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봉양리 뽕나무’ 천연기념물 됐다
자연유산인 ‘정선 봉양리 뽕나무’가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강원도기념물인 ‘봉양리 뽕나무’를 ‘정선 봉양리 뽕나무’라는 명칭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강원 정선군청 앞에는 유서 깊은 살림집인 정선 상유재 고택과 뽕나무가 있다.
정선군 문화유적 안내에 따르면 약 500년 전 제주 고씨가 중앙 관직을 사직하고 정선으로 낙향할 당시 고택을 짓고 함께 심은 뽕나무라 전해지며 후손들이 정성스럽게 가꿔 오고 있다.
봉양리 뽕나무는 비교적 크고 2그루가 나란히 자라 기존에 단목으로 지정된 뽕나무와는 차이가 있고, 북쪽 나무는 높이 14.6m 가슴높이 둘레 3.5m 수관폭은 동-서 15m 남-북 15.2m이며, 남쪽의 나무는 높이 13.2m 가슴높이 둘레 3.3m 수관폭은 동-서 18m 남-북 15.8m로, 규모에서도 사례가 드물고 생육상태가 좋아 수형이 아름답다.
정선군 근대행정문서에는 1909년 이 지역의 양잠 호수와 면적에 대한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이번에 지정한 봉양리의 뽕나무는 정선 지역에서 양잠이 번성했음을 알려주는 살아있는 자료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나무는 500년 전쯤 강원도 정선에 낙향한 선비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정선군청 근처에 있는 옛 건축물 ‘상유재 고택' 앞에 있다
상주 두곡리 뽕나무
출처: https://blog.naver.com/zaerac/222070395459
수령 300년 높이 약 12m, 둘레가 3m
1935년에 세워진 명상기념비(名桑記念碑) 경북 기념물 1호 > 2020년 천연기념물 559호 승격
출처: 경북상주시 블로그
독립투사 한 서린 ‘통곡의 미루나무’, 쓰러진 채 보존한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보존 처리 거쳐 전시 시작
“역사적 아픔 시민과 나누기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10월 말 역사관 남쪽 사형장 인근 ‘통곡의 미루나무’를 보존 처리하면서 촬영한 모습.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공
1923년 일제는 서대문형무소 남쪽 끝 사형장 근처에 미루나무를 심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독립투사들이 조국 독립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생의 마지막 순간 이 나무를 부여잡고 울었다고 해서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을 품은 미루나무가 100년 수령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태풍에 넘어진 건 지난해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쓰러진 미루나무를 소독·보존 처리해 상설전시로 시민에게 공개한다고 24일 밝혔다. 미루나무 전시는 지난 10월 말 작업을 시작해 23일 표지판 설치 작업까지 마쳤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미루나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전문가·주민들과 논의하다가, 누운 모습 그대로 시민에게 공개해 사형장의 역사와 아픔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무가 자리를 지킨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는 송학선, 엄순봉, 채경옥 등이다.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생을 마친 독립투사는 4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루나무가 제자리를 지키는 사이 1908년 10월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11월까지 감옥으로 쓰이다가, 1998년 11월 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통곡의 미루나무가 한 그루는 아니었다. 이번에 전시된 미루나무는 사형장 담 ‘바깥’에서 자랐다. 사형장 안뜰에서 바깥 나무와 형제처럼 자란 나무가 한 그루 더 있었다. 담 밖 나무가 때마다 무성하게 잎을 틔웠다면 담 안 나무는 어느샌가 점점 고목이 돼가다 2017년 봄 결국 고사했다. 하지만 일제가 심은 미루나무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박 관장은 “다행히 몇년 전 기존 미루나무 뿌리에서 자생한 아기 미루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며 “형무소가 품은 역사를 새롭게 이어가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시구문(屍軀門) 사형집행 후 시신을 외불 반출하기 위해 뚫어 놓은 통로
서대문형무소…나라 빼앗긴 참담함과 해방의 환희가 서린 곳
1945년 8월 10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일본은 사실상 패전국 준비에 들어갔다. 조선총독 아베(阿部新行)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조선에서 일본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흥분한 조선인이 일본인에 대해 보복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베는 송진우를 만나 치안 유지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상황이 급해진 아베는 15일 오전 여운형에게 같은 제안을 해 겨우 승낙받았다. 그때 여운형은 5개 조건을 요구했는데, 그 첫 번째가 전국에 수감된 정치·경제 사범의 석방이었다.
8월 15일 해방 당일 조선 전역은 의외로 조용했다. 경성에서조차 해방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역사학자 최영희 교수가 사실관계 위주로 정리한 <격동의 해방 3년>은 8월 15일 분위기를 “갑작스런 국내외 정세의 격동과 패전에도 불구하고 일본 관헌의 언론통제로 일반 국민은 행동의 방향을 잡지 못하였고 국내 지도자들 역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어 적절하고 통일된 지도 방향을 잡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방대한 <해방일기>를 집필하고 있는 역사학자 김기협은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고 제목을 달 정도였다.
일본이 의병들 수감하기 위해 급조
국민이 체감하는 해방 장면은 이튿날이 되어서야 볼 수 있었다. 바로 서대문형무소가 진원지였다. 앞서 여운형과 아베의 약속대로 8월 16일 전국 형무소 문이 열렸다. 오전 9시 여운형은 이강국, 최용달과 함께 ‘혁명동지 환영’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여운형은 죄수복도 갈아입지 않고 뛰쳐나온 정치·사상범들을 뜨겁게 안았고, 악대를 앞세운 이들 일행은 서울역을 거쳐 종로통을 도는 시가행진을 벌였다.
진정한 해방의 기쁨이 표출된 최초의 현장이 바로 현저동 101번지(도로명 주소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이곳 서대문형무소였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의 만행을 가장 처절하게, 또 극명하게 품고 있는 현장이다. 일제 36년의 참담함과 광복의 뜨거운 환희를 응축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꾸며진 이곳은 서울이고, 지하철역 바로 옆으로 접근성이 좋아 하루 2000명, 연간 60만명이 찾는 역사의 교육장이 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대한제국 말기 경성감옥에서 시작됐다. <서대문형무소>를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일본 통감부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을 수감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를 급조했다”며 “당시 전국 8개 감옥 수용인구가 300여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서대문형무소는 대규모 감옥이었다”고 말했다.
일제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계속돼 구속자가 늘어나자 1912년 마포에 새로운 감옥을 만들어 경성감옥으로 이름 붙이고 이곳은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꿨다. 일제는 1923년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어 일제 강점기 내내 그렇게 불렀다. 해방 후인 1946년에 경성형무소로,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서울교도소로 바뀌었다가 다시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구치소는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으로 옮길 때까지 계속 활용됐다. 이곳에 수용됐던 사람만 35만여명이나 된다.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일제 형무소 시설 일부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일제의 조선 침략에 항거한 의병장들과 광복운동에 참여했던 광복투사들이 고문을 당했던 장소와 고문 장비를 볼 수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는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에서 “2차 공산당 사건 책임비서 강달영이 고문의 고통으로 자기 골을 책상에 부딪쳐서 자살하려고 했다”면서 “강달영은 결국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후 귀중한 동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회한으로 미쳐버렸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순국한 구한말 의병장만 해도 이강년, 허위, 이인영 등 57분이나 된다. 이 중 허위는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8년 일제에 사실상 점령된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 동대문까지 진출했던 대단한 의병장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이 이뤄지고 난 뒤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한 이재명, 일제 총독을 처단한 강우규를 비롯해 김구, 김동삼, 안창호, 유관순, 한용운, 여운형 등 낯익은 이름의 광복운동가 대부분이 이곳에 수용됐다. 당시 그들이 수용됐던 옥사가 지금도 그대로 보존돼 있고, 5000여명의 수형기록표도 정리돼 있다.
그 중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쓴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올리는 글월’이라는 글은 당시 감옥생활의 열악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 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잘 자라지 못한 ‘통곡의 미루나무’
이곳에서 꼭 봐야 하는 곳은 북서쪽 끝에 있는 사형장이다. 1923년 지어진 목조건물 한 채는 높이 5m의 붉은 벽돌 담장으로 격리돼 있다. 조그만 나무의자에 사형수를 앉히고 사형 집행자가 뒤에서 레버를 당기면 의자와 함께 마루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교수형이 집행된다. 의사가 검시해 사망이 확인되면 시신은 지하 수습실에 눕혀 놨다 날이 어두워지면 옮겼다고 한다.
지금도 지하 시신 수습실에 내려가 보면 어두운 콘크리트 벽에 차가운 냉기가 가득하다. 사형장 안팎에는 지을 때 같이 심은 미루나무가 있는데, 사형장 안 미루나무는 92년된 나무라고 보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냘프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측은 “사형장으로 끌려간 애국지사들이 이 나무를 붙잡고 원통함을 통곡해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린다”면서 “안에 있는 미루나무는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박경목 관장은 “사형은 한 날 연속으로 집행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일제는 1936년 7월 21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간도공산당 사건 관련자 1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면서 “이곳에서 단시간에 사형이 집행된 최다 인원”이라고 말했다. 간도공산당 사건은 1930년 5월 간도 전역에서 일제 영사관과 동양척식회사 출장소, 철도 등을 파괴한 항일시위로 5000여명이 체포돼 300여명이 투옥된 사건이다.
다음으로 많은 사형이 집행된 때는 1974년 4월 9일 우리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되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하루에 8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대법원 확정판결 후 불과 18시간 만에 이뤄진 사형집행이었다. 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이후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 2007년 재심을 거쳐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서울구치소는 사형 선고 통지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형을 집행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서대문형무소는 비단 일제강점기 광복운동가뿐 아니라, 서울교도소 시절 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옥되고 사형이 집행된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애국열사 못지않게 민주화 인사에 대한 기념·추모 공간도 많다. 이곳과 관련한 대표적 민주화 운동만 해도 진보당 사건(1958년), 민족일보 사건(1961년), 인혁당 사건(1964년), 동베를린간첩단 사건(1967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 6월 항쟁(1987년) 등이 있다. 이들 사건은 모두 진실화해위나 재심을 통해 불법으로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많은 민주화인사들 투옥되고 사형 집행
역사관 박 관장은 “이곳은 해방 전 광복운동과 해방 후 민주화운동을 같은 맥락, 같은 정체성으로 판단해 관리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간혹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민주화운동은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다는 고충으로 들린다. 사실 요즘처럼 친일파가 득세하고, 일제강점기가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뉴라이트 사관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느 독립기념관인들 마음 편히 운영될 것인가.
그나마 서대문형무소가 이 정도 남아 일제 만행을 웅변하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된 것도 정부가 아닌 ‘민심’의 역할이 컸다. 역사관 박 관장은 “1987년 정부가 서울구치소를 의왕으로 옮기고 이 자리를 완전히 철거하려 했는데, 광복운동가 후손은 물론 국민이 철거를 반대해 그나마 이 정도 보존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남아 있는 옥사와 사형장 등이 국가사적(제324호)으로 지정되자 서대문구가 이를 역사관으로 꾸며 개관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중요한 일제강점기의 산 교육장을 정부나 서울시도 아닌 기초자치구인 서대문구가 관리하고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서대문구 도시관리공단은 공영주차장이나 문화회관, 체육시설 등을 관리하는 곳으로 역사나 전시 등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는 업무와 거리가 멀다. 전문인력도 없어 그나마 1년에 한 번 관련 세미나를 여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용산 전쟁기념관, 천안 독립기념관 등은 모두 무료이지만 이곳은 유료(3000원)이다. 박 관장은 “입장료 수입도 전시관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대문구 수입으로 들어간다”면서 “인건비를 제외한 운영비가 3억원에 불과해 전문적인 전시나 자료 수집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의 혼과 정신이 서려 있는 현장을 주차장 관리하듯 다루는 우리 현실이 민족사 홀대의 상징적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 2015.03.03ㅣ주간경향 1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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