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의 눈〉 발 플럼우드 지음, 김지은 옮김, yeondoo 펴냄
Val Plumwood(1939~2008)
호주의 페미니스트 생태학자이자 활동가로 한평생 인간과 자연의 공생적 관계를 이론화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호주와 미국 등 세계 명문 대학에서 강의했고 말년에는 호주국립대학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70년대부터 생태철학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1985년 호주 카카두국립공원에서 홀로 카약을 타던 중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했지만, 기적적으로 탈출한 경험으로 유명하다. 이후 자신이 온몸으로 생생히 체감한 자연의 먹이사슬,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천착하며 다수의 에세이를 집필했고, 그의 사후 동료들에 의해 『악어의 눈』으로 편집되고 출간되었다. 대표작으로는 1993년에 출간한 『페미니즘과 자연의 지배』와 2002년에 출간한『환경문화: 이성의 위기』 등이 있다. 생태철학에 대한 기여를 인정 받아 2001년 루틀리지 출판사가 선정한 50인의 환경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
목차
서문
서론
1부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
1장 포식자와의 만남
2장 스톤컨트리의 건기
3장 균형 잡힌 바위의 지혜: 평행우주와 먹이의 관점
2부 비인간 생명 존재와의 소통
4장 웜뱃 경야: 비루비를 기억하며
5장 베이브, 말하는 고기의 이야기
3부 생명과 죽음의 생태적 순환
6장 동물과 생태: 더 나은 통합을 향해
7장 무미: 먹이로서 죽음에 접근하기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감사의 글
출판사 서평
페미니스트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가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한 경험을 통해 직면한 인간과 자연의 가장 비밀스러운 진리!
왜 돼지는 먹어도 되고 개는 안 되는가? 개 식용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려오는 항변이다. 그저 ‘보신탕’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볼멘소리라고 치부하기에 앞서 왜 많은 사람이 돼지를 먹는 것보다 개를 먹는 것이 더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느끼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악어의 눈』이 그 사유의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플럼우드는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한 경험을 공유하며 ‘먹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위를 인간까지 확장하고, 영화 〈베이브〉에서 재현된 동물 농장의 경우를 예시로 들며 ‘존중 받아야 하는 존재’의 범위 안으로 돼지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경계 밖에 어떤 생명 종도 남겨두지 않는다. 개별적 집합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존재들이 완전한 교집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먹이고 동시에 먹이 그 이상”이다.
돼자나 개나 먹이사슬의 일부이니 개를 마음껏 잡아먹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포식 그 자체나 먹히고 사용되는 생명의 종류가 아니라 그 생명과 우리 자신을 완전히 다른 범주로 바라보고, 그들을 고깃덩어리로 환원하여 도구화하는 일이라는 것이 플럼우드의 관점이다. 개를 먹는 일이 돼지를 먹는 일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간이 오래전 개를 길들이며 윤리적 고려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인 반면, 돼지는 고기의 범주에 남겨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개를 오직 고기로 바라보며 사육하고 도구화한다면 그것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플럼우드가 동물의 모든 쓰임을 예외 없이 완강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존재론적 완전채식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세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동떨어진 방식의 채식주의는 존중 받는 생명의 범위를 인간 밖으로 확장할 뿐 윤리적 범주와 생태적 범주의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그 경계 밖에 존중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를 여전히 남겨둔다. 농작이 여의치 않거나 오히려 포식보다 생태에 악영향을 미치는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사냥과 포식조차 서구인의 시각에서 재단한다는 것, 동물을 극도로 도구화하고 ‘살’이나 ‘고기’로 환원하는 공장식 사육 농장과 비교적 동물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농장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린다는 점 역시 저자가 지적하는 존재론적 완전채식주의의 한계다.
플럼우드에게 죽음은 우월한 영혼이 열등한 육체를 지상에 남겨두고 천국으로 향하는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종착역도 아니다. 우리의 몸이 땅에 묻혀 수많은 벌레와 미생물의 먹이가 됨으로써, 그 토양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그 식물이 동물의 먹이가 됨으로써 우리는 지구적 생태 공동체의 서사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먹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비인간 존재가 존중과 윤리적 고려의 대상임을, 우리와 그들의 세계가 나뉘어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플럼우드가 악어의 눈을 통해 발견하고,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진실이다.
악어에게서 살아난 뒤 알게 된 진실 “사람도 먹이다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무게를 나는 사파리 버스를 타보고야 알았다. 호랑이가 다가오더니 한껏 입을 벌렸다. 세상에, 호랑이에게 나는 한 입 거리구나. 버스 안에서 웃고 있는 게 한심하게 여겨졌다. 호랑이한테 물리면 나는 정신을 차리긴커녕 그대로 숨이 넘어갈 위인이다. 이런 주제이기에 나는 호랑이 앞에서도 끄떡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일테면 〈악어의 눈〉을 쓴 발 플럼우드 같은 사람.
오스트레일리아의 페미니스트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는 마흔여섯 살 때 혼자 카누를 타다가 악어의 공격을 받았다. 악어는 먹이를 입에 물고 살이 뜯겨 나가도록 물속에서 회전시키는데, 플럼우드는 세 번째 소용돌이 이후 가까스로 악어의 턱에서 빠져나왔고 끔찍한 부상을 입은 채 몇 시간 동안 늪지대를 기어다닌 끝에 구조되었다. 그리고 보통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경험을 십수 년간 숙고하며 자신이 본 ‘악어의 눈’으로부터 근대 휴머니즘 철학을 뒤엎는 새로운 생태철학을 전개해나갔다. 악어에게서 살아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그 일을 곱씹으며 거기서 삶을 일신할 새로운 철학을 구성하다니, 놀람과 호기심에 책을 펼쳤다. 상상을 넘는 삶과 그 삶에서 길어 올린 깊디깊은 철학을 만났다.
나라면 트라우마였을 사건을 플럼우드는 ‘진실의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환영에 사로잡혔던 이전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진실에 눈을 떴다고 말한다. 어떤 진실인가? 사람도 먹이라는 진실이다. 익히 아는 사실이라고? 맞다. 인간은 동물이고 저보다 강한 동물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건 상식이니까. 하지만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위협한 동물은 죽이는 걸 당연시한다. 그저 사람 사는 마을에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도 멧돼지나 곰 같은 동물을 죽인다(그 결과 전 세계 포유류 중 야생동물은 4%에 불과하며, 인간은 34%, 가축은 62%를 점한다). 사람을 해쳤어도 죽이지 않는 건 주인이 있는 개뿐인데, 인간의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먹이’동물과 ‘애완’동물을 나누는 모순
플럼우드는 악어에게 물린 순간 이런 인간 중심적 세계가 허상임을 깨닫는다. 인간은 여느 짐승과 다른 우월적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먹이이며, “다른 존재의 죽음을 살아가고 다른 존재의 생명으로 죽는” “먹이사슬의 우주”를 살고 있음을 통감한다. 그리고 이 “가혹하고 생소한 평행우주”에서는 인간이나 쥐나 모두가 먹이이자 포식자로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 평등함은 모든 존재가 영혼 없는 물질-육신이라는, 즉 다 같은 먹잇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영혼 없는 물질이란 없기 때문이다.
플럼우드는 영혼과 육신을 나누고 인간과 자연을 대립시키는 근대적 이분법에 반대한다. “본질적 자아는 육신을 떠난 영혼”이고 죽음은 육신의 끝이자 영혼의 영속이라 보는 서구 사상은, 인간 존재를 지구로부터 소외시킬 뿐 아니라 자아의 연속성을 이야기하지도 못한다고 비판한다. 대신 그는 모든 생명이 순환하고 소통하는 애니미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오래됐지만 낯선 세계관에서 “모든 생명체는 먹이이고 동시에 먹이 그 이상”이다. 죽음은 재생이니, “생명의 기원을 이루는 선조 공동체와 생태 공동체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플럼우드는 “인간을 지구공동체의 맥락에서 다시 상상하라”고 촉구하는데, 이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먹으면서 먹히고 죽지만 죽지 않는다.
그는 먹이가 됐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모든 먹이가 영혼”임을 분명히 하며, 따라서 ‘영혼 없는 먹이’만 먹을 수 있다는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은 근대의 이분법을 반복, 강화하는 또 다른 제국주의라고 통박한다. 플럼우드는 죽어가는 야생 웜뱃을 자식처럼 거뒀지만 그를 자신의 “특권적 반려동물”로 키우지 않았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했지만 이는 육식 문화가 아니라 동물을 상품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 문화에 반대해서였다.
영화 〈꼬마 돼지 베이브〉에 관한 에세이에서 그는 ‘먹이’동물과 ‘애완’동물을 나누는 이분법, 동물들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인간 사회의 관습적 계약이 가진 모순을 지적한다. “다른 동물을 고기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늑대(개)에게 그들 몫의 고기를 주고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그는 인간의 특권을 (반려)동물에게 확장하려는 동물보호운동이나 윤리적 사고를 비인간 영역에 적용하지 않으려는 생태운동 둘 다 ‘인간/자연’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고 비판한다.
생애 말년에 쓴 에세이에서 그는 포식을 악마화하는 존재론적 완전채식주의나, ‘남성-사냥/여성-채집’을 분리해 후자를 상찬하는 젠더 인류학에 반대하면서, 육식에 대안이 있다는 주장은 서구적 보편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원주민 문화에서 볼 수 있듯이, 먹이는 시장이 아니라 생태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책을 덮을 즈음, 양애경의 ‘귀’라는 시를 읽었다. “(…)고속도로에서 마주친/ 거대한 가축 수송차량 안// 비죽 솟은/ 돼지의/ 순하디순한/ 분홍색 귀//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말하고 말았다// -내가/ 너를 먹고 살아야 하는 거니?” 플럼우드라면 이 물음에 뭐라고 답했을까? 네, 먹고 살아요. 내 혀가 아니라 내 심장이 필요로 할 때, 오직 그때만 우리가 친족 관계라는 걸 인정하면서 그 분홍 살을 먹어요. 그리고 내 안에 들어온 분홍색 귀로 잘 듣고, 잘 살다 잘 죽어야 해요. 이 세계의 과거와 미래가 지금 내 안에 있으니까요,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제 나는 이 담대한 사람이 가르쳐준 마음으로, 소중한 살을 먹고 내 소중한 살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까지, 겸허히 살기로 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그래서 아름다우니, 용감하진 못해도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보람은 충분하리라.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시사인
악어의 눈
1985년 2월, 호주의 한 철학자가 바다악어의 습격을 받았다. 영화 '크로커다일 던디'로 유명한 호주 카카두 국립공원에서 카약을 타고 홀로 탐사하던 도중이었다. 물속으로 끌려간 그녀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세 차례나 겪은 후 악어의 턱에서 빠져나와 가까스로 되살아났다.
죽음과 마주친 인간은 변화한다. 악어 먹이가 될 뻔한 철학자는 이 체험의 의미를 세상을 뜰 때까지 깊게 사유했다. 세계적인 생태철학자 밸 플럼우드의 '악어의 눈'(연두 펴냄)은 그 성찰의 치열한 기록이다.
자연 지배와 포식의 서사에서 인간은 승리자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인간 눈으로 볼 때 악어는 이빨 빠진 피식자, 즉 비싼 가죽 가방의 재료를 제공하는 천연자원이다. 그러나 인류의 선배로 약 2억년 전부터 지구에 살아온 악어의 눈으로 볼 때, 사슴이나 양 같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육즙 가득한 맛 좋은 고깃덩이, 기회만 닿으면 한 끼 먹이로 삼을 만한 피식자에 지나지 않는다.
© PetrGanaj, 출처 Pixabay
퍼붓는 빗속에서 악어의 금빛 얼룩무늬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저자는 오래 무시하며 살아왔던 이 엄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죽음이 갑자기 눈앞에서 거대한 입을 쩍 벌리자, 인간과 동물을 분리하면서 인간 승리를 찬양하던 문명의 눈부신 환각이 산산이 깨어졌다. 자연의 거대 순환 과정에서 보면 인간은 특별히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언제든 다른 강력한 힘에 먹힐 수 있는 작고 허약한 존재, 인간-고기일 뿐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먹이이자 살로서 동물적 질서에 포함된다."
그러나 현대인은 궁극의 포식자처럼, 자연의 어떤 존재도 절대 자신을 먹이로 삼을 수 없는 존재인 양 거만하게 행동한다. 군림하는 신이라도 된 듯 다른 존재를 얕잡는 우쭐함은 오늘날 인간 행위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 명령에 복종하고 인간 욕망에 순응하는 온순한 존재가 아니다. 카약, 즉 기술의 힘을 빌린 인간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위험 없고 아늑한 장소로 착각하는 순간, 자연은 저항성을 드러내면서 섬광처럼 인간을 습격한다.
호주 원주민의 서사에서 악어는 인간 잘못에 대한 신의 심판을 전하는 사자다. 악어의 공격은 저자가 인간의 절대 지배라는 서구 문명의 거짓 서사에서 벗어나는 진실의 망치로 작용했다. 인간을 포식자로만 보는 오만한 태도는 결국 자연의 습격을 받아서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를 초래했다. 저자는 과도한 도구와 지나친 소비, 높은 에너지에 의존하는 문명의 서사를 다시 쓰자고 말한다. 우리 자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면서 겸손히 행동하는 성찰의 문명이 절실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매일경제
왜 돼지는 먹어도 되고 개는 안 되는가?
개 식용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려오는 항변이다.
그저 ‘보신탕’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볼멘소리라고 치부하기에 앞서 왜 많은 사람이 돼지를 먹는 것보다 개를 먹는 것이 더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느끼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악어의 눈』이 그 사유의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플럼우드는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한 경험을 공유하며 ‘먹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위를 인간까지 확장하고, 영화 <베이브>에서 재현된 동물 농장의 경우를 예시로 들며 ‘존중 받아야 하는 존재’의 범위 안으로 돼지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경계 밖에 어떤 생명 종도 남겨두지 않는다.
개별적 집합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존재들이 완전한 교집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먹이고 동시에 먹이 그 이상”이다.
돼자나 개나 먹이사슬의 일부이니 개를 마음껏 잡아먹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포식 그 자체나 먹히고 사용되는 생명의 종류가 아니라 그 생명과 우리 자신을 완전히 다른 범주로 바라보고, 그들을 고깃덩어리로 환원하여 도구화하는 일이라는 것이 플럼우드의 관점이다.
개를 먹는 일이 돼지를 먹는 일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간이 오래전 개를 길들이며 윤리적 고려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인 반면, 돼지는 고기의 범주에 남겨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개를 오직 고기로 바라보며 사육하고 도구화한다면 그것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플럼우드가 동물의 모든 쓰임을 예외 없이 완강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존재론적 완전채식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세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동떨어진 방식의 채식주의는 존중 받는 생명의 범위를 인간 밖으로 확장할 뿐 윤리적 범주와 생태적 범주의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그 경계 밖에 존중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를 여전히 남겨둔다.
농작이 여의치 않거나 오히려 포식보다 생태에 악영향을 미치는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사냥과 포식조차 서구인의 시각에서 재단한다는 것,
동물을 극도로 도구화하고 ‘살’이나 ‘고기’로 환원하는 공장식 사육 농장과 비교적 동물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농장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린다는 점 역시 저자가 지적하는 존재론적 완전채식주의의 한계다.
플럼우드에게 죽음은 우월한 영혼이 열등한 육체를 지상에 남겨두고 천국으로 향하는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종착역도 아니다.
우리의 몸이 땅에 묻혀 수많은 벌레와 미생물의 먹이가 됨으로써, 그 토양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그 식물이 동물의 먹이가 됨으로써 우리는 지구적 생태 공동체의 서사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먹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비인간 존재가 존중과 윤리적 고려의 대상임을, 우리와 그들의 세계가 나뉘어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플럼우드가 악어의 눈을 통해 발견하고,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진실이다.
[알라딘 책소개에서] '악어의 눈' -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작성자 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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