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노비와 쇠고기

by 이성근 2023. 3. 5.

노비와 쇠고기 성균관과 반촌의 조선사 강명관 지음 l 푸른역사 l 2023.02

 

: 강명관 (姜明官)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문학을 현대의 텍스트로 생생히 살려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 그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후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활동했던 여항인들의 역사적 실체와 그들의 문학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 한문학의 연구 지평을 넓힌 역저(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문화일보)". "풍속사, 사회사, 음악사, 미술사를 포괄하는 방대한 지적 편력을 담아 내고 있다. 정작 문학 텍스트 자체에 논의를 거의 할애하지 않았는데도, 논의 전개 과정에서 그 시대와 함께 문학 텍스트의 의미가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한양대 정민)." 등의 호평을 받았다.

 

광범한 지적 편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풍속사 읽기를 시도하고 있으며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문학을 쉽게 풀이한 저서들을 다양하게 출간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 시대에 지식이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어 유통되는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어떻게 설치되어 인간의 사유와 행위를 결정하는가, 그리하여 어떤 인간형이 탄생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공부 중이다. 최근작 열녀의 탄생과 연계하여, 조선 시대 남성-양반이 그들의 에토스를 만들기 위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의식화했던가,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남성다움, 양반다움으로 남성-양반은 여성, 백성들과 구별 짓고, 우월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면면을 연구할 계획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조선의 뒷골목 풍경,근대 계몽기 시가 자료집,안쪽과 바깥쪽,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농압잡지평석,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열녀의 탄생, 시비是非를 던지다,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01 쇠고기

1. 삼한에서 고려까지

삼한과 삼국시대

고려

원 간섭기 이후

 

2. 조선 전기

금도령과 달단 화척

불법 도축과 쇠고기 소비의 증가

 

3. 조선 후기

서울의 사도

지방 사도

관포

국가가 설치한 공식 관포국가가 묵인한 지방의 관포

법의 무력화

 

02 반인

1. 반촌

2. 반인

반인의 유래

반인의 수

반인의 노역

3. 반주인

4. 반인의 성격과 문화

반인의 언어와 폭력적 성향

반인의 지식과 한시 문학 및 예술

 

03 성균관과 삼법사

1. 성균관

조선 전기 성균관의 재정

임병양란 이후 재정의 붕괴

임병양란 이후 재정 상황성균관의 재정 수요성균관의 토지성균관의 절수 어장노비신공

 

2. 삼법사

삼법사와 속전

이예와 금란

 

04 현방

1. 반인과 도축업

반인의 생계수단

반인과 소의 도축

2. 현방

현방의 출현 시기

현방의 수와 위치

현방의 구성과 구성원

소의 도축 방법과 부산물

 

05 수탈

1. 속목속전과 1707년의 감축

2. 사헌부 속전의 복구와 성균관의 현방 수탈

3. 1712년 현방의 빚과 공금 대출의 시작

4. 삼법사의 본격적 수탈의 전개

1724년 삼법사 속전 감면 요청의 실패와 공금의 대출

1728년 조지빈의 상소, 궁핍해지는 반인과 성균관

삼법사 속전 감축 요구와 반복된 실패

대사성 정우량김상규김약로서종옥의 요청과 좌절1740년 대사성 심성희의 해결책 제안왕과 조정의 무능과 책임 회피

 

1750년 균역청 설치 이후의 사정

1812년 궐공과 대책의 실패

5. 새로운 수탈의 주체, 궁방

6. 명문화된 대책, 현방구폐절목

1857현방구폐절목

1862현방구폐절목

 

06 대응

1. 현방의 확장과 첩도

현방의 확장

첩도

2. 건전과 창전, 우방전

건전

창전

우방전

3. 어물전과 염해전 등

어물전

침어전

염해전

빙계

 

07 저항

1. 식당 도고

2. 게판

3. 집단행동, 철도

4. 궐공

 

08 해방

1. 제도의 변화

1895포사규칙

포사규칙의 내용|〈포사규칙과 현방현방의 포사세포사와 포사세의 관할권을 둘러싼 논란

1905도수규칙

1909도수규칙

 

2. 갑오개혁 이후 반인의 활동

회사 설립을 위한 시도

검포소

균흥조합소

3. 숭의학교 설립

09 끝맺음

 

출판사 서평

500년 조선왕조와 성균관의 버팀목은 쇠고기 팔던 노비들의 피와 땀이었다

 

넓고 깊고 촘촘한 강명관 표 역사 그물

역사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왕조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하기도 하고, 인물이나 사건의 추이를 따라 파악하기도 하는 식이다. 이 중 키워드를 중심으로 역사를 읽어내는 방법은 꽤나 유용하다.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세밀화를 그려낼 수 있어서다. 이 책의 지은이 강명관 전 부산대학교 교수는 이미 풍속화, 열녀 등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쌓았고, 그리하여 고정 독자층을 확보한 이 방면의 대가다.

 

그가 이번엔 노비쇠고기란 낯선 조합으로 조선사를 파고들었다. 어쩌면 사회사, 혹은 음식문화사로 읽힐 법하지만 두툼한 책 두께가 시사하듯 조선의 정치사회사를 관통하는 역작이다. 조선이란 사족국가의 국가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던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이 공노비 신분이었던 반인의 노동에 바탕했으며 그들이 도축해 팔던 쇠고기에 대한 세금이 버팀목이었음을 치밀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증명해내기 때문이다.

 

눈이 번쩍 뜨일 뜻밖의 사실

조선은 내내 소의 도축을 금하고, 쇠고기를 먹은 사람까지 처벌했다. 원칙적으로 그랬다. 하지만 17세기에 서울에는 속전을 물고 쇠고기를 파는 현방이 공공연히 존재했다. 책은 현방을 운영하던 반인泮人과 이들이 살던 반촌 이야기를 촘촘히 풀어간다. 성균관 주변의 반촌에 살던 그들이 고려 시대 성리학을 처음 전한 안향이 기증한 노비에 뿌리를 두었다든가, ‘제업문회란 일종의 학교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는 등 여느 역사책에서는 만나기 힘든 사실을 소개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반인들이 자비로 무장을 갖추고 참전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반인들은 1년에 여섯 달을 입역하고, 7~8세부터 입역하는가 하면 성균관 유생들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며 봉사했다는 수탈상도 그려진다. 노예들이 기록을 남겼을 리 없으니 다양한 사료를 꼼꼼히 뒤져낸 공력이 감탄스럽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 음식문화 중심에 쇠고기가 있었으니 불교국가인 고려에서도 개성 시전에서 고기를 팔았다든가, 18세기 조선에선 해마다 약 20만 마리의 소가 도축되는 쇠고기 국가였다는 사실 등도 만날 수 있다.

 

무릎을 칠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

반인들이 수탈의 대상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단다. 성균관과 일종의 경제공동체가 되어 삼법사의 수탈에 반발하기도 했고, 유생들이나 과거를 치러온 이들이 묵는 여각의 주인은 반주인이라 하여 과거 합격 잔치를 반주인 집에서 치르는 등 내내 이익을 공유했다. 과도한 세금을 피해 생계를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도 등장한다. 반인들이 얼음 판매업을 독점하려 빙계를 만든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조선 후기에 육류·어류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여름철에 육류·어류의 부패를 막기 위해 국가는 물론이고 의열궁義烈宮이나 성균관에서도 얼음이 부족하면 사빙을 사서 썼다. 반인은 1768년 빙계氷契를 조직하여 사빙私氷을 독점하고자 했다. 빙계가 창설되기 전에 경강변에는 사빙업자가 30~40곳 있었기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1789년 궁방의 마직들의 횡포에 맞서 사흘 동안 현방 문을 닫아 서울 시민들 제사상에 돼지고기를 올리도록 한 철도’, 반인들이 성균관 식당에 식사 제공 노역을 거부한 궐공’, 이로 인해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물러나는 공재등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실렸다.

 

번득이는 예리한 비판의식

현방, 즉 조선의 공식적 쇠고기 판매는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농사도 장사도 할 수 없는 성균관 공노비들의 생계수단을 위해 허용한 현방은 점차 형조, 사헌부, 한성부 삼법사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들의 실무관리인 하예에게는 따로 급여가 없었으니 이를 마련하기 위해 불법행위 단속을 빌미로 가혹한 속전을 물렸다. 차인들이 구하기 어려운 소의 특정 부위를 구입하겠다고 나선 뒤 이에 응하지 못한 현방에게 돈을 받아내는 방전이 그런 예다. 종내에는 성균관까지 현방 등 치기에 가담했으니 조선 후기 성균관은 현방에서 수탈하는 돈으로 운영되었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사족 체제의 정점에 있던 자들은 성균관을 존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실제 재정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고도 근원적인 대책은 관심 밖이었다고고 비판한다. 정조는 각 군문의 군졸들이 밤에 현방을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일을 막기 위해 고입인가율을 적용하도록 하는 게판을 허용했는데 이 역시 흐지부지되는 등 논의만 무성했지 효과적인 대책은 서로 미루기만 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반인과 현방의 입장에서는 삼법사와 성균관으로부터 이중의 수탈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 사족체제의 최고 교육기관과 경찰기구가 반인과 현방의 수탈 위에 존립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갈파한 대목은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책은 역사서로는 이례적으로 각종 수치 자료까지 인용했기에 읽기 만만치 않다. 하지만 쇠고기를 중심으로 조선사를 관통하면서 곳곳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 덕분에 조선 정치 비판서로도, 풍속사로도 공들여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책 속으로

969(광종 19)에 광종은 궁중에서의 도살을 금하고 육선肉膳, 곧 고기 요리의 재료를 시전市廛에서 사서 올리게 했다고 한다. …… 개성 시민을 위해 개경에 개설된 시전에서 고기가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설 시장에서 팔릴 정도라면, 고기에 대한 일정 규모 이상의 수요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17

 

1362년 금살도감의 설치 이래 소의 도축을 금지했던 법령들은 15세기 후반이면 사실상 사문화되고 있었다. 이후 도축자를 체포하여 처벌하는 한편 체포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논상論賞하는 절목을 마련하기도 하고, 거골장이 4범할 경우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처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p.36

 

법은 소의 도축과 쇠고기의 판매와 식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준행된 적은 없었다. 지배계급부터 쇠고기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법은 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없애지 않는 한 적용될 수 없었다--- p.39

 

현방은 소의 도축이 불법인 것을 전제로 벌금, 곧 속전贖錢을 형조·사헌부·한성부에 내고 공식적으로 도축과 판매를 허가받은 점포였다. 속전은 일종의 영업세인 셈이다. 현방의 영업 공간은 서울로 한정되었다. 현방의 경영자인 반인은 뒤에 지방에서도 일부 도축과 판매의 권리를 갖게 되지만, 그것은 국가가 일부 지방에 도축과 판매를 묵인하면서부터 가능해진 것이었다--- p.43

 

장패藏牌는 사도를 단속하는 담당관서인 형조·사헌부·한성부에서 금리들이 단속을 나갈 때 주는 금패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일정한 기간 동안 소의 도축을 공식적으로 허가한다는 뜻이다. …… 1690년경에 새해 첫날을 전후한 3일 동안(5일 동안으로 바뀜) 삼법사에서는 소의 도축에 대한 단속을 멈추었으니, 10일 동안 소의 도축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p.51

 

서울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소 값이 지극히 싼 것을 이롭게 여겨 곳곳에서 도축이 낭자하고(1762), 큰 도회나 작은 취락을 막론하고 장시가 있으면, 감영의 허가증을 갖고 있는 포사가 반드시 있었으니, 쇠고기를 길거리에 채소처럼 걸어놓고 파는 쇠고기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p.66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의 5五部 안의 24개 푸줏간, 그리고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쇠고기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라고 말했다. 1년의 총 도살 수는 182,500마리이다. …… 당시 인구를 2천만 명으로 본다면, 100인당 1마리(박제가의 통계) 혹은 50인당 1마리(이한운의 통계)에 가까우니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조선은 박제가의 말처럼 작고 가난한 나라였으나, 쇠고기만큼은 적지 않게 공급되고 있었던 셈이다--- p.68

 

성균관 주변에 거주하면서 성균관에 직접 신체노동을 제공하는 노비와 지방 여러 곳에 흩어져 살며 신공身貢을 바치는 외거노비가 그것이다. 전자를 특별히 반인泮人이라 부른다. …… 반인은 반촌泮村 거주인이란 뜻이다. …… 반촌은 반궁泮宮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 서주西周 시대에 천자가 설치한 대학은 벽옹?, 제후諸侯가 설치한 대학은 반궁이라 불렀다--- p.72

 

반촌은 또한 금리와 순라군이 들어가 소란을 피울 수 없는 곳이었다. 곧 금례들은 관현을 넘어 반촌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반촌이 이렇게 금지가 된 것은, 그 내부의 성균관이 공자를 위시한 유가의 성인들을 모신, 성화聖化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 p.82

 

반인의 기원은 고려 말 성균관의 재정비에 크게 기여했던 안향安珦(1243~1306)의 사노비私奴婢. 안향은 성균관에 자신의 녹봉과 노비 100명을 바쳤다고 한다. 고려 말기 성리학을 처음 한반도에 전한 인물로 알려진 안향은 당연히 성균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p.84

 

1746년부터 시행된 속대전성균관 노비는 면천을 허락하지 않고, 면천해줄 만한 공로가 있어도 다른 상을 주며, 성균관 외에 다른 역사役事를 시키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반인은 1801년 내수사와 중앙 행정기관의 노비를 혁파할 때 공식적으로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p.88

 

반인은 18세기 말이면 1만 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p.90

 

1707년 대사성 이건명李健命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성균관 전복, 곧 반인의 노동에 대한 수탈이 가혹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대개 공천公賤·사천私賤의 신역의 무거운 것을 말하자면, 성균관의 전복보다 더 한 경우는 없습니다. 옛날 백성을 부리는 것은 한 해 사흘을 넘기지 않았지만, 이 무리들은 1년 안에 여섯 달을 입역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비자婢子에 이르기까지 채모·식모의 역이 있으며, 재직은 7, 8세부터 입역합니다. 한 집안에 늙고 젊고를 물론하고 신역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그 형편이 정말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p.108

 

유생들은 원래 연청직硯廳直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었으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작은 잘못이 있을 경우에도 곧장 회초리와 매를 쳤고, 심지어 채모·식모 역시 작은 과실에도 회초리가 난무하여 여러 곳에서 벌을 받는 일이 있었다--- p.109

 

반촌은 평소 성균관 유생들이 방을 잡아 공부하는 숙소이기도 했고, 과거 때면 거자擧子들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여관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 반인은 자신의 집에 객방客房과 마구간을 마련하고 사족들을 받았다 …… 유생이 반인의 집에 머무를 경우 그 사람을 반주인泮主人이라 불렀다--- p.113

 

반주인은 단순한 여각 주인이 아니었다. …… 검주黔州 이웅징李熊徵(1658~1713)은 이렇게 말한다. 성균관은 유생이 모여드는 곳이라 사대부는 반드시 전복을 주인으로 정한다. …… 대궐 뜰에서 합격자를 발표할 때에는 난입하는 잡인을 금하지만 관주인만은 대궐 뜰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머리에 꽃을 꽂아주게 한다. …… 새로 벼슬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공손치 못한 행동을 하면 반드시 주인에게 죄를 물어 온갖 힘들고 괴로운 일을 겪는다. 그래서 유생이 관직이 높아진 뒤에는 상당히 후하게 보답하게 되고, 주인 역시 사대부를 상전처럼 여겨서 대대로 관계를 전하여 바꾸지 않는다--- p.116

 

반인은 사족이 과거에 합격하기 전 유생일 때부터 성균관을 매개로 하여 서로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를 형성했다. 사족이 일방적으로 반인을 지배할 수만은 없었다. …… 성균관 대사성이 삼법사의 현방 수탈을 맹렬히 비판했던 것도 사실상 반인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성균관 노비들은 도리어 관료를 움직이기도 했던 것이다--- p.123

 

국가가 반인을 계속 성균관과 반촌에 묶어놓기 위해 생계수단으로 제공한 것은 현방의 독점경영권이었다. 곧 서울에서 소를 도축하여 쇠고기를 팔 수 있는 전매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 사족국가 최고의 학교이자 국가이데올로기의 교조敎祖에게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 제의소祭儀所는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혹독하게 착취함으로써 겨우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p.142

 

189512314개조의 포사규칙?肆規則이 제정되기 전까지 소의 도축과 쇠고기 판매는 불법이었다. …… 여전히 불법행위였으므로 현방은 벌금, 곧 속전을 납부해야만 했다. 속전은 사실상 세금이었던 것인데, 문제는 그 세금을 받는 곳이 형조·한성부·사헌부 등 이른바 삼법사三法司였다는 것이다. 삼법사는 서울 시내의 불법행위에 대한 단속권을 나눠 갖고 있었다. …… 삼법사는 자신이 거느리는 하예들의 삭료를 지급한다는 명분으로 현방으로부터 속전을 수탈했던 것이다--- p.143

 

조선 전기에는 이 일체의 비용은 성균관이 보유한 토지와 노비 등의 재원에서 나왔다. 재원의 관리처는 성균관 유생에게 공급하는 쌀과 콩 등을 관장하는 종6품 아문인 양현고養賢庫였다. …… 양현고는 섬학전贍學田이라 불리는 전지를 소유했지만, 이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1401(태종 13) 당시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물과 국 외의 찬을 제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편이었다--- p.147

 

16354월 성균관은 평소 거재생이 80명 이하일 때도 찬물饌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증광시增廣試와 관시館試에 응시하기 위해 모인 선비들이 240여 명에 이르렀고 또 지방의 선비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른다고 말한다. 늘어난 유생의 숙식 비용과 과거 응시에 필요한 지필묵은 모두 성균관의 재정에서 나왔던 것이니, 과거를 거치면 성균관의 재정이 궁색해지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p.160

 

1602년 성균관의 소 도축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하루 수십혹은 수백 마리를 도축할 정도로 규모가 커져 있었다. 특히 여기서 수선지지곧 성균관이 도사의 소굴이 되었다는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도사는 짐승을 도축해서 판매하는 가게의 의미로 쓰인 것이고 현방이 출현한 뒤에는 현방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p.240

 

유본예柳本藝(1777~1842)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현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현방. 쇠고기를 파는 도사屠肆. 고기를 매달아놓고 팔기 때문에 현방이라고 한다. 도성 안팎에 스물 세 곳이 있다. 모두 반민泮民에게 쇠고기를 팔아 생계로 삼게 한다. 로 고기를 바쳐 태학생太學生의 찬거리로 삼는다--- p.242

 

1648년까지 형조는 현방으로부터 속전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현방은 1648년 이후 1653년 이전에 출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곧 속전을 내는 현방의 존재는 1648~1653년 사이에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원래 무명으로 바치던 속목은 1678년 상평통보의 유통 이후 돈으로 대신 바치게 되었고 곧 속전이란 명칭으로 불렸다--- p.245

 

1792년 광례교 근처에 현방을 신설하고 신설된 현방을 운영할 반인들을 모집했던 바, 70여 호가 몰렸다. 곧 현방 1개에 반인 70여 호가 소속되었던 것이다. 1732112일 성균관 대사성 정우량鄭羽良은 현방의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공채를 빌려줄 것을 요청하면서 현방 한 곳에 70~80명이 소속된다고 했다--- p.250

 

1675년 성균관 대사성 민종도는 …… 삼법사의 현방 수탈이 과중하다는 것을 최초로 지적한 사람이다. 과중한 속목 혹은 속전이 현방 경영을 압박하고 결과적으로 반인의 삶을 곤궁하게 만든다는 논리로 …… 성균관 대사성이 전면에 나선 데는 당연히 반인들의 요청이 있었다. 반인과 성균관은 이익을 공유하는 일종의 경제공동체였다--- p.264

 

태학의 전복은 그 수가 거의 만 명에 이르는데, 다른 생업은 없고 단지 도판屠販(소를 잡아 판매하는 일)을 명줄로 삼고 있습니다. 도성 안의 도사는 모두 21곳인데, 각 현방은 모두 본전이 없습니다. 매일 소를 잡는데 소 값은 모두 사채私債에서 나옵니다. …… 근년에는 전복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소 값은 날마다 뛰어올라, 소를 잡아 팔아도 공사公私 비용을 당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p.287

 

현방은 속전을 전혀 내지 않는 잠도潛屠 혹은 사도와 불리한 경쟁을 해야 했고, 한편으로 돼지고기 소비와도 경쟁해야만 했다. …… 본래 48좌였던 현방이 계축년(1673)21좌로 줄어든 반면, 시안市案에 기재된 것이 6~7곳에 불과했던 저육전은 70~80좌로 늘어나 있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저육전이 현방의 이익을 갉아먹었음은 물론이다--- p.295

 

봉상시는 봄·가을에 한정해서가 아니라, 사철 임의로 도축을 하고 쇠고기를 팔아 이익을 취하고 있어 이로 인해 반인이 이익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송인명은 봄·가을 15일에 한정하여 필요한 양만큼 도축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고 영조는 수용했다. 하지만 문제가 봉상시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형조의 금리가 형조의 담장 밖에서 마음대로 도축하고 가게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현방이 이익을 잃는 이유가 되었다--- p.298

 

조지빈은 …… 금란속전은 사헌부 관리가 대동하는 겸인과 하리에게 주는 체하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겸인은 청지기로서 유력한 양반가의 가내 집사를 의미한다. …… 조지빈이 말하는 겸인, 곧 청지기는 정식으로 사헌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개인적인 수행원이다. 하리는 사헌부의 금리일 것이다--- p.302

 

사족체제의 정점에 있던 자들은 국가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구로서, 또는 상징적 기구로서 성균관을 존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실제 그 기구의 재정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고도 근원적인 대책은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성균관의 노비는 더더욱 말할 것이 없었다. 결국 자살하는 노비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p.311

 

심성희는 현방의 문제도 거론했다. …… 현방 1곳에 소속되는 반인은 최근 인구 증가로 인해 90여 명이다. 1곳의 현방이 대개 70~80명이 소속되었던 것을 상기하면, 10~20명 정도가 늘었던 것이다. 1인에게 돌아가는 이윤의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심성희에 의하면, 1인에게 돌아가는 도축의 기회는 1년에 3~4차례에 불과하고, 그로부터 얻는 수익은 열흘이나 보름을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빈약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p.333

 

심환지의 말을 직접 옮겨보자. 소 값은 날마다 오르고 전로錢路는 날이 갈수록 황폐해집니다. 각 현방이 매일 도축하는 소는 하루에 1마리의 정수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종 세금은 여전하여 줄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집이며 가산을 팔아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또 해마다 빚을 내어 대응하는데 그 이자가 불어나 지금은 각 현방마다 지고 있는 빚이 7,000~8,000냥 혹은 만 냥에 이릅니다. 재물은 바닥이 나고 힘이 고갈되어 생계를 꾸릴 수도 응역할 수도 없습니다--- p.349

 

현방을 거의 극한까지 수탈하고 또 현방의 이익을 위협하는 일체의 불법적 도축을 금지시키지 못한 결과는 결국 성균관의 기능 마비로 나타났다. 1815415일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은 순조에게 성균관 유생의 반미飯米 부족으로 궐공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대책을 마련할 것을 요청했다--- p.353

 

4년 뒤인 181912월 식당의 궐공이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이전의 궐공에 비해 더 심각했다. 유생들이 궐공으로 인해 즉각 공재空齋에 돌입했던 것이다. 기숙사를 비우고 성균관을 떠난 것이다--- p.365

 

17895월 반한泮漢 곧 반인과 궁방의 마직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고 급기야 현방이 철도撤屠, 곧 소의 도축을 정지하여 서울 시내에서 제상祭床에 쇠고기를 올리지 못하고 돼지고기를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p.371

 

정조는 각 군문의 순라를 도는 군졸이 밤에 현방을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일을 막기 위해 고입인가율을 적용할 것을 허락했는데, 현방에서는 정조의 그 명령 전체를 판에 새겨 현방 앞에 걸었던 것이다--- p.376

 

방전防錢이란 새로운 수탈법도 생겨났다. 차인들이 현방에서 도살한 쇠고기를 다 팔고 다음 소를 도살하지 않은 시점에 구하기 어려운 소의 특정 부위를 구입하겠다고 하면 현방에서는 당연히 응할 수가 없었다. 차인들은 그것을 현방의 책임으로 돌리며 윽박질렀고, 현방에서는 미봉책으로 15방전을 차인에게 주었다--- p.379

 

현방에 진열한 쇠고기를 첩도라고 하여 속전을 징수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첩도는 하나의 현방에서 하루 1마리 소를 잡는 규정을 넘어 보다 많은 소를 도축하는 것을 의미했다. 첩도에 관한 허다한 자료들은, 금리가 현방에서 진열한 쇠고기를 첩도라 지목하고 속전을 과다하게 받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삼법사의 금리들은 단속 건수를 채우지 못하면 현방에 진열된 쇠고기를 첩도한 것이라면서 규정 밖의 속전을 뜯어내었던 것이다--- p.422

 

근래 선비는 선비의 도리로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오직 작은 이익만을 노린다. 모든 이바지하는 물건을 돈으로 받지 않는 경우가 없고 모두 정해진 가격이 있다. 굴비는 2, 점심밥은 2, 대별미는 8, 소별미는 5, 명절 별공別供30문이다. 그 외 만약 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에 하인배들이 무시하고 미워하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본래 물건까지 바치지 않는다. 둘러대는 말을 하기도 하고 혹은 욕하면서 거절하기도 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더 심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날마다 내놓으라고 다그치고 소리를 질러 꾸짖고 매질을 하는 소리가 걸핏하면 28개 방에 어지럽게 울리는 것이다--- p.471

 

최초의 의도적 철도는 1773년에 일어났다. 사도세자의 딸과 결혼한 당은첨위唐恩僉尉 홍익돈洪益惇의 노복들이 시정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이 많아 그의 집 근방의 현방이 철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것이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철도 사례다. …… 17895월 반인은 궁방의 마직馬直들과 싸웠다. 반인들은 궁방의 마직들이 헐값으로 쇠고기를 사들여 자신들을 실업 상태에 빠지게 했다고 주장하고 항의 표시로 사흘 동안 현방 문을 닫았다. 서울 시민들은 제사상에 올리는 고기를 돼지고기로 대신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p.479

 

18597월 현방은 사도가 워낙 심해 자신들이 매매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연일철시했고 이로 인해 막중한 제향의 물종과 약간의 진배외에는 궐공과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현방의 문을 잠금으로써 국가의 제사 그리고 궁방에서 필요한 양만큼의 쇠고기를 제공했을 뿐 그 외에는 일체 팔지 않음으로써 사도를 단속하지 않은 데 대해 항의했다--- p.493

 

궁방의 침탈이 그치고, 서울의 사도가 줄어들자 현방은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1865(고종 2)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자 현방이 원납전을 낸 것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반인은 적게는 200냥에서 많게는 1,000여 냥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원납전을 납부했고, …… 그것은 반인과 같은 사회 하층집단으로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인이 병인양요에 참여했던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 반인은 자원군으로 참전한다. 반인 200명이 총융청摠戎廳에 소속되어 전투에 참여했다--- p.496

 

정교鄭喬에 의하면, 반인을 뽑아 군적에 넣고 별초군別抄軍이라고 부르게 한 것은 흥선대원군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실제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p.497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다. …… 공식적으로 성균관의 노비였던 반인은 신분제의 폐지, 성균관이 그 본질적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성균관에 대한 일체의 의무적 노동은 더이상 강제되지 않았다. …… 반인은 이로 인해 진정한 해방의 계기를 얻었다. 관제의 변화 역시 반인을 해방시켰다. 형조는 법무아문으로 바뀌고, 한성부는 명칭 그대로 존속했지만, 사헌부는 폐지되었다. 현방에 대한 삼법사의 속전 수탈 역시 존속될 수 없었다--- p.499

 

18951월 일본인·청국인淸國人과 포주?의 설치를 둘러싼 논의가 있었는데, 이 시기 이들은 포점?을 설치해 영업을 하였으나 세금을 내지 않고 있었다. …… 외무아문에서는 현방과 동일하게 납세하면 허가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영국·프랑스·미국의 공사가 공문 혹은 편지로 청국인의 포주가 없으면 외국인의 음식에 필요한 육류를 사기 어렵다고 청국 현방의 개설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 p.501

 

18974월 민비의 늦은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성균관 두민頭民들은 전례에 따라 여사군轝士軍이 되었다. 이 경우 현방의 속전 5개월분을 감해주는 것이 통례였다. 23개 현방은 속전이 포세로 바뀌었음을 들어 5개월 치의 포세 3,105냥을 감해줄 것을 요청했고, 탁지부에서는 요청을 그대로 따랐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반인이 국장 때 죽은 왕이나 왕비의 상여를 메고, 세금을 면제받는 관행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p.504

 

19051220일부터 시행된 도수규칙은 서울의 도사에게 적용되는 법이었다. …… 부패한 육류가 야기하는 건강상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도축과 판매를 분리하고, 일상적 감시가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도수규칙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경무청이 도축과 판매에 대한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래 현방에 대한 사무를 장악하고 세금을 받았던 경리원으로서는 애매한 입장이 되었다--- p.514

 

19086월의 광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광고에 의하면 경시청의 인가를 받은 5五署 내 포사 영업자의 집단조직인 균흥조합소는 부패한 쇠고기를 판매하던 악습과 무익한 경쟁을 뿌리 뽑아 균일한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 곧 조합에서는 쇠고기 가격을 신문에 매일 게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68일의 정육正肉 가격은 구화舊貨 1125이었다--- p.526

 

반인들은 학교를 세웠다. 김윤식金允植1908219일 일기에서 반인이 숭교의숙崇敎義塾을 설립하고 장박張博을 교장으로, 자신을 찬성원贊成員으로 하는 공함公函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p.528

 

191012580명의 학생이 입학식을 함으로써 숭교의숙은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안광수와 정학수의 학교 이후 100년이 지나 반인은 자신의 학교를 갖게 되었다--- p.530

 

1908년 숭교의숙의 설립을 이끌었던 홍태윤·김태훈 두 사람의 사례다. 홍태윤은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 모르나 189691일 당시 영평永平 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과거 성균관의 노비이자 소를 잡는 도한屠漢으로 인식되었던 반인이 지방관에 올랐다는 것은 놀라운 신분 변화가 아닐 수 없다--- p.533

 

 

소 도축 금지에도소 잡아 성균관 먹여 살린 노비들

강명관, 성균관 노비 반인의 쇠고기 장사 연구

노동력·영업세 수탈 겹쳐지배체제 무능·실패

조선은 소의 도축과 매매를 원칙적으로 금지했지만, 쇠고기 식용 문화는 갈수록 확산됐다. 이를 보여주는 성협의;풍속화첩; 가운데 야연’(위쪽). 함경남도 흥원에서 1911~1912년께 백정들의 도축 작업을 담은 사진(아래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푸른역사 제공

 

노비와 쇠고기, 이 두가지를 소재로 삼아 조선이란 나라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을까. 별 관계 없어 보이는 이 둘은 조선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기관인 성균관에서 만나, 지배체제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수탈했는지, 피수탈자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국가의 통치는 어떻게 실패했는지 등을 낱낱이 드러낸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열녀의 탄생> 등 여러 저작에서 역사를 세밀한 풍경으로 그려내는 한편 그 속에서 지배체제의 본질을 드러내온 한문학자 강명관(전 부산대 교수)이 새 책 <노비와 쇠고기>에서 펼친 작업이다. 지은이는 스스로 만들어낸 모순에서 나오는 폐해를 감당할 능력은커녕 의지조차 없던 지배체제의 실패를 냉정하고 꼼꼼하게 까발린다.

 

먼저 쇠고기 쪽에서 출발해본다.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에 집중하려 했던 조선은 건국 때부터 축력 보호목적으로 소의 도축을 강력히 금지했다. 조선 최초의 법전 <경제육전>이 이를 법령화했다. 그러나 저절로 죽은 소의 고기는 관아의 허가를 받아 매매가 가능했고, 무엇보다 지배계급부터 쇠고기를 즐겨 먹었다. 15세기 후반이면 이미 쇠고기 식용이 보편화되어 법령이 사문화됐다. 서울의 현방’(懸房)과 지방 일부 기관들은 소 도축·판매를 사실상 허용받았다. 사사로운 불법 도축(사도·私屠)은 그보다 더 횡행했고, 그 이익이 크다 보니 아예 관이 직접 나서거나 민관이 한패를 먹고 사업을 벌이는 경우도 빈번했다. 18세기 기록엔 한 해 도살되는 소가 39만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소와 말을 도축하는 자는 장 100대에 전가사변(가족 모두를 변경으로 옮겨 살게 하는 형벌)에 처한다’(<대전후속록>, 1543) 등 우금(牛禁) 원칙은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갑오개혁 이후인 1895123포사규칙이 제정되고서야 폐기된다. 국가가 사실상허용했다 해도 소 도축·판매는 원칙적으로 불법이므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서울의 현방은 형조·사헌부·한성부(이를 삼법사라 한다)에 영업세 성격의 벌금, 속전’(贖錢)을 대신 냈다. 이는 사도에도 적용되어 점차 법 자체가 무력화됐다. 사도를 범해 유배를 가던 자가 압령하던 군사를 위협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소를 도축한 사례도 있다. 임병양란 이후 누구나 값만 치르면 쇠고기를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쇠고기 식용이 보편화됐으나, ·제도와 그 집행은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다. “현실의 변화에 대한 대응력을 상실한 것이 조선 후기 사족체제의 특징이었다.”

<태학계첩>(1747)에 수록된 반궁도’. 성균관의 건물 구조와 배치를 평면도 형식으로 재현한 가장 오래된 시각 자료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누리집 갈무리

<상춘야연도> 그림.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푸른역사 제공

 

이번엔 노비 쪽에서 출발해보자.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비는 최하층에 위치한다. 지은이가 주목한 것은 성균관 주변에 거주하며 성균관에 직접 신체노동을 제공하는 등 독특한 성격을 지닌 반인이다. 반인은 반궁(대학)이 있는 마을’(반촌)에 사는 이들이란 뜻으로, 성균관에 구속되어 반촌을 떠날 수 없고 면천’(양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한 대신 이를 활용해 집단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나름의 생존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앞서 말한, 서울 지역에서 소 도축·매매를 사실상 허용받은 현방의 영업을 이들 반인이 맡게 된 것은 그런 맥락 위에 놓인다. 성균관은 최고 교육기관이자 국가 이데올로기의 교조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의소로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임병양란을 거치며 재정이 크게 어려워지자, 국가는 이익이 큰 현방 독점 운영권을 반인에게 줬다. 반인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한편, 성균관 재정에 대한 책임까지 그들에게 떠넘긴 셈이다.

 

이익이 큰 사업을 독점하게 된 것은 반인이 구사한 생존전략의 성공이기도 했다. 성균관 토지 등에서 나오는 수입이 현격히 줄어들자 학생들의 찬거리 등을 핑계로 현방 영업을 꿰찬 것이다. 문제는 그 대가 역시 혹독했다는 데 있었다. 현방은 1638~1653년 사이 출현했는데, 한성부(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와 사헌부(오늘날로 치면 감사원)가 곧장 소 도축·판매는 불법이라며 속전을 받아갔고 형조(오늘날로 치면 법무부)도 여기에 끼어들었다. 이들 삼법사금란’(禁亂·불법행위 단속)으로 현방에서 거둬가는 돈은 1704년 한해 7700여냥에 달했고, 여기에 성균관의 자체 수탈, 궁방(왕가)의 수탈까지 더해지며 현방이 한해 수탈당하는 전체 금액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2만냥, 3만냥, 4만냥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삼법사가 현방을 수탈한 이유도 고약하다. 기관 내 말단 일꾼들의 삭료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이를 감당할 재원도 없어, 금란으로 거두어들이는 벌금으로 이를 충당했던 것이다. 현방은 그중 가장 큰 먹잇감이었다.

경성부 도살장 내부 모습. 1917.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푸른역사 제공

 

노비와 쇠고기가 성균관에서 만나 이처럼 온갖 문제들을 드러냈으나, 이를 해결할 능력과 의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반인들은 성균관을 움직여 속목 감축, 공채 제공 등을 요청하며 나름의 생존전략을 구사했고 나중엔 철도(파업), 궐공(유생 식사 제공 거부) 등을 벌이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진 건 거의 없었다. 지은이는 1704속목(속전) 감축을 요구한 성균관 대사성 조태구의 상소, 1862년 궁방 수탈을 막으려 한 현방구폐절목제정과 시행, 1895년 근대적 변화의 시작인 포사규칙제정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조정에서 펼쳐진 온갖 정책 논의들을 지루할 정도로 꼼꼼하게 다룬다. “자기반성과 개혁을 기대할 수 없는, 낡고 화석화된 관료기구의 작동을 직접 느껴보라는 의도다. 해결책은 단순했다. 성균관이 중요하면 근본적인 재정 확보를 위한 대책을 세우면 된다. 쇠고기 식용이 기왕 보편화됐다면 법·제도를 그에 맞게 바꿔야 한다. 말단 관리들의 생계를 위한 금란이 문제라면 급료를 새로 책정하는 등 재정을 가다듬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법 혹은 제도와 현실과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고민하기보다 방치해두는 것이 사족체제의 유일한 대응이었다.” 그에 뒤따르는 고통은 오직 아래로, 아래로만 흘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