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무더웠다. 8월1일 새벽에는 잠까지 설쳤다. 사무실도 휴가에 들었다 팔월 첫주와 둘째주로 나누었고 덕분에 더욱 텅빈 사무실에는 거의 혼자 있다. 시기적으로 8월 첫주는 휴가의 절정이다.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산과 계곡, 바다로 왕창 떠났다. 언론을 통해 소개되는 피서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에 치이는 휴가, 오가며 스트레스 받는 휴가를 피해 나름 휴가답게 보낼려고 선택한 일정이다.
소나기가 지나갔다. 천둥소리 지축을 흔들고 섬광이 번쩍이는 저녁 무렵, 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다. 삽시에 어두워진 거리에 빗줄기는 달아오른 아스팔트를 순식간에 식혀버렸다. 이 소나기 진작에 좀 왔더라면
출근해서 보니 수조에 있던 미꾸라지 한마리 물 밖으로 튀어 나와 있었다.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듯 몸은 굳어 있었다. 가끔 있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다시 수조에 넣어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회복했지만 이번은 달랐다. 아마도 내가 새벽잠을 설치던 그 시각 미꾸라지도 이 더위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몸부림 치다 수조밖으로 떨어져 있다 생을 다한 것 같다. 이 미꾸라지는 명지에서 추어탕집을 하는 정경환 선생집에서 얻어 온 몇 마리 중의 한마리다. 그래도 몇 개월을 같이 살았다. 명복을 빈다.
음 유월 스무 아흩날은 조부 이외기의 기일이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이날 만큼은 일가 친척이 다 모인다. 나 또한 특별히 다른 제사 때보다도 신경을 쓴다.
누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다들 날을 기억하고 있다 온다
그렇지만 올해는 빈자리가 많았다. 아버지 내색은 않았지만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았다. 어찌보면 어라 이사람들 봐라 라고나 할까. 사실 올봄 주례 제사에 부모님은 참석하지 못했다. 두분의 표현에 따르자면 긴가민가 하고 있다가 깜빡하셨다는 것인데, 그래서 참석하지 못했는데 마치 이분들의 불참이 너거도 안왔으니 우리도 안 간다 같이 여겨진다. 어머니가 전화 해 봐라 해서 해보니 한분은 가족들과 휴가 중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것도 급히 올린 밴드에 남긴 글이었다. 물론 못올 수도 있다. 좋게 말하면 뭔 다른 일이 있거나 참석하지 못할 부득이한 이유들, 예컨데 상가집에 갔다거나 그런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려니 그래서 전화 한통이라도 해주면 그래 라고 수긍하고 납득이 길 일을, 그도 저도 없었다는데 섭섭함이 있는 것이다.
이 李자 외 外자 기 基자 할아버지는 1916년 생이다. 살아계신다면 올해로 딱 백살이 된다. 하지만 떠나신지 이제 30년이 다되 간다. 많은 고생을 하신 것으로 안다. 일제시절 일본 탄광 생활도 하셨고 그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집안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당시 나 태어나기 전 고향 집은 지금의 터가 아니고 들 가운데 있다고 해서 들가운데 집이라 했다. 그런대로 살았다고 했는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미루어 짐작하기로 달성서씨 할매 사후 이어진 신안주씨 할매, 신창표씨할매 등의 후처를 받아들이면서 였지 않을까 싶다 . 다시말하면 여복이 없었다고나 할까. 내 기억속의 할매는 신창 표시 할매와 또 한 분이 더 계셨다. 마지막 할매는 후손들이 모셔갔기에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지금 아버지 형제는 아버지는 이복형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일한 친혈육이었던 둘째 삼촌이 객사한 이후 세째 삼촌이 실질적인 둘째 아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고모들이 나 보다 다 어리다. 평탄하지 못했던 가족사의 한 단면이다. 아버지 개인으로 본다면 부모로부터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 시절 촉망받는 수재였는데 그 재능을 이끌어 줄 사람이 부재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아버지 평생의 한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암튼 집안 누구나 인정하듯 할배는 실질적인 고향의 지킴이였다.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진설(陳設)중인 고부지간
어린 조카 나정이도 거들고 하여 반서갱동(飯西羹東 ), 어동육서(魚東肉西), 병동숙서(餠東熟西), 홍동백서(紅東白西), 동조서율(東棗西栗) 로 제사상 차림이 끝났다.
그리고 제사를 올린다. 아버지 유세차 그런 거 생략하고 음 유월 스무 아흘 아버지 입장일이십니다. 세분 어머니 더불어 음감을 착실히 하이소 하고 일곱 차례 정도 절을 올린 뒤 제사가 끝나면 혼백 배웅하듯 마당으로 나온다.
그러면 어머니와 아내를 비롯하여 숙모, 여동생이 음복 상을 차리고 한켠에서는 제사에 참석한 이들을 위한 제사 음식 나누기가 진행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른 건 몰라도 아내는 어머니의 제상상 차림이 불만이다. 지나치게 음식을 많이 장만한다는 것인데 어머니의 생각은 다르다. 이른바 음복의 공유다. 그래서 제사 모시고 나면 떡이며 생선, 찌짐과 튀김을 일일이 봉다리에 담아 참석자들 손에 들려 보낸다. 예전같으면 이 봉다리를 하나 더 가져 갈려고 욕심도 냈을 법 하건만 세월이 달라 졌다.
그럴려니 하고 가져가는 손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한테는 억지로 손에 쥐어 주신다. 아내는 쿨 하게 굳이 그럴게 할 필요 있느냐. 와 준 것만도 고마운데 그걸 걸 강요안했으면 좋겠고, 근원적으론 이런 현상은 어머니의 과도한 제사음식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내는 그게 스트레스로 느껴지는 모양인데 내 입장으로선 두 사람 다 옳다. 2016년 음 유월 스무 아흐레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Cinema Paradiso - The A To Z Orchestra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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