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기 전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리 노거수
2014년 11월12일 발견 당시 하정리 마을터줏대감
지역 |
수종 |
수령 |
수고 |
가슴둘레 |
근원부 |
수관폭 | |
금정구 |
하정 |
소나무 |
100 |
15 |
1.9 |
2.8 |
11.6 |
느티나무 |
70 |
10 |
|
3.9 |
23 |
이번 방문 때 마을 노인은 소나무의 수령을 150살 정도 된다고 했다.
이 당산 나무 주변과 길가에서 소산역임을 비정하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금정구 선동의 하정리 당산나무가 사라졌다. 10월29일 스트리텔링 축제 신회동팔경 사전 답사 때 였다. 망연자실 서 있다 마침 밭에 가는 주민을 붙잡고 나무의 행방을 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새로 땅을 산 사람이 집을 짓는다고 베어버렸다고 했다. 일주일 전이었다고 했다. 얼추 150년 추정의 소나무와 느티나무였다. 하정리의 터줏대감이었고 마을주민이 동티날까 함부로 대하지 않던 신령스러운 나무들이었다. 주민들은 심기가 불편하고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어르신 한분이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노여움 찬 말 한마디 던졌다. “귀신은 어디 갔노”
그래, 땅은 사고 팔수 있다. 허나 거기 뿌리 내린 노거수는 사정이 다르다. 수령 백 살이 넘는 나무가 있는 마을은 흔치 않다. 마을 노거수가 상징하는 바는 인의예지와 전통이 살아있는 공동체마을로서 역사성과 문화적 지위가 녹아있는 곳이다. 하정리 노거수가 졸지에 흔적없이 사라진 것은 21세기에 걸맞는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2016년 현재 225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그 외 특별한 보호장치를 획득하지 못한 100년 이상의 나무는 토지 소유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부산그린트러스트는 이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마을터줏대감나무라는 지위를 부여하여 100년 이상의 마을나무를 보호하고자 부산시의회와 공동세미나 등을 열어 길을 모색해왔지만 여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또다시 이런 상황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짚어보자. 법 제도의 문제 이전에 우리가 존중하고 지켜내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예컨대 땅은 사고 팔수 있고 또 그 땅에 무엇을 하든 특별한 문제가 없는 이상 땅주인이 뭘 하든 자유다. 그러나 거기 서 있던 나무가 개인을 넘어 지역의 오래된 자산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다시말해 공공의 자산과 사적재산의 구분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하정리 터줏대감나무는 공공의 자산이었다. 그 공공의 자산을 누가 지키는가.
하정리는 조선시대 소산리라 하였고, 여기에는 역원이 있었다. 당시 동래부 관내에는 소산역(하정)과 휴산역(연산동과 수영 사이)의 2개 역이 있었다.
고려 때부터 개설된 소산역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에서도 확인되는데, 조선 시대에는 황산도에 소속되어 존속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에는 성산역(省山驛)으로 기재되었다가, 1462년(세종 8) 8월 이후부터 줄곧 소산역으로 역참 업무를 담당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혁파되었다.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832] 역원조에 “소산역은 부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남쪽 휴산역과의 거리는 20리이고, 동쪽 기장 고촌역과의 거리는 20리이며, 북쪽 양산 위천역과의 거리는 40리로 대마 1필, 중마 2필, 복마 7필, 역리 51명, 노비 24구이다[蘇山驛 在府北二十里 南距休山驛二十里 東距機張古村驛二十里 北距梁山渭川驛四十里 大馬一匹 中馬二匹 卜馬七匹 驛吏五十一人 奴二十四口]”라고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초에 그린 『부산 고지도(釜山古地圖)』의 제8폭에서 기찰을 지난 지점에서 소산역이 확인되고, 말을 탄 길손과 함께 소산역의 북쪽 멀리에 양산 경계의 사배현(沙背峴)도 확인된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소산역이 있었던 하정 마을을 역놈 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 시대 황산도(黃山道)에 속한 소산역은 영남 대로의 종결지인 동래 휴산역과 낙동강 하구의 양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의 동래성 전투에 관한 기록 중 소산역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1592년(선조 32) 4월 왜군이 동래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이 분투하는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두고 “소산역에서 진을 치고 협공하겠다”라는 핑계로 도망친 것으로 전한다.
소산역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부산 지역의 교통 네트워크를 확인할 수 있는 역참 시설로, 오늘날 산업화·도시화로 사라져 버린 영남 대로의 복원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지만, 당산나무가 베어짐으로 인해 중요한 상징이 사라진 것이다. 예컨대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이 일대가 소산역이 있었다고 비정되는 '수의상국이공만직영세불망비(繡衣相國李公萬稙永世不忘碑)나 '황산이방최연수애휼역졸비(黃山吏房崔延壽愛恤驛卒碑)' 등의 비를 발견한 장소도 실은 하정리 당산나무와 길섶이었다고 한다.
비는 1887년(고종15)과 1697년 (숙종23년)에 세워졌는데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과 300여년전이다. 기록된 문서나 비석이 아니면 어찌 감당하겠는가. 적어도 하정리 당산나무는 이만직의 불망비가 세워졌던 그 시절을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듯 허망히 베어져 사라진 것이다.
아 귀신은 어디갔노
Sister Golden Hair -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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