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시립 김병종미술관
한국화가이자 대학교수. 김병종 화백은 글과 그림의 경계를 넘나든다. 서울대 미대 교수이자 『바보예수』『생명의 노래』 그림 시리즈,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등으로 순수예술을 이어가면서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함께 누리고 있는 그는 유려한 필력과 그림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많은 독자들과 미술애호가들을 사로잡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광주비엔날레, 베이징비엔날레와 피악,바젤,시카고 등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국내외 저명미술관에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고, 미술기자상,선미술상,대한민국기독교 미술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서울대 미대 학장, 서울대 미술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유가철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중국회회연구』 등의 책을 내었다. 화집으로는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길 위에서』, 『청렴과 탐욕의 중국사』 등이 있다.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왕정동 도로변에 큰 절터가 있다. 덕유산에서 뻗어내린 교룡산의 줄기인 기린봉 기슭으로, 산자락이 절터를 나지막하게 감싸고 앞으로는 요천이 잔잔히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다. 옛날에는 남원 시가지가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 절로 돌아가는 승려가 남원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장관이었다고 한다. 바로 여기가 남원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던 만복사(萬福寺, 사적 제349호)가 있던 곳이다. 이름 또한 대중적이어서 부처님께 정성으로 기원하면 누구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원도호부」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재위 때(1046~1083) 창건하였다”고 하며,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왜구에 의해 불타버린 이래 숙종 4년(1678) 남원부사였던 정동설(鄭東卨)이 중창하려 했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예전처럼 복원하지는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그 명맥을 유지해왔으나, 이후 300여 년 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는 등 폐사로 있다가 1979년부터 7년간 전북대박물관팀에 의해 발굴, 복원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만복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창건 후 몇 차례 중창되면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각각 금당이 들어선 1탑 3금당식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이루었음을 확인했다. 현재 절터에는 여러 금당터와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 석불입상, 석대좌, 당간지주 등이 남아 화려했던 만복사의 옛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가람배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절터로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창건 당시 가람은 “동쪽에 5층 전각과 서쪽에 2층 전각이 있다”고 하였는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있었던 발굴조사에서 동쪽의 5층 전각(목탑터)과 서쪽의 2층 전각(서금당터)이 확인되었다. 곧 만복사는 동전서탑(東殿西塔) 양식이며, 탑과 금당의 중심이 동서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같은 초창 가람과는 별도로 동·서 금당이 목탑을 중심으로 거의 대칭되는 곳에 자리잡고, 목탑과 남북 일직선상에 북금당이 자리잡은 2차 가람의 모습과 이들 금당에 각각 불상을 모신 불대좌가 있었음도 발굴 결과 확인되었다. 경주 불국사가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는 대웅전 영역 외에 대웅전 위쪽에 비로전 영역, 대웅전 왼쪽에 극락전 영역이 따로 조성돼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만복사 가람배치도
우선 만복사터에 들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유물은 도로 위의 철책 속에 갇혀 있는 석인상이다. 한껏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인왕상의 몸통은 땅속에 묻혀 있다. 석인상 아래쪽으로 내려서서 절터에 이르면 보물 제32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절터 맨 앞쪽에 서 있다. 당간지주 뒤쪽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추청되는 중문(中門)터가 있으나, 토층(土層) 조사 결과 중문터는 창건 당시의 건물은 아님이 밝혀졌다.
중문터 뒤에는 창건 당시의 동쪽 5층 전각, 곧 목탑터가 있다. 남북변에 각각 계단 일부가 남아 있는데 정면과 측면이 각각 5칸이며, 둥글게 다듬은 초석과 지대석·기단석 등이 복원돼 있다. 중문터와 목탑터의 사이에는 네모난 지대석 위에 복엽 연화문을 양각한 하대석이 남은 석등이 자리잡고 있다. 상면 중앙에는 간주를 끼울 수 있는 구멍도 남아 있다.
목탑터 왼쪽의 석대좌(보물 제31호)가 있는 건물터가 창건 당시의 서쪽의 2층 전각, 곧 서금당터이다. 서금당터는 외둘레가 1칸이고, 정면 5칸 측면 4칸 정도의 규모이다. 남쪽에 계단의 일부도 남아 있다.
목탑터 뒤쪽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터가 북금당터인데, 초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외둘레 1칸이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계단터가 남아 있다. 목탑터와 북금당터 사이에는 복엽 연화문이 양각된 하대석만 남은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하대석 상면 중심에 지름 30㎝의 홈이 파였으며, 그 바깥으로 팔각 구획이 있어 간주를 받치도록 되어 있다.
목탑터의 오른쪽에서 뒤쪽으로 약간 물러선 곳에 자리잡은 동금당터는 파손이 심한 편이나 남아 있는 초석과 적심석 등에 의하면 정면 3칸 측면 3칸인 건물로 추정된다. 남쪽과 북쪽에 남아 있는 계단터가 희미하다. 북금당터와 동금당터는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세조 9년(1463) 이후 세워진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금당터 뒤쪽에 오층석탑(보물 제30호)이 있으며, 동금당터와 오층석탑 사이에 석탑의 부재인 지붕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오층석탑 뒤쪽에는 석불입상(보물 제43호)이 있는 보호전각이 있고, 전각 오른쪽에 건물터 둘, 전각 뒤쪽에도 작은 건물터 하나가 복원돼 있다. 북금당터 뒤쪽에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강당터가 들어서 있다.
만복사는 김시습의 한문소설 「만복사 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춘향전』과 달리 남자가 절개를 지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출처: 만복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박종분, 김성철, 유홍준, 정용기)
화강암으로 된 사각 기둥의 세 면에 석인상이 조각되어 있고, 나머지 한 면은 조각없이 밋밋하며 머리에서 1.22m 내려온 곳과 3.18m 내려온 곳에 당간지주의 천공(穿孔)과 같은 깊이 24㎝, 폭 13㎝짜리 구멍이 뚫려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머리 부분은 정수리에 육계와 같은 둥근 머리채가 있고, 귀는 길고 눈썹은 치켜올라가고 눈방울이 튀어나왔다. 입은 벌리고 있는데 화를 내고 있는 표정이며, 땅속에 묻힌 몸은 반라이다. 구부린 팔목과 팔뚝에 두 줄이 그어져 있고, 허리에 옷주름이 묶여 있으며, 발은 옷자락에 가려진 채 간략히 처리되었다. 발 밑에는 몸체와 한돌인 기초석 부분이 있으나 그 크기는 알 수 없다.
이 석인상을 당간지주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이 석인상과 짝을 이루는 석인상이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다. 크기나 모양새가 같고, 석재가 짧았던지 목 부분에서 돌기를 만들어 몸체에 끼워 맞추었다. 그리고 몸체의 두 구멍 중 아래쪽 구멍 바로 밑이 절단되어 있는데,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 석인상을 당간지주로 보지 않고 사찰장승으로 보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장승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기는 학자들도 다수있다.
1979년 새로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보호전각 안에 있는 석불입상은 높이 2m 정도 되는 화강암 하나를 그대로 이용하여 불상과 광배를 함께 만든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안상이 새겨진 팔각 기단석이 있는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무릎까지 파묻혀 있었던 흔적이 보이고, 얼굴·신체·옷주름 등 전체적인 인상은 매우 온화하고 원만해 보인다. 광배 뒷면에는 손에 정병을 든 약사여래입상이 음각돼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눈, 원만한 코, 미소를 살짝 머금고 있는 타원형의 도톰한 얼굴은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 유창한 옷주름 등은 퍽 유연하고 자연스럽다. 삼도나 옷주름은 다소 형식적으로 보인다.
각각 따로 만들어 끼우도록 돼 있는 손과 발이 빠져나가고, 두 눈과 코도 긁혀 나가고 없다. 광배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깨어졌는데 그 일부분을 살짝 얹어놓았다. 광배의 두광과 신광 안쪽에는 연꽃잎을 새기고 둘레에 당초 무늬를 둘렀으며, 그 외연부는 불꽃무늬를 둘렀고, 불꽃무늬 중간중간에 작은 불상이 새겨져 있다.
광배 뒷면에 크게 음각된 약사여래입상은 Y자형으로 표현된 법의가 매우 독특하며, 앞면의 불상과 마찬가지로 조각선이 유려하다.
만복사터 부근에는 ‘백들’ ‘썩은 밥배미’ ‘중상골’ 등 당시의 사찰 규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지명들이 남아 있다. ‘백들’은 만복사터 앞의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이 널어놓은 빨래로 제방 주변이 온통 하얗게 됐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며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 찌꺼기를 처리하던 장소로 당시의 만복사에 있던 승려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만복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박종분, 김성철, 유홍준, 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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