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표기문자로 채택하자 국내 언론들은 너나 없이 모두 환호했다. 일본에서는 언론이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쓰는 현장까지 보도하면서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에도 우리는 한글의 위대함을 확인했다. 찌아찌아족이 고유의 민족어를 인도네시아어로 표기할 수 없었고, 로마자나 아라비아문자로도 쓸 수 없는 음을 한글로 표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식 표기 문자로 받아들인 거였다. 민족어를 지키고자 택한 '한글'이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쓰면서부터 기록을 남기는 일도 당연히 가능해졌다.
그러나 한글의 우수성을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한글 하면 떠오르는 것도 세종대왕, 훈민정음, 주시경 정도에서 그친다. 완벽한 과학적 원리를 갖춘 문자라고 알고 있다 해도 왜 그런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한글을 즐기고 사랑하는 데 앞장서야 할 행정이 워터프런트, 월드콰이어챔피언십과 같이 외국어를 남발하는 현실이다. 의령 출신 한글운동가 이극로(1893~1978)는 그런 면에서 기려야 할 인물이다. 그는 표준말 제정, 철자법 통일,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 조선어학회 활동 전반을 이끌었다. 예를 들면, '낫'으로 모두 표기했던 것을 낮(晝), 낯(面), 낱(個) 등으로 나눴다. '맨들다, 망글다, 맹글다' 등 사투리가 많았는데, '만들다'를 표준말로 정했다. '로돈, 논돈, 윤돈'으로 쓰던 것도 런던(London)으로 표기하게 했다. 이처럼 우리가 쉽게 쓰는 한글이지만, 이면에는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이극로를 비롯한 학자들의 불철주야 노력이 있었다
학계의 분주함과 달리 고향 의령군에서는 아직 '찬밥 신세'다. 한글 연구에 대한 공로를 치기 이전에 '북으로 간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여태 벗기지 못한 탓이다.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조차 의령이 아닌 서울과 부산에서 추진되고 있다. 문중은 2008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꾸려 모금 운동을 통해 힘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학계와 문중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의령군과 경남도가 재조명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루 이극로 = 남북 양쪽 언어의 이질화를 막은 뛰어난 업적이 있음에도 남쪽에서는 '잊힌 한글운동가'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 초대 간사장을 지낸 그는 해방 전후 우리말 맞춤법 제정, 표준말 사정, 철자법·외래어 표기법 정비 등을 하며 <조선말 큰 사전>을 펴내는 핵심 역할을 맡았다. 앞서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을 경제학 박사로 졸업했을 때 언어학·철학·인류학 등이 부전공이었다. 그의 한글관은 1945년 11월 <중앙신문>에 게재된 "한글이야말로 위대한 정신생활의 기초요,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조선 민족의 이기(利器)이다"라는 그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그는 1948년 북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고, 1966년 이후 언어 규범화 운동인 '문화어운동'을 이끌었다. 이 때문에 남쪽 학계에서 그는 금기가 됐었다.
그러나 2005년 최초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을 쓴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은 23일 "남쪽에서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많아 비록 북에 남았지만, 그는 한글 보존이야말로 민족 독립이라 외친 민족주의자였다"며 "오늘날 남북의 모든 문화가 이질화했지만, 한글로 아직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다. 언어의 분단을 막았다는 것이 이극로 박사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강조했다.
◇오락가락 의령군 = 이극로 기념사업이 더딘 가장 큰 이유로 의령군의 약한 의지를 들 수 있다.
국가기록원은 2008년 이극로가 조선어학회 활동을 통해 1947년 10월 9일 펴낸 <조선말 큰 사전>의 원고를 '제4호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했다. 지난해 한글날에는 의령 출신 김승곤 전 한글학회 회장이 꾸린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가 논문집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을 냈다. 고영근 서울대 명예교수, 김하수 연세대 교수, 박용규 소장 등 9명이 참여해 생애, 민족운동, 언어사상 등을 담은 책이다. 하지만 의령군은 이와 다르다. 2009년 선정한 '의령을 빛낸 인물'에도 이극로는 없다. 삼영화학그룹 이종환 회장,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등 기업인은 포함돼 있다. 군 차원에서 뽑은 항일애국지사에도 이름이 없다. 의령군 지정면 두곡마을에 있는 이극로 생가 복원도 염두에 없다.
잊힌 한글 운동가 이극로 (1) 가난했지만 넓은 세상 꿈꾸다
한글운동가 고루 이극로(李克魯·1893~1978)는 고향 의령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자란 곳의 배경은 그의 삶도 이해하게 한다. 그는 가난했지만, 더 큰 세상을 꿈꿨다.
북에 남았다는 이유로 남쪽 사람들 기억에서 잊힌 그의 삶을 어린 시절, 민족운동, 우리말운동 그리고 북에 남은 까닭 등으로 나눠 10회 안팎 살펴보려 한다. 그가 생업을 내버려두고 몰두했던 조선어학회 활동의 면면도 담고자 한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여느 학자와 달리 따로 직업 없이 학회 일에 매진했다.
앞으로 두 차례 실을 어린 시절 부분은 빈농 집안에서 자란 그가 어떻게 세상과 만나는지 엿보게 한다. 또, 1910년 봄 가출까지 감행해 입학한 마산 창신학교에서 1년여 동안의 짧은 생활 등을 담는다.
한글 학자 고루 이극로 박사 생가.
◇의령을 알면 그의 삶이 보인다 = 이극로는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태어났다. 의령은 충절의 고장이다. 임진왜란 시기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친 곽재우(郭再祐·1552~1617) 의병장을 꼭 이야기한다. 지난해 호국 의병의 날(6월 1일)은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몸바친 안희제(1885~1943),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1902~1999), 조선어학회에 가장 많은 재정을 지원한 이우식(1891~1966)의 고향도 의령이다.
이극로는 <고투 40년(苦鬪四十年)>에서 고향을 회상한다. 해방 이후 나온 <고투 40년>은 앞서 그가 썼던 글을 엮은 일종의 자서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의 임란전승 보덕비각(報德碑閣)이 있으며 건너편 함안 땅에는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1585 ~ 1664·조선 인조 때 문관)의 합강정(合江亭)이 있으니 내가 어릴 때에 동무들과 같이 뛰놀던 인상 깊은 곳이다."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은 "고향에 이런 훌륭한 인물이 많아 이극로 선생도 항일·애국 정신을 새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극로가 글을 익힌 두남재의 현재 모습. 경사재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구연 기자 sajin@
◇주경야독 = 이극로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와 의붓어머니 밑에서 컸다. 8남매 중 막내로 형 5명, 누나 2명이 있었다. 이복 여동생 2명도 있었다. 가난한 농가여서 글을 체계적으로 읽을 수 없었다. <고투 40년> 속 고백이다. "글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낮에는 소 먹이고 밭매고 나무하는 모든 일을 내 힘닿는 대로 다하게 되었다. 우리 마을의 서당은 우리 밭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밭에서 김을 매다가 점심 때에 학동들이 점심 먹으러 간 틈을 타서는 그 서당에 들어가 글씨가 쓰고 싶어서 남의 지필묵(紙筆墨)을 내어놓고 체면에 흰 종이에는 쓸 수 없고 쓰고 남은 사잇줄에 까맣게 써놓고 나온다. 그러면 아이들은 벌써 내가 다녀간 것을 안다. 이런 식으로 밤낮으로 틈을 내서 글을 몇 자씩 배우는 형편이었다."
한글학회가 지은 위인전 <한글을 사랑한 독립운동가 고루 이극로>(2009)에서 그의 어린 시절 성격을 알 수 있다. "여섯 살 계찬이는 뭘 해도 악착같았다. 저보다 네댓 살 많은 아이들과 달음박질을 해도 이기려고 기를 썼고, 싸움이 나면 얻어맞으면서도 물러서는 적이 없었다." 계찬(啓贊)은 그의 어릴 적 이름이다.
동네에서 시동(詩童)으로도 이름났다. 8살 때 일화다. 두남재(斗南齋) 서당에 갔는데, 여러 사람이 시를 짓고 있었다. 내놓은 운자는 글월 문(文)이었다. 그는 이 모습을 보고 절로 흥이 났다고 한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가 철없는 소리를 한다 했지만, 그는 "春來千山和氣 一日人人作文(봄이 찾아와 온 산에 화기가 도니, 어느 날 사람마다 글을 짓는구나)"라는 시구를 읊었다. 두남재는 경사재(敬思齋)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두곡마을 이극로 생가에서 40여m 떨어져 있다. 역시 어른만 참여하는 시연회에서 시를 읊은 곳으로 고조부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등도 있다. 생가에서 20m 정도 대나무숲 길을 올라가면 있다.
◇더 넓은 세상으로 = "소년시절 그의 꿈은 방랑객이 되는 것이었다. (중략) 세계는 넓고 크니 마음대로 돌아다녀 봤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형형색색으로 사는 인류야말로 그를 가장 유쾌하게 하는 구경거리라고 생각하였기에 늘 방랑객을 꿈꾸었던 것이다." 박용규 소장은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2005)에서 이같이 옮겼다. 이극로가 1939년 <조광(朝光)>에 실은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나 - 방랑객'에서 밝힌 대목이다. 농사일로 공부하기 어려웠지만, 배움에 대한 욕구는 강했다. 그는 <고투 40년>에서 말했다. "나는 뼈가 굵어짐에 따라 농사꾼으로서의 책임이 무거워졌다. (중략) 이리하여 나에게는 밤공부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니 틈이 없어 많은 글을 읽지 못하였지만 구한말 당시 융희(隆熙)시대(1907~1910)의 <대한매일신보>쯤은 뜯어 읽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공동으로 보는 이 <신보>를 힘써 읽었다."
신문으로 전해지는 세상 소식에 그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집을 떠난 것도 이때다. 1910년 음력 정월 보름에 한 푼 없이 서울로 가다 이틀째 둘째형에게 붙잡혔지만,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도망(?)쳤다. 목적지는 60리(약 24㎞) 떨어진 마산항이었다. /이동욱 기자 ldo32@
도움말/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문학박사·한국근대사 전공)
신학문 배우며 민족운동 씨앗 발견
잊힌 한글 운동가 이극로 (2) 마산에서 항일정신이 싹트다은단 장사·마방 죽 끓이며 창신학교서 2년 가까이 공부
이극로(1893~1978)의 스무 살 직전 '방랑'은 깨달음을 낳는다. 그가 짧게 머무른 마산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마산은 민족운동의 씨앗을 발견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마산에서 신식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때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1910년이었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 1910년 음력 4월 봇짐을 싸서 떠나 마산항에 다다랐다. 일종의 자서전인 <고투 40년>에서 이극로는 도착한 다음 날, "예수교회 경영의 창신(昌信) 사립학교를 찾아가서 땋았던 머리를 깎고 입학하였다"고 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그의 행보를 아버지와 형들은 크게 걱정했다. 머리를 다시 길러서 돌아오라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고투 40년>에서 창신학교를 떠올리는 대목이다. "이럭저럭 창신학교에서 보통과 1년 및 고등과 1년으로 2년간 수업을 받았는데, 그때 보통과의 학과는 전문학교의 성격을 지녔다. 예를 들면, 법학 통론(通論), 교제 신례(新禮), 맹자, 노자 등의 과목이 있었다. 학생들의 나이는 30세나 되는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과도기의 교육인 만큼 모든 것이 기형적으로 되었다."
<창신 100년사> 150~151쪽에 실린 이극로 관련 부분.
2년 가까이 배운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학교를 다니는 일은 치열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다. 은단갑과 영신환 약봉지 등을 팔려고 거리에 나섰고, 여관을 떠돌며 지냈다. 방학에는 고향인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마을 서당 두남재에서 학동들에게 산술, 이과, 국어(한글) 등을 아는 대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의 자식까지 그릇된 길로 가게 한다"는 마을 사람들의 꾸지람도 들었다.
한편, 이극로는 창신학교 시절 '가고파'를 쓴 시인 이은상(1903~1982)의 아버지 이승규(李承圭)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승규는 당시 마산포교회(현 문창교회)의 장로로 창신학교에서는 학생 감독이나 학사 업무 등을 맡은 학감(學監)이기도 했다. 집안 지원 없이 은단 장사와 마방(馬房)에서 말죽을 끓이며 고학생으로 사는 이극로의 모습에 상대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공부한 이은상은 아버지로부터 비교를 당하며 꾸중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1910년 당시의 창신학교(지금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87번지 자리).
◇민족 독립운동의 출발점 = 창신학교의 역사를 보면, 10대 후반의 이극로가 무엇을 얻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차민기 경남부산지역문학회 이사는 지난해 한글날(10월 9일) 나온 이극로 연구논집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에서 '고루 이극로 박사의 삶 연구'라는 글을 통해 밝혔다.
"청년 이극로가 수학한 창신학교는 당시 민족 교육의 바탕이 되었던 곳이었다. 이극로가 수학하던 1910년에는 근대 국학자이면서 독립활동가였던 자산(自山) 안확(安廓·1886~1946)이 교사로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극로 박사의 자서전 <고투 사십년> 원본 사진.
훗날 실천한 민족운동의 출발점이 창신학교였다. 아울러 창신학교는 평생을 몸바친 한글 운동과도 뗄 수 없는 관계다.
차민기 이사의 글이다. "이극로는 창신학교 재학 시절, 안확에게서 역사와 우리말을 배웠다. 안확 이외에도 이후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위원이었던 김윤경(1894~1969)과,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에 큰 힘을 보태었던 이윤재(1888 ~ 1943)가 창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들은 모두 뒷날 조선어학회의 주축이 되는 인물로서, '창신학교'를 매개로 이극로와 자연스레 인연이 맺어진 셈이다." 창신학교는 개교 100돌을 맞은 지난 2008년 이극로를 한글학자이자 독립투사로 학교가 배출한 인사 가운데 이름을 올렸다. 이는 이극로를 여태 지역 출신 항일애국지사에 포함시키지 않은 의령군과 대조된다.
◇'물불'이라는 별명 = '고루고루 잘 사는 나라를 이룬다'는 뜻의 우리말 호 '고루'로 이름났지만, 창신학교 시절 붙은 별명 '물불'도 유명하다. 학교에서 낙동강변으로 소풍을 갔었다. 이 자리에서 호주 출신 교사는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조선 청년의 용기가 부족해서"라며 "용기 있는 자는 저 강물에 뛰어들어 봐라"고 말했다. 이런 비꼼에 격분한 이극로는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물불'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따라붙었다.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은 "이 행동에서 우리는 그의 국권 회복에 대한 강렬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다시 봇짐을 싸고 = 급변하는 세상사에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국권 상실에 대한 비탄은 그를 또 한 번 움직이게 했다. <고투 40년>의 한 부분이다. "나는 여러 가지 형편으로 오랫동안 마산항에 박혀 있지 못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충동을 받은 것이니, 곧 동양 정국(政局)의 대변동이 생긴 것이다. 즉, 경술국치(庚戌國恥)와 중국의 신해(辛亥)혁명이 그것이다." 1910년 일제가 강압적으로 국권을 앗아간 경술국치와 1911년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중국 최초 민주 혁명인 신해혁명이었다. 1912년 4월 이극로는 다시 단봇짐을 쌌다.
발걸음은 멀고 먼 서간도와 만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역만리서 민족운동 싹 틔워
잊힌 한글 운동가 이극로 (3) 민족운동과 한글 연구 임무를 부여받다
이극로(1893~1978)는 고향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마을에 배달되는 <대한매일신보>를 읽고 나라 안팎의 소식을 접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경술국치 이전 발행된 항일 신문이다. 이극로는 1909년 청년 중심 비밀 결사 단체 대동청년단에 가입했다. 대동청년단은 국권 회복 운동을 벌였는데, 단원으로 윤세복(1881 ~ 1960), 안희제(1885~1943), 신채호(1880 ~ 1936), 이우식(1891~1966) 등이 있다. 안희제와 이우식 역시 의령 출신이다. 이들을 만나면서 이극로의 민족운동도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우리말 연구의 계기 = 창신학교를 나온 그는 만주로 향했다. 1912년 4월, 옛 마산역에서 서간도로 떠나던 심정은 이랬다. 해방 이후 나온 자서전 <고투사십년> 일부다. "여비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사람은 뜻을 세우고 힘쓰면 그것을 이룬다는 일종의 미신 같은 자신감을 가진 것뿐이었다."
친척이 있는 대구와 김천을 거쳐 경성(서울)에 이르렀다. 압록강에서는 강원도에서 온 이주민 몇 집과 동행하게 됐다. 이극로는 특히 이 여정에서 우리말 연구의 필요성을 느낀다.
일행이 평북 창성(昌城) 땅인 압록강 부근 한 농가에서 아침을 사 먹는데, 고추장이 없었다. 한 사람이 고추장을 달라 했으나 농가에선 '고추장'이라는 말을 몰라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설명하니 "옳소, 댕가지장 말씀이오"라는 말이 돌아왔다. 사투리로 일상에서 쓰는 말이 서로 달라 소통 못 하는 답답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훗날 그는 <고투사십년>에서 이렇게 떠올린다. "당시의 느낌이 내가 조선어 연구에 관심을 두게 된 첫 출발점이요, 또 조선어 정리와 더불어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외래어표기법 통일안 그리고 표준어 사정(査定) 및 조선어대사전(大辭典) 편찬 등의 일에 온 힘을 바치게 된 동기이다."
이극로가 만주 동창학교에서 인연을 맺고 영향을 받은 박은식(왼쪽)과 윤세복. 박은식은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맡았고 윤세복은 대종교 3세 교주가 된다.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이극로 평전>에서
◇민족운동 본격 시작 = 이극로는 만주 회인(懷仁·지금 환인桓仁)현에 도착해 조선인 여관 동창점(東昌店)에 묵게 된다. 주인 이원식(李元植)을 만나는데, 생의 전환점이었다. 이원식은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동창(東昌)학교에서 중국어 강습을 받고, 역사가이자 한학자(漢學者)인 박은식(1859~1925)을 도와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청한다.
이후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박은식이 저술 중인 6개 역사서적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동명왕실기(東明聖王實記)> 등을 등사(謄寫)하는 일도 함께했다. 같은 시기 회인현에서 독립운동가 윤세복(1881~1960)을 만나 그의 집에서 살았고, 그 영향으로 대종교를 믿기 시작했다.
동창학교는 대종교인 윤세용(1868~1941)·세복 형제가 1912년 회인에 세웠다. 학생 100여 명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의 자식이었다. 1909년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로 숭배하는 대종교가 생겼고, 동창학교는 단군을 민족사 정통으로 삼는 교과서를 만들어 역사, 국어, 한문, 지리 등을 4년 과정으로 가르쳤다. 독립운동가 양성이 핵심이었다. 때문에 일본 영사관이 중국 관헌에 압력을 넣어 설립한 지 3년 만에 졸업생 1명 배출 못 하고 문을 닫게 됐다. 동창학교서도 그는 한글 연구의 기회를 얻었다.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이 '영남 사투리꾼'이라고 놀려대 자신이 쓰는 말을 돌아봤다. 또, 주시경(1876~1914) 밑에서 한글을 공부해 조선어 연구 참고서도 많았던 백주(白舟) 김진(金振)과 함께 교원으로 일했다. 이극로는 이 시기 노학당(老學堂)서도 교사로 활동했다. 노학당은 최초 여성 의병 지도자로 이름난 윤희순(1860~1935)이 환인 읍내에서 75㎞ 떨어진 보락보진(普樂堡鎭)에 세운 동창학교 분교다.
당시 이극로의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13년 여름방학 학생들과 집안현 고구려 광개토대왕릉을 참배했다. <고투사십년>이다.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옛 영토였던 만주대륙으로 진출하여 시베리아에서 얼음을 깎던 겨울철의 칼날 바람에 살을 에이는 듯하는 고통과 또는 몽고사막의 모래에 달구어 나오는 여름철의 불꽃 같은 바람에 살을 익히는 듯 하는 고통을 맛보아 대자연의 위력과 싸우고 사는 인고 단련하여 어떠한 역경(逆境)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 이제 우리 민족은 고구려의 무강(武强)을 더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이극로는 만주서 지내는 동안 민족독립운동과 우리말 연구라는 두 가지 임무를 받았다. 고영근 서울대 명예교수는 논문 '이극로의 독립운동과 문화민족주의'(2008)에서 "흔히 고루(이극로)의 사상적 기저를 '문화민족주의'라고 규정하는데 문화민족주의는 어문민족주의와 역사민족주의를 통칭하는 것이다. 김진을 통하여는 어문민족주의의 싹을 틔웠고 박은식, 윤세복, 광개토대왕릉과 비문을 통하여서는 역사민족주의에 눈을 틔웠다"고 설명했다
백두산 아래서 잊지 못할 나날
잊힌 한글 운동가 이극로 (4) 독립군 양성에 동참하다
어느 누구도 전쟁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극로(1893~1978)의 삶도 전쟁이란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만주 동창학교와 노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이극로는 다시 발길을 옮겼다.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전보다 더 힘든 여행 = 1913년 음력 섣달, 함께 지낸 이들과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통화(通化)현 합니하(哈泥河)로 갔다. 이곳 깊숙한 산중에 자리 잡은 신흥(新興)무관학교에서 그는 독립운동가 이시영(1869~1953), 윤기섭(1881~1959) 등과 만난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이시영·회영(1867~1932) 형제 등 군인 출신 중심으로 설립한 독립군 양성 근거지였다. 일제의 눈을 피하고자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을 내걸었는데, 1919년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바꿨다. 신흥은 항일 비밀 결사단체인 신민회의 신(新)과 부흥을 뜻하는 흥(興)을 합쳐 만든 것이다.
만주의 한 훈련장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독립군. /<북으로 간 한글 운동가>에서
또, 이극로는 유하(柳河)현에서 강일수(姜一秀)라는 청년을 알게 된다. <신흥교우보(校友報)> 주간으로 서간도에서 문사(文士)로 이름난, 자신보다 어린 청년이었다.
두 사람 모두 혈기왕성한 시기라 무전 도보여행을 계획했다. 목적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서북부 발트해 연안에 있는 도시. 소비에트연방 시절 레닌그라드). 육군과 톨스토이 문학이 유명한 곳에서 이극로는 군사학, 강일수는 문학을 공부하고자 했다. 1914년 음력 정월 초사흘 여행이 시작됐다. 주머니에 겨우 소양(小洋, 중국 화폐로 작게 만든 은화의 이름) 몇 원뿐이었다. 열차에 몸을 실으려면 북쪽으로 가야 했다. 옥수수떡과 좁쌀죽 등을 먹으며 닷새 동안 장춘(長春)까지, 기차로 하얼빈까지 갔다.
이전 여행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개를 넘고 산골을 지나면서 강도를 여러 차례 만났고, 호떡 하나로 하루를 지내면서 굶주림에 정신이 아찔했단다. 하얼빈을 지나 북만주 철로변을 따라 걸었다. 훗날 이극로는 이 여정을 되새기면서 사흘을 굶다 인근 농가에서 얻어먹은 꽁꽁 언 '좁쌀떡'을 잊지 못하는 음식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차원이 다른 데는 추위도 한몫했다. 그가 쓴 <고투사십년(苦鬪四十年)>을 보면, 난로도 변소도 없는 북만(北滿) 철도를 타고 내릴 즈음에 오랫동안 참던 대·소변을 싸버렸는데, 이것이 그대로 얼어 옷에 달라붙었다는 일화도 나온다.
갖은 고생 끝에 1914년 2월 말 중국 국경 너머 시베리아 치타시(市)에 다다랐다. 강일수는 조선인 가정에서 가정교사로 수개월 일하다 만주로 돌아갔다. 농사일을 해본 이극로는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돈을 벌어 레닌그라드로 갈 참이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감자 농사를 했던 이극로에게도 전쟁의 기운이 전해졌다. <고투사십년>이다. "이 곳은 러시아 시베리아군의 주둔지로, 우리 농장 옆은 곧 연병장(練兵場)과 사격장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나던 해인지라 신병(新兵)이 맹훈련하는 소리, 대포소리, 소총소리, 군악(軍樂)소리에 귀가 아파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극동 주둔군의 출병으로 밤낮으로 수송하는 군용열차의 소리에 편히 잠잘 수도 없었다." 모든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고, 전쟁이 일어난 러시아나 유럽으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만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14년 청년 이극로의 혈기왕성한 여정.
◇백두산을 누비다 = 1914년 10월 만주 회인(懷仁)현에서 이극로는 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를 처음 만났다. 신채호와의 인연으로 독립운동도 계속됐다. 이극로는 신채호 등이 참여했던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요 자리에 있는 인물들을 도왔다. 만주로 돌아온 뒤로는 독립군을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15년 무송(撫松)현 백산(白山)학교에서 교원 생활도 했다. 윤세복(1881~1960)과 재회했고, 의병장 이진룡(1879~1918)과 김동평(金東平) 등도 알게 됐다.
백산학교를 이극로는 <고투사십년>에서 "이 곳은 봉천성에 속한 백두산 기슭 신개척지로 현을 설치한 지 오래되지 않은 지역이다. 숨어서 양병(養兵)하기 좋은 곳"이라며 "동포가 경영하는 초등과와 고등과가 있는 소학교인데 교장인 전성규(全星奎) 씨는 명망이 높은 분이다. 그는 독립군에 관계하여 3·1운동 때 간도에서 왜적에게 산 속에서 피살되어 시체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일대에는 일본군 밀정이 유기 장수나 필묵 행상으로 변장하고 다녔는데, 독립군에 의해 귀신도 모르게 죽게 됐다고 한다.
이극로는 일본군을 크게 이긴 봉오동전투(1920)를 이끈 홍범도(1868~1943)와 이진룡 등이 조직한 포수단에도 함께했다. 평생 잊지 못할 나날이었다고 한다. 훈련장이자 사냥터이기도 했던 백두산은 감흥 자체였다. 감흥을 시로도 읊었다. 다음은 일부분. '북에서 쏜살같이 불어오는/ 북빙양(北氷洋) 얼음 깎던 칼날바람/ 사람살을 깎는 듯/ 그러나 백두산이 방패 되니/ 그 안에 든 무리야/ 엄동설한인들 어떠리'.
하지만, 한 번은 마적떼의 습격으로 몸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마적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는 등 죽을 고비도 넘겼다. 이런 고된 생활을 보고 공부를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다. 방랑을 접고 수양을 하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각오로 이극로는 중국 상해로 가는 배에 올랐다.
신채호 절대독립론에 심취하다
잊힌 한글 운동가 이극로 (5) 중국 유학시절 고학·독립운동
이극로(1893~1978)는 중국 상해 동제대학에 입학하면서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젊은 날 방랑을 뒤로한 채 조국 독립과 학문 두 가지가 삶에서 크게 자리를 잡는다.
◇다시 시작된 고학 = 1916년 4월, 상해 프랑스 구역에 있던 독일인 경영의 동제(同濟)대학 예과(豫科)에 들어갔다. 입학금 2원만 주고 일단 갔지만, 개학 사흘째 학교 게시판에 경고문이 붙었다. 일주일 안에 수업료와 기숙사비 등 모두 150원을 내지 않는 이는 입학을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불안했던 이극로는 최종 마감 하루 전, 거짓 병가를 내고 빈민여관에서 묵으면서 학비를 구하려 애썼다. 궤짝 속에서 잠을 자고 굶주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신규식(1879~1922)의 도움으로 돈을 구해 사흘 만에 학교로 돌아갔다.
중국 상해 동제대학의 모습. 출처 <안호상 회고록>(1996).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
같은 반에 입학한 조선 학생은 모두 셋,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썼다. 당시 조선 학생들은 편의를 위해 중국 원적(原籍)을 가지고 겉으로 조선인 표를 내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극로 역시 그랬다. 하지만, 언어 문제로 오래 속일 수는 없었다. 동향인 이우식(1891~1966)의 학비 후원, 같은 대학 공과(工科) 4학년 조후달(趙厚達)의 타자기 또는 등사(謄寫) 일거리 제공 등이 있어 좋은 성적을 거둬 장학생으로 4년을 마쳤다. 1920년 2월 예과를 졸업했지만, 대학에는 자기 성격과 안 맞는 의과와 공과밖에 없었다. 공과를 택했지만, 망치로 벌건 쇳덩이를 치거나 화판에 자와 컴퍼스를 쓰는 일들에 소질이나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해 가을 조선에 들어와 학비 마련차 2주가량 머물렀다. 때가 3·1운동 직후라 경계가 살벌했고, 상해에서 온 신분이라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서둘러 상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잊지 못할 한이 됐다. 10년 만에 고향에서 70세의 아버지를 만나 한나절만에 헤어졌는데, 마지막이었다. 이때 이극로는 10년 동안 해외 생활을 해보자는 결심을 한다. 동제대학 자퇴 수속을 밟고, 독일 베를린으로 가려고 마음먹던 순간, 1921년 봄 이동휘(1873~1935)가 유럽행 동행을 청했다.
임정에서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는 국제공산당 3차 대회에 참석하고자 모스크바에 가는 상황이었다. 만주서부터 인연을 맺었던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가 독일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이극로를 통역 요원이자 경호원으로 적극 추천했다. 1921년 6월 상해를 떠나 일본 경관에게 가명 중국 여권을 빼앗길 위기를 넘기고, 인도양의 험한 풍랑도 거스르면서 인도 불교 수도원, 아프리카 흑인의 서당, 성경에 나오는 시내(Sinai)산, 수에즈 운하와 이집트 피라미드, 로마 유적과 교황 궁전, 알프스산맥 등을 둘러본다. 이동휘와 이극로는 러시아혁명(1917) 이후 모스크바 출입이 까다로워 늦가을 한 달 동안 베를린에 머물다 9월 모스크바로 들어간다.
◇절대독립론 외쳐 = 중국 유학 시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3·1운동을 앞두고 임정 요인(要人) 돕는 활동을 했고, 1919년 상해 유학생 총무로 독립운동 지도부와 학생 사이 연락과 협의 등을 맡았다.
단재 신채호 선생.
이극로는 3·1운동의 감격을 뒤돌아본다. 1948년 미 군정이 발행한 월간지 <민주조선>에 실린 '3·1운동 때의 감격 되시는 것 한 가지' 중 일부다. "조선 민족은 국가 독립을 아니하고는 살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민족이다. 단군 건국, 4000여 년에 처음 당한 망국 고통이라 적수공권(赤手空拳·맨손과 맨주먹)으로 만세를 불러 민족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만도 희생을 각오하고 나온 정기이다." 1915년 만들어진 상해 유학생회는 상해학생회나 상해한인학생회로 불리며 단원 55인이 개인 학업보다 임정을 후원하는 등 정치운동에 힘쓴 단체다. 특히, 이극로는 중국에서 신채호와 교류하며 역사 인식과 일제를 향한 철저한 비판 등을 배운다. 1936년 월간지 <조광(朝光)>에 나오는 '서간도시대의 단재' 가운데 일부다.
"조선역사의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하여 선생은 늘 애를 썼다. 역사 이야기만 하게 되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죄악을 통론(痛論)하였다. 천추(千秋)에 용서하지 못할 것은 고려 인종으로 하여금 원금(元金)을 멸하고, 칭제건원하면 36국이 내조(來朝)한다고 부르짖던 묘청의 난을 김부식이 대원수가 되어 토벌하고 사대주의를 주장한 일이다."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은 "이극로가 신채호의 절대독립론 등 역사 인식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위임 통치론과 같은 외세 의존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1921년 4월 신채호가 작성한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조선 위임통치 청원'을 규탄하는 성토문(聲討文)에 서명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신채호를 비롯한 54명이 서명했는데, 김원봉(1898~1958), 장건상(1882~1974), 오성륜(1900 ~ 1947) 등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 단원도 함께했다.
성토문 한 대목이다. "우리 앞길은 전국 이천만의 요구가 독립뿐이라는 피와 눈물의 외침으로, 안으로는 동포의 정성을 단합하여, 밖으로는 여러 나라의 동정을 널리 얻음에 있거늘, 이제 위임통치라는 그릇된 주장을 허용하면 다른 길을 열어 동포를 미혹케 할 뿐만 아니라, 또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외국인에게 보이어 조선 민족의 참된 뜻이 어디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독립운동의 앞길을 위하여 이승만(1875~1965)·정한경(1891~1985) 등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한글 잃으면 민족성 잃는다
잊힌 한글운동가 이극로 (7) 민족독립우리말운동에서
일제는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식 이름을 강요했다. 일본어 강습소 수천 개가 곳곳에 들어섰고, 학교서는 일본어 수업이 늘어났다. 한글학자들의 위기감은 높아졌다. 교육 현장에도 문법에 안 맞는 우리말 철자법과 일본어로 된 조선어 사전만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주시경(1876~1914)의 영향을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바뀌었다가 1949년 9월 25일 한글학회가 된다. 이극로(1893~1978)는 중국·유럽 유학을 마치고 1929년 1월 10년만에 부산항으로 돌아와 그해 4월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했다.
<신한민보> 1928년 8월 30일 1면. '국어가 민족의 생명 중요보다 지급 문제 - 강사 리극로 박사의 력셜'이라는 글이 실렸다.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
◇우리말 연구의 동기 = 이극로는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김두봉(1889~1960)에게 영향을 받았다. 1919년 상해 유학 시절 김두봉을 만났는데, 우리말 연구의 스승이었다.자서전 <고투 사십년>(1947)을 보면, 이극로는 베를린서도 김두봉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김(두봉) 씨가 창안한 한글 자모분할체(字母分割體) 활자를 만들려고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인쇄소에 함께 다니면서 교섭한 일이 있다. 독일 학자들은 국립인쇄소에 활자를 제작시키자는 논의를 부쳐 허락되었다. 곧 상해의 김두봉 씨에게 편지하자, 그 활자를 한 벌 부쳐왔다. 그것을 본떠 4호 활자를 만들었는데 첫 시험으로 동방어학부 연감에 허생전(許生傳) 몇 장을 인쇄하였다."
베를린대학서 3년 동안 조선어강좌를 맡았던 일도 있다. 이극로는 강의를 하면서도 우리말 철자법이 통일되지 않았고 사전이 없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우리말 연구 뜻을 확고하게 하는 계기였다.1927년 발간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조선의 독립투쟁>에서는 이같이 강조했다. "28개의 문자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조선의 글자는 1443년부터 1446년까지 세종대왕의 장려로 창제되었다. 14년 이상 조선에서 한글을 면밀히 연구한 가톨릭 선교사 에카르트 신부는 그의 <조선어 회화 문법>(1923년 하이델베르크)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 만일 한 민족의 문화 수준을 언어와 문자로 측정한다면, 조선은 지구상에서 최상의 문화 민족일 것이다. 한글은 수천 개에 달하는 형용사와 동사를 가진, 표현력이 풍부한 문자이며, 자연에 대한 조선인의 자세한 관찰과 풍부한 정신적 자산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언어이다."
◇"우리말 사전 만들러 갑니다" = 1928년 6월 아일랜드에서도 우리말 운동을 향한 열의를 다졌다. 이극로는 아일랜드 문부성을 찾아 국어 교육 현황을 조사했는데, 민족어 말살이 실제로 드러난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모국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썼고, 간판과 도로 표지 등 모든 것이 영어로 쓰여 있었다. 우리말과 글도 이런 신세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찾아왔다.
귀국길에 미국도 지나왔다. 이곳에서 서재필(1864~1951)·이승만(1875~1965)·장덕수(1895~1947)를 만났다. 당시 장덕수가 "이군은 장차 귀국하면 무엇을 하려는가?"라 물었고, 이극로는 "나는 '코리앤 딕셔너리(Korean dictionary, 한글사전)' 만들러 갑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1928년 8월 30일 미국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 1면에 '국어가 민족의 생명 중요보다 지급 문제 - 리극로 박사의 력셜'이 실린다. 이극로는 8월 26일 샌프란시스코 강연에서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모어가 그 민족성이 됩니다. 모어를 잃어버린 나라는 민족성을 잃게 됩니다"라고 역설했다.
실천 방향도 언급했다. "첫째, 국어사전을 편찬하자. 질서 없는 말을 가지고 과학생활을 하기가 절대 불가능하다. 둘째, 국한문 섞어 쓰지 말자. 우리말의 생명을 회복하려면 한문에게 사형선고를 하고 우리말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써야 한다. 한문은 외국어의 하나로 배우자. 셋째, 순국문으로 쓰자. 우리말로 된 외래어가 우리 본말 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 외래어도 쓰자. 넷째, 우리글을 가로로 쓰자. 오늘날 자모음을 쓰는 모든 나라 말이 가로로 쓰고 있다."
잠도 잊은 채 10년간 사전 편찬에 몰두
[잊힌 한글운동가 이극로] (8) 조선어학회에 반생을 바치다
이극로(1893~1978)는 1929년 돌아오자마자 조선어 교육의 현상을 조사했다고 한다. 자서전 <고투사십년>(1947)에서 이유를 밝혔다. "언어 문제가 곧 민족 문제의 중심이 되는 까닭에 당시 일본 통치하의 조선민족에게 이 언어가 곧 소멸되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운동의 과제는 명확했다.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査定), 외래어 표기법 제정이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된다. 편찬회가 어휘 모집에 나섰고, 조선어연구회에서 1931년 이름을 바꾼 조선어학회는 어문 통일 작업에 착수했다.
◇사전이 있으면 겨레는 없어지지 않는다 = "조선말 사전이 있는 한 조선말과 조선 겨레는 없어지지 않는다."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의 신념이었다.
우리말 사전 편찬은 민족 운동이었다. 이극로가 유럽 유학에서 봤듯이, 한 나라의 언어 규범 수립은 국가기관이 했다. 민간 학술단체가 이를 대신한 것은 식민지 시기 뼈아픈 역사다. 1929년 10월 31일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에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고 이극로는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편찬회에는 발기인 108명이 참여한다. 민족주의자이자 한글학자인 신명균(1889~1941), 이윤재(1888~1943), 최현배(1894~1970), 장지영(1887~1976) 등의 도움이 있었다.
발기인에 좌익과 우익이 모두 포함됐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의 설명이다. "김활란(1899~1970)·주요한(1900~79)·백낙준(1895~1985)·이광수(1892~1950)·이은상(1903~82) 등 타협 민족주의자로 분류되는 인사와 안희제(1885~1943)·김법린(1899~1964)·김두봉(1889~1960)·이우식(1891 ~1966)·이순탁(1897~?) 등 비타협 민족주의자로 분류되는 인사가 있었다. 사회주의적 성향 인사로 정칠성(1897~1958)·허헌(1885~1951)·홍기문(1903~92) 등과 신간회 중심 인물로 활동하던 안재홍(1891~1965)과 홍명희(1888~1968) 등도 참여했다."편찬회에는 좌우 인사가 두루 참여했다는 점에서 사전 편찬은 민족 공동의 과제였다. 박 소장은 "한글운동은 합법 공간에서 전개된 민족협동전선 운동이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조선어학회 시절 이극로 가족 사진. 가운데 김공순 여사와 이극로 박사. 이극로 박사 앞에 양복을 입은 이가 큰아들 이억세, 그 옆에는 둘째아들 이대세. 부부 사이 머리를 깎은 학생은 집안 손자뻘 되는 이종무.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이승철 씨
◇조선어학회에 반생을 바치다 = 이극로가 사전 편찬에 열성을 다했음은 부인 김공순(1907~?)의 얘기로도 알 수 있다. 1929년 12월 이극로와 결혼한 김공순은 안중근(1879~1910)에게 권총을 넘겨준 김창걸의 막내딸이다. 1940년 잡지 <여성>에 실린 김공순의 글이다. "그는 사전을 시작한 지 십여 년간 밥도 옷도 잠도 다 잊었습니다. 하루에 한 끼도 잡수고 두 끼도 잡수는 때가 많고 아침을 점심으로 점심을 저녁으로 그저 사전, 사전 하면서 다니시며 또한 연구하는 것을 볼 때 그의 건강이 근심됩니다."
사전 편찬회 조직 이후 관심이 높아졌다. 편찬회 발기인이자 조선어연구회 회원인 이상춘이 1929년 11월 초순 10년간 수집한 9만여 어휘를 편찬회에 제공했다. 그러나 1933년 6월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재정 문제에 부딪혔고, 맞춤법 통일과 표준어 사정 등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었다.
1936년 이우식이 거금 1만여 원을 기부하고 사전 편찬 비밀 후원회 등이 꾸려지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사전 편찬을 지휘하고 회원들 학문적 견해를 조율하는 역할이었다. 1936년 3월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회가 추진해온 업무를 넘겨받았다. 표준어 사정 작업이 마무리 단계였기 때문이다.
사전 편찬은 겨레가 힘을 모아 진행됐다. 이광수(문학), 채동선(음악), 고희동(미술), 이덕봉(식물), 정인섭(외래어), 이순탁(경제), 백남훈(사회과학) 등 분야별로 학자들이 용어 주해를 맡았다. 아울러 사투리 수집에는 중등학생과 소학 교원 5000여 명이 함께했다고 한다.
일제가 일본어로 해설해 간행한 <조선어사전>(1920)보다 3배가 많은 16만 우리말 어휘를 수집하고 주해했다는 점은 민족어 사전 편찬의 가치를 말해준다.
일제가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탄압하면서 사전 편찬은 중단됐다. 해방 이후 일제가 압수한 사전 원고가 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됐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말 큰사전>이 1947년 1권이 나왔다. 편찬을 시작한 지 28년 지난 1957년 총 6권 3558쪽으로 완성됐다.
'맞춤법 통일' 민족 말 하나로 모아
[잊힌 한글운동가 이극로] (9) 한글운동 민족 분열을 막았다
"3년 동안 백 수십 차례의 토의로 조선어 철자법통일안을 내고 2년간의 토의로 조선어 표준어집을 내었으며 10년간의 연구토의로 외래어표기법의 통일안을 내놓았다."
이극로(1893~1978)가 몸담았던 조선어학회의 업적을 요약하면 이렇다. 자서전 <고투사십년>(1947)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말 맞춤법 통일안은 1930년 12월~1933년 10월 3년 동안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맞춤법 제정 위원 사이 격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 때마다 이극로는 '민족을 위해'라는 말로 이들을 설득하고 충돌을 막았다고 한다.
◇한글 운동은 민족을 위한 길 = 당시는 맞춤법이 제각각이었다. 훈민정음 출현 이후 한문 권력 아래 한글이 제대로 쓰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1881~1910년 신·구약 성서를 번역한 것,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심사해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쓴 것, 주시경(1876~1914)의 학설을 이어받은 주시경파의 것 등 크게 3가지 맞춤법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 때문으로도 풀이된다.
이극로 박사가 1925년1월 5일 독일 베르린대학 재학 시절 탄광 견학 도중 찍은 사진. /고루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 추진 준비위원회(이승철 경남대 교수)
민족 분열을 막았다는 점에서도 맞춤법 통일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더욱이 일제는 1938년부터 일어 상용(常用)을 강제했다. 이극로는 맞춤법 통일안 완성 즈음 한글이 널리 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3년 10월 <조선일보>에서 "먼저 신문 혹은 잡지기자 학교 교원 같은 직접 문필에 종업하고 교육의 중임에 있는 이들을 모아 간단한 강습회를 개최하고 또는 다른 일반 성의있는 이들을 모아서 특별한 강습을 시켜서 일반 민중에게 널리 사용되도록 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이극로가 함흥형무소에서 시골집에 있는 조카 정세에게 보낸 엽서. 날짜는 1944년 11월 26일로 "지금부터 통신이 허가되었습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댁내의 무사를 기원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검열 완료'라는 도장도 찍혀 있다.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이승철 씨
그는 이희승(1896~1989)·정인승(1897~1986)과 함께 맞춤법 통일안 가운데 문제점을 바로잡았고 1940년 6월 개정안이 공포됐다. 이는 해방 이후 남북에서 교과서 기술 등에 그대로 적용됐다. 표준어 사정도 마찬가지다. 당시 사투리가 넘쳐나 한 가지 사물에 말은 수십 개였다. 민족이 갈라짐을 막고 현대 문명에 맞춰 가려는 뜻이 있었다. 1934~1936년 표준어 사정 작업이 있었다. 1936년 11월 <조선일보>를 보면 표준어 사정에 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현대 문명은 모든 것이 다 표준화한다. 철도 궤도의 폭은 세계적으로 공통화하였으며, 작은 쇠못부터 큰 기계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나 대소의 호수(號數)가 있어 국제적으로 공통된 표준이 없는 것이 없다."
맞춤법 통일안의 연장선에 있던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완성은 1940년 이뤄진다.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1935년 <한글> 25호 이극로가 밝힌 내용이다. "외래어가 우리말에 들어오는 때에는 우리화를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어느 민족의 말에나 외래어를 자기화(自己化)하는 것이 원칙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 서울을 영국사람은 '세울'이라 하고, 독일사람은 '쇠울'이라 한다. 그러니 어느 것이 자기화 아닌 것이 없다."
◇함흥형무소에서 = 일제 민족 말살 정책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다.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학회 학자 모두 33명이 검거됐다. 한글 연구로 민족의식을 높였다는 죄목으로 혹독한 고문이 따랐다. 이극로는 죄질이 가장 무겁다며 6년 선고를 받았는데,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옥살이를 한 함흥형무소에서 지은 한시를 보면 사전 편찬 등 한글 운동에 관한 성찰이 눈에 띈다.
'본디 닥치는 대로 사는 이가/ 어찌 감옥살인들 피할 사람인가/ 몇 번이나 죽을 뻔하였는데/ 하느님이 도와서 살아난 사람이다/ 나와 같이 복을 받은 사람도/ 어찌 이 세상사람에 그리 많겠는가 (……) 어려움을 참고 사전을 만듦은/ 선비의 도리에 의무를 다함이다/ 이런 일이 또한 죄가 되어/ 마침내 진시황의 솜씨를 만났다/ 가슴을 치며 울고 싶으나/ 어찌 하느냐, 이것도 자유가 없다/ 깊은 밤 감옥 방 안에서/ 홀로 누워 눈물만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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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 박사가 1925년1월 5일 독일 베르린대학 재학 시절 탄광 견학 도중 찍은 사진. /고루 이극로 박사 기념사업 추진 준비위원회(이승철 경남대 교수)
이극로(李克魯·1893~1978)
국어학자·정치인. 본관 전의(全義). 경남 의령 출생. 호는 고루.
1912년 마산창신학교 졸업.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 졸업.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집행위원·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등 역임.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 함흥형무소 복역. 1945년 광복으로 출소, 조선어학회 회장·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회장·건민회 위원장으로 활동.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조국평화통일위 위원장 역임. 북한 문화어운동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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