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노순옥 옮김·모멘토) ⓒ 모멘토
저자 MELANIE JOY
사회심리학자. 미국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대학 교수로 심리학과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 및 동물, 환경과 맺는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학술적 연구와 그 관계를 개선하려는 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식육 생산과 소비에 내재한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데 앞장서 왔다. 심리학과 동물의 권리, 사회정의 등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다른 저서로 동물보호운동가들의 핸드북인 『동물을 위한 전략적 행동』이 있다.
역자 노순옥
서울대 미학과 졸업. 전「중앙일보」와「뉴스위크」지 기자. 번역서로 『맛있는 햄버거의 무서운 이야기』『두 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쌍둥이 잘 기르기』『결혼하지 않는 즐거움』『베스트셀러』등이 있다.
목차
제1장 사랑할까 먹을까
제2장 육식주의: “원래 그런 거야”
제3장 ‘진짜’ 현실은 어떤가
제4장 부수적 피해: 육식주의의 또 다른 희생자들
제5장 육류의 신화: 육식주의를 정당화하기
제6장 육식주의의 거울 속으로: 내면화된 육식주의
제7장 바로 보고 증언하기: 육식주의에서 공감으로 ‘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 왜 안 되는지’가 아니라
‘고기를 왜 먹는지’를 이야기한다.
쇠고기, 돼지고기를 먹을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소와 돼지를 떠올리지 않는다. 육식을 하는 사람들의 인식 과정에는 사라진 연결고리가 있다. 저자는 그 단절의 미스터리에서 일련의 질문을 이끌어 낸다. 수만 종의 동물 가운데 혐오감 없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어째서 극소수일까? 그들을 먹는 일에 우리는 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육식이 태곳적부터 행해온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영아살해와 살인, 강간, 식인 풍습 역시 자연스러운 걸까? 인간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식탁에 오르는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은 왜 우리 눈에 거의 띄지 않는가? 이런 의문들을 풀어내는 키워드로 저자는 ‘육식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시공을 넘나드는 사례와 연구 결과들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개와 돼지에 대하여
실험을 하나 해보자. 개를 상상할 때 떠오르는 모든 단어를 그대로 적어 보라. 다음엔 돼지를 상상하며 똑같이 하라. 그러고는 두 목록을 비교해 보자. 개를 생각할 때 ‘귀엽다’, ‘충성스럽다’, ‘다정하다’, ‘영리하다’, ‘재미있다’, ‘애정 깊다’, ‘나를 보호해 준다’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돼지를 상상했을 때는 ‘진창’ 또는 ‘땀’, ‘더럽다’, ‘멍청하다’, ‘게으르다’, ‘뚱뚱하다’, 그리고 ‘못생겼다’ 같은 말을 떠올리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다수에 속한다.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매 학기에 하루를 이 실험에 할애한다. 몇 천 명의 학생이 거쳐 갔지만 이때 오가는 대화는 거의 같다. 대부분 학생이 개는 좋아하거나 사랑하며 돼지는 역겹다고 느낀다. 자신과의 관계를 묘사해 보라고 하면 개는 ‘당연히’ 친구이자 가족의 일원으로, 돼지는 식품으로 요약된다. 그때 저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에 따라 설명을 덧붙인다.
돼지는 왜 멍청한 거지? “그냥 원래 그런 걸요.” 그런데 실제론 돼지가 개보다도 더 영리하다고 해. 왜 돼지보고 더럽다 하지? “진창에서 뒹구니까요.” 왜 진창에서 뒹굴지? “진흙 같은 더러운 걸 좋아하니까요. 돼지는 더러워요.” 실은 더울 때 몸을 식히느라 진창에서 뒹구는 거야. 땀샘이 없기 때문이지.
돼지도 감정이 있다고 생각해? “물론이죠.” 돼지도 개와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그런 것 같은데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몰라서 그렇지, 돼지가 얼마나 예민한가 하면 가둬놓았을 때 자해 같은 신경증적인 행동을 하기도 해.
우리는 왜 돼지는 먹고 개는 먹지 않는 걸까? “베이컨은 맛있으니까요.” “개에게는 각기 개성이 있으니까요. 개성 있는 존재를 먹을 수는 없잖아요. 이름도 있고,” 돼지에게도 그런 개성이 있다고 생각해? 그들도 개처럼 개체라 할 수 있나? “네, 돼지도 알고 보면 그럴 것 같은데요.”
돼지와도 개처럼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이 땀투성이도 아니고 게으르지도 탐욕스럽지도 않은 영리하고 예민한 개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을 먹는 데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돼지를 먹는 걸 이상하게 느꼈을 거예요. 아마 죄책감 같은 걸 느꼈겠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돼지는 먹고 개는 먹지 않을까? “돼지는 먹기 위해 키우니까요.” 왜 먹기 위해 돼지를 키우는 거지? “몰라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어요.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원래 그런 게 아니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종은 도축장으로 보내고 다른 종에게는 사랑과 친절을 베푼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이처럼 일관성이 없고, 그 사실을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다면, 그건 우리가 부조리한 논리에 휘둘려 왔기 때문일 테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이 사고의 기능을 유보하고 사는 것은 물론, 자기들이 그런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알고 보면 답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육식주의 때문이다.
채식주의와 육식주의
우리는 고기 먹는 것과 채식주의를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본다. 채식주의에 대해서는, 동물과 세상에 대한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육식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행위,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아무런 자의식 없이, 왜 그러는지 생각지 않으면서 고기를 먹는다. 그 행위의 근저에 놓인 보이지 않는 신념체계에 저자는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다. 바로 ‘육식주의(carnism)’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육식주의자, 즉 고기를 먹는 사람은 육식동물과 다르다. 육식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고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육식주의자는 또 잡식동물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육식동물’과 마찬가지로 ‘잡식동물’이라는 용어는 개체의 생물학적 특징만을 기술하지 철학적 선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육식주의자는 필요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고기를 먹는다. 그런데도 선택이 아닌 듯 보이는 것은 육식주의의 비가시성 때문이다. 육식주의는 왜 눈에 드러나지 않는가? 왜 지금까지 그것에 이름이 붙지 않았을까? 거기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육식주의가 특정한 유형의 신념체계, 바로 ‘이데올로기’이며, 그것도 정밀한 검토를 쉽사리 허용치 않는 ‘지배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먹을 수 있다, 먹을 수 없다
육류와 관련해서 우리가 동물에게 적용하는 두 개의 주된 범주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이분법 안에는 또 다른 범주 쌍들이 있다. 예컨대 우리는 야생동물보다는 가축을 먹고, 육식동물이나 잡식동물보다는 초식동물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돌고래처럼)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동물은 먹지 않지만, (소나 닭처럼) 그다지 영리하지 않아 보이는 동물은 일상적으로 먹는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들이 귀엽다고 여기는 (토끼 같은) 동물은 먹지 않고 (칠면조처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동물을 먹는다. 이 같은 구분이 실제로 정확한가는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정확하다는 ‘믿음’이다. 이분법의 목적은 단지 고기를 먹는 데 대한 불편감에서 놓여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를 안고 쓰다듬으며 스테이크를 먹으면서도 그 행위가 함축하는 바를 전혀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육식은 정당화된다.
정당화의 온갖 기제들
육식을 정당화하는 방대한 신화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정당화의 3N’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육류를 먹는 일은 ‘정상이며(normal), 자연스럽고(natural), 필요하다(necessary)’는 것이다.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으며 오히려 육식이 우리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도 신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3N이 동물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행동에 내재하는 모순을 감추고 우리가 어쩌다 그걸 알아채게 되면 그럴싸하게 해명하고 넘어가는 정신적, 정서적 눈가리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곧 고기로 바뀔 돼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올 경우, 우리는 그 돼지를 쾌락과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생명체, 뚜렷한 개성과 선호를 지닌 존재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떠올리는 것은 그 ‘돼지다움(더러움, 게으름 등)’과 ‘먹을 수 있다는 점’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동물을 보는 데는 ‘인식의 트리오’라는 세 가지 방어기제(대상화, 몰개성화, 이분화)가 개입한다.
공감의 회복을 위하여
육식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동물과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이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역사를 넘나드는 각종 사례와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별도 박스로 짜 넣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입맛의 후천성, 공감 능력의 선천성,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정신적 마비, 전장에서 총을 쏘지 않는 병사들, 축산업계의 비밀주의, 권력과의 결탁, 언어 조작, 동물들의 고통 감각 능력, 한국의 개고기 시장, 권위에 대한 복종 경향, 단백질 신화, 숫자와 감각마비, 불의를 혐오하는 인간 본능, 톨스토이 신드롬 등, 곁들이는 이야기들은 말 그대로 종횡무진이다. 그 모든 것이 저자의 논리를 살찌움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유도한다. 그래서 이 책은 공감 능력의 회복을 위한 안내서라 할 수도 있다.
책속 밑줄
고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해당 동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만 달라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쇠고기와 개고기를 그토록 다르게 보는 이유의 하나는 소와 개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판이하다는 데 있다. 우리가 가장 자주, 어쩌면 유일하게, 소라는 존재와 대면하는 때는 쇠고기를 먹거나 쇠가죽으로 만든 옷이나 신을 걸칠 때일 것이다. 이에 비해 상당수 미국인들에게 개와의 관계는 여러 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우선 개를 이름으로 부른다. 집을 나설 때 다녀오마 인사하고, 돌아오면 쓰다듬어준다. (중략) 우리가 개를 사랑하면서 소를 먹는 것은 개와 소가 근본적으로 달라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14쪽)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소를 비롯해 이른바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을 먹는 일에 우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먹을 수 있는 종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정에는 설명되지 않은 단절, 사라진 연결고리가 있다. 고기와 그것을 제공한 동물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얘기다. 수만 종의 동물 가운데 우리가 혐오감 없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째서 극소수뿐인지 궁금해한 적이 없는가?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의 선별에서 놀라운 점은 혐오감의 존재가 아니라 그 부재다. 먹을 수 있다고 간주하는 극소수의 동물을 먹는 일에 우리는 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20쪽)
우리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종은 도축장으로 보내고 다른 종에게는 사랑과 친절을 베푼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 이처럼 일관성이 없고, 그 일관성 없음을 한번도 반성하지 않았다면, 그건 우리가 부조리한 논리에 휘둘려왔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테다. 우리가 돼지를 먹고 개는 사랑하면서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부조리한 일이다. 치약 하나를 고를 때도 진열대 앞에서 오래 망설이는 사람이 많은데, 어떤 종의 동물을 왜 먹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니.(33쪽)
우리는 고기 먹는 일과 채식주의를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본다. 채식주의에 대해서는, 동물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일련의 가정들을 기초로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육식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행위,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으로 본다. (중략) 육식주의자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고기를 먹는데, 선택은 항상 신념에서 비롯된다. 선택임에도 선택이 아닌 듯이 보이는 것은 육식주의의 비가시성 때문이다. 그런데 왜 육식주의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건가? 우리는 왜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36,37쪽)
추천평
구제역이 돌 때마다 수백만 마리의 죄 없는 소 돼지가 ‘살처분’된다. 아아, 그런 천벌 받을 짓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매몰할 가축을 안락사시켜야 한다고? 사육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들 모두 결국 도살될 운명이라는 데 생각이 이르면, 모두가 ‘눈 가리고 아웅’ 아닌가? 이 책은 애써 반쯤 감고 있던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렇다. “바보야, 문제는 살처분이, 구제역이 아니야. 문제는 바로 육식이야!” 환경과 건강에 엄청난 부담을 주면서, 끔찍한 폭력 위에 구축된 ‘육식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상이 벗겨진다.
지영선(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개를 쓰다듬으면서 삼겹살을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저자는 철저하게 해부한다. 인간이 평등하듯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전제 아래 우리가 동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제기한다. 동물권에 대한 인식을 키워 주는 획기적인 책이다.
이원복(한국동물보호연합 대표)
동물을 먹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뛰어난 책이다. 읽는 사람이 누구든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우는 동시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될 터이다. 깊이 있고 지극히 만족스러운 책이어서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게 틀림없다.
제프리 무새프 메이슨(『달을 보고 노래한 돼지』 등의 베스트셀러를 쓴 정신분석학자)
“현학적인 이론이나 용어를 들먹이지 않아서 아주 잘 읽힌다. 그렇다고 분석이 비과학적이거나 독단적인 것도 아니다. 저자의 논지는 탄탄한 심리학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계층과 분야, 연령, 교육수준과 무관하게 누구나 지대한 흥미를 느낄 저서다. 채식주의 주창자, 심리학 교수와 학생, 다른 분야의 사회과학자들은 물론 식품 관련 당국자들도 배울 바가 많을 것이다.”
리타 아그라왈(『응용사회심리학: 전지구적 시각』의 공저자)
“눈을 활짝 열어주는 책으로, 우리가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진정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개나 고양이, 햄스터 또는 새를 귀여워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많은 생각거리를 얻을 것이다.”
존 로빈스(『음식혁명』의 저자, ‘지구구조대’ 설립자)
개는 좋아하면서 돼지는 먹는 이유 8.7 오마이뉴스
베를린 동물원은 한 해 26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원이다. 2006년 12월 5일에 태어나 2011년 3월 19일 세상을 떠난 북극곰 '크누트'는 전 세계에서 최다 동물 종을 보유한 이곳에서 가장 주목받는 동물이었다.
크누트는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 버림 받았다. 동물원 동물들은 야생과 거리가 먼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갓 태어난 새끼를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사육사 토마스는 동물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온갖 정성으로 크누트를 살려냈고, 이 아기 곰은 곧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다.
크누트가 동물원에서 첫 선을 보이던 날, 베를린 동물원에는 무려 3만 여명의 관람객과 400여 명의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같은 날 개최된 유럽연합 기념행사가 가려질 정도로 크누트의 인기는 대단했다. 크누트를 위한 팟캐스트와 웹캠이 운영되었으며, 크누트 인형, 배낭, 기념 접시, 쿠키, 사탕 등 각종 크누트 관련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 베를린에 체류 중이던 미국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이러한 열풍을 지켜보며 '종간 장벽'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내렸다. 사람들은 동물원에 가서 크누트를 만나고, 배가 고파지면 그 옆에 있는 매점에서 '크누트 소시지'를 사먹는다. 소시지가 된 돼지는 크누트 못지않게 영리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만한 특징을 지녔지만 한낱 식재료로 취급된다. 채식주의자인 포어는 자신의 책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스타' 대접을 받는 크누트와 '먹을 것'으로 간주되는 돼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종간 장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물, 먹을까... 아니면 사랑할까?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이다. 공감의 대상은 같은 인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축장에서 피 흘리는 돼지를 상상하면서 삼겹살을 맛있게 구워 먹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TV에서 소·돼지·닭이 도살되는 장면을 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람은 잔인한 장면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세상의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개를 먹는 문화를 혐오하는 서구인들도 소·돼지·닭을 비롯한 이른바 '식용' 동물을 먹을 때는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개를 식용으로 간주하는 입장과 그렇지 않은 입장이 모두 존재한다.
일상적으로 소는 '먹는 동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자식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2012년 6월에 방송된 SBS스페셜 2부작 다큐멘터리 <동물, 행복의 조건 1부 '고기가 아프면 사람도 아프다'>에는 죽어가는 송아지를 살려내어 반려동물처럼 기르는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다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송아지는 할아버지의 농장에서 가장 특별한 동물이다. 할아버지는 다행이만은 고기용으로 팔지 않겠다고 말한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사회심리학과의 멜라니 조이 교수는 사람들이 동물을 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지적하면서, 이런 모순의 원인으로 '인식의 단절'을 꼽았다. 사람들은 반려동물처럼 '무엇'이 아닌 '누구'로 인식하는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먹는 동물의 고기를 마주할 때는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접시 위의 고기와 살아있는 동물을 연결 짓지 않는다. 내가 먹는 고기를 위해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이상 인식을 확장시키지 않는 것이다.
'육식주의'라는 신념체계
채식주의는 육식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일반적으로 채식주의는 동물을 죽이지 않겠다는 신념이나 가치관에 따른 개인의 '선택'으로 여겨진다.
이에 반해 육식은 신념이나 가치관과 무관한,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식량의 양적·질적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산업 국가에서 육식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다. 동물을 먹지 않고도 건강과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 즉, 오늘날 대다수의 국가에서 육식은 채식주의와 마찬가지로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육식이 선택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필수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멜라니 조이 교수는 육식이 필수라고 믿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신념체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저서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에서 이 보이지 않는 신념체계에 '육식주의(carnism)'라는 이름을 붙였다.
▲ 멜라니 조이는 책 서두에서 가상의 현실을 제안한다. 당신은 저녁식사 파티에 초대받았다. 집주인이 내온 고기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당신은 무엇으로 만들었냐고 묻는다. 으쓱해진 주인이 "골든리트리버(개의 한 종류) 고기를 갖은 양념에 재워서 만들었다"고 대답한다. 그 말을 들은 당신은 요리를 계속 먹을 수 있을까? 개고기에 거부감보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개는 먹는 동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영상 트레일러의 한 장면. 출처: www.carnism.org. ⓒ Carnism.org
육식주의의 신념체계 덕분에 사람들은 평소 고기를 먹을 때 살아있는 동물을 떠올리지 않는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무수한 가축들이 폐기처분되는 기형적인 현실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육식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신념체계 때문이다. 육식이 동물과 환경에 미치는 폐해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육식을 선뜻 관두기가 쉽지 않은 것도 인간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육식주의 시스템 때문이다.
조이 교수가 육식주의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것은 동물을 먹는 사람을 전부 '육식주의자'로 매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분이나 피부색, 성별에 따른 차별이 그러했듯이, 관습이나 전통으로 옹호되는 신념체계를 문제 삼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이름도 없이 존재하는 신념에 도전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조이 교수가 동물을 먹는 행위 근저에 있는 신념체계에 굳이 '육식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겉으로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육식주의는 그것에 관계된 자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희생 시킨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보다 빨리, 보다 많은 고기를 얻기 위해 고안된 현대식 농장과 도살장은 동물들의 지옥이 되었다. 도축장에서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육체적 위험을 감수하고, 동물을 죽임으로써 정서적 대가를 치르는 노동자들도 육식주의의 희생양이다. 소비자 역시 과도한 육류 섭취로 건강을 해치고, 자신이 먹는 고기가 원래 생명이었음을 망각하는 인식의 단절을 겪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축산업이 방출하는 오염물질로 황폐해진 지구환경 역시 육식주의의 희생양이다.
육식주의는 동물이라는 '약자'를 맘대로 지배해도 좋다는 억압의 이데올로기다. 또한 '힘이 곧 정의'라는 믿음을 추종한다는 점에서 약자의 고통을 담보로 하는 여느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들과 다르지 않다.
조이 교수는 우리가 육식주의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조리한 이데올로기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를 알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언젠가 또 다른 부조리를 용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동물을 먹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윤리 차원을 넘어선 사회 정의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 책은 인간이 누구나 평등한 것처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개는 쓰다듬고 돼지에게는 고통을 주는' 의식구조에 도전함으로써, 동물 간에 차등을 두는 우리의 모순을 돌아보는 한편, 약자에 대한 공감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상향평준화와 하향평준화... 우리가 나아갈 길은?
▲ <인도주의행동연합> 회원들이 지난 7월 26일 서울 홍대거리에서 개식용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인도주의행동연합> 캠페인의 목표 중 하나는 '소·돼지·닭을 먹고 있으니 개도 먹어야 한다'는 하향적 평등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조세형
서구인들이 조이 교수의 의견에 따른다면, 그들은 지금껏 개·고양이에게 베풀어온 인도주의를 소·돼지·닭에게까지 확장 시켜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개는 보신에 좋고(보신탕), 고양이는 관절에 좋다(나비탕)는 믿음 때문에 두 동물이 모두 식용으로 거래된다. 그래서 여러 단체들이 개·고양이 식용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인다.
이에 대해 '소·돼지·닭도 먹으면서 개·고양이만 먹지 말라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이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분명 틀린 주장이 아니다. 이미 먹고 있는 동물 가운데 특정 동물만 먹지 말자는 주장은 평등의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관건은 평등의 기준으로 상향평준화와 하향평준화 중 무엇을 삼을 것인가이다. 동물을 인간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입장에서는 개·고양이만 식용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다. 이에 반해 동물을 먹을 때 고통을 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동물의 생명권을 존중하는 입장에서는 식용으로 희생되는 동물의 가짓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온당하다.
따라서 어떤 동물의 식용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육식 전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육식 전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개·고양이 식용 반대만을 외치는 것은 또 다른 차별로 여겨지게 된다.
우리 사회는 상향평준화와 하향평준화 중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나는 약자를 해방시켜온 인간의 이성에 기대를 건다. 인류는 약자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이미 존재하는 고통을 근거로 그것을 합리화하기보다는, 고통은 누구의 것이든 옳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점진적으로 진보해왔다.
물론 유독 자연과 동물만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입장이 존재한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걸겠다. 꽃 위에 앉아있는 섬세한 나비처럼, 작고 미약한 생명에도 경외심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의 따뜻한 심성에. 그리고 나 자신부터 변화를 위해 노력하겠다.
Yalnizlik Senfonisi
출처: 광주 지인의 다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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