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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by 이성근 2022. 8. 16.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작가 지그문트 바우만 /번역 정일준 / 새물결  2008.08.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한 후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 바르샤바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나,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가르쳤다. 1971년 리즈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고 1990년 정년퇴직 후 리즈대학과 바르샤바 대학 명예교수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201719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목차

What's up 총서를 발행하며

감사의 말

서문

 

01 태초에 설계가 있었다

질서 구축 과정이 만들어낸 쓰레기

 

02 ‘그들너무 많은가?

경제 발전이 만들어낸 쓰레기

 

03 각각의 쓰레기는 각각의 처리장으로

지구화가 만들어낸 쓰레기

 

04 쓰레기 문화

 

옮긴이 후기

 

출판사 서평

포스트모던 이후 실종된 거대 담론, ‘삶의 쓰레기화로 복원한다!

TV에서는 도전과 리얼 버라이어티가 넘쳐나는가?

촛불 시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사라지는 유동적 현대세계에서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88만원 세대’, ‘대졸 실업’, ‘이태백’, ‘사오정같은 음울한 유령들이 지금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인격이 사람됨을 결정하는 시대를 넘어 능숙한 영어 구사 능력, 재빠른 현실 감각,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비정함이 실격(失格) 인간을 결정하는 잣대로 등장해 사람들을 항상적 공포와 전지구적 이동으로 몰아넣으며, 가족까지도 해체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들 쓰레기가 되는 삶들’, ‘버려지는 인간들이 일시적이거나 예외적인 부산물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디지털 첨단화와 경제 발전과 지구화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스팸 메일이라는 형태로 매일같이 최첨단 디지털 매체에서 뿌리는 쓰레기에 덮여 살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제는 인간이 쓰레기의 양산자이자 피해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이후의 사회에서는 모든 안전과 (사회)보장이 사라지고 매사每事와 매일每日도전이 되리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거대 담론이 문화론이나 문명의 충돌론으로 대체되면서 우리 삶에 대한 섬세하면서고 구조적인 인식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래의 인용문이 잘 보여주듯이 디지털 문명의 본산 실리콘 밸리와 각종 리얼리티프로그램을 종횡무진하면서 우리 시대를 인간 자체의 쓰레기화로 진단하고 있는 바우만의 이 역저는 우리 시대에 대한 우울한 진단서이자 지구화하는 말만 들어도 울렁증을 느끼는 우리에게 진짜 무엇이 문제인가를 차분하게 진단해주고 있는 새로운 처방전이기도 하다.

 

진보의 다른 이름, 인간의 쓰레기화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쓰레기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오늘날 사회를 진단한다는 점이다. 쓰레기인가? 바우만에게 현대화의 역사는 한편으로 진보와 생산의 역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쓰레기 생산의 역사이다. 현대화 과정, 더 정확히 말하면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이 만들어낸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승리함에 따라 갈수록 더 많은 쓰레기가 생겨나게 된다.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생산 욕구에 이끌려 소비자들은 더욱더 빨리 상품을 소비하고, 끊임없이 더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기를 요구받는다. 모든 상품은 마치 버려지기 위해 생산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쓰레기개념이 우리를 더욱 경악시키는 것은, 그것이 산업 쓰레기와 같은 물질적인 쓰레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나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이, 인간의 삶이 쓰레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쓰레기라는 용어가 그저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주기 위한, 그리고 그럼으로써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생산과 소비 양 영역에서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한 채 과잉, 잉여, 초과 인구가 되고 있다. 말 그대로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가 되는 일만이 남은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바우만은 쓰레기 생산이 현대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라 지적한다. 현대화 과정의 밑바탕에는 더 좋은 사회, 진보한 사회가 가능하다는 관념이 깔려 있다. 현재의 상태는 불완전하고 더욱 개선되어야 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현대화 과정의 주요 강령이었다. 사회 진보를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인류는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이라는 열매를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과정은 인간 쓰레기도 생산했으며 그것을 더욱 가속화했다.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갈수록 적은 사람만이 필요하게 되었고, 생산과 소비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맡을 수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이들을 생산 영역으로, 그리하여 소비 영역으로 다시 투입할 수 있는 길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지구는 이제 만원이다, 전지구적 쓰레기 생산

현대화 과정의 초기에는 인간 쓰레기 생산이 일부 선진 국가들에 한정되었다. 그 국가들은 자국의 잉여 인간들을 저발전지역으로 내보냄으로써 인간 쓰레기 처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식민화와 제국주의적 정복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목적”(22)이었다. 바우만은 현대화된 지역은 지역에서 발생한 과잉 인구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지구 전역에서 찾으려 했고 또 발견할 수”(23)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지구는 만원이다.”(20) 더이상 자국의 인간 쓰레기들’, ‘잉여 인간들을 보낼 수 있는 지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진국들은 그동안 축적한 부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뒤늦게 현대화에 뛰어든 이른바 개발도상국들은 그 어떤 외부적인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해결책(23)”이 요구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제는 가난한 국가의 난민들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때로는 합법적으로 그러나 대부분 불법으로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다. 이른바 가난한 자들의 제국주의”(135)라는 역설적인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미국과 부유한 일부 서유럽 국가들은 내부에서 생산되고 외부에서 유입되어 이중으로 넘쳐흐르고 있는 인간 쓰레기문제에 난처함을 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책을 찾지 못한 난제aporia라는 사실이다. 국민 국가는 한편으로 자국 내 잉여 인간들을 각종 게토로 몰아내 격리하고, 자국으로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통제하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영토를 요새화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대신, 그것도 저렴한 가격으로 해주는 노동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국민 국가 - 촛불 시위를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

인간 쓰레기 문제와 관련해 바우만이 주목하는 또 하나의 지점은, 그것이 산재해 있는 다른 사회 문제를 감추어버리는 눈가리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우만의 독특한 국가론이 등장한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승리의 깃발을 휘두르고 있으며 그에 따라 각종 복지 제도가 해체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국가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자유 경쟁, 각종 유연화 정책이라는 명목 아래 국민 국가는 갈수록 국민의 복지 책임, 사회 안정화에서 손을 떼면서 시장과 기업 활동의 자유, 즉 부유한 자들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국가는 잉여 인간들을 위험한 자들로 포장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데 주력한다. 사회 내부의 잉여 인간들은 사회의 안정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자들로, 이주자들은 잠정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된다. 이러한 전략으로 국가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을 철저히 관리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미약해져만 가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 한다. 단순히 9. 11 이후 테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서구 국가들로 하여금 광기에 가까운 대외 정책을 추진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국가 구성원들이 안정적으로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결책을 내놓으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사회 현상에 대한 근원적인 분석

바우만을 다른 사회학자와 구분해주는 독특함은 그가 사회 현상을 표면적인 차원(‘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에서만 이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우리 눈에 드러나는 사회 현상을 그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심층적인 영역(‘인간이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이 어떠했길래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는가?’)과 연결하는 데 주력한다. 그는 한손에는 일간 신문을 다른 쪽 손에는 철학 고전을 들고서, 오늘날 인간 쓰레기현상을 다루는 동시에 그 원인을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를 만들어가게 하는 원동력, 문화의 본성, 질서 구축 과정에 따른 포함과 배제, 지금까지 인류의 이상을 이끌어온 영원성 개념 등에서 이끌어낸다. 이는 사회학보다는 철학적 영역에 가까운 주제이다. 그에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고 문화를 만들어온 메커니즘을 고려할 때만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우만이 우리에게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해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의 분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현실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철학적?역사적 영역으로 파고들어가 탐구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도 잉여 인구에 관한 조어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청년 실업에서부터 각 각 연령대의 잉여 인간을 지칭하는 이태백’, ‘사오정등등 여러 단어들이 생겨났고, 최근에는 ‘88만원 세대라는 구호가 큰 반향을 얻기도 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이러한 신조어들은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을 칭하는 단어들은 계속 변하더라도 본질적인 현상, 잉여 인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국가는 쓰레기문제를 타개할 그 어떤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는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갈수록 증가하는 이주노동자는 한국 역시 바우만의 표현대로 쓰레기 처리 산업의 심각한 위기”(24)를 맞고 있음을 직감하게 해준다. 인간이 쓰레기로 전락하며, 법과 정치, 경제 영역에서 배제되어 현대의 호모 사케르가 되는 상황이 현대화 과정의 필연적 귀결임을 드러내는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고통받으며 코너로 몰리고 있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도 오늘날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유용한 그리고 절실한 통찰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제야 우리에게 도착한 바우만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이 새물결 출판사의 “What's up?" 총서의 4번째 책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바우만은 모더니티, 홀로코스트, 소비 사회 문제, 통합과 배제 등 현대화, 자본주의, 문명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었던 난제들을 정면으로 파고들어온 사회학자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그의 근작 중 하나이다. 1925년생으로 폴란드에서 지적 여정을 시작해 60년대 말 폴란드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 정서로 인해 영국으로 망명한 바우만은 본인이 일종의 추방자로서의 삶을 몸소 체험했다는 독특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 그가 골몰한 주제들에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망명 후 영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칼 마르크스, 게오르그 짐멜,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등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흡수하는 한편, 자신만의 독창적 개념들을 고안해 사회학?정치학 차원에서 중요한 통찰들을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저작들을 내놓았고 여든이 넘은 현재도 매년 23권의 책을 발간하면서 정력적으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바우만이지만 그동안 한국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고, 번역된 책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 출간됨으로써 모더니티의 양가성, 홀로코스트를 그 극단으로 하는 현대 사회의 통합과 배제 메커니즘, 문명화 과정의 의미에 대한 그의 사유를 한층 더 깊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책 속으로

핵심적으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일이 문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집안에 있는 도구와 자원만으로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이상 일시적 하락의 문제, 경기 과열과 또다른 경기 상승 사이의 경기 후퇴 문제가 아니다. 세금, 보조금, 수당, 인센티브 따위로 살짝 땜질해 소비자 주도의 경기 회복을 다시 한 번 불러오면 사라져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릴 일시적인 자극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문제의 뿌리들은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옮겨간 것처럼 보인다.---p.40

 

복지 국가제도는 점점 해체되고 퇴출되는 반면 비즈니스 활동과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에 부과되었던 이전의 제약은 제거되고 있다. 국가의 보호 기능은 고용이 불가능한 소수의 사람들과 병약자들만 포함할 정도로 차츰 줄어들고 있으며, 이러한 소수 집단마저 사회적 보호 문제가 아니라 법과 질서의 문제로 재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시장의 게임에 참여할 수 없는 무능력이 갈수록 범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국가는 자유 시장의 논리(또는 비논리)로부터 야기되는 취약성과 불확실성에서 손을 떼고 있으며, 이제는 그러한 문제들을 사적인 문제로, 개인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자원으로 다루고 대처해야 할 문제로 재정의하고 있다.---p.101

 

오늘날의 국가는 다른, 비경제적인 유형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을 찾아내 자신의 정당성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최근 몇 달 동안 미중앙정보국과 미연방수사국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걱정하게 만드는임무에 극렬하게 몰두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저지를지는 모르지만 미국인들의 안전에 대한 공격이 분명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미국인들을 끊임없는 경계 상태와 긴장 강화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긴장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더 긴장하면 할수록 바람직하다. 그래야 예고된 공격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긴장을 풀고 안심할 수 있다. ……국가가 경제적 불확실성에 더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개인들로 하여금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불안전에 대한 개인적 치유법을 개인적으로 모색하도록 내버려두자 공식적으로 촉발되고 강화된 집단적 두려움이 새롭게 동원되어 정치적 의도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의 안녕에 관한 시민들의 관심은 시장이 유발하는 고용 불안정이라는 불안한 지형에서 멀리 떨어져 보다 안전하고 보기에 그럴싸한 영역, 즉 통치자의 놀라운 힘과 강철 같은 결의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어 대중의 찬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영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pp.102106

 

안전에 대한 위협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이주자들은 사회적 지위의 갑작스러운 동요와 취약성으로 인해 발생한 우려의 눈길을 돌리기 위한 편리한 대안적 초점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우려가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근심과 분노를 발산할 비교적 안전한 출구가 되었다.---p.108

 

요새화된 대륙들 내부에서는 국경을 물샐틈없이 지키는 것과 무슨 일거리든 기꺼이 받아들이는 값싸고 요구가 많지 않고 유순한 노동력을 쉽게 얻는 것이라는, 현저하게 모순되지만 그만큼 중요한 두 가지 조건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새로운 사회 위계가 형성되었다. 다시 말해 자유 무역이라는 조건과 반이주 정서에 영합할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말이다. ‘어떻게 사업에는 문을 열고 사람에는 문을 닫을 수 있는가라고 클라인은 묻는다. 대답은 쉽다. 먼저 경계선을 확대한 다음 문을 걸어잠그면 된다.’---p.118

 

이러한 부류의 좌절과 운명의 역전은 전례가 없던 현상인 잉여 인구와 그것의 처리 문제에 최근에야 직면하게 된 지역들에서 한층 더 증폭되고 첨예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에 최근은 너무 늦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구는 이미 만원이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쓸 빈 땅은 전혀 없고, 현대인들로 이루어진 가족에 새로운 구성원들이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는 방향으로 경계선의 비대칭성이 확고히 굳어졌다는 뜻이다. 그들 주변의 나라들은 그들의 잉여를 반기지 않을 것이며, 과거에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강제적으로 잉여를 수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대()의 후발 주자들은 전지구적인 원인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지만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p.134

 

따라서 사회 국가의 해체와 종말을 주관하고 있는 모든 정부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의무는 국가 권위의 자기 주장과 규율에 대한 요구가 새롭게 토대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정당화 공식을 찾아내거나 끌어내는 것이다. 경제 발전의 부수적 사상자로 전락하는 것은 정부가 모면하게 해주겠다고 확실히 약속할 수 있는 곤경이 아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부유하는 테러 음모자들이 초래하는 개인적 안전에 대한 위협의 공포를 한층 더 크게 과장한 다음 점점 더 많은 경비원과 더 촘촘한 엑스선 투시기의 그물망, 더 광범위한 폐쇄 회로 텔레비전, 더 빈번한 검문, 더 잦은 선제 공격과 예방적 체포를 통해 안전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편리한 대안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p.165

 

스타이너가 카지노 문화라고 명명한 이런 문화에서 모든 문화적 산물의 가치는 최대의 효과를 짜낸 후 얼마나 빨리 낡아빠진 것으로 만드느냐를 기준으로 계산된다.---p.215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본산이자 현대판 멋진 신세계의 전진 기지인 실리콘 밸리에서 평균 고용 기간은 직종을 불문하고 약 8개월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촌 시민 누구나가 부러워하고 열심히 모방하려고 애쓰는 더없이 행복한 삶이다.---p.236

 

옛날의 빅브라더는 포함 사람들을 대열에 정렬시키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통합 하는 데 열중했다. 오늘날의 새로운 빅브라더의 관심은 배제 그들이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내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더욱 바람직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것 이다.---p.241

 

 

인간쓰레기의 사회

마침내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라는 생각을 한지 오래인데, 중년 남성의 자의식 과잉이나 자기비하를 통한 수동공격성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현대성의 이론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정일준 역, 2004/2008)에서 이야기한 바의 의미로 그렇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생산자 사회와 소비자 사회를 구분한다. 생산자 사회가 형식적으로나마 산업예비군, 사회부적응자를 교화시켜 사회로 흡수해 생산에 재활용하려는 사회였다면 소비자 사회는 사람들을 취약성에 노출시켜 급속도로 유행을 창출하고 불확실성을 가속화하며 각자도생으로 흩뿌려지도록 설계된 사회이다.

 

소비자 사회는 이른 아침의 말끔한 도심 풍경과 닮았다. 분리 배출된 쓰레기는 새벽 청소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분주히 새로운 쓰레기를 만들며 쓰레기의 향방과 그 수거자가 누구인지 무심한 채 오늘의 활력을 얻어간다. 문제는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쓰레기 안에 소비력이 모자란 살아있는 사람들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각종 불운 또는 타인에게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조차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반사회적 범죄로 간주되었다.” 마치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수 십 년 일한 노동자들이 겨우 최저임금만을 받는 현실을 구제해달라는 호소가, 여성 또한 인간답게 대우해달라는 목소리가 시민을 볼모로 삼고 불법을 획책하며 정신병이라는 듯이 말이다.

82,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관계자들이 서울 용산구 4호선 삼각지역 승강장에서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촉구하며 삭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말한 바대로 이전의 학문적 성취가 이를 능가하는 성취로 낡아질 운명이자 그것이 학문의 목적이라면, 나의 쓰레기가 되어버렸다는 우울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감정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편법과 요행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이를 발판삼아 또 다른 상품화를 꾀하면서도 식언하는 이들, 돈 되는 분야로 쏠리고 이들만의 배타적 인적 사슬이 견고화되는 학계의 풍경, 교육을 그저 직업 훈련으로만 인식하는 관료의 경박한 언사와 이를 마주하도고 침묵하거나 공모하는 관계자의 눈치 보기 속에서 쓰레기가 되는 이들은 절망을 넘어 깊은 무력감으로 침잠한다.

 

비단 학계뿐일까. 최근 아모레퍼시픽 그룹은 70년대생 팀장들을 대거 팀원으로 강등시키고 그 자리에 80년대생을 채웠다. 90년대생 재벌가 딸의 경영 승계 일환이다. 아모레퍼시픽만의 일도 아니다. 명예퇴직과 구조조정은 흡사 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진다. 바우만의 말처럼, “‘쓰레기로 지정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일부 분리된 인구만의 문제가 아니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전망이 된다.” 희소한 자원의 독점, 자본의 초거대 축적이 가능한 소비자 사회를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쓰레기로 할당되고, 배출되며, 사라져야 한다.

 

인간쓰레기의 생산, 관리, 배제에 대한 바우만의 통찰은 2022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수상작 KBS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오빛나 글·구성, 김가람 연출 2021)를 통해 탁월하게 예증된다. 다큐멘터리는 가나의 수도 아크라 해변에 밀려오는 폐기된 옷들로 시작하는데, 옷의 자리에 인간을 대입한다면 그 어떤 묵시론적 영화보다도 무섭다. 패스트 패션의 부산물과 인간의 등치가 비약일리 없다.

KBS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시장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상품과 인간의 차이는 사라졌다. 유행에 맞지 않거나 수요 예측에 실패하여, 혹은 단순 싫증으로 버려지는 옷과 싼 몸값으로 소진되고 소모되며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비참에 이르는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헌 옷이 수거되어 제3세계로 팔려나가듯, 난민과 경제 이주민 또한 모국의 터전을 잃고 새 땅으로 밀려난다. 이들 중 극히 일부만이 원래 쓰임새를 회복할 뿐이다.

 

대부분의 폐기 의류가 방치되어 쓰레기 산이 되듯, 이들은 빈민가나 게토로 흘러가고 의류 폐품이 소각되듯, 때론 집단 학살에 노출된다. 친환경 의류 재활용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바우만이 지적한 바대로 도덕적 정상성을 유지하고 싶다는 간결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유해한 인간쓰레기를 처리하고 싶다는 터질듯한 바람에 부합할 뿐이다. 결국, 덜 만들고, 적게 사고, 오래 사용할 수밖에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 속도를 늦추어 소비를 제어하고 시장 바깥의 삶을 되살려야 한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쓰레기가 되어버릴 운명이다.

 

미디어오늘 홍성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2022.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