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동아일보 전면 실린 “모든 여자들아 교회에서 잠잠하라” 광고는?
재난지원금 지급과 재정자립도 하락은 관계없다
쿠바의 한인,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
마른 발은 미국으로 젖은 발은 쿠바로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대졸초임, 대기업 5084만원 vs 5인 미만
쏟아지는 위드 코로나’ 보도가 말하지 않는 것들
팽창 가속’ 수도권 ‘소멸 직전’ 지방, 두 번째 분단
오세훈·박형준 기소여부 '초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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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면 죽어라, 살면 이중간첩 된다”
현대사의 ‘버러지’ 간첩 제조자들
명성황후 시해범을 쫓아서... 92세 일본인의 마지막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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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유족측 변호사, 강제추행 혐의로 피소

조선·동아일보 전면 실린 “모든 여자들아 교회에서 잠잠하라” 광고는?
조선·동아일보 1일자 전면광고 “모든 여자들아 교회에서 잠잠하라”
신옥주 목사를 ‘성령’이라며 신격화, ‘억울하게 수감됐다’는 메시지도
‘타작마당’이라는 종교의식이라며 목사가 신도를 폭행하거나 신도간 폭행을 지시해 지탄을 받은 은혜로교회가 일간지에 “여자들아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내용의 전면광고를 내걸었다. 왜곡된 성차별인식을 이용해 담임목사의 악행을 옹호할 뿐 아니라 ‘성령’이라고 표현하며 신격화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지난 1일 각각 은혜로교회의 입장과 관련된 성경구절이 담긴 전면광고를 실었다. “이제 온 천하는 잠잠하라”는 제목 옆에는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잠언 18장 17절)라는 성경구절과 “하나님의 법으로 온 세상의 거짓을 판결한다”는 소제목이 함께 실렸다.
또한 “모든 ‘여자들’아, 교회에서 잠잠하라”라는 메시지도 실었다. 여기서 ‘남자’는 그리스도, ‘여자’는 ‘교회와 목사 곧 성경을 가르치는 지도자’라고 한 뒤 실제로는 목사 신씨를 비판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의 실명을 언급하며 이들을 ‘여자’라고 했다. 일부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성차별 인식을 비유로 들며 반성이 아닌 과거 행적에 대해 합리화하는 내용이다. 은혜로교회는 해당 광고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내용이 포함된 고린도전서 14장의 성경구절도 함께 인용했다.

▲ 1일 조선일보 26면 전면광고
폭력행위처벌법상 공동상해, 사기, 특수감금 등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7년 판결을 받고 수감 중인 은혜로교회 담임목사 신옥주씨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듯한 메시지다. 목사 신씨는 교인들의 여권을 빼앗아 집단 숙소생활과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피지에 거주하게 해주겠다며 돈을 가로채기도 했다.
은혜로교회는 해당 광고에서 “여자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신령한 교회의 표상이자 하나님께서 장가드신 실상의 여자, 다윗 집의 열쇠를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인 진리의 성령인 나 신옥주 목사를 뜻한다”고도 했다. 수감 중인 신씨를 ‘성령’이라고 칭하며 여전히 신씨의 행동을 옹호하는 메시지다.
이는 사회적 비난이 잠잠해지자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데일리굿뉴스 8월31일자 보도를 보면 신씨는 수감상태지만 은혜로교회는 교인들을 집단생활시키면서 국내에서 사업확장을 시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문사들이 기사와 광고면을 분리하고, 통상 광고의 내용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는 관행을 악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자들을 향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경우 이를 기사화할 언론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광고면을 구입해 지속적으로 자신들 주장을 유포하는 것이다.
은혜로교회는 앞서 지난 6월과 7월에도 수차례 동아일보에 실린 전면광고를 냈다. 이들은 “나는 은혜로교회 신옥주 목사다. 나는 전 성경을 통으로 보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서 성경 속에 감추어 두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는 목회를 하던 중, 자칭 목사, 자칭 기독교인들, 우리에게서 나가 후욕하는 자들이 ‘이단이란 프레임’을 씌워, 성경대로 보고 듣고 믿고 행동한 일들을 두고 2018년 7월 24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성도와 함께 긴급 구속되어 ‘특수폭행, 공동 상해, 폭행, 중감금, 특수감금, 사기, 상법위반, 아동복지법위반 교사죄’라는 더러운 죄명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2년 11개월째 옥에 갇혀 있다”며 “나는 나를 고소한 자들이 말한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신씨가 억울하게 수감됐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 교인을 폭행하는 은혜로교회 목사 신옥주씨. 사진=노컷뉴스
이에 강호숙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는 3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신씨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지만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왜곡된 리더십을 답습하고 성경을 입맛대로 해석하며 폭력적인 모습을 유지한다”라며 “실제 교회에서 문제제기하는 여자들이 많기도 하고, 비판하는 사람을 여자라면서 잠재우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기독교 주류에선 은혜로교회를 이단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다. 강 박사는 “성경은 폭력이 아니고 평화의 메시지여야 하는데 가부장 남성중심주의, 종교의 폐쇄성, 강자중심주의 등 나쁜 것을 다 가져와서 부패한 목사들이 오히려 약자들을 억압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며 “정통 교회에서도 ‘여자들에게 잠잠하라’라면서 성경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정통에서 얘기하는 것을 (은혜로교회가) 가져다 쓰는 악순환”이라고 말했다.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재난지원금 지급과 재정자립도 하락은 관계없다
평가는 기준에 따라 해야 한다. 수학 그래프 그림을 미술 선생님이 미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종종 벌어진다.
가정 살림, 중앙정부 살림, 지방정부 살림의 원칙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가정 살림 기준으로 중앙정부 살림과 지방정부 살림을 바라보는 기사가 무척 많다. 가정은 수입이 좋으면 좀 더 쓸 수 있지만, 사정이 안 좋아지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월급이 오르면 여유롭게 소고기도 사 먹어도 좋다. 그러나 수입이 줄면 돼지고기로 만족하자. 수입이 감소해도 조금이라도 저축하면 좋다. 요약하자면, 가정 살림 평가 기준은 흑자(저축)를 많이 내면 점수가 올라간다. 다만 사정이 좀 나아질 때는 지출을 더 늘려도 좋다.
중앙정부는 반대다. 경기가 나쁠 때 오히려 지출을 늘려야 한다. 경기가 나쁘면 수입이 준다. 수입이 줄 때 지출을 늘리니 적자재정이 된다. 경기가 안 좋을 때, 정부라도 돈을 안 쓰면 내수가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경기가 좀 회복이 되면 오히려 지출을 줄여야 한다. 재정건전성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수 감소 상황에서 지출 증대 사실을 비판하는 언론은 오류다. 경기가 안 좋으면 세수가 줄 수밖에 없지만, 경기가 안 좋을수록 적자재정을 펼쳐야 한다. 중앙정부는 경기 조절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특히, 경기 하락 상황에서(세수감소 상황) 복지지출을 늘렸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언론도 있다. 오히려 시장이 제 기능을 잘할 때는 복지지출은 줄일 수도 있다.

▲ 세수가 줄었는데 복지 등 지출을 늘린 사실을 비판하는 기사들.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지출을 확대하고, 경기가 좋을 때 지출을 줄이는 것이 중앙정부 재정 원칙
지방정부는 어떨까? 지방정부는 균형재정이 원칙이다. 균형재정이란 번 돈 만큼 지출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지방정부는 돈을 남겨서도 안 되지만 적자재정을 편성해서도 안 된다. 1000억원을 벌면 1000억원을 다 쓰고, 1조원을 벌면 1조원을 써야 한다. 실제로 중앙정부 예산서는 총수입 규모와 총지출 규모가 항상 다르지만(불경기엔 적자재정, 호경기엔 흑자재정), 지방정부 예산서는 세입과 세출 규모가 정확히 일치한다. 중앙정부가 추경예산을 편성할 때는 새로운 수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메르스나 코로나가 발생하면,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메르스 추경’이나 ‘코로나 추경’을 편성한다.
반면, 지방정부가 추경을 편성하는 이유는 대부분 추가 수입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본예산 편성금액보다 추가로 수입이 발생하면, 추가로 수요를 창출해 지출항목을 편성한다. 균형재정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결국, 흑자도 적자도 아닌 균형재정이 원칙인 지방정부는 수입 예산 총액이 곧 지출 예산 총액이다. 이를 어디에 ‘배분’하는지만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정한다.

▲ 매일경제 온라인 22일자 기사, 지면엔 23일 1면과 5면에 걸쳐 실렸다
그런 의미에서 9월22일 매일경제의 “‘너나없이 주더니’ 재난지원금 5조 뿌린 지자체…재정자립도 50% 무너졌다” 기사는 지방정부 재정원칙을 오해한 측면이 있다. 일단, 재난지원금 지급과 재정자립도 하락에 대한 연관성은 전혀 없다. 재정자립도는 전체 세입 대비 자립재원의 비율이다. 자립재원(지방세와 세외수입)으로 40억원을 벌고 의존재원(교부세와 보조금 등)으로 60억원을 받으면 재정자립도는 40%다. 재난지원금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아도 재정자립도 40%는 변하지 않는다.
세입이 100억원이니 균형재정 원칙에 따라 세출 예산도 100억원을 편성해야 한다. 재난지원금액과 재정자립도가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난지원금 지급예산을 늘린다고 세출총액 예산 금액조차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균형재정이 원칙이니 다른 곳에 쓸 금액이 줄어들게 된다.
우리는 가정 살림 원칙은 잘 알지만, 중앙정부 재정원칙이나 지방정부 재정원칙은 잘 모를 수 있다. 가정 살림은 경기가 좋지 않을 때도 지출을 줄여서 저축을 하는 것이 좋다. 중앙정부 재정원칙은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지출을 늘려서 적자재정 편성이 원칙이다. 반면, 지방정부 재정원칙은 균형재정이다. 이러한 재정원칙을 혼동하고 내가 잘 아는 가정살림 원칙을 통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재정을 해석하면 오류가 생긴다. 재난지원금과 재정자립도의 관계는 로미오와 심순애 정도의 관계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로 로미오가 고통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mediatoday

쿠바의 한인,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
쿠바의 한인 이민사는 ‘약소민족의 디아스포라’나 ‘독립운동의 예외 사례’로 간주된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불꽃같은 20년 독립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한국사 바깥에 존재한다.

월2일 순천교육지원청에서 개최된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 100주년 기념 사진전’ 기념식.ⓒ순천시의회 제공
올해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1년 3월25일, 한인 288명이 쿠바 라스투나스 지역의 마나티 항구에 입항했다. 그들은 멕시코 유카탄주를 떠나 쿠바로 들어온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쿠바 한인에 대한 이해는 ‘1905년 4월 인천에서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 유카탄반도로 건너가 에네켄(용설란과의 식물. 밧줄의 원료인 섬유를 추출) 농장에서 일하다가 그보다 노동환경이 낫다는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했다’는 식이다. 좀 친절한 자료는 유카탄반도에서 16년 정도 머문 다음 쿠바로 건너갔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쿠바로 건너간 한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이 멕시코에서 16년 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쿠바의 한인 이민사가 ‘박해받은 약소민족의 디아스포라’ 정도로 이해되거나 그들의 독립운동이 언급되는 경우에도 ‘예외적 사례’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민 100년이 다 되도록 한국 사회는 여전히 쿠바 한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한인들의 불꽃같은 20년 역사’가 여전히 한국사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
쿠바 한인의 역사는 그들이 떠나온 멕시코 유카탄주의 주도 메리다 한인의 역사로부터 되짚어봐야 한다. 이는 다시 1905년 4월 인천에서 멕시코로 출발한 1033명의 이민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밀 생산량이 급증하자 포대용 굵은 밧줄의 수요가 폭증했다. 이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재배 급증으로 이어지면서 노동력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유카탄의 농장주협회와 의회가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에게 의뢰해 해외 노동자 이민을 추진했다. 마이어스는 1904년 11월부터 1905년 1월 사이 〈황성신문〉과 〈대한일보〉에 농부 모집 광고를 낸다. 이렇게 하여 모인 1033명 중에 대한제국 퇴역 군인 200여 명이 포함돼 있었다. 그들은 일제의 강압에 따른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울분에 차 있었다. 이런 퇴역 군인 200여 명이 멕시코 이민 행렬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멕시코 에네켄 이민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이면의 진실이다. 군인 외에도 이민 행렬에는 소작인, 잡역부, 전직 하급관리, 몰락한 양반, 부랑아, 걸인 등 다양한 계층이 끼어 있었다.
1905년 4월 이들을 태운 화물선 일포드호는 약 40일의 항해 끝인 5월13일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수출항 프로그레소에 도착한다. 유카탄의 주도 메리다는 이곳에서 35㎞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한인들은 이곳의 32개 농장에서 계약기간 4년 동안 노예노동에 준하는 혹독한 환경 아래 에네켄 채취에 종사했다.
문제는 계약기간이 만료된 1909년에 발생했다. 유카탄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이 한인 노동자들을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마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 주도로 해외 한인 독립운동 단체를 총망라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 중이었다. 메리다 한인의 보호 요청을 받은 대한인국민회 측에서 요원을 보내 농장 계약만료 3일 전인 1909년 5월9일 ‘대한인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가 창립됐다. 메리다 지방회는 한인 사회의 단결과 권익 옹호,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1909년부터 농장 3곳에서 군사훈련이 진행되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1910년, 본격적인 사관 양성기관인 숭무학교를 창설해 3년 동안 졸업생 118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독립전쟁이 벌어질 경우 언제든 뛰어들 준비를 한 것이다. 안창호 선생이 1917년 10월부터 1918년 8월까지 10개월간 에네켄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곳도 여기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대한공화국 건설과 새 정부 조직 축하 경축식을 열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당시 한인들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수입의 20%를 독립자금으로 내어놓았다고 한다.

1937년 ‘아바나 지방회 3·1절 기념식’에 자리한 대한인국민회 대표들.ⓒ미한사
쿠바 한인은 바로 이 메리다 한인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을 찾아 떠난 한인 288명 중에는 메리다 지방회 회원 42명이 들어가 있었다. 그들의 가족 95명을 더하면 288명 중 137명이 메리다 출신이다. 당시 멕시코에는 메리다 외에도 멕시코시티와 코아트사코알코스 지역에 대한인국민회 소속지방회가 있었다. 쿠바 이주민 중에 메리다 출신 외에도 독립운동과 직간접으로 관계 있는 사람이 존재했으리라 보인다.
단순한 한인 단체가 아니었다
쿠바 한인 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인물인 임천택 선생(1903~1985년)도 메리다 지방회 출신이다. 그가 1905년 인천에서 어머니와 함께 일포드선을 타고 유카탄에 온 게 두 살 때였다. 1921년 쿠바 마나티항에 입항할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으니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투철한 정신과 자세는 메리다 지방회에서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288명 한인이 마나티 항구에 도착한 1921년 3월25일 공교롭게도 설탕 1파운드 가격이 22.5센트에서 3센트로 폭락했다. 그만큼 고용이 줄었다. 한인들로서는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할 수 없이 찾아간 곳이 나중에 한인들의 근거지가 된 마탄사스 지역 핀카엘볼로 마을의 에네켄 농장(엘볼로 농장)이었다.
비슷한 일이 또 발생했다. 현지에 있던 일본 영사관이 한인들을 일본 신민이라 우기며 등록을 시도한 것이다. 한인 60여 명이 이에 강력 반발하며 1921년 6월14일 쿠바 한인의 공식 대표기구로서 대한인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한다. 메리다 지방회가 만들어진 과정이 쿠바에서 재현된 것이다. 1921년 9월 마나티 지방회가 만들어지고 1923년 3월 카르데나스 지방회가 만들어진 뒤엔 자연스럽게 쿠바 지방회의 이름도 마탄사스 지방회로 바뀐다. 지방회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김구 주석의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결됐다. 사실상 현지 한인들에 대해 정부 기능을 담당하는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 기관이었다.
임천택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마탄사스 지방회는 의무금을 납부한 회원 30여 명이 1945년까지 약 25년간 지방회 경상비·교육비·외교비 등으로 2만원 가까운 금액을 출연했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8년 동안 상하이 임정에 1489원 70전을 독립운동 성금으로 납부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2월부터 5월까지 광주학생운동 지지 대회를 개최하며 3개 지방회 소속 한인 100여 명이 특별후원금 100달러를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당시 시세로는 쌀 400가마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 외에도 민성국어학교, 진성국어학교, 흥민학교 등 한국 말과 글, 한국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설립설립했다. ‘친구회’를 조직해 쿠바 현지인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개시하자 참전을 고려하는 쿠바 정부에 한인들의 공동 참전을 설득했다.
한인이 쿠바에 건너간 1921년부터 엘볼로 농장 해체로 한인회가 급격히 약화된 1945년까지 쿠바 한인의 삶은 조국 독립을 위한 불꽃같은 헌신의 삶이었다. 그 뒤 남북 분단과 쿠바혁명으로 그들이 뿌리로 삼았던 상하이 임시정부의 후신인 한국 정부와 선이 끊어지고 후손들의 현지화가 계속 진행됐다. 이제 그들 1세대와 2세대의 독립투쟁은 전설이 되었다. 당시 이들이 보내준 독립자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소상히 기록돼 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동북 3성에 250만, 러시아에 150만, 일본에 40~50만의 동포가 있으나 각각의 사정으로 기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서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를 아우르는 1만여 명의 동포 성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솔직히 토로한 바 있다. 그들이 보내온 피 같은 성금으로 임시정부를 꾸리고 윤봉길·이봉창 열사의 거사를 진행한 것이다.

2019년 1월13일 쿠바 마탄사스 엘볼로 충혼탑 앞에서 쿠바 한인후손회와 국제코리아재단이 주최한 진혼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국제코리아재단 제공
현재 정부는 쿠바 한인 33명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했으나 그중 20여 명의 후손에게만 연락이 닿았을 뿐이다. 나머지 다른 후손들은 자기 선조의 역사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쿠바 혁명과 한인의 숨결을 찾는 순례길
쿠바의 한인을 해외 한인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에 정당하게 편입하자는 움직임이 비교적 최근에 일어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19년 1월 쿠바 현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진혼제를 쿠바 한인회와 공동 주최한 국제코리아재단(이창주 상임의장·〈쿠바한민족사〉의 저자) 측이 올해가 가기 전인 12월21~31일 ‘쿠바 한인 디아스포라 100주년 기념행사’를 갖는다. 이창주 의장은 “2019년 3·1운동 100주년 행사 이후 각계에서 쿠바 한인 100주년 행사도 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호세마르티 문화원과 쿠바 한인후손회 등이 협력기관으로 참여한다. 행사는 아바나와 마탄사스의 엘볼로 마을 및 바라데로 등에서 기념식을 열고 한·쿠바 경제 포럼, 숭모기림문화제 및 기림비 헌정식을 한 다음 국내 참가자와 함께 버스를 대절해 하바나에서 산티아고데쿠바까지 쿠바 혁명과 한인의 숨결을 찾아 순례길에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자세한 행사 내용은 www.koreanglobalfoundation.org 참고).
시사인 남문희 기자
마른 발은 미국으로 젖은 발은 쿠바로
냉전이 붕괴되자 ‘중남미의 외톨이’ 쿠바에 위기가 왔다. 소련과 동유럽에서 들여오던 생필품과 석유가 급감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특별시기’로 선포하고 대처했지만 미국으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쿠바 현대사에 드리운 피델 카스트로의 삶을 지난 호에 이어 재조명한다.
냉전의 붕괴는 외톨이 쿠바에 고독만 안겨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한 고통은 바로 배고픔이었다.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쿠바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쿠바는 혁명 이후에도 사탕수수와 담배를 수출하는 국가였다. 혁명 이전에는 주로 미국에서 오던 수입품이 혁명 이후에는 소련과 동유럽에서 왔다. 식량과 의약품은 물론이고 생필품과 석유는 모두 공산국가들에서 들여왔다. 소련은 사탕수수를 매우 후한 가격으로 사주었고, 석유는 매우 싸게 공급해주었다. 그렇게 쿠바를 배려하던 사회주의 형제 국가가 1991년에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쿠바 정부는 1992년에 이른바 ‘특별시기(Periodo Especial)’를 선포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 몰락 이후를 가리켜 “혁명 이래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라 쿠바 역사상 가장 힘든 시기”라고 말한 바 있다. 20세기 중남미 역사에서 이렇게 힘든 상황에 놓인 나라는 없었다. 대공황기의 어느 중남미 국가보다도 1990년대 초반의 쿠바가 더 힘들었다.
1989년과 1993년 사이에 쿠바 국내총생산은 무려 45%가량 축소된다. 1989년과 1992년 사이에 석유 수입량이 86% 줄었고, 식량 수입량도 42% 감소했다.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물자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버스는 휘발유가 부족하거나 동유럽에서 수입하던 부품이 없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트랙터는 소가 끌게 되었고, 말이 끄는 달구지가 다시 등장했으며, 사람들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야 했다. 에너지 위기에 투자마저 줄어들어 공장들은 문을 닫았다. 정전은 하루 12시간씩 계속되었다.

1994년 쿠바와 미국 사이의 바다에서 발견된 쿠바 망명자들. 고무 튜브와 드럼통 등으로 얼기설기 만든 뗏목에 타고 있다.
이제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쇠고기·닭고기·생선은 식사 메뉴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식용유 대신 맹물로 달걀을 프라이하는 법, 자몽과 오렌지 그리고 바나나 껍질을 이용해 고기 맛을 내는 법 등을 개발했다. 영양부족으로 각기병, 시신경염 등을 앓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나마 식량배급 제도로 대규모 기아와 영양 결핍 사태를 겨우 막았다. 당시 쿠바 정부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옵션 제로’라는 대책까지 준비해두었다.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군대가 직접 동네마다 돌면서 끼니를 배급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갑자기 쓰러지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살아서도 고달팠지만 죽어서도 편히 쉴 수 없었다. 당시 쿠바인들은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가톨릭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려면 나무로 관을 만들고 매장해야 하는데, 목재조차 구하기가 힘들었다.
쿠바 화폐인 페소의 가치는 폭락했고, 물가는 치솟았다. 한 공식 자료에 따르면 1992년 쿠바 인구의 약 65%가 월 소득이 2달러 미만에 불과했다. 당시 환율은 곤두박질쳐서 1달러에 150페소였다. 쌀 1파운드(453g), 아보카도 1개가 140페소에 달하던 시절이었으니 한 달치 월급으로 아보카도 2개를 사면 그만이었다.

ⓒAP Photo2008년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오른쪽)가 국가평의회 의장에 올랐다.
피델 카스트로가 소요 현장에 나타나 대화
그 시절 쿠바 혁명의 적대자들은 물론이고 우호적으로 지켜보던 사람들도 쿠바 혁명 체제가 몰락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모두 쿠바가 소련과 동유럽의 길을 갈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쿠바 내부에서도 그런 조짐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1994년 8월5일에는 수도 아바나에서 혁명 이후 최초의 대중 소요가 발생했다. 그날 아침 아바나 사람들 사이로 두 가지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하나는 사람들이 연안 여객선(Lanchita de Regla)을 납치해 플로리다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배들이 도착해서 떠나고 싶은 사람들을 실어갈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송출하는 보수적인 라디오 마르티가 직접 언급했다는 것이다.
‘특별시기’에 힘겨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쿠바에서 바닷길로 144㎞ 떨어진 플로리다로 가면 망명 쿠바인들의 공동체가 있어서 먹고살거나, 성공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배를 훔쳐서라도 쿠바를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들을 술렁이게 한 소문이 퍼진 것이다. 사람들은 아바나 방파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도 기다리던 배들이 오지 않자 사람들의 기대감은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군중이 모여든 것에 위기감을 느낀 경찰이 해산을 시도하자 절망감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경찰을 피해 달아난 아바나 시민들이 방파제 앞 대로로 흩어지더니 사이사이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골목에서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다시 방파제 쪽으로 나아갔다. 누군가가 “물러가라!(Que se vaya!)” “피델 꺼져라!(Abajo Fidel!)”를 외쳤다. 플로리다로 탈출하려던 사람들이 시위대로 변한 것이다.
분노한 시민들이 돌과 막대기를 들었다. 경찰차 유리창이 돌에 맞아 깨졌고, 호텔과 상점의 쇼윈도가 박살났다. 약탈이 벌어지고, 쓰레기통이 뒤집혔다. 소요는 순식간에 아바나의 서민 지역으로 퍼져갔다. 열대의 나라 쿠바는 8월의 열기에 대중시위 열기마저 더해졌다. 마치 화약고에 불똥이 튄 것과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불과 한 달 전인 7월13일에는 예인선이 침몰해 30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아바나를 떠나려던 사람들이 예인선을 납치해 플로리다로 가다가 이를 쫓아온 다른 예인선들의 공격을 받아 쿠바 연안에서 7마일 되는 지점에서 침몰했다. 정부는 불법행위를 막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고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배도 고픈데 떠나려는 사람마저 죽인다고 생각했다.
대중 소요는 오후에 진정되었다. 놀랍게도 직접 피델 카스트로가 소요 현장에 나타났다. 그는 지프차를 타고 경호원 몇 명을 데리고 직접 등장했다. 군인이나 경찰을 대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현장의 기자들에게 “원하는 사람은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다. 쿠바 해안경비대가 이민 가려는 이들을 잡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소요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날 경찰은 수백명을 체포했다. 다행히 총격도 사망자도 없었다. 부상자들이 제법 되었지만 모두 가벼운 타박상에 그쳤다. 이날 시위는 1959년 혁명 이후에 최초로 쿠바에서 벌어진 대중 소요였다. 쿠바 정부도 이 소요를 댐의 균열로 인식했다. 이 틈이 더욱 커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소요 사태 이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8월11일에 쿠바를 떠나려는 사람들을 막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정부가 국경을 개방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플로리다로 가는 수단까지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정이 좋은 사람들은 그나마 엔진이 달린 배를 타고 승선 인원을 초과한 채로 달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뗏목을 만들어 띄웠다. 물에 뜨는 것이라면 모두 이용해서 얼기설기 만든 원시적인 뗏목이었다. 고무 혹은 드럼통으로 뗏목 바닥을 만들고, 나무와 철로 난간을 만들고, 이불 천과 나무로 돛을 달았다. 그리고 친구나 가족 예닐곱 명, 열댓 명 등이 한 조가 되어 노를 저어 갔다. 훗날 사람들은 이 이민 물결을 ‘뗏목 이주 위기’라고 불렀다. 모두가 무사히 플로리다 해안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도중에 익사했다. 그런데도 수천명이 쿠바를 떠났다.
결국 미국은 1994년 9월9일 이 대규모 이민 물결을 제지하기 위해 쿠바와 이민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은 매년 2만명의 쿠바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1966년 미국 의회가 채택한 이른바 쿠바 이민법(The Cuban Adjustment Act)을 개정했다. 기존 법은 쿠바 이민자에게 특혜를 주는 법이었다. 이 법은 쿠바 이민자들에게만 자동적으로 ‘정치 난민’으로 규정해 망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1년 뒤에는 영주권을 주었다. 개정 이민법은 기존 법을 개정해 “젖은 발, 마른 발(Wet feet, dry feet)” 원칙을 내세웠다. 즉 쿠바 이민자가 플로리다 해안에 도착하면(마른 발) 정식 이민자로 간주하여 영주권을 주지만, 양국의 공해상에서 발견되면(젖은 발) 쿠바로 돌려보낸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대규모 이민 위기는 일단 수습되었다.
미국이 경제 봉쇄했지만 위기 극복에 성공
쿠바 정부도 위기 극복에 나섰다. 당시 쿠바가 참고할 몇 가지 길은 있었다. 먼저 고르바초프가 펼친 개혁·개방 정책을 따르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고르바초프의 몰락과 소련의 급격한 붕괴가 너무 빠르고 과도한 개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다른 하나는 기존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중국의 길이었다. 쿠바는 100% 외국인 소유 기업도 허용하고, 해외 자본과의 합작기업 설립을 허용했다. 스페인이 호텔 사업에, 멕시코가 전화 사업에 투자하는 등 유럽과 아메리카 국가들이 적극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쿠바에서 시장경제가 성장하는 것을 미국이 가로막았다.
미국은 1966년부터 쿠바와 완전히 무역을 중단하고 쿠바를 경제적으로 봉쇄해왔다. 그런데 탈냉전기인 1990년대에 오히려 쿠바에 대한 봉쇄 조치를 더 강화했다. 1992년에는 제3세계 국가에 있는 미국 기업의 자회사들조차 쿠바와 무역하지 못하게 하더니, 1996년에는 쿠바 혁명정부가 국유화한 미국인 재산에서 이득을 얻는 외국 기업을 고소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인의 범위에는 혁명 이후 망명한 쿠바인들까지 포함했다. 이 법안은 1959년 이후 혁명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과의 무역을 방해하고, 외국인의 투자를 막으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미국이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유독 쿠바에 대해 이토록 초강경 조치를 취한 것은 쿠바 붕괴론 때문이었다. 쿠바 경제를 더욱 압박하면, 쿠바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와 대중봉기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이 카스트로 체제의 몰락으로 나아가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압박에도 쿠바는 느릿느릿 중국의 길을 따랐다. 국영 농장을 개혁해 협동조합이 농업을 주도하게 만들었고, 생산량 일부를 시장에 팔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였다. 자영업을 허용해 세수도 늘렸다. 관광업 투자를 늘려서 관광객을 유치하자 최대 외화 수입원이 되었다. 의료 서비스는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1999~2013)가 무상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쿠바 의료인력 3만여 명을 수입했다. 또한 정부는 미국 거주 망명 쿠바인들의 달러 송금을 늘리기 위해 쿠바 국민들이 달러를 보유할 수 있게 했는데, 달러 유입으로 정부의 외환보유고도 늘어났다. 에너지 위기도 쿠바 연안에서 원유가 발견되고, 베네수엘라가 저렴하게 석유를 제공하면서 누그러졌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쿠바는 혁명의 성과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사회복지 투자 비율을 보면 1980년대 GDP 대비 17%에서 1993년 24%로 오히려 늘어났다. 쿠바가 지키기 위해 노력한 교육 수준과 의료 수준 등 사회주의적 인프라는 해외 투자자들에게 투자 유인으로 작용했다. 해외 투자기업은 교육비와 의료비, 노사관계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2008년에는 교육과 의료, 국민소득을 종합하는 인간개발지수에서 180개국 중 51위, 중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칠레·우루과이·코스타리카 다음으로 5위를 기록하며 혁명의 성취를 지키는 데도 성공했다.
정치체제도 개선했다. 무엇보다 입법부(민중권력의회)를 강화했다. 쿠바 국민들은 혁명 이후 처음으로 인민의원들을 직접 비밀투표로 선출하게 되었다. 직접 투표로 의원들의 평균연령이 43세로 낮아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지도자 교체도 이뤄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부터 2008년까지 쿠바의 최고지도자인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다. 2006년 80세 생일을 앞두고 위장출혈로 긴급 수술을 받으면서 사망설까지 퍼진 적이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의 동생이자 혁명 동지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라울은 형처럼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는 아니지만 신중하고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라울이 1959년 혁명 직후부터 2008년까지 쿠바 군대를 통솔해왔기 때문에 권력 교체 과정에서 동요는 전혀 없었다.
신임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는 2009년 1월1일 쿠바 동부 산티아고 시에서 열린 혁명 50주년 기념식에서 쿠바 민중의 피와 땀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1994년 최초의 대중 소요가 벌어졌을 때 곧 몰락할 것만 같던 쿠바 혁명체제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박정훈 (중남미 연구자)/ 시사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시사인 이상원 기자
“대졸초임, 대기업 5084만원 vs 5인 미만

2020년 기준 사업체 규모별 정규직 대졸초임(초과급여 포함 임금총액) 평균(고용노동부, 2020년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 원자료 분석). 한국경영자총협회 제공
우리나라 5인 미만 사업체의 정규직 대졸초임이 300인 이상 사업체의 절반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대졸초임 수준이 지나치게 높게 설정돼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 원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국내 300인 이상 사업체의 정규직 대졸 신입근로자가 받은 초임(초과급여 포함 임금총액)은 평균 5084만원인 것으로 집계됐다고 4일 밝혔다. 반면 5인 미만 사업체의 정규직 대졸초임은 2611만원으로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이외에 30∼299인 사업체의 정규직 대졸초임은 3329만원, 5∼29인 2868만원 등으로 나타났다.
초과 급여를 제외한 임금총액 기준으로도 300인 이상 사업체의 대졸 정규직 신입 초임이 평균 4690만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5인 미만 사업체의 초임이 2599만원으로 300인 이상 사업체의 55.4% 수준에 그쳤다. 성과급 등 변동 상여를 제외한 고정급(정액급여+정기상여) 기준으로도 300인 이상 사업체 정규직 대졸초임이 4320만원으로 가장 높았다.

2019년 기준 한·일 규모별 대졸초임 격차(한국 고용노동부 2019년 임금구조기본통계조사 원자료 및 일본 후생노동성 2019년 임금구조기본통계조사). 한국경영자총협회 제공
특히 일본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대졸초임은 모든 규모에서 일본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총에 따르면 물가 수준을 반영한 구매력평가(PPP) 환율 적용시 우리나라의 전체(10인 이상 사업체) 대졸초임 평균은 3만6743달러, 일본은 2만8973달러로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26.8% 높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대비 대졸초임 수준을 보면 우리나라는 전체 규모(10인 이상)에서 86.0%로 나타나 일본(68.7%)보다 17.3%포인트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규모별 대졸 초임 격차도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월등히 컸다. 우리나라 대기업(500인 이상)의 1인당 GDP 대비 대졸초임 수준은 111.9%, 일본(1000인 이상)은 71.0%로 양국 간 차이가 40.9%포인트로 나타났다. 10∼99인 사업체 상용직 대졸초임을 100으로 볼 때 일본 대기업(1000인 이상) 초임은 113.4에 불과한 반면, 우리나라 대기업(500인 이상)은 151.7에 달했다.
하상우 경총 경제조사본부장은 “이는 우리 대기업의 대졸초임 수준이 일본보다 월등히 높은 것에 주로 기인하며 이러한 현상은 일자리 미스매치, 임금격차 심화 등 각종 사회 갈등의 단초가 될 수 있다”면서 “우리 대기업도 연공에 기반한 임금 설정보다 일의 가치와 성과에 따른 합리적 보상이 이뤄질 수 있는 임금체계로 바꿔나가고, 근로자도 이에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김지애 기자 amor@kmib.co.kr







쏟아지는 위드 코로나’ 보도가 말하지 않는 것들
싱가포르·영국서 ‘확진자 늘어도 사망 줄었다’? 사실과 달라
“언론, 사망자 증가 경고해야…정부, 거리두기 지원 책임 다했나”
‘위드 코로나’를 주문하는 보도가 쏟아진다. 10월 1~4일 주요 언론사 54곳이 내놓은 관련 보도만 394건이다(빅카인즈). 다수 언론이 방역을 완화한 나라를 예로 들며 위드 코로나 도입을 강조하지만, 용어의 사용은 제각각인 가운데 사실과 다른 보도도 눈에 띈다. 특히 다수 언론은 위드 코로나 도입이 사망자 증가를 불러온다는 전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언론은 위드 코로나의 주요 본보기로 싱가포르와 영국을 제시했다. 다수 기사는 두 나라가 백신 접종 이후 방역를 완화하면서 ‘확진자가 늘었지만 사망자 숫자는 줄었다’고 설명했다.
KBS는 지난달 22일 “‘확진자 천 명도 괜찮아’…싱가포르 위드 코로나의 숨은그림 찾기”에서 방역 완화 정책을 편 지 한 달 뒤 싱가포르 상황을 살폈다. KBS는 “확진자는 늘어나도 사망자는 거의 없다”며 “사망자가 크게 줄었다. 일주일에 1~2명 정도”라고 설명했다. 뉴스1도 “이번 달 (싱가포르) 사망자수는 전달 대비 30명으로 늘었지만, 누적 사망자수는 85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위드 코로나 관련 연합뉴스TV 보도 갈무리
영국도 위드 코로나 정책 효과를 본 사례로 일부 언론에서 거론됐다. 한겨레는 “‘위드 코로나’ 영·이스라엘, 확진자 늘었어도 사망자 급감” 기사에서 “선행 국가들 상황을 종합하면, 방역 완화 이전보다 확진자는 늘지만 사망자는 크게 준다”고 했다. 영국의 경우 (9월 초 전후) 확진자 수는 7월19일 방역 완화 당시와 비슷하지만, 사망자는 3차 유행 때(지난해 겨울)보다 줄었다고 했다. 연합뉴스TV도 8월 말 위드 코로나 사례로 영국과 싱가포르를 들며 “방역의 목표를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를 줄이는데 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상과 다소 거리가 먼 얘기다. 실제로는 두 나라 모두 방역 완화 정책을 편 뒤로 눈에 띄게 사망자가 증가했다.
싱가포르의 경우 코로나19 발발 이래 지난 7월까지 37명이 숨졌다. 한달에 2명 꼴이다. 그러나 8월19일 방역을 일부 완화한 뒤 9월 중순부터 증가세가 시작돼 한 달 간 38명이 숨졌다.
영국도 사망자 수가 늘었다. 한겨레가 보도와 함께 내놓은 그래프를 보면, ‘자유의 날’을 선포한 7월19일 앞뒤로 일일 평균 사망자수는 53.6명이었으나 이후 한 달(8월13일~9월16일) 동안 수치는 114.4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실제론 확진자 수는 비슷하지만 사망자 수는 늘었다.

▲지난 16일 한겨레 보도 내 그래프 갈무리
“위드 코로나, 경제적 약자 위해 생물학적 약자 희생시키기”
진료 현장에선 방역 조치를 완화하면 확진자 증가에 따라 사망자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위드 코로나란 결국 정부가 충분한 지원을 안 해준다면 방역을 완화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사망자도 확진자에 비례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도 싱가포르처럼 인구가 밀집해 백신접종률이 높아도 미접종 감염이나 돌파감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경제적 약자를 위해 생물학적 약자를 희생하는 것이 위드 코로나”라는 것이다.
엄 교수는 “영국은 방역 통제를 하지 않을 때에 하루 2000~3000명씩 죽는 경험을 했기에 방역 완화로 인한 충격이 덜하지만, 우리는 하루 3~20명 정도 사망하던 수준에서 100~200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며 “언론과 전문가들은 위드 코로나 전략을 수행할 때 일어날 수 있는 피해를 상세히 설명할 책임이 있다. 예상 가능한 상황을 충분히 전달하지 않고서 정책을 도입하면 이후의 혼란은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풀어도 한국 4단계인데 위드 코로나?
‘정부 책임’ 선택지 지우기 우려도
위드 코로나의 정의도 폭넓게 쓰이지만 그만큼 자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싱가포르의 완화 조치는 사실 한국의 4단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싱가포르는 백신 접종 완료자의 사적 모임 제한을 2명에서 5명으로 늘렸다. 재택근무 규정은 사무실 출근을 점차 늘려 최대 50%까지 허용했다. 영국의 경우 실내 마스크 착용 규제를 거두고 밀접접촉자도 백신 접종을 받았다면 자가격리를 면제하는 등 대폭 규제를 완화했다가 일주일 뒤 급하게 일부를 철회했다.
이들 사례를 모두 ‘위드 코로나’라 통칭하다 보니, 나라마다 다른 조건과 전후 맥락을 따지지 않고 ‘일단 방역을 풀자’는 주장에 활용되기 쉽다는 것이다.
보도를 접한 독자들도 위드 코로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국립중앙의료원이 지난달 27일 내놓은 ‘코로나19 국민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코로나19의 종식은 불가능하고 독감처럼 관리해야 한다’는 질문엔 응답자 90%가 동의한다고 답했지만, ‘사회경제적 비용 감소를 위한 방역 완화 필요’에는 과반(53.4%)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위드 코로나 뜻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8월26일 오후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청에서 18~49세 국민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접종 관련 질의에 대해 전문가가 답변하는 코로나19 특집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현재의 위드 코로나 담론이 정부의 방역 정책에 따른 지원 책임을 지워버린다는 우려도 나온다. 엄 교수는 “선진국들은 한국 정부에 비해 자영업자에게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확실한 보전을 해 줬다”며 “그러나 우리의 경우 정부 책임이 뒤로 빠진 상태에서 민간영역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 6월5일 기준 주요 20개 선진국은 코로나19 재정지출에 국내총생산(GDP)의 17.3%를 투입했다. 20개국에 포함된 한국의 지출규모는 4.5%였다.
전진한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위드 코로나는 생계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생명을 포기하는 전략”이라며 “막상 생계를 위한 정부지출은 주요선진국 중 최저수준이다. 상병수당과 유급병가, 퇴거와 해고금지, 사회안전망 확대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전 국장은 또 “다른 나라에 비해 공공의료가 부실해 의료역량도 현저히 떨어지는 현실”이라며 “정부가 국민에 생계와 생명 중 선택을 떠넘길 게 아니라 둘 모두를 지키기 위해 재정을 쓰고 정책을 시행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예리 기자 ykim@mediatoday.co.k
팽창 가속’ 수도권 ‘소멸 직전’ 지방, 두 번째 분단
프롤로그

지난달 3일 경기 용인시 광교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판교테크노밸리(가운데)가 어둠에 싸인 산등성이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판교는 스타트업들의 ‘남방한계선’으로 통한다. 사진 아래 태봉산 기슭의 송전탑들이 마치 전방 철책처럼 보인다. 권도현 기자
국가균형발전 정책 시행 20년
청년 일자리·주거 집중 더 심화
판교·기흥이 ‘취업 남방한계선’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인구가 2019년(2592만5799명)을 기점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5184만9861명)의 절반을 넘어섰다. 1970년 28.7%이던 수도권 인구 비중은 50년 동안 21.3%포인트 늘어났다. 지역내총생산(GRDP)의 수도권 비중도 52.1%(2020년 현재)였다. 국토 면적의 12.1%에 불과한 수도권이 경제력도, 인구도 비수도권을 앞지르면서 한국은 머리만 과도하게 커진 ‘가분수’가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영국 12.5%, 일본 28%)에 비해 수도권 집중도가 압도적이다. 국가균형발전 정책이 시작된 지 20년째, ‘수도권 일극주의’는 오히려 공고화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02년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했고, 2003년 출범한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통해 공공기관 지방 이전, 혁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하지만 기업정책은 거꾸로 갔다. 2006년 수도권정비계획법 시행령을 풀어 경기 파주에 LG디스플레이 공장을 짓도록 허용했다.
이명박 정부는 본격적으로 수도권 공장 신증설 규제의 빗장을 해제했고, 박근혜 정부는 수도권 규제 대상에서 접경지역(경기 북부)을 뺐다. 문재인 정부도 해외에서 국내로 귀환하는 제조기업의 입지 제한을 풀었다. 균형발전 명목으로 재정 지출은 늘렸지만 정작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들의 수도권 집중은 정부가 방치·조장한 것이다.
2010년대 중반 ‘4차 산업혁명’의 구호가 등장하자 ‘비수도권 제조공장, 수도권 연구·개발’이라는 공간분업의 마지노선도 허물어졌다. SK하이닉스가 2019년 경기 용인에 반도체클러스터를 짓기로 한 것은 결정타였다. 그 결과 판교, 기흥에는 DMZ 못지않게 삼엄한 ‘취업 남방한계선’이 그어졌다.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은 지방의 자강(自彊)을 막는 ‘분할통치’였다. 예산을 쥔 중앙정부가 공모사업을 통해 지자체를 길들이고, 경쟁을 부추겼다. 지역 나눠먹기식 혁신도시 지정 탓에 투입재정 대비 효과는 미미했고, 균형발전은 ‘예산 잡아먹는 하마’라는 편견만 커졌다.
남북 분단보다 수도권 대 비수도권의 ‘두번째 분단’이 이제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이 됐다. 주거, 취업을 비롯해 한국 사회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이 이 모순과 연관돼 있다. 판교와 강남은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지만 지방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 농어촌은 ‘소멸’위기에, 지방 제조업 도시들은 ‘러스트벨트’화될 조짐이 뚜렷하다. 청년들은 일과 기회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들지만, 취업·주거난에 결혼도 출산도 엄두를 못 낸다. 그런데도 정부는 집값이 폭등하는 수도권에 국비 십수조원을 들여 광역급행철도(GTX)를 건설하고 있다. 균형발전의 허울 아래 수도권 팽창정책은 가속화하고 있다. 경향신문 기획취재팀은 위기에 빠진 ‘절반의 한국’ 비수도권의 실태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수도권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지방의 현실,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모색들을 살펴봤다.

판교라는 ‘남방한계선’

지난 9월26일 드론으로 촬영한 경기 성남시 판교신도시 전경. 2009년 첫 입주를 시작한 판교테크노밸리는 인재와 자본을 끌어들이며 10여년 만에 ‘대한민국 스타트업 수도’로 성장했다. 서울 강남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과 ‘4차 산업혁명’의 산업구조 재편이 빚어낸 결과다. 권도현 기자
사무직은 ‘판교라인’기술직은 ‘기흥라인’이 취업 마지노선
“판교 직장인들의 중고거래 서비스로 출발했으니 판교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처음엔 판교테크노밸리에 공간이 없어 백현동 카페거리 상가 2층에 사무실을 냈습니다. 1층 고깃집의 냄새를 맡으며 1년 반 동안 있었어요. 함께 고기를 굽다 첫 투자 연락을 받았는데 그날 고기 맛이 무척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남 삼평동 판교테크노밸리
강남서 가장 가까운 산업단지
‘일+삶터’ 2009년 첫 기업 입주
테헤란밸리 IT 기업들 건너오며
‘한국판 실리콘밸리’ 위상 굳혀
중고거래가 ‘국민앱’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지역기반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은 창업 6년 만에 누적 가입자 2100만명에 추정 기업가치 3조원의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용현·김재현 공동대표가 카카오에서 일할 당시 사내 장터에서 착안한 서비스다. “게시판에 중고물품 거래글이 올라왔는데 반응이 뜨거웠어요. 물건이 좋고 가격도 쌌거든요. 사내 거래다보니 믿음도 갔고요.” 정우람 당근마켓 서비스부문 총괄(40)은 당근마켓 6번째 창업 멤버다. “판교신도시가 ‘핫하다’는 이미지가 있어 입소문을 타니 분당, 죽전으로 금방 퍼져나가더라고요.”
지난 8월 당근마켓은 1789억원의 시리즈 D 투자(스타트업 성장 단계에 따라 시드머니로부터 시리즈 A·B·C·D로 구분)를 유치했다. 임직원 6명은 200여명으로 늘었다. 취업준비생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네카라쿠배당토(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당근마켓·토스)’에도 이름을 올렸다. 당근마켓의 현주소지는 강남 교보타워. 지난 8월19일 정씨와 만난 11층 사무실 창문 너머로 강남역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안락한 라운지에는 편의점 못지않게 군것질거리가 채워져 있다. 간식·식대 무제한, 자유로운 복장과 자율적 근태, 영어 닉네임으로 소통하는 조직 문화까지 스타트업의 전형이다. “개발자들은 뛰어난 동료를 특히 중시해요. 당근마켓은 인재의 밀도도 매우 높다고 자부합니다.” 비싼 임대료를 감수하고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강남이 사람을 뽑기 제일 수월해요. 판교만 해도 서울 강북이나 인천이 집이면 출퇴근이 어렵잖아요.” 인재와 자본, 인프라가 몰려있는 수도권, 그중에서도 강남과 판교 말고 어디냐고 물으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창업 초기에는 지방과 서울 차이가 없겠지만, 성장 단계에선 인재 확보가 최우선이거든요.”
‘스타트업 수도’ 판교
신분당선 강남역에서 판교역까지 이동 시간은 14분. 강남 한복판을 출발해 청계산 터널 구간의 어둑함에 익숙해질 때쯤 판교역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1번 출구로 나오면 판교 테크노밸리. 네이버와 카카오가 입주한다는 초대형 오피스빌딩이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이었다. 횡단보도 건너편 판교테크노파크공원에는 번쩍이는 유리 빌딩들이 곧은 도로를 따라 줄지어 있다. 컴퓨터그래픽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도시 공간에 반팔티,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느긋하게 오가는 직장인들이 ‘판교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고연봉 IB·컨설팅社도 싫다…‘인재 피라미드’ 맨 위에 스타트업”. 최고 직장으로 꼽히는 투자은행과 컨설팅회사에서 ‘판교’로 이직하는 흐름을 알리는 기사 제목이다. 창의적 업무 분위기에 성장 가능성, 수억·수십억원에 달하는 인센티브가 인재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판교의 성공요인을 꼽자면 우선 지리적 장점이죠. 강남에서 가장 가까운 산업단지잖아요. ‘워라밸’을 추구하는 젊은 연구 인력들이 판교 아래로는 안 가려고 해요. 가족이 있으면 더 그렇고요.” 판교테크노밸리를 지원하는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연현호 차장은 허허벌판이던 지난 10년 전부터 판교의 성장을 지켜봤다.
굴지의 대기업과 그 계열사 등
1697개 기업 매출액만 109조원
임직원 7만여명 중 2030이 63%
578억이던 판교공영주차장 부지
13년 만인 올봄 8377억에 매매
‘대장아파트’도 30억 잠실 수준
“초창기에 한국파스퇴르, GE 등 앵커 기업을 유치한 것이 기틀을 잡는 데 긴요했습니다. 판교 1700개 기업 중 대기업은 60여개입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연구·개발(R&D) 협력이 쉽게 이뤄지죠. 공공기관, 관련기업, 투자사 등이 밀집해 있으니 하루에 몇번이고 사람들과 업무미팅을 잡을 수 있는 게 장점입니다.” <직업의 지리학>을 쓴 경제학자 엔리코 모레티가 강조하는 ‘집적효과’가 판교에서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집적효과는 우수 인재들이 밀집해 있으면 상호작용을 통해 더 큰 혁신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모레티가 미국 320개 대도시 노동자 110만명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첨단기술 일자리가 1개 생기면, 부수적 일자리 5개가 창출된다. 실리콘밸리가 성공한 까닭이자, 세계 주요 도시들이 집값 상승·교통 체증 등 부작용에도 사람과 기업을 모으려는 이유다.
성남시 삼평동 판교테크노밸리는 2기 신도시인 판교신도시의 첨단산업단지로 조성됐다. 베드타운에 그친 1기 신도시와 달리 일터와 삶터를 합친 공간으로 짜였다. 2009년 첫 기업이 입주했고, 2015년 핵심 지원시설인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가 문을 열며 사업이 일단락됐다. 강남 테헤란밸리의 IT기업들이 건너오면서 ‘한국판 실리콘밸리’ 위상을 굳혔다. 첨단 제조업이 자리 잡은 경기남부권과도 가까운 입지 조건은 판교의 매력을 높였다.
‘2021년도 판교테크노밸리 입주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입주기업 수는 1697개로 대기업 64개(3.8%), 중견기업 97개(5.7%), 중소기업 1487개(87.6%), 공공기관·협회 49개(2.8%) 순이다. 삼성·SK·한화·포스코 등 대기업의 계열사, 안랩·한글과컴퓨터 등 소프트웨어 업체, 카카오·엔씨소프트·넥슨·스마일게이트·네오위즈·NHN 등 게임업체들에 SK바이오팜·차병원그룹 등 바이오기업이 입주했다. 이들의 매출 합산액은 109조9000억원. 임직원 7만1967명 중 20~30대가 3분의 2에 이른다.
판교의 위상은 부동산에서도 확인된다. 2008년 578억원에 성남시에 팔렸던 판교공영주차장 부지가 올봄 엔씨소프트 제2사옥 부지로 8377억원에 매매됐다. 올여름 판교 ‘대장아파트’라는 판교푸르지오그랑블 집값이 30억원대로 잠실 대표단지 잠실엘스를 넘어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집값이 제자리걸음하며 뒷자리 ‘0’ 하나가 차이나는 지방 도시에선 별천지 같은 이야기다.
“지난해부터 10년 전매제한이 풀리면서 기업들이 판교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왔지만, 지금도 공간이 부족해 2판교, 3판교 테크노밸리를 만드는 형편입니다.” 국내 자치단체부터 해외 개발도상국까지 매년 수백명이 판교를 찾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물론 ‘어떻게 제2의 판교를 만들 것인가’이다. “대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을지, 특화 산업을 만들어낼지가 관건 아닐까요.”
고삐풀린 ‘수도권 집중’
판교의 성공은 ‘4차 산업혁명’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는 흐름과도 맞물린다. 10여년 전부터 대기업 인사담당자 사이에선 ‘취업 남방한계선’이라는 조어가 등장했다. ‘명문대를 졸업했거나 우수한 스펙의 취업준비생들이 양재·기흥 이남 근무를 기피한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사무직은 판교까지만 간다고 ‘판교라인’, 기술직 엔지니어는 용인시 기흥이 마지노선이라고 해서 ‘기흥라인’이다. 화성 현대차 남양연구소, 평택 삼성반도체클러스터가 기흥라인 선상에 걸쳐 있다.
“대기업 지방 근무직은 면접 때 애인이 있다고 하면 뽑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지도 꽤 됐다. 지방근무를 1년도 못 버티고 퇴사한다는 것이다. 정착하기에는 수도권과 교육, 문화 격차가 크다는 게 기피 사유다.
2008년 수도권 규제완화에 물꼬가 트이면서 수도권 집중에 드라이브가 걸렸다. 국내 30대 그룹 중 등기상 본사가 지방인 기업은 포스코(경북 포항), 현대중공업(울산), 카카오(제주), 하림(전북 익산) 4개뿐이다.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 SK케미칼, 한화테크윈 등은 이미 판교로 R&D 기능을 옮겼다. 본사와 공장이 경기 이천으로 ‘기흥라인’ 외곽이던 SK하이닉스가 2019년 120조원 규모의 공장을 용인에 짓기로 한 것은 결정타였다. 연구소뿐 아니라 대기업의 제조 공장마저 지방을 떠나 수도권으로 향하게 만든 것이다. 그 결과 판교, 기흥에는 DMZ에 버금가는 ‘취업 남방한계선’이 그어졌다. 수도권이 부풀어 오르며 최근엔 ‘수청권(수도권+충청권)’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제조업 공장들이 경기도 접경인 충청도 북부를 따라 입주하며 수도권의 자장에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전국의 시야에서 보면 비수도권이 새롭게 성장하는 대신 수도권이 ‘불건전한’ 팽창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리쇼어링(제조기업 본국 회귀) 촉진을 위해 국내 복귀 기업에 수도권 부지를 우선 배정하고, 수도권에도 첨단산업이나 연구·개발센터가 옮겨오면 새롭게 각종 혜택을 주기로 했다. 한국의 거의 전 산업을 수도권에 몰아넣을 기세다.

그래픽 | 성덕환 기자 thekhan@kyunghyang.com
수도권 블랙홀, 공장마저 빨아들이며 ‘수청권’ 비정상적 팽창
국토연구원의 2019년 기업 28만4424곳 분석 결과 연구·개발비 지출을 통해 고용·매출 성장을 함께 달성한 ‘혁신성장기업’은 대부분 서울과 경기도 남부에 몰려 있었다. 남방한계선은 경기도와 인접한 천안 북구였으며, 서쪽은 안산 반월, 동쪽은 성남 중원 사이에 클러스터가 형성됐다. 이를 스타트업으로 좁히면 수도권 집중은 더욱 두드러진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2019년 스타트업 주소 분석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10억원 이상 투자를 받은 575개 스타트업 중 90%가 수도권, 80% 이상이 서울, 절반이 강남구·서초구, 3분의 1이 테헤란밸리 부근에 있다. 강남-판교-지방으로 이어지는 위계가 뚜렷하다.
2008년 수도권 규제완화 ‘물꼬’
SK하이닉스 용인 공장 건설은
수도권 쏠림 현상 ‘결정타’ 역할
2012년 설립된 카카오벤처스는 ICT 및 소프트웨어 기업에 투자하는 초기 투자 전문 벤처캐피털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로 일하다 2018년 합류한 장원열 수석 투자심사역(37)은 투자 기준에 대해 “학력이나 스펙보다는 ‘맨땅에 헤딩하는 실행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왓챠, 두나무, 당근마켓 등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들이 카카오벤처스 투자를 받았다. 9월 기준 누적 투자 기업은 205곳에 투자 금액은 3400억원이지만 지방 소재 스타트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주소지는 상관없어요. 좋은 기업인데 지방이라고 투자 안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방은 스타트업 숫자 자체가 적은 데다 수도권으로 옮겨온 곳도 많다. “모든 스타트업의 문제는 인력 확보입니다. 스타트업은 빠르게 몸집을 키워야 하니 인재 수요가 많고, 인력 확보에 가장 좋은 곳이 서울인 거죠. 한번에 30~40명씩 뽑느라 하루 종일 대표님이 면접만 본다는 회사도 있으니까요.”
혁신성장기업 대부분 수도권에
경기도 접한 천안, 한계선으로
10억원 이상 투자받은 스타트업
90%가 수도권에…집중 더 심해
‘빨리 몸집 키우기’ 과제 풀려면
인력 밀집 지역서 시작해야 유리
벤처캐피털과 액셀러레이터(투자와 보육을 함께하는 전문회사)들 역시 테헤란밸리에 몰려 있다. “요즘은 서울 성수동에도 스타트업들이 많아요. 판교 기업들은 이미 대기업이 됐잖아요. 초기 스타트업을 위한 공유오피스는 오히려 강남에 많죠.”
카카오벤처스가 있는 판교메리어트호텔을 나오면 리치투게더센터라는 인상적인 이름의 건물과 마주친다. 이곳에 자리 잡은 부스트이뮨은 면역항암제를 개발하는 바이오스타트업이다. 지난 2월 창업한 이광희 대표(48)의 롤모델은 197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업한 세계 최초 바이오텍 제넨텍이다. “바이오텍은 연구자 출신 창업자들이 아이디어만으로 투자를 받아 성장해나가는 기업입니다.” 이 대표 등 3명이 근무하는 공유오피스에는 컴퓨터와 책상만 놓여 있다. 실험기구로 가득한 연구실과는 딴판인 ‘드라이 랩(Dry Lab)’이다. 자료를 분석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만드는 사고 실험 공간이다. 부스트이뮨은 외주 실험을 통해 약물을 설계하는 단계다.
이런 공간이라면 판교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판교는 벤처캐피털이 있는 강남과 대형 제약사들이 있는 경기남부권 사이에 있어 최적의 장소죠. 스타트업은 인력이 적은 대신 경험이 풍부해야 합니다. 기업에 있다가 창업하는 경우가 많고, 경험 있는 인력 확보가 중요하니 기업 밀집 지역에서 시작하는 거죠.” 판교는 이미 공간이 다 차고 임대료도 강남급으로 오르면서 최근에는 송파구 문정동으로 바이오기업들이 모인다고 한다. 역시 ‘남방한계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바이오는 스타트업에서도 가장 뜨거운 분야다. 2019년 바이오·의료 분야 신규 투자는 1조1033억원(25.8%)으로 2년 연속 1위였다. 바이오 중소·벤처기업 2496개 중 경기 665개, 서울 519개, 인천 67개로 수도권이 절반에 달했다. 바이오산업 메카인 대전은 206개, 충북 179개, 충남 111개였다.
대구서 스타트업 창업, 박재식 온빛 대표
개발자 구하기 어려워
본사는 대구에 둬도
영업이나 개발은 서울서 해야 하나 고민
지방 창업의 아쉬운 점‘기회의 격차’
지난 8월 중소벤처기업부의 ‘K-바이오 랩허브’ 후보지로 대전과 충북 등을 제치고 인천 송도가 선정되면서 균형발전을 외면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전은 정부출연연구기관과 카이스트 등 연구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이라 충격이 컸다. 대전 바이오산업을 선도한 LG화학(LG생명과학)이 서울 마곡으로 옮기면서 인력 유출이 있던 터라 고민은 깊어지게 됐다.
지방에서도 ‘판교’가 나올 수 있을까
중기부는 지난 8월 스타트업 육성 전략을 담은 ‘중소기업 창업지원계획(2021~2023년)’을 내놨다. ‘제2벤처붐’이라고 할 만한 창업 열기를 성과로 잇기 위해 만든 최초의 법정계획이다. 이 계획에서도 수도권 집중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기술창업 현황을 보면 수도권은 2016년 11만254개(57.8%)에서 2020년 14만3135개(62.5%)로, 비수도권은 2016년 8만420개(42.2%)에서 2020년 8만5814개(37.5%)로 격차가 벌어졌다. 이장훈 중기부 창업정책총괄과 서기관은 “제조업 일자리는 정부 보조금 지원 등으로 성과를 만들 수 있지만, 스타트업은 민간의 혁신이 전제”라며 “정부가 펀드를 만들고 기반시설을 지원하는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마강래 중앙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2013년 무렵 ‘4차 산업’이라는 대도시 지향의 혁신산업이 본격 등장하면서 수도권이 급성장했다”며 “고학력·고임금·고부가가치 일자리가 강남과 판교에 집중되면서 청년들의 수도권 쏠림 현상이 심화됐고, 비수도권은 경쟁력을 잃어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지방 스타트업의 요람은 창조경제혁신센터다. 박근혜 정권 당시 대기업과 17개 시·도를 짝지어 지역별 전문 산업을 육성하도록 한 정책이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2014년 출범한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는 삼성전자의 협력으로 옛 제일모직 대구공장 터에 조성됐다. 삼성전자 사내 벤처 프로그램 C랩 등 지원체계가 잘 갖춰진 곳으로 평가된다. 과거 정치인들의 단골 방문지가 서문시장이었다면, 최근에는 여야 가리지 않고 센터를 방문한다.
주기중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창업지원본부장(48)은 “지역의 기성 산업과 스타트업의 연계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부품, 지능형 기계, 섬유기계 등이다. “원가·공기 절감 등 기존 산업을 고도화하는 스타트업을 육성해 시너지를 내는 것이죠. 서울에서 제조 창업은 어렵잖아요. 제조 기반도 없고 제품 쌓아놓을 야적장도 없지만 대구라면 주차장을 비워서라도 쌓아줄 겁니다. 설계부터 양산까지 지원 플랫폼을 구축해 기업들이 서울 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 겁니다.”
여기도 가장 큰 고민거리는 사람이다. “경북대 등 지역 거점대학 졸업생들도 삼성에 취업하거나 서울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센터에서 육성한 헬스케어 스타트업 온빛은 이런 악조건과 싸우며 성장해왔다. 2017년 창업한 박재식 온빛 대표(32)는 병원 방문 없이 모바일로 증명서를 발급받고 실손보험 청구까지 가능한 ‘메디메디’ 앱을 개발했다. “증명서만 받으면 될 일인데 병원에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크잖아요. 병원마다 전산시스템이 달라 하나의 앱으로 연동하기 어려웠는데 우회 연결하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병원판 배달의민족’을 꿈꾼다는 메디메디를 도입한 병원은 200곳이 넘는다. 서비스를 확장해야 할 단계에 이르고 보니 서울에 사무실을 내야 할지 고민이 커지고 있다. “제가 직접 개발을 배워 헤쳐왔는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개발자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본사는 대구에 두더라도 영업이든 개발이든 서울에서 뭐라도 해야 하나 싶어요.” 지방에서 창업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아쉬움을 묻자 ‘기회의 격차’라는 답이 돌아왔다. “생태계 자체가 작죠. 강이나 바다에 풀어놓으면 먹을 게 많은데 좁은 연못은 아무래도 적잖아요.”
수도권의 글로벌 경쟁력이 세계 최고라는 찬사가 나올수록 비수도권의 박탈감은 깊어진다. 지방에서도 ‘판교’, ‘네카라쿠배당토’가 나올 수 있을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해봐요. 정부가 지방에서 창업하면 1인당 1억원을 준다든지, 직원들 살 집을 준다든지…. 근데 그렇게 한들 바뀌겠어요?”
센터 너머에는 삼성상회 건물과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동상이 서 있다. 도로명 주소도 호암로 51. 대기업 유치와 개발사업에 매달리는 지방의 열망이 센터를 둘러보는 동안 어렴풋이 이해됐다. 기업은 자꾸만 수도권으로 떠나가고, 도심에도 빈집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나오는 절박함일 것이다. 동상을 바라보는 동안 ‘경제정의’라는 익숙한 관념과 ‘지역불균형의 부정의’라는 낯선 단어가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경향 특별취재팀
오세훈·박형준 기소여부 '초읽기'
기소땐 자격시비 공세
혐의 벗으면 재선 탄력
4·7 재보궐선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공소시효(10월7일)가 이틀 남았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에 대한 검찰의 기소여부가 관심사다. 두 사람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경 수사를 받아왔다. 두 사람 모두 "문제될 것 없다"는 입장이지만 민주당 등에서 고발한 사건이 많아 모든 혐의를 벗어날지는 불투명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2일 검찰에서 14시간 가량 조사를 받고 귀가했다. 조사가 끝난 뒤 오 시장은 취재진과 만나 "각종 시민단체에서 고소·고발한 건이 8가지로,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밝혔다. 혐의를 부인하는지 묻는 질문엔 "결과를 지켜보시죠"라고 했다.
검찰은 오 시장의 '파이시티' 관련 허위사실 유포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경찰로부터 넘겨받아 수사를 했다.
파이시티 의혹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부근 약 3만평 가량의 대지 위에 백화점과 업무 시설 등을 건설하는 복합유통센터 개발을 허가하는 과정에서 각종 특혜비리 의혹이 불거진 사건이다.
앞서 오 시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로 나섰던 한 토론회에서 파이시티 사건과 관련해 "제가 재직하던 시절에 서울시와 관계되는 사건은 아닐 것이다. 제 임기 중 인허가한 사건은 아닌 것 같다"는 발언으로 한 시민단체로부터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된 바 있다.
검찰은 오 시장의 내곡동 땅 셀프보상 특혜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를 해왔다.
지난 선거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오 시장이 서울시장을 지냈던 2009년 처가 소유의 땅이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지정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오 시장이 지구 지정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민주당은 허위사실 공표죄에 해당한다며 검찰에 고발했다.
◆오-파이시티, 박-4대강 사찰 = 박형준 부산시장은 기장군 일광면 토지 미등기 및 건축물 재산신고 누락, 예비후보 등록 때 거주지 주소 허위기재, 4대강 사업 불법 사찰 관련 발언 등으로 인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선거 당시 민주당 쪽에서 고발한 것은 모두 11건이다.
이 가운데 4대강 사업 불법 사찰 관련 혐의가 핵심 사안이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언론을 통해 2009년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홍보기획관이던 박 시장이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4대강 사찰 문건에 관여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박 시장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한 바 있다. 하지만 국회 정보위원장인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제출받아 열람한 '4대강 사찰 감찰 결과 보고서'에서 박 시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지시한 정황이 나타났고, 민주당은 지난 7월 박 시장을 허위사실공표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뒤늦게 고발했다. 박 시장 딸의 홍익대 미대 입시 부정 청탁 의혹도 쟁점이다.
두 사람이 불기소처분을 받으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게된다. "1년 밖에 안했으니 한번 더 밀어주자"는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
반면 기소가 결정되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국민의힘 당헌·당규에 따라 현직 단체장이 기소되면 중앙당 윤리위원회가 소집돼 해당 인사의 당원권 정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만약 당원권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재판에 계류 중인 상태에서 공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일 공산이 크다. 당 안팎에서 경쟁 주자들의 거센 공세에 시달려야 한다.
차염진 · 이제형 기자 yjcha@naeil.com
국정원 검찰 간첩조작에 영합한 언론보도, 그 대가는?
[언론피해 구제, 이대로 괜찮나요? (09)]
언론피해에 최대 5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이른바 ‘징벌적 손해배상제’(배액배상제) 법안을 둘러싼 논의가 뜨겁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으로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용어가 있다. 베트남전쟁에서 일어난 민간인 살상을 두고 미군이 쓰는 완곡한 표현이다. 여기엔 ‘어쩔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핑계가 깔려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매년 발간하는 <언론판결 분석 보고서>에 기록된 소송사례를 통해 ‘언론 자유’ 논쟁에 가려진 무고한 시민들의 ‘부수적 피해’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뤄왔는지 조명한다. 특히 언론보도 피해에 대한 위자료 산정 등 법원의 양형기준이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리고자 한다.
2013년 국가정보원 간첩조작 사건은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용공조작 사건이 얼마든지 다시 벌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국가정보원은 한 개인을 간첩으로 몰기 위해 탈북민 출신 서울시 공무원 유 모 씨 동생을 잡아 폭행과 고문 위협을 가하며 허위 자백을 받아냈고, 중국 공문서를 위조해 외교 마찰까지 불렀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이른바 보수언론의 보도행태였습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에 대한 여론이 급격하게 돌아선 계기는 2014년 2월 경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에서 간첩 증거로 사용된 유 모 씨 출입경 기록이 위조됐다는 사실을 밝혀내고서입니다. 그런데 보수언론은 국가정보원의 증거조작 사실을 ‘의혹’으로 보도하며 그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유 모 씨를 간첩으로 몰아가는 보도를 계속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아일보와 종편입니다. 동아일보는 2014년 2월24일 이 사건의 최초 제보자라며 익명의 탈북민 여성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도했는데요. 유 모 씨 가족과 동거했다고 주장한 해당 여성은 ‘출입경 기록 위조 논란은 본질을 흐리려는 것’, ‘유 씨 아버지가 아들이 보위부 활동 중이라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탈북민은 국정원으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허위 진술을 했던 것입니다. TV조선과 채널A 등 일부 종편은 연일 시사대담 프로그램에 탈북민 출신 극우 인사들을 출연시켜 유 모 씨를 간첩이라며 비난했습니다.
유 모 씨는 2013년 8월 1심과 2014년 4월 2심에서 잇따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2015년 10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최종 확정됐습니다. 유 모 씨는 2014년과 2017년, 언론과 국가를 상대로 각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2020년 서울중앙지법은 국가가 유 모 씨와 그의 동생 및 부친에게 총 2억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럼 국가정보원·검찰과 원팀처럼 움직인 언론의 책임에 대해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카드뉴스에서 확인하세요.
* 분석대상 및 참고자료 : 서울중앙지법 2014가합548118 판결, 서울고등법원 2016나2059882 판결, 서울중앙지법 2014가합548088 판결, 서울고등법원 2016나2034562 판결














민주언론시민연합
설레며 대관령 넘던 여고동창들 “서울? 잡기 힘든 무지개”
강릉 소녀들의 그 후

강원 강릉의 A여고 3학년 1반 동창생인 장호진씨와 김영빈씨(이상 가명), 김현주씨(왼쪽부터)가 지난달 12일 서울 남산공원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대화하고 있다. 졸업한 뒤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강릉 소녀’들은 14년째로 접어든 서울살이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되돌아봤다. 김창길 기자
“학창시절 내내 목표는 강릉 밖”
강릉 A여고 동창 절반 수도권에
이들에게 서울은 ‘꿈’과 동의어
현실은 정보·전략·기회 태부족
‘안녕히 가십시오 - 강원도(Good-bye, Gangwon-do).’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구불거리는 대관령 길을 넘는 아버지 차 안에서 김현주씨(당시 19세)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트렁크가 꽉 차 뒷좌석에 실은 짐가방을 그는 꼭 끌어안았다. 고향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는’ 것은 오랜 바람이었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목표는 강릉 밖으로 나가는 거였어요. 어쩌면 모두의 목표였겠지만요.”
2008년 2월의 그날 그가 짐을 푼 곳은 경기 수원의 한 대학 기숙사. 모든 것이 새로웠다. 대도시의 스카이라인, 차도와 길거리에 넘치는 자동차와 사람들까지. 현주씨는 “낯선 세계로 떨어진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가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13년이 흘러 서른두 살이 된 그는 7년차 영화 마케터다. 서울 관악구의 원룸에 살며 강남의 콘텐츠 회사에서 일한다.
흔한 이야기다. 고향을 뒤로하고 서울에 자리 잡은 청년이 어디 현주씨뿐인가. 5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청년들은 진학과 취업을 위해 서울로 향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다. 구불거리는 고개가 매끈한 터널로, 아버지의 자동차가 KTX로 바뀌었을 뿐이다.
‘청년들은 무엇 때문에 고향을 떠나나’ ‘떠난 이들이 향하는 곳은 왜 수도권이며 왜 돌아가지 않나’. 청년층 이탈로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을 건져내기 위해선 우선 이 질문들의 답을 찾아내야 한다. 경향신문은 2008년 현주씨와 함께 강릉의 A여고를 졸업한 3학년 1반 동창생 36명의 졸업 후 행적을 추적했다. 소재가 파악된 30명 가운데 14명에 대해 대면·전화·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의 진학과 취업, 결혼 등 청년기 주요 고비의 이동 경로와 선택에서 지방과 지방 청년의 현실을 읽어내려 했다.
강릉 소녀들, 떠나다
‘꿈’ 이룬 미디어 콘텐츠 운영자
“고향에 남는 건 끝난다는 느낌”
‘꿈’ 이룬 미디어 콘텐츠 운영자
“고향에 남는 건 끝난다는 느낌”
취업 큰 산 넘으면 집값·생활비
서울 토박이가 부러운 이방인 삶

A여고는 비평준화 지역이던 강원도에서 지역 명문으로 통했다. 동해나 속초 등 인근 시·군에서 온 유학생도 많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인서울’ 대학 진학은 중요함을 넘어 당연시되는 목표였다. 현주씨의 짝꿍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미디어 콘텐츠 운영 업무를 하는 장호진씨(가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집 근처 사범대를 나와 교사가 될 것을 권했지만 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미디어 업계에서 일하고 싶었던 그에게 서울은 꿈과 동의어였다. “강릉에 남는다는 것은 무언가 ‘끝나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추적을 통해 확인한 ‘강릉 소녀’들의 근황에서도 ‘수도권 지향성’이 뚜렷했다. 소재가 파악된 30명 중 수도권 거주자는 16명(서울 13명·경기 3명)으로 절반이 넘는다. 전업주부 1명을 제외하면 15명이 수도권에서 일한다. 비수도권 거주자는 14명으로 강릉(8명)과 춘천·속초·부산·대구·세종·청주(각 1명)에 산다. 진학 대학이 파악된 32명 가운데 40% 이상인 15명이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으로 갔다. 특히 대학을 서울로 진학한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수도권에 정착했다.
그러나 ‘인서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수도권 학생들에 비해 입시 정보와 전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꿈이 큐레이터였던 현주씨는 어려서부터 미술사 책을 끼고 살았고 그림 감상을 좋아했다. 진로를 상담한 선생님은 미술사를 전공하려면 미술 실기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형편이 안 됐던 현주씨는 진로를 바꿔 행정학과에 진학했지만,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야 실기 없이도 갈 수 있는 관련 학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에 있었더라면 저렴한 비용으로 미술이론 전공자에게 논술 과외를 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그랬으면 인생행로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등급제’가 적용된 처음이자 마지막 시험이었다. 등급제란 표준점수와 백분위 없이 성적표에 등급만 표기하는 제도다. 1~2점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폐단을 막기 위해 마련됐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속출했고, 원서 접수 과정에서 눈치 싸움이 극에 달했다.
박소흔씨(가명)는 대입제도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원망스럽다. 서울의 대형병원 간호사인 그는 ‘인서울’ 대학 대신 춘천의 한 사립대를 졸업했다. 그는 “입시 때 학교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성적이 비슷한 다른 수험생이 인서울 대학에 합격한 것을 알고 속상했다”고 말했다. 정보 부족으로 국가유공자 자녀임에도 관련 수시 전형 대신 정시에만 올인한 경우도 있었다.

서울 생활의 기쁨과 슬픔
상경한 강릉 소녀들은 대도시에 압도됐다. 곳곳에 즐비한 고층건물에 충격적으로 편리한 대중교통, 어디서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인프라, 다양한 출신 배경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기회이자 가능성이었다.
현주씨도 공강 시간이면 미술 전시나 특색 있는 큐레이션의 영화를 보기 위해 수원과 서울을 수도 없이 오갔다. 영화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도, 복수전공으로 문화산업을 택한 것도 이 경험 덕분이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알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호진씨는 서울살이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깨달았다. 여고 시절 한 아이돌그룹의 열정적인 팬이었던 그는 서울에 와서야 진짜 ‘덕통 사고’를 당했다. 록페스티벌에서 만난 한 밴드에 푹 빠진 것이다. 호진씨는 말했다. “그때 알았어요. 강릉에 있을 때 아이돌을 좋아한 건 ‘좋아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어서’라는 걸요.”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서울에 발붙이고 사는 일은 만만치 않음을 곧 깨달았다. 대부분 월세 30만~60만원대의 작은 방에 살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강릉에선 본 적 없는 서울역의 홈리스, 강남의 명품 거리가 빈부격차를 실감케 했다.
경기 부천의 사립대를 나와 8년째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는 김영빈씨(가명)는 ‘서울 토박이’가 가장 부러웠다고 했다. “서울 친구들은 자취를 하는 저를 속도 모르고 부러워했어요. ‘강릉 유지’ 딸 아니냐면서요. 아직도 부모님과 살면서 월급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해요.”
더 놀란 것은 서울 사람들의 지방에 대한 무지·무관심이었다. 강릉 사람이라면 2002년 태풍 루사는 잊을 수 없다. 하루에 800㎜가 넘는 물폭탄이 쏟아지며 사망·실종자만 246명, 재산 피해는 5조원이 넘었다. 하지만 서울 친구들은 수도권 피해가 컸던 태풍 매미는 기억하면서도 루사는 전혀 몰랐다. 그는 “하도 모르길래 재산 피해액, 인명 피해 수치를 뽑아 보여준 적도 있다”고 했다

두 번째 갈림길, 취업
게임사 그래픽 디자이너 취업자
“강원도엔 사행성 게임사 한 곳뿐”
자산운용사 취업 10년차 직장인
“금융사 지방 영업점, 인턴 안 뽑아
서울에 있었기에 취업 가능했다”
취업은 청년층의 두 번째 이동 기점이다. 강릉 소녀들의 ‘2차 이동’은 대학 졸업 전후인 2010년대 초중반 시작됐다. 비수도권 대학을 졸업한 뒤 5명이 수도권으로 올라왔다. 반대의 경우는 3명(강릉 2명·세종 1명)이다. 이 시기 수도권 거주자가 15명에서 16명으로 비수도권을 앞질렀다.
서울의 유통회사에서 상품기획자로 일하는 최서현씨(가명)는 2012년 말 춘천에서 상경했다. 그의 대학 생활은 강원도 탈출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편입과 교환학생, 해외취업 등 시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조건 인서울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갔어요. 편입도 해외취업도 하지 못했을 때에는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강원도 안에 잡아두려는 건가 싶었어요.” 서현씨는 졸업 전부터 서울에서 방을 잡았고, 얼마 안 가 취업할 수 있었다.
원하는 일자리가 서울에만 있는 경우도 많았다. 서울의 게임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길효리씨(가명)는 강원도의 대학을 나와 서울로 취업했다. 사행성 게임을 만드는 업체 한 곳을 제외하면 강원도에는 게임회사가 한 군데도 없었다.
효리씨는 고향에 머물며 취업준비를 위해 서울로 디자인 학원을 다녔다. 강원도에는 그래픽 디자인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다. 약 2년간은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리는 수업을 듣기 위해 왕복 8시간을 꼬박 버스에서 보내야 했다. “제가 차 안에 있던 그 시간에 서울 친구들은 연습을 더 하면서 진도를 뺄 수 있었어요. 확실히 그 친구들이 취업도 빨리했고요.”
자산운용사에서 10년째 일하고 있는 한예현씨(가명)도 서울에 있었기에 취업 기회도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한 사립대를 졸업한 예현씨는 대학 시절 자산운용사에서 인턴을 한 경험을 살려 빠른 취업에 성공했다. “강릉에 있었다면 기회가 없었을 거예요. 자산운용사는 서울에 몰려 있고 다른 금융기업의 지방 영업점들은 인턴을 뽑지 않거든요.”
취업이라는 큰 산을 넘은 강릉 소녀들의 최대 고민은 이제 ‘내 집 마련’이다. 치솟는 수도권 집값으로 출신과 관계없이 청년층에게 내 집 마련은 요원해졌지만 지방 출신 청년들의 출발선은 서울 출신들보다 뒤에 그어져 있다. 대충 따져봐도 서울의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는 이들과 비교하면 월세와 생활비를 포함해 한 달 최소 100만원 이상을 10여년 손해본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국 사회에서 서울에 집이 있다는 건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이기도 하다. “서울 출신인 회사 후배가 저보다 모은 돈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나보다 연봉 많이 받는 거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죠. 서울 출신은 지방 출신보다 적어도 1000만원 연봉을 더 받는 것과 마찬가지예요.”(김영빈씨)
경향 최민지 기자
천공 “조언했지만 멘토는 아냐”

▲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손바닥에 왕(王)자를 적고 국민의힘 대선 경선 토론회에 나와 논란을 자초했다. 사진=YTN 보도 갈무리
천공은 지난 7일 YTN ‘뉴스가 있는 저녁’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윤 전 총장에게 “검찰총장 사퇴 문제를 조언했다”고 주장하면서도 “멘토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김건희씨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해서 그러면 내가 뵙겠노라고 해 만났다. 만날 때 윤 전 총장이 남편이니까 같이 왔다”며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사이”라고 밝혔다.
천공은 윤 전 총장의 검찰총장 사퇴에 관해 “조금 정리할 시간이 될 것이라고 코칭을 해줬다”며 “너무 오래 싸우면 모든 검찰이 어려워질 것이니 그런 것들을 판단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해줬다”고 답했다. 천공은 윤 전 총장 손바닥 ‘왕’ 자와 관련해 “나는 그런 짓 못하게 한다. 나한테 자문을 구했으면 전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천공-尹 관계 알린 최보식 인터뷰
천공과 윤 전 총장 관계가 처음 알려진 것은 인터넷매체 ‘최보식의 언론’ 인터뷰에서다. 조선일보에서 33년 근무하고 올해 초 정년퇴직한 최보식 기자는 지난 3월 자신이 발행하는 매체 ‘최보식의 언론’에 천공 인터뷰를 보도했다.

인터뷰에서 천공은 ‘윤석열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윤 총장이 내 공부를 하는 사람이니까, 좀 도와준다”며 “윤 총장 부인은 오랫동안 내 강연 유튜브를 보고 공부했던 모양이다. 부인이 그걸 보고서 윤 총장에게 그 유튜브를 권했던 것 같다. 윤 총장이 몇 번이나 그걸 반복해 들었다고 한다”고 밝혔다.
미디어오늘


“체포되면 죽어라, 살면 이중간첩 된다”
전쟁 이후 남북한이 보낸 공작원 수만 명은 분단의 비극을 가장 크게 체감한 사람들일 거야. 목숨 걸고 휴전선을 넘거나, 동지 팔아 목숨을 부지했거나, 말로 다 하기 힘든 사연의 주인공이겠지.

2018년 6월6일 청와대 앞에서 열린 북파공작원 추모행사에 참여한 유족이 희생자 명단을 살피고 있다.ⓒ연합뉴스
스파이 세계에서는 불문율이 하나 있다고 해. “성공한 공작은 공개되지 않는다.” 남북도 마찬가지다. 남이나 북이나 엄청난 수의 공작원을 상호 침투시켜 파괴 공작을 벌이거나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누군가를 포섭하려 들었지만 그만큼 많은 실패를 했지. 이 실패가 드러날 때 양쪽 당국은 당연히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들은 관계없다고 우기게 된다.
전 세계 정보기관들이 가장 탐내는 공작 중 하나는 이중간첩 공작이야. 즉 적의 스파이를 포섭해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지. 그만큼 위험부담도 크고 투자도 많이 해야 하지만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상대방의 정보를 내 손금처럼 들여다볼 수 있으니 그보다 더 매력적인 공작은 없지 않겠니. 세계를 주름잡는다는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러시아 정보기관이 벌인 이중간첩 공작에 호되게 당한 적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4년 체포된 올드리치 에임스 사건을 들 수 있어. 글쎄 에임스는 CIA 내부에서 러시아와 동유럽을 담당하는 고위직이었단다. 그런 그가 이중간첩이 됐으니 러시아 내 CIA 활동망이 거덜날 수밖에 없었지.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한 일을 찾아볼 수 있다. 1983년 다대포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해안으로 숨어드는 북한 침투조를 급습한 건 일반 해안경비 부대가 아니라 대북 특수부대였어. 남한 쪽의 이중간첩이 된 북한 스파이가 흘린 정보를 통해 그 침투 과정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다가 덮친 케이스였지. 세상에 알려진 몇 안 되는 ‘성공한 공작’ 중 하나인 셈이야.
전쟁 이후 남북한이 서로 보낸 공작원 수만 명은 분단의 비극을 가장 크게 체감한 사람들일 거야(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북파공작원 수가 7726명이니 북한도 그보다 적지는 않을 것 같다).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나들다가 체포돼 처형되거나, 동지들을 팔아 목숨을 부지했거나, 그 외에 말로 다 하기 힘든 사연들의 주인공이겠지. 그 가운데 오늘은 심문규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그는 1925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고, 일본군에 입대해 관동군으로 근무하다가 별안간 참전한 소련군의 포로가 됐어.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중국공산당 팔로군에게 사로잡혀 팔로군 노릇을 하게 되지. 무슨 빠삐용도 아닌데 그는 또 탈출을 감행해 고향 철원으로 돌아왔어. 오늘날 철원에 가면 북한 노동당사가 남아 있다. 즉 전쟁 전 철원은 북한 땅이었어. 그는 철원의 인민보안대원으로 근무하다가 밀주(密酒) 관련 사건에 연루돼 철창신세를 진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철원이 수복되면서 심문규는 이번엔 남한 편에 서서 치안대원 노릇을 해. 6사단에 입대해 수색대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지.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그는 HID, 즉 대북 특수부대 요원이 됐어. 〈한겨레〉 인터뷰에서 그의 아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갔다 오면 장교 대접을 해준다는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대북 특수요원이 된다는 사실은 아내에게 막막한 벼랑으로 내몰리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 임신 중이던 심문규의 아내는 낙태하려고 키니네를 먹었다가 그만 숨지고 말았다. 이런 아픔을 뒤로하고 1955년 9월20일 심문규는 아이들 셋을 처남에게 맡기고 북한 침투에 나서게 된다(〈오마이뉴스〉 2011년 7월6일).
북한에 침투해 소정의 임무를 완수한 심문규는 인민군 몇 명까지 납치해 귀환할 배를 기다렸다. 무슨 이유에선지 배는 오지 않았고 육로로 돌파해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명령에 따라 육로로 귀환하던 중 심문규는 인민군에 체포되고 말았지. 북한은 당연히 남한의 간첩에게 이중간첩 공작을 하려 든다. 북한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 그는 이 위험한 임무를 계속 거절했다고 해. 그런데 그처럼 북한에 침투했다가 자수한 HID 요원들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일곱 살 난 당신 아들에게 HID가 북파 교육을 시키고 있어요.” 이건 사실이었다. 심문규의 아들 심한운은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산을 타고 바다를 헤엄치는 훈련을 받고 있었으니까.
반세기 동안 죽음의 이유 찾아 헤맨 유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살인 기계로 교육시킨다는 설정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실사판이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심문규는 이 소식을 듣고 남파를 자원한다. 북한에서 새로 얻은 아내도 임신 중이었지만 그는 일곱 살 아들이 자신과 같은 궤적을 밟는다는 것을 참기 어려웠나 봐. 북에서 남으로 휴전선을 넘은 그는 1957년 10월6일 서울 처남 집에 도착한다. 처남댁, 즉 아이의 외숙모가 겨우 HID에서 빼내 온 아들과 꿈에 그리던 상봉을 했지. 그리고 곧바로 그가 속해 있었던 대북 첩보부대에 자수한다. 남파돼서 공작을 벌인 일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 별 탈 없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건 세상을, 그리고 분단을 너무 무르게 본 것이었지.
대북 첩보부대는 심문규를 1년 넘게 데리고 있으며 정보를 캐고 남파 간첩과 접선하게 해 그를 체포하는 등 이른바 단물을 다 빼먹은 다음에야 군 특무대에 넘긴다. 범죄 혐의가 있다면 즉시 특무대에 넘겨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거야. 특무대는 대충 이런 의견을 낸다. “북한군에 체포돼 군사기밀을 제공하고 북파 공작원을 적발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됐으나, 임무를 포기하고 자수한 자로 공훈이 있기에 정상을 참작하여 의법 처리하는 쪽이 좋겠다.” 즉 범죄 사실은 있으나 공도 있으니 이를 참작해 처벌하자는 것이었지.
그런데 처음에는 ‘자수한 간첩’으로 되어 있었던 공소사실이 이후 첩보부대의 의견이 반영된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는 “서울시에 잠입한 후 합법을 가장할 의사로 첩보부대에 자수하였다”로 180도 바뀐다. 간첩 활동을 포기하고 자수한 게 아니라 간첩 활동을 하려고 자수했다는 주장이었지. 이를 근거로 심문규는 1961년 5월25일 사형대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어. 그의 죽음은 가족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단다.
일곱 살 나이에 아버지를 찾겠다며 북파 훈련을 받았던 아들은 거의 반세기 동안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거쳐 2012년 대한민국 법정은 심문규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것으로 심문규의 영혼에, 그리고 그 가족들의 아픔에 어느 정도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심문규처럼 죽어간 북파 요원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거야. 동해 첩보부대인 36지구대 부대장이었던 이의 증언이다. “(북파 공작원들이 북한에 체포된 뒤 이중간첩 임무를 띠고) 남한에 내려오면 다시 (남한에) 귀순을 하였으며, 첩보부대에서는 귀순자들에게 북한에서 습득한 정보를 빼낸 후 처리하였다(죽였다). 그들을 사회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고, 다시 교육을 시켜 북파하더라도 북한에 다시 귀순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 건조한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핏물과 비명이 배어 있는지를 상상해보기 바란다. 북파 요원들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 “체포되면 죽어라. 살면 북한의 이중간첩이 되고 남파되면 남한에서 죽는다.” 그렇게 남과 북 양쪽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대관절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구나. 알게 되면 더 비통해지고 기가 막히겠지만 알아야 할 사연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현대사의 ‘버러지’ 간첩 제조자들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던 이근안.ⓒ시사IN
분단 후 우리 현대사를 가로질렀던 여러 ‘간첩’들의 이야기를 해봤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자신이 선택한 나라를 위해 대한민국의 발밑을 파고들었고, 대한민국 국가기관은 당연히 그들을 파헤치고 드러내려 애썼다. 그러나 간첩을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야.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정보기관들이 정보를 캐내기 위해, 또 정보를 빼내는 간첩을 잡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하얗게 밤을 밝히고 있지.
그런데 한국 정보기관과 대공 수사기관들은 매우 특출한(?) ‘간첩잡이’ 실력을 발휘해왔다. 북한이 의욕적으로 간첩들을 내려보냈던 196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대남 전략을 수정했던 1970~1980년대에도 툭하면 ‘간첩단’ 뉴스가 지상을 장식하며 ‘간첩’을 무더기로 잡아냈지. 여기서 유머 한 자락을 소개할게. 세계 각국 정보기관에 깊은 산에서 쥐 한 마리를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위성을 총동원해서 쥐를 찾아냈고, 러시아 정보기관은 CIA의 통신을 감청해 별 수고 없이 쥐를 확보했다. 그런데 한국 정보기관은 웬 곰 한 마리를 끌고 왔다. 뭇 사람들이 이게 뭐냐고 물으니 한국 정보기관원이 대답도 하기 전에 온몸에 피멍이 들고 다리 두 개가 부러진 곰이 울부짖었다. “저는 쥐입니다. 찍찍. 아이고, 고양이 무서워. 저는 쥐라니까요.”
이 얘기는 한국 공안당국이 발휘했던 ‘유능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대변한다. 간첩을 ‘만드는’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한국 공안당국의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지. 우리 현대사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수많은 간첩들의 정점에는 자백과 함께 소위 ‘그림’이 있었어. ‘나는 간첩입니다’라는 자백을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 포섭돼, 누구를 만났으며, 그 증거는 무엇인가 줄줄 외우고, 자신도 모르는 ‘증거’가 있는 장소까지 제보해야 했지. 찍찍 울어대면서 고양이를 겁내며 자신을 쥐라고 주장하는 곰처럼 말이야.
1948년 14연대의 반란으로 촉발된 여순사건 이후 숙군(肅軍) 작업이 벌어지면서 많은 장병들이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 일본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은 그 유혈극의 선봉이었다. 붉은 치마만 봐도 미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빨갱이’ 혐오자였지. 김창룡은 후일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를 비롯해 엄청난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동시에 그들을 좌익으로 ‘제조해’냈다.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 장군은 김창룡을 불러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전기고문을 해대면 아무거나 불지 않을 이가 어디 있느냐. 이 버러지 같은 놈아(〈한겨레신문〉 1990년 3월30일).”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는 이런 부류의 ‘버러지’들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영화 〈1987〉에서 배우 김윤식이 살을 찌워가면서 열연했던 배역 ‘박 처장’을 기억할 거야. 억센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부모가 공산당 손에 죽었던 기억을 절절히 토로하지만, ‘빨갱이’ 잡는 데에는 공산당 못지않게 잔인하고 가혹했던 그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다. 그 이름은 박처원. 평안남도 용강의 지주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공산당 손에 가족을 잃은 뒤 열일곱 나이로 혈혈단신 남하해 경찰에 투신, 순경부터 시작해 경찰 조직의 별이라는 경무관까지 입신한 사람이야. 그를 암살하겠다며 북한이 간첩을 내려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활약이 대단했지.
그 ‘활약’ 와중에 그는 앞서 언급한 특무대장 김창룡을 닮아가고 있었다. 〈1987〉 영화에서 보듯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세였다. ‘간첩’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1977년 중앙정보부조차 난색을 표하는 상황에서 박처원은 유신체제에 항거했던 지식인 리영희 교수를 잡아들이겠다고 고집했다. “리영희는 이번 기회에 유죄판결하고 뽄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사상통제를 할 수 없다(리영희 지음 〈대화〉).” 그리고 잡혀온 리영희에게 그만의 방식으로 협박을 하지. “자기 둘째손가락을 보라고 하더군. 보니까 굳은살이 잔뜩 나와 있더라고요. ‘30년 동안 펜대를 잡고 빨갱이 잡는 조서를 밤낮으로 쓴 그 유물이 바로 내 둘째손가락의 뚝살이오’ 하는데 정말 소름이 끼치더군(〈대화〉).” 그렇게 많이 써 제꼈던 조서 가운데 그가 정말 잡아야 했던 ‘간첩’의 비율은 얼마나 됐을까. 그리고 합리적 증거를 통해 법을 어긴 범죄자로 밝혀진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박처원이 가장 총애했다는 부하를 통해 그 속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고문 가해자의 황망한 악수 제의
이근안은 1970년 경찰에 입문하자마자 박처원의 경호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특출한 힘과 고문 실력으로 박처원의 아낌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박처원은 결재 과정도 무시하고 이근안에게 직접 보고를 받아 중간관리자들로부터 원성을 샀을 정도였지. 일제강점기에 해외 출장까지 다니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악질 경찰 김태석처럼, 이근안은 박처원의 호출이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그 실력(?)을 발휘했다. 이근안에 따르면 남영동에 끌려온 이들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했던 ‘칠성판’, 즉 나무판자를 간이침대처럼 만든 뒤 사람을 눕히고 가죽끈으로 고정해 물을 퍼부었던 물고문 전용대의 발명자는 박처원이었어. 그들은 그 짓거리를 하면서 애국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종찬 장군이 김창룡에게 일갈했던 표현대로 실상은 ‘버러지’가 돼가고 있었지. 애국적 버러지라고 해야 할까.

김근태 고문 사건의 가해자 김수현.ⓒ연합뉴스
박처원의 부하 가운데 김수현 경감이라는 이가 있었어. 1985년 남영동에 끌려온 김근태의 몸을 거의 부숴버렸던 고문 가해자야. 구체적인 범죄 내용을 여기서 읊고 싶지는 않구나.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어. 그러나 고문 혐의로 김수현이 재판정에 섰을 때 김수현의 변호사는 이렇게 열변을 토한다. “이 사건은 빨갱이를 잡는 데 일생을 바쳐온 대공 경찰과 좌익운동가들의 싸움이므로 이 싸움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동아일보〉 1990년 12월27일).” 변론이 끝나자 “방청석을 차지하고 있던 사복 차림의 대공 경찰관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으며 고문 경관들은 끝까지 고문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했지.
그들이 지켰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민주주의국가다. 민주주의에서 최고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지. 그 인간을 부수고 짓밟으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선사하던 이들이 ‘애국’을 논하는 일만큼의 언어도단은 없었다. 그들의 간첩 ‘제조’는 민주주의 국가가 응당 실현해야 할 방첩(防諜)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처절한 모욕이었지. 간첩 몇 명을 잡았든 그들의 공이 단 한 명의 간첩이라도 억지로 만든 과오를 덮을 수 없는 이유야.
1988년 11월 김근태 고문 사건 재판이 진행되고 증인신문이 열렸을 때 김근태는 남영동의 지옥에서 본 악마 김수현과 마주한다. 김근태는 끔찍한 악몽을 헤집으며 당시 김수현의 행각을 되짚었지만 김수현은 기계처럼 부인만 할 뿐이었지. 신문이 끝났을 때 참으로 어이없게도 김수현은 김근태에게 손을 내민다. 황망한 악수 제의 앞에서 김근태보다도 그의 아내 인재근이 참지 못했다. 그는 김수현의 얼굴에 침을 뱉었지. 김수현은 허둥지둥 신문실을 나가버렸다. 우리 역사에 수많은 명장면이 있지만, 박처원 이하 고문 경관들은 후일 범법자로 처벌받았지만, 그날의 침 세례만큼 통쾌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장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1988년 6월 김천교도소를 나와 부인 인재근씨를 끌어안고 손을 흔드는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연합뉴스
김형민 (SBS Biz PD)/ 시사인


명성황후 시해범을 쫓아서... 92세 일본인의 마지막 강연
구마모토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카이 도시오씨... 올해도 어김없이 추모식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남은 생 동안 명성황후 시해범을 추적할 겁니다."
일본 구마모토현 아소군 자택에서 만난 카이 도시오씨가 처음 만나 한 말이다. 지난 2004년 5월 일로 카이씨는 당시 75세였다(관련기사: "명성황후 시해범, 죽는 날까지 추적할 것").
그 때로부터 17년이 흘렀다. 그의 나이도 92세가 됐다. 종일 앞서 걸으며 기자에게 현장을 안내하던 그는 이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도 힘이 빠졌다. 눈이 나빠져 책과 자료를 보는 게 힘들다.
하지만 그는 17년 전 약속을 지켜왔고 지키고 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시해범을 찾는 일에 노년을 바쳤다.
일본에서 열린 명성황후 시해 126주년 추모식

▲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해 활동해 온 카이 도시오씨의 모습. 모임을 발족한 2005년(왼쪽)과 2021년 10월(오른쪽) 모습.ⓒ 심규상
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126주년인 8일 오전 10시 일본 쿠마모토현의 '한일문화교류센터 구마모토'에서 열린 명성황후 추모기념식에 참석, 참배한 후 마지막 강연을 했다. 이날 기념식과 강연은 그가 주도해 만든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과 '재일 대한민국 민단 구마모토현 지방본부'(단장 김태문)가 공동주최했다.
중학교 교사로 일하던 카이 도시오씨는 1980년대 어느 날 아소산 국립공원에서 한 한국인 소녀를 만났다.
"그 한국인 소녀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역사 교사인데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였으니까요."
이 일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한 나라의 국모를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죠. 특히 시해에 가담한 대부분이 구마모토현 출신이라는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죠."
실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48명의 일본인 중 21명이 구마모토현 출신이다. 카이씨는 이때부터 수십 권의 책과 논문을 찾아 읽었다. 교사 퇴직 후에는 문장 하나하나를 자신이 직접 재조사하듯 확인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직후인 2004년 11월에는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발족했다.
카이씨가 주로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시해범들의 행적이다.
"시해 사건 가담자들이 어떻게 참가하게 됐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사건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았는지, 어떻게 살았고 언제 죽었는지,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그 후손들은 무엇을 하는지 등을 조사했습니다."
이같은 조사 결과를 큰 종이에 직접 썼다. 이를 들고 다니며 일본 시민들에게 알렸다.
"당시 히로시마 재판부의 기록에 의하면 미우라 고로(일본을 대표하는 조선국 주차공사) 공사가 외무성의 기밀비를 사용해 낭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일본 정부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공사에게 기밀비 형태로 시해에 필요한 막대한 돈을 제공한 것만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당시 한성신보사(일본인 아다치 겐조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위한 선전 기관지로 1895년에 창간한 신문. 일본외무성의 기밀보조금으로 창간됐다-기자주) 사장 아다치가 구마모토 출신이었는데 이 사람이 미우라 공사의 의뢰에 따라 구마모토 낭인들을 동원했고 때문에 구마모토 출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이후 48명 모두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됐습니다. 일부는 일본 고위직을 지내기도 했죠. 지금도 명성황후 시해를 치적으로 새겨 자랑까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명성황후 생각하는 모임 만들고 16차례 홍릉 참배

▲ 8일 오전 10시 명성황후 시해 사건 126주년을 맞아 "한일문화교류센터 구마모토"에서 "명성황후 추모기념식"이 개최됐다.ⓒ 주영덕

▲ 이날 추모기념식 참석자들이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주영덕
그는 아소산 국립공원에 세워진 한 기념비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것을 치적으로 기록한 인물을 찾아내 기념비 삭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문제의 인물은 마츠무라 다츠키(1868~1937)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구마모토시의회 의원, 구마모토현 기성회 상임이사를 역임하는 등 주요 요직을 거쳤다. 그는 아소산 일대를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시켜 구마모토현 근대문화공로자로 선정되기도 했다(관련기사 : 명성황후 시해 가담한 게 '치적'이라고?).
그는 시해에 가담한 이들이 일반 일본 낭인이라는 주장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할 수 있었을까요?"
한편 그는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일에도 매달렸다. 2005년을 시작으로 지난 2019년까지 매년 10여 명의 회원을 이끌고 명성황후가 묻힌 경기도 홍릉을 찾아 참배했다. 방한 때마다 한국독립기념관도 꼭 들렀다. 방문 횟수만도 16번에 이른다. 특히 지난 200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후손을 찾아 설득해 함께 참배하기도 했다. 당시 이 일은 한일 언론에 각각 '11년 만의 참회'라는 제목으로 크게 다뤄졌다(관련기사: "더 사죄하기 위해 오래 살고 싶다").
마지막 강연의 마지막 당부 "한일 과거사 알고 직관해야"

▲ 이날 행사가 끝난 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주영덕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홍릉 참배가 처음으로 중단됐다. 그런데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추모 행사는 계속됐고 카이씨도 함께했다. 지금도 그는 일본 시민에게 "한국에 가면 명성황후 묘소를 참배하거나 서대문형무소·독립기념관 등을 꼭 둘러보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안내한다.
이날 강연의 말미에서 카이 도시오씨는 이렇게 밝혔다.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일본이 어떻게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한국인, 조선인을 어떻게 차별하는지를 생각하는 단체입니다. 일본 권력은 자꾸 역사를 숨기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국민은 역사를 더 잘 알아야 합니다. 과거 역사를 배우고 직시하며 한일이 우호해야 일본에 진정한 평화와 발전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심규상(djsim)






영양실조로 사망 외환위기 후 최다?



유권자의 3분의 1 청년층, ‘지지후보 없음’
한때 벅찬 감동을 느꼈던 많은 이가 지금은 실망과 냉소, 무관심에 빠졌다. 유권자의 3분의 1, 청년층의 절반이 ‘지지 후보 없음’이라는, 냉랭한 시선으로 정치를 보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양대 정당의 후보 경쟁이 흥미진진하다. 누구 한 명이 일찌감치 승기를 잡으면 싱거울 텐데 주자들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당에선 이재명 지사가 선두에 있지만 이낙연 전 의원과 여야 양자 대결 경쟁력이 엇비슷하고, 야당에선 윤석열씨가 대세인 것 같더니 홍준표 의원이 혜성처럼 나타나 판을 재밌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가? 재미난 삼류 영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나서 텔레비전을 끄자마자 기분 나쁜 공허함이 밀려온 경험 말이다. 이번 선거가 이런 식으로 간다면 어쩌면 내년 3월쯤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어떤 이슈도, 희망도, 감동도, 기대도, 열정도 없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찍고 싶은 사람이 없는 선거는 처음’이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누가 51%를 가지느냐보다 본질적인 질문
한국갤럽 9월 첫째 주 리포트에서 ‘다음번 대통령감으로 누가 좋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없음’과 ‘모름’ 응답이 32%나 나왔다. 특히 20대의 50%, 30대의 40%가 지지 후보가 없다는 게 충격이다. 지난 19대 대선을 앞둔 2017년 1월 실시한 동일 조사에서 ‘없음·유보’ 응답이 전체의 13%, 모든 연령대에서 10~16%였다.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겨울에 많은 시민들은 가슴에 큰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오세제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내가 정부 일에 의견을 피력해서 뭔가 바꿀 수 있다는 정치 효능감은 촛불집회를 겪으며 크게 높아졌다. 특히 20대는 2015년에 비해 38%포인트가 오른 70%가 자신감을 보였고, 30대는 59%, 40대는 58%가 그러했다. 이 시민들 중 많은 사람이 지금 여든 야든 정치에 기대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실망, 보수 정치가 탄핵 후에도 쇄신이 없었던 점, 그렇다고 강력한 제3세력이 부상하지도 않은 점 등 문제가 총체적이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넘어 변화를 개시할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다. 그런데 지금 대선 경쟁은 많은 유권자에게 실망을 주고 있다. 나의 대표자가 될 그들이 나의 문제로 싸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갤럽이 재작년에 수행한 대규모 인식조사에서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고르라는 질문에 44.6%가 ‘일자리’라고 답했고 그다음이 ‘빈부격차’로 25.6%였다. 둘을 합치면 70.2%다. 우리 사회의 문제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는 84.6%, 대기업과 중소기업 격차는 81.2%, 기업가와 노동자 갈등은 78.3%가 ‘문제가 크다’고 답했다. 그런데 지금 여야 후보들은 이에 대한 비전을 놓고 다투고 있지 않다.
어떤 면에서 이런 괴리는 새롭지 않다. 2015년 나는 ‘불평등과 한국 민주주의의 질’에 관한 논문에서 국민 여론과 선거 정치 간의 깊은 간극을 보고한 바 있다. 민주화 직후인 1990년대에는 다수 시민이 우리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정치개혁을 꼽은 데 비해, 2000년대에는 일자리, 소득격차, 부동산 등 경제 문제를 꼽았다. 하지만 2000년대에 치른 대부분의 선거는 후보의 인물과 스캔들 사건이 좌우했다.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우리 사회가 이런 과거와 단절하고 새 출발을 하기 바라는 많은 시민의 꿈을 담고 있었다. 이처럼 한때 벅찬 감동을 느꼈던 많은 이가 지금은 실망과 냉소, 무관심에 빠졌다. 유권자의 3분의 1, 청년층의 절반이 ‘지지 후보 없음’이라는, 냉랭한 시선으로 정치를 보고 있다. 촛불의 환희 뒤에 찾아온 이 우울의 시대를 여기서 멈추고 사람들의 가슴이 다시 뛰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누가 51%를 가지느냐보다 더 본질적인 시대의 질문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시사인
어이없고 기가 막힌 고발 사주 의혹 ‘말말말’
윤석열 캠프와 국민의힘은 ‘고발 사주 의혹’을 두고 정치공작, 제보 사주,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라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고발 사주 의혹을 둘러싼 ‘말말말’을 팩트체크했다.
지난 9월2일 〈뉴스버스〉가 ‘고발 사주 의혹’을 처음 보도했다. 이날부터 윤석열 캠프나 국민의힘은 ‘정치공작이다’ ‘고발 사주가 아니라 국정원의 제보 사주다’ ‘국정원 정치 개입이다’라고 주장했다. 고발 사주 의혹을 둘러싼 ‘말말말’을 팩트체크했다.

ⓒ연합뉴스
“어떤 페이퍼, 종이 문건이든지 디지털 문건이든지 간에 그 출처와 작성자가 나와야,
그게 확인돼야 그것이 어떠한 신빙성 있는 근거로서
그걸 가지고 의혹도 제기하고 문제도 삼을 수 있는 건데,
그런 게 없는 문서는 소위 괴문서라고 하는 거다.
이런 괴문서를 가지고 국민들을 혼동에 빠뜨리고.”
- 9월8일, 윤석열 후보 기자회견
‘고발 사주 의혹’이 불거진 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첫 공식 기자회견. 윤 전 총장은 이 사건을 ‘정치공작’으로 규정하면서 고발장 등을 출처와 작성자가 불분명한 ‘괴문서’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이후 대검찰청(대검) 감찰부,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3부는 디지털 증거가 조작되지 않은 것으로 결론 냈다. 검찰과 공수처는 디지털 포렌식 결과 제보자 조성은씨(당시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가 지난해 4월3일 오전 10시12분(지○○ 페이스북 캡처 사진), 오후 1시47분(지○○ 판결문 3건), 오후 4시19분(고발장)에 각각 내려받은 파일 생성 기록을 확인했다. ‘손준성 보냄’ 사진 파일(고발장·페이스북 캡처·판결문)이 사후 조작됐을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다.
또 검찰과 공수처는 ‘손준성 보냄’의 손준성과 손준성 검사(당시 대검 수사정보정책관)가 동일 인물임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검찰과 공수처는 4월3일 김웅 의원이 텔레그램으로 전한 ‘손준성 보냄’ 파일을 조성은씨가 받은 것은 ‘팩트’라고 확인한 것이다.
공수처는 9월28일 손준성 수사정보정책관 밑에서 일했던 성 아무개 당시 수사정보2담당관, 수사정보정책관실 소속 검찰연구관이었던 임 아무개 검사의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괴문서라는 말과 달리 고발장 작성자와 전달자가 검사들로 좁혀지고 있는 셈이다.

ⓒ연합뉴스
“정당과 국회의원은 공익신고의 대상으로 이에 대한 공익 제보를
마치 청부 고발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공익 제보를 위축시키는 것으로 심히 유감이다.”
- 9월2일, 김웅 국민의힘 의원 입장문
10월7일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보든 당시 상황에서 보든, 설득력이 전혀 없는 입장문. 제보자 조성은씨에게 파일이 건네진 2020년 4월3일과 4월8일 당시 손준성씨는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으로 검사였다. 김웅 의원도 국회의원이 아닌 국회의원 후보 신분이었다.
공익신고자보호법에 따르면 ‘공익신고’는 ‘공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신고’하는 행위다. 여기서 공익을 침해하는 행위란 ‘국민의 건강과 안전, 환경, 소비자의 이익, 공정한 경쟁 및 이에 준하는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상대방의 범죄 혐의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형식인 고발장 내용은 공익신고가 될 수 없다(김웅 의원 논리대로라면 모든 고발장은 공익신고다). 즉, ‘손준성 보냄’의 고발장은 공익신고로 간주하기 어렵다. 오히려 수사기관에 근무하는 검사가 중립성을 의심받을 만한 행위를 한 정황을 보고 이를 공익을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해 신고한 조성은씨의 제보가 공익신고의 일반적 정의에 해당된다. 10월1일 국민권익위원회는 조씨가 부패·공익신고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한편, 고발장을 전달한 김웅 당시 후보와 조성은씨 사이의 통화 내용(지난해 4월3일)이 복구되었다. 10월6일 언론들을 통해 공개된 김웅 의원의 당시 발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만들어서 보내줄게요” “(고발장을) 그냥 내지 말고 왜 인지수사 안 하냐고 항의를 해서 대검이 억지로 받은 것처럼 하세요”.
9월2일 김웅 의원의 입장문은 ‘의도적인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결과적으로 김웅 후보의 말(복구된 통화 내용)이 김웅 의원의 말(9월2일 입장문)을 팩트체크한 셈이다.

ⓒ시사IN 이명익
“발신자의 텔레그램 메신저상의 이름을 손준성으로 지정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실체가 누가 됐든지 손준성이 보낸 것처럼 찍히게 된다.”
- 9월3일, 김경진 윤석열 캠프 대외협력특보,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10월7일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검사 출신 김경진 특보의 주장이 틀린 것으로 확정되었다. 검찰과 공수처는 ‘손준성 보냄’의 손준성과 손준성 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윤석열 캠프는 해당 자료들의 ‘발신자’가 손준성 당시 수사정보정책관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가면서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해왔다. 윤석열 캠프나 국민의힘에서 내놓은 정치공작의 유일한 근거는 제보자 조성은씨와 박지원 국정원장의 만남 정도. 윤석열 캠프 측은 박지원 원장과 조성은씨가 서로 공모해 ‘고발 사주 의혹’을 제기했다며 국가정보원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공수처에 고발했다.

ⓒ연합뉴스
“우리 방 보좌관이 보고를 받아서 당무감사실에 넘겼는데
누구한테 받았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 9월9일, 정점식 국민의힘 의원, 〈한겨레〉 인터뷰에서
지난해 4월8일 ‘손준성 보냄’으로 조성은씨가 전달받은 사진 파일은 최강욱 의원(열린민주당)에 대한 선거법 위반 혐의 고발장이었다. 이 고발장은 4개월여 뒤인 8월25일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명의로 검찰에 접수된 고발장의 문구와 내용이 똑같다. 심지어 ‘손준성 보냄’의 고발장에 기록된 최강욱 의원의 잘못된 주민등록번호 및 최 의원이 출연한 유튜브 채널 ‘매불쇼’ 조회수(4월8일 현재)가 4개월 뒤 미래통합당의 고발장에 기록된 내용과 일치한다. 팟캐스트 플랫폼 ‘팟빵’을 ‘팥빵’으로 잘못 쓴 오기도 똑같다. 미래통합당 법률자문위원인 조 아무개 변호사는 당무감사실에서 초안을 받아 문장만 손봐서 검찰에 접수시켰다고 말했다. 그런데 당무감사실에 고발장 초안을 넘긴 장본인은 정점식 의원이었다.
지난 9월3일 윤석열 후보 캠프 총괄상황실장을 맡은 장제원 의원은 “윤 후보가 진짜 야당 고발이 필요하다고 했다면 그 당시에 이 법률 지원과 관련된 책임자가 정점식 의원이다. 정 의원이 책임자이고 윤 후보와 정 의원은 가장 가깝다. 그분에게 전달해서 바로 고발하는 게 맞지 왜 건너건너서 이런 짓을 하느냐”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발언의 가정(‘정점식에게 고발장을 전달했을 것이다’)이 일주일 후 (주장이 합리적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밝혀진 셈이다.
조성은씨는 ‘손준성 보냄’의 파일을 당에 건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4월8일 김웅→조성은씨 경로와는 다른 통로로 당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역시 검찰과 공수처 수사가 밝혀야 할 부분이다.

ⓒ연합뉴스
“손준성이가 보냈다, 그리고 김웅 의원이 그걸 받았다, 그게 뭔 문제가 되죠?
그런 걸 찾아내면 표창장을 줘야지 그게 뭐가 문제가 돼요?”
- 9월14일,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 국민의힘 인천·경기 예산정책협의회가 끝난 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당연히 문제가 된다. 검사 직분을 이용해서 제3자의 판결문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고발장을 전달했으며(검사의 직분은 고발장을 받는 것이지 작성하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선거에 활용하려 했다는 의심까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발 사주라는 사건은 없다. 얼토당토않은 터무니없는 짓을
공수처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다.”
- 10월6일,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 정점식 의원실 압수수색에 항의하며 기자들을 향해
디지털 증거가 조작이 아니었다고 확인되었지만, 김기현 원내대표는 여전히 ‘고발 사주’는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김 원내대표뿐 아니라 국민의힘은 이 사건을 공익신고자로 인정받은 조성은씨와 박지원 국정원장이 꾸민 ‘제보 사주’라고 주장한다. 국민의힘은 고발 사주 의혹을 조사하겠다며 공명선거추진단을 꾸렸지만 개점 휴업 상태로 알려졌다.
시사인 나경희 기자
미국은 2001년 9.11 테러로 인하여 무너진 세계무역센터(WTC) 빌딩 2동이 서있던 부지에 거대한 추모공간을 만들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는 반면, 우리는 1995년 부실공사로 무너져서 500여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부지에 호화 주상복합빌딩을 지었다
오세훈 ‘시민단체형 다단계’ 주장에···전문가들 “향후 10년을 보라” 쏟아진 비판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달 13일 서울시 민간위탁 사업의 ‘중간지원조직’을 두고 “시민단체의 피라미드, 시민단체형 다단계”라고 비판했다. 중간지원조직은 서울시가 일부 사업을 협동조합·비영리단체 등 민간에 맡길 때 서울시와 이들 사이에서 관리 역할을 한다. 오 시장은 “특정 시민단체가 중간지원조직이 돼 다른 시민단체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해왔다”라며 “시 예산으로 보조금을 나눠주고 생색을 내는 기발한 사업구조를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구조에서 지원을 받은 대표 사례로 ‘마을공동체 사업’을 꼽으며 “인건비 비중이 절반이 넘는다”라고 주장했다.
오 시장이 지목한 마을공동체 사업의 중간지원조직인 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가 지난 7일 그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나섰다. 이들은 서울성북미디어문화마루에서 연례행사인 ‘마을컨퍼런스’를 열면서 “지난 10년의 서울 마을공동체 정책과 민관협치 거버넌스의 성과와 비판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과 발전적인 방향을 제시하겠다”라고 밝혔다. 올해 컨퍼런스 주제는 ‘중간지원조직’과 ‘시민참여 정책’이었다.

서울시 주최·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주관 ‘2021 마을컨퍼런스’ 가 열린 성북구 서울성북미디어문화마루에서 컨퍼런스 참석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 미우라 히로키 서울대 사회혁신 교육연구센터 선임연구원, 이태동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용석 서울시의원, 김미윤 은평구 은평정책연구단장, 이상현 중랑마을넷 기획팀장.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유튜브 갈무리.
컨퍼런스에 참석한 시민사회·학계 인사들은 중간지원조직에 관한 인식부터 바뀔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정부 정책을 하향식으로 집행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박영선 한양대 제3섹터 연구소 연구교수는 “중간지원조직은 행정과 시민을 연결하고 민간과 민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갖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의 프로그램을 집행하는 것으로 폄하되거나 잘못 인식됐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 역할만으로는 복잡한 현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민사회 참여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 경로에서 중간지원조직이 생겼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 교수는 “정부가 시민참여를 도모한다는 측면에서 중간지원조직이 중요한 정부 정책 도구로 부상했고, 사회적 혁신과 공익활동의 거점이자 시민사회 활성화의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라며 “시민사회가 중간지원조직을 통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거나, 사회적경제 등 독자적 영역을 개척해 지역사회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라고 했다.
다만 정부 주도로 설립되다보니 중간지원조직 스스로가 정부 정책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치중했다는 점과 취약한 재정 능력, 짧은 시민사회 역사에 따른 전문성 부족 등 때문에 한계점이 드러났다는 점도 지적했다.
이상현 중랑마을넷 기획팀장은 “행정에 긍정적이거나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의견을 개진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일어난다”라며 “예산을 지급한다는 이유로 시민단체 활동에 행정이 개입하는 구조가 돼 ‘행정에 포섭됐다’라는 평가도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오수길 도시지속가능연구소장은 “중간지원조직은 시민과 행정을 연결하는 사람, 즉 ‘연락병’”이라며 “그런 중간지원조직이 행정 주무부서의 하부 조직처럼 일하면 한방향의 연락만 주는 셈”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인적·조직적 자원이 부족해 외부에 의존해 독립성에 도전받거나, 혁신을 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아마추어리즘으로 비쳐지고 있다”라며 “중간지원조직이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탁기관(정부·지자체)으로부터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마을 공동체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시민사회 참여를 중시한 사업의 성과는 보다 장기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단순히 양적 성과를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미우라 히로키 서울대 사회혁신 교육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의 역사를 ‘자생적 시작(2000년대)’과 ‘정책적 육성(2010년대)’으로 구분했다. 그러면서 이 기간 동안 ‘1만6000여개 주민 모임 지원’ ‘마을활동가 1086명 육성’ ‘주민자치 관련 교육참여자 24만명’ 등 성과를 언급했다.
미우라 선임연구원은 “향후 10년 동안 정책의 고도화와 사회적·정책적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30년 단위로 정책을 봐야 한다”라며 “단순히 양적 성장이 아니라 사람과 마을의 질적 성장을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오수길 연구소장은 “10년 동안 얼마를 썼고 몇 개 단체가 어떻게 했는지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충분한 지원이 됐는지,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게 운동장을 개방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이태동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날 주민자치회 사업 참여가 ‘정치적 효능감’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설명했다. 정치적 효능감이란 ‘지역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주민 스스로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식’을 말한다. 서울시는 주민들이 스스로 지역 의제를 발굴하고 예산과 정책 편성 권한까지 일부 갖게 한다는 취지로 ‘서울형 주민자치회’를 운영 중이다. 이 교수는 “협치를 했을 때 정치적 효능감이 늘어날 수 있고 지역사회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 동력이 계속 생길 수 있다”라며 “정부·지자체 예산이 지역사회와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좋게 하는 방향으로 투명하게 쓰이면서 다양한 성과를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김미윤 은평구 은평정책연구단 단장은 “마을정책은 ‘탑다운(Top-Down·하향식)’ 행정의 한계를 개선해 예산의 효율적 집행에 초점을 둔 공공정책에 시민참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공동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와 사회혁신의 새 발전방향을 모색하며 출발한 정책”이라며 “처음엔 시민참여의 과정이 번거롭고 시간이 필요해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당연한 문화가 됐고 행정의 체질과 지역사회 의사결정구조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경향
박원순 유족측 변호사, 강제추행 혐의로 피소
핵심요약
올 5월 방배서에 고소장 접수…경찰 "고소인 조사 모두 마쳐"
정 변호사 "3년前 스토킹 당해…허위사실 유포도" 혐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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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유족 측 법률대리인인 정철승 변호사가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경찰에 피소된 것으로 확인됐다. 정 변호사는 자신이 오히려 '스토킹' 피해자라며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9일 경찰에 따르면, 고소인 A씨는 지난 5월 서울 방배경찰서에 정 변호사를 강제추행 및 유사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정 변호사는 이달 6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이같은 사실을 직접 밝히기도 했다.
해당 글에서 정 변호사는 "오늘 경찰서로부터 내가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당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3년 전에 나를 집요하게 스토킹하면서, 나와 사귀고 있고 결혼할 예정이라는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내 사무실에 여러 차례 무단침입해서 징역형 집행유예의 형사처벌을 받았던 여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여성은 당시에도 경찰 수사와 형사재판을 받던 중 정신병원에 입원해 실형을 모면했다"며 "그렇게 처벌받은 여자가 피해자인 나에게 도리어 강제추행 고소를 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대한민국의 개탄스러운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정철승 변호사의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경찰 관계자는 "정 변호사가 피고소된 것은 사실"이라며 "고소인 조사는 모두 마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직 정 변호사의 소환일정을 조율 중이라 수사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A씨는 고소장을 통해 지난 2018년 10월 정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유사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정 변호사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 측 김재련 변호사의 주장을 반박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글을 일부 삭제하라는 법원의 결정에 불복해 이의신청을 제기한 상태다. 그는 지난 6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가처분 이의사건 심문에서 "채권자(피해자) 측이 지난 1년 동안 이 문제를 여론으로 끌고 와 일방적인 주장을 대중에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CBS노컷뉴스 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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