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박노자 지음|나무연필|2021.10.
박노자-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다.
박노자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 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난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귀화한 것은 스스로 한국사회에서 국적, 또 외국인과 내국인이라는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리트머스지가 될 것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노자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날카로운 논리로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 바 있다. 세계사를 보는 거시적인 혜안 속에서 치열하게 인문학적 성찰의 삶을 살아온 그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토종' 한국인보다 진한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한국을 잘 아는 외국인보다는 러시아를, 또 세계를 잘 아는 한국인에 가까운 그는 한국 사회를 그 주춧돌부터 다시 살펴본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믿고 살던 권위주의의 서까래며 집단이기주의의 기둥이 그 앞에서는 대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폐품이 되고 만다. 이제까지 나왔던 많은 한국인 비평, 비판보다 서너 길은 더 깊은 통찰이 있고 무엇보다 저자가 한국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 든든하다.
두 번째 책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는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회의 이모 저모를 소개하고 있다. 상하의 질서와 복종을 강조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문화와 달리, 다양성의 존중과 소박한 삶을 생활의 주요 철칙으로 여기고 있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평등한 인간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박노자는 북유럽 사회에 비추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되돌아보는데 그치지 않는다. 외견상 선진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제3세계에 대한 차별, 인종주의와 극우 민족주의의 발호 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면서 평화로운 일상에 젖은 그들보다 모순과 부조리를 뛰어넘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희망이 있음을 역설한다.
『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에서 보여주는 한국 사회는 '동양을 타자화하여 비화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인식'과 서양을 정형화·범주화하는 '서양/비서양'식의 이분법적 인식 속에 좀 더 원어에 가까운 영어 발음을 위해 아이의 혀에 가위를 들이대는 부모들이나 '영어공용화'가 식자층 사이에서 설득력 있게 논의되는 사회는 오리엔탈리즘이 지배하는 곳이다. 또한, 후세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미국과 유럽을 아무런 비판 없이 모범으로 삼을만한 미래로 여기는 자세에 대해서도 '맹목적'이라 일갈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 시선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그 시선을 만들어낸 곳이 어디인지, 우리 안에 있는 서구제국주의의 시각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근작으로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후퇴하는 민주주의』, 『씩씩한 남자 만들기』『리얼 진보』(공저)가 있다.
목차
머리말 _사회주의 운동, 그 ‘선구’의 의미를 되새기며
1강 신남철 _식민지 조선의 제국대학에 출현한 주체의 철학자
2강 박치우 _파시즘의 기원을 찾아 나선 이론가이자 비운의 빨치산
3강 임화 _한국적 근대의 근원을 모색한 유기적 지식인
4강 김명식 _식민지 시대 최고의 명필, 한국적 좌파의 토대를 마련하다
5강 남만춘과 김남겸 _조선과 러시아의 경계에서 사회주의를 꿈꾼 디아스포라들
6강 최성우와 양명 _모스크바에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본 급진파 조선인들
7강 한위건 _중국공산당의 노선을 파고들어 활약한 이념형 운동가
8강 허정숙 _붉은 페미니즘을 선도한 조선의 엘리트 신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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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세계를 자신의 시야에 두고 조선의 대안적 근대를 고민한 선구자들
그간의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이들의 이야기
일본의 식민지 출신으로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몸을 던지고 생각을 펼쳤던 이들의 열전이라니, 지금과는 자못 다른 시대의 소수파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오래전 역사의 뒤안길에 있던 이들의 발굴로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지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들의 고민이 대안적 근대의 정초를 마련하는 데 기반이 되었으며, 그것이 현재까지 유효하게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들은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근대인이었다. 달리 말하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논쟁적인 사안들을 앞서 고민한 이들이었다.
이들이 주로 활동한 시대는 세계사적으로 보면 매우 특별한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인 1918~1939년 사이, 일명 전간기(戰間期)로 불리는 때다. 이 시기는 세계 자본주의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던바, 전쟁 후의 혼란이 잦아들 무렵 세계 대공황이 밀려왔으며 불평등, 빈곤, 제국주의적 침략, 차별 등의 문제가 터져 나와 거의 전 세계가 혁명과 반란, 각종 독립운동의 화염에 휩싸이던 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미래를 고민하던 이들에게 그만큼 세상을 바꿀 꿈을 꾸는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선구자의 운명은 이러한 것일까. 냉혹한 현실 가운데서 미래를 바라보고 살았던 이들의 삶은 지독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정작 본인들의 미래는 대부분 고통과 때 이른 처참한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그야말로 당대의 최첨단에 서 있었다. 몸은 식민 치하의 조선에 있을지언정 시야를 넓혀 머나먼 서구 세계의 움직임과 이론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현실을 들여다보았다. 일본의 도쿄, 중국의 상해와 연안, 소련의 모스크바 등 한반도를 넘어선 곳들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혹독한 위기의 시대에 선구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려 했던 열 명의 사회주의자, 그들의 이야기
조선의 지식인 사회, 그 중심에 있던 사회주의자들
조선의 사회주의자로 필자가 가장 먼저 주목한 인물은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 학술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연구자 생활을 이어가다가 모교에서 교수를 지낸 철학자 신남철(申南澈, 1907~1958)이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운동으로서의 역사뿐만 아니라 사상으로서의 역사도 함께 짚어봐야 한다는 점에서 신남철을 우선 살펴보았다. 그는 해외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조선에서 원전을 읽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국내파로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경성제대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주의 이론을 생산하는 기관이었다. 일본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식민지 대학의 교수직은 마음 편치 않은 자리였다. 그럼에도 본국과의 거리감 때문인지 특히 경성제대 철학과는 일본 학계와 견주어보더라도 리버럴한 분위기였다. 이곳의 교수였던 사회주의자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는 조선의 노동운동가 이재유를 교수 관사 지하 토굴에 숨겨주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신남철은 바로 그의 제자로 마르크스의 저작을 독일어 원전으로 배우면서 19세기의 유럽 문화까지 폭넓게 학습한, 세계성을 바탕으로 조선의 문제를 고민한 연구자다.
그는 집단적 투쟁을 벌일 수 있는 개성적이고 실천적인 개인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관념주의자가 전체주의에 이용될 수 있는 측면을 잘 지적한 이성의 철학자였다. 또한 주변부 국가의 인텔리로서 변혁운동에 한발 들이게 된 자신을 규명해보려는 시도였는지,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 혁명 전위가 만들어지는 상황을 왕양명의 지행일치 철학과 결부해 설명하기도 했다. 신남철은 해방 이후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 교수로 북한 철학계의 초기 기틀을 마련했으나, 주류에서 밀려난 뒤 병사한다. 남한에서는 월북 때문에, 북한에서는 주류에서 밀려났기에, 서서히 잊히며 재조명하기 어려웠던 안타까운 인물이다.
경성제대 철학과를 거치며 사회주의자가 된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박치우(朴致祐, 1909~1949)다. 신남철이 연구자로 자리매김했다면, 박치우는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현실에 적극 개입하기도 한 인물이다. 잠시 숭의실업전문학교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하자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다양한 논의를 벌여 나갔다. 해방 뒤에는 박헌영과 뜻을 같이하며 활동하다가 월북한 뒤 빨치산 양성 기관인 강동정치학원에서 정치부원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그 스스로 빨치산이 되어 남한으로 내려왔고, 결국 태백산 지구 전투에서 사살된다.
이처럼 극적인 삶을 살아간 박치우는 개념사 정리가 돋보이는 철학자였다. 고대 그리스의 자유 개념에서부터 부르주아의 자유주의를 거쳐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자유와 개인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그의 글을 보면, 그의 사유가 과거를 아우르면서도 현재적이고 세부를 들여다보면서도 폭넓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전 세계를 제패하기 위한 침략을 서슴지 않던 상황에서 파시즘의 뿌리를 탁월하게 분석해낸 이론가이기도 하다.
한편 이 책에서 다룬 인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이는 바로 임화(林和, 1908~1953)일 것이다. 혁명적 낭만 시인이자 유기적 문예를 주창한 이론가 임화는 민족 문학과 계급 문학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고민한 지식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사회주의 운동사의 산증인이었으나 일제 말기에는 소극적으로나마 부역을 했고, 미제의 고용 간첩이었다는 누명을 쓰면서 북한에서 숙청된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필자는 임화가 당대의 주류 신화에 도전하며 보여준 방법론을 눈여겨본다. 주류 세력들이 즐겨 쓰던 ‘객관성’ ‘자유’ ‘순수예술’ 같은 개념들을 역사적으로 맥락화하여 그 이면을 드러내고, 그것이 왜 주류 세력의 신화인지 설명해내는 지점에 주목해본 것이다. 이는 필자가 모든 담론 가운데 계급적 의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면서 그 주관성을 들춰내는 임화의 방법론이 지금도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주의 양반가 출신으로 식민지 시대 최고의 명필로 불렸지만 우리에게는 잊힌 사회주의자 김명식(金明植, 1890~1943)은 그야말로 달필에다가 한국적 좌파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지적인 압축 성장의 시기를 살아가던 조선 사회주의자 1세대들의 도약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즉 그는 양반가의 자제로 전근대적 풍토에서 성장했으며 일본 유학을 거치면서 급진적 근대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다가 사회주의자로까지 나아간다.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선비로서의 뜻을 품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자로서 민족 문제와 근대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그는 민족이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직시하면서 이를 조선에 대입해보려 했다. 그런 과정에서 당대 민족주의의 거두였던 이광수와 거침없는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마르크스주의적인 민족주의 비판론을 대중화한다. 또한 식민 치하에서 명실상부한 자본주의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리면서, 파시즘의 발생 과정을 비롯해 그 과정에서 주변화한 중산계층과 금융자본의 역할, 근대 자본주의의 내재적 진화 논리와 파시즘 사이의 관계도 정밀히 연구한다. 그의 존재는 오랫동안 남과 북에서 망각되었다. 하지만 식민 치하에서 그의 글을 읽은 이들이 차후 남북을 이끄는 지식인 집단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가 닦아놓은 한국적 좌파의 명맥은 초기의 북한을 비롯해 남한에도 가녀리게나마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수자로서 세계의 중심에 뛰어들어 조국을 고민했던 이들
이 책이 조명한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남만춘(南萬春, 1892~1938)과 김만겸(金萬謙, 1886~1938)은 유독 많이 가려져 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재러조선인 2세 출신, 즉 디아스포라로 사회주의 활동의 세계적 중심지였던 러시아와 자신의 조국 사이에서 활동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은 러시아에서는 소수자 지식인이었고 조선에서는 조선인 활동가였다.
사실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서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고 유포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접경인들이었다. 조선에서는 남만춘과 김만겸 같은 디아스포라들이 급진화되어서 볼셰비키에 입당하고 조선 사회주의 운동에도 이바지한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와 조선을 오가고, 조선에서 러시아로 망명한 사회주의자들과 교유하며 보다 넓은 시야로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특히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적 조선 근대사론인 『압박받는 고려』를 통해 조선의 좌파에게 영향을 미친 남만춘의 기여는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 근현대 사회사 연구의 선구자로서 러시아 현지에서 활약했던 최성우(崔聖禹, 1898~1937)와 양명(梁明, 1902~?) 역시 주목해볼 만하다. 최성우는 남만춘, 김만겸과 마찬가지로 재러조선인 2세이면서 코민테른의 중심에서 활동한 인물이고, 양명은 중국 유학을 거쳤다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뒤 상해와 모스크바를 무대로 활약한 인물이다. 중앙의 이론적인 틀로 주변부를 바라보고 주변부의 상황을 중앙에 전달하는 중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두 인물은 특히 이론가로서 주목할 만한데, 이들의 몸은 머나먼 타국에 있었지만 이들의 식민지 시대 조선에 대한 관찰은 상당히 치밀했다. 급진파 사회주의자로서 밑에서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폭동과 소요를 비롯해 조선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는 사건들에 하나하나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운동가로서 민중의 흐름을 열심히 추적하며 이를 바탕으로 이론을 만들어낸 이들이다.
한편 한위건(韓偉健, 1896~1937)은 중국공산당에서 활약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해로 피신했으며, 이후 도쿄로 유학하여 와세다대 정치경제과에 다녔다. 급진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던 그는 유학에서 돌아와 《동아일보》의 기자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사회주의자로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1928년 지하 조선공산당이 무너지면서 일제의 검거를 피해야 했기에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렇게 중국으로 거처를 옮긴 한위건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상당히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활동하는데, 당시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영도권을 쥐고 있던 왕밍(王明)의 노선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주목받는다. 이후 마오쩌둥은 자신의 전집에서 실사구시한 사람, 빈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유물론적·변증법적 혁명관의 소유자로 한위건을 묘사하기도 했다. 조선, 일본, 중국에서 모두 살아본 노련한 운동가로서 그의 급진적 대중 노선은 중국공산당에 여파를 드리운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마지막 인물은 붉은 페미니즘을 선도한 조선의 엘리트 여성 허정숙(許貞淑, 1908~1991)이다.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를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도 한 그녀는 일본, 중국, 미국 등 다양한 나라를 돌아보았고, 일본어, 중국어, 영어, 러시아어까지 구사할 줄 알았던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하는 운동가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해서는 조선의용대로 활동하며 여전사이자 정치 지도자로 활약한다. 그리고 당대의 수많은 신여성들에게 드리워져 있던 가십의 회오리바람에서 줄곧 중심에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사회의 최전선에 서 있던 그녀가 월북한 뒤의 행보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을지 모르겠다. 1920~30년대에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활동한 허정숙이 김일성이라는 최고의 가부장과 타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를 힘센 이와 힘 약한 이의 동맹에 가까웠다고 평한다. 급진 페미니스트였던 그녀가 체제에 편입되어서 만든 젠더 정책의 급진성 또한 다시금 주목해볼 만한 지점이다.
책속으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대부분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자들의 승리가 영구적이고 불가역적인 것일까요? 상당수의 노동자들을 그때그때 이용했다가 쉽게 해고해도 되는 일회용 ‘나사’처럼 취급하는 후기 자본주의는 지금 20세기 초반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양극화를 낳고 기후 위기까지 몰고 와 장기적으로 지구의 미래 자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모범생이 된 대한민국은 집값, 양육비 등의 상승 때문에 출산율이 0.84명으로 떨어져서 2021년 유엔인구기금의 「세계인구현황보고서」에 의하면 조사 대상 198개국 중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입니다. 언론에서는 ‘선진국’으로 인정을 받았다며 자축하는 분위기지만, 오늘날과 같은 경제·사회 모델이 궁극적으로 한국인의 ‘자멸’을 낳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p.11~12
신남철은 인텔리들이 왜 세상을 바꾸려는 에너지로 충만해야 하며 혁명에 나서야 하는지에 대해 답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인텔리들은 노동계급도 아니고, 대개의 경우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도 않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그런 험난한 일에 나서야만 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신남철의 결론이었습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까지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알게 되면 결국 변혁 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최후의 혹은 최대의 앎이란 곧 자기희생입니다. 무언가를 몸소 알고 실천하다 보면 결국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이처럼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숭고함은 헤겔 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p.47~48
저는 해방 이후 박치우가 처한 상황이나 그의 선택을 떠올리면서 비장미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박치우는 남로당 소속으로 소련 문서에 박헌영의 수행비서로 묘사될 만큼 그와 가까웠습니다. 월북한 뒤에는 빨치산이 될 사람들을 가르치는 강동정치학원의 정치부원장으로 활동했고, 결국 그 자신도 빨치산이 되어서 교전하다가 죽고 맙니다. 살아남았더라도 남로당 출신이었으니 북한에서는 이후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테고, 남한에서도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밖에 없었을 겁니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인물에게서 비장미를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 거예요.--- p.58
무엇보다도 지금 임화를 참조할 만한 지점은, 주류 사회의 신화에 도전하는 그의 방법론일 겁니다. 임화는 분석적인 역사화와 맥락화를 통해 자유와 객관성의 신화를 파괴합니다. 누구를 위한 자유인지, 어느 위치에 서 있는 누구의 객관인지 질문하지요. 모든 담론 가운데 계급적 의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면서 그 주관성을 들춰내고요. 그가 보여준 역사화와 맥락화라는 방법론은 여전히 우리가 소중하게 살펴야 할 이론일 겁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런 방법론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p.119~120
김명식이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남과 북에서 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은 이들이 차후 남북을 이끄는 지식인 집단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가 닦아놓은 한국적 좌파의 명맥은 초기의 북한을 비롯해 남한에도 가녀리게나마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령 북한에서는 1950~60년대만 해도 민족을 혈통 개념으로 보지 않았어요. 사회주의의 자장 안에 있던 이들이 민족을 넘어선 공동체에 대한 이해의 틀을 제시했던 거예요. 혈통을 민족의 정의에 추가한 것은 1970년대이지요. 비록 김명식은 요절했지만, 그와 같은 이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되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게 가능했을 겁니다.--- p.152
남만춘과 김만겸은 1920년대 초반에 ‘소비에트 조선의 건설’ 같은 초좌파적 구호도 내세웠지만, 실제로 이들에게 사회주의 운동은 소수민족과 여성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해방적 근대를 꿈꾸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세계 체제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아우르면서 거대 담론을 구축할 자질이 있던 디아스포라들이 조선 사회에 했던 역할을 우리는 지금 다시금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p.189~190
이들 (최성우와 양명)은 중앙의 이론적인 틀로 주변부를 바라보고, 주변부의 상황을 중앙에 전달한 중재자였습니다. 국제 사회에 조선의 상황을 번역해 전해준 이들이었지요. 그러면서도 밑에서의 움직임에 대단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폭동과 소요를 비롯해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는 사건들을 자신의 글에서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이들에게 민중의 폭발은 생명과도 같은 일이었어요. 공산당이 이 민중들을 지도했든 안 했든 간에, 이들의 시선은 민중의 움직임과 흐름을 열심히 추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것이 연구자이자 활동가였던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공부하면서 활동하고, 활동하면서도 이론화 작업을 하는 것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큰 힘 중 하나였어요.--- p.227
한위건이 지식인 중심 운동의 약점을 비롯해서 그 당시의 운동권 내부 문화의 전근대성과 비민주성을 매우 자세하고 정확하게 지적한 점은 새겨볼 만합니다. 또한 민족주의 세력이 민중에 대해 군림하려 하면서 극우적인 장제스 독재 모델을 지향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정곡을 찌른 비판이었지요. 한위건이 생각했던 공산당의 노선은 급진적 대중 노선이었는데, 이는 조선, 일본, 중국에서 모두 살아보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까지 했던 노련한 운동가가 자기 운동 인생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p.260
허정숙은 여성 관련 정책의 입안자로 북한에서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북한은 정권 초기부터 대단히 급진적인 여성 정책을 시행합니다. 1946년에 양성평등법이 제정되었고, 매매춘도 금지됩니다. 일부일처제가 철저해지고 이혼이 자유로워졌는데, 1956년에 이르면 재판을 통한 이혼만 허용되는 등 여성 정책이 다소 퇴보하지요. 하지만 모성 보호와 관련해 산모의 휴가 기간은 계속 늘어나서 출산 전에는 30일, 출산 후에는 60일까지 휴가가 보장됩니다. 이와 같은 진보적 여성 정책은 허정숙 같은 이들이 주도해서 만든 겁니다. 북한에서 그녀는 체제를 비판할 순 없었습니다. 그렇게 타협해야 했지만, 내부에서 여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 나름의 노력을 했던 점은 인정해야 할 겁니다. --- p.291~292
시베리아·도쿄·경성에서 새 조선을 꿈꾸다…‘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 경향신문 대안적 근대의 정초를 마련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 왼쪽부터 남만춘, 김만겸, 박치우, 임화, 허정숙. | 나무연필 제공
마르크스주의가 한반도에 유입된 경로는 크게 세 가지다. 일단 ‘혁명의 나라’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직접 배우고 경험한 이들이 있었다. 러시아에서 이주민 2세로 태어났던 남만춘(1892~1933), 모스크바의 국제 레닌대학에 유학했던 박헌영(1900~1955) 같은 이들이 그런 경우다.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들도 있다. 1922년 도쿄에서 결성된 유학생 사회주의자 그룹 ‘북성회’의 멤버들이 대표적이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에 유학했던 김명식(1890~1943)도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고 귀국해 논객으로 활약했다. 또 하나의 경로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성제국대학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설립한 이 대학의 교수 중에는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었다. 철학과의 미야케 시카노스케(1898~1982)가 대표적이다. 그에게 배운 조선인 제자들도 스승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강의하는 박노자 교수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책을 내놨다.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10명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평전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철학자 신남철(1907~1958)이다.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27년 경성제대 철학과에 입학, 시카노스케 교수의 제자가 됐다.1931년부터 조교 생활을 하면서 스승과의 학연을 이어갔다.“문학 소년 출신”이었던 그는 1933년부터 약 3년간 동아일보 학술 담당 기자로 일하며 문예비평을 쓰기도 했다. 특히 하이네를 좋아했다.‘혁명 시인 하이네, 이성과 낭만의 이원고(二元苦)와 철학’(〈동광〉, 1931)은 경성제대 졸업 직후의 글이었다. 1930년대 조선의 지식사회에까지 불어닥친 하이데거 열풍에 대해서는 ‘나치스의 철학자 하이데거’(〈신동아〉, 1934)라는 글로 대응했다.
저자는 ‘주체’(主體)라는 단어를 빈번히 사용했던 신남철에 대해 “주체적 개인이 출현하지 않으면 해방적 근대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지녔던 철학자”라고 평한다. “전 세계를 시야에 두면서도 구체성을 놓지 않는 길을 고민했다” “보편적 세계사 속에서 조선을 모색했다”는 평가도 이어진다. 신남철은 해방 후 월북해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56년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숙청(8월 종파 사건)의 바람 앞에 위기를 맞았다. “남한의 인텔리 출신” “자유주의자”로 비판받으면서 대학에서 밀려나 2년 뒤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저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모스크바에 유학했던 이들이 돌아와 김일성대학의 실권을 잡던 시기”라면서 “황장엽도 그런 인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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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춘과 김만겸(1886~1938)은 그간의 국내 사회주의 운동사에서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시베리아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주요 활동가였다. 물론 이르쿠츠크파 멤버들 중에는 여운형(1886~1947), 안병찬(1854~1921) 같은 국내 출신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핵심은 “조선인이면서도 조선인이 아닌 이들, 바로 재러조선인 2세들”이었다. 남만춘은 러시아 극동부의 블라고슬로벤노예에서 태어났다. 김만겸은 함경북도 경원군 태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저자는 “재러조선인 2세대”로 설명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사회주의로 넘어간 경우”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조선과 러시아의 경계에서 사회주의를 꿈꾼 디아스포라들”이었다. 러시아 볼셰비키에 입당했던 두 사람은 러시아와 조선을 오가면서 “보다 넓은 시야로 조선사회를 바라보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조선공산당의 핵심 분파인 ‘화요회’의 이론적 멘토가 바로 두 사람이었다.
저자는 “디아스포라 지식인들”에게 적잖은 지면을 할애하는데, 남만춘과 김만겸 외에 최성우(1898~1937)와 양명(1902~?)도 그런 경우다. 최성우도 재러조선인 2세였으며 코민테른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양명은 중국 베이징대학에 유학하면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했으며, 1925년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일보에 다니면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상하이와 모스크바를 무대로 활약했다. 저자는 “급진파 사회주의자였던 두 사람은 특히 이론가로서 주목할 만하다”며 “몸은 먼 타국에 있었지만 식민지 조선에 대한 관찰은 치밀했다”고 평한다.
박치우(1909~1949)는 “파시즘의 기원을 찾아나선 이론가이자 비운의 빨치산”이었다. 임화(1908~1953)는 “한국적 근대를 모색한 유기적 지식인”이었으며, 김명식(1890~1943)은 “식민지시대 최고의 문장가, 한국적 좌파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국제주의적 연대를 중시”했던 한위건(1896~1937)은 “중국공산당 노선을 파고들어 활약한 이념형 운동가”였다
마지막 챕터에 나오는 인물은 허정숙(1902~1991)이다.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하는 그는 상당한 재산가이자 변호사였던 허헌(1884~1951, 김일성대학 초대 총장)의 딸이었다. 1920년대 신문에 “조선의 콜론타이”로 소개되곤 했다. 러시아의 급진 페미니스트였던 콜론타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언어 능력이 출중했다. 허정숙도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했다. 두 사람은 자유분방한 연애로도 유명했다. 허정숙은 1947년경 “아버지를 따르던 수십명의 사람들과 함께 월북”했으며, “이후로는 국가 가부장 체제를 용인”하며 살았다. 저자는 “낯 뜨거울 정도로 김일성을 찬양했던”, 월북 이후 허정숙의 면모에 대해 “힘센 이와 약한 이의 동맹”이라고 평한다.
10인은 허정숙 등을 제외하곤 대부분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저자는 “대안적 근대의 정초를 마련한 인물들, 지금의 우리에게도 논쟁적 사안을 앞서 고민했던 사회주의자들” “혹독한 시기에 선구적으로 미래를 내다본 이들”이라고 일괄한다. 특히 기존의 조선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별로 중시하지 않았던 “디아스포라 사회주의자들”을, 저자는 각별한 애정과 관심으로 복원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예수는 모든 조직의 적이었던 순교자, 니체는 이기주의자”
한 라이너.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삼일절이나 광복절이 오면 곧잘 일제 잔재를 이야기하지만, 일본식 용어 몇 마디를 따지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더 중요한 잔재는 사상이다. 그 중 하나가 전체주의 내지 집단주의로 이는 남북한 모두에게 공유된 일제의 잔재다. 그것이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를 배경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적인 의미의 전체주의는 일제 이후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특히 일제 말의 ‘귀축 미영의 사상’으로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철저히 배척되었다. 해방 후에도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프티부르주아 사상으로 매도되었다. 북한에서는 지금까지 그렇지만 남한에서도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 내지 국가주의자들에 의해 그런 경향이 남아 있다. 특히 헌법에도 규정되고 정치적으로도 애용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달리 개인주의는 여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개인주의자’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돌아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개인주의자라고 하면 어떨까? 개인주의를 “어떤 도그마, 전통, 외부의 결정에도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양심에만 호소하는 도덕적 교리”라고 정의한 한 라이너(Han Ryner, 1861~1938)가 예로 든 대표적 개인주의자가 바로 소크라테스와 예수인데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정의된 개인주의의 전형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 두 사람을 좋아하지만 조국인 아테네의 민주주의보다 적국인 스파르타의 전체주의를 좋아한 소크라테스보다는 열두 명의 사도들과 함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어 방랑을 하다가 처형 당한 예수를 좋아한다. 반면 라이너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외부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 안에서 진리를 찾도록 가르쳤고 그 결과 도시가 숭배하는 신을 존중하지 않고 청소년을 부패시켰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고백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결국 그는 법과 판사들에 의해 비난 받고 개인주의의 순교자인 도시에 의해 암살당해 죽었다.“고 보았다.
라이너에 의하면 예수는 “자유롭게 살고 방랑자였으며 어떤 사회적 관계와도 무관했다. 그는 사제, 외부 컬트 및 일반적으로 모든 조직의 적”이었고 “사제들에 의해 쫓기고 사법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예수는 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는 종교의 가장 유명한 희생자이며 개인주의에 대한 가장 유명한 순교자”다. 그런 예수를 좋아하는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서 그를 숭배하지 않는다. 예수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처럼 살려고 하지 않고 예수를 무조건 숭배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니체가 정치했다면 지배자 아니라 복종자 됐을 것”
라이너는 에피쿠로스와 에픽테투스도 개인주의자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절제를 존중하며 “다른 모든 필요, 즉 거의 모든 욕망과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자연적이고 필요한 욕망, 둘째 자연적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욕망, 셋째 자연적이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는 욕망이다. 그 중 첫째는 행복의 절대조건으로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일단 충족되면 더 이상 요구되지는 않는 것으로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다. 반면 둘째와 셋째 욕망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인데, 특히 셋째는 우리의 적으로서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둘째도 무리 없이 충족되는 경우에만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행복도, 자유도 있을 수 없다. 또 라이너는 “스토아학파인 에픽테투스는 용감하게 가난과 자신의 노예 신분을 지켰다. 그는 평범한 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완벽하게 행복했다”고 했다.
에피쿠로스
라이너는 그 밖에도 안티스테네스와 디오게네스, 제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등을 개인주의자로 보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는 앞에서 본 네 사람과는 달리 인색하다. 가령 안티스테네스와 디오게네스의 가르침은 스토아주의의 스케치에 불과하고,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이며, 데카르트는 지적 개인주의자이고, 스피노자는 독선적이라고 비판한다. 라이너가 스피노자에 대해 내린 “그는 몇 알갱이와 약간의 우유 수프를 먹고 겸손하게 살았다. 그에게 제공된 의자를 거부하면서 그는 항상 육체노동을 통해 일용할 양식을 얻었다. 그의 도덕적 교리는 금욕적인 신비주의다. 그러나 너무나 지적이어서 그는 이상한 절대주의적 정치를 고백했고, 권력에 직면하여 생각의 자유만을 유보했다. 어쨌든 그의 이름은 위대한 도덕적 아름다움보다 형이상학적 힘을 더 많이 염두에 두고 있다”는 평가는 옳다. 또 데카르트에 대해 “지적인 개인주의자지 도덕적인 개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실제 도덕성은 스토아학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주의와 반대로 법과 관습에 순종할 것을 권고하는 ‘잠정적 도덕성’만을 알려주었다. 더욱이 그는 다른 상황에서 철학적 용기가 부족한 것 같다”고 한 것도 옳다. 그러나 나는 앞선 글에서 보았듯이 적어도 디오게네스와 제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라이너가 비겁한 에고이스트라고 비판한 몽테뉴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라이너는 개인이 의지 할 수 있는 힘으로서 주관적 의지를 강조했지만, 그가 정의한 이러한 개인주의자들로부터 그는 스탕달과 니체와 같이 “자신을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한 정복적이고 공격적인 이기주의자”를 구별했다. 라이너에 의하면 힘으로 행하고자 하는 니체의 개인주의는 그가 말한 초인에게만 적용되는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초인주의를 주장한 니체를 개인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노예적인 존재를 필요로 하는 자는 허위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즉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두렵게 하거나 마음에도 없이 사랑하거나 속임수 등의 무리한 수단으로 억누르는 것 외에는 주인공이 될 수 없어서 그 결과 자신이 노예의 노예가 되므로 개인주의와는 가장 먼 존재가 된다. 니체는 한 번도 정치를 한 적이 없지만 만일 그가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고자 했다면 “훌륭한 지배자가 아니라 가장 불쌍한 복종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라이너는 보았다. 니체에 호의적인 자들은 흔히 니체를 프러시아 군사 국가를 싫어했다고 하면서 그가 나치스에게 악용 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라이너는 니체의 초인주의를 노예주의로 비판한 것이었다.
한 라이너, 제국주의 근대의 양심
한 라이너는 프랑스의 개인주의 아나키즘의 철학자이자 활동가이자 소설가였던 바크 엥르 앙리 암브로와즈 네르(Jacques Élie Henri Ambroise Ner)의 가명이다. 전자의 이름이 더 유명하므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의 시골에 살았던 겸손한 종교적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죽은 후 가톨릭을 포기하고 사회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94~1895년에 두 편의 소설을 출간한 뒤에 언론인과 교사를 지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작가가 되었고 1896년부터 한 라이너라는 가명으로 여러 개인주의 아나키스트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글이 위에서 소개한 내용을 담은 1903년의 「개인주의 미니매뉴얼(Petit manuel personaliste)」이었다.
사회를 “공동 노동을 위한 개인들의 모임”으로 정의한 라이너는 사회의 악에서 무관심을 키우는 것에 대한 개인의 저항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행복을 자신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사회는 자연적 노동의 위대한 도구인 지구를 소수에게 넘기기 위해 모든 사람으로부터 훔쳤다"고 생각하고 군중을 ”가장 잔인한 자연의 힘“으로 보고 거부했다. 그는 노동을 사회에 의해 악화되는 악으로 보았다. “첫째, 그것은 모든 노동에서 특정한 수의 사람들을 임의로 떼어내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준다. 둘째, 그것은 쓸데없는 노동과 사회적 기능에 많은 사람을 고용한다. 셋째, 그것은 모든 사람 사이에서, 특히 부유하고 상상의 필요 사이에서 배가되고,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끔찍한 노동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한다.”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왼쪽)와 니콜라 사코. 이탈리아계 미국인 무정부주의자들로 1920년 무장강도 및 살인 혐의로 체포돼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증거, 증언 등이 어긋났음에도 석연치 않은 재판이 이어졌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사면 운동이 일었으나 둘은 끝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진=위키피디아
독일의 개인주의 아나키스트인 슈티르너에 따라 그는 “특정 국가들에서는 왕이나 황제, 다른 나라에서는 인민의 의지라고 불리는 사기, 질서, 정당, 종교, 조국, 인종, 피부색과 같은 외부의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희생”을 거부했다. 피부색은 인종을 의미했으며 “백인은 특히 프랑스, 독일, 러시아 및 이탈리아인을 하나의 컬트로 통합하고, 이 고귀한 사제들은 수많은 중국인들을 피의 제물로 삼았다. 아프리카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파괴하고 흑인들을 린치한 것도 그들이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복이 번성한 시대에 거의 유일한 양심적 발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자 평화주의 와 반전을 주장하며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나키스트인 사코(Nicola Sacco, 1891~1927)와 반제티(Bartolomeo Vanzetti, 1888~1927),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마흐노(Nestor Makhno, 1888~1934) 등을 위해 활동을 한 점에서도 그는 당대 유럽 지식인 중에서 보기 드문 양심이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교수신문 2021.05.17.
권위를 부정하고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
‘라 뤼세’(La Ruche)
예술가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한 파리 15구의 몽파르나스에 ‘벌집’이라는 뜻의 ‘라 뤼세’(La Ruche)라는 특이한 건물이 있다. 지금은 약 50 명의 예술가의 작업장과 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같은 이름의 기숙학교가 20세기 초엽에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랍부예(Rambouillet)에 있었다. 1904년 1월부터 1917년 2월까지 13년간 운영된 이 학교는 아이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의 자율성을 장악하고 연대감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도록 열렸다. 자유롭고 형제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자유의 실천, 평등주의적이고 자율주의적 사회적 맥락에서 개인이 평등주의적이고 자율주의적 가치와 행동 양식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 설립자인 아나키스트 세바스티앙 포르(Sébastien Faure, 1858~1942)는 러시아의 소설가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 프랑스의 교육가 폴 로뱅(Paul Robin, 1837~1912), 스페인의 교육가 프란시스코 페레르(Francisco Ferrer)의 자유교육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로뱅이 1869년에 체계화한 통합교육이론을 1880년부터 1894년까지 켐푸이스(Cempuis)에서 시도한 실험교육의 영향이 컸다. 어린이의 예술적 방향을 개발하고 어린이의 욕구를 고려하며 남녀 공학을 하는 것이 기본규칙이었고, 매년 여름 등 2개월 동안 바다로 데리고 가는 것을 포함한 육체적, 지적 교육은 19개의 서로 다른 워크숍으로 보완되어 적어도 한 번의 완전한 직업(제빵, 인쇄, 사진, 벽돌 등) 형성을 제공했다.
세바스티앙 포르(Sébastien Faure, 1858~1942)
교육에 대한 포르의 견해는 인간의 모든 면이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확인했다. 그는 남성이나 여성이 신체적 수작업을 수행하고 최소한의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존중하고 상호적이며 평등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강의 투어와 지역 사회의 노동과 클럽, 협회, 노동조합, 협동조합 등이 모금한 돈으로 당시 꽤 큰 농가, 과수원, 숲, 초원 및 경작지가 있었던 시골 지역에 25헥타르의 토지를 임대하고 3년 만에 자급자족을 이루어 내었다.
육체와 정신 함께 가꾸는 아나키즘 아카데미
처음에는 20명으로 시작했으나 뒤에 약 40명의 소년(6~13세)과 20명의 도우미가 포함되었다. 모든 학생은 자발적으로 기부하고 무료로 입학했다. 포르의 협력자들은 지역 안팎에서 살았으며 특정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다. 그들은 지역 사회의 문제와 논란을 조사하고 관련 결정과 옵션을 해결하기 위해 때때로 소년들의 자유롭고 비공식적인 면전에서 매주 회의를 열었다. 모든 것은 자율적이었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자발적으로 의무를 받아 들였다. 개인의 책임을 지배하는 것은 그의 능력과 양심뿐이었다. 교육의 목표는 건강하고 균형 잡히고 개방적이며 배운 수작업 기술을 생산하는 교육 및 훈련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미래의 남녀를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야외 생활, 건강관리 및 위생, 건강한 식단, 경쟁과 무관하게 즐거움만을 위한 여러 스포츠에 참여하고, 걷기와 춤에 중점을 두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과학적 사고방식에 따라 비교리적 관찰력과 비판적 교수진을 육성하기 위한 합리적 학교 교육이 있었다. 그리고 성인과 어린이 사이의 토론, 성교육, 처벌이나 상벌의 부재가 특징이었다.
다수의 방문객들은 아이디어와 경험을 교환하고 기여를 높이고 식민지와 주민들을 풍요롭게 하는 기술을 모색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름철에 아이들은 길고 흥미로운 그룹 여행을 했고 합창단원들은 스위스나 알제리와 같은 먼 곳으로 모험을 떠났다. 이 모든 것이 다른 지역과 외국에서 새로운 실험과 아나키즘적 아이디어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14년부터 포르는 1천명 이상의 구독자를 끌어 들였지만 10호로 끝난 잡지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학교는 문을 닫았다.
주간지 '르 리베테르(Le Libertaire)'
프랑스 아나키즘 교육의 선구자이자 아나키스트 운동의 주역이었던 포르는 부유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험 회사에서 일했고 군 복무 후 영국에서 1년을 보낸 뒤 결혼하여 보르도에서 살았다. 그 뒤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나 르클뤼와 크로포트킨의 글을 읽고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 뒤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그와 뜻을 달리한 아내와도 헤어진 뒤 1888년에 파리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대중 연설자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독창적인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여러 경향의 아나키즘을 망라하는 종합적인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1890년대 후반의 새로운 생디칼리스트 운동에 확신이 없었지만 그 자신은 활동적인 노동조합원이었고, 개인주의자는 아니지만 개인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폭력적인 방법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 방법을 사용한 사람들에게 공감했다. 그는 결코 단순한 안락의자 이론가가 아니라 자주 수색, 체포 또는 기소를 당했고 때때로 그의 활동으로 인해 투옥되었다. 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항하는 투쟁을 전파한 그는 1895년에 루이즈 미셸과 함께 주간지 <르 리베테르(Le Libertaire)>를 시작해 리버테리안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1898년 이후에는 드레퓌스를 위해 일했다. 1903년부터는 피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04년부터는 위에서 설명한 교육에 종사하고 제1차 대전 중에는 평화주의와 반군사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백과사전 쓰고 노선 종합해낸 아나키즘 큰손
1920년대 후반에 포르는 종파주의에 반대하고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집단주의적 아나키즘, 생디칼리슴적 아나키즘이 공존할 수 있는 '종합 아나키즘'(Synthesis anarchism, 종합주의자 아나키즘synthesist anarchism이라고도 한다)을 옹호했다. 종합 아나키즘이란 참여자에 대한 다양성을 추구하고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의 원칙에 따라 서로 다른 경향의 아나키스트에 합류하려는 아나키스트 조직의 한 형태를 말한다. 포르에 의하면 “이러한 흐름들은 모순되지 않고 보완적이며, 각각 아나키즘 내에서 역할을 했다. 즉 대중 조직의 힘이자 아나키즘의 실행을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서의 생디칼리슴적 아나키즘, 각자의 필요에 따라 노동의 과실을 분배하는 것에 근거해 제안된 미래 사회로서의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그리고 억압의 부정과 모든 면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려는 개인의 발전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긍정으로서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공존이다.” 종합 아나키즘은 1880년대부터 소위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제안되었으나,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 1853~1932)와 함께 포르가 가장 중요한 추진자라고 할 수 있다.
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 1853~1932)
그러한 추진의 일환으로 그는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수많은 전문가를 동원하여 거의 3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아나키스트 백과사전(L 'Encyclopedie Anarchist)』 4권을 편집하고 발간했다. 그 사전에서 러시아 아나키스트인 볼린(Volin, 본명은 Vsevolod Mikhailovich Eikhenbaum, 1882~1945)은 ‘종합 아나키즘’ 항목에서 “운동을 통합하기 위해 모든 진지한 아나키스트들이 수용해야 하는 세 가지 핵심 아이디어”를 “1. 사회 혁명의 진정한 방법론을 가리키는 생디칼리즘 원칙의 확실한 수용. 2.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직적 기반을 마련하는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의 원칙의 확실한 수용. 3. 개인의 완전한 해방과 행복이 사회 혁명과 새로운 사회의 진정한 목표가 된다는 개인주의 원칙에 대한 확실한 수용”이라고 했다. 포르 자신은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라고 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3
극우∙극좌 오간 변절자를 이해하라고? 천만에
조르주 소렐
조르주 외젠 소렐(Georges Eugène Sorel, 1847~ 1922)은 흔히 아나키스트로 소개되지만, 나는 그를 아나키스트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다.
지금까지 아나키스트로 소개한 사람들 중에 그들을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는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고드윈, 슈티르너,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과 같은 고전적인 아나키즘 이론가들만 아나키스트로 보는 사람들은 특히 내가 종교인들이나 교육학자, 또는 화가나 작가나 시인, 심지어 가수들을 아나키스트로 보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을 다루면서 설명했듯이 아나키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들은 종교인, 예술가, 교육자들이다. 이는 종교, 교육, 예술이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반국가적이고 반권력적이며 반자본적이고 반물질적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아나키즘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우리의 종교, 교육, 예술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점을 더 강조하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지금 소개하려는 조르주 외젠 소렐(Georges Eugène Sorel, 1847~ 1922)은 흔히 아나키스트로 소개되지만, 나는 그를 아나키스트로 소개하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어서 그에 대한 이 글을 쓰는 데 무척이나 망설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폭력주의자이고 그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레닌의 볼셰비즘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아나키즘은 절대로 어울릴 수 없으며 극좌와 극우를 몇 번이나 오간, 그야말로 카멜레온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런 변절을 옳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소렐에 대해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소렐이 그렇게 변절한 것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 시대 이상으로 복잡한 양상인 우리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렇게 변절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너그럽게 봐주지는 못한다. 프랑스의 100년 전이 지금 우리보다 더 복잡해서 그런 변절을 이해하라고? 천만에. 그렇게 변절하지 않고, 그런 변절을 욕하며 일관되게 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제와 박정희와 김일성과 노무현을 모두 추종한 셈
꼭 나와 같은 생각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우리에게 소렐의 소개는 너무나 늦었다. 1908년에 나온 『폭력에 대한 성찰』은 1세기 뒤인 2007년에, 같은 1908년에 나온 『진보의 환상』은 112년 뒤인 2020년에야 번역되었다. 너무나 늦었음에도 그렇게라도 소개되는 것에 의미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 책들이 지금 우리에게 모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동서양 학술명저 번역총서’ 따위로 번역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소렐의 의미를 프레포지에가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말한 ‘총파업’이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노동자의 정신 속에서 매력적인 힘으로 남아 있다’(462쪽)고 한 정도로라도 인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도 맹목적인 총파업을 통해 계급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까? 프레포지에의 말과는 반대로 일시 ‘총파업’을 주장했다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그것을 포기한 소렐의 의미는 레닌이나 무솔리니에 의해 실현된 극단적인 권력추구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렐이야말로 가장 반아나키즘적인 자가 아닌가? 여하튼 여기서는 그에 대해 최소한으로나마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프랑스 서부 시골에서 파산한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의 명문 이공대학인 에콜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하고 토목 관리로 살다가 45세가 된 1892년 은퇴하고 독학으로 사회이론을 공부했다. 은퇴 이전 본래의 그는 부르주아 출신 ‘공돌이’ 관료답게 보수주의자, 군주주의자, 전통주의자였다. 그러다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급변했다가 다시 개량적 사회주의로 약화되면서 드레퓌스 사건 동안에 드레퓌스파 쪽에서 활동했다가, 다시 극좌파로 돌아서서 『폭력에 대한 성찰』과 『진보의 환상』 등을 쓴 뒤에, 자신이 주장한 ‘총파업’을 불신하면서 본래의 반유대주의와 극우 왕정주의자로 돌아섰고, 말년에는 다시 볼셰비키 혁명과 레닌을 극찬하는 극좌로 돌아섰다. 즉 극우 파시즘과 극좌 사회주의를 몇 번이나 넘나든 인물이어서 그를 보면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제와 박정희와 김일성과 노무현을 동시에 추종한 셈이다. 물론 권력이나 돈을 추구하여 멋대로 변절할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론가로서의 변모였지만 말이다.
니체∙베르그송∙바쿠닌을 추종했던 급진주의는 결국 파시즘으로
그러나 그 변절의 본질은 니체의 권력의지와 같은 권력주의라는 점에서 하나였다. 변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을 힘의 적용을 통한 것이라고 본 프랑스의 자코뱅 전통에 입각한 그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극좌와 극우를 좌충우돌했다. 그가 처음부터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1868~1952)와 그가 지도한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를 찬양한 것은 프랑스적 영웅주의 내지 권력주의의 소산이었다. 통합국민주의(정부나 국가가 사회의 모든 면을 통제하는 전체주의), 군주주의, 협동조합주의를 옹호하는 반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에 반대한 모라스주의는 반혁명 이념교리로서, 프랑스라는 국가의 응집과 위대함을 긍정하고 왕당파를 옹호했다. 나아가 혁명정신과 낭만주의 정신이야말로 실패의 원인이며, 그 정신을 잉태한 자유주의 세력들인 유대인, 개신교, 프리메이슨, 외국인이라는 ‘반프랑스 세력’으로 그들은 프랑스 국민국가의 일부로 존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뒤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이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전개된 극우 왕정복고 운동 '악시옹 프랑세즈'와 이를 주도하면서 이론적 기틀을 제공한 샤를 모라스(왼쪽).
소렐이 뒤에 레닌을 찬양했지만 초기 저작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같이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이어서 진리라고 주장한 합리주의와 유토피아적 성향을 비판하고, 치명적으로 쇠퇴한 부르주아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구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진리라고 믿은 점도 힘에 대한 숭배에서 나왔다. 즉 필연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를 믿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직접적인 행동을 좋아했다. 신화의 중요성을 밝혀내고 과학적 유물론을 비판한 베르그송, 초인의 영웅주의적인 위대함을 예찬하고 평범함을 증오한 니체, 민주주의의 잠재적 부패성을 비판한 보수주의자 토크빌이나 르낭을 소렐이 좋아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바쿠닌의 아나르코코뮤니즘(anarcho-communism)를 지지하고 프루동처럼 사회주의를 근본적으로 도덕적 질문으로 본 점도 마찬가지였다. 현존하는 질서를 급진적이고 폭력적으로 전복하는 것이야 말로 좀 더 나은 미래로 가는 확실한 길이라고 믿고 대중을 일치된 행동으로 동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신화'의 필요성에 대한 소렐의 믿음은 1920년대 대중 파시즘 운동으로 실현되었다. 무솔리니는 "내가 가장 큰 빚을 진 자는 바로 소렐이다"라며 소렐을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아버지'라 불렸다. 또 프랑스 파시스트당의 창립자인 조르주 발루아(Georges Valois, 1878~1954)는 소렐을 파시즘의 정신적 시조로 간주하고 "파시즘의 진정한 지적, 감정적 기원은 소렐의 사회주의이다"고 지적했다.
아나키즘의 본질은 비폭력, 소렐은 지지받기 어려워
소렐은 폭력과 무력을 구별하여 ‘프롤레타리아트 폭력’으로 ‘부르주아 무력’을 반대하며 전자는 정화 효과가 있고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유할 수 있게 해주고,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영감을 주는 '사회적 신화'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소렐에게 사회적 신화는 '사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행동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기 때문에 중요했다. ‘의회 사회주의는 도덕성에 대한 경멸을 공언’하고 생산자들의 새로운 윤리를 공언하기 때문에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인정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지만, 혁명적 의지와 프롤레타리아 폭력에 대한 소렐의 찬양은 왼쪽보다 오른쪽에 더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화에 의해 착취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노동조합을 통해 붕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생디칼리슴(Syndicalisme, 노동조합주의, 노동자주의 또는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라고도 번역되지만 생디칼리슴에는 독특한 의미가 있어서 보통 그렇게 표기된다) 운동에 소렐이 영향을 끼쳤다고도 하지만 그 운동 자체는 총파업이 신화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생디칼리즘 이론가들에게 대한 소렐의 영향을 미미했을 뿐이었다. 소렐이 피에 굶주렸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산업 사보타주에 반대했고, 생디칼리스트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을 뒤흔든 테러와 같은 가증한 행위로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을 본질로 하는 아나키즘에서 소렐의 폭력은 식민지 체제나 독재체제와 같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지하기 어렵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2
고흐와 드레퓌스를 위해 쓰고 자본과 권력의 협잡에 맞서다
옥타보 미르보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가 죽기 직전 그에 대한 최초의 평론을 쓴 사람이 19세기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작가이자 평론가인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 1848~1917)였다. 그 평론은 극찬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이를 읽은 반 고흐가 이제 자신의 그림이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에 그렇게도 기뻐했는데 자살을 했다고 하다니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 자살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담은 『내 친구 빈센트』를 썼다. 2006년에 그 책이 나온 뒤 반 고흐의 자살설에 의문을 표하는 책들이 다수 나왔다.
그런데 반 고흐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함께 미르보의 존재도 사라졌다. 그리고 반 고흐처럼 죽고 한참 뒤에, 그보다 훨씬 뒤인 1970년대에 와서야 미르보가 재발견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소설 『어느 하녀의 일기』의 번역본이 2015년에 나왔다. 원작이 1900년에 나왔으니 115년 만에 번역된 셈이다. 같은 해에 나온 영화가 없었더라도 소설이 번역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그 작품의 영화화는 이미 1916년에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뒤 1946년 장 르누아르, 1964년 루이스 부뉴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위치한 소도시 레말라르(Remard)에서 답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미르보는 인근에 있는 반느(Vannes)의 예수회 기숙 중학교에 다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성적도 나빠 4년 후 석연찮은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15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공증인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다가 1870년에 징집되어 충격적인 전쟁 경험도 한다. 제대 후 2년이 지난 뒤 보나파르트주의자의 리더이자 전직 하원의원이었던 뒤게 드 라 포콘느리(Dugue de La Fauconnerie)의 비서로 일하다가 뒤게의 소개로 왕당파 홍보기관인 ‘로르드르 드 파리’(L’odre de Paris)에 들어가 ‘노동계급’으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하지만 당시 그의 행적은 뒤에 강한 죄의식으로 남는다. 뒤게를 비롯한 유력자들의 ‘시종’이자 왕당파부터 반유대파에 이르는 타락한 기자로서의 ‘매춘’ 장단편 소설들의 대필자였기 때문이었다.
고통 받는 예술가, 노동자, 피해자의 삶을 묘파
1884년, 36세가 되어서야 부도덕한 여성과의 파행적인 관계를 계기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브르타뉴 지방의 끄트머리 마을로 재충전을 하러 떠난다. 이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속죄로서의 글쓰기로 사회정의와 천재적 예술가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최초의 저술인 단편집인 『내 초가집으로부터의 편지들(Lerrres ettres de ma Chaumiere)』은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지역을 배경으로, 알퐁스 도데의 작품세계에 담긴 따뜻함과는 대조적인 분위기를 담으며, 인간과 사회의 지극히 어두운 면을 그린다. 뒤이어 발표되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세 편의 장편들이 같은 경향을 더 견고히 묘사한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으로 쓴 『쥘 신부(L’abee Jiles)』(1888)에서 사회적 압제와 교회의 부패에 온몸으로 맞서 대항하는 가톨릭 신부의 심리를 깊게 묘사한다. 그리고 『세바스티앙 록(Sebastien Roch)』(1890)는 예수회중학교의 신부가 학생을 성폭행한 사건을 소재로 삼아 아이의 순결한 영혼의 죽음을 격앙된 감정으로 적는다. 이러한 저작들과 함께 가명으로 여러 신문들에 기고하여 오귀스트 로댕,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폴 고갱, 반 고흐, 카미유 클로델, 아리스티드 마이욜, 모리스 유트릴로 등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동시에 아나키스트로서 불랑제 장군파, 민족주의자, 식민지 정책, 군부정책 그리고 보편타당을 앞세워 개성을 말살하고 개개인의 우둔화를 계획하는 ‘나쁜 목동’들인 권력의 시녀들을 척결하는데 앞장선다.
미르보 최초의 저술인 『내 초가집으로부터의 편지들(Lerrres ettres de ma Chaumiere)』
1890년대에는 작가로서나 남편으로서 딜레마에 빠져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지만 실존주의를 방불하게 하는 소설인 『하늘 속에(Dans le ciel)』(1892-1893)에서-당시 미르보가 발견한 반 고흐로부터 영감을 얻은-고통 받는 예술가를 묘사한다. 그리고 졸라의 노동소설 『제르미날(Germinal)』과 같은 주제의 희곡 『나쁜 목동들(Les Mauvais Bergers)』에서 노동자계층의 비극을 그리기도 한다.
드레퓌스 사건, 미르보를 세상으로 이끌어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미르보를 신경쇠약으로부터 벗어나서 의미 있는 사회활동에 참여하게 한 계기는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에밀 졸라가 이 사건에 개입한지 이틀만인 1897년 11월 28일부터 그는 특유의 관대함과 함께 드레퓌스 옹호에 참여한다. 지식인들의 두 번째 서명을 위한 선언문을 쓰는 한편, 매일 졸라의 재판에 참석하고, 사재를 털어 졸라에게 부과된 벌금지불에 사용한다. 또한 파리와 지방에서 열린 수많은 드레퓌스 옹호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와중에 노동자와 지식인 계층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글을 쓰고, 가상의 인터뷰들을 지어내 민족주의자와 교권주의자 그리고 반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하여 졸라에게 ‘정의의 사도’라고 찬양되었다.
이어 당시의 노예제도인 하인 고용을 비난하는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의 치부를 드러내는 『어느 하녀의 일기』(1900)를 발표한다. 하녀 셀레스틴의 기구한 삶을 통해 19세기 말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풍속, 부르주아의 탐욕과 위선, 성적 타락과 방종은 물론, 하층 계급의 비참한 노동 조건과 신산한 삶, 국론을 분열시킨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반유대주의와 애국주의의 광풍까지 그려낸 작품으로 일기라는 형식이지만 과거 회상 장면이 중간에 자주 삽입되어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서술된다. 그 중 한 구절을 보자.
"가난한 사람들이란, 삶의 수확물과 즐거움의 수확물을 키우는 인간 비료나 다름없으며, 부자들은 이 수확물을 추수하여 너무나 잔인하게 우리에게 악용한다. 더 이상 노예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억지다. 하인들이 노예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노예 제도가 정신적 비열함, 필연적 타락, 증오를 낳는 반항심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노예 제도는 지금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인들은 악덕을 주인에게 배운다. 순수하고 순진한 상태에서 하인 일을 시작하는 그들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습관과 접촉하면서 금세 타락하게 된다. 그들은 오직 악덕만을 보고, 악덕만을 호흡하고, 악덕만을 만진다."(이재형 옮김, 책세상, 367~368쪽)
53년 뒤 아나키스트 계몽가의 재발견
그리고 무식한 졸부들을 비웃고 금전만능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희곡 『사업은 사업이다(Les affaires sont les affaires)』(1903)를 발표해 성공을 거둔다. 그 뒤 병으로 고생하다가 1914년에 터진 1차 대전은 늘 전쟁의 추악함을 고발해왔고 프랑스-독일간의 우호를 주장하던 평화주의자인 그를 절망하게 하여 69번째 생일인 1917년 2월 16일에 사망한다.
사후 오랫동안 망각된 그는 1970년에 이르러 재발견된다. 참여적 작가의 원형이며 아나키스트이자 개인주의자였던 그는 국민을 소외시키고 억압하고 숨을 끊어놓던 인간 부류들과 제도들의 실체를 밝히는 데 앞섰던 위대한 계몽가였다. 그는 의식을 마비시키고 거짓되고 축소된 비전을 삶과 사회에 강제하는 부르주아 계층과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리고 주류 이데올로기와 전통 문학형식들에 맞서서 투쟁했다. 협잡을 일삼는 정치적 선동꾼, 주식시장의 도적들인 투기꾼과 책략가들, 상공업계의 탐욕스러운 사업가들, 법의 이름으로 부당한 억압을 강요하는 근엄한 도덕주의자들을 그는 비난했다. 또한 인간의 영혼을 화석으로 만드는 종교인들, 겉모습만 번드르르한 예술가이며 문학가들, 돈에 좌우되고 마취성 강한 언론에 종사하는 어릿광대들과 공갈꾼들도 비판했다.
서민의 불행으로 치부를 하는, 인정과 예술적 감성과 개인적 사고능력이 부재하는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도덕적이고 지적 안락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할, 단단히 뿌리내린 거칠 것 없는 양심을 가지고 굳건히 자리 잡은 사회는 빈사상태였고, 모든 것이 올바른 방향과는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한편, 민주적 혹은 공화적이라는 허울아래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수 권력자들이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다수를 갈취하고, 억누르며, 소외시키고, 훼손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적 재능을 평준화하고,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사람과 사물, 재능과 명예를 수요와 공급의 시장논리가 적용되는 천박한 상품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인간적 가치가 사라진 폐허 위로 신전이 세워졌고, 그 곳에서 자본주의 신이 온 세상을 제 손아귀에 넣고는, 고문의 뜰’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특히 현실주의라고 자처하는 소설 양식을 매장하는 데에 앞장섰고, 자연주의, 아카데미즘, 상징주의를 거부하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의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1
세상에 지쳐버린 지리학자의 혁명시
자크 엘리제 르클뤼①
“슬펐다, 살아가는 일에 지쳐 버렸다”로 시작되는 책의 이름이 『산의 역사』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가 계실지 모른다. 저자는 계속 쓴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계획이 무산되고,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친구라던 이들은 초라한 내 모습을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들떠 싸우는 인간들이 추해 보였다. 가혹한 운명이다. 그래도 어차피 죽을 것이 아니라면, 정신 차리고 다시 기운을 내든 해야지, 마냥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선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지평선 너머 울퉁불퉁한 봉우리들이 치솟은 높은 산으로 향했다.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해가 지면 뚝 떨어진 시골 여관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에 질려 버린 상태였지만, 혼자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새들의 울음이 구슬프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시냇물 소리와 깊은 숲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웅성거림도 더 이상 침울하게 들리지 않았다.“
『산의 역사』는 1880년에 나온 책이니 140년 만인 2020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셈이다. 저자인 엘리제 르클뤼(Élisée Reclus, 1830~1905)의 책으로는 처음으로 번역된 책이다. 번역서의 띠지에는 “그의 삶은 소설이고, 이 책은 시다. 산에 대한 가장 우아한 명상록이자 인문에세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지은이 소개에는 “현대 인문지리학의 선구자로 생태학이론과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그의 걸작 “『인간과 대지』 등 역시 20세기 사상사에 중요한 고전”이라고 하는데, 이런 저자의 책이 140년 만에 번역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역자 해설에서는 『산의 역사』가 소로의 『와추셋 산행』과 함께 산에 관한 고전으로 유명하다는데, 소로의 책이 대부분 번역되었는데도 『와추셋 산행』은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국토의 70%가 산이고, 등산인구가 인구비례로 세계 1위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한국에서 산에 대한 책은 인기가 없는지 모른다. 르클뤼는 특별히 산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산을 포함한 자연 자체를 사랑한다. 여기서 자연이란 야생의 자연 자체이다.
산으로 들어간 혁명가
그런데 르클뤼가 산에 들어간 이유는 우리나라 텔레비전 등에서 보는 소위 자연인들처럼 사업에 실패하거나 건강을 잃어서가 아니라 ‘혁명에 실패한 탓’이다. 그리고 그 혁명은 정치적 야망을 품은 풍운아의 그것도 아니다. 그의 혁명은 그런 정치가 조작한 세상을 자연처럼 바꾸려는 혁명이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 말한 『산의 역사』를 쓰기 15년 전인 1865년에 쓴 『인간과 자연(L’Homme et la Natu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생의 자연은 아주 아름답다! 그렇다면 자연을 장악한 인간이 새로 정복한 각각의 영역을 체계적으로 착취하고 저속한 건축물과 재산을 주사위처럼 반듯하게 경계 지어 자신의 소유로 표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156년 전, 35세의 르클뤼가 한 말이다. 당시에도 그는 산에 올라 자연을 내려다보며 쓴 것이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우리가 산 위에 올라 밑을 보면 참으로 저속한 건축물과 주사위 같은 농토는 물론 자연의 배를 가른 듯한 고속도로나 철도를 비롯한 직선의 길만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서울은 나에게 추악한 혐오의 도시일 뿐이다. 오래 전에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윌리엄 모리스에 대한 책을 쓰면서 머리말에 쓴 서울은 추악하다는 주제의 이야기를 출판사에서 빼버린 적이 있다. 서울이 추악하지 않다면 그런 책을 일부러 쓸 필요도 없는 데 말이다.
모리스 책을 내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리스를 아시나요’라고 물었을 정도로 20년 정도 전에 그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르클뤼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가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리학자로서의 그에 대한 소개로는 1996년에 김재완이 쓴 『엘리제 르클뤼 사상과 그의 한국에 대한 기술』이라는 글 외에는 없는데 지리학 학술지에 쓴 그 글을 읽은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사실 지리학계에서도 그는 오랫동안 잊힌 사람이었다. 살아생전에도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로 프랑스 지리학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기 어려웠다. 아나키즘에 관한 국내외 문헌에서 르클뤼에 대한 설명을 보기 어렵고, 인터넷에서 프랑스 아나키스트를 쳐보아도 르클뤼는 나오지 않지만, 나는 그를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아나키스트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취미는 가난, 아나키스트는 걷는 사람이어야
그러나 나에게 그는 무엇보다도 ‘걷는 사람’이다. 걷는 사람이 모두 아나키스트인 것은 아니지만 아나키스트는 걷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행기 일등석이나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호화 호텔에 묵는 아나키스트를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취미가 가난한 생활이라고 했고, 어떤 공직도 거부했다. 공직에는 작든 크든 반드시 전횡의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르클뤼는 루이즈 미셸과 생몰연대가 같고 함께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르클뤼는 1830년 프랑스 남부 보르도 부근의 시골인 셍프와(Sainte-Foy-la-Grande)에서 칼뱅주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가톨릭이 주류인 프랑스에서, 그것도 시골에서 프로테스탄트 목사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처가는 루이 18세의 대신을 지낸 명문이므로 그가 원하면 고급관료로 출세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오로지 신앙의 길을 갔다. 교회에서도 출세할 수 있었지만 평생 피레네산맥 부근의 시골 마을 목사로 살았다. 게다가 그는 일상생활은 물론 정치도 종교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네브에서 신권정치를 한 칼뱅의 후예로 언제나 국가와 대치한 점에서 아나키스트와 통했다. 그는 1831년에 국가 공인의 목사직을 사퇴하고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그런 진보적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쿨뤼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열 명이 넘는 형제자매도 모두 정치인이나 문학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열두 살 때부터 형 엘리와 함께 독일의 노이비트라는 라인 강 변의 마을에 있는 모라비아형제교회에서 자급자족의 청빈한 공동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민들이 모인 그 교회에서 민족간 배타주의와 권위주의가 횡행하는 것을 목격한 르클뤼는 2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기 위해 칼뱅주의의 몽토방(Montauban) 신학대학을 다녔으나 1848년 혁명이 터지자 학교를 떠나 부근의 산맥을 넘어 지중해로 걸었다. 그 거리는 230킬로미터다. 시간당 4킬로를 걷는다면 56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하루 10시간을 걷는다면 6일이 걸리는 거리다. 그 뒤 그는 베를린대학교에 다녔는데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 다니던 형을 만나 부모가 사는 집까지 애견과 함께 21일 동안 788킬로미터를 걸었다. 하루에 38킬로미터를 걸은 셈이다.
링컨의 장려금을 거부하다
르클뤼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카를 리터(Carl Ritter, 1779~1859)에게 지리학을 배웠는데 리터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Freiherr von Humboldt, 1769~1859)와 함께 현대 과학으로 지리학의 방법론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여 ‘현대 지리학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뒤 1851년 12월, 나폴레옹 3세의 제정에 반대해 관청을 점거해 항의한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칼뱅주의적 양육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종교를 거부한 르클뤼는 고드윈처럼 강렬한 낙관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견해를 발전시켰다. 21살에 그는 『세계에서 자유의 발전』(1851)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성숙한 사고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이 단계에서 프루동의 영향력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의 운명은 국가가 더 이상 정부나 다른 국가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는 이상적인 완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부의 부재다. 그것은 질서의 가장 높은 표현인 아나키 상태다.”
그리고 영국, 미국, 중앙아메리카 및 콜롬비아에서 6년(1852~1857)을 농사와 지리조사, 그리고 코뮌 만들기로 보냈다. 그 6년 동안에도 그는 엄청난 거리를 걸었고 선주민의 생활과 대륙의 지형에 압도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프랑스어 교사를 하기도 했으나 노예제와 교회와 이민자 도덕을 혐오하여 미국을 떠나 콜럼비아로 갔다. 교회는 흑인 노예 소유를 인정하고, 흑인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이민자의 도덕은 도덕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중남미에서는 시에라 네바다의 거대한 농장을 사서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으나 협동조합의 실패 등으로 여의치 않아 1857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856년에 사면을 받고 무죄가 되었기 때문이고 프랑스 선장과 세네갈 여성의 딸 클라리스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후 르클뤼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행 안내서를 만드는 서점에 취직해 「시에라 네바다 여행」을 비롯해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즉 <철학평론>에 실은 ‘유럽 토지의 역사’를 비롯하여 <양세계평론>에 정치와 지리 분야의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그가 쓴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글을 링컨대통령이 읽고 그에게 장려금을 주려고 한 적도 있었다. 르클뤼는 그 돈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8
모든 중앙집권통치는 감옥과 같다”
자크 엘리제 르클뤼②
1871년 3월에 터진 세계 최초로 노동자 계급이 세운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파리코뮌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제2제국 정부의 무능함에 반발한 프랑스 민중이 일으킨 항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의 르클뤼 형제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파리코뮌이 선언되었을 때 형제는 적극 가담했고 엘리 르클뤼는 에두알 바이얀의 지휘 아래 국립도서관과 루브르박물관 경비대에서 일했다.”(김유곤 옮김, 578쪽) 이어 엘리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르클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당시 르클뤼는 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섰다. 프로이센군과 결탁한 정부군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가 싸움에 나선 대의는 더욱 컸다. 그가 싸움에 뛰어든 이유 중의 하나는 파리코뮌이 터지기 2년 전에 병으로 아내가 죽은 것이었다. 당시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다가오는 혁명의 목표는 평등을 확립하고, 물질생활과 지식생활의 특권제를 폐지하며, 주인과 하인의 대립, 부르주아와 노동자와 농민의 대립을 폐지하는 데 있다. 이러한 싸움을 위해 이토록 오랫동안 참아왔으니 이제는 평화와 우애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번 혁명이 조금은 더디어 그렇게도 열망해온 그 평등이 과연 올 것인지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손을 위해 일하자. 폐허 속에, 또는 유혈 속에 다시금 일보 전진하자.”
아내가 죽은 뒤 르클뤼는 철저한 채식주의자(비건)가 되었다. 썩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혁명으로 평등을 모든 사람에게 주고, 평화와 우애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총을 들었지만 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4월에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그는 문맹인 죄수들에게 읽고 쓰는 법, 심지어 영어를 가르치고 나머지 시간에는 『지구』라는 책을 썼다. 르클뤼는 군법회의에서 뉴칼레도니아 섬에서의 종신형을 선고 받고 야전병원과 감옥을 전전한 뒤 프랑스 지리학회와 다윈을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의 호소와 미국 정부의 압력에 의해 1872년 1월에 10년의 국외 추방형으로 감형되었다.
파리코뮌이 터지고 34년이 지난 1905년, 르클뤼는 『인간과 대지』 제5권에서 파리코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인터내셔널에 의해 선언된 우애의 이념이 어떻게 생생하게 현실화했는가를 놀랍게 확인시켜주었다. (중략) 파리코뮌을 현대의 진화에서 높이 위치시켜야 하는가는 지배자를 타도한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바쿠닌∙크로포트킨과 교류… ‘아나키스트 선언’
지리 조사 여행도 계속한 르클뤼는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을 조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당시 피렌체에 살고 있던 바쿠닌을 만났다. 그들은 ‘평화와 자유를 위한 회의’의 제2히 베른 대회에서 협력했으나 함께 그 회의에서 탈퇴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소원해졌으나 서로 존경하는 마음은 버리지 않았다. 1876년 바쿠닌이 베른에서 죽었을 때 인적이 드문 장례식에 르클뤼는 참석했다.
스위스의 루가노에 살면서 지리학 전문지로부터 사상지에 이르는 여러 잡지에 글을 썼다. 특히 1875년부터 1892년까지 매년 한 권씩 『새로운 세계지리, 대지와 인간(La Nouvelle Géographie universelle, la terre et les hommes)』 19권을 썼다. 권당 1천 쪽 전후로 전부 3천500장의 지도가 수록된 이 책은 단순한 지리서가 아니라,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총동원하여 각 지역의 생활, 풍속, 지형지질, 동식물의 분포 등을 종합적으로 서술했다. 한국에 대해서도 34쪽으로 설명하는데 한국을 이탈리아와 유사하다고 본 최초의 지리학자인 르클뤼의 스승인 리터와 마찬가지 의견을 피력했다.
『새로운 세계지리, 대지와 인간(La Nouvelle Géographie universelle, la terre et les hommes)』(1875~1892)
스위스에서 그는 레르미네스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2년 만에 죽었다. 그래서 클라란으로 이사해 앞에서 말한 『산의 역사』를 썼다. 당시 파리코뮌에 참여했던 많은 종료들이 스위스의 아나키즘 중심인 쥐라 산맥 지역에 살면서 조합운동을 하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의 북쪽, 프랑스와·스위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그곳의 지층 구조에서 지질 시대인 쥐라기의 이름이 붙었다. 그곳에는 1977년부터 크로포트킨이 살고 있었다. 그는 1872년에 처음 그곳으로 와서 쥐라연합 사람들과 접촉한 뒤 러시아에 돌아갔다가 체포되어 구금된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다시 그곳에 왔다. 르클뤼는 크로포트킨이 발간한 아나키스트 신문 <반역자(Le Révolté)>에 투고하고 함께 활동했다. 이를 이유로 프랑스 정부가 리옹 고등 법원에서 기소를 시작하고 크로포트킨을 체포하고 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으나 르클뤼는 스위스에 남아있어서 처벌을 피했다. 그 후 르클뤼는 크로포트킨의 글을 모아 『반역자의 말』을 출간하면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주인이다. 관청의 자리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자유의 말에 공허한 기대를 걸고 저 소란한 의회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밑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이 책이 나올 무렵 프랑스에서는 선거가 한창이었다. 그에 반해 르클뤼는 우리 모두 자신의 주인이니 정부든 의회든 무엇이든 다른 것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고, 대신 나도 그 일원인 노동자 농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표트르 크로프트킨이 1879년부터 1885년까지 발행했던 아나키스트 신문 '반역자(Le Révolté)'. 사진=영문 위키피디아
르클뤼는 이 때부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파리코뮌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과거의 전제정은 물론 공화정보다 뛰어난 것이었지만 중앙집권적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였고, 이유도 모르고 그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에 실패하여 포로로 잡혔다는 반성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희망대로 자주 자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를 명백하게 보여준 1877년 3월 3일, 생 이미에(St Imier)의 쥐라연합(Jurassian Federation)에서 행한 ‘아나키 상태와 국가’에 대한 연설에서 르클뤼는 “모든 근대국가는 중앙집권화하고자 한다. 어떤 중심에서 모든 것을 통솔하고자 하는 생각은 감옥 모델과 비교할 수 있다. 그것과 달리 모든 것을 국가에 포섭하는 것에 반대하여 사회의 생생한 힘을 형성하는 자유의 집단을 나는 솔선하여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인종차별 반대하고 ‘결혼 반대’ 운동 전개
그는 자유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어원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로 '아나키 상태'라는 용어의 사용을 옹호했다. 그리고 국가는 '인간성이라는 힘의 자유연합'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고, 법은 '자유 계약'으로 넘어 가야한다고 했다. 그러나 르클뤼는 아나키 상태가 먼 미래의 이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유 사회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영구적이지 않고 변화하는 요구에 적응할 것이기 때문에 제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나키스트 이상을 '특권과 정부 변덕의 억압, 재산 독점의 파괴, 자연법에 대한 상호 존중과 합리적 관찰에 의한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사회의 자발적인 기능'으로 보았다. 르클뤼의 주장에 따라 라쇼퐁(La ChauxdeFonds)의 쥐라 연맹 총회는 1880년에 자유 사회의 기본 단위로 기존의 행정 공동체가 아닌 '자연 공동체'를 채택했다.
르클뤼는 1879년에 사면을 받았지만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1880년에 그는 진정한 적들이 사유 재산의 소유자이자 수호자임을 분명히 했다. 사유 재산은 소수에 의한 집단 재산의 부당한 착취이기 때문에, 그는 노동의 결실의 개별적인 회복으로서 정당한 절도를 인정했다. 그의 유일한 단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도둑질이 저질러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 자체나 그 결과가 아니라 그 이면의 의도라고 본 그는 복수를 불의에 대한 필연적인 대응으로 간주했고, 당시 테러 폭격기라고 불린 ‘라바콜’이 원시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는 반역자였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스위스의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쥐라연합(Jurassian Federation)'의 로고
개인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나키즘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또한 “이해관계의 연대성과 자유롭고 공동체적인 삶의 무한한 이점이 사회적 유기체를 유지하는 데 충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점에서 인종주의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해방과 양성의 평등을 옹호했다. 남자의 잔인한 성적 힘에 기반한 가부장제와 달리 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착에 기초한 모계사회는 관습의 세련미와 사회 진화의 더 높은 단계로 이어졌다고 본 그는 유럽 문명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것이고 사유 재산이 박멸될 때에만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완전한 남녀 공학을 요구한 그는 남성과 여성이 자유로운 결합을 형성하고 오로지 애정에 근거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전통적인 것이었지만 공식적 또는 종교적 인정 없이 두 번째 두 동반자와 '결합'했고 1882년에는 결혼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9
인류가 신이나 주인 없이 형제처럼 살 수 있다면
자크 엘리제 르클뤼③
반국가주의 내지 반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아나키스트들이 국제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특히 지리학이라고 하는 학문의 성격이 아나키즘과 통할 수 있지만, 한국의 지리학이 아나키즘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나키즘의 최고 이론가인 크로포트킨이 지리학자인 것처럼 그의 친구인 지리학자 엘리제 르클뤼도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다.
1893에 그는 농민들에게 땅을 점령하고 공동으로 일할 것을 촉구했다. 생산량을 늘리고 모두에게 삶의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첨단 기술을 추구한 그는 세기말에 프랑스의 아나키즘 집단에서 ‘신멜서스주의’가 부흥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학 연구에 의해 모든 인류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지구는 충분히 풍부하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그것이 자연의 파괴적인 정복 없이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람들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으며 상호 원조는 그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본 그는 “인류의 작은 그룹이든 큰 그룹이든, 그것은 항상 모든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자발적인 연합과 협력을 통해,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인간 발전을 결정하는 세 가지 주요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계급 투쟁, 평형의 추구, 그리고 개인의 주권적 결정이다. 그 중에서 개인의 주도권이 가장 중요한 진전 요인이지만, 사회의 투쟁과 균형 사이에는 끊임없는 진동이 존재한다고 본 그는 아나키 상태 자연 질서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학문적 연구와 전투적 선동의 긴 생애를 보냈다.
동시에 역사적 발전에서 인종의 역할을 거부한 그는 모든 종족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그들의 외부적 차이는 전적으로 다른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융합을 옹호한 그는 다른 나라의 '유럽화'를 환영하며 상호 연관된 세계를 창조했지만, 이것은 제국주의의 위장된 형태가 아니라 당시 유럽의 기술적 진보와 사회적 자유를 인정한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처럼 르클뤼는 인간은 고립된 원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전체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1890년대 초 테러 캠페인이 실패하고 그에 따른 혁명 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크로포트킨과 같이 르클뤼는 사회적 변화의 점진적이고 진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되었다.
진화(evolution)과 혁명(revolution)의 조화
1892년에 『새로운 세계지리』의 마지막인 제19권이 발간되자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브뤼셀 자유대학의 교수로 초청받았으나, 그 직후 파리에서 터진 폭탄사건에 그의 조카가 억울하게 연루된 탓에 그 초청은 취소되었다. 심지어 그 취소에 항의한 교수들도 해고되었다. 그러자 시민들에 의해 1894년에 브뤼셀신대학이 창립되어 르클뤼를 비교 지리학 의장으로 임명했다. 르클뤼는 1900년까지 브뤼셀에 살면서 지리학과 종교학을 강의하여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식물학자 에르망스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진화와 혁명(Evolution et revolution)
1898년에 그의 『진화와 혁명, 아나키즘의 이념』이 간행되었다. 1880년에 팸플릿으로 낸 <「진화와 혁명(Evolution et revolution)」을 발전시킨 이 책은 그의 아나키즘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volution과 révolution은 지구의 공전(公轉, 한 천체가 다른 천체 주위를 원이나 타원 궤도를 따라 도는 것)과 혹성의 자전(自轉, 천체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운동)을 뜻하기도 한다. 진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르클뤼는 그 담당자를 우주, 지구, 자연, 인간, 동물, 식물로 보고, 인간의 진화와 사회의 진화를 함께 다루었다. 인간의 진화를 이루는 것은 혁명인데, 그것은 사회체제의 혁명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으로 혁명이 진화에 의해 성취된다고 보았다. 즉 매일 논밭을 가꾸고 해와 달. 지후에 주목하면서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것, 지구와 함께 자전하면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책의 마지막에서 르클뤼는 “와야 할 진화와 혁명은 이념 뒤에 오는 현실이고, 어떤 현상과 같은 현상을 섞는 것이다. 건전한 유기체에서 삶을 기능시키고 인류와 세계의 삶을 기능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진화는 이념이고 혁명은 현실이다. 머릿속으로 진화를 준비하고 스스로의 신체로 혁명을 낳는다는 것은 그 두 가지가 항상 동반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로부터 르클뤼는 프랑스의 모든 혁명이 진화 없는 혁명이라고 비판했다.
르클뤼의 마지막 단말마, “혁명이다!”
1904년에 형 엘리가 죽었다. 엘리도 신대학의 교수로 종교학을 가르쳤다. 뒤에 레비브륄이나 마르셀 모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엘리는 문화인류학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다. 르클뤼가 이듬해에 죽은 것은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누운 탓이기도 했다. 그해에 『새로운 세계지리』의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번역본이 나왔고, 1905년 러시아혁명이 터졌다. 혁명 소식에 병석의 르클뤼가 “혁명이다!”라고 환호한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만년의 르클뤼는 『대지와 인간(L’ Homme et la terre)』 6권을 집필했다. 그가 죽은 1905년에 제1권이 나오고 1908년에 마지막 권이 나왔다. 이 책은 인문지리학과 사회지리학의 선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에게 지리학은 인민 상호간의 변화하는 관계와 그 환경에 대한 연구였다. 인간 삶의 공간적 차원을 살펴보면서 그는 국가의 인위적인 경계에 의해 무시되는 사람들을 위한 자연 환경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사람들은 비슷한 생활 조건을 공유할 때 자연스럽게 협력한다고 본 그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이질적인 민족의 강압적이고 왜곡된 법적 통합을 표상했기 때문에 유럽 국가의 국가적 지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사회 철학의 중심은 진보다. 진화와 혁명이 모두 역사에서 일어난다고 믿으면서도 혁명적 대업의 궁극적인 성공을 확신한 그는. 마지막 권의 ‘진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대지와 인간(L’ Homme et la terre)
“우리를 둘러싼 대륙, 해양, 공중을 정리하는 것, ‘우리의 전원을 경작하는 것’, 식물, 동물, 인간 각각의 개체성을 양성하도록 새롭게 그 환경을 배치하고 주정하는 것, 지구 그 자체에 속하는 우리 인간의 연대를 확고하게 의식하는 것, 우리의 기원, 현재, 지금의 목적, 먼 이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에 의해 진보가 양성되는 것이다.”
비폭력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입장은?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는 '신이나 주인이 없이 형제처럼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곤 했다. 자연 보존을 옹호하고 동물에 대한 육식과 학대에 반대한 그는 현대의 사회생태주의와 동물 권리 운동의 선구자였다. 우리가 다른 종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본 그는 “동물의 관습은 우리가 생명과학에 더 깊이 침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사랑을 넓힐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비폭력주의자인 톨스토이나 간디와 달리 르클뤼는 “고문을 당하는 고양이, 구타당하는 아이, 학대를 당하는 여자를 보고, 그것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그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폭력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불가피한 것일 수는 있다고 본 그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의 법칙, 신체적 충격과 반격의 결과”라고 했다. 폭력의 필요성에 대한 르클뤼의 입장은 크로포트킨의 도덕 원칙과도 거리가 있다. 또한 그는 1860년대에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했지만 파리 코뮌 이후에는 협동조합과 커뮤니티를 단지 소수에게 이익을 주고 기존 질서를 그대로 두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의 결합된 행동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주장했다. 나중에 그는 아나코 신디컬리즘과 거리를 두고 정부와 법률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제2 인터내셔널에도 반대했다.
한편 그는 자연주의와 과도한 노출도 옹호한 점에서 이채롭다. 알몸으로 사는 것이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라고 주장한 그는 피부가 빛과 공기에 완전히 노출되어 ‘자연적인 활력과 활동’을 재개하고 동시에 더욱 유연하고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누드가 더 아름답다고 주장했다. 의복에 대한 반대 이유는 도덕적인 것으로 그것에 지나치게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사상은 그것이 사물의 분류나 순서의 감각보다 앞서는 것으로 인간이 최초로 추구한 것이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을 추구한 윌리엄 모리스와도 통한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0
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1
동양 아나키즘의 원조 붓다 “군대가 가는 쪽, 쳐다보지도 말라”
최초 아나키스트 고대 중국 허행
노자, 농민전쟁 평등사상의 기초
장자는 도피적 지식인 사상으로
아나키스트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했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아나키즘은 때론 ‘반문명적 반국가적’인 측면만 부각시키는 ‘색안경’에 의해 오도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존재할’ 아나키즘의 생명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늘 세상의 주류는 아니었지만 아나키즘이 갖고 있는 평화와 평등, 그리고 자유를 추구하며 전쟁을 인정하지 않는 기본 사상은 세상과 문명을 유지하는 긍정적 축이다.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것’을 추구한 노자는 아나키즘, 혹은 반문명의 철학으로 보아야 한다.
아나키즘의 역사
아나키즘의 역사를 다룬 국내 유일의 책인 프랑스 철학자 장 프레포지에(Jean Preposiet, 1926~2009)의 <아나키즘의 역사>에 의하면 최초의 아나키스트는 흔히 견유학파로 번역되는 키니코스학파의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기원전440~336)와 디오게네스(Diogenes, 기원전412~323)다. 이어 중세로 넘어가 현대까지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설명하는데 모두 서양인이다. 세상에! 비서양에는 아나키스트가 없었단 말인가? 서양에만 아나키스트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면 아나키즘은 서양에 고유한 것이지 인류 공통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역사 이전의 선사시대에 존재한 원시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아나키적 사회였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고, 그 비슷한 성격의 사회는 현존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원시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인디언 사회는 “고대적 사회, 각인의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즉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232-233쪽)라고 말한다. 나도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원시사회나 인디언 사회만이 아니다. 미국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 1936~)은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 및 인도 동북부의 고원지대를 조미아라고 하고 그곳에서도 최근까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존재했다고 <조미아>에서 밝혔다. 스콧에 의하면 조미아의 산악민들이 지난 2천 년 동안 노예제와 징병, 과세, 부역, 질병, 전쟁 등 평지의 국가 만들기 과업의 폭정에서 달아난 탈주자, 도피자, 도망노예들이고 하면서 중국이나 인도는 그들을 야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야만과 미개의 모습으로 규정된 그곳 소수민족의 탈주와 도피 문화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전략으로서, 그들의 이동식 경작방식인 화전농법은 국가와 지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대표적인 생계방식이었으며, 카사바, 감자, 고구마 같은 ‘도피 작물’은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원천이 되었다고 스콧은 주장한다. 이러한 야만이 바로 아나키로서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서양 어디에서나 존재했다. 개마고원이나 지리산이나 한라산이 한반도의 조미아였다.
동양 아나키즘의 원조인 붓다(기원전624~544년?)는 조미아의 동북쪽 끝에서 태어났다. 아나키즘 이론가인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 1842~1921)은 그의 <상호부조론> 결론에서 그가 주장한 아나키즘의 핵심인 상호부조의 원칙이 구현화된 것으로 원시적인 불교도의 커뮤니티를 들었다. 인도의 초기 승가는 “군대가 가는 쪽을 쳐다보지도 말라”, “칼 찬 자에게 설법하지 말라”는 붓다의 말에 충실했다, 행복과 무관한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제도인 국가와 자본주의가 압박과 고통을 낳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들을 부정하는 불교는 아나키즘일 수밖에 없으나, 기독교가 그러하듯이 불교도 권력과 부를 배제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들과 결탁되어 타락했다. 그러나 권력과 부를 부정하는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은 불교 역사 2500여 년 동안 그치지 않았다.
재상으로 모시려 하자 장자는 “나를 더럽히지 말라.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더러운 도랑에서 헤엄치며 놀겠다”고 했다.
허행
현대 미국의 아나키스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버(David Graver, 1961~)는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에서 아나키즘의 역사를 말하면서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고대 중국의 허행(許行)과 농가(農家)를 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운동은 상인들과 정부 관리들을 쓸모없는 기생충으로 여겼고, 오직 솔선수범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경제는 큰 국가들 사이의 소유자가 없는 영토 내에서 민주적으로 규제하려고 했다. 명백하게 이 운동은 이러한 자유촌락으로 도망쳐온 지식인과 농민 사이의 연합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점차 주변의 왕국으로부터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기에 그것이 주변 왕국들의 침략의 빌미가 되어 결국 그들이 붕괴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대규모 망명을 장려하는 것은 고전적인 아나키스트들의 전략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이념은 후세대의 공식 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고대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은 개인은 어떠한 사회적 관습에 매여서는 안 되며 상상의 공동체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기술은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을 주었다. 이 경향은 역사 속에서만 반복되었다. 이러한 개인주의자들과 원시주의자들의 이상은 차례로 노자와 장자의 도교철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211쪽)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없는 허행이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맹자(기원전372~289)의 언행을 적은 <맹자>의 ‘등문공 상’에서 맹자를 만난 진상(陳相)이 허행도 만났다고 말하니 대체로 기원전 4세기 전국(戰國)시대 사람인 것 같다. 그를 중심으로 한 농가는 제자백가 중 하나로 농사를 가르치고 스스로 농사를 지은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가르침을 실행했다. 허행이 태어난 초(楚)나라는 당시 중심 문화권 밖에 있어서 그 문화권에게 받는 피해가 컸으므로 허행은 통치자가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으면 농산물을 가질 권리가 없고, 따라서 백성의 농산물도 뺏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맹자>에서 허행을 추종하는 진상이 맹자에게 임금이 백성과 더불어 농사를 지어 먹고 음식을 끓여 먹으면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자 맹자는 분업 체제 하에서 농민은 임금을 먹여 살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반박한다. 즉 맹자는 통치자인 대인의 일과 피치자인 소인의 일이 다르고 그것이 천하의 보편적 질서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진상의 답은 <맹자>에 적혀있지 않지만, 그가 분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정하게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은 그가 뒤에 이중가격 등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볼 수 있다. 그러자 맹자는 다시 물건의 질이 똑 같지 않으니 가격도 같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서도 진상의 답은 적혀져 있지 않는데, 이미 앞의 말에서 진상은 같은 원료의 물건이면 값도 같아야 한다고 하여 질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았고, 같은 질의 물건에 대해 값이 차이가 나는 점을 비판한 것이므로 맹자의 비판에는 문제가 있고 궤변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여하튼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농업이나 수공업)에 의하여 자신의 생활을 충족시켜야 하고,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는 각자의 소유에 귀속시켜야만 천하가 고루 공평하게 된다고 허행이 주장한 반면 맹자는 통치자와 피치자의 계급과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가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맹자>의 기록만이 남아있는데, 그것만을 보는 한 그레버의 설명을 옳다고 보기 어렵다. 허행은 소국에서 대국으로 갔고, 임금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임금도 일반 백성과 같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나키스트의 시조라고 보기도 하는 노자(기원전601?~?)가 농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그레버의 설명에는 그들의 생몰연대를 보면 문제가 있다. 장자(기원전369?~286?)도 맹자와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다. 물론 노자나 장자의 생몰연대도 확실하지 않으므로 그레버의 설명이 반드시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김용옥은 <맹자 사람의 길>에서 허행은 “맑스가 말하는 원시공산주의의 사회를 지향하는 어떤 이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의 직경을 주장하며, 소득의 분배를 균일하게 하며, 시장경제를 무시하는 사용가치 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상, 330-331쪽)고 하며 ‘촌놈’이라고 평가한다. 김용옥이 허행을 “촌놈”이라고 하는 이유로 김용옥은 현대 사회에서 재벌 회장이 할 일이 따로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김용옥이 과거에 대우라는 재벌의 회장이었던 김우중과 나눈 <대화>라는 책에서 김우중을 두고 “이렇게 정직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존경한다고 말한 바를 생각나게 한다. 김용옥 정도는 아니지만 허행이 통치자를 부정했다고 하면서 경솔하다고 비난하는 윤재근 같은 학자들이 대부분이다.(<맹자1>, 1059쪽) 통치자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행은 통치자를 부정한 적이 없다.
<맹자>는 성리학에 의해 중시되어 ‘사서삼경’의 하나로 들어간 뒤 고려 말부터는 중국과 한반도에서 널리 읽혀왔으나, 허행을 주목한 사람은 없는 듯하다. 19세기말에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면서도 허행을 주목한 사람이 없다. 중국인 허행을 우리의 새로운 아나키스트 원조로 주장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맹자>를 널리 읽어온 동아시아의 정신풍토를 감안하면 그를 그렇게 감안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
그레버의 주장과 달리 종래 고대 중국의 아나키스트로는 노자와 장자가 회자되어왔다. 가령 노자는 <도덕경> 80장에서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은 것’을 추구했음을 아나키즘/반(反) 문명의 철학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봄은 이어지는 다음 문장에서도 확인된다. “열 사람, 백 사람이 쓸 수 있는 도구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으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이사 가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고 병기가 있지만 벌여놓을 일이 없다. 백성들이 끈으로 매듭을 짓는 결승문자를 사용하고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사는 곳을 편안히 여기고, 풍속을 즐거워한다. 옆 나라에서 닭과 개의 소리가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의 행동을 백성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그렇게 하게 한다면(그런 식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를 아나키즘으로 볼 수 없다. 이를 국가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면 전체주의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고, 그 증거로 법가가 도가사상을 통치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점을 들 수도 있다.
<도덕경>에 대한 한반도 최초의 주해서는 이이(李珥, 1537~1584)의 <순언>(醇言)이었지만 소국과민에 대해서는 주해하지 않았다. 소국과민에 대한 최초의 주해는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이었는데, 그것은 주희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식으로 주해한 것이었고 그 뒤에 이어진 주해서들도 마찬가지로 유교식이었다.
<노자>의 ‘소국과민’은 <장자>에서 ‘지덕지세’(至德之世)로 나타났다. <장자> ‘거협’ 편에서 신농(神農) 등의 신화시대에 “백성은 밧줄의 매듭을 기호로 썼고 그 식사를 맛있게 여겼으며 그 옷을 훌륭하다 생각했고 그 풍속을 즐기며 그 집을 편안하게 여겼다. 이웃 나라가 바로 앞에 보이고 닭이나 개울음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였지만 백성은 늙어죽을 때까지 오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시대야말로 가장 잘 다스린 시대다.”라고 한 것은 <노자> ‘소국과민’의 반복이었다.
<도덕경>이 어지러운 전쟁 시대에 처한 지배자의 통치방법에 대한 책인 반면 <장자>는 사적인, 즉 비정치적인 개인이 그런 전쟁 시대에, 또는 다른 시대에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책이라는 점은 오래 전부터 강조되어 왔다. 그래서 노자가 아닌 장자를 아나키스트로 보기도 한다. 그 근거로 사마천의 <사기>에서 초나라가 장자를 재상으로 모시려 하자 그가 “나를 더럽히지 말라.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고 한 것이 제시되기도 하지만, 노자도 국가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장자도 유가가 주도한 한나라 이후의 중국에서 노자처럼 배척을 당하지 않았다.
<노자>에는 사회 개혁을 위한 실천적 제안은 없지만, 당시 유가가 지지한 신분제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 있고, 인민의 생활에 간섭하지 말고 무의하면서 천하를 다스리라는 주장이 있지만, <장자> ‘지락’(至樂) 편에서는 “죽으면 위로 군주가 없고 아래로 신하가 없다”고 했을 뿐이고 <장자> ‘덕충부’(德充符) 편에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알아서 이것에 안주하고 명에 따르는 것은 오직 유덕자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장자는 인간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시비, 선악, 귀천, 빈부, 회복, 생사 등을 초월하여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고 살기를 권유했다. 그래서 노자는 한대 말기의 태평도나 오두미도와 같은 농민전쟁의 평등사상이 되기도 했지만, 장자는 죽림칠현과 같이 도피적인 지식인의 사상으로 나아갔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쿠라하라 고레히도(藏原惟人, 1902~1999)는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에서, 노자에게는 무위자연 사상과 사회경제사상이라는 양면이 있는데 장자는 전자를, 허행은 후자를 계승했다고 보았다. 쿠라하라에 의하면 장자는 위험하지 않아 후세에 남았지만 허행은 위험하여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 전통사회에서 임금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니 허행의 사상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쿠라하라는 허행을 아나키즘이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의 원류로 보지만 허행을 그 둘 중 어느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김용옥이 허행과 맑스를 연관시키는 점에도 문제가 있다.
아나키즘이란?
인류의 희망…언제 어디서나 생기는 보편
계급제, 불평등, 폭력과 전쟁 등이 항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세상을 꿈꾸는 것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고 특히 전쟁에 의한 평화나 상향식 명령에 의한 평등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보다 쉽고 분명하게 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권력에 의한 강제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함께 살면서 서로 돕고 평화롭게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생각(사상)과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를 손문의 삼민주의나 조소앙의 삼균주의처럼 자유-자치-자연의 삼자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치하는 사회를 자연과 조화롭게 추구하는 운동인 아나키즘은 인류 공통의 희망으로 언제 어디서나 생겨나는 보편이다. 특히 노예제와 계급제, 불평등과 차별, 폭력과 전쟁 등이 항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세상을 꿈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나키즘은 맑스주의와 공통점을 갖기도 하지만 맑스주의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국가권력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달리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고 특히 전쟁에 의한 평화나 상향식 명령에 의한 평등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권력에 의한 강제 중 가장 참혹한 것이 전쟁이다. 전쟁은 자유와 평등, 평화와 자연을 파괴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고 자신도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사문화를 찬양하는 자들이 있다.
꼭 적과 싸우는 전쟁만이 아니다. 일상의 삶을 비참한 투쟁으로 만드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에 아나키즘은 저항한다. 가정과 학교, 기업과 사회도 군대식의 계급구조와 상명하복문화가 지배하는 점에 아나키즘은 반대한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입각한 민주적인 가정, 그리고 자유학교나 ‘학교 없는 사회’를 추구한다. 또한 노동조합의 역할을 중시하는 민주적 기업, 나아가 간접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정치를 요구한다.
아나키즘은 일찍부터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고 모든 개인의 자결(자기결정)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자결을 존중했다. 따라서 식민지하에서 아나키즘이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일제강점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문제가 된 김원봉은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의 단장인 아나키스트로서 신채호에 의해 유일하게 진정한 독립군으로 찬양되었으나, 해방 후 근본주의적인 광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는 가운데 희생되었다. 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번진 신자유주의와 결탁된 소위 글로벌리제이션이 거대자본의 세계독점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2012년 월스트리트점거운동을 비롯한 아나키즘의 세계정의운동은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추구한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
그리고 한반도에서 가장 혹독한 욕(애비 없는 놈)이 됐다
열자, 양주, 묵자
허행과 같은 길을 간 사람으로는 묵자(墨子, 470~391), 장자의 길을 간 사람으로는 열자(列子, 기원전440?~370)가 있다. 열자의 존재 자체에는 의문이 있고 맹자보다 조금 앞선 사람으로 알려질 뿐 그 전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말을 적은 책이라고 하는 <열자> 8편은 현존한다. 그 중 ‘황제’ 편에서 황제의 꿈을 빌어 그 이상국인 ‘화서씨(華胥氏)의 나라’를 “우두머리가 없고 자연히 살 뿐이다. 그 백성에게는 즐기고 좋아함이 없고 자연히 살 뿐이다.”라고 한 것은 노자의 ‘소국과민’을 답습한 것처럼 보이지만 ‘소국과민’이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반면 비현실적이고 비사회적인 신선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
묵자는 허행과 달리 그의 글을 모은 <묵자>가 현존하여 이를 통해 허행보다 자세히 알 수 있지만, 허행처럼 사후 오랫동안 잊힌 사람이었다가 20세기에 와서 재발견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도 맹자를 비롯한 유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은 탓이었다. <맹자> ‘등문공 상’ 편에도 허행에 이어 묵자를 비판한 부분이 나온다. 그것은 상례를 중시하지 않는 묵자의 제자 이지(夷之)가 유가의 후장(厚葬)주의를 비판하자 맹자가 그것을 비판하고 이에 이지가 승복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김용옥은 이지가 “진상과 달리 융통성이 있었고 반성도 있는 폭넓은 인간”으로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유가의 후장주의를 찬양하지만(340쪽) 화려한 장례를 찬양함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맹자> ’등문공 하‘ 편에서 맹자는 “천하의 여러 주장이 양주가 아니면, 묵자에게 귀속된다. 양씨는 위아(爲我)를 주장하니 이것이 무군(無君)이고, 묵씨는 겸애(兼愛)를 주장하니 이것이 무부(無父)다. 무부무군은 바로 금수다. … 양·묵의 도가 그치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날 수가 없으니 사설(邪說)이 백성을 속여서 인의를 막게 된다. … 무부무군은 주공(周公)이 응징하는 대상이다. 나도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아 사악한 주장들을 그치게 하고 비딱한 행실들을 막고 잘못된 말을 추방하여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한다.
위 문장의 처음에서 양주와 묵자가 천하의 언론을 지배한다는 것은, 당시 노장이 은둔자로서 주로 변경지방에서 유행한 반면 양묵은 유가와 함께 중원 도시를 중심으로 성행하고, 유가가 지배층인 사대부의 이익을 대표한 반면 양묵은 상공업자 중심의 시민과 지식층의 사상으로 유가와 적대했음을 보여준다고 쿠라하라는 말하지만(170쪽) 반드시 그렇게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맹자는 <맹자> ‘진심(盡心) 상’ 편에서 “양자가 위아를 취하니 자기 다리의 털 한 오라기를 뽑아 천하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을지라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양주를 극단적 이기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열자> ‘양주’ 편에서는 양자가 “사람마다 털 한 오라기를 손상시키지 않고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저절로 잘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고 양자가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비자는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의롭더라도 위태로운 성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며, 천하 사람들의 큰 이로움을 자기 다리의 털 오라기와 바꾸지 않았다”고 하여 여러 임금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맹자와 전혀 다른 평가이다.
맹자의 주장은 공자(기원전551~479)의 가부장주의가 양·묵의 비판에 직면하자 더욱 강하게 가부장주의를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용옥은 이를 “참으로 장쾌한 맹자의 논설”이라고 하지만 쿠라하라가 말하듯이 맹자는 “공자와 똑같이 본래 의미의 군자와 소인을 차별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을 명백히 하며, 세습적인 귀족의 지배와 그 가부장적·신분적 입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49쪽) 따라서 ’장쾌‘하기는커녕 계급차별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맹자의 위 말에서 쿠라하라가 주목하지 않은 점은 맹자 자신 이전에 이미 주공이 무부무군론을 응징하였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말에 권위를 부여한 점이다. 주공은 기원전 12세기에 살았던 자로서 그 당시부터 무군무부론을 응징했다고 하니, 그런 주장이 이미 그때부터 있었다는 것이 되지만, 우리로서는 누가 그런 주장을 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전의 중국 태고시대에도 다른 지역의 원시시대에서와 같이 무군무부의 사회가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여하튼 맹자 이래 무군무부라는 말은 동아시아에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다른 종교가 들어올 때에 그 종교들을 비난하기 위해, 또는 유교 내에서 다른 유파의 등장을 비난할 때면 언제나 사용된 문자가 되었다. 특히 이단배척이 유독 심했던 한반도에서 그러했다. 그래서 무부무군이란 ‘애비 없는 놈’이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혹독한 욕이 되었다.
맹자의 양묵 비판
<맹자> ‘진심’ 하편에서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대단하지 않다”거나 “백성의 옹호를 받으면 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맹자는 민본주의자로 평가되지만 사실은 친족과 친하게 지내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존경하는(親親尊尊) 등급 원칙을 당연한 것으로 보아 민본주의는 전제군주이론을 보완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맹자 이래 2천년 이상 유학이 동아시아를 지배하면서 전제군주정은 그 정치의 원리였다. 물론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것이나 민주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묵자와 양주의 사상이었으나 그거들은 항상 배척당했다.
묵자의 겸애가 모든 인간에 대한 무차별적인 평등한 사랑임에 반하여 공자나 맹자가 주장한 인(仁)은 혈연적인 친소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차별적인 사랑을 뜻했다. 공맹이 말하는 군자란 신분이 높은 사람이고, 소인이란 농상공 등의 노동에 종사하는 생산자를 말하고, 인은 군자의 덕목인 반면 생산자는 이익을 덕목으로 한다고 주장되었다. 반면 묵자는 <묵자> ‘상현’(尙賢) 상편에서 농상공인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관이 항상 귀한 것이 아니고 백성이 항상 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묵자는 신분제 자체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로 한 평등 대우를 주장한 점에서 역시 완전한 민주주의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한편 묵자가 후장을 경계한 것은 그로 인해 “천하가 빈곤해지고 인민이 줄어들고 나아가 어지럽혀지”기 때문에 절제를 주장한 것이지 무부를 주장한 탓이 아니라는 것을 <묵자> ‘절장’(節葬) 편에서 알 수 있으므로 제사를 둘러싼 맹자의 묵자 비판은 옳지 못하다. 맹자는 평소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음을 그 제자인 팽경(彭更)이 맹자에게 그가 수많은 수레와 수행인이 수반 들게 했다고 말한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맹자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니 사치스럽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김용옥은 그런 “오기 때문에 그래도 선비의 도덕적 기능이 존중되는 그러한 사회적 기풍이 조선 5백년의 역사를 통하여 형성되어 왔고, 오늘 우리 사회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하여 그가 TV 강연 등을 통하여 엄청난 강의료를 받는 대단한 명강사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반면 쿠라하라는 이로부터 “전국시대 말기에 부자들에게 기식하면서 장례절차나 봐주고 생활하였던 유가의 말류, 즉 천유(賤儒)가 나타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70쪽) 맹자를 그런 천유의 하나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런 천유가 전국시대부터 지금까지 존재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늘어났으며, 특히 유교가 20세기 초 나라를 망친 주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한반도에서 유독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묵자는 공맹과 달리 만인평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당대의 어떤 주장보다도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허행을 묵가로 보는 견해에 따른다면 허행도 마찬가지로 반전 평화를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허행을 자유와 자치와 자연에 충실한 동아시아적 삶의 방식을 주장하고 만민평등을 역설한 최초의 이단이자 비주류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쿠라하라는 장자의 길을 간 사람이 열자라고 했지만, 양주를 노장의 계승자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양주는 노자가 <노자> 23장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사상을 발전시켜 인간성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아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열자> ‘양주’ 편에 나오는 양주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볼 수 있다. “태고 사람은 생이 잠시 머무는 것이고, 죽음은 잠시 가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마음대로 움직여도 자연상태를 벗어나지 않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명예의 유혹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고, 본성대로 삶을 즐겼다. 만물을 거스르지 않았고, 사후의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형벌이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명예의 유무와 수명의 다소는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열자
<열자> ‘양주’ 편에서는 백성이 불안한 이유를 장수, 명예, 지위, 재물을 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맹자가 위아를 주장한 양주를 짐승이라고 비난한 것과 달리, <한비자> ‘현학’(顯學) 편에서는 양주가 위아를 주장하여 “세상의 군주가 그를 따르고 예로 대하며 그의 지혜를 귀하게 여기고 그의 행동을 고상하게 여겨 외물을 가볍게 보고 생명을 중시하는 선비라고 생각한다”고 했음이 이해된다. 즉 “외물을 가볍게 보고 생명을 중시하는” 것이 양주 사상의 핵심으로 이를 이유로 여러 군주의 존경을 받았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도 양주는 당시 10명의 현인 중 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맹자가 양주를 비판한 이유는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에 대해 양주는 그것도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인위적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양주는 이념이나 가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공격하고 심지어 전쟁을 통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비판했다. 따라서 양주가 군주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주장한 맹자에게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양주의 사상은 당시의 엄혹한 현실에 대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 곧 사라졌다. 즉 맹자가 비판하듯이 군주를 부정한 탓이 아니라, 생명 중시만으로는 현실 해결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생명사상이라는 것이 친체제적인 것인 한 현실 해결에 무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무군파와 도교
<장자>는 내편(內篇)과 외잡편(外雜篇)으로 구성된다. 내편과 달리 외잡편을 장자 자신의 글로 인정하지 않고 장자 후학의 작품으로 보는 리우샤오간(劉笑敢, 1947~)의 견해에 따라, 앞에서 언급한 ‘거협’편을 비롯하여 외잡편의 ‘도척’(盜?) 등 7편의 저자를 무군파(無君派)라고 한다. 무군파는 “허리띠 고리를 훔치면 목이 베이고 나라를 훔치면 제후가 된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군주는 물론 현명한 군주의 통치에도 반대했다. 나아가 중국 고대의 황제로부터 문왕까지 역대 성군이라고 칭송된 군주들을 모두 비판하고, 이어 “도둑치고는 이렇게 큰 도둑이 없는데 천하 사람들이 왜 너를 도구(盜丘)라 하지 않고 나를 도척(盜?)이라고 하는가”라고 했다. 여기서 도구란 공자를 말한다.
무군파가 군주를 비판하는 이유는 군주가 세속의 이익에 사로잡혀 참된 인간성을 갖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참된 가치판단의 기준인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을 무군파가 어겼다고 본 탓이다. 무군파에 의하면 군주가 백성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통치하면 백성은 참된 본성에 따라 살 수 없고, 결국은 백성의 삶이나 나라를 망친다. 나아가 무군파는 통치자는 물론이고 그를 위하여 봉사하는 지식인까지 비판하므로 ‘무군’이란 통치자와 통치체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렇게 해야 완전한 무위, 즉 어떤 통치도 없앨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군파가 장자의 현실초탈을 넘어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은 장자철학에 대한 중요한 개조이자 발전으로서 지금 우리가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이다.
무군파가 현실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전한(前漢, 기원전220~기원후8)이 망한 뒤 후한(後漢, 25~220)이 건국되면서 삶이 어려워진 농민을 중심으로 한 오두미도(五斗米道)와 태평도(太平道) 등의 결사와 함께 등장한 중국의 종교인 도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태평도는 <삼국지>에 나오는 황건적의 두령인 장각(張角)이 일으킨 조직으로 철저히 진압당해 이어지지 못했지만, 오두미도는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여 천사도(天使道)로 이어져 중국 도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한반도에도 들어와 고구려 말엽에 크게 유행했다.
도교는 중국 최초의 도교 경전인 <태평경>을 편찬한 황로도(黃老道)를 계승하고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를 편찬했다. 두 책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인 무형의 원기(元氣) 또는 도기(道氣)가 음양오행을 통해 유형의 모든 사물을 만들어낸다. 이는 도가와 음양가의 기론적 우주관을 계승한 것으로, 원기는 태양과 태음 및 그 조화인 중화로 분화되어 천 지 인, 해 달 별, 부 모 자녀, 군주 신하 백성 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러한 천인합일 이론과 함께 도교에서는 그 실현을 위한 수양론을 중시했다. <태평경>은 ‘육죄십치결’(六罪十取決)에서 “재물을 담당하는 사람이 그 축적에만 힘쓰고 다른 사람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는 것을 방기한다면 그 역시 중대한 범죄”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이 당시의 빈곤한 농민들에게 감동을 주고, 아나키즘적인 상호부조의 이념을 퍼트렸을 수도 있었다.
완적, 유령, 도잠
유가의 유군론은 <맹자> ‘만장’(萬章) 상에서 “하늘이 천자에게 천하를 준 것은 백성이 천자를 수용하고 그 삶을 편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설명되었지만 후한(後漢, 25~220) 말에서 삼국(220~280) 및 서진(西晉, 265~316)에 이르는 시대에 왕실이 부패하고 사회혼란이 끊이지 않은 현실에 대한 설명일 수 없어서 많은 무군론자가 등장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도가에서는 왕충(王充, 27~?)이 유일했다. 그는 무군론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소공권이 말하듯이 그 사상의 논리적 귀결은 무군론이었다. 주저 <논형>(論衡)에서 천(天)의 의지에 의하여 자연과 사회가 지배된다고 하는 유교의 천인감응의 신권설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맹의 언행도 비판하고 숙명론에 사로잡힌 채 생애를 끝마쳤으나 중국 중세를 통하여 가장 혁신적인 철학을 수립했다.
위진의 죽림칠현에 속하는 완적(阮籍, 210~263)과 유령(劉伶, 221~300)도 무군론을 전개했다. 완적은 <대인선생전>에서 무군과 무신(無臣)을 주장했다. 즉 태고에는 순박한 상태에서 백성이 모두 편안했고 “군주가 없어 삼라만상이 안정되었고, 신하가 없어 만사가 순조로웠”으나 뒤에 제도가 생겨나 고통까지 수반되었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음을 만들어 소리를 어지럽히고, 색을 만들어 형체를 파괴하고, 밖으로는 면모를 바꾸고 안으로는 감정을 숨긴다. 욕심을 품어 많은 것을 추구하고, 거짓과 기만으로 명예를 쫒는다. 군주라는 직위가 세워지면 포악함이 나타났고, 신하라는 직위가 생기면 도적들이 생겨났다. 가만히 앉아 예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곧 아래 백성들을 속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정치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본 완적의 무군론은 노장의 현실비판보다 더욱 격렬한 비판이었다. 완적과 같은 무군론자였던 유령은 <주덕송>(酒德頌)에서 대인선생은 “행동에 걸림이 없었고 집이든 갈대숲이든 거처를 가리지 않았으며, 하늘을 천장삼고 땅을 자리삼아 뜻대로 멋대로 살아갔다”고 했다.
죽립칠현보다 100년쯤 뒤에 태어난 도잠(陶潛, 365~427)도 무군론자였다. 그의 <도화원기>(桃花源記)나 시에서 묘사한 세상은 노자의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가 없는” 조건과 합치되고, 군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 시에서 “가을이 익어도 왕의 세금이 없다”고도 노래했다. 그러나 죽림칠현이나 도잠은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오직 자연주의 은둔사상가로 왜곡되었다. 그들의 무군론을 민주주의로 부활시켜야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뿌리가 비로소 튼튼해진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2)
동아시아 민주주의 발전 위해 ‘무군론’에 대한 재인식 시급
폭군 연왕에 저항하다 처참하게 살해당해 -방효유(方孝孺,1357~1402)
공자의 권위 도전…중국사상사에서 혁명적 -왕양명(王陽明,1472~1529)
국가사회의 통제로 인한 개성왜곡에 저항 –이지(李贄, 1527~1602)
명의 방효유, 왕양명, 이지
앙양명
종래 중국의 전통 사상 가운데 아나키즘에 가까운 것으로 명(明, 1368~1644)의 양명학, 특히 양명 좌파를 중시해왔다. 그 앞에 역사가인 방효유(方孝孺, 1357-1402)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폭군인 연왕(燕王)에 저항하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진리의 순교자로 “하늘이 군주를 세운 것은 인민을 위한 것이며, 인민으로 하여금 군주를 떠받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인민은 곡식과 옷감을 군주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른 것을 고르게 하고, 홀아비와 고아를 돌보고, 빈곤한 자를 구제하고, 무능한 자를 가르치고 먹여 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경과 공손의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민의 감정이 그런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방효유
16세기에 와서 각자의 마음에서 윤리를 찾고 능동적인 존재인 개인의 욕망도 인정한 왕양명(王陽明, 1472~1529)과 그 제자들이 등장했다. 그는 “마음으로 탐구하여 아니라면 그것이 공자에게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감히 옳다고 할 수 없다”고 하여 한나라에서 명나라까지 모든 전제정부의 추앙을 받은 공자의 권위에 도전한 점에서 중국사상사에서 혁명을 이루었다. 특히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우부(愚夫), 우부(愚婦)와 성인(聖人)이 같다”라고 주장하여 사대부의 계급적 우월을 절대시하는 이념체계인 주자학의 반발을 샀다. 19세기 중국의 아나키스트인 유사배(劉師培, 1884~1919)는 왕양명을 높이 평가하면서 왕양명의 양지설을 루소의 천부인권설에 필적하는 것으로 보았다.
왕양명의 제자 중에는 이른바 ‘양명 좌파’로 불리는 개인주의적 급진파가 등장했고, 그 중에서도 이지(李贄, 1527~1602)가 두드러졌다. 이지는 공맹 우상화를 공격하고 자율적 개성(아기와 같은 천진한 마음인 동심)을 강조하면서 국가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통제 기제들로 인한 개성 왜곡에 대해 저항했다. 특히 <분서>(焚書)에서 “백성들에게 (획일적인) 도덕과 예의를 강요하려고 국가의 형벌을 남용하는 탐욕스러운 거짓 ’인자‘(仁者)의 무리”라고 유가를 비판했다. 그는 진나라 말기 “왕후장상에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느냐”면서 만민평등의 기치 아래 중국 최초의 반란을 기도한 진승(陳勝)을 높이 평가하고, 무위도식하는 도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지는 무위에 입각한 정치를 주장한 점에서 도가와 유사했으나, 도가와 달리 군주가 이룩한 업적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즉 태고의 인간은 금수와 다름없어 요순 이후 작위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성인이 필요했으나 무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유가의 등장 이후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제도가 필요해졌고, 그 결과 정치가 더욱더 번거로워졌다. 따라서 그는 통치자가 강제수단으로 백성의 생활을 규제해서는 안 되고, 특히 통치자의 사상으로 백성의 사상을 규제해서는 안 되며, 무위에 근거하여 사회에 유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지는 위진의 완적이나 포경언 등이 보여준 무군론과는 달리 유교적인 유군론에 충실했고 일부 군주를 찬양했다.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
포경언의 무군자치사상
무군론은 위진남북조 시대(3~5세기)의 포경언(?敬言)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허행의 책이 전하지 않고 <맹자>를 통하여 그를 알 수 있듯이 포경언에 대해서도 갈홍(葛洪, 284~364)의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으로만 알 수 있다. 그러니 포경언은 갈홍과 같은 시대 사람이거나 그 이전 사람으로 추측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맹자가 허행을 비판하듯이 갈홍이 포경언을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맹자나 갈홍 같은 주류의 책만 남고 허행이나 포경언 같은 비주류는 그들의 책이 남기커녕 남들의 비난을 통해서만 겨우 알려졌다.
갈홍 ⓒ위키피디아
도가인 포경언은 우주만물이 음양으로 구성되므로 존비 관계가 설 자리는 없다는 이유에서 유가의 군권신수설을 비판하고 군주제와 군신관계를 부정했다. 나아가 군주제가 백성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그들의 자연스러운 성정에 위배되므로 군주제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군주가 없었던 태고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했다. 포경언은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고에는 군주도 신하도 없었다.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었다.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한없이 스스로 만족했다. 서로 다투지도 힘들여 살지도 않고 영예도 수치도 없었다. 산에는 길이 없었고 강에는 배도 없었으며 하천과 계곡이 막혀 서로 왕래가 없었으므로 토지를 겸병할 일도 없었다. 무리를 지어 한 데 모여 살지도 않았으므로 서로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 말에 꾸밈이 없었고 행위에 거짓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지도 않았고 형별로 백성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포경언은 태고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하여, 노장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즉 “백성은 자기에게 이로우면 그것을 다투려고 한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에나 사람은 이기적임을 인정한 것이다. 포경언은 유가의 예교나 법가의 엄벌을 핵심으로 하는 군주제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도리어 군주제 하에서 이기심은 더욱 커진다고 했다. 즉 "임금과 신하의 신분이 생기면 변화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본래 수달이 많아지면 물고기가 놀라고, 매가 많아지면 작은 새가 근심하는 법이다. 부리는 사람이 늘어나면 인민은 고통스러우며, 위에 바치는 것이 많아지면 아랫사람은 가난해진다."고 했다.
군주와 신하가 없었던 태고에 대해 설명한 뒤 포경언은 전제군주제의 기원을 고찰하고 “유가가 “하늘은 백성을 낳고 군주를 세웠다”고 말하는데 어찌 하늘이 사람을 위해 간절하게 말을 하려고 했겠는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면 약자가 복종하게 된다. 똑똑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면 어리석은 자는 그를 섬기게 된다. 복종을 하게 되니 군신의 도리가 생겨나고 섬기게 되니 힘이 없는 백성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하면서 유가의 군권신수설을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포경언은 사람의 본성은 자유를 원하고 구속을 받으면 기뻐하지 않는데 군주제는 백성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으로 그들의 바람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즉 군주 탄생 이후 백성들에게 좋은 점을 주지 않았고 그들을 위한 어떤 이익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담만 가중시켰고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또 가장 개명된 군주에 의한 통치도 군주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포경언은 그 대안으로 백성들의 성정에 맡기며 그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무위’의 정치 방식을 제시했다. 즉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스스로 행함, 즉 자행의 자치에 맡기는 것이다. 즉 모든 정치 형식을 부정하지 않고 자치의 정치를 주장한 것이다.
불교와 <무능자>
포경언이 살았던 시대의 중국에 불교가 성행했다. 즉 위진시대(魏晉時代, 220~420) 이후였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 589)에는 더욱 성행하면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을 주장하자 유가만이 아니라 도가도 그것에 반대했다. 위진시대에 도가는 예교를 타파하기 위해 유가에 적대했으나, 남북조에는 예교를 옹호하여 유가와 제휴했다. 도가는 삼파론(三破論), 즉 불교가 나라와 가정과 몸을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무부무군무신(無父無君無身)이라고 했다.
340년에는 진나라에서 승려에게 군과 부를 공경하라고 명했으나 혜원(慧遠, 334~416)과 같은 승려는 그것에 반대했다. 남북조에 와서는 도교는 중화의 것인 반면 불교는 오랑캐의 것이라고 하여 배척하는 주장도 나왔으나, 불교 측에서는 당연히 이에 반대했다.
수당시대(581~907)에는 유가가 우세했으나 불교도 강성했으며 도교도 조정의 지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당 중기 이후 환란이 계속되면서 유가에서는 맹자의 민본사상이 강조되고 노장사상이 성행하면서 무군론이 다시 제기되었다. 저자를 알 수 없는 <무능자>(无能子)라는 책에서는 인류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 즉 만류(萬類)의 평등을 주장하고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전통적 관념을 타파했으며, 인류끼리도 마찬가지로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그 책에 의하면 태고사회는 절대적인 자유 평등의 사회였으나 일을 좋아하는 성인에 의해 파멸되어 맑고 편안한 행복은 점차 감소되고 번잡스럽고 가혹한 고통이 날로 심해졌다. 그 과정은 첫째, 가족만 있고 국가는 없는 반자연사회였으나, 둘째, 다스리고 가르치는 일이 더욱 심해져서 사람들끼리 불평등하게 된 정치사회가 등장하고, 셋째, 원시적 정치사회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법이 오래 됨에 따라 폐단이 생기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어 윤리적인 정치사회가 되었고, 넷째, 그 뒤로 폐단은 더욱 심해져 사회의 쇠란은 극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과 만물은 다 같이 죽게 되지만 모두가 갖는 기(氣)는 영원하기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도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중국 천자의 존귀함이란 천하를 열로 나누었을 때 1, 2할에 불과하고, 정벌전쟁을 하며 자신을 드높이는 것일 뿐이”고 군주제는 반자연적이라고 비판하여 포경언을 능가했다.
<무능자>는 성인이 명예와 이익의 욕망을 선동하고 인륜의 정감을 과장하며 인의의 덕을 가장한 것을 그만두고, 백성이 자연스럽게 되고 순박과 천진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천하가 다시 자유 평등의 상태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즉 이익이 중요하지 않고 명예 또한 숭상할만한 것이 못 되며, 인륜의 정감, 특히 부자 형제의 윤리까지 중요하지 않다고 보아 포경언의 사상을 방불케 했다.
원의 등목과 백련교
송대(960~1279)에 와서 유가가 득세하고 도가는 침몰하면서 무군론도 사라졌다. 유가는 성리학자들인 이학파(理學派)와 공리주의자들인 사공파(事功派)로 나누어졌다. 북송이 쇠약해지면서 국가의 부강을 중시하고 왕도와 함께 패도도 인정하여 법가를 방불케 한 사공파가 대두하여 이학파를 압도했다. 그런 송대에 무군파는 존재할 수 없었다.
포경언 이후 중국사상사에서 무군파는 천년이 지난 13세기에 와서 원(1271~1388) 초기의 대표적 진보사상가인 등목(鄧牧, 1247-1306)에 의해 이어졌으나, 그는 중국사상사에서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 그는 ‘삼교외인(三敎外人)’이라 자처하며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만큼 유·불·선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상의 소유자로 원나라의 관직 제의를 거부하고 저술에만 종사했으나, 그 저술은 반군주 및 반전제 사상을 이유로 대부분 사라지고 유일하게 <백아금>(伯牙金)만 전한다.
등목은 그 책에서 이상적인 태고사회인 요순시대를 음식이 사치스럽지 않고, 의복이 아름답지 않으며, 궁실이 화려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특권이 없었고, 군주와 백성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나 엄격한 등급의 제한도 없었고, 군주가 직책을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백성을 잘 살폈다고 묘사했다. 즉 군주는 길을 가는 사람을 만나거나 백성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의 요구를 명백히 이해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민생을 구하는 책임을 졌으며,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오랜 재해를 다스리며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을 백성에게 주었다고 했다.
포박자 ⓒ위키피디아
등목에 의하면 군주의 생활은 백성의 그것과 다름이 없어 군주가 되려는 자가 거의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고 그가 그만둘까 걱정했으며, 따라서 군주는 유가가 말하는 성인이 아니고,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었다. 군주와 마찬가지로 관리가 되려는 자도 없었고, 선비들은 높은 산속에 은거하여 군주가 온갖 정성을 다해 그들을 청했으며, 따라서 관리도 군주처럼 부득이하여 된 것이고 백성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했다.
이처럼 “하늘이 백성을 내고 군주를 세운 것은 군주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데 어찌 사해의 넓은 곳을 군주 한 사람의 사사로움을 위해 사용할 수 있으랴,” “오늘날 백성들은 스스로 일해 먹고 살 수 없어 날이면 날마다 화식(貨殖)으로 절취당하고 유혹당해 그것을 착취당하니 또한 도적의 심보가 아니겠는가. 도적들이 일어나 민가를 해치며 백성을 종처럼 부려도 그 피해가 극심한 데까지 이르지 않는 것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리로 인한 피해는 피할 수가 없어 대낮에 횡행하고 천하 백성이 원망은 할지라도 감히 말을 못하고 성을 내어도 감히 처벌을 못한다. 어찌 하늘이 어질지 못하여 바탕을 숭상하고 간교함을 좋다고 하며 호랑이, 이리, 뱀, 버러지 같은 놈들과 더불어 똑같이 백성을 해할 수 있으리요.”라고 현실을 비판했다.
등목은 삼대 이후의 군주는 요순시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백성은 어리석지 않으며 관리의 착취에 당연히 분노하고 원망하기 마련이므로 그 반항은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등목은 특권이 없는 군주제 이외의 다른 정치체제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즉 중앙관직이나 현령을 없애고 백성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했으나 군주제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즉 무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원나라에는 등목 외에 이렇다 할 사상가가 없었지만 도교와 불교에서 기원한 중국 민간종교인 백련교(白蓮敎)가 등장하여 아나키즘적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여성과 빈민이 환영한 교리는 한 여인이 그 자식을 천년왕국이 도래할 때 하나의 가족으로 모은다는 것으로 불교의 미륵사상과 민간신앙이 혼합된 사상이었다. 물론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비밀결사 형태로 존재했으나, 14세기에 원나라를 멸망시킨 홍건적의 난의 모태가 되었고, 명의 태조 주원장도 백련교도로 출발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명을 세웠다. 청나라에 와서도 백련교도는 정권에 반대하는 비밀결사로 조직되었고 의화단의 모태가 되었다. 특히 1800년 전후 8년간 이어진 백련교도의 난은, 인구가 조밀한 동부 해안지대에서 이주한 빈농과 부랑 노동자 중심의 백련교도가 일으킨 반권력 폭동으로서 통일적인 조직이나 목표나 지도자를 결여하면서도 교묘한 게릴라전으로 청조를 곤경에 몰아넣은 아나키적 반란이었다.
청의 황종희, 당견, 대진
황종희 ⓒ위키피디아
명말청초의 황종희(黃宗羲, 1610년 ~ 1695년)는 양명학의 전통을 승계하여 사람은 누구나 옳은 행동을 가릴 수 있는 양지를 가지며 그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 양명 좌파와 달리, 공부와 수양을 통해 양지를 계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학의 진면목을 밝히고자 한 고증학의 입장에 섰다. 그가 1663년에 쓴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독선적인 군주세습제를 반대하고 사대부 중심의 공론정치를 강조한 탓으로 청말의 개량파와 혁명파에 의해 루소에 비교되었다. 그러나 왕양명이나 이지와 마찬가지로 무군론과는 무관했다.
당견(唐甄, 1630~1704)은 <잠서>(潛書)에서 "진(秦)나라 이래 2000여 년 간의 도살이 끝내 멈추지 않았으니, 슬프다! 어찌 제왕이라는 도적놈들의 해독이 이렇게 극심한 데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한 사람을 죽이고 베 한 필과 곡식 한 되를 취하여도 도적놈이라 부르는데, 천하의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베와 곡식을 죄다 빼앗아 가는데 도적놈이라고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당견도 무군론이 아니라 황종희와 유사한 사대부 공론정치를 주장했다.
유사배가 높이 평가한 청나라 중기의 대진(戴震, 1724~1777)은 주자가 완성한 이기철학이 본질적으로 기보다도 이를 중시하고, 인성에 대해서도 의리의 성을 말하고 기질에 뿌리박은 정이나 욕을 악의 근원으로 삼아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을 비판하고 기의 철학을 주장했다. 즉 기질의 성만을 성으로 생각하고 정이나 욕을 정당한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긍정하여 권력자에게 억압된 하층 사대부나 국민의 입장을 주장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명청대에는 무군론의 전통이 단절되었다.
이상의 무군론에 대해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무시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1999년에 번역된 주일요(朱日耀)의 <전통중국정치사상사>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소공권이나 유택화(劉澤華)의 <중국정치사상사>에서는 무군론을 어느 정도 다루고 있지만, 무군론을 무시하는 중국 현대 정치학의 태도는 중국의 전통적인 반민주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주일요 책의 번역본에는 등목을 유목으로 표기하는 등의 오역까지 눈에 띈다. 동아시아 전통사상, 특히 무군론에 대한 재인식이 동아시아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긴급하게 필요하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6022
서양 고대의 아나키스트1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6023
아나키즘과 민주주의
동아시아 아나키즘,그 반역의 역사
(책세상문고우리시대 29) 저 : 조세현/ 책세상
목차
001. 책을 쓰게 된 동기...(6)
002. 들어가는 말...(11)
제1장. 일본 :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노동운동...(19)
1. 마르크시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 - 고토쿠 슈스이...(21)
2. 동아시아 혁명가들의 사상 교류...(35)
3. '대역 사건'과 고토쿠 슈스이의 죽음...(46)
4.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의 재생 - 오스기 사카에...(52)
제2장. 중국 : 군주제와 군별정부에 대한 저항 그리고 신문화운동...(59)
1. 정치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61)
2. '중국식' 아나키즘과 '과학적' 아나키즘...(67)
3. 중국 아나키스트의 초상 - 스푸...(80)
4. 스푸의 학생들과 신문화운동...(92)
제3장. 한국 :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99)
1. 민족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서...(101)
2. 신채호는 아나키스트인가...(108)
3.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123)
제4장. 아나·볼 논쟁과 아나키스트 운동의 쇠퇴...(135)
1. 동아시아의 아나키즘·볼셰비즘 논쟁...(137)
2.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의 쇠퇴...(146)
003. 맺는말...(153)
004. 주...(157)
005. 더 읽어야 할 자료들...(168)
출판사 서평
최근 들어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런 흐름은 아나키즘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서부터 아나키즘과 사회운동을 접목시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책세상 문고 ||^우리시대 29||^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는 오늘날 이러한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과 맥을 같이하되, 환경, 공동체, 반자본주의 운동 등 범인류적 사회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이 아니라 역사상의 아나키즘, 더욱이 동아시아 세 나라, 일본·중국·한국의 아나키즘에 한정해, 국가와 민족의 수동적 운명을 거부해온 ||^반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동양의 아나키스트들의 사상과 삶을 통해 근대 동양, 특히 일본, 중국, 한국 동아시아 3국의 역사 속에 태동되고 움직였던 아나키즘 운동을 집중 소개하고 있다. "나의 자유는 최고의 자유"라고 선언했던 푸르동, "파괴는 새로운 창조"라 했던 바쿠닌,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며 민중을 깊이 사랑했던 크로포트킨 등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서양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한결같이 매우 열정적이다.
최근 들어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런 흐름은 아나키즘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서부터 아나키즘과 사회운동을 접목시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책세상 문고 '우리시대 29'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는 오늘날 이러한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과 맥을 같이하되, 환경, 공동체, 반자본주의 운동 등 범인류적 사회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이 아니라 역사상의 아나키즘, 더욱이 동아시아 세 나라,일본·중국·한국의 아나키즘에 한정해, 국가와 민족의 수동적 운명을 거부해온 '반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동앙의 아나키스트들의 사앙과 삶을 통해 근대 동양, 특히 일본, 중국, 한국 동아시아 3국의 역사 속에 태동되고 움직였던 아나키즘 운동을 집중 소개하고 있다. "나의 자유는 최고의 자유"라고 선언했던 푸르동, "파괴는 새로운 창조"라 했던 바쿠닌,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며 민중을 깊이 사랑했던 크로포트킨 등 우리에게 잘알려져 있는 서양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한결같이 매우 열정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모습을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에게서도 찾아 우리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어한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중국의 스푸(師復), 류스페이, 한국의 신채호, 박열 등 서양의 그네들에 못지않게 열정적인 삶을 살다 간 동양의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한 사상과 행동이 갖는 중요성을 짚어봄으로써 근대화 과정에서 아니키즘이란 결코 시대의 이단이 아니라, 역사적으로요구된 사상이라는 점, 아나키즘의 광범한 수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 사회 내뷰·의 절박한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실마리를 찾게 한다.
식민지로서의 근대 한국의 아나키즘은 민족해방이라는 숙명적인 과제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한수단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시작부터 색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론가들은 한국의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매우 강해 민족주의의 바탕에서 태어나 민족주의 때문에 사망했다고까지 평가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서양의 아나키즘 이론의 잣대만으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한국의 근대적 상황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신채호로, 그는 중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의 다양한 접촉을 통해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조선식 아나키즘을 주장하며 민족 주체성을 강조했다. 또한 의열단의 폭력투쟁을 이론화한 직접행동 강령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자신의 아나키즘 사상의 단면을 보인다.
지은이 조세현은 고등학생 때 《노자》 와 《장자》 를 읽던 중 노장사상이 동양의 아나키슴이라는 옮긴이의 글에 흥미를 느껴 '아나키즘' 이라는 주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중국사를 공부하던 중 중국 근대 사회에서도 아나기스트 운동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져 석사학위 논문 주제로 중국의 아나키스트그룹 가운데 하나인 '신세기(新{比紀)' 파에 대해 썼다.
한중 수교 후 평소 바라던 중국 유학의 길에 올라 1999년 여름 <청말(淸末) 민국초(民國初) 아나키스트의 문화사상> 이라는 논문으로 베이징 사범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서강대, 광운대, 방송통신대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포스트 닥 연구비 지원을 받아 중국사회당이란 정당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 동안 중국의 아나키즘을 비룻해 중국의 근현대 사상과 관련된 여러 편의 논문을 중국어와 한국어로 발표했다.저자는 이러한 모습을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에게서도 찾아 우리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어한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중국의 스푸(師復), 류스페이, 한국의 신채호, 박열 등 서양의 그네들에 못지않게 열정적인 삶을 살다 간 동양의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한 사상과 행동이 갖는 중요성을 짚어봄으로써 근대화 과정에서 아니키즘이란 결코 시대의 이단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요구된 사상이라는 점, 아나키즘의 광범한 수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 사회 내부의 절박한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실마리를 찾게 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는 1900년대에, 스푸는 1910년대에, 한국의 신채호는 1920년대에 주로 활동한 인물들로, 저자는 대략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로 이 세 사람을 등장시켜 글을 전개시킨다. 초기에 마르크시즘을 수용했다가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에 영향을 받은 고토쿠 슈스이는 군국죽의와 애국주의를 동전의 앞뒷면으로 보아 함께 부정했고, 세계주의에 기초하여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는 보편적 인류애를 주장했다. 중국인에게 아나키즘 수용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혁명이론의 전진을 의미했다. 즉 종족주의에 기초해 만주족 정권인 청 왕조를 타도하는 정치혁명에서, 사회주의에 기초해 전제왕조와 군주제를 전복하려는 사회혁명으로 나아간 것이다. 스푸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전형적인 아나키스트라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일본의 아나키즘과 러시아의 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폭탄을 제조하여 주요 인물 암살을 감행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정치문제보다는 도덕문제에 주력하여 봉건적인 가족제도의 해체를 주장하는 등 도덕혁명론을 주장했다. 저자는 스푸의 사상이 청말 아나키즘과 신문화 시기의 아나키즘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식민지로서의 근대 한국의 아나키즘은 민족해방이라는 숙명적인 과제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한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시작부터 색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론가들은 한국의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매우 강해 민족주의의 바탕에서 태어나 민족주의 때문에 사망했다고까지 평가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서양의 아나키즘 이론의 잣대만으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한국의 근대적 상황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신채호로, 그는 중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의 다양한 접촉을 통해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조선식 아나키즘을 주장하며 민족 주체성을 강조했다. 또한 의열단의 폭력투쟁을 이론화한 직접행동 강령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자신의 아나키즘 사상의 단면을 보인다.
각 나라별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은 서양과 기본정신에서는 일치한다. 즉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자나 볼셰비키처럼 일부 엘리트의 지도나 일부 정치집단의 음모에 의해 이상사회를 달성할 수 없으며, 오직 민중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서만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선거를 통한 혁명이나 공산당과 같은 전위조직을 부정하고, 오직 민중 스스로가 테러와 총파업, 혹은 교육운동이나 이상촌 건설과 같은 방법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주의의 고양과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시대조류에 맞서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동아시아 민중연대를 주장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비록 현실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안과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원리원칙을 고집한 것이 운동의 패인으로 종종 지적되지만, 그래도 그들이 제시한 이상주의적 전망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던진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https://blog.naver.com/anarchistleague 아나키스트 연대
과격한 테러리스트는 오해…아나키스트 대부분 민중과 연대"
조세현 교수에게 듣는 영화 '박열'과 아나키즘
- 민중 바탕으로 사상 실천
- 교육자로 계몽 앞장서기도
- 영화 속 박열, 비주류지만
- 권력 쥔 이들과 대척점에서
- 한·일 민중 연대 모습 돋보여
- 우리사회 어지럽히는 갈등
- 현대 걸맞은 아나키즘으로
-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28일 개봉한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의 반응이 뜨겁다. 개봉 첫날 관객이 20만 명을 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1902~1974)에 대한 관심도 높다. 영화 '박열'의 영어 제목은 'Anarchist from Colony·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이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를 그린 영화 '박열'(감독 이준익)의 한 장면.
아나키즘 전문가인 부경대 조세현(사학과) 교수에게서 '박열'과 아나키즘 이야기를 들었다. 조 교수는 중국 베이징사범대에서 중국 근현대 사상문화사(아나키즘)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교류와 연대' 등의 책을 썼다.
-영화 '박열'을 보셨나. 어땠나.
▶개봉 첫날 상영관에서 봤다. 고증에 충실했다. 이준익 감독이 박열을 많이 연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증에 신경을 많이 써서인지 영화적 재미만을 기대한 관객에겐 조금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다.(웃음) 학계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는 대목은 적절히 피해갔다. 박열이 상하이에서 정말로 폭탄을 들여왔는지, 김중한이 고문을 받던 중 털어놓은 그대로 박열이 천황 암살 시도를 했는지, 가네코 후미코가 자살로 생을 마쳤는지 등이다. 이런 대목은 학계에서도 해석과 의견이 분분하다.
-영화 속 박열은 거침없고 자유분방하다. '아나키스트' 모습으로 봐도 될까.
▶박열의 아나키즘은 개인주의 아나키즘, 허무주의 아나키즘 정도로 분류할 수 있겠다. 당시 아나키스트의 열에 아홉은 소련의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적 아나키즘 성향을 띠었는데, 박열은 당시의 그런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 공격적이고 자유분방하며, 민족주의도 깔려있다.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젠가 영화화될 것으로 생각했다.
-'아나키스트'라면 테러리스트가 먼저 떠오르는데.
▶'무정부주의자'라는 번역 탓에 오해가 있다. 아나키즘의 역사·사상적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과격한 모습도 있지만 극히 일부다. 영화나 소설에서 극적 표현을 위해 불러들이는 아나키스트 모습이 획일적이었다. 아나키즘의 핵심 가치는 '연대'다. 민족과 국가가 아닌, 권력층에 맞서는 민중의 연대 구도로 편성된다. 그래서 대부분 아나키스트는 민중 사랑을 바탕으로 사상을 실천하고, 교육자로 계몽에 앞장선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한일 민중의 연대가 인상깊다.
▶공감한다. 아나키즘 정신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런 장면이 나왔을 것이다. 일본 아나키스트와의 교류를 더 자세히 표현해도 좋았겠다 싶었다. 박열의 아나키즘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 아나키즘으로 보인다. 한국·중국에선 없던 흐름이다.
-영화 속 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는 어떤 사람인가
▶박열보다 사상적으로 더욱 치밀한 아나키스트였을지도 모르겠다. 글도 잘 썼다. '천황 암살'을 모의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재판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엄청난 이슈였다. 가네코가 박열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안 일본이 형무소에서 죽인 다음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이 실제 있었다. 영화에서도 두 인물의 비중이 비슷하다.
-오늘날 박열과 아나키즘에서 참고할 점이 있다면.
▶그동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영화는 비슷했다. 비장하고, 영웅적이랄까. 영화 '박열'이 그 틀에서 벗어난 점이 좋았다. 당시 아나키스트는 일본 민중과 한국 민중은 물론, 동아시아 연대를 추구하던 사람들이다. 다시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가 고개를 드는 오늘 아나키즘은 많은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되지 않을까. 현재에 걸맞은 연대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안세희 기자 ahnsh@kookje.co.kr 2017-06-29
우리가 몰랐던 일본인 여성 아나키스트
영화 〈박열〉로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의 삶이 주목받고 있다. 일왕제에 맞섰던 그녀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옥사했다. 여성으로서 사회적 정체성도 고민했다.
여기 한 명의 여성이 있다. 일본 이름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한국 이름 박문자.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의 동지이자 아내로 등장하면서 비로소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인물이다. 제국주의 본진인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제(천황제)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다 감옥에서 스물세 해의 짧은 생을 마쳤다.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여성 혁명가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불세출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매혹적이라는 수식어로 포장되는 근대 여성도 아니었다. 배움도 배경도 없는 동아시아의 ‘흙수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삶은 다만 처절하고 치열했으며, 그러므로 혁명적이었다.
영화 〈박열〉이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극장가에서 내려간 뒤에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뒤늦게 영화를 접한 이들 사이에서 그녀의 삶에 공명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관련 서적을 펴냈던 출판사는 개정판을 준비하는 등 여운이 길다. 영화 〈박열〉이 온전히 다루지 못했던 이 여성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녀는 무적자(無籍者)였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가정을 내팽개쳤고 어머니도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서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그녀는 열 살에 조선으로 건너와 고모의 양녀가 된다. 충북 부강이라는 곳이었는데, 지금의 세종시 부강면이다.
ⓒ도서출판 산처럼 제공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은 수기를 썼다.
그녀는 조선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설움을 겪는다. 일본 소설 〈오싱〉의 주인공처럼 어린 나이에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구박과 차별은 일상이었다. 오죽하면 밥을 굶는 가네코를 딱하게 여긴 마을의 조선 아낙네가 일본인이었던 그녀에게 “보리밥이라도 괜찮다면 먹을래?” 하고 권했을까. 그녀는 훗날 옥중 수기에서 “조선에 머물렀던 7년 동안 이때만큼 인간의 사랑에 감동받은 적이 없었다”라고 술회했다.
식민지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던 대다수 일본인과는 달리, 가네코는 조선의 피억압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3·1 운동이 보여준 ‘반역의 기운’ 또한 그녀를 감화시켰다. “조선에서 있었던 비참한 기억을 말하거나 조선인이 얼마나 학대받고 있는지 이야기할 때에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박열이 말려도 막무가내였다”라고 지인이 회상할 정도였다. 그녀의 삶을 추적한 일본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는 “가네코는 일본 문명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인의 일원인 박열의 모습에서 자신이 살아갈 방향을 발견했다”라고 평했다.
“어떠한 고정된 주의도 없다”
10대 후반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가네코가 사회주의에 눈뜬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도쿄에서 신문팔이를 하며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학습’하고 ‘투쟁’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교조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 가령 그녀는 옥중 수기에서 ‘사회주의는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난동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에 변혁이 도래했을 때, 아아 그때 민중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지도자는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그리고 민중은 다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녀가 옥중 수기를 쓴 1925년은 러시아 혁명 이후 전 세계에 사회주의 바람이 몰아치던 때였다.
가네코는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가 되는 길을 택했다.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흑도회’를 구성하고 그 기관지인 〈흑도〉를 간행한다. 〈흑도〉에는 이런 ‘선언’이 실려 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고정된 주의(主義)도 없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검은 개(우익)가 짖든 말든 우리들에게는 우리들만의 소중한 체험과 재능과 방침이 있다. 그리고 뜨겁게 약동하는 피가 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사회적 정체성을 직시했다. 피억압 민중 가운데에서도 가장 약자인 여성으로서 비참한 유년을 견뎠던 기억이 그녀를 기존 체제와 권력을 부정하게끔 이끌었다. 영화 〈박열〉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되는 그녀와 박열의 동거 서약(‘동지로서 동거한다. 운동 활동에서는 가네코 후미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공동생활을 그만둔다’)은 그녀가 제안한 것이었다.
ⓒGoogle 갈무리
남편 박열과 함께 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그녀는 일왕 측의 전향 요구를 거부했다.
가네코가 맞서려는 세계의 끝에는 일왕제가 있었다. 그녀에게 장자 상속 원칙을 따르는 일왕제는 국가권력과 가부장의 화신이었다. 그녀가 박열과 함께 왕세자에게 폭탄 테러를 가하려 한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전향하라는 일왕 측의 요구를 끝내 거부한 건 이런 이유였다. 당시 판사는 그녀를 일컬어 “반항적이고 열광적이며 눈물이 많고, 때로 무서울 정도로 히스테릭하다”라고 기술했지만, 오히려 이는 그녀의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가네코는 1926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는지 여부를 놓고 말이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옥중에서 쉬지 않고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담은 수기를 썼다. 그러면서 더 많은 부모들, 교육가, 정치가들이 자신의 수기를 읽어달라고 했다. 사후에는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다. 감옥에서 22년을 복역한 뒤 우익 성향 재일본조선거류민단(현재의 민단) 단장을 맡아 반공주의자가 된 박열의 삶과는 퍽 달랐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로 재조명됐지만,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응시했던 인물은 적지 않았다. 우선 앞서 밝힌 일본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에게 빚진 바 크다. 야마다 쇼지의 글을 번역해 〈가네코 후미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를 펴낸 정선태 교수(국민대 국어국문학)는 “저자의 성실한 자세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재판 기록과 수기는 물론, 신문·잡지 등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해 그녀의 삶을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2006년 한·중·일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펴낸 〈미래를 여는 역사〉에서도 가네코 후미코는 아시아의 사회운동가로 소개됐다. 2009년 소설가 김별아가 펴낸 〈열애〉도 박열과 그녀의 이야기를 다뤘다.
흥미로운 건 1984년 한국에서 이미 가네코 후미코를 다룬 연극이 공연되었다는 점이다. 원로 연극인 김의경이 집필하고, 정진수가 연출한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민중극단)가 그것이다. 극본을 맡은 김의경씨가 일본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다룬 소설 〈여백의 봄〉을 접한 뒤 만든 작품이었다. 지난 6월 타계한 배우 윤소정씨가 이 작품에서 가네코 역을 맡았다./시사인 이오성 기자 2017 8.28
절대적 자유를 향한 반역의 역사 저자 이호룡|서해문집 |2008.0
이호룡-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계명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방 직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운동노선> <재일본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의 조직과 활동> <일제강점기 국내 아나키스트들의 조직과 활동> <일제강점기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해방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조직과 활동> <신채호의 아나키즘> <미군정 경제정책의 기본 성격> <해방 이후 이종률의 민족혁명 활동과 그 사상> 등의 논문과 <한국의 아나키즘-사상편> <한국현대사강의> 등의 책을 썼다.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에서 한국민주화운동사 연구 및 그와 관련한 업무를 맡고 있다.
책을 내면서
1.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다
1-1 아나키즘의 수용과 확산
1-2 사회주의의 분화
2.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는 이상사회를 꿈꾸다
2-1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
2-2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는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
2-3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향해
3. 절대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다
3-1 진정한 민중해방은 민중들의 직접행동에 의한 사회혁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3-2 아나키스트 사회 건설은 아나키즘 선전에서부터!
3-3 테러적 직접행동을 통해 민중을 혁명의 길로!
3-4 경제적 직접행동과 일상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을 혁명전선으로!
3-5 혁명은 근거지 건설에서부터!
3-6 공산주의자를 박멸하자!
3-7 모든 민족의 힘을 하나로!
4. 자주적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다
4-1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4-2 생활혁신과 정치활동을 통해 자유사회 건설의 기반을 다지자
4-3 정당활동을 통해 자주적 민주국가를 건설하자
맺는말 : 황폐한 대지에서 새싹이!
주석-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절대적 자유를 향한 반역의 역사』는 10여 년 동안 한국 아나키즘운동 연구에 천착해 온 학자 이호룡이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을 다룬 당시 신문·잡지는 물론이고 아나키스트 단체가 발행한 각종 간행물과 팸플릿, 해외 아나키스트 단체의 자료 등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모아 한국 아나키즘의 역사를 생생히 살려낸 책이다.
저자는 아나키즘이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으며, 이후 민족주의·공산주의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신채호, 박렬, 이회영 등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아나키스트들이고, 그들은 일제강점기 농민운동·노동운동 등 대중운동부터 일제에 대한 테러까지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 극심한 좌우 대립 구도가 고착된 한반도에 제3의 사상 역할을 아나키즘이 해왔다고 평가한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견해를 토대로 아나키즘 수용 과정, 공산주의와의 분화, 아나키스트 단체들의 구체적 활동 사례와 그들의 부침, 재일본·재중국·재러시아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다양한 논쟁들과 그 영향, 그리고 최근의 동향 등을 아침 신문 기사처럼 촘촘히 재구성하고 있다.
한국의 아나키즘, 그 슬픈 초상
사람들은 ‘아나키즘’ 하면 ‘무정부주의’를, ‘아나키스트’ 하면 ‘낭만적 테러리스트’를 떠올린다. 그만큼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와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가 부족했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단순화할 수 없으며, 아나키스트들의 테러활동은 그들의 다양한 실천 방법 중 하나였을 뿐이다.
아나키즘은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으며, 이후 민족주의·공산주의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신채호, 박렬, 이회영 등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아나키스트들이고, 그들은 일제강점기 농민운동·노동운동 등 대중운동부터 일제에 대한 테러까지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계의 주도권을 넘겨주었고, 이후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훨씬 열악한 인적·물적 기반 위에서 힘겹게 활동을 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아나키스트들은 놀라운 실천력과 과감함을 보여 주었고, 민족주의자·공산주의자들과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연합하며 자신들의 활동을 만들어 갔다.
해방 이후 북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남에는 자본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반도에는 극심한 좌우 대립 구도가 고착화되었다. 제3의 사상 역할을 했던 아나키즘과 그 활동은 첨예한 좌우 대립 구도 속에서 그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민족해방과 자유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투쟁한 아나키스트들의 뜨거운 역사는 ‘수명을 다한 사상’이라는 비아냥 속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묻힌 과거를 꺼내 생생한 오늘의 역사로 살려내다
아나키즘에서 길을 찾다
1980년대 말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자본가독재의 대안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따라서 독재 권력을 온몸으로 거부하던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여러 운동에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이 잦아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들어 관련 연구자들의 모임이 결성되고, 자생적인 아나키스트 소모임도 만들어졌으며 아나키즘의 기본 원리인 상호부조에 기초한 다양한 공동체들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천민자본주의와 무차별한 생존경쟁이 인간을 말살하는 21세기의 현실, 사회주의의 희망이 사라지고 진보적 활동가들이 보수 정치권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땅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 세력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면서 민중의 삶이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고, 이를 막아 줄 진보 세력들은 자체 분열과 지리멸렬한 활동으로 그 한계에 봉착했다. 따라서 2008년은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다시 시작해야 하는 해이며, 우리가 아나키즘의 역사를 그저 살려 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될 해이기도 하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그들의 투쟁의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해방 이후 형성된 좌우 대립 구도 속에서 모든 사상가들이 좌와 우 어느 한 쪽에 편제되어야 했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외의 사상과 그 사상에 의해 지도된 활동들이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현대 이후 우리나라 사회를 주도하는 가운데 이 양쪽에 속하지 않은 사상이나 세력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좌우 대립의 흑백논리가 판치는 한, 좌우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은 나올 수 없으며, 평화적 민족통일도 이룰 수 없다. 민족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상 체계를 수립하고 그 속에서 민족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민족이 통일된 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는 사회여야 한다 ---저자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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