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강의 팬데믹 이후의 학교와 병원을 생각한다 저자 이희경|북튜브 |2021.10
이희경-일명 문탁.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거쳐 지금 <문탁네트워크>까지 20년 넘게 인문학공동체에서 공부하고 있다. <수유+너머> 시절에는 한국근대젠더 연구를, <문탁네트워크>에 와서는 인류학과 선물의 공동체, 또 동양고전과 윤리적 주체 문제 등을 탐구했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영성, 공동체와 양생, 늙음과 죽음 등에 관심이 많다. 한마디로 잡식성 공부. 이를 통해 공부와 현장이 결합되길 꿈꾼다. 지금 구성하고 있는 현장은 <길드다>라는 청년인문학스타트업과 <인문약방>이라는 새로운 콘셉트의 양생공동체이다.
『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를 썼으며, 함께 쓴 책으로 『문탁네트워크가 사랑한 책들』, 『루쉰, 길 없는 대지』, 『신여성?매체로 본 근대 여성 풍속사』, 『인물 톡톡』이, 풀어 엮은 책으로 『낭송 장자』가 있다.
목차
머리말5
첫번째 강의 _ 성장을 멈추어라 : 이반 일리치의 생애와 사상
이반 일리치, 당연한 것들에 대한 질문
사제 이반 일리치
대안을 꿈꾸다
『성장을 멈춰라』와 공생의 도구
생산적 도구와 반(反)생산적 도구
공생적 도구와 조작적 도구
좋은 삶, 버내큘러와 커먼
첫번째 강의 Q&A
두번째 강의 _ 학교 없는 사회 : 공생적인 배움의 도구를 상상하기
학교의 역할과 뉴 노멀
불평등을 확산시키는 학교
학교화된 사회
의례를 넘어
학교를 재도구화하기
두번째 강의 Q&A
세번째 강의 _ 병원이 병을 만든다 : 자기 돌봄의 능력을 회복하기
의료는 건강을 증진시키는가
부작용의 고통, 임상적 의원병
‘정상’이 되라는 명령, 사회적 의원병
죽음조차 잃어버린 삶, 문화적 의원병
건강에서 양생으로
세번째 강의 Q&A
부록 _ 신화가 된 학교
출판사 서평
『이반 일리치 강의』 지은이 인터뷰
1. 이반 일리치는 그렇게 널리 알려진 사상가는 아닌데요. 독자들을 위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선, 이반 일리치는 메이저 사상가가 아니라 마이너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아주 강렬한 팬덤을 가진 사상가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부터 책이 번역되고 소개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되곤 했어요. 그런데 머지않아 또 복간되더군요. 늘 어디선가 누군가는 반드시 이반 일리치를 다시 소환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반 일리치는 신기할 정도로 생명력이 긴 사상가입니다.
두번째로 이반 일리치는 유럽 출신이지만 남미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학교 없는 사회』(1971)는 푸에르토리코에서의 교육 경험이 직접적인 바탕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교육기회를 주기 위해 도입된 의무교육제가 왜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가난하게 만들 뿐이지?’ ‘사회적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행해지는 학교 교육이 왜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확대하는 거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일리치는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1960년대 남미, 소위 ‘저개발국’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진 ‘경제개발 ○○개년 계획’ 같은 프로젝트를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발전’(development)에 대해 질문한 것이지요. 개발, 발전, 성장, 즉 “모두가 부자 되세요~”라는 근대의 슬로건이 달성 가능한지 혹은 생태적으로 바람직한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근대문명에 대해 가장 본질적이고 급진적인 비판을 한 사상가입니다.
셋째, 이반 일리치는 대학제도 밖의 연구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강연은 늘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그가 쓰는 책마다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1971), 『성장을 멈춰라』(Tools for Conviviality, 1973),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Energy and Equity, 1974), 『병원이 병을 만든다』(Limits to Medicine, 1975) 같은 책이지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일리치가 자신의 그런 책을 ‘팸플릿’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등 세계 문명의 근본적 전환기에 기존의 제도출판 밖에서 소책자 형태로 간신히 제본만 하거나 때로는 표지도 없이 찍어서 배포되었던 팸플릿!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책이 아카데미가 아니라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새로운 정치적 행동의 자극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거리의 사상가’였습니다.
넷째, 이반 일리치는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입니다. 하지만 사제생활 초기부터 그는 살아 있는 기독교 공동체 신체로서의 교회와 제도와 권력으로서의 교회를 구별했습니다. 덕분에 로마교황청과 불화하고 결국 파문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인으로 살았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이런 개인적 토대가 그를 다른 좌파 정치인과 다른 에토스를 갖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반 일리치에게 희망이란, 권력의 교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대안은 환대의 기풍과 우정의 정신을 가진 새로운 공동체들의 건설이었습니다. 정치성과 영성이 함께 가는 사상가!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한 영감을 주는 대목입니다.
2. 이반 일리치의 책들을, 선생님께서 몸담고 계신 〈문탁네트워크〉의 ‘소의경전’(핵심 사상이 담긴 경전)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리치 사유의 어떤 점이 선생님과 문탁네트워크 활동에 영향을 끼쳤을까요?
소박하고 자율적인 삶이죠. 이반 일리치가 주장한 것은 우리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서 스스로 자기 삶의 양식을 창안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것을 어떻게 충족시킬지를 사회적 명령이나 전문가의 진단에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문탁네트워크의 출발도 그러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의 전환기에 놓인 갑남을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을 가거나 유학하러 간 게 아니라 우리 집 거실에서 세미나 테이블 하나를 놓고 작은 세미나를 열었지요, 그걸 기점으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각자의 주머니를 털고, 지혜를 모으고, 크고 작은 능력을 섞었습니다. 그렇게 마을작업장을 만들어 화폐경제 밖에서 자립하려고 노력했고, 마을학교를 만들어서 제도학교에 가지 않거나 갈 수 없는 청소년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을공유지를 만들어 공동식탁을 운영했습니다. 순환의 지혜와 나눔의 기술을 익힌다면 한 끼 2,500원으로도 풍성하고 즐거운 식사를 할 수가 있더군요. 이제는 마을약국을 만들어 몸과 질병, 늙음과 죽음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을작업장, 마을학교, 마을약국처럼 겉으로 드러난 어떤 성과가 아닙니다. 진짜 소중한 것은 너무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언성을 높여서 싸우기도 하고 같이 헤매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관점을 기꺼이 바꾸고 새로운 영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아니라 서로 돕고 협력하는 삶이 이렇게 짜릿하고 흥분되고 기쁨을 주는 것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는 “우정이 없었더라면 서로에게 불가능했을 존재형식에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일리치에게 받은 최고의 선물이죠.
3. 이 책의 2장과 3장에서는 ‘학교’와 ‘병원’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교육과 건강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 학교와 병원을 일리치는 어떤 이유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건강하게 살고 싶고,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고, 원하는 곳에 가고 싶고, 세상사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고,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은 근대사회에서 표준화되어 버렸죠. 아프면 누구나 병원에 갑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으면 학교나 학원에 갑니다. 이동하고 싶으면 더 빠른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삶에 대한 욕망은 이런 식으로 전문가와 그들이 만든 제도에 대한 의존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일리치는 ‘가치의 제도화’라고 부르고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살면 살수록 무능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의 제도화를 습득하는 첫번째 장치가 바로 학교입니다. 왜냐하면 학교는 ‘지식의 전수’나 ‘인격의 함양’ 같은 가치와 관계된 곳이 아니라 근대 소비사회의 신화를 저장하고 유통하는 게임의 구조로 작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게임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배움을 교과별, 학년별로 잘게 나누고, 시험이나 점수로 그것을 측정하고, 전문가가 만들어 놓은 평가척도를 통과하면 다음 단계로 진급합니다. 즉 커리큘럼에 의해 세분되어 제공된 지식을 소비하면 다음 단계의 지식 소비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은 앎의 기쁨이나 삶의 깨달음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아도 더 높은 단계를 향해 중단 없이 ‘진보’하는 형태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일리치가 보기에 학교에서 익히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런 게임의 규칙, 미션수행을 통해 다음 단계로 이동해야 살아남는다는 게임의 규칙입니다.
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각 문화마다 병을 치료하고 통증을 해석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고유의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어느 시점이 되면(이반 일리치는 이 시점을 1950년대 중반쯤으로 잡습니다) 그동안은 간단한 처치나 사소한 생활습관의 변화로도 고칠 수 있는 작은 질환조차 모두 병원에 가서 전문가 의사의 진단을 받아서 치료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회적 배치가 바뀌게 됩니다. 진단과 치료는 의사가 독점하고 우리는 자기 몸으로부터 완벽하게 소외되어 버립니다. 이런 상태를 이반 일리치는 ‘삶의 의료화’라고 말합니다.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의료권력(생명권력)의 사회입니다.
4. 우리는 이미 거대한 규모의 도구들이 제공하는 편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이 일상화되면서, 이 무형의 ‘도구’는 우리 삶을 더 동여매고 있는 듯한데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의 방향을 전환하고 실천을 이어나가야 할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물질적 풍요가 주는 쾌락은 달콤하지요. 더 빠르거나 더 맛있거나 더 편리한 것들을 우리는 선호합니다. 그것이 팬데믹을 가져오고, 북극곰을 굶어 죽게 만들고, 고래의 뱃속을 플라스틱 빨대로 채우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멈출 것인가? 멈추지 못할 것인가? 인류가 어떤 기로에 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멈추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에 빠져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결국 닥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치지요.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미래를 낙관하게 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종말론자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서 저는, 일리치주의자로서(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저는, 희망에 기댑니다. 희망은 일리치에 따르면 기술적 해결이 아니라 자연의 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죠. 인류의 생존 여부는 희망을 사회적 힘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혼자서는 힘드니까 친구들과 함께 하려고 하고, 너무 힘들고 어려우면 하기 힘드니까 재밌고 쉬운 것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이 미친 속도에서 탈주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습니다. 이분들에게서도 계속 배웁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작은 실천들을 사부작사부작 엮어 나가는 것. 다만 이것을 꾸준히 하는 것. 이것이 제가 사는 방식입니다.
책속으로
지난겨울 한국도서관협회 ‘길 위의 인문학’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큰 주제는 ‘팬데믹 시대의 일상의 인문학’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반 일리치를 선택했다. 근대사회에서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차분하게 분석하고 포스트 코로나를 생각해 보는 데 일리치만큼 좋은 사상가는, 적어도 나에겐 없었다. 그리고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슬픔과 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희망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말처럼, 정치적 선택이다.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도 한 발을 떼는 것,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정치적 행동이다. 나는 여전히 이반 일리치, 데이비드 그레이버, 김종철 선생님 같은 스승들과 함께 이 길에 서 있다.-「머리말」중에서
오늘 다룰 이반 일리치는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에 이미 이런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진짜 당연한 거야?’ ‘학교를 왜 가야 해?’ ‘학교를 넘어서 생각해 봐야 되지 않아?’ ‘선진국이 되는 게 좋아?’ ‘임노동이 아닌 삶을 생각해 봐야 되지 않아?’ 이런 질문들을 던졌단 말이에요. 그리고 선진국과 후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이라는 구분도 이상한 거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이반 일리치가 했던 이런 질문들이 코로나 시대를 숙고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팬데믹의 출구를 여는 데 이반 일리치만큼 좋은 동반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p.20~21
그래서 우리는 고통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나아가 죽음에 대해서도 더 이상 사유하지 않아요. 이반 일리치는 그게 너무 이상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일리치는 암 치료를 거부하고 환자가 아닌 방식으로 10년을 더 살다가 2002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물론 근본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에 이가 아프면 치과에도 갔어요. 그리고 탈장으로 수술도 하고 했지요. 병원에 대해 새롭게 생각을 한다고 해서 병원에 절대 안 가고 수술 같은 것도 안 받겠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여러 조치들을 합니다. 찜질 같은 요법을 쓴다거나, 생아편 성분이 있는 약초를 심어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현대 의학이 일률적으로 제시하는 통증 완화치료, 즉 ‘통증은 무조건 감소하는 것이 좋다’라는 명제를 거부했을 뿐인 거죠.--- p.32~33
이때 ‘조작’이라고 하는 건 삶의 물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욕망까지도 포함합니다. 언제부터 우리 여성들의 욕구는 44사이즈가 됐을까요. 너무 이상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을 어떤 프로세스나 기준 속으로 가둬 버린다는 거죠. 여덟 살이 되면 무조건 학교를 가야 된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등등. 근대는 이런 고정된 프로세스를 통해 삶을 조작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조작적인 도구를 쓰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학교에 가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고요.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 학교를 안 가는 것은 굉장한 결여로 느껴지는 거예요. 학교를 가지 않으면 내가 모자란 걸로 느껴지는 거죠.--- p.47
학교 교육에서는 중학교 1학년에는 수학은 어디까지 배워야 하고, 지리는 어디까지 배워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죠. 배우는 순서도 정해져 있습니다. 한국지리를 먼저 배운 다음 세계지리를 배우고, 인문학적 관점에서의 지리를 배우고, 이런 식으로 단계를 밟아 나가야겠지요. 그리고 이런 과정 역시 전문가에 의해서 고안된 거잖아요. 그런데 사실 배움은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역사에 대해서 몰라도, 그러니까 르네상스는 언제고, 프랑스혁명은 언제고, 이런 것들을 몰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몰라도 가령 어려운 철학자인 푸코를 읽는 데도 문제가 없어요. 푸코를 읽다가 ‘내가 세계사나 유럽사에 대해서 모르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공부를 하면 되는 거예요.--- p.78
일리치는 이렇게 사회의 의료화가 강화되면 … 어떤 몸이 적절한 몸인가를 사회적으로 규정하게 된다는 거예요. 요즘 인바디 측정도 많이 하시죠.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계에서부터 실제로 병원에 가서 하는 건강검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정상’(normal)과 ‘비정상’(abnormal)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몸을 정상으로 바꾸라는 사회적 명령을 받아요. 그러면 만성질환자, 장애인, 사회적 소수자 같은 사람들은 끝까지 ‘비정상’으로, 그래서 정상인의 타자로 살게 되는 거예요. 이거는 더 이상 병의 문제가 아니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인 거예요.--- p.117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우주의 법칙을 신처럼 직관적이고 필연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한테 닥쳐오는 것들, 내 몸에 생겨나는 변화들,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사유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사유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는 거고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것을 공부해서 파악한다고 해서 그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그걸 겪을 수 있는 삶의 기술들을 우리가 고안해 내야 합니다. 그런 삶의 기술은 공생의 도구들과 연결되겠지요. 첫번째 강의에서 이야기한 ‘공생의 도구’를 양생 혹은 ‘자기 돌봄의 테크네’라고 이야기해도 될 듯합니다. --- p.130
“학교·병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회가 당연한가요” 이반 일리치가 묻다
이반 일리치의 사상에 대해 쉽게 풀어낸 <이반 일리치 강의>의 저자인 이희경 문탁 네트워크 대표는 지난달 28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질문을 성찰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 일리치의 생각을 함께 나눌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학교와 병원은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자 공간이다. 근대 이후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학교와 병원의 기능 유지는 필수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지금부터 50년 전에 모두가 필수적 공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학교와 병원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학교는 교육 기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배움을 독점하게 만드는 공간이 아닐까. 병원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몸을 자율적으로 돌보는 능력을 오히려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19로 인해 학교와 병원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 일리치의 질문은 함께 고민하고 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최근 <이반 일리치 강의>(북튜브)라는 책을 낸 문탁네트워크의 이희경 대표(60)는 “지난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질문을 성찰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 일리치의 생각을 함께 나눌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팬데믹 이후의 학교와 병원을 생각한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통해 이 대표는 학교와 병원에 대한 일리치의 비판적 사유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책은 지난해 겨울 코로나19로 인해 한국도서관협회에서 진행하던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강연 프로그램이 중단되면서 마련된 비대면 강의의 내용을 구어체로 정리한 것이다. 지난달 28일 경향신문사에서 이 대표를 만나 일리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리치는 주류 아카데미의 계보에서 한 발 비켜 나가 있던 사상가이자, 거리의 지식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근대성의 형식들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었죠.”
일리치는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와 쿠바의 혁명가인 피델 카스트로같이 1926년에 태어났다. 정통 학자나 혁명가의 길을 택하는 대신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미국령이었던 푸에르토리코의 대학에서 부총장을 하면서 교회의 세속화와 관료제에 비판의 날을 세우다가 교황청에 의해 파문당한다. 이후 그는 멕시코에서 대안대학을 만들고,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대안적 삶을 고민했다. <학교 없는 사회>(1971), <병원이 병을 만든다>(1975) 등의 책에 그의 생각이 담겼다.
일리치는 푸에르토리코 정부의 교육위원회에 참여하면서 학교라는 공간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사회적 표준이 되면서,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그 표준에서 멀어지게 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학교 없는 사회>에서 그는 학교가 교육 기회의 평등이 아닌 인간을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의무교육제도 도입으로 학교가 교육을 독점하면서, 우리의 삶과 앎이 분리된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학교는 앎에 대한 호기심을 확산시키고 배움을 일으켜 홍익인간이 되게 하는 곳이 아니라, 1등부터 100등까지 줄 세우면서 시험을 통과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게임의 규칙’을 익히게 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코로나19로 인해 학교가 멈추면서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주어졌음에도, 여전히 배움에 있어서 학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 ‘위드 코로나’로 다시 아이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받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일상의 회복인지 질문할 때”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병원의 중요성과 권한도 커졌다. 삶의 많은 영역이 ‘의료’라는 잣대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일리치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의료 기술의 확충 혹은 의료 제도의 확대는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학교와 마찬가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일 뿐인 병원이 너무 강조되다 보면 오히려 본말이 전도되며, 우리가 그에 종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자기 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증상임에도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아 질환으로 진단받는 것을 ‘의원병(醫原病)’이라고 개념화했다. 이 대표는 “의사나 병원이 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에 대한 독점이 너무 일반화되면서 자기 돌봄이나 자기 치료라는 관점에서 의료가 활용되지 못한다는 점을 문제 삼는 것”이라며 “ ‘의원병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몸에 대한 자율권을 완벽하게 잃게 된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어마어마한 과로사회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잖아요. 우리가 앞으로 삶의 동선을 어떻게 단순화하고, 과로사회를 벗어날지를 이야기해야죠. 그런데 지금은 ‘뉴노멀’ 대신 백신만 있으면 코로나를 다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 당황스러워요. 과거로의 회귀인 것이죠.”
이 대표는 일리치가 말한 것들을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오고 있다. 대학 밖 인문학 연구모임의 시초인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했던 그는 2010년 집 주변 친구들과 세미나를 하면서 문탁네트워크라는 인문학공동체를 꾸렸다. 문탁은 함께 묻고(問) 연마한다(琢)는 뜻이다. 경기 용인시 수지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멀리서도 함께 공부하기 위해 오는 이들이 있어 전체 참여회원은 100여명이다.
지난 2월 문탁네트워크의 약사 회원이 마을 사랑방처럼 이용된 카페가 있던 곳에 ‘일리치약국’을 열었다. 회원들은 일리치약국을 중심으로 자기 몸을 이해하고, 경험을 나누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 이 대표는 “월경과 갱년기를 주제로 세미나를 두 차례 열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일리치가 말한 대로 자기 몸에 대한 주체적인 배움을 실천하는 과정이다. 이 대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정해진 법은 없다”며 “일리치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한 대안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경향 이혜인 기자
이반 일리치의 죽음 저자 레프 톨스토이|역자 이강은|창비 |2012.10.
원제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 в 90 т. Юбилейное издание (1828
Smert Ivana Ilyitsha
러시아의 대문호 똘스또이의 중단편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
판사로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는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간다. 죽음 앞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고통스럽게 되묻는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한 인간이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되짚어보며 그 의미를 파고드는 과정을 매우 밀도 있고 설득력 있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운명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감동적인 장면을 빼곡하게 담고 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거장의 통찰
소설은 동료들과 가족 친지들이 이반 일리치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동료들에게 통보되자, 이들은 그를 애도하기보다는 그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가져올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에 열중한다. 그다음, 이반 일리치의 삶과 발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이반 일리치의 시점에서 그려진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 삶의 기준대로 살아온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 이르러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가를 거듭 묻는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이반 일리치는 무능한 의사들, 이기적이고 무심한 가족들, 그리고 신과 운명을 저주하며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러나 결국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이반 일리치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히 눈을 감는다.
똘스또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역사적, 사회적 모순성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해낸 예술가로서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근대적 인간의 존재와 존재양식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이반 일리치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조차 넘어선다는 것은 이반 일리치의 깨달음일 뿐만 아니라, 언젠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작가 자신,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똘스또이는 외적인 일상의 모습과 인간 심리의 움직임 사이의 거리를 적나라하게 묘파함으로써 인간 삶의 보편적 모습을 인지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의미에 대한 탐색인 동시에 인간의 일상적 모습과 내면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과 지양의 심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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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추도식으로 시작하여 그의 생애를 조망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죽음의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끝난다.
이반 일리치는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사회에서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십등 문관으로 시작하여 몇몇 자리를 전전하다 마지막에 항소법원 판사로 승진하게 된다.
지위가 높고 연봉도 훨씬 많아 품위에 맞는 근사한 집도 사게 된다.
그러나 멋진 집을 사서 꾸미는 도중에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 도무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도배공에게 직접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창틀에 튀어나온 손잡이에 옆구리를 부딪친다.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어보여도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옆구리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도 전혀 낫지를 않았다. 그의 나이는 인생에서 한창이라 할 수 있는 45세 때였다.
이반 일리치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가족과의 거리도 그만큼 멀어졌다. 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그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세상사는 전과 다름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당시 사교계에서 한창 절정을 구가하고 있던 아내와 딸은 그의 고통을 알아주기는 커녕 그가 음울하고 까다롭게 구는 것"에 대해 불만이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의 하나는 거짓이었다"는 표현은 이반과 주위 사람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가족들도, 동료들도, 의사들도 모두 의례적이고 형식적으로 좋은 말만 건넬 뿐 진심을 담은 위로나 안타까운 마음은 전혀 없어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자신의 삶도 거짓으로 점철된 것이었다는 점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그 주변의, 그리고 그 자신의 이런 거짓말이 이반 일리치의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이르는 고통의 장면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자신의 인생이 정당했다는 의식을 끌어안고 있는 이반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더욱 더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한 처음 추도식 장면과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추도식장에서는 남의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거리낌 없이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마지막 죽음의 과정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의 심리적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며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영혼과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쁘로스찌(용서해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쁘로뿌스찌(보내줘)라고 말해버린다. "그러자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 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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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더 나아가 살펴보면.
이야기의 첫 부분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들은 그의 지인들은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야.’
‘아, 그는 죽었지만 나는 살아있어!’라고 생각하며 안도감을 갖는다.
겉으로는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지만 속으로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따진다.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은 물론 그의 아내까지도 그랬다.
추도식장에서 친구들은 추도식이 끝나고 카드놀이를 할 궁리를, 직장동료들은 그의 빈자리를 누가 잡을 것인지를, 자기도 더 나은 자리로 옮기게 될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부인은 남편 사망으로 국가로부터 받을 지원금이 얼마인지, 어찌하면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는 가에 골몰한다.
인간이 얼마나 거짓, 위선, 가식에 능한지 그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살아남은 자가 남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지만 그게 우리들의 본 모습이라 생각하니 계면쩍기도 하다.
이렇듯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삶보다는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참모습을 그려냈다고 본다.
‘죽음, 그래 죽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즐겁게 놀기나 하는구나. (문 저쪽에서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반주 소리가 흩어져 들려왔다) 다 마찬가지다, 저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너희들은 좀 나중일지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즐거울까, 짐승 같은 놈들!’―본문에서
죽음이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도록,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죽음을 응시하도록.―본문에서
그는 오랫동안 곁에서 떠나지 않던 죽음의 공포를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죽음으 어디에 있지? 죽음이 뭐야? 죽음이란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 어떤 공포도 있을 수 없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본문에서 --- 본문 중에서
뻣뻣하게 굳은 사지는 관 속 안감 위에 푹 잠겨있고 두 번 다시 들지 못할 머리는 베개를 베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죽은 사람다웠다.
그 얼굴에는 해야 할 일을 다했고 또 제대로 해냈다는 표정이 담겨있었다.-13p
'등받이가 없는 간이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마침 간이의자의 스프링이 망가져 앉은 자리 밑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람에 표뜨르 이바노비치는 아주 불편했다'(16p)
'언제든지 지금 당장 나에게도 닥칠 수 있지 않을까, 서늘한 두려움에 순간 몸서리쳤다. 하지만 곧바로 그건 이반 일리치의 일이지 자신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들었다(19쪽).
그는 가정생활에서 아내가 해줄 수 있는 것으로 따뜻한 식사와 집안관리, 잠자리 등 딱 세 가지 편의 사항만을 기대하기로 했다.
만일 이 세 가지에 차질이 생기면 그 즉시 자신만의 고립된 일의 세게로 파묻혀 거기서 보람을 찾았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났다. 아내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고 가정사에 원칙을 세워놓은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34p
공적 업무에서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 생활에서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가 진정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카드놀이를 할 때였다. p.43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런 심각한 일이 그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고,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기 불편해 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59
카이사르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었고, 그러니 죽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 바냐, 이반 일리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p.62
그는 파멸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이해하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만 했다.
그를 오랫만에 보는 가족들은 병들어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온 몸으로 놀라지만 정작 수면위로 끌어올려 이야기 하는 것을 거부한다.62p
맹장도 신장도 다 문제가 아니다. 삶이냐 죽음이냐의 문제다. 그래, 아직 살아있지만 생명이 자꾸만 빠져나가고 있는데, 난 잡을 수가 없다. 맞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나 말고는 모두들 다 분명히 알고 있다.67p
ㅡ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분명히 인정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71p)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는 누구도 그가 바라는 만큼 마음 아파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몹시도 괴로웠다.
어떤 때 오랫동안 통증에 시달리고 나면, 이런 고백하기 부끄럽긴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아픈 어린아이 보듯 가엾게 여겨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이를 안고 달래듯 다정하게 다독여주고 입맞춰주고 자신을 위해 울어주길 바랐다.
중요한 자리에 있는 관리인데다 수염까지 하얗게 센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이반 일리치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p.72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고 자신에게 말한다.
"일이나 하자. 그래. 난 일 때문에 살아왔잖아"
그러나 죽음은 그 어떤 것이라도 뚫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병이 깊어지며 배뇨와 배변을 위해 특수 용변기가 부착되고 매번 그것을 사용하는데 심한 고통과 냄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간절한 건 따뜻한 손길이었고, 함께 진심으로 아파해 줄 한 사람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 자신을 아픈 어린아이 대하듯이 그렇게 가엾게 여기며 보살펴주기를 가장 간절히 소원했다.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바랐다.-84p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다 하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삶과 죽음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 단 하나의 해답을 마치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인 양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지금 네가 원하는 건 대체 뭐지? 사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인가?
교도관이 ‘재판이 시작됩니다!’라고 외치는 법정에서의 삶이 네가 원하는 삶인가?’
재판이 시작된다, 재판이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는 이 말을 입 속으로 되뇌어보았다.
‘그래, 재판이 시작되었어!
그리고 난 아무 죄가 없어!’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p.87
그의 가슴에서 뭔가 부글 부글거렸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그의 몸에 경련이 찾아왔다.
쉭쉭 거리는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운명하셨습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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