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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공원녹지

대구그린트러스트 창립 총회 다녀오다

by 이성근 2021. 7. 22.

간만의 대구 나들이가 대구 그린트러스트 창립총회로 이루어졌다.  오전나절 미세먼지 차단 숲 조사를 끝내고 부산역에서 대구로 향했다.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내려 목적지 대구매일신문사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 바람이 불어 한낮의 폭염이 견딜만 했고, 깔끔하게 정비된 골목 골목은 시선을 붙들었다. 

거리두기에 대한 대구지하철의 저극적 표현도 인상적이었고 승객 서비스도 부산지하철 보다는 앞섰다는 느낌이다. 

가야할 목적지와 버스 환승 표시가 구간마다 상세하다. 

성내2동 숙박업소와 술집과 음식점이 밀집해 있다. 그렇다고 유흥가는 아니다.  도시재생의 손길이 거쳐간 거리의 모습들은 비교적 잘 정비된 상태다.   

한때 계산동 이 일대는 뽕나무 골목이었다고 한다.  그 흔적은 찾을 길 없지만 뽕나물를 심은  사람은 임진왜란때 원군으로 왔던  이여송장군의  풍수지리 참모를 했던 두사충(杜師忠)이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했고 대구에 터를 잡았다.  대토받은 4천평에 뽕나무를 심었다.  이곳에서 두사충은 청상의 과부와 연을 맺게 되었는데 '뽕도따고 임도 보네'라는 말이 연유되었다고 한다.  일제시기 1912년 부터 그의 후손들이 모명재(慕明齋)를 지어 추모하고 있다. 

직진하면 서성로가 나온다 

길건너가 청라언덕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 넘어에 계성중학교가 있다.   1906년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아담스(James E. Adams 안의와 安義窩)박사가 세운 영남 지방 최초의 중등교육 기관으로 이 학교를 다녔던 작곡가 박태준의 짝사랑을 담은 가곡 동무생각이 묻어 있는 곳이다. 훗날 박태준의 이야기를 들은 시인  이은상이 박태준의 곡에 사우(思友)라는 시를 붙여주고 이를 박태준이 동무생각으로 풀어 바꾸었다.

약령서문 근처에 집이 있던 박태준이 학교로 가려면 이 인덕을 넘어야 했는데 당시 이곳엔 담쟁이 넝쿨 무성했던 선교사들의 집이 3채 있었다.  청라언덕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계산성당(桂山聖堂)이다. 건립 당시 현 위치와 서편 청라언덕 전체 사이에 고민하다가 노인 신자들의 요청으로 현 위치에 성당을 건립하기로 정해졌다고 한다. 원래는 강화성당과 비슷한 한옥식 건물이었지만, 화재로 1901년에 전소되자 새로 고딕식 성당을 지었는데 영남권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이다. 정식명칭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계산 주교좌 대성당'으로 범어 대성당과 함께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공동 주교좌 성당이다. 1898년에 본당을 세웠는데, 본당의 주보성인은 루르드의 성모.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건축하고 전주 전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맡았고, 외부공사나 벽돌 조달은 청나라 인부들이 맡았으며, 부지공사나 벽돌공장 건설 등은 일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했다. 스테인드 글라스 같은 것들은 프랑스에서 산지직송, 즉 직접 공수했다. 19012월 성전 부지정리작업을 시작하여 1902121일 외부 공사를 완료하고, 1903111일 뮈텔주교가 축성식을 거행했다.

19114월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설정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지정되었으며, 1918년에 증축 공사를 시행했다. 초창기 스테인드 글라스는 12사도와 성당 제대 뒷편에 위치한 성인상 그리고 성당 입구에 있는 장미창으로 이루어졌다. 1991년에는 대대적인 보수.인테리어 공사가 있었는데, 이때 한국 순교자들과 4대 복음사가 스테인드 글라스를 추가했다. 또 마루바닥을 대리석으로 교체하고 함석지붕을 동판으로 교체하였다. 아름다운 설계와 100년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성당은 1981925일 대한민국 사적 제290호로 지정받았다.

교구 한켠에 성당 역사를 소개하는 표말 안내 중에 빅정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이 박정희뿐이었겠나만 숫한 사람들 중에 한국 현대사에서 특히 이 지역에서 박정희란 인물이 가지는 존재감이 큰 까닭이다. 아무튼

19501212, 박정희와 육영수는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주례를 섰던 대구시장 허억은 신랑과 신부를 소개하면서 '신랑 육영수, 신부 박정희'라고 불러 하객들을 웃겼다고 한다.

앞서 박정희는 대구사범 4학년때 아버지의 강권으로 결혼했던 김호남과 195011월 협의 이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딸(박재옥)이 하나 있었고 그 딸의 남편이 3공 시절 민주공화당 국회의원과 UN대사 등을 지낸 한병기다.

 

한편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전, 육군 대위로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중대장으로 근무할 때 원산 루시여고 출신의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당시 24)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깨어진 것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고, 이후 이현란이 수차례의 가출과 방황을 해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됐다고 전한다. 두 사람 사이 아들이 있었는데 생후 6개월만에 죽었다고 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6819

 

...194810'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잠시 여순반란토벌사령부로 파견됐던 박정희는 육사로 복귀한 직후인 그해 1111일 김창룡이 지휘하는 방첩대에 체포됐습니다. 이후 남산 근방의 헌병사령부에서 며칠 취조를 당한 후 서대무형무소로 넘겨졌습니다.

 

한편 박정희는 체포되자마자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며 자술서를 쫙 써내려갔는데, 평소 자신이 알고 있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전부 털어놓았습니다. 군 수사당국은 이 명단을 통해 육사는 물론 군부 내 좌익분자들을 대거 체포하였는데, 명단 제공 공로로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도 목숨을 건졌습니다. 김창룡 팀으로부터 몇 차례 신문을 받은 후 박정희는 그해 연말에 석방됐습니다....이후 박정희는 좌익전력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능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장군으로 진급(1953.11.25.)했다

 

하기사 그의 전력이 좌익전력 뿐이었던가.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때 사용한 이름이 창씨개명한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 수석 졸업생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은사품으로 금장시계를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예과 상위 성적자에게 베풀어지는 관행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2)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1944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해 견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된다. 그해 7월 황군 육군 소위 '만주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 배장(소대장)으로 근무한다.

 

19441223일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 관리하게 된다 19457월 중위로 진급한다. 1945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10일에 출발하여 17일 집결했으나 일본이 패망 소식을 접하고,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해제당했다.

1945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6단과 함께 미윤으로 이동한 후, 921일 도망치기 위해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의 방침에 따라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 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으나, 4월 평진대(1대대)가 해산한 후, 58일 미군정의 방침에 의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19469월 귀국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해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12142기로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가서 포병 소위 계급을 부여받는다.

 

복무 도중에 셋째 형이자 공산주의자였던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으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이재복은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박정희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러던 중 우익에게 피살된 형 박상희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들어가서 대한민국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갈 때,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이 신원 보증을 서줬다. 남로당 활동 당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감행했던 작전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다.

 

19481111, 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 도중에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연루돼 박정희가 체포되는데, 우선 남로당 군총책 이재복이 '거동수상자'로 잡혔다. 이재복에 이어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숙군 수사가 급진되는데, 수사팀은 연락책 김영식을 통해 명단을 얻게 된다. 이 명단에 '박정희 소령'이 포함되어있었다. 결국 1111일 박정희는 체포된다. 같은 만주국 출신이자 당시 육본정보국장으로 김창룡의 직속상관 백선엽 대령과 정일권, 김정렬, 장도영, 원용덕, 채병덕, 강문봉, 송요찬 등의 육군군관학교 출신 군인들의 구명으로, 처벌을 면하고 예편되었으며 전향하게 된다. 수사 과정에서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 약 300명의 명단을 제공하고 그 공로로 숙군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점을 인정받아 19492131심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다.

 

동거녀(약혼녀) 이현란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람이었고 아들마저 죽자 박정희에게 실망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아내와 딸내미까지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이현란에게 들통났다. 박정희는 19502, 결국 이현란과 헤어졌다. 3남 박상희가 경찰에게 총살당하고, 막내아들 박정희마저 무기징역 선고를 받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 백남의는 세상을 떠났다. (나무워키에서)

 

계산성당은 서울의 명동성당’,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천주교 3대 성당으로 거론된다. 명성 과 역사성이 있어 여러 이력을 달고 있다. 계산성당DS ᅟᅧᆼ남지방에 천주교를 토착화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1951915김수환 추기경이 이 성당에서 사제 서품 받았으며, 19845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기도 했다

 

그 토대는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신부라 할 수있다. 한국이름은 김보록(金保祿)이다. 1876년 사제가 된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두세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입국해 강원도 이천(伊川)을 거쳐 경기·강원도 낭천(浪川), 지평, 부흥골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1882년 경상도 지역의 전담 신부로 임명받아 대구교회의 발전에 힘썼다.

 

계산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청라언덕의 제일교회 1994년 신축건물이다. 1893년에 지어진 원래 제일교회는 약전골목쪽에 있다. 시초는 조선 말 부산 선교부에 주재하던 미국 북방장로 선교사 베얻 목사가 경북지역 순회 전도여행중 대구 읍성에 첫 발을 디딤으로서 시작되었다. 제일교회 역시 대구.경북 최초의 교회라 할 수 있다. 1933년 지은 옛건물은 대구유형문화재 (30)로 관리중에 있다.

"대구에 국가정원 조성" 대구그린트러스트 창립

금호강 일대 중심 최우선 과제 추진시민·전문가 학술연구·토론회 계획

'녹색도시 대구' 기치 공원녹지 확충

 

대구그린트러스트가 21일 매일가든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대구에 '국가정원'을 조성하기 위한 범시민운동이 출범했다.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과 순천만 국가정원 같은 국가정원을 대구에도 조성해 시민들이 보다 쾌적한 환경 속에서 건강한 삶을 향유하고 관광자원화하자는 것. 대구의 공원녹지를 확충, 보전하고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면서 시민들의 건강한 삶이 보장되는 '녹색도시 대구'를 기치로 내건 대구그린트러스트가 21일 창립총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대구그린트러스트는 금호강 일대를 중심으로 대구만의 특색을 살린 국가정원을 조성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시민과 전문가들이 참여해 학술연구와 토론회 등을 통해 구체적인 추진 계획을 마련하고 대구시와 적극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대구그린트러스트는 또 국가정원뿐만 아니라 시민참여형 공원 조성, 녹지문화 교육, 녹지정책에 대한 아이디어 제안과 연구조사 활동, 민간참여형 공원 이용 활성화 방안 마련 등 대구를 '숲과 정원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도 하게 된다.

 

김수봉 대구그린트러스트 공동대표는 "팬데믹 이후 도시의 녹지공간이 시민들에게 많은 위안이 되고 있다. 도시의 공원녹지는 시민들과 도시의 병든 땅을 치유하여 건강하게 하고, 사람과 자연을 조화롭게 만들어 도시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며 이러한 공원녹지 조성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한편 대구그린트러스트는 21일 매일가든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김환열 전 대구MBC 사장과 김수봉 계명대 교수를 공동대표로 선출했으며, 전문가와 시민 등 각계 대표 10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통원 기자 t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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