
민음사, 신구문화사의 편집실에서 생활. 신동문의 술을 최인훈, 염무웅, 김현 등과 자주 마심.
1968
수필집《G선상의 노을》,《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출간.
한국 뮤지컬 대본 <한강>집필 - 예그린 악단의 공연 제목은<정이 흐르네>.
《세대(世代)》에 연재·기고를 자주 했고, 이광훈, 이중한, 권영빈 등이 내 글을 게재하기 좋아했음.
1969
정릉으로 이사. 화가 박고석 등과 친교.
자취와 매식, 폭음·만작(晩酌)의 주벽.《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절망의 메시지》 출간. 장시 <사형(死刑)>(大日蝕 改題).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취임, 이것이 유일한 직장생활. 외신기자 구락부 살롱을 취중 난동으로 파손시켜서 그 일로 바로 사직, 저술에 전념.
1970
단시집(短詩集)《세노야》출간.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신문 발표용 선언문 초안 청탁이 송원영(宋元英) 측으로부터 문공부 차관직 제시로 있었는데 사절.
정교하게 추진한 음독자살이 정릉 골짜기 취약지구 예비군 특훈 때문에 의식불명의 신체가 발각되어 경찰에 의해 입원, 만 30시간 만에 의식 회복. 장기간 치료 및 휴양.
아버지 병사(病死)로 20여 년 만에 밤중에 고향에 감.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자결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
1971
연희동으로 이사. 수필집《한 시대가 가고 있다》 출간.
송지영, 남재희,《문학과지성》편집 동인 등과 술을 자주 마심.
1972
《1950년대》제1권 출간. <노래의 사회사(社會史)>를 한국일보에 연재.
1973
화곡동 46-308로 이사. 이 이사 이후 이른바 허무주의의 대표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역사의식의 출발이 실현됨. 박정권 3선 개헌반대 운동의 첫 단계인 개헌청원 운동에 문인대표로 참가. 백낙청 등과 동반하기 시작함.
세칭 문인 간첩단사건 구명운동을 주도하고 민청학련사건의 김지하 석방운동도 개시함.《이중섭평전》을《신동아》에 연재, 출간(영화화). 중편《파계(破戒)》영화화.
1974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백낙청, 이문구, 박태순, 염무웅, 이시영, 송기원, 조태일, 황석영, 신경림, 장용학, 등과 결성, 초대 대표간사로 활약. 제1차 선언문 발표. 데모 중 체포됨.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문인대표로 김병걸, 백낙청 등과 참가. 이때부터 경찰서, 정보부의 고객이되어 유폐되는 일이 다번 했음.시집《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장편소설《일식日蝕》(영화화 됨)을 출간,《이상평전》을《세대》에 연재, 출간. 장편소설《어린 나그네》를 《독서신문》에 연재, 출간.《고사편력(古寺遍歷)-나의 방랑放浪 나의 산하山河》출간. 편역서 《당시선》, 《두시언해》 출간.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한 이상화(李相華)와 만남.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동아 자유언론투위와 동조, 동아일보지광고의 격려광고 운동에 박차를 가함.
강연, 선언문 낭독 등에 의해 당국에 연행, 장기구금. 전담형사 및 정보부 기관원의 24시간 감시·동침·동행이 계속됨. 심지어 친지의 결혼식에 갈 때도 동행하고 술집에도 함께 가서 앉아야 했음.
서울대생 김상진 추도식 때문에 명동 수녀원에 피신, 끝내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추도식을 함세 웅신부 등과 개최.
1975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일단 칩거당함. 한동안 절필(絶筆)하다가 집필 재개. 이 1년 동안 소주 1천 병을 통음(이 계산은 이문구가 해주었음).《서울평론》에 연재했던《한용운평전》 출간.《세대》에 연재한《제주도》 출간. 민음사의<오늘의 시인선>의 고은시선《부활復活》 출간. 역주《초사(楚辭)》출간. 이남덕, 이효재, 박순경, 이종복, 권영빈, 강운구, 등과 설악산에서 자주 만남.
1976
지학순, 김승훈, 함세웅,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등과 <김지하 구출위원회>를 결성, 부위원장으로 석방운동 개시.
이우정 등과 동일방직사건에 대한 대책위원회, 상고사 대책위, 원풍모방 대책위, 전태일과 청계피복사태 문제 등에 참가하여 노동 운동에 입문. 제품 불매운동, 단식투쟁, 시위와 노동시 낭독, 선언문 발표 등으로 여념이 없었음.
오늘의 산문선집《환멸을 위하여》출간. 역주《시경(詩經)》출간.《한국의 지식인》출간. <불교란 무엇인가>를《법륜(法輪)》에 연재. <시와 시대>를 《독서신문》에 연재. 역주《두보시선(杜甫詩選)》 출간. 동화《갠지스 강의 저녁놀》출간.
1977
시집《입산(入山)》출간. 소설집《밤 주막》출간. 수필집
《세속의 길》출간. 오늘의 사상신서《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출간. 장편소설 《피안앵》을 개작,《산산이 부서진 이름》으로 출간. 민주구국헌장사건 주모자로 약 1개월 동안 정보부의 지하실에 구속, 그 뒤로 송광사에 유폐당함.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조태일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수감. 구속 취하로 석방. 선임 변호사 김강영, 홍성우, 황인철 등. 나의 인세 및 가계 등의 관리를 담당형사가 맡음. 황숙자가 옥바라지. 출옥 뒤 자유실천문협 제3주년을 계기로 문학운동 확대를 위한 선언문 발표. 《대화》에 장시 <대륙大陸> 연재.
1978
<민주청년협의회>를 화곡동 자택에서 결성 지도, 윤보선, 문익환, 박형규, 성내운, 천관우, 송건호, 백기완 등과 고문이 됨. 민주통일 원칙 및 방안의 모색. 광주 서울 부산 등지의 많은 강연, 그 중에서 KSCF주최 4·19기념강연은 열렬한 반응.
자유실천문협과 백범사상연구소 공동주최로 '민족문학의 밤'을 개최, 성대한 운동이 되었음. 개회사 및 <갯비나리>를 친지 백기완 등이 특별낭송. 외유와 국회의원, 장관 등의 유혹과 협박 심각. 8·15를 맞아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삭발. 다시 평화시장 남영나일론 해태제과 등의 노사문제와 동일, 상고, 원풍 등의 사태에 대한 대책문제로 노동 현장에 접근.
이 무렵 <똥> <쪼까니 딸들에게> <열다섯 살의 노동자 바우에게> <전태일> <장준하> 등의 근로자 격려시를 각 집회에서 발표. 이 때문에 당국의 제재가 있었음.
원주 집회사건으로 구금. 집은 늘 찾아오는 젊은이들로 메워짐.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발족, 송건호 등과 함께 그 부회장에 피임.
산문집《사랑을 위하여》, 《가난한 이를 위하여》, 평론집《진실을 위하여》출간. 민중연구 모임에 참가(서남동, 백낙청, 박현채, 김용복, 서인석, 현영학, 김윤수, 구중서). 일제잔재 청산, 분단극복을 지향하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제기함.
시집《새벽길》 출간.
1979
평론집《지평선으로 가는 고행苦行》출간. 《한국문학전집 - 고은집》 출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국민연합) 결성, <민주회복국민회의>와 <한국인권운동협의회>의 지도층을 잇는 새로운 재야운동의 총본산이 실현됨.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함세웅, 박형규, 이우정 등과 함께 참여, 문익환, 함세웅과 함께 중앙상임위 부위원장으로 핵심 역할을 함. 각종 인권문제에 대응. 집에서 세수할 겨를도 없을 때가 많았음.이상화 영국 런던대 대학원으로 떠남. YWCA에서 10일간 민족문학 특강. 《실천문학》창간 주도. 미 대통령 카터 방한 반대 데모 주도, 구속.
YH사태에 문동환, 이문영 등과 함께 대책 수립, 농성현장을 격려·지도.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게 여공들의 문제를 협의, 적극 찬동을 얻음. YH 김경숙 양 신민당사에서 절명. 국가보위에 관한 특조법 위반으로 문·이 등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투옥. 선임 변호사 홍남순,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박한상, 박세경, 등. 집은 오종우가 맡아줌. 옥중에서 10·26사태를 만남. 연말에 보석 형식으로 출감. 노동운동을 결심하고 하루 두 갑짜리 담배를 끊음. 감옥에서 귀의 고막 파열로 청각을 잃어서 그 때문에 귀와 코의 수술. 서울대 의대 김종선(金宗善) 집도.
1980
계엄하에 작품발표 엄금됨. 국민연합운동 적극화. 이때 한두번 작품발표를 위해서 '무단(舞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음. 소설집《산 너머 산 너머 벅찬 아픔이거라》출간. 대학신문들의 청탁에 호응. 출옥 직후 영등포에 노동학교 설립, 교장이 됨.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이문영, 이우정, 서인석, 서남동, 김종철, 정연주, 이돈명, 홍성우, 김용복, 한완상, 김찬국, 장기표, 신혜수, 서경석, 임명진 등이 주요 초빙 강사. 각 대학 강연.
5월 이후 내란음모죄, 계엄법, 계엄교사 죄목으로 조사, 재판.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등과 육군교도소에 구속됨. 죽음 직전의 극한 상황 체험. 군법회의에서 20년 선고 받음.
1981
대구교도소 특별요시찰 정치범 수용 중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어 통합병원에서 파견된 김종선에 의해 다시 귀 수술, 위기를 넘김. 양복순과 친지들이 집을 맡았음.
1982
8·15기념으로 가석방. 국민연합 동참 예춘호를 비롯 성내운, 박태순, 염무웅, 김종철 등이 대구에 와서 내 신병을 인수.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건강상태였음. 여러 번의 옥중 단식으로 인한 악성 위궤양, 과민성 대장염 치료. 삭발 철회. 당분간 강연 불응.
1983
친구인 의사 장홍주의 시술로 어머니 양성종양 수술. 3년 만에 시를 발표. <조국의 별> <온돌>(세계의 문학) <4월혁명론> 발표. <함석헌 전집> 편집위원.
5월 5일 이상화와 결혼. 풍운의 독거생활을 끝냄. 식장은 수유동 안병무 교수 자택 정원. 주례 함석헌, 축도 문재린,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 집전 리영희 교수 등으로 극히 제한된 친지 1 백여 명만을 초청함. 정보기관에서도 당일에야 알고 달려왔음.
아내는 결혼으로 대학 당국에서 면직 여부 대상이 되었으나 대학 담당 안기부 직원의 권고로 무사하게 넘어갔음.
결혼 직후 고려대 이문영 교수가 소개한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에 주거를 정함.
4년 만의 첫 강연 <민족통일의 역사적 과제>. 시를 잇달아 발표함.《고은 시전집》1, 2권 출간. 출판기념회를 준비가 당국에 의해서 제지당함.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주년을 맞아 재창립, 후진에게 물려줌. 일본의 반핵평화운동대회의 초청이 있었으나 출국불허.
미국 기독교 기관에서 초청이 있었으나 출국불허. 연금이 다시 계속됨.
1984
김재준, 함석헌, 안병무, 박형규 등과 재야간담회 구성 실무를 맡음. 민통련 지도위원직 등은 자동적인 것임.
시집 《조국의 별》출간.
1985
서사시 <백두산>을 계간지《실천문학》에 연재하다가 강제 폐간당함. 창작과비평사 출판사 등록 취소에 맞서 투쟁. 월간 《마당》에 <겨레와 노래> <어린 시절>을 연재. 딸 차령이 태어남. 5월 12일.
미국 일본 등지의 초청여행 불허됨.
1986
<만인보(萬人譜)>를《세계의 문학》에 연재함. 전작으로 옮겨 1, 2권을 출간.《창작과비평》강제폐간 뒤 이름을《창작사》로 연명할 때였음. 시집 《전원시편》,《시여 날아가라》,《가야 할 사람》, 평론집《문학과 민족》출간. 산문집《고난의 꽃》출간.
일본 펜클럽과 서독 하이델베르크대 등지의 2개 대학 강연 초청이 있었으나 여권이 발급되지 않음. 당국에 의한 연금상태 자주 있었음. 집 주위는 항상 사복 경찰관 수명이 감시. 제13회 한국문학작 가상 수상식에도 연금에 동원된 경찰 중 3명과 함께 동행하여 상장만 받고 바로 귀가 조치됨.
1987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상임공동대표(박형규, 김승훈, 이돈명 등과). 6월 항쟁에 적극 참여. 최루탄가스로 흉통이 잦았음. 동대문, 세운상가 그리고 서울역 광장 시위에 참가하였음. 박종철, 이한열 군 추도회 주관하고 추도시 낭독. 서울 시청앞 광장 2백만 시민집회에 앞장섰으나 그것을 청와대로까지 이끌지 못했음. 이른바 대통령 직선제의 6·29선언에 이렇다 할 정치적 대응없이 대통령선거 국면을 맞았음. 재야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것을 보고 비애. 저술에 몰두함. 대학 등 강연 계속.
당국으로부터 완전봉쇄의 연금조치를 자주 당하고 어느 때는 사전에 이를 피해서 떠돌이 생활로 보내기도 했음.
버클리대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강연과 여행 2개월(1회용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그러나 일본의 국제평화대회 초청에는 정작 일본 정부로부터 배일(排日) 사상가로 낙인 찍혀 비자를 받지 못했음.
대하장편서사시《백두산》시작, 1, 2권 출간.<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해체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회장 김정한, 백낙청과 함께 부회장이 됨.《만인보》3, 4, 5권. 출간.
1988
《만인보》6권, 시집《네 눈동자》, 《나의 저녁》, 《그 날의 대행진》, 평론 《잎은 피어 청산 되네》출간. 《고은전집》1, 2, 3, 4권을 출간하면서 매월 2권씩 계속해서 간행함.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여덟 번째 초청인 일본 이와나미(岩波) 출판사 초청이 당국의 출불허로 또 막히고 함께 초청된 백낙청을 통해 강연 원고가 대독되었음.
다시 일본 초청을 받아 그곳 2백여 지식인과 작가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강연과 대화를 계속함. 일본 사회당 당수 도이(土井) 위원장. 작가 오에(大江健三郞), 야스에(安江良介), 이회성(李恢成), 노마(野間宏) 등과 교유. 일본 TV의 취재 계획에 따라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현장 참배.
1989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위원장에 피선, 남북작가회담 제안. 판문점 회담을 위해서 회담 대표와 동료들이 가다가 연행 되었음. 일단 귀가조치 뒤 다시 연행하여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시킴. 서울구치소. 국제펜클럽 등 여러 나라의 석방운동, 구속항의에 의해 2개월 만에 보석 석방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의 1심, 2심 재판이 진행됨.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창립, 초대 공동의장 피선으로 의장 수락연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진보적 예술인의 결집체가 이루어졌음.
《만인보》 7, 8, 9권. 산문집 《고은통신》, 《얼마나 나는 들에서 들로 헤매었던가》 출간.
1990
시집《아침이슬》, 《천년의 울음이여 사랑이여: 백두산 서정 시편》,《눈물을 위하여》. 평론집《황혼과 전위》출간. 납월북 예술가 산문집 전 3권 엮음.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1991
민예총 의장 연임한 뒤 사임. 문학 저술활동.
시집 《해금강》, 《선시 - 뭐냐》, 《거리의 노래》, 《백두산》3, 4권, 장편소설《화엄경》출간.<중앙문화대상>수상.
1992
호주 시드니대 한국학과에서 <한국문학의 오늘> 강연 및 호주 각 지역 여행.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초청, <한반도의 꿈> 강연.
장선우 감독, 김형균 등과 인도, 네팔, 스리랑카 여행.
시집《내일의 노래》, 소설《그들의 벌판》,《내가 만든 사막》 출간.
1993
김영삼 정부에 의해 리영희 교수 등과 함께 사면 복권됨. 처음으로 복수여권을 발급받음.
미국 미시간대 국제대학 주관 국제대회에 리영희교수와 함께 강연.
경향신문사와 MBC 후원, 창비, 동아출판 협찬의 <시력詩歷 35년 고은 문학의 밤> 문학행사. 연강홀. 기념집 《고은문학앨범》(웅진) 출간.
경향신문에 자전소설 <나의 삶 나의 산하> 장기 연재, 광주일보에 <방랑시인> 연재.
서사시《백두산》후반부 5, 6, 7, 8권 출간. 시집《아직 가지 않은 길》, 에세이집《광야에서의 사색》, 여행기《인도기행》, 연구서《내가 가는 금강경》, 자서전《나, 고은》1, 2, 3권 출간.아내 이상화, 딸 차령이와 함께 첫 유럽여행.
1994
경기대 대학원 석좌교수로 초빙됨 (1994-1998).
제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대하서사시《백두산》5, 6, 7권을 출간하면서 완성.
1995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초청 시낭독 및 강연.
프랑스 문화성 초청, 시낭송 및 문예지 고은특집.
시집《독도》. 소설 《정선아리랑》, 《소설 김삿갓》1, 2, 3권, 소설《선(禪)》1, 2권.자서전《나의 청동시대》.
1996
호주 작가 페스티벌 참석. 고은 시선《아침이슬》영어판 출간. 시드니 TV 특집 프로 '한국시인 고은'에서 대담 및 시낭독.
일본 오사카 '중심 21' 초청강연 및 시낭독.
독일 주어캄프사 주최로 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 등 5대 도시 순회 시낭독. 독일 주요신문들 인터뷰.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시인대회 참석.
시집《어느 기념비》, 대하연작시《만인보》10, 11, 12권 출간.
1997
버클리대에서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와 함께 시낭독. 버클리대에서 미국 계관시인 로버트 하스와 시낭독.
멕시코 <과달라하라 북페어> 문학행사에서 시낭독 및 인터뷰.
시집 《어느 기념비》,《만인보》13, 14, 15권 출간. 프레스 센터에서 창작과비평사 주최《만인보》15권 출판기념 '70년대 사람들' 행사.
산문집《살아있는 광장에 서서》, 동시집《차령이 노래》, 동화책《나는 시골 삽살개에요》
40일간 티베트 수미산 순례 중 어머니 별세(향년 84세).
1998
중앙일보 주관으로 북한 방문, 15일 간 북한 각지 문화와 자연 시찰. 북한에서 쓴 시를 분단 이후 최초로 팩스를 통해 직접 남한에 전달, 신문에 실림.
시집《속삭임》출간.
프랑스 정부 초청, 파리 <작가의 집>에서 미셀 드기, 알랭 주프르와와 시낭독, 이브 본느프와와 대담.
<산하여 나의 산하여:고은 시낭독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2일간 공연됨.
<만해대상> 시부문상 수상.
1999
미 하버드대 옌칭 연구교수 및 버클리대 방문교수로 가족과 함께 1년간 도미, 시론 강의.
한국 뮤지컬 대본 <백범 김구>집필.
하버드대 페인홀에서<고은의 밤>행사.
시카고대에서 미국 10대 시인의 하나로 시낭독 및 강연.
미 UCLA, 버클리대, 하와이대, 캐나다 요크대학, 캘거리 등지에서 강연과 시낭독.
뉴욕에서 '고은의 밤' 행사.
멕시코에서 파블로 네루다 기념 시낭독회 중남미 시인들과 참가.
시집《머나먼 길》, 북한여행기《산하여, 나의 산하여》, 시평론《시가 있는 아침》, 소설《수미산》1, 2권 출간.
2000
분단 55년 휴전 50년 만의 남북공존을 세계에 선포한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의 일원으로 방북, 기념만찬장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낭독.
스웨덴 스톨홀름대 한국학 포럼 참석 및 <요테보리 도서전시회>에서 강연 및 시낭독.
미워쉬와 쉼보르스카야가 후원하는 폴란드 크라카우 세계시인축제에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망명시인 베이 다오와 함께 참가. 쉐이 머스 히니, 로버트 하스 등과 각종 시 행사에 참여.
시집《남과 북》,《히말라야 시편》출간.제 1회 대산 국제문학제에서 기조연설.
2001
유네스코 주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 시인의 날'에 초대받아 아테네, 델피, 올림피아 등지에서 시낭 및 토론.
독일 브레멘 세계시인대회에서 시낭독 및 강연과 인터뷰.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린 <세계 시 아카데미>창립대회에 회원으로 초청받음.
남미 콜롬비아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각지 순회 시낭독.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동양박물관 초청강연 및 요테보리 국제 도서전 시 축제에서 시 낭독.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 초청으로 UC 데이비스에서 시낭독 및 강연. UC 버클리와 UC 산타크루즈에서 시낭독 및 강연.
일본 도쿄 국제도서전시에서 후지와라 출판사의 포럼 발제자로 참가. 일본 5대 일간지와 인터뷰.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대 초청, 시낭독 및 강연.
시집《순간의 꽃》, 수필집《길에는 먼저 간 사람의 자취가 있다》출간.
2002
체코 '프라하 작가 축제'에 초청받아 시낭독 및인터뷰, 현지 신문에 <시와 혁명> 기고.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 열린 한국 문예창작학회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필리핀 마닐라에서 필리핀 문학예술센터가 주최한 제1회 '환태평양 시인축전'에 13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 발제 및 시낭독.
백낙청 편 고은시선《어느 바람》출간.
전 38권의 《고은접집》출간 (김영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시낭독 및 문학강연.
프랑스 정부 초청의 한국문화축제 행사로 파리 몰리에르 극장 시낭독.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 받음.
시집《두고 온 시》, 《늦은 노래》, 《젊은 그들》출간.
2003
일본 오끼나와에서 열린 문학과 환경 국제회의에서 발제 및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와 시낭독.
프랑스 빠리 제 7대학 동양학 연구소 주최 아시아 축제에서 시낭독, 강연 등.
이라크 한국군 파병 반대 작가 시위.
스웨덴 동양박물관 주최 현대한국문학 심포지엄에서 발제강연 및 시낭독.
일본 도쿄 국제 도서전의 한일 지식인 포럼에서 기조연설 및 기자회견 등.
만해재단 주최 국제평화시인대회 대회장으로 세계 20여개국에서 온 시인들의 문학축전을 금강산과 서울에서 진행.
제 3회 베를린 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 및 시낭독.
군산에서 시비 '삶' 제막행사.
2004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
미국 워싱턴의 폴저 쉐익스피어 도서관에서 시낭독, 하버드대학과 위싱턴대학에서 시낭독.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여행.
스페인 살라망카대학에서 스페인 시인 안토니오 꼴리나스와 시낭독.
오페라 대본 <단군>(일명 개천<開天>) 집필.
스페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만인보》 출간 기념 시낭독.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고은 문학의 밤' 개최.
스페인 무르시아 세계시인대회와 꼬르도바 도서전에서 시낭독.
단재상 수상.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제 1회 한이문학포럼에서 강연 및 시낭독.
《만인보》16-20권 출간.
2005
한반도 분단 이후 최초의 한국어 공동사전 편찬을 위한<겨레말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상임위원장에 취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강연 및 시낭독.
일본의 마쓰야마대학과 고베 등 여러 도시에서 강연, 대답, 인터뷰 등.
장편 판소리 대본 <초혼(招魂)> 집필.
제 3회 베를린 세계 시인축제에서 대담, 시 낭독, 시 녹음 등.
노르웨이 몰데에서 열린 뵨슨문학제에서 강연, 시낭독, 인터뷰 등. 이어 오슬로 대학에서 강연과 시낭독.
독일 베를린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과 시낭독.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주빈국 대표로 개막식의 '문학연설'을 하고 여러 행사에서 시낭독, 인터뷰 등.
노르웨이의 유일한 문화훈장인 뵨슨 문화훈장 받음.
2005
제 2회 대산 국제문학제에서 기조연설.
2006
<겨레말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의 정례회의를 위해 수차례 북한 방문.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백두산에서 남북작가 300여명이 참가한 문학축제에 남측 대회장으로 시낭독.
이탈리아어판 《순간의 꽃》 출판 기념 시행사를 로마, 피렌체, 밀라노, 포르미아 등 4개 도시에서 개최, 여러 인터뷰와 시낭독.
프랑스 보르도대학과 빠리 도서전에서 강연 및 시낭독.
미국 여러 도시에서 영어판 시집 《삼거리 주막》 출판 기념 강연과 시낭독.
미국 PEN의 뉴욕 국제문학제에서 시낭독, 알렌 긴즈버그 50주기 기념식에서 시낭독.
이탈리아 빠르마 세계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 대화, 시낭독.
미국 제랄딘 다지 국제 시축전에 '특집시인'으로 초대받아 강연, 대화, 시낭독. 이어 하버드대학과 워싱턴대학에서 시낭독.
스웨덴의 문학상 시카다상 수상.
《만인보》 21-23권. 시집 《부끄러움 가득》 출간.
2007
몽고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제 1회 한몽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홍콩에서 개최된 국제 펜 아태지역회의의 특별손님으로 초대받아 시낭독.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ARCO 기념행사에서 인터뷰와 대담 및 시낭독, 말라가대학에서 강연과 시낭독.
서울대 초빙교수.
일본 도쿄에서 열린 <21세기 지식인>이 주최한 제2회 국제 콜로키엄에서 기조연설, 대담과 인터뷰 등.
일본 가나자와에서 개최된<문학과 환경학회>한일공동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영랑문학상 수상.
만해축전 대회장
한국에서 개최한 제1회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AALF)에서 기조연설 ‘나는 제 3세계라는 이름을 폐기한다.’
통일부 통일고문. 『겨레말큰사전』 남북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남북한에서 수차례 회의 주재.
노르웨이어판 선시 『뭐냐』 출간.
한러문학제에 참석, 모스코바 레닌도서관에서 시낭송.
북경과 상해에서 열린 한중문학제에서 강연 및 시낭송.
《만인보》 24-26권, 산문집《우주의 사투리》출간.
2008
독일 베를린의 세계문화의 집에서 열린 아시아문학제에서 시낭송과 대담.
괴팅겐, 에르푸르트, 라이프찌히에서 독일어판 시집 『바람 부는 날』 시낭송회.
영국 런던의 한국문화원 주최 첫 문학행사로 시낭송회.
캐나다 토론토에서 그리핀 문학상, 평생공로상 수상.
유심문학상 수상.
『인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카』 2008년 연감에 등재됨.
만해국제문학제 대회장으로 기조연설.
시인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허공』을 출판하고 첫 그림 전시회를 가짐.
50주년 기념행사는 9월부터 12월까지 많은 대담과 인터뷰, 중앙대, 경희대, 단국대, 서울대에서 포럼과 세미나, 서울, 대전 대구에서 기념 강연 및 시낭송회 등으로 이어짐. 축하행사의 하나로 주한 외국대사 10명이 10개국어로 ‘고은 시 낭송회’를 가짐.
예술원상 수상. 『겨레말큰사전』남북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계속 활동.
이라크와 이집트의 대표 주간문예지 『알 아디브』와 『알 아라비』에 시 특집.
단국대 석좌교수.
2009
마키즈 명사 사전(Marquis Who's Who)에 등재됨.
스페인에서 시 ‘어떤 기쁨’ 한 편의 원본과 번역본을 나무상자에 담은 한정본시집 출간.
『만인보』 마지막 4권 집필 완료.
시인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선집 『50년의 사춘기』(김형수편) 출간.
산문집 『개념의 숲』 과 『오늘도 걷는다』 출간.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개최된 국제 시축제에서 시낭송, 대담, 강연 등. 때 맞춰 출간된 폴란드어 시선집 『소나기』가 저명한 출판사 즈낙(Znak)에서 출간되어 현지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음.
이탈리아어 시선집 『노래섬』과 스페인어 시선집 『천년의 말라가』 출간.
2010
『만인보』의 마지막 4권을 출간하면서 1980년 감옥에서 구상한지 30년, 집필 을 시작한지 24년 만에 총 30권에 5600명의 이름을 올리면서 4001명을 노 래한 대하 인물시집을 완성함. 11권으로 된 특별 양장본 『만인보』 전집도 별 도로 출간. 출판 기념 ‘『만인보』 국제 심포지움’에 프랑스에서 시인과 학자가 참석해 발제와 발표를 했고 이어 대규모 출판기념식 열림. 미국의 전 계관시 인 로버트 하스는 “영어권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흥분하게 만드는 이 시집의 시들은 시인이 세계에 주는 선물이며, 그 모든 인간성과 폭력에 대한 기막힌 20세기의 초상이며, 한국 국민의 생명력에 바치는 찬사이다” 라는 축하 메시 지를 보내왔음.
『만인보』가 제 7회 광주비에날레의 주제로 선정되어 미국 『뉴욕 타임스』에 보도됨.
미국 동부의 스미스 컬리지와 로스앤젤레스의 UCLA대학 등지에서도 시낭송회, 인터뷰 등.
이탈리아 베니스 시 주최 국제 시 축제인 제 4회 ‘문화의 교차로’에서 시낭 송 등. 베니스대학 강연.
이탈리아의 밀라노, 플로렌스, 로마에서 이탈리아어 시선집의 북 투어. 매 도시에서 많은 이탈리아 시인들이 헌정시를 낭송. 이 시선집은 이탈리아의 ‘카마이오레 문학상’ 국제부문에서 3권의 최종 후보 중 하나로 오름.
산문집 『나는 격류였다』 와 『나의 삶 나의 시: 백년이 담긴 오십년』 출간.
『타임스』 아시아판에 특집 기사가 실리면서 ‘현존하는 아시아의 가장 위대 한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음. 『아이리쉬 타임스』에도 특별 기사로 소개됨. 호주의 방송국 ABC가 영어판 『내일의 노래』를 중심으로 특집 방송.
단국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서울에서 개최된 제 23회 IFURO(세계산림학 대회)에서 기조연설.
터키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제 2회 WALTIC(작가 번역가 회의) 에서 기조연설.
베트남 하노이에서 시집 출판기념 시낭송회.
1910년 한일합병 100주년을 맞아 합병조약 무효 선언 운동에 참석.
2011
미국 당대 예술 프로젝트에서 국제적 작가에게 주는 평생 공로상 ‘아메리카 어워드’ 2011년도 수상자.
전북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
시 ‘햇볕’이 호주의 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림.
프랑스어판 『속삭임』과 『순간의 꽃』 출간
독일어판 『순간의 꽃』 출간. 이 시집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독서 진흥 연구소’의 1분기 ‘최고의 리스트’ 에 “고은은 우리 시대 위대한 서정 시인들의 샤먼이다” 라는 평과 함께 선정, 한국번역도서로는 최초의 도서.
제 23회 체코 프라하 국제도서전에 국제 손님으로 초대되어 시낭송와 인터 뷰 등.
제주도 특별자치도의 명예도민증을 수여 받음.”
Francis Goya -Torn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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