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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지역과 마을

해리단길 보고 술 취해 간 곳

by 이성근 2020. 8. 22.

 

나루공원에 영화인의 숲을 만들기위해 비프를 찾았다. 영화의전당 이영관 이사장BGT 공동대표와 같이 자리를 했다.  부산대 김동필교수도 동참했다.  BGT 제안에 대해 흔쾌이 합의가 이루어 졌다. 나루공원을 활성화 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올해 사업계획에 잡았던 것인데, 코로나19로 마루어지다 더 늦추면 안될 것 같아 날을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코로나가 급속히 번지고 있다. 이번주말과 다음주까지가 관건이다 개최가 불투명했던 영화제는 일단 여는 것으로 했지만 게폐막식은 불확실하고,한다고 하더라도 약식 형태에 영화의 숲이 가미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관건은 올 봄보다 더 급속하게 번지는 코로나19다.

의외로 싶게 합의가 이루어져 시간이 많이 남았고 김교수와 해운대로 향했다.  맥주나 한잔 하자고 ... 헌데 낮술 마시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렀고 문을 연 술집도 없었다.  해운대 역사 뒷편 해리단길로 향했다. 나는 두번째 방문이었다.   

역사 공원화 사업은 보류됐다. 시민사회와 해운대구청의 생각이 달라서다.

해리단길이란 이름이 어디서 근원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에   경리단길이 있다. 과거 육군중앙경리단이 이 길의 초입에 있어서 경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경리단길이 유명세를 타자, 부산 전포동의 전리단길’,  경주 황남동의 황리단길과 같이 O리단길이라는 이름이 전국에 유행처럼 번졌다불과 4~5년 만에 전국에는 20여곳이 넘는 ‘O리단길이 생겨났다. 해리단길 역시 그 아류다.

2016년 동해남부선이 폐선되며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201821개소의 상점이 위치했던 해리단길은 201961개소로 늘었으며 하루 평균 3000여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ㅣ지난해에는 행정안전부가 대한민국 최고의 골목길로 인정 받기도 했다.  상인과 주민들이 함께 하는해리단길발전협의회는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협약도 맺었다.

지난해 방문했을 때 구청 관계자에게 폐선부지에 뭔가를 넣기 보다는 차라리 논으로 조성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정도 면적이면 다양한 경관의 연출에 생물서식지로서 각광받는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조언 했던 적이 있다. 이른바 도심내 습지로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 해리단길은 옛 동해남부선 뒤쪽 2만여의 마을과 상권을 아우르는 이름이다. 낡은 주택을 개조하고, 개성있는 카페와 식당 등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 타켓은 젊은층이다. 그들의 기호 구미에 맞게 지역의 개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골목 곳곳에는 영산대학교 디자인학부 학생들이 그린 그림들이 입혀져 있다. 경계할 일은 마을의 대부분 건축물 층고가 2층 높이 밖에 안되는데, 더러 34층으로 신축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2층 가운데 4층짜리가 들어 온다면 뒤틀리게 되는 것이다.

해리단길 안에 있는 아파트는 연식이 오래된, 주로 1980년대 중반 지어진 5층 높이가 최고 건물이다. 건물의 1층에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위성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주변 고층 아파트의 난립은 일대의 겨울을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마치 부산시민공원 주변 고층아파트처럼 되고 있는 상화이다. 더욱이 겨울시기 고층 건물의 그림자에 의해 상당시간 음지를 강요받게 되는 형국이다.

공원으로 조성된 폐선부지와 아직 손되지 않은 구간,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차라리 이대로가 좋을 듯하다. 손대더라도 주변의 불법경작지 정도만 정비하는 수준이면 한다. 이런 그림 돈을들여서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쑥부쟁이들이 지천이다

역사 앞 멀구슬나무는 이곳의 터주대감이자 상징목이다. 역사내 키큰 은행나무와 더불어

일대는 예전 해운대 609 터다. 주변에 있던 건물들은 지난 2월 철거했다. 대산 들어설 건물은 38층 높이의 숙박시설이다. 609는 한국전쟁 때 성매매 집결지로 형성됐으니 역사가 70년이나 된다. 1971년까지 해운대 인근에 주둔하던 미 609 수송부대에서 이 거리 이름이 비롯됐다. 해운대구가 지난 63609 폐쇄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며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보상가는 평당 3000~5000만 원에 거래되었다. 누군가는 큰돈을 벌었고 벌겠지만 여기서 일하던 그 여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베어진 은행나무처럼 이곳의 아픈 역사는 흔적없이 사라지는 중이다.

인근 마귀족발이란 곳에서 새로 합류한 지인들과 거나하게 마시고

술꾼들과 헤어진 뒤 김교수와 캔맥주 사들고 밤바다에 앉았다. 그리고 나누었던 이야기들 ...위로와 격려, 재회의 덕담까지

그가 있어 고맙다. 사연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형편을 알고 개인적 후원을 해주기도 한다. 이래저래 도움을 많이 받는다. 갚을 날이 있을까.

8.21

헤어져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술기운에 깜빡 졸다 보니 어문 곳에 내리게 됐다. 부암역 ... 버스정류장을 찾으니 ...이거 원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 어느 곳으로 가든 먼저 오는 버스를 타기로 작정했고, 87번이 왔다. 사무실과는 반대방향 ...그리운 이가 사는 곳으로 가는 차였다. 예정에 없던 선택이었다. 치창으로 건너다 보았다.

8.20

사실 결과적으로 본다면 20일에 이어 연속이다. 목요일 제주 올레의 정지혜가 왔었다. 마침 외대 안종영 교수와 약속이 잡혀 있던 터라 동석하여 술마시고 헤어진 다음 덕분애로 향했다. 다행이 없었다. 어쩔거나 이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