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탐방 대장정, 곳곳에 스러진 민초들을 기리며…
[프레시안 손호철의 발자국] 74. 마치며 : 역사의 토건화, 역사 지우기, 진실과 화해
한국근현대사 기행이 이제 끝났다. 이번 기행은 지난 해 봄 답사를 시작해 8월부터 <한국일보>에 주 1회씩 30회를 전면 연재한 뒤, 올해 3월부터 <프레시안>에 주 3회 연재해 1년 만에 총 103곳을 다루었다.
이번 답사는 오래 전부터 준비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재작년 정년 후 그람시,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 실패한 좌파혁명가들의 사상기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어 그람시 기행을 끝냈고, 작년 봄 로자 룩셈부르크 기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터져 나오면서 외국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되면서, 나이가 훨씬 들어 외국을 다니기 어려워질 때 하려고 생각했던 한국근현대사 기행을 앞당겨 하게 된 것이다.
기행을 마음먹은 지난 해 봄, 답사 대상 120여 곳을 선정하고 답사를 시작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1년 3개월 동안 3만5000Km를 달렸다. 서울~부산이 왕복 900Km이니 서울~부산 거리를 40번 왕복한 셈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 렌트카를 한 제주도, KTX를 타고 이동한 부산과 광주, 대중교통을 이용한 서울의 이동거리를 포함하면 이동거리는 훨씬 더 길었다.
특히 코로나 19의 방역지침을 지키며 답사를 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열심히 달려간 답사현장이 코로나19를 이유로 폐쇄돼 헛걸음을 쳐야 했던 곳이 여럿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거의 찾아오지 않고 바닷가의 청정 야외인 강화도 광성보나 넓은 야외 공간인 4‧19묘역 같은 곳을 코로나19를 이유로 폐쇄하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와 관료주의에 열을 받고 돌아와야 했다.
답사한 곳은 150여 곳이 되지만, 이중 핵심적인 곳을 골라 글을 썼다. 알려지지 않은 곳을 더 많이 소개하기 위해, 독립기념관, 탑골공원(3‧1운동), 전쟁기념관같이 잘 알려져 있고 '제도화된' 곳은 제외했다. 글로 싣지 못한 곳과 글을 실었지만 지면에 싣지 못한 많은 사진 자료들을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자료실을 만들 생각이다.
한국정치가 전공인 만큼 한국현대사를 나름 공부해 왔지만, 이번 답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우리의 국토 곳곳이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우리 근현대사의 많은 사건들이 패배와 학살의 역사였기 때문에 답사 내내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 같은 패배와 학살의 비극을 딛고, 아직도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성과를 얻어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기행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키려고 했다. 첫째, 현장성이다. 가능한 사건의 현장들을 모두 찾아가려고 노력했다. 현장을 다녀온 뒤 새로운 자료를 발견해 다시 찾아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사진이 중요한데 거의 답사를 마쳤을 때, 사진들을 보관한 외장 하드가 망가져버렸다. 사방을 뛰어다니며 복구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이미 다녀온 곳들을 눈물을 흘리며 다시 답사해야 했다.
둘째, 사실이다. 워낙 방대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모든 자료들을 수집해 소화할 수는 없었지만, 가능한 많은 사실을 수집해 읽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단행본 이외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온라인 자료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사실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다면, 이번 답사는 그 준비에 몇 배 더 많은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셋째, 관점이다. 나는 '진보학자'로서 진보적 시각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다루었다. 특히 진보적이되 보편적이고 글로벌한 시각에서 사물들을 보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다산 정약용도 단순히 조선조의 시각이 아니라 글로벌한 시각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혁명의 급진파 로베스피에르와 비교해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넷째, 서사다. 역사적 사실의 나열과 같은 전통적인 서술을 넘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현대적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북한에 협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수십 만 명을 학살한 보도연맹사건은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연결시켜, 전두환 정권의 북한의 금강산댐 수공 위협 발표는 을지문덕 장군의 유명한 수공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답사를 마치며, 몇 가지 느낀 바를 전하고 싶다. 첫째, 역사의 토건화다. 사람들은 일본을 정부의 재정을 통해 불필요한 도로를 만드는 등 토건공사로 경기를 부흥시키는 토건국가라고 비판한다. 이번 답사를 통해 느낀 것은 지나친 '역사의 토건화'다. 물론 기념물을 만들고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역사가 '토건화'되면 그 정신을 해치게 된다. 이 같은 토건화는 5‧18기념공원이 대표적인 예로써 윤상원 등 5‧18 희생자들을 가족들이 실어와 묻은, 현장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망월동 묘역을 놔두고 외형만을 강조한 거대한 묘역을 새로 그 옆에 조성한 바 있다.
이번에 답사를 해보니 가장 기념물이 많은 것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기념탑이었다. 시군 단위로 없는 곳이 거의 없었다. 몇 년 전 태백시는 6‧25전쟁 월남전 참전기념탑을 세우려 했는데 일부에서 이미 세워진 학도병 기념비도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며 반대의사를 밝혀 논란이 된 바 있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것은 동학 관련 기념물이다. 그동안 동학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만, 일부는 '지나친 토건화'로 오히려 그 정신이 훼손되지 않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다. 황토현 동학기념물은 기념관, 기념동상, 황토현 기념비 등 상당히 잘 만들어져 있었는데 완전히 그 지역을 들어엎어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동학군이 몰살당한 비극적 장소인 우금치조차 대형 주차장을 만든다고 큰 공사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정신 계승이지 거대한 조형물이 아니다.
▲ 대대적인 확장공사로 주변지역을 다 파해쳐 놓은 정읍 동학공원 일대 ⓒ손호철
▲ 우금치 동학공원 확장 공사 ⓒ손호철
둘째, '역사지우기'다. 다양한 형태로 역사적 유적들이 사라지고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지휘부가 있었던 전북 순창 회문산의 남부군 사령부 벙커다. 이명박 때 회문산 자유휴양림 공원을 만들면서 이를 철거하고 비슷한 모양의 벙커를 새로 지어 역사관을 만들었다.
▲ 남부군 본부 벙커를 부수고 지은 회문산 역사관 ⓒ손호철
전설적인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이 휴전 뒤인 1953년 9월 '반김일성파'라는 이유로 직위해제 당한 뒤 산을 내려오다가 사살된 지리산 빗점골 계곡 바위 옆에는 이를 알리는 설명판이 있었으나 이명박 때 이를 철거했다. 그러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철거를 못하게 아예 바위에 '이현상 바위'라고 새겨버렸다.
▲ 이명박 정부 들어 이현상 사살지의 표시판을 없애버리자 누군가 바위에 '이현상사살지' 표시를 새겨넣었다. ⓒ손호철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 정권이 보도연맹원들을 대량 학살한 세종시의 은고개도 마찬가지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과거사 규명작업과 관련, 2018년 지역시민단체들이 은고개 지역을 발굴해 유골 등을 수습했고 근처의 세종국제고 학생들이 모금을 해 이들을 기리는 위령비를 설치했다.
하지만 LH공사가 세종시 개발로 이 지역을 개발하면서 학살 현장을 없앴고 위령비도 철거해 버렸다. 박정희 정권의 어두운 역사인 중앙정보부도 마찬가지다. 정치인,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잡혀가 조사를 받던 6국 건물 등 중요한 역사적 유적을 철거하거나 유스호스텔로 만들어 역사를 지워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 세종시 은고개 학살유적지는 LH의 세종시 개발 공사로 사라져 버렸다. ⓒ손호철
셋째, 진실과 화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제주 4‧3, 여순 등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작업을 했고 미진한 부분에 대해 제2차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너무도 많다. 빨리 억울한 과거사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나아가 화해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있었던 좌우익 간의 교차학살에 대해 좌우익 피해자를 함께 추모하는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을 세운 영암, 그리고 비슷한 탑을 세운 화순의 사례는 우리가 배워야할 귀감이다.
보상은 복잡한 문제다. 제주 4‧3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부는 4‧3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결정했고 산청·함양·거창학살 피해자들, 여순사건의 피해자들도 정부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정읍시의 경우 동학 참여자 유족들에게 월 10만 원의 유족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이에 대한 보상은 당연할 일이다.
하지만 5‧18과 여러 민주화운동이 보여주듯이, 5‧18과 민주화운동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피해자만이 아니라 5‧18과 민주화운동 덕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들까지 거액의 금전적 보상을 받아 대중들의 비판을 받고, 금전적 보상을 받은 자와 못 받은 자의 반목(동일 사건 내에서의, 나아가 비슷한 다른 사건들 간의)을 가져오고 '가짜 피해자'들이 등장하면서 어렵게 지켜온 운동의 대의를 해칠 우려가 있어 걱정이 크다. 특히 여순의 경우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비해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는 너무 적어 심각한 갈등이 예상되고 있다.
여러 차례 소개한 바 있지만, 10년 전 남미를 답사하며 목요일 11시 30분경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통령궁 앞을 찾아간 적이 있다. 12시가 되자 하얀 스카프를 두른 80대의 어머니들이 펼침막을 들고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군사독재 시절 군부에 의해 실종된 활동가들의 어머니들의 모임인 5월 어머니회로, 매주 목요일 이곳에서 시위를 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들고 있는 펼침막이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자식들을 보상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당시 현안이었던 '외채를 동결하라'는 것이었다. 5월 어머니회는 "내 자식들은 현재의 운동 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사체를 발굴하지 않으며 이들의 정신을 가두는 기념물을 만들지 않는다, 생명은 돈으로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금전적 보상을 거부한다"며 매주 목요일 자식들이 살아있다면 앞장서 싸울 현재의 문제들을 가지고 집회를 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에게 5월 어머니회와 같은 숭고한 정신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하되,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예상되는 반목과 추태, '역사의 금전화'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 아르헨티나 실종자 어머님들의 모임인 5월 어머니회가 실종된 아들들의 문제가 아니라 아르핸티나의 핵심문제인 '외채 동결'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손호철
이 자리를 빌려 이번 답사에 신세진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제일 먼저, 최풍만 동지다. 잘 나가던 IT분야에서 일하던 그는 인간을 금전의 노예로 만드는 자본주의가 싫어, 직장을 그만둔 뒤 꼭 돈이 필요할 때만 건설노동자로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러 투쟁현장에서 이름 없이 '반(半)전업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이단아'다.
그는 진보운동에 대한 정치적 동지이자 여행의 길벗으로, 이탈리아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를 찾아 나선 이탈리아 사상기행과 스페인과 프랑스의 피카소 기행 등을 같이 했다. 이번 한국근현대사 여행도 대부분 동행을 했고 속도를 잘 지키지는 않았지만 탁월한 솜씨로 운전을 해주었다. 어깨 고장으로 장시간 운전이 어려운 나의 건강을 생각할 때,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번 답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최 동지 이외에도 원경 스님, 명진 스님,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단병호 전 민주노총위원장, 최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박재묵 충남대 명예교수, 곽진 상지대 명예교수, 창원의 임영일 미래를 준비하는 노동사회교육원 이사장, 임춘식 한남대 명예교수, 이영근 PROPAC사장, 김정한 서강대 HK교수, 김철홍 전 국가인권위원회 광주인권사무소장이 답사를 같이 했다.
제주 강정의 문정현 신부님, 제주 '수상한집' 강광보, 광주 황광우 장재성기념사업회 사무총장과 해직교수 이무성 교수, 여수 황남식 사장, 김용국 영광핵발전주민대책위 위원장, 대구 송필경 범어 송치과원장과 역사교사 강태원 씨, 통영 장석 시인, 마산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진현경 사무총장, 울산노동역사관1987 이은영 자료실장과 김호규 금속노조위원장, 경주 최부자아카데미 최창호 상임이사, 소성리 강현욱 주무, 세종추모관 김경호 담당관, 노근리 정구도 관장, 대추리 심종원 이장, 천안 신학철화백과 최중한 씨, 강원민주재단 전미영 위원, 원주 황도근 무위장학교장과, 양길승 원진재단 이사장, 최열 환경재단이사장,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 위원장, 퇴직 역사교사 최병도 씨, 박천우 전 장안대 교수, 양경규 전 노동자정치연대 대표, <박헌영 평전>과 <이현상 평전>의 저자인 안재성 작가 등이 답사를 도와줬다.
특히 해방정국의 최고전문가인 심지연 교수는 각각 해방정국이라는 예민한 주제를 다룬 여러 글들을 꼼꼼하게 읽고 잘못을 지적해주었고, 프랑스혁명의 최고전문가인 최갑수 교수도 역사학자로 여러 조언들을 해줬고, 민중화가인 김정헌 선배는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을 풍자한 그림을,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와 부안의 사진작가 허철은 중요한 사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6월항쟁 지역기념 사진을 갑자기 쓰게 되면서 조승래 청주대 교수와 차진수 무위당사람들 대외협력실장이 청주와 원주의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경향신문>과 <한국일보>, 그리고 여러 기념사업회와 기념관의 여러 자료사진들도 큰 도움이 됐다. 이 모두와 이번 연재를 담당한 <한국일보>의 강윤주 기자와 <프레시안>의 임경구 기자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전한다.
코로나19에 대한 우려로 여행을 만류하는 답사를 한사코 강행하는 '철부지' 남편과 아버지를 용서해준 아내와 딸 고은이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이번 답사가 진짜 빚지고 있는 것은 이름 없이 쓰러진, 그를 통해 더 나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준 한국근현대사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뜨거운 묵념을 드리며 긴 연재를 끝내려 한다./프레시안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학살 명령 거부한 '의인' 경찰들을 기리며
[손호철의 발자국] 2. 전남 구례 : 안종삼·문형순 생애를 생각한다
시인 김남주는 왜 재벌집 담장을 넘었나
[손호철의 발자국]3. 전남 해남 : '무장강도'를 찾아서
'독립운동 성지'인가 '때늦은 애국'인가?
[손호철의 발자국] 4. 경북 안동 : 안동유림의 노블리스 오블레주와 그 한계
지긋지긋한 차별의 역사, 성소수자는 우리시대 백정인가?
[손호철의 발자국] 5. 경남 진주 : 형평운동은 한국 인권운동의 효시
죽창 들고 항일 투쟁한 '원조 빨치산'을 찾아서
[손호철의 발자국] 6. 경남 함양, 경북 경산 : '구구 빨치산' 보광당과 결심대
역사가 되고 신화로 남은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의 생애
[손호철의 발자국] 7. 경남 산청 지리산 : 순박한 산골소녀는 왜 '최후의 빨치산'이 됐나?
'작전명령 5호'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
[손호철의 발자국] 8. 경남 산청‧함양‧거창 : '거창 사건'은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박근혜도 치켜세운 '2‧28 운동', 대구의 '민주화 전통'을 걷다
[손호철의 발자국] 11. 대구 명덕역 :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지' 대구?
진보의 요람'과 '보수의 아성' 공존하는 이 도시
[손호철의 발자국] 12. 경남 창원(마산) : 3‧15와 부마항쟁, 그리고 '두 도시 이야기'
'간첩' 누명에 떠돌다 귀천 후에야 고향땅 밟은 세계적 작곡가
[손호철의 발자국] 13. 경남 통영 : 동백림 사건으로 '상처받은 용', 윤이상 이곳에 잠들다
반미 운동의 기원을 찾아서
[손호철의 발자국] 14. 부산 미문화원 : 한국의 반미운동과 자주파는 이곳에서 시작됐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잡혀간 시민들은 '부랑자'로 죽었다
[손호철의 발자국] 15. 부산 : '사설 강제노동수용소' 형제복지원과 그 원형인 서산개척단
'민주정부'에서 되살아나는 '박정희 향수'
[손호철의 발자국] 18. 경북 구미 : 누가 '죽은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나?
소성리 '사드'는 어떻게 '광기'를 불러냈나?
[손호철의 발자국] 19. 경북 성주 소성리 : '사드(THAAD)'의 정치경제학
남과 북이 사지로 내몬 아홉살 소년을 추모하며
[손호철의 발자국] 21. 강원도 평창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한국판 엘도라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손호철의 발자국] 22. 강원도 춘천 :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파병 베트남전쟁의 빛과 그림자
1980년 '서울의 봄', 막장 광부들이 돌을 들고 싸웠다
[손호철의 발자국] 25. 강원도 사북 : 어용노조에 저항해 일어난 '사북(탄광) 항쟁'
학살 명령 거부한 '의인' 경찰들을 기리며
[손호철의 발자국] 2. 전남 구례 : 안종삼·문형순 생애를 생각한다
"나는 지금부터 여러분들을 모두 방면합니다. 나는 반역으로 몰려 죽을지도 모르지만 내 혼이 480명의 가슴 속에서 지킬 것이니 새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선량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말입니다."
1950년 7월 안종삼 구례경찰서장(1903~1977)이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구금하고 있던 보도연맹원 480명을 사살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고심을 하다가 명령을 어기고 이들을 석방하며 한 이야기이다(보도연맹은 과거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가입시킨 조직으로, 한국전쟁 직후 있었던 이들의 학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3. "죄 지을지 모르니 미리 죽인다", <한국일보> 2020년 8월 25일자 참조).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대신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1950년 8월 제주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1897~1966)이 구금 중인 221명의 보도연맹원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석방하며 한 이야기이다.
그렇다.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했지만 자신의 양심에 따라 명령에 불복종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경찰들도 있다. 언론에서는 이들에 대해 '한국의 쉰들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쉰들러는 공직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상부의 사살 명령을 직접 어기고 목숨을 구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들은 '쉰들러 그 이상'이다.
의인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비교를 하자면, 자신의 아들과 친척을 죽인 가해자들의 목숨을 구한 여수의 손양원 목사와 영광의 박남도 씨가 최고 수준이다('손호철의 발자국'15. "좌익의 우익 학살 또한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한국일보> 2020년 11월16일자 참조).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명령을 불복종하며 수많은 목숨을 구한 안 서장, 문 서장 등이 그 다음이고, 쉰들러는 그 다음일 것이다.
인민군이 장악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한 구례 지역으로 안 서장이 돌아와 보니 구례는 다른 지역과 달리 '피의 보복' 없이 평온했다고 한다. '恩深洞庭湖 德高方丈山(은심동정호 덕고방장산 : 은혜로움이 동정호 같이 깊고 덕이 방장산 같이 높도다)'. 1951년 그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자 마을 사람들은 10폭 병풍과 함께 써줬다는 한시다. 그는 이 시구의 끝 자를 따서 호를 호산(湖山)으로 지었고 이후 전남도의원 등으로 활동했다(오세구의 블로그, '구례-안종삼 서장').
2012년 7월 24일, 그가 480명의 목숨을 살린 지 정확히 62년이 되는 날, 구례경찰서는 그의 동상을 세웠다. 그 동상 앞에 서자 존경심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 구례경찰서에 설치되어 있는 안종삼 전 구례결찰서장의 동상 ⓒ손호철
제주 지방경찰청에도 규모는 작지만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제주4.3평화공원 기념관에는 '집단학살 속의 의로운 사람들'이란 부분에 그의 사진과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 제주시에 있는 제주도경찰청 청사 앞에는 4.3 의인 문형순 전 서귀포서장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손호철
▲ 제주 4.3평화공원 기념관에는 문 서장의 용기있는 선행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손호철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모퉁이에 문 서장이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써서 답신한 학살명령서이다. 많은 친일 경찰들과 달리 평안도 출신으로 일찍이 만주로 넘어가 만주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했던 그는 해방 후 남쪽에 내려와 경찰에 투신했다.('손호철의 발자국', "토벌대의 두 얼굴 : 차일혁과 김종원", <한국일보> 2020년 12월 7일자에서 지적했듯이, 독립군 출신 경찰과 군인 대부분이 '친민중적'이었다면, 백선엽, 김종원 등 학살의 주범들은 대부분 일본군출신이었다). 4.3 때도 모슬포경찰서장으로 지역좌익 1백 여 명의 명단을 입수하고도 이들을 처형하는 대신 설득해 자수시켜 훈방시켰다.
▲ 4.3기념관에 전시 중인 해병대 정보참모의 학살명령서. 우측 상단에 문 서장은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써서 돌려보냈다. ⓒ손호철
평생 독신으로 살아 제주도에서 병사한 그는 제주시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그곳을 찾았지만 특별한 표시판이 없어 한참을 헤매다가 평안도민회 총무에게 전화를 해 간신히 찾았다. 그의 인품만큼 커다란 나무가 감싸 안고 있는 그의 묘 앞에서 그의 용기와 인간미에 존경심을 표했다.
▲ 제주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있는 문 서장의 묘. 낡은 비석으로 찾기 어려웠는데 2020년 12월말 제주경찰서가 새로 비석을 세웠다. ⓒ손호철
최근 제주를 들를 일이 있어 간 김에 문 서장의 묘를 다시 찾았는데, 제주경찰서가 새 비석을 설치해 찾기가 쉬워졌다.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다. 공동묘지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도로 내리막길로 풀로 덮여 있었는데 풀 밑은 완전히 진흙 밭으로 렌트한 SUV가 빠져나오지 못해 구난차를 불렀지만 구난차도 빠져 나오지 못해 거금을 주고 다시 오프로드 차를 불러 8시간 만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하루 종일 굶고 일정 망치고 예상 밖의 거금까지 날리고 말았는데, 문 서장 같은 '의인'이 아니라 '악인'을 찾아갔다가 그랬다면 열 받아 쓰러졌을 것이다.
"여보, 그들을 풀어주세요."
"그러면 내가 죽는대."
"그들을 죽여 놓고 당신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이 죽더라도 그들은 살려야 지요."
모든 의인들의 생애가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이들에 비해 구한 사람들의 수는 적지만, 충북 영동의 이섭진 용화지서 주임(1921-1989)도 의인 중의 한 명이다. 상부 지시에 의해 마을의 농민 등 40명의 보도연맹원을 소집해 놓고 그는 고민에 빠져 부인에게 상의했다. 그는 부인의 설득에 따라 이들을 풀어주고 이들을 가둬 놓은 곳이 허술해 이들이 도망쳤다고 허위보고했다(박민순, "총살 직전 보도연맹원 40명 목숨 구한 시골지서 주임", <오마이뉴스> 2018년 1월22일).
그는 명령을 어기고 사람들을 구한 것이 소문이 나서 영동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고, 변두리 보직만 맡다가 일찍 옷을 벗어야 했다. 용화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에 낡은 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세월에 파여 이제 읽기조차 어려워진 글귀에 '지서주임 이섭진'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글이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영원히 잊지 않는 비'라! 목숨을 구한 가난한 농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곡식을 모아 세운 소중한 비석이다.
▲ 충북 영동 용화리의 또 다른 의인 이섭진 지서주임을 기리기 위해, 생명을 구한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곡식을 모아 세운 감사비 ⓒ손호철
충북 괴산군 증평면 증평지서장 안길룡은 더욱 비극적이다. 충북도경 보안과에 근무했던 윤태훈 씨의 증언에 따르면, 안지서장은 보도연맹원 중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줬다가, 헌병대에 의해 근처로 끌려가 즉결 처분 당했다고 한다.
증평지서를 찾아가 물어봤지만, 그런 사람이 근무했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종삼 서장, 문형순 서장이 '인권 경찰'의 표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것과 너무 대조적이라, 안타까웠다. 나는 증평지서 앞에서 물었다. "과연 나는 안 지서장처럼 나의 목숨을 버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구할 용기가 있는가?" 자신의 양심에 따른 이유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안 지서장에게 묵념을 드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증평을 떠났다.
▲ 억울한 보도연맹원들을 구해줬다가 즉결처분당한 인길룡 증평지서장이 근무했던 증평지구대 ⓒ손호철
이 같은 양심적인 명령 거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안병하 치안감(1928-1988)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거부로부터 30년 뒤인 1980년, 전두환 등 신군부가 광주에서 시민 학살을 자행할 때, 안병하 전라남도경찰국장은 진압 경찰관의 무기 사용과 과잉 진압을 금지했다. 그 때문에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면직 당했으며, 병마에 시달리다 1988년 사망했다. 2017년 정부는 시민 보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해 그를 치안감으로 특진추서했고 2020년에 그의 평전도 나왔다.
이와는 다소 결을 달리하지만, 일부에서는 제주 4.3과 관련해 제주주민 학살을 위한 출동을 거부한 여수14연대의 '항거'(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14. "국가보안법의 단초가 된 여순사건의 비극" <한국일보> 2020년 11월 9일자 참조), 부마항쟁에 대한 박정희의 강경진압 노선에 저항해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의 10.26 거사 역시 이 같은 양심적 명령 거부의 예라고 주장한다.
▲ 여수 14연대의 제주출병 거부가 '정당한 항쟁'이라는 주장과 관련해, '여순항쟁탑'이라는 이름이 주목을 끄는 순천의 여순기념탑 ⓒ손호철
▲ 김재규의 암살 재현 장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암살 역시 양심적 명령거부이므로 김재규를 민주화유공자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연합뉴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 2021.03.10.
시인 김남주는 왜 재벌집 담장을 넘었나
[손호철의 발자국]3. 전남 해남 : '무장강도'를 찾아서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제일 좋아하는 여행코스는 강진과 해남이다. 글이 막히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답답하면 차를 몰고 강진으로 달려가 '뿌리의 길'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올라간다. 초당을 내려와 강진시장서 귀리밥을 먹은 뒤 해남의 땅 끝으로 달려가 산꼭대기에 위태롭게 자리잡고 있는 초미니 암자 도솔암에 올라 남해바다를 바라보면 속세의 모든 번뇌를 잊게 된다.
다시 서쪽으로 차를 달려 진도 앞바다에 가면 명량대첩의 울둘목이 나온다. 우수영의 진도대교 밑에서 눈을 감고 울둘목의 회오리바다가 내는,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순신의 고독과 민중들의 처절한 신음, 분노에 찬 함성이 들려온다.
마지막으로 찾는 곳은 '무장강도'의 생가다. 현대사 답사에 "웬 무장강도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그 무장강도의 이름은 김남주(1946~1994)다. 그렇다. 시인과 무장강도.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지만, 분단체제가 최종 봉인된 1953년 후 이 땅의 시인 중, 아니 예술가중 가장 '실천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김남주는 무장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 전남 해남에 있는 '민족시인', '혁명시인' 김남주의 생가 ⓒ손호철
▲ 김남주 생가 바로 앞의 풍경. 해남 농촌 가난한 농가에서 자란 그는 그 뿌리를 잊지 않았다. ⓒ손호철
해남읍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삼선면 봉학리 마을회관 앞에 위치한 김 시인의 생가에 들어서면 상징 같은 굵은 뿔테 안경을 쓴 그의 흉상과 여러 시비들이 맞는다. 그 시비들 사이로 보이는 시인의 생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건물이 있다. 흰색으로 칠해진 이 투박한 건물에는 앞쪽으로 난 작은 창에 철막대기들이 몇 개 설치되어 있다. 김 시인이 살던 감옥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 김남주 생가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흉상 ⓒ손호철
▲ 생가 뒷편에 만들어놓은 감옥의 모형. 이 같은 감방에서 김 시인은 근 10년을 보내며 결국 병을 얻었다. ⓒ손호철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호남의 인재들이 다니던 광주일고에 들어간 그는 부모님과 가족들의 기대를 잔뜩 받았지만, 획일적인 입시교육에 실망해 자퇴했다. 검정고시로 전남대에 들어가서도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운동권이 된 그는 유신에 저항해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감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해남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시인이 됐다. 그는 가족, 특히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자신의 심정을 <그러나 나는>에서 다음 같이 노래했다.
그러나 나는 / 면서기가 되어 /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하는 금판사가 되어 / 문중의 자랑도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한 곳 / 착취와 억압이 있는 바로 그 곳에 (이하 생략)
▲ 김남주 소개돌 위에 핀 붉은 코스모스 잎이 뜨겁게 살다 처연하게 진 그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손호철
유신 말기인 1978년 12월부터 강남의 부유층들의 집에 강도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1979년 4월 27일 아침 10시, 당시 재벌 2세들의 문란한 사생활로 문제가 된 '7공자'들의 한 명으로 알려진 최원석 동아건설 사장집에 3인조 무장장도가 침입했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재빨리 출동해 격투 끝에 주범은 잡히고 두 명은 도주했다. 도주한 두 명 중 한 명이 김남주 시인이었다.
수사팀에는 김근태 전 의원을 고문한 '남영동의 저승사자' 이근안이 있었다. 그는 최 씨 일가로부터 강도들이 '혁명군자금'을 운운했다는 진술을 듣고 연이은 강도 사건이 단순한 강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이를 추적해 이 사건이 비밀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의 전위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의 소행인 것을 밝혀내고 남민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결국 김 시인은 남민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15년을 선고받아 생가에 지은 작은 감방 같은 감방에서 9년 3개월을 살다가 민주화가 되면서 형집행정지로 1988년 석방됐다. 놀라운 것은 김 시인이 쓴 510편의 시 중 360편이 감옥에서 쓴 것이라는 사실이다.
▲ 김남주의 시 '자유', '사랑은'을 새겨놓은 시비와 대나무숲이 조화롭다. ⓒ손호철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지배하던 1930년 파시즘 시대에도 집필을 허용해 공산당 당수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감옥에서 <옥중수고>라는 불후의 명작을 썼다. 우리는 군사독재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민주화가 된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초기까지도 감방에서 펜과 종이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했다. 김 시인은 우유를 싼 못을 갈아 은박지에 쓰거나 연필심을 구해 화장지에 어렵게 쓴 시를 더 어렵게 밖으로 내보냈다.
▲ 김남주의 시집인 <진혼가>. 그는 감옥에서 은박지에 못을 갈아 시를 써서 몰래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한국시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의 '종과 주인'은 충격적이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은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렸다
바로 그 낫으로
김 시인은 이처럼 뜨거운 열혈투사였지만, 고문과 오랜 감옥 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49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어야 했다. 도대체 남민전은 무엇이고, 왜 김남주는 무장강도 행위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이 모두는 유신이 낳은 비극이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선포 후에도 민청학련 등 학생들의 저항이 일어나자 이를 짓밟기 위해 1970년대에 무리하게 이들을 기소했다. 문제가 됐던 대구 지역 혁신 세력인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조직 재건을 위해 재건위를 만들었다고 조작해 핵심인사들에 사형선고를 내렸고 대법원 판결 직후 사형을 집행했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7회 '대구 인혁당', <한국일보> 2021년 2월 8일자 참조).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가장 암흑의 날'이라고 평한 이 사건은 민주화 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조작사건으로, 박 정권은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사형집행 후에도 가족들에게 시신를 돌려주지 않고 화장을 하는 반인륜적인 행패를 부렸다.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박정희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의 최후진술이다. 박정희의 심복의 심정이 그러했으니, 민주화운동 세력, 특히 인혁당의 동지들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인혁당의 동지로 1차 사건 때 옥살이를 했으나 민청학련 때는 도주해 사형을 피한 이재문은 동지들의 사형 소식에 날로 심해지는 유신의 횡포를 목격하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976년 2월 또 다른 지하당이었던 통혁당 관계자 신향식, 남조선혁명전략당 김병권과 만나 유신을 끝장내고 우리 사회를 제대로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남베트남해방과 베트남통일의 기초가 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남민전을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김남주 시인으로부터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사건 발표 당시 한 대기업의 파리주재원으로 근무 중이어서 다행히 체포를 피하고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택시기사로 일했던 이야기를 나중에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베스트셀러로 쓴 홍세화, 이후 보수 정치인으로 탈바꿈해 이명박의 오른팔이 된 이재오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유신 붕괴 직전 체포되어 10‧26, 5‧18 등의 격변 속에서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재문은 81년 옥중 병사하고 신형식은 82년 사형이 집행됐다. 이근안은 이후 잡혀온 시국사범들에게 이재문이 옥중 병사한 것은 자기의 고문 때문이라며 겁을 줬다고 한다.
▲ 남민전 재판 장면. 이재문이 발언을 하고 있다. ⓒ의문사위원회 자료사진
▲ 남민전의 리더였던 이재문의 묘소는 모란공원 묘지의 민주민족열사 묘역에 자리잡고 있다. ⓒ손호철
검찰은 남민전에 대해 김일성 지시를 받지 않았지만 북한의 대남간첩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민전은 북괴에 지시에 의한 남한의 혁명세력이 아니라 남한 출신 인사의 자주적 혁명단체"이고 '북한과 접촉이 이루어질 경우 대등한 입장에서 접촉한다'는 것이 공식적 입장이었다. 즉 통혁당 등 과거의 지하조직들과 달리 북한과 연계되지 않은 독자적인 조직이었다. 보수언론들도 과거와 달리 '자생적 공산주의집단'인 '코레콩(코리안 베트콩)'이 등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남민전의 강령은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볼 때는 다소 급진적일 수 있지만, 80년대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차라리 '온건한' 내용이었다. 남민전의 10대 강령은 1. 국제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체제와 그 앞잡이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 수립, 2. 폭넓은 진보적 민주정치 실현, 3. 민족자주적인 자립경제 수립, 4. 경자유전 원칙에 의한 토지개혁 단행, 5. 남녀평등 실현, 지방색 타파, 6. 민족자주적 교육 실현과 민족문화 계승발전, 7. 국가와 인민을 보위하는 군대 건설, 8. 평화와 중립의 자주외교 실현, 9. 7‧4남북공동선언의 원칙과 토대 위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 촉진, 10. 일체의 침략전쟁 반대, 세계평화 옹호이다.
논쟁이 된다면 투쟁 방식이다. 남민전은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를 만들어 여러 차례 배포했다. 그러나 '상식'을 넘어선 유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이 같은 전통적 방법 이외의 '비상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예비군훈련장에서 소총 1정을 빼돌려 비축했고 혁명군자금 마련을 위해 무장강도와 같은 '비전통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또 인혁당재건위 사형수 가족으로부터 8인의 속옷을 받아 그것으로 해방 직후 여운형이 만들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인공기를 닮은 깃발을 만들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는 유신이라는 당시 상황, 즉 "암울했던 폭압적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며, 이미 사망한 이재문 등 3명과 신청을 하지 않은 홍세화, 이재오 등은 제외한 김남주 등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정부의 판정이 인정하듯이, 남민전과 무장강도는 유신이 얼마나 양심적 지식인들을 극한으로 몰고 갔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일종의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는 김 시인의 집을 나서자 무장강도까지 불사했던 열혈투사 김남주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같이 가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 내가 넘어지면 네가 일으켜주고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김남주의 '가장 따뜻한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시비 ⓒ손호철
'독립운동 성지'인가 '때늦은 애국'인가?
[손호철의 발자국] 4. 경북 안동 : 안동유림의 노블리스 오블레주와 그 한계
투옥 17회. 의열단원이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무장투쟁을 추구하다 40살에 감옥에서 숨진 독립투사는?
많은 사람들은 직업적인 혁명가를 연상하겠지만, 그는 이원록, 일본 조서에는 '이활'로 기록된 문학가이다. 이원록, 이활 하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첫 죄수번호였던 264번을 따서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중략)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의 대표적인 시 '광야'를 되뇌며, 나는 '최고의 항일문학가'인 이육사를 만나러 안동 도산서원을 향하고 있다. 고향이 그 근처인 그의 문학관은 한국성리학의 성지인 도산서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육사는 이퇴계의 14대 손이다.
▲ 도산서원이 가까운 이육사문학관 앞에 세워져 있는 이육사 시비와 동상 ⓒ손호철
그뿐만이 아니다. 한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이만도 역시 퇴계 직손으로 경술국치를 당하자 곡기를 끊고 자정순국했다. 아들 이중업은 대한독립회 등에 깊이 관여했고 며느리 김락 역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고문으로 실명하는 등 가족 중 9명이 독립유공자이다.
베이징 감옥에서 이육사의 시신과 유작들을 챙겨 나와 우리에게 그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도 이육사의 친척이었다. 이병희는 여학교를 중퇴하고 방직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을 하다가 투옥당하기도 했고, 베이징으로 망명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이육사의 유작 등을 거둔 것이다.
안동에 있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들어서면 "전국적으로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 어디냐"는 질문이 제일 먼저 보인다. 경북은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을 제일 먼저(1894년) 시작했고, 나라가 망하자 목숨을 끊은 자정순국자(17명)도 제일 많다. 독립유공자도 유일하게 2000명이 넘는 2116명으로, 인구비율로 따져 제일 많다고 한다. 사실 도 단위에서 독립운동기념관을 만든 곳은 경북뿐일 것이다.
▲ 경상북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사진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다. ⓒ손호철
특히 한국 유학의 중심인 안동은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인구 16만 명 안동은 무려 941명에 달하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퇴계 자손들만이 아니라 안동 명문가들과 유림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퇴계의 진성 이씨 52명, 의성 김씨 47명이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마을로는 의성 김씨의 내앞마을,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 안동 권씨의 가일마을, 풍산 김씨의 오미마을이 대표적이다.
독립운동기념관 코앞에 있는 마을이 '마을 앞에 개울이 흐른다'는 의미의 '내앞마을'이다.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수제자였던 김성일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로, 제국주의의 침입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학을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한 '혁신유림'의 본고장이자, 전통사회 안동에 혁명을 몰고 온 '혁명발상지'이다.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독립기념관을 바로 이 마을에 지은 것이다. 이 마을은 1910년대에 인구가 700명에 불과했지만 김대락, 김동삼 등 독립유공자를 18명이나 배출했다.
▲ 도 단위로는 유일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안동 내앞마을 옆에 위치해 있다. ⓒ손호철
내앞마을 혁명성의 상징은 '사람 천석, 글 천석, 살림 천석'으로 '삼천 석 댁'으로 불린 의성 김씨 가문의 장손 백하 김대락의 고택인 백하구려(白下舊廬)이다. 김대락을 비롯한 김씨 문중은 의병운동이 실패한 뒤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껴 유학의 심장부인 이곳에 근대적인 협동학교를 세웠다.
아름답게 보존된 고택에 다가서자 고택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돌이 나를 맞았다. 이 돌이 유학 혁신의 슬픈 역사를 상징한다. 1909년 협동학교가 모두 단발을 하자, 분노한 유림들이 밤에 쳐들어와 숙직을 서고 있던 교사 등을 이 돌에 머리를 놓고 베어버렸다고 한다.
내앞마을 사람들은 결국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을 가기로 결심했다. 망명길에 나선 사람은 김대락, 김동삼 가족 등 15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만주 삼원포에서 신훙무관학교를 만들어 청산리대첩에 참여하는 많은 독립군들을 길러내는 등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다.
▲ 유교의 고장인 안동에서 혁신유교를 주창한 김대락의 고택 백하구려. 김대락은 이곳에 근대적인 협동학교를 세웠는데, 유림들이 쳐들어와 사진 속의 바위에 교사들 목을 놓고 쳐버렸다. ⓒ손호철
"광복이 되기 전에는 나의 유해를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유명한 유언이다. 그의 본가는 99간의 임청각이다. 그는 노비들을 해방하고 큰처남인 김대락(김대락의 여동생은 이만도의 며느리 김락이다)과 함께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임청각과 땅을 팔아 독립자금을 댔다. 놀란 문중이 돈을 모아 사들인 종가 임청각의 소유권은 68명에게 나뉘어 있다가 최근에 정리했다고 한다.
이 집안도 독립유공자만 3대에 걸쳐 9명을 배출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임청각 한가운데를 관통하도록 중앙선 철도를 놓아 고택을 잘라냈으며, 반쪽만 남은 고택 바로 옆으로 기차가 다닌다. 잘려 나간 고택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아프다(최근 중앙선을 고속철도화하면서 옛 철로가 불필요해지자 임청각을 관통했던 철로를 철거해 임청각을 복원하기로 했다).
▲ 석주 이상룡의 아흔아홉간 집인 임청각. 그는 이 집과 땅을 팔아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손호철
▲ 임청각에 전시되어 있는 석주 이상룡의 사진 ⓒ손호철
안동은 '좌파' 독립운동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 독립운동기념관에는 일본 경찰 앞에서 작성한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였던 김재봉의 조서가 눈길을 끈다.
풍산 김씨 집성촌인 풍산읍 오미마을에 가면 그의 고택이 있다. 3.1 운동 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그는 감옥을 갔다 온 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노동자대표로 참석했고, 1925년 서울 아서원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됐다. 이후 오랜 감옥살이를 하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눈을 감았다. 고택 앞에는 커다란 돌에 새져진 '조선독립을 목적하고'라는 글이 그의 한을 보여주고 있다.
▲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인 김재봉의 생가 앞에는 그가 일본경찰의 조사에서 밝힌 조서의 구절이 방문객을 맞는다. ⓒ손호철
▲ 풍산 김씨의 집성촌인 오미마을에 있는 김재봉의 생가.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였던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후유증으로 해방 전에 목숨을 잃었다. ⓒ손호철
다른 양반 명문가인 안동 권씨가 모여 사는 가일마을은 풍산읍의 또 다른 마을로,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린다. 6.10 만세운동의 주역인 권오설 등이 중심이 되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녹슨 철관이다. 일제가 권오설을 얼마나 혹독하게 고문했는지, 가족들의 입관도 허락하지 않고 그의 관을 열어보지 못하도록 철관에 넣어 봉인해 매장을 한 것을 몇 년 전 이장을 하며 파내온 것이다. 이는 비인도적인 폭거지만 최소한 시신을 돌려줬다는 점에서 그래도 '인도주의적'이었다. 고문 흔적을 유가족들이 못 보도록 인혁당재건위라는 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시킨 일부 혁신인사의 시신을 강제로 화장한 박정희에 비하면 그렇다.
외지에서 학업 등으로 떠돌던 권오설은 3.1 운동으로 감옥을 다녀온 뒤 귀향했다. 그는 문중 서원에 강습소를 만들어 농민들을 가르치고 소작회를 만들어 일본 지주들과 한인 대지주들에 저항해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이후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6.10 항쟁을 주도해 감옥에 갔다가, 출소 100일을 앞두고 고문으로 사망했다. 가일마을의 그의 집은 가슴 아프게 무너져 없어지고 잡초만 무성하다. 대신 마을입구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커다란 기념비가 그가 농민들을 위해 싸웠던 넓은 풍천 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 6.10 만세 사건의 주범인 권오설의 전설적인 철관. 일제는 고문으로 그가 옥사하자 유족들이 고문 흔적을 보지 못하도록 시신을 철관에 넣어 봉인해 건네줬다. ⓒ손호철
이런 표현이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다행스럽게도' 김두봉과 권오설은 해방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은 덕으로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뒤늦었지만 얼마 전 독립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의 반공주의 속에서 이들이 완전히 복권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독립운동기념단체들이 권오설의 묘 입구에 안내석을 설치했는데, 얼마 뒤 누군가 안내석의 모퉁이를 깨버렸다.
안동의 독립운동을 돌아보고 느낀 것이 있다. 안동이 '양반의 유림의 중심'답게 독립운동에서 '노블리스 오블레주'를 모범적으로 실천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많은 친일 인사들을, 또 갖가지 핑계로 군대를 가지 않고도 입만 열면 국가안보를 떠드는 요즘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이는 높이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타까운 것이 있다. '손호철의 발자국'10. 전북 정읍 무성서원 편(<한국일보> 2021년 1월 12일자)에서 지적했듯이, 이 노블리스 오블레주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때늦은 애국'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양반과 유림들은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동학군의 연대투쟁 제안에 대해 오히려 민보군을 조직해 동학군을 분쇄하고,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뒤늦게 의병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애국심보다 지배계급으로서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가까운 문경에서 효령대군의 직손인 의병장 이강년 장군이 동학군의 대의에 공감해 동학 지휘관으로 일본군과 싸울 때, 안동은 유림의 중심지답게 민보군을 조직해 지역 동학군을 척결했고, 동학군이 강했던 예천에 3500명의 민보군을 지원군으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내앞마을의 혁신유림 등이 조금만 더 일찍, 조금만 더 개방적 자세로, 봉건적 유학을 혁신하고 동학군과 함께 항일투쟁에 나서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긋지긋한 차별의 역사, 성소수자는 우리시대 백정인가?
[손호철의 발자국] 5. 경남 진주 : 형평운동은 한국 인권운동의 효시
청년 정육점'. 요즘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가게 이름이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시장에 가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칼을 들고 발골하는 정육점이 많다. 과학영재고와 카이스트를 나와 국비장학생으로 유학을 갈 예정이던 인재가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맛있는 돼지고기나 실컷 먹자고 전국 맛기행에 나섰다가 정육점을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축을 도살하는 정육업이 이처럼 대접을 받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가축을 도살하는 백정은 노비는 아니지만 양민 중 최하층으로 차별과 천대를 받고 살았다. 이들은 거주가 제한되어 따로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했고, 호적이 없는 무적자여서 일반 상민들과 달리 별도로 관리되었다. 이들은 외출 할 때는 상투를 틀지 않은 채 백정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수한 모자인 패랭이를 써야 했다.
경기도 양주 불곡산에 가면 산 초입에 넓은 빈 공터가 나온다. 안내판을 보면,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의적으로 불리는 임꺽정의 집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천대당하며 컸다. 백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동네 우물물도 마시지 못하게 해 가까운 불곡산까지 가서 산에 흐르는 물을 떠다 마시며 컸다고 한다.
▲ 경기도 양주 불곡산 입구에 있는 임꺽정 집터 보존비. 임꺽정은 백정으로 차별을 받고 살았다. ⓒ손호철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라. 그럼으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여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 사람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本社)의 주지(主旨)니라. 우리도 조선민족 2천만의 분자이며 갑오년 6월부터 칙령으로 백정의 칭호를 없이하고 평민이 된 우리들이다. 애정으로 상부상조하여 (…) 공동의 존영을 기하고자 40여만이 단결하여 (…) 그 주지를 선명히 표방코자 하노라."
일제 치하인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의 한 강당에는 백정 출신의 지역 재력가들과 '깨인' 양반 출신 지식인 등 80명이 모였다. 창립선언문이 보여주듯이, 수백 년 간 차별을 받아온 백정들이 백정 등에 대한 차별이 없는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로 '저울(衡) 같이 공평(平)한 사회(社)'라는 뜻의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한 것이다.
▲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제6회 형평사 전국대회(1928년) 사진 ⓒ손호철
▲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손호철
이 선언에서 언급했듯이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폐지되었고 그동안 호적이 없는 무적자로 지내온 백정도 1896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호적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차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직업란에는 여전히 백정이라 표시했고 학교나 교회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다. 일제도 이 같은 정책을 이어받아 직업란에 백정을 표시했고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내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 같이 실질적인 차별이 계속되고 있던 때에 기폭제가 된 사건이 터졌다. 진주의 백정으로 돈을 많이 번 이학찬이란 사람이 자식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하자 백정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입학 거절을 당했다. 우회곡절 끝에 간신히 입학을 허가받았으나 백정의 자식임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압력 때문에 학교를 그만둬야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화가 난 이학찬은 1년 전 일본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의 백정들이 '수평사(水平社)'라는 조직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와 비슷한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진주에서 형평사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형평운동이 불처럼 번져갔다. 5월에는 각 지방대표자 회의가 열린 진주에서 차 3대에 타고 시내를 다니며 7000장의 선전문을 나눠줬다. 부산, 대구, 논산, 옥천에 지사를 설치했고 이어 정읍에 분사를 설치했다.
1년 뒤에는 전국에 12개 지사와 67개 분사가 설치됐고 1926년에는 일반인에 의한 차별과 박해가 심한 것, 관광소와 교원이 차별 대우하는 것, 목욕탕, 식당 등에서 공공연하게 차별이 행해지는 것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형평운동을 시작한 10년 뒤인 1933년에는 240개의 분사가 설치되어 40만 백정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물론 형평운동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진주 각 동의 대표자들이 모여 쇠고기를 사먹지 않기로 결의하는가 하면, 각 마을마다 쇠고기 사먹는 집이 있는지 감시하고 협박하는 등 형평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반(反) 형평운동을 주도한 것이 상류층만이 아니라 오히려 농민, 노동자 같은 '기층민중'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23년 진주에서 형평사 축하식이 열린 다음날, 2500명의 농민들이 형평사 본부를 습격했고 제천에서는 노동자들이 백정을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미국에서 흔히 흑인으로 잘못 불려온 아프리카계에 대한 인종차별 폐지에 대해 같은 유색인종인 동양계가 펄펄 뛰며 반대하고 나서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이는 기층민중인 노동자, 농민이 자기들보다 더 하층인 백정을 탄압한 안타까운 사건으로, 기층민중들의 의식이 얼마나 지배 질서가 강요해온 신분제에 물들어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때 조국 서울대 교수 같은 부유층 좌파에 대해 '강남 좌파'라는 담론이 등장했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강북 우파', 즉 보수적인 기층민중이라는 점과도 연결된다.
형평사 운동은 반형평운동의 저항뿐만이 아니라 내분으로도 고통을 겪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운동의 본부를 어디에 줄 것이냐는 지역적 주도권 문제, 온건한 투쟁방식을 추구할 것인가, 급진적인 투쟁방식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투쟁 전략 문제 등으로 갈등하고 내분을 겪었다.
"형평사 동인 제군, 우리들 수평사 동인과 제군 사이에 있는 것은 단 하나의 해협뿐입니다. 우리들은 고작 122마일에 불과한 이 해협이 우리의 굳건하고도 따뜻한 악수를 막는 데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몰지각한 인간모독자의 눈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른 바 정신적 노예제의 영역을 돌파하려는 인류의 기수로 선택된 민중이라는 기쁨을 함께 나누며 전진합시다."
형평사 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이 운동이 처음부터 국제연대투쟁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형평사의 선배 격인 일본의 수평사는 형평사의 요청에 따라 형평사 창립대회에 축사를 보내왔다. 그들의 열악하고 천대받는 사회적 지위가 국경을 넘어 쉽게 연대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진주 시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는 진주성, 특히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것으로 유명한 촉석루다. 이 촉석루의 강 건너편에는 남강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작은 공원이 있다.
그 공원에는 진주가 전국적인 형평운동을 주도한 것을 기념하는 형평운동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다. 반달 모양의 탑 앞에 두 남녀가 서 있고 그 위에 또 다른 건축물이 세워져 있는 특이한 모습의 조형물이다. 반달 모양의 탑에는 '자유, 평등, 형평정신'이라는 글씨와 함께 형평이라는 깃발을 든 투사를 부조로 새겨놓았다.
▲ 진주 남강변에 설치되어 있는 형평운동기념탑 ⓒ손호철
▲ 다른 각도에서 본 형평운동기념탑 ⓒ손호철
이 탑은 '형평 정신'은 진주 정신의 상징이라는 취지에서 시민 1500명이 성금을 내서 1996년 진주성 앞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진주성 앞에 진주대첩광장을 만들면서 여러 시민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것도 백정 차별의 유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기념탑 앞에 세워진 취지문에는 "형평운동은 수 천 년에 걸친 신분 차별을 없애려는 우리나라 인권운동의 금자탑"이라고 쓰여 있다. 민주주의란, 인권이란, 모든 착취와 억압만이 아니라 모든 차별과 배제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취지문은 정곡을 찌른다. 그렇다. 형평운동은 우리나라의 근대적 인권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의 참사를 목도하고 자성 속에 1948년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은 제1조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백정을 포함한 그 어떤 천민도 다른 사람들처럼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선언. 그것이 바로 형평운동이다. 이 점에서 이 탑을 1996년 유엔이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일인 12월 10일에 설립한 것은 더욱 의미가 크다.
형평운동기념탑에 쓰여 있는 '자유, 평등, 형평정신' 글귀를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차별받고 있는 성소수자 등 '우리 시대의 백정'에 대해, 그리고 2007년에 고(故) 노회찬 의원이 발의했지만 아직도 통과되지 못한 차별금지법이 생각났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는다." 우리가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사회주의 국가라고 비판하는 쿠바도 2019년 성소수자 등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는데, 우리나라는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의 반대 등에 막혀 아직도 모든 차별을 금지하자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백정이라는 차별의 언어와 신분제도는 사라졌지만, 성소수자와 같은 '또 다른 백정'은 여전히 존재하며, 차별 없고 저울같이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는 형평정신, '누구나 공평하게 인간 존엄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고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형평정신은 아직도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요한 정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진주 남강을 떠났다.
▲ '동성애는 인권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시위를 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 ⓒ프레시안
죽창 들고 항일 투쟁한 '원조 빨치산'을 찾아서
[손호철의 발자국] 6. 경남 함양, 경북 경산 : '구구 빨치산' 보광당과 결심대
보광당. 대부분 금은방 이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이름이 한국 현대사, 특히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단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독립운동 하면 크게 1)김구를 중심으로 한 상해의 임시정부 2)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미국에서의 외교 운동 3)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에서의 무장투쟁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생각한다.
이에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추가할 수 있다. 같은 운동이라도 국내에서의 운동이 가장 값질 것이다. 하지만 극악한 일본의 탄압에 1930년대 이후에는 공산당 등 좌파를 중심으로 한 운동만 살아남았고,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 투옥되거나 병사하거나 변절해, 박헌영, 이현상 등 극소수 외에는 살아남지 못했다.
그 규모가 빈약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일제 말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추구했던 세력들이 있었다. '널리 나라의 빛이 되자'는 뜻의 보광당이 그런 조직 중의 하나다. "일제를 타도하자!"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1944년 9월 1일, 24명의 젊은이들이 덕유산에서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쳤다.
1945년 봄, 150명으로 늘어난 보광당은 평야가 가까워 식량을 구하기 쉬운 쾌관산(현 대봉산)으로 이동해 화염병 만들어 일본 경찰 토벌대를 격퇴했고, 7월에는 함양경찰서 공격해 잡혀있던 동지들을 구출했다고 한다. 이병주의 <지리산>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보광당을 만든 하준수를 체포해 조사한 전 육군특무부대 특무처장에 의하면, 이들은 함양 이외에도 산청, 무주, 임실, 장수경찰서를 공격했다고 한다.
▲ 일제 말기 보광당이 활동했던 경남 함양의 대봉산 ⓒ손호철
이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젊은이들을 징용, 징병으로 끌고 갔던 일제의 발악에 조선 젊은이들의 선택은 뻔했다. 하나는 박정희‧백선엽처럼, 민족이든 뭐든 다 팽개치고 출세를 위해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 때려잡는 일본군 장교로 들어가는 길이다. 두 번째 선택은 일본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징용이나 징병에 끌려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택한 것은 바로 이 길이다. 세 번째 선택은 장준하‧김준엽처럼 학병으로 중국까지 끌려갔다 도주해 독립군에 합류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마지막 선택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징용과 징병을 피해 지리산, 월악산, 덕유산 등에 숨어버리거나, 나아가 산속에 작은 해방구를 만들어 기회 날 때마다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보광당이 바로 이들 중의 하나다.
이들은 임정, 조선공산당 같은 거대 조직이 아닌 소수집단이어서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게다가 상당수가 '좌파'였던 이들은 해방 후 빨치산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졌다. 하지만 국내에서의 무장투쟁이 최고의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투쟁은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참여자들과 지역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진 그들 이야기는 여러 문학작품들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보광당의 이야기를 다룬 이병주의 <지리산>이 그 선구자다. 1980년 초, 시국사범 권운상이 감옥 생활을 함께 한 월악산 항일유격대 비전향장기수 등의 이야기를 몰래 메모해 나와 신문 등을 통해 검증하고 집필했다는 대하실록 소설 <녹슬은 해방구>는 이 같은 움직임을 가장 잘 요약해주고 있다.
"39년인가 40년인가부터 징용이 실시됐는데, 41년, 42년 정도엔 집단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주로 모이는 곳이 산이었죠. 그것도 소백산일대가 가장 많았을 겁니다. 그러다가 43년과 44년에 이르러서는 징병제를 거부하고 산으로 들어온 진보적 지식인들이 대부분 지도부를 형성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비전향장기수의 회고다.
조선공산당과 빨치산 운동에 대해 깊이 있는 조사를 해온 안재성 작가도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40년대 들어 전국 곳곳에서는 일본군대에 끌려가기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입산과 항거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몇 명씩 산으로 도피했다가 숫자가 늘어나자 조직적으로 경찰주재소를 습격, 무장을 하여 경찰에 대항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기도 포천에서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경찰 무기를 탈취해 산중 생활을 하며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을 만들었다 체포되기도 하고 (…) 충주 일원의 청년들은 월악산 유격대를 결성해 친일 관료를 죽이기도 했고 속초 청년들은 설악산에 들어가 산악대라는 이름으로 경찰에 저항하기도 했다."
1944년 7월 경북 경산에서는 29명의 젊은이들이 징용을 거부하고 투쟁을 하기로 결의, '결심대'를 조직했다. 산세가 험한 대왕산에 진지를 잡은 이들은 대장간에서 쇠로 무기를 만들면 발각이 될까봐 죽창으로 무장해 일본 경찰과 싸우다 식량이 바닥난 탓에 보름 만에 체포됐다. 두 명은 옥사했고 나머지는 해방과 함께 풀려나, 모두 애국애족장을 받았다. 매년 이들을 기리는 추모제도 열리고 있다.
▲ 대왕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는 죽창의거전적비 ⓒ정만진 제공
▲ 경산 결심대의 결의사항. 여기에는 쇠창으로 싸운다고 되어있지만, 쇠창을 준비하면 발각될까봐 죽창으로 싸웠다. ⓒ손호철
대구 달성초등학교 친구들 중 좌파 성향을 가진 15명이 1944년 원대동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있다'는 소식을 미국 단파방송을 통해 듣고, 일본 패망 즉시 무기고를 습격‧보복하려고 '원대결사대'를 구성했다가 적발되는 등, 그 예는 많다. 이들의 이야기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일제의 징용이나 징병에 저항했던 경북의 다양한 운동들을 소개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자료 ⓒ손호철
이 같은 사실들은 최근 들어 매우 중요해졌다. 징용‧징병, 나아가 위안부까지도 '자발적인 지원'이라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의 역사부정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보광당과 결심대 사례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징용‧징병이 자발적이었다면, 왜 이들은 굳이 피해 목숨을 걸고 산으로 들어가 생고생을 했겠는가?
이들의 투쟁은 항일독립운동사와 일제 말 젊은이들의 분화뿐 아니라 빨치산의 역사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우리는 대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좌익 탄압, 특히 '제주 4‧3 항쟁 진압을 위해 출동하라'는 이승만 정권의 명령에 저항한 여수 주둔 14연대 좌파들이 일으킨 여순 사건 이후, 빨치산이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다. 진압군이 쳐들어오자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된 이들이 '구빨치'다. '신빨치'는 한국전쟁 때 남하한 북한군이나 좌파가 인천상륙작전 등의 영향으로 북에 돌아가지 못해 산으로 들어간 1950년대의 빨치산이다.
보광단, 결심대, 산악대 같은 항일투쟁 조직의 존재는 빨치산의 역사가 일제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구빨치보다 더 오래된 '구구빨치'라고 하겠다. <만다라>로 유명한 소설가 김성동 씨에 따르면, '구구빨치'의 역사는 더 이전으로 올라간다. 김개남은 동학혁명의 급진파였다('손호철의 발자국'9. '전봉준에 가려 잊혀진 또 다른 녹두장군 김개남을 아시나요' <한국일보> 2020년 10일 5일자 참고). "그의 부대에서 살아남은 농군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의병이 되었고 그들 뒷자손들은 일제 때 '항왜빨치산'이 되었으니 '구구빨치산'입니다."
과장된 이야기로 들리지만,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월악산 항일빨치산 출신은 이 같은 항일빨치산 소부대들이 산재해 있었기에 "45년 해방 이후에 남로당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소백산맥 주변 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녹슬은 해방구>에 따르면, 충북 봉양 대지주의 아들 조성옥은 경성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 하다가 조선공산당 5차 사건으로 조직이 와해되자 귀향했다. 그는 1942년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월악산으로 들어가 징용‧징병 기피자들을 모아 유격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죽령에서 중앙선 화물열차를 폭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재상은 일제 말에 이 같은 규모의 무장투쟁이 국내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다고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보광단 대장이던 하준수(1921~1955)는 함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잣집 아들이었다. 가라데 6단 하준수는 일본 순회 가라데 시범을 다닐 정도로 무술에 뛰어났다. 그는 진주중학교 재학 시절 일본인 선생을 폭행해 퇴학을 당하고 유학을 갔으나 징병 영장이 나오자 산으로 올라갔다. 해방 후 남로당 가입을 거절할 정도로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뛰어난 무예 덕에 이승만의 경호대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일파 중용에 분노해 결국 다시 산으로 들어가 '남도부'라는 빨치산의 대장으로 활약하다 체포돼 처형당했다.
그가 '동네 최고의 부자'로 생활했던 함양 병곡면 도천리는 넓은 평야를 자랑하는 마을이다. 그러나 그의 집이 몰락한 탓인지, 천석꾼 부잣집은 사라지고 없다. 동네 뒤편으로는 그가 조직한 보광당의 근거지인 쾌관산이 대봉산으로 이름을 바꿔 도천리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 함양 최고의 부자 하준수의 집이 사라진 도천리 마을. 왼쪽 뒤로 보이는 산이 대봉산이다. ⓒ손호철
도천리를 떠나 경산 사월리로 향했다. 사월리에는 '항일 대왕산죽창의거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해발 600여 미터의 악산인 대봉산 정상에도 대구지역 유적답사를 오래 해온 정만진 씨가 "독립운동 기념물로 드물게 산꼭대기에 세워진 전적비"라고 평한 '항일 대왕산죽창의거 전적비'가 있다. '징용‧징병이 자발적 지원이었다'고 주장하는 역사부정론자들이 반드시 와봐야 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 앞에 서면, 죽창으로 일제에 맞섰던 애국 청년들의 기개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 경북 경산에 세워진 항일대왕산죽창의거 공적비 ⓒ손호철
역사가 되고 신화로 남은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의 생애
[손호철의 발자국] 7. 경남 산청 지리산 : 순박한 산골소녀는 왜 '최후의 빨치산'이 됐나?
"나는 <지리산>을 실패할 작정을 전제로 쓴다. 민족의 거대한 좌절을 실패 없이 묘사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은 내게는 없다."
이병주는 언론인 시절 "조국이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는 글('조국의 부재')을 써 오랜 술친구였던 박정희에 의해 감옥에 갔다. 이후 작가로 변신한 이병주는 1970년대 한국 최초의 빨치산 소설인 <지리산> 서문에서 이 같이 썼다.
지리산의 많은 부분은 경상남도다. 지리산이 걸쳐 있는 5개 면과 시 중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를 뺀 세 군데, 즉 함양, 산청, 그리고 이병주의 고향 하동이 경상남도다. 산청에는 안내원마을, 내원골로 불리는 마을이 있다. 너무도 깊은 산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안'과 그 한자어인 '내(內)'를 같이 사용한 곳으로, 오지 중의 오지다.
▲ 최초의 빨치산 소설 <지리산>을 집필한 이병주문학관. 대형 만년필이 인상적이다. ⓒ손호철
▲ 경남 함양쪽에서 바라본 지리산 ⓒ손호철
그러나 이제는 도로가 잘 닦여 있고 자연 속에 살고 싶은 사람들이 고급 별장을 지어놓은 별장촌으로 변했다. 이 별장촌을 지나 길이 끝나는 곳, '입산금지' 팻말이 있는 곳까지 차를 몰고 가면, 표시판이 하나 나타난다. '구들장 아지트'라고 쓰여 있다.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은거하다 1963년 체포된 곳이다.
그렇다. 1953년이 아니라 1963년이다! 1963년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된 해이자 5‧16 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정권 2년이 된 때다. 정순덕은 체포 당시 사살된 이홍희와 '2인 부대'로 이 때까지 지리산에서 살아남아 총 13년 동안,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무려 10년 이상, 빨치산으로 활동해 온 사람이다.
▲ 정순덕이 구들장 밑에 아지트를 지어 살았던 곳임을 알리는 산청 내원마을의 표시판 ⓒ손호철
▲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에 재현해 놓은 정순덕의 구들장 아지트 ⓒ손호철
'손호철의 발자국' 남원 편(<한국일보>, 2020년 11월 30일자)에서 살펴보았던 지리산 남부군대장 이현상은 금산 갑부의 아들로, 중앙고보(중앙고등학교) 재학 중 항일투쟁을 시작한 이래 조선공산당 건설 등을 위해 투쟁하다 빨치산으로 변한 '좌파 지식인'을 대변한다.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은 빨치산의 또 다른 얼굴을 상징한다. '무지렁이 민초'들이다. 이병주가 '민족의 거대한 좌절'이라고 표현한 지리산 빨치산은 이현상 같은 좌파 지식인만이 아니라 정순덕처럼 못 배우고 가난한 민초들로 구성됐다. 아니 이들이 다수였다.
▲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에 진열되어 있는 빨치산 사진 ⓒ손호철
정순덕은 1933년 산청 내원마을에서 태어났다. 산속에서 교육을 받은 기회가 있었을 리 만무해, 정순덕은 순박한 산골 소녀로 자랐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빨치산이 생기자 지리산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정순덕은 평지마을로 이주한 이듬해인 16살에 중매 결혼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은 잠시뿐이었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 점령 시절에 그들을 도왔던 남편은 북한군 협력자로 낙인찍히자 국군의 보복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
국군은 수시로 정순덕을 찾아와 남편을 찾아내라고 구타했다. 하루는 정순덕을 뒷산 비석에 묶어놓고 "아침까지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잘 생각해보고 답하라"고 말한 뒤 돌아가기도 했다. 정순덕은 추위 속에 밤새 손을 비틀어 간신히 빼냈고, 겨울옷을 챙긴 뒤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 때 나이 18살이었다. 정순덕은 남편을 만났지만, 부부를 같은 부대에 배치하지 않는 규칙에 따라 다른 부대로 배치 받아 빨치산이 됐다.
정순덕은 주로 취사, 간호 등의 일을 했는데, 얼마 뒤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1952년 정순덕은 무기를 지급받고 전사가 됐다. 한글과 한문을 배우고, 타고난 계급적 현실에 대한 정치교육으로 의식까지 갖추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워 조선공산당 입당도 허가됐다. 1953년 종전협정이 체결됐지만, "빨치산에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 투쟁을 계속했다.
"10년만 버티면 통일이 될 것이다." 정순덕은 이렇게 믿었다. 정전 이후 토벌작전은 더욱 강화됐고 1954년 들어 정순덕 부대는 세 명만이 살아남은 3인 부대로 쪼그라들었다. 식량이 떨어져 화전민들의 식량을 털어야 할 지경까지 몰렸음에도, 정순덕은 "빨치산이 인민의 양식을 빼앗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버텼다.
이들은 외딴 곳 화전민들을 관찰하고 접근해 협력자로 만들었다. 1955년 한 가족을 접촉했을 때, 다음 날 이들이 경찰에 연락하러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살해했다. 1960년 경찰의 저격으로 한 명이 죽어 3인 부대는 2인 부대로 더 축소됐다. 둘은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죽여주기로 약속했다. 1961년에는 평소 믿었던 세포 집을 방문했지만, 총을 들어 자신들을 체포하려던 가족을 몰살시킨 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망실공비는 자수하라!' 경찰은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를 지리산 전역에 뿌렸다. "순덕아 내려오래이." 정순덕 어머니의 자수 권유 방송도 내보냈다. 1963년 정순덕과 이홍희는 겨울 식량 등을 구하기 위해 가깝게 지내온 세포를 찾아갔다가 매복한 경찰과 마주쳤다. 총격전 끝에 이홍희는 즉사했고, 정순덕은 총상 입은 다리를 절단했다. 이로써 최장기인 정순덕의 13년 빨치산 생활과 '지리산 빨치산 시대'가 막을 내렸다.
정순덕은 조사 과정에서 문맹을 가장해 비상한 법정투쟁을 전개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재판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X새끼, 감형만 시켜봐라, 이 X놈아"라고 소리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순덕은 긴 감옥살이를 했다.
"2616번 정순덕 석방!" 23년 뒤인 1985년, 정순덕은 8‧15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충북 음성의 한 가톨릭복지기관에서 지내며 세례(세례명 카타리나)를 받았다. 다큐멘터리 작가인 정충제가 정순덕을 찾아와 자기 집으로 모셨다. 뱀사골 지리산역사관으로 정순덕을 데리고 갔을 때,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순덕이 한자로 된 토벌작전 희생 군경 충혼탑의 추모글을 거침없이 읽자 정충재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문맹의 산골소녀가 빨치산 투쟁 과정에서 한문까지 거침없이 읽을 수 있는 지식과 의식을 갖춘 것이다.
정충제는 취재와 정순덕의 구술에 기초해 <실록 정순덕>을 출판했다. 그러나 쓰지 말라고 당부했던 인민재판 이야기를 기록하자 정순덕이 분노해 결별을 선언했다. 정순덕은 이후 비전향장기수들이 모여 사는 '만남의집'에서 살았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의해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자신이 감옥에서 쓴 전향서는 고문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며 송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송환되지 못했다. 2004년 71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 <실록 정순덕> 표지에 실린 정순덕의 젊은 시절 사진 ⓒ손호철
▲ 정충제 씨가 출옥한 정순덕씨와 살면서 구술을 받아 책을 낸 <실록 정순덕> ⓒ손호철
▲ <실록 정순덕>에 실린 체포 당시 정순덕의 소지품 사진 ⓒ손호철
북한은 김일성의 특별지시로 1964년 정순덕을 주제로 한 <지리산 여장군>이란 영화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선전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상영이 중단됐고 영화도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영화 상영 중 정순덕이 체포됐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정순덕이 대북방송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정순덕은 전향한 남파간첩 김남식 씨가 감옥 순회강연에서 이 사실을 말해 알게 됐다고 한다.
지리산에는 크기에 걸맞게 역사관이 여럿 있다. 뱀사골에는 실내 역사관과 지리산 토벌작전으로 희생된 군경을 위한 충혼탑과 조각이 야외에 있다. 구례 화엄사 입구에는 화엄사를 살린 차일혁 총경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놓은 지리산문화역사관이 있다. 이현상이 사살당한 하동 의신마을에도 작은 지리산역사관이 있다. 이곳에는 사살당한 이현상의 사진이 걸려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이 찡하게 한다.
지리산 역사관 중 가장 큰 것은 산청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이다. 이름에서 반공주의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이 전시관 정원에는 당시의 탱크 등 여러 무기들이 진열돼 있으며, 빨치산 전쟁을 상징하는 다양한 조각들도 같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 건물에는 빨치산 전쟁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는데, 전시관 이름과 달리 반공주의가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에 설치되어 있는 조각. 빨치산과 국군토벌군 사이에서 고통받는 한 여인을 형상화했다. ⓒ손호철
전시 내용 중, 토벌부대(백야전사)의 대장이 친일 행각으로 최근 논란이 된 백선엽이었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그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최근 백선엽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때, 그 앞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전시관 언덕에는 정순덕의 구들장 아지트를 재현해 놓았다. 아궁이의 솥단지를 들어내 구들장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은 뒤, 다시 솥을 얹어 물을 끓이는 방식으로 검색 나온 경찰을 완전히 따돌리도록 고안한 설계가 기가 막히다.
이 아지트를 보고 있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몰랐던 순박한 산골소녀가 한국 역사상 최장기 빨치산 투쟁을 한 '최후의 빨치산'이 돼야했던 이 땅의 비극적 역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동 이병주문학관에는 이병주의 유명한 말이 쓰여 있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지리산의 한 산골소녀는 그렇게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됐다.
'작전명령 5호'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
[손호철의 발자국] 8. 경남 산청‧함양‧거창 : '거창 사건'은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한국현대사, 특히 한국전쟁 전후에서 가장 유명한 민간인 학살사건은 무엇일까? 아마 오랫동안 '거창 사건' 내지 '거창 양민학살 사건'으로 불러온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이 떠오를 것이다. 그 이유는 단일 사건으로 그 규모가 엄청난데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당시 조사가 이루어져 관련자들이 재판을 받는 등 널리 여론화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거창 사건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의 비극적 요소와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거창 사건을 다루기에 앞서 명확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1951년 2월 지리산에서 벌어진 학살을 '거창 (학살)사건'이라 부르지만 거창 학살은 일부에 불과하고 정확한 명칭은 '산청·함양·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이다.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1951년 2월 7일 아침, 산청(정확히 이야기해 산청군 금서면 가현)에서 시작해 함양(지곡면)을 거쳐 2월 11일 거창(신원면 과정리 박산골)까지 학살을 자행했다. 다시 말해, 이 학살은 지리산 동남부를 돌며 5일간 지속된 '연쇄학살사건'이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는 알려진 거창 719명 이외에 산청·함양에서도 705명이 희생되어 모두 1424명에 달한다.
하지만 거창 학살사건을 아는 사람도 산청‧함양 학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나 역시 부끄럽지만 이번 역사탐방 이전에는 산청‧함양 학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거창추모공원을 찾느라 내비게이션을 뒤지면서 산청‧함양 추모공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곳을 방문해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비로소 학살의 전모를 알게 됐다.
▲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희생자 위령탑 ⓒ손호철
문제는 왜 거창 학살만이 알려지고, 정작 학살의 시작인 산청‧함양 학살은 묻히고 말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가 기가 막히다. 그것은 지역 국회의원의 차이였다. 당시 학살에 대한 정보를 몰래 제보 받은 거창의 (무소속) 신중목 의원은 이를 국회 본회의에서 폭로했다. 반면 여당 소속이던 함양 의원, 병원 입원을 핑계로 삼은 산청 의원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에 침묵했다는 것이 산청함양 유족회의 조사 결과이다.
신 의원의 폭로로 국회가 조사단을 꾸며 현장조사를 갔으나, 여순사건 때 무자비한 학살로 '살인마'라는 별명을 얻은 김종원 정보대령이 국군을 빨치산으로 위장시켜 조사단을 공격하도록 했다(김종원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8. '토벌대의 두 얼굴' <한국일보>, 2020년 12월 7일자 참조). 조사단은 이에 놀라 제대로 조사도 못하고 철수했다.
하지만 외신에 학살 사실이 보도되자 이승만 정부는 서면으로 국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산청‧함양 학살을 완전히 누락하고 거창도 187명만 학살한 것으로 보고했다. 이에 따라 군사재판에 회부된 관련 지휘관들은 징역 3년부터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지만, 이후 사면을 받고 풀려나 승승장구했다.
▲ 산청함양추모공원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는 산청‧함양‧거창 학살의 경로. 1951년 2월 7일 산청에서 시작해 함양을 거쳐 2월 11일 거창에서 끝난다. ⓒ손호철
"이 년들도 죽여 버리자."
"어차피 오늘 밤 호랑이 밥이 될 턴데 뭐."
1951년 2월 7일 아침, 7시경 3대대 군인들은 산청군 가현마을 40가구 100여 명을 모아 뒷동산 골짜기에 4열종대로 앉혀놓고 집단학살했다. 어린 이점순 씨와 두 여동생은 그 와중에도 이렇게 살아남아 부모님을 비롯한 123명의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 지킬 곳은 견고한 벽을 쌓고 나머지 지역은 빈 들판만 남겨라). 2월 2일 이 지역을 담당하는 11사단 9연대는 이 같은 이름의 작전명 5호를 3대대에 하달했다. 빨치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복구 지역의 주민은 전원 총살하라"는 지시였다.
▲ 산청‧함양‧거창 학살을 지시한 작전명령 5호의 내용과 배경 설명 ⓒ손호철
북쪽으로 이동, 산청군 방곡에 도착한 3대대는 오전 10시쯤 마을 사람들을 모았다.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부녀자와 노인들이어서 "젊은이들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대부분 "군대에 갔다"고 답했지만, 군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212명을 무차별 학살했다.
다시 북상해 오후 1시 30분 경 함양군 휴천면 점촌에 도착한 군인들은 마을 우물가에 63명을 모아놓고 사살했다. 노하우가 생겼는지 자혜, 지곡, 손곡, 주암, 주상, 화계마을의 주민들을 끌고 북상한 군인들은 경호강변에 있는 서주마을 둔치에 오후 4시경 도착했다. 이곳에서 310명을 학살하고 시신 더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렇게 하루 동안 산청‧함양 10개 마을 주민 705명이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이다.
산청‧함양추모공원은 두 번째 학살지인 방곡에 세워져있다. 역사관이 리모델링 중이라 추모공원만 볼 수 있었던 거창과 달리, 이곳은 추모관에 사건의 배경, 진행 과정, 이후 명예회복 과정들을 다양한 시각적 자료와 함께 잘 전시해 놓았다(거창 역시 답사 후 리모델링을 끝내고 역사문화관을 개장했다고 한다).
▲ 방곡마을 학살을 그래픽으로 만든 슬라이드 ⓒ손호철
전시물 중 가슴 아픈 것은 사체로 발굴된 300여 명을 분류한 결과이다. 이중 여성이 51.3%였고, 어린이와 청소년 45.3%, 60세 이상 노인 5%였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리산 밑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어린이들이 국군에 의해 이처럼 비참하게 죽어가며 자신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가슴이 메어졌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지휘라인에 있었던 사단장 최덕신 장군, 연대장 오익경 대령,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대대장 한동석 소령 등 학살주범 4인을 빚어놓은 조각상이다. 다들 학살의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총애로 승승장구한 이들 가운데 이력이 특이한 사람은 최덕신이다. 그는 박정희 아래에서 주독대사,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내다 월북해버렸다. 민간인 학살 주범의 월북이라니, 기이한 이야기이다.
▲ 산청함양추모공원 기념관에는 김종원 등 학살 주범 4인을 잊지 않기 위해 이들의 모습을 부조로 만들어 놓았다. ⓒ손호철
▲ 거창사건추모공원 입구에는 1954년에 있었던 학살자들에 대한 재판판결문을 크게 설치해 놓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후 사면을 받고 승승장구했다. ⓒ손호철
산청 생초초등학교에서 야영을 한 다음 날 거창군 신원면으로 넘어간 학살군은 9일 덕산리 청연골 주민 84명을, 10일 대현리 탄랑골 주민 100명을,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무려 517명을 학살함으로써 5일 간의 잔혹한 학살극을 마무리했다.
산청‧함양추모공원을 떠나 거창사건추모공원에 다다르면 길가에 '거창사건 희생자 박산골 학살처'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화살표를 따라 산 쪽으로 올라 골짜기에 들어서면 커다란 바위와 '총알흔적 바위'라는 팻말이 나타난다. 517명의 목숨이 처참하게 사라진 박산골이다. 70년이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바위에는 아직도 총탄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놀랍게도 이중 3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거창 학살을 알리는데 일조했다.
▲ 거창의 민간인 517명이 희생당한 박산골 총알바위. 아직도 바위에는 총알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손호철
거창사건추모공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안과 밖의 차이'다. 밖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공원 안으로 들어가자 '거창양민학살사건 판결문', '거창양민학살 사건 안내도' 등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사방에 표기돼 있다. 정부가 '거창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이라는 표현을 팻말에서도 막아왔다는 이야기다.
거창 사건은 다른 많은 학살 사건들과는 달리 용감한 지역 국회의원 덕분에 학살 당시의 비극이 알려지는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명예회복의 길은 길고 험난했다. 추모공원 초입에 설치되어있는 문병현 유족회 부회장의 공로비가 이를 증언해주고 있다.
암흑과 통곡 속에서 살아온 유족들은 보도연맹 등 다른 학살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유족회를 만들어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에 들어갔다. 특히 5월에는 학살 당시 학살 대상자를 선별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신원면장 박영보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그가 거부하자 분노한 유가족들이 그를 생화장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거창 학살은 다시 한 번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국회는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입법에 들어갔고, 문 부회장의 주도 아래 시신을 수습해서 합동묘소를 설치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추모비도 설치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군사정부는 추모비를 부숴 묻어버렸고 합동묘역을 해체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문 부회장을 구속해 반국가단체구성죄로 고발했다.
▲ 4‧19혁명 후 설치된 거창학살희생자 위령비를 5‧16 쿠데타 후 군부가 부숴 버렸다. ⓒ거창사건추모공원 제공
▲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희생자 추모 조각상 ⓒ손호철
긴 어둠은 민주화가 된 뒤인 1996년, 즉 학살 45년 만에 국회가 명예회복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끝났고, 2004년 거창추모공원을 준공했다. 그러나 같은 학살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역사적 체험 때문에 산청‧함양과 거창 학살 유가족들은 추모와 명예회복사업을 함께 추진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다행히 두 유가족회는 2018년 국가에 대한 배상요구 등을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거창을 떠나며 생각해보니, 산청‧함양‧거창의 민간인 학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후 베트남전쟁, 그리고 1980년 광주의 시민 학살로 이어져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억울한 영혼들이여, 고히 잠드소서.
▲ 거창 학살 현장 사진
<보론> 한국전쟁 전후 학살 유가족 박정희?
"마산 유족회입니더."
"저는 부산기지사령부사령관 박정희라고 합니더. 내도 같은 유족인데, 점심 사면 안 되겠십니꺼?"
4‧19혁명 후 한국전쟁의 학살 유가족들이 전국유족회를 조직해 명예회복에 나선 때인 1960년 8월25일, 전국유족회 회장인 마산유족회 노현섭 회장에게 박정희부산기지사령부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박만순, "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사면 안 되겠심니꺼?'", <오마이뉴스> 2020년 11월 30일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구미경찰서를 공격하고 도주하다 사살됐으니, 자신도 유족이라는 박정희의 말은 사실이었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6, '대구는 진보도시였다', <한국일보> 2021년 2월 1일자 참고). 박상희의 부인인 조귀분은 선산유족회 부녀부장으로 열심히 활동했고 박정희는 형수를 위해 유해 발굴 때 군 트럭도 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1년 뒤 5‧16 쿠데타에 성공하자 표변한 박정희는 한국전쟁 유가족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는 등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을 탄압했다. 쿠데타 이틀 뒤인 1961년 5월 18일 노현섭 씨는 영장도 없이 방첩대에 연행되어 혁명재판부로부터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1972년까지 11년 간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박근혜도 치켜세운 '2‧28 운동', 대구의 '민주화 전통'을 걷다
[손호철의 발자국] 11. 대구 명덕역 :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지' 대구?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 2‧28 민주운동'. 대구 중심가에 있는 지하철역인 명덕역을 나서면 고가 기둥에 커다랗게 쓰인 글씨가 우리를 맞는다. 이를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의문에 빠졌다. "진짜 내가 광주가 아닌 대구에 온 것인가?"
이 문구는 두 측면에서 혼란스럽다. 하나는 '한국 민주혁명'이 다른 곳이 아닌 대구에서 시작됐다는, 통념과 떨어진 주장으로 인해 혼란스럽다. 둘째로, '민주화 운동'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것 같은 '보수의 도시' 대구가 이 같은 사실을 자랑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럽다. 그것도 '민주혁명'이라는 '과격한' 용어를 쓰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돌출적인 문구가 아니다. 고개를 돌리면 역 앞의 거리 이름을 적은 표지판을 볼 수 있는데, 거리 이름이 '2‧28 민주로'다. 지하철역 표지판 역시 '명덕' 옆에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라고 표시돼 있다. 한마디로, 2‧28 민주운동을 의식적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 대구 명덕역에는 대구가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점이었다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어 보는 이를 의아하게 한다. ⓒ손호철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기둥에서 길을 건너면, 보도블록 한 가운데 작은 표지석이 나타난다. 이곳에 "1961년 2‧28 대구 학생민주의거를 기념하는 탑을 건립했다가 1990년 2월 20일 두류공원으로 옮겼다"는 표지석이다. 그렇다. 1960년 2월 28일 학생 시위가 벌어졌던 현장에 이를 기념하는 탑이 있었지만, 1990년 이를 철거해 구석진 공원으로 옮겼다.
▲ 원래 명덕역 앞에 설치되어 있다가 대구가 보수화되면서 도시개발과 함께 외곽으로 이전한 2.28 민주의거 기념탑 ⓒ손호철
명덕역 앞의 두 표식, 즉 2‧28 민주운동을 찬양하는 대형글씨판과 기념탑의 이전을 알리는 표지석은 2‧28 민주운동이 무엇이고, 그 기념비는 왜 1990년 역사의 현장에서 철거돼 두류공원으로 옮겨졌으며,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 대구는 왜 다시금 2‧28 민주운동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나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1960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명덕역이 들어서는 명덕네거리가 위치한 대구 중심가에선 경북고, 경북여고 등 대구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자유와 정의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이승만 정부가 이날 열리는 야당의 선거강연회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동안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과 '관제데모' 동원에 불만을 품어온 대구지역 고등학교 지도부들은 이날 대구 중심가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로 사전 모의했고, 학생들은 이날 교문을 박차고 나와 항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일부 연구자들에 따르면, 2‧28 주동자로 알려진 명망가 중 일부는 시위 계획이 사전 발각되자 경찰의 지시에 의해 경찰차를 타고 시위중지를 촉구하는 선무방송을 했지만 이미 밑으로부터 터져 나온 학생들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2개 여자고등학교가 시위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투쟁에 여학생들이 체계적으로 같이 한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 2.28 민주운동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 2.28 민주항쟁 사진.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해 거리로 나왔다. ⓒ손호철
대구의 이 시위는 1953년 종전으로 분단체제가 완성되고 이승만 독재체제가 확립된 뒤, 관제데모가 아닌 "최초의 자주적 시위"이며, 2‧28 민주운동은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이라는 것이 2‧28 관계자들과 대구의 주장이다. 나 역시 4‧19 혁명은 경찰이 김주열 군을 죽여 바다에 버린 마산의 '3‧15 의거'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알고 있었고, 3‧15 이전에 대구의 2‧28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2‧28이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명덕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는 최근 건설된 2.28 민주운동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민주운동의 문을 열다'라는 큰 글씨가 눈에 띈다. '2‧28이 한국 민주화운동의 문을 열었다'는 주장이다.
▲ 명일역 근처에 새로 지어진 2.28 민주운동 기념회관 ⓒ손호철
전시관의 한 지도에는 4‧19 혁명 당시 발생한 민주화운동이 지역과 날짜로 표시돼 있는데, 이를 보고 모르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2‧28 대구 다음날인 2월 29일은 전주에서, 3월 8일, 10일, 12에는 각각 충청도 대전과 충주, 청주에서, 4월 19일에는 광주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지도는 대구의 시위가 마산(3월 15일)으로 옮겨가고 이어 서울(4월 19일)로 전파됐다는 점을 붉은 불빛으로 표시해 두었다.
▲ 기념관에는 4.19 혁명이 대구 2.28 투쟁으로 시작해 마산을 거쳐 서울로 번져간 것을 표시해 놓았다. ⓒ손호철
▲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는 2.28 민주운동 관련 조형물 ⓒ손호철
시기적으로 2‧28이 가장 앞선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시위가 언론보도 등을 통해 얼마나 마산과 서울로 알려져 실제 4‧19 혁명의 촉발제가 됐는지는 미지수다. 투쟁 내용 역시 2‧28의 경우, 4‧19 혁명이 추구했던 '이승만 하야'와 같은 '과격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대구 10월 항쟁의 실패와 처절한 학살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1960년대까지는 대구가 '야당도시', '민주선도도시'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박근혜가 대통령 시절에 보낸 축하 메시지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메시지는 탄핵 전인 2014년 작성된 것으로, 이 해부터 2‧28 기념식이 국비 지원으로 열리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다.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2‧28에 대한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2‧2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민주화운동으로는 1960년 3‧15 의거,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1987년 6‧10 항쟁에 이어 다섯 번째다.
▲ 탄핵 전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 보낸 2.28 민주운동 축하 메시지가 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다. ⓒ손호철
명덕역 앞의 표지석이 알려주듯이, 4‧19 혁명 1년 뒤에 명덕네거리에 세워졌던 기념탑은 29년이 흐른 뒤인 1990년 두류공원으로 옮겨졌다. 명덕네거리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이전이겠지만, 70~80년대를 거치며 대구가 그만큼 보수화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2‧28에 별 관심도 없고 그다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지금처럼 2‧28을 대구가 자랑해야 할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이라고 여겼다면, 이를 두류공원으로 쉽게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리를 옮겨 두류공원에 설치된 '2‧18학생의거기념탑'은 생각보다 큰 탑이다.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은, 바지 둘을 세워 놓은 것 같은 이 탑을 보고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가 궁금했는데, 기념관에서 그 설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큰 모양은 남학생을, 작은 모양은 여학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60년 전에 만든 조각이라고는 하지만,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역사적인 민주화운동을 성차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조각으로 형상화한 것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와 조각을 바꿀 수는 없어도 최소한 그 같은 설명은 기념관에서 치워버려야 한다.
대구 중심가에는 근사한 2‧18민주운동기념관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2‧28 기념중앙공원도 생겼다. 그만큼 2‧28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평가, 나아가 대구의 인식과 평가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대구도 이제 "우리가 사실은 민주화운동의 원조야"라고 이야기할 만큼, 우리 사회에 '민주'가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이루어온 우리 민주화의 영향일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바라보는 마음은 흐뭇하다.
일부에선 자유민주주의를 "무찌르자 공산당!"과 같은 극우반공주의로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는 자신과 다른 급진적인 사상이나 표현까지도 보장해주는 민주체제를 의미한다. 이점에서 사실 국가보안법으로 아직도 특정한 사상을 금지하고 있는 우리는 아직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2‧28기념중앙공원을 거닐며 1960년대의 '민주선도도시' 대구를 회고한 나는, 대구가 자랑스러운 전통을 부활시키기를,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이름 아래 '보수주의'와 철 지난 '극우반공주의'를 선도하는 도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진정한 자유와 민주를 위해 앞장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선도도시'가 되기를 기원했다.
<보론>
▲ 1946년 10월 2일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에 분개한 대구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대구 10월 항쟁이라는 시위를 벌였다. ⓒ미국립문서기록청 자료.
대구는 1960년 2‧28 민주화운동만이 아니라 1946년 미 군정에 저항해 제일 먼저 들고 일어선 곳(대구 10월 항쟁)이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진보적인 지하당과 지하서클이 가장 왕성했던 지역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6. '대구 10월 항쟁' <한국일보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469&aid=0000576563 > 2021년 2월 1일자와 '손호철의 발자국' 27. '인혁당재건위' 2021년 2월 8일자 참조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469&aid=0000578624 ).
▲ 1946년 10월 2일 경찰들이 대구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발포 준비에 나서는 모습이다. 대구 시민들은 노동자 김용태가 경찰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반발해 시위를 벌였다.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
1946년 10월 2일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에 분개한 대구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사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립문서기록청 자료.
▲대구 10월항쟁으로 대구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경에 인계된 사람들의 명단. 대부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대구는 '보수의 메카', '수구 세력의 메카'로 변화했다. 언제부터, 왜 대구가 이렇게 변화했는가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8. '대구의 보수화' <한국일보> 2021년 2월 15일자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469&aid=0000580151 참조.
▲전직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모두 대구 출신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진보의 요람'과 '보수의 아성' 공존하는 이 도시
[손호철의 발자국] 12. 경남 창원(마산) : 3‧15와 부마항쟁, 그리고 '두 도시 이야기'
김주열과 부마항쟁, '야당도시'. 이제는 창원의 일부가 됐지만, 마산 하면 개인적으로 아구찜 외에 떠오르는 것들이다. 마산은 부산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의 지지를 받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은 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화됐다. 1990년 이후의 대통령선거와 총선 결과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3‧15 의거와 부마항쟁의 기념 방식의 차이에서 잘 나타난다. 3‧15 의거는 한 때 마산의 자랑으로 사방에 그 기념물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옛 중심가에는 3‧15의거기념탑이 우뚝 솟아 마산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기념탑을 올려다보고 있자, 3‧15 의거 사상자에 대해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이 했다는 망언이 떠올랐다.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
▲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난 3.15 의거를 기념하는 마산 중심가의 기념탑 ⓒ손호철
1960년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민주항쟁 가운데,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대구의 2‧28 민주운동이다('손호철의 발자국' 11. '대구 2‧28 민주운동' <프레시안>, 2021년 3월 31일자 참조). 하지만 3‧15 부정선거 이후 가장 선도적으로 일어나 이승만의 몰락을 가져온 곳은 마산이다. 이승만 정권은 마산에서도 전면적인 부정선거를 했다. 야당인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투표소에 들어가 사전투표 등 부정선거 현장을 적발하고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이날 저녁 민주당사 앞에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1만 명이 넘어섰고 경찰이 발포를 했다. 시위대도 저항하며 여당인 자유당사, 언론사, 파출소 등을 부쉈다. 7명이 사망했고 수 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3‧15 부정선거 후 일어난 첫 항쟁인 3‧15 항쟁이다.
▲ 부정선거로 유권자수보다 많은 투표용지가 나오자 투표용지를 불지르는 장면이 담긴 3.15기념관 전시물 ⓒ손호철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 분노한 시민들은 2차 항쟁(4‧11 항쟁)을 시작했고, 이는 전국적으로 번져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두 차례의 항쟁으로 12명이 사살됐고 수백 명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했다. 이승만 정권은 마산시위를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 민주당 도의원을 '남로당 출신 빨갱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 3.15기념관에는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군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어 보는 이를 분노하게 만든다. ⓒ손호철
12명의 희생자를 위한 묘지는 1968년에 조성된 것인데, 김대중 정부 시절 성역화 작업에 들어가 2002년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기념관과 기념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념관에는 3‧15 부정선거와 두 차례의 항쟁에 대한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바닷가는, 이제 바다 매립과 개발로 인해 찾기가 쉽지 않다. 길을 헤맨 끝에 김주열 인양지를 간신히 찾아가자 그의 상반신을 그린 벽화와 약력 등이 나를 맞았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마산 앞바다를 보고 세워진 표지판이다. 김 군의 처참한 시신이 떠오른 바다를 알려주는 안내판이다.
▲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오른 마산항구에 인양지 표시가 설치되어 있다. ⓒ손호철
3‧15 의거에 대한 기념물들이 잘 조성된 반면, 훨씬 '현재성' 있는 부마항쟁은 그렇지 않다. 부산은 그래도 시내 한가운데에 민주공원을 건설하는 등 눈에 띄는 기념물을 만들었다('손호철의 발자국' 30. '부마항쟁', <한국일보> 2021년 3월 1일자). 하지만 마산은 부산과 사뭇 다르다.
부마항쟁 20주년인 1999년 세운 부마항쟁기념물은 일상적인 항쟁기념물과는 전혀 다른, 특이하고 아름다운 조각이다. 문제는 이 조각이 시내 중심가에 있는 3‧15 의거탑과 달리, 과연 그런 조형물이 있기나 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마산 서쪽 끝에 위치한 서항공원이라는 작은 공원(방송통신대 창원시 학습관 앞)에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3‧15 의거에 이어 민주 성지 마산의 영원한 혼이 된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해 나가고자 이 조형물을 세웁니다." 문구는 자랑스럽지만, 이 조형물은 창피한 위치에 있다. 한마디로, '찾아오지 말라'는 조각 같고, 부마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잊기 위한 '망각탑' 같다.
시내에 설치하려 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 구석진 곳으로 귀향을 왔다고 한다. 3당 합당 이후 보수화된 이곳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박정희에 저항해서 일어난 부마항쟁은 부담스러운 사건인 것이다.
▲ 3.15의거탑과 달리, 아무도 찾지 않는 시 한 구석으로 귀양보내듯 설치한 1979년 부마항쟁 기념 조각 ⓒ손호철
마산항쟁의 진원지인 경남대학교도 마찬가지다. 경남대학교에는 부마항쟁 30주년인 2009년 10월 마산항쟁의 출발지라는 의미를 담은 '시원석(始元石)'이라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3‧15 민주정신으로 일어난 10‧18 부마 민주항쟁의 그 날을 기억하며'라고 쓰여 있는 이 기념물도 찾아오지 말라는 듯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어, 찾느라 애를 먹었다(부산대학교 기념물에는 '10‧16부마민중항쟁'이라 쓰여 있지만, 경남대학교는 마산항쟁이 이틀 뒤에 일어난 점을 기리는 듯 '10.18부마민주항쟁'이라고 쓰여 있다.).
부마항쟁의 국가기념일 지정을 놓고 10월 16일을 주장하는 부산과 10월 18일을 주장하는 마산이 부딪쳤지만, 10월 16일로 결정됐다. 부마민주기념재단 마산 사무실은 부마항쟁이 격렬했던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다. 부마항쟁이 두 곳에서 일어난 만큼 기념재단도 두 곳에 있다. 기념식은 10월 16일에 하되 부산과 마산 두 곳이 돌아가며 진행하며, 재단 운영권도 3년씩 돌아가며 가지기로 했다. 항쟁 피해 신고를 받고 있는데, 구속자만 1500명인데도 신고한 사람이 2020년 5월 현재 300명대에 불과하다고 한다. 당시 시위대에 의해 불탄 파출소는 이제 소방서로 바뀌었다.
▲ 부마항쟁 당시 마산 지역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불질렀던 파출소 자리에는 이제 소방서가 들어섰다. ⓒ손호철
주목할 것은 마산이 박정희 시절 외국자본을 위해 만든 (마산)수출자유지역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입주 업체는 미국과 일본의 군소 전자업체들로,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유입됐다. 박 정권은 외국 기업의 노동조합 구성을 금지시켰지만, 간간히 저항이 일어났다. 부마항쟁 때에는 가까운 창원 지역의 노동자들까지 합세해 부산과 달리 노동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특히 1980년대 말 미국으로 원정투쟁을 가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마산‧창원 여성노동자회에 들려 당시의 치열한 투쟁 기록들을 보고 있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산자유무역지역으로 이름을 바꾼 공단은 업종도 바뀌어 이제는 남성노동자들이 대부분이며 노동운동이 미미하다고 한다. "게다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상대적으로 젊은 노동자들이 많은 창원과 달리, 보수적 정치 색깔을 가지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들이 선망하는 교수(경남대학교)직을 던지고 노동운동에 전념해온 임영일 미래를 준비하는 노동사회교육원 이사장의 설명이다.
▲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에는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을 그린 작품 사진 등이 걸려 있다. ⓒ손호철
▲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에 전시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장면 ⓒ손호철
"이대로 길을 내고 오른쪽은 공장, 왼쪽은 생활시설을 지으라." 박정희는 창원 지도를 놓고 자로 줄을 그어 지시했다고 한다. 1973년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내걸고 방위산업 등 중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건설한 신도시이자 계획도시 창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중공업단지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적이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원시를 달려보니 그 같은 도시계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에서 본 북한 평양의 거리를 달리는 기분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도시 끝에 있는 로켓 모양의 탑이다. 신기해서 다가가 보니 박정희의 친필로 쓴 '정밀산업진흥의 탑'이었다.
▲ 창원 중화학단지를 상징하는 '정밀공업진흥의 탑'. 박정희의 친필로 국방산업을 향한 박정희의 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손호철
▲ 박정희가 국방산업 육성을 목적으로 만든 창원의 공업단지 ⓒ손호철
창원은 중공업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울산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이 집중된 노동자 도시로 발달했다. 특히 숙련공 남성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있다. 이들은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전설적인 마창노련(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을 만들었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을 거쳐 이제는 민주노총의 중심축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결과가 '진보정치'다.
▲ 민주노총의 뿌리가 된 마창노련의 역사를 기록한 책 ⓒ손호철
3당 합당 이후 계속 보수정당이 승리해온 마산 지역과 달리, 창원 지역은 2000년대 들어 총선에서 권영길 두 번, 노회찬 한 번, 여영국 한 번 등 네 번이나 민주노동당과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에게 승리를 선사한 '진보도시'다. 노동자 도시로 알려진 울산보다도 더 많은 진보의원을 배출한 진보정치의 요람이다.
2020년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민중당 등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안타깝게도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됐다. 하지만 그가 47.3% 득표에 그쳤다면,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34.9%를 얻었고,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15.8%, 민중당 후보가 1%를 얻어 진보개혁 후보들이 51.7%를 득표했다.
찰스 디킨스의 명작에 <두 도시 이야기>라는 소설이 있다. 이제는 하나의 도시로 통합됐지만 창원시는 노동자 중심의 '진보 창원'과 '보수 마산'이 공존하는, 또 다른 '두 도시 이야기'이다. 역사적인 야당 도시에서 보수 도시로 변해버린 마산과 우리 사회에서 예외적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한 진보 도시 창원의 공존을 바라보며, 도시의 변천과 '도시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진보의 씨를 뿌리다가 황망히 저세상으로 떠난 노회찬 의원이 보고싶어졌다.
▲ 진보도시 창원에서 진보의 꿈을 키우던 노회찬 의원은 이제 모란민주공원에 누워있다. ⓒ손호철
▲ 모란민주공원에 잠든 노회찬 전 의원의 묘와 그를 기리는 이들의 흔적. ⓒ손호철
'간첩' 누명에 떠돌다 귀천 후에야 고향땅 밟은 세계적 작곡가
[손호철의 발자국] 13. 경남 통영 : 동백림 사건으로 '상처받은 용', 윤이상 이곳에 잠들다
'한국의 나폴리'. 개인적으로 전남의 강진·해남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인 통영의 별명이다. 통영은 개인적으로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 2학년 때, 수배를 피해 도망을 왔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옥으로 직행한 슬픈 추억을 가진 곳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다도해와 세월을 비껴간 것 같은 아담한 도심, 그리고 한국 최대의 굴 생산지답게 싱싱한 굴 요리로부터 충무김밥, 중앙시장의 시락국 등 풍부한 먹거리와 좋은 지인(고 노회찬 의원의 고등학교 동기이며 이곳에서 '건강한 굴양식'을 하는 시인 장석 씨) 때문에 자주 찾는다.
▲ '한국의 나폴리' 통영의 야경 ⓒ손호철
이 같은 매력과는 별개로, 통영에 들어서면 나도 모르게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특히 2018년부터 찾게 된 미륵도 관광특구의 언덕에 서면 그러하다. 이 언덕에 서있는 멋진 현대식 건물 뒤쪽으로 가면 커다란 천연석으로 만든 묘비석이 통영의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처염상정(處染常淨)'. 돌에 새겨진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맑다'는 뜻의 글 밑에는 '윤이상 1917~1995'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 통영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지만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해외간첩단사건'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의 희생자였던 윤이상의 고향이다. 따라서 이곳에 서면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에 대한 자부심과 동백림 사건이 웅변적으로 보여준 분단의 슬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2000년대 들어 그가 우리 사회에서 '복권'이 되어 그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고 통영국제음악당을 지은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8년에는 독일에 있던 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 윤이상 묘가 있는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내려다본 통영의 모습 ⓒ손호철
▲ 통영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이상의 무덤 ⓒ손호철
충남 예산에는 비구니 스님들의 암자가 있는 수덕사가 있다. 그 앞에는 초가지붕을 한, 풍치 있는 수덕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수덕여관 앞에는 땅에 누운 커다란 바위에 글자를 닮은 특이한 암각들이 눈에 띈다. 윤이상과 함께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가 이응로 화백(1904~1989)의 흔적들이다. 일본에서 생활했던 그는 해방 후 귀국해 수덕여관을 인수해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바위에 새겨놓은 그림들도 그의 작품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두 명의 세계적인 예술가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첩의 누명'을 쓰고만 것이다.
▲ 충남 수덕사 앞 바위에 새겨진 이응로 화백의 글씨. 그 역시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치렀다. ⓒ손호철
"나는 공산당이 아니다." "아이들아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다." 1967년 6월 말. 윤이상을 심문하던 조사관이 조사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깨서 보니, 벽에는 피로 이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윤이상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사관이 잠든 사이 윤이상은 책상에 있던 사각형 재떨이로 머리를 쳐 자해를 하고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손가락에 묻혀 쓴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7월 3일부터 17일까지 무려 7차례에 걸쳐 유럽 거주 지식인들과 유럽에 유학한 바 있는 국내 교수들, 이들 교수들과 연결된 학생운동 지도자 등 203명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벌이고 대한민국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동백림 사건('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을 발표했다. 203명에는 윤이상, 이응로, 윤이상 씨 부인 이수자 등 해외 거주 교민 30명과 황성모 서울대 교수, 김중태, 현승일 등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자들 이외에 시인 천상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독일에서 공부한 서울대 문리대 교수이자 한일회담 반대투쟁 등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의 지도교수였던 황성모 교수를 통해 북한이 학생운동을 조종하고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대한민국은 충격에 빠졌고 총선 부정선거 규탄투쟁을 벌이던 학생운동은 풍비박산 났다. 중앙정보부가 공작원들을 파견해 독일과 프랑스에 윤이상, 이응로 등을 사실상 불법적으로 납치한 것이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도 들끓었다.
▲ 윤이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백림 사건 당시의 윤이상 모습 ⓒ손호철
윤이상과 이응로는 공통점이 많다. 서양 예술에 각각 동양적 음악과 동양화 기법을 도입해 주목을 받은 것이 그러하고, 둘 다 1950년대 후반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윤이상이 통영의 죽마고우로 월북한 음악가 친구의 소식을, 이응로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들 소식을 물어보려 동백림(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것도 비슷하다.
서베를린에 살고 있던 윤이상은 이후 북한대사관을 10여 차례 방문했고 여비 등의 명목으로 금품도 받았다. 자신의 작품 테마로 구상하고 있던 고구려 강서고분도 보고 북한의 실상을 보고 싶어 1963년 북한을 방문했다.
하지만 윤이상은 재판과정에서 "북한의 노동당 가입 권유는 일언지하에 거부했으며 북한과 접촉한 것은 결코 사상적으로 동조해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부인 이수자는 윤이상이 돈을 받은 의리 때문에 북한대사관에서 전화가 오면 몸서리를 치면서도 찾아갔고, 다녀와서는 "내가 백림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괴로워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윤이상 등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대접을 받고 금품도 받았으며 일부는 북한은 방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지시를 받아 간첩 행위를 했다는 정부의 발표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 체제하임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간첩죄에 대해서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고, 다만 '적국'인 북한 방문 등에 관해서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이에 화가 난 박정희는 유신 후 판사 재임명제를 도입해 사법부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변질시켰다).
윤이상, 이응로는 국제예술가들의 서명운동과 독일, 프랑스 등의 압력으로 석방되어 독일과 프랑스로 돌아갔다. 황성모 교수와 김중태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 같은 민비연 관련자들도 가벼운 형을 받는데 그쳤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이들 유럽의 지식인들은 국내와 달리 국가보안법 등을 잘 몰랐고 북한에 대해 강한 적대감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앞서 있었고, 외화송금 제한 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유학생 등은 북한의 호의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많은 유학생 등이 북한에 대해 알고 싶거나 한식이 먹고 싶다는 이유로도 동백림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문제는 독일 유학 시절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 임석진 교수가 자신의 대북접촉 전력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정보기관에 자수를 하면서 불거졌다.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임 교수를 직접 청와대로 불러 설명을 듣고 공작팀을 만들어 유럽 등에서 관련자들을 잡아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당시 반공에 목을 매고 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이들을 좌시할 수 없는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고 판단해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법을 무시하고 이들을 독일, 프랑스 등에서 잡아 온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남편과 함께 옥고를 치른 윤이상의 부인 이수자는 "국내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동서독 간 교류를 보고 동백림을 왕래해서 그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사전에 한국대사관이 경고라고 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이들에게 무리하게 간첩죄를 씌워 상처를 주었지만 대법원이 간첩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을 간첩으로 발표해버림으로써, 그가 간첩이란 오명을 쓰고 평생 쓰고 살도록 했다. 그 결과 윤이상, 이응로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소위 '반한친북인사'로 만들고 말았다.
주목할 것은 동백림 사건의 해외 불법납치공작의 경험이 1970년대의 비극적 사건들을 잉태했다는 점이다. 1973년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과 1970년대 말에 있었던 '김형욱 살해사건'이 그것들이다, 유신 선포 당시 외국에 있었던 김대중은 일본을 중심으로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서 서울로 끌고 왔다. 김형욱 사건은 더욱 극적이다. 중앙정보부장으로 동백림 사건을 터트린 김형욱은 권력에서 밀려나자 해외로 도주, 미국에서 반(反)박정희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가 그를 프랑스로 유인해 비밀리에 살해한 것이다. 이처럼 동백림 사건은 이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불법해외공작의 효시이다.
▲ 통영 윤이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곡 중인 윤이상의 모습이 담긴 사진 ⓒ손호철
윤이상은 1969년 독일로 돌아간 뒤 독일로 귀화했고 1972년 오페라 '심청'으로 뮌헨올림픽의 서막을 여는 등 세계적인 작곡가로 주가를 날렸다. 동백림 사건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성숙해진 그는 1980년 광주학살을 보고 '광주여 영원하라'를 작곡했다. 1988년에는 자신이 직접 옥고를 치르며 체험한 분단을 넘어서기 위해 남북한 정부에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안해 1990년 분단 45년 만에 남북 간의 음악 교류를 성사시켰다.
▲ 윤이상은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식에 '심청'을 공연해 서구음악의 정상에 섰다. ⓒ손호철
윤이상은 통영을 무척이나 사랑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1994년 서울 등 국내 주요 도시에서 윤이상음악축제가 열리면서 귀국을 준비했으나, 한국 정부가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옹졸하게 요구하자 귀국을 거부했다. 윤이상은 독일 예술에 기여한 공으로 독일 대공로훈장과 괴테상 등을 받았다.
결국 귀국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목숨을 거둔 그는 이제 윤이상 생가터에 세워진 윤이상공원의 동상으로 우리를 맞는다. 공원에 세워진 윤이상기념관에 가면 그의 천재성과 분단과 동백림 사건으로 '상처받은 용'의 아픔 등 그의 체취를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윤이상의 음악관을 배울 수 있다.
"우주에는 항상 흘러 다니는 음(音)이 존재한다." "음악은 작곡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음을) 낳는 것이다." 음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서양음악과 달리 그는 도교적 관점에서 이처럼 주장했다. 그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했다. "나의 음악언어는 차라리 정의를 향한 절규에 더 가깝습니다. 나의 음악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단결을 호소합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 음이 하나의 우주라는 윤이상의 음악관에 대한 설명 ⓒ손호철
천의무봉한 시인 천상병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로 끝나는 아름다운 시 '귀천'을 생각한다. 그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 친구에게 막걸리를 얻어먹은 죄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성기에 전기고문까지 받고 나와 쓴 '소풍'이란 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통영을 떠나려는데 '소풍'의 슬픈 구절이 생각났다.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 사건을 통해 이 땅에서 가장 맑은 영혼을 가진 '귀천'의 시인까지도 이처럼 절규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 저 세상 소풍 끝나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천상병의 삶이 소풍이었다고? / 그 소풍이 아름다웠다고? /
(중략)
오늘 / 반쪽의 일터에서는 굴뚝 위에서 농성을 하고 / 바람이 바뀌었다고 / 다른 쪽의 사람들은 감옥으로 내 몰리는데 / 이 길이 소풍길이라고? /
(중략)
홀로 밤길을 걷고 / 길을 비추는 달빛조차 몸을 사리는데 / 이곳이 아름답다고?
▲ 윤이상기념관 앞에 세워진 윤이상 동상 ⓒ손호철
반미 운동의 기원을 찾아서
[손호철의 발자국] 14. 부산 미문화원 : 한국의 반미운동과 자주파는 이곳에서 시작됐다
"교수님 같은 진보 학자들의 노력으로 한국에서도 진보 운동이 부활했는데…"
"진보 지식인들을 그리 과대평가 해주시다니요. 한국전쟁 후 진보 운동이 사라진 뒤 수 십 년간 진보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이 평생을 걸고 노력해도 못 이룬 진보 운동을 부활시킨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요?"
"전두환이지요."
"전두환이요?"
"네."
"아니 전두환이 왜?"
"그가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해 불가능할 것 같은 진보 운동을 단칼에 복원시켜주지 않았습니까? 반미의 불모지에서 반미 운동이 살아나고요. 사실 전두환이 진보를 부활시키기 위해 군에 위장 취업했던 북한의 프락치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광주학살을 통해 반미 운동 등 진보 운동을 부활시켜 적을 이롭게 했으니 전두환에게 적용해야하는 진짜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이지요."
부산의 중심가인 광복동 뒤쪽에 있는 부산근대역사관 앞에 서자 떠오른 것은 김영삼 정부가 12.12 군사쿠데타 등과 관련해 전두환을 감옥에 보냈던 1990년대 중반에 한 언론과 가졌던 이 인터뷰였다. 그렇다. 역사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와 전혀 다른,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전두환의 1980년 5‧18 광주학살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학살은 우리에게 "국가란, 미국이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반미의 무풍지대에 거센 반미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982년 2월에 있었던 부산미문화원 방화 사건이다. 부산근대역사관은 1999년 미문화원을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아 만든 것으로, 부산미문화원 방화의 현장인 이곳에 서자 문제의 인터뷰가 생각난 것이다.
▲ 대학생들이 방화했던 부산미문화원은 이제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변해, 부산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손호철
▲ 역사관에는 부산의 근현대사가 잘 요약돼 있다. ⓒ손호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전쟁 이후 사라진 반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광주였다. 첫 방화 사건은 부산미문화원이 아니라 광주미문화원이었다. 부산미문화원 사건이 일어나기보다 1년 3개월 전, 즉 광주항쟁이 처참하게 진압된 지 반년이 지난 1980년 12월 9일, 전남 농민 운동가들과 대학생들이 광주미문화원 직원들이 퇴근한 뒤 지붕에 구멍을 뚫고 휘발유를 부어 불을 질렀다.
광주항쟁 당시 부산 앞바다에 미국항공모함이 와있다는 보도를 보고 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군의 만행을 제어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쟁 지도부인 윤상원 대변인이 전화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에게 군부와의 협상 중재를 요청했지만 이조차 거절당하고 진압 작전에 의해 처참하게 사살 당하자, 분노한 생존자들이 반미 운동에 나선 것이다. 여론을 우려한 전두환 정권은 이를 단순 누전사고로 발표했다. 방화자들이 밝혀진 뒤에도 '부랑아들의 영웅심리'로 치부하고 쉬쉬했다.
15개월 뒤, 젊은 신학대 대학생이 부산미문화원 앞에서 통을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통을 전해 받은 두 여대생은 문화원 안에 미리 들어가 있던 다른 여대생들과 문을 깨고 실내에 잠입, 통에 있던 휘발유를 바닥에 뿌렸다. 밖으로 나온 이들은 준비한 방화봉에 불을 붙여 건물 안으로 던졌다. '펑' 소리와 함께 문화원은 불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휘발유통을 전해준 총지휘관 문부식은 건너편 2층 창가에서 이를 촬영했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미국은 더 이상 남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가까운 국도극장과 유나백화점에서는 다른 대학생들이 창밖으로 구호가 적힌 유인물을 살포했다. 기이하게도, 구호 중에는 "전두환은 이미 북침 준비를 완료하고 다시 동족상잔을 준비하고 있다"는 엉뚱한 것도 들어있었다.
이 사건은 국민들, 나아가 미국과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특히 문화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 학생이 죽고 여러 명이 화상을 입자 여론은 비판적이었다. 수배령이 떨어진 문부식 등은 원주 최기식 신부를 찾아갔고 그의 주선 하에 자수했다. 최 신부는 이들을 의식화시킨 김현장을 숨겨준 죄로 구속됐고, 방화 사건은 전두환 정권과 가톨릭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결국 김현장, 문부식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형을 받았고 민주화가 되자 1988년 출소했다.
▲ 대학생들이 방화해 불타고 있는 부산미문화원 사진. 민주인권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방화 사건의 배후인 김현장을 숨겨준 혐의로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는 사진이 역사관에 진열되어 있다.
방화라는 극단적 수단을 사용한 것과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들이 생긴 것은 소영웅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불평등한 한미 관계,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 국민들이 어찌되건 극우 정권을 지원해온 미국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한 역사적인 기여를 했다.
나아가 미국과 세계가 한국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줬다. 김현장은 2012년, 사건 30주년 인터뷰에서 담당검사가 "신미양요 이후 미국 코를 납작하게 해준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해 줬고, 석방 후 만난 해외공관 무관은 "이 사건 이후 제3세계 관계자들이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해주더라"며 고마워했다고 말했다.
사건의 여파는 엄청났다. 강원대 성조기 소각 사건(1982년), 광주미문화원 2차 방화(1982년), 대구미문화원 폭발 사건(1983년), 부산미문화원 투석 사건(1985년), 서울미문화원 집단 점거(1985년), 부산미문화원 집단 점거(1986년) 등 반미 투쟁이 이어졌다. 1986년에는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신림동에서 대학생들의 전방입소훈련 시위 중 "양키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 반대"를 외치고 분신해 사망했다.
▲ 서울대학교 인문대 앞에는 1986년 '양키 용병교육 전방 입소를 거부한다'며 시위 도중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손호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등 학생운동, 나아가 오래 동안 민중 운동의 최대 정파로 활동해온 반미통일운동 중심의 자주파 내지 민족해방주의파(NL)가 이 방화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중 일부는 북한을 추종하는 반미주체사상파(주사파)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불평등한 한미 관계와 미국의 잘못된 대한 정책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가 이후 지나치게 모든 문제를 외세의 탓으로 돌리고 북한을 미화하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 서울미문화원을 점거하고 주한미국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는 대학생들. 민주인권기념관 전시물
풍문과 추측에 의존하던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이 나타난 것은 1996년이다. 미국의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정보자유법을 통해 4천 페이지에 달하는 5‧18 관련 미국 정부의 문서들을 받아서 공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글라이스틴주한미국대사 5‧18 직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인은 들쥐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건 따라갈 것이다.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하지 않다"는 망언을 한 인종주의자 존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 등 극소수 비밀 팀과 만든 '체로키 파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12.12 쿠데타는 한미군사협정 위반이지만 미국은 이를 묵인했다. 1980년 봄 학생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국무장관은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진압을 위한 군사 작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5월 18일 계엄령을 선포하자 놀랐고 이후 전개에 당황했다. 백악관은 분단위로 광주 상황 보고받았는데 신군부의 왜곡된 정보에 의존해 통제 불가능한 폭동 내지 혁명이라고 인식했다. 카터 대통령은 광주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21일 군의 대학살이 있은 뒤 열린 22일 백악관 회의이다. 여기에서 미국은 군의 학살을 알면서도 광주 점령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민주화보다 진압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최대 실책이었고 미국은 광주에 사과해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공수부대의 이동을 몰랐다는 등 책임이 없다고 밝혀 왔지만, 셔록은 그 허구성을 폭로했다.
세월이 흐르며, 김현장은 호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아니라 자신의 대법원 재판의 판사였던 이회창을 지지했고,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를 지지했다. 문부식은 방화로 학생이 목숨을 잃은 것, 동의대 사태 때 진압 경찰이 숨진 것 등과 관련해 '우리 속의 폭력', '우리 속의 파시즘'이라는 문제를 놓고 운동의 자기성찰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보수언론과의 인터뷰로 운동권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했다.
물론 이 같은 성찰은 필요하지만, 운동권의 폭력은 극히 예외적 현상이며 한국전쟁 이후 우리 운동의 주된 특징이 다른 나라들과 달리 테러가 아니라 분신, 투신과 같이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기 폭력'이었다는 점을 보지 못한 일면적 관찰이다. 다만 최근 나타나고 있는 민주화운동 진영의 일련의 일탈을 보면, 민주화운동 세력의 자기성찰이라는 그의 문제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부산근대역사관은 부산에 역사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는 좋은 지역 역사관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근현대 한미 관계'에 대한 전시이다. 개화기인 '19세기 한미 관계'로부터 '미군정', '한국전쟁과 미국의 원조',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반환 운동'을 간단히 시기별로 설명하고 있고 미군정 관련 서적도 진열되어 있다.
▲ 역사관에는 미문화원방화 사건과 이후 문화원 반환 과정을 설명해 놓았다. ⓒ손호철
기이한 것은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방화에 대해 "당시 일방적인 의존의 대상이었던 미국에 대한 반감 표시"라고 쓰여 있을 뿐, 정작 기폭제였던 5‧18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미문화원의 역사도 방화 사건과 1995년 시민단체의 미군부대 반환 운동, 1996년 문화원 폐쇄, 1999년 반환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이곳이 해방 후 미군이 주둔했던 미군정 사무실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군정 사무실에서 미문화원으로 변신하고 반미 운동으로 불탔다가 시민들의 반환 운동 덕으로 미국으로부터 반환받아 부산근대역사관이 된 이 건물의 역사는, 복잡했던 한미관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파쇼 정권을 지탱시켜주는 가장 큰 힘은, 정치적 기반도, 경제력도, 경찰력도, 군사력도 아니며, 바로 비정상적이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문부식이 38년 전 재판부에 쓴 탄원서의 일부다.
부산근대역사관을 떠나며 물었다. 민주화가 됐으니 이제 군사파쇼 정권은 아니지만, 박근혜 정부, 그리고 문재인 정부를 지탱시켜주는 가장 큰 힘은, 문부식이 생각했듯이, 불평등한 한미 관계인가? 그리고 문부식이 생각했듯이, 그리고 이후 자주파들이 생각했고 일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듯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근원이 불평등한 한미 관계인가?
▲ 한국전쟁 포스터가 걸려있는 미대사관. 미문화원방화 사건은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손호철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잡혀간 시민들은 '부랑자'로 죽었다
[손호철의 발자국] 15. 부산 : '사설 강제노동수용소' 형제복지원과 그 원형인 서산개척단
너 이 빵 어디서 났어?"
"학교에서 집이 가난하다고 줬는데요."
"이 새끼 거짓말 할래!"
부산 사상구 개금역에서 부산보훈병원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인 백양대로의 오른쪽 언덕에는 아파트단지들이 이어져있다. 그 아파트 앞에 서자 한 뉴스에 보도된 최승우 씨의 슬픈 사연이 생각났다.
전두환이 광주의 피의 학살을 통해 권력을 잡은 정권 초기인 1982년, 13살로 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경찰에 의해 이렇게 형제복지원에 잡혀갔다. 정신병동에 감금된 그와 어린 학생 등에게 소대장이라는 사람이 발가벗으라고 하고 찬물을 끼어 얹은 뒤 침상에 자라고 했다. 그날 밤부터 그에게 성폭행을 당해야 했다고 한다.
"왜 우리를 가두느냐"고 항의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담요로 싸서 폭행을 했고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죽여서 암매장한 것이다. 이렇게 납치되어 잡혀온 사람이 4300여 명, 암매장되어 사라진 사람이 최소한 513명이라고 하니, 생지옥 그 자체였다.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이 있는데 부랑자들이 거리에 보이지 않게 격리수용하라." 비극적인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두환의 노숙자 등 '부랑아' 정화 지시와 함께 생겨났다. 전두환 정권은 부랑자를 수용하는 경찰에게 실적을 인정해주고 부랑자 수용에 일정한 국고를 지원했다.
▲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종자 유가족모임이 참여연대 등의 도움을 받아 연 자료 공개 발표회 포스터.
사상구의 국유지를 헐값에 불하받아 형제복지원을 개설한 박인근은 일선 경찰의 도움을 받아 '부랑자', '노숙자' 뿐만이 아니라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이나 기차역에서 TV를 보고 있는 무고한 시민 등이 발견되면 무작위로 납치했다. 형제복지원에 갇힌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70%가 가정이 있는 일반인이었고, 해운대에 놀러온 서울대생과 일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멀쩡한 사람도 잡아간 이유는 인원 수 만큼 국가 보조금이 나오기 때문이었으며, 박인근은 이런 식으로 매년 20억 원 씩 12년 동안 국가 보조금을 받아 착복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하루 10시간 이상씩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거나 폭행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폭행을 일상적으로 자행했고, 500여 명 이상이 사망에 이르는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
하다못해, 납치된 아들과 딸을 구하러 온 아버지까지 강제수용했으며, 구타해 죽은 시신 중 일부는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에 실습용으로 판매하기도 했다니,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그 자체였다. 원래 계획은 부랑자를 수용해 1년 간 교육시켜 내보내는 것이지만 부산시의 조사결과 평균 1107일, 일부는 5년이나 갇혀있었다.
▲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된 사람들에는 이같이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형제복지원진상규명대책위 자료.
1987년 한 원생이 구타로 인해 죽는 것을 목격한 후, 원생 25명이 목숨을 걸고 탈출해 울산경찰서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려 했다. 원생들이 한 방송국을 찾아가 제보함으로써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박인근은 관련 기관들의 비호 속에 징역 3년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나와 호의호식하다가 죽었다. 자식들은 이렇게 착복한 1000억 원대 재산을 물려받아 잘 살고 있다. 피해자들과 부산 지역 사회단체의 끈질긴 요구로, 문재인 정부 들어 이에 대한 재조사가 진행 되고 있다.
'부랑자' 등을 '보호'한다는 이름아래 생각할 수도 없는 인권 침해가 자행된 형제복지원 자리에는 이제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여러 단지로 나누어진 이 지역을 여러 번 돌아보아도 옛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이 암매장한 증거들도, 처참한 인권 침해의 흔적도, 아파트 건물 아래로 묻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수용자들의 가슴속에 남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우리의 인권사에 기록된 부끄러운 역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 이제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형제복지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손호철
소위 '부랑아'들에 대한 이 같은 인권침해는 형제복지원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 원형을 찾으려면, 우리는 이제는 모월리 3구라고 불리는 충남 서산의 바닷가로 향해야 한다. 형제복지원의 참사가 벌어지기 14년 전인 1961년 이곳에서 비극이 시작됐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사회 정화와 국토건설이라는 이름아래 조직폭력배, 병역기피자 등을 잡아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의 원형이 되는 국토건설단이라는 강제노동수용소를 만들어 제주도의 5‧16도로 건설 등에 투입했다('손호철의 발자국' 4. '제주 5‧16도로' <한국일보> 2020년 9월 1일자). 이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 대한청소년개척단, 일명 '서산개척단'이다(이 이야기는 2018년 <서산개척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을지로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는 민정식이라는 사람에게 위임해 부랑자 청년과 윤락녀 등을 모아 개척단을 만들고 서산의 뻘밭을 개간하도록 했다. 모월리 3구에 가면 이들이 개간한 넓은 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실적을 만들기 위해, 길 잃은 어린이들이나 통행금지를 위반한 소시민까지 잡아갔다.
▲ 상지대보고서에 들어있는 서산개척단의 작업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영화 '서산개척단' 포스터
이렇게 잡혀온 사람이 한 때 1700명에 달했고, 그 중 25%가 15세 미만의 유소년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부실한 식사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산에서 채굴한 돌을 날라 바다를 메워 방조제를 만드는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목표량을 못 채우면 자행된 폭행으로 죽은 사람도 허다했다. 결혼식도 강제로 했다. 운동장에 남성 수용자들을 세워놓고 여성들에게 고르라고 한 뒤, 125쌍의 합동결혼식을 거행하고 이를 <대한뉴스>에 내보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렇게 개간한 땅이 무려 250만 평방미터다. 이들은 이 지역에 정착했는데 정부는 "개척을 하면 너희 땅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깨고 경작권만을 인정한 채 소유는 국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소송을 제기해 오랜 싸움 끝에 장기분할로 상환하라는 결정을 받았다. 자기들이 피땀으로 일군 땅을 아직도 1년에 300만 원씩을 내고 갚아야 하는 것이다. 생존자들은 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진상규명과 특별법제정, 보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국토건설단이 대한민국의 '굴락(Gulag,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이었다면, 형제복지원은 국가가 위탁한 '사설 굴락', 서산개척단은 '반(半)관 반(半)사영 굴락'이었다. 1215년 영국에서 선포한 마그나카르타 이후 근대 인권의 핵심에는 신체의 자유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에도 신체의 자유 없이 재수 없으면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가야 했다.
자본주의의 특징, 장점 중 하나는 '굶어죽을 수 있는 자유'다. 즉 굶어죽을 각오를 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노예제와 달리 강제로 일을 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유신 시절에는 '생계능력이 있으면서 무위도식하는 것'도 경범죄로 처벌을 받았다. '무위도식할 수 있는 자유'도 박탈한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서산 모월리 3구의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바라보고 있자, 저 벼들이 강제로 끌려와 이곳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서산개척단원들의 피와 눈물이 응고한 결정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어 거리를 떠돌거나 차를 놓쳐 통행금지를 어기면, 그것도 아니고 단순히 운이 나쁘면, 서산개척단이나 형제복지원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가 사람 이하의 삶을 살아야했던 것이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였다.
▲ 박정희 정권이 서산개척단을 통해 강제노동으로 개간한 서산 모월리 3구 지역의 논 ⓒ손호철
▲ 서산개척단 사람들이 정착한 서산 모월3리의 마을 풍경 ⓒ손호철
<후기>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은 검찰과거사위원회의 재조사 권고에 따라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의 특수감금혐의에 대한 법원의 무죄판결을 파기해달라는 비상상고를 했지만, 대법원은 2021년 3월 이 사건으로 "헌법 최고의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됐다"면서도 비상상고를 기각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2020년 연말 출범한 제 2기 진화위(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20210408
'민주정부'에서 되살아나는 '박정희 향수'
[손호철의 발자국] 18. 경북 구미 : 누가 '죽은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구미 박정희 생가 옆에 위치한 새마을공원 박정희 동상 앞에 서자 귀에 익은 새마을 노래가 들려왔다. 갑자기 유신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아 으스스한 기분에 겁이 덜컥 나고 나도 모르게 주위에 경찰이 없나 둘러보게 됐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2018년 지방선거가 생각이 났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여파 속에 치러진 선거인만큼 이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싹쓸이를 했지만, 영남, 특히 보수의 텃밭인 경북은 예외였다. 헌데 경북 지역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광역단체장 후보가 당선된 곳이 있었다. 의외지만, 구미였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의 덕을 봤다고는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보수 세력이 신봉하는 박정희의 출생지인 구미에서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구미가 박정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박정희는 1973년 구미에 공단을 지었고, 전두환이 1983년 제2공단을, 노태우가 제3공단을 지었다. 박정희의 고향이란 이유로 다른 지역을 제치고 공단을 집중적으로 지으면서, 구미에는 외부 인구들이 대폭 유입됐다. 구미는 경북에서 외부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경북의 보수적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경북 중 구미에서 유일하게 더불어민주당 시장이 등장한 이유일 것이다.
최근 여러 공장들이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구미는 여전히 대표적인 공단도시다. 그 덕으로 외지인들이 많기는 하지만, 구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박정희의 도시'다. 도시 한가운데는 그가 친필로 쓴 낡은 '수출산업의 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도시 곳곳에서 박정희기념관으로 가는 방향을 표시한 '박정희 대통령 생가'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박정희로'라는 길도 있다. 박정희 생가와 기념시설들 앞의 큰 길이 박정희로다.
▲ 구미 시내에 우뚝 서 있는 '수출산업의 탑'. 하단에는 박정희가 직접 쓴 '수출산업의 탑'이라는 글씨가 있다.(좌) 구미 시내의 박정희로. '박정희대통령생가'라는 도로판이 사방에 눈에 띈다(우) ⓒ손호철
박정희 생가에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큰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했고 단체 참관객을 싣고 온 관광버스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5인 이상 집합 금지 이전이었다). 역시 이 지역의 박정희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생가 쪽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맞는 것은 새마을복을 입고 손수레를 끌고 있는 농민들의 조각이다.
생가 쪽으로 올라가면 왼쪽에는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어려운 시절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보릿고개 체험장'이 있고 오른쪽에 생가가 있다. 생가 앞에는 실물 크기의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의 전신상이 세워져있어 이들이 살아 우리를 맞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두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추모관이 있고 가족사진들이 걸려 있다. 아버지 옆에 선 앳된 박근혜의 사진을 보자, 부모를 모두 총격으로 잃고 능력 밖의 대통령 직을 맡아 결국 감옥을 가야했던 그의 삶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뒤편으로 조금 걸어가면 박정희 기념 장소에는 언제나 볼 수 있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커다란 박정희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 뒤에 박정희 동상, 그 뒤로 박정희의 연보와 새마을 악보 등을 새긴 검은 대리석이 세워져 있다.
▲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생가의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손호철
▲ 박정희 부부 모형이 방문객을 맞는 박정희 생가 ⓒ손호철
박정희는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함께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태극기부대 등에게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수천 년의 가난에서 구하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불세출의 영웅'이다. '진보주의자' 등은 그를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할 때 일본군 장교가 된 민족반역자이며 경제 발전이란 이름 하에 유신 등으로 민주주의를 압살하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독재자'로 혐오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올바른 평가인가? 이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에 달려있다. 첫째, 한국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인가? 둘째,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독재, 즉 '개발독재'는 올바른 것이었나?
첫 번째는 사실적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어떤 가치가 더 중요하냐는 가치선택에 대한 문제이다. 보수적인 박정희 지지자들은 둘 다 그렇다고 답할 것이고, 진보적인 비판자들은 둘 다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 사이에 첫 번째에는 '그렇다'이지만, 두 번째는 '아니다'라는 입장,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이지만 그 공보다 과가 더 크다는 입장도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이 진행될 사안이다. 1990년대 말 생겨난 박정희 향수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진보적 현대사 연구를 대표하는 한 학자는 "박정희 신화는 정치학자들이 공부를 안 해 박정희가 얼마나 나쁜 지도자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정치학자들을 비판했다. 박정희 신화는 극우 정부와 보수 언론 등에 의해 세뇌당한 '무지한 대중들의 착각'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관념론'이다. 박정희 현상은 단순히 대중의 착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적 기반'이 있다. 그것은 박정희 때 보릿고개에서 탈피해 먹고 살 수 있게 됐다는 대중들의 직접적인 체험이다. 물론,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보릿고개를 벗어난 주된 원인이 박정희는 아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까마귀가 배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시대에 보릿고개를 벗어났으니 박정희 시대와 보릿고개 탈피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지만, 박정희 때문에 보릿고개를 벗어난 것(인과관계)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의 체험을 논리로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많은 대중들이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가짜뉴스' 등 자신들이 믿는 것만 보고 들으려고 하는 '탈진실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를 전제로 위의 두 질문을 간단히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자세한 내용은 손호철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중 '해방 70년과 박정희 신화' 참조).
주목할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4인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이 모두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발전이 박정희, 특히 그의 개발 독재 때문이라면, 이들 나라들은 박정희도 없는데, 특히 홍콩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영국 지배 하의 '민주체제'였는데, 어떻게 경제성장에 성공했느냐는 것이다.
4인방의 공통점은 개발 독재가 아니라 남미 등과 다르게 산업화를 가로막는 지주 계급이 도시국가(싱가포르, 홍콩)라 원래 없거나, 분단에 따른 체제 경쟁(한국 대 북한, 대만 대 북한)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던 농지개혁으로 몰락했기 때문이다(선진국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싼 공산품을 수입하기를 원한 지주들은 산업화의 장애이다). 사실 이승만 정권기와 박정희 시기를 비교하면 이승만 시기가 박정희 시기보다 다른 제3세계에 비해 더 빠르게 발전했다.
"소련 동구가 망해서요." IMF 경제 위기 당시인 1998년,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한 언론의 의뢰를 받아 한국정치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를 만나 한국에 경제위기가 온 이유를 묻자, 그는 엉뚱하게 국내 학계에선 거론도 안 된 '탈냉전'을 들고 나왔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에 성공한 것은 내부 요인도 있지만 냉전 때문이에요. 냉전의 최전방에 위치해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미국이 남미들과 달리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허용한 것이지요. 헌데 소련 동구가 망하니 한국 등 아시아를 더 봐줄 필요가 없어 손 본 것이에요." 다시 말해,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경제성장을 한 것은 박정희나 장제스, 리콴유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는 이들 나라들을 미국이 봐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들이 '한강의 기적'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를 대전제로 하여, 스탈린의 강압적인 산업화가 소련을 빠른 시간동안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들어줬듯이 노동자 등 민중들을 짓밟은 민중 억압적인 박정희의 개발 독재가 경제 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파괴, 노동 탄압 등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양하는 것은 경제적 성과를 이유로 스탈린을 찬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스탈린이 이 같은 강압적 산업화의 덕으로 히틀러의 공격을 격파해 세계를 구하고 유럽의 낙후국인 소련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양대 강국으로 만든 '공'에 비하면, 박정희의 공은 '하찮다'고 하겠다. 특히 박정희가 남긴 부정적 유산 중 주목할 것은 결과 제일주의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나 수단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 제일주의는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불행한 박정희의 유산이다.
결론적으로, 산업화의 장애인 지주의 몰락과 냉전이라는 구조적 요인 때문에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상당히 빠른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른 성장이냐는 것인데, 나는 박정희 체제보다 조금 덜 빠르게 성장을 하더라도 민주적이고, 덜 억압적이고 '민중친화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정세의 효과에 따라 좌우로 진동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죽은 박정희를 살린 것은 운동권에서 극우로 변신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같은 '뉴라이트' 박정희 추종자들이나 '태극기부대'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흔히들 '민주정부'라고 부르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세력',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흔히들 '진보'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자유주의, 즉 리버럴이지 민주노총이나 정의당 같은 '진보(progressive)'는 아니므로 '개혁' 내지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불러야 맞다).
박정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 출신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7년 IMF 경제 위기를 가져왔다. 이 같은 위기 속에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의 시장만능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빠른 시간 내에 경제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부작용으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민생이 어려워졌다. 그 결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박정희 향수'가 생겨난 것이다. 박정희 향수는 박정희에 대한 학술적, 논리적 분석의 결과도 아니고, 박정희의 실체에 대한 좋은 연구가 없어서도 아니라, '개혁 정부' 하에서 대중이 직접 체험한 '객관적 현실'의 결과이다.
투표 결과가 이를 입증해준다. 김대중과 이회창이 대결했던 1997년 대선에서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을 찍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친 10년 뒤에 치려진 2007년 대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명박을 찍었다. 이어진 2008년 총선에서도 서민층들은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며 박정희를 이어받은 냉전적 보수 정당에 압승을 선사했다.
이 같은 박정희 향수에 찬물을 뿌린 것도 진보사학자가 고대한 박정희의 잘못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니라 '현실'이다. 즉 박근혜의 실정이다. 박근혜의 실정이 드러나고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자, 박정희 향수도 주춤해진 것이다.
▲ 박정희 생가에 전시되어 있는 가족 사진. 아버지를 따라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가 감옥에 가 있는 박근혜의 앳띤 모습
안타깝게도 박정희 향수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 심화, 조국 사태, 안희정‧박원순‧오거돈의 성추문, LH 사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등 여권 핵심의 전세값 인상 파동 등 연이은 측근들의 도덕적 실추 같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주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정희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뒀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평가와 박정희 향수는 '정세의 효과'이며 '현재의 정치에 대한 성적표', 특히 '개혁 정부'에 대한 성적표이다. 박정희 향수가 살아나고 있다면, 개혁 정부들이 죽을 쑤고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박정희 향수가 조용하다면, 이는 개혁 정부들이 잘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기억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정치다.
박정희 생가를 떠나 이제는 새 청사로 이전을 하고 문을 닫은 구미경찰서로 향했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가 미군정의 친일파 중용 등에 저항해 대구시민들이 일어난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때 구미경찰서를 공격하고 퇴각하다가 사살된 곳이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한국일보>, 2021년 2월 1일자 참조). 구미경찰서 앞에 서자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박정희의 '짧은 외도'와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 1946년 대구 10월항쟁 당시 박정희의 형이 공격했던 구미경찰서. 그는 이후 도주하다 사살당했다. ⓒ손호철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일본군-인용자)에 채용해주실 수 없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일보>에 보도된 박정희의 혈서다.
박정희는 일제 말 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계에 어려움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본왕에게 충성 맹세 혈서를 쓰면서까지 일본 육사에 입학해 독립군을 때려잡던 만주군에 근무했다. 그의 친일은 생계 때문에 불가피했던 '생계형 친일'과는 전혀 질이 다른 '출세형 친일', '악질 친일'이다.
▲ 박정희가 일본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는 당시 <만주신문> 사본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정희는 해방이 되자 한국군에 입대한 뒤 남로당(남조선로동당)에 가입해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여순 사건 후 있었던 군내 좌익 숙청 작업에 체포됐다('손호철의 발자국' 14. 전남 여수순천, <한국일보> 2020년 11월 9일자 참고). 하지만 동료들을 다 일러바쳐 목숨을 구했고 한국전쟁 덕으로 군에 복귀해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다. 쿠데타 후에도 미국이 급진적인 경제개발 계획에 반발하자 이를 주도한 영관급 주모자들을 쫓아내고 자신은 살아남았다('손호철의 발자국' 29. 울산, <한국일보> 2021년 2월22일자 참고).
친일파에서 공산주의자, 밀고자를 거쳐 반공주의자로 변신에 변신을 계속한 것이다.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변신도 서슴지 않았던, 동지도 부하도 언제든지 버렸던, '생존주의자', '생존지상주의자'였다.
"첫째, 민족의 적입니다. 일본제국의 용병이었으니까요. 둘째, 민주주의 적입니다. 쿠데타로서 합헌 민주정부를 전복한 자니까요, 셋째, 윤리의 적입니다. 자기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친구를 모두 밀고해서 사지에 보낸 자니까요. 넷째, 현재 국민의 적입니다. 학생이건 지식인이건 인정사정없이 탄압하는 자이니까요."
언론인이었던 이병주는 5‧16 쿠데타가 나자 오랜 술친구였던 박정희에게 필화사건으로 구속됐다. 출감 후 소설가로 변신한 그는 '그를 버린 여인'이란 소설에서 여순 사건 때 박정희의 배신으로 아버지를 잃은 청년들의 입을 통해 박정희를 이 같이 고발했다.
박정희는 '생존주의자'로 민족, 민주주의, 친구, 동지, 국민을 모두 버리고 살아남았지만, 영구집권을 꾀하다가 부인을 총격으로 잃었고 자신도 최측근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딸마저도 결국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가야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숭배와 증오의 주인공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정말 파란만장하다.
▲ 박정희 생가 뒷편 새마을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박정희의 동상 ⓒ손호철
소성리 '사드'는 어떻게 '광기'를 불러냈나?
[손호철의 발자국] 19. 경북 성주 소성리 : '사드(THAAD)'의 정치경제학
무등산 수박과 성주 참외. 여름에 가장 먹고 싶은 과일들이다. 대구 북서쪽에 위치한 성주는 조용한 농업지역으로, 가야산의 맑은 물로 키워내는 당도 높은 참외 이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다. 이러한 성주가 몇 년 전부터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고 시끄러운 곳이 되고 말았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때문이다.
'사드 출입금지'. 성주군 북쪽에 있는 소성리에 들어가면 아스팔트 바닥에 쓴 흰 페인트가 방문객을 맞는다. 원래 소성리는 원불교의 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가 탄생한 원불교의 성지로 원불교 순례자들과 이곳에 있는 성주골프장 방문객 이외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성주골프장에 사드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 소성리에 들어서면 '사드출입금지'라는, 아스팔트에 써 있는 구호가 제일 먼저 방문객들을 맞는다. ⓒ손호철
이곳에서 80년을 산 할머니 집의 외벽에는 예쁜 꽃들 위에 'No THAAD', '삶의 터전을 건드리지 마라!'라는 살벌한 구호가 쓰여 있고, 마을 곳곳에는 갖가지 구호의 사드 반대 펼침막들이 걸려있다. 마을에서 사드 기지로 올라가는 삼거리 진밭교에는 마을사람들이 검문소를 설치해 사드 관련 장비 등의 기지 내 추가 반입을 막고 있다. 이곳에서 기지 정문 앞까지의 좁은 언덕길은 길 양쪽에 전국 각지에서, 여러 단체들이 보내 온 펼침막들이 끝없이 도열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 연세가 80세인 할머니 댁 벽에 써 있는 사드 반대 구호 ⓒ손호철
▲ 사드 기지 정문 앞에는 각 단체들이 보내온 사드 반대 펼침막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손호철
사드가 무엇이기에 이 같은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사드는 적의 미사일을 고고도에서 요격하는 미사일방어시스템으로, 2013년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이 북핵을 막지 않으면 중국을 미사일로 포위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한반도 배치가 시작됐다. 2014년 국무부 관계자가 한국에 사드 배치를 고려 중이라고 밝혔고, 북한의 핵 개발이 본격화되자, 박근혜 정부는 중국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드 배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2016년 7월 정부는 롯데가 운영하는 성주 소성리의 골프장에 사드 포대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했고, 중국은 롯데마트에 대대적인 영업정지 조치를 내리는 한편(이후 롯데마트는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했다), 한국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하는 등 강력한 제재를 취했다. 이후 촛불 항쟁에 의해 박근혜가 탄핵을 당하면서, 촛불 항쟁 지도부는 사드를 해결해야 할 주요 적폐로 지목했다.
2017년 4월은 탄핵된 박근혜 밑에서 국무총리를 하던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이 국정을 이끌고, 박근혜의 후임을 뽑는 대선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주한미군은 여러 시민사회단체와 성주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틈을 이용해 사드 포대를 소성리에 전격 배치하고 작동에 들어갔다.
▲ 사드 발사 실험 장면 ⓒ연합뉴스
2017년 5월 대선에서 승리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을 때는 이미 사드 배치가 다 끝난 뒤였다. 촛불 항쟁에 힘입어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도 이후 여러 회견 등에서 "사드는 한미동맹에 기초한 합의이고 한국 국민과 주한미군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주한미군과 정부는 사드 배치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과는 무관하며 최근 북한이 급속히 추진하고 있는 북핵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자구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성리 주민의 반대는 지역이기주의, 구체적으로 '님비(NIMBY : Never In My Back Yard, 즉 '혐오 시설은 내 근처에 설치하면 안 된다)'는 것인가?
"우리가 사드에 반대하는 것은 지역이기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사드가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 마을에 설치하더라도 반대하지 않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드 반대를 위해 마을 검문소 근처에 천막을 치고 상주하고 있는 강현욱 원불교 교무는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비판자들은 사드라는 것 자체가 실전에서 검증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반도 지형 상 북한 미사일 방어에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드는 적의 미사일을 감지하는 레이더가 없으면 소용이 없어지기 때문에 북한이 방사포 등으로 레이더를 파괴하면 게임은 끝난다.
또 북한이 미사일 등을 계속 쏴 미군이 성주에 있는 사드 48기를 모두 소진하도록 만든 다음에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면 속수무책이다. 사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방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방어시스템이 인구 절반이 살고 있는 수도권을 포기하는가?
이 때문에 성주 주민들 비롯해 비판자들, 그리고 중국은 이 기지가 북한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21세기의 동북아 패권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싸움에 소성리와 한반도가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강 교무는 탄식했다.
▲ 소성리 사드 반대 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강현욱 원불교 교무. ⓒ손호철
- 사드의 역사적 의미는?
미국이 중국에 대항해 미·일·한 군사동맹을 위해 세 가지를 했다. 첫째, 이 동맹의 가장 큰 장애인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 미국은 박근혜 정부를 시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도록 강제했다. 둘째,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를 체결하게 했고, 마지막으로 한국과 일본에 사드를 배치했다. 소성리의 사드 배치는 이 같은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사드 이후 제일 불편한 것은?
수 십 년 삶의 터전인데도, 통행의 자유가 없다. 민통선처럼 국방부 허가를 받아야 자기 집을 출입할 수 있다.
- 현 상항은?
사드 포대는 기지, 장비, 인력이라는 세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2020년 5월 28일 이들이 경찰을 동원해 장비를 업데이트했다. 그동안 사드 관련해, 경찰이 7차례에 걸쳐 3000명이 투입됐는데 7번 중 5번이 문재인 정부 때였다. 특히 5.28 투입 때가 가장 폭력적이었고 사전 통보도 없었다. 한 마디로, 문 대통령이 "사드의 투명성을 지키겠다"는 공약을 안 지켰다.
- 앞으로는?
미군의 최우선 요구 사항은 지상 병참선을 확보해달라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도로를 막고 있어 식자재 등을 모두 헬기로 공급하고 있다. 외출 등 한국군의 출입은 막지 않았는데, 5.28에 대한 항의로 앞으로는 한국군의 출입도 막겠다.
▲ 2020년 5월 소성리에는 사드 업데이트 장비가 반입됐다. ⓒ연합뉴스
'From MAD to Madness'. 사드 기지 정문이 멀리 보이는 바리케이드 앞에 서자, 갑자기 냉전 시기 미 국방부에서 핵전략작업을 했던 폴 존스턴(Paul Johnstone)이 인류를 핵전쟁의 재앙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죽기 전에 남기고 간 책 제목이 떠올랐다. 여기에서 MAD는 '미친'이란 뜻이 아니다. 즉, 책 제목은 <'미친'에서 '미침'으로>가 아니라 <MAD에서 광기로>다. MAD는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상호파괴확신)'의 준말로, 냉전 시기 미소 간의 사생결단의 군비 경쟁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핵전쟁이라는 파멸로부터 구한 비결이다. 따라서 말뜻과는 정반대로, 전혀 '미치지 않은' 것이다.
▲ 반핵운동의 선구적 책인 from MAD to Madness
핵전쟁에서 한 쪽이 전쟁 후에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핵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만다. 반대로 둘 다 확실히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하면(상호파괴확신, MAD), 자기도 멸망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핵무기의 단추를 누를 수 없다. 소위 '공포의 균형'이다.
어떻게 하면 핵단추를 누르면 둘 다 확실히 멸망한다는 확신, 즉 MAD에 이를 수 있을까? 그것은 핵무기에 대한 방어용 무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1945~1980년대까지의 냉전 시기에 미소가 극한적으로 대립하고 무한 군비경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인류가 살아남은 비결은 미소가 MAD론에 기초해 방어용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방어용 무기가 없으니 "전쟁이 나면 나도 잿더미가 될 것"이기 때문에 핵단추를 누르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거대한 방위산업이었다. 미소는 오랜 핵 경쟁 끝에 지구를 수 천 번 부술 수 있는 핵무기를 비축했고,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이 인류를 핵전쟁이라는 파멸부터 구한 비결일지 몰라도, 방위산업에게는 재앙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 레이건 대통령이 제안한 '스타워즈 프로그램'이라는 미사일방어체계다. 즉 방어용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합의를 깨고 적의 미사일을 요격하는 방어용 미사일을 우주에 배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로써 새로운 무한 군비경쟁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이다. 존스턴의 책 제목처럼 정말 '미친 짓(Madness)'이고 핵전쟁을 막아 온 MAD에서 방어용 무기와 새로운 무한 군비경쟁(잘못하다가는 이에 따른 핵전쟁과 인류 멸망에 이르는)이라는, '미친 짓(Madness)'으로 가고 만 것이다. 'From MAD to Madness'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 같은 판도라 상자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열렸다는 점이다. 사드란 바로 이 판도라 상자에서 뛰쳐나온 방어용 무기의 한 종류이다. 따라서 '미친 짓'의 일부이다. 물론 민중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있는 것 역시 '미친 짓'이고, 비판받아야 한다. 북한의 핵무장을 비판하는 미국도 방어용 무기 개발에 나설 것이 아니라 다른 핵 보유국들과 함께 기존 핵무기의 폐기에 나서야 한다.
MAD론에 따르면, 설사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기 때문에 '공포의 균형'에 의해 북이 핵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방어용 무기인 사드를 배치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성리를 떠나며 나는 사드의 한반도 배치로 인해 우리도 존스턴이 경고한 '미친 짓'의 일부가 되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쳐 낼 수 없었다.
<후기>
문재인 정부는 답사를 다녀온 2021년 1월 22일 사드 기지 병사들의 거처 등 생활환경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코로나 비상 상황에도 불구하고 6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주민들의 저지망을 뚫고 32대 차량분의 건축자재를 사드 기지로 반입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와 관련, 1월 26일 다시 한 번 찾아가 강 교무를 만났다. 그는 사드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려고 머지않아 패트리엇 미사일을 반입하려 할 터인데 이를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 다시 찾은 소성리에는 주택 담벼락에 사드 반대 구호가 더 늘어나 있었다. ⓒ손호철
남과 북이 사지로 내몬 아홉살 소년을 추모하며
[손호철의 발자국] 21. 강원도 평창 :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우리의 반공 교육에서 가장 유명하며, 우리 사회의 반공주의를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영동고속도로 속사 출구에서 내려 북쪽인 오대산 쪽으로 조금 달리면 텅 빈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이승복기념관이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든 소년의 커다란 전신상 위에 크게 써놓은 이 같은 글씨가 방문객을 맞는다.
기념관에는 이승복 동상 이외에도 이승복이 공부하던 교실과 학교를 보존해 놓았고 전시실에는 이 군의 유품, 당시의 상황을 그린 그림, 그의 이야기가 실린 초등학교 교과서 등이 진열되어 있다. 1968년 12월 9일 북한의 '무장공비'는 근처에 있는 이승복 집에 나타나 이 군과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을 살해했고 아버지와 형에게 부상을 입혔다.
▲ 이승복 동상 위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글이 크게 쓰여 있다. ⓒ손호철
▲ 이승복 사진과 그가 공부하던 책상과 책, 신발 등이 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다. ⓒ손호철
이틀 뒤 <조선일보>는 살아남은 형의 증언의 형태로 "공비들이 온 가족들을 모아놓고 공산주의 선전을 하자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얘기했고 공비들이 이군의 입을 찢고 가족들을 몰살했다"고 보도했다. '이승복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반공주의가 여전히 강력하지만, 과거와 같은 광기는 사라진 만큼 이승복기념관은 넓은 시설과는 대조적으로 관람객은 보이지 않았다. 이승복 이야기는 민주화 이후 반공 교육이 줄어들고 교과서에서도 빠지면서 잊히고 말았다. 잊혀진 이 말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1988년 한 언론운동가가 그동안 언론계에 떠돌던 이야기('문제 기사를 쓴 <조선일보>기자가 현장에 없었고 기자가 만든 이야기'라는) 등에 기초해 한 잡지에 조작설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언론 시민단체들은 이승복 기사 오보 전시회를 열었고 이승복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복 가족과 <조선일보>가 그 언론인과 단체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고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기념관에는 '이승복의 명예회복'이란 제목 하에 이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 이승복 발언의 조작설을 둘러싼 논쟁을 정리한 전시물 ⓒ손호철
나는 이승복이 정말 그 말을 했느냐는 것이 쟁점이 되면서, 정말 중요한 문제가 묻혀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조선일보>와 박정희 정권의 주장대로, 그리고 사법부가 인정한대로, 이 군이 정말로 이 말을 했다면, 이 군이 어떻게 해서 이 말을 하게 됐느냐는 것이다.
만일 문제의 발언을 한 사람이 성인이거나, 성인이 아니더라도 한국전쟁을 통해 공산당을 직접 경험한 미성년자이라면,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군(1959~1968)은 한국전쟁 종식 뒤에 태어난 만큼, 한국전쟁 등을 통해 공산당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또 사망 당시 9살에 불과한 산골의 초등학생이 여러 책 등을 읽고 공산당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기에, 죽을지 모르는 공포의 순간에도 이 같은 말은 했겠는가?
강남에 사는 부잣집 아들도 아니고 하루 끼니도 연명하기 어려운 강원도 산골 화전민의 아들인 이 군이 말을 잘못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자신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이 말을 하게 만든 것은 바로 반공교육이다. 즉 이승복 사건, 이승복의 공산당 발언이 보여주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교육시키면서 의도했듯이, '공산당은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목숨을 걸고 싫다고 소리칠 정도로 나쁜 놈들'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이승복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공산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이 소리를 할 정도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어린 학생 때부터 반공주의를 주입시켜 왔다는 사실이다. 다른 많은 점이 그러하지만, 최소한 이 점에 관한 한, 우리 체제는 북한과 너무도 닮은꼴이었다. 만일 이승복이 북한에 태어나,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뭐라고 했겠는가?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미제국주의가 싫어요! 나는 남한 파쇼도당이 싫어요!"
결국 반공교육과 이에 따른 반공주의가 이승복으로 하여금 이 같은 발언을 하게 만들었고, 역으로 이승복의 문제의 발언이 최고의 반공교육 교재가 되어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건 후 이승복 이야기는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 실렸고 초등학교마다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우리 땅의 동해 북쪽 끝인 고성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7번 국도는 동해를 끼고 달리는 만큼 기가 막힌 풍경을 자랑한다. 이승복기념관에서 강릉을 거쳐 동해대로라고 불리는 이 도로를 타고 울진 죽변항 근처까지 약 150킬로미터를 달려가 나곡4리에서 월천2리 쪽으로 빠져 나가면 버려진 작은 탑이 나온다. '자유수호의 탑'이다. 바로 이곳이 이승복 죽음의 시작인 울진 무장공비 사건의 현장이다.
▲ 울진에 설치되어 있는 '자유수호의 탑' ⓒ손호철
1960년대 후반은 우리의 경제발전이 아직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기 전으로, 일찍이 계획경제에 의한 산업화를 추구했던 북한은 경제력 등으로 우리보다 앞서있다고 평가받던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도 베트남에서 북베트남의 공세가 진행되는 등 북한에 유리한 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북한은 한편으로는 남한에 통일혁명당과 같은 지하당을 건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험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노선에서 '무장공비'를 남파하는 등 강력한 대남공세에 나섰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 특수부대 30명이 청와대를 습격했다가 실패했다. 이로부터 9개월이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2일 사이에 북한은 15명이 한 조를 이룬 무장공비 8개조 120명을 울진 나곡리해안과 삼척 지역에 침투시켰다. 이들은 강원도 오지 산간지역에 소규모 게릴라 기지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위조지폐를 살포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군경합동작전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군인, 예비군, 그리고 지역주민들을 추모하는 탑이 자유수호의 탑이다.
▲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경로 ⓒ손호철
이들 중 일부가 군경의 추적을 빼돌리고 150킬로미터 이상을 진군해 평창까지 올라왔고, 이승복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설사 일부의 주장대로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북한 무장공비가 9살 소년을 죽였다는 사실이다. 이승복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나는 공산당의 싫어요"라는 발언이나, 그 말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바로 이 사실에 있다.
이승복 사건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위에서 지적했듯이, 아무것도 모르는 9살 소년으로 하여금 그 같은 말을 하게 만든 반공주의 교육이다. 다른 하나는 1960년대 후반 모험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잘못된 판단에서 남한에 계속해서 무장공비를 내려 보낸 북한은 자신들이 해방시키겠다고 외쳐온 '일하는 기층민중(화전민)'의 9살짜리 어린 아들까지도 죽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오쩌둥의 말대로, "혁명은 저녁만찬이 아니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전복하는 폭력적 행위"라지만, 이런 모험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통일 전략, 혁명 전략은 문제가 많다.
▲ 전쟁기념관에는 청와대 기습 미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등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모험주의적인 군사도발을 설명해 놓았다. ⓒ손호철
이 점에서 이승복 사건은 1960년대 말 남북한 체제의 부끄러운 민낯을 모두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잊지 말아야 것은 우리도 북한처럼 무장 침투부대를 북한에 보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실미도 사건 때문이다. 1971년 정체불명의 무장군인들을 태운 버스가 청와대로 향하다가 노량진에서 폭발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사건은 김일성 암살을 위해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북파부대원들이 열악한 환경과 불투명한 미래에 분노해 청와대로 돌진하다가 자폭한 것이다.
▲ 우리도 북한에 공작원을 보냈던 바, 이에 대한 실화를 다룬 영화 '실미도' 포스터
이는 실제 무장부대를 북파한 사건이 아니었고, 정부도 우리 군의 북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해 왔다. 그러나 북파공작원들의 소송으로 법원이 2002년 이들의 존재를 인정해줬고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법안까지 제정됐다. 이들의 구체적 실체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정부자료 등에 따르면 1953년 휴전 이후 1972년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7726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승복기념관을 떠나며, 나는 남북한의 모험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통일 정책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승복 가족들, 그리고 이승복과 달리, 이름없이 희생당한 북파공작원들을 위해 추모의 묵념을 올렸다.
'한국판 엘도라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손호철의 발자국] 22. 강원도 춘천 :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파병 베트남전쟁의 빛과 그림자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 (중략) /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소녀.'
춘천 소양 댐 앞에 서면 절로 나오는 노래다. 소양 댐을 조금 못 미친 북한강변에는 강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작은 잔디밭 공원이 있다. 공원에서 춘천전투기념비, 6‧25참전학도병기념탑을 지나면 월남전참전기념탑이 나타난다.
이번 답사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을 여러 차례 돌면서 알게 된 것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기념물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기녑탑이라는 사실이다. 대략 시나 면에 하나씩 있는 것 같다. 이중 춘천의 월남전참전기념탑은 특별하다. 춘천 북쪽 파로호 근처의 옴리는 우리나라에서 지형이 베트남과 가장 비슷하다. 그곳에서 참전 병사들이 훈련을 받고 춘천을 거쳐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춘천 지역 병사들의 이름을 적어 놓은 국군 장병들 조각과 기념탑 앞에 서자, 여러 가지 개인적인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첫 번째 장면은 중학교 시절 강제 동원에 의해 베트남참전용사 송별식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던 기억이다. 베트남전쟁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수업을 하지 않는 것에만 신이 났었다.
▲ 소양강가에 새워져 있는 춘천 월남 참전 기념탑 ⓒ손호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베트남 파병을 미국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제의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는 군사, 경제적 이유로 베트남에 참전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미국이 오히려 여러 이유로 거절했다(사실 1954년 이미 이승만은 미국에게 라오스에 우리 군대를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전세와 국제적 환경이 어려워지자, 다급해진 미국이 우리에게 파병을 요구했다. 박정희 정권은 "공산 침략을 자유 우방의 도움으로 저지한 나라로서 아시아의 자유를 지키는데 기여해 빚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1964년 야당 반대 속에 월남 파병안을 통과시켰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인 베트남 파병이 시작된 것이다. 박 정권은 1965년 본격적으로 파병을 시작해 휴전협정이 체결된 1973년까지 8년 간 총 32만 명을 파견했다.
▲ 전쟁기념관에는 맹호부대 등 월남파병 부대들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전쟁기념관에 진열되어 있는 파월 한국군의 전투 장면
두 번째로 떠오른 장면은 대학에 들어가 베트남전쟁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깬 리영희 선생의 글과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뒤늦게 대학에 들어온 늦깎이 대학 동기로부터 들은 베트남전쟁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다. 베트남전쟁이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자유진영의 전쟁'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베트남전쟁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어진 '제국주의'에 대항한 베트남 민중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리영희 선생의 주장은 충격이었다. 대학 동기로부터는 베트남에서 우리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듣고 충격에 빠졌었다.
"베트남은 '한국의 엘도라도'였다." 1980년 광주학살로 언론사를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가 한국의 경제 발전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한 하버드대학의 한국 연구총서를 읽고 있을 때 나타난 충격적인 문장이었다. 이 책은 베트남전쟁을 스페인의 아메리카대륙 식민지화 시절에 생겨난, 도시 전체가 황금으로 덮여있다는 '전설의 땅 엘도라도'에 비유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 베트남전쟁에서 우리가 얻은 직접적인 상업적 이익이 7억 달러이고 한국군이 받은 월급을 송금한 것이 20억 달러, 합쳐서 27억 달러였다. 이는 그 기간 중 우리의 전체 수출액의 40%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소위 '산업화의 도약의 단계'였던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 베트남 파병은 한국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엘도라도'의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브라운이 작성한 '브라운 각서'에 의해 우리는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무기 현대화와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우리 기업들은 브라운 각서에 의해 여러 현지 공사, 운송 등에 참여해 세계시장으로 나아가 글로벌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진은 비행기로 사람들과 물류를 베트남으로 수송하고 베트남에서 운전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군부대에 물류를 운송하는 등 다양한 운송사업을 벌여 이를 기반으로 현재의 대한항공 등 종합운수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현대건설 등도 베트남에서의 해외 건설 경험을 토대로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에 뛰어들 수 있었다. 즉 '한강의 기적'은 사실상 베트남전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에 가려진 어둠 역시 깊다. 32만 명의 파병 중 5099명이 죽고 1만1232명이 부상을 입었다. 16만 명이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 피해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신적인 트라우마에 고통을 받은 병사들도 적지 않다. 이들만이 아니라 위험한 물자 운송을 하다가 죽은 노동자들도 적지 않다(파월 노동자들 400여 명은 1971년 한진상사가 연장노동 등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번 140억 원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며 KAL빌딩을 점거하고 방화했다).
이 점에서 한강의 기적,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풍요는 열대우림의 이국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군인들과 노동자들에 빚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포터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한국이 베트남전에서 얻은 이익은 일본이 한국전에서 얻은 이익과는 비교도 안 되고 파병도 하지 않은 일본이 베트남전에서 얻은 이익보다도 훨씬 적었다고 한다.
"어디에서 왔지?"
"한국"
"아, 미국 용병의 나라에서 왔구먼."
유학 초기 미국 대학에서 만난 남미의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왔다"는 나의 말에 단번에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의 또 다른 어둠은 '미국의 용병'이라는 불명예이다. "한국도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에 미국편을 들어 군대를 보낼 수 있느냐"며 "한국이 일본을 상대로 민족해방전쟁을 하고 있는데 베트남이 일본 편을 들어 파병을 하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고 물었다.
물론 남베트남이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역사를 알게 되고 남베트남이라는 것이 부패한 꼭두각시 정권에 불과해 미국의 엄청난 원조와 지원에도 결국 패망하고 만 상황에서, 한국의 파병이 '베트남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변할 수도 없어, 낯만 붉히고 있어야 했다.
사실 용병 논쟁은 파병 당시 이미 미국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도 제기됐다. 당시 우리군은 미군 봉급의 3분의 1 수준을 지급받았는데, 이 금액이 국내에서 받은 봉급보다 훨씬 많아 비판적인 의원들로부터 "한국군은 '피의 보상을 노린 용병'이 아니냐"는 비판에 시달렸다.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용산 전쟁기념관의 베트남 참전 전시장의 커다란 팻말이다. 베트남 십자성부대 정문 앞에 세워져 있었던 채명신 주월 한국군 사령관의 훈령을 크게 재현해 놓은 이 진열물은 2018년 한베 평화재단을 따라 베트남을 방문해서 본 한국군 학살 관련 추모물과 너무나 대비가 됐다. 과연 한국군은 이 훈령을 지켰는가?
▲ 전쟁기념관에 재현해 놓은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의 훈령 ⓒ손호철
코로나19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지만, 최근 들어 한국 사람들이 자주 가는 여행지 중의 하나가 중부 베트남의 휴양지 다낭이다. 다낭에서 가까운 하미 마을에는 기이한 비석이 하나 있다. 추모비인데, 한 면은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쓰여 있지만, 다른 한 쪽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비'다. 1968년 1월 24일 한국군은 이곳에서 130명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이후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추모탑 건설비를 지원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추모탑 한 면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쓰고 다른 한 면에 한국군의 학살 사실을 언급했다. 참전용사들이 문제를 제기했고, 마을 측이 항의의 뜻으로 그 면의 글을 다 없애고 백비로 만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군에 의해 69명이 학살당했다는 퐁니 퐁넛 마을에서도 희생자들의 추모비가 우리를 맞는다. 광남성 주이쑤엔현 투언찌촌 마을 무덤 입구에는 9명의 가족을 한국군에게 몰살당했다는 당소 씨가 베트남어와 영어로 '한국군이 가족 9명을 학살한 범죄의 흔적'이라고 써 놓았다.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1966년 2월 26일, 미 제국주의의 지휘 아래, 남조선의 꼭두각시 군인이 380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베트남 곳곳에는 이와 비슷한, 섬뜩한 '한국군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오랫동안 이 문제에 천착해온 한베 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에 따르면, 이같이 한국군에 학살당한 사람은 80여 건, 총 9000여 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그 중 상당수는 어린이들이다. 베트남이 '전선이 없는 전쟁'이었다고 하지만, 어린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이들까지 죽여야 했는가? 우리군은 이들 학살을 부정하고 있지만, 한국군이 아니라면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북한군이 국군복을 입고 학살을 저질렀던 말인가?
▲ 중부 베트남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학살 유적지를 방문한 한베평화재단의 평화기행단. '한국군의 범죄유적'이라는 영어 글씨가 가슴에 아프게 다가온다. ⓒ손호철
▲ 2018년 하미 학살 50주년 위령제에서 비석에 새겨져 있는 희생 가족들의 이름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히는 유가족들 ⓒ손호철
베트남에 가서 이들 추모비들을 보고 있자, 떠오른 것은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등 한국전쟁 과정에서 우리 군이 저질렀던 무수한 민간인 학살과 1980년 광주에서 우리 군이 저지른 잔인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 셋은 분리된 개별적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셋 중 한국전쟁 전후 학살과 5‧18은 뒤늦었지만 진실화해위원회와 5‧18 진상조사 등을 통해 그 진상이 상당히 규명됐고 희생자들도 명예회복이 됐다. 또 미진한 부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베트남 학살의 경우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 등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 다만 미국의 한국군 감찰보고서에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퐁니 마을 학살사건에서 8살 어린이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응우엔티탄이 2020년 민변의 도움을 받아 한국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한국정부가 베트남 학살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우회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이에 대한 자료 공개 등 진상규명에 미온적이다. 우리가 훨씬 오래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고, 미국이 노근리 학살에 대해 문서를 공개했고 학살에 가담한 미군들이 증언을 한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소개될 노근리 학살 참조). 베트남정부 역시 한국과의 경제 교류 등을 위해 이들의 진상규명과 손해배상 요구 등을 '제어'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베트남 참전의 그림자는 너무 깊다. 베트남 참전의 빛과 그림자를 생각하며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춘천을 떠나려는데, 베트남에서 만난 응우엔티탄 할머니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왜 한국군이 나까지 죽이지 않아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만들었느냐?"
▲ 일본군 성노예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에는 일본군 피해 할머니들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피해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다. ⓒ손호철
아가야, 한국군이 우릴 폭탄 구덩이에 넣고..."오마이 뉴스 2014.03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oid=047&aid=0002048923
베트남 학살 피해자 앞에 무릎꿇은 명진 스님 오마이뉴스 2015.04.11.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oid=047&aid=0002085654
시민평화법정 재판부 “베트남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 공론화 필요” 2018.04.13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133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책임…대한민국에 묻겠습니다 2021. 8.26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08791.html
베트남정부, 한국군 학살 논란에 침묵하는 이유
▲ 지난 2020년 10월 12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입구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국가배상 소송 1차 변론기일 경과보고 기자회견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베트남TF와 한베평화재단 등 관계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신짜오 베트남-134] 지난 26일 국가정보원이 보유한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의혹 관련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날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임재성 변호사가 국정원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처분 무효확인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이날 판결로 공개되는 정보는 1968년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에서 벌어진 민간인 70여 명 학살 사건과 관련한 자료입니다. 민변 측은 관련 자료를 공개해줄 것을 수차례 국정원에 요청했는데 국정원은 이를 거부한 바 있습니다. 민변은 중앙정보부가 학살 사건에 관련된 베트남전 참전 군인 3명을 신문한 조서들의 목록인데요. 국정원은 문건 공개를 거부했다가 행정소송에서 패소 판결이 확정됐는데, 또 다른 사유를 들어 또 비공개 처분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에 민변은 2019년 3월 공개 거부를 취소하라며 다시 행정소송을 냈지요.
이 사건과 관련 손해배상 소송도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 씨(61)가 낸 소송입니다. 그는 8살이던 1968년 2월 한국군의 총격으로 어머니와 남동생, 이모, 사촌동생 등 가족들이 몰살됐다며 소송을 냈습니다. 소송을 대리하는 민변 측은 당시 한국군 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으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 74명이 학살됐다고 얘기합니다.
2000년 6월 미국 기밀문서 비밀 해제로 진상이 드러난 당시 상황은 끔찍합니다. 사건 당일 한국군은 이 마을을 지나가다 총격을 받았고 분개한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가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공개된 사진을 촬영한 미군 상병은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가까운 거리에서 총격을 당하거나 대검에 찔려 죽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젊은 남자 주검은 없었고 노인이거나 여성, 아이들이었다'고 얘기합니다. 베트콩이 한국군을 상대로 사격 후 떠나간 자리에 남은 마을 사람들을 놓고 광기의 학살을 벌인 정황이 뚜렷합니다. 당연히 사과해야 하고 잘못을 물을 수 있으면 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법의 판결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베트남전쟁 당시를 바라보는 베트남 정부의 입장은 한결같습니다. 공식석상에서 나오는 발언의 온도는 변화가 없습니다. 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저는 이 발언이 베트남 경제 성장을 위한 정부 차원의 '인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트남 정부 관계자라고 과거 잘못된 학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싶겠습니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얘기하고 국제사회를 통해서 지지의 목소리도 이끌어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발목 잡혀 옛날얘기를 꺼내면 투자를 받거나 공장을 유치하는 데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쉬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게 완전한 착각이란 걸 깨달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의 한 원로 언론인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한국 나이로 아흔이 넘은 그는 베트남전의 상흔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나이였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이슈는 베트남전쟁 당시로 그리고 한반도의 남북관계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트남은 일찍이 통일을 이뤄서 단합된 나라로 잘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 남과 북으로 갈려 서로 싸우고 있지 않느냐. 참 안된 일이다. 아무쪼록 서로 노력해서 통일을 이루기를 바란다. 베트남도 응원하겠다."
혹시라도 이슈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만행으로 흘러가면 사과의 뜻을 전해야겠다는 제 생각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위로하는 것은 그였고 저는 위로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이후 베트남 정서에 능통한 전문가 여럿을 만나 전해들은 베트남 지식인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베트남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과 싸워서 이긴 승전국입니다. 한국군은 미군을 도와 파병한 용병 개념이었습니다. 따라서 베트남전 당시 한국은 패전국의 용병 개념이라고 베트남 지식인들은 생각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승전국' 입장에서 패전국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넘어가겠다는 게 베트남 정부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경제 발전을 위해 분노를 참고 과거를 묻어두는 개념이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뒤 베트남에 대한 제 이해도는 훨씬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현대사로 접어들며 프랑스와 중국, 미국과 싸워 모두 이긴 나라가 베트남입니다. 지금이야 1인당 GDP 3000달러에 그치는 중진국이지만 내면에는 맹렬한 자부심으로 뿜뿜 뭉친 나라입니다. 베트남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이 같은 심리를 읽어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글을 마치며 이번 대법 판결을 통해 공개되는 정보가 그리고 그로 인해 밝혀지는 진실이 유족을 위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합니다.
[하노이 드리머(홍장원 기자)][ⓒ 매일경제 2021.03.27
1980년 '서울의 봄', 막장 광부들이 돌을 들고 싸웠다
[손호철의 발자국] 25. 강원도 사북 : 어용노조에 저항해 일어난 '사북(탄광) 항쟁'
코로나19 때문에 요즈음 줄어들었지만, 산골오지에 수백 명의 노숙자들이 서성이는 곳이 있다. 바로 정선의 사북이다.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도박중독자들이 노숙자가 된 것이다. 이제는 강원랜드라는 국내 유일의 내국인 카지노가 생겨난 '카지노마을'이 되고 말았지만, 사북은 원래 한국을 대표하는 탄광마을이다.
"어용노조지부장은 물러나라!", "지부장 직선제 실시하라!", "임금, 40% 인상하라!" 1980년 4월 21일 사북의 동원탄좌 노조사무실 앞에는 300여 명의 광산 노동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외치기 시작했다. 역사적인 '사북(탄광)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이 항쟁은 하루하루를 생명을 걸고 살아가는 '막장 인생'인 광부들이 일으킨 대표적인 항쟁이자,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에 의해 생겨난 '서울의 봄' 시기에 터져 나온 대표적인 노동투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 태백 석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북 항쟁 사진
주목할 것은, 광부들이 임금 인상 등 회사 측을 겨냥하면서도 진짜 공격한 대상은 노동조합 지부장이었다는 점이다. 즉 사북 광부 항쟁은 열악한 광부들의 생활에 분노해 일어난 생존권투쟁이지만 동시에 어용노조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항쟁이 진짜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53년까지의 해방 8년사가 극우세력의 승리로 끝난 뒤,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않고 회사 측과 정권을 대표하는 우리의 노동운동, 즉 '어용노조'의 어두운 역사다.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이 쟁점이 되어 이승만이 불출마 선언을 하는 쇼를 하자, 대한노총은 "국민들만이 아니라 소나 말도 이 대통령의 출마를 원한다"며 우마차를 동원한 시위를 했다. 하다못해, 사북 항쟁 7년 뒤인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적 저항이 불타올랐을 때도, 한국노총은 대통령 간선제 헌법을 지키겠다는 전두환 정권의 호헌 성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광부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하다. 급수시설을 비롯한 생활 여건도 나쁘거니와 광부의 임금으로는 자녀 교육이나 생활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사북 항쟁 당시인 1980년 3월, 노조위원장이 아니라 내무부 차관이 한 이야기이다. 정부 고위관리들이 인정할 정도로, 당시 광부들의 생활은 열악했다.
당시 동원탄좌가 운영하며 민영 탄광 중 최대 규모인 4000명의 광부가 국내 생산량의 10% 이상을 생산하던 대형 탄광, 사북 탄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열 30~40도의 고열 속에서 고난도 노동을 해야 하고, 까딱하다간 목숨을 잃기 십상이며, 진폐증이라는 직업병을 얻게 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씻을 물도 없는 주거 환경은 엉망이었고 급여도 낮았다.
▲ 석탄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사북 광부들의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 환경
문제는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하는 노조 역시 회사 편이었다는 점이다. 노조는 회사로부터 부당한 금전적 혜택을 받고 회사 앞잡이로 행동했다. 1963년부터 노조위원장을 한 이재기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분노한 이원갑은 노조위원장에 출마했고 의식 있는 노조 대의원인 신경이 그를 도왔다. 그러나 광부들이 아니라 대의원이 노조위원장을 뽑는 간선제였고, 이재기는 제주도로 초대한 대의원들을 매수해 1979년 가을에 열린 선거에서 승리했다. 선거 결과에 일반광부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에도 이재기는 여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광부들이 요구해온 임금 40% 인상안을 위원장 직권으로 포기하고, 회사 측과 20% 인상에 합의해 버린 것이다.
당시는 박정희가 사망하고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였다. 사회적 분위기에 고무된 광부들은 어용노조위원장 퇴진, 위원장 직선제 도입,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사내 분규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시위가 사북을 마비시킨 엄청난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우발적 사고' 때문이다.
1980년 4월 21일, 집회를 금지하는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300여 명의 광부들이 노조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노조사무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경찰들이 시위 참여 광부들을 카메라로 채증하기 시작했다. 이에 항의하는 노조원들과 시비가 붙었고, 화가 난 광부들이 경찰을 쫓자 한 경찰이 건물 앞에 세워둔 승용차를 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차 앞을 막아선 광부들을 차로 치고 도주했다. "경찰이 사람을 잡았다." 흥분한 광부들은 노조사무실에 있던 경찰서장을 붙잡아 몰려가 경찰서를 점령했다.
경찰들은 도주하고 사북은 '해방구'로 변했다. 부녀자들은 솥을 걸고 음식을 해 광부들을 먹였고, 광부들은 밤새 사북을 헤집고 다녔다. 그들은 노조사무실, 경찰서, 광업소 사무실, 회사 간부와 노조 간부의 집을 파괴했다. 어용노조위원장 이재기를 찾아 나섰지만 그는 이미 도주해버려 이재기의 처만 붙잡았다. 일부 광부들은 이재기의 처 김순이 씨를 폭행하고 심각한 성추행까지 했다고 한다. 김 씨는 인질로 묶인 채 마을을 끌려 다니다 3일 뒤인 24일에야 풀려났다.
비상이 걸린 강원도 경찰은 도 경찰국장의 지휘 아래 400여 명이 진압에 나섰다. 사북에서 광업소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인 안경다리에서 22일 전투가 벌어졌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접근해 왔지만, 3500명 광부들에 마을 사람들까지 더해져 6000명이 모였다. 남자들은 부녀자들이 날라다준 돌로 무장해 투석전으로 맞섰다. 결국 경찰 1명이 사망하자 경찰은 철수했다.
경찰은 계엄당국에 공수부대 투입을 요청했다. 계엄사령부는 군 투입작전을 준비했지만, 다행히 작전 개시 이전인 4월 24일 협상이 타결됐다. 3일 간에 걸친 노사정 협상에서 회사 측은 상여금을 250%에서 400%로 늘리는 등 여러 후생복지 개선책에 합의했고 이번 사태에 대해 회사와 당국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약속했다.
▲ 경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안경다리 옆 뿌리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광부의 동상 ⓒ손호철
▲ 사북에는 아직도 광부들이 생활하던 열악한 주택들이 남아있다. ⓒ손호철
정권 장악을 노리던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이 같은 '노동의 도전'을 묵과할 수 없었다. 계엄사는 사북사건합동수사반을 조직해 주모자를 잡아들인다는 명목으로 사북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110여 명이 잡혀갔고 이원갑 등 '주모자'들은 보안사 수사관들로부터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부녀자들은 이재기의 처보다 더 심한 성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언론은 '노조위원장 부인 폭행'만을 부각시켜 항쟁을 매도했다. 결국 이원갑 등 28명은 계엄군법회의에서 최고 5년 등 모두 84년형을 선고받아야 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생업에 고통을 받아야 했다.
민주화와 함께 이들은 사북노동항쟁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자신들의 투쟁이 "민주화를 위한 노동운동이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싸워나갔다. 2000년대 들어 발족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과보상심위위원회에 명예회복을 신청했지만, 신청자 21명 중 이원갑과 신경 등 2명만이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다(이들은 2015년 재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19명의 명예회복 신청이 기각된 것 이외에도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노조위원장 처 김순이 씨에게 가해진 성폭력과 폭력,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성폭력이다. 사북 항쟁이 아무리 정당한 항쟁이었다고 하더라도, 어용노조위원장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폭력과 성폭력을 가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원갑의 말대로 이는 "없어야 할 일"로, 이원갑은 김 씨를 찾아가 사과했다.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계엄사가 조사과정에서 고문 등 인권을 침해했다며 "국가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추진"하는 한편, "집단폭행을 당한 어용노조위원장의 처 김순이 씨를 위로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적절한 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않고 있다. 김 씨는 이원갑 씨 등에 대한 민주유공자 지정을 취소해달라는 헌법소원을 냈지만 기각됐다. 다만 이들이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민사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고 한다. 항쟁 참여자들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 정선군은 사북 항쟁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정선군 자료
사북에 가면 이제 사북 항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석탄 산업의 구조조정에 의해 광부들이 목숨을 걸고 일했던 동원탄좌는 이제 폐광이 되어 사북탄광문화관광촌이라는 광산 체험관으로 변했다. 대신 강원랜드라는 카지노가 들어서 한국 최대의 탄광촌은 카지노마을로 변했다.
광부들과 경찰들이 격전을 벌였던 안경다리에는 카지노 광고가 설치되어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고 있다. 근처의 노조사무실은 뿌리관으로 변했고, 그 옆에 광부들의 생활과 사북 항쟁을 요약한 기념비와 산업전사의 탑이 세워졌다. 사북에서 30분을 달려 태백시로 들어가면 태백석탄박물관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탄광의 모든 것에 대해 잘 전시되어 있지만, 사북 항쟁에 대해서는 '사북 사태'라는 제목으로 종이 한 장에 간단히 써놓았다.
이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총이라는 자주적 노동조합연합체가 생겨났고, 한국노총도 변신을 하여 자주성을 많이 회복했다. 41년 전 사북 광부들이 계엄정부에 저항해 돌을 들고 싸웠던 안경다리에 서자, 이 같은 변화의 밑바탕에는 어용노조에 대항해 분연히 일어났던 사북 항쟁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경찰과 치열한 투쟁을 했던 안경다리는 변화한 사북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손호철
▲ 이제는 탄광체험관으로 변한 동원탄좌 채광시설들 ⓒ손호철
▲ 사북에는 탄광이 문을 닫은 대신 카지노가 들어섰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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