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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그 사람

이효정 -나의 '경성 트로이카' 친구들

by 이성근 2017. 10. 14.

나의 '경성 트로이카' 친구들

국가보훈처는 88·15 광복 61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313명에게 포상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된 포상대상자에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가 다수 포함돼 있어 주목됐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이재유, 생존해 있는 최고령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93)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이재유는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던 당시의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국내에서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그는 이현상, 김삼룡, 정태식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으며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자유자재로 뚫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재유가 일제에 검거됐을 당시 언론은 '신화적 인물이 드디어 잡혔다'라며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이효정 할머니 역시 '경성트로이카'의 한 구성원이었다. 그는 1920년 동덕여고보 동맹휴학을 시작으로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이들의 이름은 오랫동안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혹독한 고초를 겪었지만 해방 이후에도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던 다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이재유의 삶과 투쟁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1993년 출간된 이재유 연구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 그동안 언급조차 금기시 돼 왔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조금씩 학문적 조명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담당했던 비중에 비해 그간의 연구는 너무 미진하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 왔다. 또 이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예우와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소설 경성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 씨도 이런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경성트로이카는 이재유와 '경성트로이카' 활동가들, 그리고 이효정 할머니를 소재로 다룬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안 씨는 이효정 할머니를 직접 찾아갔고 그 뒤 꾸준히 교분을 유지해 왔다. 이 소설에 담긴 1930년대 경성(서울)의 손에 잡힐듯한 묘사는 이효정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 편집자


보통, 나이가 들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는 어렵다고들 한다. 중고등학교 동창까지가 스스럼없는 진짜 친구일 뿐, 대학동창만 해도 경쟁심이 개입되며 직장동료나 사회친구는 삶의 공간이 바뀌면 그만이라고들 한다. 나이 차이가 많은 경우는 물론 친구의 범주에도 들지 않으며, 죽은 사람과는 더더욱 교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넘나드는 우정의 시작, 이효정 할머니를 만나다


노동운동이며 작가 생활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음에도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대인관계에 인색한 내가 40대 중반이 되어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다. 전북 고창군 미소사의 도의 스님, 백담사 효림 스님, 한국학연구소 김경일 교수님, 그리고 일제하 서울에서 혁명적 항일운동조직인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해 동맹휴학과 동맹파업을 주도했던 이효정 할머니 같은 분들이다. 하나같이 나보다 연륜이 많고 살아 온 경험이 다름에도 때때로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고 별다른 일 없이 만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도 편하고 기분 좋은 분들이다.


이효정 할머니는 그 중에서도 독특한 경우다. 내 나이의 꼭 두 배인 95(한국식 나이), 화장실 드나들기도 불편한 처지임에도 정신은 놀랍도록 맑다. 누운 자리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 최근까지도 이영희 교수와 임헌영 교수의 대담을 통독할 정도다. 대화나 편지는 한 마디 한 구절이 모두 시적이고 사려 깊다. 이효정 할머니를 통해서 나는 과거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의 천재성과 따뜻한 인격을 읽는다.


어쩌면 나는 할머니를 통해 이미 죽은 이들과 교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성트로이카를 주도했던 이재유, 박진홍, 이관술, 이순금 같은 인물들이 그녀의 모습에 투영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책을 쓰면서, 나는 그들의 영혼과 일체가 되어 버린 걸까? 어디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불행하게 죽어간 옛 친구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되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곤 한다. 95세 노파와의 우정뿐 아니라, 이미 죽은 영혼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조금도 놀랍지 않다.


그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되살리고파

이효정 할머니, 나아가 경성트로이카 사람들과 친구 되기는 우연으로 시작되었다. 일제하 노동운동사를 공부하면서 1930년대 서울을 누비던 그들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먼 옛날이야기처럼만 생각하던 내게 이재유 전기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오고, 그 방면의 전문가인 김경일 교수님으로부터 생존자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을 때만 해도 꼭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최고령 여성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과 최근 모습(). 프레시안

 

예나 지금이나 다수 국민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한다는 게 보다 많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작가로서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사회주의 이론서를 읽었다는 이유로 한때나마 감옥살이를 했던 나의 국가보안법 전과기록은 더욱 부담이 되었다. 바로 전에 쓴 장편소설 <황금이삭>에 베트콩을 우호적으로 표현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집안 어른들로부터 빨갱이를 찬양, 고무했다는 비난을 받고 우울하기도 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꼭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것은 순전히 이효정 할머니와의 만남이었다. 취재라기보다 여행 삼아 내려간 경남 마산에서 몇 사람과 함께 찾아간 이효정 할머니와의 한나절은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야말로 편견과 오해에 기초한 것임을 깨닫게 했다. 그때도 이미 90이 넘어 거동조차 불편했음에도, 할머니가 보여준 예리한 정신세계와 풍부한 감성은 동행했던 이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회주의자라면 일단 교조적이고 냉정한, 날카롭고 전투적인 인물로 상상하는 나의 관념이야말로 오랜 반공교육이 심어준 편견임을 확인했다.


내 스스로 경험하였듯, 80년대 진보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의 대다수가 이타적이고 따뜻한 인품을 가진 이들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기도 했다. 이념이 곧 권력인 북한에서는 몰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리고 저항운동에 뛰어든 탄압받는 시기의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평가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반공이 국시이던 파쇼정권 치하에서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박해를 받으며 반세기를 살아 온 할머니 자신은 과연 자신의 이야기를 써도 될까 오히려 걱정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로 인해 또 다시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으나 누군가 자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또 그것이 책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실로 경찰이 아닌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궁금해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만도 일생에 겪지 못한 충격이었으리라.

나 역시 70년 세월을 넘어 날아온 신선한 충격 속에 할머니 집을 나서면서 이재유뿐 아니라 경성트로이카 사람들 모두를 복원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보수 세력의 편협한 시각으로 왜곡되거나 대중에 영합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무관심 속에 역사의 그늘 속에 짓눌러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숨겨져 온 이야기들을 되살려야겠다는, 그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되살려 보겠다는 내 마음의 약속이었다.


일제 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에 대한 무관심에 놀라다

<경성트로이카>를 쓰기 위해 일제 중반기 이후 국내의 항일운동을 공부하면서 여러 측면에서 놀랐다첫째는 1920년대 후반 이후 해방까지 민족주의 진영의 항일운동이 한심할 정도로 지리멸렬했다는 점이요. 둘째는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이 예상보다 훨씬 깊고 넓은 반경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시기 사회주의운동사에 대한 은폐와 외면이 경악할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세워진 역사박물관에 가보면 1920년대 이후 국내의 항일운동은 전무한 것처럼 보인다. 이조 말기 의병운동부터 대형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일제 중반기 이후 도표는 거의 없다. 해방되는 그날까지 총 한 방 쏘지 않은 채 이합집산과 권력투쟁에 몰두했던 상해임시정부가 마치 항일운동의 유일한 상징처럼 전시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1930년대 검거된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해마다 수천 명임에도 그 대다수가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철저히 제외된 것이다.


, 어떤 대형 도서관에 가도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나 자료는 책장의 한두 칸을 넘기 어려웠다. 아니, 일제강점기 자료 전체를 합쳐도 책장 하나를 통째로 채우지 못했다. 중세 왕조사나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 자료가 책장 하나로 부족한 것과도 비교가 되었다.



이재유의 체포를 다룬 <경성일보> 1937430일자 호외 기사. 1면 머릿기사로 크게 다뤘다. 당시 이재유를 검거한 서대문 경찰서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프레시안

 

고의적인 은폐는 남한뿐 아니라 북한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남한에서는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 적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나 북한에서는 최고 대학의 교수들조차 국내 항일운동의 역사에 무지할 만큼 어두웠다. 경성트로이카 구성원 중 월북하여 고위직을 지냈던 박진홍과 이순금의 뒷소식을 알기 위해 여러 경로로 북한의 기록을 확인했으나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다. 역사학 교류를 위해 방한한 김일성대학 교수들에게 간접적으로 질문까지 해보았으나 전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답변을 거부했다기보다 애초에 배운 적도, 연구한 일이 없는 것이었다.


이런 실정에서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는 바라기 힘들었다. 예우는커녕 빨갱이였다는 이유로 이효정 할머니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90년대 초반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까지도 감시와 통제 속에 살아야 했다. 이는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경성트로이카를 비롯해 일제하 사회주의 조직의 제일 중요한 목표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일본군 철수, 조선어 교육 등이었다. 인간평등에 대한 강령으로는 8시간 노동, 13세 이하 노동금지,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실시 등 오늘날 대부분 실현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란 언젠가 이룰 이상적인 국가 형태를 의미할 뿐, 실천 강령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로 이뤄졌고, 모든 것은 항일운동에 접속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부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들에 대해서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로 한 것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효정 할머니를 포함한 다수는 여전히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 할머니의 가족들은 그녀가 일제 치하에서 수십 차례나 연행되고 감옥살이를 했던 경륜을 들어 독립유공자 포상을 요청했으나 보류 상태로 계류 중이었다. 책을 완성하고도 이러저런 이유로 수 차례 할머니를 방문하고, 시시때때로 안부 통화를 할 때마다 안타까웠던 것도 그 점이었다.

마침내 이효정 할머니로부터 이번 광복절에 이재유와 함께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게 되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내가 직접 포상을 받는 듯 기뻤던 것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였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죽어간 이재유, 박진홍, 이관술 같은 친구들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이 결실을 맺은 것만 같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효정 할머니의 겸손은 혹독한 투쟁 감내한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



이재유가 속한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 사건을 다룬 <조선일보> 1937512일자 기사. 사진 맨 위가 이재유. 프레시안

 

이효정 할머니는 늘 자신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왔다. 유공자 지명을 받던 날도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 자기보다 훨씬 더 열심히 싸운 동덕여고 동기동창 박진홍과 이순금 같은 친구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그들을 빼놓고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게 되어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전화라서 볼 수는 없었으나 할머니의 눈에 맺힌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연구서가 아니라 소설 형태로 집필된 <경성트로이카>에서는 이효정 할머니 부분이 다소 과장되어 있기는 하다. 이재유와의 직접 만나는 부분은 또 다른 생존자인 이병희 할머니의 증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반면, 이효정 할머니가 수십 번이나 왜경에 연행되어 고생한 이야기들은 글의 맥락 때문에 제외되었다. 책에 나온 것과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할머니가 그보다 더 열심히 활동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혼 이후 활동을 중지했지만 여전히 항일운동을 계속한 남편을 보조한다.


그럼에도 늘 자신은 한 일이 없다며 겸손해 하는 것은 당시 국내의 항일운동이 얼마나 힘들고 가혹했는가를 반증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해방되는 그날까지 전향서 한 장 안 쓰고 고문과 감옥살이를 감수한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존경의 표현이었다. 만주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방어할 어떤 무기도 지니지 못한 채 맨손으로 싸워야만 했던, 오로지 동맹휴학과 파업, 그리고 자신의 희생 그 자체가 무기요 선동수단이었던 그들의 고난을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더구나 해방 후에는 빨갱이로 지목되어 또다시 박해 속에 수십 년을 주눅들어야 했던 마음의 상처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한다고, 위로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해방 이후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정당한 평가 이뤄져야

다행히 한 많은 생을 마치기 전에 포상을 받게 된 것은 국가보훈처가 지난해부터 심사 지침을 바꾸어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가라도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지 않은 경우는 포상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효정 할머니와 가족들은 과거 어떤 정부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노무현 정부의 용기에 대해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다.

언젠가는 해방 직후 좌익 활동을 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일제하 활동을 인정해 주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조심스러운 진단이기는 하지만, 친일파와 친미 보수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모순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사회주의의 옳은 측면이 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앞으로 내가 관심을 갖고 집필하려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 역시 관심을 보이는 작가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들 무관심하거나 혹은 조심스러워 한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산당 내지 사회당이 합법화된 오늘날 여전히 이런 이야기에 조심스러워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치유하기 어려운 살상극을 겪은 우리 윗세대가 살아 있는 한편으로 여전히 최악의 위험을 간직한 북한이 존재하는 한반도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일제로부터 조국과 민족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회주의자들을 인정하는 일이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키려 목숨을 바친 이들을 평가 절하하는 일은 결코 아니라는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프레시안 2006 .8.11 안재성/소설가

 

이효정(李孝貞)

1913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성부로 올라와 1930년대 초 경성에서 노동운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효정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아가 만세를 부르고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고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당했다. 졸업 후에는 이재유가 지도하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921, 종연방직 제사공장(鍾淵紡織 製絲工塲)에서 파업 투쟁이 일어나자 이효정은 이재유에게 지도받아 여성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총파업을 지도하였다. 노동쟁의 확대를 꾀해 공장 내 조직을 확대하고 이를 토대로 산업별 적색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하에 파업 투쟁을 지도하였다. 종연방직 파업 투쟁 이후 193310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11, 이효정은 경성에서 이재유와 권우성이 주도하여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 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이효정은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받다가 '교원 노조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계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혼인하여 시댁인 울산으로 내려가 주부로서 살았고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광복 이후

해방 이후 이효정은 건국준비위원회 울산 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울산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후일 '남로당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기도 했던 남편 박두복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는 일이 벌어지고 자녀 21녀와 함께 대한민국에 남겨진 이효정은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생계를 어렵게 꾸려 가다가 1950년대 말 남편이 남파 간첩으로 활동하다가 거듭 월북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요시찰인물이 다시 된 이효정은 수시로 사찰 기관에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취조당한다. 영장 없이 끌려가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고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지는 장애를 입으면서 억울한 옥살이도 감수하여야 하였다. 1980년대 '6.10 민주항쟁'으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지자 이효정을 대상으로 한 사찰도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노년에 이효정은 시집 回想(도서출판 경남, 1989)여든을 살면서(도서출판 경남,1995)를 출간하면서 문학인으로 지냈다.

 

2006년에 대한민국 행정부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면서 선생은 93세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았다. 2010814일 타계하였다.

 

일제시대보다 더 혹독한 세월 견딘 97세 할머니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 97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정도로 발음이 정확했다. 인터뷰 내내 보여주었던 미소. 박현주

 

낡은 연립주택에서 만난 97세의 독립운동가

모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효정 할머니는 처음 보는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올해나이 아흔 일곱. 97. 일제시대엔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이주하, 박진홍, 김태준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엔 여운형, 이승만, 박헌영, 김구, 김일성 등이 지도자로 서는 것을 보았으며, 좌우갈등 속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을 몸소 겪었을 그녀. 오랜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와 치열했던 민주화운동과 정권교체의 과정을 모두 보았을 그녀.

 

이효정 할머니의 97년의 인생이 곧 우리나라 근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약 100년의 세월동안 겪었을 풍파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가 반백년을 지배했던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 운동 경력자가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효정 할머니의 얼굴은 고생한 사람 같지 않게 평화롭고 온화했다. 검버섯이 내려앉았지만 얼굴빛은 맑았고 눈동자는 깊고 또렷했다.

 

그녀에게 광복은 어떤 의미였을까? 열여섯 동덕여고 시절부터 뛰어든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에서 기쁘게 '되찾은 빛'(光復)이 되었을까?

 

- 선생님, 1945년 해방됐을 때 선생님의 동료들이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에서 일하고 있었지요? 그때 당시 분위기 좀 말씀해 주세요.

"해방 당시 저는 서울에 있지 않고 시골에 있었어요. 울산에 있었지요."

 

- 울산이 고향이었나요?

"울산이 시댁이에요. 아주 벽촌에 있었어요. 해방됐다고 소리만 들었는데, 사람(남편)은 없어요. 벌써 가고 없어요. (이효정 할머니의 부군인 박두복 선생은 울산 건준 간부로 일했다.) 너무 감격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한 달 후에 남편이 가족을 데리러 왔어요. 그때 세 식구였는데, 친정어머니까지 네 식구였는데 울산시내로 나왔어요. 집이 없어서 부녀동맹회관에서 살았어요. 여운형 선생 와서 강연할 때 울산대표로 저하고 어떤 처녀하고 같이 갔었어요. 그때 서울서 활동하던 진홍이(박진홍, 건준 간부, 경성트로이카 동지)도 만나고. 한 달 후에 이관술 선생(조선공산당 지도자)의 따님이 아버지에게 돈을 전달해달라고 해서 만났지요. 그런데 정판사 사건이 나서 체포되어 이후에는 뵐 수가 없었어요."

 

그에게 해방은 무엇이었나?

 

동덕여고 시절의 이효정. 생애 중에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박현주

 

- 선생님과 동료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나요?

"어떤 나라? (웃음) 우리가 좋아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지요."

 

- 그게 어떤 거였어요?

"다 잘 사는 나라지요."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극도의 좌우대립과 단정 수립, 분단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보다 더 혹독한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친일파가 애국자로 둔갑하여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며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 해방 후 좌우대립의 상황은 어떠했어요?

"아주 어수선했지요. 서북청년단이 나와서 야단하고."

 

- 한국전쟁 때 어디 계셨어요?

"전쟁 때는 저는 피난 다니느라고. 대구서 있는데, 박격포가 터져서 힘들었어요."

 

- 미군 박격포요?

"."

 

- 선생님은 보도연맹 가입하지 않으셨어요?

"안 했어요."

 

- 강요받지 않았어요?

"강요받지 않았어요. 뭣하러 가입하나요."

아는 사람이나 친척 중에 보도연맹으로 죽은 사람들이 있는지 말해달라는 질문에 아주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이효정 할머니 대신 옆에 있던 아드님이 대신 정리해주었는데, 6·25를 전후로 집안이 거의 풍비박산 난 것 같았다.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친척들이 울산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 많이 돌아가셨고, 재주 많던 시동생은 간첩으로 몰려 자살했다고 한다.

 

- 선생님 집안은 어떻게 됐나요?

"우리 친정?"

 

친정 쪽 집안은 친가 외가 모두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유명하다. 증조부때 부터 의병장이 여럿 있었고, 유명한 이육사 시인도 친척 아저씨다. 이후 그녀를 포함해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도 여럿 나왔다. (이종희, 이종국, 이병기) 그러나 친일세력이 다시 득세했던 이승만 정권 때 독립운동가 집안이 온전할 리 만무했다. 그의 친정도 시가와 마찬가지로 죽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많았다.

 

동덕여고 졸업앨범 속의 경성트로이카 동지들 왼쪽부터 이관술(당시 동덕여고 교사, 조선공산당 핵심지도자, 한국전쟁당시 대전형무소학살사건때 사망), 이종희(이효정의 친척, 적색노조운동 참여, 종연방직파업때 이효정과 함께 검거됨. ), 이순금(이효정의 친구, 반제동맹 동덕여고 책임자, 해방후 남로당 중앙위원. 김삼룡의 처) 박현주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더욱더 커다란 시련이 닥쳐왔다. 할머니의 남편인 박두복 선생이 월북을 했기 때문에 그녀는 '빨갱이 가족'으로 손가락질 받는 것과 동시에 연좌제에 묶여 옴짝달싹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감옥에 두 번이나 갇혔다.

 

수시로 찾아오는 형사들 때문에 학교 교사였던 그녀는 교단에서도 쫓겨나 과일행상 등을 하며 세 아이를 키워야했다. 취직하는 곳마다 형사가 따라붙어 쫓겨나기 일쑤였고, 이사가는 곳마다 감시가 붙었다. 경찰서에 끌려가 매를 맞아 한쪽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불편한 팔로 노동을 하며 그녀는 어린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연좌제에 묶인 세월



1930년대 동덕여고 졸업앨범 속의 동덕여고와 교무실의 교사들, 왼쪽에서 세번째 교사가 이관술. 박현주

그 엄혹한 세월은 1987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든이 다되어서야 고난의 역사 속에 묻어두었던 개인적인 꿈 하나를 이루었다. 그것은 문학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문학회에 가입하여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89<회상>, 1995<여든을 넘기며>를 발간했다.

 

아흔이 넘고 백세가 가까워오는 연세 덕에 이효정 할머니는 외출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보내는 때가 많다. 이부자리 뒤로 빼곡이 쌓여있는 책과 문학잡지가 인상적이었다. 시집 두 권을 낸 시인이기도 한 할머니의 어릴 적 꿈은 문학가였을까?

 

- 원래 꿈이 뭐였어요?

"내 꿈은 명필이 되는 거였어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매일 글씨 한 장 씩을 쓰게 했지요."

 

이효정 할머니는 동덕여고 시절 서예전에 나가서 장원을 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2006, 참여정부 때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되면서 그녀도 드디어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을 받게 되었다. 동덕여고 시절 반일 동맹휴학과 종연방직 파업 활동 등이 7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드디어 공로를 인정받고 그녀도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그가 받은 독립운동가포장엔 노무현 대통령의 직인이 찍혀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어떠셨어요?

"……"

 

이효정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으셨다. 그리고 잠시 머리맡에서 무언가 꺼내신다. 신문 하나가 나왔다. 노대통령의 사진이 실려 있는 신문이었다.

 

- 많이 슬프셨어요?

"이젠 늙어서 슬픈지도 어떤지도 몰라요. 텔레비전에서 영결식은 봤어요."

일제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젊은이의 설움과 희망을 함께 나누던 동지들의 죽음, 해방의 감격도 잠시, 단독정부수립기의 혼란과 한국전쟁 속에서 죽음으로 영영 이별했던 가족, 그리고 민주주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전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까지 그가 봐야했던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녀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선물로 주었던 조국은 그녀에게 어떤 나라였을까 궁금해졌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슬프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효정 할머니는 말없이 신문을 꺼냈다. 박현주

 

- 선생님, 거의 백년을 사셨잖아요. 우리나라는 선생님에게 어떤 나라였어요?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고 믿으세요?

 

그는 내 질문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이효정 할머니는 여전히 말이 없고, 나는 질문을 바꾸어 할 수 밖에 없었다.

 

- 선생님, 혹시요, 다시 태어난다면 또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으세요?

"."

 

예상외로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왜요? 이렇게 고생만 하셨는데, 우리나라에 또 태어나고 싶으세요?

 

이효정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셨다. 그리고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100살이 가까워오는 초고령임에도 이효정 할머니의 모습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겸손함과 기품이 느껴졌다. 옛날 선비의 모습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녀를 인터뷰하는 내내 우리나라에 이런 집안도 있었구나하는 경이로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들었다   경상북도 안동의 한 양반가문의 구성원들이 대를 이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다가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 철저하게 매장당하고 이제 자취조차 사라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깝다. 그 천만금보다 더 귀한 정신을 물려받을 후손이 적으니.

 

삶의 기쁨을 노래한다

역사에서 '만약'을 말해서는 안 된다지만, 만약에, 광복 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랬다면 오늘날의 이 혼란과 대립이 존재했을까? 여차하면 퇴보하려는 이 민주주의란 놈의 발목을 지금처럼 힘겹게 붙들고 있지도 않겠지. 민주주의는 아주 굳건한 반석위에 서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이효정 할머니와 그 집안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이며 대한민국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 말미에 이효정 할머니는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그 속에는 동덕여고 졸업앨범, 경성트로이카 조직원들의 검거내용이 실린 신문기사, 지인들이 보내준 편지, 사진 등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보물 상자였다.

 

이효정 검거 기사. 동아일보 19331019일자 종연방직 파업사건으로 동대문서에서 이효정과 동료들을 검거했다는 내용(), 1935118일자. 서대문형사대에서 이효정을 다시 검거했다는 내용(아래). 박현주

 

자료들 사이에서 엽서 몇 장이 떨어졌다. 그 엽서엔 할머니의 시 한 편이 인쇄되어 있었다. 제목은 '삶의 기쁨'. 여든이 넘어 쓴 시일게다. 시련과 역경 많은 삶에서 기쁨을 찾아낸 곳은 물방울 같은 작은 것에서였다.

 

삶의 기쁨 / 이효정

 

작은 물방울 한 알에도

크나큰 고마움을 기울이다 보면

아리도록 맑은 하늘이

살짝 안겨올 때가 있습니다

 

어제에도 내일에도 매이지 않고

오늘만의 묵정밭을 일구다보면

향긋한 오월 바람이

땀방울을 쓸어 줄 때가 있습니다

 

어제엔 미처 몰랐던 것을

오늘 용케도 깨닫다 보면

여지껏 살아 남은 대견함이

잔잔히 스며들 때가 있습니다

 

"진홍이도, 순금이도 이 소식 들을 수 있었으면" 06.8.14

61회 광복절, 건국포장 받는 이효정 할머니

"동덕여고보에 다닐 때 나와 내 친구들의 별명이 나팔관이었어. 소리 나는 나팔 있잖아. 모이면 어찌나 요란하게 웃고 떠들어댔는지."

61주년 광복절인 15일 건국포장을 받는 최고령 독립운동가 이효정 할머니가 동덕여고보 재학 시절 친구들의 사진을 짚어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동덕여고보 동맹휴업, 적색노조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을 해 왔다. 그러나 독립유공자로서의 예우를 받기는커녕 오랫동안 자신을 숨긴 채 살아 왔다.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동덕여고보 재학 시절 사회주의 항일운동 시작하다

경북 안동의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부친이 한 살 때 지병으로 숨지자 할아버지와 함께 상경해 1920년대 동덕여고보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이 할머니는 역사 교사였던 이관술, 조선어 교사였던 한글학자 이윤재 등을 만나면서 사회주의에 눈을 떴다이 할머니는 진보적인 서적을 읽는 독서회에 가입하면서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동덕여고보 3학년 때는 박진홍, 이종희, 이순금 등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시기를 회고하는 이 할머니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다. "(함께 활동하던 박진홍, 이순금 등이) 참 순수하고 좋은 친구들이었어요. 워낙 좋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때는 정말이지 힘든 줄을 몰랐어요."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울산과 서울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반일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연이어 해임됐다. 교직에서 쫒겨난 뒤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수 차례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다. 이재유, 김삼룡 등이 주축이 된 '경성 트로이카' 조직원으로 활동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일본 경찰은 지독한 물고문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이 할머니에게 '잉크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왜 이런 별명을 얻게 됐는지는 이 할머니의 경험을 소재로 쓴 소설 경성 트로이카에 잘 나와 있다.


"이효정이 얼마나 지독하게 버텨냈는지, 나중에는 조선인 형사 중에서도 가장 악랄했던 이 형사라는 자가 담배 은박지로 잉크병을 싸서 얼굴 앞에 들이대며 말했다.

'봐라. 이 작은 종이로 잉크병을 싸 봐라. 안 싸지지? 그런데 너는 잉크병을 종이에 싸려고 해. 이 독한 년!. 얌전한 척 혼자 다 하면서 말이야!' ()

이때부터 그녀에게는 '잉크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잉크병은 겉모습일 뿐, 그녀의 내면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갈갈이 찢어져 가고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 141)


남편의 월북, 고난의 시작

적색노조 사건으로 22개월의 수형생활을 한 뒤 울산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이 할머니는 그곳에서 교원노조 운동을 벌이고 있던 남편 박두복 씨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이후 이 할머니는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면서 항일 운동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지냈다그러나 평화로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역시 항일운동을 하던 남편이 끊임없이 감옥에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다. 남편은 여전히 바빴다. 여운형이 이끌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가했던 남편은 건준의 붕괴와 더불어 좌절했다. 해방이 됐지만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남한 분위기를 못 마땅하게 여긴 남편은 줄곧 월북을 꿈꿨다.


하지만 이 할머니는 만류했다. 그 때 이미 북한의 사회주의가 변질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월북한 이들로부터 내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 남한 지역에서 활동해 온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하는 북한 출신 노동당 간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품게 된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결국 북으로 넘어갔다. 남편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고, 이어 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한 직후 형무소에서 빠져 나온 남편은 '북한행'을 택했고 그 이후 북한에 남았던 것. 이때부터 새로운 고난이 시작됐다. 한국전쟁 기간 내내 대구에 머물렀던 까닭에 이 할머니는 인민군을 구경조차 한 적이 없다. 이 할머니가 한국전쟁을 끔찍한 경험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남편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우익단체 청년들에게 치도곤을 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노점상을 전전한 지식인, 칠순을 넘어 다시 시를 쓰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할머니는 국민학교 교사, 대구일보교열기자 등을 지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 이상 지식인에 걸맞은 직업은 구할 수 없었다. 월북한 남편을 둔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효정 할머니의 이부자리에는 작은 책장이 놓여 있다. 이 할머니는 리영희 선생의 책을 특히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프레시안

 

살아남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자식들이 장성할 때까지 온갖 종류의 노점상을 전전했다.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사실이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평생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동덕여고보 재학 시절 감수성이 넘치는 문학 소녀였던 이 할머니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은 칠순이 넘어서였다. 경남 지역의 문인들과 교류해 오던 이 할머니는 76세가 되던 1989년 첫 시집회상을 냈다. 이어 1995년에는 두 번째 시집 여든을 살면서를 냈다. 칠순이 넘은 노인의 시라고 해서 만만히 본다면 잘못이다. 팽팽하게 짜인 시어들에 담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생때같이 펄펄한 놈 쓸만한 놈들이

불의의 채찍에 무참히 쓰려졌다 해도

천진한 어린 것이 야차의 유흥비로

제물이 됐대 해도

그 어미의 단장의 몸부림을 두 눈 뜨고

멀거니 지켜 보면서도

나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짜고 매운 미각도 잃지 않은 채

나는 밥을 먹었노라

목젖이 조금 뜨끔한 것을

가슴 저 밑바닥이 쩌릿한 것을

그래도 나는 밥을 삼켰노라

눈물도 함께 찔끔찔끔 삼켰노라

인간의 양심이 조금은 남은 탓일까

('양심', 시집 회상에 수록)

동 시대를 치열하게 아파한 흔적도 묻어난다.

살아 온 세월 많아

체념도 배웠고 참는 버릇도 제법 늘었지요

할 수 없지 그럴 수도 있지

이해와 관용도 더러 배운 것 같아요

()

돈 독이 오른 머저리 군인 대통령

일제가 아닌 같은 겨레의 모진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

겨레가 쏴댄 최루탄 파편에 죽은 이한열

폭력의 난무

, 해방만 되면 독립만 되면

오순도순 평화의 낙원을 이룰 줄

믿었는데

('아직 이 時代', 시집 회상에 수록)


하지만 이 할머니의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정서는 어떤 '간절함'이다.


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 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약속', 시집 여든을 살면서에 수록)


"사회주의는 비현실적그러나 일본에 맞선 것은 인정해야"

이 할머니는 현재 인천 부평구 십정동의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큰아들 박진수 씨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더위에 지친 탓에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이 할머니가 나직이 뱉어내는 말은 모두 논리가 정연했다.


이효정 할머니가 살고 있는 28평 연립주택.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다. 프레시안

 

이 할머니에게 젊은 시절 잠깐의 사회주의 활동으로 인해 평생 고통을 겪게 된 데 대해 후회하지 않는지 물었다. "사회주의는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이론만 놓고 볼 때는 몰랐는데 현실에 대입해보니 금세 오류가 드러났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대부분 사회주의에 동조했어요. 사회주의가 일본에 맞서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일본에 맞서는 데 있어서만큼은 사회주의자들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큰 후회는 없습니다."


이 할머니는 요즘 자꾸만 '나팔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동덕여고보 시절의 친구들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삶을 통틀어 가장 밝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그리고 정부의 이번 훈장 수여 결정이 그 시절을 함께 지낸 이들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나의 동산에서

                                이효정

 

양지바른 곳에 땅이 좀 있으면

조그만 동산을 만들고 싶다

빙 둘러 참꽃과 철쭉을 심고

한 가운데는 어머님의 노래비를

세우고 싶다

대문 밖 키는 은행나무를 베어

어머니 기리는 절절한 마음

노래로 그려 새겨 놓고

그 노래 읊조리는 고운 새들도 그려놓고

작은 연못을 파서 사철 고기떼가 놀게 하고

동그란 파문에 감도는 어머님의

옛 이야기 꽃피우고 싶다

 

참꽃 필 무렵이면

파릇파릇 햇쑥이 돋고

철쭉나무 사이사이에

파아란 들나물로 자라나겠지

씀바귀 꽃다지 벌그두데기 냉이 달래랑

돌미나리 미역취 반도나물

어머니 즐기시던 햇나물 햇쑥

그 때는 어머니 만날 수 있겠지

그리도 즐기시던 쑥버무리 쑥절편

소담하게 담아 놓고

싸근한 들나물 무쳐 보리상반 밥에

달큰한 고추장 곁들여 비빈 밥

어머니와 도란도란 먹어 보고 싶다.

(후략)

-시집 회상에서

 

이효정 애국지사의 시집 <여든을 살면서><회상> “도서출판 경남

 

여든을 넘긴 어느 날 마산의 문학인들과 나들이 간 개나리 핀 뜰에서 고운 자태의 이효정 애국지사. 사진=박진수 제공

 

독립운동가 이효정 가계도 EBS.삼일절방송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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