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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장모 안선자 여사의 歸天

by 이성근 2021. 5. 31.

소식 전해지기 전날 달은 전에 없이 밝았고 자귀나무는 꽃을 활짝 피웠다.  지리산 나들이 끝이라 피곤했지만 달빛이 머리맡까지 스며든 밤이라 오래도록 그 달 보고 있다 잠이 들었다.

알바 갈 큰 아이 학교갈 작은 아,  나 또한 오전 중요 회의와 이후 일정은 모두 중단이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다시 경전철로 환승했다.   낙동강을 건너고

평강천을 건너고

김해 해반천을 건너

코로나19 백신 주사를 맞기 위해 줄지어 선 사람들을 보며 목적지 근처에서 

내려 택시 불러 장례식장으로 갔다.  

죽음은 늘 삶 가까이 있다.

새벽 아내의 터져 나오는 울음에 잠을 깼다. 직감은 현실이 됐다.

나의 장모, 안선자 여사께서 돌연 이 세상 소풍을 그만 두신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에 진작 찾아뵙지 못한 후회가 가슴을 찢었다.

 

코로나 핑게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귀결되며 미덥지 못한 사위가 된 것이다.

어쩌면 허우대 멀쩡하지만 속빈 강정같은 이서방에 대한 장모의 판단은 오래전 내려진 결정 이었다. 외동딸을 생각하는 당신의 염려 변하지 않았고 나는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그 사이 손주들은 장성했고 그냥저냥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당신은 쇠약해졌고 총명했던 장인은 치매로 당신의 근심이 되었다.

당신 계시지 않는 시간

혼자 있을 장인이 눈에 밟혀 입버릇처럼 노래했던 말

저 양반 누가 챙길기고ᆢ 누가

그랬던 나의 장모 안여사가 기별없이 먼저 가신 것이다.

 

알고 보니 예고 했던 말이 있었다.

인자 고구마도 안심고

들깨도 안심고. 고추도 안할란다

인자

 

평생을 논바닥 밭고랑 호미질로 아팟던 육신 내려놓고

그래요. 인자 암 것도 하지말고 자유롭게 맘 편케 저 세상 가이소.

당신께 했던 약속 꼭 지킬게요.

한차례 소나기 지나고 개인 하늘 

반사경에 모습 담아 보았다

주어진 3일 간의 장례일정.. 상주들은 여러 가지를 결정해야 한다. 판단을 위한 숙고의 시간은 길지 않다.  왠지 주검을 먹고 사는 시장에 던져진 느낌이랄까. 선택의 폭은 적다.  경우에 따라서는 심하다 싶은 대목도 많다.  경황 없음이 무마한다. 

입관, 영좌설치, 성복, 문상이 장례식장 선택 직후부터 바로 적용 된다.  체류 3일  중 첫날 석전(夕奠)을 시작으로  조전(朝奠)2회 등 모두 4회 였고, 상복은 직계 가족 남녀 모두 대여했다.  한가지 의심스러운 바 조석전에 올린 음식은 가족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재사용되어지는 것은 아닌지 ... 식장에 있는 동안 특실 두곳과 일반실 4곳이 가동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찜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외 필용에 의해 사용되는 물품, 치솔 하나 음료수 한병도 계산이 이루어진다.  

예전처럼 밤을 새는 문상객이 없고 직계가족이 많은 곳은 10에서 20명 이상이 되는데 잠자리는 대게 맨바닥 이었다.  

둘째날 

평소 처럼 망자에게 밥을 올리는 행위다.   

상이 나면 또 하나의 특수가 꽃이다. 제단의 장식부터 화환에 이르기까지 ... 화환을 실은 차들이 무수히 드나든다.  국화장식 재단이 80만원이다.  화환은 10만원 선이 주류인데 ... 집안의 명암이 뚜렸했다. 즐비하게 늘어선 화환 속의 직함들이  확실한 과시였다.  우리가 이런 집안이라는 ...   5호실 앞 특실이 그랬다.  처음으로 부고를 충실히 알리지 못한 후회를 가진 시간이었다. 

치매 4~5기 수준의 장인이 장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가끔씩 기억이 돌아오긴 하였으나 길지 않았다.  장인은 나를 일아 보지 못했다.  이서방임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읺는다. 

그나마 친가 외가 손주들이 있어 든든했다.  2남1녀 자식들로부터 각 두명씩의 손주들이 있고 대부분 다 컷다.  

고인의 동생(사상 이모)이 끊임없이 장인의 기억을 흔들며,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장인의 존재는 잠시 바람쐬러 나와서 보았던 저 수탉의 존재와도 같았지만 지금은 ....

금강조은병원 주변 들어선 아파트들이다.  최고층 15층이고 녹지대가 살아있다.   

아파트를 만들어도 이정도면 참 양반이다.  더욱이 녹지대가 두텁다. 

병원 뒷쪽 산에서 심심하면 뻐꾸기가 울었고,  날 저물고는 솔부엉이가 울기도 했다. 

병원은 경운산 북동쪽에 위치해 있고 58번 국도가 지나간다. 삼계삼거리를 통해 한림 진영쪽으로 빠진다 

건너다 보이는 아파트들은 20~25층 높이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29층짜리가 공사중이다.  

출상 전날 조문객들이 내고 간 부의금을 정리중이다.  장모상에 있어 부고(訃告)를 직접 내지 않았고 작은 처남의 낸 모바일 부고를 몇 곳에 보냈을 뿐이다.  그래서 소식을 접한 지인들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조문을 왔던 분들이 꽤나 있었지만,  부고장을 돌리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통상  부의금으로 장례에 든 비용은 비례하거나 남는데 수목장으로 하는 바람에 적자가 되었다.  두번째 후회를 했던 시간이었다.  좀더 열심히 알리는 것인데 하는... 

3일차 출상

두 처남이 장례식장 이용에 다른 비용을 처리하고 있다.  

손두들이 마지막으로 망자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 집행자는 이때도 노자돈을 유도했고 나를 포함 처남들과 몇 사람이 동참했다.

이날 화장장으로 가서 화장 직전까지  행위 하나하나 은근 돈을 요구하는 주문이 있었다.  

운구와 화장장으로 가는 차내 

화장 직전 

시방 혼을 불러낸 장모의 육신이 불길 속을 가고 있다.

잠시후 한줌 뼈가루로 재회할 것이다.

장모의 죽음은 딸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어쩌면 니는 그렇게 살지말라고 말씀 건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장모의 삶이 화나고 허망하다 했다.

스물셋에 결혼하여 여든넷 이승을 떠나기까지 딸이 지켜본 당신의 삶은 고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늘 아들,딸 뒷바라지가 우선이었고 정작 당신은 제대로 대접받은 바, 없다고 여긴다.

이제 그 딸도 육십 고지로 향하는 시점에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한다. 그 저간에는 남편의 존재와 역할도 한몫한다. 그래서 두 아들 더불어 바램을 이야기 한다. 곧 앞으로 내 하고 싶은대로 살겠다고 했다.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망설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애들에게 기댈 생각은 추호도 없고, 다만 너희들도 이제 성인이니 앞가림하며 살아가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묵묵히 들었고 그리하라 했다. 진작부터 했던 말이다.

 

오월 끝 날 세상은 녹음 짙어간다. 장모님 잘가이소.

고인의 육신이 화장에 든 다음 주변 묘역을 둘러 보았다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은 망자의 유택은 사라진다.  부서진 석물과 수거된 조화들 

망자의 유택은 집안이나 자손의 재력에 따라 그 규모며 조형물이 크기와 형태가  달라진다.  죽음에는 차별이 없다 했지만 망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죽음의 크기는 다르게 포장된다. 

수습한 유골을 함에 모셔 수목장 장소로 이동중이다. 

삼랑진에서 밀양가는 58번 국도 변 미전리에 있다  

비용이 적지 않게 든다.  너무 촘촘했다.   

가족들이 저 작은 모종삽으로 흙을 떠 세번에 나누어 뿌리고 있다. 

장인과 아내의 뒷모습이 평소같으면 흐뭇한 장면일테지만 전혀 다른 의미다. 

장모 없는 처가집..홀로 남겨진  장인 ... 문제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 

2020년 설날 이후 처음이었다.  애써 코로나 때문이었다고 변명해 본다. 

이렇게 빨리 가실 분이 소금은 뭣 한다고 저리 사 놓은 걸까 

어수선한 마당을 빗질하고 물로 씻어 냬었고  처남과 아내가 장모 유품을 태웠다.

제비가 날아 들었다. 

마을에는 이런 분들 뿐이다. 

모두들 피곤에 겨워 부족한 수면을 채우는 시각 산책에 들었다. 

마사 터널, 작은 처남네 조카들 커 가는 모습 하루가 다르다. 

이 풍경을 볼려면 모정고개를 넘어 와야 했다.  

석류꽃이 피고 있었다. 

장인을 어떻게 모실 것인가 ..현재로선 답이 없다.   내게 가장 친절하게 답해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있었지만 이제 너무 멀리 있다.   

장모의 텃밭, 누구도 가꾸지 않을 것이다. 양파며 상추 푸성귀는 이제 어쩌나  

제비 돌아와 집을 짓듯 떠난 사람 돌아 오는 것이 ...

진영에서 부전역으로 향하는 저 경전선 열차를 바라보며 어떤 기다림을 떠 올렸다. 결혼 초기 우리는 차가 없었다.  저 기차를 타고 다녔다. 

늦은밤 집으로 오면서 우리 부부 말이 없었다.  대신 아내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대로 살고 싶다는 입장을 다시금 밝혔고..나는 그런 아내를 이해하면서도 왠지 모를 화를 감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