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순의 기억전쟁-대전편>에서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대전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예비검속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에는 대전형무소가 위치해있어,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이 일어났으며 대전 골령골 등 다수의 학살 매장지가 발생했다. 박만순 시민기자는 희생자 개개인의 사연에 초점을 맞추며, 진실규명을 위해 애써온 유족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박만순 시민기자는 2002년도에 창립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으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민간인학살 관련 충북·충남내 마을조사, 문헌자료 수집 및 연구, 구술조사를 하고 있다. 2018년 현재 <충북역사문화연대>와 <사단법인 함께사는우리> 대표를 맡고 있다. 충북지역 민간인학살를 다룬 책 <기억전쟁>을 펴냈다.
1. 살인 누명 쓴 아버지, 62년 만에 진실 밝힌 딸

▲ 전재흥 ⓒ 박만순
"피고 전재흥은 할 말 있는가?" "....." "피고 전재흥은 1950년 7월 10일경 민청(民靑)에 가입하여, 괴뢰(傀儡)를 위한 활동에 종사하다가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했기에 사형을 선고한다." 1951년 2월 21일 대전에서 열린 군법회의 재판관의 얼굴은 염라대왕의 그것이었다.
군사재판이 열린 지 11일 만인 1951년 3월 4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전재흥(1926년생)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전재흥은 밧줄로 몸이 꽁꽁 묶인 채 다른 부역혐의자들과 함께 골짜기 안의 나무에 세워졌다. 지휘관의 "발사"소리와 함께 "탕탕탕" 총소리가 이어졌다. 흙이 날리면서 전재흥의 목이 꺾였다. 26세 청년이 빨갱이 짓을 했다는 혐의로 세상에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서대전사거리에서 급정거하다

▲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출신 내역의 전재흥 판결문 ⓒ 박만순
'끽' 서대전사거리에서 자동차가 급정거하면서 난 소리에 통행인들의 눈이 집중되었다. 운전을 하던 전숙자는 사거리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한국전쟁기 대전형무소 학살 위령제'라는 글씨가 주먹만큼이나 컸던 것이다.
전숙자가 2002년 7월 대전에 사는 아들집에 가다가 발견한 현수막은 순간적으로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위령제가 열린 산내국민학교로 차를 몰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인근 마을의 주민들한테 물어서 학살 현장을 찾았다. 조그만 위령비가 전숙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최소 18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장소'라는 설명이 검은 돌에 새겨져 있었다.
전숙자는 비석을 끌어안고 한동안 울부짖었다. 뒤늦게 현수막을 봐, 위령제에 참석 못한 회한도 들었지만 아버지가 죽은 장소를 처음 알았다는데 감회가 남달랐다.
그해 추석날인 2002년 9월 21일 새벽 4시에 산내 현장을 찾았다. 약간의 제수용품을 펼쳐놓고 골짜기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오늘은 누군가 오겠지' 하며 오후 늦게까지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허탈한 심정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와 그때부터 위령제 주최 단체를 수소문했다. 결국 '대전참여연대'에 연락해서 유족회 관계자와 연락이 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마치 죽은 아버지가 살아난 것처럼 반가웠다. 2005년 과거사법이 제정되었고, 2006년 3월 14일 아버지 전재흥의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다.
전숙자는 2002년부터 유족회활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 다른 지역에 위령제나 행사가 있다고 하면 모든 일을 제쳐놓고 참석했다. 자비로 기름 값, 식대 모두 부담하고 다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는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 사건은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으로 분류되어 만 3년여 기간의 조사를 거쳐 진실규명됐다.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을 받으니...
"등기 왔습니다." 받아보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온 우편물이다. 허둥거리며 우편물을 뜯어보니 기절초풍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재흥이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했지만 공권력의 불법성이 입증되지 않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된 것이 분명한데 왜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불능' 처리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군법회의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아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사형 확정 판결문 ⓒ 박만순
이때부터 전숙자는 투사의 역할을 자임했다.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불능 결정'을 통보받은 2010년 10월 6일로부터 일주일도 안 되어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요지는 '1951년 진행된 군법회의는 불법적이며 위헌적이다'라는 것이다. 즉 제헌헌법에 군사법원과 같은 특별법원의 설치에 대한 규정이 없고, 군사법원은 1954년에 관련법이 만들어지면서야 합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최능진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즉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951년 1월 20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그해 2월 21일 사형집행 된 최능진은 법적 근거도 없는 '군법회의'에 의해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는 결정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라면 전재흥 역시 당연히 불법적인 '군법회의(군사재판)'에 의해 판결되어 죽음에 이르렀기에 진실규명 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동일한 상황에서 최능진은 진실규명 되었고, 전재흥은 불능처리된 것이다. 형평성에 심대한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매일 소머리해장국을 끓인 이유
'불능 통보서'를 받은 전숙자는 허둥지둥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때 도움을 준 이가 대전유족회 부회장 이계성(81세, 논산시 성동면)이다. 당시 이계성은 서울에 거주했는데, 충무로에 있던 진실화해위원회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당신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사건 피해자였기에, 이 사건이 어떻게 조사되고 있는지 조사관에게 매일 물었다. 관련 자료도 수집하고, 대전형무소 사건 유족들이 필요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마다 커다란 도움을 줬다.
이계성은 불능 통보를 받아 얼굴이 사색이 된 전숙자에게 "계룡대로 갑시다"라며 손을 이끌었다. 육군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시로 한걸음에 갔다. 계룡대에 가서 전재흥에 관한 판결문을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20여 페이지의 판결문을 받았다. 판결문의 핵심 요지는 전재흥이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해 사형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군사재판의 절차상의 불법성은 진실화해위원회 판결에 맡겨놓은 상태였기에, 전숙자가 할 일은 별도로 있었다. 밤마다 소머리해장국을 끓였다. 들통을 들고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로 출근했다. 선동리는 아버지 전재흥이 살았던 곳이자, 아버지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라권집의 고향이기도 했다.
"어르신 저는 선동리 살던 숙잔데유. 해장국 좀 드셔 보셔유" "네가 숙자여? 어쩐 일여?" 수저로 해장국을 뜨던 선동리 노인은 전숙자의 용건을 묵묵히 들었다. "무슨 소리여? 재흥이가 구장을 죽게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노인은 "라구장은 서천등기소에서 불에 타 죽었어" 하며 펄쩍 뛰었다. 전숙자는 혹시나 해서 같은 동네에 아버지 친구와 동년배의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돌아온 답변은 이구동성이었다. 그러던 차에 라권집의 딸 라도정이 충남 서천군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며칠에 걸쳐 주거지를 확인한 전숙자는 라도정의 집을 찾았다. 하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에 하나 "당신 아버지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죽었소"라는 소리가 나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발걸음에 라도정씨가 먼저 입을 뗐다. "그란디 누구신데 자꾸 울 집에 오시는규?" 용건을 얘기한 전숙자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라도정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전숙자에게는 복음(福音)이었다.
"무슨 말이래유? 우리 아버지는 등기소에서 불에 타 죽었슈. 금이빨을 보고 시신도 수습했어유. 절대 당신 아버지 때문에 죽은 게 아니유" 서천등기소 사건은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 북한군과 지방좌익이 서천군 우익인사들을 등기소 창고에 감금하고 1950년 7월 27일 불을 질러 250여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에는 라권집이 피해자로 명시되어 있었다. 즉 라권집은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서천등기소에서 불 타 죽은 것인데, 군법회의 재판장은 전재흥 때문에 죽었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재흥 판결문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확인 절차 없이 '사형 확정 판결문'이 있다는 이유로 불능 결정 처리한 것이다. 더군다나 전재흥 때문에 죽었다는 라권집은 동일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서천등기소 사건 피해자라고 진실 규명한 상태였는데, 이 자료조차 기관 내에서 충분히 공유되지 않은 것이다.
자료와 증언을 확보한 전숙자는 만감이 교차했다. 감정을 수습하고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했다. 위원회는 2010년 12월 18일 전숙자의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전재흥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결정 요지는 '군법회의 재판이 불법적이다라는 점과 전재흥이 라권집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의제기한 지 2개월 만의 결정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불능결정 이의제기를 받아들인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불과 2개월 만에 수정·보완한 결정을 내린 것은 사상초유의 일이었다.

▲ 진실화해위원회 수정 결정문 ⓒ 박만순
그런데 2개월이라는 기간이 전숙자에게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낮에는 생업인 미용실 일을 하고 밤에는 소머리해장국을 끓여 선동리 노인들을 만나는 일과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단한 행군을 했지만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6.25때 끌려간 아버지가 누구를 죽였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라권집'이라는 사람을 죽이게 했다니, 그 사실이 믿겨지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위원회의 수정결정문을 받기 전까지 그녀의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일 밤 부여 백마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를 밤새도록 타야 마음속의 근심이 없어졌다. 이런 2개월간의 고난의 행군은 결국 몸에 이상을 가져왔다. 온갖 스트레스로 치아가 모두 빠졌다. 아래윗니가 모두 주저앉으면서 지금의 치아는 모두 임플란트다.
건강은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위원회의 수정결정문을 받아든 전숙자는 날아갈 듯 기뻤다. 마침내 2013년 1월 31일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에서 열린 전재흥의 재심은 무죄로 결정되었다. 전재흥이 살인혐의 누명을 써 학살된 지 62년만의 결정이었고, 전숙자의 진실 찾기 활동 10년 만의 일이다. 그렇다면 전재흥은 어떤 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골령골에서 이승의 생을 마감한 것일까?

▲ 무죄로 결정난 재심 판결문 ⓒ 박만순
동생에게 도민증 내주었다가 형장의 이슬로
연희전문 출신인 동생 전재원의 인공시절 활동이 문제가 됐다. 전재흥은 재원에게 도민증을 주며 피신하라고 말한다. 또 며칠 후 경찰들의 수사망이 좁혀오면서 전재흥도 피신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전재흥은 몇 년 전에도 동생의 좌익 활동 내력 때문에 피신했다가 검거된 전력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내의 목숨을 건 항의로 지서에서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산으로 피신한 전재흥은 어린 딸 전숙자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태어난 지 두 돌이 되었건만 아직도 서서 걷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먹을 것을 가져 온 아내로부터 "숙자가 섰어요"라는 소식을 들었고, 그날 밤 늦게 재흥은 마을로 내려왔다.
재흥이 집에 도착해서 숙자의 걸음마를 보던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경찰들이 군홧발을 신은 채로 방문을 열며 전재흥의 멱살을 잡았다. 전재흥은 저항했지만 여러 명의 경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끌려 간 것이 전숙자가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순전히 동생 전재원에게 도민증을 내 준 것이 도피와 검거의 이유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몇 개월 후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 이장 라권집을 살해케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써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전재흥이 숱한 고문을 당한 것은 동료 수감자와 가족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강압수사와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된 것은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의 재심결정에서 밝혀진 바 있다.
딸 숙자를 애지중지 귀여워하며 사랑했던 딸 바보 전재흥, 동네사람들 중에 생일을 맞이한 사람이 있으면 꼭 생일상을 챙겨줬던 전재흥, 동네 사랑방에서 모시를 짜는 할머니들에게 옛날 얘기책을 읽어 주던 청년 전재흥은 마을에서 인심 좋고 언변 좋은 젊은이로 이름이 났다.
그런 전재흥을 경찰과 군법회의는 빨갱이로 몰아세웠지만, 62년 후 딸 전숙자(71세. 충남 부여군 부여읍)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
2. 날 보러 왔다 붙잡혀 학살당한 아버지... 그래도 살아냈다
전숙자의 '진실을 노래하라' ②
퉁방울눈을 한 할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눈알만 좌우로 굴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할아버지 뭐 불편한 거 있어요?" "....." "큰 거 보셨구나" 전숙자는 할아버지의 바지를 내렸다. 순간 지독한 똥 냄새가 진동했다. 지난 봄에 중풍으로 쓰러진 할아버지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손녀 숙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 늘 집안이 시끄러웠다.
똥 묻은 바지를 광주리에 담아 터벅터벅 걷는데, 매서운 겨울바람이 순식간에 얇은 옷을 파고들었다. 숙자의 목은 자연스럽게 자라목이 되었다. 보통 빨래는 마을 개울에서 하지만, 똥 묻은 바지는 그럴 수가 없어 1km 떨어진 논 웅덩이로 가야 했다. 주변의 커다란 돌을 주워 얼음을 깼다. 맨손으로 얼음물에 바지를 빠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잠깐 사이에 손이 얼었지만 빨래를 중간에 멈출 수도 없어, 손을 입에 대고 '호호' 하며 빨래를 마무리했다. 손은 어느새 파란 심줄이 돋고, 손등이 얼어 터져 피가 흘렀다.
집으로 돌아와 방 안에 빨래를 너니 새벽이었다. 한 번 얼은 몸은 쉽사리 녹지 않았다. 쪽잠을 자고 나니 해가 방안을 슬금슬금 기어왔다. '아차 늦었구나' 부리나케 할아버지 식사를 챙겨드리고 학교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2교시가 지난 뒤였다. 슬금슬금 자리로 가 앉았지만 담임선생 김준수(가명)는 "전숙자! 뭐 하느라고 이제 와? 썰매 타다 늦었지, 이리 나와"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김 선생이 다그쳤지만 '할아버지 바지를 빨다가 늦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은 숙자의 아버지와 엄마가 없는 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중풍이 와서 대·소변도 못 가리는 할아버지와 둘이 산다는 것은 기특함의 대상이 아니라 놀림의 그것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답변이 없자, 김 선생은 "손 내밀어"라고 하며 대나무 회초리로 숙자의 손을 내리쳤다. 회초리가 숙자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온 몸이 경직되고, 손바닥이 터질 것 같았다. "하나, 둘...열" 열대를 맞고 제 자리에 앉으니, 머리가 핑 돌았다. 그날 밤 숙자의 손에서는 불이 났다. 손이 너무 뜨거워 방문을 박차고 장독대에 쌓인 눈에 손을 넣었는데, 눈이 녹으면서 김이 나왔다. 순간 콧등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개월 후 숙자는 학교를 그만뒀다. 결국 졸업도 못하고 4학년에서 학업을 멈추어야 했다. 동네 꼬마 녀석들이 할아버지에게 "미쳤다"며 돌을 던져, 툭하면 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할아버지가 정신을 놓은 것은 숙자가 11살 때인 1958년이었다. 면사무소 직원과 경찰들이 인구조사를 하던 때였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어디 갔냐? 작은아들한테서 편지가 왔냐?"며 시시콜콜 물었다. 순간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며 "네놈들이 우리 아들을 죽여 놓고, 뭐가 어째"하며 쇠스랑을 들었다. "이놈들 다 죽인다"며 달려들었다. 기겁한 공무원들은 달아났지만,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정신은 임종 직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지서에서 선 채로 대·소변을 본 어머니
어두컴컴한 밤에 그림자가 방문을 잡아당겼다. 동생의 피신 때문에 덩달아 산으로 몸을 피했던 전재흥이 딸 숙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온 것이다. 들뜬 맘으로 집에 온 전재흥은 곧바로 경찰에 붙잡혀, 충남 서천군 시초면 시초지서로 연행되었다. 딸이 태어난 지 이틀만인 1949년 1월 8일이었다.
다음날 아내 장복순(1924년생)은 허리까지 온 눈길을 허우적거리며 4km 떨어진 시초지서로 갔다. 남편은 유치장에 갇혀 있어, 지서장에게 항의했다. "내 남편이 뭔 죄가 있다고 여기에 가두는 거예요?" "당신 시동생 전재원이 때문에 그런 거야" 장복순이 다시 항의했지만, 지서장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내 남편 풀어주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요"란 말을 끝으로 장복순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장복순이 해산 직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찰들이 안달이 났다. "아주머니 그러지 말고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라며 달랬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복순은 선 채로 대·소변을 봤다. 경찰들은 기겁을 했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결국 이틀 만에 지서장이 백기를 들었다. 전재흥이 각서를 쓰고 지서에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전재흥은 가족의 평온한 삶을 위해 좌익 활동 중지 선언을 했지만, 동생의 일에 본의 아니게 또 관여되었다. 동생이 북한군 점령시절 활동 혐의로 도피하게 되었다. 이때 도민증을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되어 전재흥은 또 다시 도피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도피 중에도 딸의 신상이 늘 관심이었던 그에게 '숙자가 서게 되었다'는 소식은 가뭄의 단비였다.
야심한 시각 집으로 와 숙자의 걷는 모습에 기뻐하던 그는 얼굴에 웃음이 가시기도 전에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그가 검거되는 과정에서 딸 숙자는 군홧발에 차였고, 어머니 구덕환은 총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맞아 탈골이 되고, 죽기 전까지 청각장애자로 살아야 했다. 전재흥은 서천경찰서를 경유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고, 사건은 조작되었다.
아버지 전봉준이 대전형무소로 면회 갔을 때 아들 전재흥은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다. 동생에게 도민증을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된 이를 '우익인사 라권집을 살해케 했다'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숱한 고문이 자행되었고, 회유의 손길이 뻗치기도 했다. 하루는 충남 서천경찰서 경찰이 전봉준에게 찾아와 "전 재산을 바치면 아들을 빼주겠다"고 한 것이다. 다음번 면회 때 전봉준이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전재흥은 "아버님 제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재산을 바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조만간 석방될 테니까요"라고 했다. 하지만 듬직한 아들의 이야기만을 믿었던 전봉준은 이후에 영원히 아들을 볼 수 없었다.
자살 시도 후유증, 혼수상태서 강제 결혼

▲ 증언하는 유족 전숙자 ⓒ 박만순
전재흥이 학살된 후 아내 장복순은 딸 숙자가 크는 것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살았다. 하지만 전봉준은 며느리가 개가하기를 원했다. 전봉준이 독한 마음을 먹고 며느리를 집에서 내보내기로 작정한 것은 1951년이었다. 그는 며느리가 기거하던 방의 구들장을 파헤치고 방문을 뜯어 창고에 처박았다.
쫓겨나다시피 장복순은 집에서 나갔고, 딸 숙자는 그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 1958년 할아버지에게 중풍이 와 3년 6개월간 고생하다가, 생을 달리했다. 할아버지에게 중풍이 오면서 숙자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고모들이 집안 재산 관리를 하면서 전숙자가 일 년 내내 농사꾼 뒷바라지를 해 수확한 농작물은 고모들의 차지가 되었다. 고모들은 할아버지와 전숙자가 연명할 최소한의 농작물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가져갔다.
전봉준이 죽고, 전숙자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해 수면제와 쥐약을 마셨다. 하지만 누군가 위세척을 시켜서 간신히 살았지만 2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상태에서 그녀는 강제결혼을 당했다.
백마강 귀신은 다름 아닌 나였다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은 13세나 연상이었다.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결혼생활에 좌절을 한 전숙자는 다시 한 번 삶을 포기하려 했다. 땅콩 농사를 짓던 때, 그녀는 백마강에 뛰어 들었다. '풍덩' 소리와 함께 몸이 강바닥으로 쭉 가라앉았다가 하류로 둥둥 떠내려갔다. 그러다가 모래톱에 걸렸다.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모래톱에서 다시 한 번 강물로 뛰어 들려고 했다.
강물로 뛰어 들려는 순간 강물에는 웬 귀신이 있었다. 머리가 가슴까지 내려온 귀신이 써늘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겁을 한 그녀는 땅콩 밭으로 돌아왔다. 원두막에는 자식이 자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 신세가 이런데, 내가 죽으면 저 놈도 똑 같은 신세가 되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죽음의 기운을 몰아냈다. 물론 백마강 귀신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강물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 것인데 기겁을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보따리 장사, 여관 식모 등을 전전했다. 하지만 이런 일로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을 했다. 1979년 겨울, 1개월 15일 동안 미용실에서 기술을 배웠다. 1980년 100만원을 대출 받아 미용실을 차렸다. 의자와 미용재료는 모두 중고였다. 그렇게 시작한 미용실은 사업이 날로 번창해 애들 3명을 대학까지 가르치고, 노후생활을 준비하게 해준 진정한 효자였다.
시로 진실을 노래하다

▲ 전숙자 시집 <진실을 노래하라> ⓒ 박만순
2002년부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던 전숙자(1948년생, 충남 부여군 부여읍)는 2004년부터 전국의 위령제에 참여하면서, 곳곳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각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유가족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전쟁 당시의 참혹함을 시로 엮었다.
전숙자가 각 지역 위령제에 시를 낭독할 때는 단순한 시 낭독이 아니라 '눈물의 물결'이 연출된다. 2018년 충북 청주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시 낭독이 있었다.
달빛마저 푸르른 1950년 광풍이 몰아치던
그 여름밤 대학살의 현장 막고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대학살
내려 보던 북두칠성마저 통곡하던 밤 (중략)
이불 홑청에 말아 짊어지고
죄인처럼 숨어 옥녀봉을 내려올 때
땅인지 절벽인지 혼은 떠서 허공을 맴돌고
망연자실 통곡마저 삼켜야하는
김병묵 형님 원통해 녹아내리는 저 가슴을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
어찌 하오리까~~? ('그 여름밤의 광풍' 중에서)
한국전쟁 당시 충북지역에서 있던 민간인학살 장면을 시로 부활시켰다. 그가 시를 낭독하는 동안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전숙자는 다니는 곳마다 눈물을 몰고 다닌다. 본인도 서럽게 울지만, 그의 시는 듣는 이에게 공감을 일으켜 울 수밖에 없게 만든다. '눈물 바이러스'를 전파시키는 것이다. 실컷 울고 나면 눈과 마음이 맑아진다.
전숙자는 2006년 '백두산문학회'를 통해 등단하였고, 2017년에 시집 <진실을 노래하다>를 출간했다. 이제는 유족이자 '시인' 전숙자다. 시로 진실을 노래하는 그가 많은 이에게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주길 기대한다. 19.315
3. 마취도 없이 허벅지살 25㎝ 어머니에게 이식한 아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임우영... 남겨진 가족에게 생긴 일들
송병순은 꼴머슴을 앞세워 집을 나섰다. 보리 방아를 찧으러 가는 길이다. 지게에 보리를 잔뜩 싣고 뚜벅뚜벅 걷는 꼴머슴은 얼마 안 가서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8월 말의 날씨는 여전히 뜨거웠기 때문이다. "잠시 쉬었다 가자." "네." 송병순과 꼴머슴은 손부채로 땀을 식히고 횡기에 있는 방앗간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송병순이 사는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중자작(새땀)에서 횡기까지는 800m에 불과했지만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은 그들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더군다나 송병순은 황달이 걸려 눈자위는 노랗고 빈혈기가 있었기에 식은땀마저 흘렸다.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어요." 방앗간 주인은 환한 웃음을 지며 송병순을 맞이했다. "잘 좀 찧어줘요." 주인은 보리를 찧기 위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당시 용화면 자계리에 있던 방앗간은 전기나 석유로 발동기를 돌리는 곳이 아니었다. 참숯을 때어 그 화력으로 발동기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제국주의가 부족한 연료난을 해결하기 위해 숯을 자동차 연료로 썼던 목탄차(木炭車)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잠시 후 '쉭쉭' 하는 소리와 함께 발동기가 돌아갔다.
방앗간 주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송병순은 보리가 잘 찧어지는지 보기 위해 기계 앞으로 갔다.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쓰러졌다. 주인과 꼴머슴이 황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송병순의 치마가 발동기 피댓줄에 휘감기면서 그녀의 하반신이 기계에 끌려간 것이다. 하반신이 파열되면서 피가 사방에 튀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손을 부들부들 떨던 주인은 밖으로 뛰어가더니 잠시 후에 트럭을 타고 왔다. 군용트럭을 이용해 벌채된 나무를 운송하던 트럭이었다. 당시 충북 영동군은 산림지대로 목재 생산의 주요 지역이었다. 트럭에 실린 송병순은 영동군 구세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허벅지 살 25cm 잘라내

▲ 해방 후 임우영의 모습 ⓒ 박만순
피도 부족했지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을 이식하는 게 중요했다. 응급실 의사는 가족들에게 그녀의 상황을 설명하고,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만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 순간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리던 큰 아들 임세환(당시 16세)이 "선생님, 제 허벅지 살을 잘라 내주세요"라고 말했다. 모두 눈이 동그래졌지만 어느 누구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세환은 수술실 안의 어머니 옆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들은 헝겊으로 그의 손목을 침대에 묶었다. 1954년 당시 영동 구세군병원은 마취시설이 안 되어 있을 만큼 시설이 열악했다.
"악~~~" 병원이 떠나가는 소리가 났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의 허벅지 생살을 25cm나 잘라 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도하는 의사나 돕는 간호사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지만 이들은 묵묵히 수술에 전념했다. 몇 시간 만에 수술실에서 나온 의사에게 가족들이 몰려들었다. "선생님, 결과는 어떻습니까?" "글쎄, 경과를 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들의 생살을 이식받은 어머니 송병순은 건강이 악화되기만 했다. 당시 의료기술 수준으로는 그녀의 삶을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사고 6개월 만인 1955년 3월 2일 송병순은 사망했다.
'효자선생' 가족 돕기 성금

▲ 임세환 사망 관련 기사-경향신문 ⓒ 박만순
"지난 10일 영동역 광장에는 60여명 의 어린이들과 교육계인사들이 열차에서 내리는 말 없는 유해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효자 선생으로 불리던 임세환 교사(31세)의 유해는 발을 구르며 울부짖는 제자들의 울음 속에 장지로 향했다." (경향신문 1968년 2월 19일자)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25cm나 잘라낸 임세환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68년 1월 9일 부산복음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수술한 일로, 작고하기 전까지 병마와 싸웠다. 과다 수혈과 피부 이식 수술의 후유증으로 악성빈혈에 시달린 것이다.
영동중학교와 영동농고를 졸업한 그는 명지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문리대 사범대를 나와 고향 영동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영동초등학교에서 조회를 할 때에 빈혈로 쓰러지기 일쑤였고, 사정을 알고 있던 교사들의 마음은 새카맣게 탔다. 그러다 결국 만 30세의 나이에 아내와 어린 딸 둘을 남겨놓고 세상을 하직했다.
고인이 담임을 맡았던 영동초등학교 3학년 4반 학생들을 포함한 전교생이 유가족을 돕기 위해 모금에 나섰고 12만원을 전달했다. 1968년 12만원은 2019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500만원이다. 초등학생 모금액으로는 거액임을 알 수 있다.
임세환이 어린 나이부터 가장(家長)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송병순의 남편은 어디 있었기에 아내와 어린 자식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추억

▲ 용화면사무소 근무시절의 임우영대전호적사무협회영동지부기념사진 - 둘째 줄 우측 두번째가 임우영 ⓒ 박만순
아버지 임우영은 둘째 아들 임두환에게 '맥가이버' 같은 존재였다. 뚝딱하면 책상이 만들어졌다. 또한 집에서 필요한 공구나 물품 웬만한 것은 아버지 손을 거쳐 탄생했다. 한국전쟁 전에 아버지는 집에서 책상을 당신 손으로 손수 만들었다. 그 책상을 아들 임두환은 70년 동안 보관해오고 있다. 이제는 낡아 색이 바래고, 실제 사용되지는 않지만 의미가 남다른 물건이다.
70년 된 책상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녹아 있다. 색 바랜 책상은 70년 동안 보존되어 왔는데, 아버지는 69년 전 생을 달리했다. 현재는 대전광역시가 되어 있는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된 것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까지 사망했다는 이곳에서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도 사망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전 대전형무소는 전국 각지에서 온 정치범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형무소에는 대전·충남 지역 정치범들과 제주 4.3사건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타 지역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헌병대의 지휘를 받은 군인과 경찰은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명 이상을 처형했다. 학살지는 대전 산내 골령골이다. 산내에서는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 보도연맹원들이 함께 처형되었다.
충북 영동군에 거주하던 주민 중 전쟁 전에 국가보안법 등 시국사범 위반자들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영동과 옥천은 행정구역이 충북이지만 생활권은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영동군 정치범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들이 산내에서 학살된 것이다.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에 살았던 임우영이 산내에서 학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수배자를 숨겨주다

▲ 영동경찰서가 작성한 의견서철 ⓒ 박만순
용화면 임우영(1916년생)은 용화면 자계리 출신으로 해방 후(1947.4.1.~11.15)에 용화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무원이었던 그는 해방 후에도 그 직을 이어나갔다. 임우영의 활동내역과 전쟁기 학살정황은 지역주민들의 구술증언과 더불어 영동경찰서의 관련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우영은 1948년 1월 송재웅 사건으로 인해 1948년 4월 1차 구속을 당했는데, 송재웅 사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48년 1월 31일 제10구경찰서(영동경찰서) 용화지서 소속 순경 곽순영은 1946년 10월 3일 영동에서 발생한 좌익 폭동의 주모자로서 포고령 위반으로 수배를 받아오던 이필영이 용화면 자계리 임우영가에 은신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 지서 순경 조용두, 안정희, 김대석, 정해걸 등 4명과 함께 동 가옥을 급습하자 마침 이곳에서 벌목을 위해 기숙하고 있던 피해자인 송재웅이 갑작스런 경찰의 출현에 놀라 도주를 하므로 마당에서 경비를 서던 동인이 이를 수배자로 오인하고 추격하여 격투를 벌이다, 곽순경이 총기를 탈취하려는 피해자에게 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소지하고 있던 99식 장총을 발사하여 현장에서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영동경찰서, <의견서철>, 1949)
위 사건이 임우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임우영은 좌익 활동 혐의로 1949년 10월에 다시 영동경찰서에 연행되어 1949년 말에 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석방을 1년여 앞둔 시점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대를 이은 사랑
임우영이 학살된 후 아내 송병순은 자식 셋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데 1954년 불의의 사고로 1년 후인 1955년에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임세환 남매는 뜻하지 않게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러자 임세환의 숙부 임만영(1930년생)은 팔을 걷고 임세환 남매를 챙겼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영동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교직의 길을 걸었다. 이때부터 세환, 두환, 숙자 3남매를 한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모든 숙식과 생활을 챙겼다. 결국 큰 조카 세환은 대학까지 가르치고 나머지 조카들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쳤다.
당시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우면 자기 자식들도 초등학교·중학교까지만 가르치던 것이 일반적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카들을 고등학교·대학교까지 가르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임만영은 현대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교를 나온 이부영과 결혼 후 2남3녀의 자식을 모두 교육자로 키워 '교육 집안'으로 호를 날렸다. 그는 이후 한양대학교와 인하전문대학 강사를 거쳐 서울교육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특히 1996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내리사랑의 바통은 임두환이 이어받았다. 임두환은 1968년 형 세환이 사망한 후 조카 둘을 책임졌다. 형수가 개가했기 때문에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는 숙부가 자신의 형제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카 둘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살면서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시집을 보냈다. 대(代)를 이은 내리사랑이다.
영동대교에 세워진 모자(母子)상

▲ 영동대교 앞에 세워진 모자상 ⓒ 박만순
2010년 11월 22일 충북 영동군 영동대교 앞에는 영동군 주민 300여명이 모였다. '효자 임세환 선생상' 건립식이 있었다. 임세환의 선행을 기려 영동군이 1억 원을 들여 모자상(母子상)을 건립한 것이다. 임두환(영동군 영동읍·80세)은 평생 자신의 삶의 과제로 삼았던 두 번째 일을 마무리해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는 생의 첫 번째 과제였던 부친 임우영의 명예회복도 해결한 상태였다. 2002년부터 시작한 부친의 명예회복운동이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으로 분류되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되었기 때문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활동 중간에 암이 발생해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약 10년 만에 부친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일궈냈다.
임두환은 부친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후에 심혈을 기울여 형님의 선행에 대한 공론화와 동상건립운동을 추진했다. 그 결실이 2010년 말에 이루어졌다. 임두환은 "형님의 선행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청소년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효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한국전쟁기에 국가폭력에 의해 많은 가족공동체가 붕괴되었다. 이후 연좌제에 의해 또 한 번의 고통을 받아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단절된 삶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밖에 없었다. 한국의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는 주로 여성의 희생에 의한 남성의 성공신화가 주를 이룰 뿐이었다.
그런데 임두환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임우영이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되었음에도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가족애를 발휘함으로써 가족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지역사회의 귀감이 된 것이다. 임만영-임세환-임두환으로 이어진 가족사랑·인간사랑의 정신은 개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사회 속에서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가치이지 않을까?

▲ 아버지 70년 전에 손수 만든 책상 앞에 있는 임두환 ⓒ 박만순
4. 아버지는 대전, 할아버지는 광주... 제주 사람이 왜 거기서 죽었을까
[4.3 특별편] 연좌제에 고통받았던 양성홍씨의 이야기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귀국하는 양두량의 가슴은 터질 듯이 기뻤다. 지긋지긋한 징용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간다니 이보다 기쁠 수가 있는가. 배 안에 있는 수백 명의 동료들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 일제군국주의자들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눈알이 빨개졌다. 소위 '총알받이'와 전쟁터의 '일꾼'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던 양두량(1924년생)도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가, 해방과 동시에 귀국길에 올랐다. 갑판 위에 선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원하지 않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경찰 시험에 합격했으나...

▲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경찰 ⓒ 강요배
2년 전 관부연락선의 갑판 위에서의 결심은 양두량을 제주경찰서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지난 2년간 그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이호리 오도룡 마을 처녀 김열을 만나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아들 성홍을 낳았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배였다. 그러다 보니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1947년 3월 1일 있었던 사건과 이후 몇 개월 사이 제주의 모습을 보면 생각이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3월 1일 그는 제주북국민학교에 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연동리 사람 모두 참석했다. 이 집회는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였다. 1919년 만세운동을 기념하자는 취지였지만, 그보다는 1년 6개월 동안 실시된 미군정의 실정(失政)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제주도민을 포함한 조선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 것은 불과 한두 달이었다. 일장기가 있던 자리에 성조기가 꽂이더니 일제강점기 때 '공출'보다 심한 '미곡수집'이 실시되었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무엇보다 도민들의 가장 큰 원성을 산 것은 친일 경찰의 재등용이었다.
불만이 극에 달한 제주도민들이 북국민학교에서 집회를 마치고 관덕정 앞에 도착했을 때 사건은 터졌다. 말에 탄 경관의 말발굽에 치여 한 아이가 쓰러졌는데, 기마경찰이 그냥 가 버리려 한 것이다. 항의하는 군중들이 경찰서로 향하자 경찰은 사격을 가했다. 이날 사격으로 6명이 사망했다.
이날 이후 제주도에는 시위 주도자 검거령이 내려졌고, 여기에 양두량의 큰 처남 김민하도 체포돼 구류를 살았다. 제주도에는 육지 경찰들이 소위 '응원 경찰'이라는 명분하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했고, 제주도민을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찰시험에 합격한 양두량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애초에 그가 경찰시험에 응시한 것은 건국 과정에서 뭔가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소박한 뜻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정국이 급속하게 변했고, 민중이 원하는 경찰은 제주도 어느 곳에도 없었다. 아니 식민지 시절보다 더 무서운 경찰들이 득시글했다.
잠시 처자식의 생계 때문에 고민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양두량은 경찰 합격통지서를 미련 없이 확 찢어버렸다. 1947년 여름이었다.
무차별적 사살... 가족을 잃은 사람들
'흑'하며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왜 그래?"하며 양두량이 아내를 부축했지만, 아내는 이내 기절했다. 옆에 서 있는 사내는 어쩔 줄 몰라 얼굴이 빨개졌다. "이보시오. 무슨 소리를 했길래 내 아내가 이런 거요?" 사내는 마치 자기가 죽을 죄를 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예. 큰 서방님(양두량에게는 큰 처남)이 경찰들한테 총에 맞아 돌아가셨답니다" 했다.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오빠의 사망소식을 들은 아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자신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작년 3.1절 기념식 사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 고생을 한 큰 처남이 경찰 총에 맞아 죽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기절초풍할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처남 사망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돼 4.3사건이 터지고, 제주도 곳곳은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
"탕탕탕"하는 총소리와 비명이 이어졌다. "악" "컥" 경찰과 군인들의 토벌작전이 본격화되면서 여러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양두량이 사는 제주읍 연동리에서도 벌어졌다. 캄캄한 밤에 군경은 마을의 집에 불을 질렀고,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움직이는 물체에는 모두 총질을 해댔다. 송요찬 9연대장이 지난 1948년 10월 17일 내린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에 허가 없이 출입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한다"는 포고령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포고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는 이의 절대 다수는 여성과 어린아이였다.
양천종의 용기
연동리 마을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양두량 아내 김열은 마을이 불타는 상황에서 가재도구와 옷가지를 챙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아기 성홍을 건사하는 것만이 관심사였다. 마을의 젊은 남자는 경찰과 군대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고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들은 따로 움직였다. 그 피난 와중에 양두량은 아내 김열과 헤어져 산속으로 들어갔다.
며느리와 손자와 함께 몸을 피한 시아버지 양천종(1898년생)은 그 상황에서도 양식을 챙겨 왔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이윽고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움직였다. 산에 노숙할 수는 없었다. 추위가 문제가 아니라 군인에게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인근에 굴이 있는지 찾아다녀, 몇 시간만에 굴 하나를 발견했다. 연동리 사람 모두가 그 굴로 이동했다. 굴 안에 누운 김열은 '여기서 얼마나 보내야 하나?'고 생각을 하자 한숨부터 나왔다.
다음날 해는 여지 없이 뜨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는 만무다. 우선은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군인과 경찰들의 방화에 갑자기 집에서 뛰어 나오느라 양식을 챙긴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며칠이 될지 모르는 피난길에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한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에 한라산에 산과일이나 채소도 전무했다. 결국 방법은 하나다. 다시 마을에 내려가서 양식을 가져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양식을 군인과 경찰이 불 지르거나 탈취해 갔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집 뒤곁에 양식을 숨겨놓은 비상식량이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채울 사람이 누구냐'였다. "내가 하겠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는 양천종이었다.
"안 돼요, 아버님"하며 김열이 시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 우리 모두 굶어 죽을 때까지 그냥 있냐? 성홍이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갔다 와야지 누가 가겠냐?"
양천종은 당시 연동리에서 노인 축에 끼였다. 하지만 젊은 남자들은 일찌감치 토벌대의 눈을 피해 입산했기에, 이곳에는 노인들과 여성, 어린이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 양천종이 자원했을 때 누구도 만류할 수 없었다.
어둠이 산자락을 모두 집어삼키고도 한참이 지난 후 양천종은 산을 등지고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가 동굴로 다시 온 것은 새벽이 다 되었을 때였다. 찬 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그의 얼굴은 땀이 비 오 듯했다. 양천종은 서 있을 힘도 없었지만 며느리에게 "아가, 이거 얼른 죽 쒀서 성홍이 멕여라"고 말했다.
그는 가져온 양식을 마을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주었다. 받는 이들은 면목이 없었지만 달리 양식을 구할 길이 없어, '고맙다'며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양천종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일을 몇 차례 더 자원했다.
자식은 대전형무소로, 아버지는 광주형무소로

▲ 행방불명자 묘역제주 4.3당시 행방불명된 이들의 집단묘역 ⓒ 박만순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49년 초 산으로 갔던 젊은 남자들도, 피난을 갔던 마을 사람들도 마을로 내려왔다. 경찰의 선무 방송만 믿고 자수를 한 것이다.
이후 양두량은 주정공장에 구금됐다가 대전형무소에 정식 수감됐다. 그는 주정공장에서 '손가락(손가락 가리키는 대로 이뤄진) 재판'을 통해 받은 7년형을 선고받았는데, 혐의는 1948년 이후 좌익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제주농업학교를 나온 양두량은 항상 지식에 목말라 했다. 수감 생활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쓸 때면 '아버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로 시작해 아들 성홍의 건강을 묻고는 이내 '책 좀 보내주시오'로 이어졌다.
아내 김열은 반가움과 동시에 서운함이 몰려 왔다. 그렇게 기다렸던 남편의 소식이었건만, 책을 보내 달라니, 너무나 무정한 이였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철창 안에서 책을 읽을 엄두도 못 낼 텐데'라는 생각을 하니 존경의 마음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김열은 책과 옷가지, 그리고 꿀을 대전형무소로 보냈다.
수감 상태에서 한국전쟁을 맞은 그는 1950년 7월 초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동료들과 함께 대한민국 군경에게 처형 당했다.
골령골에서 화약 냄새가 채 가시기 전 빛고을 광주에서는 아버지 양천종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양천종이 광주로 가게 된 경위는 파악되지 않는다). 죄명은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 군경의 토벌을 피해 한라산에 피신했을 때 목숨을 걸고 집에서 양식을 가져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준 것이 죄가 된 것이다. 이른바 '폭도에게 음식을 제공한 죄'였다. 굶는 이웃을 보고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게 정상이지, 그게 죄가 될 것이라고는 양천종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들은 대전에서 학살되고, 아버지는 광주에서 학살됐다.
4.3은 끝났는가?
상처에는 경중(輕重)이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상처는 받을 때마다 고통스럽다. 김열의 경우가 그렇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한국전쟁 초기에 대전과 광주에서 죽었다. 그런데 친정식구들은 4.3때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초토화되었다.
큰오빠 김민하는 4.3 전에 학살되었고, 작은오빠 김순하도 학살되었다. 큰 오빠의 딸은 4.3 당시 행방불명되었고, 조카 김상훈(김민하의 아들)는 제주읍 해안동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 친정아버지는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한국전쟁 전에 자살했다. 4.3 사건으로 김열은 친정에서 5명이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되고, 시댁에서는 2명이 학살된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조카들의 죽음과 행방불명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 오빠 김순하의 유해가 제주국제공항 유해 발굴시 DNA 조사로 확인된 것이다. 유해는 찾았지만 오빠가 되살아오지는 못했다.
양두량의 아들이자 양천종의 손자인 양성홍(1947년생. 제주시)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집안이 4.3의 상처로 얼룩진 것을 정확히는 몰랐다. 제주중학교를 나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것을 생각했던 그에게 '빨갱이 자식'이라는 딱지가 그의 꿈을 산산조각 냈다. 고2 때 친척이 "너는 아버지가 4.3때 죽어서 육사에 못 가니 일찌감치 다른 길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던 것이다.

▲ 양두량 묘석아버지 양두량 묘석 옆에 앉아 있는 양성홍 ⓒ 박만순
그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학업을 일절 포기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이 "성홍아, 상업학교 가라"고 했던 말이 번쩍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 담임 선생은 양성홍의 집안 사정을 알고 상업학교 진학을 권유했던 것이다.
성홍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선거관리위원회에 취직했는데 3개월 만에 해고되었다. 역시 신원 조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1980년까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살다가 1981년에야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다보니 1987년 민주화 이후 제주사회에 불붙은 4.3 진상규명운동을 알았지만 동참할 수 없었다.
1992년부터 건설업을 시작했지만, 그때도 4.3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입찰에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1999년 '제주 4.3 특별법'이 생긴 이후였다.
4.3 유족들이 막은 송요찬 선양 사업

▲ 청양군이 진행한 송요찬 선양사업 반대시위 ⓒ 오마이뉴스 심규상
"제주교육청인데요."
기자에게 '4.3 평화공원'을 안내하기 위해 운전대를 잡은 양성홍에게 전화벨이 울렸다. "제주교육청 ○○○장학사인데요"로 시작된 통화의 골자는 올해 진행되는 인권교육의 교육 일정에 관한 협의였다.
제주교육청에서는 제주도내 초·중·고생들에게 '4.3'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4.3유족회' 회원 중 36명을 '명예인권강사'로 선정해 인권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양성홍도 참여하고 있다. 2017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이석문 교육감에 의해 4.3이 일어난 지 69년 만에 진행되는 것이다. 양성홍은 대기고등학교, 오름중학교, 한라중학교, 한라초등학교에서 인권강좌를 진행했다.
그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3유족회 대전위원회' 회장을 맡았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이후 민사소송이 진행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 받은 114명 중 72명이 재판에 참여해 전원 승소했다. 이때 양성홍은 회장으로서 회원들을 설득해 재판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적지 않은 회원들이 인지대라는 경제적 부담과 승소에 대한 불안감으로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회원들이 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완전히 씻기지 않은 '피해 의식'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는 도장을 받고서도 여전히 그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그는 유족회 활동 중 기억에 남는 일로 '송요찬 선양사업 반대 운동'을 꼽았다. 2017년 충남 청양군은 10억원을 들여 이 지역 출신인 송요찬의 생가와 동상, 기념관을 재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미 보훈처에서 3억이 내려왔고, 충청남도에서도 예산 3억이 확정되었다. 나머지 4억은 청양군이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송요찬이 어떤 인물인가? 송요찬은 일본군 출신인데다가, 제주 4.3민간인학살, 1950년 보도연맹원 및 형무소재소자 학살을 지시 또는 실행한 인물로 꼽힌 이였다.(관련 기사: 4.3유족회 "학살자 송요찬을?" 청양군수 "먹고 살려고...")
4.3 때 평화협상을 이끌었던 김익렬이 해임되고, 후임 박진경이 부하들에게 사살된 후 제주도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데 진두지휘를 한 9연대장이 송요찬이었다. 송요찬이 자신의 삶에서 공(功)이 있다면 4.3은 용서할 수 없는 과(過)인 것이다. 그런 이에게 지방자치단체가 공적인 예산을 들여 선양사업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성홍은 유족회 임원들과 함께 충남 청양군을 찾아 군수를 면담하고 항의했다. 결국 충청남도와 보훈처, 청양군이 사업을 철회했다.
70세를 훌쩍 넘긴 양성홍은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인권교육을 하는 것을 생의 기쁨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제주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인권교육에 커다란 애정을 갖고 있다. 양성홍과 제주도민의 노력으로 제주도가 진정 평화의 섬으로 우뚝 서길 기대해 본다.
5. 발가벗고 곡을 한 형수와 시동생... 그 다음은 생매장이었다
[외전-가평편] 1950년 양방마을의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도 안 돼

▲ 증언자 이봉열씨의 국민학교 졸업식 모습. 둘째 줄 맨 왼쪽이 이봉열 ⓒ 박만순
"전부 옷 벗어!" 방 안에 있던 이들은 기겁해 눈만 껌벅였다. "이 빨갱이 새끼들, 전부 벗으라니까!" 하며 가까이 있던 노인네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노인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대한청년단원은 발로 노인의 가슴을 짓밟으며 "빨리 일어나지 못해" 하며 몽둥이를 노인의 머리로 향했다. 노인은 신음소리를 내며 주춤주춤 일어났다. "옷 벗어" 대한청년단원은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노인에게 반말을 하며 옷을 벗게 했다.
노인은 할 수 없이 겉옷을 벗었다. 하지만 차마 속옷을 벗을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젊은 여성과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며 "빤스도 벗어! 벗기 싫으면 여기서 죽을 줄 알아" 호령을 내리는 대한청년단원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눈동자에 핏줄이 서고 생사람도 잡아먹을 표정을 하고 있는 이는 이웃 마을 청년이었다.
전부 발가벗겨진 노인은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발개지고,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그 정도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청년단원들은 노인의 손을 뒷결박 지었다.
"이 빨갱이 노인네처럼 전부 벗는다. 벗는 시간은 3분이다. 벗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뒈질 줄 알아!" 청년단원의 살기등등한 목소리는 천장까지 닿으며 방안에 윙윙 퍼졌다.
젊은 여성들은 흑흑 울음소리를 내며 할 수 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예외는 없었다. 어린아이도 예외 없이 옷을 벗어야 했다. 방 안에 있던 20명의 노인, 여성, 청년, 아기 모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옷을 벗었다. 청년단원들은 킥킥거리며 준비한 새끼로 손을 묶었다.
"전부 걸어."
1950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양방마을에서 벌어진 일
11월 말. 칼바람이 불었다. 옷이 모두 벗겨진 이들의 몸은 움츠러들었고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발가벗겨진 채 마을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손이 묶인 상태에서 걷기에 눈을 감을 수도 없고, 중요 부위를 가릴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머리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었다.
마을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이봉열(당시 15세)은 갑자기 나타난 해괴한 행렬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소년 일행은 볏집단 뒤로 숨어서 행렬을 구경했다. 처음에는 대낮에 어른들이 전부 옷을 벗고 걸어가는 것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호기심에 차서 봤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발가벗겨 가는 이들의 손이 묶여 있고, 울면서 걷는 것이 아닌가. 이봉열이 더욱 놀란 것은 그 대열에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외삼촌과 외숙모, 막내 외숙모와 딸, 이모의 시아버지가 있었던 것이다. 막내 외숙모 딸은 불과 3살이었고 발가벗겨진 채 외숙모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이봉열 역시 얼굴이 붉어지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수치(羞恥)의 대열에는 형수와 시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피울음만을 낼 수밖에 없었다. 형수와 시동생, 부부, 사돈 되는 이들 20명이 대낮에 발가벗겨 걷고 있으니...
이 대열은 1950년 9월 말 가평 용문산 자락에서 인민군에게 학살된 이의 상가(喪家)에 멈췄다. 두 달 전에 죽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상가에 있던 이들 중 일부는 놀라 얼굴을 돌리기도 하고, 일부는 킥킥 거리고, 어떤 이들의 얼굴에는 적개심과 고소함이 묻어났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상가 집의 망인(亡人)은 인민군에게 죽은 것이고, 발가벗겨진 이들은 소위 부역자의 가족이었다. 즉, 이념대립의 양편에 속한 가족이라 할 수 있다.
"전부 무릎 꿇고 곡(哭)해!"
끌려온 20명의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울음이 터졌다. 망인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이자 서러움의 표현이었다. "아이고" "흑흑" "엉엉"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누가 일부러 시키지 않아도 터질 수밖에 없는 울음이었다. 1950년 11월 말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양방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숯가마에 묻혀 죽고
"부른 사람들은 얼른 나오기요." 북한군은 마을에 나타나 4명의 청년들을 호명했다. 총을 들고 있는 북한군의 명령을 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호명을 당한 청년들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동무들, 이 짐을 지게에 싣고 함께 갑시다."
인민군 대열과 4명의 청년들은 추석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 25일 달그림자와 함께 용문산을 향했다. 짐은 그리 무겁지 않았지만, 청년들은 '짐을 모두 옮긴 후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 걱정을 입 밖으로 내어 북한군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목적지인 용문산에 도착했다. 북한군들은 "동무들, 집으로 돌아가서 여기 위치를 이야기하면 안 되오. 모두 가시오" 하면서, 자기네 일행 2명을 산 아래까지 바래다 주라고 시켰다. 양방마을 청년 4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들이 가슴을 쓸어내린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 산 아래까지 바래다 줄 것으로 알았던 군인들은 인민의 편에 선 군인(인민군)이 아니라 저승사자였던 것이다.
산 정상에서 내려와 8부 능선에 있는 숯가마에서 북한군은 양방마을 청년들에게 정지할 것을 명령했다.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청년들에게 총알이 날아들었다. "탕탕탕!" 순식간에 청년들이 고꾸라졌다. 북한군들은 주변의 흙과 낙엽으로 시신을 덮었다.
수장당한 남편을 살려낸 아내
비슷한 시각 청평호 끝자락에서는 후퇴하는 북한군들이 우익가족들을 배에 태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빨리빨리 타라우." 북한군들은 총구를 우익가족들을 향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낮에는 미군의 공습 때문에 꼼짝 못하는 북한군들이 야심한 시각에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에 의해 배에 실리는 우익가족들은 한결같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고 몸은 옴짝달싹 못하게 새끼로 묶었다. 동작이 더딘 이들은 여지없이 총 개머리판으로 맞았다.
드디어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가 강 중간으로 이동했을 때 장교의 "쏴!" 하는 소리에 총구에서 불이 붙었다. "군관 동무 어떻게 할까요?" "물고기들 포식하게 해주시오." 장교의 명령에 북한군은 2인 1조로 나누어 시신을 강에 던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우익가족들이 청평호에 수장되는 순간이었다. 시신들이 모두 가라앉자 북한군들은 북쪽을 향해 노를 저었다.
잠시 후 한 중년 여인이 시신들이 가라앉은 곳을 향해 헤엄쳐 왔다. 강 속으로 잠수한 이 여인은 남편을 찾아 한 팔로 남편의 목을 감고, 다른 팔을 부지런히 움직여 헤엄쳤다. 이 여인이 강 밖으로 나왔을 때는 몸을 까딱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여인은 죽기 살기로 남편의 입을 벌려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인공호흡을 시도한 지 한참만에 남편의 목에서 '쿨럭' 소리가 나며 물이 쏟아졌다. 남편은 다리 여러 군데에 총상을 입었지만 천만다행으로 급소에는 맞지 않았다.
남편이 살아난 상황을 확인하고 이 여인은 혼절했다. 새벽에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발견된 이 부부는 주민들의 간호로 목숨을 건졌다. 아내의 사투(死鬪)로 목숨을 건진 이는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심종한이다.
이렇듯 후퇴하는 북한군이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집단학살하면서 이념대립은 극에 달했다.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양방마을은 '설악면의 모스크바'로 불리웠으며 경찰과 우익단체의 눈엣가시로 인식되었다.
생매장

▲ 이봉열의 모친인 유씨 ⓒ 박만순
1950년 9월 27일, 그해 추석 다음날 지서 경찰들과 대한청년단원들이 양방마을에 들이닥쳤다. 둘째 외삼촌 유제을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봉열은 "빵" 하는 소리에 기겁을 했다. 이윽고 "나와" 하는 소리에 방 안에 있던 가족들이 전부 마당으로 나갔다. 총을 든 경찰들과 몽둥이를 든 대한청년단원들이 눈을 부라리며 유제을 가족과 이봉열을 쳐다보았다.
"이 빨갱이새끼들 전부 묶어!" 마당으로 나온 가족들은 해명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묶여 길가로 나왔다. 마을 한길로 나오니 동네 사람 수십 명이 있었다. 부역자 집안으로 찍힌 이들은 몸이 꽁꽁 묶인 채 설악면 면소재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때 가족들과 같이 이 대열에 끼이게 되었던 이봉열(84세,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은 "당시는 경찰이나 군인보다 한청(대한청년단) 놈들이 더 무서웠어요, 머리에 흰 띠를 두른 한청 놈들은 부역자 가족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쥐 잡듯 했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한다.
20리(8km)를 걸어 도착한 곳은 금융조합(농협의 전신) 창고였다. 지서 옆에 있던 금융조합창고에 갇힌 이들은 뭇매와 고문을 당했다. 한 사람씩 취조 당했는데, 어른들이 먼저 불려 나갔다. 삐삐선(군용전화선)으로 맞은 이들은 이내 피칠갑이 되었다. 창고에 감금된 지 일주일 만에 이봉열이 불려 나갔다.
이봉열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오줌을 지렸다. 이봉열에 이어 나이 어린 소년들이 불려 나왔다. "너희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풀어 준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 다시 한 번 빨갱이 짓 하다간 죽을 줄 알아!"
이봉열이 풀려나고 다음 날 이봉열의 어머니 유(柳)씨(1908년생)도 풀려났다. 유씨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설악면 창의리 친척 집으로 갔다. 그런데 너무 심한 고문 탓에 당일 저녁 절명했다. 1950년 10월 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이봉열은 창의리로 가려고 했는데, 대한청년단원 김필주(가명)가 못 가게 막았다. "빨갱이 새끼는 마을을 이탈해서는 안 돼"라는 소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결국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이웃 마을에 가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금융조합 창고에 마지막까지 갇혀 있던 이들은 방일리 한 가옥으로 이동되어 구금되었다. 적산가옥으로 분류된 집이었다. 북한군 점령 시절 북한군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은 이들은 부역자로 규정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압류되었다. 특히 가옥은 적산가옥으로 분류돼 첫 번째 압류조치 대상이 됐다. 적산가옥으로 분류된 집을 무단 점령한 경찰과 대한청년단원들은 소위 '부역자 가족'들을 짐승 취급했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부역자 가족'들을 발가벗겨 용문산에서 죽은 이의 장례식에 끌고 가 곡(哭)을 하게 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며칠 후에 경찰과 대한청년단원들은 '부역자 가족'들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된고뎅이 골짜기로 끌고 갔다.
'부역자 가족' 약 20명은 파놓은 구덩이에 들어갔다.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온 것임을 눈치 챈 이들은 통곡을 시작했다. 이윽고 통곡하는 이들에게 흙이 뿌려졌다.
"악!"
"엉엉."
"아이고."
소리는 흙에 묻히고 약 한 시간 만에 20명이 생매장 당했다.
그런데 생매장 당한 이들은 북한군 점령시절 부역활동을 했던 이들이 아니다. 소위 '부역'한 이들은 군·경이 수복하면서 모두 달아난 뒤였고, 그들의 가족이 끌려온 것이다. 그렇기에 청·장년은 거의 없고 노인, 여성, 아이가 대다수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상처는 계속되고

▲ 현재 경기도 가평군농협(금융조합 창고 터) 설악지점 자리에 선 이봉열 ⓒ 박만순
그해 겨울 난리에는 미군 폭격으로 인해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다. 미군이 방일리 양방마을에 휘발유를 뿌리고 네이팜탄을 투하해 가옥 1/3이 불타버렸다. 양방마을 유용상의 동생은 하반신 장애인이었는데, 겨울 난리 피난 때 추위와 병마로 목숨을 잃었다. 겨울 난리에 참전한 중공군들 중 가평군 설악면까지 왔던 이들 상당수가 사망해 시체가 길거리에 즐비했다. 마을 노인들이 동원돼 중공군 시신을 수습해 매장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상처는 계속됐다. 양방마을 민○○(여)은 부역자의 아내로 규정되어 면 소재지 대한청년단원 모씨에게 강제로 개가(改嫁)당했다. 이봉열의 이모부는 북한군 점령시절 활동으로 강원도에 도피했다가 검거되었다. 그는 4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되었던 이모부는 이봉열에게 편지를 써 면회 오라고 했지만 이봉열은 면회 한 번 가지 못했다. 부역자 가족들을 발가벗겨 상가(喪家)로 끌고 가고, 결국 된고뎅이에서 학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필주(가명)가 이봉열이 면회 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김필주는 당시 마을 구장(이장)을 맡고 있었다.
이봉열은 한국전쟁 이후 냉가슴만 앓았다. 누구에게 억울하다 하소연 한 번 못했다. 억울하다고 하기는커녕 '빨갱이 집안'이 돼 반듯한 직장을 얻을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69년의 세월이 흘러 2019년 2월 설 연휴였다. 아내의 산소에 가족들이 성묘하러 가는데 아들 이재영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옛날 이야기가 나왔다. 아들 이재영이 "어머니는 결혼 전에 어느 마을에 살았어요?"로 시작된 대화는 6.25 때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이봉열 외가 이야기로 접어들면서, 외삼촌이 '빨갱이'로 오해받아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아들 이재영은 더욱 자세하게 묻기도 머쓱했다. 이봉열도 마음속 이야기를 다 풀어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9년 3월 5일 아들과 함께 찾아온 기자 앞에서 69년 전 전쟁의 상처를 모두 드러냈다. 가족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처음 풀어 놓은 것이다.
이봉열의 가슴에 남은 상처가 이번 취재 과정에서 약간은 치유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유는 국가가 나서서 정확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유씨와 된고뎅이에서 죽은 20명, 숯가마에서 죽은 4명, 청평호에서 수장당한 이들(인원 미상)도 모두 진상규명되어, 망자의 안식(安息)을 기원하고, 유가족의 눈물을 씻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6. 아버지 사망신고 위조한 아들, 그 배후엔 경찰이...
[4.3 특별편] 김명훈과 김차수 부부의 4.3, 그리고 숨은 의인들
"전부 나와!"
"국민학교로 전부 모여!"
경찰과 군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소리 질렀다. 그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그냥 목소리만 크고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살기(殺氣)가 있었다. 옷가지나 가재도구를 챙기는 것은 사치였다. 군·경은 단 몇 분간의 시간만 주고, 집 처마 밑에 불을 붙였다. 초가집은 '호르륵' 하며 순식간에 타버렸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이 타는 것을 보며 눈물 흘릴 여유도 없이, 이호국민학교(제주읍 이호리)로 발걸음을 분주히 옮겼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이미 노형리 사람들이 와 있었다. 노형리도 며칠 전 모든 가옥이 불타버렸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전해진 터였다.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회원들은 총과 몽둥이로 주민들을 겁박하며, 운동장에 마을별로 모일 것을 지시했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매서운 날씨였지만, 추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두꺼운 외투는 고사하고, 이불이나 담요 등 추위를 막을 게 하나도 없었다. 1949년 1월,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전부 눈 감아."
교단에 선 군(軍) 책임자가 호령을 내렸다. 500여 명의 주민들은 운동장 한가운데 모여 앉았고, 주위에 군인과 경찰들이 에워쌌다. 운동장에 모인 주민들 중 남성 청·장년은 하나도 없었다. 군인과 경찰이 무서워 그들은 이미 피한 상태였고, 여성과 노인, 그리고 12세 미만의 아이뿐이었다.
"남편과 자식 중 한라산에 올라간 사람은 손들어!"
눈을 감은 주민들은 누구도 손을 들지 않고, 웅성거리기만 했다.
"탕!"
"시끄러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가족 중에 입산한 자들은 손들어."
손가락 재판
이번에는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저 추위와 공포에 질려 손과 발, 입술만 떨었다. "이 빨갱이 새끼들 안 되겠구만"하며 군 책임자는 마을의 한 청년을 데리고 주민들이 모여 있는 운동장 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군 책임자 뒤로는 군인과 경찰 십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마을 청년이 손가락으로 한 여성을 가리켰다. 군 책임자가 턱을 옆으로 하자, 뒤따르던 군·경이 그 여성의 양 팔을 잡아 일으켰다. "아이고 하느님. 살려 주세요" 그 여성은 운동장 가장자리로 끌려가 앉혀졌다.
손가락질은 계속 되었다. 이른바 '손가락 재판' 이었다. 어떤 합법적인 재판도 아니고, '입산자 가족'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자기를 변호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2명의 여성과 아이, 노인들이 끌려나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들은 잠시 후 자신들이 죽을 것임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 군 책임자의 턱짓에 군·경은 이들을 학교 옆 '임이밭'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는 어떤 설명이나 일장 연설도 없었다.
잠시 콩 볶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가족 중 남편과 자식, 그리고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빨갱이 집안', 아니 '폭도'로 몰려 학살된 것이다.
1949년 1월 13일 제주읍 이호리 오도롱 마을 사람이 겪은 '난리 아닌 난리'였다. 오도롱 사람들은 한 달 전인 1948년 12월 7일 마을 500미터 남쪽에 위치한 '호병밭'에서 또 하나의 '난리'를 겪었다. '입산자 가족'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주민 16명이 학살된 것이다.
살기 위해 입산

▲ 군경의 방화로 살 곳을 잃어 한라산에 오른 사람들을 표현한 작품. 강요배 <한라산 자락 사람들>(1992) ⓒ 박만순
제주읍 이호리 오도롱 사람들이 이호국민학교에서 참변을 겪을 때 김명훈(1946년생)의 큰아버지 김희선도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김희선은 50대 중반으로 자녀가 며칠 전 한라산으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당시 50대 중반이면 '노인'으로 인식되었으나, 군·경의 눈엔 '빨갱이 자식을 둔 폭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이 손가락 재판에서 김명훈의 아버지 김희교(1914년생)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집이 불타면서 본의 아니게 한라산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즉, 제주도민 절대다수는 미군정과 대한민국에 저항하기 위해 한라산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마을이 불타면서 거주할 곳이 없어서 한라산행을 택한 것이다. 단순히 살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입산을 택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당시에는 죄가 있고 없음이 아니라, 보이는 남성 청·장년은 무조건 학살 대상이 되었다. 집안에 청·장년이 없으면 이는 다시 '입산자 가족'으로 분류되어, 방화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1949년 1월 중순 본의 아니게 입산했던 김희교는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선무방송만 믿고 자수해, 그해 4월경 산에서 내려왔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주정공장에 구금되었다. 아내가 면회를 가자, 남편은 "난 아무 죄도 없으니 조만간 석방될 거야"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남편은 석방되지 않았고, 아내가 두 달 후에 주정공장을 다시 찾았을 때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 후 대전에서 엽서가 왔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산내에서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
가장(家長)이 어이없는 죽임을 당한 후, 남은 가족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의도치 않게 이산가족이 되었다. 김명훈의 누이들은 제주와 부산의 공장으로 일하러 갈 수밖에 없었고, 어린 김명훈은 어머니와 함께 이호리에서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다. 주말마다 한라산에서 땔감을 해 5일장에 팔았고, 이모가 준 소를 키워 학비에 보탰다. 그는 이렇게 험난한 상황에서도 제주중학교와 제주상고를 나와 제주교대까지 마쳤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앞두었다.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 김명훈증언자 김명훈 ⓒ 박만순
"김명훈씨 계십니까?"
"누구시죠."
"지서에서 나왔습니다."
경례를 한 이는 외도지서에서 나온 젊은 순경이었다.
"이번에 초등학교 선생님 발령이 나셨던디, 신원조회 나왔습니다."
김명훈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빨갱이', '신원조회' 하면 가슴 졸이며 겁부터 나던 버릇이 발동한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사실대로 아버지가 4.3 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죽었다고 했다.
"제주도경찰국에 보고해야 하는데, 4.3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 발령을 못 받을 텐데요..." 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1968년은 반공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그런 시절에 아버지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죽었다고 상급 정보기관에 보고된다면, 교사 자리는 물 건너 가는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김명훈은 마치 판결을 앞둔 죄수처럼 머리를 푹 숙였다. 30대 초반의 외도지서 경찰은 마치 자기 일처럼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버님 사망신고는 되어 있습니까?" "아니오." "그럼 잘 됐습니다." 김명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되다니요?" 김명훈의 아버지 김희교가 2개월 전에 병으로 죽었다고 허위로 사망신고를 내자는 것이었다.
김명훈은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것만큼 묘안은 없었다. 당시에는 6.25를 전후한 시기에 사망신고를 내면 군인이 아닌 한 '빨갱이 짓'을 하다 죽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보니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된 많은 이들이 사망신고를 실제 죽은 년도보다 몇 년 늦게 하거나, 아예 사망신고를 내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사망신고를 위조하자고 하니,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김희교는 1967년 12월에 집에서 병사(病死)한 것으로 사망신고서가 작성되었고, 덕분에 김명훈은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제주 4.3 때 경찰들이 주민들에게 저지른 악행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 후에 서북청년회를 포함한 육지경찰들은 대거 제주도 경찰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했고, 수십 년 동안 제주도민들을 괴롭혀왔다. 그런데 4.3 사건 유족이 신원조회로 불이익을 받을까봐 사망신고를 위조하는 데 협력한 경찰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큼 고통 받은 사람은 없어요"
제주시 노형동에 살고 있는 김명훈씨와 한참을 인터뷰하고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김명훈 아내 김차수(1947년생)가 끼어들었다. "4.3 때 나만큼 고통 받은 사람은 없어요."
남편 김명훈의 바로 옆 마을에 살았던 김차수가 겪은 4.3은 참혹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당시 제주읍 이호1리에 살았던 김차수 가족은 4.3의 풍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7년경 학생들이 데모할 때, 진압경찰은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학생들이 무차별하게 폭행당하기 직전 김차수 오빠들은 두 팔을 들고 막았다. "학생들이 뭔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온 몸으로 경찰의 폭행을 막았던 오빠들은 4.3 직후에 마포형무소에 구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포형무소에 구속되었던 큰 오빠 김영수는 북한군에 의해 옥문이 열리면서 고향 제주도로 내려왔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에 제주도 정뜨르 비행장에서 학살되었다.
둘째 오빠 김택수는 마포형무소 옥문이 열린 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둘째 오빠가 고향사람들에게 "북으로 가니 걱정하지 마라"고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소식을 모르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행방을 모른다.
김차수 아버지 김정익은 자식들의 활동으로 인해 고초를 겪은 경우다. 4.3 직후 목포형무소로 끌려간 김정익은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형무소에서도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자 그를 내보냈다. 어렵사리 제주도 고향에 연락이 되어 동생이 제주항으로 마차를 끌고 마중을 나갔다.
"아이고, 형님." 동생이 형을 보았을 때 이미 형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송장일 뿐이었다. 마차에 태우고 이불로 덮었지만 형은 집에 오는 동안 신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집에 돌아온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사실 김정익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을 때는 이미 김씨 집안에서 흘릴 눈물을 지닌 사람도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4.3의 광풍으로 남녀노소 없이 싹쓸이되었기 때문이다. 김차수의 첫째 올케(큰 오빠 부인)는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둘째 언니네 집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김차수의 둘째 언니 김이수와 형부 박영수(당시 초등학교 교사), 3세짜리 조카가 학살되었다. 당시 조카는 이름이 없어, 후일 비석에 '박아기'로 이름이 올랐다. 둘째 언니네 가족은 장소가 명확하지 않지만 죽창으로 공개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는 김차수가 어머니 홍종하에게 증언을 들은 것이다.
"우리 아기 탄다!"
김차수가 살았던 제주읍 이호1리가 군경에 의해 방화될 때의 상황도 무척이나 급박했다. 경찰이 초가집 처마에 불을 지르니, 지붕은 순식간에 타 버렸다. 그 순간에 언니 김덕수(당시 7세)는 맨발로 뛰어 나갔다. "사람 살려" 하면서 한참을 뛰었는데 갓난아기 차수가 생각이 났다.
"아이고, 우리 아기 탄다"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초가집은 이미 반이 넘게 탔지만 7세 어린이가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덕수에게는 '동생 차수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불속에서 발견한 동생을 업고 변소로 뛰었다. 변소에는 돼지가 '꿀꿀'거리며 울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곳으로는 불이 번지지 않았다.
집이 불타고 간신히 살아남은 김차수 가족은 옆 마을인 도두리로 갔다. 도두리에서 사정을 해 간신히 방도 아닌 마루를 빌렸다. 그 마루에서 6개월을 살았는데, 그렇다고 마루 전체를 전세 낸 것이 아니었다. 4~5평 되는 마루에 4집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것이다. 한 겨울에도 마룻바닥에 지푸라기만 깔고 살았는데도, 가족 누구도 춥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가 뜨면 마당에서 가족끼리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아침식사는 마루가 아니라 마당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마루는 4가족, 20여 명이 식사 할 공간으로는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에 구세주 같은 이가 나타났으니, 제주읍내에 살고 있던 이모였다. 이모는 트럭을 보내 언니네 가족을 모두 읍내로 이사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사를 자유로이 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마치 '007 작전'을 하듯이 했다. 적재함에 실은 가구 안에 온 가족이 숨었다. 경찰들은 4.3 직후라 일주도로 곳곳에서 검문검색을 했는데, 다행히 걸리지 않았다. 그때 홍종하 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홍종하 가족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늦깎이 공부 시작해 문인이 되어
1947년생 김차수가 돌이 갓 지나 시작된 집안의 불행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그녀의 가방끈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상급학교에 진학은 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니 오빠 고등학교 보내는데, 너까지 (상급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 말이 엄청난 상처였지만, 당시에 오빠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여동생이 공장에 취직하거나 식모로 가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아니 197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나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보니 그녀는 속울음을 울며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제주읍 외도에 있는 전분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경리 일을 보다가 편물공장으로 옮겼고, 다시 선거관리위원회로 가 7년을 일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배운 회계 일이 이후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김차수는 막내아들이 대학교 4학년 때 큰 결심을 했다. 못다 한 공부를 해보자는 욕심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친 그녀는 정식 시험을 치러 한라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한라대학은 집에서 가까워서 선택한 학교였다. 그러다가 2012년에는 <창작수필>에 등단하여 현재는 문학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학업활동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 위기 때마다 격려를 해 준 이는 자식들이었다. "어머니가 하고 싶은 공부 하세요."

▲ 4.3 영문판김명훈의 장남이 번역한 4.3 영문판 ⓒ 박만순
자식들과 4.3을 소통한 지도 오래되었다. 2000년도부터 대전 산내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 꼬박 참석했는데, 둘째 아들은 한양대학생 시절에 대전위령제에도 같이 참석한 일이 있었다. 큰 아들은 4.3 책자를 영문판으로 번역해 4.3을 전 세계로 알리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큰 아들은 아주대 영문과를 나와 2019년 현재 한라대 교수로 있다.
다시 김명훈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김명훈은 1968년에 집으로 찾아온 외도지서 순경을 잊을 수 없다. 벌써 51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순경 덕분에 신원조회에 걸리지 않고 교사 발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 순경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김명훈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경찰이지만 평생의 은인이다.
사람다운 사람, 그 순경이 보고 싶다.
7. 남편 죽은 줄도 모르고 30년 동안 무당 찾아다닌 부인
[4.3 특별편] 4.3 유족 양남호씨 집안 이야기

▲ 외삼촌 징병 환송연 사진외삼촌 문용상이 일본에 징병갈 때 찍은 단체사진. 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양공순 ⓒ 박만순
캄캄한 선실 안에는 여러 사람이 내뿜는 땀 냄새와 구토한 음식물로 인한 시큼한 냄새가 겹치면서 악취가 진동했다. 하지만 배 안에 있는 이들은 얼굴만 찡그릴 뿐 선실 안의 불결한 환경을 항의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탔기 때문이다.
출렁이는 파도 때문에 통통배는 심하게 울렸다. "욱" 하며 젊은 여성이 토하기 시작했다. "쫌 참지, 토하면 어떻게 해요!" 하지만 그 여성은 연신 토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먹은 게 별로 없어 음식물을 많이 토하지는 않았지만, 냄새만큼은 선실 안에 진동했다.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마친 양남호(당시 26세)도 고향 제주에서의 생계가 막막하자 밀항선을 탔다. 그는 원래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이라 토하는 여성에게 싫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코를 쥐고만 있었다. 1968년 9월 부산에서 출발해 밀항하던 그날도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이었다. 그런데 작은 선실 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더위와 악취는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통통배는 3일을 항해했다. 새벽이 되니 하늘이 희뿌옇졌지만, 현재 위치를 종잡을 수 없었다.
"통통통" "통 탁...." 지하 선실로 내려 온 선장이 황급히 외쳤다. "큰일 났소. 기름이 떨어졌소" 긴급 상황이 발생했다. 중간에 접선하기로 한 이와 약속이 어그러지면서, 몇 시간을 더 항해하다 보니 기름이 떨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아이고" 하는 탄식 소리가 절로 났다. 어느 누구도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잠시 후 선장이 외쳤다. "젊은 사람들은 갑판 위로 올라오시오." 양남호를 비롯한 십여 명의 청년들이 갑판 위로 올라왔다. "비상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소. 여러분들이 헤엄쳐서 저 섬에 있는 바위에 밧줄을 묶어주었으면 하오." 배와 바위 사이에 밧줄을 연결하면, 밧줄을 붙잡고 섬으로 이동한다는 계획이었다. 양남호는 다른 이들과 함께 옷을 훌훌 벗고 밧줄을 한 손에 쥐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죽기 살기로
십여 명의 청년들이 죽기 살기로 헤엄쳤다. 때 아닌 '유격훈련'을 하는 셈이다. 약 50미터를 헤엄쳐서 간신히 섬에 도착했다. 바위에 밧줄을 단단히 묶고 선장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묶었습니다!" 이윽고 선실에 남아 있는 이들이 밧줄을 잡고 섬으로 모두 건너왔다.
몇 집 안 되는 자그마한 섬이었지만, 수상한 외지인들이 나타나자 신고체계는 신속하게 가동되었다. 잠시 후 육지에서 경찰들이 경비정을 타고 나타났다. "모두 여기 타시오." 밀항자들이 전부 경비정에 타자, 경비정은 '쌩'하고 달렸다. 약 15분을 달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下關)에 있는 '출입국관리소'에 도착했다. 심사를 하는 데 1주일이 걸렸다.
'밀항죄'가 적용되어 시모노세키 형무소에 구금되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밀항선을 탔던 양남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만 그가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묵묵히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2개월의 형무소 생활을 하니 이번에는 나가사키현으로 이송되었다. 아침에 출발해 전철을 탔는데, 이들이 오무라수용소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였다.
오무라수용소는 징벌 성격의 형무소가 아니었다. 불법으로 밀항한 이들을 일시적으로 수용했다가, 어느 정도 인원이 차면 자국(自國)으로 귀환시키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수용소 내의 환경이 형무소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1개 방에 5명씩 수용되었고, 10개 방을 묶어 1개 동으로 관리했다. 이 수용소에는 총 10개동이 있었으니 총 인원이 500명이나 되었다.
양남호는 수용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1개 동의 수용소자치회 총무에 선임되었다. 실내체육관에서 탁구를 치는데 자치회장이 "이놈아 운동 잘 하네"하면서 총무를 하라고 했던 것이다. 수용소 내에서의 총무 역할은 다양했다. 50명의 생활 형편을 일일이 챙기고, 개선해야 될 내용을 수용소에 건의하기도 했다.
수용소와 막걸리
양남호는 PX에서 소화제를 다량으로 구매했다. 배급품으로 나온 식빵에 소화제와 물을 섞어 잘 갠다. 그런 후에 내용물을 신문지에 싸서 양철통에 담아 눌러 놓으면 발효가 되어 누룩이 된다. 그런 연후에 누룩을 화장실에 걸어서 건조시킨다. 건조된 누룩을 잘게 부수면 가루가 된다. 이 가루와 밥을 따듯한 물에 넣어 2~3일간 보관하면 막걸리가 된다.
1주일 걸려 만든 막걸리를 큰 통에 담아 10개 방에 나눠주어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오무라수용소가 생긴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막걸리 제조와 파티는 수용소자치회에서 진행한 것이고, 여기서 실제 일은 총무를 맡고 있던 양남호가 거의 도맡아 했다.
수용소 생활이란 것이 암울한 것이긴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니 가급적이면 즐겁게 지내려 양남호는 애를 썼다. 수용소에서 나오는 물자와 식사에서 10%를 적립해, 수용소 내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일에 썼다. 즉, 일본에 친지와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수용소 내에 생필품이나 음식을 사입(私入)시키기가 어렵다.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도 빈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이들에게 음식이나 담배, 내복 등을 적립기금에서 무료로 지급한 것이다. 말 그대로 생활공동체를 꿈꾸고 실천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치회 총무를 하면서 매점 일을 보기도 했는데, 매점이 5시면 폐점하는 바람에 당시 유행했던 권투경기를 볼 수 없었다. 당시 유명한 한국 권투 선수로는 유제두(1948~)가 있었다. 그의 경기를 볼 수 없자 화가 나서 문을 부수기도 했다. 그 일로 양남호는 독방에 수용되었다.
생활력이 누구보다 강했던 그는 매점 일로 번 돈으로 '브라더미싱'을 구매했다. 브라더미싱을 이용해 번 돈은 귀국 교통비용에 보탰다. 오무라수용소 생활 8개월 만의 일이다.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지만 꿈에 그리던 고향 제주도로 가는 길이 평탄하게 열리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대한민국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죄목으로 부산시 대신동에 있던 부산형무소에 구금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재판결과가 다행히 집행유예로 나왔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나온 것이다.
양남호가 일본 밀항 시도를 하다 형무소→수용소→형무소를 전전긍긍한 이유는 무엇일까? 돈 벌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경제적으로 곤궁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극도로 곤궁했던 한라산 생활

▲ 식량 은닉동굴어머니 문임생이 4.3때 양식을 은닉시켜 놓았던 굴 ⓒ 박만순
제주읍 오라리에 불이 났다. 군인들이 계획적으로 불을 지른 것이다. 모든 집이 타버리자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양남호 가족도 살기 위해 한라산행을 선택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와 양남호가 그 대열에 끼였다.
입산한 지 3일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양남호는 그 무리에서 빠졌다. 아버지는 "나는 젊어서 내려가도(자수해도) 처벌 받게 된다"며 처자식을 데리고 한라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던 것이다. 이들은 용진각 아래 있는 등버새기굴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이미 오라리 연미마을 사람 20여 명이 있었다.
한겨울인 1948년 12월의 일이다. 한겨울에 한라산에 먹을 것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동굴에 있던 사람들이 교대로 마을에 몰래 내려가 집에 숨겨 놓은 양식을 가져왔다. 양남호 어머니 문임생도 집 근처 자그마한 굴에 숨겨 놓았던 양식을 가져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임시방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3개월의 산 생활은 최악이었다. 토벌대의 "자수하면 살려 준다"는 말을 철석처럼 믿고, 등버새기굴에 있던 연미마을 사람들은 흰 수건을 나무에 매달고 한라산을 내려왔다. 하지만 이들의 자유는 쉽게 보장되지 않았다. 1934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주정공장에 구금된 것이다.
현재 제주시 건입동에 있던 주정공장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를 원료로 술을 빚는 곳이다. 해방 후에는 조선인에게 넘어가 운영되던 이 공장이 4.3때는 자수한 제주도민을 구금해 심사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곳은 1949년 봄에 자수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부상자와 임산부도 같이 있었다. 혹독한 고문 후유증과 열악한 수용환경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있었으며, 애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양남호는 이곳에서 밀수입한 쌀로 가마솥에 찐 밀밥을 먹기도 했다. 고역이었던 것은 주정공장에서 이발충(기계충)에 걸린 것이다. 곶감보시를 몇 개월 쓰고 있다 보니 걸린 것이다. 곶감처럼 생긴 모자인 곶감보시는 당시 제주에서 쓰던 방언이다. 문임생과 양남호 모자는 주정공장에 구금된 지 20일 만에 석방되었지만 아버지 양공순(1918년생)은 그렇지 못했다. 양공순이 주정공장에서 땔감 작업하러 나왔다가 아내 문임생을 한 번 만나 가족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른 채
양공순은 특별한 활동을 한 것도 없이,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구속되었다. 1949년 9월 대전형무소에서 엽서가 왔다. "나는 대전에 와, 잘 있고 조만간 석방되니 걱정 마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초 대한민국 군·경이 후퇴하면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를 전부 학살한 것이다. 이 죽음의 대열에 양공순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양공순의 사촌 형인 양상순도 저승길에 합류했다.
4.3 사건 때 제주에서는 양공순의 또 다른 사촌 형 양덕순이 행방불명되었다. 행방불명이란 것이 언제, 어디에서 학살되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전쟁의 상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양덕순의 처 서○○도 한라산에서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했으며, 그의 딸 양○○(7~8세)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임에도 문임생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사실을 정확히는 몰랐다. 그녀는 1950~60년대 내내 점집을 순례했다. "제 남편이 살아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무당의 답변은 그때그때 달랐다. 그러다 보니 점집을 더 다닐 수밖에...
그러다 어느 점집에서 "밥뚜껑에 이슬이 맺히면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문임생은 아침마다 따듯한 밥을 해서 밥공기에 담아 뚜껑을 덮었다. 그러니 당연히 뚜껑에 김이 서릴 수밖에. 그렇게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것으로 일부러 믿고 산 것이 1979년까지 였다. 그런데 그해 4.3 때 육지로 끌려간 이들 중 생존자들이 "대전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말을 전했다. 이 때부터 양남호 어머니 문임생은 남편의 가묘를 조성하고 제사를 지냈다.
폭삭 주저앉은 집안
아버지가 대전에서 학살당한 후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양남호 집안은 폭삭 주저앉았다. 어머니 문임생은 일년 내내 보리농사에 매달렸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한 자식인 양남호가 학교에 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주말마다 한라산에 올라갔다. 나무를 해 오일장에 내다 팔기 위해서였다. 방학 때는 매일 한라산에 올라갔다. 이렇게 시작된 나무하기는 고등학교까지 계속되었다. 겨울에는 눈 쌓인 한라산에 올라가기 위해, 칡넝쿨로 신발을 감쌌다. 그런데 한라산에서 어린 양남호와 친구들이 무서워했던 것이 있었으니, 이른바 산감(山監)이다.
영림서(營林署) 직원이었던 산감은 공무원이었는데, 경찰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벌목 죄로 이들에게 걸리면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했고, 벌금까지 물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나무를 하다가도 툭하면 도망가기 일쑤였다.
오라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오현중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이모가 송아지를 사주었다. 송아지는 양남호 집안의 귀한 살림 밑천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과 이모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학교 다니는 것이 만만치만은 않았다. 수업료를 낼 때마다 좌불안석이었다.
당시 수업료가 한 달에 260원이었는데, 어느 때인가 집안의 돈을 탈탈 긁어모은 것이 60원밖에 되지 않았다. 이 돈을 학교에 갖다 냈지만 부족한 200원은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담임선생 김○○이 부족분 수업료를 대신 내주었다. 양남호(77, 제주시 오라3동)는 "그때 담임선생님의 은덕을 잊을 수가 없어요"라고 회고한다.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에서 자대생활을 했는데, 땅딸한 그는 모든 운동에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어 축구, 배구 등 운동 시합마다 차출되었다. 제대 후에 고향 제주에서 먹고 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그런 와중에 누가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더라"라는 말에 현혹되어 밀항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4.3 때 물건을 아직 간직하는 이유

▲ 아버지 가묘부친 양공순의 가묘 앞에 선 양남호 ⓒ 박만순
부산형무소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고향으로 온 양남호는 농촌진흥청 제주시험장에 입사했다. 일용직으로 일하다가 집행유예 기간이 만료되자 상용직으로 채용되었다. 관리과에서 경리, 서무 일을 보았다. 하지만 이 직장도 생계를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그는 1978년부터 감귤농사를 시작했고, 1988년에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하우스 감귤농사에 도전했다.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자식 셋을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고, 2019년 현재 제주도에서 유명한 감귤농이 되었다. 하우스 2천 평, 노지 7천 평 규모의 농사를 짓는 그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유명한 감귤농군이다.
장남은 한림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고, 차남은 경희대 법대를 나와 충남 당진에서 노무사를 하고 있다. 막내는 제주대를 나와 사회생활을 하다가 현재는 아버지를 도와 감귤농사를 짓고 있다.

▲ 4.3때 사용한 그릇4.3때 한라산에서 양남호 가족이 사용한 그릇 ⓒ 박만순

▲ 수용소에서의 귀국 후 사진오무라수용소에서 귀국한 후 부산에서 단체촬영. 앞줄 맨 오른쪽이 양남호 ⓒ 박만순
남극에 갖다 놓아도 얼어 죽지 않을 양남호는 생활력만 강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4.3을 공유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이다. 그의 집에는 4.3 때 한라산에서 사용하던 밥그릇, 국그릇 등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또한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사용하던 책상을 여전히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무라수용소와 귀국할 때의 사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는 4.3 때 살던 집 근처에 아버지 가묘를 1979년에 조성해 2019년 현재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그가 이런 아버지와 4.3의 유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지 않는가? 양남호가 현재 보관하고 있는 아버지의 유품과 오무라수용소에서의 사진이 '4.3 평화 기념관'이나 이후 대전에 조성될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기념관'에 전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의 기억, 젊은 세대와의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8. "아버지뻘 노인 결박하고 턱수염 태워... 그 뒤엔 무차별 학살"
[4.3 특별편] 대전형무소에서 죽은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삶

▲ 강요배 화백이 그린 <천명>(1991). 토벌대의 방화로 불타는 마을을 담았다. ⓒ 박만순
마을에 '뚜두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방문을 열고 고샅길로 나왔다. 잠시 후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서야 그 소리가 말발굽 소리인 줄 알았다. 말들은 동네 골목을 다니며 시뻘건 불을 토해냈다. 그런데 불을 토해 낸 것은 말이 아니라 경찰들이 던진 솜방망이였다. 즉, 새벽에 기마경찰들이 제주읍 노형리에 나타나 다짜고짜 민가에 불을 지른 것이다. 마을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열 살 소년 송병기는 콜록거리며 골목길을 무작정 뛰었다.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소년의 집은 목수인 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으로 마을에서는 튼튼하고 좋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초가집이 불방망이를 당해낼 수는 없는 법. 집 처마에 불이 붙고 연기가 집안을 휘감는 것을 보고 뛰어나온 소년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소년이 마을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 소와 말을 방목하는 야산으로 접어들었을 때 놀라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재산 목록 1호인 말과 소들이 하늘을 향해 양발을 들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잠시 후에 자세히 보니 가축들의 옆구리에서 붉은 선지피가 '쿨럭'이며 쏟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기마경찰은 가축들에게도 사정없이 총질을 해댔다.
초가집에서 연기가 잠잠해질 때쯤 소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을로 향했다. 마을 한길에 접어드니 길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 안에는 쇳조각이 있는 듯했다. 기관총 파편이었다. 경찰과 군인들은 마을에 불만 지른 것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 기관총을 설치하고 무차별을 사격을 가한 것이다. 또 기마경찰들은 도망가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총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가축에게도 총질을 했다.
경찰들의 만행
경찰의 만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 년 농사지은 농작물을 훼손했다. 마을사람 대부분은 제주도의 주농작물인 고구마를 수확한 후 땅속에 저장했다. 육지 사람들이 초겨울에 김장을 해 땅 속에 묻듯이 말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경찰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고구마를 저장해 놓은 가마와 억새를 대검으로 '푹푹' 찔러댔다.
그렇게 대검을 찔러대니 고구마는 상할 수밖에 없고, 위의 것이 상하면 아래 고구마도 연이어서 상하게 됐다. 경찰과 군인들은 '빨갱이'들이 숨어 있는지 확인하는 거라고 했지만, 젊은이들은 이미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에 올라간 뒤였다. 결국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주민들의 먹을거리를 전부 훼손한 격이었다. 1948년 11월 초의 일이었다.
한 달 후인 1948년 12월 11일 토벌대가 마을에 다시 들이닥쳤다. 한 달 전의 방화로 마을 50~60호중 10가구를 빼고 모두 불타 버렸지만, 갈 곳 없는 이들은 타지 않은 집에 삼삼오오 모여 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나마 남아있는 10가구에 불을 다시 질렀다. 그리고 주민들을 마을 한가운데로 모이게 했다. 입산자 가족 2명을 뽑은 후 데리고 가더니 잠시 후 '탕탕' 소리가 났다. 즉결 처형이었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 "송달현, 강○○...." 4명을 불러냈다. "이놈의 새끼들, 네 자식들이 한라산에서 폭도로 활동하고 있는데도 신고를 하지 않아?" 하며 군 책임자는 호통을 쳤다. 아버지뻘 되는 이에게도 무조건 반말부터 했다. 호명되어 나간 이들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무조건 두 손 모아 빌기만 했다.
군인들은 사람들의 팔을 뒤로 묶었다. 잠시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군 책임자가 씨익 웃으며 라이터를 꺼내 묶여 있는 이들의 턱수염에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닌가. '으악' 하는 소리가 났지만 누구도 어찌하지 못했다. 수염에 불이 붙은 당사자들도 손이 묶여 있어,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악' 소리와 함께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했지만, 수염이 타버린 자리에 화상만 남았다. "앞으로 갓!" 이들 4명은 주민들 앞에서 그렇게 모욕 당하고도 군인들에게 끌려가 학살을 당했다. 송달현, 강태수의 부, 김학성의 부, 김학성의 숙부가 그들이다.
그들이 한라산으로 올라간 이유

▲ 도노미당서인옥과 오라리 주민들이 피신했던 굴, 도노미당 ⓒ 박만순
집안 삼촌인 송달현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망신을 당한 후 학살당한 것을 지켜본 송병기는 어머니와 함께 고난의 피난길을 시작했다. 제주읍 이호리의 집안 이모에게 찾아갔으나 문전박대 당했다. 괜히 사람을 들였다가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주저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해는 갔지만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외가가 있는 연동리 섯동네로 갔으나, 그 곳도 토벌대에 의해 한 집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고모가 살고 있던 연동리 베두리 마을로 갔으나 며칠 후 그곳도 여지없이 불타버렸다. 할 수 없이 원래 집인 노형리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송도윤(1916년생)이 집 근처에 땅굴을 파고 숨어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가족들은 반가움을 표하기도 전에 피난 짐을 싸야 했다.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달픈 한라산 생활의 시작이었다. 송도윤은 특별히 좌익활동을 하거나 무장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토벌대의 무차별 학살을 피해서, 살기 위해 한라산에 올라갔다. 많은 이들이 송도운 같은 상황에 처했는데, 제주읍 오라리 서인옥(1922년생)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은 오라리에서 제일 큰 집이어서 집 창고에 마을 사물놀이 악기(樂器)들을 보관해 놓았었다. 그런데 토벌대가 마을을 방화하면서 서인옥의 집도 불타버렸고 악기들이 불에 타 버렸다.
'투둥 퉁' 북이 타면서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마을을 휘감았다. 그 소리는 모를 심거나 수확기에 농군들이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신명나게 두드리는 북소리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뭇 생명들이 죽어가는 조종(弔鐘) 소리였다. 집이 불타버려 살 곳이 없던 오라리 사람들은 한라산 초입의 굴인 '도노미당'으로 피신했다. 이후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산내에서 학살당한 서인옥도 이곳으로 피신했다.
한라산에서 출산, 누구도 축하할 수 없었다
"아가 얼른 서둘러라." 며느리 김연옥(1919년생)은 시어머니 몰래 입을 삐죽 내밀었다. 곧이어 시어머니의 지청구가 들렸다. "빨리 서두르라니까 뭐해!" 며느리는 눈물이 쏙 나왔다. 넷째를 임신해 출산을 불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산 생활을 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임산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식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김연옥은 남산만한 배를 하고 뒤뚱거리며 한라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49년 1월 한라산은 눈이 쌓인 설산(雪山)이었다.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임산부 김연옥은 힘들게 '아흔아홉골'까지 올라갔다. 먹을 것은 없고, 한겨울 추위에 몸은 자동적으로 덜덜 떨렸다. 거기에 토벌대가 언제 올지 몰라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런 마당에 설은 다가왔다.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구만." "글쎄 말이야, 모래가 설인데 차례도 지낼 수 없구...." 노인들의 대화였는데, 어느 누구도 대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민족 명절 설인 1949년 1월 29일은 쓸쓸하게 지나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월 초 산 속에서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으앙!" 김연옥이 아기를 낳은 것이다. 당연히 축하해야 할 아기의 출산이었지만 누구도 축하의 말을 하지 못했다. 아기가 온전히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사실 어른도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데, 갓난아기가 이 추운 겨울에 한라산에서 온전히 생존할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주변의 아낙들은 "쯔쯧" 하거나 눈가의 눈물을 찍어 냈다.
산모인 김연옥의 마음은 어땠을까? 모유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산속에서 먹는 게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김연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우는 것밖에 없었다. "토벌대닷!" 하는 소리에 사람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김연옥도 아기를 업고 무작정 뛰었다. 몇 시간을 뛰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이 한라산을 모두 삼켰을 때야 다리쉼을 할 수 있었다. 한 겨울인데도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옷은 땀에 젖고, 눈에 미끄러져 또 젖었다. 그런 상황에서 밤은 지옥이었다.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면서 옷이 얼기 시작했다.
바위틈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토벌대의 추격을 피해 또다시 피난길이 시작되었다. 짐이랄 것도 없는 짐을 푼 곳은 '큰도리'였다. 몸을 꼼짝할 수도 없었다. 몇 시간이나 누워 있었을까, 또다시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자와 추격자의 씨름이 한창 진행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겨울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겨울비인데도 불구하고 보슬비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김연옥의 갓난아기는 구상나무 아래에서 숨이 멎었다. 겨울비에 얼어 죽은 것이다. 생후 1개월도 안 되어 세상과 작별을 했다.
여지없이 봄이 왔지만
한라산에도 여지없이 봄이 왔다. 하지만 봄은 따스한 희망의 봄이 아니었다. 김연옥의 남편 송도윤이 토벌대에 의해 검거되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김연옥은 제주읍 애월리 곽금초등학교에서 주먹밥을 먹고, 이송되어 주정공장에 구금되었다.
주정공장에 구금된 지 11일 만에 석방되어 나왔는데 배추꽃이 활짝 피었다. 1949년 4월이었다. 노형리 주민들이 마을에 성을 쌓아 재건부락을 만들었다. 그해 여름 남편 송도윤이 육지형무소로 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제주항으로 갔지만 배에 실리는 이들 중에서 남편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편을 배웅하지도 못한 서운한 마음속에 살다가 그녀에게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셋째 송애화가 영양실조에 걸려 죽은 것이다. 송애화는 당시 6세였다. 한라산에서 갓난아기를 얼음산에 묻은 지 6개월도 채 안되어 또 하나의 생명을 땅 속에 묻어야 하는 기구한 삶이었다.
안 좋은 일은 연이어서 생기는 것인가? 대전형무소로 간 송도윤이 1950년 봄에 "잘 있다"는 엽서를 보냈지만, 한국전쟁 직후인 그해 7월에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던 가족들은 일상생활을 했다. 장남 송병기는 초등학교 입학 시기를 훌쩍 뛰어넘은 12세에 도두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다. 송병기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54년에 재건부락 생활을 정리하고 원 고향인 제주읍 노형리로 갔다. 어머니 김연옥이 산에서 나무를 해 와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그때부터 김연옥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김연옥은 앓는 과정에서도 점집을 전전했다. 남편이 살았는지 물어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결과가 점집마다 달랐다. 남편의 생사도 모르고, 자식 둘을 가슴에 묻은 그녀는 결국 1964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 이원술국방경비대 탈영 후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된 이원술 초상화 ⓒ 박만순
김연옥이 점집을 전전할 때 제주읍 오라리 이기석은 밤마다 술을 마시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아이고 나 때문에 자식이 죽었어."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하면서 울부짖었다. 제주북국민학교를 나온 후 서귀농림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학교를 작파한 이원술(1926년생)은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모슬포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는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했다.
도피생활을 하다가 자수했지만,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한국전쟁 당시에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원술의 아버지 이기석이 1950년 1월 대전형무소로 면회를 갔는데, "돈만 가져오면 석방시켜 준다"는 말을 들었다.
이기석은 봄 농사를 마무리 짓고 그해 여름에 돈을 장만해 아들을 석방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러기 전에 6.25가 났다. 이기석은 자신이 돈을 빨리 장만해 대전으로 갔다면 자식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어디 이기석의 책임인가. 하지만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을 탓하고, 자식 제사를 지내었다.
"살암시민 사라진다"라는 제주 말이 있다. '살다보면 살게 된다'라는 말이다. 4.3 사건을 겪은 제주도 사람들의 힘겨운 삶을 반영한 말이다. 막내 동생을 한라산에 묻은 송병기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가세는 더욱 더 기울었고, 급기야 송병기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어업조합연합회' 급사로 취직했다. 하지만 이 일로 생계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이후 농사일을 하다가 목수로 전직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이다.

▲ 송병기자신이 지은 집 앞에 선 송병기 ⓒ 박만순
4.3을 겪은 이 중 고통스런 삶을 산 게 어디 송병기뿐이겠는가? 제주도민 전체가 고통 속에 살아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제주시 오라2동에 살고 있는 김익중(1943년생)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 김용진이 4.3때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산내에서 학살된 후 그의 삶도 고행(苦行) 그 자체였다. 당시에 김익중은 아버지만 잃은 것이 아니라 외할머니와 외숙모, 그리고 외사촌이 서귀포에 있던 알뜨르비행장에서 학살당했다.
어머니, 누나와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된 김익중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생활을 했다. 그는 제일중학교와 제주상고를 다닐 때 매일 하루에 두 번씩 한라산을 올라갔다. 나무를 하기 위해서다. 물론 방학 때면 매일 올라갔다. 나무를 지게에 지고 읍내 가가호호를 방문했다. "나무 사세요!" 오일장에 팔수도 있었지만 집집마다 다니며 파는 것이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 있기에 그렇게 했다. 부끄러움은 사치였다. 그는 다행히 연좌제를 비껴갈 수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 공직에 몸을 담았다. 1998년 제주시 연동 동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쳤다.
제주 4.3 사건으로 약 3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국가폭력으로 학살되었다. 피해자 중 일부는 육지형무소로 분산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초기에 대부분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런데 육지형무소로 간 이들은 반백 년 넘게까지 '행방불명자'로 불리었다. 어디로 간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1999년 추미애 국회의원이 제주도 주정공장에서 육지 형무소로 이송된 명단을 밝혀내면서, 피해자들의 최후를 확인할 수 있었다.
4.3사건 희생자 중 육지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리라.
9.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화폐 위조범으로 몰려 학살된 독립운동가 이관술
이계동 당직 간수장이 1950년 7월 1일 허겁지겁 2층으로 뛰어왔다.
"이(李) 대장, 큰일 났어."
"왜 그래요?"
"검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 새벽을 기해서 대규모 적의 공격이 있다고 하네. 그러니까 공산당 책임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그대로 집행하래."
당직 간수장의 이야기를 들은 이준영은 간담이 서늘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형무소 간수 대부분이 후퇴하거나 출근하지 않은 상황에서 형무소 재소자들이 탈출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준영은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지만 재소자들을 쉽사리 죽일 수도 없는 일이고, 어느 선까지 죽여야 하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가 소장님한테 갔다 와야 겠습니다." 소장 관사에는 김택일 소장과 서울에서 내려 온 법무부 원태연 행정국장(현재의 교정국장)이 있었다.
그가 상황을 보고하니, 김택일 소장이 검사장을 만나서 확인하자고 한다. 둘이 검사장을 만났는데 같은 명령을 내렸다. 소장 관사로 다시 오니 법무부 교정국장과 장·차관들은 부산 방면으로 피난가기 위해 허둥댔다. 국난의 위기에 국가지도자들은 피난 가기에 급급했다. 형무소로 돌아온 이준영 특별경비대(특경대) 부대장은 형무소재소자들의 폭동을 진압했다.
이틀 후 헌병대 짚차에 이어 지에무씨(GMC) 트럭 수십 대가 대전형무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헌병대 심용현 중위가 "야, 재소자들 전부 인계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헌병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경찰, 형무소 간수, 보병 군인은 그들에게 '고양이 앞에 쥐' 격이었다. 간수들이 재소자들의 손과 몸을 노끈과 광목, 철사로 묶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트럭에 실린 이들은 4사(倽)에 구금되어 있던 주요 정치범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서울에서 이감된 이관술과 송언필이 있었다. "이관술 나와." 처형장으로 가는 길이라 짐작한 이관술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명령에 응했다. 조선정판사 서무과장이었던 송언필은 이때부터 정신줄을 놓았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실은 트럭은 흙먼지를 날리며 대덕군(현재의 대전광역시) 산내면 골령골로 향했다.
"조선민족 만세!"
골령골에 도착한 인솔책임자 이준영은 이관술을 위시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을 헌병대에게 인계했다. 이준영이 등을 돌리고 내려오려는 순간 심용현 중위가 불렀다. "어이, 특경대장 이리 와." 이준영이 심용현 중위 근처로 가니 사전에 파놓은 커다란 구덩이가 여러 개 있었다. 인근 지역 주민과 청년방위대원들을 시켜 파놓은 세로 1m80cm, 가로 50m의 구덩이였다. 제일 먼저 학살의 희생양이 된 이는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이었다.
심용현 중위가 "어이~ 이관술. 너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 부를 수 없냐?"고 하니, 이관술은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라고 답변했다. 이관술이 "조선"이라고 외침과 동시에 '서서 총' 자세를 취하고 있던 헌병과 경찰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탕탕탕!" 이관술은 '악' 소리 한번 못하고 고꾸라졌다.
심 중위는 이관술의 뒤통수에 권총을 들이대고 확인 사살했다. 심 중위는 이준영에게 "특경대장은 저쪽으로 가면서 확인 사살해"라고 지시하면서 본인은 다른 방향으로 가면서 확인 사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발굴보고서', 2008).
이관술이 죽던 날 송언필도 죽었고, 이후 며칠간 진행된 '피의 살육제'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1800~3000명이 학살되었다. 48세에 산내 골령골에서 이슬처럼 사라진 이관술은 어떤 인물인가?
동덕여고 교사에서 항일혁명가로

▲ 이관술동경고등사범 졸업 앨범 속의 이관술 ⓒ 박만순
이관술(1902년생) 집안은 경북 울산군(현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일대에서 이름난 양반 지주 가문이었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면서 이관술의 조부와 부친은 그를 가르치는 것에 주저했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이관술이 '많이 배우면 다친다'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관술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가족들도 말릴 수 없었다. 그는 경성의 중등고보를 나온 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의 명문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를 나오면 학교 선생님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명석하고 담대한 행동을 했다는 일화는 숱하게 많다.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 살고 있는 이수환(84)은 "관술 형님이요, 얼매나 똑똑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일을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일을 시키는 꾀돌이에요. 하루는 그 형님이 콩잎에 밥을 싸서 호박잎에 주먹밥 여러 개를 싸놨어요. 그리고는 소 꼴 먹이러 가는 친구들에게, 자기 소 풀을 먹이면 밥 한 덩어리씩을 주었어요"라고 했다. 그는 단순히 영리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양반·상놈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풀고 더불어 사는 호인이었다.

▲ 이수환이관술의 어릴적 시절을 증언한 이수환 ⓒ 박만순
일본에서 귀국한 그의 첫 직장은 동덕여고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학생 체벌을 하지 않은 이관술은 동덕여고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의 인기교사가 되었다. 제자들의 독서회 모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은 그의 끓는 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그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항일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반제국주의동맹-경성트로이카-경성콤그룹에서 핵심지도자로 일하게 된 그는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이자 혁명가였다. 1920년대 숱하게 명멸한 조선공산당의 오류를 답습하지 않고 이재유와 함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진행해나갔다. 정책적 대안마련을 위해 '노동조건조사표'를 작성해 공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수배 중에 구두닦이, 고물장수, 솥땜장이로 위장해 일제경찰의 눈을 속이기도 했다.
그의 벗 이재유가 1944년 10월 26일 청주형무소에서 옥사했지만, 이관술은 해방을 대전 고물상에서 맞이했다.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인기정치인 5위에 오른 이관술이 무기징역
지금은 잊혀진 혁명가 이관술을 해방 직후 조선인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해방직후 선구회라는 보수적인 잡지사에서 정치인 여론조사를 했다.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결과는 놀라웠다.
요즘 사람들이 해방 직후 인물 하면 대부분 김구, 이승만, 김규식, 조병옥을 떠올릴 텐데, 당시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1위는 여운형으로 33%를 차지했다.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자였다가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그였다. 다음은 이승만(20%), 김구(17%)가 뒤를 이었다. 놀라운 것은 다음부터다. 박헌영(15%), 이관술(13%)이 4, 5위를 차지한 것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당수이고, 이관술은 조선공산당 총무이자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다.
한동안 '공산당'하면 '빨갱이'를 떠올렸고 '악마'같은 존재로 인식했지만, 해방 직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0~40년대에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에 전향하거나 순응해 별다른 독립운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이 여론조사에 반영된 것이다.
이관술은 당시에 조선공산당이라는 거대정당의 주요직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졌다. 소속은 공산당이었지만 좌·우익 진영에서 고루 호감을 받았다.
1946년 5월 4~7일 중부경찰서 형사대가 서울 소공동 74번지에 위치한 조선정판사 건물에 들이닥쳤다. 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 재무과장 박정상, 기술과장 김창선 등을 검거했다. 검거령이 내려진 이관술도 7월 6일 체포되었다.
'정판사 위폐사건'이란, 조선공산당 간부 및 조선정판사 직원들이 공모하여 조선정판사 인쇄시설을 이용해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까지 총 6회에 걸쳐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한국어과 박사학위 논문)
초고속으로 진행된 재판은 경찰조사과정에서 피의자에 대한 고문, 충분한 변론기회 박탈, 증거 불충분 등의 숱한 조작혐의가 있었다. 소설가 안재성은 조선정판사 사건이 조작혐의가 짙다고 했으며, 임성욱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정판사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해방 후 좌익진영을 분쇄한 사건은 '모스크바 삼삼회의 결정에 따른 논쟁'과 '정판사 사건'이었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던 이 사건과 재판으로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송언필과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만 4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대전 산내에서 '위조 지폐범'이라는 오명(汚名)을 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토지 기부 공적비반곡초등학교에 세워진 공적비 ⓒ 박만순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인 1947년 울산군 언양면 반곡리에 초등학교를 세우는 운동이 벌어졌다. 4인의 독지가가 땅을 기부했는데, 총 5715평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4인 중에 이관술이 포함된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범서면 이관술이 542평을 기부한 것으로 나온다.
무기징역에 처해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그가 가세가 기울어 가족의 생계도 걱정되었을 텐데, 그 와중에 500여 평의 땅을 반곡초등학교 세우는 데 선뜻 기부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태화초등학교에서 열린 합동위령제

▲ 합동묘 앞의 단체사진 백양사 아래에 만들어진 합동묘 앞에 선 유족들 ⓒ 박만순
학살 당한 것은 이관술만이 아니었다. 이관술의 사위와 이복동생도 총성에 사라졌다. 1960년 4.19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해 여름이었다. 경남 울산군 태화초등학교에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였다. 10년 전인 1950년 8월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학살된 이들의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기 위해서다.
울산지구 CIC와 울산경찰서 경찰들은 울산지역 보도연맹원 최소 870명을 위 두 곳에서 학살했다. 유가족들은 4.19 후인 1960년 여름 두 곳에서 상당수의 유해를 발굴했다. 가마니 위에 부위별 유해와 보도연맹원들을 묶었던 철사 줄이 대량 발굴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태화국민학교로 간 박경희(경남 마산시, 70세)는 발굴된 유해를 보자 경기를 일으켰다. 엄마 이정환 역시 목 놓아 울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천 명의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어떤 것이 누구의 유해인지 구별이 불가능했다. 물론 일부는 유품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수환의 증언에 의하면 "울산 범서면 망성리의 최문호의 아버지가 학살되었는데요, 발굴 때 도장이 나왔어요"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유해는 피해자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태화국민학교에서 위령제를 치른 후 백양사 아래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후 약 30명의 유족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하지만 봉분을 세운 지 1년도 채 안 되어 묘가 파헤쳐졌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동토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상부의 명령을 받은 울산경찰서는 비석을 깨부수고 유족들을 호출했다.
"빨갱이들이 묘를 만들었으니, 네놈들이 묘를 파헤쳐"라고 했다. 유가족들에게 파묘를 지시한 것이다. 인륜에 어긋나도 너무나 어긋난 조치였다. 더군다나 경찰들은 파헤친 묘에서 나온 유해를 유족들에게 화장해 버리라고 지시했다.
경남북지역과 제주도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하지만 유족들에게 파묘를 시키고, 유해를 불태워 버리라고 지시한 곳은 울산이 유일하다. 박경희의 부친 박동철은 이관술의 큰 사위다. 또한 울산에서 학살된 이중에는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학술도 포함되었다.
울산에서는 웃지못할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학살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울산군 두동면 구영리 모(某)씨가 야음을 이용해 집으로 왔다. 그는 친지와 자식들도 모르게 다락방에 은거했고, 아내가 밥을 갖다 주었다. 그런데 몇 개월 뒤 아내의 배가 남산만하게 부풀어 올랐다. 남편도 없는 여자가 바람을 피운 것으로 오해한 주변 사람들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다락방에서 내려와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몇 년 징역살이를 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로 추서돼야

▲ 이관술 생가 이관술 생가 앞에선 외손녀 손옥희 ⓒ 박만순
울산 지역의 시민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이관술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소설가 배성동과 고려대학교 이명훈 명예교수는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해 애쓰고 있다. 배성동 소설가는 "이관술 선생의 따님 이경환과 외손녀 손옥희 선생의 맺힌 한을 풀어주고 싶다"며 이 운동에 뛰어든 동기를 설명했다.
이관술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이명훈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한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에요?"라며 기자에게 역으로 질문한다. 맞는 말이다.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았다면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정한 원칙이다.
이런 기준에 근거하면 이관술은 당연히 독립유공자가 되어야 한다. 다만 이 문제는 국민적 공감대가 중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병행되어야 할 것 같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는 이관술 생가가 있다. 이관술 생가에는 어떤 안내판도 없으며, 현재 소유주가 집을 매각하려고 한다. 또한 생가 옆 작은 텃밭에는 이관술 비석이 땅속에 묻혀 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유족들이 무덤도 없는 비석을 세웠지만, 울산지역 보수단체들의 항의와 공안당국의 압력으로 땅 속에 묻힌 것이다.
이관술은 1950년 대전형무소 사건으로 대전 산내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실을 확인했으며, 사법부 역시 유족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주었다. 다만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역사적 진실규명이 되지 않았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한다면 이관술 개인이 아닌 '조선정판사 사건' 진실규명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이관술이 일제강점기 15년 동안 민족해방운동에 전심전력했고, 이로 인해 두 차례 5년간의 옥살이와 8년간의 수배생활을 했기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야 한다'라는 의견이 울산과 경주지역에서 형성되고 있다.

▲ 지난 24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사무소에서 '정판사 위폐 사건의 조작과 진실' 등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 ⓒ 박만순
"엉엉"
지난 24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사무소에서 '정판사 위폐 사건의 조작과 진실' 등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통곡이 터졌다. 잠시 울음을 터뜨린 것이 아니라 세미나 내내 울음이 그치지 못했다. 그 어느 토론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울음의 주인공은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85세)씨였다.
이날 창립한 '이관술기념사업회'는 평생을 조국과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이관술 기념관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 세미나에는 박재동 화백, 임성욱 박사 등 100여 명이 참여했다.
10. "속리산 구경 시켜줄게" 트럭에 태운 뒤 장난하듯 총살
청원군 사주면 사천리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앞으로 갓! 뒤로 갓!"
스무 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사천리 질구지 하천변 공터에서 제식훈련을 했다. 잠시 후에는 보도연맹가(保導聯盟歌)를 부르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공터로 다시 돌아온 무리들은 지휘자의 보도연맹 강령 선창에 따라 마지막 구호를 따라 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자" "다하자! 다하자! 다하자!" "우리는 망국적 북한괴뢰집단을 절대 반대하자" "반대하자! 반대하자! 반대하자!" 1950년 5월 충북 청원군 사주면 사천리(현재는 청주시 사천동) 질구지마을의 풍경이다.
사주면 사천리는 질구지, 발산, 새터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된다. 사천리에서는 보도연맹사건으로 42명이 학살되는데, 질구지 19명, 발산 12명, 새터 11명이 피해를 입었다. 이 마을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 경위는 증언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김홍만(83세, 청주시 사천동)은 "이장이 보도연맹 가입을 주도했는데요, '가입하지 않으면 비료 배급을 하지 않겠다, 농사 품앗이에서 제외 시키겠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마을 청년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한다.
신대식(70세, 청주시 내수읍)은 "아버지(발산리 신옥성)가 도장을 찍지 않으니까 경찰서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해 보도연맹에 가입했어요"라고 한다. 그런데 위 증언이 남로당 가입 경위인지, 보도연맹 가입 경위인지는 불분명하다.
발산리 김순오(96세, 청주시 사천동)의 증언은 당시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웃 마을에 사는 조신술(가명)이가 해방이 되니께 빨갱이 두목이 돼서 남로당원 모집을 했어. 나도 끌려 갈 뻔했어. 그때 남로당에 가입했던 이들이 나중에 모두 죽었지." 조신술의 주도로 마을 청년 상당수가 남로당에 가입을 하고, 이들이 후에 만들어진 보도연맹에 자동으로 가입되어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얘기다.
김순오의 증언은 이어진다. "당시 남로당에 가입되지 않은 이들은 자동으로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에 가입됐어. 나도 그렇고. 그런데 형님(김인구)이 조신술한테 공개망신을 당했어. 동생도 (남로당에) 가입 못 시키는 병신이라고 말여." 그렇게 해서 질구지 19명, 발산 15명, 새터 13명이 남로당을 거쳐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 증언자 김순오96세의 나이에도 경운기를 운전하는 김순오 ⓒ 박만순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도망가!"
정재님은 치마 끝자락을 움켜잡고 내덕지서로 달려갔다. 남편 신옥성을 포함한 사천리 보도연맹원들이 지서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여기 있으면 죽는대요."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도망 가! 따비밭의 참외나 잘 지켜." 쟁기나 소가 들어서지 못하고 따비나 지나 갈 정도로 좁은 밭에 주렁주렁 달린 참외를 누가 훔쳐 가지는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김홍만의 경우 어머니와 누님이 청주경찰서로 아버지를 면회 갔는데, "안 가면 크는 애들이 문제가 된다"며 청주경찰서 무덕관에 그대로 남았다고 증언한다.
발산리 김인구는 들일을 하다 집에 늦게 들어가니 마을 보도연맹원들이 전부 경찰서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 김복임은 새 옷 중 적삼을 남편에게 건네주고 "잘 다녀와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보리쌀 3되를 안겨 주었다. 김인구 동생 김순오는 "형님 가지 마요,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라고 만류했지만 허사였다.
이렇게 청주경찰서의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에 순순히 응했던 47명의 사천리 보도연맹원들은 죽음의 땅으로 끌려갔다. 청주경찰서에서 약 1주일간 구금되었던 이들은 손이 묶인 채 GMC 트럭에 실렸다. '왜 이러지' 하며 웅성거렸지만 돌아온 것은 무장한 군인과 경찰의 총 개머리판 세례였다. 이내 침묵이 트럭 안을 지배했다. '덜컹 덜컹' 하며 트럭은 비포장도로 길을 한참이나 달려 미원국민학교로 갔다.
미원국민학교 교실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밥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경찰들은 보도연맹원들에게 "마을에 들어가 알아서 밥을 얻어먹어라"고 한 것이다.
미원 면소재지에 살았던 송재복씨 집으로 갔던 사천리 새터 정현필과 정상봉은 집 주인의 언질로 그 시간부로 도망쳤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그들은 마을에 와서 사천리 보도연맹원들이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죽었다고 알려주었다. 김순오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 발산에서도 3명이 탈출을 해 마을로 돌아왔다.
신대식이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는 다르다. 신대식은 "미원국민학교에서 경찰이 수류탄을 터뜨렸는데, 보도연맹원들이 도망갔대요. 잠시 후에 경찰이 방송을 해 다시 모이라고 해 재집결을 했다고 해요. 그 혼란의 와중에 일부 사람들이 도망갔대요"라고 증언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미원국민학교에서 탈출을 한 사천리 보도연맹원은 새터 정현필과 정상봉, 발산 조신술(가명) 형제, 최민석(가명) 아버지였다.
"사람 잡아놨으니 장례 치러라"
충북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미원면 미원국민학교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은 다음날인 1950년 7월 12일 오전 9시 30분경 트럭에 실렸다. "속리산 구경시켜 줄 테니 트럭 위에서 조용히 해!"
보도연맹원들은 긴가민가 하면서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가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20분을 달려 트럭이 멈췄다. "속리산이 아닌데" 하는 웅성거림에 총 개머리판이 다시 날라 왔다. 길 가 옆에 일렬로 세워진 보도연맹원들에게는 마지막으로 말 할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인솔자의 "쏴"하는 소리와 함께 짚단 무너지듯이 보도연맹원들이 쓰러졌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가 2곳과 산 초입 1곳, 산 중턱 1곳, 총 4곳에서 15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는 데는 불과 수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장난치듯이 총질을 한 군인과 경찰들은 학살을 모두 마친 후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아치실 마을로 들어갔다. 집집마다 다니며 "사람 잡아놨으니 장례 치러라"라고 외쳤다.
아곡리 청·장년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핏물이 흐르는 사건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현장에는 애벌레가 채반 위에서 나란히 죽은 것처럼 흰 옷을 입은 이들이 일렬로 쓰러져 있었다.
군인과 경찰들이 양쪽에서 총격을 가해 옷은 붉은 피로 얼룩졌고, 밭고랑에는 핏물이 졸졸 흘렀다. 당시 시신 수습에 동원된 우창기(1926년생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는 "경찰들이 와서 장례 치르라고 해 삽 들고 갔어요, 너무나 끔찍해 생각하기도 싫어요"라며 침울한 얼굴을 했다.

▲ 우창기한국전쟁 당시 시신수습에 동원된 아곡리 주민 우창기(우측에서 3번째) ⓒ 박만순
낙인과 통곡... 남은 사람들의 삶
6.25 직후 입대했던 유○철(사주면 사천리 발산마을)은 휴가를 나와 보니 형 유영식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눈알이 돌아가며 이성을 잃었다. "조신술이 이 새끼 죽일 껴" 하며 마당에서 뛰어 나갔다.
보도연맹학살 사건 이후 조신술은 사천리 발산에서 살 수 없었다. 자신이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한 것은 아니지만, 보도연맹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유가족들로부터 원망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없이 인근마을인 청원군 사주면 사천리 상정마을로 이사했다.
유○철은 상정마을로 가 조신술을 찾아냈다. 총 앞에 장사는 없는 법. 유○철은 카빈총을 조신술에게 겨누고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갔다. "너 이 새끼, 우리 형 죽게 했지. 너도 죽어 봐." "동생. 내가 그런 거 아니잖어. 어쨌든 잘못했네. 한 번만 살려주게." 손을 싹싹 빌었다. 이윽고 총 소리가 났다. "탕탕탕" 세발의 총성에 조신술은 다리가 풀리며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는 살아났다. 유○철이 조신술을 정조준해서 쏜 것이 아니라 공포를 쏘았기 때문이다. 유○철은 울분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마 조신술을 죽일 수는 없었다. 실제 보도연맹원 학살의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책임자인 대통령 이승만과 집행자인 경찰과 군인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고,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그들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김순오는 여름 난리에 피난했다가 다시 마을로 왔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주경찰서 경찰이 와서 "잠시 조사할 게 있으니 갑시다"라며 그와 같은 마을 사람 3명을 연행한 것이다.
경찰들은 경찰서 취조실에서 바로 전기고문에 들어갔다. "너네 남로당에 가입했지." "아닙니다." "이 빨갱이 새끼들 솔직하게 불어." 전기고문의 강도를 높였다. "악" 비명이 이어졌지만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몇 시간 후에 당시 사천리 같은 마을 살았던 대한청년단원 권요섭이 경찰서에 찾아왔다. "형사님, 얘들은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증언해 결국 풀려났다. 보도연맹원의 유족이라고 경찰이 트집을 잡은 것이다.
신대식의 집안은 아버지 신옥성이 학살당하고 풍비박산 났다. 결국 어머니 정재님은 큰형과 작은형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신대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에 컸다. 본의 아니게 가족이 생이별한 것이다. 정재님은 살기 위해 전쟁을 했다. 약 10년간 식모살이를 했고, 서울 명동성당 내 고아원에서 밥해주는 일을 했다.
두 형은 고아원에 맡겨졌다. 작은 형은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다니다가 졸업을 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검정고시로 중학교 자격을 취득한 작은형 신태식은 청주상업학교(현재 청주의 대성고)를 3등으로 합격했다. 공부에 매진한 그는 졸업하자마자 청주 상업은행에 1차 합격했다.
그런데 최종심사에서 '아버지가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었다'는 이유로 신원조회에 걸려 낙방했다. 그날 어머니 정재님과 세 아들은 서로 부여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빨갱이 꼬리표는 그렇게 신대식 가족을 따라다녔고, 심지어 신대식이 1972년 해병대에 입대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다.
기억해야 할 죽음

▲ 2019년 발굴된 유해아곡리에서 발굴된 유해 ⓒ 박만순
지난 3월 8일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충북도청이 주관하는 유해 발굴 개토제가 열렸다. 이곳에 신대식을 포함한 옛 사천리(현재 청주시 사천동) 유가족들이 참석했다. 포클레인이 흙을 뜨는 동안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이후 발굴 현장에 두 차례 더 찾아가 자원봉사활동을 한 신대식은 유해 발굴 이야기에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이름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어요." 유복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발굴 현장에서 마음속으로 아무리 '아버지'를 불러 보아도 아버지가 돌아올 리 없다. 뒤엉킨 유해 속에 아버지의 체취를 맡을 수 있을까 해서, 여러 번 찾아가고 자원봉사활동도 해보지만 왠지 마음은 허하다.
신대식은 당신 아버지를 찾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아버지를 단 한명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신옥성을 포함한 사천리 보도연맹원 42명, 그리고 아곡리에서 죽은 백 수십 명의 죽음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유해 발굴의 최종 결과는 오는 25일에 발표된다.

▲ 2014년 아곡리 유해시굴 장면2014년 아곡리 유해시굴 장면. 앞줄 우측에서 4번째가 신대식. ⓒ 박만순
11. 새파란 젊은이가 상노인의 뺨을... 경찰보다 더 했던 태극청년단
국가폭력의 피해자, 이경종 집안 사람들
따스한 햇살이 천지를 비추는 때, 이경종의 마음은 한겨울이었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채 경찰의 총부리가 지시하는 데로 발걸음을 향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머리는 삼베로 뒤집어씌웠기에 앞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평지를 지나 숲속으로 가는 것 같았다. 그의 추측대로 경찰은 이경종을 충북 영동군 영동읍 설계리 구수동 찔레숲으로 끌고 갔다. "네 동생 어디로 도망갔어?" "모릅니다." 경종의 얼굴에 날아온 것은 구식 장총의 개머리판이었다. "퍽퍽퍽!"
"마지막 기회를 준다. 이복종이 어디에 있어?" 하는 질문과 함께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경종의 사지는 마비되고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심장의 쿵쾅거리는 소리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정말로 동생이 어디로 피신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답변이 없자 경찰은 그를 죽도록 패고, 영동경찰서로 끌고 가 유치장에 내던졌다. 찔레꽃이 한창 피던 1948년 5월경 일이었다.
▲ 뒷줄 왼쪽부터 이경종, 삼종, 복종 ⓒ 박만순

태극청년단과 경찰의 습격
낯선 청년들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봉현리 마을로 들이닥쳤다. 안내하는 청년을 따라 그 무리는 이경종의 초가집으로 걸음을 내쳤다. "복종이 나와"라며 마루를 몽둥이로 내리쳤다.
하지만 집안에는 이규태의 할아버지 이범준(1885년생)과 손자 규태, 그리고 여인들뿐이었다. "아들은 집에 없소." "철썩!"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 상노인 이범준의 뺨을 때렸다. 당시 63세는 노인 중의 노인인 상노인(上老人)으로 대우받았다. 가족 모두가 놀랐지만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이놈의 집 모두 박살 내"하는 소리와 함께 몽둥이들이 춤을 추었다.
몽둥이에 닿는 것은 모두 부서졌다. 옷장이며 그릇, 마당에 있던 항아리 등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그러더니 대장인 듯한 사람이 대빗자루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 기회야. 당신 자식 어디에 숨겼어?" 하지만 이범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불붙은 대빗자루를 든 대장은 초가집 지붕에 불을 붙이려 했다.
순간 이규태(당시 6세)는 울음을 터뜨리며 똥을 쌌다. 한 청년이 소년 이규태가 똥을 싼 것을 알고 다가왔다. "괜찮아. 울지 마" 그 청년은 규태의 머리를 쓰담으며 안심시켰다. 대장도 초가집에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은 물러났다. 1947년에 태청(태극청년단)이 충북 영동군 영동읍 봉현리 이경종의 집에 와서 부린 행패였다. 태극청년단의 행패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보다 무서운 것이 우익청년단이었는데, 특히 '태극청년단'이 그랬다.
물레를 돌리던 초겨울 늦은 밤 두툼한 돕바(외투)를 입은 청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죈(주인)!" 불청객의 등장에 규태의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경찰이다. 낮에 이 집으로 들어 온 자가 누구야?" "아무도 안 왔는데요?" "시끄러워!" 하는 소리와 함께 경찰들이 우르르 튀어 나왔다. "곳곳을 뒤져!" 경찰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방으로 들어 가 옷장이며 쌀뒤주를 뒤졌다.
한 경찰은 소 외양간에 가서 바닥을 발로 쾅쾅 차기도 했고, 다른 경찰은 다락에 올라가 호롱불을 비추기도 했다. 이들은 마을 앞산에서 새벽부터 하루 종일 감시하다가 밤 12시에 이경종의 집을 들이닥친 것이다. 하지만 이경종, 복종, 삼종 삼형제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경찰들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주시오"
"서대문형무소로 보내주시오." 한국전쟁 전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경종(1914년생)은 이감을 신청했다. 면회 온 아내 김희연(1917년생)이 만류했다. "서울로 가면 면회를 어떻게 가라고요. 그냥 여기에 있으세요." 하지만 그의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 힘도 없었다. 수시로 찾아온 경찰들에게 살해협박과 구타와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동경찰서에 마지막으로 잡혔을 때는 '쇠좆매'(채찍형 무기)로 엄청나게 맞아 몸이 '걸레'가 되었다.
그가 이감을 요구한 데에는 6촌 형 이종이 서대문형무소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을 간 것이 목숨을 구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대포소리, 탱크소리, 기총소사 소리가 아침부터 귀청을 때렸다. 잠시 후 옥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동무들은 해방되었소!" "만세!" 소리가 연이어졌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면서 서대문형무소 문이 북한군에 의해 열린 것이다.
이종은 육촌 아우 경종에게 말했다. "나는 북으로 갈 테니 동생은 고향 영동으로 가게." 형무소에서 작별인사를 한 이경종은 산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1주일이 걸려 고향 봉현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전쟁 와중에 그의 동생 복종과 삼종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복종(1921년생)은 좌익 활동 혐의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0년 7월 초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셋째 삼종(1929년생)은 한국전쟁 전 형들의 수배와 검거 와중에 어디론가 피신을 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69년이 지난 지금까지 행방불명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기에 온갖 고통을 겪고, 둘째 복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이복종의 좌익 활동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의 무거운 것이었을까?
무학자들의 배움터 '야학'

▲ 이경종 아들 이규태 ⓒ 박만순
전주 이씨 후예인 이규태(1942년생)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그런데 영동군 영동읍 심원리에 살던 외조부는 이경종이 양반 집 자제라는 이유로 딸 김희연을 시집보냈다. 외조부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사위에게 땅을 주고 3년 동안 매해 송아지 한 마리씩을 줬다. 이토록 가난했기에 경종과 복종은 초등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으며 셋째인 삼종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곤궁이 이경종 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봉현리 전체에 해당되었다. 1930년대 중반 봉현리는 80호 4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는데, 그 중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 졸업생이 3명이었고, 재학생이 4~5명에 불과했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 엮음, <끝나지 않은 여정>) 이런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키 위해 봉현리 출신 이종(1911년생)은 마을에 야학당을 개설했다. 계몽운동의 일환이었다.
야학을 개설한 이종은 19세에 상경해 무산자교육기관인 '고학당'에 입학했다. 김삼룡, 유축운, 이능종 등이 그의 선배였는데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밥벌이를 했다. 밥벌이는 주로 '영신환팔이'를 했다. 일부 야학생들은 <신소년> <별나라> <비판> 등의 잡지를 읽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접했다.
봉현리에서 야학을 하다가 <사회주의의 대의>라는 책이 발각되어 1개월간 옥고를 치른 이종은 타 지역을 다니며 생계에 전념하기도 했다. 해방을 영동에서 맞이한 그는 영동군 농민조합과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고, 활동공간을 이전해 남로당 청주시당 부위원장 겸 선전책을 하기도 했다.(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 엮음, <끝나지 않은 여정>)
충북 영동과 청주에서 간부로 활동하던 이종과 이경종·복종·삼종 형제는 6촌간이었다. 특히 무학자였던 경종과 복종은 마을의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이종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이종이 야학당 선생이기도 했지만, 그의 식견이 워낙 탁월했기에 봉현리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6촌 형 이종의 영향을 받은 복종은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고, 경종은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에서 지냈다. 삼종은 앞서 얘기했듯이 전쟁 전 행방불명되었다. 이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종의 삶... 그는 결국 북한으로 갔다
1949년 종로경찰서에 붙잡힌 이종은 치안국 사찰과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북한군의 옥문개방으로 풀려난 그는 한강 마포에서 원유도하 사업을 맡다가 UN군 수복기에 북으로 후퇴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1년 초겨울 금강정치학원에 입소했다. 소위 '남파간첩 교육기관'이다.
'똑똑'하는 소리에 이어 "동무들 하선하시오"라는 소리가 배 갑판에서 들렸다. 캄캄한 새벽에 배에서 내려 무작정 산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마을 이장한테 갔다. "이장님! 군산으로 장사하러 가는 사람인데, 길을 잃었습니다. 통통배 하나만 내 주세요." 하지만 이장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야 이 사람아! 풍랑이 이렇게 심한데 배를 어떻게 띄워?" 그러자 이종은 조용히 이장의 주머니에 돈 봉투를 찔러줬다. 돈의 효력은 바로 나타났다. "어이 ○씨, 이 양반 군산까지 태워다 줘."
충남 당진을 거쳐 전북 군산에 도착한 때는 1953년이었다. 그는 북한과의 선이 끊겨 소위 간첩 활동을 하지 못했다. 모시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낚시를 즐겼다. 그러다 하루는 군산시장에서 고향 사람 박○○을 만났다. 북한에서 교육받을 때 "친척이나 지인을 만나면 즉시 근거지를 옮겨라"는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설마' 했다. 그날 밤 영동 경찰들에게 붙잡힌 이종은 만 10년간의 옥살이를 꼬박했다.
그가 풀려난 때는 1969년이었다. 갈 곳 없는 그에게 귀향을 권유한 이는 이경종이었다. 어찌 보면 가족의 불행이 육촌형 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건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의 불행을 '시절 탓'으로 돌린 그는 육촌형을 집으로 데리고 와 깍듯이 모셨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노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을 둥구나무 아래서 항상 책을 읽던 모습을 7촌 조카 이규태는 기억한다. 이규태(78세. 영동군 영동읍)는 "닐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갔을 때요, 이종 아저씨가 마을 노인들한테 '저기(달)에 가면 중력 때문에 한 번 쓰러지면 힘들어서 일어나기가 힘들어요'라고 이야기기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1969년 만기석방 된 이종은 육촌 동생 이경종의 집에서 2년간 머무르다가, 영동읍 조심동에 살고 있던 친누나 이인의 집으로 가 4~5년을 살았다. 이인의 손자 임두환(80. 영동군 영동읍)은 "이종 할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서 한겨울에도 철길 옆 개울가에서 냉수마찰을 했어요, 정신력이 대단한 분이었어요"라고 회고한다.

▲ 이종이 쓴 시집 <독방>을 들고 있는 임두환 ⓒ 박만순
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이종을 징역 10년으로 풀어주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들어서 장기수들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했다. 사상전향은 폭력배와 교도소 간수를 동원해 폭행과 고문을 수반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분단체제를 이용해 악법을 휘둘렀다.
국가보안법에 이은 사회안전법 제정(1975년)으로 이중처벌을 가했다. 이종은 간첩다운 간첩활동도 하지 못한 채 징역 10년을 살았는데,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75년부터 1988년까지 2차 감옥생활을 했다. 총 23년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그는 1999년 비전향장기수 동료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2011년에 만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장에서 공무원으로 특채돼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한 이복종의 가정은 풍비박산났다. 이삼종은 전쟁 전부터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이경종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후 집에서 농사생활에 전념했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살던 그에게 육촌형 이종이 남파간첩사건으로 구속된 것은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종의 구속으로 인해 이경종이 특별히 불이익을 받거나 어려움에 부닥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경종의 아들 이규태는 1970년대 봉현리 이장을 하면서 '모범이장'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영동읍에서는 '모범이장'을 상대로 공무원 특채시험을 치렀는데, 이규태가 여기에 합격했다. 정식채용 직전 경찰에서 신원조회를 실시했다. 엄격하게 신원조회를 하면 이규태가 낙마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영동읍장 배정혁이 이규태의 사람 됨됨이와 능력을 알아보고 신원조회를 벗어나게 도움을 주었다. 즉 배정혁 읍장이 영동경찰서에 이규태 신원조회 서류를 들고 가 "빨리 처리해 달라"고 윽박지르다시피 해,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배정혁은 해방 직후 영동경찰서 사찰과에 근무했고, 자유당 시절에는 선거관리위원장을 역임한 지역 유지였다. 공무원에 특채된 이규태는 영동읍사무소와 심천면사무소에 근무했고, 추풍령면사무소에서 민원실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했다.
일제강점기에 계몽운동 차원으로 시작된 봉현리에서의 야학이 사회주의운동과 연계되었다는 혐의로 강제 폐쇄되고, 관련자들은 빨갱이로 규정되었다. 이경종 삼형제는 육촌형 이종과의 관계로 상처를 입었다. 물론 이복종이 학살당하고 나머지 형제가 곤욕을 치른 것이 이종의 탓은 아니다.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와 정부의 잘못이다.
특히 대전에서 학살당한 이복종이 뚜렷한 좌익 활동을 했다는 근거도 없다. 전쟁의 상처는 끝나지 않았다. 상처를 누가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가?
12. 빨갱이 잡겠다며 14살 소녀 목에 총 겨눈 경찰
공주경찰서에 끌려간 신석호 집안이 겪은 6.25
야트막한 초가지붕 위로 밥하는 하얀 연기가 올라갈 때, 한 명의 사복형사와 두 명의 경찰이 들이닥쳤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가족들에게 경찰은 마치 저승에서 온 염라대왕 같았다. 눈을 부라리던 사복형사는 14세 소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네가 신석호 동생 순란이냐?"
"네."
"따라 와."
가족들이 말릴 새도 없이 신순란은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그렇게 마을 뒷산으로 가는데 작은 오빠가 황급히 달려와 "네가 말 잘 못하면 우리 가족 다 죽는다"라고는 다시 산 아래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깊숙한 골짜기에 다다르자 경찰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오빠가 어디에 굴을 팠냐?" "오빠 밥 갖다 준 적 있지?"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소녀가 답변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퇴학시킨다고 겁박도 했다. 하지만 뭘 알아야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소녀의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로 화가 치민 형사는 "이 지지배가 정신 못 차리네, 죽고 싶어" 하며 권총을 소녀의 목에 들이댔다. 경찰 두 명도 장총을 소녀의 목에 들이댔다. 세 정의 총구가 14세 소녀의 목을 향한 것이다.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소녀는 입만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돌아서." 돌아선 소녀는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집으로 돌아가." 산 날망(마루의 방언)에서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엉금엉금 기어온 것만큼은 분명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산에서 있었던 일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다섯 살 아기까지 끌고 간 경찰
신순란이 경찰들에게 협박 받기 약 한 달 전, 경찰들은 소녀의 초가집에 들이닥쳤다. 추석을 3일 앞둔 1949년 10월 3일이었다. 방 뒷문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자 공부를 하던 신석호가 문을 빼꼼이 열었다. 경찰들이었다. 앞문을 박차고 뛰는 순간 경찰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수갑을 채우고 밧줄로 몸을 묶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러시오!" 항의하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발길질과 뭇매뿐이었다.
마루에서 울고 있던 여동생 순란(1936년생)에게 경찰은 시끄럽다고 혼내키며, 수숫대로 마루를 내리쳤다. 신순란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경찰은 수숫대로 소녀의 얼굴과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내리치는 수숫대의 따가움과 경찰들의 기세에 눌려 순란은 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생네 집에 가 있던 아버지 신명현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는 줄 모르겠지만, 죄가 있다면 자식 대신 나를 붙잡아 가시오." "시끄러워!" 언쟁이 붙은 지 얼마 안 되어 경찰이 총구를 신명현의 목에 들이대며 "죽고 싶어?" 하며 소리쳤다. "쏘아라, 쏴!" 말대꾸가 귀찮아졌는지 경찰들은 신명현을 밀치고, 신석호(1924년생)를 끌고갔다.
어머니는 그해 추석에 송편을 빚지도 않았고, 종손(宗孫) 신석호가 경찰에 잡혀간 후부터 집에 웃음이 끊겼다. 그 뿐만 아니었다. 경찰들이 수시로 들이닥쳐 집뒤짐을 했고, 감시를 밥 먹듯이 했다. 밤이 되면 가족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말없이 눈만 감고 있는 형편이었다. 밤마다 가족들이 한 명씩 끌려가 신문을 받았다. 하루는 신석호 딸 신치수(여, 5세)가 끌려가기도 했다. 충남 공주경찰서로 다섯 살짜리 아기를 끌고 간 것이다. 경찰이 아기에게 들을 수 있는 답변이 울음 말고 무엇이 있었겠는가. 몇 시간이 흐른 뒤 순란의 숙부가 아기를 업고 왔다.
오빠는 누구였길래

▲ 학생 시절의 신석호 ⓒ 박만순
1949년 10월 12일 충남 공주경찰서에 끌려 간 신석호는 어떤 활동을 했던 인물인가? 아쉽게도 그가 어떤 사회활동을 했는지 특별한 증언이나 자료가 나온 게 없다. 판결문 역시 나오지 않았다. 다만 백범 김구의 서거 소식에 오빠가 목 놓아 울었다는 여동생 신순란(84세, 대전광역시 중구 산성동)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민족주의자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신석호가 살았던 충남 공주군 의당면 송정리는 40호가 사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낮에는 훈장을 초빙해 청년들이 글을 배웠고, 밤에는 신석호가 중심이 되어 야학을 운영했다. 마을 아주머니, 할머니 중 글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글방을 운영했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직접 책을 묶기도 했다. 책을 만들 때면 여동생 순란은 먹을 가는 등의 잔일과 심부름을 도맡았다. 또한 책을 오랜 기간 보관하기 위해 책 모서리부분에 기름칠을 했다니, 신석호의 책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신순란의 증언이다.
"오빠는요, 한 번도 큰 소리를 치거나 화를 낸 적이 없어요. 저한테도 항상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그랬어요."
그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인물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신순란은 "낯선 분들이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석호 오빠를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다 한다. 1948년 5월 10일 열린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공주에서 신석호를 출마시키기 위해 지인들이 나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신명현은 단호히 거절했다. "잘난 놈이 먼저 죽는다." 아버지의 불호령에 가족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지만, 가슴에 부풀어 오른 자부심만은 어쩔 수 없었다.
걸레가 된 손과 피투성이 옷

▲ 신석호가 직접 만든 책 ⓒ 박만순
공주경찰서에 끌려간 오빠 면회를 위해 순란은 올케와 함께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경찰서까지는 20리(8km) 길이었다. 경찰서 가기 전에 있는 고모 집에 들렀다. 반가워하는 고모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지금 경찰서에 가봐야 오빠는 없다"는 말을 했다. 재소자들을 태운 GMC 트럭이 대전방향으로 며칠 전에 갔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여 유심히 보았는데 트럭에서 용수를 잠시 올린 신석호가 고모한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대전형무소에 있는 신석호 면회를 위해 어머니 이비상은 새벽차를 탔다. 몇 번 버스를 갈아타는 동안 머리에 인 보따리로 자라목이 되었지만, 아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목이 아픈 줄도 몰랐다. 보따리에는 먹을 것과 겨울 옷, 새솜을 넣은 버선이 있었다. 형무소 문이 덜컹 열리면서 면회절차에 들어갔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아들이 나타났다.
꾸벅 절을 하는 아들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이 너무나 야위었고, 뭔가 감추는 모습이 역력했다. 양 손을 뒤로 감추는 것이 아닌가.
"야. 네 손 좀 만져보자."
"아녜요. 어머니. 그냥 말씀하세요."
"아니긴 뭐가 아녀. 네 손 만져보기 전엔 한발작도 안 움직일란다."
할 수 없이 손을 내민 아들의 손은 이미 사람 손이 아니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손이 걸레가 되었다. 전기고문으로 인해 손바닥과 손등 모두 갈라지고 피부가 까매졌다. 원래 입었던 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입었던 옷을 끌어안고 울며불며 100리(40km) 길을 걸어왔다. 도저히 맘 편안히 버스를 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혼절했다.
얼마 후 대전지방법원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재판장이 '신석호 5년'이라고 선고를 하자 법정 안은 탄식과 울음바다로 이어졌다. 아버지 신명현은 항소를 하기로 결심하고 변호사를 사기 위해 황소 두 마리를 팔았다. 하지만 항소심을 진행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신석호는 산내 골짜기로 끌려가 군인과 경찰에게 학살당했다.
괭이 메고 시신을 찾아 헤매다
집안 종손이 죽었다는 소식에 집안은 혼비백산이 되었다.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신줄을 놓았다. 정신을 추스른 아버지가 괭이를 메고 매일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다녔지만 허사였다.
아버지 신명현이 기력이 빠져 돌아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집 안에 누워있던 어느 날, 땅거미가 질 무렵 인민군들이 마을 우물가에 나타났다. 물동이를 팽개치고 허겁지겁 달려온 딸 순란에게 인민군 소식을 들은 신명현은 괭이를 들고 인민군에게 달려갔다. "이 놈들아. 내 자식 살려내! 네놈들이 쳐 내려오지 않았으면 울 아들도 안 죽었을 껴!" 하지만 인민군한테 분풀이를 한다고 해서 죽은 아들이 살아올 수는 없는 법이었다.
1959년경 신석호의 시신이 없는 묘가 만들어졌다. 그가 일제강점기 말 군인으로 끌려가면서 놓고 간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도 관에 넣었다. 평소 그가 애지중지한 물품들도 관속에 넣었는데, 직접 엮은 책도 포함되었다.

▲ 신석호 여동생 신순란 ⓒ 박만순
신순란은 1949년 가을부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오빠가 잡혀가는 모습과 자신이 경찰로부터 살해 협박 당한 것을 잊은 적이 없다. 오빠가 왜 누구한테 죽었는지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눈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대전으로 시집 온 이후에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부모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는 오빠 이야기를 모두 했다. 그러나 남편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고, 세상사는 게 어려워 마음속에 묻어 두기만 했다.
2000년, 남편의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방에 들어가 보니 TV에 산내 골령골 위령비 제막식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다음 날 택시를 타고 산내 현장을 가니 학살 사실이 쓰여 있는 비석이 있었다. 비문을 읽으니 오빠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때까지 오빠가 언제, 왜,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는지 정확한 내용을 몰랐기 때문이다.
1년 후인 2001년 같은 날, 일찌감치 산내 현장에 갔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수백 명이 모였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이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이제까지 평생 울은 것보다 많은 눈물이 흘렀다. 2002년도에는 오빠의 사연을 담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에 응어리 진 것이 풀릴 것 같았다.
그때부터 사는 게 사는 것 같았다. 2005년에는 <백두산문학>에 등단했고, 그해 말 시집 <눈물의 1949>를 출판했다. 시집에 실린 '입을 열어도 될까'는 열네 살부터 칠십의 나이까지 가슴속에만 묻어왔던 오빠의 사연을 공론화시킨 작품이다.
1949년 음력 8월 12일 밤에 책상 앞에 계시다
끌려 나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꿇어앉혀놓고 발길로 차곤 했다
오라버니께서 나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고 외치셨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 시 '입을 열어도 될까' 일부
이후 신석호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사건'으로 분류되어 진실규명 되었다. 2017년 6월 27일 대전 산내에서는 '제18차 대전산내 학살사건 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 중간에 가수 진은설의 추모가(追慕歌)가 있었다.
비가 내리네 소리 없이 내리네
어머니 눈물 같아서
어머니를 불러 보네
바람이 스쳐갈 때면
어머니 한숨소리 같아
그처럼 그 소리가
- '자식 잃은 어머니의 눈물' 가사 중 일부
신순란이 가사를 만들고 진은설이 노래했다. 진은설은 신순란의 외손녀이다. 진은설은 노래하는 내내 외할머니 신순란의 손을 꼭 잡았다. 신순란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노랫말을 지었지만, 진은설이 부른 노래는 참가한 모든 유족들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아니,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바치는 노래이자 역사에 바치는 노래였다.
12. 말 타고 땅 관리하던 땅부잣집은 왜 몰락했나
충남 논산군 광석면 윤여병씨 가족 이야기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야, 이 지지배야 시끄러워!"
"집우 집주 넓을 홍 거칠 황."
"시끄러우니까 그만하라고."
고모부가 성질을 냈다.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6세 윤정희는 제 흥에 겨워 고모부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흥에 겨워 장단에 맞춰 외우기 시작한 천자문 낭독은 계속되었다.
"날 일 달 월 찰 영 기울 측."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별이 반짝였다. 순간 어린 소녀 윤정희는 의식을 잃었다. 화가 난 고모부의 발길질에 소녀가 방바닥을 몇 바퀴 구르면서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것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뇌진탕이었다. 어린 소녀가 뇌진탕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은 것은 거의 3년이 지나서였다. 다른 이도 아닌 가족인 고모부가 왜 6세 소녀를 발로 차 뇌진탕에 걸리게 했을까?
말을 타고 땅을 관리하던 부잣집 둘째 아들
파평윤씨 문정공파 윤상효는 충남 논산군 광석면의 거부(巨富)였다. 광석면에서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자신의 땅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말을 타고 다녔다.
집에는 말이 한두 마리도 아닌 다섯 마리나 되었다. 박경리 소설 <토지(土地)>에서 주인공 최서희가 가마를 타고 자신의 땅을 둘러보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윤상효의 땅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말 다섯 마리가 있었다는 증언만으로도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집터가 1500평이나 되었으며, 소작료를 받는 가을이면 광(창고)에 집의 머슴이나 마름들이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번질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윤상효에게 걱정거리가 생겼다. 둘째 아들 윤여병(1919년생)이 남로당 가입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22세부터 충남 논산군 광석면사무소에 취직한 윤여병은 성실한 공무원으로 소문이 났었다. 그런 그에게도 해방정국의 회오리는 비껴가지 않았다. 같은 마을 청년들이 그에게 남로당 가입을 강권한 것이다. 그의 딸 윤정희의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 윤여병에게 마을 좌익청년들이 양쪽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며 남로당에 가입할 것을 협박했다고 한다.
과연 당시에 정말 그렇게 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이 일로 인해 윤상효는 둘째 아들에게 노발대발했다. "야, 이놈아. 도장 찍으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왜 도장 찍었어? 칼에 찔리고 총에 맞는 상황이 오면 그냥 죽어야지, 도장을 찍어?" 윤상효가 콧바람을 쉭쉭대면서 언성을 높였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이다.
윤여병이 동료들의 권유를 협박으로 여기고, 특히나 동료들이 칼로 위협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노발대발하는 아버지에게 변명을 하기 위해 말을 둘러댔을 것이다.

▲ 판결문윤여병의 판결문 ⓒ 박만순
판결문에 따르면 윤여병은 남로당 자금 일부를 다른 이에게 전달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49년 10월 31일에 대전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면사무소에서 면직(免職)되었다. 그런데 이런 선고가 윤여병과 그의 동료에게는 의외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같은 마을 사람 4명이 대전지방법원에서 동일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다른 이는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윤여병만 실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윤여병이 경찰의 출두명령을 수차례 거부한 점을 보면 스스로가 큰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경찰의 출두명령서를 받은 날도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면사무소로 출근했다. 당시 면사무소 직원 중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이는 그가 유일했다.
그렇게 일상생활을 하던 중에 마침내 논산경찰서에서 그를 연행해 재판에 회부했다. 같은 마을 사람 4명은 이미 연행된 뒤였다.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찰·검찰과 피의자 가족 간에 은밀한 거래가 진행되었다.
즉, 뇌물을 쓰면 집행유예로 석방시켜 준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금액도 이야기되었다. 1인당 30만 원이었다. 그 결과 돈을 쓴 다른 4명은 모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광석면 소문난 갑부의 둘째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윤상효가 '너 이놈 고생해봐라'며 뇌물 쓰기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자식 죽었다는 소리에 뇌졸중 걸려
윤여병 아내 송숙원은 백일 된 막내를 업고 대전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육중한 철문이 마음을 옥죄었지만, 남편을 본다는 기쁨이 더욱 컸다. "여보 잘 지내셨어요?"라고 인사하며 애틋한 심정으로 남편과 조우했다.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남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남편은 그리운 아내보다 백일 된 막내가 더욱 안쓰러웠다.
"어쩔려구 이렇게 갓난아기를 데려 왔소?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라구"하며 역정을 냈다. 이윽고 그는 아내에게 "얼릉 집에 가" 하며 휙 돌아섰다. 그리운 아내를 보았건만 사랑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70년 전 한국 남성의 모습이었다. 송숙원은 서럽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쉬웠던 면회가 이승에서 마지막 대면(對面)일 줄이야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보게. 지금 자네 뭐라 했는가?" 하지만 소문을 갖고 온 집안 사람은 쭈뼛거리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말해 보라니깐!" 하며 언성을 높이자, 그 사람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리가 나 정부가 후퇴하면서 우리나라 군인이랑 경찰이 형무소에 있던 이들을 전부 쏴서 죽였다고 하더구만요. 대부님도 아마 돌아가셨을 겁니다." 집안 항렬이 높았던 윤여병을 그 사람은 할아버지(大父)라고 불렀던 것이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이 쓰러졌다. 윤상효가 정신 줄을 논 것이다. 당신 아들이 죽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북한군도 아닌 대한민국 군인·경찰한테 총살 당하다니... 사실 아들이 죄가 있다면 정부에서 불법화한 남로당에 도장 찍어준 것 밖에 없는데, 그에 대한 죗값은 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까막소(감옥소의 방언)에서 달게 받고 있던 것이 아닌가. 결국 자기가 재판에서 뇌물을 쓰지 않아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며느리를 볼 면목이 없었다.
"아가, 친정으로 가거라. 그리고 좋은 사람 만나 개가(改嫁) 해라." "싫어요, 아버님." 하지만 시아버지 윤상효는 단호했다. 도저히 한 울타리 안에서 며느리와 같이 살 자신이 없었다. 아들을 죽인 사람이 자신이라는 죄의식 때문에, 며느리와 손주들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한번 뜻을 세운 파평 윤씨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송숙원은 큰아들과 막내를 데리고 잠시 친정집에 가 있기로 했다. 기간을 약정할 수 없는 헤어짐은 눈물바다였다. 특히 엄마와 헤어지게 된 윤정희(1946년생)는 악을 쓰며 울었다. 눈물 콧물에 얼굴은 엉망이었다. "아가, 울지 마"라며 달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린 소녀는 마을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이러한 눈물바다 속에서도 이별의식은 진행되었다.
집안 머슴들이 구루마(리어카)에 쌀과 양식들을 산처럼 쌓았다. 윤상효가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면서, 가슴 시린 마음을 구루마에 쏟아 부은 것이다. 전 재산을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땅은 쉽게 팔리지 않는 것이라 식량과 물품으로 아쉬운 마음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상당한 현금도 며느리의 손에 쥐어 주었다. 며느리는 눈물을 머금고 친정인 충남 청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들도, 며느리도 없는 광석면 율리는 마치 초상집 같았다. 밤이면 귀신이 나타나는 것 같아 윤상효는 한시도 율리에 있기가 싫었다. 그는 딸에게 가기로 결심하고 일부 토지를 팔았다.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낼 때처럼 구루마에 식량을 잔뜩 실었다. 또한 그의 전대에는 토지를 판매한 돈이 두둑했다. 이사 가는 날 마을 사람들은 나와 보지도 않았다. '빨갱이 집' 이사 하는데 나와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세상 인심이 너무나 야박하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전쟁 중인 1951년도에 세상 인심만을 타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충남 부여군 부여면 능산리에 살았던 사위는 장인 장모의 행렬에 처음에는 살갑게 대했다. 하지만 사위의 살가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특히 장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더욱 그랬다.
칼, 작두를 방 안에 놓고 잠든 소녀

▲ 윤정희윤여병의 딸 윤정희 ⓒ 박만순
뇌졸중으로 쓰러진 윤상효는 똥오줌을 가리지 못했다. 결국 똥오줌을 받아내는 것은 아내 박덕례의 몫이 되었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1년만인 1952년에 한 많은 세상과 작별을 했다.
윤정희 고모부는 민주당 지지자로 각종 선거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업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가산은 쉽게 없어졌다. 장인이 전대에 가득 가져온 돈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처조카 윤정희의 천자문 외는 소리가 자신의 초라한 신세를 타박하는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순간 짜증이 일면서 발길질을 한다는 것이 조카의 뇌진탕으로 이어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장인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때부터 윤정희의 정신은 오락가락했다. 아니 3년간 의식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더욱 부합했다. 논산군 광석면 부자라는 명성은 할아버지가 죽은 몇 년 사이에 온데간데 없었다. 결국 고모부의 집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고모부가 선거에 돈을 없애느라 집을 채권자들에게 담보로 잡혔기 때문이다. 채권자들은 돈 받을 길이 없자, 집을 헐어 목재를 가져갔다. 할 수 없이 할머니와 윤정희는 남의 집살이를 전전했다.
오빠가 술에 취해 집에 왔다. 동생 정희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평소에는 양처럼 온순한 오빠가 술만 먹으면 광인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no touch(노 터치)" 오빠가 술만 먹으면 외치는 소리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학살되고, 열심히 공부해 보았자 신원조회로 미래가 없는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방황하게 되었고 어릴 때부터 술과 유흥의 길에 빠져 들었다. 맘보 청바지에 선글라스를 끼고 서울 등지를 배회했다. 시골에서 돼지를 팔아 돈이 떨어질 때까지 놀았다. 가끔 집에 올 때마다 만취 상태였고, 화풀이로 여동생 정희를 팼다. 오빠한테 맞는 것이 너무도 무서웠던 정희는 대전에 사는 셋째 고모네로 도망갔다.
윤정희가 열 살에 대전 대흥동 고모네로 갔지만, 소녀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고모가 조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모는 하숙을 치면서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조카 윤정희는 심부름을 했다. 중앙시장에서 바느질감을 받아 와 고모에게 전달해 주고 다시 중앙시장에 갖다 주는 일을 했다. 고모 일은 더욱 번창해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가져 오는 것도 정희의 몫이었다.
바느질감을 담은 보따리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미군부대와 중앙시장, 고모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다보면 목은 자라목이 되고, 머리가 '빵꾸'나는 듯했다.
"아줌마 신청 잘못하면 큰일 나요"
산악회에서 대전 인근의 산을 올라갔다가 하산하는 길이었다. 현수막에 "6.25 때 가족 중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까?"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 순간 그 글씨가 주먹만 했다. 대전 중구청으로 내달렸다. 안내하는 이에게 물으니 비치된 '진실규명신청서'를 내줬다. '아버지 윤여병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0년 7월 초 후퇴하는 군·경에게 불법적으로 희생되었다'는 요지의 신청서를 썼다. 신청서를 담당공무원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공무원이 뜻밖의 소리를 했다. "아줌마, 신청 잘못하면 큰일 나요"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공무원은 해당자가 아닌 사람이 잘못 신청하면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서운한 감정이 앞섰다. 담당 공무원의 대꾸를 무시하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2006년 11월 29일의 일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청서 접수를 마감하기 하루 전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산내 골령골에서 열리는 위령제에도 꼬박 참석했다. 아버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국가기록원도 방문하고 종친회 행사에도 참석해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수소문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오빠의 행동도 이해했다. 국가폭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신원조회로 미래가 없던 오빠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래서 술로 세월을 보냈고 "노 터치"를 외쳐댄 것이리라.
윤정희(74세,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가 진실화해위원회 문을 노크한 지 4년 만에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전후한 시기에 오빠와 남동생이 병환으로 사망했다. 이제 윤정희는 세상에 혼자 남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이끌어냈고, 문중과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자녀와 손주들의 사랑스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안방과 거실에 잔뜩 걸어 놓았다. 매일 사진을 보며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얻는 것이다. 부모에게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식과 손주들에게 실컷 베풀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은 따듯하기만 하다.

▲ 진혼비문 윤정희가 작성한 아버지 윤여병의 비문 ⓒ 박만순
13. "거기 가면 다 죽어" 수십명 살리고 불명예 퇴직 당한 경찰
안만근 남이지서장과 현도면 주민들이 겪은 6.25
현도분주소에 끌려온 안희영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치안대원에게 맞았는지 뺨은 붉게 물들었고, 퉁퉁 부었다. "야 이 새끼야! 어깨에 멘 건 뭐야?" "기타입니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소년이 말했다. 분주소장이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 자식, 내무서로 보내." 분주소장의 명령으로 분주소원과 치안대원은 안희영을 끌고 나갔다.
"야, 그 새끼 메고 있고 기타는 놓고 가게 해!" 뒷결박을 지은 채 안희영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충북 청원군 현도면에서 청주로 가려면 청원군 남이면 소재지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면소재지인 척산을 지나가는데 남이지서가 보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 지서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1950년 7월 12일 동료들과 함께 영동으로 후퇴했다.
다른 가족들도 피난을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년 안희영(1934년생)은 가족들과 함께 가는 피난길을 마다했다. 하지만 며칠 후 경찰 가족이라고, 청주로 끌려가는 신세이다 보니, 가족들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50리(20km)를 걸어서 청주내무서에 도착했을 때는 안희영이나 끌고 오는 이들이나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안희영이 청주내무서(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을 때에는 이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며칠 후 이들은 무심천(無心川)으로 끌려 나갔다. "인민의 적, 반동들을 처단하시오"라는 상급자의 명령에 내무서원들의 총에 불이 뿜어졌다. 그렇게 안희영은 청원군 남이지서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17세의 어린 나이에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1950년 7월 중순 학살되었다.
"청주로 가면 다 죽어!"

▲ 국군 수복 후에 찍은 남이지서 단체사진. 앞줄 가운데가 안만근지서장. 1950.10.2 ⓒ 박만순
안희영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길래, 소년 안희영은 학살되었을까? 소년의 아버지 안만근은 당시 충북 청원군 남이면 지서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말 악랄한 행동을 해 주민들의 원성을 샀던 인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놀랍게도 남이 보도연맹원 약 70명을 살려준 의인이었다. (관련기사: 밟혀 죽고, 숨 막혀 죽고... 시신 가득했던 부역자 이송 기차)
그런데 북한군과 지방좌익은 그 선행을 알지 못한 채 지서장과 그 가족을 무조건 '반동'으로 치부해 잡아들인 것이다. 현도면 죽전리가 집인 안만근이 경찰 동료들과 후퇴하자 그의 동생을 붙잡기 위해 남이분주소장이 부하들을 현도면으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남이분주소원들이 도착하니 안만근의 동생은 막 피신을 한 상태였다. 그들은 빈털터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안만근 가족들을 체포하려 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 안희영 밖에 없었다. 그는 늘 기타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멋쟁이였다. 그런데 피난을 가지 않고 있다가 역사의 희생양이 됐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놀라운 일을 알게 됐다. 남이지서장 안만근이 남이면 보도연맹원뿐만 아니라 현도면 보도연맹원들도 살려줬다는 증언이 나왔다. 남이지서장이 현도면 보도연맹원들을 어떻게 살려줄 수 있었을까? 사연은 다음과 같다.
6.25가 나자 상부의 지시로 현도지서장 신아무개는 현도국민학교에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다. 70명의 보도연맹원 중 3명을 선별해, 홍아무개 순경에게 현도면 상삼리 고개마루(밤고개)에서 처형할 것을 지시했다. 상삼리 김기모와 우록리 김종협과 정종태가 제물(祭物)이 되었다.
신 지서장이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에게 "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집으로 가라는 얘긴 줄 모르고 청주경찰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8일이었다. 그들이 남이면 소재지를 지나갈 때, 한 사람이 "지서에 들려서 지서장님한테 인사나 하고 가세"라고 했다.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동의해 지서 문을 열었다. 일행을 반갑게 맞이한 안만근 지서장은 이들이 청주경찰서로 간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지금 청주로 가면 다 죽어. 얼른 도망가게."
안 지서장의 소리에 현도 보도연맹원들은 기겁을 하고 면으로 되돌아갔다.(오경세, 85세, 충북 청주시 현도면 중척리) 이렇게 해서 현도면 보도연맹원 70명 중 3명만이 죽고, 전원이 살아날 수 있었다.
기존에 청원군 현도면 보도연맹원 대부분이 학살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었다. 첫째, 신아무개 지서장이 살려주었다는 설, 둘째, 안만근 남이지서장의 귀뜸으로 살아났다는 설, 셋째, 현도면 보도연맹원 오갑진(吳甲鎭)이 소집에 응하지 말라고 했다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작용할 수는 있었으나, 결정적인 것은 안만근의 역할이었다.
안승갑이 쓴 1950년 5월 23일자(양력으로는 7월 8일) 일기에 보면 "보도연맹회원 청주 들어가던 중에 남이면에서 돌아오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용근, <낙산유고(諾山遺稿)>, 양서각) 남이면 보도연맹원 일부와 현도면 보도연맹원 절대 다수를 살려 준 안만근의 선행은 북한군 점령기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가족이 좌우로 내몰린 시대
청원군 현도면 시목리 오국진 집에 불이 환하게 빛났다. 1950년 7월 17일 북한군 진주 며칠 전 '오국진 환영대회'가 열린 것이다. 오국진은 일제강점기에 '동경물리학교'를 나와 개성 송도고보 교사를 지냈고 해방 후에는 청주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한국전쟁 전에 월북한 그는 전쟁이 나자 '정치공작대'에 소속되어 청주를 거쳐 전주로 가게 됐다. 와중에 고향 현도에 와서 하룻밤을 자게 되니 현도면의 유지들이 금의환향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당시 오국진의 집에는 오세균이 살고 있었다.
현도면의 대표 유지인 오영길이 손을 들어 오국진에게 물었다. "우리는 집이 부유해 일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공산당이 오면 모두 죽이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오국진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산당은 모두가 골고루 잘 살자는 것이지, 부자들을 죽이거나 괴롭히지 않습니다. 걱정 마세요." 오국진은 다음 날 청주로 출발했고, 후에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오세균, 86세, 청주시 분평동)
오국진 동생 오갑진은 형의 월북으로 '요주의인물'로 낙인 찍혀 보도연맹에 자동으로 가입됐다. 하지만 그는 현도초등학교 교장을 하고 있어서 지역유지이기도 했다. 그는 전쟁 초기 보도연맹원 소집에 응하지 않아 죽음을 피해갈 수 있었다. 북한군이 현도면에 진주하자 오갑진은 1950년 7월 23일 현도면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다. (안용근, <낙산유고(諾山遺稿)>, 양서각) 이후 오갑진은 청원군 인민위원회 사무장이 됐고 국군 수복 후엔 살기 위해 월북을 택한다. 가족들은 남쪽에 둔 채로 국진-갑진 형제는 북으로 갔다.
안만근 지서장과 그의 가족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오국진 형제 이야기로 샛길을 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안만근의 아들 안희찬이 후일 오갑진의 사위가 되기 때문이다.
어리숙한 간첩
1968년 어느날 '부강약수터에 수상한 자가 나타났다'는 첩보가 수사기관에 입수되자, 중앙정보부와 청원군 경찰들은 난리가 났다. 청주 시내의 정보기관과 경찰기관 요원들이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에 있는 부강약수터로 총출동했다. 하지만 수상한 자는 검거되지 않았다. 며칠 후 문의면에 중의적삼을 입은 3명의 수상한 남성이 출현했다는 제보가 날아왔지만 검거에는 실패했다. 그런데 며칠 후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끽'하는 소리가 문의면 면소재지를 울렸다. 현도와 신탄진을 경유해 대전으로 가는 시외버스였다. 중의적삼을 입은 이들이 버스에 탔을 때는 빈 좌석이 없었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고, 비포장도로라 툭하면 버스가 출렁였다. 그런데 버스기사 차장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중의적삼을 입은 이 중 한 명이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었는데, 상의가 올라가면서 허리에 찬 실탄이 보인 것이다. 당시 민간인이 실탄을 소유했다면 백퍼센트 간첩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차장은 큰 소리를 칠 수도 없었다. 버스가 현도를 지나 신탄진 시장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신탄진지서로 가 간첩을 신고했다. 즉시 출동한 신탄진지서 경찰은 쉽게 간첩 3명을 생포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어리숙한 간첩이 검거되는 순간이었다.
검거된 간첩 중에는 현도면 죽전리의 박노택이 있었다. 그는 남파되어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 도움을 청하고, 두 번째 접선 대상을 만났다. 오국진의 아들 오헌영이 그다. 박노택은 오헌영을 만나 부친의 사진과 편지, 공작금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오헌영이 완강히 거부해 접선은 실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노택 일행은 검거됐다.
이후 오헌영은 국군보안사령부에 연행되었지만 무혐의 처리되었다. 석방 이후에도 오국진-오갑진 형제의 자녀들은 수사기관의 요시찰대상이 되었다. 분단과 전쟁은 한 가족을 이산(離散)시키고, 건널 수 없는 좌·우 대립의 강으로 내몰았다.
이 사건이 발생한 1968년에서 일년 후인 1969년 안만근 지서장의 아들 안희찬이 오갑진의 딸과 결혼을 한다. "왜 그런 집 딸과 결혼하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희찬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버지의 사상이 딸과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안희찬, 75세,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
남과 북의 국가폭력

▲ 안만근 지서장의 아들 안희찬 ⓒ 박만순
안만근 지서장의 선행은 오랫동안 역사에 묻혀왔다. 아니 2019년 현재까지 어느 공적인 기록에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노무현 대통령 때 만들어진 '진실화해위원회'는 한시적인 국가기구에 불과했다. 만 5년간의 조사를 통해 '보도연맹사건'을 포함한 민간인학살사건을 규명하고, 피해자 일부를 확인했다. 안만근 지서장 같은 의인들의 선행을 공론화하는 작업까지는 역부족이었다.
남과 북 모두 국가폭력에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만근 지서장의 아들이 인민군과 지역 좌익에 희생된 것만 해도 그렇다. 안만근의 선행에 북한군은 관심이 없었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 경찰'로 낙인을 찍었다. 안만근은 보도연맹원을 살려줬다는 이유로 상급기관의 조사를 받고, 경찰에서 1952년에 불명예 퇴직을 당했다.
14. "사람 목을 잘라 죽창에..." 소녀가 본 끔찍한 장면
여순사건으로 복역하다 학살된 군인 박정환, 그리고 그 가족 이야기
"순이 엄마, 케비에스(KBS) 틀어 봐."
"아따 성님! 일찍도 오셨소. 방송하고 있는갑소."
집에 TV가 없는 노연금이 이웃집으로 마실을 왔다. 그런데 이 마실은 특별한 마실이었다. KBS는 1983년에 6.25 33주년을 맞아 6.25 때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주기 위해 특별프로그램을 편성했다. 노연금은 이 방송을 보려고 마실을 온 것이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6월 30일 오후 10시 15분부터 2시간 방송 예정이었으나 2시간 30분으로 연장되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5일 동안 '이산가족 찾기'라는 단일 주제로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했다. 시청률이 무려 78%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 경이적인 현상에 광주 황계마을(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의 노연금도 합류했다.
"저 어렸을 때 이발소에 맡기고 갔었어요?"
"예, 맞어요."
"오빠. 엉엉엉."
TV에서는 연신 헤어진 가족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사람들의 눈물은 강과 바다를 이루었다. 종이 팻말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노연금의 눈물도 쉴 새 없이 흘렀다. 어젯밤 이장 집으로 서울 사는 딸이 전화를 해왔다. "엄마, 아버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TV를 매일 봐요?" "시끄럽다. 네 아버지가 죽긴 왜 죽어!" 노씨는 역정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새벽에 집에 가서 쪽잠을 잔 노씨는 부리나케 순이네 집으로 다시 왔다. 노연금은 TV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그렇게도 애타게 찾는 남편은 나오지 않았다. 비슷한 인적상황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도 허사였다.
며칠째 TV에 눈을 고정하느라 눈이 쾡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순이 엄마를 포함해 동네 사람들 모두는 노연금이 헛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녀가 33년 전 죽은 남편을 살아 있다고 믿고 있는 데에야...
마지막 외출

▲ 박정환14연대 헌병대에 근무한 박정환 ⓒ 박만순
"아빠 또 올게. 잘 있그라."
"하루 더 자고 가."
"안 돼요, 어머니. 집에 더 있으려면 휴가를 받아 와야 돼요."
군인 박정환은 어머니에게 큰 절을 올리며 외출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8세짜리 딸 귀덕이를 번쩍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 소녀 귀덕이는 군복을 입은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빳빳한 군복에, 파리도 미끄러질 법한 군화는 얼굴도 훤히 비칠 지경이었다.
3대 독자인 박정환은 늦깎이로 군에 입대했다. 14연대 헌병대에 입대한 덕에 그는 남들보다 휴가나 외출이 자유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어린 귀덕에게 "또 온다"고 하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날 외출은 그의 마지막 외출이 되었다.
박정환은 부대 복귀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렀다. 전남 광주군(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면 황계마을에서 광주시로 나왔을 때 한 군인이 그를 붙잡았다. "잠시 실례 하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가 연행된 때가 여순사건이 발생한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그는 여순사건 관련자로 군사재판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3대 독자 박정환이 대전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그의 신변에 이상이 있음은 진작에 알았다. 마지막 외출을 하고 간 며칠 후 시계, 옷 등 소지품이 집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가 검거된 직후 근처를 지나가던 아버지의 친구에게 "집에 전해 달라"고 한 것이, 며칠 만에 본량면 황계마을 집으로 왔다. 아들에게 무슨 변고가 생겼다고 생각한 부모가 백방으로 아들 소식을 수소문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옆 동네 사람 오○○이 박정환의 소식을 갖고 왔다.
"정환이 갸는 대전에 있어요."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오○○이 알려준 것이니 틀림없었다. 1년 동안 남편 소식을 몰라 가슴이 새까매진 아내 노연금이 옷가지와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대전으로 향했다. 찬바람이 불던 1949년 10월 말 대전형무소 면회실. 장발을 한 남편이 앉아 있었다. 미결수로 머리를 1년 동안 깎지 않아 장발이 된 것이다.
"나는 잘 있응께, 부모님 잘 모시고 있소. 내 나가서 잘 해줄팅께."
아내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꾹 참았지만 흐르는 눈물은 어쩌지 못했다.
다음 달 노연금은 셋째 딸 박청숙(당시 5세)을 데리고 대전형무소를 다시 찾았다. 남편은 기결수로 처리돼 머리를 박박 깎았고, 장갑공장에 출역(出役)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는 면회가 안 된다는 형무소의 방침에 따라, 남편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셋째 딸은 얼굴도 보지 못했다. 남편은 아내에게 가족과 마을 어른들의 안부를 일일이 물었다. 집안 아저씨 두 명이 사망했다고 하자,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루는 대전형무소에서 편지가 왔다.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가루치약과 칫솔, 내의를 보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당시 형무소에는 의복과 생필품 보급이 형편없었다. 그러다 보니 월동 준비를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사는 김석암이 대전형무소에 있었기에, 면회 가는 그의 아버지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김석암은 도중에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박정환에게 전해질 물건들은 다시 집으로 왔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 이후에는 가족들이 박정환 면회도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초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박정환은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남편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아내

▲ 박정환과 동료14연대 근무시 동료와 촬영한 박정환(왼쪽) ⓒ 박만순
노연금은 용하다는 이웃 마을 점집으로 향했다.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개다리소반 위에 쌀과 동전을 놓고 한참 운세점을 보던 노파는 "죽었어. 그냥 시부모 모시고 잘 살어"하는 것이 아닌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러 군데서 점을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 그리 잘 생기고 똑똑한 사람이 허망하게 죽었을리 없었다. 자식과 친지들이 남편이 6.25 때 죽었다고 해도 듣지 않았다. "느그 아버지는 탈옥을 해서 북으로 넘어갔어야. 북한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여"라는 그녀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집안 가장이 부재하고 시어머니는 노인이라 일 할 수 없다 보니, 먹고 사는 일은 노연금과 둘째 딸 박귀덕(1941년생)의 몫이 되었다. 시골에 논도 밭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의 일 하는 것과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파는 일이었다. 마을 뒷산에서 나무를 해 광주 5일장까지 가려면 30리(12km)를 걸어야 했다.
"동지섣달(음력 11, 12월)에 머리에 나뭇단을 이고 가는데요. 개울을 건너는데 자갈이 발바닥에 붙어요." 양말과 신발을 신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귀덕은 "양말이 어딨어요. 버선밖에 없는디, 안 젖을라고 맨발로 걸어강께 자갈이 자석처럼 붙더랑께요"라고 당시를 회고하며 울먹인다. "엄마, 더 이상 못가겠어요" "아가야 어쩔 것이냐. 이거(나뭇단) 못 팔면 식구들 전부 굶어 죽을 판인디..." 어머니의 얼굴을 본 귀덕은 다시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행운의 여신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판 나무는 서속(黍粟)과 꽁보리 한두 되를 사고 나면 그만이었다. 끊어질 것 같은 창자를 움켜쥐고 집에 와서 꽁보리밥과 고구마를 먹은 것이 그날 끼니의 전부였다. 이렇게 극도의 가난한 생활을 했지만 행운의 여신은 노연금 모녀편이 아니었다.
박정환이 살아 있을 때의 일이다. 그가 휴가를 나왔을 때 아내는 임신하게 되었다. 노연금이 4대 독자 아들을 낳았을 때 남편은 대전형무소에 있었다.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갑자기 앓더니 3일 만에 죽었다. 남편 면회를 갔을 때 이 일은 차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박정환이 죽은 지 몇 년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넷째 딸이 늑막염에 걸렸다. 당시 집에는 먹을 양식이 한 톨도 없어 10세 박귀순이 병원 가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귀순은 10세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
단칸방 신세는 수년간 이어졌다. 방 하나에 할머니, 어머니, 딸 셋이 이불에 발만 넣고 잤다. 발 10개가 한 이불 속에 들어간 형국이었다. 경찰의 감시와 차별도 참기 힘들었다. 1950년 가을 군경 수복 후에 지서에서 툭하면 집뒤짐을 했다.
순경은 다짜고짜 "박귀덕이 어디 있어?"라며 신발을 신고 방으로 들어왔다. 한 번은 소녀 박귀덕이 변소에서 용변을 보고 있을 때였다. 순경은 변소 문을 벌컥 열며 총부리를 들이대고 "아버지 어디 있어"하는 것이 아닌가. 소녀는 얼굴이 빨개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소녀가 본 끔찍한 장면

▲ 증언자 박귀덕 ⓒ 박만순
박귀덕은 6.25가 지난 반백년동안 경찰만 보면 사지가 떨렸다. 군경 수복 후에 총을 들이대고 집에 수시로 찾아오던 경찰에 대한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목격한 끔찍한 장면 두 가지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경이 수복한 지 얼마 안 있어, 박귀덕이 밭에 새를 쫓으러 가는데 강둑에서 경찰들이 부역자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손이 묶인 부역자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직면하고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찰들의 총알이 그들의 발보다 빨랐다.
며칠 후에는 본량지서 앞에서 못 볼 것을 봤다. 박귀덕이 지서 앞을 지나갈 때였다. 당시 지서에는 대나무로 죽창을 깎아 담을 둘렀는데 정문 앞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 목을 잘라 죽창에 걸어 논 것이다.
그것을 본 소녀 박귀덕은 한참을 토했다. 집에 간신히 돌아 와 며칠을 누워 있었다. 이 두 가지의 기억은 그녀의 뇌리에서 반백년 동안 가시지 않았다. 아버지 박정환도 어디에선가 그렇게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들이 아버지 사망신고를 1960년도에 했지만 어머니 노연금은 남편이 죽은 지 33년 동안 남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밤새워 보았던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신청한 박귀덕은 '진실규명결정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죽음의 불법성에 대한 인정일 뿐, 여순사건 당시의 재판자체가 불법이라는 국가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 관심이 무척 많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 그녀는 카네이션을 들고 대전 골령골을 찾았다. "아버지"하며 수차례 불렀지만 아버지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15. 주저하는 부하 다리에 사격... 3200명 학살하고 승승장구한 군인
대전 산내학살사건의 주범, 심용현을 다시 생각한다
1950년 7월 1일 대전형무소. 특경대 부대장 이준영이 2층 교회당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이계동 당직 간수장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왜 그래요?"
"검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 새벽을 기해 대규모 적의 공격이 있다고 하네. 그러니 공산당 책임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그대로 집행하래."
당직 간수장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일은 이준영이 독단으로 실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김택일 대전형무소장에게 가서 이를 전했다. 형무소장은 대전지검 검사장에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준영과 함께 검사장 관사로 갔다.
"영감, 어떻게 된 겁니까?"
"큰일 났어. 적의 대규모 공습이 있다고 공산당 우두머리를 처리하래."
"감방 안에서 총성이 있으면 소요가 일어날 텐데요."
"아, 심장에다 쏴요?"
"영감님, 심장에다 쏜다고 총소리가 안 납니까?"
검사장과 형무소장이 옥신각신했다.
소장 일행은 지프차를 타고 소장관사로 갔다. 상급자인 형정국장에게 재차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자네는 기다려"하며 소장이 관사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나온 이는 소장이 아니었다. 원태연 형정국장(현재의 교정국장)이었다. 이준영이 부동자세를 취하자 원 국장은 "대전역으로 가자"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이우익 법무부장관이 전주행 피난열차를 타기 위해 역에 가 있으니 "가서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형무소를 나와 법원네거리를 지나 도청 앞에서 좌회전을 하면 대전역이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달리는 지프차 때문에 물보라가 튀었다. "자넨 여기 있어. 내가 장관 만나고 올 테니까." 약 20분 후에 원 국장이 왔다. "장관을 못 만났네. 소장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전하게." 그러고는 피난열차를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갔다.
이준영은 원 국장을 향해 권총을 쏘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느꼈다. 국난(國難)시에 위에 것들이 책임은 지려 하지 않고 모두 도망가기에 급급하니 말이다. 하지만 지하도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있어 차마 총을 쏠 수는 없었다.
'위에 것들'이 도망간 이후

▲ 특경대장 이준영 이준영이 대전형무소 정문에서 촬영한 사진 ⓒ 박만순
형무소로 돌아온 이준영은 소장에게 이를 전했다. 그러자 김택일 소장은 "직원들만 개죽음 시킬 수 없으니 지금 시간부로 직원들을 해산 시킨다"고 선언했다. 이준영은 기겁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약 4천 명의 재소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방치하고 피난을 가면, 이들이 북한군과 합작해 무엇을 할지 모른다. 눈앞이 아찔했다.
"안 됩니다. 소장님은 피난을 가든 말든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특경대원들과 함께 형무소를 지키겠습니다."
법무무장관, 대전지검 검사장, 형정국장, 대전형무소장이 모두 도망간 대전에서 이준영 특경대 부대장(수석 분대장)은 대원 22명과 함께 형무소를 지키겠다고 결의했다.
잔뜩 긴장한 이준영은 특경대의 힘만으로 형무소를 지킬 자신이 없어 충남도경에 전화를 했다. 충남도경과 계엄군에서 각각 1개 분대씩 응원군이 도착해 정문과 외곽을 경비했다. 그런데 소장과 형무소직원들이 도망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인과 경찰들은 직원들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도망가지 않고 형무소 치안을 위해 출근하던 이수복 작업과장이 군인들의 총격에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준영이 군인과 경찰에게 자중을 요청하고 있는데, 정진원 대원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왜 어디서 파옥(破獄)이 일어났어?" "7감방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달려가 보니 계획된 소요가 아니라 '간수들은 보이지 않고, 시간이 되도 밥을 안 주니, 문을 때려 부수고 나가자'며 웅성거린 것이다. 당시 7감방은 재소자가 차고 넘쳐 작업장을 임시감방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보안이 허술하고, 여러 명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문이 박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준영은 부하와 함께 총에 장전을 하고 설득과 회유를 통해 재소자들을 진압했다. 즉, 7.1 소동이란 것의 실체가 이것이었다.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의 계획된 소요가 아닌, 형무소 직원들이 모두 없어지고, 아침을 안 주자 일시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형무소를 버리고 도망갔던 김택일 소장은 직위해제 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법무부장관, 형정국장, 검사장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재소자들 넘기시오"
1950년 7월 7일 중위 계급장을 단 헌병이 대전형무소 소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이순일 소장서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서 오십시오"라며 인사했다. 당시는 계엄(戒嚴) 상태라 군(軍)이 치안상황을 진두지휘할 때였다. 특히 헌병은 군대 내의 경찰(Military Police)이었다. 즉, 헌병(憲兵)과 CIC(특무대)는 무소불휘의 권력을 지닌 집단이었다.
헌병 중위는 부하에게 명령 내리듯이 "국방경비법 위반자, 여순사건 및 제주4.3사건 관련자, 보도연맹원, 일반수 중 10년 이상의 중범을 넘기시오"라고 했다. 이순일 소장서리는 이준영과 함께 법원장 관사에 있던 법무부장관을 만나러갔다. 당시 법무부장관은 기차를 타고 남부지방까지 피난 갔다가, 국민들의 원성으로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이우익 법무장관은 "계엄군이 달라면 줄 수밖에 없다. 만약에 재소자를 인도한 게 후일 문제가 되거든, 사전에 장관 만났다는 소리 하지 마시오"라는 것이 아닌가. 이준영은 '저런 것들이 장관입네 하고 앉아 있는 것'에 불끈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준식 부장이 명적계를 보며 재소자를 분류했다. 그래서 헌병대 중위가 요구한 대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일반수 중 중범죄자를 군에 넘겼다.
감방에서 끌려나오는 재소자들은 '고양이 앞에 쥐'였다. 어깨는 축 쳐지고 발걸음은 공중에 붕 뜬 듯 허둥댔다. 눈동자는 잔뜩 긴장해 초점을 읽은 상태였다. 재소자들은 광목으로 2인1조로 손을 묶인 채 GMC 트럭에 실렸다. 트럭 적재함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으나 적재함 모퉁이 4곳에 탄 군인들은 막무가내였다. "야, 이 새끼야 앉아"하며 개머리판을 휘두르기 일쑤였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 현장인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까지 수송은 형무소 특경대 몫이었다. 1950년 7월 8일 아침에 시동을 켜놓고 대기하고 있던 트럭 조수석에 이준영이 탔다. '부릉'하며 트럭은 출발해 산내 현장으로 갔다. 자신들이 호송한 재소자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준영은 이곳에서 못 볼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한 헌병 중위의 활약

▲ 확인사살하는 군인 ⓒ 미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어이, 특경대장 이리와"하며 심용현이 불렀다. 그곳에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관련자 이관술과 송언필이 있었다. "어이 이관술,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나 불러 봐."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
하지만 이관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대기하고 있던 사수들의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대기하고 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2인1조가 되어 이관술의 시체를 큰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이봐, 특경대장 자네는 그쪽 구덩이에 가면서 확인사살 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심 중위는 반대편 구덩이를 가면서 확인 사살했다.
필자는 지난 2007년 이준영 등을 만나 산내 골령골 학살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2007년 발간된 진실화해위원회의 <2007년 유해 발굴 보고서>에도 이같은 내용이 실렸다.
그런데 1992년 작가 노가원이 <말>지에 쓴 상황은 훨씬 리얼하다. 충남도경찰국 사찰과 주임 변홍명(가명)이 목격한 장면이다.
"중위가 '사격개시'하면 사수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사격을 하면 골이 튀어나와 사수의 온몸에 튕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나요. 만약 총알이 빗나가면 중위가 뒤에서 권총 사격을 합니다. 사수의 발부리에 대고 발사하는 거지요. 그러면 사수는 풀쩍하고 한 길이나 뛰어 올라요"(노가원, '대전형무소 4천3백명 학살사건', <말> 1992년 2월호)
여기서 말하는 중위는 심용현 중위다. 심용현은 산내 학살현장에서 모든 사건을 지휘하고 점검하는 역할을 했다. 사전에 인근 마을 주민과 청년방위대원 약 50명을 동원해 커다란 구덩이 여러 개를 파게 했다. 그리고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을 땅을 보게 한 후 근접사격을 가했다. 대부분 총구를 머리 가까이 했다.
심 중위의 '발사' 명령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 죽는 이들의 뇌수가 터져 바지를 흥건히 적셨다. 이 증언은 변홍명뿐만 아니라 이준영과 여러 명이 같았다. 또한 사수들이 주저하면 심 중위는 공포나 사수의 다리를 향해 사격을 가해 혼쭐을 내었다.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너부터 죽을 줄 알라'는 협박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각 경찰 10명, 군인 10명으로 구성된 사수 3개조 총 60명은 '살인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치안엔 무능력했던 대한민국 행정부와 군·검·경·형무소 상층부가 학살에는 모든 능력을 발휘한 형국이었다. 그렇다면 산내 학살현장에서 총감독 역할을 한 심용현 중위는 누구인가?
초고속 승진의 신화 심용현

▲ 심용현 사진 ⓒ 박만순
그가 산내 학살현장의 '총감독'으로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초로 산내 사건을 취재한 노가원은 변홍명의 증언을 토대로 헌병 중위라는 존재만을 밝혔다. 그런데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가 1999년 12월 이준영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심용현'이란 이름이 나왔다. 필자 역시 2007년에 이준영을 인터뷰하면서 같은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심용현 본인이 직접 쓴 '자력서'(自歷書)가 나왔다. 관련자들의 증언으로만 존재하던 심용현의 행적이 그가 손으로 쓴 문서로도 확인됐다는 의미다. 증언과 문헌의 일치다. 필자는 이를 입수해 살펴봤다.

▲ 한국전쟁 직후 수천명이 희생된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의 현장 지휘 책임자가 심용현 중위임을 방증하는 자력서. ⓒ 박만순
이 자력서에 의하면 심용현의 군 생활은 아래와 같다. 심용현은 1918년 8월 30일 생으로 서울 용산구 한강로가 주소지였다. 그는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5년제)를 나온 후 부푼 꿈을 안고 군에 입문했다. 육사 8기로 1949년 2월 입대해 3개월의 교육을 받고, 1949년 5월 23일 소위로 임관했다. 그가 헌병 주특기(9110)를 받고, 대전에 있던 2사단 헌병대에 배치를 받은 것은 1949년 7월 7일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 5월 1일 중위로 진급했고, 청주에 있던 1군단 헌병 제4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은 1950년 7월 14일이었다.
자력서에 기재된 시점과 맞춰보면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 학살과 1950년 7월 초에 형무소재소자 1800여 명 학살이 그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7월 중순에 있었던 형무소재소자 및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약 1700~3700여 명 학살사건은 그의 손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그의 손에서 3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심용현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초고속 승진했다. 중위가 된 지 7개월 만인 1951년 1월 1일 자로 대위가 되었으며, 다시 33개월만인 1953년 9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1954년 12월 중령으로 예편하면서 그의 군 생활은 끝났다.
다시 심용현을 생각한다
그는 전역 후 성신학원 이사장을 4차례 역임했고, 1986년 4월 사망했다. 그런데 성신여자대학교에서는 2011년 4월 교정에 그의 흉상을 제막했다. 학살자의 동상이 학문의 전당인 대학교에 버젓이 세워진 것이다.
상부의 명령에 국가폭력이라는 씻을 수 없는 경험을 했던 변홍명, 이준영이 말년에 학살에 참여했던 것을 후회하거나 괴로워했던 반면 심용현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어찌 보면 심용현은 이승만과 김창룡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암울했던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 할 것이다. 비록 그가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역사적 범죄를 지금이라도 밝혀야 하지 않을까.

▲ 지난 2011년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심용현 성신학원 전 이사장의 흉상. 심 전 이사장은 한국전쟁 당시 대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지휘한 인물이다.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심화진 전 성신여대 총장으로 심용현 중위의 딸이다. ⓒ 성신여대
16. 부여 백마강에서 떠내려 간 22구의 시신을 아시나요?
한국전쟁 초기 벌어진 예비검속과 부역 혐의 학살
"이봐 강씨, 읍내에서 회의가 있다고 오라대."
"읍내 어디요?"
"어디긴. 경찰서지."
강순구는 조준구(가명)의 전언에 대꾸 없이 집을 나섰다.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는 진주 강씨 집성촌인데, 강순구를 포함한 22명이 부여경찰서로 가기 위해 마을을 출발했다. 조준구의 반말지거리에 기분이 불쾌했지만, 어느 기관의 호출이라고 응하지 않겠는가. 평소에 장하리 마을에서 진주 강씨와 풍양 조씨 간에는 알력이 심했다. 강씨 중에는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고, 조씨는 대부분 우익활동을 했으니, 그들 사이가 닭과 개와 같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강순구를 포함한 강씨 22명은 부지런히 걸어서 부여경찰서까지 갔다. 경찰서 안에 들어가자 조준구는 부여경찰서 사찰과 형사에게 이들을 인계하고 되돌아섰다. 이윽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야 이놈들 전부 유치장에 쳐 넣어" 부동자세로 있던 경찰은 형사의 지시에 "예"하고 이들을 유치장으로 밀어 넣었다. "왜 이래유. 우리가 뭘 잘 못했다고 그런데유?" "시끄러워 이 자식아 맞아야 정신 차리겠어!" 으르딱딱대는 경찰의 위세에 눌려 강순구 일행은 이내 고분고분해졌다.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새우잠으로 자고 났을 때였다. "전부 나와"하면서 광목천으로 손을 묶기 시작했다. 일행이 웅성대기 시작하자 경찰이 총 개머리판을 사정없이 휘둘러댔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사찰과 형사는 "빨갱이 놈들은 두드려 패야 정신 차린다니까"라고 하면서 이들을 인솔해 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행선지는 경찰서에서 멀지 않았다. 약 1.5km 떨어진 부여 낙화암 아래 구두레나루터였다. 일행을 일렬횡대로 세운 후에 어떠한 설명도 없이 사찰과 형사의 신호로 총소리가 났다.
"탕탕탕"
22명이 세상과 연을 끊는 데 걸리는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재소자들을 학살하면서, 좌익에 대한 예비검속과 학살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런 와중에 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강씨 22명이 부여경찰에 의해 낙화암 아래 구두레나루터에서 총살당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구두레나루터에서 죽은 인원이 총 몇 명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최소한 백수십 명일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시신은 백마강에 버려졌고, 강물을 따라 서해안으로 둥둥 떠내려갔다. 시신은 충남 부여와 경계지역인 전북 군산의 섬까지 떠내려갔다. 인근의 주민들은 시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어, 야산에 매장해 버렸다. 그리고 강씨들의 죽음은 반백년 넘게 역사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노한 여성들이 금광으로 몰려간 이유
장하리 강씨 22명이 한날한시에 몰살한 것은 금방 마을에 전해졌다. 죽은 이들의 부인들은 통곡을 하며 울부짖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살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북한군이 내려왔다. 인공(人共)세상이 된 것이다. 강씨 부인들은 조준구 집으로 달려갔다. "준구 이놈의 새끼 당장 나와!" 그녀들의 손에는 식칼과 낫, 괭이들이 있었고, 눈은 살기등등했다.
조준구는 "살려 주시오"하며 손을 싹싹 빌었다. 맨 앞에 나선 여성이 "이 뻔뻔한 새X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와"하며, 조준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녀들은 조준구를 광목천으로 묶고 다른 조씨 집으로 갔다. 그렇게 마을을 한 바퀴 돌았지만, 그녀들이 붙잡은 조씨는 3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피난을 간 상태였다. 조씨 일행은 흥분한 여성들에 의해 근방 금광으로 끌려갔다.
구두레나루터에서 강씨들이 죽을 때처럼, 어떤 설명이나 절차 없이 조씨들은 순식간에 저승사람이 되었다. 다만 이들은 더욱 처참하게 죽어야 했다. 화가 난 여성들이 돌로 찧어 죽였기 때문이다. 좌·우 갈등과 국가폭력이 겹쳐지면서 마을에 재앙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이 있고 약 두 달이 지난 후에 세상은 역전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후퇴하고 국군과 연합군이 다시 왔기 때문이다.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여성들은 이미 도망간 상태였기에, 이 마을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런데 부여군 부여읍 구룡면 용당리에서 사건이 터졌다.
트럭운전수가 목격한 것

▲ 박경래부역혐의로 백마강변에서 학살된 박경래 ⓒ 박만순
서울에 살던 박경래는 전쟁이 나자 고향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룡면 용당리로 피난을 갔다. 가족이 있었지만 먼저 피난길에 올랐다. 며칠 후 박경래 처남 양승목이 누이와 조카들을 데리러 서울로 왔다. 수레에 이불보따리, 솥 등을 잔뜩 싣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해, 1주일 만에 부여읍 구룡면 주정리에 도착했다. 박노수(83세.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룡면 용당리)는 당시 14세였고, 어머니 양화목과 남동생 2명(8세, 4세)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다.
피곤에 쩔은 양화목 모자는 친정집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며칠 만에 남편이 있는 용당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 어수선한 전쟁의 와중에 양화목 남편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구룡 분주소로 출근했다. 분주소원으로 활동을 한 것이다. 그가 분주소원을 하면서 누구를 해코지한 적은 없었지만, 국군이 수복하면서 검거대상 우선순위에 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박경래는 부여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용당리에서 비단 그만 연행된 것은 아니었다. 김광현, 유병기, 임양재, 김영채, 김영태가 부역을 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들은 인공시절 분주소원도 아니었고, 특별한 감투도 쓰지 않았다. 다만 인민위원회에서 '밥 해놓으라'는 소리에 몇 차례 식사를 제공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적을 이롭게 한 이적행위(利敵行爲)로 둔갑한 것이다.
구룡면 용당리 사람을 포함한 부역혐의자들이 부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다가, 경찰서 트럭에 실리기 시작했다. 부여경찰서 트럭 운전수였던 박노연(당시 34세)은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부역혐의자들이 실린 트럭을 백마강변으로 몰았다. 장마에 범람했던 물이 빠져 나간 자리에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이곳에서 박경래와 용당리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다. 이들만이 아니라 부여경찰서에 구금되었던 부역혐의자들이 학살을 당했다. 경찰들은 2인1조가 되어, 피로 얼룩진 시신들을 웅덩이에 쳐 넣었다.
시신들을 웅덩이에 가득 넣은 후 모래로 그 위를 덮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불과 2~3년도 안 있어, 고인들을 두 번 죽이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부여와 청양사이의 전선을 연결하는 철탑공사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 철탑을 그곳에 세운 것이다.
물론 철탑을 세운 장소가 부역혐의자 수십 명이 죽은 곳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철탑을 세우면서 유해가 엄청나게 훼손되었지만 이를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독재정치가 판을 치는 1950년대 초반의 사회풍경이었다.
당시 트럭운전수였던 박노연은 반백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동생 박노삼(84세. 부여군 부여읍)과 계수에게 당시의 비극을 전했다.

▲ 증언자 박노삼 내외부여경찰서 트럭운전사 박노연의 동생 내외 ⓒ 박만순
죽을 때까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은 어머니
부여에서 부역혐의로 죽은 이들이 모두 백마강변에서 참변을 당한 것은 아니다. 구룡면 주정리의 양일남과 용당리의 김영환은 국군 수복 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되었다.
빨갱이 사냥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대전 산내 골령골과 부여 백마강변에서 한스러운 죽음이 있은 직후 부여군 내 각 지서에서는 경미(?)한 부역혐의자들을 잡아들였다. 구룡지서에서는 면내의 좌익혐의자와 가족들을 잡아 들여 농협창고에 구금했다. 박경래 처 양화목과 매제 양승목도 창고에 잡혀 들어갔다. 구금된 지 며칠 후 경찰들은 창고에 갇힌 이들의 머리를 박박 깎았다. 여성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그렇기에 양화목의 긴 머리가 바리깡으로 순식간에 잘려 나갔다. 그런데 그녀는 머리가 잘린 일도 수치스러웠지만 더 큰 고통이 있었다.
2살짜리 아기가 젖을 먹지 못해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자기 살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외할머니 집에 있던 아기 박노경(당시 집 나이 2세)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대었다. 아기가 밥이나 죽을 먹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엄마 젖을 먹어야 하는데, 창고에 갇혀 있던 엄마는 먹을 것이 없어 젖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양화목의 친정엄마는 동네를 다니며 식량 구걸에 나섰다.
"우리 딸이 먹지를 못해 아기한테 젖을 못 주고 있어유. 사람 두 명 살리는 셈치고, 밥 한 덩어리만 주시유."
동네 사람들은 평소의 친분 때문에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동냥해 온 음식을 창고로 나르는 일은 양화목의 큰 아들 박노수의 몫이었다. "엄마 아기 왔어요" 하며, 아기를 건네는 걸 창고 보초는 차마 막지는 못했다. 포대기에 싼 아기를 건네면서 음식을 몰래 엄마에게 건넸다. 이렇게 해서 아기는 죽지 않고 생명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음식을 부지런히 날랐던 박노수의 특급작전이 항상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보초들은 "이 놈의 새끼 왜 또 왔어?" 하면서 군홧발로 조인트부터 깠다.
양화목이 몇 개월 만에 창고에서 풀려난 후 머리가 길을 때까지는 항상 수건을 쓰고 다녔다. 머리가 어느 정도 길면서 그녀는 평생 머릿수건을 쓰지 않았다. 전쟁 때 강제로 삭발 당했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십년 동안 계속된 주민 간 전쟁
이웃집 벼 타작 일을 하고 돌아 온 양화목은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끝도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줄줄이 있는 자식들을 굶길 수는 없는 법이다. 쌀자루를 여는 순간 너무나 황당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품삯으로 받아 온 한 되의 쌀이 돌 쌀이었다. 돌 쌀은 벼 타작을 하면 땅에 떨어지는 찌꺼기 쌀과 돌이 섞인 상태를 말한다. 이른바 쌀 반 돌 반의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이웃집은 구룡면 용당리의 소문난 부자인데, 품값을 그렇게 인색하게 준 것이다. 그렇다고 그 집에 찾아가 항의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다음부터 그 집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 난 남편 둔 죄'라고 스스로를 탓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된 생활에 새로운 고통 하나가 가중되었다. 구룡지서에서 "남편 어디 갔냐?"며 매주 찾아온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항의할 수도,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매주 찾아오는 윤 순경이 하루는 마루에 걸터앉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화목은 이웃집에 가서 급전을 빌려 구판장에서 담배 한 곽을 사다 윤 순경에게 주었다. 그제서야 윤 순경은 마루에서 일어났다.
양화목 모자가 그나마 용당리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녀의 친정엄마가 침을 놓고 운수점을 볼 줄 알아 동네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 중 양화목의 친정엄마에게 침을 맞지 않은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 용당리 유족부역혐의로 학살된 구룡면 용당리 유족들 ⓒ 박만순
구룡면 용당리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흐를 때까지 마을 사람들 간에 불화가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과 학살이 감정의 골을 깊게 팠기 때문이다. 마을 공회당은 톱질 전쟁의 와중에 좌우익이 상대편을 끌고 와 집단 뭇매를 가한 장소였다. 그러다보니 집안 간에도 원수지간으로 지내는 일이 있기도 했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이렇듯 너무나 컸다.
17. 서울대·연대·고대 돌며 '도둑강의' 들은 남자
대전 산내 학살 유가족 허상균... 그에게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1960년대 초반. 청바지에 와이셔츠를 입은 청년은 대학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친구 몇이 인사를 한다. "상균이 왔냐?" "아침 먹었냐?" "어" 웅성거림은 잠시고, 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자 이내 잠잠해졌다.
과대표의 "차렷, 경례" 소리에 맞춰 학생들이 일제히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했다. 그 소리가 허상균의 아침잠을 깨웠다. 조순 교수의 '경제학개론' 강의가 시작되었다. 조 교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교수로, 경제학하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명강사였다. 그러다 보니 조교수의 강의는 항상 수백 명의 학생들로 들끓었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썰물처럼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허상균은 친구들이 같이 커피를 마시자는 얘기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캠퍼스를 빠져 나왔다. 이번에는 연세대학교로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뜀박질을 했다. 5월의 따스한 햇볕과 꽃내음을 감상할 사이도 없이 그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들어섰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강의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세대학교 철학과 강의실에서도 몇몇 친구들이 아는 체를 했다. 이번 강의는 김형석 교수의 '행복론'이었다. 김형석 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9년 평양 제3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조치(上智)대학 예과를 거쳐 1944년 같은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마쳤다. 이후 중학교 교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한국신학대학교 강사를 지내다 1954년부터 30년간 연세대학교 교수로 근무한 이다.
허상균은 어제 오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회계원론' 강의를 들었다. 1박2일 동안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청강(聽講)의 강행군을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른바 도강(盜講)을 한 것이다. 그가 학생이었다면 당연히 한 개의 학교 학생이어야지, 여러 개 학교의 강의를 들을 수는 없는 터이다. 일부 친구들은 상균이가 자기네 과 친구인 줄 착각하기도 했다.
"며느리 볼 면목이 없다"
허상균이 1960년대 초반 소위 'SKY'의 도강(盜講)을 하고 다닌 것은 다른 이에게 사기 치기 위해 대학생 흉내를 낸 것이 아니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열정은 집안 내력이기도 했다.
허상균의 아버지 허준(1920년생)은 일제강점기에 대전공업보통학교(5년제)를 나와 일본에서 측량을 공부하기도 했다. 허상균(1941년생) 역시 3년 동안 수업료가 면제되는 교통고등학교를 나왔다. 또한 그의 집안 대부분이 대학교를 나왔다.

▲ 대전고보 시절의 허준 ⓒ 박만순
이는 상균의 할아버지 허식(1894년생)의 영향 탓이었다. 허식은 시골에서 서당에 다닌 것이 배움의 끝이었다. 그의 부모와 조부모가 일본식 교육을 받는 것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허식은 배움이 모자란 것을 평생 후회했고, 자신의 후손들에게는 '배움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가훈'으로 삼았던 것이다.
허준은 충남 대덕군 기성면 흑석리에서 허식의 독자로 태어났다. 허준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근대식교육을 받았으며 대전공업보통학교 졸업 이후 일본에 건너가 측량기술을 배웠다. 그런 후에 '만주철도'에서 측량기사 일을 했다. 그런데 허식은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근대적인 사고를 가진 이였지만, 나머지 문제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가족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장남이 왜 객지로 다니냐"며 아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였다.
몇 년 후 해방이 되었고 허준은 농사일을 하면서 한량처럼 지냈다. 그의 집안이 지주는 아니었지만 먹고 살기에 어려울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허준의 오촌 아저씨인 허림은 그의 집을 자주 출입했다. 허림은 진잠초등학교 출신으로 사회주의자였다. 이런 연유로 허준의 사랑방은 자연스레 마을 좌익 활동가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허림은 빈농(貧農)으로 집도 작았기 때문이다. 허준의 집에서는 초저녁과 늦은 밤에 모임이 자주 열렸다.
허준의 처 송현순(1921년생)은 농사 일 하랴, 일꾼들 밥 주랴, 정신없는 와중에 남편 손님들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농번기에는 아침 참, 점심, 오후 참 세끼를 일꾼들에게 챙겨주어야 하는데, 남편 손님들에게 저녁까지 챙겨 주어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 시부모와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저녁상을 차려야 했으니...
하루는 참다못한 허식이 허림에게 "며느리 볼 면목이 없다. 우리 집에 그만 와라"고 역정을 냈다. 그 후에도 모임이 몇 차례 더 이루어졌고 1950년 초 충남 대덕군 기성면에도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졌다. 허림은 허준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했다. "조카,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살 수 있네" "아저씨는요?" "나는 가입하지 않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조카에게는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하긴 했지만 허림 자신은 전향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흑석역에서 팔짱을 끼고 묵묵히 걸어
6.25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11일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비추던 시간에 '쿵쿵'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송현순의 "누구세요"하는 소리에, "지서에서 나왔소"라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지서에서 회의가 있다'며 아버지 허준을 데려가려는 것이다. 허준은 아래채에 살고 있던 아버지 허식에게 "잠시 지서에 댕겨 오겠습니다"라고 문안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렇게 나간 허준은 이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허준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 왔다. "동생이 산내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허준의 8촌 형 허엽이 갖고 온 것이다. 허엽은 당시 대전에서 지서장을 했다. 그는 허준이 기성지서에서 유성경찰서로 이송된 후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는 소식만을 남긴 채 남쪽으로 후퇴하기에 바빴다. 나머지 가족들은 가장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전에 피난 짐을 싸야 했다. 그런 경황 중에 허준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보도연맹 예비검속 시 허림은 마을을 벗어났다. 그가 보도연맹원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마을에 남았다면 죽음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군 점령 시절, 그는 대덕군 기성면 인민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60여 일 후 세상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국군이 수복해서 인공(人共) 때 감투 썼던 이들을 붙잡아 들인 것이다.
체포 위기에 직면한 허림은 친구 한양섭의 집으로 도피했다. 당시 법원 서기였던 한양섭과 거취를 상의한 허림은 경찰에 자수했는데, 경찰관 수십 명이 한양섭 집을 에워쌌다. 그렇게 검거된 허림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가 청주형무소에서 석방되던 날 허식이 손주 허상균에게 "오늘 허림이가 나오는 날이다. 흑석역에 나가봐라"고 했다. 흑석역에 마중을 나가니 잠시 후에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에서는 삐쩍 마른 이가 내렸다. 허림은 가족들과의 인사도 미룬 채, 허상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상균의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마을까지 걸었다. 오리(2km)를 걷는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기 때문에 허준이 죽었다는 자책감이었으리라. 그러니 그의 아들 상균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랴...
만약 그에게 6.25가 없었다면

▲ 대전관재국 입사초기 허상균(뒷줄 좌측이 허상균) ⓒ 박만순
자신의 아들이 한국전쟁에서 학살당하자, 허식은 '내가 만주에서 불러들이지만 안했어도 죽지 않았을 텐데'하는 자책에 빠졌다. 하지만 아들이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것이 어찌 아버지 탓이랴.
그렇지 않아도 교육열이 강했던 허식은 자식이 죽자, 집안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허상균의 상급학교 진학에 무엇보다 열성이었다. 하지만 가장(家長) 허준의 죽음으로 인해 허상균이 마음 놓고 배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교통고 졸업 후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공채1기로 대전관재국에 입사했다. 관재국은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던 곳이다. 그는 관재국 입사를 전후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청강을 했다. 직장에 근무할 때는 출장 기간에 청강을 했다. 출장 업무를 최대한 신속히 처리한 후에 남는 시간에 대학교 강의를 들은 것이다. 이는 조부 때부터 내려온 교육열의 집안 내력이자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의 발로였다.
직장이 사세청(司稅廳)으로 통합된 얼마 후 그는 군에 입대했다. 경기도 가평의 통신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2급 비밀 취급 인가를 신청했는데 신원조회에서 거절당한 것이다. 화가 나 행정반에서 몰래 '기록카드'를 들쳐 봤더니, '보도연맹원으로 학살된 자의 아들로 사상이 의심스럽다'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포기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런 아픔을 겪은 그였지만 허상균은 이후 직장생활을 즐겁게 했다. 매사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로 임한 것이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성격을 내림받았으리라.
그는 팔십을 앞둔 나이에도 젊게 산다. 청바지에 연보라 와이셔츠를 입은 그는 인터뷰 내내 옅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암울한 집안의 역사를 경험하고도 그의 품은 넓기만 하다. '만약 그에게 6.25가 없었다면'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 본다.

▲ 증언하는 허상균 ⓒ 박만순
18. 수천구 시신 속에서 남편 찾던 여성, 그의 마지막 소원
북한군 따라 산내 학살현장에 시신수습 하러 간 사연
"뭔 놈의 날씨가 이리 덥다냐."
"우매 못 참겄어야."
정광임은 연신 손부채를 하더니 웃통을 훌러덩 벗었다. 대낮이기는 하지만 삼복더위의 푹푹 찌는 날씨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기 방은 피난민들에게 세를 주고, 자신의 가족은 하꼬방에서 지낸 터라 더욱 그랬다. 하꼬방은 말 그대로 불가마 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주변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등목을 하기 위해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중이었다.
바가지로 물을 등에 끼얹는 순간 '쾅'하는 소리와 동시에, 경찰들의 군홧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박만호 나왓"하며 5~6명의 경찰이 동시에 뛰어 들었다. 그러자 세 들어 사는 청년 일부가 쪽문으로 다람쥐같이 내달았다. 정광임은 양 손으로 젖가슴을 가린 채 어리둥절해 있었다. 경찰이 하꼬방과 인근 방을 수색했지만 그들이 찾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 경찰들은 정광임에게 "남편 어디 갔어?"하며 다그쳤다.
"멀리 돈 벌러 갔당게유."
정광임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경찰들은 그녀에게 옷 입을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수갑을 채웠다. 그러자 그녀는 거세게 항의했다. "사람이 어디 도망가요? 옷은 입어야 할 거 아니에요." 특히나 그녀의 둘째가 갓난아기라 젓이 퉁퉁 불어 있었다. 경찰들도 민망했던지 수갑을 풀고 옷을 입게 했다.
대전경찰서 유치장은 만원이었다. 정광임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남편과 아이 둘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간수가 불러냈다. 면회실로 가니 남편이 큰애 손을 잡고, 둘째를 업고 있었다. 아내가 경찰에게 잡혀갔다는 소문을 들은 남편이 집에 왔을 때는 아이들이 콧물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엄마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놀라 밤새 울어대자, 박만호는 아이들을 데리고 제 발로 경찰서로 찾아왔다.
그 시간부로 남편이 유치장으로 들어가고 아내는 석방되었다. 정광임처럼 풀려난 아내들이 경찰서 앞에서 "안에 있는 사람들 나올 때까지 기다립시다"라고 해, 주린 배를 안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오후 5시경 사이렌이 울림과 동시에 트럭이 경찰서 안으로 연신 들어갔다. 트럭이 나올 때는 적재함에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적재함 네 귀퉁이에는 총을 든 경찰들이 긴장을 한 채 서 있었다. 여러 대의 트럭이 산내로 갔고, 그곳에서는 피의 살육제가 벌어졌다.
1950년 7월 14일 늦은 오후였다. 대전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던 정광임과 수십 명의 여성들은 그 일이 남편들과 죽음을 '바톤 터치(baton touch)'한 것이라는 걸 당시에는 몰랐다.
"동무, 산내에 가보자우"
남편이 죽은 지 일주일이 채 못 되어 북한군이 진주했다. 인공(人共)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바뀔 것도 없었다. 전쟁 중이라 항시 긴장상태에 있었다. 그나마 북한군들이 보도연맹원 유가족들에게 쌀 한 말씩을 나눠주어 굶어죽지는 않았다. 그러다 하루는 북한군 여러 명이 몰려 왔다. "동무, 산내에 가보자우." 정광임은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했는데, 뒤따르던 동네 아줌마들 얘기가 "산내로 시신 수습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약 20명의 여성들이 북한군 뒤를 따랐다. 7월 말의 푹푹 찌는 날씨에 약 십오 리(6km)를 걸어 산내 현장에 도착하니 모두가 기진맥진했다.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파리와 모기떼들이 하늘을 시커멓게 덮었고,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정광임이 수천 구의 시신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데서 남편을 찾는다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였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그녀는 남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이 금니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지 보름이 지난 시체는 급속히 썩어 들어갔다.
켜켜이 쌓인 주검들 속에서 밑에 깔려 있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위에 있는 시신의 팔을 잡아당기는데, 팔이 '쑥' 빠져 버렸다.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하고는 괭이로 시신을 뒤적거렸다. 이번에도 물컹물컹한 시신들이 그녀의 괭이질에 손상이 났다.
더 이상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다른 이를 훼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학살현장에서의 악취는 일주일 넘게 옷과 몸에 배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69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날의 악취는 가셔지지 않았다.
"나 우리 아버지 이름도 몰라"

▲ 정광임의 젊은 시절 ⓒ 박만순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중림리에서 태어난 정광임(94세. 충북 청주시 현도면 시동리)은 5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정광임 집안은 손바닥 만한 곳에 논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대책이 없는 이였다. 극빈층이었음에도 노름과 술에 절어 살았던 것이다. 물론 살기가 어려우니 비관해서 그럴 수밖에 없긴 했으리라.
그런 와중에 정광임이 9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새엄마를 들인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다 보니 입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동시에 발생했다. 9세 소녀 정광임이 희생양이 되었다. 대전역장 집에 애기업개로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문턱을 밟지도 못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친정아버지 이름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 우리 아버지 이름도 몰라"라고 답변하는 정광임의 얼굴은 쓸쓸하기만 했다.
1년을 애기업개로 보낸 때, 대전역장이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같이 가자고 하는 손길을 뿌리쳤다. 서울까지 따라가면 가족들과 영원히 이별할 것 같아서다. 대신 부농 집에 수양딸로 갔다. 말이 좋아 수양딸이지 실제로는 머슴이었다. 그 집에서 5~6년 일하면서 손과 발이 모두 짓물렀다. 그나마 그 집에서 정광임을 좋게 봐줘 결혼까지 시켜줬다. 시골 마당에서 찬물 떠놓고 치른 소박한 결혼식이었지만, 그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남편 박만호는 면사무소 앞에서 구두 닦는 일을 했다. 그 일로 네 식구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새롭게 찾은 일이 산에서 솔뿌리를 캐다가 공장에 파는 일이었다. 아내 정광임은 길거리에서 참외장사를 했다. 겨울에는 대전역 앞에서 떡국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던 정광임에게, 꿈속에서 "송영리를 찾아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 친정집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기차와 우마차를 타고 어렵사리 친정집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다. 집 떠난 지 14년만의 일이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둘 낳고, 친정집도 찾은 그녀가 마냥 행복할 순 없었다. 보도연맹원이었던 남편이 6.25가 나면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되었기 때문이었다. 정광임 부부가 알콩달콩 살던 행복한 상황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더군다나 뒤늦은 피난길에 돌아와 보니, 집은 경찰에게 뺏긴 상태였다. 소위 '빨갱이 집'이라는 이유였다. 졸지에 집을 뺏기다 보니 갈 곳이라고는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찬밥신세였다. 시어머니가 개가한 상태이다 보니 의붓 시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이웃집 골방에 세를 얻었다.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동냥질에 나섰다.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인지, 남의 밭떼기를 조금 얻어서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고구마를 쪄놓고 나가,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행상을 했다. 광주리에 비누, 사카린 등을 담아 시골 마을을 다니며 파는 일이었다. 그러면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은 엄마가 쪄놓은 고구마를 먹고 학교에 갔다. 큰 아들 박성관(74세. 충북 청주시 현도면 시동리)은 당시 4년제였던 현도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했지만, 둘째 아들 박성국은 그나마 졸업을 못했다.
가난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었다. 박성관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남의 집 머슴을 살았다. 그 후 청주와 서울에서 점원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2019년 현재는 신탄진에서 영세규모의 고물상을 하고 있다. 박성국도 어릴 적부터 남의 집 머슴을 살다가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16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남편과 아들 하나를 먼저 보낸 정광임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신세이다 보니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모내기철에는 이웃 마을을 다니며 모를 심었다. 가을에는 벼 베기를 다녔다. 그런데 이 일은 이웃 마을만 다닌 것이 아니다. 기차를 타고 평택까지 가 5일간 모를 심기도 했다. 계절농업노동자였던 것이다.
94세 할머니의 소원
평생을 가난과 씨름한 94세 정광임의 소원은 무엇인가?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남편을 다시 보는 것이고, 교통사고로 죽은 둘째 아들이 살아와 얼굴을 쓰다듬어 보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보통사람에게는 너무나 소박한 꿈이 왜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소원이 되었을까?

▲ 정광임 모자현도면 시골집 앞에 선 정광임 모자 ⓒ 박만순
19. 어머니는 화병, 아버지는 끝내... 한 가족을 파괴한 판결
산내에서 학살된 문상국 가족 이야기
'맴맴맴' 매미 우는 소리가 마을 이곳저곳에서 정신없이 날 때였다. "할아부지 안에 계세요?" 아무런 답변이 없자 재차 물었다. 잠시 후 방에서는 대답 대신 '콜록'하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가 뭘 하시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양자는 감히 방문을 열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평소에 '호랑이 할아버지'로 소문난 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잠시 후 전등 세 개가 동시에 꺼졌다. "악" 소녀는 어떨 결에 비명을 질렀다. 전등 나간 것이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어머니 백순현이 마실 갔다가 집에 들어오며 "왜 불이 꺼졌니?"라고 물었다. "몰라" 문양자의 입술을 잔뜩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는 대답이 없고, 전깃불은 나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몇 시간 째 혼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엄마는 왜 이제야 오는 거야?"하며 투정을 부렸다.
집안 상황을 딸한테 들은 백순현도 안방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옆집으로 달려갔다. 집안 일가 되는 이를 불러 왔다. "형님 안에서 뭐하십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열었다. "어허" 문기홍이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1951년 8월 뜨거운 여름 날, 문기홍은 세상과 이별했다.
징역 10년 선고 받았는데... 사형

▲ 부역죄로 학살당한 문상국 ⓒ 박만순
땅거미가 마을 초가지붕을 모두 삼켰을 무렵이었다.
"문상국씨 계시오."
"누구십니까?"
"서에서 왔소. 잠시 조사할 게 있으니 경찰서에 갑시다."
누구의 명령이라고 거부하겠는가. 문상국은 아내가 차린 밥상을 받아 막 밥숟가락을 뜰 찰나였다. 평소 겁이 많던 아내 백순현은 마당에 나가지도 못 했다. 소녀 문양자(당시 7세)는 "아부지 어디 가유?"하며 따라갔지만, 경찰 두 명이 문상국의 양쪽 팔을 낚아챘다. 문양자가 뒤를 따라 나서려자 뒤에 있던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 집에 들어가, 며칠 후면 아버지가 오실 거야"하며 등을 토닥였다. 아버지 문상국은 그렇게 눈 쌓인 골목길을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1951년 12월 말이었다.
"피고인 문상국(31세)은 1950년 8월 8일 (충남)대덕군 기성면 장안리 민청위원장에 취임하고~ 이병찬을 위협하여 76만 원을 갈취했다. 위와 같은 죄로 징역 10년에 처한다."
대전지방법원 판사의 선고는 1951년 1월 8일 내려졌다. 연행된 지 불과 10여 일만에 내려진 것이다. 연행 당시 문상국은 31세로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그는 북한군 점령시절 고향에 사는 부친 문기홍의 안부 인사차 몇 차례 장안리에 다녀가기는 했다. 하지만 문상국은 대전에 거처가 있었기에 시골에서 민청위원장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 이런 객관적인 정황은 무시되었고, 중형이 선고됐다.
선고 후 불과 닷새가 지난 1951년 1월 13일경, 그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소위 부역죄로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판결은 분명 징역 10년이었지만 집행은 사형으로 둔갑해버렸다. 이런 황당한 형 집행이 20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좌익사상에 반대한 이가 빨갱이?

▲ 공무원 시절의 문상국공주군청 근무시 동료들과 함께(가운데가 문상국) ⓒ 박만순
일제강점기에 공주군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한 문상국은 해방 후 대전에서 경찰을 하다가 6.25 전 신문기자로 직업을 바꾸었다. 그가 특별히 좌익 활동을 했다는 자료나 증언이 없는데, 부역 죄로 사형을 당한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판결문에 나와 있는 이병찬에게 괘씸죄에 걸린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병찬은 원래 외지인으로 충남 대덕군 기성면 장안리 산막골에서 살던 이다. 그는 정부로부터 야산을 사 벌목(伐木)을 해 돈을 버는 사업을 했다. 전쟁 전 이병찬이 장안리 장씨 산을 샀는데, 마을 훈장을 하던 문양자 할아버지 문기홍이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양 집안에 갈등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상국은 평소 좌익사상에 반대했다고 한다. 딸 문양자(1944년생.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는 "해방 직후 아버지는 마을 처녀들에게 '여성동맹'에 참여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셨대요"라고 증언한다. 그의 전력과 당시 직업, 거주지, 언행 등을 살펴봤을 때, 장안리 민청위원장을 했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다. 물론 사법부의 판결을 모두 믿는다손 치더라도 10년형을 받은 그가 사형을 당한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상국의 어이없는 죽음은 한 가족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왔다. 문상국의 어머니 장준숙은 아들이 죽고 난 후 화병에 걸렸다.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아들이 죽고 난 지 약 2개월 만인 1951년 3월 세상을 떴다.
이번에는 문상국의 아버지 문기홍이 그해 8월에 자살했다. 평소 한학을 배워 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선비가 왜 자살을 택했을까? 그 이유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6.25 발발 직후 일이었다. 충남 대덕군 기성면장이 피난을 가면서 문상국을 데려갔다. 그런데 문기홍이 "우리 아들이 뭔 죄가 있다고 피난 가냐"며 대구로 가는 피난 길 도중에 데려 온 것이다. 만약 아들이 대구로 피난을 갔다면 부역 죄로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문기홍은 자신 때문이 아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문상국과 그의 부모가 한 해에 모두 사망하고, 다음해 문상국의 아내는 개가(改嫁)했다.
뿔뿔이 헤어진 남매

▲ 문양자 남매문양자 삼남매(좌측부터 문순자, 문양자, 문경호) ⓒ 박만순
졸지에 문양자 남매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남매는 뿔뿔이 헤어졌다. 여동생 순자는 어머니가 데려갔지만 남동생 경호는 고아원 신세를 져야 했다. 오갈 데 없는 문양자는 친척 집 몇 군데를 전전긍긍하다가,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외가) 이모 집으로 보내졌다. 학교를 보내준다는 이유였다. 그때까지 문양자는 초등학교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해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대전시 삼성동에서 국수집을 하고 있던 그 이모네 집에서 한 일이라곤 부엌데기였다. 국수 삶고 음식 나르고 잔심부름하는 게 전부였고, 학교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다.
하루는 이모가 심부름을 시켰다. 시장에서 소를 '야메(뒷거래의 비표준어)'로 잡은 이의 일을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그 일이란 삼성동에서 중앙시장까지 불법으로 도축한 소를 운반하는 것이다. 소다리 하나씩을 큰 대야에 담아 어린 아이 4명이 머리에 이고 나르는 것이다. 3km 거리를 이고 가면 목은 이미 자라목이 되었다. 문양자가 12세 때의 일이다. 이렇게 심부름을 해서 150원을 받으면 진외가 이모가 그 돈을 모두 빼앗았다. 부모 없는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
삼성동 이모 집에서 나와 간 곳은 대전에 있는 대영노트공장이었다. 그곳에서 2~3개월 심부름 하다가, 14세에 대전방직 매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점에서 일하는 이들 밥 해주고, 심부름 하는 일이 그녀의 몫이었다. 월급은 없었다. 1년을 무급으로 일하고 나니 공장에 정식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15세에 취직한 것인데, 당시 가장 어린 나이였다. 대전방직은 노동자 3천명이 다니는 대기업이었다. 이 곳에서 그녀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으쌰 으쌰" 소리가 약하게 들리더니, 구호 소리가 점점 커졌다. 앞 구호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뒷 구호는 알 수 있었다. "~노동자는 동참하라" 공장에 있던 노동자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순간 고참 노동자들의 '와' 소리에 기계가 꺼지면서, 일하던 동료들이 우르르 공장 정문으로 몰려 나갔다. 문양자도 당연히 뒤를 따라갔다. 시내로 진출 하지는 않았지만 공장정문에서 연좌농성을 했다. 문양자가 겪은 4.19혁명이다.
아버지를 찾다
문양자가 몸이 엄청 아팠을 때였다. 하루는 꿈을 꿨는데, 트럭에 탄 아버지가 그녀에게 까스명수를 던져주며 "얼릉 먹고 일어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문양자는 순간 아버지가 트럭에 실려 어딘가에서 학살된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녀는 그 꿈을 꾼 2001년까지 아버지가 6.25 당시 학살된 줄 몰랐다. 그 꿈을 꾼 지 며칠 후 TV에 대전 산내에서 합동위령제하는 장면이 나왔다. 남편에게 "여보 나 저기 태워다 줘요"라고 해 산내에 부리나케 갔다. 아버지가 학살된 현장을 찾은 것이다.
2003년에는 국가기록원에서 아버지 판결문을 찾았다. 2007년도에는 할아버지의 한 많은 죽음에 대해서도 알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인조사를 하면서 집안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1951년 8월 할아버지가 목메던 날 문양자 집에 왔던 집안 아저씨였다. 할아버지의 죽음사연을 듣고 그녀는 며칠을 울었다.
소녀 문양자에게 "지금은 여자도 공부를 해야 되는 시절이다, 너 크면 아버지가 유학 보내 줄게"라는 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겪은 그녀의 상처를 누가 씻어줄 것인가.
20. 가출, 구걸, 깡패, 검거... 인생을 밑바닥으로 끌고 간 사건
이중훈 부자가 겪은 국가폭력
새벽닭이 울자마자 소년 이중훈은 벌떡 일어났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간단한 짐을 꾸리고 방문을 살짝 열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동생의 얼굴을 보자 순간 울컥했지만 눈을 질근 감고 방문을 닫았다. 충남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 큰집에서 논산역까지 걸어가는데 맥이 빠졌다. 아침도 먹지 못했는데, 90리(36km) 길을 걸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큰집에서 더 이상 눈칫밥 먹기가 싫어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막상 기차역에는 도착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마을을 떠나 이렇게 멀리 온 것도 처음이고 기차를 구경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쐑쐑' 하는 기차 소리에 소년 이중훈의 간은 한없이 졸아들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표를 어떻게 끊는지도 몰랐지만, 설령 알았다손 치더라도 그의 수중에 돈 한 푼 없었기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차는 서울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
용산역에 도착했을 때, 비상상황이 발생했다. "검표(檢票)가 있겠습니다. 표 보여 주세요." 역무원의 소리에 다른 이들이 호주머니에서 표를 꺼내 보여주는데, 이중훈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안절부절 못했다. 이중훈의 차례가 되자 역무원은 그의 모습에서 사태를 알아차리고 대뜸 소년의 귀뺨을 갈겼다. "새파란 새끼가 도둑 기차질이나 하고 말이야"하며 귀를 잡아끌었다. 볼도 얼얼하고 귀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주변 사람들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더욱 신경 쓰였다. 역장 앞으로 끌려갔다. "이 놈의 새끼, 무임승차 벌로 3일간 변소 청소해." 냉혹한 현실과 처음으로 맞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서울에 도착했지만 소년이 갈 곳은 없었다. 이번에는 부산으로 가는 하행선을 탔는데 충북 추풍령역에서 무임승차한 것이 걸렸다. 용산역에서의 상황이 재연되었고, 그는 다시 기차에 탔다. 부산 못 미쳐 구포에서 또 한 번의 시련이 반복되었다. 약 일주일 동안 세 차례의 곤혹을 치른 그는 더 이상 무임승차를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거지 왕초가 되다
구포역에서 변소 청소를 하는데 웬 시커먼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승객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한 푼 줍쇼." 새까만 양손을 벌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연신 절을 했지만, 거지소년들에게 동전을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저녁때가 되자 소년 거지떼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을 하루 종일 유심히 지켜본 이중훈은 거지떼들을 따라 나섰다. 어차피 그가 갈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거지떼들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기찻길 아래였다. 커다란 구덩이 안이 그들의 주거지였다. 그곳은 그럴 듯한 집도 아니고 움막집도 아니었다. 거의 노숙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지소년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자, 거지들은 아무런 주저함 없이 이중훈을 한 식구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거지생활이 시작되었다. 거지의 하루는 피곤했다. 아침에 일어나 마을이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시민들에게 하루 종일 구걸해도 밥 한 끼 해결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편법이 동원되었다. 기차가 잠시 정차해 있는 사이에 올라타서, 승객들의 짐을 '슬쩍' 하는 것이다. 완행열차의 상단에 있는 짐 보따리를 승객들이 잠자고 있는 사이에 몰래 훔쳐 나오는 것이다.
보따리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간혹 떡 보따리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훔친 보따리와 구걸한 음식을 그들의 숙소(?)로 갖고 와 공평하게 나눠 먹는 것이 가장 행복한 때였다. 간혹 인근교회 목사에게 가면 떡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중훈의 구걸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거지 왕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15세의 나이였지만, 그는 친구들보다 키가 한 뼘이나 컸다. 키도 컸지만 주먹질도 잘해, 자연스레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거지생활 2년을 하고 나니 생활이 무료해 견딜 수가 없었다. 무작정 기차를 타고 상경을 했다.
싸움, 술, 돈... 밑바닥 삶
청량리역에 도착한 이중훈은 우연찮게 588 근처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흔히 '588' 하면 대한민국의 가장 유명한 성매매 집결지를 일컫는다. 그곳에는 '기둥서방'이라는 이름으로 깡패들이 거의 상주 하다시피 했다. 성매매여성들을 보호한다는 것인데, 그 명목으로 '보호비'를 받는 것이다.
그가 기둥서방은 아니었지만, 성매매 집결지에 자주 가 여성들에게 밥도 얻어먹고, 용돈도 얻어 썼다. 17세의 어린나이에 그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폭력조직에 가입해 술과 싸움, 돈에 심취했다. 소위 '동대문파'에 속했던 것으로, 조직의 최고 보스는 이정재였다. 4년간의 달콤한 생활에 날벼락이 쳤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였다. 전국의 깡패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일제 검거령이 내렸다.
동대문파 보스인 이정재는 사형대에 올랐고, 나머지 깡패들은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정재파 '똘마니'였던 이중훈은 강원도로 끌려가야 했다. 5·16 직후인 1961년 5월 23일 한신 내무장관의 "검거 깡패는 군법재판에 회부하여 엄격히 처리할 것이며, 형을 치르고 나와 개전의 정이 있는 자는 탄광 또는 도로공사에 종사케 하여 혁명정신과 국민근로정신을 터득케 하겠다"고 다짐하는 인터뷰(조선일보 1961년 5월 23일자)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권력을 불법적으로 탈취한 군부는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폭력배 일소'를 통한 '개혁적이고 도덕적인' 정권으로 포장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치안국(현재의 경찰청)은 5·16 이후 만 명의 깡패를 검거하여 그 중 3088명을 국토건설사업공사장에 보냈다.(조선일보 1961년 7월 2일자)
깡패들만 국토건설단에 동원된 것은 아니다. 부랑자와 성매매여성들도 동원되었다. "정부는 거리의 부랑자와 윤락녀들을 잡아들여서 서해안의 갯벌공사에 투입했다. 그렇게 수백 명이 충남 서산 바닷가로 끌려갔고 '양아치 총각'들과 '창녀 아가씨'들의 집단 결혼식이 올려졌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보고서>) 민초들에게 '인권'이란 단어는 사치에 불과하던 시대의 풍경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중훈은 강원도 춘천으로 끌려 가 도로작업에 동원되었다. 수 백 명이 소양강변에 대형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었다. 밥은 굶지 않을 정도만 주고, 군인들은 수시로 공포를 쏘며 동료들을 위협했다. 결국 그는 몇 명의 동료와 함께 3일 만에 탈출을 결행했다. 춘천에서 걸어서 청량리까지 왔다. 청량리에 도착해서 반 거지 반 미치광이의 모습으로 허겁지겁 밥을 먹는데 동대문경찰서의 호출이 내려졌다.
경찰서장은 "너네 다시 강원도로 가라. 거기 가면 인간적으로 대해 주고, 임금도 준다"며 감언이설로 꾀었다. 그래서 간 곳이 강원도 삼척군 도계면 황지리였다. 그곳에는 기찻길을 뚫는 공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중훈은 국가폭력으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와는 다른 경우지만 또 다른 국가폭력으로 인권을 유린당했던 것이다. 지옥 같았던 1년 생활을 마무리했을 때는 입영 영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왜 밑바닥으로 흘러갔을까
이중훈이 어릴 때부터 밑바닥 생활을 전전긍긍했던 이유 한 가운데에는 전쟁이 있었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내지리에서 반장을 보고 있던 아버지 이희영은 마을 유지였다. 밭은 12마지기로 자작농에 불과했지만 정미소를 운영해 부유층에 속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여를 점령한 북한군은 내지리에서도 인민위원회를 통해 식사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반장을 맡고 있던 이희영은 된장, 고추장 등을 걷어 북한군 식사마련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후일 화근이 되었다. 군·경이 수복하면서 부역자 검거가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군·경만이 아니라 우익 치안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50년 10월 초 경찰에게 뒷결박 지어 끌려간 이희영은 부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그해 10월 10일 부여경찰서에서 학살된 부역자들은 백마강 구두레나루터에 수장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이중훈 집안에서는 아버지 이희영만 학살된 것은 아니었다. 이중훈의 외사촌 형 임영규는 이희영과 함께 부여경찰서에 끌려가 백마강 구두레나루터에 수장되었다. 이중훈의 외사촌 형 임병규(1927년생)는 부역혐의로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51년 2월 8일 고문후유증으로 병사(病死)했다(임병규 제적등본). 또한 이중훈의 외숙부 임흥조는 한국전쟁 초기에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었다.

▲ 제적등본임병규가 부산형무소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제적증명서 ⓒ 박만순
가장이 죽었다는 사실을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이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가족들은 가장 이희영이 살아 있을 것으로만 믿었다. 그런데 경찰과 치안대원들이 와 협박과 회유를 했다.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해라. 그러면 이희영이 석방된다." 이 말을 순진하게 믿은 가족들은 땅문서를 그들에게 주었다.
이번에는 치안대원과 외지에서 온 김아무개 일가가 와서 집을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이중훈의 어머니 임경희와 이중훈(1942년생), 그리고 그의 어린 동생들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몇 차례의 폭언과 구타가 있었고, 결국 이중훈 가족은 집을 빼앗겨, 마을에서도 쫓겨났다.
당장 잘 곳이 없었던 그들이 찾아간 곳은 이웃면이었던 충남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로 갔다. 이중훈의 큰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눈칫밥을 면하지는 못했다. 결국 어머니 임경희는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이중훈도 큰아버지 집에서 약 3년 정도 머슴처럼 일하다 가출을 했다. 그러면서 그의 밑바닥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둠을 벗어나다

▲ 결혼식이중훈의 결혼식 ⓒ 박만순
1963년 8월 논산훈련소에 입대한 그는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1971년 봄 베트남 다낭에서 베트남전 생활이 시작되었고, 1980년 5·18 때는 광주 한복판에 있었다. 계엄사령부에 있었던 그는 5·18을 하나의 '전쟁'으로 생각했고, 잊고 싶은 '기억'으로 인식했다.
아내가 암으로 2000년도에 사망했고, 그는 현재 광주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현재 '부여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아 피해보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유족회 활동에 열심이다. 미신고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다.
또한 그는 전쟁 때 집과 땅을 강제로 뺏긴 것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향후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구성되면 이 문제도 공식적으로 제기할 참이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 이희영이 국가폭력으로 학살된 것이 이중훈의 인생행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살기 위해 먹을 것을 구걸하던 것이 거지왕초에서 깡패 똘마니 생활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둠의 생활을 지속하지는 않았다.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면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아버지의 명예회복도 이루었다. "강제로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것과 미신고자의 명예회복을 돕는 것을 남은 생의 과제"로 삼는다는 이중훈(79세.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의 말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21. '의사 아들'이라고 우물에서 학살된 남자
충남 온양 용화리의 통곡
대구에서 73일간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GMC 트럭에 올라탄 이준영(1924년생)의 심정은 답답하기만 했다. 전쟁 초기 대전 산내에서 목격한 민간인학살사건이 형무소 간수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구에 있던 차석태 충남도경찰청 인사과장에게 찾아가 "간수 생활 정리하고, 경찰로 가고 싶습니다. 아무 직책이라도 좋으니 경찰로 보내주십시오"라고 사정했다. 처가 쪽 친척이었던 차석태는 "그럼 인천상륙작전 하는 대로 갈래?"하고 해서 '좋다'고 응낙했다.
숙소로 돌아와 대전형무소 동료와 상급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니, 상급자 박근식이 펄쩍 뛰었다. 그는 "자네 이제까지 같이 고생하고 무슨 소리여? 처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판에"라며 만류했다. 이준영은 경찰로의 전직을 포기하고 1950년 10월 3일 대전으로 향하는 GMC 트럭에 몸을 맡겼다. 오전에 대구에서 출발한 트럭은 오후에서야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형무소 정문에 도착하니 미군 헌병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이준영 일행이 도착하자, 뭐가 그리 급한지, "Thank you(고맙다)"를 연발하며 지프차를 타고 형무소를 떠났다.
"악."
누구랄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준영 일행 앞에는 가히 '지옥도'의 세계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형무소 담벼락 근처에 있던 온상 밭에 수백 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이준영의 증언이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을라면은요, 온상을 했거든요. 12척(4m) 높이의 담벼락 앞에 (묘종을 키우는) 온상을 길게 두 줄로 만들었단 말여. 거기에 시커먼 송장들이 그냥 전부 널부러져 있단 말이여."
시신의 눈은 온데간데없고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발굴 보고서>)
"차라리 저희를 죽여 주십시오"
시신 가까이 가보니 더욱 끔찍했다. 북한군은 총알이 아까웠는지, 우익인사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을 쏜 듯했다. 어떤 시체는 두개골이 부숴진 경우도 있었다. 둔기로 때려서 숨지게 한 것이다. 멀쩡한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 이준영이 온상 밭의 시신을 둘러보고 있는데, 간수 한 명이 "대장님, 저쪽에도 난리가 났어요"라며 울부짖었다. 정신없이 뛰어가니, 우물 앞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야?"
우물 주변에 있던 이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코를 감싸 쥔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이준영이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셀 수 없는 시신들이 새까맣게 쌓여 있었다. 당시 대전형무소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던 우물이 공동묘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시 형무소 내 우물은 총 4개였는데, 북한군이 학살 장소로 이용한 곳은 2개였다. 직경 2m의 우물은 둘레가 6.3m에 깊이가 11.6m였다. 직경 1m의 우물은 깊이가 2m로 작은 것이었다.
형무소 인근에 있던 도마리와 탄방리 야산에서도 시신이 나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준영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며 장탄식을 했다.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충남도경 사찰과로 갔다. 그는 사찰과장에게 "공산당 피의자 있으면 주시오"라고 했다. 사찰과장이 이유를 묻자, "대전형무소에서 죽은 반공애국지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하오"라고 했다. 사찰과장은 7명의 부역혐의자들을 내주었다.
이준영은 "야, 이놈들아 여기 있는 시신들이 공산당 너희 놈들한테 돌아가신 분들이여"하며 시신 수습을 명령했다. 가마니를 펴고 양쪽에 목재를 대 들것을 만들어 시신을 정리하려 했지만, 어불성설이었다. 시신이 벌써 부패하기 시작해 제대로 옷을 걸치지 않은 시신을 손으로 잡으면 뭉클어지기 일쑤였다.
부역혐의자들은 "대장님! 차라리 저희를 죽여 주십시오"라고 사정했다. 이준영이 보기에도 이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대전시청 사회과로 가서 협조를 요청했다. 3개동에서 300~400명씩이 동원되어 3일간 수습했다. 우선 온상 밭에 있던 시신들을 일렬로 눕혀 놓았다. 그 일에만 3일이 걸렸다. 그런 후에 들것으로 옮겨 인근 야산에 매장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은 화장을 해 매장했다. 우물에 있던 시신도 건져 내어 마찬가지로 했다.
형무소 문에서는 가족들을 찾는 유족들이 모여들었다. 들것을 든 이들은 문에서 잠시 멈춰 유족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은 시신들의 옷가지, 치아 등을 보았지만, 시신을 수습해 가는 이는 극소수였다.
시신들을 화장하는 데만 10일이 걸렸다. 시신들을 헤아려 보니 온상 밭고랑에서 300구, 두 우물에서 171구, 도합 471구였다. 유족들이 찾아간 시신을 고려하면 약 500명이 대전형무소 내에서 북한군에 의해 학살되었을 것이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보고서>)
아이 때문에 피난 안 간 아버지

▲ 기타를 치던 석만수 ⓒ 박만순
일꾼들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과수원을 한 바퀴 둘러본 석만수(당시 30세)는 부리나케 용화리(충남 아산군 온양면) 집으로 향했다. 갓난아기의 얼굴이 아른거려 차분히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내미는 종옥이었다. 남들은 북한군이 내려왔다고 해서 전부 피난길에 올랐지만, 석만수는 아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피난을 가지 못한 게 불안하기는커녕 아침저녁으로 종옥이 얼굴 보느라 입이 귀에 걸렸다.
"우리 아가 잘 있었나?"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석만수 있나?"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내무서에서 왔소. 잠시 갑시다" 청년 3~4명이 석만수를 끌고 간 곳은 아산내무서(아산경찰서)였다.
연행하는 이유는 붙잡아 갈 당시에도 설명이 없었고,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산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동안, 석만수의 남동생 석광수는 매일 주먹밥을 날랐다. 하루는 석광수가 석만수 아내 문정희에게 "형수님! 내일이나 모레 형님이 대전으로 간다고 하네요"라고 했다. 갓난아기를 두고 남편 면회를 갈 수 없었던 문정희의 속은 타기만 했다.
대전형무소에 구금된 석만수는 자신의 미래보다 아기의 건강이 더욱 걱정이었다. '아기가 젖은 제대로 먹고 있나'하는 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런데 형무소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50년 9월 23일부터 3일째 밥을 주지 않았다. 전세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새벽에 끌려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감방에서 나간 후에 총소리가 난 것을 보면, 그들이 죽은 것은 확실했다.
1950년 9월 25일 1차로 나간 이들은 피난 가지 못한 경찰과 군인들이었다. 새벽에 총소리가 나면서, 그때부터 감방에 있던 이들은 전부 잠들지 못했다. 감방에 남은 이들은 하루 종일 불안에 떨었다. 이들 대부분은 지역 유지였다. 이들은 땅을 많이 갖고 있던 지주이거나, 장사를 크게 하던 이들이었다. 또한 공무원이나 전문직종에서 일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한청년단이나 국민회에서 감투를 쓰기도 했다. 이들은 북한군이 내려오면서 '반동분자'로 취급되었고, 충남도내 각 경찰서(내무서)에 구금되었다. 그러다가 9월 말 대전형무소와 대전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었고,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인 9월 25일과 26일에 집단학살되었다. 석만수 역시 9월 26일 새벽 대전형무소 내 우물에서 죽임을 당했다.
대전형무소에서 북한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이들의 숫자는 구금되었던 471명을 포함해 총 1557명으로 파악되었다. 전쟁 초기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된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재소자와 더불어 전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석만수는 어떤 활동을 했기에, '반동인사'로 분류되어 죽음의 대열에 끼었을까?
의사 아들이라는 이유로

▲ 석만수 희생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명부. 출처: 이갑산, <집념을 불사르며>, 1984 ⓒ 박만순
석만수 아버지 석제경은 온양의 내로라하는 지역유지였다. 평양이 고향이었던 석재경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의전을 나와 서울 종로에서 개업을 했다. 그러다가 건강 문제로 충남 아산군 온양면으로 내려와 '온양공제병원'을 열었다.
그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큰 규모의 과수원과 논·밭을 소유했다. 그러다 보니 지역유지로 이름을 날렸다. 손녀 석종옥(70세, 대전광역시 중구 목동)의 증언에 의하면, 조부 석제경은 온양에서 인심을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악착같이 치부(致富)를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석만수의 동생 석광수가 서울대 치대를 나오고, 그의 이복동생들이 연세대·가톨릭의대·숙명여대·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것을 보면, 석제경이 얼마만큼 부유했는지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석만수는 학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집안의 장남인 그는 평양에서 5년제 중학을 다니고 상급학교에는 진학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트럭 한 대만 사주세요, 그러면 어머니 모시고 살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석제경은 본부인과 별거를 하고 있었고, 둘째 부인과 온양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석제경은 장남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석만수는 할 수 없이 온양에서 아버지 과수원을 도맡아 생활하고 있었다. 과수원에는 기술자와 일꾼이 있었기에, 그는 아등바등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평소에 음악을 좋아해 기타를 끼고 살았다. 그런데 그에게 '반동'이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왜 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점령하면서 소위 '반동'인사들을 잡아들였다. 검거대상은 월남인(越南人), 군인과 경찰 및 우익단체 활동가, 지역유지였다(임재근, '한국전쟁시기 대전지역 민간인학살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런 기준 때문에 석제경은 지역유지로 분류되었고, 검거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석제경은 전쟁이 나자마자 피난길에 올랐고, 석제경을 검거하지 못한 북한군과 지방좌익은 '꿩 대신 닭'이라고 그의 아들 석만수를 검거한 것이다. 석종옥의 증언에 의하면, 좌익 활동을 했던 온양의 한 병원 의사가 밀고를 했다고 하는데, 이는 추측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석만수는 본인이 지역의 유지도 아닌데, 의사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군에 의해 구금 후 학살된 것이다.
용화리의 통곡

▲ 증언자 석종옥 ⓒ 박만순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북한군에 의해 학살된 석종옥은 이후 고된 삶을 살아왔다. 작은할머니에게 생활비를 타야만 했던 석종옥 가족은 눈칫밥을 먹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석종옥은 덕성여대에 입학했지만 졸업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어머니 문정희는 2012년에, 오빠 석종호는 2013년에 세상을 떴다. 어머니와 오빠 모두 말년에 기초생활수급자였기에, 그들의 뒷바라지는 그녀의 몫이 되었다.
대전 한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는 석종옥은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열심히 읽는다. 특히 문학책을 좋아한다. 책 읽는 것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도 좋아한다. 2014년 백제문학에 등단하기도 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자신이 겪은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묶어 글로 쓸 계획이다.
<용화리의 통곡>이라고 제목도 미리 정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남은 가족들의 슬픔은 그녀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고 우리민족이 겪은 비극이다. 민족의 비극을 직접 체험한 그녀가 좋은 작품을 써, 전쟁의 상처를 많은 이들과 나누었으면 한다.
22. "내 남편 돌려줘" 경찰서에 항의했다고 '사형' 당한 여성
국가에 의해 부모를 모두 잃은 송석윤의 눈물
"우리 석윤이 아부지가 뭔 죄가 있겄시유?"
"..... "
"그러지 말구 나랑 같이 경찰서에 한번 같이 갑시다."
김진기(가명)는 도끼눈을 치켜들고 "내가 뭐할라구 경찰서엘 가요?"라며 삿대질을 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도와줘유." 하지만 김진기는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저자세였던 이용옥이 돌변했다.
"아니 이 아저씨가 너무 하네. 아저씨 때문에 남편이 보도연맹에 가입된 거 아닌가 봐유?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갔으면 쫌 도와줘야 할 거 아니유?" 김진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듣자듣자 하니까 이 아줌니가 큰일 날 소리하구 있네. 누가 누구를 가입시켰다고 지랄여. 당장 나가"하며 역정을 냈다. 이용옥이 힘으로 남성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법.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섰다.
이용옥은 다음 날 일찍 집을 나섰다. 마을 나루터에서 백마강만 건너면 부여 읍내였다. 생전 처음 가보는 부여경찰서였다. 가슴은 콩닥거렸지만, 남편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 독한 마음을 먹었다. 경찰서 정문을 기웃거리자, 보초를 서는 경찰이 물었다. "뭔 일이유?" "예. 사찰과장님 좀 뵈러 왔구만유." 경찰이 안내해 준 곳으로 갔다. 마침 사찰과장이 자리에 있어, 사정을 얘기하고 '남편이 아무런 죄가 없으니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사찰과장의 안색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교육이 있어 소집한 것에 불과하니, 집에 가 있으면 며칠 후에 돌아갈 거니 안심하시오."
사찰과장의 답변이 있었지만, 그녀는 안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지금 같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살아서 다시 못 만날 것 같다는 불길한 짐작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사찰과장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과장님, 지발 제 남편 좀 살려주시오"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허허 참. 이봐! 이 아줌니 돌려보내." 그러자 사복경찰 여럿이 다가 왔다. 이용옥은 그때부터 악을 썼다.
"야, 이놈들아.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간디 이 난리여. 당장 내놔!"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거기까지였다. 사복경찰 여럿이 그녀의 팔다리를 번쩍 들어 정문 앞에 내동댕이쳤다. 보초를 서던 경찰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아줌니. 그라지 말구 집으로 가세요. 여기서 이런다구 남편 분이 나오는 것도 아니구." 이용옥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대성통곡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마을을 향해 걸음을 향했다.
경찰서에 항의한 게 이적행위?

▲ 송완쇠, 이용옥 부부 ⓒ 박만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충남 부여를 점령하기 직전 사람들은 피난 짐을 쌌다. 부여군 규암면 신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을에 살던 이용옥(1914년생)도 남편 걱정은 잠시 미룬 채 애들 챙기랴, 피난 짐 싸랴 정신이 없었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들을 앞세워 구두레나루터로 갔다.
나루터에는 흰 옷 입은 이들이 개미 때처럼 몰려 있었다. 한나절을 기다린 후에야 배를 탈 수 있었다. 그녀 일행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부여군 은산면 가루고개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아이들의 고모가 살고 있었다. 가루고개 마을은 산속에 있는 마을로, 백마강을 건넌 후에 우마차를 빌려 30리(12km)를 가야 하는 곳이었다.
당시에 엄마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던 송석윤(1944년생)은 수시로 호죽기(전투기)가 날아다녀 공포에 시달린 기억이 남아 있다. "호죽기가 '쌕'하고 나타나면요. 엄마가 저를 치마로 덮어씌운 후에 바짝 엎드렸어요. 저를 살리려고 한 거지요." 그렇게 고모네 집에서 2개월을 살았던 이용옥 가족은 9.28 수복 때 규암면 신리로 돌아왔다.
며칠 후 경찰 2명이 찾아왔다.
"이용옥씨 있소?"
그녀는 경찰들이 집으로 올 것을 미리 알았는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송석윤의 큰 어머니와 마을 아줌마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 앞이라 아무도 소리 내지는 못하고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잠시 경찰서에 갑시다"라며 경찰들이 이용옥의 팔을 이끌었다. '이제 가면 못 올 것 같다'는 웅성거림이 마을 아주머니들 속에서 나왔다. 아랫말 지나 구두레나루터로 끌려가는 이용옥의 뒷모습을 마을사람들은 눈물로 떠나보냈다.
그렇게 끌려간 이용옥은 1950년 12월 11일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며칠 후 계엄사령관 육군 소장 이형근은 사형집행을 명령했고, 그녀는 대전 산내에서 학살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잠깐의 행복
이용옥이 산내에서 학살된 이유는 남편의 예비검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남편 송완쇠(1915년생)는 일제강점기에 규암보통학교를 나와 간도에도 다녀왔다. 집에 있는 경우는 별로 없고, 무슨 일을 하는지 늘 밖으로 내돌았다. 집에 있을 때에는 공회당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완쇠가 집에 오는 날은 대부분 장날이었는데, 아들 송석윤의 입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아버지 자전거 뒷좌석에 타, 은산장에 놀러 가기 때문이었다. 장날이면 송완쇠는 큰 홍어를 사, 이웃해 있는 큰집 식구들과 함께 요리해 먹었다. 그의 부모와 형 식구, 그리고 처자식까지 하면 13명의 대식구였다. 먹을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랬던 그가 처남과 함께 좌익 활동에 연루되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6.25 직후 처남·매형은 각각 예비검속되었다. 충남 공주 탄천면이 집이었던 처남은 공주경찰서로 끌려가 공주 왕촌에서 학살되었고, 송완쇠는 부여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대전으로 이송된 뒤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송완쇠 아내 이용옥이 이웃집과 경찰서에 가서 "남편을 살려 달라"고 사정하고, 항의한 것은 송완쇠가 살아 있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경찰을 대상으로 그녀가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고, 더군다나 피난길 때문에 남편의 생사에 더 이상 메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피난 짐을 싸는 동안 남편과 남동생은 대전 산내와 공주 왕촌에서 학살되었다. 북한군이 부여군을 점령하는 동안 그녀는 부역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 그 기간에 이용옥은 올케가 살던 부여군 온산면으로 피난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적행위'라는 중죄를 뒤집어썼는가?
듣도 보도 못한 법

▲ 이용옥의 판결문 ⓒ 박만순
이용옥이 사형선고를 받은 법은 '국방경비법'이었다.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북한군 점령기에 부역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은 숫자 미상의 사람들이 이 법에 따라 사형선고를 받거나, 실형선고를 받았다. 그럼 이 법이 과연 '합법적'이었는지를 살펴보자.
1948년 7월 5일에 공포된 것으로 알려진 국방경비법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다. 왜냐하면 이 법은 대한민국 수립(1948년 8월 15일) 이전인 미군정 시기에 만들어진 법으로,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형사처벌의 잣대로 사용됐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방경비법이 정식으로 공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방경비법은 정식 법률 번호도 없고, 몇월 며칠에 공포되었는지 어느 기록에도 없다. 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 인권평화재단연구소 소장은 "국방경비법 자체가 근거가 없는 법률이다"라고 주장한다. 많은 연구자나 법률학자들도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1998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이 문제에 대해 비상식적인 판결과 결정을 내렸다. "국방경비법이 법으로써 갖추어야 할 문제(정확한 제정시기와 공포과정)를 결여했지만, 법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합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즉, 실체가 불분명한 건 맞지만 '관습법'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정하기엔 이 법은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수없이 앗아갔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사죄하는 것이 마땅한데 '잘못된 법이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중 잣대를 없애 주시오"

▲ 증언자 송석윤 ⓒ 박만순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의 가족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바로 이중잣대다. 부모를 잃은 송석윤(76,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은 "아버지는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로 진실규명 되었지만, 어머니는 국방경비법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이유로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기각 결정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전쟁 통에 국가에 의해 부모를 잃은 송석윤 가족의 삶은 피폐하기만 했다. 그의 형은 머슴처럼 살았고, 송석윤은 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 신흥사 적조암에서 심부름을 했다. 중학교는 검정고시로 마쳤고, 한양대학교 뒤편에 있던 한양고등학교 야간을 다녔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한 그는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1967년 군 입대 후 베트남전쟁터까지 갔다 온 그는 사회생활도 '오뚜기'처럼 했다. 청계천에 있던 경원세기에서 냉동기술을 배워 외환은행에 입사해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2019년 현재 그는 경남여중에서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평생 손을 놀리지 않고 살았기에 무엇이라도 해야만 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대전유족회 초창기부터 활동해온 그는 "어머니의 명예회복이 제 여생의 바람입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의 예비검속에 항의한 어머니가 사형선고를 받아, 산내에서 학살당했다. 그런데 국가는 '사형선고를 받아, 집행되었기에 어쩔 수 없다'라며, 나 몰라라 한다. 국가는 언제까지 송석윤의 눈물을 외면할 것인가.
'팽' 당한 국방경비법 피해자들
한국전쟁 전후에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을 받은 이중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2019년 현재까지 '빨갱이'라는 오명(汚名)을 벗지 못했다. 왜냐하면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국방경비법'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받은 이들을 진실규명 대상에서 애초에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방경비법으로 사형 선고받은 이들에 대한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 후 '기각'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극히 일부 예외가 있었다. 정부수립 전 이승만 선거구인 동대문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최능진은 국방경비법으로 사형 선고받았는데도 진실규명 되었다. 즉 진실화해위원회는 최능진이 인공시절에 '정전·평화' 집회에 참석한 것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위배되지 않고,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은 것은 위법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충남 부여군의 전재흥 역시 인공시절 이적행위 명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애초에 전재흥 사건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가, 유족의 이의제기로 '진실규명 결정' 처리했다. 즉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았다는 점과 전재흥 때문에 죽었다는 이가 실제로는 후퇴하는 북한군에 의해 학살된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최능진과 전재흥은 '국방경비법'으로 사형선거를 받았어도,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으로 처리했으며, 유족들은 이를 근거로 국가를 대상으로 재심 청구했다. 결과는 모두 유족들의 승리였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방경비법 피해자 유족들은 국가에 하소연 한마디 못하고 '팽' 당했다. 국가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기상천외한 잣대를 갖고 유족들에게 2차 가해를 했기 때문이다.
23. "매일밤 미군이 강도·강간" 그들이 대둔산에 올라간 이유
[박만순의 기억전쟁] 한국전쟁 때 6명이 사망한 윤석중 가족
"쿵쿵쿵."
대포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지 며칠 후였다. "동무들 빨리 서두르시오." 조선로동당 충남도당위원장 남충렬(본명 박우헌)은 부하들을 재촉했다. 충남도당 사무실은 벌집을 쑤신 격이었다. 후퇴 짐을 싸랴, 소각할 문서와 가져갈 문서를 구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웬만하면 버리고 가시오"라는 상급간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당원들은 필수품만 챙기고 대둔산 초입의 충남 논산군 양촌면으로 집결했다.
충남도당이 유엔군을 피해 대둔산으로 집결한 때는 1950년 10월 초였다. 대전시당, 대덕군당, 논산군당, 부여군당, 천안군당에서 모여 들었다. 여기에는 로동당 당원들과 북한군 패잔병이 주된 대오를 형성했다. 하지만 논산군당 소속의 강경읍과 양촌면당은 인민위원회뿐만 아니라 민청, 여맹, 농민동맹원들까지 조직적으로 입산했다.
입산 초기 충남 빨치산은 약 1000명이었다. 그들은 대둔산 골짜기마다 참호를 구축하고, 발전기를 이용한 도정시설과 병원시설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막강한 대오를 형성했던 충남빨치산은 4년에 걸친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궤멸되었다. 400여 차례의 군·경 토벌작전으로 빨치산은 2287명이 사살되었고, 1025명이 붙잡혔다. 군경과 의용경찰, 우익단체원은 1376명이 전사했다. (송현강, '6·25 전쟁기 강경경찰서 및 대둔산지구 전투연구', 2012)
특히 초기에 있었던 대둔산 월성고지 전투는 힘겨웠다. 논산군 양촌면에 위치한 월성고지에는 100m 이상의 수직암벽이 있다. 경찰의 토벌과정에서 경찰 두 명이 바위 밑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 명은 즉사했고, 중간에 소나무 가지에 걸린 이는 다행히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놀뫼신문> 2019년 6월 19일자, "1129일간의 6.25전쟁, 그리고 900일간의 대둔산 공비토벌")
이름 없이 죽은 삼남매

▲ 대전형무소에서의 학살한국전쟁 기간 대전형무소 내 온상 밭에서 학살된 시신들. ⓒ FADING AWAY, CHRISTOPHER HK LEE
대둔산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 중에는 윤씨 삼남매가 있었다. 윤덕중(22세), 윤영중(19세), 윤경희(17세)가 그들이다.
충남 논산군 강경읍에 살았던 이들은 북한군이 강경을 점령하던 시절, 북한군을 도왔다. 약 70일간의 인공시절 북한군에 협력한 대가는 참혹했다. 이들의 막냇동생 윤석중(당시 9세) 증언에 의하면 "형님들과 누나가 대둔산으로 올라간 후 소식이 없어요. 토벌 과정에 죽은 것으로 들었어요"라고 한다.
윤씨 삼남매를 포함한 사람들은 왜 대둔산으로 올라갔을까? "중공군이 참전하기 때문에 한 달만 버티면 된다"라는 북한군의 선전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런 이들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 대둔산으로 올라갔다. 대한민국 군·경의 강압적인 '부역혐의자 검거'와 '처벌'이 두려워서였다.
1950년 겨울 한국전쟁 발발 후 대전형무소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 수감자로 폭발직전이었다.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1950년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 충남경찰국에서 검거한 부역자 수만 1만1992명이었다. 이들 중 주요가담자는 사형, 무기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지서나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중공군 참전으로 인한 1·4 후퇴시기에 서울, 대전 형무소 등지의 재소자들이 대구나 부산을 포함한 남부지역 형무소로 이감되면서 숱한 인권유린과 죽음(학살)을 당했다. 얼어 죽고, 전염병에 걸려 죽고, 굶어 죽고, 압사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이들은 부산 초량역에서 내렸는데, 언젠가 한 번은 기차가 왔을 때 기차 안에서 죽은 사람이 350명 정도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부역혐의자들이 처한 조건은 공주형무소나 청주형무소도 마찬가지였다.
군경이 수복한 후부터 1·4 후퇴 시기까지의 고초는 부역 혐의자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대전충남의 산악 인접지역 주민들은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 하에 각종 전쟁 범죄의 희생양이 됐다.
1950년 12월 21일부터 1951년 1월 20일, 만 한 달간 대전형무소에서는 439명이 죽었다. 앞서 1950년 12월 서울의 부역혐의자 2020명이 대전형무소로 대량 이감되는 과정에 벌어진 참사였다. 대전으로 옮겨가는 동안 수감자들은 의약품, 식량, 침구의 미비로 병사, 아사, 동사했다.
거기다가 미군이 밤마다 강도와 강간을 일삼는 등 기겁할 일도 있었다. 최근 기자가 입수한 미8군 배속 UNCACK(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 보고서에는 이같은 민간인 피해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구술 증언과 일치한다. 보고서는 이렇게 적었다.
"이 지역 도지사 이씨(이영진)는 밤마다 강도와 강간이 대전시에서 일어나며, 이런 행위들은 미군(美軍)에 의해 범해지고 있다고 보고함. 이 정보는 519 헌병부대에 전달됨(The Governor of this Province Governor Lee reports that robbery and rape is nightly occurrence in the City of Taejon and, that these acts are being committed by US Army colored soldiers. This information was passed on to 519 MP Bn)" - WEEKLY ACTIVITIES REPORT, UNCACK, TAEJON TEAM, 22-28 January 1951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군 점령시절, 북한군에 협조한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인들이 강간과 강도를 피해 대둔산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빨치산'으로 불렸으며, 군·경의 토벌과정에서 숱하게 죽었다.

▲ 대전에서 밤마다 미군이 강도와 강간을 일삼았다는 유엔 보고서 ⓒ 박만순
정신분열, 행방불명... 전쟁이 망쳐놓은 삶
"보도연맹 회의가 있으니 잠시 경찰서에 갑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강경경찰서에서 나온 형사들은 세수를 하고 있던 윤한병(1900년생)을 연행했다. 세수하다 간 남편이 오지 않자, 아내 염순길은 강경경찰서로 갔다. 그곳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보도연맹원들은 모두 대전(산내)에서 죽었다"는 말이었다.
강경읍에서 '춘산한의원'을 경영하던 한의사 윤한병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평소 여운형과 호치민을 존경했던 그는 투철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계기로 참여한 건국준비위원회 이력 때문에 후일 윤한병은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해야 했다. 강경경찰서로 간 윤한병은 대전형무소에 옮겨졌다가 학살되고 만다.
윤한병의 남은 가족들은 피난 짐을 쌌다. 그들은 논산군 은진면 호량리로 피난을 갔지만 곧이은 북한군의 진주로 강경읍내로 돌아 왔다.
경복고와 광산전문학교를 나와 대전공업중학교(6년제) 교사를 하던 윤한병 장남 윤의중(1921년생)은 인공 시절 북한군의 호출을 받았다. 논산군 학무국에서 일하라는 것이었다. 후에 윤의중은 군경 수복 후 부역자로 검거돼 7년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경찰서에서의 호된 고문과 열악한 형무소 환경은 건강하던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 나왔다.
석방 후에도 윤의중은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했다. 아니 생활은커녕 매일 방에서 누워 있는 신세였다. "특무대(CIC)가 전파 장치로 내 뇌를 조종하고 있다"라는 등의 헛소리를 했다. 툭하면 밤새도록 자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석방된 지 6년만인 1964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윤한병의 둘째 아들 윤갑중(1924년생) 역시 전쟁 피해자다. 의용군으로 나간 그는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결국 윤한병 집안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6명이 죽었다. 보도연맹원으로(아버지 윤한병), 부역혐의자(장남 윤의중)로, 빨치산으로 3명(자녀 윤덕중, 윤영중, 윤경희)이 죽었고, 한 명이 의용군(둘째 윤갑중)으로 행방불명됐다.
생존자는 대인기피증에 시달려

▲ 증언자 윤석중 ⓒ 박만순
참혹한 가족사는 윤한병·염순길의 9남매 중 막내인 윤석중의 가슴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평생을 사람을 멀리하게 하는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초등학교 때 내리 1등만 했던 그는 강경중학교를 나와 강경상고에 들어갔다. 300명 졸업에 10명만 은행에 입사하던 시절 농협에 합격했다. 이후 주택은행에 스카웃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근무했다. 강원도, 대구, 충무, 대전에서 지점장을 하고 1997년 정년퇴직했다.
그는 농협에 합격했을 때 신원조회를 당할 수 있다는 우려로 호적을 바꿨다. 매형 앞으로 옮겼다. 그러다보니 직장 근무시절에는 신원조회로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그는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에 아버지 윤한병을 진실규명 신청했다. 하지만 대둔산에서 죽은 형 두 명과 누나는 신청하지 않았다. 전쟁의 옥쇄에서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역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비무장한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면 전쟁의 희생자가 아닐까?
윤석중(78세,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은 전쟁으로 인한 가족의 비극에 대한 소감을 묻자, "노무현이 고맙지"라는 답변을 선뜻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과거사법이 제정되어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되었다는 뜻이다. 평생을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를 썼던 그에게 노무현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윤석중의 형과 누나에게 '빨갱이' 굴레가 벗겨지는 날은 언제일까.
24. 인민군 피해 땅굴에 숨어 산 남자, 국군 총에 죽었다
기관사 우종석의 짧았던 삶
1950년 7월, 피난길에서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우종석 집에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우종석 동무 있소?"
"누구세요?"
"내무서에서 나왔소. 우종석 동무랑 상의할 일이 있어 왔소."
우종석의 어머니가 '없다'고 했으나, 그들은 쉽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방 좀 보겠소" 하면서 방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방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들은 '우종석이 집에 오면 내무서에 꼭 들려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갔다.
며칠 후 내무서에서 다시 왔다. 그때는 우종석의 어머니는 집에 없었고, 여동생 우정분(당시 15세)만이 있었다.
"오빠 어디 있나?"
"모르는디유."
내무서에서 나온 이들은 지난번처럼 집뒤짐을 했다. 여전히 우종석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그들이 쉬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내무서원들은 조카를 업고 있는 우정분에게 "오빠가 기관차 기술이 있어 협조를 얻으려고 하는 거야. 어디 있는지 솔직히 말해"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우정분은 정말 오빠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우정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밖에 없었다.
"정말 몰라유."
그러자 내무서원들의 자세가 돌변했다. "이놈의 지지배가 버르장머리가 없네! 오빠를 찾아내지 않으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며 목청을 높였다. 그들은 우정분을 집 뒤쪽 장독대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자, 마지막이야. 오빠 어디 있어?" 우정분은 답변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탕' 소리가 나자 소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음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후 애기 울음소리가 났다. 정분은 '아니, 저승에서도 애기가 우네?'라고 웅얼거렸다. 그런데 그곳은 저승이 아니라 장독대 앞이었다. 우정분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근처의 떡시루가 산산조각 나있었다. 그때서야 우정분은 내무서원들이 자신이 아니라 떡시루를 쐈음을 눈치 챘다.
땅굴에서 60일을 버텼는데 '잔류파' 낙인

▲ 온양온천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 1947.2.28. 뒷줄 맨 우측이 우종석 ⓒ 박만순
내무서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여동생을 협박하며 간장 독을 쏜 시간, 우종석은 바로 근처에 숨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집 뒤쪽 울타리 아래에 굴을 파서 아들을 숨겼다. 그러한 사실은 가족 어느 누구도 몰랐었다.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한 60여 일간 우종석은 굴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식구들 몰래 밥을 날랐다.
후퇴했던 국군이 대전을 수복하자 군인과 경찰들은 인민군에 협력한 소위 '부역자'들을 검거하느라 눈알이 빨개졌다. 기관사였던 우종석은 업무 복귀를 위해 대전역에 갔다. 그는 인민군 점령 시절 인민군(내무서원)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열차 운행에 협조하라'고 했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부역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운신에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전역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피난가지 않은 이들은 전부 빨갱이로 몰리는 상황이 돼버렸다.
우종석이 복귀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 친구 임홍근이 집으로 찾아 왔다. 여동생 우정분이 집에 혼자 있는데, 임홍근은 "오빠 어디 갔냐?"라고 물었다. 우정분이 "집에 없는디유"라고 하자, 그는 세모눈을 뜨고 방문을 모두 열어 보더니 같이 온 이들과 함께 나갔다. 훗날 소문을 들으니 임홍근은 피난 가지 않은 이들을 '부역자'로 잡아들이는 일을 했다. 우종석 역시 피난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잔류파'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잔류파=빨갱이 등식이 성립되던 때였다.
하루는 마을 반장이 와서 "제2국민병 모집을 하니 이 집 아들도 신체검사를 받으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소위 '국민방위군'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중공군이 참전하자 1950년 12월 17일 '제2국민병소집령'을 발동, 약 50만 명의 장정들로 국민방위군을 편성했다.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성들이 대상이었다.
우종석은 소집령에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냐. 한때는 빨갱이들이 잡으려고 안달이더니, 이제는 경찰이 잡아들이려고 난리쟎어." 떳떳하게 직장에 복귀하려면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는 삼성국민학교로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이후 소식이 감감했다. 신체검사를 받으러간 우종석은 대전경찰서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구금되었기 때문이다.
"별 일 없을 거예요"
대전형무소 간수 송중근은 순찰을 돌다가 얼굴이 퉁퉁 부은 친구를 만났다. "종석이 웬일이여?" 우종석은 그간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송중근에게 "울 어머니한테 가서 진정서 좀 받아달라고 전해줘"라고 부탁했다.
송중근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머니는 충남 대덕군 회덕면 대화리 가구를 일일이 다니며 진정서를 받았다. 당시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진정서를 받은 우정분(85, 대전 광역시 유성구 송광동)은 "밤저골, 황소, 말랭이, 고마니 150 집에를 일일이 다녔어요"라고 한다. 대화리 자연마을을 모두 다니며 진정서를 받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선뜻 진정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종석은 효자로 소문난 이였고, 인민군 점령 시절에 열차를 몰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진정서까지 들어갔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느 날 송중근이 우종석의 어머니를 찾아와 "모레가 재판인데, 걱정 마세요"라고 했다. 재판날에도 우종석의 집에서는 참석할 여력이 없었다. 잘못한 게 없으니 우종석도 석방되리라 기대했다.
그후 송중근이 와서 우종석의 여동생 정분에게 전한 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얘기였다.
"동생, 이리와 봐."
"....."
"네 오빠 산내에서 죽었어. 어머니한테는 얘기하지 말어."

▲ 우종석이 이적행위로 사형을 받았다는 판결문 ⓒ 박만순
우종석(1927년생)은 1951년 1월 6일 육군본부 군법회의에서 이적행위(국방경비법 위반)로 사형 선고를 받아 대전 산내에서 죽었다. 25세 젊은 나이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마을 사람이 다 보는 앞에서 '효자상'을 받았던 그의 생은 이렇게 짧게 끝나버렸다.
그 기차가 멈추지만 않았어도

▲ 철도 직원들과 함께. 1948.4.12. 앞줄 우측 3번째가 우종석 ⓒ 박만순
삼성초등학교를 나와 대전공립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한 우종석은 일본으로 가서 기관사 교육을 받았다. 귀국한 그는 한국전쟁 전까지 대전역에서 일했다. 어려서 효자로 이름을 날린 그는 청년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서울이나 부산 출장 일이 아니면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만큼 효성이 지극했다. 퇴근이 조금 늦으면 어머니는 우정분을 시켜 마중을 나가게 했다.
전쟁이 나서 피난길에 올랐을 때 우종석 집안은 열차를 이용하는 행운을 얻었다. 우종석이 기관사였기에 방치되었던 열차를 그가 운전하고 가족들 일부는 타고, 일부는 매달려 낙동강까지 갔다.
그런데 기차는 낙동강 앞에서 멈춰야 했다. 헌병이 제지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다리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지나갈 수 없소." 사정을 했지만 군인들은 단호했다. 우종석 가족은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이 대화리로 돌아왔을 때는 집에 있던 가축과 식량이 인민군 손을 탄 뒤였다. 이것이 우종석 가족이 '잔류파'로 찍히게 된 이유였다.
우종석이 대전 산내에서 '이적행위'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학살된 이후, 그의 아들은 7세에 병에 걸려 죽었다. 딸은 남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크게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고 2014년 사망했다. 우종석에게 남은 가족은 여동생 우정분(85)·우매자(82) 자매뿐이다. 이제 그녀들의 나이는 여든을 훌쩍 뛰어 넘었다.

▲ 우정분-우매자 자매 ⓒ 박만순
우매자는 막내가 초등학교 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다.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요,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1979년), 막내가 영문을 몰라 울지 않자, 담임선생님이 '빨갱이 자식이라 울지도 않는다'며 혼찌검을 냈어요"라고 회고한다. 우정분 역시 친정 엄마가 죽을 때까지 오빠가 산내에서 죽은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엄마의 지병이 도질까 걱정이 돼서였다.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우정분·우매자 자매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 그것은 오빠의 명예회복이다. 69년 전 엄마를 따라 다니며 오빠의 무죄를 주장하는 '진정서'에 서명을 받았던 우정분과 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뒷바라지했던 우매자 자매의 표정은 결연하기만 하다.
25. "동생 안 내놓으면 니가 죽는다" 공포의 서북청년회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문문흥·문육봉 형제와 그 유족
1950년대 중반. 깜깜한 새벽 시간 김묘순은 마루에 널어놓은 고구마 줄기를 챙겼다. 고구마 줄기가 상하지 않도록 큰 보자기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집 대문을 뒤로했다. 아침마다 보는 새벽별은 그날따라 무척이나 밝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아침밥을 챙겨 먹을 시간은 없었다. 새벽 4시이다 보니 무얼 먹기에도 그렇지만 사실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다. 20리(8km) 길을 걷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번질거렸다. 대전시장에 도착하니 오전 6시였다. 시장 가게들은 이미 대부분 문을 열었고, 노점상도 절반 넘게 나와 있었다.
"옥성이 엄마 나왔어?" 함지에다 애호박을 담아 장사할 준비를 하던 아줌마가 밝게 웃으며 김묘순에게 아는 척했다. 오전 동안 정신없이 장사를 하다 보니 가져온 것을 모두 팔았다. 앉았던 자리를 깨끗이 치운 다음 묘순은 "나 먼저 가유"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오니 벌써 오후 1시가 되었다. 눈이 빠지게 엄마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은 멀리서 엄마 그림자가 보이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엄마"하며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김묘순은 "아이구, 내 새끼들 배고프지? 엄마가 얼릉 밥 해줄게"하며 다리쉼도 하지 못한 채 부엌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고구마 줄기를 판 돈으로 산 보리쌀을 씻어 밥을 앉혔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아이들은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도 쉴 짬은 없었다. 밭으로 가 내일 시장에 내다 팔 고구마 줄기를 캐야 하기 때문이다. 몇 시간을 땅에 머리를 쳐박았는지 모르지만, 다음 날 장사할 만큼의 양을 캤다.
집에 돌아와 우물가에서 세수를 했다. 초가을 날씨라 물은 차가웠지만, 땀을 흠뻑 흘린 뒤라 무척이나 시원했다. "아이구 시원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저녁은 찐 고구마로 해결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가족들이 모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찐 고구마를 먹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이들은 누구인가?
마을회관 종소리가 울릴 때
"댕 댕 댕."
앞선 어느 날, 충남 대덕군 진잠면 학하리. 마을회관 종소리가 울리자 젊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뒷산으로 달아났다. '서북청년회(서청)'가 나타났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젊은 남정네들은 좌·우익 가릴 것 없이 모두 뒷산으로 뜀박질을 했다. 지난번 누군가가 종소리가 울렸는데도 집에 남아 있다 서청 회원들에게 봉변을 당한 이야기가 마을에 파다하게 퍼졌다.
서북청년회에 걸렸다 하면 좌익 관련 활동을 한 전력이 없어도 매타작을 당했다. 이북에서 도망 온 이들은 '빨갱이 사냥'에 광분했다. 문제는 이들이 빨갱이만이 아니라 청·장년 모두에게 몽둥이찜질을 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문육봉은 서북청년회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해방 후부터 좌익 활동에 심취해왔다. 그러다 보니 서북청년회는 물론이고 진잠지서에서 툭하면 문육봉의 집을 들이닥쳤다. "육봉이 있나?" 진잠지서 경찰들이 야심한 시각에 나타났다. 같이 살고 있던 문육봉의 형 문문흥(당시 37세)은 "동생은 집에 없는디유"라고 답변했다.
경찰들은 군홧발을 신은 채 마루와 방을 다니며 총 끝에 대검을 꽂아 여기저기 푹푹 쑤셨다. 경찰들이 찾는다는 정보를 접한 문육봉(당시 24세)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경찰들은 찾는 이가 없자 형에게 화풀이를 했다.
"다음에 올 때까지 동생을 찾아내지 않으면 네놈이 죽을 줄 알어."

▲ 생전의 문문흥 ⓒ 박만순
그날 이후 문문흥은 도망간 동생 때문에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툭하면 진잠지서에 연행되어 구타당했다. 지서마당으로 끌려가서 경찰 여럿한테 집단뭇매를 당하는, 그야말로 '동네북' 신세였다. 1950년 봄 어느 날 또 끌려간 문문흥은 경찰들의 군홧발에 차여 지서 근처에 있던 동구나무까지 굴러갔다.
1950년 초 충남 대덕군에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좌익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문문흥이 1차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동생 대신 형이 가입된 것이다. 몸을 피했던 문육봉도 1950년 초 대덕군 기성면 흑석리에서 경찰에게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눈썹 밑에 흉이 있어 찾기 쉬울겨"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문흥은 마을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었다. 젊은이 7명이 '밤고개'를 넘어 지서로 향하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들은 진잠지서에서 덕고개를 넘어 유성경찰서로 이송되었고, 다시 대전형무소를 경유해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문육봉도 비슷한 시기에 산내에서 학살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문흥, 문육봉 형제가 산내 학살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날 '밤고개'를 넘은 이들은 문문흥과 이용재, 이성기의 아버지와 숙부, 김복술, 이○○, 송○○이었다. 문문흥의 아버지 문공삼은 아들이 산내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산내를 휘젓고 다녔지만 아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문문흥과 같이 끌려갔던 이용재(당시 27세)의 집도 난리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이용재의 조카 이순재(82세, 대전광역시 유성구 상대동)는 당시 할아버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용재는 눈썹 밑에 흉이 있어 찾기 쉬울껴."
그렇게 자신했던 그지만 산내 학살현장에 도착하니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수천 구의 시신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찾는다는 것은 당최 불가능했다.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 이용재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일주일 넘게 식음을 전폐했다.
이용재의 갓난아기는 아버지가 끌려간 지 2년도 안 되어 당시 횡행하던 전염병으로 세상과 작별해야 했다. 아기가 죽자 이용재의 아내는 집을 떠났고 남은 식구들의 마음의 상처는 더욱 커졌다.
"경찰이 오면 말 좀 잘해주시오"

▲ 문옥성가수원역 근무시 문옥성(뒷줄 맨 좌측) ⓒ 박만순
아버지 문문흥이 산내에서 학살된 후 문옥성은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중학교 진학은 애초에 기대할 수도 없었던 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머슴처럼 일을 했다. 동네 아저씨들과 함께 매일 품앗이로 일했다.
경기도 파주에서 군 생활을 한 그는 제대 후 철도청에 취직했다. 1968년이었다. 충남 대덕군에 소재하고 있던 가수원역과 연기군 전의역, 충북 옥천역에서 여객 업무를 담당했다. 문옥성이 철도청에 취직할 때의 이야기다.
"진잠리에 주막이 있었는데요. 어머니가 주막 주인에게 '경찰이 오면 말 좀 잘해 주시오'라고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문옥성의 어머니가 아들의 철도청 취직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 마을 유지였던 주막주인에게 사정을 했던 것이다. 국가폭력에 의해 한국전쟁 때 학살된 이들의 유족이 경찰들의 신원조회로 2차 피해를 입었던 시대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장에 근무하면서 승진 때마다 신원조회로 여러 차례 불이익을 받았다.
추모시에 눈물 흘려
이승만이 달아 준 살인 허가장 이마에 달고
한 손에는 일본도요 또 한 손엔 미군총을 들고
동족 학살 저지르는 광견들 피의 축제
아비들은 제물 되어 백만 인이 죽었으니
저 간악한 혓바닥은
전쟁고아 만들어 내는 산실청이었소
(중략)
가시덤불 우거진 골령골 골짜기마다 헤매는
저 흰 머리 날리는 고아들을 보라 (하략)
산내 희생 유족이자 시인인 전숙자가 지난 여름 산내에서 열린 '대전산내 합동추모제'에서 낭독한 <학살 육십 년>이란 시다. 추모제에서 전숙자의 낭독을 들은 문옥성(82세, 대전광역시 유성구 계산동)의 눈에는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팔십이 넘은 나이지만, 그녀의 시를 들을 때마다 6.25 당시의 상황이 연상됐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어이없는 죽음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현재 노인회 활동에 열심이다. 대한노인회 유성구지회 부회장이자 진잠동 분회장이기도 하다. 진잠동에만 경로당이 35개이다 보니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 와중에도 산내유족회에서 위령제나 큰 행사가 열리면 꼬박 참석한다. 아버지와 숙부의 억울한 죽음이 잊히지 않아서다.
문옥성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마을에서 죽었던 이들은 명예회복되지 못했다. 그들도 명예회복의 길이 빨리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

증언하는 문옥성 ⓒ 박만순
26. 손주뻘에게 매타작... 집성촌에서 벌어진 광기어린 소동
청주시 미원면 김동수 집안의 비극
구녀성과 이티재가 소재해 있는 충북 청주시 미원면 대신리는 원래 충북 증평과 내수 미원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길목이다. 가깝게는 증평 좌구산과 연결되고, 멀게는 속리산과 이어지는 곳이다. 대신리 새터는 3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김해김씨 집성촌이었다. 1950년 10월 이 마을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이 빨갱이 새끼, 죽어봐라."
"아이구구, 살려 주시유."
지게 작대기는 공중에서 춤을 추며 김정제(1891년 생, 당시 60세)의 허리와 어깨, 얼굴을 향했다. 당시 60세면 상노인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손주뻘 되는 미원지서 경찰은 노인이라고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북한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얘기해! 빨갱이들 밥 해줬지?" 김정제가 "안했습니다"라고 했지만, 지게 작대기는 다시 한 번 춤을 추었다. 젊은이도 당해낼 수 없는 매질에 노인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잠시 후 작대기는 김정제의 아내 이정자와 며느리 민호녀에게까지 향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진 이 날의 광기어린 소동을 지켜본 마을 주민들은 착잡했다. 사실 북한군 패잔병과 지방 좌익으로 구성된 빨치산에게 밥을 해 준 것은 김정제 집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빨치산의 강요로 마을의 모든 집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밥을 해 주었다. 그런데 왜 유독 김정제 가족만 경찰의 뭇매를 감당해야 했을까?
그 일이 있기 전 마을 반장이 주민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경찰이 와서 빨갱이들 밥 해줬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해요. 거짓말 했다가는 큰 코 다쳐요." 그런데 김정제는 이 얘기를 전해 듣지 못했다. 경찰에게 화를 당할까봐 밥을 해 준 사실을 부정했고, 그 결과 경찰에게 '괘씸죄'로 치도곤을 당했다.
그렇다면 마을 반장은 왜 김정제에게만 귀띔을 해주지 않았을까?
징역 10년 선고해 놓고 학살

▲ 김동수 판결문 ⓒ 박만순
김정제의 아들 김동수(1922년생)는 마을에서 인기가 좋았다. 미원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글을 모르는 여성과 아이들을 상대로 야학을 운영했다. 그는 수원우체국에서 1년간 근무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미원국민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청주지방법원이 작성한 판결문을 보면 그의 활동내역은 다음과 같다.
"1947년 7월 6일 남로당에 가입한 김동수는 그해 12월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고향에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그에게 '남로당 영동군당 조직책'이라는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었다. 1949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김동수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오중순과 영동읍 심원리에서 회의를 하고 조직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영동군 학산면 도덕리 뒷산에서 무장유격대(01부대, 02부대) 활동관련 회의를 했다.- 청주지방법원 판결문
김동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49년 8월 31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는다. 판결문의 내용을 100% 믿는다손 치더라도 재판 결과는 지나치게 과했다. 재판부가 언급한 그의 범법행위는, 기껏해야 몇 차례 회의를 진행한 것뿐이다. 폭력, 방화, 살해 행위 같은 구체적 범죄행위는 전혀 없었다. 어쨌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그는 얼마 후 대전형무소로 이감된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몇 차례 면회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바람결에 실려 온 소문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 없었다. 마을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귀한 아들이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김동수의 어머니와 아내가 시신을 수습하러 대전형무소에 갔지만, 산내에서 죽었다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며칠을 허둥댔지만 시신 수습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학살된 아들을 둔 김정제 집안은 '빨갱이 가족'으로 미원지서에 찍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장과 반장은 마을에서 김정제 집안을 따돌렸다.
전 재산이 논 470평
김동수가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뒤 남은 가족들의 생활은 피폐하기만 했다. 김동수 아버지 김정제에게 남은 전 재산은 논 470평이었다. 이것으로는 가족들 생계가 불가능했다. 결국 남의 땅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김정제가 1953년에 사망하자 그의 며느리 민호녀가 가장의 역할을 떠맡았다.
민호녀는 논농사를 지으며 한편으로는 행상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단 장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녹용을 팔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충북 청원군 내수를 시작으로 음성군에 이어 경기도 이천까지 향했다. 심지어 서울 홍은동과 사당동 등지도 그녀의 손길이 미쳤다.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은 그녀의 생활력은 대단했다. 행상 보따리에 책을 여러 권 갖고 다니며, 마을에서 노인과 여성들을 상대로 읽어 주었다. 이야기책에 굶주린 그들에게는 그녀가 장사꾼 이전에 반가운 손님이었다. 민호녀는 어느 마을을 가든 환대를 받았다. 모든 거래는 외상이었다. 가을에 농작물을 수확하면 현물로 외상값을 받았다. 외상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떼인 적은 없었다.
김동수 아들 김영환(1945년생)은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농사일을 했고, 제대 후에는 유리가게, 구멍가게, 신발가게, 용달차 운전, 자가용 운전, 여관업에 전전했다.

▲ 증언하는 김영환 ⓒ 박만순
아버지가 불법적으로 학살당한 뒤 야생마처럼 살아온 김영환(75, 대전광역시 중구 용두동)은 지난해(2018년)에서야 과거사법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TV에 산내위령제가 나오는 모습을 본 게 계기였다. 방송국과 충북경찰청을 찾아갔지만 아는 이는 없었다. 대전의 시민단체를 어렵사리 찾아갔더니 유족회를 연계시켜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김영환의 '아버지 찾기'는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아버지의 판결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유를 몰랐던 그에게 판결문은 궁금증의 실마리를 풀어주었다. 그는 판결문을 읽던 날 밤새 울었다.
판결문을 모두 믿는다손 치더라도, 10년이면 석방돼 자유인이 될 수 있었던 아버지는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28세 젊디젊은 김동수의 청춘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그의 아내와 아들의 삶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 청주시 습격사건이 보도된 빨치산 신문. 한림대학교, 빨치산자료집 7 ⓒ 박만순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김영환(당시 7세)은 서당에서 큰 목소리로 천자문을 외웠다. 열려진 문으로 빨치산이 따발총을 메고 골목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모였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은 빨치산은 김영환에게 "얘, 이리 와서 글 읽어 봐라"라고 했다. 배운 천자문을 술술 외우니, 빨치산은 "그놈 참 기특하네. 공부 열심히 하거라"며 김영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들은 집 주인인 서당훈장에게 옷을 있는 대로 달라고 했다. 무슨 해꼬지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훈장은 안심하고 옷을 한 아름 안고 나왔다.
그렇게 서당에서 옷을 얻은 빨치산 십여 명은 새터에 보초 한 명을 세우고 아랫마을인 보도막골로 내려갔다. 훈장은 아이들에게 "얼른 집으로 가거라"고 했지만, 관심이 동한 소년 김영환은 멀찍이서 빨치산을 따라갔다. 그들은 보도막골 이장집으로 가서 옷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이장은 또랑을 따라 미원지서로 내달렸다. 이장이 미원지서에 신고하러 가는 것을 눈치 챈 그들은 이장 집을 불 질렀다. 1951년 5월 27일, 빨치산 이동루트의 주요길목인 미원면 대신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날 대신리에 와서 민간인복을 빼앗아간 이들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부대의 유격대원이었다.
청주시 동공원에 집결한 부대원들이 숨소리를 죽였다. 1951년 5월 20일 속리산을 출발해, 청주에서 10km 떨어진 가래산(청원군 가덕면)에 도착한 것은 5월 23일이었다. 청주시 한가운데 있는 동공원에 도착한 것은 5월 26일 새벽 1시였다. 옷은 보슬비로 흠뻑 젖었다. 새벽 1시 45분 '투두두'하는 기관총소리를 신호로 유격대원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청주해방작전' 이었다.
유격대원 약 180명은 3개 소부대로 나뉘어 공격했다. 남부군 승리사단이 감행한 이날의 공격은 정치주임 김갑제의 지휘 아래 김흥복 부대장과 송관일 부대장의 현장지휘로 이루어졌다. 청주역, 청주형무소, 충북도청을 주요 공격지점으로 잡은 유격대원들은 청주방송국, 청주경찰서, CIC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주요 관공서가 파괴되고, 방화되었다.
특히 김흥복 부대 박원길 분대장은 청주형무소를 공격해 사상범 전원을 석방시켰다. 형무소에서 나온 좌익수 140여 명이 빨치산대오를 뒤따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형무소생활에 허약해진 이들이 날다람쥐 같은 빨치산을 뒤쫓아 가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남로당 괴산군당 선전부장을 맡았던 김종한을 비롯한 수십 명이 빨치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엄지섭(여) 순경(보안과), 오선표 순경과 도청 공무원 1명이 사망했다. 새벽 3시 30분 철수를 시작한 유격대원들은 미원을 경유해 속리산으로 퇴각했다.
한국전쟁기에 지리산, 덕유산, 신불산, 대둔산 등 전국 산악지역에서 유격대활동을 했던 빨치산들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투쟁성과는 미미했다. 군·경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이른바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게 그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약 1시간 30분에 불과했지만, 유격대가 도청소재지를 공격한 것은 한국전쟁기 빨치산투쟁 중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1951년 6월 6일 속리산에서 '청주해방투쟁 기념 경축대회'를 열었다. 반원형 야외무대에는 김일성·스탈린 초상화가 걸렸고, 김흥복, 송관일 부대의 경과보고와 연예대회가 진행되었다.(한림대학교 <빨치산자료집 4, 7>, 홍두표 <나의 여운>, 전창식 <5·26 청주피습사건전말>, 충북지방경찰청 <충북경찰사>)
즉, 이현상부대가 청주시를 습격한 다음 날 퇴각하면서 미원면 대신리에 들어와 민간인 옷을 구하려 한 것이다. 이 와중에 보도막골 이장집이 불에 타버렸다. 이 사건 외에도 인근 야산의 비트(비밀아지트)가 880부대에 의해 발각된 사건이 있었고, 크고 작은 유사사건이 발생했다.
글:박만순(us2248) 편집:손지은(93388030) 오마이뉴스
무슨 죄인지도 모른 채 생지옥으로 끌려간 남자
여순사건 때 아버지를 잃은 유인수의 고단한 삶
하숙 칩니다. 하숙 쳐요!"
기차가 역에 도착할 때마다 유인수는 목청껏 외쳤다. 여수시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업무를 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숙 영업을 하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은 신사는 유인수의 영업대상이 아니었다. 허름한 복장이거나 영업직원 같은 이들에게만 호객행위를 했다.
"일주일에 얼마요?" "예 손님, 이 주변에서 가장 싸게 드립니다. 믿고 가시죠." 박시현(가명)은 유인수를 따라 역에서 500미터가량 떨어진 주택가로 간다. 박시현 역시 일주일간 이곳에서 막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고, 투숙할 경비가 따로 책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최대한 저렴한 방을 계약한다. 여인숙이나 그럴듯한 민박집은 애초에 염두에도 없었다.
"엄마 손님 모시고 왔어요." "잉 수고했다. 손님 이짝으로 오시요." 박시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말 그대로 '쪽방'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방이 아니었다. 천장에 붙박혀 있는 형광등은 옆방과 공동으로 쓰는 형광등이었다. 방 한가운데 칸막이를 설치해 한쪽은 주인이 쓰고, 다른 쪽은 손님이 쓰는 구조였다. "야들아, 손님 들어왔승께 조용히 하그라." 박시현 역시 많이 경험한 일이기에 놀랍지도 않다. 다만 항상 겪어도 항상 불편할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유인수는 새벽같이 일어나 하드(아이스크림)통을 메고 집을 나선다. 자기 몸의 1/3 정도 되는 크기의 통을 메고 도매점으로 간다. "잉, 인수 왔냐." 아이스크림가게 사장은 인수를 비롯한 20여 명의 소년들에게 하드를 배분해준다. "더운디 고생들 하그라." 하드를 받아든 소년들은 각자의 구역으로 뛰어간다. "하드 있어요." "목구멍이 씨언하게 얼어붙을 하드 사세요." 이렇게 종일 하드 통을 메고 뛰어다녀봐야 소년들이 손에 쥘 수 있는 건 보리쌀 한 됫박 값도 안 되는 돈이었다. 그래도 모두들 열심이었다.
산비탈과 조각하늘만 보이던 마을

▲ 여순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장면 사진(출처 : , 촬영일 : 1948.11.1.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 진실화해위원회
'탕' 소리를 신호로 흩어진 군인들은 청·장년들을 마을 한 가운데로 소집했다. 모인 이들을 대상으로 이장이 손가락질을 한 결과 유귀동(1922년생)을 포함해 몇 명의 청년들이 한쪽 귀퉁이에 섰다. "폭도 새끼들 전부 끌고 가!" 인솔 군인은 간단한 명령만 남긴 채 몸을 뒤로 했다.
끌려가는 이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고, 남은 가족들도 군인들에게 사정을 하거나 매달리지 못했다. 진압군에게 항의하거나 사정하는 이들은 똑같이 폭도 취급을 받았고, 군인이 현장에서 총을 쏘아버리는 일도 일쑤였다.
유귀동 역시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에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이 없었다. 다만 봉기군이 마을에 와서 강요해 심부름을 한 죄밖에 없었다. 사실 유귀동이 사는 마을은 조각하늘과 산비탈밖에 보이지 않는 궁촌이었다. 논은 거의 없었고, 주민들 모두가 바다에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남 여천군 화양면 이목리 서이동에 살던 유귀동은 그렇게 1948년 11월 군인에 의해 끌려간 후 다시는 고향 하늘을 보지 못했다. 그는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산내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남은 가족은 마을에서 쫓겨나
스물여섯에 혼자가 된 조막진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살 길이 막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빨갱이 가족'이라고 마을에서도 쫓겨났다. 본의 아니게 여수시내로 나온 그녀는 살기 위해서 닥치는대로 일했다. 하지만 그녀 가족이 할 수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반거지 생활이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역전에서 석탄을 얻어다 팔고, 쓰레기장에서 버려진 미 원조물자를 주워다 먹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한끼 먹기도 힘들었다. 결국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유일한 생계방안이었다. 유귀동의 아내 조막진은 하숙방을 치고, 장남 유타관(1943년생)은 시내 중국요릿집에 가서 일하고, 차남 유인수(1946년생)는 하드 통을 메고 길거리를 달렸다. 물론 조막진이 하던 하숙집은 무허가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유인수 삼형제의 '가방끈'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삼형제 모두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유인수는 그나마 졸업장이 없다. 학교 다닐 때 월사금(수업료)을 납부하지 못해, 툭하면 담임선생에게 끌려가 혼쭐이 났다. 그는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이 너무 창피해 학교에 가지 않았다.
"유인수는 1980년 8월 ○○일까지 전남 여수 ○○○○부대로 입소하기 바람."
유인수는 통지문을 받아 본 순간 기절초풍했다. 소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당시 양복점을 하고 있었는데, "인수 자네는 양복점을 하니라 바쁭께 낭중에 한가할 때 훈련 받으소"라는 예비군 중대장 말에 예비군 훈련 소집에 한 번 빠졌을 뿐이다.
유인수는 동사무소로 달려갔다. 중대장에게 하소연하니, 중대장은 "글씨 그게 나는 분명 그렇게 처리했는데, 동사무소에서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신고했는갑다"라며 얼버무렸다.
유인수는 양복점 문을 닫고 정해진 날에 여수에 위치한 군부대에 입소했다. "깡패새끼들, 줄 똑바로 못 서"라며 군인들은 진압봉을 휘둘렀다. "와 그러십니까? 말로 하쇼"라고 대꾸하는 이에게 군인은 군홧발을 내질렀다. 여러 명의 군인들이 대꾸한 이에게 몰려들어 몽둥이찜질을 했다. 진압봉, 주먹, 군홧발, 곡괭이 자루 등으로 몇 시간동안 몰매를 가했다. 기절해도 소용 없었다. 기절하면 찬 물을 쏟아 붓고, 깨어나면 다시 때리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그 상황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고양이 앞의 쥐가 되었다.
예비군 한번 빠졌다는 죄로 생지옥 경험
그날부터 시작된 2주간의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생지옥이었다. 유격체조, 봉체조, 구보, 기초 장애물, 포복, 공수접지훈련이 연일 이어졌다. 특수부대에서나 받는 훈련을 일반 시민들에게 강요한 것이다.
저녁시간이라고 자유시간이 주어지진 않았다. 정신교육이라고 하면서 '반성문'을 강요했다. 그나마 편한 정신교육시간은 많지 않았다. 2주간의 교육기간 중 12시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육체훈련이었다. 말이 육체훈련이지 군대식 훈련에 구타가 전부였다.
그러면 유인수가 1980년 8월에 여수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2주 동안 받은 삼청교육은 무엇인가? 소위 '한국판 수용소군도'라 불린 삼청교육대는 불법의 대명사였다. 전두환은 1980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불법적으로 탈취한 후,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전두환은 그렇게 함으로써 군사정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 버리고, 양심적 정권이라는 가면을 쓰려했다.
1980년 8월 1일부터 1981년 1월 25일까지 6만755명의 시민들이 끌려간 이 사건에 연인원 80만 명의 군경이 투입되었다. 검거된 이들은 A, B, C, D 등급으로 나뉘었다. A등급은 전방부대에 입소해 4주간의 교육을 받았고, B, C 등급은 지역 군부대에서 2주간의 교육을 받았고, D 등급은 훈방되었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8개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상', 2007)
전두환 정권은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불량배와 비위공직자를 검거해 삼청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물론 그런 이들 중의 일부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지역할당에 의해, '자신의 죄가 뭔지도 모른 채' 끌려가, 생지옥을 경험했다. 어찌 보면 한국전쟁 직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과 유사하다.
유인수 역시 예비군교육에 한 번 빠졌다는 죄(?)로 삼청교육대라는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몸 추스릴 새도 없이

▲ 양복점에서 유일라사에서 딸과 함께 ⓒ 박만순
2주 만에 풀려 난 유인수는 몸을 추스릴 새도 없이 양복점 문을 열었다. '유일라사'가 어떤 가게인가. 그가 양복기술을 배우기 위해 '청광사양복점'에 취업한 것이 17세 때였다. 한겨울에도 새벽 6시에 출근해, 숯불을 피우고, 작업준비를 했다.
시다부터 시작해 그가 직접 바느질로 바지를 만드는 데까지 3년이 걸렸다. 시다생활 3년 동안 그는 툭하면 선배 노동자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기술을 배워 언젠가는 독립하겠다는 꿈이 없었다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차린 '유일라사'를 문 연 지 1년 만에 닫았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2주간 문을 닫았던 일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수군거림이 치명타였다. '저 놈아 알고 보니 불량배 였드라'라는 소문은 일파만파 번졌다.
가게를 정리하니 빚이 천만 원이나 되었다. 그 빚을 갚는 데 10년이 걸렸다. 빚 덩어리를 진 그는 여천공단 노가다 판에 뛰어들었다. 6년 전인 2013년까지 '아시바 기술자(비계공)'로 일했다.
유인수(74·전남 여수시 여서동)는 살아오면서 청소년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애비 없는 새X" "저놈의 XX자식" 하는 소리가 견딜 수 없었다. 여순사건으로 인해 아버지가 학살되지 않았다면 듣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그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고, 고단한 삶을 살아온 것이 여순사건과 무관한 걸까.

▲ 유인수증언자 유인수 ⓒ 박만순
6.25 때 죽은 남편 제삿날이 세 번 바뀐 이유
죄가 없어 당당했던 김태수 일가의 비극
"여가 김태수씨 댁인가라우?"
"누구신디라우."
"아, 여 집 찾니라 엄청 고생했어요."
정순례는 자기네 집을 찾아 왔다는 여성을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맞이하며 마루에 앉을 것을 권했다. "지저분하지만 편히 앉으쇼." 이 집을 찾아온 여성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속이 타는 것은 주인인 정순례였다. "근디, 우짠 일로 찾아오셨다요?" 재차 다그치자 여성이 입을 열었다. "잉, 여그 서방님이 지난 번 난리 때 돌아가셨담서요?" "예?" 주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경찰에서 보냈나? 아니 죽은 남편 뭘 알아보려고, 경찰이 이런 사람을 보냈겠어' 등등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상대방은 느긋했다. 정순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있었다.
수상한 여성의 정체
역시 답답한 건 집 주인이었다. "우리 집 남편이 6.25 때 죽은 걸 우찌 알았당가요?" "....." "답답항께, 그라지말고 속씨언하게 얘기 좀 해보쇼." 그제서야 여성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그 서방님이 대전형무소 있다가 죽었담서요. 그니까 그때가 경인(庚寅)년 5월 18일이었지라." 그 여성이 말하는 때는 양력으로 치면 1950년 7월 3일이다. 정순례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지난 번 사람은 5월 14일(양력으로 6월 29일)이라 혔는디." "어허. 내 말 못 믿으라우?"라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주인은 고분고분해지고, 거꾸로 손님은 목청을 높이며 말이 많아졌다. "여집 남편이 (여순)반란사건으로 대전형무소 있다가 객사(客死)를 했는디, 제사 날짜를 잘못 쓰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 왔는디, 영 접대가 션찮은디라." "아이고 몰라뵀구만요. 대접할 게 없는디 어째야쓰까?"라며 부엌에서 찬 물을 가져왔다. "이거라도 씨언하게 드시고 말 좀 해보쇼."
냉수를 마신 여성은 별 신통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은 날이 5월 18일이고, 그렇기에 제사를 음력 5월 17일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는 망자(亡者)가 산 날에 맞춰 지내기 때문이다. 정순례는 한편으로는 긴가민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주인은 여성 옆에 있는 보따리를 쳐다보았다. "이 보따리는 뭐라요?" 그때서야 그 여성이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참빗, 동동구루무(화장품), 거울 등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여성은 다름 아닌 방물장수였다. 그런데 이 마을에 들어서면서 공동우물에서 아낙네들하고 얘기 나누는 중에 6.25 때 김태수가 죽은 사연을 이야기 들었다. 방물장수 여인은 꾀를 써 김태수가 죽은 날짜를 거짓말로 꾸며댔다. 실은 물건을 팔아먹기 위한 술수였다.
그 사실도 모르고 정순례는 방물장수를 점쟁이라고 믿었다. 그 해부터 남편의 제사를 음력 5월 17일로 지냈다. 몇 년 후 비슷한 사건을 또 겪은 정순례는 그때도 또 속아 남편 제삿날을 바꿨다. 그런 식으로 김태수의 제삿날은 총 세 번이 바뀌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마음이 약해진 아내의 심성을 이용한 행상들의 얄팍한 상술이었다.
극심한 좌우갈등

▲ 지난 6월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 골령골 임시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9주기 제20차 대전 산내 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사진은 위령제를 마친 뒤 대전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목회자들이 표지석 제막식을 갖고 꽃은 심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여순사건 발발 며칠 후 전남 순천군 상사면 오곡리 청년들이 면소재지가 있는 흘산리 성○○ 면장 집으로 몰려갔다. "성○○, 이 자식 빨리 나와!" 미처 도피하지 못한 성○○은 몸을 사시나무 떨듯하며 방안에서 나왔다. 한 청년이 "이놈의 반동새끼 죽어봐라"하며 성○○을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결국 주검이 된 상사면 면장 성○○을 뒤로하고 오곡리 청년들은 마을로 돌아갔다.
오곡리 좌익 청년들이 우익세가 강한 면소재지로 가서 테러를 감행한 이유는 뭘까? 평소에 오곡리와 흘산리 간에 좌·우 갈등이 격심했기 때문이었다. 후일 이 사건을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전해들은 김종구(78세. 인천광역시 부평구 삼산동)는 오곡리 청년들이 상사면 면장을 해꼬지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주철희는 "여순사건 당시 상사면장은 성○○이 아니었다"라고 한다.
상사면 면장 테러사건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상사면 내 좌·우 갈등이 극심했다는 걸 보여준다.
순천이 진압된 후 오곡리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오곡리 주민들 전체가 마을 한가운데에 집결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원들이 주민들을 에워쌌다. 경찰지휘자는 주민들을 가족 단위로 심문했다. "네 남편 어디 갔어?" "...." 간부의 턱짓에 경찰과 우익단체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여성과 그녀의 가족들에게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갓난아이들은 앙앙 울어댔다.
이번에는 김태수 가족 차례였다. 가장(家長) 김태수는 도피한 상태였다. 진압군이 온다는 소식에 마을 청·장년들은 유·무죄를 막론하고 모두 도피했다. 경찰지휘자의 신문에 김태수 아내 정순례는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이 어디로 피신해 있는 줄 몰랐다. 정순례가 말이 없자, 이번에도 그녀에게 몽둥이찜질이 가해졌다.
진압군의 '빨갱이 색출작전'은 하루에 끝나지 않았다. 며칠간 지속되자 주민들의 시달림은 극에 달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김태수(당시 31세)는 경찰들 앞으로 자진해서 나아갔다. 가족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나가 뭔 죄가 있다고 도망다닌다요?" 죄가 없어 당당했던 그는 경찰들 눈에 띄자마자 밧줄에 묶여 트럭에 태워졌다. 오곡리에서는 김태수만 연행된 것이 아니었다.
박생규(당시 28세)와 오지평(당시 25세)이 끌려갔다. 김태수와 이들은 1948년 12월 13일 광주지방검찰청에서 '포고령 제2호 위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지 1년여 후에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후퇴하던 대한민국 군·경이 자행한 집단 학살이었다.
아버지 없는 삶

▲ 김종구증언자 ⓒ 박만순
아버지가 학살 당한 후 김태수 아들 김종구의 청소년 시절은 늘 우울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오이 밭을 지나가는데, "니놈들 꼼짝 마"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서리를 하지 않았는데도, 오이 밭주인이 다짜고짜 호통을 치며 쫓아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무조건 줄행랑을 쳤다. 김종구는 뜀박질을 남들보다 잘해 제일 먼저 내달렸다. 하지만 오이 밭주인의 걸음을 아이들이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잡혀 혼쭐이 났다. 그런데 이 사건이 김종구에게는 평생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왜냐하면 붙잡힌 아이들 중 김종구만 밭주인에게 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상사초등학교 다닐 때 당한 일 역시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초등학교 선생 중에는 고모할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툭하면 김종구를 때렸다. '사람 만들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사랑의 매'와는 거리가 멀었다. 뺨은 물론이고 온몸을 매로 사정없이 맞았다. 발로 지근지근 밟히기도 했다. 김종구는 할머니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학교에 가지 않았다.
김종구는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사일을 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상경해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했다. 사회활동이라고는 하지만 노점상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리어커 끌고 다니며 소금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 "소금 사세요" 신촌로터리, 망원동, 성산동 일대를 다니며 장사했다. 초겨울에는 배추, 무등 김장거리를 팔고, 봄에는 고추장, 된장 등을 팔러 다녔다. 장사 구역은 서울에 국한되지 않았다. 부천 소사와 부평으로도 다녔다. 김종구 부부는 종일 노점상에 매달렸다. 그러니 집안일과 아이 키우기는 어머니 정순례 몫이었다.
경기도 구리에서 소곱창 장사할 때는 돈벌이가 좋았다. 15년 동안 장사하며 아이들을 모두 키웠다. 이후에는 다시 노점상으로 복귀했다. 팔십을 앞둔 그는 현재도 뻥튀기 장사를 한다. 물론 요즘은 매일 하지는 않고 주말에만 트럭을 몰고 다니며 뻥튀기 장사를 한다. 하루 벌이가 2~5만 원이니 품값도 되지 않지만, '놀면 뭐하나'라는 생각에 장사 길에 나선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해 진실규명 확인 결정을 받았다. 그런데 배상소송 과정에서 서류가 누락되어 배상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진실규명 되었지만, 배상은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진심으로 고대한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시절'에 대한 보상에 대해 국가가 답해야 하지 않을까.

▲ 진실화해위원회 결정문진실화해위원회의 김태수 결정문 ⓒ 박만순

기억전쟁 저자 박만순|예당 |2018.07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영동 고자리서 단양 노동리까지
지은이 박만순은 2002년도에 창립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충북도내 마을조사, 문헌자료 수집 및 연구, 구술조사를 하고 있다. 2018년 현재 [충북역사문화연대]와 [사단법인 함께사는우리] 대표를 맡고 있다.
- 6.25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아픔을 공유하기 위해 16년 동안 발품을 팔았다. 2007년도에는 청원군 1,054개 자연마을을 돌아다녔고, 2008년도에는 영동군 401개 자연마을을 다녔다. 민간인 학살 규모가 컸다고 하는 마을을 방문해 조사와 구술증언을 청취했다. 청원군 강내면과 단양군 노동리·마조리는 10회 이상 방문했다. 충주시 살미면과 엄정면은 마을 전수조사를 통해 보도연맹사건과 부역혐의사건,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사건)을 재구성하였다.
- 박만순은 그동안 활동하면서 가해자의 증언을 발굴했다. 대표적으로는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 김만식의 공개증언을 2007년 충북도청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개최함으로써 국가폭력의 실상을 공론화했다. 김만식은 보도연맹 학살명령을 이승만대통령이 무전을 통해 지시했으며, 강원도 횡성에서 1950년 6월 28일경 춘천, 횡성지역 보도연맹원을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충북의 쉰들러라 할 수 있는 의인(義人)을 다수 발굴했다. 영동군 용화지서장 이섭진, 영동군 용산면 양조장 주인 김노헌, 청원군 강서지서장 남정식 등의 사례를 발굴해, 전쟁기 의인의 모습을 재현했다. 이런 의인들을 발굴함으로써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재인식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가치를 공유하고자 한다.
목차
1부 기억전쟁
영동 고자리서 단양 느티마을 까지
도망가란 신호였는데...남자는 결국 학살됐다
충북 보도연맹원 사건 희생자 이웅찬의 66년 전 그 날
“금단추 달린 코트 입고 피난... 그렇게 부자였는데”
조혜자의 겨울 난리 피난길 경험담
'대한민국 만세' 부르면 살려 주겠다던 국군, 하지만...
오창양곡창고 보도연맹사건
“머리 빡빡 깎인 채광산에 끌려가 총살되었지”
영동군 보도연맹원들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사연
수 백 구의 시신...바짓단으로 남편 찾은 아내
“가매장한 곳에 괭이를 심어놨어요” 충주시 살미면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열여섯 살에 형 시신 수습, 충북 모스크바’의 참상
수리너머 고개에서 큰 형의 시신을 수습한 박헌영씨 사연
월북지식인과 같은 동네...찍힌 이유였다
괴산군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사건’의 상흔
“이름만 같았을 뿐인데...”억울하게 학살당한 오월성
충북 영동군 보도연맹원 학살 실태...만삭 임신부 등 400여 명 숨져
총 8발 맞고 살아난 임산부,국가는 보상하지 않았다
쌍수리 학살사건 생존자 강영애씨의 기구한 사연
“친정엄마가 찾으러 올 테니까 따로 묻어 주세요”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 박정순씨 사연
“학살당한 동생들 시신, 낫으로 수습 했어요”
남로당 증평면 사건과 그 후
안덕벌이 과부촌이 된 사연
보도연맹사건, 두 지서장의 다른 선택
청주 강내지서장과 제천 한수지서장이 겪은 한국전쟁
영동의 의인, 가마니창고에 갇힌 50명 목숨을 구하다
충북 영동군 용산면 보도연맹원 50명 살린 김노헌씨
총살 직전 보도연맹원 40명 목숨 구한 시골 지서주임
충북 영동 용화면민들이 지서주임 공덕비 세운 사연
‘충북의 쉰들러’남정식 지서장 공덕비는 왜 세워지지 못했나
의인 행적 기록한 대동청년단 내덕동 감찰부장 장기암과 전 영동경찰서 정보보안과장 이창세
한 노병의 참회“죽기 전에 고백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전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 김만식의 트라우마 탈출기
남들 황천길 보내놓고, 자기는 술판 벌여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의 인생 역정(歷程) 1
“김일성장군” 실언해 감옥 간 신형식, 전향공작 앞장서다
충북보도연맹 간사장 신형식의 인생 역정(歷程) 2
시력 잃은 퇴직교수가 한국전 ‘민간인 학살’ 파헤치는 까닭
7살 신경득은 왜 야맹증을 앓았을까
일제와 싸웠던 의열단(義烈團)원의 유해, 60년 넘게 방치된 까닭,
의열단원 홍가륵의 삶과 죽음
책상을 손수 만들었던 아버지
땅 때문에 처남 팔 자르고 여동생 가족 몰살
충주시 엄정면 민간인학살 실태...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대한 대량 학살 빈번
매일 밤 지서 순경이 마을에 올라온 이유
한국전쟁기 충주시 엄정면에서 벌어진 ‘피의 제전’
우익단체 활동한 19세 청년은 왜 ‘북한군 대위’가 됐나
영동군 민간인 307명이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사연
장손이라는 이유로 밀고 당해
부역혐의로 처형된 제천 덕산면 전이준
황간면의 저승사자는 완전범죄에 실패했다
부역자처벌에 앞장 선 황간면 대한청년단장
“군인 피하려고 딸들을 김칫독에 숨겼어요”
8사단 군인들이 충주 살미면에서 자행한 성폭행과 가축약탈
성폭행 당한 딸, 화병에 죽은 엄마... 모녀의 ‘비극’
한국전쟁의 희생양이 된 여성들... ‘좋은 전쟁’은 없다
‘얼음장 물고문’이 군인에게는 장난이었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던 괴산 청천면 사람들의 한국전쟁
밟혀 죽고, 숨 막혀 죽고... 시신 가득했던 부역자 이송기차
부역자들이 부산행 기차와 부산형무소에서 죽은 사연
유해에 빨갱이 색깔을 덧씌운 지서장
빨갱이 소리 들으며 장례 치르고...
엄마 따라가겠다는 7살 딸 말렸는데, 마을에 폭격이
충북 영동군 제2의 노근리사건
피난민 수 백 명에 네이팜탄 폭격, 곡계굴의 비극
마지막 생존자 조봉원의 ‘단양곡계굴사건’ 증언
죽은 소 버리기 아까워 먹었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충주와 단양 주민의 겨울 난리 체험기
청주형무소가 불타던 날, 놋그릇 덕에 살았다
문철근 옹이 말하는 1950년 청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20년 동안 경찰 감시’,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닥친 일
보도연맹원 사건으로 아버지 잃고 경찰 감시당한 박태용씨 사연
80대 노인이 일주일에 한 번 국회를 찾는 이유
이세찬 충북유족회 회장의 과거사법 투쟁기
괴산 장터에서 만난 사람
충북 영동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7명이 학살된 사연
영동군 황간면 김영옥 일가의 전쟁 피해
"퇴비장에 버려진 곰팡이 난 밥으로 목숨부지"
한국전쟁 고통으로 4번 자살기도를 한 서순남
보리쌀 두 되와 맞바꾼 목숨
청주형무소가 불타던 날
분터골, 싸리고개, 어서실에 울려 퍼진 총성!!!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10년사 [상]
기억여행 10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10년사 [하]
2부 역사와 사건
History & Event
Ⅰ. 한국전쟁과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대한민국 정부 수립│국민보도연맹 결성과 운영
Ⅱ. 충북지역 사건유형별 민간인학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청주형무소 재소자 학살│군에 의한 학살│보복학살│결론
Ⅲ. 충북지역 민간인학살 현황
사건유형별 학살 현황
국민보도연맹원 학살│부역혐의 학살│청주형무소 재소자 학살│6.25이전 학살 미군에 의한 학살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보도연맹원 소집 후 풀려난 사건
Ⅲ. 피해자 명부
16년 간 2000여곳 마을 누비며 기록한 '충북 민간인학살 보고서'
이 책에는 한국전쟁기에 충북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을 사건유형별로 정리했다. 특히 보도연맹사건은 충북도내 시·군별, 학살지 별로 정리해 일목요연하게 기록했다. 2부에서는 충북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의 원인과 배경, 진행과정을 정리했다. 즉 민간인학살사건을 중심으로 충북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동안 노근리사건, 곡계굴사건, 오창창고 등 사건 중심으로 알려진 충북지역 현대사가, 시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총체적 인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청주형무소사건, 부역혐의사건, 미군사건,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사건 등을 모두 조사해 책에 수록했다.
민간인희생자 2,578명을 성별, 학살일시, 장소, 사건유형별로 정리했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만 5년간의 조사를 통해 충북지역 피해자 약 900명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했다
충북지역 현대사 정리와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사건, 형무소사건, 부역혐의사건 뿐만 아니라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사건까지 정리해, 보편적 인권에 근거한 국가폭력의 문제를 다루었다.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사건과 더불어 ‘충북의 쉰들러’를 깊게 다룸으로써 전쟁기 인간의 존엄과 의인의 참모습을 다루었다.

66화 석유 뿌려 태워죽인 것도 부족해 시신을 전시했다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의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보복학살 부르며 방식도 참혹
"정춘영이 나와." "애 아부지는 없는디유..." "어디 갔어?" "글씨 어제 나가서 안즉 안 왔는디유."충남 태안경찰서 소원지서 경찰의 물음에 정춘영의 아내 이예순이 답했다. 경찰들은 찾던 사람이 없자 논에서 일하던 정춘영의 동생 정성...
21.07.10 20:09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52899&SRS_CD=0000012242
65화" 어린 것들 죽여서 뭐하냐" 아수라장에도 사람이 있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족 충남 태안 소원면 정만호 이야기
콜록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창고 안은 캄캄했다. 그나마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서 가까이 앉은 사람을 식별할 수 있었다."엄마, 배고파요." "이것아, 이 난리 통에 배고픈 것이 대수냐!" 어린 자식에게 핀잔을 ...
21.07.03 19:32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51632&SRS_CD=0000012242
64화 처형도, 형수도 쫓아냈지만 원망하지 않은 이유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충남 태안군 박병칠 유족 박민교 이야기
뒷결박 지은 새끼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박병칠(당시 27세)은 죽을힘을 써가며 새끼줄을 푸는 데 집중했다. '여기 있다가는 개죽음을 면치 못하겠구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밤중 곡물 창고 안은 캄캄했다. 바로 옆 사람도 희미...
21.06.26 19:58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50606&SRS_CD=0000012242
63화 빨갱이로 몰려 죽은 아버지, 아들은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 서울시 교육위원 최홍이의 가족사...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아버지 최원복
1974년 최홍이는 서울 용산공업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의 마음 한켠에는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 3년 전 서울 신용산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한 이래 '기회가 되면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좋은 대학에 제자들을 많이 보내겠다'는 포부가 있...
21.06.19 11:35 ㅣ 박만순(us2248)
62화 소도 아닌데... 철사로 사람 코를 꿰어 2km 끌고 갔다
한국전쟁기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 민간인 희생사건... 매형 죽게한 처남도
1950년 10월의 어느날."강순애 나와!" 불안감에 얼굴이 벌게진 강순애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유치장에 갇혀있던 다른 여성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댔다. "빨리 안 나와!"라는 고함에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유치장 밖을 나왔다."이놈의 ...
21.06.12 19:31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50606&SRS_CD=0000012242
61화 '빨갱이'로 몰려죽은 초등학교 교사, 그 학교에 부임한 교사 아들
한국전쟁 부역혐의자 이기성과 전 예산교육장 이병학의 삶과 꿈
"계시오?" "네. 누굴 찾아오셨어요?" "자네가 이기성 선생 아들인가?" "네. 그렇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온 초로의 신사는 16세 농투산이(농투성이) 이병학의 손을 꼭 잡고 "자네가....."라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
21.06.05 11:14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7486&SRS_CD=0000012242
60화 세브란스 의사가 추석 쇠러 왔다가... 매형과 같이 끌려갔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충남 홍성군유족회 김동규·이기만
"6·25 전쟁 당시 학살돼 집단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유해가 충남 홍성에서 발굴됐습니다. 조사단과 유족은 특별법 제정 등 국가 차원의 후속 조치를 호소했습니다. 이상곤 기자의 보도입니다."TV에서 나오는 소리에 김동...
21.05.29 19:26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6890&SRS_CD=0000012242
59화 한국전쟁 발발 후 왜 독립운동가는 학살당했을까
김승일 전 조선대 음대학장의 아버지 명예회복 투쟁기
"모시모시(여보세요)" "..." "하잇(네)!" 선 채로 전화를 받는 일본인 광주경찰서장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얼음장같았다. 통화를 끝내고도 그는 멍하게 서있기만 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고등계장과 사찰계장(현...
21.05.25 17:08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4790&SRS_CD=0000012242
58화 남편과 친정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는 똥장군을 졌다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진주유족회 이야기] 아버지 정한석의 신원 바라는 정영우
1967년 논산훈련소에 입대한 정영우(1945년생)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춘천 101보충대로 갔다. 춘천 101보충대는 신병에게 주특기를 정해주었는데 정영우는 '610'을 받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100(보병)이었...
21.05.24 09:10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4301&SRS_CD=0000012242
57화 신랑은 좌익, 신부는 우익 집안... 결혼식 주례는 '우익'이 봤다
한국전쟁기 충남 홍성군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건
"우리들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사무소 토벌작전에 참가하오. 그러니 여성 동무들은 월산으로 가 있으시오." 1950년 10월. 이종섭(1933년생)이 대전에서 '여맹(여성동맹) 간부교육'을 받고 온 직후였다. 그녀는 홍성군...
21.05.22 19:47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6288&SRS_CD=0000012242
56화 태풍 지나가자 드러난 뒤엉킨 유해들... 참혹한 죽음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진주유족회 이야기] 정효갑, 정연조, 김현국
"계십니까?" "누구십니꺼?" "서에서 나왔습니다" 진주경찰서에서 나온 경찰들은 집주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방 문을 거칠게 열었다. 정대용·강정이 부부는 영문도 모른 채 방 한켠에서 벌벌 떨었다. 경찰들은 장롱과 반닫이, ...
21.05.18 19:06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3852&SRS_CD=0000012242
55화 시장에서 몰래 팔린 유골가루... 알고보니 민간인학살 피해자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진주유족회 이야기] 아버지 얼굴도 못 본 정연조
1951년 여름. 산골짝의 해거름은 일찍 찾아왔다. 경남 진주시(당시 진양군) 명석면 용산리에 사는 허진원(가명)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사람임을 알아채는 데는 시간...
21.05.17 07:27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43147&SRS_CD=0000012242
54화 쫓겨나듯 이민가고 육체노동 전전... 전쟁통 아버지의 죽음 그후
한국전쟁기 충남 홍성군 보도연맹원 학살과 유족들의 삶
"야, 종섭아 큰일 났다!" "왜요 어머니?" "난리가 났다." "예?"이종섭(1933년생)의 어머니 이묘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큰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종섭의 아버지 이강세(1909년생)가 경찰에게 붙잡혀 갔다는 것이다. 이묘희는 ...
21.05.15 11:27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5703&SRS_CD=0000012242
53화 "남편 어디 있어?" 임산부에 총구 겨눈 경찰
한국전쟁 홍성군보도연맹 학살 피해자 이강세 이야기
국회의원 선거로 초비상 정국이었던 1948년 5월 초 밤 11시. 충남 홍성군 홍성경찰서 경찰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상급자의 수신호가 있자 칼빈 총구가 문풍지를 '북'하며 찢었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닷!"방안은 쥐...
21.05.08 12:42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5057&SRS_CD=0000012242
52화 첫날밤의 불청객, 중앙정보부가 형님을 잡아갔다
38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선고 받은 민경욱 간첩사건
"이로써 신랑 민경철군과 신부 정경자양의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내·외빈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1970년 11월 19일 경기도 김포군(현 김포시) 김포공항예식장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주례가 성혼선언문을 낭...
21.05.01 20:15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2487&SRS_CD=0000012242
51화"왜 도둑 고양이처럼 몰래..." 남산 안기부로 쳐들어간 교사
평생 신원조회와 감시로 고통받은 김포유족회 회장 민경철
1967년 12월. 경기도 김포 면소재지의 '흙다방'은 지하에 있었다. 민경철은 코트에 잔뜩 묻은 눈을 털고 다방 문을 밀었다. 다방 안은 담배 연기에 너구리 굴이나 다름없었다. "경철이 형, 여기요." 김연호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
21.04.24 19:14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1805&SRS_CD=0000012242
50화 두개골이 사라진 아버지의 시신... 기나긴 여정의 시작
한국전쟁기 김포군 하동정씨 집성촌 절멸... 아들 정금모의 진실찾기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대곡리 설원마을과 김포면 감정리는 이웃해 있는 마을로, 하동정씨 집성촌이다. 13대째 살아온 이 마을들에 불행의 먹구름이 낀 때는 1950년 가을이었다.당시 김포군에는 인민군에 협조한 ...
21.04.17 19:42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1344&SRS_CD=0000012242
49화 이장을 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수복한 뒤 그들은 죽었다
김포군 양촌면 민간인학살 피해자 유족 정봉운-최용선
1950년 10월 대한민국 군·경의 수복을 앞둔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좌익 활동가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김포군 양촌면 인민위원장 김〇〇은 사회주의자로,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9년에 전향해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6.25 ...
21.04.10 11:42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0625&SRS_CD=0000012242
48화 구덩이에서 나온 신학생복과 묵주...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은 선교사
김포군 고촌공소 송해붕의 죽음... 야학 열었다 지역유지들이 모함
1952년 7월. 14세 소녀 송해숙은 천주교 선교사였던 오빠 송해붕의 시신을 찾기 위해 천등고개를 올랐다.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현재는 김포시 고촌읍)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km 가니 천등고개가 나왔다. 높지는 않은 곳이지만 ...
21.04.03 11:44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30168&SRS_CD=0000012242
47화 우익에서 좌익, 다시 우익으로... 한살 아기까지 살해했다
김포군 고촌면 천등고개의 비극... 한 집안에서 12명 죽임 당하기도
1952년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법정은 한여름 가마솥 같았다. 뜨거운 감자 같은 사건으로 재판정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피고는 당시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 치안대원과 현직 경찰로 소위 '반공애국투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재판을 받다...
21.03.27 19:55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29840&SRS_CD=0000012242
46화 100세 할머니가 또렷이 기억하는 남편이 죽은 '그날'
전남 완도군의 증언자 이남금과 황인태가 겪은 한국전쟁
"할머니, 오셨어라." "잉. 발써 와 있었구만." 방금 들어온 이에게 경로당에 앉아있던 80대 노인들이 모두 아는 체를 했다. 노인들은 의례적이지 않고 정다움이 흠뻑 묻어 있는 태도로 인사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들어온 이...
21.03.20 19:41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18902&SRS_CD=0000012242
45화 육지로 끌려가 총 맞아 죽은 완도 사람들
한국전쟁기 전주형무소의 민간인학살... 완도군 신지면민 스무명도 희생
1950년 7월. 새벽에 득달같이 일어난 김영금(1919년생)은 보따리를 챙겼다. 큼직한 보따리를 두 개나 들었는데 하나는 음식이고 다른 하나는 옷이었다. 남편 이기동(당시 30세)은 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 지난 초봄 면회한 이후 처음이니,...
21.03.06 19:13 ㅣ 박만순(us224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17771&SRS_CD=0000012242
44화 "독립운동 아버지는 총 맞아 죽고, 동생 둘은 굶어죽었지"
최동희가 겪은 한국전쟁 "피난 시절이 가장 행복"
'철썩철썩' 1950년 12월 겨울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칼바람은 열다섯 최동희의 얇은 겉옷을 뚫고 들어왔다. 소년의 이는 추위에 떨렸고 '따따닥'하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차민수(가명)는 우악스러운 손으로 최동희의 귀를 잡아 끌었다...
21.02.27 16:00 ㅣ 박만순(us2248)
43화 761명과 2000명 사이, 한국전쟁 때 완도에서 생긴 일
완도군 민간인학살 피해 현황과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과제
"흑, 엉엉."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아든 박옥심은 울음을 터뜨렸다. 6.25 때 억울하게 죽은 숙부 때문에 반백 년 넘게 '빨갱이 가족'으로 손가락질받아 온 슬픔이 왈칵 밀려왔기 때문이다.박옥심은 '가족 중에 6.25 때 억울하게 돌...
21.02.22 19:15 ㅣ 박만순(us2248)
42화 우익학살, 좌익학살, 민간인학살... 모든 학살을 겪은 섬
한국전쟁기 완도에서 일어난 서남부사건과 희생 사례
"유엔(UN)군이 완도를 쑥대밭으로 맹글어 버린다는구만." "시방 뭔 소리여?" "유엔군이 완도로 들어와서 수복작전을 펼친다는구만. 그러면 완도는 전장(戰場)터로 변해버릴 것이여."1950년 9월 말 전남 완도군 군외면 황진리...
21.02.13 11:32 ㅣ 박만순(us2248)
41화 단지 경찰 집안이라는 이유로... 일가족 6명 몰살
한국전쟁기 장흥군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사건... 북한군-지방좌익이 살해해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9월. 보안서원들과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전남 장흥군 대덕면 가학리 이국빈 집을 들이닥쳤다. 이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이국빈의 아들 이대진(1909년생)을 마을 공회당으로 끌고 갔다. "저런 쯧쯧"하며 마을 사람들...
21.02.06 16:06 ㅣ 박만순(us2248)
40화 산사람 이름 안 댄다고 입을 찢은 경찰
장흥군 관산면 방촌리 위희량·이순남 부부의 죽음
1948년 7월의 어느날. 땅거미가 질 무렵 전남 장흥군 관산면 방촌리에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마을 입구 둥구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불청객을 보고 반쯤 일어나 아는 체를 했다. "강 순경 어쩐 일이오?" 나이는 자식 뻘이지만 노인...
21.01.30 19:23 ㅣ 박만순(us2248)
39화 '산사람' 만나러 간 자수귀환대, 왜 모조리 죽었을까
손만석의 아들 손성명이 증언하는 자수귀환대, 그리고 그리운 아버지
"자네들을 '자수귀환대'로 임명한다." "짝짝짝." 지서 마당의 경찰과 의용경찰대원, 주민 30여 명은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전남 장흥군 장흥경찰서 김재일(가명) 안양지서장은 ...
21.01.23 20:20 ㅣ 박만순(us2248)
38화 3대 독자가 무슨 소용, '빨갱이 자식' 꼬리표 달렸는데...
한국전쟁 장흥군 보도연맹사건 유족 김경수... 호적도 없어 뇌물주고 만들어
1967년 어느날. 쌀 두 가마 반을 마루 위에 쌓아 놓은 김경수(당시 18세)는 날아갈 것 같았다. '드디어 나도 호적이 생긴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입이 귀에 걸렸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쓰는데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옆집 ...
21.01.16 17:39 ㅣ 박만순(us2248)
37화 하룻밤 새 경찰서에서 사라진 남편, 시체도 못 찾았다
조성섭·이면순 가족이 겪은 한국전쟁... 살생부가 된 보도연맹원
"지는 안 갈라요." "뭔 소리요?" "지는 가기 싫구만이라." "어허. 뿌리 읎는 나무가 어디 있소. 해방이 됐으니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조성섭은 아내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아휴" 한숨을 쉰 이면순(당시 32세)은 귀...
21.01.09 11:37 ㅣ 박만순(us2248)
36화"김일성을 절대 반대한다" 외치고도 물고기밥 신세
전남 장흥군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시신 수습 안 된 이가 대부분
"계룡이 아버지! 계룡이 아버지 어디 있소? 살아 있으면 대답 쫌 하시오." 1950년 7월. 전남 장흥군 득량만에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이면순(당시 37세)의 외침은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때 바다 한가운데에 희끄무...
21.01.02 11:26 ㅣ 박만순(us2248)
35화 천석꾼의 아들이었는데... 고문당해 죽고 아들은 빨치산
전남 화순군 양회인·양득승 부자의 한국전쟁 이야기
"우리 집이 동명지서 앞 파란 대문이요." "예? 무슨 말씀인지..." "큼큼. 그냥 그렇다고." 1949년. 전남경찰국 사찰과장은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섰다. 기작현(양회인의 부인)은 사찰과장의 말을 금세 잊었다. 다음 날 집안사...
20.12.26 12:13 ㅣ 박만순(us2248)
34화 멀쩡하던 치과 의사가... 한 지붕 다섯 가족의 전쟁 비극
나주경찰부대에 학살당한 김응준과 그 가족 수난사
1950년 7월 말경. "여기가 해남치과요?" "그라지라." "의료기기 판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요." "들어 오씨요." 오태장은 의료기기를 사러 온 손님을 데리고 치과로 들어갔다. "여기 왼갖 기기들이 있응께 둘러 보씨오."...
20.12.19 19:37 ㅣ 박만순(us2248)
33화 사냥꾼이 짐승 총질하듯... 길 가던 주민 죽인 나주경찰부대
해남읍 평동리 민간인학살 생존자 김경예가 말하는 '피 내음' 그날
"막둥아, 엄마 있냐?" "예." 1950년 7월 25일. 이웃집에 사는 해남경찰서 고 형사가 식전에 찾아와 김경예의 어머니 김문신을 찾았다. 무슨 얘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김...
20.12.12 19:11 ㅣ 박만순(us2248)
32화 인민군복 입고 민간인 총살한 대한민국 경찰부대
우익도 좌익도 피해 가지 못한 해남·완도 민간인 학살사건
"박상후 있는가?" "(김상규) 면장님 오셨어라우." "인민군들이 온다는데 언능 울 집으로 가서 환영대회를 우짜케 할 것인지 상의해 불드라구." "그라지라."김상규(1896년생)는 1948년 초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완도 지역 유지다....
20.12.05 19:56 ㅣ 박만순(us2248)
31화 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마산 민간인학살 유족 노상도 노현섭 형제의 고난기
'따르릉'"예, 마산유족회입니더." "지는 부산기지사령관 박정희라 캅니더." "그런데예?" "내도 유족인데,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동래유족회'가 결성되던 1960년 8월 25일 오전 마산유족회 사무실로 걸려 온 ...
20.11.30 08:40 ㅣ 박만순(us2248)
30화 1681명 수장시키려 전차상륙함 동원... 기막힌 작전
괭이바다에서 죽은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
1950년 7월 중순. 트럭 십여 대가 경남 마산시 구산면 앞바다에 멈췄다. 밧줄에 묶인 이들이 불편한 자세로 트럭 적재함에서 내렸다. 그들은 파란 색과 흰 색 옷 입었는데 파란 옷을 입은 이들은 짚으로 만든 벙거지인 용...
20.11.27 20:44 ㅣ 박만순(us2248)
29화 아들은 자수 후 1년만에 자살... 만석지기 집안의 파멸
'해남의 모스크바'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 마을 김상훈 집안의 비극
"상훈아.""누구세요?""오빠다.""우리 오빠는 다 죽었어요."낯선 남자가 대문을 열고 불쑥 들어오자, 새댁 김상훈은 무서워 부리나케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부엌에 들어가 나무 빗장을 건 그녀는 문에 뚫린 옹이로 밖을 내다봤다. ...
20.11.21 20:18 ㅣ 박만순(us2248)
28화 빨갱이 며느리를 밀쳤는데 귀한 손주가 죽었다
해남군 마산면 이병희 일가가 겪은 한국전쟁
"이 빨갱이년, 당장 나가거라!""어머니 왜 이러세요.""시끄럽다. 서방 잡아먹은 년이 웬 말이 많아.""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고정하세요." 며느리 이혜영은 시어머니에게 울먹이는 소리로 싹싹 빌었다. 하지만...
20.11.20 20:57 ㅣ 박만순(us2248)
27화 "갈매기섬에 시체가..." 아버지 시신 찾으러 간 열살 아들
국회의원 선거에서 감사장을 받은 강부천의 죽음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전남 해남군 송지지서로 향하는 강금순(당시 16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어젯밤에 본 아버지 강부천의 몰골이 생각나서였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탄탄한 체격에 과묵한 선비의 기품이 묻어나는 분이었다....
20.11.14 19:31 ㅣ 박만순(us2248)
26화' 대량살상'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남은 남자, 그가 한 일
일제 치하 해남군 독립운동가 오홍탁과 오임탁의 삶과 죽음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진에서 출항한 목선은 갈매기섬을 향해 서서히 전진했다. 승선한 이들의 가슴에는 흥분과 비탄이 뒤섞여 있었다. 14년 전 학살당한 가족의 유해를 수습하러 간다는 기대감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다...
20.11.13 21:35 ㅣ 박만순(us2248)
25화' 빨갱이'들 죽은 지 몇달 후, 갈매기섬이 춤췄다
돌 달아 바다에 수장시키고 무인도에서 총살한 해남보도연맹 학살사건
캄캄한 어란진(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수협 창고 안에서 밤을 꼬박 새운 이들은 새벽이 되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찰들이 우리를 어떻게 하려고 여기에 가두었을까?"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1.07 19:44 ㅣ 박만순(us2248)
24화 교장과 사환 월급이 같은 학교, '빨갱이'로 몰려 죽은 설립자
김해 진영의 '나눔의 철학' 교육가 강성갑... 추모 동상만 덩그러니
"조카, 느그 아버지 시신이 발견됐데이.""정말입니꺼?"큰아버지 강갑이의 연락을 받은 강성갑의 아들 강흥철은 부리나케 시신이 발견된 현장으로 내달렸다. 시신은 학살 현장인 낙동강변 수산다리에서 2km 떨어진 대산면(현...
20.11.06 18:21 ㅣ 박만순(us2248)
23화 생매장한 사람 발이 '꿈틀'하자... 전쟁통 경찰지서장의 악행
민간인학살 가해자 중 유일하게 사형 집행된 김병희 진영지서장
낙동강변 수산교 아래에는 십여 개의 달그림자가 도열해 있었다. 지휘 장교의 "앉아 쏴" 구호에 군인과 경찰 무리가 앉은 자세로 총구를 강성갑과 최갑시를 향해 겨누었다. 총구에 불이 붙으려는 순간 "마지...
20.10.31 19:00 ㅣ 박만순(us2248)
22화 고문하다 사람이 죽으면 낙동강 고기밥으로 던졌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4형제와 막내 여동생 김학봉의 이야기
경남 밀양시 삼랑지서 유치장과 인근 창고에 구금되어 있던 이들이 굴비처럼 엮여 트럭에 실렸다. 트럭에 탄 이들은 자신들이 죽음의 계곡으로 가고 있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송지리...
20.10.30 18:45 ㅣ 박만순(us2248)
21화 이근안에게 고문당해 피부가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대구유족회 조사부장 이복녕의 삶
지하실 철문이 '쾅'하고 닫히더니, '뚜벅뚜벅' 구두 발자국 소리가 났다. 형사 3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이에게 90도 절을 했다. "상무님, 오셨습니까?" 상무로 불린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172cm의 보통 키였지만 90kg이 나가는 그는 인상 자...
20.10.24 11:59 ㅣ 박만순(us2248)
20화 "4.19 때 북한 간첩이 남파"? 박정희 군부의 놀라운 '소설'
5.16 군부의 경주유족회 김하종 '빨갱이' 만들기
서울시 중구 필동에 있는 혁명재판소를 들어서는 김하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 우리의 운명이 판가름 나는구나'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1961년 11월 13일은 '경주피학살자유족회사건' 공판이 있는 날이었다. 피고석에는 ...
20.10.23 19:50 ㅣ 박만순(us2248)
19화 이승만을 최다 득표차로 누른 조봉암, 그 기적의 숨은 공로자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을 세상에 알린 강창덕의 이야기
"행님, 조심해서 올라가이소." "그려, 동생도 조심하게."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시장에 있는 2층 사무실은 계단이 가파랐다. 맨 앞에서 가는 이는 94세, 뒤따라가는 이는 88세 노인이었다. 선두의 강창덕은 아픈 무릎을 부여잡으...
20.10.17 12:24 ㅣ 박만순(us2248)
18화 지서장 아내를 구해줬는데... 경찰에 죽음당한 천하장사
한국전쟁 직후 경산 코발트광산 피학살자 배동발과 아들 배일천 이야기
"배고파서 못 살겠다!" "쌀을 달라!"1946년 10월 1일. 대구시 중앙통에 모여 있는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이만섭(1932~2015, 국회의장 역임)의 선창에 따라 일제히 구호를 외쳤다.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모두 모인...
20.10.16 18:41 ㅣ 박만순(us2248)
17화 초등학생 성폭행한 교사 혀에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진영장터만세운동의 주역 김정태가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까닭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1어온 이는 이석흠이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위원장님 오셨는교." "지서장님도 잘 지내셨지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이들은 자리에 앉았다."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라며 이석흠이 회의 시...
20.10.10 14:27 ㅣ 박만순(us2248)
16화 박정희 형수의 항변 "빨갱이는 함부로 죽여도 되는교?"
4.19 이후 민간인학살 전국유족회의 활동... 5.16 쿠데타에 감옥 신세도
"조 여사님 남편은 용공활동을 했잖은교?" 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조귀분이 "그래서요?"라고 대꾸했다. 잠시 당황한 김하종이 말을 더듬거리며 "음, 공,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우리 유족회하고는 상관없는 거 아...
20.10.09 20:27 ㅣ 박만순(us2248)
15화 1800명 넘게 죽은 죽음의 광산,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들
100km 떨어진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충북 영동군 보도연맹원들
마을에서 어르신을 만나면 먼저 인사부터 꾸벅했다. 이어서 "할아버지, 전쟁 때 여기에서 보도연맹원으로 죽은 사람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건 왜 물어?"라고 하신다. "예, 보도연맹 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 명예회복 시켜 드...
20.09.26 11:50 ㅣ 박만순(us2248)
14화 공개총살 당한 남자, 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경산 코발트광산 피학살자 손세종의 아들 손계홍의 파란만장 인생
1950년 7월 어느날, 경북 경산읍 남천면. 이곳 산정동 마을에 난리가 났다. 경찰과 이장(당시 구장)이 마을을 뛰어다니며 "집에 있는 이들은 공회당 앞 들판으로 모두 나오시오. 한명이라도 안 나오는 집은 알아서 하시오!"라고 ...
20.09.25 21:31 ㅣ 박만순(us2248)
13화 우리는 이승만 정부가 만든 '이산가족'입니다
경산 코발트광산 피학살자 나윤상의 자녀 나정태-나점순의 상봉기
"절대 집에 가지 마세요!"화장실에 가려던 나정태의 뒤통수에 날아온 말이다. KBS 대구방송국 관계자한테 수십 번 들은 소리다. 언제 가족과 연락이 될지 모르니 잠시라도 자리를 뜨지 말라는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198...
20.09.19 20:10 ㅣ 박만순(us2248)
12화' 3대독자' 남편이 총맞아 죽었을 때가 내 나이 스물둘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 이금순의 이야기
1982년 대구. "계란 사이소. 싱싱한 계란이 있어예." 이금순은 새벽부터 리어카에 계란을 잔뜩 실어 대구 시내 주택가 골목을 이 잡듯이 다니며 목청을 높였다.새벽 5시 집에서 나와 범어동에 있는 몇몇 양계장에서 계란 100...
20.09.18 12:14 ㅣ 박만순(us2248)
11화" 군인들 눈이 빨개 흉측했다" 1800명 죽어나간 '해골광산'
기자 강창덕과 최승호의 경산 코발트광산 진실규명 투쟁기
2007년 7월 8일. 날씨는 화창했다. 굴 앞에 마련된 제사상에는 갖은 음식이 놓였고, 주변에는 여러 기관에서 보낸 조화가 줄지어 있었다.이태준 경산코발트광산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의 초헌과 송기인 진실화해위원회 ...
20.09.12 20:44 ㅣ 박만순(us2248)
10화 귀신 나온다던 틈수골, 알고보니 장인 어른이 숨진 곳
한국전쟁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김삼도의 딸 김청자·이장수 부부 이야기
"틈수골에서 귀신 나온대." 1970년대 초 경북 월성군 내남면사무소(현재는 경주시 내남면으로 편입)로 근무지를 배정받은 이장수는 귀신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내남면사무소에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료들과 친해질 만...
20.09.11 08:22 ㅣ 박만순(us2248)
9화 논두렁에 버려진 딸, 서로 데려가려고 한 아들
경주유족회 최금자-김순도의 극과극 피난길... 둘 다 아버지를 불법학살로 잃어
[최금자의 피난길] 논두렁에 버려진 아이 1950년 8월. 김복례 식구의 6.25 피난길은 험난했다. 일행 여섯 명 중에 남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어 무거운 짐은 애초에 포기해야 했다. 더군다나 막내 금자는 돌이 갓 지난 상태라 걷...
20.09.05 19:41 ㅣ 박만순(us2248)
8화학살당한 경주 최부잣집 독립운동가, 배후는 전직 친일경찰
한국전쟁 전후 경주 민보단의 악행과 경주 최씨 가족의 비극
"최윤식이 나와!""누구시오?" 1949년 7월 3일 경북 경주군 내남면 이조리. 최윤식이 엉거주춤 방에서 나오는데 총과 몽둥이로 무장한 민보단원 8명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오?" "빨갱이 새끼가 왜 이리 말이 많아!" 앞에 있던 단원이 총...
20.09.04 18:43 ㅣ 박만순(us2248)
7화 여덟살 자식을 버린 엄마, 아직도 용서가 안 되는 딸
경주민간인학살 유족 최상희가 살아온 길... 스물한살에 죽은 아버지 최해옥
"엄마, 왜 여기 있어? 집에 가자.""난 너하고 사는 것보다 여기서 사는 것이 더 좋다."".....저 남자는 누군데?""내가 새로 결혼한 남자다."엄마가 갑자기 집을 나간 이후 몇 달 동안 최상희는 엄마를 찾으며 울기만 ...
20.08.30 20:58 ㅣ 박만순(us2248)
6화 내가 태어나기 110일 전, 아버지는 모심다가 끌려갔다
경주민간인학살 유족 최혜숙의 사연... 아버지 최현택의 죽음 진상 밝히는 게 소원
2017년 9월 27일. 이날도 경북 경주시 한복판에 있는 황성공원에는 운동하러 나온 시민들이 많았다. 직장 일 때문에 1년 동안 이곳에 못 나왔던 최혜숙은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에 몸을 실었다. 6.25 참전비를 지나는데 오른쪽에 ...
20.08.28 20:22 ㅣ 박만순(us2248)
5화 85세까지 똥장군을 진 할아버지의 속사정
경주 양동마을 이재구-이석환-이원길 3대를 덮친 비극
"나 이제 간다.""할아버지, 엉엉.""울지 마라. 잠시 쉬러 간다." 이재구는 장손 이원길의 손을 꼭 잡았다. "원길아..." "예, 할아버지." "누이랑 동생들하고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 "네."이재구는 숨 쉬기가 고통...
20.08.22 11:16 ㅣ 박만순(us2248)
4화 김형욱 중정부장이 사면해준 '빨갱이' 낙인, 그후 생긴 일
경주 민간인학살 유가족 이종덕-조희덕 모자... 끈질기게 따라다닌 연좌제
'살인마 이협우 잔당들아 이 땅 위에서 물러가라'1960년 11월 13일. 한국전쟁 전후 경주지역 민간인학살자 위령제가 열리는 경주시 계림국민학교 교정에는 단상이 만들어지고 모두 6개의 현수막이 걸렸다. 가운데 상단에 걸...
20.08.21 17:44 ㅣ 박만순(us2248)
3화 "5.16 쿠데타 때 빼앗긴 문서, 그것만 찾으면 됩니다"
[경주유족회 김하종의 삶, 두번째 이야기] 아직 남아있는 진실규명
김이종(당시 30세, 경북 월성군 서면 화천리)은 이유 불문으로 총살됨.정위생(44세, 서면 송선리)은 1950년 8월 9일 묘소에 참배 갔다가 사살됨.공성윤(나이 미상, 서면 화천리)은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 관계로 피살됨.이종화(...
20.08.18 08:19 ㅣ 박만순(us2248)
2화 아버지가 죽었는데... 가해자는 무죄석방, 아들은 무기징역
[경주유족회 김하종의 삶, 첫번째 이야기]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직원이 모시고 온 손님을 본 김하종은 "아이고 형님들, 오랜만입니다"라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래, 잘 지냈는가?"라고 안부 인사를 하는 이는 사촌 형님 김하정이다. "형님요, 부산서 사업하는 일은 잘 되십니...
2
1. 딸을 주지 않았다고 일가족 9명을 불태워 죽였다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과 '경주 염라대왕' 이협우 20.09.03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63862&SRS_CD=0000012242
라흐마니노프 -I. Allegro ma non tanto 14:52
'세상과 어울리기 > 근 .현대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0) | 2021.08.16 |
---|---|
100년을 이어온 친일DNA…‘적반하장 조선일보’ (0) | 2020.12.26 |
ⓒ NARA 1945.9.9 ~ (0) | 2019.08.18 |
백선엽 이야기 (0) | 2019.08.10 |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0) | 2019.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