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현상학 환상 없는 사랑을 위하여 헤르만 슈미츠 지음, 하선규 옮김 l 그린비 l 2022.04
HERMANN SCHMITZ
헤르만 슈미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현대철학과 현상학을 대표하는 독창적 사상가로 평가된다. 1955년 후기 괴테 사상에 관한 박사논문을, 1958년 헤겔을 ‘개별성의 사상가’로서 재평가한 교수자격 논문을 썼으며, 1971년부터 1993년까지 독일 킬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절대적인 기억력’을 가졌던 슈미츠는 방대한 주저 『철학의 체계』(10권)를 비롯하여, 총 58권의 저서와 165편의 학술논문 그리고 35편의 서평을 남겼다. 그의 신체현상학 연구를 계승, 확장하려는 ‘새로운 현상학 연구회’(GESELLSCHAFT F?R NEUE PH?NOMENOLOGIE)가 1993년부터 매년 심포지움을 개최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며, 2006년에는 독일 로스토크대학교 철학과에 ‘헤르만 슈미츠 재단 현상학 연구’ 교수직이 마련되었다. 슈미츠의 ‘새로운 현상학’은 1970년대부터 신체와 감정의 철학, 주관성 이론, 분위기의 미학은 물론, 철학의 경계를 넘어 의학, 심리학, 실천적 신학, 건축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산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목차
서언 5
1장 주제의 한정 17
2장 주제의 동기 25
3장 역사적 입문 37
1. 그리스인들의 두 사람 사이 성적인 사랑│2. 로마인들의 성취
4장 감정과 느낌으로서의 사랑 65
1. 감정의 공간성│2. 감정을 느끼는 일│3. 확장 공간과 방향 공간│4. 감정의 공간성이 지닌 층들│5. 집중화된 감정의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6. 사랑에서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7. 사랑과 우정│8. 사랑과 증오
5장 상황으로서의 사랑 131
1. 상황으로서 사랑이 지닌 권위│2. 인상들│3. 개인적 상황│4. 공동의 상황│5. 감정과 상황 사이의 사랑│6. 이해와 신뢰│7. 주도 인상│8. 사랑의 성숙
6장 사랑과 주관성 205
1. 주관성의 응축성│2. 사랑하기의 외로움│3. 사랑의 본래적 공동성과 비본래적 공동성│4. 안나 카레니나
7장 사랑과 신체 233
1. 사랑과 희열│2. 사랑에서 내체화
8장 사랑의 역사에 대하여 301
1. 실마리들│2. 고대│3. 중세 시대│4. 근대 이후│5. 20세기 독일 철학자들의 사랑
핵심 용어 해설 441
옮긴이 해제 450
옮긴이 후기 479
슈미츠 철학에 대한 연구 문헌 486
색인 489
출판사 서평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독일 현대철학의 거장, 혹은 이단아
헤르만 슈미츠의 ‘새로운 현상학’으로 파헤치는 ‘사랑’
사랑이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랑이 왜 그렇게 자주 실패를 맞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사랑하기’에서 얼마나 현명해질 수 있을까? 국내 처음 소개되는 독일 현대철학의 이단아이자 거목, 헤르만 슈미츠는 『사랑의 현상학』에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내어 놓는다.
사랑을 통찰하는 필수조건, 존재함의 요소들
사랑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다. 슈미츠가 보기에 ‘지혜에 대한 사랑’인 철학은 ‘사랑’ 자체에 대한 규명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시도만을 해왔다. 이는 서양철학이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내면)을 객관화/실체화시켜 놓고, 거기에다 주관적 신체를 사로잡는 분위기적인 지각 내용들을 강제로 집어넣은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의 철학은 주관적 사실 그 자체인 사랑을 성찰함에 있어 ‘관념의 하늘’에 머문 채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철학이 의지했던 ‘이성’은 객관적 사실, 즉 논리 추론, 수학적 인식, 실증적 지식에만 그 권능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사랑의 현상학』에서 슈미츠는 이른바 그의 ‘새로운 현상학’을 통해, 사랑의 근원적인 문제들로 내려간다. 여기서 근원적인 문제들은 추상적인 사상이나 신념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는 살아 있는 삶의 바탕, 즉 ‘신체’, ‘감정’, ‘상황’, ‘인상’이다. 슈미츠는 철학으로써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사유가 영혼이나 이성이 아닌 삶의 가장 낮은 지점인 신체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더 나아가 신체를 감싸는 힘인 ‘감정’, 각각의 인간을 둘러싼 ‘상황’ 그리고 타인에 대한 소통과 이해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인 ‘인상’의 의미까지 명료하면서도 유연하게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느낌과 체험을 늘 동반하고 있는 이러한 존재함의 요소들이야말로 사랑을 통찰하는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신체적인 존재이기에, 몸의 느낌으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랑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독특한 정서적 뉘앙스를 띤 상황, 인상을 감지하며, 그것을 기초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따라서 『사랑의 현상학』은 사랑에 대해 우리가 갖는 온갖 환상과 신비주의, 통념의 원흉이 되는 ‘이성’, ‘실체’ 그리고 특히 ‘영혼’(내면) 중심의 서구 전통을 단호히 거부하며, 두 사람 간의 사랑이 ‘신체’를 압박하는, 두 사람을 하나로 아우르는 상황이란 점을 그의 신체현상학적 방법론과 더불어 여러 실제 사례 및 문학작품을 통해 섬세하게 관찰하고 분석한다.
현명한 삶에 대한 철학으로 가는 힘
삶의 기본조건으로서의 사랑
사랑이라는 ‘상황’은 동물, 식물, 사물 등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에 속하는 하나의 독자적인 유형이다. 상황은 “적어도 하나의 사태가 속해 있는 절대적인 혹은 상대적인 혼돈적 다양체 상태의 전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개념을 바탕으로 ‘인상’을 “명료하지는 않지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함축적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상황”으로 정의한다. 이렇듯 ‘인상’은 의미론적으로 ‘상황’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랑을 성찰하기에 앞서 상황과 인상의 존재론적 성격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대화와 신체적 교감은 철학 전통이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대면하고, 탐색하고, 공감하는 드라마임을, 그리고 우리는 이 혼돈적 다양체로서 사랑의 양상을 언제나 헤아려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 슈미츠의 논의는 사랑의 인간학적 의미와 역동적인 구조를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게 된다.
그 돌파구의 끝에서 슈미츠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상황이 합쳐진 사랑이라는 공통의 상황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대변할 수 있는 소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소명을 지니고 있다면, 사랑의 성숙이라는 긍정적 전망과 사랑하는 이와의 ‘깊은 신뢰’라는 가능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더불어 그 어떤 회의적 해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러한 신뢰가 삶을 현재에 충만하게 뿌리내리도록 하는 고귀한 힘임을 일러 준다. 이는 곧 우리가 사랑을 경험할 때 흔히 겪는 괴로움은 물론, 사랑을 향한 냉소주의에 대비할 수 있는 안목의 백신과 다름없다.
이렇듯 삶의 기본조건으로 사랑을 규명하는 슈미츠의 『사랑의 현상학』은 사랑의 온기와 풍성함을 최대한 구제하려는 겸허한 성찰의 결과물이다. 주로 두 사람 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의 사랑론이 다른 많은 종류의 사랑, 나아가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 대해서도 훨씬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랑의 현상학』은 사랑을 통해 이룩하는 현명한 삶에 대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책속으로
여기서 문제는 단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만이 아니다. 결코 쉽게 충족되기 어려운 스스로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에 따라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렇다. 사람들이 사랑을 찾을 때 그들은 무엇을 욕구하는 것일까?--- p.19
사람들은 감정을 사적인 영혼의 상태로 간주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때때로 사적인 내적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영혼’ 대신에 다른 용어를 (예컨대 ‘의식’, ‘마음’, ‘모나드’ 등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러한 통념을 따를 때, 두 사람의 상호 간 사랑이란, 두 개의 사랑이 분리된 내적 세계 안에 있으면서 서로 적응하면서 경쟁하고 있는 상태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상호 간의 사랑이 두 사람의 ‘공통적인 무엇’이어야 함에도 말이다.--- p.23
덕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요리 솜씨에 좌우되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의미하는 바의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어떤 여인이 덕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녀에 대한 사랑을 지지하고 정박시켜야만 하는 남자가 있다면, 이 남자는 요리를 잘하니까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못지않게 뒤틀린 사랑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p.116~117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상황’으로서, 그리고 ‘감정’으로서 서로 공유하고 있다. 물론, 앞서 서술했듯이 이 소중한 보물을 지키고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매번 새롭게 마주 서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여건이 좋을 때는, 사랑과 더불어 성장한 신뢰와 그 평온함으로 인해 이 과제의 어려움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의 곁에서 늘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자 각각이 사랑함 속에서 ‘심연적으로’abgrundig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p.214~215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 속에 근거를 둔 하나의 기획, 즉 인간 스스로 신이 되는 기획을 구성하려 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로운 대자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일과 인간이 지닌 즉자적 존재로서의 안정성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의미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부조리하며 도달 불가능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길로 사랑을 제시한다. 그가 이해하는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타자인 사랑받는 자의 자유를 자신에게 복종시키고 전유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p.395~396
사랑의 빛나는 순간들은 신성하다. 자기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는 젊은 엄마의 넘쳐흐르는 행복감, 사랑하는 두 젊은이가 서로 눈을 바라볼 때의 평온한 환희, 성숙한 사랑 안에 함께 속하고 성장하는 일이 주는 깊고 평화로운 행복감(5장 8절), 그 밖에 다른 충족된 사랑의 최고의 가능성들. 이러한 빛나는 순간들은 꿰뚫어 볼 수 없는 빛나는 충만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 충만함은 그 어떤 회의적 해체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시간과 죽음보다 강하다. --- p.435~436
사랑은 왜 깨지기 쉬운가’ 현상학적 분석
독일 철학 거장 헤르만 슈미츠
철학과 문학 자유로이 넘나들며
사랑의 내적 구조와 역사 탐사
환상 없는 원숙한 사랑 안내
<사랑의 현상학>은 독일 현대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1928~2021)의 1993년 저작이다. 슈미츠는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에서는 철학의 여러 영역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쌓은 사유의 거인으로 꼽힌다. 1960년대부터 16년에 걸쳐 쓴 10권 분량의 <철학의 체계>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 대작 말고도 파르메니데스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후설과 하이데거까지 철학사를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재해석한 10여권의 저작을 냈고, 자유·논리·의식·신체·시간과 같은 철학적 주제를 해명한 저작을 다수 썼다. <사랑의 현상학>도 그런 ‘주제 연구’의 성과물 가운데 하나다.
‘사랑의 현상학’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슈미츠의 철학 방법론은 현상학이다. 현상학은 전통적 이론이나 관습적 사유의 틀을 모두 배제한 채 ‘사태 자체’로 다가가 그 사태가 현상하는 대로 포착하고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현상학 창시자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이라는 형이상학적 전통의 굴레에 갇혀 있었으며 후설 이후의 현상학도 그 굴레를 벗지 못했다고 슈미츠는 비판한다. 현상학이 사태 자체에 다가가려면 ‘의식의 차원’에서 벗어나 ‘신체의 차원’으로 내려와야 한다. 우리 인간이 의식의 존재이기 이전에 신체의 존재라는 사실에서 탐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슈미츠의 생각이다. 이 ‘신체 현상학’의 방법론을 적용해 사랑이라는 현상을 독특하고도 독창적으로 분석한 것이 이 책이다.
독일 현대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 위키미디어 코먼스
슈미츠가 여기서 다루는 ‘사랑’은 두 사람이 만나 이루는 ‘성적인 파트너 사랑’이다. 이 사랑의 내적인 구조와 역사적 변모를 살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통상의 철학서와 달리 이 책은 철학·신학 저술뿐만 아니라 <트리스탄> 같은 중세 운문소설부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근대소설까지 두루 아우르며 사랑이라는 사태를 파고들어 간다. 그리하여 이 책의 첫머리는 괴테의 소설 <친화력>의 주인공 오틸리에의 일기 한 구절로 시작한다. “사랑이 없는 삶, 사랑하는 사람의 가까움이 없는 삶이란 일종의 삼류 희극, 즉 서랍 속에 내버려진 형편없는 작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랑의 역사와 관련해 이 책이 먼저 주목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사랑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파트너 사랑’은 필리아(philia)와 에로스(eros)로 나뉘어 있었다. 슈미츠는 필리아를 ‘혼인으로 가정을 이룬 남녀의 친밀한 관계’로 이해한다. 반면에 에로스는 ‘유혹적인 자극과 열광적인 흥분이 어우러진 황홀감’의 사랑이다. 그리스인들에게 필리아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은 분리돼 있었고 자주 갈등을 빚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알케스티스>에는 두 사랑 사이의 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알케스티스는 남편 아드메토스를 대신해 저승에 가는 ‘열녀’다. 필리아와 에로스는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아모르(amor)라는 이름의 사랑으로 통합됐다. 아모르 안에 친애와 성애가 합쳐진 것인데, 이렇게 통합된 아모르는 현대적 의미의 사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하나로 합쳐졌다고는 해도 필리아적 요소와 에로스적 요소 사이의 긴장과 불화가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다.
슈미츠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사랑의 구조 안에 깃든 이런 갈등의 성격이다. 이를테면 슈미츠는 사랑을 한편으로는 ‘감정’으로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황’으로 보는데, 이 두 가지 사랑의 양상은 원천적으로 충돌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분명히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곧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기도 하다. 사랑의 감정은 내밀한 것이어서 당사자는 자주 그 감정에 매달리고 매몰된다. 동시에 사랑은 파트너들에게 공동의 상황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감정과 상황은 ‘존재 층위’가 다르다. 그리하여 감정-사랑에만 빠져들면 상황-사랑에서 벗어나 표류할 수 있고, 반대로 상황-사랑만 앞세우면 감정-사랑이 짓눌려 꺼져버릴 수 있다. 이것이 ‘사랑의 딜레마’다.
이런 딜레마적 상황은 슈미츠가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응축 영역’이란 사랑의 감정이 응집되는 대상 곧 사랑의 파트너를 말한다. ‘정박 지점’이란 사랑이 닻을 내리는 지점 곧 사랑하는 이유다. 문제는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슈미츠는 ‘먼저 죽은 파트너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례로 든다. 그 경우에 사랑의 대상은 현재의 여자이지만 그 사랑의 목표는 과거의 여자다. 응축 영역 곧 사랑의 대상과 정박 지점 곧 사랑의 이유가 분리돼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파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슈미츠가 ‘변증적 사랑’과 ‘연합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선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변증적 사랑’은 두 파트너 사이의 대결적 관계에 주목하는 사랑이고, 반대로 ‘연합적 사랑’은 두 파트너가 이루는 공통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랑이다. 프랑스에서는 사랑을 주로 변증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독일에서는 사랑을 연합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슈미츠는 지적한다. 이 책은 변증적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로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분석한 사랑을 꼽는다. “사르트르의 의미에서 사랑은 병 속에 갇힌 두 마리 문어가 벌이는 싸움과 흡사하다. 두 마리 문어는 스스로 신이 되려는 분투 속에서 상대방에게 최면을 거는 것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서로 잡아먹으려고 한다.” 변증적이기만 한 사랑 곧 도전과 응전이 반복되는 대립적 사랑은 일면적인 사랑이고 그래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슈미츠는 사랑에 관한 긴 현상학적 분석을 마친 뒤 마지막에 “사람들이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을 돕는 것”이 책을 쓴 이유라고 밝힌다. 사랑은 구조상 깨지기 쉬운 것이기에 원숙한 사랑에 이르려면 환상의 베일을 벗고 사랑의 취약성을 잘 들여다보아야 하며, 그렇게 들여다보는 데 현상학적 사유와 훈련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만남이라는 모험 저자 샤를 페팽|역자 한수민|타인의사유 |2022.04.12
미지의 타인과 낯선 무언가가 하나의 의미가 될 때
CHARLES P?PIN-1973년 프랑스의 파리 근교 생클루에서 태어나 국립정치학교와 국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으며 현재 국립고등학교와 파리정치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또한 《전향과 심리학》, 《철학 매거진》 등의 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분야에서 독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 『실패의 미덕』, 『기쁨』, 『철학 주식회사』 등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목차
들어가는 말
Part 1 만남의 징후들
- 혼란스럽다: 나의 방어벽에 균열이 생길 때
- 알아보다: 우연이 운명처럼 나타날 때
- 궁금하다: 당신의 세계를 알고 싶다는 갈망이 생길 때
- 함께 이루다: 타인이 나에게 날개를 달아줄 때
- 차이를 경험하다: 내가 당신의 타자성을 경험하게 될 때
- 변화하다: 타인이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줄 때
- 책임감을 느끼다: 타인이 나의 도덕성을 일깨울 때
- 살아있다: 타인이 내 삶을 구원할 때
Part 2 만남을 내 편으로 만드는 법
- 자기의 틀에서 빠져나올 것: 행동의 철학
- 특정한 것을 기대하지 말 것: 개방성에 대한 찬가
- 가면을 벗을 것: 취약성이 지닌 위력
Part 3 진정한 삶은 만남이다
- 인간 본질로서의 만남이란 무엇인가: 인류학적 해석
- 나는 당신을 만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존재론적 해석
-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종교적 해석
- 우리를 변하게 만드는 그 욕망들: 정신분석학적 해석
- 자신을 알기 위해 타인과 만난다는 것: 변증법적 해석
결론
참고 자료
출판사 서평
| 프랑스 전 서점 베스트셀러, 아마존 철학 1위!
만남의 의미와 위력에 대한 찬란한 인문학적 사유
코로나 시대에 들어선 이후 우리가 겪은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거리두기와 비대면 소통을 경험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온라인과 스마트폰으로 사람을 만나는 게 익숙해졌고, 때로는 그게 더 편하다고 여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약속을 잡고 직접 얼굴을 보고 함께 밥을 먹는다. 위험함을 알면서도, 사회적 눈총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만남’을 포기하지 못한 채 지난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왜 우리는 만나려 하는 걸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샤를 페팽은 『만남이라는 모험』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한다. 책은 현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만남의 의미와 위력에 대한 찬란한 인문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저자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영화감독, 소설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전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을 경유하여 플라톤에서 알랭 바디우까지 아우르는 철학적 여정이다. 또한 피카소와 엘뤼아르의 만남, 데이비드 보위와 루 리드의 만남, 볼테르와 에밀리 뒤 샤틀레의 만남과 같이 사랑이나 우정으로 맺어진 풍요로운 만남들에 관해 세심한 분석을 펼친다. 이를 통해 모든 참된 만남이란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고 그와 동시에 세상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라고 외치고 있다.
| 타자성의 경험은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만남이 나의 세계에 하는 일들
지금껏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여러 만남들을 돌이켜보자. 사랑하는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부터 강렬한 충격을 던져준 영화와의 만남까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평생 경험하게 되는 모험의 중심에 ‘만남’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이때 ‘만남’과 ‘마주침’이 다름을 강조한다. 만약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만났을 때, 어떤 충격도 흔들림도 없다면 그것은 ‘만남’이 존재하지 않고 ‘마주침’만 존재한 것이다. 진정한 만남은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분명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어떤 만남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감정의 충격과 동요를 경험하게 만든다. 또 어떤 만남은 무너진 삶에 희망을 선사하여 다시 한번 일어설 힘을 불어넣어주기도 하고, 또 어떤 만남은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는 여정에서 가이드가 되어주기도 한다. 또 어떤 만남은 사물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이제 나는 나의 시선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시선으로도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거나 뉴스를 들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것만 같다. 타자성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른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진짜 만남이 일어났을 때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8가지로 분류하고, 이 흔적들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와 예술작품을 넘나들며 심도 깊게 살핀다.
| “우리는 타인에 대한 탐험을 한 번도 마친 적이 없다” _알랭 바디우
우연과 불확실성 속에서, 만남을 내 편으로 만드는 세 가지 방법
보통 우리는 만남이 우연히 찾아온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연은 그저 출발점이다. 저자는 우연은 만남을 유도하는 역할만 할 뿐이며, 우연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태도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자기의 친한 친구를 예로 든다. 이 친구는 이혼을 한 후에 3명의 10대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고, 새로운 연애를 하고 싶어 했다. 친구가 원하는 이상형은 이미 한두 명의 자녀가 있는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으로서 더 이상 아이 갖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생각한 사람과 정반대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그가 예전에 우선적으로 피하고 싶었고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런 사람과 말이다. 만남이 찾아온 것은 우연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 친구가 자신의 생각에 갇혀 폐쇄적인 태도로 이 만남을 대했다면, 결코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경계 어린 태도로 겉핥기식 대화만 나누다가 흐지부지 그 인연이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세 가지 태도를 강조한다. 자기의 틀에서 빠져나와 일단 행동부터 할 것, 특정한 것을 기대하지 않고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할 것, 그리고 자신의 가면을 벗어서 약한 모습이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것, 결국 이 세 가지는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의심이 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질 때, 두려운데도 불구하고 불확실성과 포옹할 때, 우리는 만남을 내 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아델에게 머무는 엠마의 시선과 미소 속에 호기심의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단 아델은 엠마보다 더 어렸고, 동성애자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의 기본적인 매너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클럽에 들어선 이 낯선 존재, 그곳에 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아델의 모습이 엠마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다.
이 만남에서 주목할 점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지의 낯선 사람에게서 이상하리만큼 친근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그런 순간이 아니라, 자기와 완전히 다른 사람을 향해 다가가려는 욕망을 품는 순간이다. 비록 그 ‘다름’이 친근하게 느껴지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가깝고 편하게 느껴지는 존재들 뿐 아니라 낯설고 생소한 존재들에게도 매혹을 느낀다.--- p.47
자신이 자기 세계에서 더 이상 ‘중심’에 있지 못한다는 사실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흥분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사물을 보는 나의 습관적인 방식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기에 당황스럽고, 내가 결국 세상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기에 흥분된다. 나는 내 시선과 다른 관점을 지닌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타자성이 몰고 오는 이 괴로운 경험을 규정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타인이 나의 세계를 훔친다.” 이 경험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관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자신의 시각이 계속 바뀌는 상황이 반드시 뒤따른다. 타자성에 대한 이런 발견은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p.71
‘용해되는 사랑’은 주로 청소년기에 상대를 이상화하는 감정에서 비롯되곤 한다. 그때의 우리는 각자 독립된 두 사람으로 지내는 것보다, 즉 하루하루 지날수록 상대방이 얼마나 나와 다른지 헤아려보는 것보다, 오직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고 하나의 커플로 용해되기를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우리가 같은 것을 느끼길 바라고, 같은 욕망과 취향을 갖길 바라고, 같은 생활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어디서나 우리가 함께하기를 바라고, 심지어는 항상 같은 파장의 감정을 갖기를 바란다. 즉 우리는 사랑을 최고의 형태로 구체화하기 위해 사랑의 용해를 꿈꾸게 된다.--- p.82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훑어보게 되면, 두 사람의 만남에 비추어 카뮈의 특정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특히 『반항적인 인간』은 그들이 처음 사랑의 열정을 나누었던 연애 초기에 쓰인 작품인데, 집필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51년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 속에서 반항적인 인간은 불의를 보거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목격할 때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카뮈와 마리아 카자레스의 만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카뮈가 말했던 반항적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니요’의 인간형으로, 거절과 거부의 형상으로만 만들어졌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철학자, 그토록 귀하고 심오한 정신을 지닌 이 안내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p.102
우선 마르틴 부버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인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인 책임을 발견하기 위해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경험에 의존한다. 또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만들어내기 위해 타인들의 시선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 학자들에게서,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라고 볼 수 있는 변증법적 해석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신의 인간성이 지닌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타인을 꼭 거쳐야 한다는 필요성, 그것이 바로 그들 사유의 공통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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