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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이성근 독자와의 대화 그리고 송영경 출판기념회와 故고호석선생 추모제

by 이성근 2019. 11. 28.






환경운동가 이성근 씨 첫 시집 바람이 되는 이유출간

 

환경운동가 이성근(사진) 씨는 산문을 시원시원하게 쓴다. 그의 산문 호흡은 글 그 자체로써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환경운동의 이력과 경륜에 의해 갖추어진 것이다. 경험이 쌓여도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그는 산문에서 시로 나아가 첫 시집 바람이 되는 이유(전망)를 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시를 아주 오랫동안 써왔다고 한다. “30여 년 전 쓴 시도 시집에 들어 있어요.”

 

그는 경남 의령 출신이다. “의병장 곽재우와 백산 안희제, 유신시절 변혁운동가 이수병이 고향 의령의 인물이지요.” 그는 의령 출신에 어울리는 독특한 분위기를 지녔는데 시에서도 그런 뚝심이 느껴진다.

 

그는 환경운동을 하면 나무와 풀을 비롯한 환경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게 바라보면 저절로 시가 마음속에 고여 든다제대로 숨 쉴 수 있는 녹색의 부산이 돼서 누구나 시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부산일보  12.4


이성근 첫 시집 바람이 되는 이유상재

 

한 사람이 일생 써온 시를 엮어 시집을 냈다.

 

생긴 건 우락부락이가 따시고 여린 속으로 마냥 어리석게 살며 쓴 시라고 그의 오랜 벗(구영기 부산지속가능발전협의회 부회장)은 말하고, 함께 활동해온 동지(박정애 시인, 전 부산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는 시가 가을 저수지 물 위를 건너가는 바람소리처럼 자연스럽고사람은 발바닥 지문에 갈맷길이 박혀있는 걸어다니는 나무와 같다고 말한다. 그런 시를 엮어 첫 시집을 낸 이는 이성근이다.

 

그는 부산환경운동연합이 부산공해추방시민운동협의회이던 80년대 후반부터 오늘까지 부산지역 환경운동을 살아냈다. 그 활동 속에서 시를 썼다. 격문이 남발되는 시대를 발과 가슴으로 쓴 시로 살아냈음을 알려주는 것이 그의 첫 시집 바람이 되는 이유.

 

지난 겨울 파낸 흙더미에 앉아/말뚝 박는 소리를 듣는다/깡 깡 깡 끝없이 이어지는 소리/오늘 하루만도 강바닥에는/얼마나 많은 못들이 박혔을까/가봤자 헛걸음인줄 알면서도/다시 찾은 강변 마을/언제나 반겨주던 뱃머리 갈대숲/그 너머 눈에 익은 철새떼 다시 볼 길 없고/흙먼지 자욱한 을숙도 퇴사위엔/보금자리 삶터 쫓겨난 가나한 사람들/잡초처럼 어지럽게 피었다 - 을숙도 85년 봄전문

 

부산의 땅과 바다와 하늘이 개발의 삽날에 찍힐 때마다 찍혀 찢기는 자연의 아픔에 분노하고 함께 아파하며, 핵발전소와 맞닿은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삑삑대며 놀리는 방사능 측정기 뒤에 숨은 자들과 싸우며, 부산으로 이어지는 옛길을 빠짐없이 걷고 걸으며, 길 위의 늙은 나무들과 바다를 건너와 지역 생태계를 결딴내는 외래 침입종들을 걷어내며 반공해운동, 환경운동, 생태평화·문화운동의 현장에서 쓴 시들이 바람이 되는 이유에 담겼다.

 

일생을 활동가로 살며 현장에서 만난 이들을 자기보다 아꼈으니 어머니에게는 이 좋은 세상에 돈 안 되는 짓 골라가며 하는 지지리도 못난 놈이고 제 집에 약수물 한 번 안 길어다 주는 놈이 환경운동, 아나 이놈아구박을 들을 법한 아들이다. 그 아들의 시로 쓴 활동사, 시가 된 시간을 기념하는 출판기념회가 지난 1026일 부산에서 열렸다. 활동 속에서 만나 자기보다 아꼈던 선후배들이 그를 위해 아름다운 작당을 한 결과다.

시인의 말에서 이성근은 내 생에 설정되지 않은 특별한 이벤트라며 작당한 이들을 향해 눈물 나게 고맙다고 말했다. 함께 한 시간을 특별하게 기억해준 후배들에게 감사하고 평탄치 않았던 세월 자신을 지켜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낙동강 웅숭깊은 물소리가 섞여 들렸다.

 

환경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수고로웠던 30년 시간의 강물 속에서, 사람과 자연을 위한 활동의 길 위에서 함께 전력을 다해 흘러왔으되, 결코 떠내려가지 않은 사람과 그의 시를 읽는다. 다른 더 많은 사람과 시를 읽게 되기를 바라고 기다린다.

/ 함께사는 길   박현철 편집주간 parkhc@kfem.or.kr 19.12.10




지난밤은 기쁘고 슬픈날이었다. 오랜 동지 송영경(명상지도사)씨의 천일명상일기출판 기념회가 해운대 바보주막에서 있었다. 책은 진작 우편으로 받아 그 마음 밭을 수차 거닐어지만 다시금 축하 해주고 싶었다.





발길을 옮긴 곳은 남천성당 고호석 선생 추모제였다. 준비해 간 시집을 그의 영전에 바쳤다. 올곧게 치열하게 살았던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영화 속 실제인물들 눈물겨운 인생역정

대부분 악몽 견디고 훗날 민주화노동운동 주역으로일부는 고문후유증으로 앓다 숨져

 

198182일 평범한 고교 교사였던 고호석씨(56)에게 형사들이 다가왔다. 철길 옆 대공분실에 37일 동안 불법 감금돼 물고문과 통닭구이 고문을 당한 악몽의 시작인 이날을 고씨는 잊지 못한다. 고문으로 만들어낸 진술서를 앞장세워 검찰은 고씨를 비롯한 16명을 기소했다.

 

이후 추가로 재판을 받은 이들까지 포함해 모두 23명이 연루된 부림사건의 시작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밝힌 것처럼 실체 없는 사건인 부림사건은 독서모임이나 야학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고씨의 기억 속에서 부림사건은 경찰에 붙들려 영장도 없이 대공분실로 끌려간 시점에서 비로소 시작됐다.

 

피해자들 경제적 어려움병마와 싸워

고씨의 수감번호는 영화 속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 분)와 같은 21. 영화 속 진우의 캐릭터는 고씨를 비롯해 62일간 불법 감금된 송병곤씨(55) 등 피해자들의 면면을 압축한 인물로 그려졌다. 아들을 찾아 부산 곳곳을 헤맨 순애(김영애 분)의 모습은 송씨 어머니의 실제 행동을 옮긴 것이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출소 뒤인 1984년 봄 가족들과 부산 금정산으로 야유회를 가 찍은 사진. | 고호석씨 제공 



 

 

<역사란 무엇인가>, <전환시대의 논리> 등 역사·사회과학 서적을 공산주의 서적으로 몰아간 검찰의 공소사실도 실제와 같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의 재무장관을 지냈던 계량경제학의 거두 조지프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고씨가 구입한 사실마저도 검찰에 의해 범죄사실로 지적되기도 했다.

 

고씨는 6년형이 선고된 재판이 끝날 때까지 고문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동안은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고 만사가 두려울 정도로, 그냥 있으면 그대로 폐인이 됐을 정도의 상태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고씨가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된 것은 교도소 수감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두 달 동안 독방에 갇혀 있기도 하는 등 더욱 심한 정신적 후유증을 남길 법하다고 여겨지는 수감생활이었지만 고씨는 잃을 것이 없는 삶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고 말했다. “책도 읽고 생각도 정리하면서 출소해 나가더라도 어차피 취직도 안 될 테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나서마 하는 다짐이 생기더라. 정치범·사상범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그 사람들과 같이 있다보니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고씨를 비롯해 부림사건 피해자 가운데 3분의 2 이상은 출소 후 다시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 바닥으로 돌아갔다. “전두환 시절에 잡혀 들어오는 사람이 진짜 많았는데, 결국 그 사람들이 다들 앞장서서 87년 민주화에 나섰고 5공이 무너진 걸 보면, 억지로 누르기만 하다가 더 큰 저항을 받게 된 거다.”

 

고씨는 영화 <변호인>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1987년 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부산지역 간부를 맡는 등 1988년 사면복권을 통해 원래의 직업인 학교 교사로 돌아가기까지 막 뿌리를 내려가던 부산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현재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재규씨(65), 부산민주공원관장 설동일씨(57),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대표인 정귀순씨(53), 노동운동을 거쳐 현재 노동 관련 교육사업을 하는 노재열씨(55) 등은 아직도 시민사회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이 보다 장기간 계속돼 오랜 투병생활을 보내야 했던 피해자도 있었다. 당시 사건에서 수괴로 지목된 고 이상록씨(2006년 사망 당시 50)는 출소 후 다시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하지만 부림사건이 남긴 고문 후유증이 검거·단속에 대한 공포로 이어져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1987년부터 시작된 병세는 8년이 지난 1995년 무렵에야 호전되기 시작했지만 병마와 함께 온 경제적 어려움을 피할 순 없었다. 이씨는 2006년 자신과 함께 지내던 세입자들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씨가 겪은 고문 후유증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남아 있는 그의 자필진술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씨는 거듭해서 묻는 말이라곤 네 사상이 공산주의가 아니냐’, ‘너희들 목적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 아니냐’, 이 두 가지가 대강이었다다시 눈에 반창고를 붙이고 손발을 묶은 채 몽둥이질과 발길질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밤까지 몽둥이질이 계속되었다고 진술했다. 정해진 수사방향에 맞춰 대답이 나올 때까지 구타와 고문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전과자, 그것도 엄혹한 시절 빨갱이라는 낙인까지 찍힌 사건 피해자들의 경제적 곤란도 심각했다. 박욱영 부산 해운대구 구의원(55)은 부산공업전문대학(현 부경대) 졸업 후 야학에서 활동하던 당시 집으로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끌려가 대공분실에서 43일간 불법 감금됐다.

 

그래도 당시에 부산공전 나오면 취직은 어디든 쉽게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잡혀 들어갔다 나오니 누가 써주려고 하나. 하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게이오대학에 입학했지만 박 의원은 결국 경제적 사정으로 4년을 채우지 못한 채 대학을 나와 일본에서 직장을 잡았다. “사회운동에 뜻은 있었지만 부림사건 때문에 곤란을 겪으면서 일본 대학에서 역량을 좀 키워보려 했는데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 결국 한국에는 11년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검사 등은 아직까지 승승장구

이들 부림사건 피해자 가운데 고씨를 포함한 5명은 20133월 마침내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부림사건의 혐의 전체에 대한 재심 결정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최초의 판결이 나온 1982년 이후 피해자들이 31년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을 기소한 검사들은 법조계의 거물로 자리잡았다.

 

영화 속 강 검사(조민기 분)의 모델이 된 최병국 전 새누리당 의원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 수석검사였다.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 대검 공안부장 및 중수부장을 거친 뒤 1999년 전주지검장 재직 시절 법조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옷을 벗었다. 울산 남구갑에서 16·17·18대에 걸쳐 3선 의원이 된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사과도 할 생각이 없다. 그들은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자기들 행동을 미화하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검사였던 고영주 법무법인 KCL 대표변호사 역시 공안통으로 남아 자신이 비판을 일삼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끝끝내 자리를 지켰다. 고 변호사 역시 부림사건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주장을 여러 차례 편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 당시 부림사건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문재인 민주당 의원에 대해 부림사건의 변호인이었고 공산주의 사건임을 알았을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변호인단과 피고인들에 대해 위압적인 태도를 보인 판사(송영창 분)의 모델이 된 판사는 조창호 판사(71)로 알려져 있다. 1심재판 때 재판장을 맡은 조창호 판사는 마산지법 부장판사를 거쳐 1993년 부산지법에서 부장판사로 퇴직했다. 조 판사는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한 이후 2009년 부산법원조정센터의 조정위원으로 위촉됐고, 지난해 4월 재위촉됐다.

 

이후 항소심은 당시 부산지법 제1형사부의 안상돈 재판장과 전민기·이찬효 판사가 배석했다. 1심에 비해 혐의의 상당부분을 무죄로 판결하기도 하는 등 비교적 유화적으로 재판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간경향>은 피해자들과 다른 길을 밟아온 최 전 의원과 고 변호사, 조 판사의 해명을 듣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결국 연결이 되지 않았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주간경향 201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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