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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by 이성근 2021. 11. 16.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l 열린책들 l2021.11

 

라시드 할리디 RASHID KHALIDI-세계적인 중동 문제 전문가이자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역사학자. 1948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유엔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수석 총무(1962~1965)를 맡으면서 3년간 한국의 서울미국인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70년에 예일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1974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정치인, 판사, 외교관, 언론인 등을 배출한 팔레스타인의 명문 가문 할리디가() 출신으로, 대대로 가계 전체가 팔레스타인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종고조부 유수프 디야 알할리디는 1870~1906년 사이 세 차례나 예루살렘 시장을 지냈고, 큰아버지 후세인 알할리디 역시 예루살렘 시장(1934~1937)을 역임했다. 저자 본인도 1967년 전쟁 당시 휴전을 교섭하던 유엔 회의장에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1992년에는 오슬로 회담의 일환으로 진행된 워싱턴 교섭에 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 현대 아랍 연구 담당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EDWARD SAID PROFESSOR로 재직 중이며 팔레스타인 연구 저널JOURNAL OF PALESTINE STUDIES공동 편집인이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PALESTINE IDENTITY, 기만하는 브로커들BROKERS OF DECEIT, 쇠우리IRON CAGE7권의 저서가 있고, 뉴욕 타임스, 보스턴 글로브 등 유력 매체와 여러 학술 저널에 글을 쓰고 있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론

1 첫 번째 선전포고, 1917~1939

2 두 번째 선전포고, 1947~1948

3 세 번째 선전포고, 1967

4 네 번째 선전포고, 1982

5 다섯 번째 선전포고, 1987~1995

6 여섯 번째 선전포고, 2000~2014

결론: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세계는 유랑 끝에 돌아온이스라엘의 서사에만 공감하고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의 서사는 외면해 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불타는 마을을 아버지와 아이가 황급히 빠져나오고 있다. 사진 출처 Pixabay

 

출판사 서평

팔레스타인 명문 집안 연구자, 한국과의 인연

라시드 할리디는 국내에 거의 처음 소개되는 학자이지만, 이미 세계적인 중동 문제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CNN, BBC 등 언론에 종종 인터뷰이로 등장하고, 팔레스타인의 정체성Palestinian Identity등 그의 주요 저술들은 20세기 중동 사회의 민족주의ㆍ식민주의 연구자들의 필독서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이력이 놀라운데, 저자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정치인, 판사, 외교관, 언론인을 배출한 팔레스타인의 명문 가문 할리디가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현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종고조부 유수프 디야 알할리디는 1870~1906년 사이 세 차례나 예루살렘 시장을 지냈고(예루살렘, 몰타, 이스탄불, 빈 등에서 교육받았다), 큰아버지 후세인 알할리디 역시 예루살렘 시장(1934~1937)을 역임했고, 영제국의 탄압을 받아 외딴 섬 세이셸 제도에서 유형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서문에는 저자가 초기 시온주의 운동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할리디 도서관을 애용했다고 밝히는데, 이 도서관은 1899년 저자의 할아버지가 증조 할머니의 유산으로 예루살렘에 세운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사설 도서관이다(팔레스타인 문학·역사에 관한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한편 할리디의 아버지 이스마일 라기브 알할리디는 19년간 유엔에서 일했고(유엔 정치안보이사회국 소속), 아랍-이스라엘 충돌이 벌어질 때마다 사무총장을 보좌하며 안보리 회의의 실무를 담당했다(덕분에 저자도 1967년 전쟁 당시 휴전을 교섭하던 유엔 회의장에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할리디 본인도 1982년 이스라엘 공군의 베이루트 공습 당시 가족들과 함께(아내와 두 딸, 어머니, 남동생) 현장에 있었고, 서베이루트 포격과 포위 공격이 진행된 10주간 아이들을 돌보면서 물과 전기, 신선 식품 부족이 부족한 상황과 쓰레기 태우는 냄새를 견뎌 냈다. 1992년에는 오슬로 회담의 일환으로 진행된 워싱턴 교섭에 팔레스타인 대표단 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한국과의 인연이 눈에 띄는데, 할리디의 아버지가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수석 총무(1962~1965)를 맡으면서 한국에 근무할 당시, 할리디는 3년간 이태원의 서울미국인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한국어판 서문에는 그 시절에 일본 식민 지배에 맞선 한국인의 투쟁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다고 밝히고 있다.

 

정착민 식민주의

흔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은 같은 땅에 대해 각자 권리가 있는 두 민족 사이에 벌어진 충돌로 묘사된다. 일종의 원조 논쟁이다. 수천 년 전의 선조의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측(유대인)과 그 땅을 수백 년간 점유해 온 측(아랍인), 모두에게 일정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대로라면 과거에 선조들이 어떤 지역을 점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후손들이 그 지역의 실점유자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구려가 한때 만주 지역을 지배했다고 지금에 와서 중국에 그 땅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을까). 할리디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진실을 똑바로 볼 것을 주문한다. 시온주의가 내건 종교적 명분이나 역사적 근거는 착시에 불과할 뿐, 이 전쟁의 본질은 언제까지나 식민주의였음을 지적한다. 다만 팔레스타인의 경우엔 식민 본국(영국인)이 아닌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정착민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특별할 뿐이다.

 

또한 팔-이 분쟁은 최악의 경우에는 유대인이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고국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자 아랍인과 무슬림이 광신적이고 완강하게 증오한 결과로 묘사된다.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 이산을 겪고 핍박당하는 민족이라는 시온주의의 서사는 성경을 끼고 사는 영국과 미국의 개신교도들에게대단히 매혹적이었다. 또한 미국으로 몰려든 유대인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1880~1920년 사이에 미국의 유대인 인구는 25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현대의 정치적 시온주의는 미국에서, 유대인 공동체 내부와 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깊이 뿌리를 내렸다.

 

결국 영국은 밸푸어 선언(1917)으로 유대 국가를 꿈꾸던 시온주의 운동의 손을 들어 주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94퍼센트의 아랍 주민 대신, 6퍼센트의 유대인에게 땅의 권리를 넘겨준 셈이다. 이후 유대인이 새로운 정착민으로 순차적으로 밀려들어오고, 쫓겨난 원주민들은 팔레스타인 외곽과 주변 아랍 국가의 난민촌에 둥지를 틀고,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투쟁에 돌입한다. 그렇게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정착민 식민주의가 당대의 강대국(영국과 미국)의 지원 아래 원주민을 몰아내려고 선전포고를 하고, 100년간 전쟁을 이어온 것이 바로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평화를 바라는데,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퇴짜를 맞을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적처럼 그동안 시온주의가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시온주의와 식민주의 기획

할리디는 이 책에 시온주의의 식민주의 기획 가운데 몇 가지 특징을 짚어낸다.

첫째, 원주민을 안심시키기. 시온주의 창시자 헤르츨은 1899년 예루살렘 유력 정치인 유수프 디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오더라도 걱정할 게 없다고 교묘한 주장을 편다. 오히려 유대인의 이민을 대거 허용하고, 우리(유대인)의 안녕과 부를 위해 노력하면 그들(팔레스타인 주민)의 안녕과 재산도 늘어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민주의자들이 원주민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내세워 온 빤한 논리였다. 헤르츨은 다수의 유대인이 지적 능력과 경제적 재능, 사업 수단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오도록 이민을 허용하면, 이 땅 전체의 안녕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후 역사가 증명하듯, 시온주의의 목적은 아랍인(원주민)과 유대인(정착민)의 공존이 아니라, 오로지 유대인이 독점하는 유대 국가의 건설에 있었다.

 

둘째, 원주민의 정체성과 문화 부정하기. 1969년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인 같은 건 없고,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발언으로 큰 논란을 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비가시화해 온 역사는 뿌리가 깊다. 할리디에 따르면, 시온주의 도래 이전에 이미 팔레스타인은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으며 후진적인 땅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골몰하는문헌들이 다수 등장했다. 유목 생활을 하는 소수의 베두인족이 배회하고, 그들은 뚜렷한 정체성이 전혀 없고 땅에 대한 애착심도 없었다는 식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사람 없는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주자.팔레스타인은 그곳에 정착하러 온 이들(유대인)에게 주인 없는 땅이었다.

 

셋째, 원주민의 경제력과 인구를 희생시키는 급진적인 사회공학. 1차 세계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토착 사회의 해체는 유대인 정착민의 정치적 자율성과 경제력을 높이는 반면, 원주민의 권리는 제한하고 경제적 차별을 가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영국 위임통치 당국은 유대인 정착민에게 국가에 준하는 자치 구조를 허용했고, 경제 부문에서도 아랍 노동자를 배제시키고 해외로부터 막대한 양의 자본을 유대인에게만 몰아주었다(1922년부터 1947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경제는 매년 13.2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인구 비율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차별과 탄압으로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수는 줄고(1936~1939년 아랍 대반란으로 팔레스타인 성인 남성의 10퍼센트가 죽거나 다치고 추방당했다), 정착민 유대인의 인구는 대폭 늘었다. 특히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온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인구 비율은 1932년에 18퍼센트에서 1939년에 31퍼센트로 크게 증가했다. 그리하여 1948년이 되면,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에 필요한 인구학적 임계점과 군 병력이 마련되었다. 마침내 시온주의 민병대에 이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인구의 절반 이상을 쫓아냄으로써 시온주의의 군사적ㆍ정치적 승리가 완성되었다.

 

넷째, 무자비한 폭력과 응징. 시온주의 운동과 이스라엘 국가 편에는 언제나 거대한 군대가 있었다. 1939년 이전에는 영국군, 1947~1948년에는 미국과 소련의 지원, 1950~1960년대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있었으며,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는 미국의 무제한적인 지원 외에도 이스라엘의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의 작은 소요나 폭력(시위, 로켓포, 테러)에도, 무자비한 폭력으로 응징했다. 비례 원칙을 넘어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이른바 다히야 원칙(이스라엘 공군이 약 907킬로그램 폭탄 등 살상 무기로 파괴한 베이루트 남부 교외의 이름에서 따옴)이다. 2008년 이스라엘의 북부 사령관 가디 에이젠코트는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포를 발사하는 모든 마을에서…… 불균형적인 무력을 가해서 막대한 피해와 파괴를 야기할 것이다. 이건…… 정해진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평화는 가능할까?

할리디에 따르면, 정착민 식민주의와 원주민의 대결은 결국 세 가지 경로를 걷는다. 1) 아메리카 인디언과 오스트랄라시아 원주민처럼 완전히 밀려나고 삭제된다. 2) 알제리처럼 식민 지배(프랑스)를 깨뜨리고 독립한다. 3)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소수 정착민과 아슬아슬하게 공존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이 중 어느 길도 쉽지 않다. 만약 18세기나 19세기였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이 소수였거나 오스트랄라시아와 북아메리카 토착민처럼 완전히 몰살되었다면시온주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몰아내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등장한 시온주의는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표현대로 너무 늦게 도래했다. 또한 오늘날 인구 규모 면에서 이스라엘인의 수와,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까지 모두 합친 숫자가 엇비슷하다. 그 출발이야 어찌됐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100년간 계속된 전쟁이 그 증거다.

 

이제 저자는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목표를 어디에 둬야 할지 공구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이스라엘이 점령을 종식하고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번복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에 빼앗기고 남은 22퍼센트 땅에 아랍권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해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 국외에서 사는 나머지 절반의 팔레스타인인을 고국으로 귀환시키는 것, 팔레스타인 땅 전역에서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민주적인 두-민족국가를 창설하는 것(또는 이 선택지들의 조합이나 변형)도 가능하다. 물론 어느 것도 쉽지 않고, 특히 이스라엘이 동의할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이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팔레스타인 내부의 자성도 요구된다. 지난 시기 동안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당대의 지정학적 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내부 분열과 무모한 저항에 몰두했다. 저자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서사에 맞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지금의 호기를 놓치기 말고, 주변 아랍인과 세계 여론, 심지어 이스라엘 여론에 호소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할 것을 주문한다. 여전히 수많은 팔레스타인 민중이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기본권을 침해당하고 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인은 물론 이스라엘에도 불행한 일이다. 저자는 상호 인정과 평등, 정의를 원칙으로 삼아 국제 사회를 팔레스타인의 편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요청한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가운데서도 오직 이런 정당성을 손에 넣을 때에만 팔레스타인이 세계인의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47월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 지구 슈자이야의 모습. 팔레스타인 저항단체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점령한 이후 이스라엘은 200820122014년 세 차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열린책들 제공

 

 

책속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쫓아내고 그들의 고국을 다른 이들의 민족적 고국으로 바꾸기 위해 벌어지는 이 전쟁은 해묵은 싸움의 일부가 아니라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의 부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유서 깊은 유럽의 극악한 반유대주의에 대응해서 등장한 시온주의 운동은 정착민 식민주의 기획인 동시에 민족주의 기획이었습니다.--- p.10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에 따라 유대인 이민자가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가 1932년 총 18퍼센트에서 193931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1948년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에 필요한 인구학적 임계점과 군 병력이 마련되었다.--- p.25

 

이 분쟁은 기껏해야 같은 땅에 대해 각자 권리가 있는 두 민족 사이에 벌어진, 비극적이지만 간단한 민족 충돌로 묘사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유대인이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고국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하자 아랍인과 무슬림이 광신적이고 완강하게 증오한 결과로 묘사된다.--- p.26

 

팔레스타인은 그곳에 정착하러 온 이들에게 [주인 없는 땅]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름과 형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헤르츨은 유수프 디야에게 보낸 편지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비유대인 주민]이라고 지칭했다. 당시 그곳 주민의 약 95퍼센트였는데 말이다.--- p.28

 

밸푸어 선언은 전면적인 식민지 충돌의 신호탄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켜 배타적인 [민족적 본거지]의 건설을 목표로 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지는 공격의 시작이었다.--- p.49

 

히틀러의 부상은 팔레스타인과 시온주의 양자의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이 입증되었다. 1935년 한 해에만 6만 명이 넘는 유대인 이민자가 팔레스타인으로 왔는데, 이 숫자는 1917년 이 땅에 살던 유대인 인구 전체보다 많은 규모였다.--- p.68

 

하인 하나가 들어오더니 방금 BBC 뉴스에 유엔 총회가 팔레스타인 분할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는 발표가 나왔다고 전했다. 아버지가 트랜스요르단 국왕과 만나던 19471129일 바로 그 순간에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분할한다는 결의안 제181호의 역사적 표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p.93

 

팔레스타인의 종족 청소는 1948515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기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p.114

 

나크바는 팔레스타인과 중동의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나크바 이후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이 천 년이 훌쩍 넘도록 이어진 땅?아랍인이 다수인 땅?에서 유대인이 실질적 다수를 차지하는 새로운 국가로 바뀌었다.--- p.117

 

실제로 동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의 90퍼센트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현대의 정치적 시온주의는 미국에서, 유대인 공동체 내부와 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깊이 뿌리를 내렸다.--- p.121

 

1966년까지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엄격한 계엄령 아래서 살았고, 가진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이스라엘 국가가 합법으로 간주한 수용을 거쳐 가로챈 이 땅은 경작 가능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는데, 유대인 정착촌이나 이스라엘토지공사에 양도되거나 유대민족기금에 통제권이 넘어갔다.--- p.126

 

그날 우리가 목격한 광경은 새로운 중동의 축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현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기갑부대가 대열을 맞춰 진격하고, 미국은 외교적 엄호를 해주고 있었다.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이 축이 작동하고 있다.--- p.152

 

바시르가 이끄는, 레바논부대라고 불리게 되는 집단에 포위당한 난민촌은 19768월에 괴멸되었고, 주민들은 전부 쫓겨났다. 내전을 통틀어 아마 단일 사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학살 사건으로 2,0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 유치원에서 일하던 교사 두 명도 이런 식으로 살해당했다.--- p.192

 

레바논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26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10주간 벌어진 전투에서 대부분 민간인인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 19,000여 명이 사망하고 3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p.210

 

인티파다는 시위와 나란히 파업, 불매 운동, 세금 납부 거부에서부터 다른 창의적인 형태의 시민 불복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 항의는 때로 폭력 사태로 바뀌었는데, 대개 비무장 시위대나 돌멩이를 던지는 젊은이들에게 군인들이 실탄과 고무총탄을 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불이 붙었다.--- p.252

 

1993년 이후 수십 년간 가자 지구는 단계적으로 나머지 세계와 차단되었다. 지상에서는 군대가, 해상에서는 이스라엘 해군이 겹겹이 에워쌌다. 가자 지구를 출입하려면 거의 발행되지 않는 허가증이 필요했는데, 가축우리 비슷한 대규모 요새화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했다.--- p.300~301

 

팔레스타인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데 대해 오랫동안 저항한 사실을 보면, 역사학자 고 토니 주트의 말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너무 늦게 도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특유의 분리주의 기획을 이미 앞서 나가고 있는 세계에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p.343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시온주의가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p.345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국가 편에는 언제나 거대한 군대가 있었다. 1939년 이전에는 영국군, 1947~1948년에는 미국과 소련의 지원,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있었으며,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는 미국의 무제한적인 지원 외에도 이스라엘의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다.--- p.348

 

시온주의가 유대교와 유대인이라는 역사적 민족을 아주 다른 존재?근대 민족주의?로 변화시킨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생각하는 팔레스타인에 [민족적] 소속감을 지닌 한 민족으로 여긴다는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 p.353

 

 

시온주의 식민기획과 끝나지 않을 팔레스타인 전쟁

식민주의에 분칠한 시오니즘 치밀한 기획

·미 지정학적 이익 뒷배 삼아 승승장구하는 이스라엘

원주민 말살불가능해 분쟁 지속될 터

오스만튀르크 제국에서 예루살렘 시장 등을 지낸 유수프 디야는 1899년 근대 시오니즘 운동 창시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에게 편지를 보냈다. 유수프 디야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주권 국가를 세운다는 시온주의 구상은 기독교도·무슬림·유대인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고,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유대인의 지위와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무엇보다 그는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헤르츨은 곧 답장을 보내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이민을 허용하면 이 땅 전체의 안녕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것이라며 우리의 안녕과 부를 위해 노력하면 그들의 안녕과 개인의 재산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헤르츨은 팔레스타인의 비유대인에 대해 도대체 누가 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자고 생각하겠습니까?”라고 유수프 디야가 묻지도 않은 문제를 거론했다. 팔레스타인 원주민 추방은 시온주의가 야기한 팔레스타인 분쟁의 핵심 문제인데, 시오니즘 창시자는 이를 이미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수프 디야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의 저자 라시드 할리디의 종고조부, 즉 고조부 형제다. 할리디는 이 책에서 가문이 겪은 팔레스타인 분쟁의 경험을 양념 삼아 시온주의와 팔레스타인 분쟁을 파헤쳤다.

 

정착민 식민주의는 이 책을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주권 국가를 세운 시온주의는 분칠을 한 식민주의라고 지은이는 시종일관 규정한다. 분칠이란 그 땅에 유대인의 역사적 근원이 있다며 식민주의 본국민이 아닌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이 입식의 주체가 됐다는 것이다. 이런 식민주의를 관철하는 또 다른 가공된 서사는, 유대인이 입식하기 전 팔레스타인은 텅 빈 땅에 불과했고 팔레스타인 원주민 혹은 팔레스타인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논지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반박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하나는 현재의 유대인들이 2천년 전 조상이 살던 땅에 역사적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할 근거가 있냐는 차원이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역사학 교수 슐로모 산드는 저서 <유대인의 발명>에서 현재의 유대인은 고대 이스라엘 주민과는 역사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펼쳐 큰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현재의 유대인은 로마시대 전후 유대교로 개종한 지중해 지역 주민 후손들이며 혈통적으로 보면 오히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고대 이스라엘 주민과 관계가 깊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은 기독교 문명이 만들어낸 타자들이며 유대인성이란 기독교의 박해 속에서 만들어진 민족성이라고 그는 규정한다. 그의 논쟁적인 저서 <유대인의 발명> 등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으나 <유대인, 불쾌한 진실>(2017)이라는 에세이성 논평집이 번역·출판됐다.

 

또 다른 차원은 유대인 입식과 이스라엘 건국, 몇 차례의 전쟁 등으로 이어진 과정을 국제법적인 기준과 정신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할리디는 이런 관점에서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주권국가를 인정한 밸푸어 선언이후 진행된 팔레스타인에 관한 국제 결의와 합의들을 조망한다. 저자는 이 정착민 식민주의가 여섯 차례 선전포고를 통해 구체화·현실화됐다고 진단한다.

 

첫 선전포고는 밸푸어 선언이다. 두번째는 1947년 팔레스타인을 분할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인정한 유엔 결의안 181, 세번째는 1967‘6일전쟁뒤 승전한 이스라엘의 점령지 반환을 규정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다. 네번째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다섯번째는 1987~1995년의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인 인티파다에 이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인정하는 두 국가 해법의 오슬로 평화협정, 여섯번째는 2000년 이후 2차 인티파다 등 팔레스타인 안팎의 저항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공식 인정하는 한편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의 관계 정상화를 밀어붙인 아브라함 협정이다.

 

할리디는 이런 국제 결의와 협정들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인정한다는 명분을 취하나, 본질은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식민 영역을 확대하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안보리 결의안 242호에는 이스라엘군 철수를 공인된 안전한 국경의 창설과 연계해 국경을 확장할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조항이 실렸다. 허점을 이용해 점령지를 계속 보유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오슬로 평화협정 역시 점령지에 건설된 이스라엘 정착촌 인정과 확대의 근거가 됐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할리디는 이스라엘이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은 결국 영국에 이은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 관철이 배후이기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미국이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중재자로 남아 있는 한 팔레스타인 주민에게 공평한 분쟁 해결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의 분쟁 해결 프레임을 벗어던지라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처지는 갈수록 악화됐지만, 국제 여론은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좌파민족주의에 입각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하마스 운동은 파산했다고 보고, ‘보이콧·투자철회·제재운동 같은 새로운 운동들이 이스라엘을 더 위협하고 국제 여론을 선도하는 현실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시온주의라는 정착민 식민주의는 팔레스타인 땅에 자리잡기는 했으나,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표현대로 너무 늦게 도래했다”. 오스트레일리아나 아메리카에서처럼 원주민을 말살하기에는 늦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100년간 전쟁이 계속됐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저자는 희망을 말한다.

 

저자의 주장은 근본주의적이기는 하나 결국은 근원적인 현실주의를 천착한다. 미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할리디는 청소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1960년대 한국에서 살았는데, 이런 경험을 비롯한 피식민국가들에 대한 공감이 근원적 현실주의를 천착한 바탕인 셈이다./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70여 년 동안 이어진 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왜 끝나지 않는가/ 저자 김재명|미지북스 |2019.05

 

김재명-지구촌 분쟁 현장을 두루 취재 보도해온 국제분쟁 전문가. 냉전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지은이는 서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념 대립에 몸살을 앓는 한반도 상황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문제의식은 8·15 해방 정국에서 극좌나 극우라는 이념적 편향에 치우치지 않고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중간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경향신문][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는 동안 이를 집중 취재 보도했다.

 

한반도 분단 극복에 대한 관심이 국제분쟁에 대한 관심으로 넓어지면서 마흔 넘어 신문사를 그만두고 국제정치학이란 새로운 도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 뉴욕시립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이어 귀국 뒤 국민대학에서 정의의 전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레시안의 기획위원,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일하면서 성공회대학(겸임 교수)에서 '국제 질서의 이해', '국제분쟁과 국제기구'(이상 학부), '국제분쟁과 세계질서'(대학원) 등의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 20여 년 동안 국제분쟁 전문가로 지구촌의 여러 분쟁 지역을 찾아다녔다.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보스니아, 코소보), 중동 지역(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동티모르, 캄보디아, 베트남,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쿠바, 볼리비아, 페루 등지의 유혈 분쟁을 취재 보도해왔다.

 

특히 지난 2000년부터 거듭된 중동 현지 취재를 통해 유혈 분쟁으로 몸과 마음을 다친 어린이와 여성, 집과 농토를 잃은 난민, 중동 평화의 암초로 꼽히는 유대인 정착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치 군사 지도자와 지식인 등 분쟁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글로 담아내는 데 집중해왔다.

지은 책으로 오늘의 세계 분쟁(2015, 개정판), 시리아 전쟁(2018),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2016), 석유, 욕망의 샘(2007), 20세기 전쟁영화가 남긴 메시지(2006),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2003) 등이 있다.

 

 

목차

연표

개정 증보판에 부쳐

 

1부 왜 눈물의 땅인가

1장 팔레스타인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저항

2장 왜 예루살렘인가: 분쟁의 도시인가, 평화의 도시인가

 

2부 좌절과 분노의 현장

3장 가자지구, 하늘만 뚫린 거대한 감옥

4장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팔레스타인

5장 팔레스타인 어린이와 여성들

6장 중동의 우울한 초상, 팔레스타인 난민

7장 유대인 게토가 떠오르는 분리 장벽

8장 유대인 정착민, “이곳은 신이 주신 약속의 땅

9장 팔레스타인의 장기수들

10장 팔레스타인의 내부 갈등을 키우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11장 이스라엘의 전쟁범죄

 

3부 이 스라엘-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재

12장 디아스포라, 시오니즘, 밸푸어 선언

13장 건국과 테러의 어두운 그늘

14장 하마스는 왜 투쟁의 깃발을 올리는가

15장 또 다른 반이스라엘 투쟁 조직: PFLP, 지하드, 헤즈볼라

16장 이스라엘의 고민거리, 아랍계 시민

17장 이스라엘은 민주국가인가

18아랍의 봄은 이스라엘에겐 겨울

 

4부 중 동, 미국, 그리고 평화의 전망

19장 실종된 중동 평화 이정표

20장 중동 협상의 뜨거운 감자들

21장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착

22장 이스라엘과 중동의 군사력 비교

23장 이스라엘에만 허용된 핵무기

24장 이스라엘의 병역거부자들

25장 이스라엘의 평화주의자들

 

5부 팔 레스타인의 눈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6장 작은 변화 속에 비치는 희망의 빛

27장 팔레스타인의 눈물이 그칠 날은

 

참고 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눈물과 통곡의 땅, 팔레스타인

포연이 가시지 않은 처참하게 무너진 집과 사원, 이전의 자유조차 박탈해버린 8미터 높이의 분리 장벽, 집도 없이 난민촌을 떠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앞에 호화롭게 지어진 유대인 정착촌, 이스라엘의 포격으로 부모를 잃고 아이를 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물, 가족의 생계를 위한 희망이 잿더미로 변한 올리브 밭 앞에서 무릎 꿇은 농부, 2등 시민으로 온갖 불평등을 감수하며 희망 없이 살아가는 아랍계 청년들…….

 

이것이 10여 차례 팔레스타인 현장을 찾은 지은이의 눈에 비친 이른바 테러와 그에 대한 보복의 현장, 팔레스타인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라고 몰아붙여왔다. 왜 그들은 테러를 일으키는가? 7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일어나는 피의 분쟁은 왜 끝나지 않는가? 지은이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이런 물음에 앞서 우리가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잔인한 파괴의 폐허에 흐르는 눈물과 통곡, 이곳 팔레스타인의 대지라고 말한다.

 

분쟁의 뿌리, 시오니즘

2000년 전 로마제국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유대인들이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 신생국가는 19세기 말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시오니즘)의 결실이었다. 시온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대 예루살렘의 한 언덕 이름이다. 시오니즘이란 그 옛날 예루살렘에 있던 그 언덕을 상징적인 목표지로 삼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것이다. 시오니즘 운동의 창시자인 테오도어 헤르츨은 19세기 오스트리아 언론인으로, 그는 유대인 랍비처럼 종교적으로 엄격하기는커녕 매우 세속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헤르츨은 1894년 드레퓌스 사건(유대인 프랑스 장교를 증거도 없이 독일 스파이로 몰아세운 사건)으로 반유대 정서가 퍼지는 것을 보고 유대인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르츨이 시작한 국가 건설 운동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1차 시오니스트 대회로 이어졌고, 거기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무인지대가 아니었다

시오니스트들이 가고자 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은 무인지대가 아니었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70~80만 명의 아랍인들과 5~6만 명의 토착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만약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온다면 땅을 두고 필연적으로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차 대전 당시 영국은 시오니즘 운동을 재정적으로 돕던 금융계 거물인 로스차일드에게 전비 지원을 대가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이것이 영국 외무부 장관 아서 제임스 벨푸어의 이름을 딴 벨푸어 선언(1917)이다. 그러나 영국은 또 한편으로 오스만제국과 싸우기 위해 아랍인들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그들에게도 독립국가를 약속했다. 이것이 영국 고위 관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칼리프 간에 맺어진 맥마흔-후세인 협정(1915)이다. 이 두 약속은 서로 충돌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다른 아랍 국가들은 독립했지만, 유대인 국가가 들어선 곳의 아랍인들만은 집과 땅을 잃고 강제로 내쫓겼다.

 

하나의 땅, 두 개의 국가

유대인 이주의 물결이 지속되면서, 1940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수는 45만 명에 이르렀다. 아랍인들은 유대인에 편향적인 영국의 정책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 무렵 유대인들은 아랍 원주민들과 총격전을 벌이곤 했는데,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에 나서자 영국은 이를 지원해줬다. 이때 형성된 유대인 민병대 조직들이 하가나이르군이다. 1944년 무렵 하가나 대원은 거의 10만 명에 이르렀고, 몇 년 뒤 벌어진 이스라엘 독립 전쟁에서 주력군이 된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쫓아내려고 빈집에다 수류탄을 던져넣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영국군을 상대로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다. 하나의 땅을 놓고 폭력이 오가는 혼란한 상황에서, 유엔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6 4의 비율로 분할해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각각 세우기로 결정했다(1947년 유엔 총회 결의안 181). 예루살렘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 개방된 도시로 남겨두고 신탁통치하기로 했다.

 

이스라엘 건국과 4차례의 중동전쟁

그러나 이스라엘 무장 조직인 하가나와 이르군은 그 무렵 팔레스타인 땅의 4분의 3을 이미 점령한 상태였다. 그리고 19485월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무려 87만 명의 아랍인들이 그 땅에서 쫓겨났다. 이에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지만,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유엔에서 결정되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된다. 뒤이은 3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더 많은 점령지를 갖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국한된 왜소화된 영토에서 반자치 상태로 남겨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식민 통치나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의 압제하에서 양측이 폭력을 상호 교환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세계 지도에 없었던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중동에 생겨남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고, 지금껏 눈물 속에서 지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 인티파다

이스라엘의 압제 아래 슬픔과 좌절의 세월을 보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해묵은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 두 번에 걸친 인티파다. 인티파다는 번역하면 봉기 또는 저항이라는 뜻이다. 1987년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지프차에 치여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1차 항쟁은 6년 넘게 이어졌고, 그 결과 1,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고, 90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미국과 유럽의 적극적인 중재하에 제한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세우는 것을 뼈대로 하는 오슬로 평화협정(1993)이 맺어지면서 유혈 사태는 일시적으로 진정되었다.

그러나 2000년에 이스라엘 극우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이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에 난입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이스라엘 군대가 유혈 진압하면서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7년 동안 팔레스타인인 5,000여 명이 사망했고, 이스라엘인도 1,000여 명 사망했다. 2차 인티파다에서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한 것은 팔레스타인 측이 본격적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2000~2018년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희생자는 1만 명이 넘고 이스라엘 희생자는 1,000명을 약간 웃돈다. 사망자 비율로 따지면 유대인 1명당 아랍인 10명꼴이다. 이러한 극심한 비대칭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단순히 분쟁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반인간적인 전쟁범죄와 학살을 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가자 침공과 이스라엘의 전쟁범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번갈아가며 일시적 점령, 퇴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오슬로 협정 이후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온건화되면서, 팔레스타인 정치에서 가자지구를 근거지로 하는 이슬람주의 세력인 하마스가 부상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벌이는 테러를 빌미로 2009, 2012, 20143번에 걸쳐 가자지구를 침공했다. 2009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침공 당시 11세 팔레스타인 소년을 인간 방패로 활용했고, 여성과 어린이가 있는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렸으며, 민간인을 몰아넣은 주택에 포격을 가했다. 이스라엘군은 탁 트인 시계를 확보한답시고 그곳 농민들의 생업인 올리브 밭을 불도저로 갈아엎고, 이집트로 통하는 무기 밀수 지하 터널을 찾는다는 구실로 수많은 민가에 폭격을 가했다.

 

지은이가 방문한 가자지구의 한 가정에서는 집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15세 소녀 아스마, 바로 곁에서 비둘기 모이를 주던 11세 동생 아흐메드가 대낮에 이스라엘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저격수는 무슨 까닭에 이들 자매를 죽였을까? 팔레스타인 어린이 3명 중 1명은 나중에 자라서 순교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저항이 과격해지는 것은 그들의 좌절과 분노가 그만큼 깊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거대한 분리 장벽

2002년부터 이스라엘은 총 길이 710킬로미터의 분리 장벽 건설을 밀어붙였다. 2014년 말까지 500킬로미터쯤 완성된 상태이다. 장벽을 세우는 명목상의 이유는 보안이지만, 실제로는 19676일전쟁(3차 중동전쟁) 이후 불법 점령해온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에 합치고, 언젠가 세워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영토를 더욱 비좁게 만들겠다는 목적이다. 분리 장벽은 6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년 동안 국경선으로 삼았던 그린 라인보다 더 팔레스타인 영토까지 나아가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갇힌 팔레스타인 주민 24만 명은 오도 가도 못한 신세가 된다.

 

방벽 안에 갇혀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인간이라면 최소한 누려야 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고, 가족이나 친지를 방문할 자유 또한 없다. 일자리나 생필품을 구할 수도 없고, 수로가 막혀 농사도 지을 수 없으며, 먹을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설상가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 정착민이나 이스라엘 군인들로부터 날마다 크고 작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이렇게 장벽 안에 사는 갇힌 팔레스타인들은 과거 나치 히틀러 시절의 유대인들처럼 거주 제한을 받는 21세기 게토에서 지내고 있다. 이스라엘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로 분리하고 다시 장벽 건설로 도시와 마을을 고립시

 

책속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와 분리 장벽으로 인해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농민들은 대대로 지어오던 농토에 쉽게 갈 수 없게 되었다. 가자지구는 이미 콘크리트와 철망으로 둘러싸인 지 오래다. 열린 출구라고는 지중해뿐이지만 바다 역시 이스라엘 해군의 감시하에 놓여 있다. 이런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팔레스타인 경제는 붕괴 직전이고, 남은 것이라곤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와 절망감뿐이다. --- pp.42~43

 

예루살렘의 경건한 유대교 성직자의 잣대로 잰다면, 텔아비브는 21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이다. 물론 텔아비브 시민들 모두가 이런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진 않을 것이다. 서울만 해도 큰 도시의 다양함을 지니지 않는가. 이태원과 압구정동, 홍대 주변만 둘러보고 서울이 어떻다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 p.55

 

이스라엘의 강경파 정치인들은 예루살렘은 결코 분할되거나 공유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개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왔다. 그는 통합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예루살렘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우리의 것이고, 결코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 p57

 

현장에 가보니 타다 남은 구호물자들이 여전히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휴전이 이루어진 직후 가자지구를 방문했던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도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을 강하게 비난했다. 현장에서 만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 소속의 한 실무자는 “UN 마크가 뚜렷이 달려 있는데도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아 부서진 차량들을 바라보는 반 총장의 얼굴이 무척 어두웠습니다라고 전했다. --- p78

 

그 무렵 아리엘 샤론이 이스라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은 그의 전투적 세계관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나를 괴물이나 학살자로 불러도 좋습니다. 이스라엘을 유대인 나치 국가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죽은 성자보다는 그게 낫습니다.” 전쟁범죄자로 처벌받기는커녕 샤론의 정치생명은 끈질기게 이어져 레바논 학살이 있은 지 20년 뒤인 2002년 이스라엘 총리가 됐고, 팔레스타인 목조르기에 앞장섰다. --- p121

 

하마스의 중심인물은 창립자이자 조직의 정신적 지도자인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과 의사 출신의 압둘 아지즈 란티시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2004년 봄 이스라엘군 헬기 미사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야신이 죽기 전에 두 차례의 인터뷰를 했다. 가자 시내에 있는 그의 집에서였다. 야신은 15세 때 사고를 당해 목을 다친 후유증과 하마스 창립 초기인 1989년 이스라엘에 체포되어 7년 동안 옥고를 치른 탓에 하반신과 손가락이 마비됐다. --- p291

 

팔레스타인에 물들다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저자 안영민|책으로여는세상 |2010.09.

 

안영민-평화를 갈망하고 특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많다. 1972년에 태어나 서른이 될 때까지 부산에서 살았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혼자 태종대에서 바람을 쐬곤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회문제에 눈뜨면서 관련 책을 읽고 사회운동에 참여한다. 단순한 지식보다는 삶의 의미에 목말랐기에 학교보다는 식당, 책방, 사회단체에서 일하며 20대를 보냈다.

 

서른 즈음,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 서울로 이사했고, 2002년에는 훌쩍 인도로 떠나 불가촉천민 마을에서 1년 가까이 자원봉사를 했다. 그 뒤 한국으로 돌아와 민족, 국가, 종교, 권력이란 경계를 넘어 지구별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 평화의 가치를 누리며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 몇몇 사람들과 함께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경계를 넘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2006년과 2009년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직접 보고 가까이 느끼고 싶어 한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지내기도 했다.

 

평화에 관한 글쓰기, 평화교육과 강연으로 넉넉지 않으나 나름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배드민턴과 베토벤 음악을 좋아한다. 죽을 때 3권의 책을 가져갈 수 있다면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묵자,자본을 꼽는다.

 

그동안전쟁국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책,다극화체제, 미국 이후의 세계,라피끄-팔레스타인과 나와 같은 책을 쓰는 일에 함께했으며, 현재 미니의 짧은 생각(http://blog.daum.net/minibabo)이라는 블로그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열심히 알리는 중이다.

 

프롤로그_내 마음을 움직인 사진 한 장

 

part 1.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에 가다

평화가 사라져버린 평화의 땅,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시골 아저씨, 와엘을 만나다

작은 시골 마을에 짐을 풀다

데이르 알 고쏜의 친구들

한밤중의 칠면조 나르기

물에 대한 권한을 빼앗긴 사람들

작은 시골 마을의 낯선 외국인

한밤의 칵테일 파티

알 자지라를 보는 이유

한국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생각해요?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낀 거대한 감옥, 가자 지구

느리게 돌아가는 팔레스타인의 시간

종교 때문이라고요?

우린 친구잖아요

팔레스타인 마을만 어둠에 잠기고

뒤집어진 사진 한 장

점령 마케팅

 

part 2.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에 물들다

미래를 빼앗긴 사람들

점령이 인간의 수염에 미치는 영향

저 소리 들려요?

많이 먹어요, 많이!

라마단 함께 하기

장벽, 삶을 가로막다

팔레스타인 사람 비우기가 한창인 헤브론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요

멈춰, 거기 서!

내 동생하고 결혼하세요

자기 집 마당에서도 놀지 못하는 아이

올리브 장아찌를 아시나요?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에요

세바스티아를 떠나던 날

예수가 지난 자리, 그곳에 평화가 있기를

예루살렘에 가봤어요?

팔레스타인에 희망이 있냐고요?

이별 이별 이별

나의 찌질한 복수

 

에필로그_ 한 번 울리고 끊어지는 전화

 

출판사 서평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을 아시나요?"

어느 평화주의자의 90일 간의 팔레스타인 여행기

그곳에서 진짜 팔레스타인을 만나다!

 

때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 삶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우연히 읽은 책 한 권, 누군가의 말 한마디, 예기치 못한 만남, 갑자기 가슴에 와 박히는 작은 사진 한 장. 이런 것들로 삶이 송두리째 달라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이 책의 지은이 역시 그랬다. 어느 날 신문에서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고, 그만 그 사진이 가슴에 와 박히고 말았다. 그것은 팔레스타인 아이가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맞아 죽은 사진이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지은이는 그때부터 팔레스타인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팔레스타인의 억울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6년과 2009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날아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알아갔다. 이 책에는 그렇게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뉴스나 신문이나 어려운 책을 통해서가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하루하루 삶을 통해 만나는 팔레스타인의 진짜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처럼 살았던 90,

그 속에서 만나는 팔레스타인의 진실

지은이는 팔레스타인의 한 시민단체를 통해 와엘이라는 40대 노총각을 소개받고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고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 허름한 칠면조 농장에서 함께 땀 흘려 일하고,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고, 올리브를 수확하러 밭에 나가고, 길을 지날 때마다 이스라엘이 만든 검문소에서 몸 검사와 신분증 검사를 받고, 이스라엘이 마을에 둘러친 고립장벽 때문에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고, 늦은 밤 갑자기 대문을 두드리는 군인들 소리에 놀라 문을 걸어 잠그고, 이스라엘이 전기를 끊어버려 촛불 아래 저녁을 먹는다.

인구가 5천 명도 안 되는 팔레스타인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이 꼼꼼하게 그려진 이 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사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어떤지, 나아가 미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어떤지, 지난 60년간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만히 그러나 깊게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순수하고 정이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공중전화기를 찾는 지은이에게 다가와 자기 전화기를 쓰라고 건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몇 번 인사를 나누었다고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빵가게 주인, 해거름이면 이집 저집에서 저녁 먹고 가라며 지은이를 부르는 동네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속에 묻혀 살면서 지은이는 서서히 팔레스타인에 물들어 간다. 마음 따뜻하고, 정 많고, 여유가 있고, 많은 것이 모자라고 여러 가지가 불편하지만 그래도 늘 웃고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만다.

그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 살아봤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꼭 이야기해 줘요.”라고 말할 때, 지은이는 그들이 당해야 했던 엄청난 마음고생이 느껴져 가슴이 저미고 만다.

 

 

팔레스타인 비극사 1948, 이스라엘의 탄생과 종족 청소/ 저자 일란 파페|역자 유강은|열린책들 |2017.09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나는 고발한다. 전 세계가 눈감았던 고통스러운 진실을!

 

자신의 만행을 감추려는 이스라엘의 주류적 역사관에 반대하며 198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이스라엘 역사가들 중 한 명인 일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비극사. 모국의 역사 왜곡을 계속해서 고발해 온 저자의 이 책은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을 종족 청소라는 시각으로 파헤친 역사서이다.

 

저자는 종족 청소199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계기로 생겨난 이 개념을 특정한 지역이나 영토에서 종족이 뒤섞인 인구를 균일화하기 위해 특정 인구를 강제로 쫓아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나아가 주택을 파괴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지역의 역사를 지워 버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저자에 따르면 19483월부터 이스라엘 건국 세력인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주로 아랍인인 팔레스타인인들을 본격적으로 추방했다. 추방이 일단락되었을 때 난민이 된 사람은 8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사실을 공식적, 대중적 역사에서 완전히 지우고 왜곡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의 이러한 기만적인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스라엘 핵심 인사들의 일기, 군사 기록, 구술사 자료 등을 토대로 학살, 파괴, 겁탈 등 이스라엘 건국 세력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얼마나 잔인한 일을 계획적으로 저질렀는지 폭로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전쟁 중에 자발적으로 떠났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은 근거 없는 거짓임을 드러내면서 이를 종족 청소라는 전쟁 범죄로 정의하고, 이스라엘을 향해 법적, 도덕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

 

일란 파페-1954년 하이파 출생으로, 부모는 나치의 억압을 피해 독일에서 이스라엘로 건너 온 유대인이었다. 예루살렘의 헤브루 대학을 졸업했으며, 저명한 아랍 역사학자 앨버트 후라니와 로저 오웬의 지도로 옥스포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부터 2007년까지 하이파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있었다. 이스라엘 학자로서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에 도전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유대인 학자 파페는 하마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이 이스라엘 점령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을 지지한다고 말할 정도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이스라엘 민주주의가 오로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공동체들을 위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점령을 행하는 어떤 국가도 민주국가라고 불릴 수 없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인들이 의도적으로 팔레스타인들을 추방했다는 명제에 동의하며, 반시온주의적 관점과 식민주의적 맥락에서 시오니즘을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 밖에서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행동하는 지성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1998년 파페를 가장 뛰어나고도 도발적인학자라고 평가했으며, 노엄 촘스키 역시 그를 현존하는 이스라엘 지식인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으로 평가한다. 현재 그는 미국 학계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가장 저명한 학자이자 활동가로서 스타 파워를 가진 지성인으로 부상 중이다. 현재는 이스라엘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으며, 엑시터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로 있다. 역사가이자 인권운동가로서 중동 정치에 대해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아랍-이스라엘 갈등의 형성, 1947~1951(The Making of the Arab-Israeli Conflict, 1947~1951), 현대 중동(The Modern Middle East), 팔레스타인의 인종 청소(The Ethnic Cleasing of Palestine), 일란 파페등이 있다.

 

 

목차

서문

 

1. '추정되는' 종족 청소?

종족 청소의 정의

범죄로서의 종족 청소

종족 청소의 재구성

 

2. 배타적인 유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

시온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동기

군사적 준비 태세

마을 파일

영국인들에 대항하다: 1945~1947

다비드 벤구리온: 설계자

 

3. 분할과 파괴: 유엔 결의안 제181호와 그 여파

팔레스타인의 인구

유엔의 분할안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입장

유대인들의 반응

협의체 활동 개시

 

4. 마스터플랜을 완성하다

청소 방법론

변화하는 협의체의 분위기: 보복에서 위협으로

194712: 초기의 행동

19481: 보복이여 안녕

긴 세미나: 1231~12

19482: 충격과 공포

3: 청사진 마무리

 

5. 종족 청소를 위한 청사진: 플랜 달렛

나흐손 작전: 플랜 달렛의 첫 번째 작전

팔레스타인 도시 파괴

계속되는 청소

우월한 힘에 굴복하다

아랍의 대응

'진짜 전쟁'을 향하여

 

6. 가짜 전쟁과 진짜 전쟁: 19485

티후르의 나날

탄투라 학살

여단들이 남긴 핏자국

보복전

 

7. 청소 작전 확대: 19486~9

1차 정전

야자수 작전

두 정전 사이

존재하지 않았던 정전

 

8. 임무 완수: 194810~19491

히람 작전

이스라엘의 귀국 금지 정책

형성 중인 소제국

남부와 동부의 최종 청소

다웨이메흐의 학살

 

9. 점령의 추한 얼굴

비인도적 투옥

점령 아래 벌어진 학대

전리품 나누기

성지 모독

점령의 확립

 

10. 나크바의 기억 학살

팔레스타인의 재발명

사실상의 식민주의와 유대 민족 기금

이스라엘의 유대 민족 기금 휴양 공원

 

11. 나크바 부정과 '평화 협상 과정'

평화를 향한 첫 번째 시도

평화 협상 과정에서 배제된 1948

귀환권

 

12. 요새 이스라엘

'인구 문제'

 

에필로그

감사의 말

연표

지도와 표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530

출판사 서평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일의 진실

 

'가장 용감하고 강직하고 날카로운 이스라엘 역사가' 일란 파페의 대표작 팔레스타인 비극사가 출간됐다. 파페는 자신의 만행을 감추려는 이스라엘의 주류적 역사관에 반대하며 198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이스라엘역사가들 중 한 명으로, 모국의 역사 왜곡을 계속해서 고발해 왔다. 이 때문에 파페는 이스라엘 사회의 눈엣가시가 되어 13년간 몸담았던 대학에서 파면당하고 살인 협박에도 시달렸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스라엘의 비윤리적 행위를 계속 들춰내고 있다. 노암 촘스키는 그를 '현존하는 이스라엘 지식인 가운데 가장 양심적인 사람'으로, 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가장 뛰어나고 도발적인 학자'로 평가한 적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을 '종족 청소'라는 시각으로 파헤친 역사서다. 파페에 따르면 19483월부터 이스라엘 건국 세력인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주로 아랍인인 팔레스타인인들을 본격적으로 추방했다. 추방이 일단락되었을 때 난민이 된 사람은 80만 명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은 위의 사실을 왜곡한다. 이스라엘 건국을 '비어 있는 땅에 정착해서 사막에 꽃을 피우는 데 성공'한 것으로 미화하는 한편,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강제 추방에 관해서는, 이미 건국된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아랍군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이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났다고 주장한다. 강제 추방은 없었고, 아랍의 침략에 맞선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파페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기만적인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스라엘 핵심 인사들의 일기, 군사 기록, 구술사 자료 등을 토대로 학살, 파괴, 겁탈 등 이스라엘 건국 세력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얼마나 잔인한 일을 계획적으로 저질렀는지 폭로하고, 이를 종족 청소라는 전쟁 범죄로 정의한다. 그러고는 이스라엘을 향해 법적, 도덕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다. 그것만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

종족 청소란 무엇인가? 파페는 '1990년대의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계기로 생겨난' 이 개념을 '특정한 지역이나 영토에서 종족이 뒤섞인 인구를 균일화하기 위해' 특정 인구를 '강제로 쫓아내는 것'으로 정의한다. 나아가 주택을 파괴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지역의 역사를 지워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종족 청소 개념이 생겨나기 40여 년 전에 일어났지만, 파페는 당시에 이스라엘 건국 세력이 벌인 행동을 명백한 종족 청소의 사례로 규정한다. 한편으로는 아랍인, 유대인이 섞여 살던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도록 아랍인을 강제로 쫓아내려 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건국 세력이 '플랜 달렛'이라는 종족 청소 계획를 세우고, 이를 토대로 군대를 지휘해 '주택, 재산, 물건 등을 방화'하고, '사람들을 추방'했으며, '쫓겨난 주민들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잔해에 지뢰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가장 악명 높은 청소는 '데이르야신'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났다. 파페에 따르면, '유대 군인들은 마을에 쳐들어가면서 집마다 기관총을 난사해서' 주민을 죽였고, 그들의 시체를 훼손했다. 여성을 강간했으며 아이들을 벽에 세워 놓고 그들에게 '재미 삼아' 총을 쐈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집을 포기하고 도망치지 않으면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위와 같은 끔찍한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공식적, 대중적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1948년의 상황에 대해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에 이어 아랍에 의한 '2의 홀로코스트'가 임박했던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군사적 수단을 정당화했고, 이스라엘 교과서는 '유대 쪽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냥 남으라고 설득했다'는 거짓 역사를 서술했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19483월에 위협받은 쪽이 자신들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때 잠시 팔레스타인인들을 도우려고 주변 아랍 국가에서 파견한 군대가 유대 쪽 군대에 피해를 줬지만, 파페에 따르면 '유대인 공동체는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항복해야 하는 사태를 걱정할 일이 전혀 없었'고 이스라엘은 별 어려움 없이 팔레스타인 청소를 수월하게 진행해 나갔다. 그 결과 1948년 팔레스타인인의 85퍼센트가 난민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78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다. 팔레스타인 내부에는 시온주의 세력에 저항할 지도부가 거의 없었고 전투 조직들도 자취를 감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조직들은 모두 '유대 민족의 고국을 팔레스타인에 세워주겠다'고 약속한 영국의 친유대적 기조에 반발해 일으킨 1936년 반란에서 영국군에 의해 망명길에 오르거나 해산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당시에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었다

 

 

책속으로

명령문에는 사람들을 강제로 쫓아낼 때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담겨 있었다. 대규모 위협을 가할 것, 마을과 인구 중심지를 포위하고 포격할 것, 주택, 재산, 물건 등을 방화할 것, 사람들을 추방할 것, 남김없이 파괴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쫓겨난 주민들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잔해에 지뢰를 설치할 것 등이었다. --- p.7

 

그다지 오래지 않은 과거에 당신이 잘 아는 어떤 나라에서 전체 인구의 절반이 1년 만에 강제로 추방되고, 마을과 도시의 절반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건물 잔해와 돌멩이만 남았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 재앙이 무시되지는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역사책에 전혀 실리지 않고, 이 나라에서 터져 나온 갈등을 해결하려는 모든 외교적 노력이 철저하게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라. 나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사를 샅샅이 훑으서 이런 성격의 사례와 이런 식의 운명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 p.37

 

유대교에서 팔레스타인을 부르는 이름인 '이스라엘 땅'은 수백 년 동안 여러 세대의 유대인들에게 성지 순례의 장소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미래의 세속적 국가로 여겨진 적은 없었다. (......) 다시 말해, 시온주의는 세속화되고 민족화된 유대교이다. 시온주의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의 요람으로 이 영토를 재창조, 아니 재발명했다. --- p.40

 

시온주의자들이 기대한 것은 서구에서 박해와 학살의 역사를 피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창설하는 일이었다. '옛 조국을 되찾자'는 종교적 호소가 그 수단이 되었다. 이것이 공식적인 서사였고, 시온주의 지도부 성원 대다수의 동기를 진정으로 나타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p.43

 

앞으로 우리는 특히 1967년 이후 미국이 관여한 뒤 팔레스타인의 평화 중재 역사에서 툭하 이런 양상이 되풀이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평화 정착'은 언제나 미국과 이스라엘이 배타적으로 작성한 구상을 따르는 것을 의미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배려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과 진지하게 협의하는 일도 없었다. --- p.80

 

하지만 협의체는 이미 194712월에 그들이 탐내는 유대 국가의 영토 안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관련해서 추구하기로 한 전략을 설명하는 데 히브리어 단어 '요츠마jotzma'(주도적 계획)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도적 계획'이란 '보복'의 구실이 생기기를 기다리지 않은 채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의미했다. --- p.115

 

시온주의 지도부는 처음에 군사 행동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승인받지 않은 선도 공격이 진행될 때마다 하나하나 사후에 승인하서 계획의 일부로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 p.144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 전체를 나치스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의도적인 홍보 책략이었다. 그래야만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3년 뒤에 유대 군인들이 다른 인간을 청소하고, 죽이고,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 자신감을 잃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 p.152

 

이스라엘과 서구 일반은 그들을 익명으로 뭉뚱그려서 아랍 반란자나 테러리스트로 언급한다 ? 1980년대까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서 싸운 팔레스타인인들, 그리고 1987년과 2000년에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 점령에 대항한 두 차례 봉기를 이끈 이들을 다루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식민화, 추방, 점령을 당한 사람들을 악마시하고 그들을 식민화, 추방, 점령한 바로 그 사람들을 미화하는 현실을 뒤바꾸기 위해서는 이 책보다 훨씬 더 많은 게 필요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안다. --- p.341-342

 

1948년 말에 이르러 종족 청소 작전의 주요 활동은 이제 이스라엘의 귀국 금지 정책을 두 가지 차원에서 실행하는 데 집중되었다. 첫 번째는 국가적인 차원으로 19488월 이스라엘 정부는 주민들이 추방된 마을을 전부 파괴하고 새로운 유대인 정착촌이나 '자연' 삼림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는 외교적인 차원으로 난민들의 귀환을 허용하라는 국제 사회의 점증하는 압력을 피하기 위한 끈질긴 시도가 이루어졌다. --- p.354

 

잠시 동안이나마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관심을 나타낸 이례적인 시기가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국무부 관리들이 난민 문제에 관한 정책을 지배한 반, 백악관은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한 불만이 점차 높아졌다. 미국의 전문가들은 난민들이 귀환하는 것 말고는 다른 법적 대안을 찾지 못했고, 이스라엘이 귀환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조차 거부하자 분개했다. 19495, 미국 국무부는 난민 본국 송환을 평화의 전제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이스라엘 정부에 전달했다. (......) 미국 국무부에서 인사 교체가 이뤄지서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제 난민 문제는 아예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완전히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 p.399

 

팔레스타인 전체의 인적 지형은 강제로 바뀌었다. 도시들은 넓은 구역이 파괴되서 아랍적 성격이 지워졌다. 야파의 널찍한 공원이나 예루살렘의 문화 회관 등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변화는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워 버리고 다른 민족의 날조된 역사와 문화로 대체하려는 욕망의 결과물이었다. 원주민들의 모든 흔적은 묵살되었다. --- p.403

 

이스라엘의 '녹색 허파'인 이 휴양지들은 역사를 기념하기보다는 완전히 지워 버리려고 한다. 유대 민족 기금이 1948년 이전부터 지금도 볼 수 있는 시설에 붙여 놓은 안내문을 보, 지역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부정된다. (.....) 사람들의 심리에 깊이 뿌리박은 이 메커니즘은 팔레스타인의 트라우마와 기억의 장소를 이스라엘인들을 위한 여가와 유흥의 공간으로 이렇게 대체하는 것을 통해 작동한다. 다시 말해, 유대 민족 기금의 설명문이 '생태적 관심'으로 재현하는 것은 나크바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의 엄청난 비극을 감추려는 이스라엘의 또 다른 공식적인 시도이다. _425-426

 

이처럼 역사를 의도적으로 지워 버렸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휴양 공원 아래 묻혀 있는 마을들의 운명은 한 때 그곳에 살았던, 그리고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도 난민 수용소와 머나먼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가족들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의 해결은 여전히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정의롭고 지속성 있게 해결하기 위한 관건이다. --- p.435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또는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떠맡은 다른 어떤 조직도 두 가지로 표현되는 부정에 직해야 했다. 첫 번째는 국제 평화 중재자들이 보여 주는 부정이었다. 그들은 미래의 평화 조정안에서 팔레스타인의 대의와 관심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더라도 일관되게 부차적으로 다루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인들이 나크바를 인정하기를 무조건 거부하고, 1948년에 그들이 저지른 종족 청소에 대해 법적,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을 절대적으로 피한다는 사실이었다. --- p.439

 

이 기나긴 고난의 시기 동안 이스라엘 안팎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들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손잡고 만들어 온 긴밀한 사회적 관계를 볼 때, 이런 변신은 가능하다. 이스라엘 유대인 사회에서 시온주의 사회 공학이 아니라 인간적 고려를 밑바탕으로 삼아 자신을 형성하는 집단들을 들여다보, 찢겨진 팔레스타인 땅에서 분쟁을 종식할 수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해진다. --- p.473-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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