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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우리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

by 이성근 2017. 7. 18.




우리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 저자 한지희|경상대학교출판부 |2015.10.30

 

저자 한지희는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털사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경상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재직하고 있으며,현대영미시연구편집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현대영미시, 페미니즘, 세계비교문학, 한국문학과 문화이다.

 

영문 저서로는A COMPANION TO TEN MODERN KOREAN POETSWORLD LITERATURE AND THE POLITICS OF TH MINORITY가 있고, 한글 역서로는 문턱 너머 저편이 있다. 이외에 아드리안 리치를 포함한 현대 영미시인 그리고 한국문학과 문화에 대한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 최근 일본의 근대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등 동서(東西) 문화교류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목차

저자의 말

프롤로그 소녀, 유청년문화 그리고 페미니즘

 

1장 현대 정보기술사회와 상업주의 B급문화의 부상

현대 정보기술사회와 소비문화의 특성

B급문화와 획일적 상업자본주의 이념의 문제

B급문화와 여성의 육체와 성의 대중문화적 소비

B급문화와 소녀의 육체와 성의 대중문화적 소비

대중문화 속 소녀의 표상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법

 

2장 근대 소녀의 탄생과 잉여적 존재성

근대 소년의 탄생과 남성 중심적 소년문화담론

근대 소녀의 우발적 탄생과 잉여적 존재성

 

3장 순진열렬한 소녀의 탄생과 진정한 소녀성의 신화

일본의 신여성 여학생 소녀와 모단 갸루モダンガ?의 정체성

근대 조선사회의 모단 걸 직업여성 소녀의 정체성

순진열렬한 소녀의 탄생 구식 여자 박영채

순진열렬한 소녀의 성장 박색고개의 춘향

순진열렬한 소녀의 완성 소나기의 서울 소녀

 

4장 순진열렬한 소녀의 병리적 징후와 원귀적 존재 양식

장화와 홍련의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고통

장화 홍련의 딸들과 여고괴담

 

5장 현대 명랑 소녀의 탄생과 육체 없는 몸의 존재 양식

소녀의 육체와 인권의 문제 대한민국의 평균 소녀 이옥림의 비애

가부장의 중성 소녀 판타지 명랑 소녀 차양순의 비애

국민 여동생의 감옥 예인 소녀 문근영의 비애

소녀의 육체와 정치의식 반항 소녀 소희의 비애

 

6장 아이돌 소녀 상품의 기획과 소녀의 소외

소녀시대와 오빠 판타지

섹시한 백치미 소녀와 오빠 판타지

 

7장 소녀 되기와 소녀 문화의 가능성

3세대 여성주의와 분노하는 소녀

소위 내 인생이란 것My So Called Life과 미국의 분노하는소녀

쇼넨 나이프少年ナイフ와 일본의 분노하는 소녀

이효리와 한국의 분노하는 소녀

 

에필로그 소녀를 부탁해

 

부록

 

출판사 서평

한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소녀가 탄생하고 소녀성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대중문화 속에서 소녀의 육체와 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판타지가 생산·유통·소비되는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밝힌 책!

 

1920년대 모단 걸부터 이효리까지, 우리 대중문화 속 소녀들을 만나다!

문근영, 아이유, 수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국민 여동생반열에 오른 소녀라는 점이다. 이들은 각종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청순하고 매력적인 소녀로 대중에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 여동생이라는 타이틀은 그들에게 족쇄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대중문화의 판타지가 소녀의 육체와 성을 감시하고 통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문화 속 소녀에 주목하여 소녀성의 신화에 대해 분석한 책이 나왔다. 한지희 교수(경상대학교 영어영문학과)우리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의 대중문화사에서 소녀가 탄생하고 진정한 소녀성의 신화(The Cult of True Girlhood)’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는 한국의 소녀들이 아버지의 법어머니의 침묵아래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억누르고 순종적으로 살아왔으며, 스스로 육체 없는 몸이자 정치적 무자격자로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20년대 모단 걸에서 오늘날의 이효리, 현아에 이르는 한국의 대중문화 속 소녀들을 살펴보고, 소녀의 육체와 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판타지가 예인 소녀들의 육체와 성에 투사되면서 생산·유통·소비되는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밝히고 있다.

 

소녀, 순진열렬한 소녀, 얄개 소녀, 명랑 소녀

먼저 저자는 현대사회에서의 B급 문화와 여성(소녀)의 육체와 성의 대중문화적 소비에 대해 고찰한 후 소녀라는 단어의 탄생을 추적한다. ‘소녀(少女)’라는 단어는 1903년 최남선이 근대 잡지 소년을 발간하며 서양식 의미의 소년(Boy)’소녀(Girl)’를 번역한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때의 소녀라는 언어는 사회문화담론에서 전혀 그 의미를 생산하지 못했던 불완전한 언어였고, 당대 신여성 여학생 소녀는 스스로를 여성 주체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근대 지식인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소년들의 조력자이자 잉여의 존재로 머물렀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후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모단 갸루(Modern Girl, 일본식 영어 표현)의 수입과 조선의 모단 걸 직업여성 소녀들의 등장을 통해 일본의 음란한 여학생 소녀의 표상과는 달리 한국의 순진열렬한 소녀가 어떻게 가부장적 질서에 복속되는지 그 과정을 밝히고 있다. 이광수의 무정에 등장하는 구식 여자 박영채와 박색고개의 한 전설에 나오는 추녀(醜女) 춘향에 이어 1950년대 황순원의 소나기에 등장하는 서울 소녀 등으로 진정한 소녀성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옛 소설 장화홍련전의 장화와 홍련을 통해 가부장의 절대적 권력 아래에서 고통 받는 소녀들을 살펴본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것(The Unspeakable)’을 마음속에 억누른 채 심리적 고통을 감당하는 장화와 홍련 자매에게서 병리적 징후를 포착하고,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과 영화 여고괴담시리즈 등의 소녀 귀신을 통해 한국의 대중문화 속 소녀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임예진 등의 얄개 소녀로 표상된다. 진짜 진짜 좋아해, 빨강머리 앤, 작은 아씨들의 소녀들은 귀엽고 사랑스런 말괄량이지만 남성 중심적 시각무의식이 반영된 행복한 소녀의 판타지를 구현하는 과장된 선전용 기표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보았다. 다음으로 현대 한국 대중문화 속에서 육체와 성을 통제받고 있는 소녀들을 찾아본다. 드라마 반올림의 명랑 소녀 이옥림, 명랑소녀 성공기의 중성 소녀 차양순, 가을 동화의 은서, ‘육체 없는 몸을 강요당하는 국민 여동생 문근영 등이 그들이다. 또한 대중음악산업에서 삼촌팬이라는 새로운 팬덤을 확보하여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걸그룹 소녀시대와 포미닛의 현아를 통해 청순하고 섹시한소녀의 육체와 성이 기획사에 의해 아이돌 소녀 상품인 청순 베이글녀들로 기획되어 상품화되는 모습을 밝혀내고 있다.

 

우리는 BIG(Bold Intelligent Girl)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소녀들이 자신들을 상품으로 전시하는 대중문화에 분노하고 자신의 인권에 대해 당당하게 표현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효리의 U-Go-Girl, Chitty Chitty Bang Bang, 미스코리아등을 통해 한국 소녀 문화의 전망과 정치적 역량에 대한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효리는 가부장적 권력과 질서가 보여준 성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착한 여자 되기에 맞서서 그동안 억제되었던 나쁜 여자 되기라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이효리는 가부장적 기획사가 입혀 놓은 아이돌 소녀 상품의 허구적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예술세계로 날아오른 큰언니로 예인 소녀들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시대 소녀는 ‘PIG(Pure Innocent Girl)’가 아니라 ‘BIG(Bold Intelligent Girl)’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들이 그들의 삶에 주도권을 잡고 장어처럼 유연하게, 양배추 심처럼 옹골지게, 남자들이 조직해 놓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BIG(Bold Intelligent Girl)이다라고 외치며 살아볼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말이다.”

 

 

문근영·장나라·소녀시대에 열광, 가부장적 시선이 반영된 것 15.11.12 경향

 

한지희 교수는 대중문화에 나타난 소녀의 이미지는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시선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진은 황순원 소설 원작의 영화 <소나기>의 한 장면,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의 장나라, 영화 <댄서의 순정>의 문근영, 걸그룹 소녀시대.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던 가수 아이유가 최근 새음반 <chat-shir(챗셔)> 발매 후 홍역을 앓았다.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모티프로 한 신곡 ‘Zeze(제제)’를 놓고 소아성애 논란이 일면서 비난이 빗발쳤다. 한 평론가는 아이유를 감싸고 있던 소녀의 이미지가 오히려 아이유의 발목을 잡았다고 평했다.

 

보호의 대상으로 여기던 순진무구한 존재인 아이유가 갑자기 시선을 되받아치며 자신이 주체라는 점을 드러내면서 대중의 판타지는 깨지고 비난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순진하고, 사랑스러우며,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서 소녀의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되어 오고 있을까. 경상대 한지희 교수는 최근 출간한 <우리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에서 1910년대 이광수가 바라본 소녀의 이미지부터 오늘날 소녀시대같은 걸그룹까지 두루 그 역사 등을 살폈다.

 

순진열렬한 소녀는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소녀의 한 전형이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의 박영채, 황순원 소설 <소나기>의 소녀가 이 전형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박영채는 신여성에 대비되는 구여성을 상징하며 정조를 잃자 자살을 시도한다. <소나기>의 주인공 소녀는 긴 생머리, 깨끗하고 하얀 피부, 순수함 등 소녀로서의 덕목을 고루 갖췄다. 소녀는 죽어가며 소년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날 입었던 분홍 스웨터를 입혀서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사랑밖에 모르고 사랑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1910년대 박영채 같은 여성의 후예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한 교수는 <소나기>의 소녀가 수많은 10대 소녀들을 진정한 소녀성의 전당으로 불러 모았다제도권 교육 속에서 한국 소녀들은 <소나기> 속 소녀처럼 가부장적 보호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소녀가 갖춰야 할 필수적 덕목으로 내면화했다고 분석했다.

 

소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바뀐다. 하지만 가부장적 틀 속에 매여 있는 점은 변하지 않았고, 10대들의 실질적 고민도 찾아볼 수 없다. 1970년대 영화 얄개시리즈에 등장한 소녀들은 평범한 여고생의 일상을 살아가는 말괄량이 소녀들로 틈틈이 눈물과 웃음을 보이지만, 결코 사춘기의 육체적 성장의 징후와 그로 인한 심리적 혼란을 겪는다거나 성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한 교수는 얄개 소녀는 경제개발시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권력·질서가 제공하고 싶었던 행복한 소녀의 판타지를 구현하는 과장된 선전용 기표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소녀의 이미지는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 변주된다. 2002년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의 주인공 차양순과 원조 국민 여동생인 배우 문근영이 그렇다. 배우 장나라가 연기한 차양순은 성장기 소녀가 당면하는 현실적·육체적 고민에 대한 사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가녀린 몸매에 씩씩하기까지 한 중성 소녀로 가상 소녀의 표상으로만 등장한다. 문근영은 극중 역할뿐 아니라 실제 사생활에서도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아 예의 바르고 공부 잘하는 모범적인 학생의 본보기로 기특하고 대견한 딸혹은 사랑스러운 외모를 지닌 귀여운 여동생으로 여겨졌다. 영화 <댄서의 순정>에서처럼 문근영은 작품 속에서 육체적·성적 욕망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한 교수는 대중은 문근영이 스스로 육체와 성적 욕망을 최대한 억제해 끝까지 진정한 소녀성을 간직할 것을 요구한다이는 소녀들의 육체와 성적 욕망까지 통제하고자 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남성 욕망이라고 말한다.

 

삼촌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걸그룹 소녀시대 열풍은 어떨까. “사랑밖에 모르는 소녀들이 사랑을 갈구하며 애틋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10대 소년들부터 30대 삼촌들, 40~50대 아저씨들까지 모두가 자신들이 소녀들의 오빠에 해당할지 모른다는 착각으로 그들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주고 싶은 심정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 소녀시대가 소녀의 이미지를 벗어나 주체적·독립적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지향하자 삼촌팬들은 과거처럼 그들에게 열광하지 않았다는 게 한 교수의 분석이다.

한 교수는 여태껏 한국 사회에서 소녀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고민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강조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개념을 빌려 비시민’ ‘비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이제 한국 사회는 소녀들에게 자신의 여성적 존재성, 삶의 조건을 사유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녀라는 기호 15.12.9 시사인

한지희의 <우리 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은 걸그룹 현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논의는 1908년 창간한 <소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소녀라는 기호를 억압하고 은폐하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21세기 한국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최대의 히트 상품은 10대 여성으로 이루어진 걸그룹이다. 연예기획사가 양산한 걸그룹은 케이팝(K-Pop)의 인기를 해외로 넓히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으나, 순진무구한 이미지로 다듬어진 미성년 10대 소녀들의 성적 매력 전시라는 도발적이고 모순적인 형태로 인해 자주 시빗거리가 되었다. 또 미성년 걸그룹의 골반춤과 허벅지를 아무 죄의식 없이 감상하면서, 자신의 롤리타 콤플렉스를 삼촌(오빠)과 조카(여동생)’ 같은 유사 친족 관계로 교묘하게 위장해온 삼촌(오빠) 부대의 관음증 역시 좋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한지희의 <우리 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경상대학교출판부, 2015)은 오늘의 걸그룹 현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겠다면서, 엉뚱하게도 최남선이 1908년에 창간한 <소년>지에까지 논의를 거슬러 올라간다. 제목에 나와 있는 계보학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걸그룹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녀라는 기호를 억압하고 은폐하면서 남성 자신의 욕구에 부응하는 여성의 생애주기를 강요해온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최남선이 청년보다는 나이가 어린 소년의 계몽에 역점을 두고 발간한 <소년>에는 남학생 소년만 있었지 거기에 상응하는 여학생 소녀는 없었다. 여행기와 탐험 문학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던 이 잡지의 목적은 식민지 조선의 남학생 소년들에게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를 주지시키고, 새로운 조선을 건설할 동량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이런 소년문화 담론 속에 여학생 소녀는 호명받지 못했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을 하는 동안 일본의 여학생 소녀(신여성)들이 근대 문화를 흡수하는 것을 목격했으면서도, 조선의 소녀들을 예비 주부로만 보았던 당대 조선의 가부장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지영 그림

<소년>이 창간되기 이전인 1886, 이화학당을 시초로 여학교가 잇달아 설립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미래와 전문지식인으로서의 꿈을 탐색할 수 있는 독립된 생애주기를 가질 수 있었던 소년과 달리, 여학생의 교육 목표는 예비 주부가 갖추어야 할 현모양처의 자질을 함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학교의 교과목은 주부가 응용할 수 있는 학문들로 구성되었고, 얼마 안 되는 수의 여학생조차 대부분 결혼과 동시에 학업을 그만두거나 졸업을 하고 주부가 되었다. 이처럼 여성의 존재양식이 어린 계집아이와 결혼한 부인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성은 소년이 가졌던 것과 같은 생애주기를 가질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이다.

 

해외 유학을 다녀오거나 신식 교육을 받은 여학생 소녀들은 서양식 근대교육의 혜택을 받고도 전통적인 여성의 삶과 역할을 수용하며 개인적인 역량을 사장시켰다. 반면 여성의 생애주기를 주체적으로 향유한 집단은 여학생 소녀와 대척점에 있었던 9세 이상 19세 미만의 직업여성 소녀들이다. 이들은 원래 관기(官妓) 제도에서 해방된 뒤 다양한 서비스 업종(카페 여급·다방 마담)과 예능 분야(가수·모델·영화배우)로 진출한 기생 소녀들이다. 지은이는 바로 이들이, 현재 걸그룹의 기원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괜한 오해가 있을까 봐서 덧붙이자면, 조선 시대의 기생은 기본적으로 예인(藝人)을 가리키며, 기적(妓籍)에서 풀려나 적극적으로 자기 꿈을 펼친 사람들도 기예(技藝)를 닦은 권번의 학생들이다.

 

붉을 홍자가 아닌 넓을 홍자를 쓴 현진건

비제도권이었던 직업여성 소녀들은 자발적으로 서양문물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탐색하고 봉건적 신분제도의 타파, 남녀 평등, 개인의 인권과 자유 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여성이 말할 권리를 주장했다. 이들은 “‘순수한 여학생타락한 직업여성의 구획선을 깨고 스스로에게 모단 걸이라는 신여성의 자격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을 말할 권리와 인권을 요청함으로써 타락한여성들에게 부과되는 침묵과 복종의 필연을 깨고 그들을 천민계급으로 비하하는 사회적 위계를 뒤흔드는 정치의식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과연 이들의 후예인 걸그룹은 억압된 여성으로서, 시민으로서, 정치적인 존재로서 말하고 있는가? 100년 전의 모단 걸보다 오늘의 걸그룹이 더 퇴행했다.

 

여성의 권리와 시민의 자격을 요구하는 모단 걸에 대한 조선 남성 지식 사회의 대응은 징치와 순화였다. 현진건이 모단 걸을 복사꽃(紅桃花)에 비유하면서 붉을 홍()’자가 아닌 넓을 홍()’자를 쓴 것 따위가 당대 남성 지식인들의 모단 걸에 대한 징치였다면, 이광수는 남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정절을 잃고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무정>의 여주인공 박영채를 통해 성적 자결권을 쟁취하려는 모단 걸을 순화하려고 했다.

 

지은이는 한국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여성을 순화하기 위해 박영채와 같은 순진열렬한 소녀(청순가련형 소녀)’상을 거듭 형상화해왔다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황순원의 <소나기>를 꼽는다. <소나기>에 나오는 어린 소녀는 남자라면 누구나 사귀고 싶어 하는 청순미, 순진한 마음, 남성의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연약성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소녀는 소나기가 내리던 날 자신이 입고 있던 물풀 자국 난 분홍 스웨터를 입혀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는 것으로 순진열렬한 소녀상을 완성한다. ‘순진하게만 여겨졌던 소녀가, 가슴 속에 한 소년을 향한 그토록 열렬한 사랑의 불꽃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남성들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생애주기 가운데 문턱에 해당하는 소녀 시절을 육체와 정신 양면에서 봉쇄해왔다. 소녀들은 오랫동안 성적 욕망은 물론 자신의 육체마저 의식하지 못하는 중성이나 무성애자로 훈육되어왔는데, 소녀들이 중성이거나 무성애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순진열렬함이 한 남자만을 위한 희귀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그룹이 활개를 치는 지금은 양상이 더 나쁘게 변했다. 걸그룹을 모범 삼은 소녀들은 자신의 육체와 매너를 섹시하게 가꾸면서, 여전히 중성이나 무성애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런 이중적인 구속은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켜 한층 더 다루기 쉬운 여성으로 만들며 여성 자신을 자학적이고 분열적 주체로 만든다. 걸그룹의 막강한 영향력은 소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일종의 육체 자본으로 내면화시키고, 걸그룹에 심취한 삼촌(오빠)의 존재는 소녀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성적 매력을 이용하라고 가르쳐준다. 프리가 하우그와 그 동료들이 함께 쓴 <마돈나의 이중적 의미>(인간사랑, 1997)에 따르면, 여성의 사회화 과정은 그들의 육체와 매너가 남성이 만들어놓은 주형의 주형물이 되는 것으로 완료된다.

 

청춘 아이콘변천사 16.3.6 한겨레

     

 

왼쪽부터 임예진, 문근영, 박보영, 아이유, 수지, 혜리, 설현, 이수민, 쯔위. 사진 각 방송사 제공

 

“‘국민 배우는 배우에 대한 최고의 호칭”(한창호 <여배우들>)이다.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이자, 국민을 상징하는 배우라는 뜻이다. 그러나 배우대신 여동생이란 단어를 붙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린 여자에 대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가 반영된 롤리타 콤플렉스의 연장선이라는 시선이 따라온다.

 

이런 지적들을 고려하더라도, ‘국민 여동생이 한 시대를 관통하는 청춘 아이콘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대체로 그 시대 독보적으로 인기를 끈 풋풋하고 발랄한 하이틴 스타를 일컫는 호칭으로 쓰여왔기 때문이다. 1970년대 임예진과 80년대 이상아, 이미연 등을 거쳐 1997에스이에스’(SES)를 필두로 한 걸그룹 청춘 아이콘전성시대가 열리기도 했다. 최근 들어선 저마다 섹시순수또는 귀여움을 앞세운 청춘 스타들의 각축전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당대 대중의 욕망과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며 변화를 거듭해온 청춘 아이콘의 변천사를 들여다본다.

 

순수의 시대’ 2000년 문근영 임예진으로 시작된 풋풋한 청춘의 대명사는 문근영한테 그대로 옮아갔다. 2000년대 초는 채연, 이효리 등 섹시 가수들이 사랑받던 시절이다. 이 틈에서 맑은 매력의 문근영은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2000<가을동화>에서 송혜교의 아역으로 등장해 눈도장을 찍었고, 2004년 영화 <어린 신부>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때 처음 국민 여동생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당시 문근영은 임예진처럼 크고 맑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의 이미지를 풍겼다. <어린 신부>에서 대놓고 나는 아직 사랑을 몰라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70~80년대 가부장적 시대의 시선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영화에 출연했던 한 배우는 순수한 외모에 환호하는 한편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미성년자를 결혼이라는 상황 속에 둔 것 자체가 남성 판타지의 자극이라는 불편함도 있었다고 말했다. 한지희 경상대 교수는 지난해 발간한 책 <우리 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에서 “(대중문화 속 소녀의 이미지는) 가부장적 보호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소녀가 갖춰야 할 필수적 덕목으로 내면화됐다고 지적했다.

 

당찬 아이’ 2008년 박보영2010년 아이유 여성들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 확고해진 2010년을 기점으로 시대의 동생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8년 영화 <과속스캔들>로 문근영의 국민 여동생타이틀을 넘겨받은 박보영이 그랬다. 아이 엄마가 된 그는 순수하고 맑은 동생이미지는 그대로지만, 당차진 모습으로 아이콘의 변화를 알렸다.

깜찍·발랄함을 앞세운 청춘 아이콘의 대표주자는 2010년 등장한 아이유였다. 그는 좋은 날에서 나는요 오빠가 좋은 걸 어떡해대놓고 이야기하며 남성들의 심장을 뛰게 했다. 부끄러워하며 수줍게 웃던 이전 아이콘들과 달리,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깜찍한 모습을 드러냈고, 의견을 당차게 말했다. 문근영이 국민 여동생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면, 아이유는 삼촌 부대라는 말을 등장시켰다. 한 케이블 티브이의 드라마 피디는 아이유는 10대가 보여줄 수 있는 발랄함과 20대가 내뿜는 깊은 감성이 두루 느껴졌다. 아이유 때부터 국민 여동생이 마냥 어리게만 보이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성숙해진 아이콘 2012년 수지 아이유보다 한 살 어린 수지에 이르러 청춘 아이콘은 역설적으로 한층 성숙해진 이미지를 획득한다.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90년대 대학생으로 등장한 수지는 첫사랑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며 청춘의 상징이 됐다. 문근영, 아이유과 달리 마냥 어리고 귀여운 느낌보다는 감수성 돋는 성숙한 느낌이 더해졌다. 30대 남성 팬은 아이유는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동생 같았다면, 수지는 내 여자 같은 느낌이 들어 설렌다고 말했다. 한 요구르트 광고에서 수지는 나 오늘 첫키스 할 거야라고 당돌하게 말한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지켜주고 싶은 어린아이의 이미지에서 한발짝 나아갔다.

 

섹시귀여움의 각축 혜리설현 혜리는 2014<일밤-진짜 사나이>에 출연해 잘 먹고, 민낯으로 씩씩하게 다니는 모습 등으로 호감을 샀다. 교관과의 이별을 앞두고 아잉이라는 애교 한방으로 단숨에 수지의 바통을 이어받는 청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혜리의 바통은 다시 1년도 안 되어 설현이 이어받았다. 2012년 데뷔해 영화 <강남 1970> 등에 출연했지만, 스타덤에 오른 건 지난해 한 이동통신회사의 모델로 섹시한 뒷모습을 강조하면서부터다. 그러나 1월 끝난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다시 혜리가 청춘의 상징으로 부각되는 등 섹시귀여움을 앞세운 두 아이돌 간 엎치락뒤치락 각축전이 이어지고 있다. 설현은 청순한 얼굴 한편으로 섹시한 몸매를 전면에 내세우며 청춘 아이콘의 자리에 올랐다. 이를 두고는 몸매를 강조하는 최근의 성적 상업화 경향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거부감이 덜해진 사회 분위기의 반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차세대 청춘 아이콘은 누구? 설현·혜리의 양강 체제에 대한 도전은 벌써부터 치열하다. 에스비에스의 한 라디오 피디는 청춘 아이콘의 소비주기가 몇년에서 몇개월로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주자는 15살 중학생 이수민이다. <보니하니>(교육방송)를 진행하는 이수민은 성숙한 외모와 똑부러지는 진행 실력, 당찬 성격 등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어린이 대상 프로인데 삼촌 팬들도 찾아서 볼 정도다. 걸그룹 트와이스의 쯔위와 걸그룹 여자친구도 거론되고 있다. 이 피디는 설현과 혜리 이후 2016년엔 다시 문근영 시대처럼 순수가 강조된 아이콘들이 뜨고 있다섹시함을 강조하는 걸그룹 과부하 상태에서 빚어진 역전 현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청춘 아이콘의 굴레 큰 환호를 받지만, 금세 다른 이에게 바통을 넘겨줘야 하는 청춘 아이콘들의 변신 노력에도 관심이 쏠린다. 걸그룹이 쏟아지면서 국민 여동생칭호를 누리는 나이도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20대 초반만 되어도 화제의 중심에서 비켜난다. 변신에 대한 족쇄가 되기도 한다. 문근영은 지난해 드라마 <마을> 뒤 언론 인터뷰에서 배우로 더 성장하고 싶은데 국민 여동생타이틀 때문에 틀 안에 가둬지는 것 같아 싫었다고 말했다.

정점을 맛본 청춘 아이콘들이 후유증을 앓지 않으려면, 스스로 굴레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이유는 지난해 스물셋으로 섹시한 무대를 선보였고, 공개 연애도 발표했다. 문근영은 끊임없이 성숙한 연기에 도전하고 있다. 혜리는 최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생각하면 힘들다. 당연히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다고 생각하고 연연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Mr. Salesman - Clazziqu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