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삼랑진에서 내렸다. 이곳은 밀양, 양산,김해 지역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지명의 유래는 밀양강(응천강)이 낙동강 본류에 흘러들어 '세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나루'라 하여 그 이름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수운의 쇠퇴로 예전의 그 영화는 찾을 수 없다. 津으로서 倉(三浪倉, 後漕倉)의 기능이 활발했던 때는 근동의 현풍, 창녕, 영산을 아우르는 여섯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수납, 운송하는 물산의 집산지로서 기능했다. 당시 세곡의 관리수장은 밀양부사였고 운송지휘는 제포만호가 맡았다. 그들이 머물면서 지역민에게 남긴 혜택이나 선행을 기억하기 위해 유애비, 불망비, 선정비의 형태로 남긴 것이 삼랑리 하부마을에 있는 '밀양삼랑진 후조창유지비석군'이다. 물자가 모이는 곳은 늘 말과 이야기가 넘쳐난다.
나루는 도(渡:건널 도), 진(津 나루 진), 포(浦 물가 포)로 표기되고, 여기에 군사적 기능이 더해지면 진(鎭 진압할 진)이 되었다. 나루는 소통의 장이다. 강 건너와 강의 위 아래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교환의 장소였다. 문득 나는 나루인가 자문해 보았다.
경부선 개통 이후 삼랑진은 역으로서 (三浪津驛) 경부선과 경전선의 분기가 이루어지는 교통요충지로 번성했지만 이 또한 옛말이 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밀양은 여기에 비할 거도 아니었제. 사람들로 미어터졌어요. 기차가 설 때마나 사람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어. 돈요, 길에 깔린 게 돈이었어. 여관도 엄청 많았고..."."-<김종길의 남도여행법 中> 1905년 영업을 시작한 삼랑진역에는 증기기관차의 급수탑이 역의 이력을 증명하듯 서 있다. 늘 스치면서 그 정체를 궁굼해 하던 차에 비로소 확인하였다.
아무튼 삼랑진은 큰 변화가 없는 곳이다. 이곳을 출입하기 시작한 것은 팔십년대 말부터 였으니 하마 30년이 넘는다. 삼랑진 IC 삼거리 앞에 있는 습지를 메워 산업폐기물 매립장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인근 주민들이 개발업자를 비롯한 공권력에 대항하여 격력하게 싸운 현장이다. 그때 삼랑진 성당의 역할이 컸다. 국가보안법으로 몇 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계획은 백지화 되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지만 그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한번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다. 읍을 벗어나 강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늘이 우중충해 혹시나 모른다 싶어 접이 우산 하나를 옛 철도관사 마을 앞 마트에서 샀다.
송지교를 건너 미전천을 따라 천변 둑에 자전거 길을 내었다. 읍으로 가는 길은 1022지방도로(천태로) 58번 국도와 만난다. 주민들은 길의 입구에 있는 팽나무 그늘 아래 모여 쉬고 있었다. 사실 그냥 걷고 싶었다. 예정된 일정이 아닌 그냥 다 귀찮고 혼자이고 싶어서 선택한 걸음이었다. 미전천을 따라 낙동강 본류와 만나는 합류 지점까지는 약 1km정도
낙동강 자전거 길은 4대강 공사를 하며 만들어진 강변 국토종주 자전거 전용 도로다. 2012년 4월에 낙동강을 비롯하여, 한강, 금강, 영산강이 개통되었다. 낙동강 구간은 안동댐에서 하구둑까지다. 총 거리389km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기 전과 후 걸어서 도보로 확인한 적이 있다. 눈과 가슴이 아팠던 때였다. 또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낀 때였다. 오늘도 강물은 말없이 흐르지만 발가락과 발목을 뎅강뎅강 잘리운 수변은 더이상 옛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관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강변 자전거도로를 이용할까. MB는 2009년1월 신년사를 통해 "전국 곳곳을 자전거 길로 연결해 생태문화가 뿌리내리게 하겠다"라고 했고 그 결과 4대강 자전거 도로 사업에 2,496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그리고 매년 유지보수비용이 추가로 투입되고 있다. 2013년 10월 감사원은 '사업 타당성이 없어 재검토 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4대강 자전거도로 연간 이용자들도 2012년(174만명)~ 2013(380만명)년 증가추세에서 2014년 급감했다. 2015년 현재 통계치를 알 수 없지만 글쎄
원래 일대는 모래톱으로 이루어 진 곳이다. 주변 지형은 산지와 강의 유규한 흐름 속에서 나름의 메커니즘이 형성하여 정형화 시켰는데, 그걸 일거에 허물고 깍아 내면서 수변 가장자리를 석축 호안으로 만들어 버렸다. 메커니즘에는 강 자체의 불안정한 흐름과 교란이 포함된 시공간적 생태적 구조다.
식생도 이런 것이 아니다. 들판에 망초가 하얗게 무리지어 피어 있다해서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지만 본질은 비켜가선 안된다. 원래 일대에 터잡고 있던 식물상과 그리고 그 식물들이 주변 지형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경관적 가치는 전혀 다른 것이다.
수로가 이어진 강 건너편은 김해 생림면 도요리다. 솟아 오른 산은 사명산이다.
자전거 길은 이런 친절한 경고 안내판에 더하여 터미널과 쉼터가 곳곳에 있지만 과 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한마디로 젠장이다.
미전천과 안태천이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 든다. 이곳 역시 주목받던 강 배후습지이지만 상당부분 훼손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천태산에서 뻗어나온 시루봉이 우뚝하다. 일대가 검세리로 여러 전설이 있다. 작원관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다.
작원관(鵲院關)은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담당했던 영남대로의 첫 관문이다.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鵲)자를 취하였고, 여행하던 관원들이 쉬어 가는 역원이라 하여 '원'(院)자를 취했으며, 그리고 나루터와 관문의 기능을 갖춘 곳이라 하여 '작원관'(鵲院關)으로 이름 하였다고 한다. 양산 원동 중리와 삼랑진 깐촌 사이 천태산이 낙동강으로 벼랑을 세운 곳에 있었다. 자연 천연의 요새로서 신라 적에는 가야를 치기 위해 나아갔던 요로였고 임진왜란에서는 조선관민 700명이 왜군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당시 밀양부사는 박진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동래성 싸움에도 잠시 등장한다, 동래성 싸움은 무장으로서 가야할 전형이 드러난 극명한 사례다.
1760년 변박(卞璞) 부산진순절도(釜山鎭 殉節圖· 보물 391호) 출처: 사하문화원 -다대성전투(규장각 소장) 동래부사순절도(東萊府使 殉節圖·보물 392호)
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진 첨사 윤홍신 , 동래부 부사 송상현은 임지르르 지키다 순절했다. 도우러 왔던 주변 고을 양산군수 조영규 역시 전사했고 울산군수 이언함은 포로가 되었다. 여기에 밀양부사 박신이 왔다가 중과부족으로 후퇴하고, 지례 겁을 먹고 도주한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 그리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선박과 무기들을 바다에 쏟아부은채 달아나버렸다. 당시 경상감사 김수에 대한 평가는 무능했다 고 한다.
역사란 이렇듯 엉뚱한 곳에서도 연결된다. 나는 어떤 처신을 했을까 . 닥쳐 보지 않아 쉽지 않은 판단이지만 이는 위기에 처했을 때 평소 다짐했던 신념의 결과로 귀결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데 달리수가 없을때는 송상현 동래부사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요구한데 대한 답으로 내걸었던 戰死易假道難 으로 임하지 않았을까 .
붙들고 지켜야 할 것이 명예냐 목숨이냐 에서 명분을 우선함이 욕되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소 지루하던 차에 작원관 터 주변의 풍광은 목마른데 들이키는 냉수처럼 느껴졌다.
출처: http://cafe.daum.net/samrangjinyoungman/Mlld/47
출처:http://cafe.daum.net/shinkukju http://hanulh.egloos.com/514
위 두장의 사진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1922년에 발간한 " 부산압록강간사진첩 " 에 실려 있는 것으로 일제가 경부선 철로를 깔면서 이설한 곳이지만 이 또한 1936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원래 작원관은 이곳에서 700~800m 아래쪽 천태산 노적봉 아래 조금 못 가서 있었다고 한다. 아래 두 사진 중 좌측은 정확히 출처를 알 수 없는 상태인데 반해 우측 사진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던 호머 헐버트가 1905년경 미국언론에 게재한 글 중에 실린 사진이다. 이후 1997년 검세리 101번지에 작원관을 복원하였고 비각과 충혼탑이 세워 졌다. 매년 음력 4월18일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다.
출처: http://hanulh.egloos.com/5134018
비각에는 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 작원관원문기지(鵲院關院門基址)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가 있다. 굴다리 하나만 지나면 복원된 작원관으로 갈 수 있었지만 공사중이라서 애써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작원나루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서울 혹은 대전 출장길 늘 이곳을 지날 때면 기록을 했다.
06.7.21 07.5.8 07.9.18
07.11.30 09.3.24
자전거 길이 둔치부에서 산 가장자리 수변으로 전환되면서부터 볼 것들이 늘어 났다. 물가에는 희안하게 생긴 1인용 보트를 타고 베스 낚시에 여념이 없는 한 사내를 보았다. 의자처럼 생긴 보트에 앉은 사내는 발에 물갈퀴를 달았다. 한량이 따로 없었다. 왠지 부럽기도 하였다. 유유자적이
옛 작원관 터 지나 대밭을 가로지른다.
다영한 목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강에서 수상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 문득 아까 베스 낚시하는 사람이나 이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 궁금했다. 즐기는 놀이의 장비가 일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귀나무가 꽃을 피웠다.
교각 형태의 자전거 길 난간 안으로 가지를 내미는 나무들
팽나무가 많았다. 수변에는 왕버들과 갯버들이 자리하고 수변 가장자리에는 갈참나무와 상수리, 느릅나무등이 우점했다.
칡의 창궐은 여기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수변의 경관은 물론이고 기슭 식믈의 생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질긴 칡 덩굴을 끊어 내었다. 손가락 굵기로 자란 칡도 많았다.
이쯤에서 영남대로 이야기를 잠시 해야 겠다. 영남대로는 한마디로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큰길이다. 그리고 이 길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최단거리의 노선으로 서울에서 용인·충주를 거쳐 문경새재(643m)를 통과한 후 상주에서 칠곡·대구를 경유하여 밀양·동래·부산진에 이르렀다. 이 길은 지방 행정 중심지 및 군사 지역을 통과하고 있어 주로 신속한 행정 및 군사 통신을 위한 것이었던 것으로 읽혀 지고 있다.
영남대로에는 30리마다 역참(驛站)을 설치했다. 각 도(道)에는 찰방(察訪)을 두어 역의 감독을 맡겼다. 역리(驛吏)가 사는 역촌에는 숙식을 제공하는 역원(驛院)과 외양간이 있는 역사(驛舍)가 있었다. 영남대로변에는 가로수로서 버드나무, 소나무, 주로 느티나무를 많이 심었고, 일정한 간격(4㎞)마다 장승, 토후, 돌무지, 정자목 등을 세웠다.
차령산맥, 소백산맥 등의 산지를 지나야 했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이 주로 보행과 말 또는 소의 등에 짐을 싣는 길마를 활용한 수송이었으므로 지형적 난관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 육로 수송이었다. 서울의 한강나루와 상주(진두리)의 낙동나루를 제외하면, 하천을 건너야 하는 번거로움이 거의 없었다. (글 참조 :다음 블로그 골목에서 놀고싶어요 )
조선시대에는 6개의 큰 대로가 있었다. 한양 서울을 중심으로 전자한 동래~한양 노선인 영남대로 외 한양에서 평해까지의 평해로. 양주, 영평을 거쳐 함흥. 서수라 구간의 경흥로, 고양, 파주, 개성을 거쳐 의주까지의 길인 의주로, 김포, 통진, 강화구간의 강화로 그리고 과천,수원, 진위를 거쳐 해남에 이르는 삼남로가 있었다.
출처: 국제신문
원동에서 삼랑진 또는 밀양에 이르는 구간은 경부선 철도와 동행하는 편이다.
잔도 근처 이 또한 눈길이 가는 곳이었다. 이 옹벽은 일제가 1937년쯤 쌓았다고 한다. 감쪽같다.
영남대로 구간 중 작원잔도(鵲院棧道)라는 명칭이 붙은 곳이있다. 말 그대로 험한 벼랑에 암반을 굴착하거나 석축을 쌓아 도로를 내었는데, 이 길을 조선왕조 실록에는 잔도라 하였고, 대동여지도에는 작천(鵲迁)이라 불렀다. 영남대로상에는 황산잔도, 작천잔도와 토끼벼루(점촌-문경)가 대표적이다.
황산잔도는 현재 물금읍의 황산역에서 원동에 이르는 낙동강 강변가의 절벽에 만들어진 길이고, 작천잔도는 양산 원동(용당리)의 하주막에서 밀양의 삼랑진(더 정확히는 까치원 혹은 깐촌)에 일는 벼랑길을 지칭한다. 근현대기 문헌에서는 작원관과 잔도를 합쳐 작원잔도 작천잔도로 부르기도 하였다. 작원잔도는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믄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잔도로서 역사적 ,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신동국여지승람' 밀양부 편에 " 작원잔도는 밀양부에서 동쪽으로 41리(16킬로미터)에 위치해 있다. 작원으로부터 5~6리 쯤 내려가면 낭뜨러지를 따라 잔도가 매우 험한 길이다. 그런데 그 한구빗길은 돌을 깨뜨려 길을 만들었는데 천길이나 되어 보이는 짙푸른 빛을 띤 강물이 흐로고 있다. 사람들이 이 길을 다닐 때는 모드들 마음 조리고 두려운 걸음으롷 다닌다. 예전에 한 수령이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는데 그 후로 사람들은 그 바위를 원추암이라 불렀다"
이길을 지키내기 위해 애썼던 이들이 노심초사 했던 장소다. 자전거 길을 내면서 혹시나 허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 비켜났다.
새삼 그들의 노고를 기린다.
옛 작원관 터인데 17세기 이후이곳에 위치했는데 936년 대홍수때 수해를 입어 헐렸고 당시 걸려 있던 현판은 밀양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1936년 경부선 철도를 복선화 하면서 작원관 옛 터에 작원관 원문기지비를 세웠다가 이후 이 비석을 북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산잠자리처럼 보이는데 줌을 이용해서 찍다보니 정확한 동정은 어렵다
양산과 밀양의 경계지점,
바암봉 뒤 무척산이 드리우고 있다.
이 강변에서 다시 물류를 생각한다. 애초 한반도대운하를 통해 물류를 이야기 했다. 우끼지 말라고 했지만 권력의 중심부에 선 그 자와 그 모리배들은 기어코 강을 절단내고 말았다.
좌측 시루봉이 우뚝하다.
신과 양말을 벗고 등을 붙이고 누웠다. 절반쯤 왔으려나 돌아서 삼랑진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답은 간단하다. 계속 전진이 있을 뿐이다. 거침없이 나간다는 것 작금의 내 생활의 일부에서 요구하는 판단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중간 중간 뻐꾸기가 울었다.
고이면 잡념이 꼬리를 문다. 다시 일어나 걷기로 작정한다. 그래야만 한다.여름해 길기는 하지만 할일이 있다.
양산시 소속의 관리팀이 제초를 하고 있다. 확인해보니 식재목 중심으로 웃자란 풀들만 깍아 내고 있었다.
잠시 비켜나 이웃한 관리용 도로를 따라 걸었다. 배내 계곡의 토곡산 줄기를 비롯하여 물금의 오봉산 자락까지 겹쳐 보인다. 좌측의 연분홍 흰 꽃들은 패랭이다
김해쪽 뒷편 무척산 자락이 보인다. 다른 곳 보다 단풍잎돼지풀이 많이 보였다.
원동면 용당마을에는 세 마리의 용의 전설이 전해지는 가야진사가 있다. 나루터 신(津神)을 모시고 있는 가야진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대.중.소사 중 중사(中祀)에 해당하는 제례를 지내왔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제당이 헐리고 용신제가 금지당하기도 하였다.
가야진사 내부에는 화룡도가 그려져 있고 주민들은 해마다 용신제를 지낸다. 제상에는 메 세그릇과 잔 세 개, 탕 세 그릇이 진설되고, 제가 마치면 용소에 돼지를 던지며 ‘침하돈(돼지가 가라 앉습니다)’ 이라고 세 번 외친다.
출처: 부산일보 김태권기자 출처: 다음 블로그 산따라 길따라
08.3.1 낙동강 대운하 반대 현장 답사 때
07.9.22
15.6.6
가야진사 맞은편 김해쪽에 용이 물속으로들어가는 형상을 한 용산이있고, 그 아래 용이 살았다고 하는 용소가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신대구고속도로 건설과정에서 용산이 잘려나갔고, 이에 주민의 항의하자 다시 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창 낙동강을 오르내릴 때 현장을 찾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주변은 딸기밭이었고, 감자밭이었다. 지금은 망초와 잔개자리 등 귀화식물들이 점령했다.
당곡마을 쯤에서 더 가봐야 비슷한 환경의 되플이라 판단하고 화포습지로 향한다
2000년대 초 낙동강유역청 발주로 내륙습지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위성지도에서 보듯 그때만 하더라도 습지의 매립과 농지로의 전환은 미미했다. 하기사 그때도 이미 원동습지의 육화상태가 상당히 진행되었을 때 였다. 지금은 더 많은 잠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랬건만 확실히 보이는 것은 달랐다.
그것은 사람과 마을이 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경관 또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경부선 철도 제방과 1022번 지방도로 둘러싸인 모양인데 둘레4.8km, 길이1.9km, 폭 150~500m, 넓이 57.3ha 가량 된다. 원동습지는 낙동강 본류의 배후습자로 낙동강의 흐름 방향(북서→남동)과 나란히 놓여 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일 때 쌓은 둑 때문에 낙동강과 만나지 않는다. 낙동강과 방향이 비슷한 당곡천을 따라 형성돼 있다. 당곡천은 낙동강과 합류하지 않고 북→남 방향의 원동천과 먼저 하나가 된다.
습지 식물은 총 47과 123속 156종 1아종 15변종의 172분류군으로. 이중 대형 수생식물(환경부, 2000)은 18종류이었으며, 이들을 생활형으로 구분하면, 정수성이 14종류로서 대부분이었으며, 부엽성이 3종류이었고, 침수성이 1종류이었다. 식물구계학적 특정 식물종은 Ⅳ등급종은 2종류, Ⅲ등급종이 1종류, Ⅰ등급종은 6종류의 9종류로 나타났다. 원동습지에서 식물군락별 분포 면적은 물억새군락이 전체 면적의 12.4ha(36.3%)로 가장 넓고, 선버들군락 9.8ha(28.7%), 갈대군락 6.8ha(19.9%), 줄 군락 1.2ha(3.5%) 등의 순이었으며, 검정말, 연꽃, 용버들군락 등이 각각 0.4ha(1.2%)로 분포 면적이 가장 적었다.
인된 어류는 32종 324개체로 그 중에서 붕어(Carassius auratus), 돌고기(Pungtungia herzi), 피라미(Zacco platypus) 및 베스(Micropterus salmoides) 등 4종은 모든 조사 지역에서 채집 또는 확인되었다(2000년 전국 내륙습지 학술조사에서)
언급했듯 습지 내 많은 지역이 농지로 개발되고 있다. 그리고 습지구간 사유지가 많다는 것도 문제다.
90년대 중반 이곳으로 유입된 베스를 지역언론을 통해 알려내기도 했다.
습지의 이해와 가치 또 기능에 대해 인식의 진전이 있었지만 여전히 습지는 쓸모없는 땅으로 취급된다. 4대강 공사를 하며 하도 습지의 보전이 고려되지 못힌 것ㅇㄴ 그 적나라한 실상이다.
바람이 떼로 불고 한동안 그 바람 속에 서 있었다.
대충 들러 보고 다시 원동역을 향해 이동하다 깜짝 놀란다. 도로변 버드나무 대부분이 용버들이었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용버들나무 농장이었다.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토교통부의 지방하천정비계획에 따라 당곡천의 하천정비가 예고되어 있다. 양산시는 수변공원을 조성해 주민의 휴식공간을 마련하고 생태습지 탐방데크 등도 설치해 관광·휴양지 기능도 갖출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사업은 2018년 완공 예정이며, 국비 148억 등 모두 247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된다. 한편으론 걱정이다. 말만 하면 수변공원, 생태탐방 테크설치 등으로 관광과 휴양을 도모 한다는 그 발상이
배내계곡으로부터 원동천이 흘러와 낙동강과 합류한다. 원동습지는 당곡천과 더불어 원동천이 물길이다. 낙동 제방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또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지민
수변 버들 군락은 이 지역이 아직은 건강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편 지난 2011년 경남도의 남강물 부산 공급 대안과 관련 카톡릭대 김좌관 교수는 남강 하류와 남지∼삼랑진 구간, 양산 원동지역 등에 시범적으로 3305㎡(1000평)에서 3만 3057㎡(1만 평) 정도로 식수 전용 습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어떻게 됐을까
마을로 들어 선다. 원동 역시 큰 변화는 없다. 저녁 무렵 주민들은 남녀 구별하여 담소를 나누거나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들의 일상이었다.
원동초둥학교 가는 길목
적당한 텃밭을 가진 가옥을 만났다. 좀은 특이하다 싶어 담아 보았다. 일식 건물에다 기와 형태만 빠꾼 것 같기도 하고
원동역사 내
원동역은 간이역이다. 이른바 KTX도 새마을도 서지 않는다.
열차를 기더리는 사람도 무엇을 타고 가야할 지 잘 안다. 역부러 일찍 와서 서성이지 않는다. 시간에 맞추어 와서 타고 갈 따름이다.
기차 시간을 제대로 몰랐던 외지인인 나만 서성거렸을 뿐이다.
간만의 돌발적 걷기는 피곤했지만 유익했다. 내 마음의 평정을 얻었기 때문이다.
世事一呵呵 (세사일가가)
無寃亦無懼(무원역무구)
싫어 - 펄시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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