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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채용] “학벌 좋은 사람이 일 잘할 확률은 20% 미만” 812 한국
학력과 실력의 상관관계
학력이 좋으면 실력도 좋을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은 과학적으로 게으른 추론임이 판명됐다. 한국사회에서 취업의 '패스트 패스'를 쥔 것으로 평가 받는 서울대(왼쪽부터), 연세대, 고려대 캠퍼스 정문. 한국일보 자료사진 및 각 학교 홈페이지
“학벌 좋은 사람이 입사 후 일을 잘할 확률은 20% 미만이라고 봅니다. 인사 담당자들끼리 모여 얘기해 보면 학력과 실력 사이에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죠.” 인사 담당 책임자 A씨가 근무하는 회사는 과거 신입사원을 뽑을 때 서울대는 10점, 연세대와 고려대는 9점 식으로 출신 대학에 따라 차등 점수를 부여했다.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건 지능과 학습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므로 일도 잘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학력을 실력의 대리지표로 활용해 온 것이다. 하지만 A씨의 회사가 신입사원들의 3년 후 직무성과와 출신학교 간 상관관계를 자체 분석해 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좋은 대학 나왔다고 무조건 일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게 결론이었죠. 물론 몇몇 개인만 놓고 보면 학력과 실력이 일치하는 경우가 제법 있어요. 경영진이 ‘그래도 스카이(SKY)지’ 하며 좋은 대학 출신에 대한 애정을 못 버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죠.”
경영진을 설득해 최근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A씨는 “절차가 번거롭고 빡빡해져 오히려 스카이 출신들이 지원을 안 할까 봐 걱정이 크다”며 “몇몇 기업들은 실무 단계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추진하기로 했다가 경영진의 최종 의사결정 단계에서 일단 보류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채용시 구직자의 정보를 어디까지 블라인드 처리할 것이냐의 논란에서 가장 찬반이 분분한 것은 학력이다. 학력이 실력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연성은 충분하고, 학업에서든 직무에서든 학습능력은 성취도의 중요한 요소인 것도 사실이다. 학력 스펙이 좋은 구직자들이 역차별 운운하며 블라인드 채용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굳건한 통념에도 불구하고 학력과 실력의 상관관계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이 분야의 기념비적 연구로 꼽히는 프랭크 슈미트 아이오와대 교수와 존 헌터 미시간주립대 교수의 1998년 논문 ‘인사심리학의 선발방식에 따른 타당성과 유용성’에 따르면, 전형 방법에 따른 구직자의 실력 예측변수를 -1에서 1까지 놓고 볼 때 학력(교육기간)의 상관관계는 0.1에 불과했다. 명문대 출신 여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아니라는 한계는 있지만,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일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0.5 이상이면 강한 상관관계가 있고, 0.2 이하는 약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뜻하며, 0은 상관관계가 없고, 마이너스는 역의 상관관계를 나타낸다.
85년간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피고용자 3만2,000명을 대상으로 메타 분석한 이 논문에서 구직자의 실력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전형 요소는 채용 후 부과할 작업의 일부를 시켜보는 작업 테스트(0.54)였다. 실제 할 일을 맡겨보는 것이 실력을 확인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는 당연한 결론이다. 하지만 직무분석이 제대로 돼 있지 않고 채용 후 어떤 일을 시킬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규모 공채로 인력을 충원해 온 한국 대기업의 관행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기업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학력을 채용 잣대로 쓰는 이유다.
학력의 대안으로 제시된 경력도 실력을 예측할 수 있는 적합한 요소가 되지 못했다. 경력 연차와 실력의 상관성은 0.18로, 경력이 길다고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직무 입문 단계인 0~2년 차에는 경력에 따른 실력 차가 유의미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결국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 반면 IQ와 같은 지능테스트가 0.51, 직무분석에 근거한 구조화된 직무면접이 0.51, 정직성과 성실성이 각각 0.41과 0.31로 실력의 유효한 예측변수였다.
학력과 실력의 낮은 상관관계를 절감한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학력과 실력 사이의 낮은 상관관계를 절감하고 과감히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기업들은 주로 실리콘밸리의 신기술 기업들이다. 주요 IT 기업의 인적 구성은 최고 엘리트 대학을 나온 백인 남성 일색으로 지나치게 획일적이었는데, 감(感) 대신 데이터 분석을 통해 학력이 실력과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고 민첩하게 채용 방식을 변경한 것이다. 스탠포드대 출신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공동 창업한 구글은 획일적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에 “충분한 여성 및 소수인종 지원자가 없고, 실력 있는 사람들을 뽑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두 창업자가 지원자들의 미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점수와 대학 학점까지 뜯어보며 자신과 비슷한 학벌의 사람들만 뽑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마찬가지다.
IT업계의 이 같은 채용 차별에 맞서기 위해 실리콘밸리 소수인종 출신 기업가 3인이 뭉쳐 만든 기업도 있다. 2014년 설립된 블라인드 오디션 소프트웨어 플랫폼 ‘갭점퍼스(GapJumpers)’다. 수많은 IT 인재들이 학벌 때문에 사장되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 아래 실력을 제외한 인적 정보를 알 수 없게 한 블라인드 채용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지원자는 이름, 성별, 나이, 출신학교, 졸업 연도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주소도 쓸 수 없으며, 익명으로 해당 업무에 기반한 도전들을 해결함으로써 실력과 자격을 갖췄음을 입증하면 된다. 구직자에겐 공짜이고, 기업들에는 5,000~4만달러를 받는다.
갭점퍼스가 블룸버그, 돌비연구소, 모질라 등의 요청으로 진행한 1,400회의 블라인드 오디션을 분석한 결과, 과거 1차 전형 통과자의 80%가 명문대를 졸업한 신체 건강한 백인이었지만 블라인드 오디션 이후 40%로 급락했다. 결국 면접 등 어느 단계에 이르면 지원자의 정보를 알게 되지만, 블라인드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보다 공정한 채용의 결과가 나왔다. 케다르 아이어 등 갭점퍼스 개발자들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프트웨어 덕분으로 기업들이 편견 때문에 놓쳤을 뻔한 최고의 재능을 가진 가장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출 수 있게 됐다”며 “첫 인상을 좌우하는 것이 이력서가 아니라 실력이기 때문에 면접의 초점도 거기에 맞춰지고 덕분에 면접관과 지원자 모두에게 심층면접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갭점퍼스를 통한 입사지원자 성별은 여성이 54%, 남성은 46%였지만, 1단계 블라인드 오디션 후 면접에 진출한 비율은 여성이 58%로 더 높았고, 최종 합격한 비율은 68%로 남성 32%를 압도했다. 면접에 진출한 커뮤니티 칼리지(전문대학) 졸업생 비율은 전통적 전형보다 15% 증가했다.
구글은 2014년 처음으로 회사의 인구학적 구성을 공표한 이래 복잡한 문제 해결력을 평가하는 형식으로 채용 방식을 바꾸었다. 지원자 1인당 6개월에 걸쳐 총 25회의 인터뷰를 보는 복잡다단한 전형을 실시하고 있다. 젊고 민첩한 문화의 신기술 기업들이 먼저 깃발을 올린 블라인드 채용은 로펌, 회계법인, 컨설팅 회사 등 인문계 성삼위일체 기업들에도 급속히 확산되는 중이다. 실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기업마다 다르다. 실력을 규정할 수 있는 요소들과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공정하고 유용한 시스템에 대해 한국기업들도 치열하게 고민할 때다.
다주택자 이렇게 많았나...11채 이상 3만 6,000명 812 서울경제
다주택자만 늘린 최경환 부동산 띄우기 정책
LTV·DTI 완화 후 11채 이상 '초 다주택자' 44%↑
반면 1주택자 2.2% 증가에 그쳐 정책 과실 못 봐
2주택자는 150만명 육박
정부가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세무조사 등 ‘다주택자와의 전쟁’을 선포한 가운데 전국에 집을 10채 넘게 갖고 있는 사람이 3만 6,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3년 사이 50%나 급증했다. 특히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부동산 부양 정책 이후 다주택자들이 크게 늘었다. 반면 1주택자 수 증가율은 예년과 큰 변동이 없었다. 부동산을 띄워 경기를 살리겠다는 정책이었지만 실수요자들의 ‘내 집 마련’을 촉진하기 보다는 다주택자의 투기를 부추겼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12일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주택을 11채 이상 소유한 개인은 3만 6,000명에 달했다. 통계가 작성된 2012년(2만 4,000명) 이후 가장 많았다. 3년 새 1만2,000명(50%) 증가했다. 다만 통계는 개인이 공동소유한 주택도 한 채로 인정해 다소 과대 측정됐을 가능성이 있다. 2015년 통계로 부동산 경기가 활성화된 지난해에는 이 같은 초(超) 다주택자 수가 더 늘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조사는 국세청, 국토교통부의 행정통계를 바탕으로 작성돼 설문조사 결과보다 정확도가 높다.
이는 전 정부의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 기준금리 인하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 전 부총리는 2014년 7월 취임 직후 “부동산 시장 규제가 여름철 겨울옷과 같다”며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각각 70%, 60%로 완화했다. 부동산 시장은 얼어붙어 있는데 과도한 규제가 가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은행 기준금리도 2.5%에서 지난해 6월까지 1.25%로 인하됐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 이후 약 10년간 잠잠하던 집값이 꿈틀대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 다주택자·부유층이었다. 과거 부동산으로 ‘재미’를 번 경험이 있는 이들은 부동산 투자를 확대했다. 실제 11채 이상 초 다주택자는 2013년 2만9,000명에서 2014년 2만5,000명으로 줄었지만 부동산 활성화 정책이 본격 가동된 2015년 3만6,000명으로 껑충 뛰었다. 주택을 6~10채 보유한 개인도 2013년 4만1,000명에서 2014년 3만3,000명으로 뚝 떨어졌지만 2015년 4만4,000명으로 비교 가능한 2012년 이후 가장 많았다.
주택을 5채 보유한 개인은 2013년 2만 3,000명에서 2014년 1만 8,000명으로 줄었지만 2015년 2만 5,000명으로 늘었다. 4채도 2014년 4만 3,000명에서 5만 9,000명, 3채는 18만 7,000명에서 22만 8,000명으로 증가했다. 2채를 보유한 개인은 150만명에 육박했다. 2014년 141만 5,000명이었지만 2015년 148만 7,000명으로 통계가 있는 2012년 이후 가장 많았다.
그러나 실수요자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1주택자 수는 2014년 1,093만명에서 2015년 1,116만5,000명으로 23만5,000명(2.2%)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13년 2.9%, 2014년 2.09% 늘어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정책의 과실이 실수요자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고 다주택자에게 더 많이 돌아갔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부동산을 띄워 경기를 살리겠다는 정책이었지만 양극화만 키우게 됐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文 정부 장관 3명 중 1명은 다주택자…"거주하는 집 아니면 파실거죠?" 812서울경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인터넷 부동산 카페 회원들 분노
새 정부 장관급 구성원 3명 중 1명은 다주택자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 반포 반포주공 아파트 전경./서울경제DB
문재인 정부가 8·2 부동산 대책을 내놓으면서 다주택자들을 정조준한 가운데 새 정부 들어 임명된 장관급 구성원 3명 중 1명은 다주택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본인이 거주하는 집이 아니면 팔아라’가 이번 부동산 대책의 핵심인 만큼 앞으로 문 정부 장관들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9일 오전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제관계장관회의가 끝난 후 “8·2 부동산 대책을 주도한 3개 부처 고위공직자 상당수가 다주택자라는 지적이 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재산권과 관련한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불과 며칠 전인 4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자기가 사는 집이 아니면 좀 파시고요”라며 다주택자들을 압박한 것과는 다른 방향의 대답이다. 김 부총리의 발언이 알려지면서 각종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의 회원들은 크게 반발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문 정부 고위공직자부터 솔선수범하라며 ‘황당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실제 현 정부에서 임명된 국무위원(후보자 포함)과 인사청문회를 거쳐 취임한 고위공직자 25명이 국회에 제출한 재산 내역을 보면, 본인 또는 배우자 명의로 2주택 이상을 보유한 이는 총 9명으로 분석됐다. 문 정부의 장관급 구성원 3명 중 1명이 다주택자인 셈이다. 당장 8·2 부동산 대책을 만든 김 장관부터 다주택자로 분류된다. 김 장관은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 고양의 아파트(5억3,083만원, 이하 신고금액 기준)와 경기 연천군에 위치한 단독주택(9,100만원)을 소유하고 있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도 서울 강남 대치동과 경기 성남에 각각 11억4,400만원과 5억3,200만원 상당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서울 개포 아파트·서울 가양 아파트)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서울 송파 아파트·경기 양평 단독주택) △강경화 외교부 장관(서울 관악 연립주택·서울 서대문 단독주택)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충북 청주 아파트·충북 청주 단독주택) △송영무 국방부 장관(경기 용인 아파트·충남 논산 단독주택)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서울 용산 아파트·전남 해남아파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수원 영통 아파트·수원 영통 오피스텔) 등이 다주택자로 알려졌다.
김 장관이 했던 발언대로라면 본인을 포함한 현 정부의 장관급 인사들부터 거주하는 주택을 제외한 집을 매물로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인터넷의 주요 부동산 카페에서는 해당 논란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가입 회원 수가 22만명이 넘는 카페에는 관련 내용을 다룬 게시물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상태다. 이 카페의 한 회원은 “문 정부 장관들이 하는 건 착한 투자, 너희가 하는 건 적폐투기? 뭐하자는 겁니까?”라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리며 분노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국종 교수가 처음 공개한 세월호 침몰 당시의 참담한 영상 812 프레시안
"'헬기'가 자빠져 앉아있다. 이게 우리가 자랑하는 시스템"
이국종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외상외과 교수가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 상황이 담긴 영상을 공개한 것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이 교수가 "처음 공개한 것"이라고 한 해당 영상에서 구조 헬리콥터는 참사 당시 각종 구조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세월호 탑승자 중 172명만 구조되고 304명이 사망·실종된 것이 관료적인 재난 대응 시스템의 문제라고 우회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 교수는 지난 7일 CBS 강연 프로그램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해 2014년 4월 16일 오전 세월호가 침몰된 진도 맹골수도 상공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다 본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때 11시 반에 그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어요. 배(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제 눈으로 아무것도 못하면서 봤다구요. 배 보이세요? 떠 있잖아요, 둥둥? 이게 (구출된) 마지막 학생들이에요. 174명. 저는 이게 마지막인 줄 몰랐어요."
이 교수는 "그때 11시 반에 그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배(세월호)가 가라앉는 것을 제 눈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봤다. (중략) 헬리콥터들이 왜 다 앉아 있을까요?"라며 "거기 앉아있던 헬리콥터가 5000억 원어치가 넘는다. 대한민국의 메인 구조 헬리콥터들이 다 앉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게 우리가 자랑하는 시스템이다"라고 비판했다. 즉각 대응하지 못한 채 멈춰버린 재난 구조 시스템을 꼬집은 것이다.
이 교수는 또 자신이 탄 헬리콥터가 목포에 있는 비행장이 아닌 산림청에서 급유한 사실을 전하며, "거기(목포) 비행장이 몇 개인데 왜 기름이 안 넣어질까요. 왜 그런 것 같아요? 공무원이 나빠서 그런 것 같으세요?"라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구조 헬리콥터가 움직이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이 교수는 대신 일본과 한국의 안전 시스템을 비교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방사선 방진이 날아오고 쓰나미가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구조 헬리콥터와 의사들이 현장으로 출동했지만, 한국은 아니었다는 것. 이 교수는 "이게 우리가 만든 사회의 '팩트(현실)'"라고 꼬집었다.
▲ CBS <세바시> 강연 중 이국종 교수가 공개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구조 현장 영상.
이 교수는 그해 7월 세월호 구조 지원을 마치고 복귀하던 강원소방본부 소속 소방공무원 5명이 순직한 사고를 언급하며, "이때는(세월호 침몰 당시에는) 자빠져 앉아있게 하다가 왜 나중에 비행시키느냐구요. 왜? 쓸데없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당시 기장이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와중에도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조정간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이게 우리가 그 자랑하는 시스템이에요, 우리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팩트에요. 어떻게 보면, 그냥 리얼한 모습이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위 사람들이 저보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구나' 그러는데…."
그래서 "어떻게 할까?"를 고민했다는 이 교수는 "끝까지 해보자고 하는 게 저희 팀원들"이라며 동료애와 연대 의식을 강조했다. 강연 마지막으로, "이렇게 해서 좀 더 사회가 혹시라도 발전하게 되면 좀 더 안전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11년 '아덴만의 여명' 작전 당시 피랍 선박의 석해균 선장을 치료하는 등 중증 외상 환자를 중점적으로 치료하고 있다.
직장인 거짓우정 목적 1위 “업무 협조 부탁하려고” 812이데일리
직장인 10명 가운데 7명은 업무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친분관계, 이른바 ‘거짓우정’을 만든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취업포털 커리어는 직장인 540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거짓우정’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36.1%가 ‘사내 거짓우정을 만든 적이 있다’라고 답했다고 8일 밝혔다.
‘거짓우정’의 이유로는 ‘원활한 업무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서(70.3%)’가 가장 많았다. 이어 ‘직장 내 왕따가 되기 싫어서(12.8%)’, ‘점심 및 회의 시간에 어색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9.2%)’,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6.2%)’, ‘사내 평가를 좋기 만들기 위해서(1.5%)’ 순이었다.
‘이러한 거짓우정이 진실된 우정으로 변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59%가 ‘있다’고 답했다. ‘어떤 때 진짜 우정으로 변했나’를 묻자 응답자의 47.7%가 ‘업무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았을 때’를 꼽았다. 다음으로 ‘업무 스트레스에 대한 서러움을 공유하다가(25.2%)’, ‘술자리에서 진솔한 대화를 하다가(18.3%)’, ‘비슷한 관심사를 공유하다가(13%)’, ‘직장 상사를 함께 흉보다가(1.7%)’로 나타났다.
‘없다(41%)’라고 답한 이들은 ‘상대방도 나를 대할 때 진심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진짜 우정으로 만들지 않았다(43.8%)’라고 답했다. 다음으로 ‘직장에서의 관계를 사적인 관계로까지 끌고 가기 싫어서(36.3%)’, ‘직장에서 친구를 사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10%)’, ‘업무에 치여 친분을 쌓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6.3%)’ 등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직장인이 생각하는 직장 동료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1위는 ‘회식이 아닌 개인적인 술자리(복수 응답 가능, 27%)’였다. ‘퇴근 후 식사(23.7%)’, ‘사적인 연락(18.8%)’, ‘여행(10.8%)’, ‘영화관람(9.9%)’, ‘쇼핑(6.5%)’ 등이 뒤이었다.
"진실 외면할 수 없어서" 힌츠페터가 남긴 취재기 '뭉클' 812오마이뉴스
[기획] "죽으면 망월동에 묻어 주오" 광주를 사랑한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5·18 취재 당시의 위르겐 힌츠페터와,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연기한 영화 <택시 운전사> 속 힌츠페터.ⓒ 위르겐 힌츠페터/쇼박스
영화 <택시 운전사>가 개봉 만 6일 만에 5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영화는 1980년 5월, 세상과 단절돼 있던 광주로 들어가 진실을 알린 독일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싣고 광주로 달린 서울의 택시 운전사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날의 광주와, 광주 시민들의 이야기는 언제 어떤 식으로 만나도 가슴 속에 뜨거운 울림을 준다. <택시 운전사>는, 여기에 새로운 한 사람을 소개했다. 그날의 광주를 목격한 푸른 눈의 목격자, 고(故) 위르겐 힌츠페터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독일 제1공영방송의 기자로, 일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중 우연히 '계엄령 하의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 충돌'이라는 짤막한 뉴스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5·18 이튿날인 19일,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가 쓴 광주 5월 민주항쟁 기록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이 21일에야 광주로 향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힌츠페터의 육감은 남달랐다. 당시 외국 기자가 국내에서 취재하려면 국가홍보원에 신고해야 했지만, 그는 광주 취재 허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해 아예 신고를 하지 않고 광주로 잠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가 5·18 민주화 운동을 취재한 기자들의 글을 엮어 발간한 <5·18 특파원리포트>에는 힌츠페터가 직접 쓴 당시 취재기가 담겨있다. '카메라에 담은 5·18 광주 현장' 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그때 한국 상황은 기묘해서 우리 일행의 입국 사실을 정부의 외국인 취급기관 공무원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 엄중한 언론 통제가 한반도 전역에서 이뤄지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통제를 받고 싶지 않았다"고 당시 기자 신분을 감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연락이 끊긴 직장 상사를 찾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광주에 잠입한 그는 자신을 열렬히 환영하는 광주 시민들과 만나게 된다. 세상과 단절된 채 섬처럼 고립돼 있던 광주시민들은 외신 기자들을 진실을 광주 밖으로 알려줄 수 있는 희망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는 곧 보고도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힌츠페터의 기록, 광주 진실 밝히는 '증거' 됐다
▲힌츠페터가 촬영한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 KBS
"병원 안에 줄줄이 놓여 있던 많은 관을 열어 그들의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을 내게 보여주었다. 대부분 어린 학생들의 시체였는데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에 한 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꽉 막혀서 사진 찍는 것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아침 일찍 일본항공 일등석을 예매했다. 일등석 승객이 되면 의심받지 않고 내 물건이 손가방처럼 쉽게 통과돼 안전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필름을 큰 금속 캔에 담긴 과자 더미 속에 숨겼다. 또 필름을 단단한 금속 포장과 파란색 리본으로 화려하게 꾸며 선물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 한국기자협회, < 5·18 특파원리포트 > 중에서
▲힌츠페터는 해외 신문을 가져와 시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전세계가 광주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시민들과 언론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KBS
과자 더미 속에 묻혀있던 광주의 진실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독일로 보내졌고, 바로 독일 제1공영방송 뉴스를 통해 전 세계로 방송됐다. 광주의 참상이 알려지자,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곧 ABC, CBS, 뉴욕타임스 등 세계 유수 언론의 기자들이 광주로 모여들었고, 광주로 돌아온 힌츠페터 역시, 그들과 함께 계속해서 진실을 기록했다. 오늘날 광주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는 영상 자료의 대부분은 힌츠페터가 촬영한 것이다.
힌츠페터는 1980년 9월,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것은 물론, 국내 언론의 침묵과 왜곡 보도로 광주를 '폭동'으로만 알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전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어 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철통같은 통제에도 전국의 대학가와 성당 등에서 비밀리에 상영됐고, 많은 대학생들을 민주화운동으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광주에서 나오며 군인들의 검문 검색을 받고 있는 힌츠페터 일행. 이렇게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온 힌츠페터는 필름을 쿠키 깡통 속에 숨겨 일본으로 가져갔다.ⓒ KBS
힌츠페터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도, 1989년 일본 특파원 생활을 마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고 취재를 이어갔다. 1986년에는 광화문 시위를 취재하다 사복 경찰에게 구타당해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했다고. 이때 얻은 부상의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은퇴 후 오랫동안 고생했다.
그리고 2003년. 힌츠페터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현장을 지켰던 치열한 기자정신이 국민의 양심을 깨워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당시 그는 "오로지 내 눈으로 진실을 보고 전하려는 생각뿐이었다"면서 "용감한 한국인 택시기사 김사복과, 헌신적으로 도와준 광주의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수상소감을 전하며, 공을 한국인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이 수상소감은 영화 <택시 운전사>의 모티브가 됐다.
힌츠페터가 기록한 그날의 영웅들
▲힌츠페터가 기록한 광주의 진실은, 곧바로 독일 제1공영방송을 통해 전세계로 전해졌다. 그의 보도를 접한 여러 외신 기자들도 광주로 향해 진실을 기록했다.ⓒ KBS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 KBS 1TV <푸른 눈의 목격자> 중에서
계엄령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외친 시민들, 부상자들을 실어 나른 택시 운전사들, 집에 있는 거즈와 재봉틀로 시민군의 마스크를 만든 부녀회원들, 무료로 음식을 내어준 시장 상인들... 1980년 광주에는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폭도'로 내몰릴 뻔했던 그들이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데는, 갖은 위협에도 기록을 멈추지 않은 용감한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있었다.
▲ 처음으로 80년 광주 5월의 참상을 타전한 독일 언론인 위르켄 힌츠페터씨가 추모제에 참석해 상념에 젖기도 했다. 바로 옆 그의 부인은 시종 눈시울을 붉혔다.처음으로 80년 광주 5월의 참상을 타전한 독일 언론인 위르켄 힌츠페터씨가 추모제에 참석해 상념에 젖기도 했다. 바로 옆 그의 부인은 시종 눈시울을 붉혔다.ⓒ <광주드림> 안현주
그는 2005년 광주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2016년 1월 25일 사망할 때까지 광주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2005년 내한 당시 "한국민들은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위해 숨진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사망 후에는 "광주 망월동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생전 소망에 따라, 손톱과 머리카락 등 그의 신체 일부가 광주 망월동 묘지에 안장됐다. 망월동 옛 5·18 묘역 한편에 자리한 그의 무덤에는 최근 영화 <택시 운전사>를 통해 힌츠페터를 알게 된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MBC의 몰락 10년사](5) MBC 뉴스가 일베의 환호를 받는 까닭 주간경향 815
일베들의 병맛과 극우적인 성향을 만족시켜주는 유일한 제도권 뉴스가 바로 MBC 뉴스였다. 김장겸 사장의 사퇴 목소리가 MBC 내외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일베들은 김장겸의 MBC를 비호하고 나섰다.
김장겸 현 MBC 사장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치부장, 보도국장, 보도본부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근 7~8년 MBC의 보도부문은 김장겸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기간 MBC 뉴스의 신뢰도와 영향력은 급전직하했다. 김장겸 체제의 뉴스데스크는 특히 동물 뉴스에 집착했다. 2013년 김장겸 보도국장이 취임한 처음 6개월 동안 99건의 동물 뉴스가 뉴스데스크를 장식했는데, 이는 그 전 6개월에 비해 4배 늘어난 양이었다. 주요 시간대 공영방송의 대표 뉴스가 “TV 동물농장”과 경쟁하고 있느냐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김장겸 보도국장 시절 ‘정윤회 문건’,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 등 권력에 대한 숱한 의혹이 있었지만 ‘고래보다 큰 대왕오징어’ 뉴스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편집이었다. ‘알통 굵기가 정치적 성향을 좌우한다’는 알통 뉴스, ‘비오는 날에는 소시지 빵이 잘 팔린다’는 소시지빵 뉴스 등은 MBC 뉴스의 실상을 온 국민에게 알렸다.
지난 1월 12일 MBC 뉴스데스크는 안광한 전 MBC 사장과 정윤회의 회동이 허위보도라며 강력대응하겠다는 회사 방침을 뉴스로 전했지만(사진), 종편과 만난 정윤회씨가 안 사장과 만났다고 밝히면서 이 뉴스는 오보가 되었다 / MBC 방송화면 캡쳐
동물 뉴스가 주요 뉴스로
사실 정상적인 인사였다면 김장겸 부장이 보도국장이 될 수 없었다. 2012년 김장겸 정치부장은 대통령 선거 기간 가장 악의적인 왜곡 보도로 꼽힌 안철수 논문표절 뉴스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표절했다는 논문의 당사자도 사실을 부인하는 와중에 안철수 후보에게는 방송 10분 전에 반론을 요청했다. 이 희대의 보도는 선거방송심의위로부터 법정제재인 ‘경고’를 받았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결여했기에 당연한 중징계였다. 하지만 김장겸 부장은 보도국장, 해당 기자는 워싱턴 특파원이 되었다.
2013년 김장겸 보도국장 취임 직후 ‘문재인 의원이 변호사를 겸직’하고 있다는 뉴스가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나갔다. 역시 악의적인 왜곡이었다. 전화 한 통화면 겸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굳이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법정제재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를 받았다. 김장겸 부장이 국장을 거치는 동안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문재인과 안철수를 비방하는 대형 오보를 낸 것이다. 그는 2015년 드디어 보도본부장이 되었다.
2016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졌다. 김장겸 보도본부장은 언론과 검찰, 그리고 재판부까지 그 실체를 인정한 최순실의 태블릿PC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뉴스들을 공영방송에서 보도했다.
일간베스트저장소. 줄여서 일베. 일베는 디시인사이드에서 출발한 유머 위주의 커뮤니티였다. 그들은 극단적인 병맛(병신 같은 맛)을 추구한 디시폐인들이었다. 그들은 김대중, 노무현, 전라도, 광주항쟁 등을 비하하며 극우적인 혐오성을 띠었는데, 그렇게 해야 병맛이 더 잘 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베의 혐오성은 범죄적 수준이어서 그들이 쓰는 상징이 실수로라도 방송을 타게 되면 제작진과 방송사가 사과를 해야 할 지경이다. 이런 일베들의 병맛과 극우적인 성향을 만족시켜주는 유일한 제도권 뉴스가 바로 MBC 뉴스였다. 김장겸 사장의 사퇴 목소리가 MBC 내외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일베들은 김장겸의 MBC를 비호하고 나섰다.
왜곡 뉴스는 영전 뉴스로
변희재는 공공연히 MBC 뉴스를 치켜세웠다. 방문진의 고영주 이사장은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소신을 가진 태극기집회의 단골손님이었는데, 그는 탄핵과정에서 MBC 뉴스가 가장 공정하다고 말했다. 고영주 이사장은 2017년 2월 김장겸 보도본부장을 드디어 MBC 사장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기 한 달 전이었다.
배현진 앵커에게 양치질하는 동안 수도꼭지는 잠그라고 충고를 했던 양윤경 기자가 하루아침에 비제작부서로 쫓겨난 해프닝은 MBC 뉴스룸의 상황을 상징했다. 경영진의 노동조합에 대한 혐오와 탄압도 심해졌다. 김장겸 체제에서 품위를 지키려는 ‘불순분자’들은 부지런히 내쫓겼고, 그 빈 자리를 ‘출신지역을 보고 뽑는다’는 경력기자들로 채웠다.
3월 22일자 뉴스데스크에서는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MBC 편향보도를 비판한 것을 비난하는 뉴스를 내보내기도 했다. / MBC 방송화면 캡쳐
그러는 사이 뉴스는 사유화되었다. 지난 1월 TV조선은 당시 안광한 MBC 사장이 최순실씨의 전 남편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서였던 정윤회씨와 회동했다는 의혹을 단독보도했다. 당시 안광한 사장은 정윤회씨의 아들인 배우 정우식을 MBC 드라마 7편에 조연으로 출연시키라고 해 ‘MBC 판 정유라 사건’이라는 논란에 직면해 있었다. MBC 뉴스데스크는 안광한 사장의 주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해당 뉴스는 “근거 없는 의혹을 사실인 듯 단정지어 보도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뉴스에 법적 대응을 하기로 했습니다”로 시작했다. 정윤회와 만났다는 진위에 대해서는 전혀 취재, 검증하지 않은 채 오직 안광한 사장의 거짓말만 믿고 뉴스를 만든 것이다. 결국 이 뉴스는 희대의 오보가 되었는데, 정윤회가 안광한 사장 만난 사실을 인정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보도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보도국장은 본부장으로 영전했다. 리포트를 한 경력 출신 기자는 문화부장이 되었고, 이 기사를 리드한 배현진은 최장수 앵커 등극을 앞두고 있다. 김장겸 체제에서는 오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성해야 했다. 연수·특파원·앵커·부장·국장까지 동원할 수 있는 자리는 넘쳤고, 이 자리들을 이용해 충성하는 사람들을 채웠다. 사실 김장겸 사장 자신을 비롯해 이 체제의 복무자들 가운데 기자·저널리스트로서 높게 평가받던 사람들은 드물었다. 외부의 부적절한 힘이 없었다면 존재감이 없던 김장겸 기자가 사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방송을 사유화하다시피 한 김장겸 사장과 그의 친위체제가 공영방송 MBC에서 계속 군림할 수 있을까? 현재 파업 이후 입사한 20여명의 경력기자가 불이익을 감수하며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균열은 일어나고 있다. 결국 상식이 이길 것이다.
실체 없는 8월 위기설, 언론이 만든 자작극인가 811 시사저널
이달 들어 10일까지 8월 위기설 관련 기사만 400건…전문가들도 의견 분분
또 다시 한반도에 위기설이 불거졌다. 이번에는 ‘8월 위기설’이다. 지난 4월 전후로 ‘4월 위기설’이 고조된 지 약 3개월 만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4월15일 김일성 생일을 맞아 북한이 6차 핵실험을 단행할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설’에만 그쳤다. 4월 들어 북한이 총 3발의 미사일을 쏘긴 했다. 그러나 모두 비행거리가 100km가 채 되지 않거나 실패로 끝났다.
‘4월 위기설’에 이어 이번에는 ‘8월 위기설’
8월 위기설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시사저널은 최근 한 달 동안 네이버에서 ‘8월 위기설’이란 키워드로 검색되는 기사들을 살펴봤다. 북한과 관련된 기사 가운데 가장 먼저 올라온 것은 연합뉴스의 기사였다. 이 매체는 7월26일 오전 10시 39분에 “긴장수위 다시 높아지는 한반도…동북아 정세도 불안”이란 제목의 기사를 띄웠다.
해당 기사는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64주년인 오는 (7월) 27일을 전후해 북한이 ICBM급 미사일 또는 중거리 미사일을 쏘아 올릴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면서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고강도 제재 드라이브에 박차를 가하고, 북한은 그것을 빌미 삼아 추가 미사일 시험 발사 또는 핵실험으로 내달릴 가능성도 점쳐진다”고 했다.
또 “8월 하순 진행될 연례 한미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을 전후해 한반도의 긴장 지수는 급상승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8월 위기설’이란 단어는 쓰지 않았다.
이후 MBN이 7월26일 오전 11시 24분에 연합뉴스의 기사를 받아썼다. 국제신문도 이날 오후 7시 20분에 같은 기사를 실었다.
하루 뒤인 7월27일, 뉴스1은 오전 11시 30분에 “정전체결일은 넘겼지만…내달 또다시 ‘위기의 한반도’”란 제목으로 기사를 올렸다. 휴전협정 체결일(정전체결일)인 이날 북한에서 도발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다.
연합뉴스 “8월 한반도 긴장 급상승”, 동아일보 “8월 위기설”
네이버에서 검색되는 언론 가운데 ‘8월 위기설’이란 단어를 처음 쓴 곳은 동아일보다. 이 매체는 7월27일 오후 1시 35분에 “북한의 ICBM 추가 발사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료들이 대북 군사대응 방안을 잇달아 언급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 위기감이 또 다시 고조되고 있다”면서 이른바 ‘8월 위기설’을 처음 언급했다.
동아일보는 다음날인 7월28일에도 8월 위기설을 다시 보도했다. “항상 군사적 옵션은 있다(There is always a military option)”는 레이먼드 토머스 미 통합특수전사령관(대장)의 말을 전하면서다. 이날 헤럴드경제와 채널A도 연달아 8월 위기설을 제기했다.
7월28일 밤 북한이 ICBM급인 ‘화성-14형’을 쏘아올렸다. 연합뉴스는 7월29일 이 소식을 전하며 “북한이 지난 (7월) 4일 화성-14형 발사에 성공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ICBM급 미사일을 또 발사함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급격히 고조되면서 이른바 ‘한반도 8월 위기설’까지 거론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시험발사 성공을 기념해 북한이 발행한 새 우표. © 사진=연합뉴스
7월 28일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위기설 급속 확산
즉 8월에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질 것이란 예측은, 연합뉴스에서 출발해 MBN과 국제신문을 거쳐 뉴스1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예측은 동아일보에서 ‘8월 위기설’이란 단어로 명명됐다. 뒤이어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자 연합뉴스 역시 8월 위기설을 꺼내들었다. 이후 YTN, KBS, 서울신문, 문화일보 등 다른 언론들도 8월 위기설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다. 이번 달 들어 10일까지 8월 위기설에 관한 기사만 400건에 달했다.
청와대는 8월에 위기가 닥칠 것이란 가능성을 일축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3일 국회를 방문해 “전쟁은 없다. 미국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9일에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 위기설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안보 상황이 엄중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위기로까지 발전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말 8월에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일단 겉으로만 보면 한반도의 긴장 국면은 분명 심화되고 있다. 미국과 북한이 서로 날선 말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8일(현지시각) 북한을 가리켜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북한은 9일 성명을 통해 “괌도 주변을 포위사격하기 위한 작전방안을 심중히 검토 중”이라고 받아쳤다. 앤더슨 공군기지가 있는 괌은 미국의 핵심 전략지대로 꼽힌다.
정말 전쟁 날까?… 중국과 주한 미국인 때문에 힘들다는 분석
그런데 긴장 국면이 물리적 타격으로 확대될 것이란 관측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분석이 있다. 우선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게 되면 휴전협정을 어기게 된다. 이는 자칫 중국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중국 전략문화촉진회 부회장 뤄위안(羅援)은 지난해 2월 관영매체 환구시보에 “휴전협정은 중공군 및 관련국 대표들이 공동으로 체결한 협정이다. 중국은 이를 위반하는 행위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개입하면 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대북 선제공격은 미국으로서도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다. 북한이 공격을 받으면 포문을 남한으로 돌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주한미군 2만8500명을 포함해 우리나라에 사는 약 23만 명의 미국인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서울을 겨냥하고 있는 북한의 장사정포는 약 340문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화학 무기와 탄도미사일도 무시할 수 없다.
북한도 섣불리 괌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란 의견이 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10일 시사저널에 “김정은은 의외로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라며 “미국으로부터 반격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함부로 나서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로버트 켈리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는 북한의 괌 공격 주장에 관해 9일 알자지라에 “허세를 떠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제대로 대응하면 위기 없다” vs “반드시 충돌”
한반도 위기설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다.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은 10일 “매번 한미 연합훈련이 있을 때마다 위기설이 등장했다”면서 “대응을 제대로 하면 실제 위기로 연결이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10일 “유엔도 중재자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변수가 없으면 반드시 (미국과 북한이) 충돌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서울이 공격받을 수 있고, 북한이 괌을 표적으로 명시한 이상 동해나 일본 근해가 접전지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바쁨이 미덕인 사회 815주간경향
“식사 하셨어요?”가 인사말처럼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먹는 일이 사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가난한 시절의 모습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다”며 유독 먹는 일을 강조해서 말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경제성장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언제부턴가 “요즘 많이 바쁘시죠?”가 인사말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서로의 근황조차 잘 모르는 처지임에도 다짜고짜 “요즘 많이 바쁘시죠?”라고 물으며 말문을 여는 것이 마치 새로운 대화 예절처럼 자리 잡았다.
대체 왜 이런 인사법이 생겼을까? 아마도 한창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에 바쁨은 곧 ‘활력’을 의미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지금처럼 청년실업과 조기 퇴직자가 넘치는 경제 정체기에 바쁨이란 ‘건재’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리라. 바쁨이 상대방의 사회적 능력을 인정하는 찬사이자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표현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삶이 힘들 때조차도 이제는 “바빠 죽겠다”며 악착같이 바쁨을 강조하는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늘 바쁘다.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 빨리”라는 우스갯소리도 이젠 진부하리만큼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이란 언제나 바삐 서두르는 사람들이다. “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라고 읊은 신해철의 노래 <도시인>이 발표된 것이 1993년인데, 2017년의 상당수 한국인들은 아침에 우유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이 더욱 바빠졌다. 도시에 사는 한국인들의 걸음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준이라고 한다. 주말에 강변에서 느긋하게 자전거라도 타러 나가보면 뭐가 그리 급한지 무리를 지어 저돌적으로 질주하는 자전거족들의 기세에 화들짝 위협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에게는 취미생활마저도 바쁘게 후딱 해치워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과제처럼 여겨진다. 슬로 라이프라는 말이 나오고, 슬로 시티로 지정된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지만 이조차도 느린 삶이란 그저 바쁨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을 잠시 벗어난 일시적 일탈임을 역설적으로 말해줄 뿐이다. 게다가 여전히 더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삐 인증샷 몇 컷을 찍고는 또 바삐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몸만 바쁜 것이 아니라 마음도 바쁘다. 그러니 새 대통령을 뽑아놓고 바로 다음날부터 차기 대통령 감을 논하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외국에서 깜짝 놀랄 만한 신기술이나 신제품이 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뭐 했냐?”고 다그치며 서둘러 대책기구를 꾸리고, 예산을 편성하고, 한국형 모델을 제시하기에 바쁘다. 법률 제정이나 정책적 의사결정도 속전속결로 바쁘게 처리해야 시원하게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꼼꼼히 점검하고 차분하게 공론을 수렴할 여유 따위는 허용할 틈이 없다. 이렇게 바쁨이 강조되는 풍조는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비정상적 사회의 단면이다.
잘 살기 위해 부득이 바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바쁨 그 자체가 잘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사용되다 보면, 결국 바쁘기 위해 사는 것 같은 목적전치 현상이 일어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 모양이다. 바쁨이 자산이고 미덕이 되면 불행도 바삐 오게 마련이다. 시간에 쫓겨 허덕이며 살다가 시간에 밀려 허무하게 사라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이지 않겠는가?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5년 동안 사망 10명·부상 182명, 원전의 '맨얼굴' 814 오마이뉴스
[핵노답14] 원전 가동이래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 사실은...
정범진 경희대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지난 7월 28일 JTBC<밤샘토론>에서 "(원전은) 지난 40여년간 사망자는커녕 부상자를 한 명도 내지 않은 산업이다"라고 주장하며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했다.
■ 팩트체크
정 교수의 말처럼 정말 사망자도 부상자도 없었을까? 조금만 검색해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원전 근로자가 방사능 피폭으로 산업재해 인정을 받은 사례가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2001년 원자력발전소 직원 정아무개씨(1999년 사망)가 급성골수성 백혈병을 앓다 사망한 것을 산업재해로 인정하고 1억3000여만 원을 보상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피폭만 문제가 아니다. 안전사고 또한 상당하다. 원전안전운영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원전 점검을 하던 중 사망한 사람은 7명이고 부상자는 4명이었다. 또한 2016년 6월 한국수력원자력이 추혜선 정의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원전 안전사고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10명이었다. 부상자도 182명에 달했다. 부상자의 91%인 166명이 하청업체와 하도급 업체 직원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해 7월에는 현대건설이 3년간 원전공사현장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121건을 은폐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노동자 121명이 손과 발, 갈비뼈 등에 골절을 입었지만 이런 사실이 고용노동부는 물론 발주처인 한수원에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보고되지 않은 부상 등을 고려하면 정범진 교수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그알’ PD가 공개한…친일파와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 코리아헤럴드
배정훈 PD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하나는 ‘친일파 후손’의 집, 다른 하나는 독립을 갈망하다 ‘빨갱이 자식’으로 평생을 숨죽여 살아온 집”이라는 글과 함께 사진 두 장을 올렸다. 배 PD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친일파 후손의 집은 높고 단단한 담벼락에 으리으리한 외관을 하고 있다. 반면 어느 시골 마을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조그만 집은 제대로 된 담벼락이나 현관문도 없이 허름하다.
배 PD는 “어디에서부터 이 두 집안 사이에 놓였을 격차를 이해해야 할까”라며 “적폐의 대물림 앞에서도, 자비가 필요한 걸까”라는 씁쓸한 마음을 드러냈다. 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 청산 문제와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한눈에 보여준다.
실제로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고 있는 가난과 서러움, 교육받지 못한 억울함, 그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보상을 강조하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의 탈원전 계획은 놀랍게 유사하다 814 프레시안
[기고] 미국 원자력발전의 흥망성쇠
1979년 펜실베이니아주 쓰리마일 아릴랜드 원전사고 이후, 미국의 원자력 산업은 20년 이상 동면했다. 2000년대 초, 전력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 연방정부의 격려와 함께 미국의 전력회사는 신규 원자로 건설 허가 신청을 시작했다.
그 결과 조지아주의 보글 원전 2기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버질 시 서머 원전 2기가 신규 건설에 착수되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해 미국의 전력수요가 늘지 않았고, 프래킹 기술과 함께 값싼 천연가스가 시장에 쇄도했다. 게다가 재생에너지, 특히 풍력은 경쟁력이 높아졌다. 그 결과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이 상대적으로 점차 악화되었다.
게다가 신규 건설 원전 4기는 모두 비용초과 및 공기지연으로 수십억 달러 비용이 상승하였다. 결과적으로 2017년 초, 4기의 원전을 건설하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높은 건설비용 때문에 파산했다. 7월 31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버질 시 서머 2기는 고비용문제로 건설 중단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조지아주 보글 원전 2기의 건설 계속 여부는 8월말에 결정될 예정이다. 원자력발전의 선두주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이다.
본 글은 미국 원자력발전의 흥망성쇠에 대해서 원자력발전 용량 추이 차원에서 분석을 수행하였다.
1970년대 미국 원자력위원회는 미국의 원자력발전 용량 추정에 있어서 비현실적이었다. 1974년 미 원자력위원회가 추정한 미국의 장래 원자력발전 용량을 그림 1에 주었다. 그림 1에 의하면, 2008년 미국의 원자력발전 용량은 약 2,000 GWe(1GWe=100만kWe)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의 원자력발전 총량은 약 100 GWe로 총 전력의 약 20%를 차지하였다.
그림 1. 197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가 전망한 미국 원자력발전 용량
2017년 8월 초 미국은 100기 원전이 가동 중이고, 총 전력생산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원자력발전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추이를 그림 2에 주었다.
2013년 이후 현재까지 플로리다, 위스콘신, 캘리포니아, 버몬트, 네브래스카에서 5기의 원전이 정치적 반대와 가스발전과의 경쟁력 약화로 폐쇄되었다. 쓰리마일 아일랜드와 캘리포니아의 디아블로캐넌을 비롯한 6기의 원전이 기술적으로는 더 오랜 기간 가동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2025년 이내에 폐쇄될 예정이다.
그림 2.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미국 원자력발전 용량 추이
2017년 6월말 미 에너지정보국 주최 에너지 컨퍼런스에서 원자력경제컨설팅그룹의 에드워드 키는 향후 미국 원자력발전 용량 추이에 대해 그림 3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
그림 3. 2080년까지 미국 원자력발전 용량 전망
그림 3에 의하면, 미국은 2043년에 현재 원전 발전 용량의 절반으로 줄어들고, 2050년이면 10%로 줄어들며, 2081년이면 탈원전을 하는 것으로 전망된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국내 원전 운영이 2080년경에 끝나는 우리 정부의 탈원전 정책 결과와 유사하다.
재미 핵물리학자인 강정민 박사는 전세계 240만 명이 회원으로 있는 비영리 환경단체 연합인 NRDC(Natural Resources Defense Council, 천연자원방어위원회) 선임연구위원입니다.
참고문헌:
⦁Molly Samuel, “How The Dream Of America’s ‘Nuclear Renaissance’ Fizzled,” NPR, August 6, 2017
⦁Thomas B. Cochran, et al., "Fast Breeder Reactor Programs: History and Status," A research report of the International Panel on Fissile Materials, February 2010
⦁"Nuclear Retirements – The Unknown Future of Nuclear Power in the United States," EPIS, LLC, November 2, 2016
⦁Brad Plumer, "How Retiring Nuclear Power Plants May Undercut U.S. Climate Goals," The New York Times, Jun 13, 2017
⦁Edward Kee, “The Future of U.S. Nuclear Power,” 2017 EIA Energy Conference, Washington, DC, June 26 – 27, 2017.
불로소득 매년 400조...보유세 강화, 지금이 적기 814 프레시안
[기고] 국민의 2/3가 보유세 강화에 찬성하고 있다
사실상 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부동산 대책이라 할 수 있는 '8.2대책'이 발표된 이후, 집값 상승세가 꺾였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시장 억제책이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시장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과연 다주택자들이 양도세 중과에 대한 부담을 느껴 투기용 보유 주택을 내놓을 것인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서 과거 참여정부의 경험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대책의 완결판이고 할 수 있는 2005년 '8.31대책'에서는 종합부동산세로 투기 심리에 철퇴로 가하면서 2주택자에게는 50%, 3주택 이상에겐 60%의 양도세 중과를 발표하고 실행은 1년 유예했지만, 다주택자들은 기다렸다.
그런데 투기수요 차단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대책, 그러면서 시장 친화적 정책 수단인 보유세 강화는 '8.2대책'에서 왜 제외시켰을까? 이에 대해서 김현철 대통령 경제보좌관은 보유세 강화는 세제 전체 틀에서 고민해야 할 사항이라서 제외했다고 해명했지만, 보유세 강화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보유세 강화 하면 늘 나오는 것이 '조세 저항'이다. 그러면 실제로 저항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바꿔 말하면, 보유세 강화에 얼마나 찬성할까? 이와 관련해서 여론전문조사기관인 리얼미터가 지난 10일 보유세 강화 여론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놀랍게도 67.6%, 즉 국민의 2/3가 보유세 강화에 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반대 여론의 핵심층은 아마도 소수의 부동산 과다 보유 개인이나 법인일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여론 지형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면 정부는 왜 이 '소수'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걸까? 바꿔 말해서 3분의 2나 되는 다수가 지지해도 추진하지 못하는 걸까? 아마도 이들이 경제권력과 정치권력과 언론권력, 심지어 종교권력까지 쥐락펴락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67.6%의 국민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필자는 그들이 바로 촛불혁명을 이끈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문재인 정부를 세운 촛불시민이 보유세 강화에 적극 지지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시민은 왜 보유세 강화에 찬성할까? 망국적 현상, 공화국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부동산 투기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촛불시민들이 청산을 요구하는 적폐세력이 주로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부동산이고, 그들의 주식(主食)이 부동산 불로소득이며, 이 불로소득을 환수하여 투기를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안이 보유세 강화라는 것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논리 비약일까?
핵심은 문재인 정부가 보유세 강화를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조세저항을 극복하고 국민 절대다수의 '적극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방안도 이미 나와 있다. 보유세 강화를 통해서 마련한 세수 전액을 기본소득으로 분배하면 된다. 국민의 90% 이상이 기본소득의 순(純)수혜가구, 그러니까 보유세 납부액보다 기본소득으로 돌려받는 금액이 많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것은 보유세 강화가 불평등 해소에도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도 문재인 정부가 유념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 중 하나가 불평등 해소다. 불평등 심화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부동산이다. 토지+자유연구소가 자체 추산한 바에 따르면, 매년 발생하는 부동산 불로소득이 무려 400조 원에 이른다. 임금소득에는 못 미치는 규모지만 부동산 소유 불평등이 극심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발생한 400조 원은 부동산 과다 보유 개인이나 법인이 가져갔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부동산이 불평등 심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유세를 확실하게 강화하면 불로소득인 매매차익은 크게 줄어들고 (귀속) 임대소득의 상당 부분도 환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보유세 강화는 주택에만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투기수요는 주택이 아닌 상가ㆍ빌딩 혹은 개발이 될 만한 토지 등과 같은 부동산으로 언제든지 몰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부동산에, 그리고 건물이 아니라 토지에 집중해서 보유세를 강화해야 투기수요는 비로소 차단될 수 있다.
이처럼 적폐청산을 내걸고 당선된 문재인 정부는 보유세 강화에 더 이상 머뭇거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세력의 주식(主食)인 부동산 불로소득을 환수할 수 있는 보유세 강화를 발표하고 추진해야 한다. 국민의 3분의 2가 보유세 강화에 동의하고 있는 지금, 국민의 75%가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지금이 보유세 강화의 적기다! 무엇보다 촛불시민들이 이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포스코, 세계적인 기업의 세계적인 환경파괴 [함께 사는 길]
천연 열대림 파괴하며 팜유 판매하고 대산호초 훼손하며 광산개발 사업
2015년 8월 세계 최대 규모의 국부펀드인 '노르웨이 연기금(GPFG)'이 포스코대우와 모회사인 포스코를 투자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대우가 인도네시아 파푸아지역에서 운영하는 팜유 농장인 PT. BIA(포스코대우의 자회사)가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환경 파괴"를 유발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2014년 말 기준으로 포스코 지분 0.9퍼센트, 포스코대우 지분 0.3퍼센트를 보유하고 있던 GPFG의 투자 철회가 포스코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진 않았다. 그러나 전 세계 주식을 평균 1.3퍼센트 보유한 거대기금인 GPFG가 환경을 파괴하는 산업에 투자를 중단하거나 회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GPFG와 뜻을 같이하는 다른 투자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실제로 GPFG의 포스코에 대한 투자 철회 발표 이후 국제사회가 포스코를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
▲ 포스코대우가 인도네시아에서 열대림을 베어내고 팜류농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마이티어스
지구상 마지막 남은 열대우림 훼손하는 자 누구인가
지난해 국제환경단체 '마이티어스(Mighty Earth)'와 환경연합은 인도네시아의 시민사회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지는 한국계 기업 코린도의 열대림 파괴 실태를 한국과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대책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당시 <로이터>, <가디언> 등 외신들은 코린도가 팜유 농장 건설을 위해 열대림을 무분별하게 베어내고, 체계적으로 방화를 저지른 곳이 멸종위기종인 나무캥거루가 서식하는 곳임을 지적했다. 코린도의 환경파괴 논란이 국제사회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코린도는 환경연합에 보낸 공식 해명자료를 통해 "당사의 사업장 인근은 나무 캥거루의 서식처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라며 이 사실을 부정했다. 그런데 지난 2월 17일 코린도의 사업장 인근에서 팜유농장을 운영하는 포스코대우가 발행한 '2016 PT. BIA 환경사회 보고서'에서 이를 뒤집는 조사 결과가 확인됐다. PT. BIA는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팜유농장 사업지역 내에 서식하는 멸종위기 또는 희귀동식물을 조사해 발표했는데, 이 중에는 나무캥거루와 극락조 등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 등재된 수많은 멸종위기종이 있었다.
나무캥거루가 뛰놀고 천국의 새라 불리는 극락조가 노래하는 인도네시아의 외딴 섬 파푸아에서 PT. BIA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기에
국제 언론의 비판에 직면해 있는 것일까. PT. BIA는 파푸아(Papua)주 메라우케(Merauke)시 을릴린(Ulilin)구에서 서울 면적의 60퍼센트에 달하는 3만4195헥타르(약 1억260만 평) 규모의 팜유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9월 PT. BIA 지분의 85퍼센트를 인수해 경영권을 획득한 포스코대우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해당 사업을 진행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PT. BIA는 코린도의 팜유농장 인근에 있는데, 그들의 관계는 그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가까워 보인다.
ⓒ마이티어스
지난해 9월 코린도와 포스코대우가 팜유농장을 확장하면서 대규모 환경파괴를 저지른 사실을 밝힌 보고서 '불타는 낙원(Burning Paradise)'을 작성한 '에이드인바이런먼트(Aid Environment)'의 앨버트 탠 케이트 조사관은 <시사IN>과의 인터뷰(2016년 6월 10일 자)에서 "코린도그룹과 포스코대우는 매우 친밀한 관계로 서로 돕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대우 관계자도 <시사IN>과의 통화에서 "20년 이상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활동한 코린도그룹으로부터 식재와 농장운영에 한해서 조언을 얻은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래서일까? 포스코대우가 팜유농장 개발을 위해 산림을 정리하는 방식이 코린도의 그것과 유사하다.
환경연합은 지난 6월 16일 보도자료를 배포해 PT. BIA가 팜유의 원재료인 기름야자나무를 재배하기 위해 사람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열대우림을 지속해서 파괴해온 사실을 고발했다. PT. BIA는 2015년 9월에서 2017년 4월까지 약 9900헥타르의 산림을 정리했으며, 이 중 2400헥타르는 불과 올해 1월에서 4월 사이에 빠르게 정리했다. 즉 PT. BIA는 2012년 이래 2만6500헥타르의 산림을 파괴했고, 이 중 상당부분이 1차림에 해당한다. PT. BIA의 자체 사업계획서에도 "대부분 지역이 아직 천연 열대림으로 덮여있다(most of the area is still covered by virgin tropical rain forest)"고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무분별한 산림파괴는 전 세계 주요 팜유 구입처가 제시한 '산림파괴 금지정책(No Deforestation Policy)'을 위반하는 것이다. 산림파괴 금지 정책을 도입한 팜유 구입처는 열대림과 이탄지(이탄이 집적되어 있는 토양으로 습지, 늪 등에 수생 식물·선태류 및 그 밖의 것이 다소 부식화되어 쌓인 것으로서 원식물의 조직을 맨눈으로 식별할 수 있다)를 파괴하지 않고, 인근 주민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으며 생산된 팜유를 구입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세계 최대 팜유 취급 업체이자 업계 최초로 산림파괴 금지 정책을 채택한 윌마(Wilmar)는 지난해 7월 코린도그룹과 거래를 중단했다. 세계 팜유 거래량 점유율 90퍼센트를 차지하는 기업들이 산림파괴 금지 정책을 채택했으나 코린도그룹과 포스코대우는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가 팜유 구매처에게 산림파괴 금지 정책을 준수하지 않는 공급처와 거래하지 말라는 강한 압력을 넣고 있기 때문에 포스코대우와 코린도가 이 정책 기준을 지키지 못한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지난해 발간된 '불타는 낙원' 보고서는 PT. BIA가 토지 정리를 위해 고의적이고 체계적으로 방화를 이용했음을 밝혔다. 2015년 9월과 10월에만 사업장 동쪽부지 2만9400헥타르에서 158개의 화재 지점이 포착되었는데 그해 초 벌목이 이루어진 지역에 화재가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일까. 이같이 토지 정리를 목적으로 저지르는 고의적인 방화는 사업적으로는 손쉽고 값싸지만 생태계 파괴뿐만 아니라 심각한 연무로 시민들의 건강을 해치기에 결국 어렵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15년에만 6000여만 명이 산불로 인한 연무에 노출된 바 있으며, 인도네시아 환경보호관리법 34/2009호는 이 같은 방화를 명백한 불법으로 규정하고 위반 시 벌금 또는 징역형에 처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 포스코대우의 팜유농장. 팜유농장과 열대림 지대가 극명하게 구별된다. ⓒ마이티어스
포스코대우는 인도네시아 천연 열대림을 파괴하면서 생산한 팜유를 이제 국제시장에 판매할 예정이다.
'2016 PT. BIA 환경사회 보고서'는 "2017년 1분기에 첫 팜 착유공장을 완공하고 팜유 생산 및 판매를 개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포스코대우가 환경을 파괴하며 만든 '더러운' 팜유를 성공적으로 판매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마이티어스가 약 50개에 달하는 주요 무역업체와 소매업체에 문의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재 포스코대우나 PT. BIA로 부터 팜유를 공급받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다. 이 중 20개가 넘는 업체는 자사 정책을 준수할 때까지 포스코대우와 PT. BIA를 공급처나 투자 대상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다른 몇몇 업체는 자사의 정책은 PT. BIA를 공급처에서 제외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처럼 세계시장은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멸종위기종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반환경적인 생산과정을 통해 생산된 팜유를 거부하고 있다.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은 구매처뿐만 아니라 투자자에게도 외면받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 최대 국부펀드인 노르웨이 연기금은 2015년 8월 17일에 환경파괴를 이유로 포스코대우를 투자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이미 밝혔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 '더러운 은행가(Dirty Bankers)'를 통해 홍콩상하이은행(HSBC은행)의 PT. BIA에 대한 자금지원을 폭로하였고, 결국 HSBC은행의 '산림파괴 기업 자금 지원 금지 정책(No Deforestation financing policy)'을 이끌어 냈다. 그린피스는 이 새로운 정책의 첫 번째 이행으로 HSBC은행이 PT. BIA의 환경파괴에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포스코대우와 상업적 관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 최대 은행인 BNP파리바은행 역시 얼마 전 '책임 있는 팜유기업에 자금지원 정책(responsible palm oil financing policy)'을 발표했다.
이처럼 국제 팜유시장에서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생산된 팜유로의 전환은 이미 진행 중이며 앞으로 이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질 것이다. 포스코대우가 환경파괴를 멈추기 위한 실질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사업 파트너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곧 세계시장에서 포스코대우의 도태로 이어질 것이다.
세계 최대 광산개발사업에 위협받는 대산호초 지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죽기 전 꼭 봐야 할 자연 절경'을 같은 곳의 순위를 매길 때 빠지지 않는 곳이 있다. 호주 북동부에 위치한 세계 최대 산호초 지대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Great Barrier Reef)'.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빼어난 경관과 생태적 가치가 뛰어난 이곳에 400여 종의 산호초와 수천 종의 물고기, 돌고래, 멸종위기에 처한 거대한 바다거북(green turtle), 듀공(Dugong, 바다소) 등 무수한 바다 생물이 서식한다. 에메랄드빛 바다 곳곳에 자리 잡은 다양한 모양의 산호초들과 그 사이를 노니는 물고기들의 향연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곳에 찾아와 스쿠버다이빙이나 스노클링 등을 하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몸소 체험하고 간다. 과연 우리는 아름다운 이곳을 언제까지 맘껏 누릴 수 있을까.
ⓒ마이티어스
올해 3월 호주의 연구팀이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가 소멸 위기에 처했다고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바닷물 온도가 상승하면서 산호가 하얗게 탈색되는 '백화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지난해 백화현상은 1998년과 2002년 때 발생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사상 최악의 백화현상이었다고 발표했다. 1998년과 2002년에는 산호초의 40퍼센트 이상이 백화현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작년에는 단 9퍼센트만이 이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속도로 탄소 배출량이 증가한다면 앞으로 20년 안에 산호초 전체가 사라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기후변화 대응을 통해 바닷물 온도 상승을 막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이미 빠르게 훼손되고 있는 그레이트배리어리프에 더욱 암담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도 최대 석탄수입업체인 아다니 그룹의 자회사 아다니 마이닝사(Adani Mining)가 호주 퀸즐랜드 주 갈릴리(Galilee) 유역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카마이클(Carmichael) 광산개발사업'을 곧 착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개발사업은 광산개발과 함께 광산에서 채굴한 석탄을 수출하기 위한 철도와 항만 건설을 포함하고 있는데 바로 이 항만을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인근에 위치한 애봇 포인트(Abbot Point)에 건설할 계획이다. 기존 석탄항인 애봇 포인트항을 세계 최대 석탄항으로 확장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2010년부터 추진되던 이 사업은 지역 원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한동안 지연되었는데, 2014년 포스코가 카마이클 광산과 애봇 포인트 항만을 연결하는 약 20억 호주달러 규모의 철도(388킬로미터) 사업의 EPC(설계·조달·시공)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다시 활기를 띄었다. 철도가 완성되면 연간 약 6000만 톤의 석탄운반이 가능해진다. 또한 포스코는 같은 해 12월에 애봇 포인트에 약 10억 호주달러 규모의 수출항만 '터미널 제로' 건설을 위한 EPC 우선협상대상자로 추가 선정되었다. '터미널 제로' 항만은 아다니 그룹이 호주에서 시행하는 광산개발사업 중 하나로 향후 카마이클 광산 등에서 채굴한 석탄을 아시아 지역에 수출하기 위한 요충지 역할을 하게 될 전망이다. 당시 국내 언론은 포스코의 해외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 소식을 축하하기 바빴고, 2015년 상반기에는 공사를 착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결국 2015년 7월 퀸즐랜드 주정부와 연방정부는 이 사업을 최종 승인했으나, 환경단체들이 연방환경법 위반을 들어 승인 무효소송을 제기하여 법적공방이 벌어졌고, 사업은 계속 지연됐다. 그러나 지난 6월 8일, 호주언론은 아다니그룹 이사회의 카마이클 광산개발사업 최종 승인과 호주 정부의 적극적인 사업 독려에 힘입어 이르면 내달 초부터 사전 공사작업이 시작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보도하였다. 약 7년간 수많은 부침을 겪으며 끌어온 이 사업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아다니는 최소 60년 동안 카마이클 광산을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약 23억 톤의 석탄이 채굴될 것으로 추측된다. 채굴한 석탄을 모두 태운다면 46억 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이는 기후변화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편, 이 광산을 운영하는 데 연간 120억 리터의 물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아다니는 이 엄청난 양의 물을 광산 인근의 강과 지하 대수층에서 취수할 계획이다. 이로 인해 광산 인근의 지하수위가 현격히 떨어질 가능성이 높고, 광산부지 인근에서 발견된 두 종류의 희귀 천연온천은 지하수위의 저하로 영향을 받을 것이며 이 중 하나는 완전히 마를 것으로 예상된다. 항만 건설사업 역시 해양생태계 파괴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그레이트배리어리프는 1960년대 이래로 기후변화와 석탄운반선의 대규모 기름유출 등으로 인해 이미 50퍼센트 이상 훼손됐다. 여기에 아다니가 계획한 준설작업 및 해저 침전물 덤핑작업이 진행되면 멸종 위기 생물에 대한 위협은 물론이고, 해양생태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또한 항만 건설 시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지대에 매년 500척이 넘는 석탄수송선이 추가로 운항하게 되어 선박사고 등으로 인한 기름 유출 및 여러 요인으로 인한 환경파괴 위험을 피할 수 없다.
▲ 세계 최대 산호초 지대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인근에 석탄 수출항을 건설하는 포스코가 자본을 대고 있다. ⓒ마이티어스
이 사업의 부당함은 사업 홍보에 사용한 허구적인 홍보문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첫째, 카마이클 석탄은 고품질이다? 호주는 고품질의 석탄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카마이클 광산 석탄의 품질은 호주 석탄 품질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며 품질이 좋지 않은 인도 석탄의 평균품질 정도에 불과하다. 아다니는 카마이클 광산에서 출하 예정인 석탄이 에너지 함량이 낮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지만 이 석탄의 품질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질 나쁜 화석연료는 더욱 큰 환경파괴를 초래하며, 이에 카마이클 광산에서의 석탄채굴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이 사업을 통해 1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 할 것이다? 퀸즐랜드 토지 재판에서 아다니의 증인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생겨날 일자리는 단지 1464개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즉, 일자리 창출효과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수천 개의 일자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여러 정치인과 아다니를 막지는 못하였다. 호주 녹색당 상원의원 라리사 워터스 역시 “아다니가 만들 수 있는 일자리는 1400개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며 “노동당이 태양열·풍력에너지 개발프로젝트에 투자하면 3200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목소리 높였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광산개발사업을 한다는 명분은 합당하지 않다.
셋째, 인도의 에너지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다니의 석탄이 필요하다? 전기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전기를 이용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인도에서 태양광발전을 통한 전기는 석탄 수입을 통한 화력발전보다 훨씬 저렴하며 앞으로 그 차이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측된다. 석탄 수입을 통해 에너지 빈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인 동시에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없다. 인도 정부의 정책으로 석탄 수입을 중단할 수 있으며 이는 아다니의 카마이클 광산개발사업을 중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카마이클 광산사업에서 한국과 포스코가 중요한 이유는?
아다니의 카마이클 광산개발사업에 필요한 비용이 220억 호주 달러(약 18조 원)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호주 최대 은행인 NAB(National Australia Bank), 미국의 씨티그룹,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유럽의 독일은행, 바클레이, HSBC, 스탠다드차타드 등 14개의 세계 주요 금융기관들이 기후변화 대응과 자연보호를 위해 이 사업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아다니는 북미와 유럽에서 자금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거래한 적이 없던 아다니는 인도와 한국 금융에 기댈 여지가 크다. 작년까지 이 사업이 지연됨으로 인해 많은 업체들이 아다니에게서 떠났지만, 포스코는 여전히 아다니의 파트너로 남아있다. 아다니의 발표대로 곧 사업을 시작한다면 포스코 역시 중요 파트너로서 이 사업에 착수하게 될 것이다. 한국수출입은행은 포스코가 카마이클 광산개발사업에서 철도 및 항만사업의 우선협상자로 선정될 당시 지지 서한을 보내 포스코의 우선협상자 선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만큼 한국수출입은행도 이 사업에 자금을 지원할 가능성이 크다.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사업을 막기 위해 한국과 인도에서의 재정지원을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있다. 포스코와 한국수출입은행이 이 사업에 관여하지 않을 때, 이 사업을 백지화하여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를 지켜낼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는 것이다.
세계 환경파괴 논란의 중심에 포스코가 있다. 환경파괴는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의 산림이 전(全) 지구적 환경에 이로움을 주는 것처럼 그 산림의 파괴는 전 지구적 환경에 위해를 가할 게 자명하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호주의 땅과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다. 포스코가 파괴하고 있거나 파괴할지도 모를 환경은 지구촌 모두의 환경이다. 대규모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대규모 개발사업을 막기 위한 노력이 학계에서, 법정에서, 금융권에서, 거리에서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노력의 성과가 일부 나타나고 있으며 개발사업의 주체 중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업체도 늘어나고 있다. 지속가능발전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은 이미 시작되어 점점 큰 줄기로 흐를 것이다. 심각한 환경파괴를 야기하며 생산된 물건을 구매하지 않으려는 업계와 이에 투자하지 않는 금융권의 움직임은 이미 국제적 흐름을 이루고 있다.
▲ 카마이클 탄광지대. ⓒ마이티어스
포스코,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라
'포스코 더 그레이트:POCSO the Great'. 지난 2014년 세계 경제 침체와 글로벌 철강시장의 공급과잉, 내부 경영 방만 등의 문제로 실적 부진을 겪던 포스코가 야심 차게 제시한 비전이다. 당시 권오준 회장은 주주총회에서 "차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철강 경쟁력을 높이고 재무와 조직구조를 쇄신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철강사로 거듭나겠다"며 철강기업으로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며 위기를 극복할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원재료 가격과 자동차·조선·건설산업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철광산업이 급변하는 시장환경에서 위기감을 느낀 포스코는 기존의 철광구조 사업구조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실제로 포스코는 홈페이지를 통해 "철강에서 비철강으로, 제조에서 서비스로, 전통에서 미래로 사업영역을 확대하여 철강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기존 사업과 신규 사업이 조화를 이루는 미래형 사업구조로 전환하고 있다"라고 밝힌다. 포스코가 말하는 '미래형 사업구조'에 환경파괴를 최소화하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의 사업구조 변화가 핵심적으로 포함되기 바란다. 그래야만 지구의 미래는 물론 포스코의 미래도 지속가능할 것이다. '지구의 벗' 환경운동연합은 인도네시아와 호주의 사례와 같이 포스코를 비롯한 세계각지에서 한국(계) 기업에 의한 환경파괴를 막기 위한 활동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김혜린 환경운동연합 중앙사무처 국제연대 활동가naserian@kfem.or.kr
한국의 사학은 교육기관인가, 탐욕스런 자본인가? 814민중
때는 1986년,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전국 각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때 일이다. 조선대 총장 박철웅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방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7시에 전체 교수 및 교직원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모든 교수들의 출석 여부를 일일이 확인한 뒤 교수들에게 운동장 두 바퀴를 도는 이른바 구보 훈련(!)을 지시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성의 상징이라는 대학 교수들이 총장의 지시에 따라 헉헉거리며 운동장을 뛰었다. 구보가 끝나면 1970년대 국민학교 애국조회처럼 총장의 훈화가 30분 동안 이어졌다. 이 훈화에서 박철웅이 남긴 유명한 이야기 한 대목.
“시국이 혼란스러울수록 나서는 놈만 손해야. 일제 때 독립운동 한다고 나대던 놈들 보라고. 이 박 총장처럼 잘된 놈 있어?”
그런데 이 엽기적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성인을 자처하는 교수들 중에서도 가끔 이런 미친놈이 있기 마련이다. 기회를 틈타 총장에게 아부하고 싶었던 한 교수가 총장의 훈시가 끝나자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총장님, 우리 한 바퀴 더 돕시다!”
한국은 사학(私學)의 천국이다.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사학의 비중이 높은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 대학 중 사학의 비중은 무려 80%에 이른다. 국공립 대학 비율은 20% 밖에 안 된다. 반면 극강의 천박한 자본주의를 자랑하는 미국조차 국공립대 비중이 70%나 된다. 스웨덴 독일 핀란드 등 복지강국의 국공립대 비중은 90%, 호주의 국공립대 비중은 무려 98%다.
문제는 이처럼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 사학의 성격이 ‘헌신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라 ‘탐욕스런 자본’에 훨씬 가깝다는 점이다. 한국 사학은 교육보다 돈을 버는데 훨씬 관심이 많다. 한국 교육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기형적인 이유는 바로 이 탐욕적인 자본이 교육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친일 자본으로 출발한 한국의 사학
한국 사학재단의 역사는 대부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기에 시작됐다. 이때만 해도 사학재단을 만든 이들은 강력한 항일운동가까지는 아니어도, ‘민족이 강해지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민족주의적 계몽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제도 식민지배 초기에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계몽주의자들이 항일운동가들보다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대륙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일제는 민족주의적 계몽주의자들마저 압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바탕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학마저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해방이 됐을 때 살아남은 사학들은 대부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이들이었다. 이들 대부분 학생들을 정신대와 학도병으로 보내는 데 혁혁한 전과(?)를 세운 자들이었다.
사학의 또 다른 뿌리는 해방 이후에 형성됐다. 해방 이후 한국에는 초중고 숫자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1945년에 2800개였던 초등학교는 1955년 4200개로 늘어났고 1945년 165개밖에 없었던 중고등학교는 1955년에 1500개로 급증했다.
이처럼 학교가 늘어난 이유는 이승만 정부가 교육의 주도권을 사학에 넘긴 탓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의 교육열은 매우 높았지만 정부는 교육기관을 늘릴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 지주들에게 “학교를 지으면 재산을 몰수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친일파 지주들에게 일종의 구원의 목소리였다.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도 넘기고 교육자 소리도 듣는 일석이조의 조건이었다. 여기에 농지개혁을 피해 사학을 세운 지주들까지 합류하면서 한국의 사학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재산 도피처라는 성격이 크게 강화됐다. 애초부터 사학의 설립 목적이 교육이 아니라 재산보호와 이윤추구였다는 이야기다.
막대한 보수 카르텔을 구축한 한국의 사학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선전으로 여대여소 국면을 만든 참여정부는 이듬해 사학법 개정에 나섰다. 개정안 핵심은 사학의 비리를 감시하기 위해 개방이사제롤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간단한 감시기구의 도입에 온 나라의 보수 세력들이 그야말로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장외투쟁에 나서며 “사학법 투쟁은 나라를 위한 투쟁이다. 끝까지 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보수 세력이 이 문제에 결사적 투쟁 의지를 내비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사학의 문제가 단지 수백 개 재단의 비리 문제를 넘어서서 100년 전통의 친일파 집단들이 기득권을 수호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2014년 정의당 정진후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교육부 등 정부 고위공직자 출신이 퇴직 후 사학재단의 이사에 오른 경우가 262명이나 됐다. 교육부 출신은 191명, 장·차관 출신은 41명이었다. 이러니 한국 사회가 사학의 고리에 더 단단히 엮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오랫동안 독재정권과 결탁하면서 이념적으로 극우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다. ‘사학비리의 지존’으로 불리는 상지대 김문기 이사장은 1986년 강사를 채용할 때 1000만 원을 요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격렬한 투쟁을 마주해야 했다.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양지웅 기자
그런데 이 무렵 상지대 본관 옥상 위에서 대량의 삐라가 살포됐다. 삐라에는 ‘가자 북의 낙원으로, 김일성 수령님과 협조해서 통일 이룩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치안본부 경찰들이 상지대에 들이닥쳤고, 학생 간부 150명이 체포되며 학교가 쑥대밭이 됐다. 하지만 수사결과 이 삐라를 뿌린 사람은 학교 기획실장으로 일하던 김문기의 사위로 드러났다. 자신의 비리를 덮기 위해 용공조작까지 서슴지 않는 자들, 이들이 대한민국의 사학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사학개혁,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
2005년 개정됐던 사학법은 보수 세력의 엄청난 반발(이라고 적고 ‘지랄’이라고 읽어 마땅하다)에 2007년 재개정됐다. 100년 전통의 친일자본이 장악한 사학은 생각보다 매우 막강했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같은 주요 매체까지 엮여 있어 이 카르텔을 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2005년 사학관계자들이 국회 앞에서 집회를 열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학교문을 닫겠다고 협박성 발언을 늘어놓았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냉정하게 말해 한국의 사학은 교육기관이라는 명목 아래 세금을 축내는 학교기업이다. 그것도 뿌리가 친일자본에 있는 명백한 이윤추구형 기업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사학만큼 이윤에 집착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도입한 역사보다 한국의 사학들이 비정규직 교수를 도입한 역사가 훨씬 길다. 최근 대놓고 “돈 안 되는 학문은 안한다”며 인문학 무시 풍토를 주도하는 곳도 사학이다.
한 사립대 총장(이사장 아들)이 학생들 등록금 1억 5000만 원을 단란주점에서 펑펑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학의 추악한 일면이 다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지난달 27일 교육부가 공개한 전북의 한 사립대 종합감사 결과다. 교육부가 파악한 이 학교의 배임 미치 횡령 금액은 31억 원에 이른다.
교육부는 이날 이례적으로 감사결과를 상세히 적은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교육부의 이런 적극적 태도는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에 명시한 ‘사학비리 근절을 위한 사립학교법 개정 추진’ 방침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교육부는 감사인력을 보강하는 한편 사학비리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으로 엄정 처리해 사학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도 올해 안에 안을 만들어서 사학법 개정을 다시 추진할 방침이다.
이 개혁에 보수세력들이 또 얼마나 한국 사회를 난장으로 만들지 매우 걱정스럽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난관을 반드시 돌파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교육을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비리집단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합의를 해내야 한다. 교육만큼은 자본과 이윤이 판치지 않는, 순수한 공적 교육의 장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85% “부자증세 잘했다”…72% “복지 위해 세금 더 낼 수도” 814 한겨레
문재인 정부 100일 여론조사
대기업·자산가·고소득층 증세 경제적 상층 빼곤 지지 압도적 ㅠ60대도 73%가 긍정 평가
증세 지지, 4개월 전보다 상승 보수층도 62%가 공감 나타내
우리나라 국민의 85.1%가 대기업·고소득층 등에 대한 ‘핀셋 부자증세’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더 나은 복지를 위한 증세 의향’에 대해 국민 71.7%가 동의를 표해 최소한 ‘중부담-중복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겨레>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1~12일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대기업·자산가·고소득층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도록 세법을 개정하는 것에 대해 85.1%가 ‘잘한 일’이라고 답했고, 11.3%가 ‘잘못한 일’이라고 평가해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다소 편차는 있지만 이런 흐름은 세대·지역·이념성향·지지정당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세대별로는 세법 개정에 대해 30대(91.1%)가 가장 높은 지지를 보냈고, 40대(89.7%), 50대(85.4%)가 뒤를 이었다. 60대 이상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62.1%)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은 73.2%가 세법 개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계층별로는 엇갈리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스스로를 경제적 상층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들은 부정 평가가 58.1%로 긍정 평가(41.9%)보다 16.2%포인트 높았다. 상층을 제외한 중상층(86.3%), 중간층(85.7%), 하층(88.0%), 빈곤층(77%)에선 모두 ‘부자증세’를 지지했다.
더 나은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71.7%가 세금을 추가 부담할 뜻이 있다고 답했다. 그럴 의사가 없다는 응답자는 26.2%에 불과했다. 19대 대통령 선거 전인 지난 3월30일~4월1일 실시한 한겨레-엠알씨케이(MRCK) 조사의 경우 같은 질문에 대해 65.3%가 증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4개월여 전과 견줘 이번 조사에서 증세에 찬성하는 응답자가 상승한 것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와 신뢰를 바탕으로 ‘내가 낸 세금이 국민의 복지 향상 등 필요한 곳에 사용될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감이 투영된 것으로도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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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자 74%가 ‘1060원 올린 내년 최저임금’ 긍정 평가
가장 잘한 일 “적폐청산”…못한 일은 “안보”
세대별로는 60살 이상(56.8%)을 제외한 모든 연령층에서 70% 이상이 세금을 더 낼 수 있다는 뜻을 표현했다. 자유한국당 지지층에서도 과반이 넘는 57.1%가 세금을 추가 부담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고, 국민의당 지지층은 60.0%, 바른정당 지지층은 64.6%로 나타났다. 자신의 이념성향을 ‘보수’라고 답한 이들도 62.0%가 증세 의사를 나타냈다. ‘복지 확대를 전제로 한 증세’에 우호적인 여론은 최근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흐름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지난 5월12~13일 한겨레-한국리서치 조사에서도, 새 정부가 가야 할 지향점으로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위험에 대해 사회보장 등 국가의 책임이 높은 사회’(70.5%)가 ‘세금을 적게 내는 대신 위험에 대해 개인의 책임이 높은 사회’(24.1%)보다 훨씬 높았다.
정우택 “문재인 정부 100일…낙제점 줄 수밖에 없다”
최초의 꽃은 하얀 목련을 닮았다 813 한겨레
과학자들 1억4천만년전 꽃 모양 추정 암술, 수술, 꽃덮개 세 부분으로 구성
과학자들이 추정한 최초의 꽃.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식물에는 겉씨식물과 속씨식물이 있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식물 36만여종의 대부분은 속씨식물이다. 속씨식물의 가장 큰 특징은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꽃의 목적은 자손을 퍼뜨리는 것이다. 식물의 생식기 역할을 하는 꽃의 맨처음 모습은 어땠을까?
학자들은 최초의 꽃은 지구 기온이 상승하면서 2억5천만년~1억4천만년 전 사이에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3억5000만~3억1000만년 전 최초의 식물이 등장한 지 1억~2억년이 지났을 때이자, 공룡이 지구를 배회하기 시작했을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의 꽃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지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많지 않다. 공룡에 비해 꽃은 너무나 연약해 화석으로 보존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속씨식물 화석은 1억3000만년 전 것이다.
과학자들이 재구성한 속씨식물 진화계통도. 노란색은 암수 한몸인 양성화, 파란색은 단성화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자료의 빈곤에도 최근 프랑스 파리슈드대와 오스트리아 비엔나대 등 공동연구진이 현재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토대로 최초의 꽃 모습을 추정해 과학저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지금까지 확보한 꽃 63개목 792개종, 1만3000여개의 특성에 대한 데이터와 화석 등을 통해 얻은 지식 등을 종합해 최초의 꽃을 추리해냈다. 이에 따르면 최초의 꽃은 5개 이상의 암술, 10개 이상의 수술, 그리고 이 둘을 보호하는 10개 이상의 꽃덮개(꽃잎, 꽃받침 등이 아직 분화하지 않은 상태) 등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연구진이 학술지에 공개한 내용을 보면, 컴퓨터 이미지로 재현한 최초의 꽃은 흰색 목련을 닮았다.
연구진이 제시한 꽃의 진화 경로는 양성화에서 단성화가 분화돼 나왔으며, 초기의 꽃을 구성하는 기관들은 지금처럼 나선형이 아닌 방사형으로 배열돼 있었으며. 진화가 진행되면서 기관의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평당 3000만 원 지역에 개발이 필요한가" 815 프레시안
[인터뷰 下] 도시계획·부동산 전문가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흑인, 범죄, 슬럼…. 미국 뉴욕 맨해튼 북부 흑인 밀집 거주지역 할렘 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할렘은 흑인 빈민가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흑인들만 거주하는 맨해튼 내부의 고립된 섬과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전형적인 서구 도심의 슬럼화 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과거에는 이곳이 백인 중산층 중심의 주요한 도심 지역이었다. 점차 도시기능이 빠져나가면서 슬럼화됐다. 그러면서 덩달아 기존 살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빈민층 흑인이 몰리기 시작했다. 값싼 임대료 때문이었다.
이런 할렘을 미국 정부가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 미국 중앙정부의 개입이 시작됐다. 도시재생을 목적으로 어퍼맨해튼강화지역(UMEZ)이라는 비영리기관을 설립, 각종 업체들이 이곳에 들어와 기업활동을 하도록 설득했다. 할렘에 들어오기 꺼리는 업체들에 막대한 지원금과 인센티브를 약속했다.
지자체인 뉴욕시도 마찬가지였다. 예술·문화관련 상점을 열기만 하면 고층 빌딩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기도 했다. 상점 허용 범위 안에는 대규모 영화 프랜차이즈 사업도 포함됐다.
그 결과, 지금의 할렘은 어떨까.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퇴임한 뒤, 2001년께 할렘가에 사무실을 차릴 정도로 도시의 이미지는 바뀌었다. 범죄의 온상, 슬럼화라는 이미지에서 사람이 살만한 공간으로 변했다. 할렘 주민의 98%를 차지하던 흑인은 열 명 중 여섯 명에 불과할 정도로 비중이 적어졌다.
도시재생. 구도심 등 낙후된 노후주거지를 새롭게 개선해 거주민 삶의 질과 지역발전을 향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대규모 철거 없이 주민들이 원하는 소규모 생활밀착형 시설을 설치하는 등 지역이 주도하고 정부는 지원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할렘을 변화시킨 이러한 도시재생 사업은 문재인 정부의 핵심 공약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초기부터 도시재생 사업, 즉 '도시재생뉴딜사업'을 핵심 실천공약으로 발표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진행된 뉴타운 사업처럼 대규모 개발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사람 중심, 소규모 개발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사업 의도가 좋다고 결과도 그에 상응해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낙후된 도시를 살리고 기반시설을 정부가 깔아주겠다는 정책 의도와는 별개로 막대한 예산이 적절하게 사용되는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도시계획 전문가인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지금 상황으로는 도시재생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제대로 준비도 돼 있지 않을뿐더러, 진행되는 사업이 사실상 정부 돈을 '빼'먹는 구조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래 그와의 인터뷰 전문.
(☞ 관련기사 바로가기 : [인터뷰 上]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실패? 아니다")
▲ 할렘 거리의 모습. ⓒAP=연합뉴스
"도시 재생 사업, 빨라도 너무 빠르게 하고 있다"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도 도시재생 사업은 발 빠르게 추진 중이다. 지난 5월, 국토교통부 내 도시재생 뉴딜사업 테스크포스(TF)팀이 발족됐으며 7월 초에는 ‘도시재생사업기획단’이 공식 출범했다. 앞으로 한 달간 지자체와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도시재생 뉴딜사업 선정계획'을 오는 8월 말 확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2월에는 사업지 110곳을 선정한다. 향후 전국 500곳의 도시재생을 목표로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해 연간 10조 원씩, 5년 재임 동안 총 50조 원을 투입한다.
김경민 : 재개발 재건축 중심의 뉴타운 사업과 달리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공원 주차장 도서관 상하수도 시설 등 소규모 생활밀착형 시설을 정부와 지자체 돈으로 만들어준다. 낙후된 지역 주민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막무가내 식으로 진행하면 여러 부작용이 생긴다. 사업의 타당성, 현실성, 그리고 효과, 지역사회에 미칠 영향 등을 면밀히 조사한 뒤,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국토부 발표 내용을 보면 문재인 정부 출범 3개월 만에 50조 원 규모의 사업이 확정된 셈이다. 빨라도 너무나 빠른 속도전이다.
프레시안 : 빠르게 진행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김경민 :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겠다. 약간의 설명을 하자면, 2012년~2013년 <프레시안>에 ‘김경민의 도시이야기’를 연재했는데, 대상지역이 당시 뉴타운개발에 묶여있던 창신동과 익선동, 가리봉동이었다. 해당 지역들은 산업자원과 역사자원, 문화자원이 있기에, 대규모 철거기반 사업을 해서는 안 되며, 해당 자원들을 이용한 도시재생전략 수립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창신동 같은 경우, 동대문패션상권의 제조를 담당함에도 지역의 가치가 지나치게 폄훼되었기에, 지인들과 함께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고 지역 내 쉐어팩토리(디자이너와 봉제공장 협업공간)를 열어서 도시재생사업에 민간영역의 가능성을 2013년부터 테스트하고 있다. 이하는 단순히 학문적 견지를 넘어서 지역 내 재생사업을 수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도시재생 관련, 정확한 예산 규모는 가늠하기 힘드나 올 하반기에만 수천억이 투여될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내년부터는 매년 10조 원의 자금이 총 500개 지역에 투입될 예정이다. (정확한 플랜을 알 수 없으나) 1개 지역에 대략 200억 씩이라 가정할 때, 5년간 1000억 원이 들어가는 구조로 읽힌다. 사실 이 정도 자금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런데 급조된 공약사항을 바탕으로 3개월 만에 만들어진 도시재생 사업에 어떤 계획과 청사진이 있는지 굉장히 의문스럽다. 도시재생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이런 사업이 필요한 다수의 침체된 지역이 존재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업계획은 면밀하게 구성되고 천천히 시도되어야 한다. 피해는 지역민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기 때문이다.
급조된 계획에 드라이브가 걸릴 경우, 아무리 윗선에서 좋은 의도를 갖고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정책 실행 실무조직이 해당 사업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일을 급박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여러 곳의 (한정된) 지역에 갑작스럽게 몇 백억이 투여되는데, 그 돈이 1년이라는 시간 안에 쓰여 져야 한다. 그리고 윗선에서는 사업진행을 지속적으로 체크한다고 할 때, 정책담당자는 자금을 어떻게 해서든 소진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도 주택도시보증공사(HUG – 도시재생뉴딜사업 자금 집행기관)는 이 어마어마한 자금을 어떻게 써야할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대로는 부동산 가격 상승 불가피하다"
프레시안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김경민 : 도시재생사업은 저소득 서민을 수혜대상으로 두고, 1) 이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이들의 거주가능성을 높여주는 주거복지측면과 2) 이들의 소득향상에 기여하는 지역활성화 측면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정책의 최종수혜자는 저소득서민이어야 하며, 재생사업이 아무리 좋다한들 이들이 지역에서 본의 아니게 쫓겨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도시재생사업은 하드웨어적 사업(주택 개선사업 포함한 주거환경개선사업과 지역센터와 같은 물리적 시설 개발)과 소프트웨어 사업(주거 바우처 확대와 직업교육 및 직업 기회 제공과 같은 비물리적 프로그램) 양자가 균형 있게 진행돼야 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이 한정된 지역에 단기간 (1년)에 몇 백억 원을 사용되어야 한다면, 소프트웨어 측면과 하드웨어 측면 중, 어느 곳으로 자금이 흐를 것 같은가? 이에 더해, 정책담당자들도 단기간에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실적 압박을 느낀다면 어떤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여할 것 같은가?
아마도 정책성과가 한참 후에 나타나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보다는 (건물 리모델링과 개발과 같은) 하드웨어 사업에 절대적으로 많은 자금이 투여되리라 본다. 그리고 이는 이미 시장 반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도시재생사업이 부동산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는 개발업체와 시공회사들, 부동산 중개인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신문 기사들마저도 도시재생뉴딜자금이 투여되는 지역의 부동산 시장이 어떠할지(토지가격이 오를지)를 논하지 않나?
다시,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현재 HUG는 사업비용 전체(토지매입비와 건물개발비)의 60~70%를 10년간 1.5% 저리로 대출 계획 중이다. 이 정도 장기간 저리대출기회는 사업이 진정으로 공공적이라 할 때, 정말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책을 기획한 정책당국의 의지는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기회를 잡아 사업할 사업자들의 역량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공익적 개발을 할 마인드가 있는 사업자가 있느냐. 이런 측면을 생각해볼 때 이 정책은 상당히 회의적이다.
도시재생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실제 201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고, 다양한 지역기반 조직들(NGO와 사회적 기업 등)이 활동하나, 이들이 순수한 민간기업들과 비교할 만큼의 사업역량이 있느냐는 별개다. 만약 현재와 같이 정해진 자금을 정해진 기간에 사용되어야 한다면, 결국 민간기업들이 재생사업영역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민간기업의 도시재생사업 참여를 반대하지 않으나, 현재와 같이 우리의 도시재생에 대한 인식이 일천한 가운데 민간기업들이 과연 공공적 마인드로 사업을 진행할지 아니면 생색내기용으로 갈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면, 10억 건물을 회사자금 3억 원을 투입하고 나머지 7억 원을 10년 만기 1.5% 이자(연 1050만 원 이자 – 월 100만 원도 안 되는 이자)로 매입가능한 구조라면, 결국 많은 회사들이 해당 사업에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토지확보를 위한 경쟁으로 이어질 것이고 부동산 토지가격 상승은 불 보듯 뻔하다.
프레시안 :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나.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사업을 진행할 인프라가 필요하다. 그것이 건물일 수 있다.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일 아닌가.
김경민 : 지역 공공성을 크게 괘념치 않으면서 수익률에만 급급한 업체들이 들어오게 된다면, 그 순간, 도시 재생 사업은 정부 예상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사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도시 재생 사업에서 작정하고 정부 돈을 빼 가려고 한다면, 지금 상황으로는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대비하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이다.
"도시 재생, 결국 원주민 쫓아내는 식 될 것"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도시 재생 사업이 소규모 뉴타운 사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시 재생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뉴타운 사업과 마찬가지로 개발 사업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개발 열풍으로 지정 지역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김경민 : 그렇기에 도시 재생 사업 지역 지정에도 신중함이 필요하다. 도시 재생 사업 지역으로 지정된다는 소문이라도 들리면 그 지역 일대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를 수 있다. 돈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미국 할렘이 도시 재생에 성공했을지는 모르지만, 반면에 그 지역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 것 역시 사실이다.
프레시안 :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를 어느 정도 하고 있지 않나.
김경민 : 지난 8.2 부동산대책에서 서울 지역을 도시 재생 사업 지역 지정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가뜩이나 올라 있는 서울의 주택값이 더 가파르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해석하자면, 정부에서조차도 도시재생뉴딜정책이 부동산 토지시장에 어떤 영향(토지가격 상승)을 미칠지를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경우, 나름 시 재정이 괜찮기에 자체적으로라도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할 것으로 보고 있다.
프레시안 : 이미 서울시는 2014년 1단계 근린재생 사업지로 종로구 창신·숭인, 용산구 해방촌, 구로구 가리봉동, 강동구 암사동, 성동구 성수동, 성북구 장위동, 동작구 상도4동, 서대문구 신촌 등 총 8곳을 지정했다. 또 올 2월에는 2단계 사업지로 도봉구 창3동, 강북구 수유1동, 중랑구 묵2동, 은평구 불광2동, 관악구 난곡·난향동, 서대문구 천연·충현동 등을 뽑았다. 서울시는 도시 재상 사업지로 선정될 경우 4년간 100억 원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김경민 : 이렇게 지정된 지역에 도시 재생 사업이 필요한 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일례로 서울시의 도시 재생 구역으로 지정된 해방촌의 경우, 이곳은 오르막길이라서 접근성도 좋지 않고, 더구나 낡고 오래된 주택과 건물들이 포진해 있다. 그런데, 이태원과 경리단길 상권이 넘어오면서 새롭게 상권화가 진행 중이다. (아래 지도 참조) 주택(토지)가격이 무려 평당 2500만~3000만 원대에 이른다.
ⓒ김경민
하지만 서울시는 이런 왜곡된 가격을 바로 잡는 게 아니라, 도시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을 부추기고 있다. 이는 더욱 높은 가격을 불러올 것이다. 그 결과, 원주민들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 발생가능성이 농후하다.
프레시안 : 미국 할렘에서도 도시 재생 사업으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이 일어났다.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원주민인 흑인들이 대거 할렘을 떠났다. 서울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김경민 : 도시 재생 사업을 한다며 사업주체가 3층 주택을 매입해 들어왔다고 하자. 그러면 무엇보다 수익이 나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도시 재생 사업 전임에도 해방촌은 평당 3000만 원이다. 이 높은 토지이용비를 회수하려면 1층은 상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2,3층도 주거임대료보다 더 높은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상업시설로 바뀔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서래마을 등에서 다세대/다가구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바뀐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주거공간이 상업공간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결국 최종 수혜대상자인 원주민들이 지역에서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할 것이다.
프레시안 : 한 마디로 기존 저렴한 주거비용 때문에 살던 원주민들이 도시 재생 사업으로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쫓겨난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그렇다고 낙후된 지역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부작용은 줄일 수 있는 방안은 없나.
김경민 : 도시재생지역이라고 특정한 구역을 묶어서 진행되는 사업은 위험하다. 어느 지역이 도시재생지역으로 묶이는 순간 토지가격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창신·숭인지역은 도시재생지역으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숭인동 바로 옆 신길동만 하더라도 일부 주택들은 그야말로 재생이 필요한 곳이다. 아니, 더 필요한 동네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도시재생지역에 선정된 곳은 엄청난 이자 인센티브를 받기에, 사업자 입장에서는 다른 동네가 아무리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따라서, 옆 동네 주민 및 행정당국 입장에서는 ‘우리도 비슷하게 열악한데, 왜 우리는 지정하지 않나’라는 목소리와 더불어 토지주들은 토지주들 대로 ‘도시재생지역으로 선정되면 개발인센티브를 받게 되고, 토지가격이 오르니 우리도 빨리 도시재생지역으로 선정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안 할 것 같은가? 이명박시장 당시 뉴타운 지정을 위해서 동네마다 난리가 났던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토지주인과 부동산 중개인들은 누구보다도 빨리 눈치 채고 있다. 도시 재생 구역으로 지정된 일부 지역의 경우, 국회 추경안이 통과되자마자 매물이 모두 들어갔다.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것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시 재생사업지역으로 묶은 후에 해당 지역에 속한 사업지에만 인센티브를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낙후된 지역을 묶는 식의 면 단위 도시 재생이 아닌 주택, 건물 단위의 도시 재생 사업이 필요하다. 즉 면 단위의 재생 사업이 아니라 점 단위의 촘촘한 재생 사업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 지역 수요자, 서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고민해야 한다.
"2013년 진행된 도시재생 선도 사업의 성과부터 살펴보자"
프레시안 :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한가.
김경민 : 첫째로는 주거복지다. 이것이 해결돼야 한다. 그래야 지역이 활성화된다. 그 다음으로는 지역주민들의 일자리가 필요하다. 이들이 지역 내에서 경제행위를 할 수 있는 괜찮은 수준의 직업이 창출돼야 한다. 아니면 재교육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래야 지역 경제가 돌아간다.
프레시안 :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김경민 : 그렇기에 앞으로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들어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간 도시 재생 선도사업 지역에서는 보여주기식 사업을 많이 했다. 디자인 건축 관련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도시는 깨끗해졌을지 모르나, 정작 지역 주민 소득과 주거복지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나 시 당국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게 말이 쉽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실현한다 해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벤처기업도 100개 중 1개가 성공한다. 그런데 형편없는 지역에서 도시재생이 성공한다? 매우 지난한 일이다. 그렇다 보니 일단은 '보여주기 하드웨어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지금으로라도 방향을 바꿔야 한다. 계속 하드웨어식으로 간다면 케이스만 다르지, '이명박근혜정권의 보여주기식 개발'의 작은 버전일 뿐이다.
프레시안 :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김경민 : 크게 3가지를 제안/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2013년부터 진행된 도시재생선도사업을 제대로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재생뉴딜정책을 설계하여야 한다.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2013~2017년 사이 4년간 창신·숭인 도시재생선도지역을 포함한 전국 여러 곳의 재생사업에 많은 재원(사업지마다 4년간 대략 200억 원)을 투여하여 왔다. 즉, 이미 도시재생뉴딜사업과 동일한 사업이 이미 다년간 진행 중이다.
따라서 도시재생선도사업을 성과를 면밀히 검토한 후, 도시재생뉴딜사업을 진행해도 늦지 않는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역마다 상황은 다르나, 지역민들이 본인들 소득증대에 도시재생선도사업이 무슨 기여를 했느냐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13년 이후에 진행된 도시재생선도사업이 초기 목적을 달성하였는지, 거버넌스 체계는 합당하였는지, 실행조직과 민간 파트너십은 제대로 작동하였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센티브가 충분하였는지, 거주민 일자리는 확대되었는지, 주거상황은 나아졌는지, 부동산 시장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등 검토할 부분이 산더미다. 국민세금 50조 원을 자세한 계획도 없이 사용하기 보다는 이전에 진행했던 동일사업에 대한 분석과 반성이 먼저다.
둘째, 무엇보다 50조 원의 정부 지원금을 무턱대고 지역으로 내리는 게 아니라 기금으로 만들어 천천히 도시 재생 사업(건) 을 선별하고 그에 따른 사업기금을 내리는 방식이 필요하다. 즉, 5년 이내 50조 원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기금을 장기적으로 확충하여야 한다. 5년이라는 단기에 도시 재생을 끝내는 게 아니라 지속해서 도시 재생 사업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도시 재생을 이번 한 번 하고 끝낼 수도 없다. 미국의 CDBG (Community Development Block Grant)와 같이 영속적 기금화한 후, 지속적으로 사업화하여야 한다.
셋째, 만약 현재와 같이 특정 경계 내 지역을 도시재생지역으로 선정하고 부동산 개발/개선사업에 도시재생뉴딜 사업자금이 투입되는 경우, 결국 해당 지역 토지가격을 상승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승자는 토지주와 건설시공 및 디벨로퍼들이 될 것이고, 도시재생뉴딜정책이 추구하는 애초의 최종수혜자(저소득 서민)는 지역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그리고 토지가격 상승이 실제로 일어나는 순간, 모든 지역들이 도시재생지역으로 선정을 요구할지 모른다. 며칠 전, 중앙정부에서 내년 서울시 모든 지역은 도시재생뉴딜사업에서 제외한다고 하자, 지역국회의원들이 벌써 시정을 요구하지 않았나? 정말 뒷감당하기 힘든 시점이 올 수 있다. 무리하게 급하게 진행하지 말고, 좋은 계획에 걸맞는 세심한 전략을 세우기 바란다.
노태우~문재인, 역대 대통령 첫 광복절 경축사에 뭘 담았나 815 한겨레
8월 15일은 광복절입니다. 대통령이 경축사를 합니다. 임기 5년 단임제 대통령의 첫 번째 광복절 경축사는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취임사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만 제외하고 1987년 이후 대통령은 모두 12월 대통령 선거에 당선돼 다음 해 2월 25일에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대략 6개월 뒤인 8월 15일에 대통령으로서 첫 번째 맞는 광복절 경축사를 했습니다. 취임한 지 6개월이면 국정에 대한 자신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꿈과 희망을 한껏 펼쳐가는 시기입니다.
노태우부터 박근혜까지 지난 대통령들이 첫 번째 광복절 경축사를 찾아보았습니다. 상당히 많은 분량입니다. 그들이 첫 번째 광복절을 맞아 어떤 꿈과 희망을 밝혔는지, 그 꿈과 희망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원문은 워낙 길어서 다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제 기준으로 의미가 있는 대목만 추려서 보여드리고 간략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노태우,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한 최고책임자 직접 회담 제안
노태우(1988년 광복 43주년)
“이제 온 국민의 힘과 정성을 모아 7년을 준비해 온 서울올림픽은 한 달 뒤로 다가왔습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우리 겨레 모두에게 우리가 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무한한 자신과 긍지를 심어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선진국으로 뛰어오를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년간 천길 벼랑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로 전환하여 이를 극복하고 오늘의 ‘정치적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국민의 슬기로운 선택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이제와 같은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면 4년 후인 1992년, 일 인당 국민소득은 6천불을 넘어설 것입니다. 나아가 10년 이내에 우리는 일 인당 국민소득 1만불 시대를 맞게 될 것입니다.”
“지난 7월 7일, 나는 남과 북이 이제는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는 민족공동체로서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40년이 넘은 같은 민족 간의 분단장벽은 이제 개방과 교류, 협력으로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여건을 성숙시켜 평화적 통일의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남북한 최고책임자가 만나서 대화를 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광복 43주년을 맞아 북한의 김일성 주석에게 6천만 동포의 염원에 따라 민족의 통합을 실질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나와 만나 회담할 것을 제의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개정 헌법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1988년 광복절 경축사가 발표된 것은 ‘88 서울올림픽’을 앞둔 때였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민심 수습을 위해 유치한 서울올림픽이었지만, 서울올림픽은 우리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1988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노태우 대통령.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당의 대선후보였던 김영삼-김대중 씨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어부지리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가 말한 ‘천길 벼랑과 같은 국가적 위기’는 87년 6월항쟁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승자의 여유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그의 전망대로 됐습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일시적으로 1만 달러 이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갔고 지금은 2만700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경축사를 통해 김일성을 ‘주석’이라고 처음 호칭하며 회담을 제의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는 재임 중에 소련·중국과의 수교,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등 상당한 업적을 이뤘습니다.
김영삼 “북한 핵 투명성 보장하면 핵에너지 공동개발 나설 것”
김영삼(1993년 광복 48주년)
“새 문민정부는 이같은 임시정부의 빛나는 정통성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선열 다섯분의 유골을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모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옛 총독부 건물과 총독 관사를 철거키로 한 뜻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는 바로 서야 합니다. 민족의 자존심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번 금융실명제 실시와 공직자 재산공개는 ‘신한국’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땀 흘린 만큼 열매를 거두는 정의롭고 깨끗한 사회로 가는 대로가 열렸습니다. 역대 어느 정권도 감히 해내지 못한 일을 문민정부가 해낸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북한 당국이 핵무기 개발 의혹을 해소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이제 남북 기본합의서는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산가족의 아픔을 덜어 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기 바랍니다.”
“북한이 핵 투명성을 보장하고 성실하게 대화에 임한다면, 우리는 핵에너지를 비롯한 자원의 공동개발과 평화적 이용을 위한 협력에 적극 나설 것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취임 초기에 많은 개혁 조처를 전광석화처럼 해치웠습니다. 군 사조직 하나회 출신들을 내쫓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공직자 재산을 공개했습니다.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경축사에는 자부심이 흘러넘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8월15일 목천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열린 제48주년 광복절 경축행사에 참석, 독립유공자 유족들에게 훈장을 수여한후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말 외환위기로 국가부도 사태를 불러오면서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지나친 자신감과 공명심이 그를 교만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경축사 내용을 보면 김영삼 정부 초기에 이미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한반도 상공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대중 “50년간의 남북대결 주의 넘어서 교류협력 시대 열 것”
김대중(1998년 광복 53주년)
“‘제2의 건국'은 우리가 역사의 주인으로서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그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시대적 결단이자 선택입니다. 또한 '제2의 건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저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완성하기 위한 국정의 총체적 개혁이자 국민적 운동을 가리킵니다.”
“‘국민의 정부'는‘제2의 건국'을 계획하고 추진하고자 다음과 같이 국정운영의 6대 과제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권위주의로부터 참여 민주주의로의 대전환을 이룩하여 국민과 정부 사이에 쌍방통행의 정치를 만들겠습니다.”
“둘째는 관치로부터 경제를 해방시켜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높이는 구조개혁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셋째는 독선적 민족주의와 같은 폐쇄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편적 세계주의로 나아가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넷째는 물질 위주의 공업국가를 창조적 지식과 정보 중심의 지식기반 국가로 바꾸어야 합니다.”
“다섯째는 노사 간의 대립과 갈등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화합과 협력의 시대를 향한 신노사문화를 창출하는 역사적 대전환을 이룩해야 합니다.”
“여섯째는 지난 50년간 한반도를 지배해온 남북대결 주의를 넘어서, 확고한 안보의 기반 위에 남북 간 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어나가고자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복 53주년 기념일이자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제2의 건국’을 대대적으로 제안했습니다. 선거에 의한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로 당선된 대통령답게 대한민국을 아예 새로 세우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입니다. 그가 밝힌 국정과제 중에는 지방경찰 제도 실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 저효율 고비용의 국회제도 개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복절 53주년과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1998년 8월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대한민국 50주년' 경축식에 참석, 당면한 국난 극복과 민족의 재도약을 위한 '제2의 건국'을 제창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제2의 건국’은 여론의 강한 역풍을 맞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처럼 정부 주도의 운동이 먹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해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제2의 건국’을 실현하려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은 한나라당에 밀려 1당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 기본합의서 정신에 입각해 북한의 안정과 발전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며 금강산 개발과 농업개발을 포함한 경제협력 지원을 제안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 특사를 평양에 보낼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남북관계 개선의 강한 집념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노무현 “자주독립 국가는 스스로의 국방력으로 나라 지켜야”
노무현(2003년 광복 58주년)
“경제와 안보를 보다 튼튼하게 다져야 합니다. 분단을 극복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번영의 질서가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민생을 안정시키고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높이기 위해서 주택가격을 비롯한 부동산 안정정책은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자주독립 국가는 스스로의 국방력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저의 임기 동안, 앞으로 10년 이내에 우리 군이 자주국방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정보와 작전기획 능력을 보강하고, 군비와 국방체계도 그에 맞게 재편해 나갈 것입니다. 주한미군의 실질적인 전력이 약화되지 않는 것을 전제로 부대의 재조정도 수용하려고 합니다. ‘용산기지'는 가능한 최단 시일 안에 이전하도록 할 것입니다. 주한미군 제2사단의 재배치 등 전반적인 재조정은 북한 핵 문제와 한반도 안보 상황에 맞추어서, 그 시기를 조절해 시행하도록 부시 미국 대통령과 협의하겠습니다.
“다행히 북핵 문제는 이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핵을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을 성공시켜야 합니다. 핵무기는 결코 체제보장의 안전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립과 위기를 자초하는 화근일 뿐입니다. 이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우리는 북한의 경제개발을 위해서 앞장설 것입니다. 이웃 나라들과 협력해서 국제기구와 국제자본의 협력도 아울러 끌어들일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제와 안보를 튼튼하게 다져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10년 이내에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민생 안정을 위해 주택가격을 비롯한 부동산 안정정책을 지속해서 추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국민소득 2만 달러는 달성했지만, 부동산 안정은 실패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8월15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8.15경축행사장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3년 광복절 경축사의 핵심은 자주국방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자주국방과 한미동맹을 상호보완의 관계로 파악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평화와 번영의 질서로 발전하게 되더라도 한편으로는 대립과 갈등의 잠재적 가능성이 계속 존재할 것”이라며 “그동안 한미동맹 관계는 동북아 평화와 안정의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런 제안을 미국 정부나 한국의 보수 야당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로 가는 길목에 북한 핵 문제와 남북관계가 가로놓여 있다”고 지적하고 “이 문제를 풀지 않고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도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물론 그는 북한 핵이라는 숙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북한이 핵실험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고를 무시했던 미국 정부나 우리나라 보수 세력은 그 이후 사태를 훨씬 더 악화시켰습니다.
이명박 “해양시대와 대륙시대 동시에 열면서 통일한국, 세계중심국가로”
이명박(2008년 광복 63주년)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맞는 오늘, 저는 ‘저탄소 녹색성장(Low Carbon, Green Growth)'을 새로운 비전의 축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녹색성장은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입니다. 녹색 기술(GT: Green Technology)과 청정에너지로 신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국가발전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녹색기술은 정보통신기술(IT), 생명공학 기술(BT), 나노기술(NT), 문화산업기술(CT)을 아우르면서도 이를 뛰어넘습니다. 녹색기술은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일자리 없는 성장'의 문제를 치유할 것입니다. 재생에너지 산업은 기존 산업에 비해 몇 배나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정보화시대에는 부의 격차가 벌어졌지만 녹색성장 시대에는 그 격차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녹색성장은 한강의 기적에 이어 한반도의 기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해양과 대륙이 연결되어 한반도는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바닷길, 땅길, 그리고 하늘길로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번영의 관문이 될 것입니다. 부산에서 화물을 싣고 대륙횡단철도를 따라 중앙아시아, 서유럽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해양시대와 대륙시대를 동시에 열면서 통일 한국은 세계중심국가로 도약할 것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저탄소 녹색성장을 향후 60년의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녹색성장을 통해 다음 세대가 10년, 20년 먹고 살 거리를 만들어내겠다고 했습니다. 2009년 1월 대통령 직속기구로 녹색성장위원회가 설치됐습니다. 저탄소 녹색성장기본법이 제정됐고 시행됐습니다. 그러나 녹색성장 비전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녹색성장위원회는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변경됐고 이후에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2008년 8월15일 경복궁 흥화문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건국60주년및 63주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전 대통령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습니다. 광복절 경축사에도 ‘남과 북 모두 함께 잘사는 꿈’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에 금강산 피격사건, 천안함 폭침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습니다. 남북관계는 점점 더 악화했습니다.
박근혜 “불신과 대결을 넘어 평화와 통일의 시대 열어가야”
박근혜(2013년 광복 68주년)
“올해로 남북이 분단된 지 68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남북한 간에 불신과 대결의 시대를 넘어 평화와 통일의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열어나가야 합니다. 북한이 핵을 버리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동참한다면,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어려움도 함께 풀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의 한쪽에서 굶주림과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새 정부는 정치적인 상황과 무관하게 인도적인 지원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일본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함께 열어갈 중요한 이웃입니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최근 상황이 한일 양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직시하려는 용기와 상대방의 아픔을 배려하는 자세가 없으면 미래로 가는 신뢰를 쌓기가 어렵습니다.”
“일본은 이런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상처를 지금도 안고 살아가고 계신 분들에 대해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책임 있고 성의 있는 조치를 기대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대선 공약이었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강조하며 북한에 핵을 포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2002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대통령이 되면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많은 사람이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북한을 대화로 끌어낼 수 있는 역량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식이 2013년 8월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광복회원,독립유공자,주요 내빈 등 3천 여명이 참석해 열렸다.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의 재임 기간에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개성공단을 폐쇄했고 사드 배치를 전격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불안정성이 점점 높아가고 있습니다. 부담은 고스란히 문재인 정부가 떠안았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 방안에 합의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합의를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고를 친 셈입니다. 위안부 문제의 부담도 문재인 정부로 넘어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임자 탄핵과 궐위에 의한 5월 9일 대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100일이 지나기도 전에 첫 번째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북미대결이 격화하며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맞은 첫 번째 광복절입니다. 경축사도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평화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문재인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북핵 반드시 평화적 해결”
“오늘날 한반도의 시대적 소명은 두말할 것 없이 평화입니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통한 분단 극복이야말로 광복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길입니다.”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은 안 됩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입니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북핵 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2년 후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내년 8·15는 정부 수립 70주년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치유와 화해, 통합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 현충일 추념사에서 애국의 가치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제 지난 백 년의 역사를 결산하고, 새로운 백 년을 위해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 정립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번째 광복절 경축사도 훗날 그의 업적과 함께 평가받을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첫 번째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평화의 꿈’과 ‘통합의 희망’이 모두 다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美장성 "피폭자들이 죽어? 거짓이고 선동이다" 815 프레시안
[전쟁국가 미국] 히로시마 은폐 (1)
미국인들은 히로시마 당시부터 오랫동안 원자탄의 비도덕성, 그에 의한 인간적 참상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 정부가 원자탄의 실상을 은폐, 왜곡, 통제했기 때문이다. 원자탄의 실상을 가장 잘 아는 과학자들의 이의 제기를 무시했고, 피폭자들의 증언을 억압했다. 또 원자탄 피폭의 참상에 관한 현장 기사와 사진, 기록들을 철저히 억압했다.
히로시마 직후부터 오로지 윌리엄 로렌스의 기사들로 도배된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통해 원자탄에 관한 소식을 접하게 된 미국인들은 '원자탄은 대단한 무기'이며 '원자탄 덕택에 전쟁을 일찍 끝냈고' 자신들의 자식이자 남편인 '미군 병사들의 소중한 목숨을 구하게 됐다'고 믿게 됐다.
한마디로 '원자탄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는 믿음'이 미국인을 지배했다. 히로시마 이후 30여 년이 지나도록 원자탄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는 믿음'이 미국인을 지배했다. 히로시마 이후 30여 년이 지나도록 원자탄 사용에 관한 여론조사에서 언제나 2대1의 비율로 찬성 쪽이 우세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피폭자의 백혈병 발병, 정상인의 50배
원자탄을 사용하면서 미국 정부와 군부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사항은 방사능 피폭 문제였다. 원자탄에 의한 살상은 폭발(blast)과 고온, 그리고 방사능에 의한다. 이중 방사능 피폭은 원자탄에서만 유래하는 현상이다. 방사능 피폭은 심한 경우 입과 귀와 코 등에 출혈이 생기면서 대략 3주일 후에 사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버체트가 말한 원자병이다. 약한 경우에도 그 후유증은 수 십 년 후 백혈병 등 각종 암으로 나타나며 기형아 출산 등 후대에까지 계속된다.
일본 측의 추적 조사에 따르면, 백혈병은 보통 10만 명당 2~3명이 발병하는데 히로시마 폭심에서 1킬로미터 이내에 있었던 생존자의 경우 125명, 1.5킬로미터 이내는 25명, 2킬로미터 이내 5명이었다고 한다. 각각 50배 이상, 10배 이상, 2배 이상 발병한 셈이다. 원자탄을 인간성과 양립할 수 없는 절대 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히로시마 원폭이 공중 폭발한 이유
트리니티 핵실험은 지상에서 시행된 반면 히로시마 원폭은 낙하산에 매달려 낙하하다가 지상 540미터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 이유는 방사능에 의한 살상을 최소화 하고 폭발과 화상에 의한 살상력을 최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원자탄이 재래식 폭탄과 별 차이가 없는 무기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보다 어떻게 죽이느냐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즉 방사능 피폭에 의한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려 했다.
9월 5일 '원자병'에 대한 버체트의 역사적인 기사는 미국이 한사코 은폐하려 했던 방사능 피폭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었다.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가 그 기사의 무료 전재를 모든 언론사에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대재앙이었다. 원자탄을 정당한 전쟁무기로 인식시켜 전후 외교의 핵심 수단으로 삼으려던 애초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로서는 시급히 대응해야 했다.
▲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지난 1945년 9월 5일 자 신문. 버체트의 히로시마 르포 기사가 헤드라인에 배치돼있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버체트 기사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기에 앞서 히로시마 직후 원자탄의 실상에 대한 미국과 일본 국민의 인식의 격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가해자인 미국과 피해자인 일본 국민들 사이에는 커다란 인식의 격차가 있었다. 그것은 우선 '고통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는 기본적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신민이 식민지 조선의 민중이 당하는 고통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해자 측인 미국의 국민들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피폭자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 국민들은 핵 숭배로 가득 찬 윌리엄 로렌스의 기사들로 원자탄에 관한 첫 소식을 접했다. 로렌스는 원자탄 투하에서 인류의 도덕적 위기, 나아가 인류 생존 자체의 위기를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세기, 위대한 미국의 세기를 예감하고 있었다. 원폭 피해자들의 고통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의 철저한 언론 검열이 더해졌다.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미국에서는 언론에 대한 전시 검열이 해제됐다. 단 원자탄 관련 기사 및 사진에 대해서는 '엄격한 검토'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검열이 계속됐다. 한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8월 28일이었다. 따라서 이때까지 일본 언론은 자유롭게 원자탄 피해 상황을 보도할 수 있었다.
'유령들의 행진'
9월 5일 '원자병'에 대한 버체트의 기사가 나가기 이전부터 일본 언론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괴질에 대해 보도했다. "화상을 입은 사람 중 많은 수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루 100명꼴이었다.
또 피폭 직후 히로시마에 도착한 구조대원과 피폭자의 친척들도 원인 모를 질병을 앓기 시작했다. 도쿄 라디오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상황을 "유령들의 행진"이라고 표현했다. 일본 언론의 보도는 <뉴욕타임스> 등 미국 신문에도 전해졌다.
8월 24일 로스알라모스 연구진이 그로브스(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에 전문을 보내 히로시마에서 피폭자들이 뒤늦게 죽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자 그로브스는 "거짓말 아니면 선동이야"라고 일축했다. 닷새 후 오크리지에서는 기자들에게 "원자탄은 비인도적 무기가 아닙니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의사들에 따르면 원자병은 "별다른 고통이 수반되지 않습니다. 아주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더군요"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그로브스의 최측근 케네스 니콜스는 1987년 회고록에서 "우리는 당시 고열과 폭발뿐만 아니라 방사능에 의해서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윌프레드 버체트의 히로시마 잠입 취재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단행된 것이다.
그런데 버체트가 원자탄 피폭의 잔해 위에서 타자기를 두드리며 기사를 작성하던 9월 3일 오후, 히로시마에는 미 군부 인솔 하에 일단의 미국 기자들이 비행기 편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뉴욕타임스>의 빌 로렌스(윌리엄 로렌스와 동명이인, 당시 29세)와 <뉴욕 헤럴드 트리뷴>, <에이피> 통신 기자들이었다.
버체트는 기자들에게 "진짜 기사는 병원에 있네"라고 알려주었다. 이들은 단체로 취재를 마치고 몇 시간 만에 도쿄로 돌아갔다. 하지만 버체트의 기사와 같은 날(9월 5일) 보도된 이들의 히로시마 방문 기사에 방사능 피폭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1972년 발간된 빌 로렌스의 회고록에는 "우리는 병원에서 죽어가는 피폭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그가 피폭자에 관해 기사를 썼다 해도 미 군부의 검열에 의해 삭제된 것이 분명하다.
한편 버체트의 기사가 피해자의 관점에 서 있는 반면 로렌스의 기사에는 승자의 우월의식과 오만함이 짙게 배어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쟁 기간 동안 항공기, 특히 B-29 폭격기와 원자탄 등을 발명해낸 미국인의 과학기술적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군사력의 효용성에 의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나 워싱턴, 또는 디트로이트나 뉴욕이 히로시마와 같은 운명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더욱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의 철저한 언론 통제와 언론인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대다수 미국인들은 원자탄의 파괴력에 도취된 반면 그 피해자의 참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된 셈이다. 어쨌든 미국 정부로서는 버체트의 '원자병' 기사에 대응해야 했다. 일본 언론의 원자병 보도는 적대국의 선전선동이라고 일축해 버릴 수 있었지만 주요 동맹국이자 원자탄 제조에 힘을 보탠 영국의 언론 보도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응이 필요했다.
9월 5일 일본군의 학살행위 보고서 발표
첫 번째 대응은 일본의 만행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미 국무부는 9월 5일, 전쟁 기간 동안 일본군이 저지른 200건 이상의 학살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와 병사 등을 참수하거나 생매장했고 심지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타임>은 "미국 기자들이 처음으로 히로시마에 들어가 원자탄이 초래한 잔혹한 참상을 미국 독자들에게 알린 바로 그 주에 국무부가 일본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발표했다. 눈치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 타이밍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9월 9일에는 대대적인 물타기 작전이 벌어졌다. 우선 <뉴욕타임스> 빌 로렌스 기자가 나가사키를 방문했다. 다음 날 보도된 기사에서 빌 로렌스는 이렇게 전했다.
"원자탄이 끔찍하기는 하지만, 방사능 피해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며 이는 전쟁 기간 자신들의 냉혹한 야만적 행위에 대한 미국인의 기억을 희석시켜 동정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같은 날, 윌리엄 로렌스 등 미국 기자 30여 명이 트리니티 실험 장소를 방문했다. 로렌스를 제외하고는 첫 방문이었다.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 등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들도 동참했다. 이보다 2주 전 백악관은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프로파갠다에 비추어 봤을 때 트리니티 참관은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미국 정부는 일본 피폭자들의 참상을 프로파갠다로 치부하면서 원자탄의 안전성을 입증하려 했다.
로렌스는 군부 검열을 거쳐 사흘 후 보도된 기사에서 트리니티 방문 목적은 "피폭 생존자의 뒤늦은 죽음이 방사능 때문"이라는 일본 측 프로파갠다가 "거짓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핵실험장의 "방사능은 최소 수준으로 줄었으며 인간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선언했다.
▲ 미국은 히로시마가 안전하다고 했지만 원자폭탄을 맞은 히로시마는 사실상 폐허나 다름 없었다. 사진은 원폭 투하 이후 히로시마의 모습 ⓒ위키피디아
이에 대해 제이 리프턴 박사는 "미국 최고의 과학 기자라는 사람이 당대 최대 과학적 발명의 위험성을 고의로 은폐했다"고 비판했다. 로렌스는 원자탄 제조의 전 과정은 물론 방사능의 공포를 알고 있는 유일한 기자였다. 트리니티 실험 직후 실험장 주변 마을에서 사지가 마비된 채 발견된 노새를 비롯해 과학자들의 방사능에 대한 우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그의 기사가 나간 후 <뉴욕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이제 안심할 수 있게 됐다"고 했고 <라이프>는 "극소수 일본인이" 피폭 직후 사망했겠지만 "이후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9월 9일 트리니티를 방문해 폭심 부근에 수 분 간 머물렀던 그로브스의 운전병 패트릭 스타우트(29세)는 22년 뒤 백혈병에 걸렸으며 2년 만에(1969년) 사망했다. 이때 치명적 방사능에 노출됐던 때문이다. 미군은 그에게 '복무 관련' 질병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했다. 발병 원인이 방사능 피폭임을 인정한 것이다.
"어제는 토끼, 오늘 일본 사람"
로렌스가 트리니티를 방문했던 9월 9일, 그로브스는 미국 언론에 히로시마 상황을 브리핑했다. 방사능 피폭으로 숨진 일본인이 있다 해도 "그 숫자는 극소수"이며 아마도 일본의 의료 수준이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아가 히로시마에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으며 방사능 수준이 매우 낮아 "그곳에서 영구히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브리핑은 전날 히로시마를 방문하고 돌아온 토마스 패럴 장군의 예비 조사 결과 보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히로시마 피폭이 인체 등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는 한 조사 팀원에게 "우리 임무는 원자탄으로부터 방사능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조사단에는 방사능 전문가 스태포드 워런 박사를 비롯해 로스알라모스연구소의 저명한 물리학자 필립 모리슨, 로버트 서버 등 과학자 10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보다 며칠 전 필립 모리슨은 도쿄에서 일본 최고의 방사능 전문가인 스즈키 마사오 박사를 만났다. 그는 1926년 토끼에 대한 방사능 피폭 실험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모리슨에게 당시 논문을 주며 "아, 미국 사람들 참 대단해요. 인간에 대한 피폭 실험을 하다니 말이오"라며 감탄조로 말했다.
9월 8일 스즈키는 조사팀의 히로시마 병원 방문을 안내했다. 그는 한 여성 환자를 가리키며 "감마선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저 분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이면 돌아가실 겁니다. 원자탄 때문이지요"라고 말했다. 또 사망한 환자에서 적출된 뇌를 들어 보이며 "어제는 토끼, 오늘은 일본 사람이네요"라고 말했다.
9월 12일 패럴 장군이 도쿄 데이고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버체트의 동료 기자들에 따르면 그의 '원자병' 기사를 부인하기 위해 특별히 열리는 것이었다. 당시 버체트는 도쿄에 막 도착한 상태였다. 그는 히로시마 취재를 마치고 도쿄로 돌아오는 길에 교토 역에서 호주 전쟁포로들을 만났다. 그들의 간청으로 고베, 오사카, 쓰루가 등지의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다니며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알리고 돌아온 것이다. 옷은 땀에 절고, 목욕도 못하고, 수염도 깎지 못한 그는 동료 기자에 이끌려 회견장으로 향했다. 기자회견이 거의 끝나가던 때였다.
패럴 장군은 기자회견에서 히로시마에서 7만-10만 명이 사망했다는 보도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방사능 위험은 없다"고 주장했다. 원자탄이 어떠한 잔류 방사능의 위험도 피할 수 있는 고도에서 폭발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독가스는 방출되지 않았다"고도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사능에 대해 몰랐다. 따라서 독가스를 사망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었고 버체트의 기사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독가스는 방출되지 않았다"는 패럴의 주장은 기술적으로는 맞지만 실질적으로 틀린 것이었다. 방사능 위험도 없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주장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일본 측 선전에 말려든 것 같소"
버체트는 말쑥한 차림의 공보 장교와 문답을 나눴다. 버체트의 첫 질문은 공보 장교가 히로시마를 갔다 온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장교는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에는 버체트가 목격한 환자들의 상태에 관한 것이었다. 머리털이 빠지고 푸른 반점이 생기며 귀와 코, 입 등에서 출혈이 시작되는 등의 상태를 얘기하자 공보 장교는 이는 폭발과 화염에 의한 것이며, 이들의 사망은 일본인 의사가 치료할 능력이 없거나 열악한 의료 설비 때문일 것이라고 맞받았다.
마침내 버체트는 도심을 흐르는 강물의 물고기들이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예로 들며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다음은 이에 대한 버체트와 공보 장교의 문답 내용이다.
"그 물고기들은 폭발 때문이거나 강물이 뜨거워졌기 때문에 죽은 게 틀림 없소"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그렇단 말이오?"
"그 강은 간만의 차가 있는 강물이오. 물고기들이 쓸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도 있는 것이오"
"하지만 내가 어떤 교외에 가보았는데 팔팔한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다가 강물의 어떤 지점에 가면 그대로 배가 뒤집히는 것을 보았소. 그러고는 몇 초도 안 돼 죽고 말았소"
공보 장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은 일본 측 선전에 말려든 것 같소"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의례적인 맺음말과 함께 기자회견은 끝났다. 이후 버체트는 검사를 받는다는 이유로 한 미군병원에 강제 입원됐다가 퇴원 이후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일본에서 추방됐다. 히로시마에서 찍은 역사적 사진들이 담겨 있는 카메라도 미군에 압수됐다. 이후 수 개월간 미국 언론은 방사능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트루먼은 그로브스의 제안에 따라 "비밀리에" 미국 신문편집인 및 방송 앵커들에게 "최고의 안보 이익을 위해" 원자탄의 "사용" 등에 관한 사안은 "사전에 전쟁부와 반드시 상의할 것"을 요청했다.
1945년 11월, 패럴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스태포드 워런은 미 의회에서 히로시마 사망자 중 7-8%가 방사능 피폭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또한 46년 7월 발표된 미 전략폭격조사팀의 보고서에 따르면 히로시마 사망자 중 15-20%(2만 명 이상)가 방사능 피폭에 의한 것이었다. 부상자도 같은 숫자였다. 버체트의 원자병 보도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의 공식 항의도 은폐
미국은 히로시마 직후, 원폭 투하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항의 사실도 수 십 년 간 은폐했다. 버체트의 기사가 보도된 9월 5일, 미국 정부는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대표로 이루어진 3부조정위원회를 열었다. 8월 11일 도쿄 주재 스위스 공사관으로부터 전달받은 일본 정부의 항의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스위스 공사관은 전시 중 일본에서의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항의문에서 일본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을 "인류가 경험한 어떤 무기보다도 잔인한 폭탄"이라고 지칭하면서 원자탄 투하에 따른 민간인 무차별 살상은 "국제법뿐만 아니라 제반 인도주의적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며 "인간성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범죄"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인류와 문명의 이름으로...미국 정부를 고발하는 한편 그 무기 사용의 중지를 강력하게 요청"한다고 밝혔다.
9월 5일 3부 조정위원회는 다음 세 가지 대응방침을 전했다. 첫째 스위스 정부의 외교각서를 접수했음을 인정한다, 둘째 일본 정부에는 회신하지 않는다, 셋째 일본의 항의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
6주 후인 10월 24일, 국무부는 스위스 정부에 대해 "히로시마를 '폭격했다고 하는' 것과 관련한(중략) 1945년 8월 11일 자 외교각서를 접수했음을 인정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미 국민에게는 히로시마 원폭 공격을 자랑스럽게 발표했던 미국 정부가 일본의 항의문에 대해서는 "히로시마를 폭격했다고 하는"이란 이상한 표현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윌프레드 버체트는 일본의 항의문이 미국의 의도와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은 원자탄의 막대한 파괴력만을 강조하고자 한 반면 일본의 항의문에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적시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항의 사실과 항의문 내용이 공개된 것은 25년이 지난 1970년이었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① 친일파 이완용 재산 전모 최초 확인…여의도 7.7배 SBS 뉴스 814
'똘레랑스(관용)의 나라'라는 프랑스도 과거 나치 부역자들을 '무관용 청산'했는데 우리는 세월이 한 갑자(60년)도 훨씬 지난 오늘날에도 친일파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광복 후 60년, 정부는 뒤늦게-이승만 정권 때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있었지만 위원회가 와해되면서 친일 청산에 실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특별법(2004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국가귀속특별법(2005년)을 논란 끝에 제정했다. 하지만 '지연된 정의'는 역시 정의가 아니었을까.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어렵사리 통과한 법안. 위원회의 활동 반경은 좁았고 활동 기간도 짧았다. 4년 간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2010년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파 168명의 재산을 '일부' 환수했다. 그리고 끝. 이후로는 친일 재산 환수도, 친일 진상 규명도 없었다.
친일 청산이 완벽하게 이뤄져서? 친일 재산이 모두 환수 됐기 때문에? 이 둘 중에 정답은 없다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친일 재산 환수는 어려워진다. SBS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소셜동영상 미디어 <비디오머그>는 전방위 추적으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친일 재산을 파악했다.
우리는 친일재산조사위원회 활동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보고서’를 단독으로 확보해 공개한다.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의 재산이 적힌 보고서에 기초해 미공개 친일파 재산을 뒤쫓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은닉된 친일 재산으로 보이는 부동산도 단독 취재했다. 또 당장이라도 환수가 가능할 수도 있는 친일파 재산도 파악해 잇달아 보도한다. 그 첫 편을 시작한다.
●이완용 부동산만 2,200만㎡....여의도 7.7배 규모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2006년부터 4년간 활동해 친일파 168명의 부동산 2,457필지를 환수 결정했다. 여의도 면적(2.9㎢)의 약 4.5배인 1300만㎡으로 규모, 공시지가 1,267억 원 상당이다. 짧은 활동기간, 뒤늦은 환수 작업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였다.
그러나 SBS<마부작침>이 확보한 당시 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가 환수한 전체 토지는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 1인의 부동산 규모에도 한참 못 미쳤다. 그때까지 역사학계가 추산한 이완용의 부동산은 여의도 면적 5.4배인 1,570만㎡(1,309필지) 그러나 이는 일제 강점기인 1919년 기준 토지대장만으로 확인한 수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마부작침>이 확보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조사위는 전방위로 이완용의 부동산을 파악했다. 한국전쟁이나 경지정리사업으로 토지(임야)조사부(일제시대 작성), 토지(임야)대장이 멸실된 경우, 이완용 이름으로 된 지적(임야)원도까지 확인했다. 이를 각종 사료 등 문헌과 대조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 동명이인을 제외하고 실제로 이완용이 소유했던 부동산을 가려냈다. 이렇게 확인된 토지를 합치면 이완용의 부동산은 1,801필지에 달했다.
1,801필지는 (필지마다 면적이 다르다. 보수적으로 환산했다) 676만 8,168평. 즉, 2,233만4,954㎡ 크기로, 여의도 면적의 7.7배이다. 조사위가 4년 간 친일파 168명을 대상으로 환수 결정한 전체 토지보다도 1.7배 크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완용과 함께 대표적 친일파인 송병준의 부동산도 실제 알려진 것보다 방대했다. 송병준은 정미칠적(1907년 제3차 한일협약을 주도한 7인) 중 한 사람으로 일제 강점기 당시 중추원 고문을 역임했다. 같은 방식으로 파악된 송병준의 부동산도 당초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303만7,537평(1,004만1,444㎡) 규모였다.
●환수 땅은 전체 부동산의 0.05% 불과...나머지 99%의 땅은 어디로?
여의도 면적의 7.7배가 넘는 부동산을 보유했던 이완용이지만, 정부가 귀속한 건 극히 일부다. 조사위는 지난 2007년 5월 이완용이 1914년 일제로부터 사정받은 전북 익산 낭산면 토지를 시작으로 공시지가 6,961만원 상당의 토지 1만 928㎡를 후손들로부터 환수했다. 보고서가 이완용이 보유했던 것으로 파악한 부동산 2,233만4,954㎡의 0.05%에 불과한 수준이다.
나머지 부동산은 어떻게 됐을까. 미공개 보고서에 따르면, 이완용은 대부분의 토지를 해방 전 매각했다. 그는 토지를 사정 받은 뒤 5년 내에 매각하는 방법으로 부동산의 98~99%를 해방 전 팔아 치웠다. 이미 당시에 부동산을 현금화하는 능력이 탁월한 ‘투자의 달인’이었다. 예를 들어 전북 지방의 땅을 사정 받은 뒤, 해당 지역에 일본인 지주들이 대거 진출해 땅값이 오르면 되파는 식이다. 이런 방법으로 부동산 대부분을 일본인 지주 4명에 매매한 것으로 확인됐고, 나머지 땅은 광복 이후 후손들이 차례로 매각했다.
이완용은 부동산 매매 이외의 방법으로도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 1909년 콜브란 전차회사 보조금 횡령 사건이 그 중 한 사례다. 미국인 콜브란이 전차회사를 설립할 때 고종이 보조금 100만원을 내렸는데, 이 중 40만원을 이완용이 착복하는 등 횡령액이 110만원에 달했다.
한국은행에서 제시한 기준(쌀 기준)으로 환산하면 220억 원이 넘는다. 또 고종의 내탕금(임금의 개인재산) 40만원을 횡령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정축재를 했고, 매년 연봉으로 2억 원을 챙겼다.
이완용의 현금 자산은 보수적으로 파악해도 1920년대 초에 약 300만원(현시가 600억원대)에 이르렀다고 조사위는 파악했다. 사료로 확인되는 현금과 은행 예금만 합친 액수로 이완용 일가가 보유한 부동산과 재산을 합치면 더 늘어난다. 이완용 일가는 토지를 일찍 처분해 현금 자산을 보유하면서 해방 이후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일각에선 이완용의 재산을 수천 억 원대로 추정한다. 액수도 액수지만, 환수된 게 거의 없다.
●광복 후에도 이완용 부동산 16만㎡ 확인
현금엔 꼬리표가 없다. 이완용의 현금을 후손들이 얼마나 나눠 가져갔는지 파악이 힘들어 국가로 귀속시키도 힘들다. 다만 환수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광복 이후에도 이완용 일가 명의로 남아있던 부동산이다. 일부는 조사위가 환수했다. 환수하지 못한 부동산을 추적했다. <마부작침>은 특히 이 중 일부를 아직도 이완용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광복 이후까지 이완용 일가가 가지고 있던 부동산은 <마부작침>이 확인한 것만 16만6,182㎡이다. <마부작침>이 실제 지번을 확인한 뒤 과거 토지대장에 기초해 ‘이완용 일가 소유’로 확인한것만 포함시킨 수치다. 이 토지는 서울 종로구, 충남 아산시, 전북 익산시 등 다양한 지역에 대지, 전, 임야 형태로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었다.
이 중 경기 용인시 처인구에 위치한 4만8천평 규모의 부동산이 대표적이다. 대부분이 임야지만, 부동산 가치는 수십에서 수 백 배 상승했다고 지역 주민들은 말한다. 문제의 땅 바로 옆에 사는 주민 A씨는 “이 근처에 산 지 50년이 넘었는데, 그 때보다 부동산 가격이 족히 50배는 뛰었다”고 말했다. 해당 토지는 광복 이후에도 이완용의 증손자 이 모 씨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완용 친일 재산 의심 부동산 확인.."증손자가 현재도 소유, 매각 못하고 이민 간 듯..환수 가능성 높아"
용인시 처인구 부동산 상당 부분은 1970년을 기점으로 제3자에게 넘어갔다. 일부는 1971년 임 모 씨에게 매각됐고, 79년에 다른 이 모 씨, 83년에 한 사학재단 소유로 순차적으로 변경됐다. 비슷한 위치의 다른 땅도 세 차례 매매 과정을 거쳐 지금은 김 모 씨의 소유로 돼 있다. 대부분이 매각이 됐지만, 여전히 이완용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발견됐다. 제3자에게 매각한 땅 바로 근처에 위치한 각 198㎡, 298㎡ 크기의 부동산이다. 합쳐서 496㎡ 크기의 자투리 땅은 이완용의 증손자 이 씨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다.
증손자 이 씨는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길의 아들이다. 이병길 역시 중추원 참의를 하는 등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반민족행위자다. 남은 부동산은 당초 친일파 이병길이 소유했다가 아들 이 씨(이완용의 증손자)에게 넘겨졌다. 부동산의 일부는 제 3자에게 매매됐고, 일부는 여전히 이 씨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제 3자에 팔지 못하고 남은 땅으로 추정된다. 증손자 이 씨는 1990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 시가 30억원 상당의 서울 서대문구 일대 토지를 돌려받아 되팔기도 했다. 아직도 이완용 증손자가 보유한 용인시 땅은 크기가 작지만, 정부가 나서 소송을 제기해 친일 대가성을 입증하면 환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부작침>은 증손자 이 씨의 주소지로 적힌 서울시 강북구 주택을 찾아갔지만, 이 씨는 살고 있지 않았다. 친일조사위 관계자는 “증손자 이 씨는 과거 소송을 통해 돌려받은 땅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땅을 처분해 현금화 한 뒤 1980년대 말 캐나다로 이민을 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문제의 땅은 팔지 못하고 남은 것으로 보이는데, 친일파 이병주가 소유했다가 넘긴 것이라면 친일 재산일 가능성이 높다"며 "작은 땅이라고 하더라도 정부가 나서 친일 재산이 확인되면 적극 환수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 밖에도 해당 땅이 있는 마을주민 B씨는 “이 곳(용인 땅)이 이완용의 땅이었다는 건 오래 전 어른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며 “지금은 다 매매가 됐다고 하는데 일부는 후손들이 몰래 남겨둬 이완용 일가 묘소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마부작침>은 일대 산을 뒤져 이 씨 가문의 무덤을 찾았지만 역사학자를 통해 “해당 묘는 이완용과의 직접적 관계가 낮은 다른 이 씨 일가 묘로 보인다”는 답변을 얻었다.
서울 도심의 금싸라기 땅 126㎡도 광복 직후에도 이완용 일가가 소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한 여행사 소유의 대형 빌딩이 들어선 서울 인사동의 토지. 현재 공시지가로 1㎡당 1,700만 원이 넘는 이 땅은 광복 이전엔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 소유였다. 이항구 역시 정부가 발표한 친일파이다. 이 땅은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에 바로 인접해 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이항구의 아들, 즉 이완용의 손자 이병주가 소유한 것으로 옛 토지대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같은 해 5월 땅 주인은 이병주에서 최 모씨로 넘어가는데, 이후 5차례 소유권이 변경된 뒤, 지금은 한 여행사 명의로 돼 있다. 해당 토지에서 직선 거리로 5미터 정도 떨어진 또 다른 인사동 토지 역시 이병주가 소유하다 1947년 함 모 씨에게 매매됐다. 경기 용인, 서울 인사동 토지 모두 반민특위가 1949년 해산되지 않았다면 손쉽게 국가로 귀속할 수 있는 땅이었다.
송병준의 부동산도 파악했다. <마부작침>이 옛 토지대장을 추적해 광복 이후에도 송병준 일가가 보유한 부동산 6만 7081㎡를 확인했는데, 이 역시 조사위에서 환수하지 않은 토지다. 경기 이천군, 강원도 철원군 일대에 분포해 있다. 1953년 서 모 씨에게 4,100평(13,554㎡)이 판매된 것을 시작으로, 71년까지 제 3자에게 순차적으로 매각됐다.
●“친일파는 죽었지만, 친일 재산은 남아있다”
<마부작침>이 추적한 이완용, 송병준의 부동산은 모두 국가로 귀속되지 않은 친일파 재산들이다. ‘미완의 환수’는 예정된 결말이었다. 친일재산조사위는 현실적 한계로 토지를 파악하고도 환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친일파 재산은 문화재, 현금, 땅 등 동산과 부동산을 망라해 다양했지만, 조사위는 우선 부동산만 대상으로 삼았다. 부동산이 비교적 추적이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전체 토지가 아닌 토지대장으로 확인된 부동산으로 한정됐다. 6.25, 경지정리사업 등으로 소실된 토지 대장은 제외된 것이다.
또 토지대장으로 확인됐더라도, 또 다른 현실적 한계로 대상지는 줄어들었다. 친일재산귀속법 1조에 적힌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고, 거래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구문과 ‘활동 시한 4년’이 제약이 됐다. 법 제정 이전 매매된 토지까지 환수하면 ‘재산권 침해이자, 거래의 안전성을 훼손한다’는 이유에서 애당초 조사 대상지에서 제외된 것이다. 결국 관련법이 마련된 2005년 당시 친일파 후손들이 보유했거나 그즈음 매각한 땅만 환수 대상으로 삼았다. 결국 환수 결정된 건 친일파 소유 재산 중 일부, 그 일부 중 일부로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장완익 친일재산조사위 사무처장(현 변호사)은 “근거법을 두고도 지속적으로 위헌 시비를 제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헌법적 문제에 부딪히지 않는 선에서 환수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며 “법 시행 당시 후손이 보유한 재산을 환수하는데도 4년의 시간이 부족했다”고 당시 어려움을 전했다. 이준식 친일재산조사위 상임위원(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광복 60년이 지나서야 시작한 환수 작업으로 친일 재산 일부라도 귀속한 건 상징적 의미가 있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라며 “다만 미환수 친일 재산으로 후손들이 지금도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건, 역사정의 실현에서 분명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② 조선 왕조 태실지 훼손한 '친일파 묘'…어떻게 이런 일이 SBS 뉴스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건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다. '관용하는 자'가 '잘못을 저지른 자'보다 더 죄다." <도산 안창호>
안창호 선생이 친일 청산의 실기(失期)를 예상하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말은 해방 이후 현실이 됐다. 광복 직후인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됐지만, 친일 잔존 세력의 집요한 방해 공작 속에서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을 이루지 못했고, 특위의 설치 근거였던 반민족행위처벌법마저 1951년 2월 폐지되고 말았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친일파들보다 '관용'을 빙자해 청산 작업을 막은 이들이, 역사 앞에서 어쩌면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도 볼 수 있다. 친일의 잔재는 사회 곳곳에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게 됐다.
이런 '뼈아픈 역사'를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 있다. 경상남도 사천시에 있는 '단종 태실지'는 친일의 역사가 현재진행형으로 뒤얽혀 있는 땅이다. 단종이 태어날 때 나온 태를 묻은 이 '단종 태실지' 땅의 소유권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 정부가 친일파로 규정하고 있는 최연국의 후손들이 갖고 있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비디오머그>가 '단종 태실지' 땅 소유권을 둘러싼 내막을 추적했다.
● 천하명당 '사천 단종태실지'에 세워진 친일파의 비석
경남 사천 북서쪽에 위치한 은사마을은 예부터 길지(吉地)로 유명했다. '천하명당'이라는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 이런 좋은 터에 사는 은사마을 주민들이 한 때 '태봉(胎峯)'이라 불렀던 곳이 있다.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438번지에 있는 3,954㎡ 규모의 땅, '단종태실지(端宗胎室地)'다. 조선 6대왕 단종의 '태'가 묻혀 있던 '봉우리'라는 뜻으로 태봉이라고도 불리었다.
은사마을 가운데,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적당한 높이의 동산이, 바로 단종태실지다. 여기서 직선거리로 500미터 떨어진 곳엔 단종의 조부인 세종대왕의 태가 묻힌 '세종태실지'도 있었다. 조선 왕실은 태를 묻는 장소를 찾기 위해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할 만큼 신경을 썼다. '태'는 신체의 일부이고, 태를 명당에 묻어야 땅의 기운을 받아 '태의 주인'도 장수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흔히 풍수지리학에 말하는 '동기감응(同氣感應/같은 신체, 같은 혈통은 서로 영향을 준다)'에 근거한 것이었다.
전국 명당을 물색해 태를 안치했고, 사천시 곤명면은 두 왕의 태가 모두 묻힐 만큼 '길지'였다. 특히 세종은 손자인 단종이 태어난 1441년, 자신의 태실 앞 산에 단종의 태를 안치하도록 어명을 내렸고, 그렇게 만들어진 곳이 단종태실지다. 왕실의 사연이 가득한 역사적 공간은, 일제강점기 때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사천의 유지였던 최연국이 이 땅을 일제로부터 불하받은 것이다. 태실지는 훼손됐고, 최연국이 숨진 뒤엔 태실지 정상부엔 최연국의 무덤이 들어섰다.
● 대표적 친일파 최연국…'친일파 명단에 이름이 올랐지만, 무덤은 왕처럼'
사천 출신의 최연국은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히 친일파로 규정한 인물이다. 집안 대대로 사천 지역 부호로 살았고, 일제강점기 때도 자본가이자 관료로 권력을 유지했다. 경남평의회 의원, 경남은행 대주주, 구암토지주식회사 사장, 그리고 1933년엔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가 됐다. 중추원은 명목상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이지만, 실제론 일제 식민지에 협력한 친일파들이 모인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최연국도 일제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1933년에서야 당시 친일파들의 선망의 대상인 '중추원 참의'가 됐다. 국방헌금을 내고 자신과 아들의 창씨개명 사실까지 광고하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였다. 광복 직후, 최연국은 부역의 대가를 처벌받기 위해 조사를 받았다. 향유하던 재산, 권력을 내려놓을 처지가 됐지만,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그에 대한 단죄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1951년 사망했는데, 후손들은 왕의 태실지 위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 '생전엔 숙부에게, 사후엔 친일파에게 밀린 단종'
광복 60년이 지나서야 최연국은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 동시에 이름을 올리면서 대표적인 친일파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등진 그에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최연국의 후손들은 최연국의 무덤을 태실지에 마련하고, 그의 무덤 앞에 2미터 가까운 높이의 비석도 세워놨다. 친일파가 죽어서도 왕의 태실지 위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된 사연, 도대체 그 사연은 무엇일까?
일제는 1928년부터 전국의 태실지를 훼손하기 시작했다. 조선 왕가의 기운을 차단하고 식민지를 공고히 만들기 위해서였다. 단종태실지의 경우, 태실지가 위치한 산의 형세까지 바꿨다고 한다. 태가 보관된 태항아리를 꺼내 다른 곳으로 이장한 뒤, 태실지는 개인에게 불하했다. 단종태실지의 소유권은 최연국에게 넘어갔다.
<마부작침>은 과거 토지대장을 일일이 확인해 단종태실지의 소유권이 어떻게 이전돼 왔는지, 그 과정을 추적했다. 최연국은 1929년부터 태실지를 소유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 이전엔 왕가의 태실지를 관리했던 창덕궁 명의의 땅이었다. 최연국은 1935년,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구암토지주식회사 명의로 이 땅의 소유자를 바꿨다. '구암'은 최연국 일가가 모여 살던 사천시 구암리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태실지는 1983년, 또 한번 소유권이 이전된다. 최연국의 증손자인 최모 씨가 소유자가 됐다. 현재 소유자는 이 최모 씨다. 다만, 실제 땅을 관리하는 사람은 증손자 최 씨의 어머니, 즉 최연국의 손자 며느리라고 마을주민들은 전했다.
최연국에게 넘어간 뒤 태실지의 흔적은 점차 사라졌다. 태실의 내력이 적힌 비석(태비신)은 두 동강이 난 상태로 지금까지 방치돼 있다. 대신 최연국의 생전 활동을 상세히 적은 비석이 놓였다. 이 비석에 적힌 내용을 본 이송순 친일재산조사위 조사연구관(현 고려대 연구교수)은 "공적비 수준의 비문으로, 입신양명해 어렸을 때부터 출세의 길을 달렸다는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을 뿐, 그의 친일 행적 내용은 없다"고 설명했다(동영상). 태실을 둘러싼 돌(지배석)도 이젠 최연국의 무덤을 감싸고 있다. 이 땅이 단종의 태실지였다는 걸 알려주는 흔적은, 귀부(거북 모양, 태비신을 받쳐주던 석물)에서 떼어져 나가 부서진 비석(태비신)에 희미하게 적힌 '대왕(大王)' 두 글자 뿐이다.
경남 사천시는 단종태실지를 문화재로 지정한 뒤 '표지판'도 세워뒀지만, 실질적인 회복도, 관리도 못하고 있다. 최연국 후손의 땅, 즉,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사천시청 공무원은 "환수가 되면, 현장을 복원하려 했지만, 불가 판정 이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토로했다.(인터뷰 동영상) 생전엔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사후엔 친일파에게 밀려나 있는 셈이다.
●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 취소…"참의되기 전 받은 땅이라서"
친일재산환수조사위원회(조사위)는 2006년 출범 이후, 해당 토지를 국가로 귀속하기 위해 조사를 벌였다. 뒤늦게 나마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의 정의를 세우자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이 땅을 조사를 하고도 환수 결정을 내리진 못했다. 태실지가 최연국 소유로 넘어간 건 1929년이었고, 최연국이 '중추원 참의' 관직을 받은 건 1933년이었는데, 일제로부터 땅을 불하받은 시점보다 관직을 얻은 시점이 뒤라는 이유에서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 귀속 특별법'를 근거로 친일파에게서 환수가 가능한 재산은, 친일행위의 대가로 축적한 재산에 한한다. 조사위는 "참의 관직을 태실지 소유 4년 뒤에야 받았기 때문에 이 땅과 관련해선 친일 재산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사위 내부적으로도 이런 결정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조사위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친일 행위를 먼저 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야 관직을 받게 되는 것인데, 재산 환수 대상을 작위나 관직을 받은 이후로 한정하는 건 상식에도, 역사 정의에도 어긋난다는 주장도 많아 격론을 벌였다"고 말했다.
특별법 2조 2항에 명시된, '친일재산은 러일전쟁(1904) 개전 시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친일파가 취득한 재산은 친일행위 대가로 추정한다'는 조항를 근거로, 환수가 가능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조사위 내부에선 1박 2일에 걸쳐 난상 토론을 벌였지만, "법을 두고 지속적으로 외부에서 위헌 시비를 걸고 있는 상황에선 엄격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의견이 우세했다고 한다. (*법조항 및 인터뷰*) 이렇게 태실지는 귀속 대상에서 제외됐고, 최연국만 아니라 다른 친일파에게도 이런 기준은 똑같이 적용됐다.
단종태실지가 친일파의 사유지, 무덤으로 반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태실지'라는 이름도, '태봉'이라는 이름은 희미해져 갔다. '친일파의 무덤'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마을주민들도 갈수록 드물어졌다. 마을주민 A 씨는 "예전에 태가 묻어있었던 곳이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지금은 개인 묘로 알고 있다"며 "친일파의 묘라는 걸 몰랐다"고 말했다. 친일파 최연국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지면서 "태실지 환수는 이제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쪽도 있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에 곳에서 열릴 수도 있다. (*마을주민 인터뷰)
● 국가가 포기했지만, 시민이 되찾은 땅…친일파 민영은 땅
전국에 숨어있는 친일 재산 가운데 단종태실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토지는 곳곳에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곳이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에 위치한, 한 때 친일파 민영은의 소유였던 부동산들이다. 이 땅 역시 친일재산조사위가 "국가 귀속을 할 수 없다"고 결정했던 땅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땅이 "친일재산은 언제라도 환수할 수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청주 상당구에 흩어져 있던 1,894.8㎡의 땅을 두고, 친일파 민영은 후손과 정부 사이 소송이 시작된 건 지난 2011년이다. 충북도청 앞 사거리, 도로 한가운데 1평(3.3㎡) 남짓 땅, 중학교 바로 앞 학생들의 통학로까지 싹싹 긁어서 되돌려 달라며 친일파 민영은의 후손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땅은 토지대장으로 보면, 친일파 민영은과 그 후손들 소유로 돼 있었다. 후손들 주장대로라면 청주시가 무단으로 점유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사위는 이 토지들이 친일 대가로 받은 땅으로 의심하고, 지난 2009년 조사를 벌였지만, "친일재산으로 인정할 자료가 부족하다"며 조사 개시 결정을 취소했다. 민영은이 문제의 땅을 사정 받은 건 1911년부터 1914년 사이, 민영은이 중추원 참의로 재직한 건, 1924년부터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조사위가 땅을 환수하지 못한 채 해산하자, 이듬해인 2011년, 민영은 후손들이 "청주시가 그동안 권한 없이 점유한 땅을 돌려 달라"며 소송을 낸 것이다.
1심 법원은 민영은 후손의 손을 들어줬다. 청주시가 소유권도 없이 남의 땅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고 판단했다. 조사위가 해산하자마자 친일파 민영은 후손이 마치 기다렸다듯 소송을 냈고, 국가가 1심에서 패소했다는 사실이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2심 때부턴 지역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섰다. "친일 부역 대가로 얻은 땅을 그 후손에게 돌려줄 수 없다"며 서명운동을 벌였다. 국가가 친일파에게 땅을 넘겨줄 것이냐며 이 문제를 여론화했다.
● 법원 "친일파가 1904년부터 1945년 사이에 취득했다면…조사위 결정 없어도 환수 가능"
1심 선고가 있고, 1년 뒤 항소심 선고가 내려졌다. 2심은 1심의 결론을 뒤집었다. 후손들은 "조사위가 친일대가로 보기 어렵다며 환수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한 토지"라고 주장했지만, 항소심은 이를 배척하고,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친일재산의 환수 가능성까지 열어준 셈이 됐다.
2심 재판부는 "러일전쟁 개전 시(1904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얻은 재산은 친일재산으로 추정되는 것이고, 이런 추정을 번복하려면 원고가 반증을 제출해야 되는데, 그런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조사위에서 토론을 벌였던 특별법 2조 2항을 법원이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었다. 러일전쟁(1904년)~1945년 8월15일까지 친일파가 취득한 재산은 친일행위 대가로 간주하는 게 원칙이고, 이 전제를 뒤집기 위한 입증 책임은 후손에게 있다는 뜻이다.
재판부는 또 "조사위 결정이 있어야만 귀속 효력이 발생하는 게 아니고, 위원회 활동 종료 이후에도 친일재산 귀속 문제는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2심 선고 후, 민영은 후손들은 상고를 포기해 판결은 확정됐다. 판결 확정 후, "속히 환수 절차에 나서라"는 여론이 높아지자, 법무부는 뒤늦게 민영은 후손들을 상대로 "애당초 이 땅은 국가 소유였다"라며 소유권 확인 소송을 냈다. 후손들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아 무변론으로 법무부가 승소, 이 판결은 확정됐다. 2014년 12월, 친일 재산은 온전히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 "단종태실지도 환수 가능…법무부는 속히 소송 제기해야"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청주 땅의 국가 귀속은 여전히 은닉된 친일 재산 환수를 위한 선례가 된 셈이다. 유사한 처지에 놓인 단종태실지 역시 같은 절차를 통해 환수가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청주 땅 환수를 주도했던 김성진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 사무국장은 "친일재산환수법이 존재하는 한, 단종태실지 역시 환수가 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성진 국장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건, 그 전에 일본 제국주의에 동참했기 때문"이라며 "법무부가 나서 소송을 제기해 단종태실지에 대한 환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주 땅의 극적인 국가 환수 과정에 법원의 판단이 무엇보다 주효했지만, 지역 사회의 관심도 유효한 동력이 됐다.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지속적인 관심이 선행돼야 법적용에 있어서도 적극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종태실지'도, '친일파 무덤'도 아닌 '개인 묘'로 기억하는 사회 구성원이 더 많아지기 전에, 법무부가 시급히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왜곡된 역사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방관하는 것도 죄다.
일왕은 결코 "무조건 항복"을 말하지 않았다 815 오마이뉴스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에 대한 오해
▲ 맥아더를 찾아온 일왕 히로히토 ⓒ 맥아더기념관 /박도
다시 광복절을 맞이하였다. 빛을 되찾은 지 70년이 더 지났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라디오 방송에서 비통하고 침울한 어조로 공표한 것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극히 일부의 일본사 전공자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일왕은 "무조건 항복"은커녕 "항복한다"는 말조차도 입에 담지 않았다. 아예 항복이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았다. 히로히토가 공표한 담화문의 정식 명칭은 '종전 조서'였다. 그것은 미국, 영국 등의 연합국에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어서 간접적으로 '항복'의사가 내포돼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일본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담화 형식의 "종전 선언"의 의미가 더 컸다.
당시 일왕이 공표한 종전 조서는 일본왕실에서 사용하던 문체로 되어 있는데 이를 가급적 왕실 특유의 어조를 살리면서 현대적 의미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고자 충량(忠良)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게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라는 뜻을 전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평온무사(강녕)를 도모하고 전세계(萬邦)가 다 같이 번영(共榮)하여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이 남긴 가르침(遺範)이어서 짐도 두 손으로 받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바다. 이전에 미국과 영국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 또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나 되고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 짐의 많은 관료들(百官有司)의 성의를 다한 노력, 짐의 1억 신민(衆庶)의 봉공(奉公)이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戰局)이 호전되지 않았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그런데다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해 번번이 죄 없는 신민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가 미치는 바를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문명까지도 파괴해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짐은 무엇으로 수많은 신민(億兆의 赤子)들을 보호하고 역대 황조황종의 신령들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짐이 제국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도록 한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끝까지 동아(東亞)의 해방을 위해 일본에 협력한 여러 맹방들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목숨을 잃은 자, 직장(職域)에서 순직한 자,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자 및 그 유족들에게 생각이 미치면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다. 또 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재화를 당하고, 가업을 잃어버린 자의 후생에 관해서는 짐이 깊이 걱정(軫念)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을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을 것이다. 너희 신민의 충정(衷情)은 짐이 잘 아는 바이나 짐은 시운의 흐름에 참기 어려움을 참아내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내어 금후의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열고자 한다.
짐은 이에 국체를 보호 유지하여 충량한 너희 신민의 충심(赤誠)을 믿고 늘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감정이 격하여 함부로 사달을 일으키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하여 대도를 그르치고, 세계에 신의를 잃는다는 것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모쪼록 나라 전체가 한 가족처럼 단결하고 자손들이 이어지는 것을 굳게 하여 神州(일본)의 불멸을 믿어, 책임은 중하고 길은 멀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 두어 총력을 장래의 건설을 위해 기울이고,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튼튼하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흐름(進軍)에 뒤처지지 않도록 기할지어다.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잘 지키도록 하라."
이게 이른바 종전조서란 것의 전부다. 이것을 과연 항복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일본정부는 일왕의 종전 조서 공표 전후로 연합군 측에다 일왕의 존속과 '천황제'가 유지되도록 해주길 바란다는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무조건 항복이 아니라 조건부 항복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여기 어디에 이웃나라를 침략하고 형언 불가의 고통을 가한 것에 대하여 반성과 사죄를 한 게 있는가? 원폭을 맞은 자국민의 인명 살상에 대해선 가슴이 아프다고 했지만 일본군이 일왕 자신의 이름 하에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해 수많은 약탈, 만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인명까지 살상한 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사과한다고 말한 게 없다. 일왕 자신의 전쟁도발 책임에 대해서도 단 한 마디도 없다. '천황제' 국가의 특성인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위 조서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일본이 항복하게 된 이유와 일왕의 심사가 오롯이 손에 잡힌다.
첫째, 일왕이 항복하게 된 이유는 연합군의 공격을 감당하기 힘든 "세계 대세"에 밀린데다 "잔학한 폭탄"으로 규정한 원자폭탄을 맞아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쟁을 계속했다간 일본 민족의 멸망에 그치지 않고 인류문명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둘째, 일왕은 사실을 왜곡하면서 일본의 전쟁도발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렸다. 일본은 19세기 말의 청일전쟁, 20세기 초의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공격 개시 전에 미리 상대국에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일왕은 태평양 전쟁 개전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였다. 더군다나 하지도 않은 "선전포고"를 한 이유가 일본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고 호도하였다.
셋째, 일본의 침략은 일왕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침략전쟁의 도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사실이다. 이는 당시 군사적 모험에 승부를 걸어 대외 강경노선으로 치달았던 군부에게 그 책임을 미루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봐도 된다.
넷째, 일본인 전체에게 거국적으로 허구에 지나지 않은 "만세일계"의 '천황제'를 유지, 보존시키고 "제국의 국체를 수호, 발양"할 것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한 사실이다.
다섯째, 패전의 책임을 방기하는 한편, 일본민족의 불멸을 강조함으로써 다시금 재기할 것을 일본국민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오늘날 일본정부가 시종일관 과거의 침략에 대해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오로지 비뚤어진 절치부심을 통한 재기 후 군사적 팽창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이미 종전 시 일왕이 읊은 종전 조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광복절이 어느덧 70여회나 된다. 일본의 과거사 무시와 왜곡 작태를 시정시키려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일왕의 항복 내용을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달리 어떤 무기가 이보다 더 예리하겠는가?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투철하지 못해 스스로 역사왜곡을 만들어내는 자세로는 절대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깊이 명심할 일이다. | 서상문 기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종전 72년' 특집방송에 드러난 일본의 속내 815 오마이뉴스
13일 방영된 시즈오카텔레비젼(SBS)의 특집을 지켜보면서
현재 시즈오카현 이토시(伊東市)에 살고있는 이나바 스스무 (稻葉進, 88살)씨는 1945년 8월 6일 원폭지인 히로시마의 구레항공대(吳航空隊)소속 대원이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날, 이나바 씨는 구레항공대로부터 30미터 떨어진 하늘에서 새빨갛게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보았다. 16살 소년의 눈에 비친 원폭 현장은 평생 "비참한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토신문(伊東新聞) 8월 14일치 1면 "종전(終戰) 72년" 특집에서 밝혔다.
▲ 이토신문 이토신문 기사에서 이나바 스스무 씨는 “비참한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 이윤옥
그런가하면 어제 (13일) 오전 9시 시즈오카텔레비젼(SBS)에서는 "종전(終戰) 72년"을 맞아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전문가들을 초대해서 종전 72년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참패한 일본은 패전 72년을 맞아 텔레비전과 방송에서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지난 8월 12일부터 이즈반도의 시모다(下田)에 와 있는 기자는 한국의 8.15 광복절을 앞두고 이곳 방송과 신문 등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이곳은 패전(敗戰, 지금은 전쟁이 끝났다는 뜻으로 종전 '終戰'이라 부름)을 맞이하는 지라 "1945년 8월 15일"의 의미는 한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
13일 오전 9시 시즈오카텔레비젼(SBS)에 등장해서 당시를 회고한 다니구치 스에히로(谷口末廣, 97살)씨는 "전쟁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전쟁은 지옥이다. 당시 종전(終戰)으로 진정한 평화가 올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또다시 전쟁 분위기가 일고 있어 안타깝다. 강해지기 위해서 무기를 갖는 게 상대를 위협하기 좋다라든가 약해지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는 식으로 정부는 말하지 말고 진정한 평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지를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 다니구치 시즈오카 방송에서 전쟁을 증언하는 다니구치 씨(텔레비젼 촬영) ⓒ 이윤옥
▲ 다니구치 2 일본군 병사로 전쟁에 참여했던 다니구치 씨의 병사 시절 모습(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13일에 방영된 시즈오카텔레비젼(SBS)의 특집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착잡한 생각을 가졌다. 그 까닭은 다니구치 씨처럼 전쟁 경험을 한 세대는 전쟁을 두 번 다시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특집 방송을 꾸린 방송국이나 언론들은 조금 다른 의도로 프로그램을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의 언론은 제2차세계대전에 대해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양 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날 1시간 동안 방영된 '종전 72년 특집' 내용 중 증언자의 화면 외에 눈에 띄는 것은 연합국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주요도시의 피해상황 보도였다. 무너진 건물과 나뒹구는 시체의 모습을 비추면서 자막에는 연신 사상자 수를 내보내고 있었다.
도쿄 대공습시 10만 명의 사망자가 생겼으며, 오사카 사망자 수 12,620명, 고베 7,491명, 오키나와의 경우는 주민의 4분의 1이 희생당했다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사진과 공습으로 310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자막과 내레이션이 흘러 나왔다. 희생자 수가 자막에 뜨는 동안 화면에는 처참하게 죽어가는 시민들과 황폐화된 도시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오사카 사망자수 연합군의 공격에 의한 오사카 사망자수를 자막에 내보내고 있다(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 전쟁 분위기 패전후 일본은 평화국가 건설을 맹세하며 부흥에 힘썼으나 최근 다시 전쟁 분위기로 몰고 가고 있는 점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순진한 눈으로 이날 방송만을 보고 있으면 일본이 대단한 '피해국' 인양 느껴지지만 과연 일본은 전쟁의 피해자인가를 묻고 싶어졌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시민과 소중한 목숨을 앗아갔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진 피폭자들에게도 평생 치유될 수 없는 마음과 몸의 상처, 방사선으로 말미암은 건강장해를 남겼다. 우리는 이러한 희생과 고통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바친다. 우리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의 실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후세에 전할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교훈 삼아 핵무기 없는 영원히 평화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1996.4)"
이는 몇해전 국립 나가사키 평화기념관에 갔을 때 이 기관에서 만든 홍보용 전단에 적혀있는 글이다. 여기에도 일본은 피해자로 비칠 뿐 그 어디에도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 인식은 없다.
하지만 일제 침략의 혹독한 역사를 겪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이러한 '피해자 의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자이면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이런 류의 방송은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궤변으로 가득한 역사인식이요, 역사왜곡이라는 생각에 씁쓸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러한 역사인식이라면 아무리 종전(終戰)을 돌아보고 평화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그 진정성은 찾기 힘들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의 입장에서 진정성 있는 반성을 단 한번이라도 했는가 묻고 싶다. 1947년 5월 3일 전쟁하지 않는 나라, 일본을 지향하여 만든 '일본국 헌법'을 최근 뜯어 고치려는 모습을 볼라치면 일본의 전쟁야욕을 또 다시 보는 것 같아 우려감이 앞선다.
▲ 국회 인구의 80%가 전후 세대이며, 국회의원 7%만이 전쟁 전 세대라는 자막 안내(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 토론 전쟁을 안하겠다는 맹세라는 주제로 전문가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 강상중 재일학자 강상중 교수가 참여하여 균형있는 토론을 이끌어내고 있다(텔레비전 촬영) ⓒ 이윤옥
일본의 총인구 80%가 전후(戰後)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국민의 5분의 4는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국회의원의 715명 가운데 약 7%인 50명 만이 전전(戰前)에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텔레비젼은 밝힌다. 이것은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가해국 일본의 역사를 체험한 세대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스컴과 언론이 '종전 72년' 특집으로 내보내면서 '피해자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역사인식이라는 생각이다.
정말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의 피해국인가? 기자는 시즈오카방송의 특집프로와 지역신문을 보면서 그런 질문을 던져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재일학자 강상중 교수를 토론자에 넣어 균형있는 의견을 들어보려는 의도는 참신해 보였다.
서북청년단 인분 뿌리고 욕하는데, KBS‧MBC '무보도' 814 프레시안
[KBS‧MBC 피해자 증언대회] ⑤ 사드 관련 피해 증언
▲ 2016년 7월 20일 MBC '사드 집회서 북핵 옹호 검찰 수사 착수' 보도 화면. 박근혜 정부가 사드 배치를 밀실‧졸속으로 결정했던 지난해 7월, 성주 주민들이 격렬하게 반대 투쟁에 나서자 언론은 일제히 '외부세력 개입론'으로 정권을 호위했다. 통합진보당,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 '종북 세력'이 성주 주민들을 부추겨 반대 투쟁에 나서게 했다는 것이다. 공영방송 MBC도 이런 종북 몰이에 뛰어들었다. MBC는 7월 15일 성주군청 앞 충돌사태에 "북한을 가리켜 '저희'라고 표현한 여성이 있었다"면서 이 여성의 민중연합당 지지 전력까지 거론했다. '민중연합당을 지지하고 북한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종북 여성'이 주민들과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는 심각한 오보이자 명예훼손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소한 말실수에도 '종북'을 덧씌워 성주 주민들을 폄훼하려 한 의도가 잘 드러난 보도이다.
우선 지금 이 증언을 누구한테 하는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피해자들끼리 모여서 이렇게 논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느껴집니다. KBS와 MBC 관계자가 여기 있다면, 부디 경청해주시기 사드는 현재 진행형인 사안이기 때문에 피해 사례 고발도 해야 하겠지만, 앞으로 우려되는 언론의 왜곡도 막아달라는 당부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안보 보도의 가장 나쁜 예, 사드 보도의 5가지 특징
방금 성주 주민들의 투쟁에 '종북'이 함께 하고 있다는 식의 보도를 보셨듯이, 사드는 사람들이 꺼리는 국방, 안보 관련 이슈입니다. 사드 관련 보도는 안보 관련 보도의 가장 나쁜 교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론들이 안보 이슈를 다룰 때 어떤 국민이 단지 말실수만 해도 고무찬양죄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서 보도해버립니다. 사드도 마찬가지입니다. KBS‧MBC는 물론 종편, 신문들 모두 사드와 관련해서는 막말에 가까운 보도를 쏟아냈고, 주민들의 참담한 현실을 외면했습니다.
특징 1. 정부 발표 받아쓰기
사드 관련 보도의 특징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일단 국방부나 정부의 발표를 무조건 받아쓰고 홍보하는 것입니다. 작년 7월에 갑자기 사드 배치가 전격 결정되자,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전문가가 되었는지 KBS‧MBC를 비롯한 방송사들이 기술력과 인력을 총동원해서 현란한 그래픽으로 사드를 선전했습니다. 어떻게 배치가 되고, 요격 각도가 어떻게 되며, 어디를 얼마나 방어하는지 보여주면서 한국과 미군 기지를 방어하는 가장 유력한 무기체계라고 홍보했습니다. 보도가 아니라 마치 전쟁영화 같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드는 제조사인 록히드마틴 사에서도 생산을 중단한 고물에 불과합니다. 더 이상 사용 가치가 없기 때문에 추가 생산을 중단했습니다. 실제로 요격해서 적중한 사례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도에는 마치 100% 요격 가능한 것처럼 나옵니다. 당연히 사드의 효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여론은 조명하지 않습니다.
특징 2. 반대 여론은 '반국가 세력' 프레임
둘째, 당연히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여론이 있기 마련인데, 지역 주민들이나 많은 시민들이 반대 목소리를 내면 거의 협박하는 수준으로 '국가 안위를 해치는 무리'로 규정하는 겁니다. 작년 7월 14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국가 안위를 해치는 것은 대한민국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행위이므로 적극 대처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걸 대서특필합니다. 이어서 7월 20일 황교안 총리가 "사드를 반대하는 이야기들, 전자파의 위험이나 사드의 무용론은 모두 괴담이다. 그러므로 처벌해야 한다"는 발언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전파를 탑니다. 이런 보도들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서 국민에게 재갈을 물리는 겁니다.
특징 3. 사실 왜곡과 정보 조작
▲ 사드 관련 피해 증언 중인 조은숙 원불교성주성지수호 비상대책위원회 교육팀장. ⓒ민언련
셋째, 왜곡과 정보 조작입니다. 예를 들어, 배치 부지가 결정되고 수도권 방위에는 무용지물이라는 점이 금방 밝혀졌는데 이런 사실은 굉장히 축소됩니다. 특히, 미국 MD 체계로의 편입이라는 명백한 사실도 아니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사실상 국방부의 지침을 받아서 보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드가 미국 MD 체계를 위한 것이라는 점은 미국 전문가들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KBS‧MBC가 이 점에 대해 정정 보도하거나 사과한 적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사드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중국과 미국의 힘겨루기에 한국의 국토와 국민이 담보가 됐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악화와 무역보복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KBS‧MBC는 문제가 없다거나, 중국에 사대외교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보도를 했습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사상 초유의 대중 무역 적자와 사드 보복입니다. 지난 5월 3일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발표한 보고에 의하면 중국의 보복에 따른 무역 손실이 8조5000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IBK 경제연구소 발표에 의하면 17조 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이런 피해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이것도 언론이 정정하거나 사과한 바 없습니다.
특징 4. 사드 반대하면 '종북'
넷째, '북풍 몰이', '종북 몰이'입니다. 국방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면 곧 친북 행위라는 겁니다. 주민들과 시민들이 종북이고, 친북이고, 이적단체라는 겁니다. 방금 보신 MBC 보도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작년 8월 15일 처음 성산포대 배치가 발표되었을 때 8.15를 기념해서 815명이 삭발을 하면서 결사 항전을 다짐하자고 했는데, 1000여 명이 자발적으로 나설 만큼 성주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사드 반대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성주에서 진행된 '사드 결사반대' 행사를 외부세력, 외부 빨갱이 집단이 들어와서 조장을 했다고 보도했습니다. (KBS 노조 증언에 의하면, 작년 7월 8일 사드 배치가 전격 발표된 지 3일 만인 7월 11일 고대영 KBS 사장이 간부 회의에서 사드 관련 보도지침을 내리면서 '외부 불순세력 개입'을 적극 보도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성주에 사드반대 촛불집회가 시작된 것이 7월 13일인데, 성주 주민들의 사드반대 행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외부세력 개입' 왜곡보도를 준비한 셈입니다.)
특징 5. 정작 필요한 보도에는 '침묵'
다섯 번째,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 정작 보도를 해야 할 사실들은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소성리는 매일 전쟁터인데, 이걸 아시는 분들은 매우 적을 겁니다. 정부가 새벽에 몰래 사드를 반입했던 지난 4월 26일은 마치 '80년 광주'가 경상북도 성주 소성리에서 재현된 것 같았습니다. 80여 명에 불과한 주민들을 포위하기 위해서 8000명의 경찰 병력이 동원됐습니다. 경찰 병력은 성주, 김천으로 들어가는 나들목(IC)부터 모든 도로를 다 봉쇄했습니다. 당일 새벽에 소성리 인근 지역에 있는 모든 주민들의 집집마다 경찰들이 4명씩 배치가 돼서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결국 학교에 못 가서 시험을 놓친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마을 회관 앞을 지키고 있었던 80여 명이 있었을 뿐인데 경찰 수천 명이 에워쌌습니다. 사드와 레이더를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새벽 1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7시간을 봉쇄한 겁니다. 이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 언론, 없습니다. 유일하게 경북 지역 언론 <뉴스민>만 제대로 보도했고, <뉴스민>의 영상을 받아서 JTBC가 보도를 시작했습니다. KBS‧MBC는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주 소성리의 언론은 JTBC입니다. JTBC 기자가 오면, 소성리 주민들은 마치 대통령이 온 것처럼 반가워합니다. 다른 언론들은 없습니다. 놀라운 점은 또 있습니다. 소성리는 지금 세계 언론의 중심에 있습니다. 소성리에 있으면, 정말로 많은 언론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언론이 다 방문합니다. 아랍방송,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미국에 있는 독립 언론들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정작 KBS, MBC 못 봤습니다. 현장에 없는 것이 우리 언론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서북청년단 오줌 싸고 인분 뿌리고 욕하는데, 공영언론은 '무보도'
마지막으로 언론이 이런 문제점들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성주 소성리는 아직도 공권력과 대치 중입니다. 경찰들과 주민들은 매일 몸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돌을 야기하는 원인에는 언론도 있습니다. 지난 6월 12일 내내 관심이 없던 <문화일보>에서 뜬금없이 보도를 하나 내놨는데, '미군의 사드 기름 반입을 성주 민간인들이 검문하고 있다. 치안 부재 상황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연히 <문화일보> 기자는 성주에 오지 않았습니다. 취재 요청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받아쓴 기사였습니다.
<문화일보>가 보도를 내자 6월 15일부터 7월 17일까지 소성리에 서북 청년단이 와서 한 달간 집회 신고를 해놓고 날마다 와서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농사짓고 밭에서 일하고 있는 주민들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빨갱이 새끼들 다 죽여버려야 하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고 욕을 하고, 부녀회장님 앞에서 오줌 싸고, 인분 뿌리고, 집집마다 가서 집 마당에다가 인분을 갖다 놓고, 현수막 다 찢어버리고 이런 짓을 했습니다. 그러자 경찰 병력이 또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말로는 주민을 보호한다면서 정작 서북청년단을 향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항상 주민들을 감시합니다.
저희 원불교와 천주교, 개신교 성직자들이 주민과 함께하면서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종교의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서북청년단의 행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강제로 들어내고 종교 재단 예물들을 부수기도 했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 자유가 유린당하고, 성직자와 주민들의 인권침해가 비일비재한데 이거 보도해줬습니까? 아무도 안 했습니다. 이런 폭력 상황에 대해서 어디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가 이 상황 때문에 지난 7월 19일 경찰청 앞에서 항의 기자 회견을 하고, 경찰청장 사과와 성주경찰서장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지금 소성리는 주민들 대부분이 타박상과 크고 작은 부상이 없는 분들이 없습니다. 이빨 부러지고, 골절되고, 들려 나가고, 이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했던 기자회견도 보도해주지 않습니다. 촛불 이전이나 이후나 오로지 <뉴스민>과 JTBC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유지가 됩니다.
▲ 지난 4월 26일 새벽 사드 장비를 실은 트레일러가 성주골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성주 상황 변한 것 없는데, 폭력 부르는 선동적 보도만 계속돼
여기 KBS‧MBC 기자가 계신다면 묻고 싶습니다. 이런 성주 상황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취재하고 싶지 않습니까? 저라면 하겠습니다. 지난 4월 26일 군은 마치 계엄령에 준하는 작전이라도 행하듯이 사드 장비 일부를 불법 반입했습니다. 전시도 아니고, 긴박한 대치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8000명의 경찰 병력을 움직이도록 한 근거가 무엇인지, 그렇게 특종 경쟁을 사명으로 하는 언론이라면 도대체 왜 군과 경찰이 평시에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지, 그 비용과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이런 것들이 먼저 궁금해야 정상 아닙니까?
당연히 보도해야 할 현장 상황을 보도하지 않는 대신, 경찰의 폭력 대응을 유도하는 선동적 보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조선일보>가 또 ‘어떻게 민간인이 군을 검문하느냐. 소성리는 치외법권이다'(7월 9일 자)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인 7월 11일 이른 아침에 경찰병력 1500명이 소성리에 투입돼 주민들을 포위하고 대치했고, 13일에는 원불교 법회 중인 여성 성직자를 여경도 아닌 남자 경찰이 팔을 꺾고 사지를 들어내는 폭력 행위가 반복되었습니다. 소성리 마을 주민들이 차량을 검문하는 것은 군이 주민들을 속이고 부식 차량에 기름을 싣고 들어가려다가 들킨 후 주민들에게 사과하고 군과 경찰이 암묵적으로 동의해서 몇 달째 진행되어온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 없이 불쑥 '치외법권' 운운하는 보도를 내보내고 경찰의 폭력진압이 강화되는 일련의 상황이 반복되는데 언론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KBS‧MBC 사장 교체 이상이 필요하다
KBS‧MBC 지금 사장 바꾸고 잘 해보겠다고 하시는데 사장 바꾼다고 다 해결되는지, 일단 자문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사장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기본적으로 사안을 대하는 기자들의 기본적인 소양의 문제인가 고민이 필요합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현장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견되는 충돌 상황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예방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환경영향평가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환경영향평가는 배치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절차입니다. 이것도 정권 바뀌면서 겨우 하게 된 것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 현재 운영 중인 레이더와 사드 발사대 2기는 철거해서 원래 상태에서 환경영향평가를 해야 합니다. 철거가 어려우면 운영 중단이라도 해야 하는데, 국방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레이더가 계속 운영되면서 전자파도 문제이지만, 소음으로 인한 피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골프장 바로 직선거리 500미터에 월명1리와 2리에 있는 주민들은 이미 발전기 소음으로 인해서 소들이 유산될 뻔하고, 신생아가 위험해져서 젊은 부부 두 가족이 그 마을을 떠났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이렇습니다. 취재하고 보도해줘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일종의 의무 방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지침도 법제화되어야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삼성-언론 ‘검은유착’, 일간지엔 한겨레 사진기사 뿐 812 미디어오늘
12일 종합일간지 보도 중 한겨레 사진 기사뿐… 주진우 “삼성의 힘 어마어마
시사주간지 시사인 보도로 드러난 삼성과 언론의 ‘검은 유착’과 관련해 주요 일간지들은 관련 보도를 지면에 싣지 않고 있다.
지난 7일부터 12일치 신문에서 언론사 간부들이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에게 보낸 청탁·구애 문자 메시지를 다룬 언론은 한겨레뿐이었다.
한겨레는 12일치 6면 하단 사진기사에 “추미애, 삼성에 청탁한 언론사 겨냥 쓴소리”라는 제목의 사진을 싣고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발언을 전했다.
추 대표는 지난 1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광고 청탁이나 사적 부탁 등 삼성이 언론사를 어떻게 주무르고 관리했는지 알 수 있다”며 “특히 충격적인 것은 매년 수백억 원의 국고를 지원받는 연합뉴스가 삼성 경영권 승계에 사역한 것이다. 이제라도 해당 언론사는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 한겨레 12일자 보도 6면. 빨간색 박스가 장충기 문자를 언급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발언 기사.
▲ 한겨레 12일자 6면 기사.
장 전 사장 문자에서 드러난 삼성과 연합뉴스 간부들의 유착을 비판한 것이다. 한겨레는 지난 11일 “‘언론사 간부들 장충기에 청탁문자, 개탄스러운 일’”이라는 제목으로 더불어민주당 입장을 짧게 인용 보도하고 12일 지면 하단에 작은 사진기사로 관련 소식을 전했지만 지난 8일 온라인 기사에서 시사인 보도를 세세하게 인용했던 것과 비교된다.
반면, 다른 언론사들은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온라인에선 침묵하는 언론에 “이것이 대한민국 언론의 민낯”, “다 공범자들”, “금권 앞에 덜덜거리는 불의한 사회” “언론이 적폐”라는 비난 여론이 쏟아지고 있으나 주요 일간지들은 ‘묵언수행’ 중이다.
방송 언론도 대동소이하다. 지난 8일부터 11일 사이 주요 방송사 7곳 메인뉴스 가운데 관련 사안을 보도한 것은 JTBC와 KBS에 불과했다.
JTBC 뉴스룸은 8일 “장충기 문자 속 ‘언경 유착’”이라는 리포트를 통해 “언론사 전·현직 간부들이 각종 청탁을 하면서 우호적인 기사를 약속한 정황”이 ‘장충기 문자’에 담겨 있음을 자료화면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KBS 뉴스9은 11일 언론사 간부가 정 전 사장에게 보낸 청탁 문자를 소개하며 청탁 행위의 처벌 가능성을 분석했다.
11일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포털 등 온라인상에서도 보도가 적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민언련은 지난 7일 0시부터 11일 12시(정오)까지 네이버 메인 노출 이력을 1시간 단위로 검토한 결과 네이버는 단 한 건의 관련 보도도 메인에 노출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네이버 측은 14일 입장을 내고 이 기간 시사인의 장충기 문자 전문 공개 기사를 메인에 노출했다고 반박했다.
민언련은 주요 일간지 온라인 보도에서도 한겨레가 7건, 동아일보가 2건, 경향신문과 중앙일보가 각각 1건의 관련 보도를 이 기간 포털에 송고한 반면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는 단 한건의 관련 보도도 내놓지 않았다고 밝혔다.
▲ JTBC 뉴스룸 8일자 보도. 자료화면으로 시사인 517호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JTBC 화면 캡처
민언련은 “이들 매체 이외에 온라인 지면을 통해 보도를 내놓은 매체는 YTN(2건), 연합뉴스(2건), 오마이뉴스(1건), 시사저널(1건), 미디어오늘(14건), 미디어스(2건)가 전부”라며 “다음보다 제휴 언론사가 적은 네이버의 경우만 해도 599개에 달하는 매체의 보도를 노출하고 있다. 그러나 599개의 언론사(시사인 제외)가 포털을 통해 노출한 총 관련 기사 수는 41건에 불과했다”고 분석했다.
‘장충기 문자’ 특종을 한 주진우 시사인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포털 사이트에서 내 기사는 꽁꽁 숨겨 놓는다”며 “오늘 장충기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기사(삼성의 MBC 인사 개입)를 썼는데 이 기사도 파묻었다. 삼성의 힘은 정말 어마어마하다”고 꼬집었다.
시사인은 지난 11일 장 전 사장의 문자를 추가 공개하며 삼성이 MBC 인사에 개입한 정황을 폭로했다. 장 전 사장이 익명의 한 인사에게 문자를 통해 “아들은 어디로 배치 받았느냐. 삼성전자 이인용 사장이 안광한 사장과 MBC 입사 동기라 부탁한 건데 안 사장이 쾌히 특임하겠다고 한 건데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던 것.
시사인은 “장충기 전 사장이 MBC 직원의 인사와 관련한 청탁을 받아,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을 통해 안광한 MBC 사장 쪽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장 전 사장 문자에서 언급된 특임사업국은 안광한 전 MBC 사장이 2014년 10월 신설한 사업 부서로 이곳에서 제작한 드라마 ‘옥중화’에 전직 대통령 박근혜의 비선 정윤회씨의 아들 우식씨가 출연해 특혜 의혹이 일었다.
“세계적 과학사기사건, 황우석 사태 교훈 잊지 말아야” 815미디어오늘
박기영 사태 무엇을 남겼나 “시민사회‧과학계 의견 반영 환영” 박기영 “현대판 화형…마녀사냥”
박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순천대 교수) 인사 파문이 임명 나흘 만에 자진사퇴했다. 11~12년 전 온나라를 충격에 빠뜨린 황우석 사건의 핵심 책임자가 다시 과학기술혁신 분야를 총괄하는 수장으로 부활했으나 빗발치는 반대 여론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번 인사 파문으로 청와대는 과학기술 분야 인사실패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생명윤리와 연구윤리 모두 저버린 희대의 국제 사기사건인 황우석 사태의 교훈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편, 박기영 교수는 본부장 자리에서 자진사퇴한 후 황우석 논문조작의 주범이 아닌데 언론 등이 자신을 주범으로 몰았다며 마녀사냥‧현대판 화형당했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청와대 “4차산업 대비 적임자, 박기영”부터 반발 불러
청와대는 지난 7일 차관급 인사에서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에 박기영 순천대 생물학과 교수를 임명했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박 교수에 대해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위한 핵심과학기술 연구개발 지원 및 과학기술분야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나갈 적임자”라고 밝혔다.
문제는 박 교수가 11~12년 전 황우석 난자 매매 및 논문 조작 사건에 연루됐다가 공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라는데 있었다. 그는 황우석 교수의 논문에 대한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조작으로 밝혀진 2004년도 사이언스 논문에 공동저자(제13저자)로 참여했다. 서울대 조사위는 논문에 ‘기여없음’으로 판정했다. 순천대 교수 시절 황 교수와 공동 프로젝트 연구를 하기도 했다. 특히 2004년 1월 청와대 보좌관에 임명된 이후 황 교수와 김병준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 진대제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과 함께 이른바 ‘황금박쥐’(황우석, 김병준, 박기영, 진대제의 약칭) 모임을 구성해 황 교수에 대한 정부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서울대 조사결과가 발표를 전후한 2006년 1월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직에서 사퇴했다.
이 같은 인사에 황우석 사태를 첫 보도한 MBC PD수첩 제작진, 과학계 등에서 반대여론이 터져나왔다. 당시 PD수첩 CP였던 최승호 뉴스타파 PD는 지난 8일 오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이해가 안간다”고 비판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정브리핑에 쓴 글에서 당시 PD수첩 제작진에 대해 ‘위압적 협박취재를 했다’고 보고한 사람이 박기영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었다. 최 PD는 “노 대통령이 말도 안되는 취재를 피디수첩이 했다고 했는데, 적어도 청와대의 과학기술보좌관이라고 하면,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객관적인 스탠스를 취해야 한다”며 “황우석 박사 팀이 어떤 잘못과 문제점이 생기고 이뤄지는지를 점검해야하지 황 박사 말만 믿고 그렇게 보고를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인사는 우리 자신은 물론 많은 시민들을 실망시키는 인사”라고 비판했다.
같은 제작진으로 직접 취재했던 한학수 PD도 “노무현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었어야할 임무를 망각하고 오히려 더 진실을 가려 참여정부의 몰락에 일조했던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 박기영 신임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10일 오후 서울 역삼동 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계 원로 및 기관장과의 정책간담회에 입장하며 민주노총 공공연구노조 조합원들의 항의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부 출연 과학기술연구소 소속 과학기술연구자 조합원들로 구성된 민주노동 공공운수노조 산하 공공연구노동조합(위원장 김준교)도 이날 반대 성명을 냈다. 이들은 “황우석 사태를 불러일으킨 핵심 인물로, 온 나라를 미망에 빠뜨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눈과 귀를 멀게 한 장본인”이라며 “문재인 정부는 정치권을 맴돌며 그럴듯한 ‘4차 산업혁명’의 미사여구와 얄팍한 ‘쇼’로 장밋빛 환상을 설파하던 자를 혁신본부장으로 임명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과학자들 “박기영은 정말 아니다”
박기영 교수의 과기혁신본부장 임명에 젊은 과학자들도 크게 반발했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는 지난 9~10일 오후 서명을 완료한 성명에서 박기영 교수에 대해 이름은 과학기술인들에겐 악몽에 가깝다”며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이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인사를 심각하게 재고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황우석 사태의 최정점에서 그 비리를 책임져야 할 인물임에도 그 어떤 성찰도 보여주지 않았다”며 “황우석 사태가 마무리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등장한 인터뷰에서, 그는 황우석을 여전히 두둔하는 모습만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반대 움직임은 정치성향이나 여야를 특히 가리지 않고 대체로 한 목소리였다.
박기영, 원로 간담회서 11년만의 사과? 서울대 교수 “과학계 모독”
박기영 교수는 이 같은 반대 여론에도 지난 10일 과학기술총연합회 주최 과학기술계 원로 및 기관장과의 정책 간담회 자리에서 입장을 밝혔다. 11년 전의 과오를 사과한 것이다. 그와 함께 일할 기회를 달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사과 기자회견 모습이 되레 반감을 사기도 했다. 원로와의 정책간담회를 이용해 참가자들을 방패막이 삼으려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를 지켜본 서울대 교수 288명도 지난 10일 박기영 본부장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이들은 “박 교수가 자리를 지킨다면 황우석과 그 비호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면 “박 교수는 황우석이 주도한 희대의 사기극에 동참했다”고 비판했다. 교수들은 “황우석 사태 이후 한국의 학문사회가 연구윤리를 정립하려 기울여온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며, 한국 과학계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녹색당도 11일 내놓은 성명에서 사과 기자회견을 두고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관의 ‘원로’들과 기관장들을 찾아 방패막이를 요구했다”며 “황우석씨가 대학원생들을 병풍 삼았다면, 이번에 박 교수는 원로들과 연구기관장들을 들러리로 세웠다”고 지적했다. 녹색당은 “그가 진정으로 사과한다면 그것은 사퇴이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밖에 다른 모든 야당 역시 박기영 사퇴를 요구했다.
박기영 끝내 사퇴 “황우석은 주홍글씨…마녀사냥”
빗발치는 반대 여론에 결국 박기영 교수는 지난 11일 저녁 자진사퇴했다. 그는 사퇴의 글에서 “큰 실망과 지속적인 논란을 안겨드려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드린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언론과 여론에 대한 불만과 억울함이었다. 그는 “11년전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사건은 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였다”며 “청와대 참모로서 정부의 과기정책 담당자로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가장 책임을 크게 지는 방법이고 가장 크게 사과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박 교수가 1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더 거칠었다. 그는 자신이 “황우석 사건의 주범도, 공모자도 아니다”라며 언론과 PD수첩 제작진, 서울대 교수들, 생명윤리학자들이 마녀사냥해 현대판 화형을 당했다고 썼다.
▲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서울대 조사위에서 조사받지 않고, 이름도 거론되지 않았으며 재판과정에 증인소환된 적도 없으니 논문조작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조작된 황우석 논문의 공저자로 올라있는 것과 아무 기여가 없는 것으로 판명난 것에 대한 부인은 하지 못했다. 그는 “실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줄기세포 기획할 때 논의에 참여했고 생명과학을 대상으로 인문사회과학적 분야연구로 3년간 함께 참여했기 때문에 공저자에 넣기로 했다는 전화를 받고 대수롭지 않게 동의한 잘못이 있다”며 “굳이 사양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 때 신중하게 생각하고 거절하지 못한것에 대해 정말 후회한다”고 썼다.
이에 대해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회 공동대표(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는 1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기여하지 않았는데 논문에 이름이 올라간 것이 연구부정”이라며 “신중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잘못의 중대함을 모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 대표는 “황우석 연구팀에 지원된 수백억 원이 본인과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이냐”며 “이 사건은 당시 전세계적 과학 사기사건이 되는 바람에 한국 과학자들의 신뢰가 실추돼 다른 국제 저널에 논문조차 못올린 사람도 생겼다”고 지적했다. 그는 “생명공학, 생물학, 과학분야 신뢰도에 끼친 악영향은 누구의 책임인가”라며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마녀사냥인가”라고 반문했다.
우 대표는 사퇴한 것이 가장 큰 사과였다는 박 교수 주장에 대해 “본인이 민주당 지역위원장을 하는등 정치적 활동을 했는데 그때마다 사과할 기회가 과연 없었다고 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우 대표는 “논문조작 의혹의 진상규명행위를 방해한 행위”이며 “책임이 작다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박기영 사태가 남긴 것 “황우석 사태 교훈 명심해야”
이로써 11~12년 전의 ‘황우석 악몽’을 끄집어낸 박기영 인사 파문은 나흘 만에 끝났다. 이번 인사파문은 단지 잘못된 인사를 교체하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많다.
건강과대안, 보건의료단체연합, 시민과학센터,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은 14일 내놓은 공동논평에서 “늦게나마 시민사회와 과학계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환영하지만, 부적절한 인사의 임명을 강행해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이번 계기로 과학기술과 환경, 보건의료정책의 수립과 집행에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함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가 마녀사냥이라고 한 것에 대해 이들 단체는 “사회 각계각층의 반대가 분출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위 공직자로서의 자질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번 인사로 다시 되새겨야 하는 것이 황우석 사태의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황우석 박사가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학계-정치권-언론 동맹, 개발독재 시대의 낡은 과학기술정책이 있었다”며 “강력한 생명공학 육성정책은 생명윤리와 위험, 연구 절차에 대한 다양한 쟁점들을 경제성장의 장애물로 인식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이러한 정책기조가 문재인 정부에서 ‘4차 산업혁명 육성’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될까 우려했다.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회 공동대표는 “기업 이윤과 규제완화 방향으로 과학기술 정책을 가져가려는 편향을 드러낸 것”이라며 “그것을 위해 세계적 과학사기사건에 연루된 사람까지 중용하려한 것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들을 만나다 내일
▶ ① 노예적 삶에서 자주적 노동자로 서다 2017-08-01
▶ ② 최재호 사무금융노련 초대위원장| 사무직노동운동의 깃발을 세우다 2017-08-03
▶ ③ 오종쇄 전 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 '돈' 아닌 '인간 기본권' 위해 싸웠다 2017-08-08
▶ ④ 이수호 전 전국교직원노조 위원장| 민주화시대 교사운동 새길을 열다 2017-08-10
지난해 평균연봉 3387만원, 1억원 이상 43만명 816 중앙
지난해 한국 근로자의 평균 연봉은 3387만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1억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 근로자는 43만명이었다.
6607만원이 상위10%, 4789만원이 상위 20% 커트라인
소득 하위 구간,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상승폭 더 높아
한국경제연구원(원장 권태신)은 근로자 1544만명을 대상으로 고용노동부가 실시한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의 원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16일 밝혔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근로자의 평균연봉은 3387만원으로 한해 전(3281만원)에 비해 107만원(3.3%) 올랐다. 임금 상승률은 연봉이 낮은 집단에서 상대적으로 더 높았다. 연봉 분위별 평균연봉 상승률은 1분위(하위 10% 이하) 5.3%, 2분위(하위 10~20%) 4.6%, 5분위(하위 40%) 4.4% 순으로 나타났다.
연봉 금액별로 근로자 수를 분류하면 ‘1억원 이상’이 43만명(2.8%), ‘8000만원∼1억원 미만’은 47만명(3.0%), ‘6000만원∼8000만원 미만’은 107만명(7.0%), ‘4000만원∼6000만원 미만’은 224만명(14.5%), ‘2000만원∼4000만원 미만’은 601만명(39.0%), ‘2000만원 미만’은 521만명(33.8%)으로 분석됐다.
연봉 1억원 이상을 받는 근로자 수는 전년(39만명)보다 4만명 늘어났으며, 그 비중은 2.7%에서 2.8%로 소폭 증가했다. 전년도와 비교하면 2000만원 미만 구간만 근로자 수가 감소하고 다른 구간은 모두 늘었다. 연봉 6607만원 이상이 상위 10%, 4789만원 이상이 상위 20%에 속했다.
.총근로자를 100명으로 가정해 50번째에 해당하는 '중위 연봉'은 2623만원으로 지난해 보다 123만원(4.9%) 늘었다.
기업 규모별 정규직 근로자의 평균연봉은 대기업 정규직 6521만원, 중소기업 정규직 3493만원으로 나타났다. 15년 대비 대기업 정규직의 평균연봉은 23만원 감소(-0.3%)한 반면 중소기업 정규직의 평균연봉은 131만원(3.9%) 올랐다. 대기업 정규직의 평균임금 대비 중소기업 정규직의 평균임금 비율은 15년 51.4%에서 16년 53.6%로 올라 대·중·소 기업 정규직 임금 격차가 2.2%p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문고리 사라진 청…‘임하용 실장’과 ‘8수석’ 두 날개로 비상 한겨레 8.16
남의 사람’도 끌어안아 대통령 곁 ‘임하용’(임종석·장하성·정의용)
안철수 최측근이던 장, 박원순 도왔던 임
그림자 수행 참모들은 송인배 비서관·윤건영 실장 참여정부 출신·보좌관 인연
8명 수석과 비서관 48명 전병헌 정무, 조국 민정수석 등
청와대 움직이는 핵심 인사들 비서관들 다양한 출신도 눈길
장관급부터 행정요원에 이르기까지 청와대로 출근하는 480여명 중 ‘직급의 힘’과 ‘대통령과의 거리’를 따져 첫손에 꼽히는 ‘문재인의 사람들’은 임종석 비서실장과 장하성 정책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다. 세 사람은 장관급으로 문 대통령과 가장 가까이 일한다.
‘386 학생운동권’ 출신인 임종석 실장은 본래 문재인 대통령의 사람이 아니었다.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경쟁했던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더 가까웠고, 2012년 총선 때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탓에 당시 유력 대선 주자였던 문 대통령으로부터 불출마 요구를 받기도 했다.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뒤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내며 박원순 서울시장을 도왔지만 지난 대선 때 문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캠프에 합류했다. 문 대통령은 임 실장이 부시장으로 일할 때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밥자리를 함께하며 여러 현안에 대한 공감대를 키워갔다고 한다.
재벌개혁 전도사로 꼽히는 장하성 정책실장은 더 ‘극적으로’ 문 대통령의 사람이 됐다. 장 실장은 2012년 대선 당시 문 대통령과 야권 후보 단일화의 경쟁자였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최측근이었다. 장 실장은 “아무 인연도 없고 심지어 5년 전에 경쟁자를 도왔던 나 같은 사람에게 같이 일하자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한때 ‘경쟁자의 브레인’이었던 장 실장은 문 대통령 바로 옆에서 현 정부의 일자리, 경제, 사회, 과학 정책을 책임지고 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문재인 캠프 외교 보좌그룹 ‘국민아그레망’을 이끌면서 대선 기간 동안 문 대통령이 외교·안보 인사를 만날 때 대부분 배석하며 보좌했다. 다자외교·통상 전문가인 정 실장은 북한 핵·미사일 시험이나 사드 배치 등 안보 현안은 군 출신보다는 외교 전문가가 낫다는 문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국가안보실장에 임명됐다.
이들보다 문 대통령과 더 가까이, 더 자주 만나는 이들도 있다. 부산 출신이자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사회조정비서관을 지낸 송인배 제1부속비서관은 문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행한다. 2004년 총선부터 출마했던 송 비서관은 2012년 총선 당시에도 문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 낙동강벨트’ 일원(경남 양산)으로 나섰다가 고배를 마셨다. 참여정부 행정관 출신으로 19대국회에서 문 대통령의 보좌관을 지낸 윤건영 국정상황실장도 ‘지근거리 참모’ 중 하나다.
청와대를 움직이는 이들 중엔 전병헌(정무), 조국(민정), 하승창(사회혁신), 윤영찬(국민소통), 조현옥(인사), 반장식(일자리), 홍장표(경제), 김수현(사회) 등 8명의 수석과 김현철(경제), 문미옥(과학기술) 두 보좌관의 역할도 막중하다. 국가안보실의 이상철 1차장, 남관표 2차장까지 포함해 차관급 12명이 청와대에서 일한다. 이 중 문 대통령과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호흡을 맞췄던 이는 조현옥(당시 균형인사비서관)·김수현(당시 사회정책비서관) 수석 두 사람이며, 학자 출신인 홍장표 수석, 김현철 보좌관은 각각 문 대통령의 소득주도성장론과 국민성장론의 기틀을 닦았다. 조국 수석은 몇년 전부터 검찰개혁을 주제로 문 대통령과 북콘서트를 함께하는 등 법조계의 적폐청산에 깊은 공감대를 이뤄온 관계다. 언론인 출신이자 네이버 부사장을 지낸 윤영찬 수석은 임종석 실장이 여러 차례 통음을 하며 설득해 대선 캠프의 에스엔에스본부장으로 합류했다. 하승창 수석은 시민사회단체 출신으로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냈고 대선캠프에서 일했다.
실장·수석·보좌관과 함께 일하는 비서관은 모두 48명이다. 정치인 출신으로는 한병도(정무), 진성준(정무기획), 백원우(민정), 은수미(여성가족), 신정훈(농어업) 비서관과 박수현 대변인 등이 포진해 있고, 언론인 출신으로는 최우규(홍보기획), 정혜승(뉴미디어) 비서관과 고민정 부대변인 등이 있다. 시인이자 통일운동가를 자임하는 신동호 연설비서관, 총리실·정부·국회에서 두루 경험을 쌓은 조한기 의전비서관, 더불어민주당 당직자 출신인 권혁기 춘추관장도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사다. “예산과 인사 관련된 곳엔 측근들은 피하고 능력이 검증된 공무원을 채용하라”는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임명된 이정도 총무비서관은 기획재정부 관료 출신이다. 2012년 문 대통령을 설득해 정치로 이끌어낸 핵심 인물이자 ‘복심’인 양정철 전 홍보기획비서관이 유력했던 자리여서 측근들도 모두 놀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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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관급에선 2012년 문재인 캠프와 민주당 보좌관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김종천(비서실장실)·홍일표(정책실장실)·오종식(정무수석실)·한정우(홍보기획비서관실) 선임행정관 등이 대표적이다. 같은 반열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비뚤어진 성의식이 담긴 예전 저서로 물의를 빚어 정부·여당 내부에서도 사퇴 요구가 잇따랐던 탁현민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다.
만기출소 앞둔 '한명숙 징크스’…수사·재판 관여 판·검사 요직서 멀어져816경향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잇따라 수사선상에 올라 ‘표적 수사’라는 비판까지 있었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73)가 오는 23일 2년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다. 이런 가운데 한 전 총리를 기소한 검사나 유죄 판결에 관여한 판사는 새 정부 출범 이후 퇴직하거나 요직에서 밀려난 것으로 나타났다.
수사 당시 제1야당이던 민주당은 한명숙 사건에 대해, 검찰이 이명박 정부 의도에 호응한 ‘야당 죽이기’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검찰 일부에서는 이들의 승진 실패가 한명숙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뇌물 혐의인 한 전 총리의 1차 사건은 1·2·3심 법정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2009년 11~12월 수사 책임자인 권오성 당시 서울중앙지검장 특수2부장(55)은 지난달 27일 검찰 고위간부 인사에서 검사장 승진에 실패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던 김주현 전 대검찰청 차장(54)은 정권교체 후 옷을 벗었다. 이 밖에 주임검사이던 이태관 변호사(46)는 2010년 1·2심에서 무죄가 나오자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사직했다.
1차 사건의 시작은 검찰이 2009년 11월 대한통운 사장을 지낸 곽영욱 전 한국남동발전 대표(77)를 83억원 상당의 비자금 조성 혐의(횡령)로 구속 기소하면서다. 이후 곽 전 대표가 남동발전 대표직에 대한 인사청탁 대가로 한 전 총리에게 5만달러를 건넨 혐의를 수사했다.
이 과정에서 한 전 총리가 소환에 응하지 않자 검찰은 체포영장을 집행해 곽 전 대표와 대질신문을 벌였다. 검찰이 한 전 총리를 기소하면서 내세운 증거는 곽 전 대표의 진술이었다. 하지만 곽 전 대표가 재판에서 “검찰의 위협 속에 허위 진술을 했다”고 말을 바꾸면서 무죄가 선고됐다.
정치자금법 위반인 2차 사건은 1심에서는 무죄였다가 2·3심에서 유죄가 됐다. 이와 관련 차기 대법원장 후보로 이상훈 전 대법관(61)이 법조계에서 유력하게 거론되지 않는 이유로 이 사건 주심 대법관이란 점이 꼽힌다.
2015년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8(유죄)대 5(일부 무죄) 의견으로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년과 추징금 8억8000만원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당시 주심인 이상훈 전 대법관은 “3억원 수수는 유죄로 볼 수 있지만 6억원까지 모두 유죄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일부 무죄 의견을 냈지만 다수결 결과를 뒤집지는 못했다.
2차 사건의 골자는 한 전 총리가 2007년 있었던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그해 3월부터 9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56)로부터 9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것이다. 수사 착수 시점은 묘하게도 2010년 4월8일로 무죄가 선고된 한 전 총리의 1차사건 1심 선고 전날이다. 한 전 총리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6월 지방선거를 두달 앞둔 때이기도 했다.
당시 수사를 관장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이던 김기동 전 대검 부패범죄특별수사단장(53)은 최근 고위간부 인사에서 한직인 사법연수원 부원장에 발령났다. 수사에 참여했던 다른 검사들도 지난 10일 중간간부 인사에서 주요 보직에 가지 못했다.
유민아빠 “3년 간 응어리진게 한 순간 내려갔다” 816미디어오늘
문재인 대통령 16일 오후 청와대서 세월호 가족들 만나…“정부 대표해 사과, 진실 규명 위해 최선 다할 것”
세월호 가족들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족들에게 “정부는 국회와 함께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가족의 여한이 없도록 마지막 한 분을 찾아낼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했다.
16일 오후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가족 등 207명과 만남 자리를 가졌다. 문 대통령은 “세월호를 늘 기억하고 있었고, 선체 수색이 많이 진행됐는데도 아직 다섯 분의 소식이 없어 정부도 애가 탄다”고 말했다.
이어 “그 원인이 무엇이든 정부는 참사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체 침몰을 눈 앞에서 뻔히 지켜보면서도 선체 안의 승객을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을 정도로 대응에서도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정부의 당연한 책무인 진실규명마저 회피하고 가로막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며 “정부를 대표해 머리 숙여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인양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인지, 국민들은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며 “세월호의 진실 규명을 위해서도 정부가 국회와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 드린다”고 말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세월호 가족들과 만나 위로와 사과의 뜻을 전하고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진=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면담 자리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심리치료, 안산 분향소의 공원화 문제, 세월호 보전 문제 등 현안과 진상 규명까지 가족들의 요구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청와대 영빈관 내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는 ‘304명 희생된 분들을 잊지 않는 것 국민을 책임지는 국가의 사명입니다’라는 글귀가 노란 리본 모양 문구가 떠있었다. 이날 만남 자리는 대체로 밝은 분위기로 진행된 가운데 일부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문 대통령에게 액자와 약전, 보석함 등의 선물을 노란 보자기에 싸서 전달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 이후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청와대 가는 길에 입술을 많이 깨물었다”며 “그동안 남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것까지 눈치를 봤다. 일단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줬다는 것만으로도 아픈 사람들은 한이 풀린다. 들어준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영오씨는 “(청와대가) 쉽게 이렇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구나 싶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3년 간 그렇게 고생을 했고 목숨을 걸어가며 단식까지 했고, 경찰들이 막고 안 보내주는 이런 힘든 과정을 겪었다. 대통령이 (만남 자리에서) 연설할 때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나고 3년 동안 응어리 진게 한순간 녹아내렸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세월호 조사위원회 출범이 무산된 것에 대해 세월호 가족들은 수긍하면서도 제2기 특조위에 좀 더 강력한 권한을 모아달라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오씨는 “(문재인 대통령도) 더 강한 제2기 특조위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고, 그게 맞다. 정부 조사위와 제2기 특조위가 양쪽으로 나누어 (함께) 조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문재인 대통령이 강력한 제2기 특조위가 되도록) 협조하겠다는 얘기를 해서 가족들도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언론은 CBS밖에 없는가 [미디어오늘 1113호 사설]
언론사 간부들이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에게 보낸 문자 내용이 공개됐다. 이른바 ‘장충기 문자’ 파문은 그동안 삼성과 언론의 ‘검은 유착’이 얼마나 천박하고 노골적으로 이뤄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광고와 협찬을 요구한 뒤 ‘지면으로 보답하겠다’고 다짐하는 언론사 편집국장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삼성을 도울 수 있는지 말해 달라’는 기자도 나타났다. 대놓고 사외이사 자리를 요구하는 고위급 간부도 있었고, 자식의 취업을 청탁하는 언론사 간부도 등장했다. 삼성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한국 언론이라는 비아냥을 넘어 언론인의 윤리의식이 얼마나 바닥으로 떨어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번 사건은 그 자체로도 충격이지만 파문 이후 해당 언론사들이 보인 태도는 더 놀라움을 줬다. ‘기레기 인증’ ‘삼성홍보지’라는 비판이 쇄도할 정도로 비난강도는 높았다. 하지만 공식사과문을 발표한 곳은 CBS 뿐이었다. CBS는 ‘장충기 문자’가 공개된 이후 노조가 사측에 공식사과를 요구한 데 이어 기자협회 차원의 사과성명서가 나오기도 했다. CBS 프로그램을 통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재차 사과까지 했다.
반면 다른 언론은 어떤가. 연합뉴스는 노조와 기자들이 해당 간부들의 사퇴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그러나 연합뉴스 차원의 공식사과는 아직 없다. 편집국장이 노골적으로 광고와 협찬 등을 요구한 문화일보는 사과는커녕 기자들의 비판성명이나 반발움직임도 감지되지 않고 있다. 기사를 통해 삼성을 도와주겠다는 문자가 공개된 매일경제 역시 사과문이나 기자들의 비판성명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향해 사회정의를 설파하고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했던 언론인들이 자신들의 치부가 만천하에 공개됐는데도 최소한의 유감이나 사과표명이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 언론의 서글픈 현실이다.
‘장충기 문자’ 파문에 연루된 언론사들의 노골적인 침묵도 문제지만 이 문제를 대하는 언론들의 태도 역시 문제가 심각하다. 주요 언론들은 삼성과 언론의 ‘검은 유착’ 소식을 지면에 거의 싣지 않았다. 방송 역시 JTBC KBS SBS 등을 제외하곤 이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장충기 문자’를 통해 공개된 언론사 외에 상당수 언론이 이번 사안을 소극적인 자세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공개가 되지 않았을 뿐 ‘제2의 장충기 문자’가 언제든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언론이 몸을 사리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의혹을 마냥 웃으며 넘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과할 줄 모르는 한국 언론의 일그러진 모습은 ‘장충기 문자’ 파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자진사퇴한 박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인사파문에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언론의 이중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론 ‘박기영 사퇴’와 관련해 가장 큰 책임은 인사검증을 소홀히 한 청와대에 있다.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에서 책임이 자유롭지 않은 당사자를 과학기술혁신 분야를 총괄하는 수장에 다시 기용한 것 자체가 쉽게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이번 인사를 지나치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청와대 책임론’ 못지않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부끄러움을 모르는 언론의 태도다. 진보·보수언론 구분 없이 많은 언론이 박기영 본부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기사와 사설 등을 내보냈다. 여기엔 지난 2005년 이른바 ‘황우석 사태’ 때 ‘PD수첩’을 공격하며 황우석 전 교수를 일방적으로 옹호했던 조중동을 비롯한 대다수 언론도 포함됐다.
특히 황우석 논문 조작과 관련해 진실을 파헤치려는 ‘PD수첩’ 제작진을 색깔론까지 동원해 공격했던 조선일보는 “국가 R&D 예산의 왜곡을 심화시킨 시발점이 황우석 사태”(11일자 사설)라며 정부를 맹비난했다. ‘황우석 파문’ 당시 일방적인 ‘황우석 옹호론’을 펼치며 ‘PD수첩’을 공격했던 언론 가운데 제대로 사과를 한 곳은 거의 없었다. ‘그랬던’ 언론이 이젠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운운하며 박기영 사퇴 요구에 앞장섰다.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다.
文대통령 "서민 괴롭힌 미친 월세, 미친 전세 잡겠다" 817 프레시안
"산타클로스 정책 아냐"…추가 증세 논의엔 선 그어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지난 정부 동안 우리 서민을 괴롭힌 '미친 전세', '미친 월세' 부담에서 서민과 젊은 사람들이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부동산 가격 안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취임 100일을 맞아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번 정부가 발표한 부동산 대책이 역대 정권에서 하지 않았던 가장 강력한 대책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부동산 가격을 충분히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럼에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난 뒤에 만약 부동산 가격이 다시 오를 기미가 보인다면, 정부는 더 강력한 대책도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주택 보유세 인상에 대해서 문재인 대통령은 "공평 과세나 소득 재분배라든지, 더 추가적인 복지 재원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정부도 검토할 수 있다"면서 추가 인상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러나 증세 일반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추가적인 증세 필요성에 대해 국민의 공론이 모아지고 합의가 이뤄진다면 정부도 그것을 검토할 수 있지만, 현재 정부가 발표한 여러가지 복지 정책들은 지금까지 정부가 발표한 증세 방안만으로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 본다"고 선을 그었다.
'문재인 정부 100대 과제'에 필요한 재원 178조 원을 '초대기업, 초고소득자 증세'만으로 마련할 수 있다고 공언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증세를 통한 세수 확대만이 유일한 재원 대책이 아니다"라며 "기존 재정 지출에 대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해서 세출을 절감하는 것도 중요하고, 자연적인 세수 확대, 기존 세법 하에서도 과세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세수 확대들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퍼주기 복지'를 한다는 보수 야당의 주장에 대해서도 문 대통령은 "정부의 여러 정책에 대해서 재원 대책 없이 계속해서 '산타클로스 같은 정책'만 내놓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들을 하는데, 하나하나 꼼꼼하게 재원 대책을 검토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설계한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앞서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박형준 전 수석은 이날자 <한국일보> 인터뷰를 통해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돈을 쓰는 ‘산타클로스 정책’이 너무 많다"고 비판했었다. 문 대통령의 답변은 이같은 비판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친일파 재산보고서③ 적산(敵産)은 아직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SBS 뉴스 817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이란 뜻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과 일본기관이 소유했던 동산과 부동산을 광복이 된 이후 사람들은 '적산'이라고 불렀다.
적산은 미 군정법령 제33호에 따라 조선 군정청으로 귀속되기 시작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 주체가 이관됐다. 한마디로 적산은 모두 국가로 귀속되는 게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친일파들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친일파 재산은 물론, 적산 환수도 난항을 겪었다. 한국전쟁까지 발발하자 토지대장 상당수는 소실됐고, 귀속돼야할 일본인 명의의 토지, '적산' 가운데 상당수의 땅은 그 소유권이 묘연해졌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과 소셜 동영상 미디어 <비디오머그>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4년간 한시적으로 활동했던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확보했던, 재조일인(在조선일본인,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명단과 대조해 작성된 '적산 의심 리스트'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전국 각지에 산재한 '1만 425필지(1,144만㎡)'의 '적산 의심 토지'가 적힌 리스트를 토대로, 유령처럼 우리 곁을 떠도는 '현재진행형 적산'을 찾아나섰다. 적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역사적 좌절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도 알아봤다.
● '나카라 야쓰오'…"내가 산 땅이 옛날에 일본인의 땅이었다고?"
복숭아로 유명한 충복 옥천. 3년 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복숭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 서 모 씨에게 지난해 말 정부가 발송한 문서 한 통이 날아왔다. 서 씨가 갖고 있는 땅이 "과거 일본인 명의의 땅이었으니 어떤 과정으로 땅을 갖게 된 건지 해명하라"는 내용이었다. 해명을 못하면 국고로 환수할 것이란 경고도 덧붙여져 있었다.
2년 전, 진입로 확보 문제로 원래 서 씨가 가지고 있던 땅 일부와 이웃한 땅을 교환한 것이 화근이었다. <마부작침> 취재 결과, 토지 교환으로 현재는 서 씨의 소유가 된 땅은 광복 이전엔 '나카라 야쓰오'라는 일본인의 땅이었다. 정상적이라면 광복 직후 국고로 환수됐어야 할 땅, 즉 적산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땅은 어찌된 일인지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있다가 1970년, 강 모 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고, 2004년, 다시 한 모 씨로 소유자가 바뀌었다. 그 뒤 한 씨와 서 씨가 땅을 교환했던 것이다.
<마부작침>은 수소문 끝에 2년 전 서 씨와 땅을 교환한 한 씨를 만났다. 올해 84살인 한 씨는 문제의 토지에 대해 "4대째 물려받아 농사를 지어온 땅"이라고 주장했다. 2004년 남편이 죽자 땅을 상속받았는데, 한 씨의 남편이 바로 1970년부터 땅 소유자로 등록돼 있던 강 모 씨다. 한 씨는 이 땅이 당초 남편 명의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 남편이 죽고 나서야 남편 명의의 땅이 있다는 걸 알게 돼 명의를 자신으로 바꿨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한 씨는 "옛날에 남편이 동네 사람들에게서 서명을 받아 국가기관에 뭔가를 제출한 적이 있는데 그게 이 땅과 관련한 것 아니겠느냐"고 추정했다. 현재 이 땅은 국가가 "국고로 환수하겠다"며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 3차례 '부동산 등기 특별조치법'…'적산'이 의심되는 땅들
땅의 소유권 이력을 추적해봤다. 이 땅은 1970년 강 씨가 매매한 것으로 돼있지만, 이런 사실에 대한 공식적인 접수는 1994년에야 이뤄졌다.
정부는 지금껏 3차례에 걸쳐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별조치법)'을 실시했다. 광복 직후, 적산 청산을 못해 여전히 토지대장상 땅 주인이 일본인으로 돼 있거나, 전쟁으로 인해 토지대장이 멸실됐거나, 시스템 미비 탓에 소유권이 불분명한 경우에, 토지 소유권을 정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특별조치법은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시행된 1차 특별조치법, 1993년부터 1994년까지의 2차 특별조치법, 2006년부터 2007년 까지의 3차 특별조치법이 있었다.
문제는 방식이었다. 1, 2차 특별조치법 당시 정부는 리·동별 보증인 3~6명을 위촉한 뒤, 보증인들이 "이 토지는 A 씨가 과거부터 소유하고 있었거나 돈을 주고 산 것이 맞다"고 증언 형식의 보증만 하면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해 줬다. 대부분 현장 조사조차 실시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소유권이 불분명한 땅을 얼마든지 '내 땅'으로 만들 수 있었던, 허술한 방식이었던 셈이다. 주로 신고 시점에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땅이 타깃이 됐고, 그 중심엔 '적산'이 있었다. 과거 일본인 소유였지만,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여전히 일본인 명의로 남아 있는 땅, 그 정체가 모호한 '적산'들이 정체가 불분명한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곤 했다.
앞서 서 씨가 맞바꾼 문제의 땅이 대표적인 경우다. 1970년 강 씨(한 씨의 남편)가 매수했다는 토지는 2차 특별조치법 시행 기간 동안 등록됐다. 한 씨가 "남편이 동네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았다"라고 이야기한 것도 당시 정부가 지정한 보증인에게 보증 서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 씨는 4대째 물려받은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입증할 서류는 없다. 보증인들도 모두 숨졌다. 친일재산조사위로부터 적산 환수 업무를 인계 받은 조달청은 뒤늦게 "한 씨의 남편 강 씨가 1970년 실제 땅을 매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땅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이라며 환수 소송을 낸 것이다.
● "돈 주고 샀다"…증명하기도, 반박하기도 힘든 상황
충북 옥천에서 '적산' 문제로 국가와 소송 중인 다른 사람을 더 찾을 수 있었다. 올해 90살에 가까운 유 모 씨다. 정부는 최근 유 씨 땅에 가처분 등기를 했다. 한 동안 토지를 남에게 팔거나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토지대장에 따르면, 광복 이전 유 씨의 땅의 소유자는 '이리야마 노보루'였다. 그러다 1980년 유 씨 명의가 됐고, 소유권 등기 17년 전인 1963년 유 씨가 이 땅을 샀다는 이유에서다. '이리야마 노보루'와 '유 씨' 사이에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 씨가 이리야마 노보루에게 1963년 이 땅을 매수했다는 의미이고, 이 토지는 1차 특별조치법 기간 등기 신청됐다.
[마부작침] 친일파 토지대장/등기부등본<마부작침>이 유 씨를 찾았을 때, 유 씨는 거동도 힘들었고. 기억도 또렷하지 않았다. 귀가 어두워 의사소통도 쉽지 않았다. 유 씨는 분쟁 중인 땅의 구체적 소유 과정에서 대해 "세월이 너무 흘러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다만 "이 땅을 돈을 주고 산 것 만은 맞다"고 강조했다. 또 "당초 땅 주인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내 땅을 환수해 가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역정을 냈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서류나, 증언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문제의 땅은 국고로 환수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유 씨가 땅을 실제로 매매한 것이 아니라는 확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 광복 70년 만에 시작된 일본인 명의 토지 환수…구조적 한계
이렇게 된 것은 '적산'에 대한 관리와 환수가 광복 이후 오랜 기간 부실했고, 친일파 재산 환수가 본격화한 2006년 이후에도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5년 8월, 조달청은 일본인 명의 은닉 재산, 즉 '적산 의심 토지'의 환수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친일재산조사위가 2010년 활동을 종료하며 마무리하지 하지 못한 작업을 이어서 해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조달청은 광복 전, 일본식 이름으로 명의가 돼 있는 53만 필지 토지대장을 입수했다. 이 가운데 창씨개명한 한국인이 소유했던 토지는 우선적으로 제외했다. 그리고 친일재산조사위가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한 '일제강점기 재조선 일본인' 약 23만 명의 명단과 일일이 비교했다. 그 결과, 10,479필지의 경우 한국인 명의로 소유권이 변동된 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적산'으로 확인된 땅은 환수할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조달청 관계자는 "'몇십 년 동안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땅을 환수하느냐'는 협박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일부 적산에 대한 조사와 환수가 광복 이후 70년이나 지나서, 너무 늦게 진행된 탓이었다. 곳곳이 난관이었다. 오랜 세월이 이미 흐른 터라 진실 규명도 어려웠다. 토지 조사는 매매 계약서 존재 여부, 주변인 진술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소유자가 실제 땅 주인이 맞더라도 이를 확인해 줄 사람이 없거나 계약서가 분실됐다면 국고로 환수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반대로 현 소유자가 실제 땅을 사지 않았더라도 계약서를 위조하거나 주변 사람들과 말을 맞추면 소유권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했다. 현실적 한계가 구조적으로 분명했던 셈이다.
● "작은아버지 이름도 등장하는데…" 증명할 수 없어 국고로 환수된 땅
전남 영광에서 몇십 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오 모 씨. 지난해 말 오 씨의 임야 6,446㎡가 환수됐다. 과거 일본인 명의, 즉 적산으로 국가 귀속돼야 할 땅을 "오 씨가 불법적으로 취득해 명의를 바꿔놨다"는 이유에서다.
<마부작침>과 만난 오 씨는 잘못된 방법으로 땅을 취득한 사실은 인정했다. 2차 특별조치법 당시 보증인들에게 서명을 받아 일본인에게 땅을 샀다는 내용으로 허위 신고해 땅을 취득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해당 땅은 과거부터 자신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관리해 온 가문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적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일가 중 누군가의 소유로 돼 있어야 하는데, 2차 특별조치법 당시 문제의 땅이 일본인 명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등기 신청을 했노라고 털어놨다.
환수된 땅의 소유주를 역추적했더니 오 씨의 말처럼 토지대장에는 오 씨의 작은아버지 이름이 등장했다. '오산(吳山)'으로 시작되는 네 글자는 "작은아버지가 창씨 개명한 이름"이라고 오 씨는 주장했다. 그리고 그 아래 이름은 오 씨의 고모, 즉 작은아버지의 동생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아래 두 개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오 씨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름은 친인척일 것이라고만 추정했다. 그렇지 않다면 소유권을 이어받은 사람이, 오 씨 아버지가 오랜 기간 동안 문제의 땅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있진 않았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실제로 이 땅을 "오 씨의 아버지가 관리해 왔다"는 건 마을 주민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하지만, 광복 직후 문제의 땅의 소유자로 토지대장에 기재돼 있는 '가와모토 이시이와'가 누군지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고 말한다. 해당 땅이 일본인 명의로 된 사실을 알았던 1994년에는 이미 사정을 알만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등이 모두 사망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오 씨는 "서류를 꾸며 해당 땅을 자신의 이름으로 돌린 것은 잘못됐다"고 인정하면서도, "문제가 된 땅이 원래부터 우리 가문 소유였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고 억울해했다.
● "땅을 샀을 리가 없는데…"서류로 지켜낸 땅
전남에 땅을 가진 A 씨에게도 지난해 말 정부 명의 문서가 배달됐다. 토지대장에 따르면 A 씨가 소유한 땅은 광복 전까진 일본인 명의였고, 1974년 A 씨가 매수한 것으로 돼있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당초 이 땅을 광복 직후 환수 됐어야 하는 '적산 의심 토지'로 분류했다. 다만, 서류상 광복 이후 29년이 지나 A 씨가 일본인에게 매수한 것으로 돼 있었다.
A 씨는 <마부작침>과의 통화에서 해당 땅은 "과거 일본인에게 돈을 주고 산 것"이라며 "1차 특별조치법 당시 계약서를 바탕으로 등기 신청했다"고 말했다. "일본 사람과 만나 돈을 거래 한 것이 맞느냐"는 질문에는 말을 아꼈지만, "당시 계약 서류를 보냈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는 계약서를 바탕으로 매매 사실이 확인된다며 최근 소를 취하했다. '적산'이 아니라 A 씨 소유로 인정해준 것이다.
그러나 <마부작침> 취재 결과,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점들은 있었다. 문제의 땅이 있는 마을의 한 주민은 "A 씨가 일본인에게 땅을 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1974년 A 씨가 일본인에게 땅을 매수했다면, 땅을 판 일본인이 1974년에 마을에 있어야 하거나, 적어도 그 땅의 주인이 계속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마을주민이 있어야 되는데, 이걸 알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마을주민은 "당시 마을에 일본인이 온 것을 본 적도 없고, 땅 주인이 일본인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며 "광복 전 이 마을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떠나간 일본인 명의의 땅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는 정황 증거일 뿐이고, 매매계약이 진실 또는 허위라는 걸 명확하게 확인하기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점이다. 실제로 A 씨가 '일본인' 또는 '창씨개명을 했던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는 한국인'으로부터 땅을 매입했을 수도 있다. 입증 책임은 정부에게 있고, A 씨의 매매계약서를 뒤집을 다른 증거를 확보 못한, 현실적으로도 확보하기 어려운 정부 입장에선 환수를 위한 뾰족한 수단은 없는 셈이다. 때문에 '적산 의심 토지'에서 이 땅은 결국 제외됐다.
● 지연된 정의의 대가…"대어는 놓치고 피라미만 잡는 격"
구조적 한계 속에서 정부는 지난 2년 간 소유권 반환 소송 88건을 제기해 17건을 승소하거나 소송이 마무리되기 전 자진반환 받았다. 환수된 땅은 13,545㎡ 규모다. 뒤늦게 매매 사실이 확인돼 소를 취하하거나 패소한 경우를 제외한 63건은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다.
지연된 청산의 후폭풍은 크다. 상당수 '적산 의심 토지'는 그동안 많게는 수십 차례 거래가 이뤄지면서, 최초로 적산을 불법 취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광복 직후 이뤄졌어야 할 적산 환수 실패 탓에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준식 전 친일재산조사위 상임위원은 적산 환수 작업 당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전 위원은 "2009년 즈음 적산 환수 작업을 하는데, 아직도 조선총독부 명의의 토지가 남아있었다"며 "'우리가 아직도 일제 식민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또 그는 불법적으로 적산을 가져간 사람들과 함께 해방직후 이뤄진 '적산불하'를 악용한 이들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적산불하'는 이승만 정부가 일본인 소유였던 공장·집 같은 부동산과 차량·기계와 같은 동산, 즉 대표적 '적산'을 개인 또는 기업에게 나눠준 걸 말한다. 이준식 전 위원은 "광복 직후 적산불하 과정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적산을 가져간 사람이 많은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파"라며 "이렇게 가져간 적산이 친일파와 그 후손에게는 훗날 부의 원천이 됐다"고 덧붙였다.
친일파가 가져간 적산은 귀속 대상도 아니다. 친일재산환수법은 '러·일 전쟁 개전 시부터 광복절까지' 취득한 재산만 환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적산불하'라는 외견상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이유로 현재진행 중인 적산 조사 대상에도 빠졌다.
'어제의 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다'는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말은 한국 사회에선 현실로 반복되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단죄를 받기는커녕, 적산불하를 악용해 재산을 증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단죄의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이 절실하다. 그리고 옳지 못한 방법으로 형성된 부를 되돌리는 것이 '단죄'의 한 길이다.
‘작전타임→프리스타일’…역대 대통령 100일 기자회견은 ‘당당ㆍ회피ㆍ사과’ 중앙 817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은 사전에 질답을 조율하는 기존의 방식을 탈피한 ‘프리스타일’로 진행됐다. “떨리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이 나올 정도였다. 문 대통령은 “국가의 역할을 다시 정립하고자 했던 100일”이라며 “그동안 부족함은 없었는지 돌아보고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 100일을 전후해 향후 국정운영 방향의 견해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어왔지만 대체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취임 초기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며 힘든 100일을 보내서다.
임기 초 국정운영 비판 속 회견 많아
조용히 넘어간 박근혜, 2번 고개숙인 이명박, 비판 수용한 노무현 등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3년 6월 청와대에서 열린 아르만도 게부자 모잠비크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취임 100일 회견 생략한 박근혜=북한 3차 핵실험(2013년 2월 12일)과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등으로 임기 초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대신 청와대에서 아르만도 게부자 모잠비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에너지 자원 개발과 새마을운동 전수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정치적 이벤트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임 100일은 조용히 임하겠다”고 했다. 난해한 정국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일종의 작전 타임을 가진 셈이다. 다만 100일 닷새 전인 5월 31일 기자들과 오찬 간담회를 갖고 “신이 나에게 48시간을 주셨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을 텐데 출발이 늦다보니 100일이라는 게 별로 실감도 안 난다”고 소회를 밝혔다.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특별기자회견에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특별기자회견서 두번 사과한 MB=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취임 116일째의 특별기자회견(2008년 6월 19일)에서 2번이나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광우병 파동 때문이었다. 100일 당일에 연 국무회의에서는 “오늘은 자축해야 하는 날이지만 자성해야 할 점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광우병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지 22일만에 회견을 열고서도 “저와 정부는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며 고개를 숙였다.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으로 회견문을 낭독한 뒤에는 “촛불로 뒤덮였던 거리에 희망의 빛이 넘치게 하겠다”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반면 이어진 질의에선 광우병 파동과 공기업 민영화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미리 준비한 답변자료를 거의 보지 않고도 상세히 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다.[중앙포토]
.◇산적한 현안…방어형 기자회견한 노무현=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98일째인 2003년 6월 2일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을 향해 쏟아진 각종 비판을 수용했다. 이라크 파병과 전교조 연가투쟁, 측근ㆍ친인척 비리 의혹 등이 제기된 가운데 열린 기자회견이었다. 그는 “모두 잘했다고 말씀드리지 않겠다. 시행착오도 있었다”며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정착시키는 데에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100일 동안 우리 사회에서 빚어진 여러 현안들 대부분이 이런 전환에 따른 진통을 반영하는 것이며, 물론 저와 정부의 잘못도 적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쳐가겠다”고 덧붙였다.
◇DJ는 국민과의 대화,100일 회견의 시초 YS=외환위기 수습으로 정신없는 100일을 보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5월 10일 방송을 통한 국민과의 대화 방식으로 기자회견을 대신했다. 당시 그는 “외환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수출을 늘리고 외국투자를 많이 끌어와야 한다”며 경제개혁을 강조했다. ‘100일 회견’의 시초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1994년 6월 당시 82%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비교적 당당한 자세로 회견에 임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등 초반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했다고 평가 받은 덕분이다. 그는 회견에서 “제2의 건국을 한다는 각오로 함께 전진하자“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 참석,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가진 첫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회견문을 낭독한뒤 질문자를 지정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 대통령 첫 기자회견, 박 전 대통령과 달랐던 세 가지 817 한겨레
①취임 뒤 100일만 vs 10개월 만에
17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은 여러모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비교된다.
박 전 대통령의 취임 뒤 첫 기자회견은 2014년 1월6일에 열렸다. 신년 기자회견을 겸한 자리였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13개월, 취임 뒤 10여개월만에 열린 ‘진귀한’ 기자회견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선 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에도, 정부 출범 이후에도 단 한 차례의 기자회견도 열지 않았다. ‘멸종’ 수준에 이른 기자회견은 박 전 대통령 ‘불통’의 상징이 됐다. 전임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1년 간 15번에 걸쳐 기자회견이나 ‘국민과의 대화’ 자리를 가졌었다.
박 전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사전에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 표현을 써가며 통일의 경제적 효과를 강조했다. 반면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등에 대해서는 “국력 소모”, “재판중”이라는 말로 답변을 접었다. ‘국력 소모’라던 국정원 사건은 3년7개월만에 검찰 재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치·경제·사회적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업무 뒤 관저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대통령 개인생활과 관련한 ‘한가한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르는 진돗개 이름까지 불러가며 의욕적으로 답변했다. “보고서를 보는 시간이 제일 많다”, “장관·수석과 수시로 통화하고 결정한다”, “국정의 최종 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개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 “개인적 일과 국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자나깨나 그 생각을 하고 거기서 즐거움과 보람을 찾는다”, “어떤 분들은 너무 숨 막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저는 그런 식으로 지금 국정에 임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이후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와 이후 재판 과정을 통해 상당부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②분야만 사전 조율 vs 각본대로 진행
박 전 대통령 재임 중 있었던 몇 차례 안 되는 기자회견은 매번 ‘사전 각본’에 따라 기자의 질문과 대통령의 답변이 미리 준비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문 대통령의 취임 100일 기자회견은 다르다고 청와대는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 사회를 맡은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오늘 기자회견은 기자들이 자유롭게 묻고 자유롭게 답하는 토론방식으로 진행된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청와대와 기자단 간의 질문 주제와 순서만 조율하고 질의 내용과 답변 방식은 사전에 정해진 약속이 없었음을 알려드린다. 따라서 대통령은 여러분이 어떤 질문을 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공지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을 향해 “대통령님 긴장되시죠?”라며 가볍게 긴장을 푸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기자회견은 △외교·안보(연합뉴스, 아리랑TV, 한겨레) △정치(SBS, YTN, JTBC) △경제(머니투데이, 매일경제) 분야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지역언론(경기일보, 강원일보, 경상일보) △외신(CNN, NHK, NBC) △인터넷매체(오마이뉴스) 등 15개 매체에 질문권이 주어졌다.
이날 기자회견은 사전에 ‘디테일’한 부분까지 조율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 기자회견 후반부 자유질문 시간 때는 윤영찬 수석이 손을 든 기자나 매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빨간스웨터 입으신 기자님 질문하시죠?”라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신문·방송·통신 등 이날 질문 기회가 주어진 언론사들의 구성을 볼 때 청와대 자체적으로 어떤 매체에 질문권을 줄지 내심 준비했던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③일본 기자의 껄끄러운 질문 vs 일본은 배제
한반도 상황의 급박함을 고려한 탓인지 외신에게 3차례 질문권이 주어진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박 전 대통령 첫 기자회견 때는 외신기자들 사이에 ‘청와대가 자신들을 들러리로 세웠다’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기자회견에는 청와대가 외신기자 클럽 소속 기자들과는 별도로 초청한 것으로 알려진 <로이터> 통신과 중국 관영 <시시티브이>(CCTV) 기자에게만 질문권이 주어졌다. 이를 알지 못한 일본 언론 등 일부 외신기자들이 회견 도중 계속 손을 들어 질문 기회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를 두고 한-중, 한-일 관계가 반영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문 대통령 기자회견에선 먹구름이 낀 한-일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기자에게 질문권이 주어졌고, 한일 위안부 협상 재검토와 강제징용 보상 문제 등 껄끄러운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윤영찬 수석은 기자회견이 끝난 뒤 “콘티 없이 기자분들을 지명하다보니 생중계라는 압박에 쫓기는 부분이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추다보니 사회·문화 부문(질문)에 대한 명확한 어나운스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각 매체를 고르게 배려하려했으나 결과적으로 소홀해진 매체군도 있다. 다음 기자회견엔 꼭 반영하도록 하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리얼미터] “취임 100일 문재인 정부 부정평가? ‘하나도 없음’ 1위”817 민중의소리
긍정평가 1위 ‘서민과 약자 우선의 정책’
취임 100일을 맞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국민 10명 중 6명은 취임 100일을 맞은 문재인 정부가 가장 잘한 것으로 ‘서민과 약자 우선의 정책’과 ‘탈권위적 소통과 공감의 행보’, ‘뚜렷한 개혁 소신과 추진력’을 꼽았다.
tbs 의뢰로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16일 성인 9,513명을 대상으로 지난 100일간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평가를 조사한 결과를 17일 발표했다. 가장 잘한 긍정평가로는 ‘서민과 약자 우선의 정책’이 23.0%로 가장 높게 차지했다.
이어 ‘탈권위적 소통과 공감 행보’가 21.3%로 2위, ‘뚜렷한 개혁 소신과 추진력’이 18.5%로 3위, ‘정의와 형평의 국정철학’이 11.0%, ‘평화와 대화의 외교안보’가 4.9% 순으로 이어졌다. ‘기타’는 2.9%, ‘하나도 없음’, ‘잘 모름’은 각각 12.2%와 6.2%로 나타났다.
특히 가장 잘못한 부정평가로는 ‘하나도 없음’이 33.5%로 가장 많이 꼽혔다. 대부분의 지역·연령·이념성향에서 ‘하나도 없음’이 1위를 차지했다.
이어 ‘과다한 선심성 정책’(19.2%), ‘내편/네편 편가르기’(11.8%), ‘외교/안보 능력 부족’(10.6%), ‘공약과 약속 뒤집기’(4.7%), ‘독선과 협치무시 국정운영’(3.6%) 순으로 조사됐다. ‘기타’, ‘잘 모름’은 각각 5.5%, 11.1%로 집계됐다. 이번 조사는 16일에 전국 19세 이상 성인 9,513명에게 접촉해 최종 505명이 응답을 완료, 5.3%의 응답률을 나타냈다. 또한 무선(10%) 전화면접 및 무선(70%)·유선(20%) 자동응답 혼용, 무선전화(80%)와 유선전화(20%) 병행한 임의 전화걸기 방법으로 실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4%p로 나타났다.
성적 자유주의가 상업주의를 만났을 때 814 시사인
탁현민 행정관은 지금 억울할까. 너무 많은 이들로부터 자신의 삶을 부정당한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여성가족부 장관·국회의원·언론· 여성단체·일반인 등 수많은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은 그의 해임을 요구하는 야당 대표의 발언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그토록 대체 불가능한 ‘출중한 능력’을 가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와 별개로 나는 그가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감각의 체제에 관심이 있다. ‘1970년대생 (문화)행사기획자’라는 직함은 한 시대를 보여주는 표본이나 마찬가지다. 이들은 최근 몇 년간 tvN ‘응답하라’ 시리즈나 <무한도전> ‘토토가’ 등을 통해서 소환되었던 1990년대, 바로 그 1990년대의 주인공이었던 X세대다.
쿨하게 행동했을 때 겪는 부당함에는 관심이 없는 자유
1990년대를 회고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애초에 시대 자체가 새로운 것에 매달리다시피 했으니 별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1997년 외환위기로 ‘잔치’가 강제 종료당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1980년대의 중압감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듯했다. 비록 그것이 무엇이었으며 무엇이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지언정, 1987년 민주화 이후의 공백을 채운 것이 밑도 끝도 없는 ‘문화’였다는 것은 당시에도, 또 지금도 많은 이들이 증언하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에 번성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성(性) 담론이다. 성에 대한 이야기는 대중문화에서부터 사회운동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전략인 ‘파격’은 성의 영역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부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이나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대중적 관심사가 쏠리는 곳은 역시 ‘섹스’ 그 자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가 컸던 것은 성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성적 엄숙주의와 그에 동반되는 위선을 맹비난하며, 직설적이고 즉물적인 욕망을 옹호했다. 즉 이들은 독재로부터의 해방에 이은 성 해방을 주장했다.
물론 성 해방은 인간의 자유가 증대되는 데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성적 억압과 허용이 어떻게 권력에 의해 이용되어왔는지 그 역사적 사례가 많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방의 내용이다. 특히 ‘탁 행정관 류’의 자유주의는 자신들의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생성되어 있고, 어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불)가능한지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진정한 욕망이며, 성욕의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라고 단언한다.
여기에 그 내밀한 이야기들을 활자로 찍어낼 수 있었던 것은, 조야한 성적 자유주의가 상업주의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의 가장 큰 성공 사례는 가수 싸이의 작업들일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조신한 척하고 근엄한 척하는 이들을 조롱하며 성적 자유를 옹호해왔다. 그의 노래에는 언제나 여성혐오가 깔려 있는데, 이는 그가 늘 조롱하는 성에 소극적이거나 그런 ‘척’하는 여성들이 놓여 있는 상황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쿨’하지 못함을 비난하지만, 그들이 막상 쿨하게 행동했을 때 겪는 부당함에는 관심이 없는 편리한 자유다.
그것이 얼마나 조야한 것이든 자유라고 이름 붙은 모든 것을 다 끌어다 써야 하는 시기도 있다. 모든 역할에는 유효한 기간이 있고, 이 조야한 자유는 이제 용도 폐기해야 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X는 필요 없다. /최태섭 (문화평론가)의 다른 기사보기
경쟁률 3대1…전직 대통령 재판에 몰린 사람들817 시사저널
68장의 방청권 두고 200여명 경쟁…노인들이 대다수
8월16일 오전 10시 서울회생법원 2층.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의 방청권을 얻기 위해서였다. 제1호 법정 앞에서 줄을 선 노인들의 손에는 8월21일부터 5일 동안 있을 제56~59회 공판 응모권 4장이 쥐어졌다. 저마다 응모권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뒤 법정 앞 책상에 놓인 투명한 플라스틱 응모함 4개에 집어넣었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서로 아는 얼굴이 보이는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간간이 보였다. 태극기문양이 박힌 중절모를 쓴 한 노인은 휠체어를 탄 노인에게 “자네, 이번에도 왔어?”라며 인사를 건넸다. 노인의 휠체어 한 모퉁이에는 손수건만한 크기의 태극기가 꽂혀있었다.
8월16일 오전 10시 서울회생법원 2층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 방청권 추첨장에는 약 200여명의 사람들이 몰려 3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 시사저널 김예린
추첨장에 모인 50~70대 사람들
박 전 대통령의 첫 재판 이후 86일이 지났다. 전직 대통령의 재판을 보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방청권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이날 제56~58회 공판을 볼 수 있는 방청자는 68명이었다. 응모한 사람은 약 200여명. 3대1의 경쟁률이었다. 다만 59회 공판은 작은 법정에서 열리기 때문에 20명만 방청이 가능했다. 이곳의 경쟁률은 10대1로 치솟았다. 법원 관계자는 “평소 300명에서 많게는 400명까지 온다. 오늘은 이전보다는 적다”고 설명했다. 네번째 응모하러 왔다는 60대 여성 박아무개씨는 “평소에는 줄이 길었는데 15일 육영수 여사 추모행사를 하고 비를 맞아서 지쳤는지 덜 왔다. 근데 마감 시간이 임박해지면 또 많이들 온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응모 마감 시간이 가까워지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젊은 사람들도 드물게 보였지만 상당수는 50~70대 노인들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무리 중에는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이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 결과에 대해 얘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청권을 응모한 이유를 물었다. 강남구에서 온 60대 여성 이아무개씨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에 왔다. 직접 얼굴 뵙고 응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는 박 전 대통령의 무죄를 거듭 주장하며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이씨는 “증언하시는 분들 가운데 거짓말을 하는 분도 있었다. 헛웃음밖에 안 난다. 박 전 대통령께서 너무 억울하게 당하셔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울먹였다.
박 전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덕소에 사는 이상신씨(48)는 “박 전 대통령을 구하려고 왔다. 죄 없는 여자가 모함으로 인해 법정에 섰는데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론재판’을 받게 됐으니, 판사가 여론에 휩쓸리지 않도록 직접 나섰다는 것이다. 바로 앞에 앉아있던 최순남씨(65‧여)도 이씨의 말에 크게 공감하며 “언론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8월17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언니 또 됐어? 밥 사”
15살 중학생도 있었다. 양대림군은 개학식을 가는 대신 홀로 법정을 찾았지만 자기 또래가 아무도 없어 당황했다고 했다. “TV에서만 본 장면을 직접 보고 싶어서 이번에 처음 응모해봤다. 정치에 관심이 많아 촛불집회에도 나갔다.” 대학생 정주은씨(23)도 “전 국민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재판이기에 나도 관심이 많았다. 법원에서 인턴십을 했는데 그때 바로 옆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며 응모한 이유를 설명했다.
시계바늘이 11시를 가리켰다. 법원 관계자가 마이크를 잡고 응모함을 아래위로 흔들어 응모권을 섞었다. 그리고 곧 방청권 추첨이 시작됐다. 추첨자가 응모함에서 종이를 하나씩 꺼내들었다. 하나 둘 호명되는 번호에 당첨된 사람들은 이따금씩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당첨되지 못한 사람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법정 뒤편에 지인과 나란히 앉은 50대 여성은 옆 사람이 당첨되자 “언니 또 됐어? 밥 사”라고 부러워했고 이내 자신의 번호가 호명되자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11시30분께, 4번의 추첨이 모두 끝났다. 전직 대통령의 재판을 보기 위해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모였던 사람들은 우르르 법정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15살 양군에게 “당첨됐느냐”고 물었다. “하나도 안 됐다”며 아쉬움이 묻은 대답이 돌아왔다.
가짜가 내세우는 ‘가짜’ 프레임814 한겨레21
2600기 무덤, 1만5천여 점 유물 등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물증을
무조건 가짜이고 조작이라 말하는 사이비역사가들의 망상
북한은 평양 ‘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람 뼈에 대해 역사 유물 연대 측정에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전자 상자성 공명법’이라는 방식을 적용해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평양은 갑자기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사이비역사가들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북한의 연구 성과라는 것은 이처럼 보편적 학문의 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사진은 단군릉 전경. 한겨레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이며, 고조선 멸망 뒤 세워진 낙랑군의 위치 역시 평양 일대라는 것은 아직 낙랑군이 존속하던 3세기에 저술된 중국 역사서 <삼국지>와 약간 뒷시기에 저술된 <후한서> 등의 기록(제1174호 진짜고대사 ③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참조)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 여기에 오랜 기간 쌓인 고고학계의 연구 성과까지 더해지면, 낙랑군 위치를 평양 일대로 비정하는 일은 학술적으로 사실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평양 일대에서 무수히 출토되는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은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 즉 ‘스모킹건’이다.
고분이 중국 포로들 거라고?
하지만 사이비역사가들은 물증이랄 수 있는 고고학 유물의 존재를 왜곡 또는 무시하면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정설을 무조건 ‘식민사학’ ‘매국사학’으로 매도한다. ‘진짜고대사 ④’에서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평양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낙랑군의 유적과 유물을 살피고, 더불어 사이비역사가들이 고고학 자료를 대하는 비상식적이고 억지스러운 태도도 짚어보려 한다.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낙랑 유물 중에 문자가 적힌 것이 적지 않다. 예컨대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琅富貴) 같이 ‘대놓고’ 자기 소속을 밝힌 막새기와가 있다. 막새기와는 기와 건물의 지붕 끝에 설치하는 마감용 기와다. 장식적 기능이 있어 다양한 문양이나 글자를 새겨놓곤 했다. 또 낙랑군에 속하는 25개 현 중 23개 현의 이름이 확인되는 봉니((封泥)도 수백 개 발견됐다. 봉니는 문서나 귀중품을 상지에 넣고 끈으로 묶은 다음 매듭에 진흙을 붙인 뒤 도장을 눌러 봉한 것을 말한다. 봉니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위조설 시비가 일었지만 이후 연구를 통하여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의 봉니는 진품으로 볼 수 있음이 확인됐다.
낙랑군의 위치가 평양임을 입증하는 무덤 유적은 더욱 압도적이다. 북한 학계는 1990년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평양시 낙랑구역(구역은 서울의 ‘구’ 개념으로, 평양시 18구역 가운데 한 곳이 ‘낙랑구역’이다) 안에서만 2600여 기에 달하는 무덤을 발굴했고, 유물 1만5천여 점을 수습했다. 무덤 유형은 주로 덧널무덤(목곽묘·북한에서는 이를 형태에 따라 나무곽무덤과 귀틀무덤으로 다시 분류하기도 한다)과 벽돌무덤으로,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같은 양식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이들 무덤 안에서는 ‘중국제’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대표적 유물로 칠기(漆器)가 있다. 칠기는 나무에 옻을 칠한 물건이다. 칠기는 한나라에서 중요한 신분인 이들의 무덤에 묻히던 부장품 중 하나였다. 칠기 1점 가격이 청동 술잔 10개의 값어치에 해당할 정도로 고가품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인 ‘물증’이 있는데도 ‘낙랑군은 평양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역사가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가짜’와 ‘조작’이라는 프레임이다. 사이비역사가들은 이 유적·유물이 낙랑군과 상관없다고 애써 우기거나 조작된 가짜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인다. 예컨대 사이비역사에 경도된 역사저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평양 지역에 존재하는 거대한 낙랑 고분군에 대해 고구려에서 잡아온 중국계 포로들의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에 대해 팩트체크를 해보자. 평양 지역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칠기 중 제작 연대가 적힌 것만 수십 점에 달한다. 이를 통해 무덤이 조성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칠기 중 제작 시기가 이른 것은 낙랑군이 설치된 기원전 108년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기원전 85년의 것이며, 다른 것들도 대개 기원 전후 시기가 적혀 있다. 기원전 85년은 <삼국사기>에 따른 고구려 건국(기원전 37년) 연도보다 50여 년 전이다. 이덕일 소장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자면 아직 건국조차 하지 않은 고구려가 이 시기에 이미 평양 일대까지 영역화했고, 수만 명의 중국인 포로를 잡아다 정착시킨 셈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위조품?
사이비역사가들이 기대는 최후의 보루는 조작설이다. 그들은 평양 지역이 낙랑군이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들을 덮어놓고 ‘가짜’라고 단정한다. 대표적인 것이 1993년 평양의 정백동 364호분에서 출토된 ‘초원 4년 현별 호구부’다. 이 유물은 3개의 넓적한 나무판에 붓글씨를 이용해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초원 4년(기원전 45년) 낙랑군에 속한 모든 현의 인구수를 기록한 행정 문서다. 낙랑군 전체 인구 자료가 평양에서 발굴된 것은 낙랑군의 중심 지역이 평양임을 말해주는 명확한 증거다.
평양에서 출토된 이 자료가 ‘낙랑군은 평양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역사가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껄끄러운 존재였는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초원 4년 현별 호구부는 나무판에 글씨를 써 문서를 작성한 ‘목독’ 자료인데, 이덕일 소장은 목독은 휴대가 가능해 요서 지역에 살던 낙랑군 관리가 이것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와 묻혔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동시에 어떤 강연회에서는 초원 4년 현별 호구부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위조품으로, 나중에 파내려고 몰래 묻어놓은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낙랑군을 평양에 두기 위해 일본이 모든 것을 조작했다’는 사이비역사가들의 프레임은 식민사관의 하나인 ‘만선사관’만 제대로 알아도 허위라는 것이 금세 드러난다. 흔히 일제 식민사관은 ‘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내에 가두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만선사관은 오히려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하나의 역사 단위로 묶어 이해하려는 역사관이다. 물론 그 목적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만선사관은 일제의 만주 침략과 밀접하게 연동됐으며, 당시 중국 대륙을 넘보던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제시됐다. 조선인에게 만주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이 있다면, 이미 현실세계에서 조선인을 지배하는 일본에도 만주 지역에 대한 연고권이 있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식민사관이 작동했던 시대적 맥락을 안다면, 일본인들이 엄청난 인력과 재력을 낭비해가며 평양 지역에 낙랑군 유적을 조작했다는 주장은 차라리 ‘망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제2의 왕검성 ‘창조’한 이유
이덕일 소장을 비롯한 사이비역사가들은 평양 일대에 존재하는 낙랑군 유적의 성격을 부정하기 위해 북한 학계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한다. 수천 기에 이르는 낙랑 유적을 발굴한 주체인 북한 학계에선 정작 이것을 낙랑군 유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남한 학계가 엉뚱하게 거짓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학계가 낙랑 유적을 낙랑군의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학계가 그처럼 무리한 견해를 고수하는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학계에서 평양 지역 유적을 낙랑군의 것으로 인정하는 견해가 존재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주로 고고학 전공자들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1960년대에 이르러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요하 유역에 있었다’는 학설을 국가가 공인한 정설로 채택했다. 이에 따라 고조선 중심지에 설치된 낙랑군 역시 자연스럽게 한반도 밖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됐다. 이는 고조선 영역을 광대하게 이해하고 싶은 욕망과 북한의 수도 평양이 한때나마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작동한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므로, 국가에서 공인된 학설만이 정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낙랑군 평양설’은 북한 학계에서 일체 배제돼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30여 년간 지속되던 북한 학계의 정설에 큰 변화가 발생한 계기는 1993년 단군릉 발굴이었다. 단군릉은 본래 평양시 강동군의 대박산 기슭에 있던 돌방흙무덤이다. 조선시대부터 단군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졌으나, 사실로 믿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북한의 절대 권력자인 김일성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시에 따라 이 무덤의 전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해당 무덤은 5세기대 고구려 무덤임이 확인됐다.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 장식 등은 고구려의 왕족이나 유력 귀족의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 학계에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실제야 어떠하든 이 무덤은 국가 방침에 따라 반드시 단군릉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에서 출토된 인골의 의문스러운(?) 연대 측정을 통해 무려 기원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는 최종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후 단군릉은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로 복원됐고, 단군릉이 발견된 평양 지역은 갑작스레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북한은 평양에서 발원한 문명을 ‘대동강 문화’라 명명했고 이어 ‘세계 5대 문명’이라는 선전이 이어졌다.
유적과 유물을 찾아와 제시하라
단군릉 발굴을 기점으로 북한은 30여 년간 이어오던 정설을 뒤집었다. 이제는 평양 지역이야말로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있던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존재했다는 것만큼은 여전히 용납될 수 없었다. 고대 사료를 볼 때 고조선의 왕검성과 왕검성에 설치된 낙랑군은 다른 지역일 수 없다. 북한 학계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평양에 고조선 수도 ‘왕검성’을 두고 대신 요하 유역에 ‘제2의 왕검성’이 있었다는 논리를 창조했다. 나중에 낙랑군이 설치된 왕검성은 바로 요하 유역 제2의 왕검성이라는 것이다. 북한 학계 외에 어느 나라 학자들도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의 단군릉 발굴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준다. 쇼비니즘적 욕망과 정치적 목적성이 학문에 개입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지 하는 점 말이다. 고고학은 유적과 유물로 말한다.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요서 지역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싶다면, 요서 지역에서 낙랑군 유적과 유물을 찾아와 제시하면 된다. 정작 자신들은 아무런 물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평양 지역에서 확인된 수많은 증거물에 대해 ‘조작’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영원히 ‘사이비’ 딱지를 떼기 어려울 것이다. /기경량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
박 지지자’들 소란·등쌀에 특별조치 나선 법원 818 경향
ㆍ판·검사에 “너희들 총살감” 위협…방청권 배부처에선 노숙
ㆍ채증용 카메라 설치·길목 차단…“TV중계 하면 좀 나아질 것”
박근혜 전 대통령(65) 지지자들이 법정에서 검사와 판사를 잇따라 위협하고 공격하며 소란을 피우자 법원이 ‘특단의 칼’을 빼들었다. 법정엔 채증용 카메라를 설치하고 박 전 대통령 재판이 열리는 417호 대법정으로 가는 일부 계단은 통행을 금지했다. 박 전 대통령 재판에도 큰 영향을 미칠 오는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49)에 대한 1심 선고를 앞두고 법원은 ‘폭풍전야’ 분위기다.
박 전 대통령 사건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는 박 전 대통령 재판이 열리는 417호 대법정의 검사석 옆쪽에 카메라 1대를 설치했다. 방청석을 촬영하는 카메라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객들이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경고하고, 소란 피우는 사람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카메라를 돌리는 것이다.
18일 법원 건물 내부 곳곳엔 대자보 크기의 ‘청사 내 질서유지 협조 안내문’이 부착됐다. “법원 청사 내에서 소란행위를 할 경우 청사 출입을 제한하거나 퇴거시킬 수 있다”며 “제재에 불응할 경우 형사처벌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법원은 아예 오전 8시30분 이전에는 건물 양 옆쪽 출입구를 봉쇄하고, 417호 대법정으로 가는 계단도 일부 폐쇄했다. 폐쇄된 계단에는 “통로 임시폐쇄. 돌아가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청사에서 소란행위 시 퇴거·형사처벌 가능”이라고 쓰인 공지문이 붙었다. 방청객들의 ‘노숙 장소’였던 재판 방청권 배부 책상도 417호 대법정 앞에서 건물 바깥으로 옮겼다. 법원을 찾은 한 변호사는 “계단을 이렇게 막아놓으면 어디로 다니라는 것이냐”며 불편을 호소하기도 했다.
법원의 조치는 박 전 대통령 재판을 방청하러 오는 지지자들의 소란과 등쌀 때문이다. 재판장과 법원 보안관리원들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이 법정에 들어올 때와 나갈 때 벌떡 일어나서 경례하거나 “대통령님, 힘내세요” “대통령님, 건강하세요”라고 소리를 질러 수차례 재판장의 제지를 받았다. 지난달 3일 재판에서는 한 여성이 “재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박근혜 대통령의 딸입니다”라고 했다가 재판장에게 퇴정명령을 받았다.
지난 7일 이재용 부회장 결심공판 때는 험악한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격앙된 박 전 대통령 지지자와 반대자가 고성을 지르며 몸싸움을 벌여 경찰이 이들을 떼어 내기도 했다. 급기야 17일엔 한 방청객이 재판이 끝난 직후 검찰을 향해 “검사가 마음속에 품은 것까지 (피고인들의) 죄로 잡으려고 했다”며 “너희들 총살감”이라고 소리쳐 국정농단 재판에서는 처음으로 재판부로부터 구치소에 갇히는 감치 처분을 받았다.
오는 25일엔 이 부회장에 대한 1심 선고가 예정돼 있다.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 혐의가 유죄를 선고받으면 뇌물수수 혐의를 받는 박 전 대통령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어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법원 관계자는 “선고공판 생중계를 허가하면 TV로 볼 수 있으니 굳이 법원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이 조금은 줄지 않겠느냐”면서도 “이 부회장 1심 선고 당일에 사고라도 일어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김익중 교수 “사흘간 공격한 신문, 어떻게 믿고 인터뷰하나” 819 미디어오늘
조선 김 교수 다시 비판 칼럼, 김 교수 “도덕적 온당치 않은 주장” 조선 기자 “방사능 양 안따지는 게 문제” 공방
김익중 동국대 교수의 탈핵강의를 괴담이라고 집중 비판했던 조선일보가 다시 김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이번엔 김익중 교수가 인터뷰 요구를 거부했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신뢰할 수 없는 신문이라 인터뷰하지 않은 것이라며 칼럼 내용을 반박했다.
박은호 조선일보 사회정책부 차장은 17일자 조선일보 ‘동서남북’ 칼럼 ‘명태야말로 억울하다’에서 김익중 동국대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방사능에 조금이라도 오염되면 위험하다. 일본산은 위험하다’는 내용은 엉터리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박 차장은 그 근거로 “1998년부터 시작된 방사능 오염 실태 정부 조사를 보면 국내 유통되는 농·수·축산물에는 지구가 탄생할 때부터 존재한 칼륨 같은 자연 방사성 물질이 들어 있다”며 “과거 핵무기 실험이나 원전 사고 등으로 대륙과 해양에 퍼진 세슘도 일부 외국산·국내산 식품에 칼륨의 수십분~수천분의 1 수준으로 포함돼 있다”고 썼다. 그는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방사성 물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피폭량에 비례한다”며 “김 교수 논리대로라면 세상엔 먹을 음식이 없게 된다”고 주장했다.
박 차장은 세슘 등의 국내 식품 기준치는 미국(1000㏃), 유럽(1250㏃)보다 훨씬 높은 1㎏당 100㏃이라는 점을 들어 “그러나 이 기준치를 꽉 채운 고등어·명태·대구를 연 13㎏(국민 연간 섭취량) 먹어도 서울~뉴욕 비행기를 한 번 타고 갈 동안 맞는 자연 방사선의 6분의 1, 위장 엑스선 1회 촬영의 35분의 1, CT 촬영의 406분의 1밖에 안 된다”며 “게다가 일부 국내산·외국산 식품에 든 세슘은 이 기준치를 훨씬 밑도는 수준”이라고 썼다.
그는 특히 김 교수에 대해 세차례 비판한 것에 대해 김 교수가 미디어오늘 등 인터뷰를 통해 “조선일보 보도는 황당하고 악의적이다. 반론 기회도 없었다. 억울하다”고 했다는 점을 들어 “김 교수에게 반론 기회를 주기 위해 전화하니 이번엔 ‘인터뷰하지 않겠다’고 전화를 끊었다”며 “문자 메시지에도 응답이 없다”고 전했다.
▲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가 지난 2013년 10월1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를 두고 김익중 동국대 교수는 1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내가 했던 강의를 괴담이라고 보도한 신문이 나를 공격할 의도로 내게 인터뷰를 시도하려는데 내가 어떻게 믿고 인터뷰하느냐”며 “내가 할 얘기를 반영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공격할 빌미만 삼을 것이며, 무슨 얘기를 해도 욕을 할 것이기 때문”이라며 “6년 동안 하던 강의를 어느날 갑자기 괴담이라고 사흘 연속 공격하는 언론을 어떻게 믿느냐. 사과하는 것도 아니었다. 신뢰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사흘동안 비판하는 동안 조선일보가 자신의 반론을 취재하는 과정이 없었던 것에 대해 “반론 취재 이런 과정도 전혀 없었다”며 “학교 선생이 조선일보 기자가 들어도 되겠냐고 물어봐서 그러라고 허락한 것일 뿐, 조선일보 기자와 인사하거나 명함을 주고받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칼럼의 주장에 대해 김 교수는 “원자력계에서 해온 얘기를 반복한 수준”이라며 “조선 칼럼의 요지는 음식속에 있는 칼륨40이라는 자연방사능이 있으니 그에 비하면 북태평양산 고등어 등에서 검출된 세슘양은 세발의 피이며, 이것으로 위험하다는 것은 잘못됐다는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방사능이 갖고 있는 에너지량이 갖지 않고, 베크렐(Bq)이라는 단위로 단순비교가 어렵다. 칼륨40은 모든 음식에 다 들어있다. 자연방사능 물질은 피할 길이 없다. 칼륨40 외에도 라돈 가스, 지구 전체에서 떨어지는 우주선도 있다”며 “이는 똑같이 위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인공방사능이 일부 더해지는 것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식의 주장은 도덕적으로 온당하지 않다”며 “세슘이 적게 들어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핵반응이 일어나면 1000가지 정도의 방사성물질이 나오는데, 반감기가 짧은 것을 제외하고 100가지 이상의 방사성물질이 후쿠시마에서 나왔다”며 “그중 우리는 세슘만 측정한다. 세슘 측정이 쉽기 때문.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다른 방사능 물질은 한 달이 걸리기 때문에 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음식속 세슘이 있다는 것은 다른 방사능 물질 수백가지가 같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슘 검출 여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산 고등어 명태 대구에서 세슘이 검출됐으니 위험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조선일보 2017년 8월17일자 31면
이에 대해 칼럼을 쓴 박은호 조선일보 사회정책부 차장은 17~18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김 교수가) 신뢰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자유”라며 “사실관계는 정확히 밝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부도덕하다고 했는데, 어떻게 판단을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 교수 비판 기사를 사흘 간 쓰기 전에 왜 본인에게 인터뷰나 반론 기회를 주지 않았느냐는 지적에 대해 박 차장은 “미디어오늘도 김 교수 인터뷰를 하면서 조선일보에 반론취재를 안하지 않았느냐”며 “그건 아마도 조선일보라는 텍스트가 있었고, 보도한 내용을 보고 ‘반론없어도 되겠다, 이미 하고싶은 말을 썼으니’라고 판단한 것 아니냐.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김 교수의 반론을 안 들어준 것이) 그렇게 억울한지는 몰랐다. 억울하다고 하니까 전화드리고 문자드린 것”이라고 말했다.
박 차장은 “김 교수가 다중에게 1000회 넘는 강의한 내용과 여러 활동을 보고, 김 교수 주장이 과연 맞느냐에 대해 팩트체크를 먼저 해야 한다”며 “우리가 방사능을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김 교수가 ‘(세슘이 검출된 고등어 등을) 300년 동안 먹지 말라’고 했는데, 방사능에 얼마나 피폭되지 않아야 안전한 것인지가 사회적 물음이다. 일본산 8개현 수산물, 14개현 농산물도 수입이 안되고, 기준치보다 엄격하게 반품조치도 하는데, 일본산 식품은 전체는 먹지 말라고 하느냐. 왜 양을 안따지느냐”고 주장했다.
그는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라면 (김 교수의)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며,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은 피폭량으로 인체에 미치는 것은 정말 별로 안된다는 말도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선일보는 ‘文정부 탈원전 관여한 교수, 고교서 퍼트린 ‘原電 괴담’’ 등 지난달 15일자부터 18일까지 사흘 연속으로 김익중 교수의 강의와 김 교수 비판 기사를 썼다.
1명당 한해 240개 먹는데…농장서 식탁까지 ‘달걀 공포’ 818 한겨레
살충제 파동으로 불안·분노 확산 전수조사 결과 49곳 부적합 판정
경기도 양주시의 한 산란계 농장에서 17일 양주시청 직원들과 농장 관계자들이 살충제 성분이 검출된 달걀을 폐기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달걀은 값도 싸고 단백질이 풍부한데다 맛도 있어 아이부터 노인까지 ‘최고의 반찬’으로 꼽히는 음식이다. 부침·조림·찜·국 등 요리법도 다양해 밥이나 김치만큼 많이 먹는다. 국민 1인당 1년에 240여개의 달걀을 소비한다고 하니, 통계로만 보면 일주일에 4개 이상은 먹는 셈이다. 달걀 시장(생산) 규모는 연 1조8천억원에 달한다. 이번 ‘살충제 달걀’ 파동으로 국민반찬인 달걀의 인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특히 정부가 인증한 친환경 달걀에서 집중적으로 살충제가 나오면서 소비자들의 불안과 분노가 커지고 있다.
18일 농림축산식품부 자료를 보면, 산란계 농가 1239곳(최근 달걀을 출하하지 않은 곳 제외)을 검사한 결과 사용이 금지돼 있거나 기준치를 초과해 살충제 성분이 나온 농가는 모두 49곳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31곳(63.3%)이 친환경 인증을 받은 농가다.
살충제 파동을 계기로 달걀의 유통경로를 살펴보니 “터질 게 터진 것”이라는 얘기가 빈말이 아니다. 이른바 ‘농장에서 식탁까지’ 달걀 안전을 위협하는 지뢰가 곳곳에 있었다.
생산을 맡고 있는 달걀 농가의 문제는 심각하다. 비좁은 공간에 수많은 닭을 몰아넣고 기르는 ‘공장식 밀집사육’은 살충제 달걀의 시작점이다. 대량 생산을 위해 산란계 농가의 99%가 이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가로·세로 50㎝ 크기의 철창인 배터리 케이지 안에 닭 5~6마리가 함께 산다. 조류인플루엔자(AI) 등 전염병에도 취약하고, 진드기가 생길 수밖에 없어 살충제 유혹에 빠질 위험이 높다. 농장주들도 잘 알고 있다. 한 산란계 농장주는 “밀집사육을 없애지 않고는 살충제 사용을 근절할 수 없다”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약 사용을 줄이긴 하겠지만 중단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농장주도 “케이지 사육을 수십년 동안 해왔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없앨 수 있냐”며 “정부가 인체에 무해한 살충제를 개발해 보급하거나, 닭을 방목해서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된 달걀을 사후적으로 관리하는 인증과 등급 시스템도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친환경 달걀’은 농식품부 산하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맡고 있는 무항생제 축산물과 유기 축산물 인증이 있다. 전체 산란계 농가 1456곳 중 780곳(53.6%)이 친환경 인증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 무항생제 축산물이 765곳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도 무항생제 달걀이다. 항생제를 쓰지 않은 사료를 먹고, 일정 기간에 항생제를 맞지 않은 닭이 낳은 달걀이면 인증을 받을 수 있다. 항생제는 물론이고 살충제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친환경 인증을 받을 수 없다. ‘살충제 달걀’이 나왔다는 것은 인증이 잘못됐거나 사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밀집사육·부실 인증·깜깜이 유통…곳곳 안전 구멍
50㎝ 닭장서 사는 산란계 99% 전염병 취약·진드기 등 달고 살아
업무정지 업체가 친환경 인증하고 도매상은 유통기한·산지 조작까지
관리 방치한 정부도 책임 있어
친환경 인증과 사후 관리는 64곳의 민간기관이 맡고 있다. 민간기관의 부실인증 문제는 감사원 감사에서도 해마다 지적될 정도로 심각하다. 이번에 살충제 성분이 나온 농가에 친환경 인증을 준 민간기관 중 일부는 과거 부실 인증으로 적발돼 업무정지 처분을 받은 업체로 밝혀지기도 했다. 달걀의 품질(1+, 1, 2, 3)을 알 수 있는 등급 달걀은 전체의 8% 수준으로 너무 낮다. 등급을 받는 과정에서 달걀을 꼼꼼히 살필 수 있는데, 등급제가 강제가 아니어서 농가들의 참여율이 낮다.
농가와 계약을 하는 중간유통(도매) 과정에서도 달걀 안전은 소홀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달걀 도매는 여러 경로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소 규모의 식용란 수집판매업체와 달걀 집하장(GP센터) 등이 있다. 식용란 수집판매업체는 꽤 난립해 있다. 전체 산란계 농가가 1456곳인데, 식약처에 등록된 식용란 수집판매업체는 1860곳이나 된다. 도매 단계에서 이들 업체는 전체 달걀의 33%를 담당한다. 업체 1곳당 여러 농장 달걀을 취급하고 있고, 이력추적제가 도입되지 않아 유통경로가 전산화돼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살충제 달걀’이 도대체 어디로 팔려갔는지 정부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도매상들은 달걀에 생산지나 유통기한을 조작하기도 한다. 실제 최근 생산지와 유통기한을 조작하거나 아예 표시하지 않은 달걀 44억원어치를 전국에 유통시킨 업자 21명이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반면 농가의 달걀을 모아 세척, 포장하는 달걀 집하장(GP센터)은 50곳에 불과하다. 농협 등이 운영하는 지피센터에서는 살충제나 항생제 검사도 주기적으로 하고 유통경로도 투명하다. 지피센터를 통한 도매 거래는 전체 달걀의 약 30%다. 농가에선 비용 등의 문제로 지피센터보다 중간 유통상과 거래하는 경우가 많다. 독일은 법으로 지피센터에서 처리한 달걀만 유통하도록 하고 있고, 일본은 시중 유통 달걀의 80%가 지피센터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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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충제 달걀’ 이것이 궁금하다…5가지 Q&A
소비자들이 자주 찾는 대형마트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마트·홈플러스·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3사에서도 ‘살충제 달걀’을 판매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형마트는 여러 곳의 농가와 계약을 맺고 있어, 위험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마트의 경우 납품하는 전국 57개 양계농가 중 2곳에서 생산한 달걀에서 살충제 성분이 나왔다. 대형마트 한 관계자는 “소매업체인 만큼, 자체적으로 달걀에 대한 안전성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축산물 위생관리법을 개정해 달걀의 검란·선별·포장 등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식용란 선별 포장업’을 새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사육농가에서 생산한 달걀이 대형마트 등 소매 부문으로 유통되기 전에 잔류물질 등에 대한 검사를 의무화하겠다는 것이다.
AI 살처분의 역설…전북이 ‘살충제 달걀’ 청정지대 된 까닭
전북 산란계 농장 125곳 모두 ‘적합’ 판정
AI로 닭 살처분뒤 빈 양계장 철저 소독
제주지역 30곳도 ‘적합’ 또는 ‘음성’ 판정
입식수 줄이고 약품성분 꼼꼼이 살펴 사용
전국 곳곳에서 ‘살충제 달걀’이 검출돼 파문이 커지는 가운데 전북과 제주지역에서는 18일 현재 달걀의 안전성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는 전국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유일하게 학교 급식에서 달걀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전북과 제주가 ‘살충제 달걀 파동’ 을 비켜 간 요인은 무엇일까. 농가와 방역당국의 설명을 종합하면, 계사 환경의 청정, 건강한 산란닭 유지를 위한 농가의 노력이 큰 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전북지역은 앞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생해 소독이 철저하게 이뤄졌던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꼽힌다.
집 살 돈도 없는데 '실수요자'라니? '세입자'입니다! 818 프레시안
[시민정치시평] 진정한 주거복지는 세입자 대책부터
'내 집 마련'이 양산하는 미래의 불평등
서울의 중간 수준의 주택 가격이 6억 원을 넘어섰다. 한 청년은 요즘 로또 1등 당첨금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연간 흑자액 대비 주택 구매력 지수는 2012년 기준 소득 10분위 중 5분위가 중간 수준의 주택을 서울에 구입하기 위해서는 75.9년이 걸린다. 25세에 취직한다고 하면 100세에 집을 살 수 있다. 이처럼 주택을 소유한다는 것, 더 정확히는 빚을 내지 않고 집을 산다는 것은 사실상 복권 당첨에 견줄만한 일이다.
대규모 택지 개발 등과 같은 건설 경기 부양으로 주택 가격 상승, 금융 지원으로 주택 가격 상승률 유지로 이어져왔던 이 삼각편대는 한국의 부채 주도 성장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구조가 지속되면, 빨리 태어나서 빨리 집을 사는 것이 그나마 유리한 구조이며, 다음 세대에게는 더 높은 주택 가격과 더 높은 부채를 수반해야 하는 세대 간, 세대 내 불평등한 구조를 물려줄 수밖에 없다.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출발선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다.
그동안 이전 세대가 만든 주택 가격 상승으로 인해 발생한 세대 내 불평등은 물론 세대 간 불평등을, 다음 세대인 청년들이 감당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더 높은 주택 가격을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다음 세대에 대해서 지금의 세대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브루스 애커먼과 앤 슬롯은 부동산 가격 상승은 필연적으로 다음 세대의 사회 진입을 지연시킨다고 주장하며 세대 간 불평등 완화를 위해 보유세를 걷어 청년들에게 기본 자산(basic asset)을 지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견지에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대선 후보 시절 '사회상속제'를 제안한 바가 있다. 정책으로 구체화하기에는 여러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우리 사회의 불평등의 핵심과 해결 주체를 핵심적으로 간파했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실수요자'가 아닌 '세입자'다
'실수요 보호와 단기 투기 수요 억제를 통한 주택 시장 안정화 방안'이라는 이름의 8.2 부동산 대책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직접 발표했다. 그는 정책을 설명하는 동안 '실수요자'를 총 12번 언급했다. 그가 말하는 실수요자는 주택을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인데, 이들을 위한 정책 목표로 세입자로서 기간과 가격의 걱정없는 주거 안정이 아닌, 자가 소유 촉진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임차 형태는 일시적인 문제적 상태이기에 하루빨리 탈출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감스럽게도, 새 정부는 주거정책은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고 스스로 천명하지만 지난 40년 동안 정책 기조와 전혀 다르지 않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나라 주거정책의 목표는 '내 집 마련'으로 대표되는 자가소유를 통한 주거안정 실현이었다. 소득을 훨씬 웃도는 주택 가격은 필연적으로 금융을 수반했고, 부채 없이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투자 혹은 투기의 목적이든, 실제 거주의 목적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금융 기관의 전향적인 대출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부채를 기반으로 하는 주택 가격은 꾸준히 상승했고, 다시 이 높은 주택 가격을 바탕으로 중산층으로 진입한 부모세대는 자녀세대의 생애 과업인 교육, 취직, 결혼, 출산 등을 수월하게 이룰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했다. 공적부조와 사회보험을 토대로 하는 사회안전망 확충과 대비되는 자산 기반 복지 체계가 자리잡았다.
박근혜 정부는 더 굳건히 이 구조를 구축했고 여기에 동원된 주된 대상은 바로 '청년'이었다. 2015년 7월,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는 '초이노믹스'라는 이름 아래, 취임하자마자 대대적인 LTV, DTI 완화 조치를 단행했다. 2년 뒤, 우리 사회가 마주한 결과는 빚더미에 오른 청년들이다. 주택 자금 대출 정책 중 청년층(35세 이하)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2015년 평균 30.3%였던 주택 구입 자금 비율은 17년 4월, 42.9%까지 증가했고, 전세 대출의 경우, 15년 41.8%에서 17년 4월, 60.4%를 기록했다. '빚 내서 집 사라'는 정부의 시그널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세대다.
큰 빚을 지고서야 획득할 수 있는 자가 소유는 결국 하우스푸어로 전락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자산 기반이 취약하고, 소득 수준이 높지 않는 청년들은 이 위험도가 훨씬 높다. 고용불안은 날로 심해지고 있어 청년들의 기대 소득 또한 마냥 청신호라 할 수 없다. 최근 금리 인상이 시작되고 있어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부의 대출 규제 강화는 분명 옳은 방향이지만, 실제로 현재 세입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당장 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세입자를 위해 계약갱신청구권과 한시적으로라도 전월세 상한제가 속히 도입되어야 한다. 아직 우리 사회는 임대료의 적정 수준과 이를 추동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오르는 주택 가격으로 더 빈곤해지거나, 더 위험한 상태에 놓이는 청년들이 생기지 않도록 가격 인상을 유예시키는 단기적인 처방이 급선무다. 일각에서는 계약갱신청구권으로 인해 오히려 세입자의 자기 부담이 오를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월세상한제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독일 등과 같이 대다수 나라가 선택한 기한 없는 갱신 제도를 합의하고 채택한다면 장기적으로 가격 인하 효과가 날 수 있다.
정부는 오는 9월 주거복지 로드맵을 발표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발표한 주거복지 정책의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담길 것으로 예견된다. 계약갱신청구권의 '단계적' 도입, 전월세 상한제, 공정 임대료의 '점진적' 도입 등의 완곡한 표현을 통해 유예시켜온 세입자 주거안정 공약들이 구체화되기를 바란다. 부동산 시장은 천천히 안정시키며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좋지만, 세입자의 불안은 명확한 방향 설정과 함께 속도감 있게 해소되어야 한다. 시계의 속도가 다른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 임경지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
수백조 규모 원전 사고 나도 한수원은 사실상 책임 면제
[초록發光] 한수원만 보호하는 원자력손해배상법
우리나라에서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같은 원전 사고는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찬핵이든 탈핵이든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라도, 원전에서 사고가 날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 우선, 원전을 운영하고 있는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책임져야 하고, 원전 건설을 승인하고, 원전 안전을 감시하는 정부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한수원도 원전의 사고에 따른 손해에 대비하기 위해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원자력손해배상책임보험과 원자력손해배상보상계약이 그것인데, 2016년 기준 보험료를 각각 약 141억 원, 48억 원 납부했다. 5개 부지 25기가 가입대상이므로, 1기당 5.6억 원, 1.9억 원 수준이다. 이렇게 보험료를 납부하면, 원전 사고 시 원전 1기당 500억 원이 배상 조치된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폐로·배상 등의 비용이 21조5000억 엔, 우리 돈으로 약 221조 원(103원/엔으로 계산)에 이를 것으로 집계했다. 일본 정부가 2013년에 집계한 11조 엔의 2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앞으로 더욱 늘어날 수도 있다. 221조 원 중 원전 사업자인 도쿄전력이 부담하게 될 비용은 8조 엔(약 82조 원)으로 추산됐다. 일본 국민들이 세금이나 전기요금으로 원전 사고로 인한 비용 139조 원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일본 원전사업자의 원자력손해배상 배상조치액은 약 1조6360억 원이다. 221조 원에 달하는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낮은 금액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원전 사업자의 손해배상에 책임한도가 없다. 원전 운영자에게 사고 위험에 대한 책임을 무제한으로 명확하게 부여한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원전 사업자가 천문학적인 규모의 사고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정부, 즉 국민이 그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반면에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의 원전 운영 사업자인 한수원은 원전 사고 발생시 약 5200억 원으로 책임한도가 제한돼 있다. 500억 원이 배상 조치되는 보험에 가입돼 있으면서 책임한도는 5200억 원이다. 이마저도 필요한 경우 국회의 의결을 통해 정부가 원조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원전 사고 피해액이 5000억 원을 넘어설 경우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500억 원이 넘어서는 손해에 대해 국가가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국민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하게 될 것이다.
<표 1> 우리나라의 현행 원자력손해배상제도 개관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무한책임제도였다. 하지만 원자력사업자의 책임을 제한함으로써 원자력사업자를 보호·육성하자는 취지로 2001년 이후 유한책임제도로 전환됐다. 그러나 현행 배상조치인 원자력손해배상책임보험과 원자력손해배상보상계약은 무한책임을 전제로 하는 일본 원자력손해배상제도의 기본 구조를 답습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도하게 낮은 배상조치액과 사업자의 배상책임을 제한하는 규정으로 인해 정부가 한수원을 2중 보호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과 스위스의 경우도 사업자 책임한도를 무한대로 설정해 원자력사업자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배상조치액은 각각 약 3조9175억 원과 1조3332억 원에 이른다.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등 EU국가들은 사업자의 책임한도를 제한하고 있지만, 사업자 책임한도와 배상조치액을 일치시키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사업자 책임한도와 배상조치액이 일치하진 않지만, 배상조치액은 약 4230억 원, 사업자 책임한도는 약 11조5860억 원에 이른다.
<표 > 주요국의 원자력손해배상 책임한도 및 배상조치액
원자력사업자의 책임한도를 대폭 높이거나 무한책임으로 전환하기 위한 원자력손해배상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해 한수원은 "원자력 사고의 경우 사업자의 책임은 결국 유한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책임한도를 증액할 실익은 크지 않고, 국제보험시장의 인수조건을 악화시킬 수 있는데, 해외 원전 수출시 수입국의 법령모델로서 우리나라 원자력손해배상법이 인용될 가능성이 높아, 원자력사업자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어이 상실이다. 원자력손해배상 배상조치액을 국제적인 수준에 맞게 대폭 상향하고, 한수원의 책임을 명확히 묻는 무한책임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내년 정부 예산 27조원 정도 늘린다 818내일
증가율 7%로 예년 2배, 국가채무 700조원 돌파 예상 … 재정역할 강조
내년 우리나라 재정지출 규모가 올해(본예산)보다 27조원 정도 늘어난 427조원 안팎이 될 전망이다. 증가율로 따지면 예년(3.5%)보다 2배 정도 높고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기간 중 제시한 7%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국가채무규모는 700조원을 넘겠지만 GDP(국내총생산)대비 비율은 올해와 비슷한 40%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18일 정부는 국회에서 가진 당정회의에서 이같은 내용을 보고하고 당의 의견을 청취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의장은 "소득증대를 통해 내수를 증진하고 분배를 개선해 성장을 견인하는 소득주도 성장을 위해 재정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국정과제의 차질없는 이행을 위해 (재정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작업했다"고 답했다.
분야별로 보면 보건복지 고용 교육 국방분야 예산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누리과정 전액 국고 지원(2.1조원), 기초연금 인상(9.8조원), 아동수당 도입(1.1조원), 치매국가책임제(0.3조원) 최저임금인상에 따른 추가지출 소요 등 핵심국정과제 예산이 포함됐다.
올 추경예산에 반영됐던 중소기업 청년구직촉진수당(3개월 30만원), 중소기업 추가고용지원, 노인일자리 단가 확대, 도시재생뉴딜사업 예산도 지속적으로 반영키로 했다. 2022년까지 최저임금의 50%까지 올리기 위해 병 급여가 대폭 인상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1만원인 예비군훈련보상비는 1만5000원으로 50% 뛴다.
아이돌봄지원 서비스 단가를 올리고 정부지원시간을 확대하는 데 드는 예산도 포함됐다.
중증남성장애인 고용장려금 단가가 월 40만원에서 인상되고 중소기업 근로자들에게 휴가비를 지원하는 '한국형 체킹바캉스', 소방공무원의 심리치료를 위한 심리상담실과 지원대상자 확대에도 예산이 투입된다.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방안도 같이 내놓았다. GDP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올해 예산편성 때 제시했던 40.4%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국가채무 총량은 올해 682조4000억원보다 30조원 정도 늘어남에 따라 7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강력한 구조조정 계획도 제시됐다. 김동연 부총리는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 부처 구조조정 예산만 11조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내년 예산안은 22일 국무회의를 통해 최종 확정되며 9월 1일까지 국회로 제출된다
짐승으로 변해 가는 두 얼굴의 교사들 818 시사저널
학교 내 만연해진 성범죄…교육 당국 솜방망이 처벌 문제
지금까지 학교 안에서의 성범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오래전부터 교사들의 성범죄는 일상적이고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전북 지역의 W중학교를 졸업한 40대 후반의 J씨(여)는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교사들이 뒤에서 여학생의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거나 30cm 자로 교복 치마를 들추는 것은 매일 겪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J씨는 또 “당시는 그게 성추행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싫어요’ ‘안 돼요’라는 말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지금도 비슷한 성범죄는 학교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피해 학생들이 학교 측에 피해를 호소해도 적극적인 대처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무마하기 바쁘다. 때문에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교사들의 성범죄 실상이 학교 담장 밖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다. 설사 학교 담장을 넘어 사회적 이슈가 돼도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거나 교원 소청 등을 통해 다시 교단에 서고 있다. 학교 안 성범죄, 정말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 일러스트 오상민
성추행·성희롱 등 수법도 다양
학교 안에서의 성범죄가 어느 정도인지는 한 고등학교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경기 여주경찰서는 여학생 72명을 성추행한 혐의로 A고교 김아무개(52)·한아무개(42) 교사를 구속했다. 피해자는 전교 여학생 210명 중 3분의 1에 달한다,
김 교사는 지난해 4월부터 최근까지 여학생 31명을 성추행하고, 남학생 3명을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 교사는 2015년 3월부터 최근까지 3학년 담임교사로 재직하면서 학교 복도 등을 지나가다가 마주치는 여학생 55명의 엉덩이 등을 만진 혐의다. 이들은 또 여학생들의 신체 일부를 쓰다듬거나 브래지어 끈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피해 여학생 중 14명은 김 교사와 한 교사 모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김 교사의 경우 올해 3월 이 학교의 성폭력 예방·상담을 총괄하는 안전생활부장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다.
두 교사는 끝까지 자신들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진심 어린 사과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 교사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김 교사의 경우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학생들이 그랬다고 하니 잘못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A고교의 성범죄 교사는 두 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찰이 전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한 결과, 이 학교 교사 5명이 여학생들에게 “말 안 들으면 뽀뽀해 버린다” 등 성희롱성 발언과 욕설을 했다는 추가 피해 진술이 나왔다.
성추행 피해 사실 알고도 쉬쉬
학교 측의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A고교는 학생들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알고도 쉬쉬하면서 오히려 피해를 더 키웠다는 비난을 받았다. A고교에서 여학생을 대상으로 성추행이 시작된 것은 2015년 3월부터다. 2년 넘게 성추행이 이어져왔지만 학교 측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특히 피해 여고생 중 2학년에 다니던 1명이 지난해 담임교사에게 성추행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무마됐다. 현행법상 교사는 학생의 성범죄 피해 사실을 인지할 경우 학교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또 학교장은 즉시 경찰에 고발 조치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A고교는 적극적인 대응보다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학교가 피해 학생들을 보호하거나 구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찰은 해당 교사가 사전에 동료 교사들의 성추행 사실을 알고도 학교에 보고하지 않았거나 학교가 보고를 받고도 조직적인 은폐를 시도했는지 여부도 수사하고 있다.
부산의 한 사립고교에서도 여학생들이 교사들로부터 집단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B고교에서 교사들의 성추행이 시작된 것은 올해 4월부터다. 50대 남자 교사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불필요한 신체접촉과 성희롱적 발언을 일삼았다. 두 달 뒤인 6월부터는 다른 남자 교사 3명도 비슷한 행동을 했다. 전체 피해 학생은 확인된 숫자만 2·3학년 21명이다.
이들 교사의 수법도 신체접촉 등 강제추행이나 성희롱 발언이 주를 이뤘다. 피해 학생들은 “엉덩이나 발바닥 등 신체를 만지고, ‘너는 비키니가 잘 어울리겠다’ 등 성희롱 발언이 이어졌다”고 밝혔다.
B고교도 여주의 A고교처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B고교 측은 7월7일 피해 사실을 인지해서 바로 신고했고, 그 뒤에 전수조사를 통해 알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학교 측에서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늑장 대처했다고 보고 있다.
경찰은 해당 가해 교사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그러자 부산교육청이 진상조사에 나섰고, B고교는 뒤늦게 해당 교사들을 직위해제했다. 가해 교사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범죄 의식’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신체접촉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친밀감의 표시”라고 주장했다. 즉 학생들의 신체를 만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전북 부안의 C여고에서는 수년 동안 여학생 40여 명을 성추행한 혐의로 50대 체육교사가 구속됐다. 이 교사는 수업 중에 여학생들의 신체를 접촉하거나 교무실로 따로 불러내는 수법으로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학교 담장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전국 곳곳의 학교에서는 ‘장난’ ‘훈육’ ‘교육’ ‘친밀감 표시’ 등을 이유로 성범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교사가 여학생을 사적인 공간으로 불러내 “좋아한다”면서 성폭행한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해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는 “학생들이 피해 사실을 조기에 털어놓고 공론화시킬 수 없었던 배경에는 학교와 교사 집단의 폐쇄성이 있다. 같은 교사들끼리의 잘못은 ‘교육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축소시키고 은폐해 온 역사가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말해 봤자 나만 피해를 더 보게 될 텐데 졸업할 때만 기다리자’는 심정으로 참아왔다”며 “연이은 학교 내 교사에 의한 성범죄는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학교 문화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학교 안에서의 성범죄는 그 대상이 ‘학생’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회식 자리 등을 이용해 남자 교사가 여교사를 성추행하기도 하고, 또 학부모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일도 있었다. 교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제주도의 한 고교 J교사(43)는 회식 자리에서 동료 여교사를 성추행하고 학교에서 여학생에게 성희롱 발언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J교사는 2015년 3월부터 2016년 6월까지 1년3개월 동안 같은 학교 여교사 4명을 회식 장소 등에서 만나 허벅지를 쓰다듬는 등 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또 학교 체육관 사무실에서 여학생(17)에게 성관계 이야기 등 성희롱적 발언 등 성적 학대행위를 한 혐의도 받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C교장(58)이 회식 자리에서 학부모를 성추행했다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C교장은 교사와 학부모 10여 명이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학부모 D씨(33·여)의 허벅지를 만지고 어깨를 주무르는 등 수차례 추행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또 2차로 간 노래방과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D씨를 끌어안는 등 추행을 계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충남의 한 초등학교 교장에 대해 여교사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장이 접수되기도 했다.
“성범죄 교사 교단에서 영구 퇴출해야”
이처럼 학교에서 성범죄가 만연하는 원인 중 하나로 솜방망이 처벌이 꼽힌다. 지난해 4월 서울 은평구의 한 고등학교 법인은 체육교사 조아무개씨(35)를 성희롱과 욕설 등을 이유로 직위해제하고 해임 처분했다.
하지만 지난 5월 열린 교원소청심사위는 조씨에 대해 “징계 필요성은 인정되나, 신체접촉 없이 학생들과 장난치는 과정이었다”며 “직위해제는 적법하나 해임은 과하다”고 학교에 해임 처분을 취소하라고 통보했다. 이에 따라 조씨는 1년 만인 지난 5월 복직했다. 대구시교육청은 최근 여교사를 성추행한 전력이 있는 사람을 다시 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 냈다가 여론의 질타가 있자 발령을 취소하는 촌극을 벌였다.
충청남도의 경우 2013년부터 2016년까지 15명의 교직원이 성범죄로 인해 파면·해임 등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지금도 성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배경에는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는 교육 당국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지난해 발생한 5건의 교직원 성범죄에 대한 징계를 보면 초등학생을 강제 추행한 초등학교 교감만 파면됐다.
나머지는 성희롱 초교 교사 감봉 3개월, 강제추행 고교 교사 정직 1개월, 강간미수 초교 교사 정직 3개월 등에 그쳤다. 성범죄 전력이 있는 교사들이 계속해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사회적 흐름과 교육 당국의 처벌 수위는 거꾸로 가고 있다.
최근 교육부에 따르면 성범죄로 징계를 받은 교원은 해마다 급증하는 추세다. 2012년 61건에서 2013년 53건, 2014년 44건, 2015년 97건이다. 지난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에서 성범죄로 징계처분을 받은 것은 135건이다.
물론 교육 당국도 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러 가지 대책을 쏟아냈다. 2015년 4월에는 ‘학교 내 교원 성범죄 근절을 위한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교원 성범죄를 줄이는 데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성범죄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적용한다고 했으나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제 식구 감싸기’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는 “(교육 당국은) 학교 안에서 교사 성범죄를 뿌리 뽑겠다는 각오로 ‘일벌백계’ 차원의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런 일이 드러날 때마다 학생들만을 상대로 인권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 등을 대상으로 성 평등 교육과 인권교육이 의무화되어야 한다”며 “학생 상대 성범죄 교사는 교단에서 영구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Little Wing - Snowy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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