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장과 남문시장 앞 자성고가도로.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범일고가, 좌천 고가로 불리기도 했다. 통털어 오버브릿지란 영명이 쓰이기도 했다. 철거가 결정나고 오가면서 철거과정을 보다가 짬을 내어 현장을 담아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 고가 차도를 자동차가 아닌 걸어서 통과했던 기억은 몇 번 있다. 일상이 아닌 주로 시국관련 집회의 연장선에서 였다. 불의한 것 부정의에 대한 시민 함성이 고가도로에서 울려 퍼졌고, 다양한 주장들이 메아리쳤다. 찾아보니 가장 최근의 시위행열은 지난 2018년 2월 부산역서 집회를 마친 태극기 부대가 이용했음이다. 좀 그렇다.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이지만 무엇을 주장하였으며무슨 집회였는가에 따라 의미부여는 달라 진다. 그렇다 이 고가도로는 부산민주주의의 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항쟁이 한창이던 때 고가의 시작점이기도 한 좌천동에서 한 주검이 있었다. 고 이태춘 열사가 최루탄에 맞고난 다음 고가 난간 아래로 떨어져 사경을 헤메다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89년 열사의 집을 찾아 관련 르뽀를 써기도 했었다. 아래 장면은 뉴스타파의 '6월 숨은 그림 찾기(2017.6.22)의 일부다.
동아대 승학캠프스 입구 서쪽 옹벽에 그려진 대동세상 벽화 중 6월 항쟁도에 이태춘 열사가 중심에 있다. 지금은 담쟁이 덩굴로 덮여 있다. 이 벽화는 이학교 출신의 화가 박경효와 그림패가 공동작업한 것이다.
1987년 6월18일 이날은 연세대 이한열열사의 최루탄 죽음에 항의하여 ‘최루탄 추방의 날’이기도 했다. 당시 27살 청년 이태춘은 동아대를 졸업하고 태광고무에서 일하고 있었다. 직격탄과 페퍼포크가 비오듯 쏟아지고 날아오는 가운데 그가 당했던 것이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엿세만인 6월24일 숨졌고, 그의 장례식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장으로 열였고 당시 상임위원장 이었던 고노무현 대통령이 영정을 들었다.
1997년 경찰 주장에 대한 추락사가 아닌 국가와 폭력에 의한 사망임을 주장하기 위해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 등이 국가상대손배소송이 있었다. 재판부는 국가 과실을 인정했으나 소멸시효 만료로 소송은 기각됐다. 이후 2005년 이태춘열사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자성고가교 철거는 2015년 시설노후화로 철거가 결정되었지만 예산반영이 여의치 못하다 민선7기 오거돈 시장 당선이후 'OK1번가' 정책민원을 통해 탄력을 받았다. 자성고가교 철거 민원은 300건의 민원 중 시민 공감수 7796 건으로 두 번째로 많은 공감을 받았다.
사진 부산일보 강선배기자 외
2009.3 네이브
부산에는 2012년 말 기준으로 24개소의 고가 도로가 있으며, 연장은 2만 7747.2m에 면적은 65만 6011.3㎡이다. 1969년에 설치된 자성 고가교가 부산의 최장수 고가교이며, 1980년에는 제1 도시 고속 도로인 번영로가 건설되며 구서 고가교, 동천 고가교, 회동 고가교, 수영 고가교, 문현 고가교, 원동 고가교가 설치되었다. 1990년에는 충장 대로에서 대영로로 연결되는 도로가 개설되며 부산역을 고가 도로로 통과하는 영주 고가교가 설치되었다.
1990년대에는 대연 고가교, 대영 고가교, 부암 고가교, 충장 고가교, 동서 고가교, 장산 고가교, 우암 고가교, 반여 고가교, 모라 고가교 등이 설치되었다. 동서 고가교는 부산광역시에서 가장 긴 고가 도로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석대 고가교, 우동 고가교, 좌천 고가교, 가야 고가교, 감만 고가교, 우암 고가 접속[상·하행선]이 설치되었다. 부산의 고가 도로 대부분은 번영로나 동서 도시 고속 도로, 수영 강변 도로와 같은 주 간선 도로의 건설과 주요 간선 도로를 연결하는 접속 도로로 건설되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정달식의 문화 톺아보기] 41. 자성고가교 자성(自省)
공존의 시대, 언제까지 '흔적 지우기'만 봐야 하나
더 고민할 순 없었을까? 1969년에 설치된 부산의 최장수 구름다리, 동구 범일동 자성고가교의 해체 결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50년 가까이, 도시를 지켜온 고가교였다. 한데 안타깝게도 오는 12월이면 철거된다.
남선창고, 삼성·보림 극장…
추억 쌓인 공간 없애 '삭막'
부산 최장수 고가 12월 철거
활용 방안 사색 없어 아쉬워
뉴욕 '하이라인'·서울 '7017'
지속 가능한 도시 자산 변모
부산도 개발 일변도 벗어나길
지금까진 도시 구조물이나 공공시설물은 그 수명이 다하면 해체되곤 했다. 대부분 기능이나 효용성의 관점에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의 한 구조물을,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없애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 언제까지 이런 접근에만 머물러 있을 것인가? 도시의 구조물이나 공공시설물을 이렇게 단견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이젠 벗어날 때가 됐다.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는 도시 구조물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더 가치 있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다시 고민할 수 있다면, 자성고가교도 그 활용 방안을 더 고민해야 한다. 하이라인 파크는 10년을 계획하고 고민했다.
자성고가교 주변엔 부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수많은 콘텐츠가 있다. 직선거리 500m 내외에 부산 최고의 전통시장, 좌천 가구거리, 자성대 공원, 조선통신사 역사관, 매축지 마을, 정공단이 있다. 산복도로, 동천까지 연계시킨 큰 그림을 그린다면, 자성고가교가 도시재생의 촉매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얼마든지 부산의 미래 자산으로 키워나갈 수 있음이다.
현재의 자성고가교만을 생각하면 답이 안 보일 수도 있다. 더 확장하거나 육교와의 연결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도 있다. 자성고가교는 길이와 폭이 각기 다른 3개의 다리로 구성돼 있다. 이에 부산진시장과 연결되는 고가교는 진시장 앞 육교까지, 조선통신사 역사관과 연결되는 고가교는 범일교차로까지 확장할 수도 있다. 좌천 삼거리를 향하는 고가교도 매축지 마을이나 좌천동 가구거리(도시철도 좌천역)까지 이어주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고가도로 전체를 입체적인 사람의 길로 만들자는 것이다. 동구는 문화의 보고가 아니던가? 자성대 공원, 부산시민회관, 평화시장, 자유시장이 멀지 않을 터이다. 단순히 보행길을 만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공간성, 역사성을 불어 넣어 쇠퇴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길이다.
아직은 조금 설익었지만. 서울은 '서울로 7017'(서울역 고가를 보행로)을 통해 또 하나의 지속가능한 도시 자산을 만들어 가고 있다. 외국으로 눈을 돌리면, 프랑스 파리 산책로 프롬나드 플랑테 고가도로 보행공원, 철로를 재활용한 일본 요코하마 개항의 길,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가 있다. 사람 중심의 보행길이 만들어 낸 도시재생의 대표적 사례다.
하이라인 파크가 생기면서 유명 건축가들의 빌딩과 미술관이 들어서는 등 주변 경제가 살아나고 각종 문화시설의 유입이 이뤄졌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울로 7017'이나 외국처럼 따라 하자는 게 아니다. 이보다 더 나은 고민과 생각을 끌어내자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생각들이 나와 도시의 생명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게 바로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늦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이런 논의의 장(場)이나 아이디어 콘서트를 펼쳐보자.
도시의 구조물이나 건축물은 한 번 철거해 버리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이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주택 재개발은 젖혀두고라도, 그동안 남선창고가 그랬고 삼일, 삼성, 보림 극장이 우리 앞에서 사라졌다. '영화도시 부산'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복천동 박물관 주변 대규모 주택 재개발 사업이 말해주듯, 일찌감치 부산의 자존심마저도 내팽개쳤다.
이젠 추억을 소환하고 싶어도 쉬 하기 힘든 도시가 바로 부산이 되어 가고 있다. 부산은 더 이상 '흔적을 지우는 도시'가 되지 않아야 한다. 다양한 아이디어도 안 내보고, 깊은 고민도 없이, 없애는 것은 적절치 않다. 언제까지 이런 방식을 도시 문제 해결의 해법인 양 여길 것인가?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도 있다. 이제부터 부산이란 도시의 가치를 제대로 찾아내고 바라보고 디자인할 때가 됐다. 영국의 사상가이자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는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보고 깨닫고 행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우리는, 부산은 그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조건적 철거나 개발의 미망에서 벗어나 관계와 공존을 통해 부산을 만들어나가자. 이건 '시민의 힘'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도 처음엔 철로 인근 시민들의 철거 요구가 높았다. 철거까지 결정했다. 하지만, 혜성처럼 나타난 '하이라인의 친구들'이라는 비영리단체와 시민들이 뉴욕 시장을 끈질기게 설득해 오늘의 하이라인 파크를 만들어 냈다. "철거 뒤엔 후회해도 소용없다." 부산일보 dosol@busan.com/18.10.31
이전에 자성교에서 좌우 풍경을 살필때가 있었다. 북항재개발 철도부지 지하화 시민운동 을 벌일 때 였다. 2004년이나 2005년 쯤인듯하다. 철길이 지나는 동서로 들어선 건물들을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유감스럽게도 예상한대로 경관이 형성되고 있다.
보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영가대(永嘉臺)터 였다. 보아하니 관리가 엉망이다. 지난 2003년 자성대 한켠에 복원했지만 개운하지 않다. 원래 영가대는 1614년 광해군때 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성 근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었다. 이때 바다에서 퍼 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여기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다.
1617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던 오윤겸(吳允謙)이 이 정자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다음부터 해신제를 지내고 일본으로 갔다. 영가대란 이름은 1624년 (인조 2) 선위사 이민구(李敏求)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따서 ‘영가대’라고 이름지었다.
통신사의 일본행은 1811년 순조 때까지 모두 9차례 이루어졌고 , 8개월여가 걸리는 힘든 일정이었다. 영가대는 안전항해와 무사귀환을 위해 해신제를 올리는 장소로 자리매김되었다. 또한 인공언덕이지만 주변과 어울린 경치가 뛰어나 시인 묵객(墨客)은 물론 이곳을 거쳐간 통신사행들이 많은 시를 남겼다.
高臺蕭瑟出雲端 높은 대가 소슬하게 구름 끝에 솟았는데
陂水千尋石色磻 언덕 밑 천길 물에는 돌그림자 서려 있네
柯艦穩如藏大壑 배들이 평온히 큰 구렁에 숨겨져 있는 듯
海中終日自波瀾 바다 가운데에는 온종일 물결이 치는구나. (1643년 신유 「영가대」)
사로승구도(1748 이성린)-부산진성과 영가대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중 한 장면으로 이성린이 그린 ‘부산’으로 영가대를 전면에 배치하고 부산진성 주변을 그렸다. 사로승구도는 1748년(영조24), 조선의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부터 일본의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東京)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그림이다. 총 30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병풍처럼 들어선 배경의 산은 황령산이다.
그런 영가대였지만 1905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일부 절개된데 이어 1915년 동래선 전차퀘도가 영가대 옛터와 경부철도를 횡단하여 부설되었다. 이후 1936년 부산진에서 삼랑진 간 복선공사 평탄화 과정에서 언덕이 완전히 헐리웠다고 한다.
언덕에 서 있던 정자 2동 중 한동은 1917년 수정초등학교 동편 좌천동 언덕으로 이축되었다 오이케 다다스케(大池忠助)의 별장인 능풍장으로 옮겨졌다가 광복 이후 혼란기와 도시화 과정에서 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터를 기억하기 위해 표석을 세웠고, 그 자리가 사진에서 보는 자리이건만 관리가 저리 엉망이다.
기념비는 지역의 청년조직인 한청북부단부(韓靑北部團部) 범2동 주민 30여명이 각출하여 단기 4284년 (1951년 신묘 10월)건립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비각은 1956년 10월11일 건립하였음을 대들보에 명기하였다 (그림은 네이브 블로그 미카3136에서 가져왔다)
현장으로 가보았으나 역시나 닫혀 있었다.
"영가대는 부산포의 경개 좋은 정자나 대일 통신사행을 위한 항구만은 아니었다. 영가대는 조성 내력에서도 명확히 밝히고 있듯이, 경상좌도의 거진 부산포의 수군진지였다는 사실이다. ... 요약하자면, 영가대는 첫째 부산포의 수군진에 부속된 정자로써 해안 방어를 위한 망루 역할을 수행했고, 둘째,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행의 일행들을 위한 접대와 휴식을 위한 역참의 기능, 셋째, 통신사행의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해신제를 지내는 제향의 공간, 넷째, 가까이 있는 초량왜관의 동태를 관측하고 통제하는 군사적 기능도 수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가대는 겉보기에는 한가로운 정자이지만, 기능상으로는 역참, 항구, 적정을 살피는 망대 기능까지 다용도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박하의 세상읽기 -영가대와 초량 왜관은 어떤 관계였을까 에서)
欲藏舟艦鑿深池 욕장주함착심지 전함을 숨기고자 깊은 못 파고
輦攘仍成九仞危 련양잉성구인위 수레로 흙 날라 구척 언덕 쌓았네
孤嶼忽浮鰲已戴 고서홀부오이대 홀연히 떠오른 섬 거북 등에 실려 있고
小樓俄起蜃應吹 소루아기신응취 작은 누각 세우니 이무기도 화답하네
吉川事業留千載 길천사업류천재 길천군 사업은 천년 가도 남을 테고
觀海文章冠一時 관해문장관일시 관해의 문장은 한 시대의 으뜸이라
柝木波淸多暇溢 탁목파청다가일 딱따기 소리 푸른 물결 한가한 날 많으니
每憑虛檻獨哦詩 매빙허함독아시 빈 난간 기댈 때마다 홀로 시를 읊으리
- 동래부사 이원진(李元鎭)
*부록
東州先生文集卷之三 / 永嘉臺記 甲子
(*동주 이민구가 영가대의 조성내력을 기록한 문서이다.)
釜山距日本。隔海相望。一帆乃至。故盛具舟楫戰備。日夜候風汛。示和不忘戰也。海常多大風。輒以小汛前後一再發。發必掀駕戰艦。舂撞覆敗。其更修損費以大萬計。萬曆癸丑歲。巡察權公盼始制地利。穿大陸爲湖。息壤爲堤。傍開斗門。舟所從出入。可方三艫。湖袤受艦。厥延䑸三十檣。役始也。邦人群起而噪。引宣防爲訾。顧公所獨見。規爲萬世利。非常之原。豈黎民易喩哉。旣其訖功。天合神助。巨防屹屹。泓潭鏡碧。陽侯外鼓。纖漪不作。鮫移織室。鼉窟其內。海若馮夷來往晏晏。黃龍赤雀馳馬伏龜。艨艟艅艎之屬鱗攢櫛比。首銜尾齧。至其年八月。颶作而甚。鱗介陸見。而樓櫓帖妥。不欹不撓。嚮之造謗者。又聚而歌曰。仲秋八月。天作洪濤。我有巨艑。載靜載浮。不震以驚。匪舟伊屋。爾不我信。起視新鑿。渾渾海流。可以成丘。衍衍之陸。可以行舟。咨惟我公。實天與功。實天與功。匪由我公。時則有若全侯三達終始其役。嚴侯愰知郡咸安。亦相厥事。越三年乙卯。公以朝命巡檢海防。余以幕佐從。益治港口。蓋至今十年矣。港之西直對海門。潮激沙蹙。舟路以艱。壤隤石崩。防日以襄。南公興嗟。悼功不嗣。甲子春。余膺乏使。彌節釜山。而全侯爲僉節制使。嚴侯爲左道水軍節度使。曩公所與經紀是役者。咸聚具在。詢謨懸合。事乃克本。大集諸鎭屬軍。沈舟爲基。崇石爲唐。殺其大波。退其壅沙。隱若長城繚繞。下截蛟螭。而連桅簇舳。雉列堞分。非苟曰藉手鳩功。實所以終公偉烈。庶幾天壤。前公環沙奩湖。上築爲臺。雖以升高瞰遠。重在瞭候。其登望爽塏。集勝撮奇。又足爲海岱第一。臺舊無號。余創名之曰永嘉。蓋公爲永嘉人。亦猶江左有謝公墩云。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위성에 입힌 숫자는 1960년대부터 현재 동.남. 진구 일원에 들어선 아파트과 층수를 표시한 것이다.
2019년 4월10일
미군 55보급창과 매축지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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