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동수원지 상류 수영강입니다. 비교적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원형에 가까운 하천입니다. 하지만 중하류로 가면 이런 모습은 볼 수없습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원형이란 이런 것 같습니다. 낙동강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낙동강의 가을의 이 수영강에서 그려봅니다. 08.10.10
대구 화원동산 입구에 있는 화장실을 배경으로 잡은 장면입니다. 얼핏 보기에 어느 사찰 뒤편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화장실도 저리 만들어 노니 주변 풍경과 제법 잘 어울립니다 . 내부시설도 수준급입니다. 이용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만족스럽습니다. 09.9.15
말 그대로 벽입니다. 09.9.19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치장하는 산자의 마음은 다릅니다. 죽음 역시 자본의 영역이 된지 오래입니다. 무덤의 크기와 장식이 다릅니다. 돈이 없으면 묻히지도 못하고 비석하나 세울 수 없습니다 . 그리하여 화장하고 분쇄되어 허공중으로 사라집니다. 나의 죽음도 생각해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유언은 ? 보다 진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09.10.1 김해주촌 공원묘지
추석 연휴 마지막날 처가집 옥상에서 바라본 낙동강의 저물녘입니다. 북으로부터 철새들이 편대를 이어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대충 헤아린 숫자만 약 4백여 마리 정도 입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가을인가 봅니다 09.10.10
북항 재개발이 천명된 지 제법 오래입니다. 2009 부산 걷기 축제 개막식 준비를 위해 부산항만공사의 도움을 얻어 중앙부두를 답사했습니다. 이미 터파기가 투입되어 철거가 진행중인 곳도 있었습니다. 개항과 더불어 부산의 원도심 해안은 매축되었습니다. 동시에 시민들의 접근은 차단되었습니다. 그 세월이 100년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마지막 모습조차 볼 수 없습니다. 보안 때문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도 폐쇄적 항만 관리입니다. 개막식 축제를 굳이 이곳에서 벌이고자 함은 원도심의 꿈을 열기 위해서 입니다. 11월14일, 북항 중앙부부에서 북항 재개발로 사라지는 북항의 부두 일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민과 만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09.10.15
바람막이 바위 앞에 세워진 벅수인지 하르방인지 ... 크기야 앙증맞을 정도로 작지만 시멘트로 단단하게 고정시켜 놓은 받침돌로 보아 예사 정성은 아닌듯 합니다. 그 넘어 바람언덕의 등대처럼 폭풍 속에서도 길을 인도해줄 어미의 마음인듯 (기장 월전에서 대변 방향 09.10.17)
서낙동강의 달밤 ,09.10.21
가락을 지나며 09.10.24
울산의 명물인 갈가마귀떼들 중 한 무리가 팽나무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09.10.27
양산 배내골 넘어가는 1051 지방도에서 널밭고개 방향 임도 넘어 토곡산 09.10.30
경부고속도로 언양 부근에서 바라본 신불산 자락 09.11.1
1960년대 서독에 파견된 광부들이 송금해 온 달러는 경제개발의 밑거름이 됐다고 합니다.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일할 우리나라 광부 123명이 1963년 12월 21일 에어프랑스 전세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날 때. 광부들 얼굴에는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고 합니다. 약속한 월급은 162달러50센트(기본급). 1인당 GNP가 87달러(62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실업률이 8.1%(63년)에 달하고, 200명 이상의 종업원을 둔 기업이 54개(61년)밖에 안 돼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원파견은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분명 돌파구였을 것입니다. 중졸 이상의 학력과 20세 이상 30세 미만 그리고 탄광근무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에도 불구하고 지원자는 2874명이었습니다. 8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합격한 사람은 367명.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20%나 됐다고합니다. 합격자는 20일간의 탄광훈련, 20일간의 독일어강습을 거친 후 다시 서독 현지에서 3개월의 적응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힘들게 작업장을 배정받았지만 그 작업이라는 것이 간단치 않았습니다. 지하 1000미터에서 뿜어나오는 30도의 지열과 50킬로그램이나 되는 작업도구로 3년 뒤 고국으로 돌아올 때는 대부분 한번 이상 골절상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우려했던 탄광사고도 이듬해 11월부터 발생하기 시작, 돌에 깔려 죽거나 탄차에 부딪혀 현장에서 죽는 사고들이 일어났습니다.
1964년 12월 차관을 구하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인 광원과 1964년 11월부터 파견된 간호사를 찾아 위로의 말을 하다가 “조국이 가난해서…”라는 대목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때는 장내가 온통 울음바다로 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파견된 광부는 1978년 서독정부가 광부수입을 중단할 때까지 줄잡아 7800명이나 됐습니다.
아래글은 독일마을 홈피에 실린 <출처: MBC스페셜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 내용전문> 입니다. 여기서 일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독일을 방문했을 때 본 것 처럼 그런 마을입니다. 다만 산세가 다를 뿐, 어쨌거나 말하고 싶은 내용은 독일마을의 존재가 대한민국의 '슬픈' 현대사의 한 조각이라는 것입니다. 09.11.9
가난에 찌들어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1960년대 젊은이들은 남자는 광부란 이름으로, 여자는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이역만리 타국땅. 독일로 떠났다. 조국에서 못 이룬 꿈을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가족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 남아야 했다. 그리고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1년,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의 제1목표는 경제 발전! 산업화를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돈을 빌려오기란 쉽지 않았다. 이에 박정희는 독일이 간절히 원하던 광산 노동자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3500만 불의 외화 벌이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송금해 오는 금액의 우리나라 총 수출액의 30%에 해당하는거대한 금액이었다. 유학, 돈의 꿈을 품고 떠났지만 그들이 말하는 3년 간의 광부 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40도가 넘는 지하 000미터-3000미터의 작업은‘팬티를 다섯 번을 짜서 입고, 장화 속에 고인 물을 열 번은 쏟아야’ 비로소 끝나는 하루 일과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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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에 해외를 나간다는 것 꿈 같은 일이었다. 당시 공무원이 해외출장을 가려면 박정희 대통령의 사인이 있어야만 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던 것이다. 1진 광부를 데리고 독일에 갔던 당시 노동청 직업안정국장 심강섭씨는 광부들은 소풍가는 아이 같았다고 말했다. 모두들 마음이 들떠있어 당시 독일 대사가 "당신들은 일을 하러 가는 겁니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을 설레게 했던 것은 돈이었다. 당시 광부, 간호사들의 월급은 한국의 6∼7배였으며, 이는 당시 장관의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겐 독일에만 갔다오면 번듯한 집이 생기고, 수 천 평의 논과 밭을 살 수 있으며, 동생들 대학공부까지 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독일행은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황금과 같은 기회를 붙잡은 광부, 간호사들은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독일로 떠났다. 그래서 더 이를 악물고 견디려고 했지만, 독일생활은 눈물의 연속이었다
* 만 마르크를 위하여… 강은자
엄마의 빚을 갚기 위해 독일로 간 강은자 씨는 돈을 많이 버는 게 최대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병원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40kg을 겨우 넘기는 가녀린 몸으로 거구의 독일 환자들을 씻기고,말이 통하지 않아 무조건 달려가야 했다.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한 달에 받는 돈은 600마르크, 자신은 10마르크만 남겨두고 집으로 송금하기 위해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은자 씨는 야간 연장 근무를 뛰고, 주말엔 다른 병원 아르바이트 일까지 했기 때문에, 몸무게는 점점 줄어 40㎏도 채 안나갔다. 하루 3∼4시간씩만 자면서 열심히 일해 무려 만 마르크를 모았다. 독일에 간 지 불과 1년 반 만에천만 원이 넘는 큰돈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목포에 사는 은자 씨 어머니는 은행의 잔고가 모자랐던 탓에 딸이 보낸 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은자 씨는 남은 계약기간 동안 남들처럼 여행을 다니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너무 혹사시킨 탓에 간이 부었고,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 독일에 남은 마지막 한국인 광부, 정용기
63년부터 시작된 독일 광부 파견은 77년까지 총 8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독일의 광산업이 점차 쇠퇴하자, 광산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5년 전만 해도 60∼70명이던 한국인 광부가 이제는 정용기 씨 단 한 명뿐이다. 그는 마지막 광부로 77년에 독일로 건너와 현재 31년째 독일 광산에서 일하고 있다. 광산 내의 유일한 한국인인 그는 광산 내에서도 최고참에 속한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는 말도 통하지 않아 어려움도 많았고, 처음 해보는 광산 일에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다. 광산 탄차를 모는 정용기 씨는 책까지 읽는 여유를 보일 정도로 이제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일도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 9월까지만 가능하다.
* 광부에서 발 관리사로 변신한 이명한
발 관리사 이명한 씨는 현재 5년째 독일 노인들의 발을 주무르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는 광산 일을 그만둔 지 27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막장에서의 끔찍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명한 씨가 광산에서 일을 시작한 지 1년 반쯤 된 어느 날, 석탄을 캐던 중 천장이 무너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해, 큰돌이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이 때문에 그는 갈비뼈가 부러졌고, 그 뼈가 부러지면서 폐로 들어가 생사를 오갈 정도로 큰 수술을 받았던 그는 다행히도 큰 탈 없이 잘 버텨내었다. 하지만, 명한 씨는 더 큰 문제에 직면했다. 산업재해임에도 불구하고, 광산 측에서는 보상을 해줄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상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는 계속해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3년 계약기간도 만료가 되었는데, 독일에서는 명한 씨를 무조건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려고 했다. 고국에 돌려보내면 보상을 해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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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도를 넘나드는 막장의 지열 때문에 팬티를 수십 번을 짜고, 장화에 고인 물을 수 차례 버리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날카로운 톱니가 돌아가는 광산의 대형기계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도, 이들은 40년 전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인생 최대의 기회였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에겐 젊은 날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3년 계약이 끝낸 광부와 간호사들은 자신의 꿈을 찾아 미국, 캐나다, 스위스 등 전 세계로 흩어졌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간 곳은 미국과 캐나다로, 한국인이라고는 유학생 서너 명이 전부였던 곳에 수 백 명의 광부, 간호사들이 정착했다. 한국인 최초로 대형 슈퍼마켓을 열고, 한국 음식점을 열고, 한인타운을 만드는 등 미주, 유럽 한인 사회의 기초를 세웠다. 이민 사회의 성공 신화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이었던 것이다.
사업가로, 교수로, 화가로, 의사로, 자신의 꿈을 이룬 광부, 간호사들은 외국인 노동자로 독일땅을 밟아 이제는 사회의 중심으로서 자리 매김을 단단히 하고 있다. 이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목표를 이루기 위한 40년의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가수가 되고 싶어 독일로 간 사나이, 박종선라인강 근처의 한 술집에서는 밤이 되면 한국 노래가 흘러나온다.광부 출신 가수 박종선 씨의 노래 소리다. 그가 주로 부르는 음악은 올드팝과 한국의 발라드로 술집을 찾은 사람들은 종선 씨의 노래에 맞춰서 매일 밤 흥겹게 춤을 춘다.
종선 씨는 어릴 적부터 가수가 꿈이었다. 하지만 정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뼈대있는 집의 아들이었던그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그는 가수가 되고픈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탓에 광부로 지원했다.
그는 힘든 광산 생활을 하면서도 가수의 꿈을 접을 수 없었고, 마침내 음악에 관심이 있던 광부들을 모아 광부 밴드를 조직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함께 공연을 다녔다. 아직까지 커다란 무대에 서본적은 없지만, 고국에서 펼치지 못했던 꿈을 독일에서 이뤘다. 작지만 매일 밤 그의 노래를 들으러 와 주는 사람들이 있어 독일에서의 생활이 행복하기만 하다.
* 독일 생활 40년을 투쟁처럼 살아온 이민자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의사의 꿈을 가지고 독일로 떠났던 이민자씨. 하지만 그녀를 포함해 대학을 졸업한 한국 간호사들의 주 임무는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거나, 100kg이 넘는 환자들의 목욕을 시키는 일이 전부였다. 독일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 한국 간호사, 그래서 그녀는 독일인도 하기 힘들다는 의과 공부를 시작했다.
15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동양 여자가 독일 와서 의사가 되겠다고 하자 독일인들 모두 그녀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고, 독일인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이를 악물었다. 엉덩이에진물이 날 때까지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런데 민자 씨가 일하던 병원에서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 독일에서 추방시키려 했다. 다른 한국 간호사들도 그녀처럼 의사공부를 한다고 할까봐 내린 조치였다.정신병자로 몰리고, 엉덩이에 진물이 날 때까지…. 의사가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야했던 그녀의 독일 생활은 삶이라기 보다 오히려 투쟁 그 자체였다.
* 자유를 찾아 떠난 말괄량이, 송금희
배고픔의 설움을 모르던 부자집 소녀 송금희 씨는 항상 조국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좋은 반찬은 항상 오빠가 먼저지? 왜 자전거는 남자들만 타야 하는 걸까?" 여자이기 때문에 제약이 많았던 조국이 답답했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고, 맘껏 자전거를 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유를 찾아 무작정 독일로 왔다.
그녀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독일의 시골마을에서 14살 연하의 남편과 알콩달콩 살고 있다. 조국의 답답함이 싫어서 독일로 떠났지만, 여전히 그녀는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풍물을 연주하며한국적인 것에 젖어 산다. 그래서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처럼 느껴진다.
30년을 넘게 독일 음식을 먹은 남편을 나물반찬에 김치찌개를 즐겨먹는 토종 한국 입맛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또 그녀는 매주 한 번씩 마을의 독일 주부들에게 풍물을 가르쳐 주며 살아가고 있는데….
* 박사가 되기 위한 40년 간의 전쟁, 심동선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침대에 누워서 자본 적이 없는 심동선 씨. 그는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 논과 밭을 다 팔아버린 아버지를 위해서 독일로 광부로 갔다. 하루 8시간 광산 근무도 모자라 밤 연장 근무까지 해가면서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고향의 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노력 때문에 고향집도 형편이 나아지고, 그의 생활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선 씨는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가난 때문에 채 이루지 못한 자신만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이 마흔을 넘긴 그는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남보다 두 배를 더 노력해야 했던 그는 10년 동안 침대에 누워서 자본 적도 없었고, 마침내 그는 외국인으로 독문학 박사학위를 따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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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3년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이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배추 대신 양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고, 한국 노래를 들으며 향수를 달래는 것이 광부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어쩌다가 기숙사에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흘러나오면 눈물바다가 됐다. 고국이 너무 그리워 중도에 포기한 채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았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간호사들은 향수병에 걸려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는데, 그 수가 무려20 여명에 달했다. 잘 적응한 간호사들에게도 문제가 생겼다. 뚱뚱한 독일인들을 수십 년 간 간호하느라 허리와 관절에 무리가 온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수술을 받았다.기계 때문에 손가락 한두 개 잘려나간 것은 광부들에겐 예사 일이었고, 함께 지냈던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도 지켜봐야 했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한국의 교민 수는 3만여 명에 이르는데, 교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천여 명의 광부,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3년만 일해서 고국에 돌아온다던 3천여 명의 광부, 간호사들은 왜 아직도 독일에 살고 있는 것일까?
* 사업가로 성공한 남정균
독일 장애인 아이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등하교를 시켜주는 게 남정균 씨의 하루 일과이다. 독일 카셀 지역에서 가장 큰 스쿨버스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이기도 한 그는 독일인들도 부러워 할 정도의 사업가로 크게 성공했다.
3년만 일하고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정균 씨의 계획은 아직도 보류중이다. 독일에서의 사업을 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데다 이제는 자녀 교육이 걱정이다. 독일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들과 딸이 대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자녀들이 독일 땅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이 되기도 한다.
* 꿈에도 못 잊을 고국. 영원한 이방인 이원명
사업이 어려워진 아버지로 인해 갑자기 대학을 그만 두게 된 이원명 씨는 "3년만 열심히 일해 사업 밑천을 벌어서 고국에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던 게 벌써 38년 전의 일이다. 그는 가족들에게 송금하면서도 열심히 돈을 모았고, 3년 후면 그 꿈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마지막 3년째 되던 해 한국 간호사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행복한 독일 생활은 1년이 전부였다.
부인은 힘든 간호사 생활과 향수병을 앓아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금방 낳을 것 같던 아내의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몸이 아픈 아내를 돌봐야 했던 그는 안정된 직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취직을 하게 되면 아내에게 밥과 약을 챙겨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같이 왔던 광부 친구들은 계약기간이 끝나 모두 미국과 캐나다 등으로 떠났지만 그는 갈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아내를 포기하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38년 간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고 있다. 이민을 가서 성공한 친구들과는 달리 원명 씨는 정부 보조금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아내의 병은 여전히 차도가 없고, 이젠 그마저도 정신과 치료를 권고받고 있다.
* 저도 외국인 노동자였습니다. 나이팅게일 박경옥(현재 한국거주)
64년과 70년, 각각 3년과 4년씩 독일에서 일했던 박경옥 씨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한국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40년 전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간호사로서 정년퇴직을 한 경옥 씨는 아직까지도 병원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환자들을 돌보는가 하면, 아픈 외국인 노동자의 소식을 들으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달려간다. 아파도 돈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를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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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BC스페셜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 내용전문> | |
가끔 세상 어떤 조경도, 논이며 밭에 괴어 놓은 저 축대를 흉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틈새에 절로 자라는 양치과 식물이며 이끼를 머금은 돌 하나 하나가 정겹기 그지 없습니다. 09.11.22
황령산 남쪽 자락 어느 농원 09.11.27
부산민주공원 길 09..12.2
민락수변공원에서 교각 사이 들어와 있는 그림 한점 ..처음으로 광안대교를 다시 보다 09.12.6
술자리가 많은 연말입니다. 밤 늦은 귀가 길, 놀이터 바닥에 무수히 찍혀 있는 발자국들을 봅니다. 우리집 막둥이의 발자국과 또래들과 뛰놀며 던졌던 말들이 미끄럼틀과 철봉 시이소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막내가 보고 싶어 얼른 집으로 갑니다. 09.12.12
범어사 종무소에서 바라 본 계명만월 -계명봉 어깨에 뜬 둥근 달이 참 보기 좋습니다. 2010.1.1.
빈 광장입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올 수 있는 곳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포동이나 서면 등에 이런 곳이 있다면 참으로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 질텐데 ... 2010.1.30
오륙도 SK뷰 아파트 옥상에서 2010.2.3
진주수목원 가는 길 일반성면 거기 무인역 옆 느티나무 정자 아래 마을사람 서너이 봄물 든 철로변에서 움트는 봄을 마십니다. 2010.2.7
봄을 기다림니다. 아니 봄을 향해 다가서고 있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이 비탈에 누군가 고랑을 타고 씨를 뿌리겠지요. 2010. 2.9
겨울비가 며칠째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내일모래가 설입니다. 눈밭을 달리는 귀향길의 설날입니다. 이런 봄이 시나브로 올 것입니다. 개불알풀이 지천으로 열린 김해 한림 모정입니다. 화포천 옆이지요. 그날을 나눔니다. 2010.2.12
산 넘어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온다네 / 들넘어 고향 논밭에도 봄이 온다네 /아지랑이 속삭이네 / 봄이 찾아온다고 박인희씨의 노래(봄이 오는 길)가 생각나는 때입니다. 거기다 박재란씨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가 절로 흥을 거릴 때입니다. 황량한 계절에 보리밭은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보리가 파릇파릇 돋아나고 솟구쳐 오를 때 봄은 이미 한참이나 왔을 때입니다. 그런 설레이는 봄을 생각합니다. 2010.3.4
김해 마사에서 한림 모정 사이 경전선이 지나는 터널입니다. 시방 터널 속이라면 꾸준히 전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 새로은 세상이 있습니다. 또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손 내밀 사람도 있을 지 모릅니다. 힘 내시기 바람니다. 2010. 3.10
이기대 답사길, 밭골새 근처에서 바위를 삼키는 파도들을 보았습니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고, 점차 사나워던 파도의 몸짓을 한동안 살펴보았습니다. 문득 태풍이 올 때면 이 바다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 집채 만한 파도? 그날을 기다려 봅니다. 2010.3.25
Gallagher And Lyle- Layna
올드팝매니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