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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지역과 마을

오취리(고흥군) 상오 별나로마을에서의 1박2일

by 이성근 2017. 6. 26.


초량 이바구 캠프를 운영중인 다온산 식구들과 전남 고흥을 다녀왔다.  1박2일 일정이지만 오고 가는데 걸린 시간과 기타 일정을 빼면 반나절 정도를 고흥에서 보내고 왔다. 동참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초령 민박촌과 BGT의 사업적 네트워크와 인간적 유대가 결부되어 나타난 결과다. 

암튼 고흥으로의 여행은 참 오래되었다.  하마 20년 쯤 되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월계수를 들고 선 뒷태가 아름다운 여인상을 한동안 보았다.  저 여인은 이곳이 만들어 지면서 지금껏 저 자세로 서 있었다.  전면부로 가서 살펴보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조형물이다.  등장하는 인물이 딱 두명 있다.  김재규와 박정희다.  먼저 준공식이 있던 그해 1974년 갑인년(甲寅年)에 일어났던 일들을 추려본다. 


산업기지개발공사가 발족하고 삼성중공업이 설립되고 경부선 새마을이 운행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박정희가 긴급조치 1.2호가 선포되고 비상군법회의가 설치되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백기완이 구속되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면서 시위학교의 폐기처분과 민청학련활동을 엄단하는 조치가 이루어 졌다. 그리고 2차 인혁당 사건이 발생했고 관련자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다. 8월에는 육영수 저격사건이 있었고, 신민당 당수로 김영삼 의원이 선출되었다. 10월에는 박정희가 유신체제에 대한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기자협회가 자유언론수호를 선언하는 한편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결성되기도 했다. 12월 문세광의 사형집행이 있었고 외무부는 유신독재와 인권유린에 저항하며 구속자 석방을 주장하던 미국인 오글(Oagle) 목사에게 유신불비난각서(維新不非難覺書) 쓰지 않으면 출국령(出國令) 내린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물러나고 포드가 38대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했던 해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고 일본에서는 미키 다케오가 총리로 선출됐다.


기념탑 주변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치사도 남아 있다. "우리 모드 고속도로를 완성한 그 웅지와 정열을 굳게 견지하고 10월 유신의 기치 아래 총화단결하여 번영의 80년대를 향해 줄기차게 매진해 나갑시다. 그리하여 민족중흥의 위대한 조국을 우리 세대의 힘으로 완성합시다" 라고 했다.  과연 유신(維新)의 기치란 무엇이었든가

1972년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집권 체제로 들기 시작한 박정희정권은 사회 각 분야의 쏟아져 나오는 불만과 저항을 탄압하면서 영구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1972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저임금 저곡가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으로 일관했다. 1973년에 준공된 포항제철과 1978년에 준공된 고리원자력발전소는 이 시기 중화학공업의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의 이면에는 많은 부작용이 따랐다. 반민주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에 더하여 미국과 일본에 대한 의존성의 심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오는 산업불균형,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의 만연, 지역발전의 편차, 농촌의 피폐와 도시빈민층의 형성 등 각종 사회구조적 문제의 심화는 재야 및 학생운동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70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이같은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였고 그 임계점은 YH사태, 김영삼 총재 박탈,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다 19791026일 궁정동 만찬에서 종료됨으로서 유신체제는 몰락했다. 그렇지만 과연 유신체제가 그렇게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는가 묻는다면 19791026일 이후 201731019대 대통령 박근혜 탄핵과 파면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속에 해석하고 규정해야할 적폐의 역사 또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고향 선후배 사이이며 육사동기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후진술에서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국민회생 방지, 적화통일 방지, 혈맹 미국과의 관계개선, 독재국가로의 불명예를 벗어나기 위해 박정희에게 총을 쏘았다고 했다. 호남. 남해고속도로가 준공되던 시절 김재규는 건설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기업의 중동진출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중앙정보부장이 된 것은 1976년이었다

 

"부산 사태는 체제 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점,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자유당 내무장관)나 곽영주(경무대 경호실장)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 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교해 보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 내고 말 분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 -


우연히 마주하게 된 이 기념탑에서도 한 시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하긴 이땅 어디인들 그만한 사연 없는 곳이 있으랴 만         

고흥행은 현재의 업무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지배했던 데서 기인한다. 육체적으로 고단한 상태였다.  수면 부족과 조직 운영에 따른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향하고 있을 즈음이었기 때문에 흔케이 동행했던 것이다  또 고흥이 고향인  김현정과 다온산식구들이 지난해 갔다온 경험담에 솔깃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흥은 고흥반도와 벌교읍간의 지협 사이로 소백산맥의 줄기가 뻗어 내려와 산이 62.4%를 차지할 정도이나 대부분이 500m 내외의 낮은 구릉이다. 동쪽에 팔영산(八影山, 609m), 중앙에 운람산(雲嵐山, 487m), 남서쪽에 조계산(曹溪山, 473m)과 천등산(天登山, 554m), 남쪽에 마복산(馬伏山, 539m) 등이 솟아 있어 북동쪽이 높고 남서쪽이 낮은 지형이다.

 

고흥반도와 그 주변에 널린 섬들(유인도 23, 무인도 147)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는 순천만 건너에 여수반도가 나란히 뻗어 내려와 있고 서쪽에는 보성만을 끼고 보성군·장흥군·완도군을 마주본다.   해안지역에 개펄이 발달해 이들의 많은 부분이 간척사업으로 농지로 변모하였다. 특히, 도양읍 오마도(五馬島)와 포두면 해창만을 중심으로 한 간척지가 대표적이다.

특산물로는 포두면의 삼지닥나무가 특용작물로 유명하고. 유자는 고흥의 특산물로 군의 전지역에서 많은 양이 생산되고 있다. 도화면 봉산마을에서 재배되는 취나물은 전국 재배의 6070%를 차지한다. 연안에서 잡히는 바닷고기는 도미·삼치·농어·감성돔·낙지 등이다.

 

·미역·톳이 인근의 청정해역에서 양식되는데 금산면·도화면·도덕면·풍양면 등에서 생산되는 김은 완도에 이어 전국 2위를 차지한다. 순천만과 득량만에서는 피조개·키조개 등 각종 조개류가 양식된다


현정이의 고향은 표두면 오취리다.  포두면(浦頭面)면의 동쪽은 바다에 접해 있고 북··남부는 산지이며 중앙을 향해서 낮아지는 지형이다. 내초마을 앞에서 오도(梧島)를 거쳐 영남면의 금사리를 연결하는 연장 3,462m의 방조제와 배수문이 1969년 준공되어 1,560의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이곳이 유명한 해창만(海倉灣) 간척지이다.


가던 날은 6.25였다. 군 공설운동장에서 참전용사를 대상으로 행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인근 식당은 우리 일행과 그분들로 혼잡했다.  밥 한끼 먹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고 서비스를 기대할 상황은 아니었다.

오취(梧翠)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니 옛날 이섬에 이 좋아하는 오동나무가 많고 이 살았다는 전설에 의하여 이섬을 오도라 하였으나 1914년 일제초기 행정구역폐합시 마을명을 梧翠라 개칭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상오(上梧)마을이름의 유래는 옛부터 쪽에 있는 吉頭里 飛鳳山에서 의 새끼 자웅이 있어 飛梧桐이면 不棲하고 非竹筍이면 不食한다하여 鳳德앞에 竹島가 있어 梧桐이 잘 자라는 梧桐島鳳凰 자웅이 나라와서 숫上梧에 암翠島에서 둥지를 틀었다하여 蓬萊面 梧桐島라 칭하다가 梧翠里로 개칭했다, 그후 1956년에 上梧라는 자연마을로 독립 되었다가 1963.1.1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浦頭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쉽게 풀어  보면 오동이 잘 자라는 오동도에 봉황 자웅이 와서 숫봉은 오도에 암봉은 취도에 집을 틀었다 하여 봉래면 오동도로 칭하다가 오취리로 개칭되었습니다. 그 후 1956년 상오라는 자연마을로 독립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포두면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59호의 농가에 약 140여 명의 주민이 있다.


읍에서 30분 정도 이동하여 차에서 내리자 갯벌이 펼쳐졌다.  

현재 상오마을에는 수령 2백년 정도의 팽나무 한그루와 푸조나무 수 그루가 있었다.



숙소는 별나로마을인데  상오마을과는 별개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알고보니 상오마을에서 운영하는 펜션이다. 일종의 농어촌 체험이랄까


팬션에 짐을 부리고 바로 갯벌로 향했다.

오기전날 마을에 대한 이해차원에서 현장 답사를 계획했지만  실행에는 옮기지 읺았다.

위성으로 봤을 때 소나무 중심의 임상 forest physiognomy이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활엽수를 비롯 난대 수종이 더러 있을 법 했다.  실제 그랬다.


숙소에서 갯벌로 나가는 방죽과 송강포들 

무인등대를 중심으로 좌측 섬이 와도고 우측이 취도이다. 정면 마주보이는 섬이 첨도다.  취도 취북산 능선의 끝자락에서 상오마을 끝이 갯벌이  형성되는 지역이다.

간만에 농게를 만났다.

그리고 갯벌이 숨쉬는 소리를 들었다.

상오마을의 갯벌은 뻘(70~80%) 갯벌과 작은 면적의 혼합이 섞여 있었다.  원래 일대는 꼬막의 주 산지인데 일대의 갯벌에서 생산되는 식용패류는 가무락과  반지락이 많은듯 했다. 가무락의 경우 펄 함량이 많은 곳에 서식한다

시간만 있더라면 갯벌과 생물 특강도 하려했지만, 구태여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하찮게 흔하게 보이는 저 생물들이 이 바다를 건강하고 깨끗하게 해주는 1등 공신일는 점은 들려 주고 싶었다.  예컨데 방게, 칠게, 짱둥어, 농게, 바지락의 경우 먹이활동이 왕성하여 1시간동안 약 1의 물을 걸러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굴의 경우도 역시 1시간에 1정도를 여과한다. 그 외에 홍합의 경우 하루에 50정도 여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과에 따라 계산해 보면 갯벌에서 바지락 1개체가 하루에 평균 510의 바닷물을 정화하는 셈이다


이들이 만든 구멍은 갯벌 깊숙한 곳까지 산소를 공급하게 하여, 다른 작은 생물들이 더불어 사는 공간을 마련한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갯벌을 늘 건강하게 유지시킨다. 수 십 만종의 박테리아들은 육상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오염물질들을 잘 분해하여, 갯벌 존재 자체가 냄새나는 각종 약품을 사용하는 몇 개의 하수처리장을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다.


갯벌에서 살아가는 생물종들은 크게 3부류로 나뉜다.  첫째,갯벌 위에서 사는 동물(표서동물(表棲 動物, Epifauna), 둘째, 갯벌 속과 위를 드나들면서 사는 동물 (반표서동물(半表棲 動物, Semi-endofauna), 셋째, 갯벌 속에서만 사는 동물(내서동물(內棲 動物)로 분류한다.

표서 동물은 갯벌 표면을 기어다니면서, 표면에 붙어 있는 미세한 유기물이나 식물플랑크톤을 긁어먹거나, 갯벌생물을 사냥하기도 하고, 또는 갯벌 위에서 죽어 있거나 죽어가는 동물들을 먹기도 한다. 이들도 밀물시에는 잠시 펄 속에 잠입을 한다. 나름대로 방어물질이나 무기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숭어와 같은 대형포식자의 공격에 당해낼 수 없어서 펄 속에 잡입하여 지낸다. 민칭이, 밤게, 왕좁쌀무늬고둥, 갯우렁이 등이 여기에 속한다.

 

갯벌 속과 표면을 드나드는 생물인 반표서성 동물은 갯벌에 구멍을 파고 숨어 지내다가 가끔 밖으로 나와서 먹이를 먹고는 바로 구멍으로 들어가는 종류로, 칠게, 방게, 등 게 종류와 갯지렁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서식공간에 대해 민감하며, 나름대로의 영토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 종간 치열한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새우류도 갯벌 위에 살다가 위험을 느끼면 바로 펄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형태를 보인다.

 

갯벌 속에서만 사는 내서동물들은 갯벌에 길게 굴을 만들면서 이동하는 종류와 몸을 흙 속에 파묻고 입만 밖으로 내밀어 먹이만 챙겨가는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갯지렁이, 거미불가사리, 각종 조개류가 여기에 속한다.





그림 참조: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갯벌생물의 집, 서식굴

갯골이 형성되어 있다.  이물길로 민물도 유입된다.

갯잔디 밭이다. 펄갯벌과 모래갯벌에서 밀물 때 잠기는 곳이나 만조선 부근에 분포하는데 군락이 약 100m 이상 띠를 이루고 있었다. 주변에는 가는 갯능쟁이, 해홍나물, 갯질경, 갯실새삼, 방석나물도 보였다.

주변을 살피는 중 발견한 고라니 사체,  사인이 궁금했다.  

반가운 식물을 또 발견했다. 황근이다.

제주에서 한 오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노란 무궁화로 불리우기도 하는 황근은 낙엽활엽 관목으로 아욱과 무궁화 속 식물이다.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II, IUCN Red List 취약(VU)종이다. 고흥에서 이 친구를 만났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도 한두 포기가 아니라 수제선 잎은 어긋나고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원형이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다. 꽃은 78월에 노란색으로 피고 가지 끝의 잎겨드랑이에 달리며 황색이고 안쪽 밑부분은 검은 홍색이다.

쇠물푸레나무도 있다.

영남면 금사리 앞 풍관

개화 절정의 자귀나무

개옻나무와 팥배나무, 산벚나무등이 어우려 자라고 있다.  

예덕나무도 꽃을 피웠다


갯가에서 식물탐색 하는 그시각 일행들은 장화에 작업복차림으로 반지락 채취에 들었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갯벌에 빠진 것이다.  휘청이다 몸 가누지 못한채 철퍼덕 갯벌에 넘어지기도 하면서

하나 둘 손끝이 굴과 조개에 긁히면서 개벗에서의 작업을 끝내고 돌아오고 있다.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누군가는 요령을 말했지만  갯벌에서의 작업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체험한 것으로 의미 삼았으면 한다.

반지락을 씻고 있는 민박촌 아지메들

별나로마을 초청자 현정 양과 그의 아버지,  유전자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 닮았다.  

부지른한 현정의 아버지는  노모 모시고 고향을 지키며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자전거를 구해 일대를 탐방했다.

해창만(海倉灣) 간척지이다.

포두면(浦頭面)면의 동쪽은 바다에 접해 있고 북··남부는 산지이며 중앙을 향해서 낮아지는 지형이다. 내초마을 앞에서 오도(梧島)를 거쳐 영남면의 금사리를 연결하는 연장 3,462m의 방조제와 배수문이 1969년 준공되어 1,8500의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여의도 면적 95만평의 5.7배, 이곳서 생산되는 미곡도 엄청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배 불리 먹다 못해 썩히고 있는 것이다.   가뭄이 깊어지고 있다며 걱정하지만 진실로 쌀농사 걱정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면, 함부로 입을 놀려선 안된다.  

농사꾼이 하루 일 마치고 쪼그리고 앉아 담배 연기 풀면서 쌀금 걱정하던 이야기는 그 새마을 시대부터 지금껏 큰 변화가 없는 스토리다.  1차 산업을 등한시 하고 외면하는 정책은 그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짓이다.  지식인과 도시민은 그 동조자다.  그야말로 밥 버러지들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가.   하지만 사실이란 게 더 문제다.  


상오마을과 우취마을을 연결하는 수중교를 건너 가서 저물녁 상오마을을 본다. 참 평화롭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아파트 숲이 아니라 또 부산같은 산동네가 아니라 자연에 기댄 전형적 농어촌 마을이 주는 포근함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마을 같았다.

길이 연결되는 곳까지 가보았다.  전면부의 길게 뻗어나온 산자락은 해발 150m가 조금 못되는 취북산 자락이다.  

갯벌에는 물이 들었다. 저물어가는 다도해가 보여주는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돌아서려는데 귀에 익은 울음들이 들려 왔다.   반가웠다.   너무너무,     수리부엉이(천연기념물제324-2호) 와 소쩍새(천연기념물 324호), 쏙독새가 한꺼번에 소리를 내고 있었다.  축복이었다.  한동안 어둠이 내려 앉아 어둑어둑 할때까지 귀를 세워 들었다. 


                                                                                                                                쏙독새 사진출처:네이브 블로그 초록들의 들꽃향기 따라 곤충향기

상오마을에 밤이 내리고 전등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펜션 별나로마을에서도 불이 켜졌다.

그리고 다들 둘러 앉아 준비한 회에다 술잔이 돌고

별나로마을 사업은 이 마을의 송종근씨가 지난 2006년 전라남도 농업기술원에서 실시한 '농촌체험관광교육'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마을 25농가가 참여해서 갯벌과 체험거리, 먹거리를 이용 4동의 펜션이 운영중에 있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

이른새벽 눈을 떳다. 과음하지 않아서다.   자귀나무의 잎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렇건만 주민들의 일상은 언제나 이 새벽부터 시작된다. 다시 자전거를 몰고 어제 가보지 못한 오취마을 산책에 들었다

음력 오월 사흘 목사리 아홉매 열물로  다시 드러난 갯벌에 새벽 안개가 자욱하다  

오취마을 보건 소 앞  공동작업정 건물 외벽에 내걸린 근면, 자조, 협동이란 구호가 새삼스럽다.  그놈의 새마을 운동, 그리고 박정희가 연이어 연관되는 단어들이다.


고흥의 산세는 높지 않고 나지막하면서 정겨움을 준다

전면부 무인섬  소두방섬 또한 그림이다. 

다시 펜션 별나로마을로 가다가 갯벌을 마주 했다.

방게와 농게가 마주쳤다.  내 인기척 때문 동작 중지 상태다.  5분 이상을 기다렸지만 포기하고 자리를 벗어난 것은 나 였다. 

이 길은 대조기가 되면 잠길 수 있을 것 같다. 오취도가 다시 섬이 되는 순간이다.  고흥 상오마을에서의 일박은 그렇게 섬처럼 기억될 법하다.  내가 다시 언제 짬을 내어 다시 마을을 찾는 날 마을로 가는 길이 물 빠진 갯벌처럼 다가설 것 같다. 

고흥도 아픔이 많은 섬이다.  이곳에서 얼마 안떨어진 소록도며 여순반란사건때의 아픈 이야기들은 고흥이 간직한 역사적 아픔이기도 하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에- 한하운


그렇다 이땅 어디엔들 아픈 곳 아닌 곳 없고 상처 없는 곳 없다.

고흥에 와서 못보고 가서 아쉬운 것은, 그래서 다음에 온다면 꼭 들리고 싶은 곳이 남양면 월정리  해안 방풍림과 금탑사 비자나무 숲이다.  비자나무 숲은 포두면 봉림리천등산 중턱에 있고 인공숲이다.  그리고 봉래면 신금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62호 외나로도 상록수림은  다음으로 미룬다.

때마침 머뭇거리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근자근 내려 숲이 젖고 논두렁 밭두렁 작물들 해갈 되고 그래도 기운이 남아  마른강 수위까지 채워지는 바이기를  희망해본다.

Hey Tonight - C.C.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