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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시사만평-주간 쟁점

4.29~5.4

by 이성근 2019. 4. 28.


                    4.29 경향-중앙


문재인 대통령 부정 평가 59%, 여야 지지율 역전요동치는 PK 민심

지구촌 정상들 중 연봉킹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NYT에 등장한 '춤추는 한국 할머니들'

국민청원 조작 의혹에 , "97%가 국내문제 없다"

 

"루스벨트는 진주만 기습을 미리 알았다"

팍스아메리카나 vs. 대동아공영권, 충돌은 불가피했다

진주만, 통킹만, 그리고 9.11

 

극우에 반대해 거리로 나선 오스트리아 할머니들

20대 남자 현상은 왜 생겼나

공공기관 연봉킹예탁결제원 작년 직원 평균 11160만 원

1인 시위마저 돈으로 사는 사회

심한 우울감에 빠진 중고생사이버 세상에 매몰된 20

129주년 노동절 재벌·한국당·수구언론 동맹 끊겠다

도시재생 전문가들의 8가지 '헛소리'

작년 산재사망자 971명으로 되레 늘어...정책 효과 무색


                  기호-한겨레

                    국민-한국

                    430 중앙 -인천

                    한겨레-경향

                  한국-대구

                   내일-국제

                    430 국민 5.1 중앙

                   한겨레-한국

                 국제-주간경향

                  인천-경인

                 5.1 대구-5.2 중앙

                   한겨레-국민

                  한국-대구

                    경인-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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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9~5.3 경향 장도리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분석] 문재인 대통령 부정 평가 59%, 여야 지지율 역전요동치는 PK 민심

부산·울산·경남(PK) 민심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로 바닥을 찍으면서 회복 불능으로 보였던 자유한국당은 4·3 경남 국회의원 보궐선거와 선거제·사법제도 개혁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정국을 거치면서 서서히 PK 지역에서 활력을 되찾고 있다.

 

한국당이 과거의 텃밭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더불어민주당에 뒤지고 있던 정당지지율은 어느새 30%를 넘어서면서 역전에도 성공했다.

 

대통령 직무수행 평가

전국, 긍정 44%-부정 47%

PK, 긍정 32%-부정 59%

 

정당 지지도

전국, 민주 35%-한국 24%

PK, 민주 28%-한국 35%

지역경제 침체로 여당 민심 이반

패스트트랙 이후 여론 향배 관건

 

여야 정당지지율 역전

한국갤럽이 지난 23~25일 전국 성인남녀 1003명을 대상으로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를 실시한 결과, 한국당 지지율은 전주보다 4%포인트(P) 오른 24%로 집계됐다(자세한 조사 개요와 결과는 한국갤럽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한국갤럽은 한국당 지지도 변화는 40~50대에서 두드러졌다한국당 지지율은 새누리당 시절이던 2016년 국정농단 사태가 본격화한 이후 최고치라고 설명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은 전주보다 4%P 하락한 35%로 나타났다. 정의당은 1%P 하락한 9%, 바른미래당은 2%P 상승한 7%, 민주평화당은 1% 등으로 집계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부정평가는 긍정평가를 역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문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평가는 전주보다 4%P 내린 44%, 부정평가는 5%P 오른 47%였다.

 

이번 조사를 PK지역만 따로 떼놓고 분석하면 한국당은 35%의 정당지지율을 얻어 28%에 그친 민주당을 크게 앞섰다. 41~3주째까지 20%대를 넘지 못하던 한국당이 30%대로 올라선 것이다. 반면 민주당 지지율은 28~43% 사이에서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모양새다.

 

문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PK지역의 부정평가도 최고치인 59%를 기록했다. 긍정평가는 32%4월 조사 가운데 가장 낮았다.

 

PK 지역민심 임계점?

PK정치권은 4월 들어 지역민심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데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4월 초 치러진 경남 창원성산, 통영·고성 보궐선거에서 드러났듯이 현 정부에 대한 PK지역의 불만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 PK지역은 조선·기계·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 위주의 산업구조가 지역경제를 이끌어왔는데 이들 업종의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고용위기와 자영업 부진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자 민심도 돌아서고 있다는 것이다.

 

2~3년 전부터 본격화한 지역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PK는 대구·경북(TK)과 달리 지난해 6·3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민생회복 조짐이 보이지 않자 임계점에 도달한 서민·중산층이 서서히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새 지도체제를 출범시킨 한국당이 PK에서의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지역 민심을 파고 들면서 예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신뢰를 조금씩 회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PK 민주당은 지방선거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3개 시·도를 장악했지만 지역경제 악화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후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법정구속과 PK 3개 시·도지사의 최하위권 직무수행 평가(리얼미터, 20193월 월간 광역자치단체 평가) 등이 겹치면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패스트트랙이후가 분수령

관건은 이제부터다. 현 정국 최대이슈인 패스트트랙 추진에 대해 PK 지역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따라 향후 여론의 향배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여당의 주장대로 한국당의 무리한 발목잡기에 대해 PK지역의 민심이 싸늘하게 반응할 경우 여야의 지지율은 다시 역전될 수도 있다. 국회가 제대로 돌아가면서 민생법안이 제대로 처리돼야 침체된 PK지역에 온기가 돌 수 있는데 한국당의 방해로 법안 처리가 되지 않는다고 인식되면 한국당 지지율이 떨어질 것이란 얘기다.

 

반면 여당이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법과 공수처법 등의 개정을 강행하고 있다는 한국당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 PK에서의 지지율 역전은 골든 크로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정부여당이 민생은 외면한 채 정치적 이슈에만 집착한다는 비판이 커지면서 뒤바뀐 지지율이 고착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지난주 이뤄진 김해신공항 검증단의 최종보고 결과와 여당 소속 시·도지사들이 제시할 해법에 대해서도 지역 여론이 민감하게 반응할 것으로 보여 이번 주가 총선을 앞둔 PK 민심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지구촌 정상들 중 연봉킹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의 연봉이 전 세계 국가수반 중 가장 많았다. 싱가포르와 함께 홍콩과 스위스 등 중소 강국들이 국가수반에게 연봉을 많이 주는 나라 최상위권에 포진했다.

 

28(현지시간) 미국 일간 USA투데이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수반이 받는 연봉을 달러(지난해 4월 기준)로 환산한 결과 상위 20인의 연봉은 22만달러(26,000만원)에서 161만달러(187,000만원)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였다. 포천 500대 기업 가운데 13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자사 직원의 1,000배를 넘는 연봉을 받는 것처럼 상위 20개 국가의 정상들도 자국민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라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1위를 차지한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1인당 GDP18배가 넘는 161만달러를 연봉으로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싱가포르 국민들은 지도력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USA투데이는 전했다. 홍콩의 행정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의 연봉이 1인당 GDP10배인 568,400달러(66,000만원)2위에 올랐고, 윌리 마우러 스위스 대통령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정상 중 가장 높은 483,000달러(56,000만원)3위를 차지했다.

 

개인적으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인당 GDP7배인 40만달러(46,000만원)4위에 올랐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연봉 전액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공약을 지켜오고 있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378,000달러, 44,000만원)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37만달러, 43,000만원),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34만달러, 39,500만원)5,6,7위에 올랐다. 이들 수반의 연봉은 자국 1인당 GDP7~9배 수준이다.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인 모리타니의 무함마드 압델 아지즈 대통령(33만달러, 38,300만원)8위로 아프리카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10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제바스티안 코르츠 오스트리아 총리(329,000달러, 38,200만원)와 그자비에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278,000달러, 32,300만원)가 각각 9,10위를 차지했다. 22,600만원의 연봉을 받는 문재인 대통령의 순위는 20위권 밖이었다.

 

이번 조사는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월드팩트북 정보를 참고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등 군주제 국가와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나라는 제외됐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NYT에 등장한 '춤추는 한국 할머니들'

 

미국 뉴욕타임스(NYT)27(현지시간) 초등학교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할머니들의 동영상을 게시했다. 이들은 바로 전라남도 강진 대구초등학교에 입학한 늦깎이 학생들. (사진=NYT 캡처) 뉴시스

 

미국 뉴욕타임스(NYT)27(현지시간) 초등학교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할머니들의 동영상을 게시했다. 이들은 바로 전라남도 강진 대구초등학교에 입학한 늦깎이 학생들.

 

NYT는 한국의 출산율 저하로 폐교의 위기에 처한 시골의 초등학교들이 시골 여성들에게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며 이같은 소식을 전했다. 2019년 초등학교에 입학한 70살 황월금 할머니, 75살 박종심 할머니 등의 이야기도 자세히 다뤘다.

 

황 할머니는 60년 전 친구들이 학교로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무 뒤에 숨어 눈물을 흘렸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마을 아이들이 읽고 쓰기를 배우는 동안 집에서 돼지를 키우고, 땔감을 모았다. 어린 형제들을 돌보는 것도 내 몫이었다"고 말했다. 여섯 명의 자녀 모두를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시킨 그는 "다른 엄마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없어서 늘 괴로웠다"고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황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그게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대구초교가 폐교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학생 유치에 나서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주영 교장은 "1학년으로 입학할 소중한 학생을 찾아 온 마을을 뒤졌지만 한 명도 없었다"면서 "9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학교를 위해 묘책을 세웠다. 읽고 쓰기를 배우고 싶어하는 나이든 마을 사람들을 입학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황 할머니는 "입학식 날 울었다. 이게 실제로 내게 일어난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박 할머니는 마을의 문어잡이 선수다. 하지만 최근엔 수업에 뒤처질까 노심초사하는 학생이 됐다. 그는 "기억력도 떨어지고 손이랑 혀도 내 맘 같지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죽기 전에 글을 다 배울 거다. 주민센터에 가면 내가 어떤 심정인지 아무도 모른다. 공무원들은 나한테 서류를 주면서 작성하라고 하는데 나는 이름 밖에 못썼다"고 그간의 서러움을 털어놨다.

 

NYT는 수십년 전 한국의 가정들은 아들 교육에 몇 안되는 자원을 쏟았다고 설명했다. 많은 소녀들은 부모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집에 머물며 동생들을 돌봤다고 덧붙였다. 8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진 박 할머니에게 학교 진학은 먼 꿈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미역을 따고, 누에를 기르고, 모시풀을 꺾으며 자랐다.

 

황 할머니는 벌써 야심한 향후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늘 사람들이 추천했는데 마을 여성회장직을 고사했다. 그건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이번에는 회장 후보로 나서려고 한다"고 말했다./ 뉴시스



국민청원 조작 의혹에 , "97%가 국내문제 없다"

"3월 베트남 트래픽의 90%는 장자연 관련"

자유한국당이 '국민청원 조작'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 청와대가 "부정확한 정보"라며 조작 가능성을 일축했다.

 

30일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언론들이 한국당 해산 청원에 100만 명이 동참했다고 보도하지만, 그 중 14만명 이상이 베트남에서 접속했다"며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이날 오후 청와대는 공식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등에 긴급 공지를 띄웠다.

 

청와대

 

청와대는 "429일 기준 청와대 홈페이지 방문을 지역별로 분류한 결과, 97% 국내에서 이뤄졌다. 미국이 0.82%, 일본 0.53%, 베트남 0.17% 순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3월에 베트남 접속률이 2159% 증가한 데 대해 "확인 결과, 베트남 언론 최소 3개 매체에서 314일 가수 승리의 스캔들, 장자연 씨 사건 등을 보도했고, 청와대 청원 링크를 연결해 소개했다. 3월에 베트남에서 청와대 홈페이지로 유입된 전체 트래픽의 89.83%는 장자연 씨 관련 청원으로 유입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와대는 국민과 함께 만들어온 국민청원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정확한 사실 관계 확인 없이 부정확한 정보를 인용한 일부 보도에 대해선 유감"이라고 밝혔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도 이날 오후 브리핑을 통해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거듭 의혹 해소에 나섰다. 고 대변인은 아울러 국회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법안 두 건, 검경수사권 조정을 위한 형사소송법 개정안과 검찰청법 개정안 등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한 데 대해 "국회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다만 패스트트랙 지정 이후 국회가 사실상 경색 국면에 들어선 데 대해 "어제 대통령이 말씀했지만 지금 현재 엄중한 경제 상황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힘을 모아야 할 때"라며 "특히 탄력근로제, 최저임금 문제 등이 국회 안에서 활발한 논의 통해 신속히 처리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고 대변인은 이어 문 대통령이 이날 횡령·뇌물공여 재판의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난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문제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해당 질문을 던진 기자가 "문 대통령이 임기 중에 이 부회장을 만난 게 오늘까지 총 7차례 정도 된다"고 한 데 대해 "과도한 수치 집계"라며 "단독으로만 만난 게 아니라 기업인과의 대화 등을 다 포함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오늘 행사(시스템반도체 비전과 전략 보고회)는 물론 삼성에서 일정을 진행한 것이지만, 삼성이 무엇을 했다기보다 시스템 반도체 관련해서 앞으로 우리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을 발표하는 비전 선포식이었기 때문에 삼성 뿐 아니라 SK, 현대 등 다른 기업 임원들도 참여한 자리였다"고 강조했다./ 프레시안 4.30

 

 

"루스벨트는 진주만 기습을 미리 알았다"

[전쟁국가 미국·2-]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2차 대전이 세계인의 생각에 미친 치명적이고 심대한 장기적 효과"에 대해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킨 것"이라면서 이로 인해 "1차 대전의 무의미한 살육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것이 됐다"고 지적한다.

 

'전쟁의 정당화'야말로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미국인은 2차 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으로 생각한다. 미국은 군국주의 일본의 비열한 기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회복했으며 세계의 지도국가로 등극했다는 것이 2차 대전에 대한 미국의 공식 서사다. 군사력에 의한 세계 질서의 유지, 이것이 '좋은 전쟁'의 핵심 요지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되살아난 미국의 군사주의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참전 직전까지 대다수 미국인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불신했었다. 1차 대전의 경험 때문이었다. 191742일 참전을 결정한 윌슨 행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목표했지만 모집 공고 6주 동안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자원이 아닌 징병을 통해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윌슨 행정부는 방첩법, 선동금지법 등 악법을 제정해 시민들의 반전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대대적 선전 선동을(참전 결정 직후 결성된 선전기구 CPI의 홍보 요원은 자그마치 75000명이었다) 통해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의 반전여론은 극에 달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JP 모건 등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의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던 1차 대전의 결과, 세계가 평화로워지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 따라 미 의회는 1935년 이후 4차례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의 해외 전쟁 참여를 막으려 했다. 이러한 미국인의 전쟁 불신은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때까지 계속됐다. 다시 말해 진주만 기습이 없었다면 미국의 참전은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역사학자 스티븐 암브로스는 미국은 2차 대전에 '참가한(enter)' 것이 아니라 '끌려 들어갔다(pulled-in)'고 말한다. 194112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나흘 뒤인 1211일에는 나치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시아와 유럽의 전쟁 모두에 뛰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011월 대선에서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3선에 성공했다. 또한 진주만 기습 다음 날, 127일을 '치욕의 날(Day of Infamy)'로 지칭하며 일본의 비열한 기습 공격을 강력히 비난했다. 미국은 최후의 순간까지 일본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미국의 주요 군사기지를 기습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여론은 일거에 반전된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국민 모두가 총력전 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미국에 대한 일본의 비열한 기습 공격, 이것이야말로 '2차 대전은 좋은 전쟁'이라는 공식 서사의 핵심 요소다.

 

평화를 지향했던 미국은 선의의 피해자인 반면 기습 공격을 감행한 일본은 사악한 전쟁범죄자라는 인식이 미국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이제 미국의 참전은 완벽하게 정당하며 또한 필요한 것이 됐다. 1차 대전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 과정에 대한 이러한 공식 서사는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미국은 강력한 경제 제재 등을 통해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갔다는 의견에서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고도 고의로 방치했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 반론의 핵심은 과연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속인 일본의 기만적 기습이었나?'라는 것이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도록 도발한 것은 아닌가?'

 

'미국이 일본의 비밀 암호문을 감청하고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춤으로써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거나 방해할 수도 있었던 미군의 군사 활동을 미국의 고위 정치지도자가 고의로 저지하지는 않았는가?'

 

'진주만 수정주의(Pearl Harbor Revisionism)'로 불리는 이러한 반론은 1948년 미국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도래 : 겉모습과 실제에 관한 연구>를 펴내면서 본격 제기됐다. 비어드는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저명한 역사학자였으나 이 저서에서 루스벨트를 맹비난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하게 매장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국민적 영웅 루스벨트에 대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원흉으로 비난한 대가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상당수 역사가, 논픽션 작가, 언론인들에 의해 수정주의적 반론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최고의 논픽션 작가로 인정받는 존 톨랜드의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1982), 전쟁 당시 해군 병사였으며 이후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17년간 20만 건의 관련 문서를 발굴하고 암호해독 요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을 파헤친 로버트 스티네트의 <기만의 날: 루스벨트와 진주만의 진실>(1999), 그리고 역사학자 스티븐 스니고스키의 논문 <진주만 수정주의를 옹호함>(2001)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1946년까지 5년간 9차례 조사가(해군과 육군의 자체 조사, 의회 청문회 등) 진행된 데 더해 전쟁 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도 국방부 재조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진주만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1995, 진주만 군사책임자였던 허즈번드 키멀 해군 제독과 월터 쇼트 육군 중장의 유족들은 루스벨트 행정부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관한 정보를 유독 이들에게만 전달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진주만 방어에 태만했다는) 직무유기의 죄를 뒤집어쓰고 2계급 강등 예편 당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재조사를 통해 이들의 계급과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국방부는 7개월 조사 끝에 50쪽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유족의 요청을 기각했다. 또한 1999년에는 미 상원이 키멀과 쇼트의 명예 회복에 관한 결의안을(찬성 52, 반대 47) 채택하고, 2000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들의 계급을 복원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난 후까지도 당사자 측의 이의 제기가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진주만 기습의 진실은 무엇인가?

 

팍스아메리카나 vs. 대동아공영권, 충돌은 불가피했다

[전쟁국가 미국·2-]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

진주만 기습은 일본의 사악한 전쟁 음모가 아니었다. 세계 정복이라는 거창한 야망의 시도도 아니었다. 대공황 이후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국가이익이 충돌한 필연적 결과였다. '미국을 모델로 전 세계를 재조직'하려는 루스벨트의 구상(One-Worldism)과 중국에서 동남아에 이르는 지역을 '일본 주도의 자급자족적 제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전략(대동아공영권)은 양립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이로써 일본은 '침략자'로 규정됐고, 미국은 정당한 방어 전쟁이라는 명분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을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국이 완전한 굴복, 아니면 전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 침략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본다.

 

미국은 스페인전쟁 이후(1899) '문호개방'의 원칙에 따라 세계 전체를 자신의 시장으로 만들려 했다. 미국 경제는 이미 1890년대부터 세계 최강이었다. 끝없이 생산되는 농산물과 공산품을 처분하기 위해서는 세계 전체가 필요했다. 반면 일본은 기존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 중국과 동남아를 더해 자신의 독점적 경제권을 만들려 했다. 대공황을 맞아 자본주의 열강이 자유무역을 포기하고 자신만의 배타적 경제권 형성을 통해 각자도생을 도모하는 상황에서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유일한 활로였다. 즉 중국과 동남아는 미국에도 일본에도 핵심적 지역이었다.

 

사실 2차 대전은 대공황으로 영국 주도의 국제 자유무역 질서가 무너진 이후 미국, 독일, 일본 등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시장쟁탈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과 일본이 각각 유라시아의 서부와 동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데 비해 미국은 전 세계를 자신이 주도하는 단일한 경제권으로 묶으려 했다는 점이다. 독일과 일본이 군사력에 의한 특정 지역의 영토적 지배를 추구한 반면, 미국은 압도적 생산력을 바탕으로 세계 전체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지향했다.

 

당초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형님(senior partner)' 노릇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켰고(1854), 러일전쟁 당시 영국과 함께 전쟁 비용의 60%를 지원했으며, 러시아와의 휴전 협상을 중재했다. 또한 태프트-가쓰라 조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병합을 인정했다(1905).

 

미일 충돌의 서막, 일본의 만주 침략

긴밀했던 미일 관계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19319월 일본의 만주 침략이었다. 일본은 대공황 극복을 위해 만주에 괴뢰국가를 세우고 경제 침탈에 나섰다. 1931년 일본의 수출은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대비 43%나 감소했다. 특히 일본이 직접 통치하는 조선, 대만에의 수출은 급증한 반면 그 밖의 지역에 대한 수출은 급감했다. 결국 일본에게는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경제 영토의 추가 확보가 절실했다. 그 결과가 만주 침략이다.

 

그러나 영국, 미국 등은 반대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 이전까지 자본주의 열강의 중국 경제 진출은 중국의 주권 존중(영토 보전)과 기회 균등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다. 열강은 중국 정부가 국내 치안을 유지할 정도로 강하면서도 열강의 경제적 요구를 물리치지 못할 만큼 약하기를 원했다. 또한 열강의 중국 진출 기회는 공평해야 한다는 묵계가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이러한 열강들 간의 묵계를 깨고 중국 일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문호개방 원칙에도 어긋난다. 미국은 스팀슨 독트린에 따라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았고, 국제연맹은 현지 조사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고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는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었다. 일본의 만주 점령을 철회시킬 수는 없었다. 원자재와 시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에게 만주 지배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핵심 국익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은 궁극적으로 중국 시장을 노린 것이었다. 일본의 개항, 필리핀의 식민지화, 문호개방 원칙의 선언 등도 모두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은 곧 세계 최대 시장이 될 잠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지원한 것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제패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동진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면서 미영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 일본은 미영의 라이벌로 부상한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것은 미영의 그늘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은 미국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 전개였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미국과 일본의 국가 이익이 정면충돌하는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경제제재나 군사력을 동원한 강경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만주 침략 당시 국무장관 스팀슨은 국제연맹을 통한 경제제재를 추진했으나 후버 대통령의 반대로 무산됐다. 경제제재가 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공황에 따른 국내 상황의 급박함도 영향을 미쳤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들 World War II Database

 

중일전쟁 이후 미국은 군비 확장, 일본은 동아시아 제패 구상

일본은 만주 침략에서 그치지 않고 19377월 중국 침략에 나섰다. 중국 전체를 독식하겠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불가피한 대응의 측면도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공동 항일전쟁(2차 국공합작)을 촉발함으로써 만주국의 안정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 중국을 굴복시켜 일본의 만주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 일본은 193712월 난징에서 약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하고 이듬해 난징에 친일 괴뢰정부를 세웠다.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은 정면충돌에 한 발 더 다가섰다.

 

1938년 루스벨트는 군비 확장에 시동을 걸었다. 세계 최강의 해군 건설을 목표로 10년간 11억 달러를 투입하는 '해군법'을 제정했고, 괌에 군사기지 건설을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미국 업체의 일본에 대한 항공기 및 항공기 부품의 자율적 수출 규제를 실시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신질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938113일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장개석 정부는 중국을 대표하지 않는다면서 일본 스스로의 조건에 맞게 중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만주국, 중국...이 세 나라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 것이며 동아시아의 긴밀한 경제 통합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다. 19408월 공식화되는 대동아공영권의 시작이다.

 

일본의 전략 목표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중일전쟁을 조속히 마무리 짓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본 병력의 절반이 중국과의 전쟁에 투입된 데다, 1937년이 되면 무역 적자를 메우기 위해 금 보유고의 절반 가까이를 탕진할 정도로 일본의 곤경은 심각했다.

 

일본은 만주 지배권에 대한 미국의 인정과 지원을 기대했다. 일본이 원하는 조건대로 중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중재해줄 것을 바랐다. 이를 위해 일본은 중국 남부는 미국과 영국에 양보할 용의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미국의 최대 목표는 세계 전체에 대한 문호개방의 관철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중국으로부터 일본 군사력의 철수였다. 이후 미일 협상에서 미국은 언제나 일본 군대의 중국 철수를 최우선 조건으로 제시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10년 가까이 피땀 흘려 쟁취한 기득권을 전면 포기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완성하려 했으나 이를 달성할 방법은 없었다. 석유와 기계류 등 핵심 군수물자의 조달을 미국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쟁 역량은 미국과의 교역 여부에 달려있었다.

 

딜레마에 빠진 일본

이러한 일본의 근본적 취약점에 대해 당시 일본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나와 도이치는 일본의 군사주의는 덫에 걸려들었다고 지적했다. 수출 의존적 경제 구조를 가진 일본이 군수물자 생산을 늘릴수록 민수 물자 생산과 대외 수출은 줄어들 것이며 이에 따라 서방으로부터 석유, 기계류 등 핵심물자를 사들일 재원도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석유와 기계류는 군사용이기도 하지만 산업화와 미래의 자급자족을 위한 필수 물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은 중국 침략과 자체 산업화를 동시에 추진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와는 일본의 중국 침략은 이러한 일본의 근본 모순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경고했다.

 

일본의 선택은 미국의 요구대로 중국 정복을 포기하고 삼류 국가라는 초라한 미래에 안주하든지, 아니면 근본적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자급자족적 제국을 위해 대미 공격에 나서든지 둘 중에 하나뿐이었다. 조선을 병합할 때처럼 미국의 축복 속에 중국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중국은 미국에도 너무나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통파 역사학자 조나단 어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정부 관리들은 (일본과 중국에)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나라가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군사적 파탄으로 몰아넣는 것이 더 좋은 방책이라고 결론 내렸다." <일본과의 전쟁(1937-1941)>(Going to War with Japan)

 

'하나의 세계' vs. '대동아공영권'

중일전쟁 이후 1941127일 미일 개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하나의 세계' 구상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전략은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과의 전쟁 없이, 즉 미국의 양해 아래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려 했던 일본은 결국 대미 전쟁이라는 자멸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397월 초 일본은 장개석 정부가 있는 충칭을 폭격했다. 726일 미국은 1911년 체결된 미일 무역조약의 파기를 선언했다. 파기는 6개월 후 발효됐는데,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가 가능해졌다.

 

1939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데 이어 19405-6월에는 프랑스, 네덜란드까지 단 6주 만에 서유럽을 제패했다.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 일본은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미국은 태평양함대와 공군력 증강에 나서는 한편 미 역사상 최초의 평시 징집법을 제정했다. 19405, 루스벨트는 일본의 만주 침략 당시 국무장관을 지낸 재계의 거물 헨리 스팀슨을 전쟁부 장관으로 발탁했고, 7월에는 의회에 군사비 40억 달러 증액을 요청했다. 스팀슨 발탁은 총력전에 대비해 미 산업계의 협력을 얻기 위한 조치였다. 실제로 스팀슨 취임 이후 미국은 항공기 등 대대적 군수물자 생산에 돌입한다.

 

또한 국가방위법도 통과됐다. 대통령 재량으로 미 방위에 필요한 군수물자의 수출을 제한할 수 있게 한 법이다. 이에 따라 항공기와 공작기계 등 40개 품목의 대일본 수출이 통제됐다. 일본 경제에 대한 목조르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주일 대사였던 조셉 그루는 미국의 경제 제재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일본의 머리 위에 대롱거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의 오산 : 3국 동맹으로 미국 견제?

한편 전격전으로 순식간에 유럽대륙을 제패한 독일의 파죽지세에 고무받은 일본은 동아시아 제패를 추진한다. 요체는 중국의 저항을 평정하고 석유 등 자원의 보고인 동남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미영 등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자신이 주도하는, 아시아인에 의한 신동아시아 질서의 구축을 천명한다.

 

194072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 외무상에 친독일 성향의 마쓰오카 요스케, 국방상에 도조 히데키가 기용됐다. 고노에 내각은 취임 직후 모든 정당을 해산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말살한 것이다. 81일에는 마쓰오카 외상이 대동아공영권 추진을 공식 천명했다. (730일 작성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마쓰오카는 장래 일본의 세력권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국령 말라야,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보르네오, 태국, 버마, 인도,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반루스벨트 성향의 고립주의자 해밀턴 피시 의원은 대동아공영권에 대해 '일본판 먼로 독트린'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중남미에 대해 배타적 통제권을 가졌듯이 일본도 중국 및 동남아에 대해 독점적 우위를 누리려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평가로 말미암아 일본은 대미 타협의 가능성을 높게 보았을 수도 있다.

 

1940922일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입했다. 이어 927일에는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3국 동맹을 맺었다.

 

인도차이나 진입은 독일의 프랑스 정복으로 가능해졌다. 일본은 중국 봉쇄와 함께 동남아 진출을 노렸다. 우선은 버마를 통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차단하면서 때가 되면 동남아 전역을 정복하겠다는 심산이었다(일본의 남진은 19417월 단행된다).

 

일본은 3국 동맹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에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주도하는 신질서를 건설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속셈은 미국을 겁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일본이 독일과 손을 잡으면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두 곳에서의 전쟁이라는 모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일본이 세게 나오면 미국이 일중 화해를 주선할 것이며, 일본이 원하는 조건으로 중일전쟁을 끝내고 동남아 정복에 나선다는 계산이었다. 즉 미일전쟁을 하지 않고도 동남아를 먹을 수 있다는 속셈이었지만 이는 치명적 오산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동남아를 일본에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속셈 : 그랜드 에어리어와 일본

미국의 목표는 미국이 지배하는 단일한 세계경제의 건설이었다. 당초 미국은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통합을 목표로 했다. 이른바 그랜드 에어리어(Grand Area)가 그것이다. 독일이 욱일승천 하던 1940년까지 독일 세력권을 넘볼 수는 없었다.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 1941년 가을 이후 그랜드 에어리어는 세계 전체로 확대된다.

 

2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39912일 미 외교협회(CFR)의 제안으로 12월 출범한 '전쟁과 평화 연구'는 미국 경제의 활로를 위해서는 기존 세력권인 서반구 외에 중국과 동남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정확히 겹친다. 특히 영국령 말라야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일본 손에 넘어간다면 유럽의 대독일 전쟁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이 지역의 석유, 주석, 고무 등은 영국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핵심 군수물자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팽창주의는 비독일지역에서의 미국의 우세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 위협은 "가능하다면 평화적으로, 안 되면 무력으로라도 진압되어야 했다" ('전쟁과 평화 연구' Memorandum E-B 19 1940. 10. 19)

 

'전쟁과 평화 연구'의 경제.금융 그룹은 1123, 독일이 패권을 차지하지 않은 지역에 대한 미국의 무제한적이고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하는 일본에 맞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미국은 19407월부터 일본이 만주국을 비롯한 중국 내 일본 군사력을 철수하지 않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며, 동남아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식민지를 공격한다면 이 역시 개전의 이유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진입 직후인 1940926일 미국산 고철의 대일본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일본의 무기 생산에 차질을 주었다. 한편 중국에 대한 지원을 본격화해 이 해 125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나아가 19411월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 강화, 영국 등과 함께 동남아 방어, 일본에 대한 일부 전쟁물자의 공급 차단 등을 공식 정책으로 택했다.

 

1940년 베트남 동당으로 진입하는 일본군 위키미디어 커먼스

 

루스벨트는 "(미국은) 무력으로 지배되는 세계의 외로운 섬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 상공회의소도 미국 기업의 중국에서의 동등한 사업 및 무역 기회를 위해 정부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과 동남아를 일본의 독점적 세력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19409월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입한 일본군이 10개월이 지난 19417월 말에야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격한 것은 소련의 기습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일본은 19395월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에 대패한 바 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40년 만의 패배였다. 남진에 앞서 북쪽 전선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19413월과 4월 마쓰오카 외상이 독일과 소련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과 독일은 서로 다른 속셈을 갖고 있었다. 마쓰오카는 소련을 3국 동맹에 끌어들이려 한 반면 독일은 소련 침공을 추진 중이었다. 마쓰오카의 독일 방문에서 양측은 각자의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 413일 마쓰오카는 스탈린과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어느 일방이 타국의 침공을 받을 경우 엄격한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조약 시한은 5년이었다. (소련은 194588일 이 조약을 무시하고 일본을 공격한다.)

 

미국은 경악했다. 중국에 대한 무기 임대(렌드리스)를 시작하는 한편 미 공군 조종사들을 퇴역시켜 의용군 '플라잉 타이거즈'를 결성, 중국의 대일 항전을 돕게 했다. 나아가 저명한 동아시아 전문가인 오웬 라티모어 존스홉킨스대 교수를 정치고문으로 중국에 파견했다.

 

미일 교섭, 핵심은 일본군의 중국 철수

한편 4월부터 코델 헐 국무장관과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 대사간에 비밀협상이 시작됐다. 미국의 요구는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 군사 정복의 포기, 문호 개방의 준수였다.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노무라 대사는 '미국이 만주국을 인정할 것'이라는 오판을 하고 있었다. '문호 개방'에 대한 미국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622일 독일의 450만 대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은 2차 대전의 분수령이다. 1939823일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등 동유럽을 분할 점령했던 소련이 2년도 채 안 돼 독일의 적국이 된 것이다. 유럽에서 소련이라는 군사적 우방을 얻은 미국의 입장은 강경해진 반면 일본은 혼란에 빠졌다.

 

마쓰오카 외상은 자신이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침공하자고 주장해 일본 지도부를 경악케 한다. 마쓰오카의 주장은 1주일간의 내부 격론 끝에 기각되고(당시 시베리아에서 소련의 군사력은 일본의 2배였다) 72일 인도차이나 남부로의 진격이 결정된다. 이른바 남방옵션이다. 마침내 721일 일본은 남부로 진입했다.

 

영국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5년까지를 국제적 조직폭력배의 전성기라고 지적했는데, 마쓰오카의 행태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사실 1933년 미국의 소련 승인에서(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한 대응) 1941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한 독일의 소련 침공, 전통적 우방이었던 미국에 대한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이르기까지 열강의 행태는 조직폭력배와 다름없었다. 국익을 위해 야합과 배신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 미국의 강력한 대일 경제 봉쇄

일본의 인도차이나 남부 진격에 대해 루스벨트는 미국 내 일본 자산의 동결과 석유, , 고철의 전면 수출 금지로 맞섰다. 당시 미국은 일본 석유의 60%를 공급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 제재에 대해 <뉴욕타임스>727'전쟁에 가장 가까운 극단적인 공격'이며 중국에 대한 일본의 기득권을 무효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또한 미 해군 작전본부장 리치몬드 켈리 제독은 대일 석유 금수 조치의 영향에 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국산 석유의 일본 수출 금지 조치는 즉각 일본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석유 금수 조치는 미국에 대한 일본의 심리적 저항감에 즉각적이고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본의 권력자들이 현재의 행동 방침을 계속 밀고 나가게 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일본이 영국 및 네덜란드에 대해 군사 조치를 취한다면 필리핀에 대해서도 군사행동에 나설 것이 분명하며 이로써 미국은 태평양전쟁에 말려들게 될 것이다."

 

19418월 초에 이르면 일본은 모든 전략적 원자재에 대한 거의 완벽한 통상 금지 상황에 직면한다. 여기에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행까지 금지해 11월이 되면 일본 수입의 75%가 감소한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면적인 경제전쟁에 돌입했으며 그 결과 일본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한편 루스벨트는 1937년 예편한 맥아더를 복귀시켜 극동사령부를 창설한다. 미국과 일본은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일본은 8월 초부터 호놀룰루에서 고노에 총리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추진한다.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반대하는 강경 입장의 군부를 우회해 직접 담판하겠다는 취지였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마무리되면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 군대를 철수하는 대신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의 특수지위를 인정하고 미일 무역관계가 복원하기를 원했다.

 

한편 89일부터 1주일간 대서양에서 처칠과 회담을 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17일 만일 일본이 무력을 사용한다면 미국은 스스로의 "권리와 이익, 안전과 안보를" 지키기 위해 즉각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영의 대일 전쟁 방침은 사실상 이때 결정됐다.

 

925일 노무라 대사가 일본 측 협상안을 헐 국무장관에 전달했다. 일본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원하며, 미국이 유럽전쟁에 참여한다면 일본은 3국 동맹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해석하겠다"(즉 독일을 돕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이 원하는 조건으로 중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중재 역할을 미국이 해주고,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중단한다면 일본은 중국과 공평하게 교역할 것이며 미국도 일본과의 정상적 무역관계를 복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이며 이로써 동남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부담이 완화될 것이라는 게 일본의 논리였다.

 

102일 헐 장관이 미국 측 입장을 노무라 대사에게 전달했다. 문호개방 4원칙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영토 보전, 내정 불간섭, 공평한 통상의 보장, 태평양지역 질서의 평화적 방식에 의한 변화가 그것이다. 역시 핵심은 일본군의 중국 철수였다. 정상회담은 불발됐다.

 

1016일 고노에 내각이 붕괴하고 도조 내각이 성립됐다. 11월에 이르면 미국이 일으킨 경제전쟁은 이미 일본을 결사적인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수입이 75%나 감소한 것이다. 물자 부족으로 설탕, 휘발유, 고무 등은 1년 이상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도고 시게노리 신임 외상은 조셉 그루 대사에게 "이러한 종류의 경제적 압박은 실제 전쟁보다도 더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1120일 일본이 최후의 제안을 내놓았다. 19417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 즉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격한 일본군을 철수시킬 테니 미국의 경제제재를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1126일 미국의 답변(Hull Note)"중국 및 인도차이나로부터 일본의 모든 군사력 및 경찰력을 철수"한 이후에야 일본과의 교역 및 석유 수출을 재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일본은 121일 어전회의를 통해 미국에 대한 공격을 최종 결정한다. 기습 함대는 이미 1126일 일본을 떠나 하와이로 가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은 이미 96일의 어전회의를 통해 10월까지 협상에 총력을 기울이되 안 되면 전쟁이라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다. 7월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로 일본의 석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갈될 터였다. 시간은 일본 편이 아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1126일 일반에 공개된 미국의 최후통첩은 7월 이후 일본의 모든 제안을(특히 1120일의 잠정 협정 제안)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7월의 경제 봉쇄 이후 4개월이 지난 1126일에야 최후통첩을 보낸 것은 유럽의 전황과 관련이 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이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125일 소련은 최초의 반격에 나선다). 당초 독일의 전격전에 의해 짧으면 6, 길어야 3개월 안에 굴복하리라던 소련이 5개월 이상 버티면서 미국은 두 개의 전쟁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194111월 말까지도 "워싱턴과의 협상이 결렬되지 않고 지속되도록 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던 도조 수상은 121일 미일의 잠정적 공존을(modus vivendi) 위한 어떤 대화도 더 이상 "무용"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의 완벽하고 무조건적인 철군, 난징의 (1938년 일본이 세운 친일) 중국 정부에 대한 인정의 철회, 그리고 삼국동맹의 사문화를 요구했다. 이것은 우리 제국의 위엄을 무시하고 우리가 중국 사태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도 불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제국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외교를 통해서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10월 하순 이후 미일 교섭을 이끌었던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은 일관되게 우리의 변함없는 정책인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을 위협하는 것이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제국의 국제적인 위치는 만주사태 이전보다 더 낮아질 것이고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불가피하다"

 

도고 외상은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인 도공의 후손으로 1939년 소련 대사 당시 노몬한 전투 이후 일소 휴전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그는 3국 동맹으로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마쓰오카의 책략에 회의적이었으며 일본의 군사 행동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2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사망한(1950723) 그는 옥중 수기를(한국어판 <격동의 세계사를 말한다>) 통해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미일) 교섭을 성사시키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는 데 있었다.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전부터 여러 해에 걸친 희생을 전부 수포로 돌리는 일이었음은 물론 대륙에서 전면적인 퇴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해 패전 후 오늘날과 같은 지위에 둘 각오로 머리를 조아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이러한 것을 시행할 상황이 아니었음은 매우 명백하다. 어쨌든 당시 전면적인 퇴각까지 단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부나 민간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에서조차도 또 원로대신 층에서도 미국의 제안을 그대로 수락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또 "미국은 (1941) 8월 이후 전쟁을 예정"하고 있었고,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전부 수용하지 않는 한 전쟁이며, 일본이 모든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일본이 미국의 문호 개방 요구에 전면 굴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전쟁을 통해 미국에 전면 굴복하게 된다

 

진주만, 통킹만, 그리고 9.11

[전쟁국가 미국·2-]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6, 영국 보수당 내각의 올리버 리틀턴 생산부 장관은 '미국이 전쟁에 말려들었다는 말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미국의 심각한 도발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가져왔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미 국무장관이 해명에 나섰고, 얼마 후 리틀턴은 미국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해명성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경위에 대한 의혹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즉 미국은 일본의 기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라면, 미국이 정당한 전쟁이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본을 의도적으로 도발했다는 수정주의적 견해도 만만치 않다.

 

'모든 음모론의 어머니'

미국은 진주만 기습 나흘 후인 19411211일 해군의 자체 조사를 시작으로 1995년 국방부 조사까지 무려 10차례 이상의 조사를 벌였지만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확실하게 잠재울 수는 없었다. 진주만 기습의 진실에 관한 논란이 이후 케네디 암살에서 9.11테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모론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이유다.

 

진주만 기습 후 열흘 남짓부터 미 의회는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1219일 야당인 공화당의 로버트 태프트 상원 원내대표는 "아마도 진주만 기습의 책임이 현지 사령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톰 코널리 민주당 상원의원은 행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일본 기습 공격의 눈부신 성공은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고 아서 반덴버그 상원의원(공화당)은 하원 해군위원회와 함께 진주만 사태에 대한 전면 조사를 촉구했다.

 

루스벨트는 의회가 아닌 자신이 임명한 위원회(위원장 오웬 로버츠 대법관)에 조사를 맡겼으나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2124일 발표된 13000쪽의 위원회 보고서는 진주만 기습을 방어하지 못한 책임을 전적으로 허즈번드 키멀 제독과 월터 쇼트 장군 등 현지 군사령관의 직무유기 탓으로 돌렸다. 루스벨트, 스팀슨, 마셜 등 정부와 군부 지도자에게는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이에 대해 키멀의 전임자였던 제임스 리처드슨 제독은 "이제까지 발표된 정부 보고서 중 이처럼 불공정하고 부당하며 부정직한 문서를 본 적이 없다. 조사위원들이 명예를 아는 사람이라면 최대한의 유감과 최대한의 수치를 느껴야 마땅할 것"이라고 강력 반발했다.

 

태평양함대를 진주만으로 옮긴 이유는?

그는 19405월 미 해군 함대의 본거지를 본토의 샌디에이고에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옮긴 데 대해 반대하다 퇴역 당한 인물이다. 태평양함대는 19404월 연례 합동 훈련을 위해 진주만으로 이동한 이래 샌디에이고로 귀환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515일 태평양함대의 상당 기간 하와이 체류를 결정했는데 이때는 독일이 네덜란드, 프랑스 등을 공격할 때였다.

 

이후 리처드슨 제독은 루스벨트와의 두 차례 독대(7월과 10)에서 함대의 샌디에이고 귀환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해 2월 예편 당했고 후임에 키멀 제독이 임명됐으며 태평양함대의 진주만 이전은 공식화됐다.

 

10월 면담에서 리처드슨은 자신이 지난 5개월간 태평양함대의 진주만 이전에 반대한 이유로 진주만의 훈련시설 부족, 탄약 및 연료 저장 시설 부족, 인양함 수선함 등 지원 함정 부족,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병사들의 사기 저하, 건조 도크 등 수리시설 부족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그러나 현지 사령관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앞서 78일 루스벨트와 백악관에서 오찬을 하고 난 후 그는 "(대통령의 참전하지 않겠다는) 공식 발언과는 달리 (11월 대선에서) 3선을 이룰 때까지 영국이 버틴다면 참전할 각오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로버츠위원회 보고서에 대한 리처드슨 제독의 분노는 이러한 루스벨트의 이중플레이를 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루스벨트는 1940년 대선 과정에서 '해외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도 측근들에게는 "하지만 우리가 공격 받으면 우린 싸우게 될 걸.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하면 그땐 해외 전쟁이 아니잖나?"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미국 국민은 자국이 공격을 당하기 전에는 유럽 전쟁 참전에 절대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는 "(루스벨트는) 전쟁 상황으로 떠밀려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으며 해럴드 이케스 내무장관도 "오랫동안 나는 미국이 참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대일본전을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중략) 확실히 우리가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한다면 불가피하게 독일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이른바 '뒷문으로 참전(Back Door to War)'의 논리다. (<해럴드 아이크스의 숨겨진 역사>, The Secret History of Harold L. Ickes, 1954, p.20)

 

이처럼 루스벨트 행정부는 참전의 명분을 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던 반면 진주만 기습 직전까지 미 국민의 80% 이상은 참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 전후 미국 정책담당자들의 언행을 보면 일본의 전쟁 돌입을 예상하고 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주만 기습에 '안도감'을 느낀 스팀슨과 루스벨트

예컨대 1125일 미국의 최후통첩을 일본에 보내기 하루 전날, 루스벨트는 "미국이 며칠 안에 일본과 총격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공격이 1127-121일에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까지 했다. 이날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백악관에서 헐, 녹스, 마셜 육군 참모총장, 스타크 해군 작전부장 등과 회합을 가진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일본이 먼저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우리 편에 지나치게 큰 피해가 없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할(maneuver) 것인가이다"

 

다음 날 헐 국무장관은 미일 교섭에 관한 최후통첩(헐 노트)을 일본 측에 발송하기 직전 스팀슨 전쟁부 장관에게 '이제 나의 업무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당신과 녹스(해군부 장관)의 업무'라고 말했다. 27일에는 미국 주재 영국 대사에게 '미일 외교가 사실상 종료하여 사태는 이제 미 육군과 해군에 위임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날 전군에 전쟁 경보를 내리면서 "만일 전쟁을 회피할 수 없다면 미국은 일본이 먼저 도발하기를 원한다"고 지시했다.

 

특히 스팀슨은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이 확정된 직후인 129일의 일기에 "이제 일본 놈들이 하와이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중략) 내게 처음으로 든 느낌은 우유부단의 시기가 끝나고 우리 국민 모두가 일치단결 할 수 있는 형태의 위기가 왔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이었다."라고 기록했다. 또한 이날 대국민 방송을 한 루스벨트에 대해 "이제 오랫동안 묵혔던 모든 것이 마침내 운명에 따라 그리고 일본의 공격 덕분에 결정적으로 무르익었기 때문에 마음에서 큰 짐을 덜어내고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적었다.

 

진주만 기습에 대해 '놀라움과 분노'가 아니라 '모든 문제가 해결'된 데 대한 '안도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지도자들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고대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일본을 도발하기 위해 의도적 책략을 쓴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마셜 육군 참모총장은 1115일 루스벨트를 대신해 백악관에서 7개 주요 언론사에 대해 극비 브리핑을 가졌다. <뉴욕타임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타임>, <뉴스위크>, 그리고 AP, UPI,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3개 통신사 대표들에게 마셜은 "며칠 안에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일본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계획을 설명했다. 마셜 장군은 자신의 전쟁 예측은 일본에서 유출된 정보에 기초하고 있다며 "우리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은 이러한 (미국이 일본 측 사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말했다. 나아가 "미일 전쟁이 12월 첫 열흘 안에 발발할 것"이라고 예언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일본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이 극비 브리핑의 목적은 무엇인가? 역사가 로버트 스미스 톰슨은 브리핑 내용이 일본에 간접적으로 전달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루스벨트의 대리인으로서 마셜 장군은 누군가가 자신의 발언을 유출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언론인들에게 브리핑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공격당하기 전에 차라리 선제공격에 나서도록 자극했다는 것이다.

 

또한 <기만의 날>의 저자 로버트 스티네트는 전쟁 계획을 군사지도자가 아닌 언론사 대표에게 브리핑한 데 대해 두 가지 도덕적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 언론인 상대로 기자회견을 여는 대신 감청을 통해 얻은 (12월 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월터 쇼트 중장에게 알려야 했던 것 아닌가? 둘째, 언론인들은 이러한 정보를 현지의 키멀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 알려야 했던 것 아닐까?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진주만이 일본군에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 US archives

 

진주만 수정주의

'진주만 수정주의'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도발했다는 것이다.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 영국 네덜란드와의 준군사동맹, 그리고 일본에 대한 가혹한 경제 제재 등이 그 논거다. 둘째는 루스벨트가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았으나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 (참전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현지 군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통 역사학계는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각오했고 이왕이면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것을 원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의도적으로 전쟁을 도발했거나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고도 은폐했다는 점은 부정한다. 수정주의자 중에서도 전자는 주장하지만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진주만 기습 은폐'는 가장 극단적인 수정주의에 속한다. '진주만 수정주의'는 정계든 학계든 미국의 제도권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관련 기록 등 나름 탄탄한 근거를 바탕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일본 근해 미 군함 파견 이유는?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첫째, 루스벨트가 경제 제재에서 더 나아가 일본의 군사 대응을 촉발하기 위한 군사적 도발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미국 전함을 일본 영해 내 또는 인근 해역에 파견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이들 군함이 "이곳저곳에서 출몰"할 것이라면서 "나는 이들 군함의 출몰로 일본 놈들을 혼란시키길 원한다. 군함 대여섯 척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만 한두 척 정도 잃는 것은 괜찮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키멀 제독은 반대했다. 그는 1941218일 스타크 해군 작전본부장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계획이며 자칫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19413월부터 7월 사이 3차례에 걸쳐 일본 인근 해역에 미국 군함을 보냈다. 예컨대 731일 두 척의 미군 순양함이 분고 해협(혼슈와 시고쿠 사이)까지 진출했다가 일본 구축함이 출동하자 남쪽으로 사라졌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일본 해군은 이 배들이 미국 순양함인 것으로 믿고 있다"며 항의했을 뿐 무력으로 대응하지는 않았다. (<기만의 날>, Day of Deceit, 로버트 스티네트, p.9-10)

 

이어 미국의 최후통첩으로 전운이 감돌던 1941121, 루스벨트는 마닐라 주둔 아시아함대 토마스 하트 제독에게 '작은 함선 3척으로 일본을 정찰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미군 장교가 지휘하고 선원은 필리핀인으로 하며 대포를 탑재해(군함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본 군함이 동남아로 나아가는 해역에 진출하라는 것이었다.

 

역사가 스티븐 스니고스키는 "이처럼 사소한 군사작전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면서 "게다가 항공기 정찰이 일반화된 마당에 18, 19세기에나 있을 법한 함선에 의한 정찰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즉 루스벨트의 지시는 일본의 군사 대응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다.

 

첫 번째 함선 이사벨은 121일 출항했으나 무사 귀환했고(하트 제독은 군사 충돌을 우려해 루스벨트의 명령과는 달리 도발적 행동을 자제토록 했다), 두 번째 함선 라나카이가 마닐라 항을 떠나기 직전 진주만 기습이 시작됐다. 역사가 해리 엘머 반스는 만일 당시 미국 군함이 일본의 공격을 받았다면 진주만 기습을 피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진주만보다 작은 규모의 피습으로 전쟁을 시작하려던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암호 해독은 언제부터인가?

수정주의자들의 두 번째 주장은 미국이 1940년 가을부터 일본의 주요 암호 전문을 해독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의 전쟁 계획과 공격 지점까지 사전에 파악했으나 이같은 사실을 키멀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버트 스티네트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은 19409월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일본 측 암호 해독에 성공하기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 암호 전문인 '퍼플'은 해독 완료됐고, 29개 코드로 이루어진 '가이군 안고(海軍 暗號)'는 일부 해독에 성공했지만 이 또한 19414월경에는 완벽한 해독이 가능해졌다.

 

스티네트는 2차 대전 당시 해군 병사 출신으로 전후 <오클랜드 트리뷴>의 기자로 일하면서 17년간 정보공개법에 따라 20만 건의 관련 문서를 확보하고 암호 해독요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확보한 문서에 따르면 로열 잉거솔 해군 작전본부 부본부장은 1940104일 리처드슨 태평양 함대 사령관과 토머스 아시아 함대 사령관에 보낸 편지에서 "일본 주요 함대의 모든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게 됐으며 외무성 전문도 해독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미 해군이 일본 해군 보급함의 암호 코드를 '99% 해독할" 정도이며 19414월경이면 전함 간 교신을 비롯한 해군 암호 전체를 해독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스티네트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1941130일부터 해독된 일본 해군의 암호전문을 보고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었다.

 

이에 따라 미 정보기관은 진주만 기습 사흘 전인 1941124일 미일 외교관계의 파기를 의미하는 "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라는 핵심 구절을 포착한다. 일본 외무성은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간 1119일 이른바 일기 예보 형식의 '기상 암호' 시스템을 도입해 재외 공관들에 일본 정부의 방침을 알렸는데 '동풍, '란 곧 전쟁을 의미했다. 또한 미국은 일본 전함 간 교신의 감청을 통해 항공모함을 비롯한 일본의 공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은 키멀 제독 등 하와이 현지 군사령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일례로 키멀은 진주만 공격 2주일 전 하와이 북부 북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항공모함에 대한 수색에 나섰으나 백악관 지시로 철수해야 했다. 그곳은 일본의 공격 함대가 항행하던 곳이었다.

 

한 수정주의 역사가는 당시 키멀과 쇼트에게 외교적 협상에서 일본에게 전쟁 또는 굴복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미국의 행동 수 백 통의 일본 암호 해독을 통해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루스벨트와 고위 보좌관은 전쟁을 각오했으며 곧 시작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하와이에 있던 일본 첩자와 도쿄와의 비밀 전문 해독을 통해 진주만이 일본 공격의 목표물임이 드러났다는 사실 등 3가지 종류의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키멀과 쇼트 장군은 이후 일련의 청문회에서 극도로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증거 은폐

1944년 미 육군과 해군의 진주만 청문회에서 미 정보기관 감청 요원들은 1941124"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라는 메시지를 해독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1945-46년의 의회 청문회에서는 증언이 번복됐다. 당국자들은 어떤 "기상 암호" 메시지도 받은 바 없다고 주장했으며 암호 해독을 입증할 서류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한 메시지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한 많은 증인들이 이전의 증언을 철회했다. 오로지 로렌스 새포드 대위만이 이전의 증언을(즉 미국 정보기관이 '기상 암호' 메시지를 가로채 해독했고, 미 정부 내에 널리 알렸다) 고수했다.

 

스티네트에 따르면 이는 정부의 조직적인 증거 은폐 때문이었다. 미 해군은 진주만 기습 나흘 후인 19411211일 일본의 외교 및 군사 전문의 감청 내용을 기록한 서류의 파기를 지시했다. 또한 전쟁이 끝나고 2주일 후인 19458월말에는 진주만 기습 이전의 모든 감청 내용을 극비(Top Secret)로 분류했다. 일반 공개를 차단한 것이다. 1945-46년의 의회 조사에서는 일본의 외교 전문만 공개했고 해군 교신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메릴랜드 주 첼튼햄의 해군 통신기지에서 감청 요원으로 근무했던 랠프 브릭스 선임 준위는 1977년 해군보안국 인터뷰에서 "히가시노가제, 아메(동풍, )"라는 핵심 메시지를 포착했다고 인정하면서 그러나 상부로부터 "1946년 상하 양원 합동위원회에서 그 문제에 대해 증언하지 말 것, 나아가 로렌스 새포드 대위와의 어떤 접촉도 중지하라는 상관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같은 사실을 밝혀낸 존 톨랜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새포드 자신을 제외한다면 그 문제에 가장 관련이 깊은 사람은 아마도 선임준위였던 랠프 브릭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194112월 초에 '기상' 암호를 받은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미 해군의 대서양 연안 도청 시설인 M기지에서 일본의 메시지 도청 모두를 감독하도록 배치된, 유능한 실무자의 한 사람이었다. 가타가나 강사인 그는 그날 밤 "히가시노가제, 아메" "동풍, "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Infamy : Pearl and Its Aftermath, 존 톨랜드, 1982)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진주만 기습 직전 24시간 동안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행적이다.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대응책 마련은커녕 하와이 현지에 경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워싱턴 시각 127일 오후 1시에 선전포고가 담긴 외교 전문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며, 같은 시각에 진주만 기습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일본의 외교 전문은 모두 14개로 나뉘어져 앞의 13개는 6일 오전 630분에서 1020(이하 워싱턴 시각) 사이에 발송됐다. 선전포고가 담긴 마지막 조항은 다음 날인 7일 오전 3시와 4시에 두 라인으로 전송됐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26일 이른 저녁에 일본의 답신 13개를 감청해 해독했고 이 내용을 대통령을 비롯한 각 군 지도자에게 보냈다. 이 내용을 읽은 루스벨트는 측근 해리 홉킨스에게 "전쟁을 하겠다는 거군(This means war)"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선전포고가 명시된 마지막 14항이 해독된 것은 7일 아침이며 미국 주재 일본 대사가 헐 국무장관을 만나 이 문서를 전달한 것은 이날 오후 220분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이르면 126일 저녁, 늦어도 127일 아침에는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워싱턴은 하와이에 경보를 보내지 않았다. 경보를 보낼 권한을 가진 마셜 육군 참모총장은 이날 아침 내내 행방이 묘연했다(일요일이라 평소처럼 승마를 했다고 주장). 마셜 장군은 정오경, 이미 일본의 공격이 시작된 뒤에 쇼트 장군에게 경보를 보냈고, 해군부는 150분 키멀 제독으로부터 진주만이 일본의 공습을 받았다는 특전을 받았다.

 

미국은 19406월 사소한 징후를 이유로 하와이에 전면 경계경보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그보다도 훨씬 명백한 공격 징후에도 무사태평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126일에서 7일에 이르는 동안 루스벨트를 비롯해 스팀슨, 녹스, 마셜 등 고위 지도자들의 행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수많은 조사에서 이들은 당시 행적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사태를 얼버무리려 했다. 그토록 중요한 순간의 행적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존 톨랜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 측 메시지를 읽고 난 후 '전쟁을 하겠다는 거군'이라고 말한 대통령이 즉각 전쟁부와 해군부 장관을 비롯해 육군, 해군 지휘관을 소집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프랭크 녹스 해군부 장관의 절친한 친구인 제임스 스탈만은 1973년 켐프 톨리 제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녹스 장관이 1941126일 밤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비롯해 스팀슨 전쟁부 장관, 육군과 해군 주요 지휘관인 마셜 장군과 스타크 제독, 그리고 대통령의 최측근 해리 홉킨스와 함께 있었다는 말을 녹스 본인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이들 모두는 곧 다가올 사태, 그들이 이미 예견했던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진주만 기습이었다."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Infamy : Pearl and Its Aftermath, 존 톨랜드, 1982)

 

이러한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제도권, 또는 정통 학계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한다.

 

첫째, 미국이 일본 측 암호를 해독할 수 있게 된 것은 1942년 봄부터다. 즉 진주만 기습 이후, 스티네트가 주장한 194010월보다 16개월 늦은 시점이다. 따라서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은폐의 여지도 없다.

 

둘째, 설사 일부 암호 해독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핵심 메시지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Noise)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감청 요원에서 정보 책임자, 군 지휘관, 대통령에 이르는 명령계통에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일본의 명백한 의도로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9.11테러 직전 수많은 테러 징후에도 불구하고 세계무역센터 공격을 예견하지 못한 것과 같은, 선의의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학자 리처드 번스타인은 1999년 발간된 스티네트의 <기만의 날>에 대한 <뉴욕타임스> 서평에서 엄청나게 많이 제시된 문서 증거가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결정적 한 방(smoking gun)'이 없다고 일축했다.

 

이에 대해 스티네트는 20005"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시켜 주는 4천 건 이상의 통신 정보 서류들을 발굴했으며, 이 서류들은 진주만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두 가지 쟁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서류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반박했다. 첫째, 미국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이 일본의 해군 암호를 해독하는 데 실패했다는 설과 둘째, 실제로 암호가 성공적으로 해독되고 번역되었다 하더라도 진주만으로 항해하는 일본 전함들이 무선 교신을 자제했기 때문에 진주만이 공격 목표임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스티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서류로 인해서 이 두 주장은 허물어진다. 2000년 정보공개법에 따라 기밀 해제된 서류들이 압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일본의 해군력이 하와이를 향하고 있던 194111월에 미국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은 일본 해군의 주요 암호를 해독했고, 일본의 최고위 제독들이 일본 해군 전파로 교신했으며, 일련의 전파메시지에서 진주만이 공격 목표라는 것을 밝혔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중과 의회에 거의 60년 동안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던 이 문서들은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고위 해군 제독들은 북태평양을 횡단해 진주만으로 가는 동안 무선 통신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추적한 미군 측에 엄청난 정보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략) 미군의 무선 암호 해독자들은 1941년에 잠들어 있지 않았다."

 

그 밖의 정황 증거들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는 1941년 초부터 여러 차례 미국 정부 고위층에 전달됐다. 19411월 도쿄의 페루 외교관 리카르도 슈라이버는 미 대사관의 한 외교관에게 일본의 공격 계획을 알렸고 이는 조셉 그루 대사를 거쳐 코델 헐 국무장관과 해군 정보당국에도 알려졌다. 당시 그루 대사는 이 첩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반면 해군 정보당국은 가능성을 일축했다.

 

1941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독립운동가 한길수가 조선과 일본의 정보원들로부터 일본이 크리스마스 이전에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 정계와 언론계 등에 이승만과 맞먹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한길수는 10월 하순 가이 질레트 상원의원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국무부와 육군 및 해군 정보기관, 그리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까지 전달했다. 당시 국무부의 3인자였던 스탠리 혼벡 차관은 헐 장관에게 한길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모를 보냈다.

 

한편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은 진주만의 공격 대상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일본 영사 기타 나고아와 스파이 모리무라 타다시를 밀착 감시했고 이들을 체포하려 했으나 루스벨트가 막았다. 당시 아돌프 벌 차관보는 "그들을 어떤 혐의로 추방하든 일단 추방하게 되면 미국이 일본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 바깥 세계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추방은 불가능하다"며 이들의 체포를 저지했다.

 

스티네트는 "FBI의 고위 관리들은 1941127일 이전의 모리무라 타다시의 활동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50년 이상 주장해 왔다. 이 같은 부인은 진주만에 대한 도 하나의 커다란 은폐 공작"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해군 정보 책임자인 앨런 커크 대령은 194110월 하와이에 (일본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다가 전보되었다. (<진주만 수정주의의 사례, The Case for Pearl Harbor Revisionism, 스티븐 스니고스키, )

 

마지막으로 194111월 하와이에서 적십자사의 전쟁 관련 활동을 지휘하던 돈 스미스가 루스벨트로부터 '일본이 곧 하와이를 공격할 테니 비밀리에 대비하라. 그러나 하와이 군 지휘관들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1995년 키멀과 쇼트 장군의 직무유기에 대한 국방부의 재조사 과정에서 돈 스미스의 딸 헬렌 해먼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진주만 기습의 진실'이 중요한 이유

진주만 기습으로 미군 2355명이 전사하고 1143명이 부상했다. 민간인 사망은 68명 부상은 35명이다. 이 기습 공격으로 미국은 전격적으로 2차 대전에 뛰어들었으며 그 결과 독일, 일본 등 군국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계의 평화를 회복했다. 미국의 참전이 있었기에 식민지 조선의 해방도 가능했다. 따라서 미국의 참전 자체는 문제시 될 이유가 없다. 당시의 세계정세에서 미국의 참전은 불가피했다. 또한 만주, 중국 침략 등을 통해 동아시아를 무력으로 지배하려 했던 일본의 시도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저지돼야 마땅했다.

 

그러나 참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모종의 공작이 있었다면 이는 전쟁의 정당성과 관련해 중대한 문제가 된다. 수정주의 역사가 스티븐 스니고스키는 '평화를 지향하던 미국이 일본의 불의의 일격으로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는 인식은 '2차 대전은 좋은 전쟁(Good War)'이라는 미국인의 인식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미국의 세계 경영에서 군사력이 핵심적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의 제도권은 진주만의 진실에 대한 수정주의적 인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진주만 기습의 진실'은 이후 미국의 '전쟁 만들기(War Making)'와 관련해 중대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베트남전쟁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의 경우가 그러하다. 미국은 19648월 통킹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의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베트남전쟁에 본격 개입했고, 20019.11테러를 빌미로 (이번에는 국제사회의 거센 반대를 무릅 쓰고) 이라크를 비롯한 대중동지역의 평정에 나섰다.

 

그러나 통킹만의 경우 미국과 남베트남의 도발이 먼저 있었고, 이라크는 9.11테러와 아무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조직적인 정보 조작에 의해 미국의 공격 목표가 됐다. 1960년대의 베트남전쟁과 2000년대의 대중동전쟁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전쟁임이 분명하다. 이 두 전쟁이 미국 국력의 쇠퇴와 국제사회의 신뢰도 저하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차 대전으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대중동전쟁을 통해 쇠락했다.

 

특히 지난 2000년 미국의 네오콘 집단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미국의 방위를 재건함(Rebuilding America's Defenses)'이라는 문서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진주만(New Pearl Harbor)'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당시 PNAC는 탈냉전 이후 미국 패권의 영속화를 위해 어떤 지역에서건 미국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 패권의 등장을 막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을 대폭 증강해야 하는데, 이는 '새로운 진주만'과 같은 충격적 사태가 일어나야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들은 1년 후 9.11테러를 '새로운 진주만'으로 삼아 대중동전쟁에 나섰다.

 

이들 네오콘은 진주만을 미국 패권 형성의 계기로, 새로운 진주만은 미국 패권 영속화의 기회로 인식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1941127일 진주만의 진실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극우에 반대해 거리로 나선 오스트리아 할머니들

   


오스트리아 집권 우파 연정의 반이민·반여성 정책 등에 반대하는 우파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소속 회원들이 지난달 20일 빈에서 단체 이름(Omas Gegen Rechts)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우파에 반대하는 할머니들페이스북 캡처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201711월 이후 목요일마다 반정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 집회에 매주 빠지지 않고 참여해 눈길을 끄는 할머니들이 있다. 할머니들은 직접 만든 다양한 색상의 고양이 모자를 쓰고 나타나 정부의 반이민·반여성·복지 축소 정책에 항의하며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8(현지시간) 구성원들의 평균 연령이 70세인 시민단체 우파에 반대하는 할머니들보수 국민당과 극우 자유당 연립정부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시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파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은 전직 개신교 목사였던 모니카 잘처 대표(71)201711월 만든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시작됐다. 잘처는 201710월 오스트리아 총선 결과 보수 국민당과 극우 자유당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해 17년 만에 우파 연정이 출범하게 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잘처는 극우 정당인 자유당은 수년 간 역겨운 구호와 정책으로 오스트리아 유권자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이 연립정부의 일원이 된 것이라며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이 단체는 노인들이 사회 문제에 대체로 무심하거나 보수적이라는 편견을 뒤집는다. 이들은 우리는 사회가 변할 수 있고 사회적 발언에 힘이 있다는 것을 직접 겪은 전후 세대라고 밝히고 있다.

 

우파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은 설립 몇 달 만에 오스트리아 집권 보수·극우 연정에 반대하는 상징이 됐다. 국민당과 자유당의 연성 구성 협상이 진행 중이던 201712월 중순 열린 첫 집회에 참여한 회원은 10명에 불과했으나 6주 뒤에는 250명으로 늘었다. 현재는 회원 300명에 3000여명의 후원을 받고 있다.

 

지난달 6일에는 자유당 대표인 하인츠 크리스티안 슈트라헤 부총리가 정치 집회에서 우파에 반대하는 할머니들을 언급해 이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슈트라헤 부총리는 목요일이 됐으니 할머니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걷다가 쓰러지게 내버려둬라고 말했다. 이 단체 회원인 수잔 숄은 뉴욕타임스에 모두가 우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총리까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20대 남자 현상은 왜 생겼나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20대 남자 현상은 왜 생겨났나? ‘()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성의 특수성을 가설로 추려봤다. 적어도 우리는, 생산적으로 틀리려고 노력했다.

<시사IN>과 한국리서치의 20대 남자 공동기획 시리즈는 ‘20대 남자 현상의 실체와 동력을 밝혔다. 604‘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에서 우리는 20대 남자 현상의 핵심이 권력이 남성을 차별한다는 인식이라고 지목했다. 605()페미니즘 전사들의 탄생에서 우리는 이 20대 남자 현상의 엔진을 확인했다. 25.9%, 그러니까 넷 중 한 명에 이르는 크고 강고한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을 포착했다. 20대 남자 현상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현상 대부분은 이들 강고한 정체성 집단이 주도했다. 이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다. ‘무엇이어떻게를 확인했으니, 남은 질문은 일 수밖에 없다. 20대 남자 현상은 왜 탄생했나?

 

모르겠는데요.” 분석을 총괄한 한국리서치 정한울 연구위원(정치학 박사)이 말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20대 남자 전체를 세대론으로 묶어서 보면, 반페미니즘 말고는 다른 세대와 차이를 보이는 항목이 많지 않습니다. 세대론으로 접근하면 답을 찾기 어려워요.” 20대 남자들이 다른 세대·성별과 갈라지는 지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유일한 예외는 페미니즘에 대한 단호한 반대와 강한 거부감이다. 그런데 그건 우리가 찾는 이유라기보다는, 어떤 이유가 작동한 결과일 가능성이 더 높다.

 

 

연합뉴스

()페미니즘 정체성을 지닌 20대 남성은 초··고교 과정에서는 여성이 더 뛰어나지만

취업 후에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더 유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20대 남자가 다른 세대·성별과 무엇이 다른지 물어보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20대 남자 현상의 핵심 엔진을 25.9% 정체성 집단으로 특정했으므로, 이들이 왜 등장했나를 물어보는 것이 더 나은 접근법이다. 그리고 이들을 이해하면, 이들을 엔진으로 하는 20대 남자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208개 질문 문항을 짜면서, 20대 남자 현상을 설명할 가설을 최대한 집어넣었다. 정한울 연구위원이 통계 처리를 거쳐 기각할 가설과 검토할 만한 가설을 추렸다. 우리가 추린 가설들의 조합을 소개한다. 앞으로 볼 문항들은, 반페미니즘 정체성과 통계적으로 한 덩어리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온 것들이다.

 

피해의 경험이 잡히다

 

16~17<1>, 각 생애주기별로 남녀 중 어느 쪽이 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은 결과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성, 그러니까 25.9%의 답변만 따로 모아 그렸다. 이 정체성 집단은 초··고교 교육과정과 대학 입시에서는 여성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취업 시험에서도 약간이나마 그렇다. 하지만 취업 후 업무능력과 사회생활에서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더 유능하다고 본다.

 

 

표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왼쪽이다. ··고교 교육과정에서 여성이 더 유능하다는 응답이 39.1%나 된다. 이건 그 외 20대 남자(28.4%)보다 훨씬 높고, 심지어 20대 여자(33.7%)보다도 높다. 대학 입시로 와도 이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29.2%가 여성의 손을 들어준다. 이것도 그 외 20대 남자(21.7%)20대 여자(23.5%)보다 높다.

 

이 공고한 정체성 집단은 여성유능을 이어 붙이는 데 일관되게 반대한다. 하지만 교육과정만 놓고 보면 모든 세대·성별을 통틀어 여자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그룹이 이들이다. 취업 시험도 정도는 덜하지만 자신감 없기는 마찬가지다(여성 유능 20.8%, 남성 유능 12.5%). 생애 경험이 충분히 축적된 영역(교육·입시·취업)에서 이들은 또래 여자들에게 거의 주눅 들어 있다.

 

교육과정에서 남자들이 또래 여자에 밀린다는 관찰은 역사가 길다. 남자아이의 부모는 내신 성적에서 밀릴 것을 걱정해 남녀공학을 기피한다. 2018학년도 수능 성적을 남녀로 나눠 분석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자료를 보면, 국어·수학(영어에서 여학생 성적이 높았다. 수학()는 여학생 평균이 0.1점 높아서 사실상 같았다.

 

<2>는 짝짓기 시장에서 이들이 겪은 경험을 짐작하게 해준다. “한국은 연애·결혼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이기적으로 군다여자가 남자에게 이기적으로 군다라는 문장을 각각 제시하고, 동의 여부를 물었다. 그 결과,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남자의 이기심은 유난히 낮게 평가했고(8.7%), 여자의 이기심은 단연 높게 평가했다(65.2%). 데이트 경험에서 상대방 성별이 더 이기적이고 자신들이 더 헌신적이라고 믿는 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들은 격차가 눈에 띄게 크다.

 

 

두 문항을 조합해 짝짓기 상처 지수를 만들어보자. “상대방 성별이 이기적이다응답률에서 내 성별이 이기적이다응답률을 빼보았다. 차이를 한눈에 비교하기 좋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의 짝짓기 상처 지수56.5. 그 외 20대 남자는 19.3이다. 30세 이상 남자는 13.4. 20대 여자들은 25.2(남자 이기적 57.3-여자 이기적 32.1). 30세 이상 여자는 18.7(남자 이기적 60.8-여자 이기적 42.1)이다.

 

어떤 세대·성별보다도,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짝짓기 시장에서 가장 상처받는 집단이다. 이들은 두 질문 모두에서 단연 튀는데, 자기 성별은 가장 이타적으로, 상대방 성별은 가장 이기적으로 평가했다. , 이들은 연애·결혼 시장에서 상대에 대한 불신과 자기 긍정 둘 다 가장 강하다. 이러면 연애·결혼 시장에서 불만을 갖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이들의 유난한 평가가 실제 현실대로라면, 기성세대 여자보다 지금 젊은 세대 여자가 더 이기적이 되고, 동시에 기성세대 남자보다 지금 젊은 세대 남자가 더 이타적이 되는 과정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의미다. 이들은 남자가 이기적으로 군다에 동의하는 비율도 기성세대 남자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들의 유난한 평가가 다른 세대·성별 대비 유난한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결과는 별다른 가정을 도입할 것 없이 잘 설명된다. 이들의 짝짓기 상처 지수가 현실을 반영한 결과인지 피해의식인지는 우리 조사만으로 확증하기 어렵다.

 

통계를 분석해본 정한울 연구위원은 학창 시절 경험과 연애·결혼 시장의 경험이 반페미니즘 정체성을 형성한 후보들 중 하나라고 지목했다. 둘은 삶의 경험에서 20대 남성의 피해의식이 축적될 유력한 경로다. 이 피해의식을 민감하게 느끼는 남자일수록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맥락이 제거된 공정의 등장

 

우리는 한 팀으로 일을 했을 때, 기여한 만큼 차등적으로 보상을 받는 것과 공평하게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공정한가?”라고 물었다(<3-1>). 무엇을 공정하다고 판단하는지, 공정에 대한 감각을 물은 것이다. 통계분석 결과 이 문항이 반페미니즘 정체성과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나왔다.

 

 

604호와 제605호 기사에서 우리는 공정을 중시하는 감각20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 세대·성별에 공통된 속성이라는 사실을 보였다. 그런데 무엇이 공정인가?”라고 물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20대 남자는 차등 보상을 더 선호했다. 30세 이상 남자는 20대보다는 공평 보상쪽으로 더 가서 두 응답이 팽팽했다. 우리의 주요 분석 대상은 아니지만, 30세 이상 남자 중에서도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분명하게 차등 보상을 선호(61.3%)했다.

 

이 질문에는 20대 여자도 65.1%가 차등 보상을 선호했다. 30세 이상 여자는 공평 보상으로 쏠렸다(53.5%). 무엇이 공정한지를 판단하는 감각은 성별보다는 세대로 갈린다. 20대는 한 팀으로 수행한 프로젝트에서도 개인별 성과 평가를 선호한다. 공동책임의 원리는 20대에서 남녀 불문 인기가 없다.

 

개인 책임, 개인 보상의 원리가 남자라는 성별과 만나면 재미있는 화학작용이 벌어진다. 개인 책임, 개인 보상을 선호하는 성향은, 남자들 중 반페미니즘 정체성을 예측하는 지표로도 잘 작동한다. 왜 그런가? <3-2>부터 <3-4>까지를 보면 단서가 있다. 우리는 취업 시 여성 할당 정책에 동의하는지를 물었다(<3-2>).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100%가 동의하지 않는다. “전혀 동의 않는다는 강경 응답만 91.3%. 이들에게 취업 시 여성할당제는 불의와 불공정의 상징이다.

 

 

반전이 있다.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여성 지원과 보상 정책에 동의하는지도 물어봤다(<3-3>).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이 단호한 여성혐오 집단이라면, 여성을 위하는 정책이라면 덮어놓고 반대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문장에는 정체성 집단 중 64%가 동의했다.

 

<3-3>은 이 시리즈 전체에서도 손꼽히게 튀는 그래프다. 여성 우대 문제만 나오면 전체 여론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던 정체성 집단이, 여기서는 다른 남자들의 여론과 처음으로 겹쳤다. 이들의 동력이 덮어놓고 여성혐오라는 가설에는 <3-3>이 중요한 반례가 된다. 이들은 맹목적이지 않다. 기준을 세워 상황에 따라 판단한다. 다만 그 기준이 보통의 남자들과 다르다.

 

 

다른 기준이란 무엇인가. 핵심은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가로 갈린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여성의 잘못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이것은 여성이 사회적·생물학적으로 진 짐이다. 지원과 보상은 정당하다. 반대로 책임이 자기 안에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감당할 일이다. 이럴 때는 국가가 뭔가를 보장해준다면 불공정하다.

 

이런 구분, 책임 소재가 그 사람 내부인지 외부 환경인지를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대부분 사람들이 갖고 있다. 사회심리학은 이런 걸 귀인이라고 부른다. 원인이 내부와 외부 중 어디로 귀착되느냐를 따진다는 의미다. 내부면 본인 책임이다. 외부면 도와야 한다. 아주 간명하고 알기 쉬운 아이디어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의 그래프조차 보통의 남자들과 겹치게 만들 만큼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부냐 외부냐를 가르는 경계선을 판단하는 건 쉬워 보이지만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의 행동을 설명할 때 외부 환경 요인을 과소평가하고, 그 사람의 내재적 특성 때문이라고 과하게 믿는 경향이 있다. 사회심리학에는 기본 귀인 오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개념이다. 세계적인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최근작 <불평등 트라우마>에서 이렇게 썼다. “환경의 힘을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해서 가난하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대표적인 기본 귀인 오류다. 이것이 바로 편견의 정의라고 볼 수 있다.”

 

내부 원인이면 본인이 책임지고, 외부 원인이면 돕는데, 그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가혹하게 잡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다시 말해, 환경과 사회구조의 힘을 고려해주지 않고 그 사람의 내재적 특성 탓(“게으르고 멍청해서 가난해”)을 하는 경향이 강해지면 어떻게 될까. 명백히 외부에 해당하는 극소수 사례(육아 경력단절)를 제외하면, 모든 문제가 내부로 간주된다. 그러면 모든 우대정책이 부당하고 불의한 것이 된다.

 

일리노이 대학 심리학과의 린다 스킷카 등 연구자들은 2002년 논문(‘Disposit-ions, Scripts, or Motivated Correction?’)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보고한다.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 환자의 치료비를 공공이 도와야 할까? 여기에도 귀인 문제가 개입한다. 보수 성향 응답자들은 그 환자가 성폭행이나 수혈 등 외부 원인으로 감염이 되었을 때는 돕는 데 찬성하지만, 동성애 등 자신의 선택으로 감염되었을 때는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진보적인 응답자들은 자신의 책임으로 감염된 환자들도 도와야 한다는 응답이 보수적 응답자보다 많았다. AIDS에 걸리고 싶어서 성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 환경과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 외부귀인을 넓게 잡아주는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그다음이다. 실험자들은 응답자에게 실험실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높낮이를 판단하는 과제를 주었다. 질문과 상관없는 일에 신경을 쓰도록 주의를 분산시킨 것이다. 응답자들은 그 과제를 하면서 동시에 같은 질문에 답을 했다. 그러자 보수·진보 양쪽 다 공공의 치료비 보조에 반대 응답이 올라갔다. 더 의미심장하게도, 진보적 응답자들의 반대 응답이 더 많이 올라서 보수파와 차이가 없어졌다. 공정의 문제를 판단할 때 다른 과제로 인지 부담을 주면, 응답자들이 덜 섬세해지고 더 단호해진다.

 

게임이론과 진화경제학 연구자인 최정규 교수(경북대 경제학과)는 이 실험을 기자에게 소개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경제학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가 18세기부터 강조한 얘기가 있다. 공정성을 판단하는 건 앞뒤 맥락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하는 작업이다. 역지사지도 해보고, 상대 입장에 서보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상상해야 한다. 이게 원래 뇌에 부담이 큰 작업이다. 그래서 다른 과제로 인지 부담을 주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 부담을 덜려면, 섬세함을 덜어내고 일관되게 가혹한 판단을 하면 된다.

 

이제 <3-4>를 보자. “여성 고위직 비율 확대 정책에 동의하는지를 물었다. 우리가 알던 익숙한 그래프 형태로 돌아간다. 한국 사회에서 고위직 여성이 부족한 이유는 여성 내부에 있나 외부에 있나? “외부”, 그러니까 성차별과 유리천장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국가 정책으로 여성 고위직을 늘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30세 이상 남자들은 약간 동의가 가장 많이 나온다(표에는 없지만, 여자들은 단호하게 동의한다). “내부”, 그러니까 여성 자신의 능력이 이유라고 믿는 사람들은 국가 개입이 불공정하다고 믿는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동의 안 함” 79.2%로 단연 튄다.

 

 

이제 <3-2><3-3>이 다른 이유도 분명해진다. 취업에 실패하는 이유는 여성 내부에 있다고 믿는 남자들이 단연 많다. 그래서 <3-2>는 왼쪽으로 쏠린다. 경력단절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성 외부에 있다고 남자들도 믿는다. 그래서 <3-3>은 오른쪽으로 쏠린다. <3-4>는 둘의 사이에 있다. 여성 고위직이 부족한 이유가 외부에 있다고 믿는 30세 이상 남자는 오른쪽으로, 내부라고 믿는 20대 남자는 왼쪽으로 엇갈린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여성에게 덮어놓고 가혹하다기보다는, 도움을 받을 자격에 가혹하다. 그러니까 책임이 내부인지 외부인지를 결정하는 경계선이 깐깐하다는 점에서 분명하고 지속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3-1>은 이런 깐깐함이 20대들에게 남녀 불문 나타난다고 암시한다. 20대 여자도 기성세대 여자와는 다른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런데 남자는 페미니즘이라는 주적, 경계를 깐깐하게 긋는 태도를 켜기 좋은 주적이 있다. 먼저 폭발하기 좋은 환경을 만났다.

 

조사 결과를 접한 임동균 교수(서울대 사회학과)는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서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현재 20~40세를 대략 아우르는 이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공정성과 약자 보호다. 그런데 이게 공정성을 기성세대보다 더 강조한다기보다는, 그거 말고 나머지 사회규범들, 암묵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던 규범들이 줄줄이 해체되어서 그렇다. 공정성 외의 나머지 가치 잣대가 전부 흩어지는 바람에 공정성 잣대 하나가 증폭된다. 경계선(귀인 판단)이 가혹해지는 경향은 밀레니얼의 이런 세대적 특성도 있고, 20대가 복잡한 사회생활 경험이 많지 않아서 생기는 연령효과도 있을 것이다. 둘 중 어느 힘이 더 주된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관찰해볼 문제다.”

 

사람들의 능력이나 노력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이 알고 보면 사회구조와 환경의 영향일 수 있다. 지능, 학습능력, 사회성 등 명백히 타고나는 것으로 보이는 능력들조차 그렇다. 그런 맥락을 무시하고 웬만한 귀인을 다 내부로 간주해버리는 건 쉽고 편하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해서 그렇다라고 간주하는 데는 섬세함이 필요 없다. 공정성이라는 단일 잣대만 살아남으면 이 경계선이 유난히 가혹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납작한 공정, ‘맥락이 제거된 공정을 마주한다. 맥락도 구조도 증발한 채, 사실의 조각 몇 개가 팩트 폭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온라인 공간에서 끊임없이 복제된다. 그래서 팩트 폭행은 우리 시대를 상징할 만한 유행어다. 이 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맥락이 제거된 공정의 시대를 증언한다. “역지사지도 해보고 상대 입장에 서보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상상하는, 앞뒤 맥락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작업이 설 자리가 사라진다.

 

병목 사회의 딜레마

 

통계분석은 또 한 번 의외의 문항과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을 엮는다. 경쟁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4-2>를 보자. “경쟁의 승자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문장을 주고 찬반 의견을 물었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자 집단은 87%가 찬성해서 단연 높다. , 경쟁 원리를 긍정하고 수용하는 성향이 강하다. 여기에 찬성하는 비율이 반페미니즘 정체성과 관계가 있다고 분석됐다.

 

 

그런데 <4-1>은 의외의 결과를 보여준다. 경쟁 원리를 수용하는 성향이 높은 정체성 집단이, 경쟁을 활력소가 아니라 피로의 근원으로 보는 성향도 가장 높다. 이런 묘한 관계는 경쟁에 대한 설문 전반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등장한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경쟁이 삶의 질을 악화시킨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경쟁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한국에서 경쟁의 결과는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한다고 본다. 그런데도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운보다는 실력 문제라고 본다. 이런 모순은 정체성 집단이 가장 뚜렷하기는 하지만, 다른 세대·성별도 비슷하다. , 사람들은 경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과도하게 몰입한다.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왜 이런 모순적인 태도가 나올까. 둘째, 이게 20대 남자 현상과 무슨 상관일까.

       

두 질문에 동시에 답해줄 수 있는 논리를 정치철학자 조지프 피시킨이 제공한다. <병목 사회>에서 피시킨은, ‘전사 사회라는 비유를 든다. 일종의 원시 부족사회인 전사 사회에서, 좋은 직업은 오로지 전사 하나뿐이다. 전사가 되어야만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 아이가 성인이 되는 해에 치르는 전사 시험은 완벽하게 공정하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공정할까? 피시킨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는 기회 자체의 종류가 지나치게 제약되어 있다. 전사가 아닌 다른 재능은 쓸모없고, 아이들의 소망과 목표는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전사가 되는 것 하나로 강요된다.

 

전사 시험은, 그것이 아무리 공정하다 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과몰입시킨다. 경쟁은 과열되고, 자원이 낭비되고, 원하지 않는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지원자들은 전사 시험을 통과하는 데 집중하고, 시험의 가치를 기를 쓰고 긍정한다. 그게 유일한 통로라서다. 이것이 피시킨이 병목이라고 부르는 원리다. 이런 사회는 구조적으로 공정할 수 없다. 통과하는 병목이 아무리 공정하게 관리되더라도, 병목 이전과 병목 이후를, 섬세한 의미로 공정하게 만들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사 사회는 지적 유희로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시험 하나로 삶의 경로가 결정 나는 나라는 현 시대에도 많다. 피시킨은 이걸 중요한 시험 사회라고 부른다. 전사 사회의 현실판이다.

 

피시킨의 병목 사회 모델은 우리 조사가 보여주는 모순, 경쟁에 대한 긍정과 피로가 동시에 일어나는 모순을 병목과 과몰입으로 잘 설명해준다. 중요한 시험 사회에서는, 병목에 대한 몰입·긍정·추종과 피로·과부하가 동시에 나타난다. 한국 사회는 고도성장기 내내 중요한 시험 사회였다. 대입 시험, 사법고시 등이 중요한 시험의 상징으로 작동했다. 경쟁에 대한 태도에 세대별 차이가 크지 않은 이유가 이것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 중요한 시험 사회를 거쳐간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경쟁에 강한 몰입감을 보여준다.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 가치를 훼손하거나 우회하려 든다고 간주되는 어떤 시도든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것도 자연스럽다.

<5-1>을 보자. “한국에서는 한번 실패하면 재기가 어렵다라는 문장에,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이 두드러지게 강한 동의를 표했다. 한국 사회의 구조를 강한 병목 구조로 본다는 징후다. 이런 조건에서, 경쟁의 가치에 개입하려는 외부의 시도는 그게 무엇이든 핵심 가치를 훼손하는 시도다. 그걸 흔들려는 시도는 대단한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바로 그런 기획으로 간주된다.

 

 

세대 계약이 무너지다

 

604‘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기사가 온라인에 공개됐을 때, 포털사이트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 중 하나는 이렇다. “구시대 남자가 얻은 기득권을 젊은 세대는 경쟁해서 얻어야 하니 상대적으로 불공평하다고 느끼겠지. 구시대 남자들이 안 하던 의무는 늘고 권리는 줄어들었다고 느끼는 거야.” 우리의 마지막 주인공인 세대론이다.

 

세대론은 반페미니즘 정체성을 작동시키는 중요한 변수다. 20대 남자들은 부모 세대에서 여성 차별이 심각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조차도 79.2%가 이에 동의한다. 기성세대 남자는 권리를 누렸다. 하지만 20대는 이중으로 권리를 박탈당한다고 이들은 느낀다. 남자의 기득권과 고도성장 세대의 기득권이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은 세대 계약의 붕괴로 드러난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은, “나는 부모 세대보다 기회를 더 많이 얻을 것이다라는 문장에 73.9%그렇지 않다라고 답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의 기회를 열어주려 하나 빼앗으려 하나?”라는 질문에는, 69.6%빼앗으려 한다라고 답했다.

 

세대 계약을 불신할수록 반페미니즘 정체성도 강하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설문이 <5-2>. “내가 낸 국민연금은 어차피 못 돌려받는다라는 문장에, 반페미니즘 정체성 집단의 82.6%가 동의했다. 이들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기회를 빼앗고 있고, 자신들은 기성세대를 부양하나 그것을 후속 세대에게 돌려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구구조가 감소 추세로 들어선다는 사실이 이 공포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해서 이중의 착취가 발생한다. 기성세대에 의한 착취와 여성에 의한 착취가 동시에 쏟아진다고 느끼는 이들이 강고한 정체성 집단으로 뭉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써왔던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은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부족하다. ‘젊은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이라고 써야 제대로 된 표현이다. 이 이중 마이너리티라는 현실에서 기성세대 남성의 점잖은 훈계는 먹혀들지 않는다. 이것은 남녀 갈등인 동시에 세대 갈등이기도 한데, 이 전선에서 기성세대 남성은 애초에 이들의 편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나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한 바퀴를 돌았다. 우리 조사는 반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성의 특수성을 몇 가지로 추려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들은 또래 여자에게 위축되거나 피해의식을 가졌을 개연성이 있다. ··고교 교육과정이나 입시 경쟁에서, 또 데이트 시장에서 피해의 경험을 공유한다. 사실이든 허위든 이것이 정체성의 원재료일 수 있다.

 

이들은 공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특별하지 않다. 이들은 공정 그 자체 외에 다른 잣대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렇게 해서 맥락이 제거된 공정이 시대정신으로 등장한다. 이 태도가 생물학적 남성 성별과 만나면 중요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이 조합은 여성에게 덮어놓고 가혹하다기보다는, ‘도움을 받을 자격에 유난히 가혹하다.

 

연합뉴스 129일 오전 경남 창원시 해군교육사령부 교육훈련대에서 훈련병이 목봉체조를 하고 있다.

 

경쟁을 피곤해하면서도, 경쟁의 가치를 건드리는 시도에 크게 반발한다. 병목사회에서 병목을 통과하는 경쟁은 특별히 신성하다. 20여 년의 생애경험에서 피해자는 오히려 자신이지만 특별대우를 요구할 생각은 없다. 반페미니즘 정체성 20대 남성 집단은, 대입 남성가산점 제도에 83.4%가 반대했다. 그런데 피해자인 자신에게 배려는커녕 기성세대는 세대 계약 붕괴를 안겨주고, 권력은 특권을 요구하는 여자들 편이다.

 

이런 세계에서,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둔 호혜적 관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외상 거래, 그러니까 어떤 영역에서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나중에 다른 형태로 돌려받는 거래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기성세대 남성은 군 복무라는 성차별을 감내했지만 사회에 진출하면 그걸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았다. 사회는 군대 원리로 작동했고, 군필자는 우대받았다. 바로 이런 외상거래를 이제는 신뢰할 수 없다. 바로바로 손익계산을 맞추는 방법밖에 없다. 맥락이 제거된 공정이라는 잣대는, 이 즉시 현금거래의 원리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도달한, 20대 남성 마이너리티의 마음이다.

 

이 조사는 가설부터 만들어나가는 탐색적인 조사였다. 여기서 제안된 이야기는 한 차례 조사에서 추려낸 가능성의 집합일 뿐이다. 가설을 검증하려면 더 정교하고 목표를 좁힌 설문지와, 직접 인터뷰 등 다른 방식의 접근방법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긴 이야기는, 아마도 여러 군데가 틀렸다고 결론 날 것이다. 탐색적 조사에서 뽑아낸 가능성의 이야기가 그대로 정답인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생산적으로, 반증 가능하게 틀리려고 노력했다. 이제 무엇이 틀린 이야기인지를 검증하기가 이전보다 쉬워졌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공공기관 연봉킹예탁결제원 작년 직원 평균 11160만 원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공기관 직원의 지난해 평균 연봉이 약 6798만 원으로 집계됐다. 직원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곳은 한국예탁결제원으로, 1인당 11160만 원을 받았다. 기관장 가운데서는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이 지난해 연봉 41715만 원으로 가장 높은 보수를 받았다.

 

KAIST·울산과기원 뒤 이어

기관장 1위는 투자공사 사장

 

30일 기획재정부의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인 알리오에 따르면 지난해 361개 공공기관(부설기관 포함)의 정규직 직원 평균보수는 전년보다 1.1% 늘어난 6798만 원으로 집계됐다. 한국예탁결제원의 정규직 평균보수가 11160만 원으로 첫 손에 꼽혔다. 2위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1799만 원)이었으며 울산과학기술원(UNIST·1765만 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1752만 원) 등 박사급 인력이 포진한 기타공공기관의 연봉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2017년 연봉 1위를 차지했던 KIC(1595만 원)5위로 순위가 밀려났다.

 

이외에도 한국산업은행(1548만 원), 한국수출입은행(1239만 원), 재료연구소(1192만 원), 광주과학기술원(1161만 원), 중소기업은행(1155만 원) 등이 억대 연봉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에는 평균연봉이 1억 원을 넘는 공공기관이 총 6곳이었지만 지난해에는 10곳으로 늘었다.

 

공공기관을 이끄는 기관장의 지난해 평균 연봉은 16888만 원으로 집계됐다. KIC 사장이 지난해 41715만 원을 받아 전년에 이어 연봉킹자리를 지켰다. 이어 한국예탁결제원 사장(39944만 원), 중소기업은행장(39726만 원), 한국산업은행장과 수출입은행장(각각 37332만 원) 순이었다.

 

이외에도 국립암센터(35460만 원), 기초과학연구원(IBS·31747만 원), KAIST(29118만 원),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28939만 원) 등 기관장이 상위권에 포진했다.

 

연봉이 1억 원에도 못 미치는 공공기관장도 있다.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은 3600만 원, 국방전직교육원장은 6136만 원,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장은 6480만 원을 수령했다.

송현수 기자 songh@busan.com


1인 시위마저 돈으로 사는 사회

신발 수선을 맡기러 아웃렛 매장에 가는 길이었다. 매장 근처에 주차를 하려고 주위를 돌다가 젊은 사람들이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눈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핸드마이크를 쥐고 피켓을 들었고, 몇 발자국 떨어져 남녀 두어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피켓에는 갑질 근절’ ‘비리 규탄같은 구호 몇 개가 적혔을 뿐 그 내용만으로는 이들이 누군지, 어떤 이유로 1인 시위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붙어 있는 현수막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신발을 맡기고 차를 돌려 나오는데 아직도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들을 보았다. 호기심이 발동한 건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장난을 치고 잡담을 하며 삐딱하게 건성으로 서 있는 모습이 일반적으로 무겁고 진지하기 마련인 시위 모습과 너무 달랐다. 결국 차를 한쪽에 세우고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1인 시위 알바 하는 겁니다

어떤 이유로 1인 시위를 하는 거예요?” “, . 저희는 갑질 근절과 비리 규탄을 위해 1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갑질 내용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피켓에 적혀 있는 것만 봐서는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어서요.이런 질문이 낯설었던지 근처에 서 있던 동료에게 손짓을 했다. 이곳 아웃렛 매장 안에 커피숍이 있는데 매장에서 갑질을 해서 1인 시위를 합니다.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알바 하는 거예요?” “, 저희는 1인 시위 알바 하는 겁니다.

 

윤현지

 

1인 시위 알바라고?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시간당 2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고객이 붐비는 주말 점심시간부터 저녁 시간까지 6시간을 했는데, 이제는 가격이 깎여 시간당 1만원을 받으며 6시간을 한다고 했다. 집회 신고도 낸다고 했고, 용역 업체를 통한 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일을 구했다고도 덧붙였다.

 

커피숍 사장이 바쁘면 대신 1인 시위를 맡길 수도 있겠다 싶다가도, 사람과 마네킹의 차이가 뭔가 싶었다. 주유소 앞에서 춤추는 바람 풍선이 생각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시위에 알바를 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1인 시위라는 게 그저 피켓을 들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나. 대신 든 저 피켓에 묻어 있는 억울함은 무엇일까. 보는 이들이 동의할 만한 부당함의 근거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노동운동 언저리에서 근 20년을 함께한 사람으로서 무력감마저 들었다. 도대체 시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항의와 저항의 마지막 수단마저, 억울함의 진정성마저 돈 몇 푼으로 대신 할 수 있는 이 진절머리 나는 효율과 편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청년들의 일자리가 그만큼 모자란다는 것일까. 볕 좋은 봄날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악착같이 싸우는 동료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나는, 감정이입이 과했나 싶을 만큼 그 장면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해고된 기간에 1인 시위를 많이 했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1인 시위가 힘들었다. 출퇴근길에 스쳐 지나가는 옛 동료들 속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면 유령이 된 것처럼 비참했다. 나눠주는 홍보물을 받지 않을 때는 야속하기보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저 서 있기만 하는 것처럼 보여도 무수히 많은 생각이 흐르기 일쑤다. 많은 경우 1인 시위는 절박함에서 비롯된다. 낡은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이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목소리도 높인다. 어쩌면 사소한 일일지도 모를 1인 시위 아르바이트가 특별히 더 마음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전히 몸을 던져 싸우는 이들과 그들과 기꺼이 연대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얼마든지 사람을 사서 시위를 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시위도 돈 몇 푼으로 교환되는 가치가 되었다. 인도 속담에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저항까지 대신 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창근 (쌍용자동차 노동자)


심한 우울감에 빠진 중고생사이버 세상에 매몰된 20

 

여가부·통계청 ‘2019년 청소년 통계

청소년 넷 중 한명꼴고학년일수록 우울

고민상담은 친구 49%·스스로 해결 14%

도움받을 사람 없다11년째 자살 1

20대 인터넷 소비량, 인생의 7분의1 달해

일주일에 평균 24시간5년새 3.9시간

 

중고생 4명 중 1명은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의 슬픔이나 절망 등 우울감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11년째 자살이었으며, 10명 중 1명은 낙심하거나 우울해서 이야기 상대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소통은 주로 인터넷으로 한다. 10대 청소년은 일주일에 평균 17시간 48분을, 20대는 24시간 12분을 인터넷 이용하는 데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가 사이버 세상에서 소비하는 시간이 삶의 7분의1이나 된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1일 발표한 ‘2019년 청소년 통계는 스트레스와 우울, 가족과의 갈등, 사회적 고립으로 고통받는 청소년들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 통계는 9~24세 청소년 인구 8765000명을 대상으로 2017~2018년 작성된 각종 통계를 재집계한 자료로, 매년 발표하고 있다.

 

우울감은 남녀 모두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았다. 중학생의 우울감 경험률은 25.2%, 고등학생은 28.7%. 성별로는 여학생의 우울감 경험률이 33.6%, 남학생(21.1%)보다 12.5% 포인트 높았다. 이는 ‘2018년 지역사회 건강 조사에서 나타난 19세 이상 성인의 우울감 경험률(5.0%)보다 5배 이상 높은 수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청소년은 성인도 견디기 어려운 이런 우울감을 겪을 때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남자 청소년일수록 강했다. 남자 청소년의 13.8%, 여자 청소년의 7.6%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연령별로는 한창 예민한 시기인 1318세 청소년(11.2%)1924세 청소년(10.3%)보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없다고 답한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꽃다운 나이에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청소년이 11년째 줄지 않고 있다. 20179~24세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는 고의적 자해(자살), 인구 10만명당 7.7명이었다. 2006년까진 운수 사고가 청소년 사망 원인 1위였으나 2007년부터 자살이 부동의 1위가 됐다. 청소년이 고민을 상담하는 대상으로는 친구·동료49.1%로 가장 많았고, ‘부모’(28.0%), ‘스스로 해결’(13.8%) 순이었다. 청소년의 29.6%는 가족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낮았다. 특히 최근 1년간 가출을 경험한 학생은 2.6%, 10명 중 7명이 부모를 비롯해 가족과의 갈등으로 가출했다.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낀 청소년은 24.8%에 그쳤고, 불안 요인으로 30.1%가 범죄 발생을 꼽았다. 특이한 점은 남자 청소년은 국가 안보’(21.8%)가 가장 높은 불안 요인이라고 인식한 반면, 여자 청소년은 범죄 발생’(42.5%)를 주된 사회 불안 요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2017년 기준 18세 이하 소년 범죄자는 72700여명으로 전체 범죄자의 3.9%를 차지했다. 전년 대비 4.3% 감소했지만 흉악 범죄와 폭력 범죄는 오히려 각각 0.4% 포인트, 3.3% 포인트 증가했다.

 

한 주에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간은 해마다 증가세다. 10대의 인터넷 이용 시간은 2013(14.1시간) 이후 5년 만에 3.7시간 늘었고, 20대는 3.9시간 증가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129주년 노동절 재벌·한국당·수구언론 동맹 끊겠다



199540만명으로 출발한 민주노총 보수언론 악선전 속에 100만명 확대

민주노총은 1일 오후 2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129주년 세계노동절 대회를 열었다. 이날 노동절 대회는 서울시청앞 광장을 비롯해 대전 광주, 전남 대구 경북 부산 제주 등 전국 13곳에서 열렸다.



도시재생 전문가들의 8가지 '헛소리'

[기고] 도시재생 사업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지 않는다?

도시재생 사업은 일종의 '도시개발 사업'이다(도시재생 사업이 '도시파괴 사업' 또는 '도시낙후 사업'은 아닐 것이다). 한 도시가 개발되면 그곳의 지가 및 임대료가 상승한다. 이는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상식이다.

 

그리고 임대료가 상승할 경우, 그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세입자는 기존 터전에서 내쫓긴다. 우린 그러한 세입자 내쫓김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은 (보통) 다음의 식을 따른다.

 

도시가 개발된다. → ②임대료가 오른다. → ③세입자가 내쫓긴다.

 

이는 요즘 우리가 흔히 들어 아는 (일반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소위 '도시재생판'에서 전문가로 취급되는 이들 대부분은 '이런 아주 쉽고 타당한 이야기'를 대중에게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도시재생 사업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지 않는다." 등의 '헛소리'를 생산·유통하며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축소·왜곡한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이해관계 때문이다. 도시재생 전문가들은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직·간접적인 이익을 얻는 존재다(: 관련 업체 운영 및 취업 등). 그런 그들이 도시재생 사업의 대표적 부작용인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제대로' 건드린다?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본 칼럼의 목적은 단 하나다. 바로, 그들이 생산·유통하는 헛소리가 어째서 헛소리인지를 대중에게 고발하는 것이다. 8개의 헛소리를 수집·분석했다. 갈 길이 멀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프레시안(최형락)

 

도시재생 사업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지 않는다?

금방 다룬 헛소리부터 살핀다. "도시재생 사업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헛소리는 '허접한 고전'이다. 그 때문에 진작 격파되었다.

 

누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세상에 검은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주장을 기각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사례가 필요할까? 100? 1000? 아니다. '절대적이고 확실한' 단 하나의 사례면 충분하다. 검은 고양이를 한 마리 찾으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시재생 사업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필요한 사례도 단 하나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사례는 인터넷 뉴스 검색 등을 통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도시재생 사업은 젠트리피케이션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헛소리도 있다. "도시재생 사업은 젠트리피케이션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첫 번째 헛소리가 무너지자마자 나온 헛소리다. 첫 번째 헛소리에 '거의'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최악의 헛소리다. 삶터에서 내쫓긴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안다면 절대로 할 수가 없는 말이다. 예컨대 우리는 용산 참사를 두고 "6명밖에 죽지 않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해당 사건에서 중요한 점은 사망자의 숫자 6이 아니라 용산참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삶의 터전에서 내쫓기는 이들에 대해 논하며 '거의 내쫓기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리 약속 하나 하자. 이러한 헛소리를 하는 전문가를 만나면 꼭 혼쭐을 내주자.

 

젠트리피케이션은 (서울 주요 상권 등) ''한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 번째 헛소리를 살핀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서울 주요 상권 등) ''한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헛소리는 다음의 주장과 연결된다. "''하지 않은 여러분의 도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역시 헛소리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가령 내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은 전혀 핫한 곳이 아니다. 또한 아직 언론에 구로동의 젠트리피케이션 사례가 보도된 바는 없다. 그럼, 구로동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세입자 내쫓김 문제에 관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내게 찾아와 '쫓겨날 위기에 처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 한 사람 중에 '구로동 세입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구로동 세입자들도 핫한 다른 동네의 세입자들이 내쫓기는 모습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쫓기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돈 때문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건물주가 다음의 생각 등을 행동에 옮기면 그게 곧 젠트리피케이션이 된다. '내가 그간 방을 너무 싸게 내놓았던 것 같다. 임대료를 올리자!', '세입자를 내쫓고 내가 직접 가게를 운영하자!' 그리고 다음의 명제는 진실이다. "돈을 싫어하는 건물주만 모인 지역은 없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가치 중립적 현상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가치 중립적 현상이다." 네 번째 헛소리다. 이 헛소리를 하는 전문가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지가상승 및 생활환경 개선 등의 긍정적 측면(이익)''세입자 내쫓김 문제의 부정적 측면(손해)'으로 구분한다. 그 후, 그 두 측면이 길항작용(拮抗作用)을 하기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현상이 결국에는 "나쁘다"라고 평가할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현상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니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이는 '책상에서 만든 헛소리'. 이상의 말이 ''이 되려면, 젠트리피케이션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의 대상이 되는 그룹이 같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젠트리피케이션의 긍정적인 효과는 건물주가 누리지만, 부정적인 효과는 세입자가 짊어진다.

 

한편, 본 헛소리는 '훌륭한 헛소리'이기도 하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의 본질이 계급과 정치에 있음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방금 살핀 것처럼 젠트리피케이션은 건물주에게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세입자에게는 '나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기 위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내쫓기는 세입자의 편인가? 돈을 버는 건물주의 편인가?' 난 전자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나쁘다.

 

'상생협약'이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것이다?

다섯 번째 헛소리다. "'상생협약'이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것이다." '임대료 인상을 자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건물주와 세입자 사이의 약속을 상생협약이라고 한다. 현재 정부가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 대응책 중 하나로 (열심히) '밀고 있는 사업'이다.

 

그런데 잘 알려진 것처럼 상생협약에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 건물주가 약속을 어겨도 달리 제재할 방도가 없다. 상생협약이 법적 구속력을 갖출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정부가 '건물주와 세입자 간의 상생협약 그 자체'를 강제할 방도가 없어서다. 결국 정부가 건물주를 어르고 달랜 후에야 겨우 체결되는 것이 상행협약이다. 그런 상생협약 안에 건물주 개개인을 법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장치를 설계한다 동화 같은 소리다.

 

'공공임대상가(주택)'가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것이다?

여섯 번째 헛소리다. "'공공임대상가(주택)가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것이다." 공공임대상가(주택)란 정부가 직접 상가(주택)를 매입하여 세를 놓는 '특수한 형태의 임대차'를 말한다. 상생협약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 대응책 중 하나로 (열심히) '미는 사업'이다.

 

결론부터 말한다. 젠트리피케이션에 지극히 국소적으로만 대응할 수 있는 사업(소위 '가성비'가 떨어지는 사업)이다. 다음 2가지 문제 때문이다.

 

첫째, 정부가 모든 지역의 모든 상가(주택)를 매입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심사를 통해 선발된 몇몇 세입자만 특정 공간에 입주하게 되므로 사업의 수혜자가 극히 적다.

 

둘째, 첫째의 이유로 해당 사업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임대차 시장은 공공임대상가(주택)를 일반 임대차 시장과는 관계없다고 취급한다. 따라서 주변 상가(주택)의 임대료를 낮추는 이른바 '견인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도시재생 사업,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

일곱 번째 헛소리다. "도시재생 사업,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 이건 건물주 편에 선 전문가들의 헛소리다. 건물주는 돈을 벌고, 세입자는 내쫓기는 지금의 도시재생 사업이라면, 건물주 입장에서는 도시재생 사업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 그러나 세입자 입장에서는 도시재생 사업을 (하는 것 보다는) 안 하는 게 낫다.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은 평가절하되었던 도시가 제 가치를 찾는 과정이다?

마지막 여덟 번째 헛소리다.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은 평가절하되었던 도시가 제 가치를 찾는 과정이다." 이건 그냥 '말 그대로의 헛소리'. 본 헛소리는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을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과 같은, 다시 말해 인간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 법칙에 의한 현상'처럼 묘사한다. , 해당 헛소리에 담긴 메시지는 아래와 같다.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피케이션 현상은 여러분이 절대로 대응할 수 없는(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이다. 그러니 맞서기를 포기하라.'

 

그러나 이는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재생 사업이라는 정책에 의한(그리고 각종 관련 법률에 의한), 다시 말해 인간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성질의 '규범적 법칙에 의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 대응법

끝으로,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응할 구체적인 방법을 안내한다. 우선 전국에서 진행 중인 모든 도시재생 사업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시점 이후로는 도시재생 사업에 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이 더는 발생하지 않는다. 도시재생 사업 잠시 멈춘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누가 죽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대다수의 전문가는 도시재생 사업이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군다. 혹세무민이다.

 

도시재생 사업을 멈춘 뒤에는 법률을 정비해야 한다. 그간 시행되었던 도시재생 사업을 전부 검토하여 어떤 법률 어떤 조문의 빈틈에 의해 사람들이 내쫓겼는지를 추적한 뒤, 그 빈틈을 수선·보완해야 한다(현재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등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구본기 생활경제연구소 소장 /프레시안


작년 산재사망자 971명으로 되레 늘어...정책 효과 무색

정부, 2022년 사망자 절반 감축 목표에도 오히려 증가

고용부 "제도개선 영향산재인정 사고사망 증가 원인"

건설업 사고 사망자 485전체의 절반 가량 차지해

올해 건설업 추락사고 방지에 행정역량 집중키로 해

소규모 사업장 중심 산재예방 순찰차 27대 운영키로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사망자가 전년 보다 7명 늘어난 971명으로 집계됐다. 정부가 2022년까지 산재 사고사망자를 절반 수준으로 줄인다는 목표로 국민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지만, 첫 해인 올해 사고사망자가 되레 늘어나면서 정책 효과가 무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8년 산업재해 발생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사망자 수는 971명으로 전년에 비해 0.07%(7) 증가했다. 건설업 사고사망자가 485명으로 절반을 차지했고, 제조업 217, 서비스업 154명 등으로 나타났다.

 

노동자 1만명 당 사고사망자 수 비율을 뜻하는 사고사망만인율(, 퍼미리아드)0.5120170.52에 비해 0.01포인트 낮아졌다. 전체 노동자 수가 20171856142명에서 지난해 19073438명으로 늘어난 영향으로 사망자 수는 늘었지만 사고사망만인율은 낮아진 것이다.

 

고용부는 제도개선에 따른 산재 인정 사고사망자 증가 영향으로 사고 사망자수가 전년에 비해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용부 임영미 산재예방정책과장은 "지난해 7월부터 미등록 건설업자 시공공사와 상시근로자 1인 미만 사업장까지 산재보험 적용이 확대되는 등 제도개선으로 산재로 인정되는 사고사망이 증가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중순 오는 2022년까지 자살·교통사고·산업안전 분야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기 위한 '국민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사고사망자 감축을 위한 예방활동 중심으로 사업을 개편한 바 있다.

지난해 전체 재해자 수도 102305(재해율 0.54%)으로 201789848명에 비해 13.9%(12457) 증가했다.이 중 사고재해자는 9832, 질병재해자는 11473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재해자가 증가한 것은 노동자들이 보다 쉽게 치료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한 데 따른 것이라고 고용부는 설명했다.

 

임 과장은 "고용부는 지난 20179월부터 차례로 추정의 원칙 도입, 사업주확인제도 폐지, 산재보험 적용사업장 확대 등을 도입해 왔는데 이에 따라 산재보상이 인정되는 재해자수가 증가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고용부는 올해 사고로 인한 사망자의 대폭 감소를 위해 건설업의 사고사망 예방에 행정역량을 집중키로 했다.

우선 산업안전보건법 전반에 대한 점검보다는 건설업에서의 추락재해 예방을 위해 위험유발요인에 초점을 맞춰 감독을 실시하기로 했다 또한 종전의 추락재해예방의 날(매월 14)을 추락집중단속주간(매월 14일이 속한 1주일)으로 확대 운영해 집중 감독을 실시하고, 집중단속 전 1개월 동안 사업장 자율안전조치 기간을 준 후 불시감독을 실시하기로 했다. 아울러 재래식 작업발판에 비해 안전성이 검증된 일체형 작업발판(시스템 비계) 사용확산을 유도하기로 했다.

 

소규모 현장 재해 예방을 위해 현재 시화·반월 공단에서 시범 운영하고 있는 산재예방 순찰차(패트롤카)’를 전국 27대로 확대하여 운영할 계획이다.

 

고용부는 이와 함께 소규모 현장 재해 예방을 위해 산재예방 순찰차(패트롤카)를 전국 27대로 확대해 운영하기로 했다. 산재예방 순찰차는 공사금액 3억원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35만개소)을 중심으로 운영해 안전의식을 높이고 순찰 중 안전조치가 안된 사업장을 적발하는 역할을 한다.

 

고용부 임서정 차관은 "내년도부터 원청 및 발주자 책임 강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되면 사망사고가 대폭 감축되는 전기가 될 것"이라며 "법 시행이전인 올해에는 산업안전감독관 등 한정된 행정인력을 감안하여 건설현장 추락사고 방지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감독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kangse@newsis.com



제2회 78 mbc 대학가요제-우산이 없네(메디칼사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