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정찬대 지음, 한울 아카데미 펴냄) ⓒ프레시안
‘창쟁이’라는 말이 있다. 1950년을 전후로 해 한반도 전역에서는 무수한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총알이 부족했던 시기라 학살의 가해자들은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창으로 민간인들을 찔러 죽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이유도 모른 채 컥컥거리며 쓰러졌다. ‘창쟁이’들은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학살지로 이동했다.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는 기자 정찬대가 호남과 제주 지역의 민간인 학살 사건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60여 년 전 벌어진 민간인 학살사를 엮은 책이다. 호남·제주, 영남, 강원, 충청, 서울·경기를 아우르는 프로젝트 중 첫 번째 기획인 이 책은 영암·구례·화순·함평·순창·남원·임실·제주 등 호남과 제주 지역 여덟 곳에 골골이 밴 학살의 기록을 담았다.
저자 정찬대는 1976년 전남 영암에서 출생했다.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시사월간지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다양한 매체에서 정치 현장의 기록자로 지내왔다. 2015년 인터넷 매체 ≪커버리지≫를 창간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기사와 칼럼 등을 쓰고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은 저자의 고향인 영암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궁금점에서 출발했다. 이후 2007년, 여순 사건과 관련해 전남 구례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을 취재하면서 이 문제에 더욱 천착하게 됐다. 현재 전국을 다니며 관련 사건을 취재ㆍ발굴 중이며,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와 함께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에 참여 중이다.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한 바 있는 저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수집 자료를 정리ㆍ분석하는 작업을 도맡기도 했다.
목차
추천의 글_ 그의 ‘학살’, 글 이상의 아픔과 분노를 담다(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
들어가며_ ‘한 조각’ 역사, 애달픈 꽃처럼 살다 가다
1장 영암: 달 밝은 월출산은 그렇게 목 놓아 울어댔다
좌우익 분풀이가 불러온 광분의 ‘집단 학살’
2장 구례: 지리산 품은 구례의 한, 섬진강 따라 굽이치다
좌우 대립 정점에서 ‘학살의 피’ 흘린 사람들
3장 화순: 골골이 서린 상흔, 어찌 말로 다하리오
인민군 복장한 국군, 대량학살 불러오다
4장 함평: 불갑산 꽃무릇에 배인 선불의 절규
5중대의 인간 사냥, 그리고 마지막 살육 ‘대보름 작전’
5장 순창: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패잔의 기록, 빨치산 투쟁과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6장 남원·임실: 그들이 겪은 것은 ‘진짜 전쟁’이었다
이데올로기 사슬에 순장이 된 사람들
7장 제주: 미안해서, 그리고 가엾어서 나는 울었다
이승만과 미국의 협잡, 제주는 ‘붉은 섬’이 됐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연표: 호남·제주 편
참고한 자료
구술자 명단
출판사 서평
당사자 구술로 엮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
“장개석 총통이 말한 것처럼 명주 베에 붉은 물이 들면 빨아도 빠지지 않아. 어린놈 머리통에 빨갱이 물이 들면 별수 없어, 그냥 죽여야 해.” _ 162쪽, 5장 순창
지난 2015년에 시작하여 얼마 전에 연재를 마친 동명의 연재물을 바탕으로, 취재 지역을 추가하고 문장을 다듬어 단행본으로 출간한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호남·제주 편)』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남겨야 할 어떤 기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책이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에 위치한 국립임실호국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경은 물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지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 추모의 공간 옆에는, 반대로 국가에 의해 무참히 살육된 민간인들의 넋도 함께 웅크리고 있다. 1951년 3월 14일, 임실의 한 폐광굴에 남산리 마을 주민 700여 명이 갇힌 채 시커먼 어둠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군경은 양쪽에서 입구를 틀어막은 뒤 한쪽 입구 앞에서 고춧대, 솔잎 등을 태운 연기를 굴속으로 들여보냈다. 숨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바깥으로 뛰쳐나온 주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군경의 기관총이었다.이날 700명이 넘는 민간인이 굴 안에서 죽었다. 국가는 이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바로 오른편 언덕 위 국립임실호국원에는 태극기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갈전리에서 만난 류 씨의 팔은 참혹했던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총상 자국은 깊게 패어 있었고, 힘줄이 끊겼는지 손은 불구가 돼 펴지지 않았다. …… 그는 “시체 속에서 아기가 울더라고, 그러더니 ‘이놈들 봐라’ 하면서 군인들이 다시 확인 사살을 하는 거야, 그 통에 다 죽었지”라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회고하는 류 씨의 표정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_ 95~96쪽, 3장 화순
병사들은 이미 죽은 시체의 머리통에 콜트 45구경 권총을 대고 총질을 했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한반도의 군경들 역시 ‘악의 평범성’에 매몰되어 기계적으로 학살에 가담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악하고 나약한 존재였을까? 그러나 이런 참혹한 순간 속에서도 인간의 용기는 악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장년층을 사살한 기관총의 가늠쇠는 어느새 여성 쪽을 향했다. 그때였다. 세 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은 나순례 씨(당시 29세)가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총부리를 틀어잡았다. 방금 전 난사로 총열은 뜨거웠지만, 나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뭣 땜시 우리를 죽인다요?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제발 살려주시오.” 공포감에 떤 채 아무 말 없던 몇몇 주민과 아이들이 하나둘 흐느끼기 시작했다. 냉혈한처럼 보였던 군인들도 그 모습에 차츰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의 학살은 멈췄고, 군인들은 싸늘하게 널브러진 시체를 방치한 채 급히 철수했다. _ 112~113쪽, 3장 화순
여전히 역사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들
영암 구림마을에는 ‘지와목 사건 순절비’가 있다. 1950년 10월 7일, 빨치산 인민유격대는 야간에 마을을 기습해 기독교 신자와 경찰 가족 등이 포함된 우익 인사 28명을 지와목에 있는 주막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며칠 뒤 군경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수복되자 보복 학살이 단행되었다. 지와목에서 죽은 우익 인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한국반공연맹이 주축이 되어 이곳에 순절비를 세웠다. 그것이 지와목 사건 순절비다. 물론 좌익으로 몰려 억울한 보복 학살을 당한 주민들을 위한 애도는 없었다. “그래도 좌익한테 죽어서 순절비도 세우고 그랬지, 군경한테 죽으면 뭔 말도 못하고 그랬다.” 구림에서 만난 한 주민의 육성이다. 그런데 지난 2006년 왕인박사 유적지 맞은편에 위령탑 하나가 더 세워졌다. 보복 학살의 피해자들을 위한 비석이었다.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라는 이름의 이 비문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너와 나 낡은 구별은 영원히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만 가득하리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렇게 영암 구림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추모가 공존하게 되었다.
순창에서 만난 서길동 씨는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민기가 나부끼던 시절 마을 뒷산 굴밭등에서 숨어 목숨을 건졌다. 그는 좌도 우도 아니었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에는 수십 년간 이어진 피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고택이 있다. ‘한정당(閒靜堂)’이라는 편액이 붙은 이 고택에는 1950년 겨울부터 터를 잡고 살던 문옥례 씨 가족이 지내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그녀는 빨치산 유격대원들에게 밥을 해줬는데, 그녀가 퍼준 밥알에는 물론 한 톨의 이념도 없었다.
그녀의 밥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문 씨는 그런 그들이 가여워서 넉넉하게 밥을 퍼줬다. 책을 읽다 보면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각축장으로 알았던 한국전쟁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곳에는 이념도 주의도 사상도 없었다.
7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문 씨는 “밥해주면 그거 먹으면서 동무, 동무 그랬는데……. 다들 죽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는 빨치산에 대한 연민도, 동정도 아니었다. 격변과 혼란의 시대를 함께 관통해온 이들에 대한 동질감 같은 것이었다. _ 194쪽, 5장 순창
한국전쟁은 느닷없이 끝났다. 무책임하게 선포된 평화는 여전히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마을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문서 속의 단어일 뿐이었다. “전쟁이 그렇게 대충 끝났다.” 일가족이 몰살당한 뒤 산중 생활을 했던 장재수 씨가 꺼낸 말이다. 2015년 1월에 화순군 맹리에서 만난 임봉림 씨는 군경이 길섶에 사람들을 앉혀놓고 총질을 해댄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부지들이 그런 시상(세상)을 살았어. 그런 거 생각하면 짠해…….” 희생자들은 지나간 폭력의 시간을 ‘그런 시상’이었노라고 담담히 눌러 삼키고 있다. 희생자들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지만 정작 가해자인 국가는 외면하고 있다. 반쪽짜리 화해다. 2005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의해 적지 않은 미규명 피해 사례가 진실로 규명됐지만, ‘진실규명 결정통지서’를 받은 후 3년 이내에 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몰라 신청 기간을 넘긴 수많은 희생자가 어떠한 배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퍼 담지 못한 이야기가 아직 많다
정찬대가 보고 듣고 기록한 것은 한국현대사의 처참한 살육의 역사이지만, 그 안에는 빛나는 장면도 담겨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군경 요직에는 여전히 친일 관료가 즐비했다. 당시 정부는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주민들에게 자발적으로 ‘좌익계 자수서’를 낼 것을 포고했는데, 서북청년회 등 우익 조직이 중간에 간여해 자수서 제출을 강요했다. 당시 제주 서귀포시 모슬포지서장이었던 문형순은 서청의 개입을 막고자 마을지서가 직접 ‘좌익계 자수서’를 받도록 지시했다. 또 공비 협조자에 대한 밀고가 있을 경우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며 도리어 제보자를 겁줘 억울한 희생을 막았다.
1950년 8월 30일 성산포경찰서장 시절에는 제주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의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공문을 “不當(부당)함으로 不履行(불이행)”이라고 적어 돌려보냈다. 좌익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덧씌워 언제든 총살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문 서장은 괘념치 않았다. _ 297쪽, 7장 제주
하지만 문형순 서장의 말년은 불운했다. 퇴직 후 보급소에서 쌀 배급 업무를 맡은 그는 제주 대한극장 매표원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다 결국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제주시 오등동 평안도민공동묘지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직까지 그의 죽음을, 그가 보여준 용기를 호명해준 이는 없다.
낙선동 전략촌(제주 4·3성) 이야기도 흥미롭다. 제주 4·3 사건 이후 민심을 수습한다는 목적으로 이승만 정부는 제주 낙선동에 대규모 전략촌을 육성한다. ‘있지도 않은 적’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주민을 한곳에 모아 토성을 쌓았다. 물론 축성은 주민을 효율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다. 아침 6시에 문이 열리면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 6시가 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식구 중 한 명이라도 못 들어오면 나머지 가족이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낙선동 ‘전략촌’은 사실상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24시간 성 주변을 감시했고, 대창을 든 여성과 노인, 그리고 어린 학생들까지 조를 나눠 번(보초)을 섰다. 여자는 여자끼리, 소년단은 소년단끼리, 노인은 노인끼리 조를 짜는 식이었다. 모두 9개 초소에서 5교대로 운영됐으며, 가장 중요한 정문 보초는 특공대가 지켰다. 물론 남자들이 대거 희생된 까닭에 성을 지키는 일 역시 대부분 부녀자와 노인의 몫이었다. 성 안은 몇 개 부락이 집단 거주할 수 있는 함바집과 경찰지서·초소·통시(뒷간) 등의 시설물을 갖추었고, 심지어 함덕초등학교 선흘리분교까지 마련됐다. 새(억새)로 엮은 함바집은 몸만 겨우 뉠 수 있는 공간이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게 전부였다. 통시의 똥통이 넘쳐 풍기는 악취는 정말이지 곤욕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성벽 주변(성벽 따라 15개가량 통시가 었었음)이 온통 똥물로 질퍽거렸다. 열악한 환경 탓에 이질 등 전염병이 돌았고,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_ 305~306쪽, 7장 제주
본문에서 다룬 민간인 학살 사건(호남·제주)을 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함께 시간의 흐름대로 살펴볼 수 있도록 연표로 정리해 책 말미에 덧붙였다. 또한 각 지역의 학살 사건과 관련한 주요 공간을 독자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장마다 지도를 그려 넣었다. 책 맨 뒤에는 취재에 응해준 피해 유가족 및 학살 생존자들의 명단을 출생연도·거주지와 함께 정리해 넣었다. 한국전쟁기 구술사 연구자들에게 분명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호국보훈’이니 ‘국가유공’이니 하는 이름으로 박제된 정사(正史)의 시대 속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국군에 의해 온 가족이 몰살당했음에도 국가로부터 배상은커녕 변변한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피해 유가족들의 사연을 읽으며, 또는 마을 주민 수백 명이 질식사한 폐광굴 옆에 버젓이 세워진 어느 국립호국원을 바라보며 역사의 지독한 모순에 가슴이 답답할 것이다. 편집 말미 저자는 통화로 아쉬운 소리를 했다. 취재를 하고도 정리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둘러보지 못한 지역도 많다고 했다. 이런 아쉬움 때문일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 작업에 참여 중인 저자는 벌써 다음 지역 취재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그의 ‘발굴’이 기대된다.
[책 속으로 추가]
임방규는 출소 후 서울로 올라와 페인트공이 됐다. 총을 들던 손은 솔을 들었고, 산속을 헤매던 두 발은 산업화의 상징인 콘크리트 건물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붉은빛을 지운 채 남은 인생을 색칠했다. 가끔 철탑에 올라 산업화와 도시화의 고도성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20년간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세상은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 정치, 도시 빈민 문제, 자본주의 논리 아래 횡행하는 부패와 사회 부조리……. 무등(無等)을 꿈꾸던 스무 살 청년의 미래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_ 234~235쪽, 5장 순창
수백의 원혼이 뒤섞인 임실 폐광굴. 그 아래 호국영령을 위한 국립임실호국원이 자리하고 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희생된 그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부름에 이유 없이 희생되기도 했다. 국립임실호국원에는 ‘전쟁 영웅’과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또 다른 죽음’이 함께 공존한다. _ 259~260쪽, 6장 남원·임실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회사) 제주 주정공장은 1943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군수 산업 시설이다. 고구마나 강냉이 등을 주정해 알코올을 제조했고, 이렇게 생산된 알코올은 태평양전쟁 시기 군사용 비행기 연료로 이용됐다. 지금도 제주 농가에선 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빼떼기’(절간고구마)가 널리 생산된다. 4·3 사건 이후 포로들이 늘면서 임시 수용소로 쓰인 공장은 한국전쟁 초기 예비검속자들을 수용하는 시설로도 활용됐다. 그러던 것이 1951년 7월 육군 제5훈련소로 탈바꿈해 신병 양성 기관으로 이용됐다. _ 284쪽, 7장 제주
군인이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격발되지 않은 채 ‘딱딱’ 소리만 났다. 총알이 떨어진 것이었다. 군인은 옆에 있는 청년단(할머니는 이들을 ‘창쟁이’라고 불렀다)에게 다음을 맡겼다. 그리고 가슴팍에 네 번의 창살이 꽂혔다. 할머니는 쓰러졌고, 군인과 청년단도 곧바로 부대원들을 뒤따라갔다. _ 316쪽, 7장 제주
추천평
역사(歷史)의 ‘사(史)’는 역사를 뜻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사람, 즉 기사자(記事者)를 의미했다.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시대상까지 담아내는 자가 사관(史官)이다. 그날의 학살을, 지금의 피해자를 빗대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정찬대 기자는 그런 점에서 분명 ‘기사자’이다.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 좋은 책이 다른 이에게 좋으리란 법도 없다. 또 꼭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정찬대가 말하고자 하는 ‘학살’에 많은 이들이 주목해주길 바란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이며, 아픔이자, 상처이며, 치유이기 때문이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http://coverage.kr/sub.php?code=article&category=17&mode=view&board_num=203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 민간인 학살을 되돌아보다
한국전쟁기, 한반도 전역에서 크고 작은 무수한 전쟁이 이어졌다. 어제 인민군이 지주를 청소하자, 다음 날 국군이 농민을 죽였다. 밤이면 빨치산이 마을에 들이닥쳐 우익 인사를 숙청했고, 낮에는 경찰이 몰려와 빨갱이를 처단했다. 주리고 겁에 질린 사람들은 인민군이 오면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러야 살 수 있었고, 깃발이 바뀌면 그저 살고자 외친 한 마디로 인해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지금은 미소 냉전기의 대리전으로 불리는 한국전쟁기, 대부분 약자에게 이 시간은 그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일 뿐이었다.
한국전쟁은 유례없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깊이 연구되어야 할 비극이다. 하지만 당사국인 한국에서도 명확한 학살 피해자 집계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어림잡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수가 많게는 100만 명 단위에 이르리라는 추정치가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나, 국가가 앞장서 해당 연구를 총체적으로 진행하진 않았다. 민간인 학살 사례의 대부분이 국군과 경찰, 그리고 미군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1950년과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 여전히 냉전의 망령이 한국을 떠도는 주된 이유는 과거를 마주할 용기를 누구도 내지 못했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 사례 발굴은 거시적 통계에 매몰되어도 안 된다. 전국 곳곳에서 죄 없는 숱한 목숨이 이념의 잣대로 인해 사라졌다. 억울한 죽음은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 경북 포항에서, 전남 화순에서, 제주 제주시 오라리에서 순진한 사람들이 흉포한 권력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이 야만의 역사가 남긴 상처가 너무 깊은 탓에, 짐승이 된 가해자는 과거를 미화해 평생을 자기합리화에 바쳤다. 살아남은 피해자는 과거의 상처에 갇혀버렸다. 지금이라도 숱한 억울한 목숨 하나하나를 모두 조명해야 할 이유다. 과거를 성찰할 수 있어야 왜곡된 눈으로 오늘을 조명하는 비극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커버리지> 기자 정찬대 씨가 누구도 조명하지 않던 전국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이야기를 <프레시안>에 연재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기획의 호남·제주편 이야기가 신간 <꽃 같던 청춘, 회문산 능선 따라 흩뿌려지다>(한울 아카데미 펴냄)로 나왔다. 지은이가 60여 년 전 벌어진 전국의 민간인 학살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조명한 이 책은 앞으로 이어질 영남, 강원, 충청, 서울·경기 기획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저자는 충실한 인터뷰와 풍부한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과거를 되짚고, 그날의 비극을 오늘로 소환하는 생생한 이야기를 엮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어떤 정부도 역사의 피해자들을 조명하지 않았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 호국로에 자리한 국립임실호국원 한편에는 군경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 마을 주민 700명의 넋이 잠들어 있다. 1951년 3월 14일, 이 지역을 수복한 군경은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임실의 한 폐광굴에 숨어든 남산리 마을 주민 700여 명은 굴 양편을 틀어막은 군경이 들여보낸 연기를 들이마시며 삶의 벼랑에 내몰렸다. 숨을 참지 못해 바깥으로 뛰쳐나온 이들이 차례대로 기관총에 몸이 찢겨 죽었다. 정부는 여태 몰살당한 이들에 관한 어떤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오늘날 이들이 희생된 바로 옆에는 군경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호국지사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 함평 월야면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장소. 군인들은 묘지 위(사진 하단)에 기관총을 거치한 뒤 주민들을 향해 그대로 난사했다. 주민이 모여 있던 장소(사진 가운데 상단)에 조립식 건물이 들어서고 나무가 심어져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1950년 12월 7일 아침, 전남 함평군 월야면에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이미 전날 인근 정산리와 계림리에서 각각 70여 명, 60여 명의 주민이 몰살된 터였다. 월야면도 같은 운명을 맞을 순간이었다.
군인들이 7개 마을을 에워싸고 사람들을 끌어냈다. 어떤 군인은 "빨치산이 파손한 도로를 복구해야 한다"고 달래 사람들을 끌어냈고, 어떤 군인은 "안 나오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한다"고 위협했다.
당시 11살이던 정진억 씨 가족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군인들은 45살 이상 어른과 10살 미만 아이는 면소재지로 돌려보냈고, 15세 이상~45세 미만 사람을 남겼다. 정 씨는 어린 덕분에 살아남았다. 중대장은 이들을 향해 "명당자리를 잡아주겠다"고 말한 후, 비탈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세 자루의 기관총이 이들을 맞았다. 일제히 총격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죽었다. 한 차례 사격이 끝난 후 중대장이 외쳤다. "산 사람은 하늘이 돌봤으니 살려주겠다. 일어나라." 그 말을 듣고 일어난 50여 명이 2차 총격에 의해 사망했다. 이런 식의 승강이가 총 네 차례 이어졌다. 끝까지 군인을 믿지 않은 양채문 씨(당시 19세)가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200여 명은 이 자리에서 사망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가 치러졌다. 제주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제주는 눈엣가시였다. 제주 지역 선거가 무효화되자, 이승만 정부는 행동을 시작했고 미군정은 이에 눈감았다.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했다. 곧이어 제주 토벌대가 구성됐다. 10월 17일 토벌대는 제주 해안 통행금지를 명령하고, 이를 어길 시 총살에 처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1948년부터 1949년 걸쳐 제주도 전역이 민간인 학살의 장이 됐다.
4.3사건 이후 포로들은 일제가 세운 제주 주정공장에 수용됐다. 서북청년단원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남녀를 불러내 폭행한 후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를 마구 성폭행했다. 일부 포로를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 끌고가 집탄 총살했다. 1949년 2월 경찰서에 수감된 주민 76명이 죽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군법 사형수 249명이 죽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에는 주정공장에 구금된 예비검속자 500여 명이 정뜨르비행장에서 집단 학살됐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남한도, 북한도 아니다. 죄 없는 민간인 학살 피해자다. 인민군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죽고, 불러도 죽는 생지옥에서 숱한 이들이 사망한 기막힌 현실을 우리는 여태 조명하지 않았다. 2005년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적잖은 미규명 피해 사례를 역사적 진실로 규명했지만, '진실규명 결정통지서'를 받은 후 3년 이내에 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을 몰라 신청 기간을 넘긴 수많은 희쟁자 가족이 여전히 국가로부터 어떤 배상도 받지 못했다. 여전히 역사와의 화해가 필요한 이유고, 이 책이 중요한 까닭이다.
전남 영암 구림마을에는 지와목 사건 순절비가 있다. 1950년 10월 7일 밤, 빨치산이 마을을 기습했다. 기독교 신자와 경찰 가족 등을 포함한 우익 인사 28명을 주막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며칠 뒤, 군경 토벌대가 마을을 수복했다. 2차 학살이 일어났다. 1976년 한국반공연맹은 이곳에 지와목 사건 순절비를 세웠다. 순절비는 우익 인사만 추모했다. 2006년이 되어서야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 세워졌다. '가해자와 피해자 너와 나 낡은 구별은 영원히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만 가득하리오'라는 문구가 적혔다. 남은 사람들은 이미 용서를 말하고 있지만, 가해자는 누구도 사과를 건네지 않는다.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비극이다. / 프레시안 이대희 기자
식민지 트라우마/ 저자 유선영|푸른역사 |2017.06.30
저자 유선영은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0년대 청소년기를 보내고, 1970년대 청년기를 보낸 세대로서 경험한 군사독재, 권위주의 공권력, 물질주의, 개발우선주의, 집단주의, 학력주의, 비교 콤플렉스, 국가폭력, 가부장주의, 자기주도성의 상실 등의 문제들에 민감하다. 그런 만큼 인간의 자기 통제력을 방해하거나 훼손하는, 이러한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압력들에 대한 감수성이 연구의 동력이었다. 식민지 시기에 천착하는 것은 이 같은 한국 사회의 집합적 문제들에 대한 불편한 심사의 소산이다. 〈홑눈정체성의 역사〉, 〈편쌈 소멸의 문화사〉, 〈육체의 근대화: 아메리칸 모더니티의 육화〉, 〈근대적 대중의 형성과 문화의 전환〉 등 다수의 연구를 수행했다.
목차
들어가며
1장 민족 모욕과 감정의 역사
세기말과 식민지배기를 규정한 4가지 힘/ 역사를 추동하는 감정구조/ 민족 모욕과 수치의 장기 역사/ 민족주의에 침습한 모욕감정과‘ 근대 트라우마’/ 모욕받은 민족의 탈식민화
2장‘ 업수이 여김’과 분노감정의 계몽
이민족의 모욕에 직면한 세기말/ 문명인의‘ 업수이 여김’이 촉발한 자기부정/ 분노공동체로서 민족이라는 감각
3장 문명의 트라우마, 민족의 스티그마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문명화 노선/ 물질문명의 경이를 실감하며 입문한 근대/ 자연정복의 의지를 결여한 민족이라는 스티그마/ 식민지민의 비교 콤플렉스/ 타자의 시선과 신체 이미지에 갇힌 식민지민
4장 모욕을 합리화하는 식민지 사회
일본 오리엔탈리즘의 간지奸智/ 경찰의 전지적全知的 감시망에 포획된 식민지 사회/ 문명화에 동원된 합법적 폭력/ 신체에 새긴 모욕과 처벌/ 식민지 군중의 저‘항콜, 레라 소요’
5장 식민지민이라는 저주
〈경찰범처벌령〉이 규정한 식민지민의 죄와 벌/ 문명화에서 소외된 식민지민의 흔들리는 자의식/‘ 조선인스러움’을 소환하는 호명,“ 요보”/ 저주의 주문‘ 배일排日 조선인’/ 불의와 모욕에 분노하는 식민지민의 거리 소요/ 풍속과 도덕의 규율 공간, 극장/ 식민지라는‘ 비참Les Miserables’의 공동체
6장 식민지민의 인정認定투쟁과 아메리카니즘
3·1만세운동 직후의 불온 정서/ 독립 역량을 가진 민족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 미국에 보내는 구조 요청 신호, 제2차 독립운동/ 식민지민의 오판‘, 상상의 아메리카’
7장 동정과 연예의 민족주의
상호부조의 민족주의/ 식민지민의 불온한 동정열同情熱/ 연예를 매개로 한 동정의 민족화nationalization/ 온 겨레가 거든‘ 해삼위 학생음악단’ 전국순회공연/ 식민지 동정의 감정역학
8장 친일과 매판 협력의 존재양식
‘쫓겨 간 조선인’ 이등신민이 되다/ 오갈 데 없는 재만조선인의 생존법/ 소수민족이자 일본국적자, 민족 갈등의 뇌관/ 친일의 얼굴, 얼궤이즈二鬼子/‘ 善良な 鮮人’ 혹은‘ 나쁜 선인鮮人’
9장 모욕과 폭력의 악순환
식민지민의 허위의식, 의사제국주의‘/ 일본의 개’ 간주, 구축운동 벌이기도/ 모욕 받은 자들의 폭력, 중국인 집단학살(과장, 왜곡된 오보가 불질러/ 평양선 갓난아기까지 살해/ 서둘러 사죄, 구제 금품 모금도/ 1,300여 명 검거 600여 명 기소)/ 식민지민의 민족주의, 히스테리 그리고 공격성
10장 폭력과 호환된 소비 그리고 나르시시즘
비교의 욕망에 사로잡힌 식민지민/ 근대성이라는 근원적 공포와 히스테리/ 혼란스러운‘ 근대 레시피’/ 타인의 시선에 과민한 식민지민의 인상학
에필로그- 모욕받은 민족의 감정구조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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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민족감정’으로 꿰뚫어 본- 식민사회 조선인의 민낯
“피식민지 민족은 힘의 격차가 불러온 폭력적 사태들에 직면해 열등감, 히스테리와 공격성, 수치와 죄의식, 나르시시즘의 보상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배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 감정, 정신의 상흔들이 민족의 심연에 그리고 역사의 심연에 켜켜이 쌓여 있다. 식민지 시기의 역사는 표면의 현실 역사와 심연의 역사를 동시에 바라볼 때 비록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전체의 윤곽선을 그려볼 수 있다.”
‘일제 36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한다. 당연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 이들은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영웅과 위인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보통이기도 하다. 시대의 흐름을 끌고,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이들의 몫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도와 조직 같은 유형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예사다. 그러나 이 같은 주역과 서술방식·대상에만 주목해서는 역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미시사며 문화사 등에 눈길을 돌리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그런 점에서 타당하다.
우리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일제 식민시기의 역사를 다루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의 폭력과 억압 그리고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투쟁과 부역에만 주목해서는 식민지의 역사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사회적 불의와 민족차별 그리고 독립과 해방을 염원하는 민족주의 저항과 투쟁은 식민지 역사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모욕이라는 집단경험을 축으로 재구성한 식민지배의 상흔
그 시대를 살아간 조선민족은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각 분야에 여전히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혹 시쳇말로 “엽전은 안 돼” 하는 자조의 말 역시 식민지배의 잔재 아닐까.
지은이는 근대 문명의 충격과 제국주의의 힘에 휩쓸린 식민지민의 ‘감정’에 주목했다. 그는 식민지배의 경험이란 본질적으로 트라우마, 외상外傷의 경험으로 보았다. 이민족에 의한 폭력과 모욕이 반복되는 과정에 자신의 전통과 문화, 정체성이 온통 부정당하는 정신적 외상을 집단적으로 겪었다고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 식민화를 문명화라 정당화하는 사태를 맞아 집단 불안과, 자신을 보호가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현되면서, 힘에 대한 열망, 비교에 집착하는 열등감, 히스테리와 공격성, 수치와 죄의식, 나르시시즘의 보상 욕망 등을, 다양한 자료를 섭렵해 꼼꼼히 그려냈다.
이 과정에서 서구인의 외모에 대한 열패감, 중국인에게 ‘이등신민’으로서 우월감을 과시하는 얼궤이즈二鬼子, ‘평양사건’에서 터져 나온 히스테리컬한 공격성, 속물주의에 가까운 서양문물 숭배 등 차마 마주 대하기 꺼려지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생생한 민낯이 드러나기도 한다.
책에 담긴 식민지 풍경-다시 보는 민족주의의 실체
식민지민의 트라우마는 근대성 그리고 식민지배의 두 가지 집단경험이 뒤섞인다. 그러나 외상은 ‘역사’가 되지 못했다. 외상은 정신분석의 영역이지 증거, 기록, 실증의 역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식민지민의 트라우마를 역사화하기 위해 식민지민에게 가해진 외상들을 재구성해 식민지민의 민족주의는 사실 민족적 감정의 다른 이름이며 식민지민의 진정한 자아는 그의 말도, 행동도, 스타일도 아닌 감정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과 프란츠 파농의 비판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민족모욕과 국치의 경험이 민족감정을 도발하고 민족감정은 다시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목표로 흘러갔음을 보여준다.
‘업수이 여김’을 벗어나기 위한, 힘을 향한 욕망
식민지배는 2등, 3등의 하위민족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민족적 위치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통제력 부재와 결여, 그로 인한 모욕과 수치, 불안이 가중될수록 힘에 대한 욕망도 깊이 뿌리를 내린다. 이는 서재필이 1898년 미국으로 돌아가며 한 고별연설에서 “나라를 도와 부강케 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기를 작정하고 앞으로 나아가 세계 만국에 동등 대접을 받고 다시는 외국 사람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지 말지어다”한 데서 엿볼 수 있다.
폭력을 동반한 문명화 세례
공진회가 전시하고 있는 것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다. 1920년대 문화적 민족주의, 실력양성주의, 인격주의, 개조주의는 식민지민의 저주받은 죄의식과 공격성의 산물이다. 근대는 적들의 저주받은 문명이므로 공격해야 하지만 동시에 피할 길 없는 모욕과 수치에서 벗어나게 해 줄 근대였다.
그런가 하면 콜레라 예방을 위한 위생계몽도 민족차별의 경험을 더해 우발적인 콜레라 소요가 벌어지기도 했다. 의사도, 병원도 아닌 (위생)경찰이 주도하는 방역에서 빚어지는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들, 비위생이 공개리에 까발려지는 모욕과 수치, 방역관계자들의 천시와 협박, 경찰과 순사의 칼과 몽둥이에 의한 매질과 피범벅이 되어 유치장에 갇히고 격리된 채로의 죽음이 위생계몽의 실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정투쟁과 아메리카 짝사랑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모든 조선 사람들은 미국의원단을 천사단과 같이 알고 고대하는 중.” 1920년 중국을 거쳐 조선을 방문한 미국 의원단을 영접하기 위해 특파된 《매일신보》 기자 백대진이 미국의원단에게 전한 말이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기대어 독립을 호소하려던 조선민중의 열망은 ‘자모慈母를 기다리는 유아幼兒의 마음과 애인을 고대하는 정인情人의 가슴’에 비견되었다. 이를 두고 일제 식민 당국은 이를 뇌미賴美사상이라 일축하기도 했다.
왜곡된 민족감정, 약자를 겨냥한 공격성
서구 열강의 근대성과 문명 앞에서 스스로의 열등성을 충격적으로 자각한 이래 식민지민의 모욕과 수치심은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분노, 공격성, 그리고 자기파괴적인 무력감을 야기했다. 물질적 부를 향한,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향한, 학력과 명예를 향한 열망 역시 이러한 공격성의 표출이다. 100여 명의 애꿎은 중국인이 살해된 ‘평양사건’은 자기파괴적 공격성에 포획된 식민지민의 또 다른 집단불안 징후를 보여준다.
자기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나르시시즘의 표출
식민체제는 민족차별과 서열구조에 의존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식민지민은 자기보호를 위해 방어기제로서 나르시시즘에 의존한다. 나르시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근대성이다. 근대교육과 고등학력, 근대적 지식, 근대적 생활방식과 취향, 영어 등 외국어의 구사, 그리고 서구와 일본에서 수입된 상품의 소비이다. 이화여전을 중퇴하고 《개벽》 기자 등을 역임하며 1930년대 다수의 소설을 썼던 장덕조(1915~?)는 〈내 이상理想하는 스윗트홈〉이라는 글에서 “남편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가정, 햄 샌드위치를 만들며 피크닉 준비로 소란한 가정, 한강 상류에서 피크닉, 연애감정으로 한 결혼, 월급쟁이 남편, 가난하지만 (미국여배우들과 같은) 아름다운 웃음을 짓는 (자신의) 얼굴, 계란 하나와 버터 칠한 빵 한 조각이 진수성찬인 식탁, 명랑과 쾌활함’이 있는 가정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식민지 지식인이 꿈꾸던 근대였다
책속으로
“조선 사람끼리 싸우고 시기하며 강한 자가 약자를 압제하고 업수이 여기면서 외국 사람을 대하면 ‘병신들 같이 행신行身하는’ 까닭에 외국 사람이 조선을 업수이 여긴다.”-문명인의 ‘업수이 여김’이 촉발한 자기부정(40쪽)
“제일 못나고 제일 가난하고 산천도 남만 못하고 시가市街도 남만 못하고, 가옥도 의복도, 음식도 남만 못하고 과학도, 발명도, 철학도 예술도 없고 일을 할 줄도 모르거니와 할 일도 없고 아마 이러케 불상한 백성은 다시 업슬 것”-타자의 시선과 신체 이미지에 갇힌 식민지민(75쪽)
청결 여부 판정은 순전히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판단에 맡겨졌으므로 무조건 복종하고 순응하는 것은 물론 없는 살림에 음식 접대, 뒷돈도 챙겨야 했다. 머리에 먼지가 앉았다고 몽둥이로 먼지 털듯이 실컷 두들기는 것을 경찰은 ‘청결한다’고 했고 이런 식으로 70대 노인도 ‘청결하고’ 부녀자도 두들겨 팼다.-신체에 새긴 모욕과 처벌(107쪽)
요보 호명은 하등민이라는 낙인이었다. …… 요보는 일제가 지배하는 제국 안에서 정상인이 아니라는 낙인stigma이고 민족적 범주였다. 요보라는 호명은 개개인의 개성, 신분, 인격의 차이는 삭제되고 다만 ‘요보 조선인’으로, 즉 조선인이라는 민족범주로만 존재하게 하는 장치였다.-‘조선인스러움’을 소환하는 호명, “요보”(140쪽)
“인도주의와 정의를 완전히 결여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를 동정하는 미국 의회의 일원이고 위대한 미국 인민의 대표들에게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두 눈에 피눈물을 머금고 감사를 표한다.”-식민지민의 오판, ‘상상의 아메리카’(188쪽)
1920년대 민족주의는 동정-감정에 의해 추동되었고, 연예에 의해 매개되고 실감되었다. …… 무대와 관객은 구분되지 않았고 그들은 나라를 잃은 망국민이고 식민지민이었다. 이 일체감이야말로 식민지민이 향유한 가장 강력한 카타르시스이고 쾌락이었을 것이다.-식민지민의 불온한 동정열(221쪽)
‘센료나 센징’은 중국과 일본,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이간질, 밀고, 정탐, 앞잡이, 친일매판 협력행위로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또 일본의 비호하에 유흥업, 마약류 취급, 인신매매와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자가 많았다.-‘善良な 鮮人’ 혹은 ‘나쁜 선인鮮人’(239쪽)
패거리를 이룬 장정들이 핏물 떨어지는 곤봉을 든 채 앞에서 선도하고 그 뒤를 200~300명의 무리가 따르면서 피에 주린 이리떼처럼 중국인을 찾아 다녔다.-평양선 갓난아기까지 살해(266쪽)
인텔리 여성 89명을 대상으로 ‘미래의 남성상’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고전으로는 괴테의 파우스트, 셰익스피어의 햄릿, 톨스토이의 부활을, 현대작품으로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등 작품의 개요와 주인공 이름쯤은 알아야 하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감상할 귀, 야구 .정구. 럭비 경기규칙 정도는 알고 있는 남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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