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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

by 이성근 2017. 10. 1.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 한흥섭 지음/사문난적 펴냄

 

저자 한흥섭은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뒤늦게, 조요한趙要翰 선생의 예술철학(경문사)이란 책을 통해 미와 예술에 대한 학문인 미학美學을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선생님의 지도로 장자莊子의 자유로운 정신세계에 대한 동경이, 그리고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인 혜강의 극히 사변적인 음악론인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이 각각 석사와 박사논문의 테마가 되었다. 박사 후 전혀 뜻밖에 한국전통음악(국악)과 인연을 맺게 되어, 지금까지 10년 이상 그에 관한 연구만 해 오고 있다. 그동안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 음악(국악)관련 강의를 하였고, 홍익대 인문과학연구소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는 저술 작업에 몰두하며, 가끔 서울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간 지은 책으로는 중국 도가(道家)의 음악사상, 장자의 예술정신, 악기로 본 삼국시대 음악문화, 한국의 음악사상, 우리 음악의 멋 풍류도, 한국 고대 음악사상, 고려시대 음악사상, 아악혁명과 문화영웅 세종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성무애락론, 혜강집, 예기·악기등이 있다.

 

목차

 

들어가는 말

서문 - 공자는 왜 불륜을 노래했을까

 

1. 물수리 / 2. 도꼬마리 / 3. 여치 / 4. 매실을 던진다네 / 5. 들엔 죽은 노루 있네 / 6. 참한 아가씨 / 7. 새 누대 / 8. 두 아들이 배를 타고 / 9. 담장의 찔레나무 / 10. 님과 함께 늙어야지 / 11. 메루리 쌍쌍이 노닐고 / 12. 상중에서 / 13. 여우가 서성거리네 / 14. 모과 / 15. 칡을 캐러 / 16. 대부 수레 / 17. 언덕 위에 삼밭이 있고 / 18. 둘째 도령님 / 19. 한길로 따라 나서서 / 20. 여자의 속삭임 / 21. 수레에 함께 탄 아가씨 / 22. 산에는 부소나무가 / 23. 떨어지려는 마른 잎이여 / 24. 얄미운 사내 / 25. 치마 걷고 / 26. 멋진 님 / 27. 동문의 텅 빈 터에는 / 28. 비 바람 / 29. 그대 옷깃은 / 30. 동문 밖에를 나가보니 / 31. 들엔 덩굴풀 덮였고 / 32. 진수와 유수 / 33. 동쪽에 해 떴네 / 34. 남산 / 35. 구멍 난 통발 / 36. 수레 타고 / 37. 분강의 습지에서 / 38. 땔나무를 묶고 나니 / 39. 우뚝 선 팥배나무 / 40. 갈대는 / 41. 동문에는 흰느릅나무 / 42. 형문 / 43. 동문 밖의 연못은 / 44. 동문 밖의 버드나무 / 45. 제방에는 까치집 있고 / 46. 달이 떠 / 47. 주림 / 48. 못둑 / 49. 하루살이

 

저자 주

시경원문

참고 자료

 

출판사 서평

공자의 인간적 참모습을 만나다

 

산앵도나무 꽃잎이

살랑살랑 흔들리네.

어찌 그립지 않으리요마는

그대 머무는 곧 너무 머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지,

어찌 멀리 있다고 하겠는가?”

― 《논어論語· <자한子罕>

 

공자만큼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심성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의 이미지는 과연 공자의 참모습일까? 혹시 공자를 성자聖者로 떠받드는 후학들에 의해 원래의 모습이 왜곡(신격화, 우상화)되지는 않았을까?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의 저자인 동양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한흥섭 박사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저자는 공자의 참모습이 이후의 유학자들, 특히 시서詩序의 저자나 주자朱子에 의해 상당 부분 변질, 왜곡되었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의 저자가 이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공자 자신이 직접 편찬하여 전한 시경詩經의 해석을 둘러싼 문제들이다. 저자에 의하면, 주자에 의해 근엄한 도덕군자로 탈바꿈한 공자의 참모습은 실상 인간의 성정을 두루 이해하면서 그 약점마저도 감싸 안으려 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모습이다.

 

예컨대 공자는 다양한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기도 하였지만, 노래 부르는 것도 아주 즐겨했다. 논어에 보면 그는 다른 사람이 노래를 잘하면 그냥 있지를 못하고 반드시다시 부르도록 청하고는, 뒤이어 따라 부를 정도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공자의 이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모습은 그동안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즐겨 부른 노래가 바로 시경의 시(노래)들이다. 또한 공자는 젊은이들에게 호색好色을 경계하라고 충고는 하였으나, 우리가 생각하듯 호색을 그렇게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음을 논어에서 두 번씩이나 확인할 수 있다. ‘호색을 인간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생명력의 발현으로 보았을 뿐, 이를 윤리적으로 부정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공자의 이런 뜻밖의 시각 역시 그동안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경전이 아닌 노래로서의 시경

공자는 자신이 즐겨 불렀던 시경노래들을 자기 자식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이상적인 정치지도자인 군자君子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으로 논어에서 누차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런 시경의 노래들 속에 남녀의 불륜을 노래한 불륜시가 존재한다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사실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의 저자가 아니라 바로 주자였다. 주자가 누구인가? 그는 과거 중국과 조선 왕조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거의 700여년이나 장악한 유학의 완성자가 아니던가? 그는 이런 불륜시(주자 자신은 음분시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를 공자께서 시경에 편찬한 이유를 사람들에게 경계 삼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주자의 주장은 정당한가?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의 저자는 단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시경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기원전 11세기 중엽~기원전 6세기 중엽) 시가집詩歌集으로 공자 당시에는 그냥 또는 시삼백으로 불렸다. 말하자면 경전이 아니라 그냥 노래가사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단순한 노래가사집인 시삼백은 공자에 의해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면서 한대漢代 이후 경전으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경전으로 격상되면서 자연히 그 안에 포함된 남녀의 솔직 대담한 사랑 노래는 경전의 위상에 걸맞게 변질, 왜곡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반영한 대표적인 해설서가 바로 시서詩序이다.

 

시서와 주자의 해석에 맞서다

시서시경305편 각 시편마다 짤막하게 그 대의大意를 밝힌 글이다. 그런데 이 시서의 견해에 따르면 남녀의 사랑 노래는 시경에 단 한 편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남녀의 사랑 노래는 사실 그대로 남녀가 자신들의 애정사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이를 빗대 제3자가 당시 군주나 세상 풍속을 완곡히 풍자하거나 찬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시를 오로지 정치 교화敎化의 도구로만 바라본 필연적인 결과로서, 주자의 관점에서 보면 철저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시서의 해석은 무려 천년 이상 시경의 공식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시서의 작자를 공자나 그 제자인 자하子夏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주자 역시 처음에는 이런 시서의 견해를 수용했으나 후에는 이를 비판하게 된다. 주자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시서의 왜곡을 치밀한 고증을 통해 과감하게 바로잡았다는 점이다.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는 한편으로 주자의 이러한 관점에는 동의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서와 주자의 시경해석에 조목조목 이의를 제기하면서 공자의 인간적인 참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우선 저자가 주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부분은 불륜시의 존재이다. 시경에는 주자의 주장대로 엄연히 불륜시가 존재한다. 주자의 위대성은 바로 시서의 해석과는 달리 불륜시를 불륜시로서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의 저자는 불륜시의 존재 의미와 불륜의 기준에 대해서는 주자와 생각이 다르다. 먼저 주자는 불륜시의 존재 의미를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이를 경계 삼아서 올바른 마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공자가 시경에 이런 시들을 넣은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저자는 공자가 불륜시를 시경에 편찬한 이유를 그것이 인간의 거짓 없는 또 다른 모습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본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공자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이 그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주자가 공자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라 주장한다.

 

동양적 정감 세계의 원형과의 접속

예로부터 시경에 대한 번역은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힌다. 그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으나, 대개는 한시漢詩에서의 한자漢字가 지닌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모호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의 저자는 자신의 시경해석의 정확성 혹은 신뢰성을 기하기 위해 시서와 주자의 해석을 함께 소개하여 비교 확인할 수 있도록 하면서, 시경의 원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시경의 노래들을 경전으로 격상되기 이전의, 공자가 선정하고 정리한 단계에서의 시삼백으로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저자는 공자 당시의 시삼백을 보려는 것이지 공자 이후 경전으로서의 시경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주자가 그러했듯이 노래를 노래 자체로이해한다는 것이며, 시경(특히 민간의 노래인 국풍國風’)원초적 의미에 접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동안 시경에 두텁게 덧씌워진 권위적이고 도식적인 일체의 유교적 해석으로부터의 탈피, 탈주를 뜻한다. 그렇게 해서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는 거칠고 투박한 형태로 내장되어 있던 동양적 정감 세계의 원형原型과의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이런 작업은 공자가 그랬듯이 시삼백의 의미를 이 시대에 새롭게 재발견하고 재해석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원래의 공자의 관점을 회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 결과 잃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교조적 윤리의식이지만, 얻는 것은 늘 그러한인간정감의 진실(진정성)일 것이다.

 

 

마광수 죽음의 배후 세력

나의 인격이 이벤트화(event)되거나 스펙터클화(spectacle)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한 사람이나 집단이 사건화되거나 구경거리가 되고 나면, 대중은 더 이상 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 전 국민의 이목을 끄는 사건이나 구경거리가 되면서 한 사람 또는 특정 집단은 어떤 새로운 해석이나 해명에도 끄떡하지 않는 영구불변한 기호가 된다. 김부선은 대마초녀’, 김용민은 막말꾼’, 이석기는 빨갱이’, 동성애자들은 항문으로 하는 놈들이고, 95일 타계한 마광수는 색마였다.

 

이지영 그림

 

물론 기호가 되는 것에 부정적인 함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스미디어가 범람하고 자기 홍보가 대세인 시대에 우리는 기호를 얻기 위해 만인과 쟁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를 획득해야 주목받고 비로소 자신을 팔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앞서 열거한 것과 같은 부정적인 기호는 폭락한 주식과 같다. <즐거운 사라> 사건 이후 마광수는 꾸준히 신간을 냈으나 독자 대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구속 사건은 독자로 하여금 마광수를 안 읽어도 뻔히 아는 작가로 만들어놓았다. ‘색마는 포르노 소설을 쓰죠!’

 

인격이 이벤트화한 사람은 더는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사람, 새로운 이해를 구할 수 없는 사람, 곧 살아 있는 시체가 된다. 마광수쯤은 안 읽어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이름난 문학평론가도 수두룩하다. 예컨대 그가 타계한 직후, 장석주는 어느 일간지의 추도문에 이렇게 썼다. “그는 <소돔 120>을 쓴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이고, <눈 이야기>를 쓴 조르쥬 바타이유였다.” 고인을 추앙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광수는 페티시즘 성향이 강한 이성애 범성욕주의자였지, 스너프 필름(Snuff Film)처럼 생명을 파괴했던 사드나 바타이유의 시체애호증적 일탈 성욕과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다. <성애론>(해냄, 1997)을 비롯한 무수한 에세이에서 마광수는 자신의 사도마조히즘을 하기 또는 게임으로 풀이했다. 그는 가학적 고문이나 살인 등을 연상시키는 사드와 자신을 명백하게 구분하면서, “달콤한 탐미성에 바탕을 두고 관능적인 상상력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사도마조히즘이 바로 내가 바라는 사도마조히즘이라고 밝혔다. 그의 사도마조히즘은 성애의 기쁨을 배가하기 위해 고안된 중국과 인도의 방중술에서 기원하고, 사드나 바타이유의 그것은 독신(瀆神)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되찾는 게 목적이다.

 

<즐거운 사라>의 작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은 수사를 지휘했던 심재륜·김진태 검사도, 음란물이라는 감정을 해준 문학평론가 이태동과 법학자 안경환도, 수사를 의뢰한 손봉호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 이사장도, 문학계를 대표해 유권해석을 내려준 이문열도 아니다. 기껏해야 이들은 인격 살상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으며, 이처럼 작은 그림으로는 필화 사건의 커다란 배후를 그릴 수 없다. 주범을 찾으려면 한흥섭의 <공자, 불륜을 노래하다>(사문난적, 2011)를 펼쳐야 한다.

 

공자(기원전 551~479)가 직접 편찬했다는 <시경>은 중국 문학의 비조이자 유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시경>은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유교 국가였던 한국 문학의 시조도 된다. 공자는 자신이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노래 3000여 편 가운데 305편을 가려 뽑은 다음, 자신의 제자들에게 덕을 지닌 군자가 되려면 이 노래들을 듣고 외워서 그것을 온전히 몸으로 체득하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문제는 성현이 고른 시삼백(詩三百)’ 가운데 꽤 많은 시가 청춘 남녀나 기혼 남녀의 사랑 또는 불륜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노골적인 성애와 남매간의 근친상간이 묘사된 것도 있고, 남창이 화자로 등장하는 시도 있다. 어쩌자고 공자는 이처럼 추잡스러운 음분시(淫奔詩)’를 버리지 않고 취했을까.

 

야차들은 타인의 불운을 지나치지 않는다

초기 유학자들은 성현이 편찬한 다수의 노래 가운데 음란한 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305편의 시마다 짤막한 주석을 달며 결혼한 부부관계에서 벗어난 모든 형태의 연정을 제3자가 당시 군주나 세상 풍속을 완곡히 풍자하는 풍자시로 해석했다. 이들은 <시경>에 나오는 남녀 사이의 정감 또는 욕망을 인간 고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런 정감이나 욕망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풍자를 통해 추방되거나 부정되어야 했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근엄한 경전에 음란과 불륜이 묘사된 시가 있다고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 유학의 완성자인 주자(기원전 1130~1200). 그는 <시집전(詩集傳)>이라는 <시경> 해설집을 쓰면서 무려 30여 편에 이르는 시를 음분시로 단정 지었다. 그러면서 성현이 경전에 음분시를 넣은 연유를 아주 좋은 시뿐만 아니라 아주 나쁜 시도 성정의 올바름을 얻도록 하는 데 쓸모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흥섭은 주자보다 19편 더 많은 49수를 음분시로 간주하고 재해석을 하면서, 공자의 시관(詩觀)과 색관(色觀:성애관)거짓 없고 자연스러운인간의 성정을 인정하는 것이었다고 반박한다. 공자 사후 1000년 이상 전해 내려온 초기 유학자의 주석이나, 그 후로 700년 동안 동아시아의 문학사를 장악하게 되는 주자의 <시집전>은 모두 문학을 백성 교화의 수단으로 보았다. 21세기를 눈앞에 놓고도 한국인의 뇌리 속에서는 유교적 이상국가에 봉사했던 전통적인 문학관이 사라지지 않았고, 바로 이것이 마광수를 처단하게 된 근본 배경이다.

 

<즐거운 사라>와 같은 필화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국 문인들은 꿩 먹고 알 먹는 잔치를 벌인다. ‘마광수의 소설은 쓰레기다, 그러나 그를 감옥에 보내는 것은 반대다.’ 이들은 이런 기회에 자신의 높은 문학적 감식안도 뽐내고, 헌법이 보장한 보편적 가치의 수호자도 되고 싶어 한다. 어떤 결벽과 어떤 강박이 당신들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도록 시켰는가. 쉼표(,) 앞의 전제는 항상 도움이 필요한 작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예컨대 최영미의 시는 상업적이다, 그러나 그녀가 A호텔에 했던 제안 때문에 조리돌림을 당하는 것으로부터는 지켜주고 싶다라는 발언은 이미 그녀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신이 발언한 그 자리는 최영미의 문학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야차(夜叉)들은 자신의 균형 감각을 전시할 수 있는 타인의 불운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 장정일 (소설가)927 한겨레21

 

김천택은 왜 '19' 노래를 엄선했을까



김천택은 <청구영언>19금 노래인 만횡청류를 포함시켰다. 비록 음란하고 저속하지만 꾸준히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사람 기다리기 참 어렵군. 사람 기다리기가 참말 어려워. 닭이 세 번 우니 벌써 밤은 5문밖에 나가 바라보아도 문밖에 나가 바라보아도. 이윽고 개 짖는 소리에 백마 탄 님이 넌지시 돌아드니오늘밤 두 사람의 즐거움이야 끝이 없겠지?”

 

김천택의 <청구영언> ‘만횡청류에 등장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여성은 백마 탄 남자를 밤새도록 기다린다. 얼마나 애를 태웠으면 사람 기다리기가 참 어렵고(待人難)’ ‘문밖을 나가 바라본다(出門望)’는 말을 반복했을까. ‘백마 탄 남자라는 말은 바람둥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애타게 애타게 기다렸는데, 5(새벽 3~5시 사이)이 되어서야 남자가 나타난다. 애간장이 녹은 여심은 뜨거운 관계를 기대한다. “그 즐거움이 끝이 없겠지?”하는 바람을 노래에 한가득 담았다.

 

깁적삼 안섶이 되어 쫀득쫀득 대보고 싶어라

그렇다면 이 노래는 어떨까. 상사병의 괴로움을 구구절절 표현하고 있다.

님 그리워 깊이 든 병 어이하면 고쳐낼까. 의원 청하여 약 짓게 하고 소경에게 푸닥거리 시키며 무당 불러 당줄긁기 한들 이 모진 병이 나을쏘냐. 진실로 님과 함께 있

 

으면 바로 나을 듯하구나.”

 

사랑하는 님이 보고 싶어 얻은 병은 그 누가 와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치유책이 딱 하나 있다.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이 병은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짝사랑의 아픔을 19금을 넘나들며 부른 노래도 있다.

각시네 옥 같은 가슴팍을 어떻게 좀 대어볼 수 없을까. 명주 자줏빛 화장저고리 속에 깁적삼 안섶이 되어 쫀득쫀득 대어보고 싶어라. 이따금 땀나서 붙기만 하면 떨어질 줄을 모르더라.”

노래의 주인공은 남성이다. 좋아하는 여인의 옥 같은 가슴을 직접 만져볼 수 없지 않은가. 남성은 차라리 그 여인의 깁적삼 안섶이 되고 싶다고 애를 태운다. 그래야 여인이 땀을 흘릴 때면 그 여인의 가슴과 닿을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당신은 나만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남자는 죽도록 어떤 여인을 사랑하는데, 여인은 그 사랑을 몰라준다는 것을 한탄한 노래는 또 어떤가.

 

나는 님 생각하길 엄동설한에 맹상군의 호백구같이 하는데. 님은 나를 삼각산 중흥산의 이빨 빠진 늙은 중놈이 살 성긴 얼레빗 보듯 하는구나.”

 

맹상군의 호백구(狐白)’란 무엇인가. 전국시대 제나라 재상인 맹상군이 진나라 임금에게 바친 옷이다.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을 여러 장 모아 만드는 옷이다. ·귀족들만 입을 수 있는 명품이다.

 

남자는 짝사랑하는 여인을 맹상군의 호백구처럼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여인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여자가 남자를 머리 깎은 늙은 중이 성긴 얼레빗처럼 대한다는 것이니 얼마나 절묘한 하소연인가.

 

복음성가로 만들었으나 폭넓은 사랑을 받은 노래 가운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다.

 

그런데 <청구영언> 중에는 완전 반대의 노래가 있다. 요컨대 당신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눈썹은 수나비 앉은 듯 이빨은 박씨 까 세운 듯/날 보고 방긋 웃는 모양은 채 피지 못한 삼색 복사꽃이/하룻밤 비 기운에 반만 절로 핀 형상일세그려./네 부모가 너 만들어 낼 적에 나만 사랑하라 하신 거야.”

 

너희 부모가 너를 낳은 이유는 딱 한 가지, 평생 나만 사랑하라는 것이었단다.

 

만횡청류의 노골적인 노래.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하는 농도짙은 성묘사가 눈에 띈다.

 

1. 만횡청류의 노골적인 노래.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하는 농도짙은 성묘사가 눈에 띈다

2. ‘각시네 옥같은 가슴팍하며 깁적삼 안섶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에 닿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노래.

3. 백마탄 남성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심을 표현한 노래.

4.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노래.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물방아 찧는 소리로구나

그러나 지금까지 인용한 노래들은 양념에 불과하다. ‘19딱지를 붙여야 할 노래가 한둘이 아니다.

 

들입다 바드득 안으니/ 가는 허리 자늑자늑 빨간 치마 걷어올리니/ 눈같은 살결이 풍만하고 다리를 들고 걸터앉으니/ 반쯤 핀 홍모란이 봄바람에 활짝 피었구나/ 나아가고 물러가길 반복하니/ 숲이 우거진 산속에 물방아 찧는 소리로구나.”

 

그야말로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이다. ‘들입다 바드득 안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껴안아 주세요. 갈비뼈가 똑 부러지도록이라는 우스개 가사가 절로 떠오른다. 다음 노래는 포복절도 자체다.

 

반여든(마흔 살)에 처음으로 계집질하니/ 여럿두렷 우벅주벅 죽을 뻔 살 뻔하다가/ 와당탕 들이달아 이리저리 하니/ 노도령의 마음 흔들흔들 진실로 이 재미 알았던들/ 기어 다닐 때부터 했겠네.”

 

두 작품 모두 의성어와 의태어를 동원해서 성행위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뿌리 깊은 인습과 윤리의 벽을 깬 과감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또 어떤가.

 

얽고 검고 키 큰 구레나룻 물건조차 길고 넓다. 작지 않은 놈 밤마다 배에 올라 조그만 구멍에 큰 연장 넣어두고 흘근할적 할 때는 애정은 커니와 태산이 덮어누르는 듯 잔방귀 소리에 젖 먹던 힘까지 다 쓰이는구나. 아무나 이놈을 데려다가 백년 함께 살고 영영 아니 온다 해도 어느 개딸년이 시앗샘을 하겠나.”

 

네 남편한테 이른다. 김서방하고 삼밭에 들어간 거

심지어는 유부녀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제3자가 당신 남편한테 모든 사실을 고하겠다고 협박하는 노래도 있다.

 

일러나 보자 일러나 보자. 내 아니 이르리 네 남편한테. 거짓으로 물 긷는 첫 물통은 내려 우물전에 놓고/똬리는 벗어 통꼭지에 걸고/건넌집 작은 김서방 불러내/두 손목 마주 덥석 쥐고 수군수군 말하다가/삼밭으로 들어가서 무슨 일 하는지/잔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드라고/내 꼭 이를 거야. 네 남편한테.”

 

협박은 물론이고 두 불륜남녀의 행각을 마치 생중계하듯 묘사하고 있다.

 

물을 길러 우물가에 간다고 해놓고는 다른 남자(김서방)를 불러내 삼밭에 들어가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이다. 삼밭이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마구 흔들거렸다는 것이니 얼마나 노골적인 표현인가. 그걸 또 네 남편한테 고자질하겠다는 것이니.

 

사라진 노래가 분하고 아까워

<청구영언>이 무엇인가. 1728(영조 4) 김천택이 고려말부터 편찬 당시까지 개인문집이나 구전으로 전하던 가곡 노랫말 580수를 한데 모아 시대별·인물별로 엮은 책이다. 이 노랫말들을 한글로 실었다는 것이 중요한 착안점이다.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와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단심가’, 기생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까지 임금, 사대부, 기녀, 중인, 무명씨의 작품을 모두 모았다.

 

각시네 옥같은 가슴팍하며 깁적삼 안섶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에 닿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노래.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지은 속마음은 발문에 잘 나와 있다.

 

무릇 (사대부가 즐기는) 문장(중국글)과 시율(중국시)은 책으로 편찬돼 오래도록 전해진다. 그러나 (일반 백성이 즐기는) 노래(영언·永言)는 한때 입으로만 불리고 저절로 사그라든다. 이것이 어찌 분하고 아깝지 않은가. 고려 때부터 조선까지 이름난 분이거나 큰 선비거나, 혹은 여느 백성이나 아낙네들의 노래까지 하나하나 주워모아 틀린 것은 고치고, 깨끗이 적어 책 한 권을 만들어 <청구영언>이라 한다. 입으로 외우면서 마음으로 생각하고 손으로 만지면서 눈으로 바라보아 널리 퍼뜨리기를 바란다.”

 

사대부가 짓고 읊은 글이나 시도 가치가 있지만, 민간에서 사랑받는 노래, 즉 대중가요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러나 사대부의 글과 시는 전해지지만, 정작 백성들의 애창곡은 한때 유행하고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김천택은 그것이 분하고 아까워(慨惜)’ <청구영언>을 편찬했다는 것이다.

 

노래는 말을 길게 빼는 것(영언)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궁금증을 풀어본다. <청구영언>이라 했을까.

 

청구(靑丘)’는 예부터 동방세계를 의미했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은 청구를 종종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표현했다. 단적인 예로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 왕손인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책봉하면서 공의 조상은 그 덕과 공이 크고 높아서 위세가 청구에 떨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영언(永言)’은 무엇인가. <서경>()’에서 인용한 말이다.

 

시란 말에 뜻이 담긴 것이다. ()는 말을 길게 빼는 것이다(詩言志 歌永言).”

 

무릎을 치게 된다. ‘시는 말에 뜻을 담은 것이라는 표현도 그렇지만, 노래()말을 길게 빼는 것(永言)’이라는 정의도 절묘하다. 그러니까 노래()’영언이라는 것이다. <청구영언>은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노래를 모은 노래책이다. 김천택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양반의 노래나 백성의 노래나 다를 수 없다. 그 모두가 조선인이 예부터 사랑해왔던 노래일 뿐이다.’

 

백마탄 남성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심을 표현한 노래.

 

5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우는 모습을 묘사하며 네 남편한테 이른다고 협박하는 노래가사

6. 나이 40에 처음 경험한 남녀관계를 묘사한 노래. “이럴 줄 알았다면 어렸을 때부터 했을 걸하고 눙치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7.당신은 나만 사랑하라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부른 노래.

 

노래 덕후김천택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기획하고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김천택은 김성기의 작품 발문에서 나는 노래에 벽()이 있어서 국조 이래 이름 있는 사대부와 여항인의 노래를 뽑아 모았다고 밝혔다.

 

이라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마니아혹은 덕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천택은 김성기의 악보를 구하기 위해 온 군데를 다 수소문하고 돌아다녔다. 마침내 문욱재의 처소에서 김중려(1675~1716)에게 어렵게 김성기의 작품을 구했다. 그런데 수소문해서 작품을 구할 때까지 10년 넘게 걸렸다. 과연 노래수집 덕후임이 틀림없다.

 

김천택은 20대 후반부터 가곡 노랫말을 수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순히 노랫말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 수집한 노랫말을 일일이 교정해서 오류를 바로잡는 일을 병행했다. 결국 17276월 하순 <청구영언> 초고본을 완성했다. 이미 밝혔듯이 김천택은 여말선초 이후 명공(名公)과 석사(碩士), 여항인(대중가수)은 물론 규수(기녀)의 작품까지 수록했다. 이름값에 현혹되지 않았다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세상에 전하는 노래는 모두 채록했다. 그 사이에 비록 뛰어난 작품으로 이름나지는 않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진 경우라면 모두 기록했다.”(<청구영언> ‘이삭대엽 발문’)

 

비록 그 사람의 이름을 취하기는 어렵다는 판정을 내려도 노래만 좋다면 그대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됨됨이나 명성이 아니라 노랫말만 좋다면 수록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개인문집이나 별도 가집에 수록된 유명작가뿐 아니라 1~2수씩 구전되던 작품도 상당수 수습됐다.

 

19금 노래까지 다 모은 까닭

여기서 핵심 궁금증이 생긴다. 이렇듯 의미 있는 <청구영언>에 왜 노골적인 성행위와 음담패설이 담긴 퇴폐적인 노래를 떡하니 실었을까.

 

앞서 몇 작품을 살펴보았지만 지금의 기준으로도 인용한 곡 대부분은 ‘19딱지를 받았을 것이다. <청구영언>만횡청류는 보편적인 상식을 초월하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미혼남녀의 사랑과 이별, 그리움 등을 노래한 작품도 있지만,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노래도 많다. 심지어는 유부녀와 외간 남자, 유부녀와 승려 등 당시로서는 비정상적인 일탈 행위가 노랫말에 그대로 담겨 있다.

 

당연히 18세기에도 이른바 만행청류는 나라를 어지럽게 할 음란한 음악이라고 비판받았다. 여기서 만횡청류(蔓橫淸流)’란 무엇인가.

 

()’은 아마도 <시경> ‘국풍·정풍에 있는 노래(‘야유만초·野有蔓草’)에서 따온 말일 것이다.  

들에는 엉클어진 덩굴이 이슬에 푹 젖어 있네(野有蔓草 零露溥兮). 아리따운 한 아가씨(有美一人) 눈매가 예쁘기도 하여라(淸揚婉兮).”

 

원래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노래를 가리키는 정풍음란한 노래, 망국의 노래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남녀가 이슬 젖은 덩굴풀(만초)에서 만났다는 것은 질탕한 남녀관계를 은유한다. 결국 덩굴을 의미하는 ()’은 헝클어지고 휘감는 남녀 사이를 가리킨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노래. ()의 의미도 비슷하다. 옛 문헌을 보면 가로를 의미하는 횡은 세로를 뜻하는 종()과 어우러진다. ‘종횡으로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니까 만횡은 성적 일탈의 방종, 방탕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란 무엇인가. 조선 중기의 문인인 주세붕의 <무릉잡고>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지금의 노래는 대부분 쌍화점·청가(淸歌)와 같은 부류들이며 모두 사람을 꾀어서 악하게 만듭니다. 풍속을 해이하게 하고 날로 타락시키니 그 음탕하고 외설스러우며 타락한 이치는 차마 듣지 못할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주세붕은 청가를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남녀상열지사로 낙인찍힌 쌍화점과 동격으로 보고 있다. 음탕하고 외설스러운 타락한 음악이라는 것이다.

 

난세지음과 망국지음

소리에서 청성(淸聲)은 한 옥타브 높은 음역으로 지칭된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음악만 감상하면 그 나라의 흥망성쇠를 가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예기> ‘악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소리엔 치세지음과 난세지음, 망국지음이 있다. 치세지음은 태평하고 안락한 소리다. 난세지음은 원망하고 노여워하는 소리다. 망국지음은 애상과 회고에 젖은 소리다.”

 

그러면서 난세지음(亂世之音)은 이른바 청철장려(淸澈壯勵)해서 음의 높낮이가 평탄하고 낮은 치세지음(治世之音)이나 망국지음(亡國之音)보다 아주 높고 빠르다   

높고 빠른 소리, 즉 청철장려한 소리는 격앙되고 불안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주세붕과 <예기>의 언급을 정리하면 청() 혹은 청가(淸歌)는 난세를 반영하는 남녀 간의 연정과 향락을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만횡청가는 흥청거리는 곡조와 남녀 간의 자유연애를 담은 노래의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방탕한 내용의 가사를 치렁치렁 늘어지는 곡조로 부르는 것이 만횡청가였던 것이다.

 

선한 음악이 있으면 악한 음악도 있는 것이다”   

사실 꼬장꼬장한 성리학자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조선사회에서 이런 장르의 음악을 감히 활자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김천택은 고심 끝에 과감히 남녀상열지사인 이 만횡청류를 <청구영언>에 포함시켰다. <청구영언> 서문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하다.

 

만횡청류는 노랫말이 음탕하고 뜻과 자취가 보잘것없어 본보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한꺼번에 폐기할 수 없는 까닭에 특별히 아래쪽에 적어둔다.”

비록 사회적인 지탄을 받은 노래라 할지라도 오래도록 사랑을 받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김천택이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지탄을 받은 곡이라도 한꺼번에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김천택은 뿌리깊은 유교사회의 분위기에서도 그 어떤 자체 검열의 메커니즘을 가동하지 않고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온갖 장르의 음악을 소개했던 것이다.  사실 천하의 김천택이라도 논란 많은 만횡청류를 <청구영언>에 포함시키면서 좀 켕겼던 것 같다. 김천택은 종실(선조의 맏아들인 임해군의 후손)인 이정섭(1688~1744)에게 이 만횡청류’ 116수를 보여주고 감수를 부탁했다. 이정섭이 쓴 발문에 저간의 사정이 잘 나와 있다.

 

김천택이 하루는 청구영언 한 책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이 책엔 민간의 음란한 이야기와 상스럽고 외설스러운 가사도 있습니다. 군자가 이를 보고 병이라 여기지 않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어떠신지요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했다.”

 

이정섭이 괜찮다고 한 까닭은 뭘까. “공자가 <시경>을 편찬하면서 음란하기로 악명높은 노래인 정풍이나 위풍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음악이 있다면 악()한 음악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정섭은 음악을 감상함으로 선과 악을 구별짓는 것도 나름 가치 있는 것이라 좋게 해석해주었다. 이정섭은 창작의 자유와 감상의 자유를 설파한 것이다. 김천택은 종실인 이정섭의 괜찮다는 한마디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경찰 겸 싱어송라이터였던 김천택

사실 김천택을 <청구영언> 편찬 하나만으로 소개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였기 때문이다.   동시대 인물인 김수장(1690~?)이 쓴 <해동가요>에 따르면 김천택은 숙종 때 포교를 지냈다. 포교는 포도청의 부장이다. 포도부장도 그리 간단한 직함이 아니었다. 휘하에 70명 가까운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울과 수도권의 치안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김수장이 가객 56명의 명단을 기록한 <고금창가제씨>에도 김천택의 이름 석자가 올라 있다. 포교를 지내면서 여항가객으로 활동할 만큼 예술적 재능이 남달랐다 할 수 있다.

 

여향(閭巷)’은 일반적으로는 벼슬하지 않은 민간을 지칭한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여항인이라 하면 의관이나 역관 등의 중인과 퇴임한 하급관료, 평민 등을 통칭했다. 여항문화는 상업도시로 변모한 서울에서 일정한 지식과 부를 갖춘 중인 및 하급관리가 사대부와 같은 여유를 부리며 향유했던 문화를 뜻한다. 신분 자체가 그다지 높지 않은 김천택이었지만 당대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였기에 사대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꽃미남 뇌섹남 톱가수

김천택은 노래로 당세에 이름이 났다. 그러나 속되지 않았다. 얼굴빛이 희고 수염은 창처럼 뾰족했으며, 어릴 때 <시경> 300편을 암송하고 나이 60이 되도록 조금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사람보다 총명하지 않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을축(1745) 2월에 화사자가 욕음재에서 쓰다.”(<해동가요>)

 

화사자라는 인물이 김천택을 평한 내용이다. 하얀 얼굴에 뾰족한 수염, 그리고 시경 300편을 모두 외울 정도의 총명함, 나름 저속하지 않은 노래. 18세기 꽃미남이자 뇌섹남톱가수였다는 얘기다. 중인 출신이지만 학식이 뛰어나 사대부 자제를 가르쳤던 정래교(1681~1759)<청구영언>의 김천택 작품에 쓴 발문을 보자.

 

남파 김백함(김천택)은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나라 안에 이름이 났다. 성률(리듬)에 정통하고 문예도 닦아 스스로 신번(시조)을 지어 여항인에게 주어 익히게 했다. 백함은 노래를 잘 불렀고 신성(새로운 가곡)도 능히 지었다. 거문고를 잘 타는 전악사(全樂士·전만제로 알려져 있다)와 서로 의지해서 아양지계(峨洋之契)를 이루었다. 전악사가 거문고를 타고 백함이 노래를 부르면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귀신을 감동시키고 화기(和氣)를 일으킬 수 있다. 두 사람의 기예는 더할 수 없는 교묘한 재주라 할 만하다.”(<청구영언>)

      

이 기록을 보면 김천택은 타고난 싱어송라이터였음을 알 수 있다. 노래 잘 부르는 가수였고, 작곡가로서의 위치도 확고했다.

 

아양지계인가 아양밴드인가

당대 거문고의 달인인 전만제와 아양지계를 이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아양지계란 무엇인가. <열자> ‘탕문에 나오는 춘추시대 그 유명한 백아와 종자기의 일화를 알아야 한다. 즉 거문고의 달인인 백아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절친 종자기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을 표현하면 종자기는 이렇게 찬양했다.

 

아름답구나!(善哉) 높고 높기가 태산과도 같구나!(峨峨兮若泰山)

백아가 흐르는 물을 표현하면 종자기는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아름답구나! 넓고 넓기가 황하 같구나!(洋洋兮若江河)”

 

백아와 종자기는 이처럼 거문고 연주를 통해 음악적 교유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내 음악을 알아주는 이가 사라졌으니 무슨 희망이 있느냐며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백아절현(伯牙絶弦)의 고사다.

 

그런데 정래교는 김천택과 전만제의 관계는 아양지계(峨洋之契)’라 했다. 종자기가 백아의 음악을 듣고 높고() 넓은() 산과 강 같다고 한 데서 착안하여 아양의 관계라 한 것이다. 약간 우스갯소리를 가미하면 보컬김천택과 거문고리스트전만제가 결성한 밴드 이름을 지어보면 어떨까. ‘아양지계가 아니었을까. 요즘말로 아양 밴드?’라 이름 붙이면 어떨까.

 

당대 최고의 힐링가수

김천택과 전만제가 이룬 아양지계의 음악을 들으면 절로 힐링이 됐다고 한다. 정래교의 평가다.

 

내가 일찍이 남모르게 깊이 간직한 병이 있었다. 그 때문에 가슴에 맺힌 것을 풀 수 없었다. 그런데 김천택이 전악사와 함께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니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를 모두 씻을 수 있었다.”

 

특히 김천택을 평가하는 단어를 보면 신성(新聲)’ ‘신번()’ ‘신곡(新曲)’ 등 모두 새로울 ()’자가 들어간다. 김천택이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개척하고 그 노래를 스스로 불렀다는 의미다. 김천택은 여항가객, 즉 대중가수들 사이에서 구심점 역할을 했다. 새로운 가곡을 작곡한 뒤 노랫말까지 지어 당대 가수들에게 주었다   김천택이 지은 노래 중 72~79수가 <청구영언><해동가요>에 실려 있다. <청구영언> ‘여항육인에 등장하는 김유기는 1716년 집으로 찾아온 김천택에게 내가 쓴 노랫말을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시경> 300편을 다 외울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김천택이었기 때문이다.

 

19금 전시회

국립한글박물관은 지금 순간의 풍경들, 청구영언 한글 노랫말 이야기특별전을 열고 있다.   <청구영언>과 함께 조선의 3대 가집이라는 김수장의 <해동가요>와 박효관·안민영의 <가곡원류>도 전시된다. 특히 <청구영언>만횡청류노래를 모은 ‘19전시실이 눈에 띈다. <청구영언>에 실린 고고한 작품들도 물론 관심이 가지만, 왠지 ‘19금 노래에 시선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필자가 만횡청류에서 찾아낸 노래 한 편을 소개할까 한다. 라임(Rhyme·가사에서 마지막 문장의 운율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 넘치는 노래다.

 

오늘도 날 저물었네. 저물면 샐 것이고, 밤이 새면 이 님 갈 것이고, 님이 가면 못 볼 것이고, 못 보면 그리워할 것이고, 그리워하면 병들 것이고, 병이 들면 못살 것이니, 병들어 못살 줄 알면 자고 가는 게 어때?”

 

(이 기사는 조규익의 <만횡청류의 미학> 단행본과, 권순회의 김천택 편 청구영언의 문헌특성논문을 중심으로 작성했습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노랫말은 조규익의 단행본에서 발췌했습니다.) 이기익 경향 논설위원 17 5 10

 

<참고자료>

조규익, <만횡청류의 미학>, 박이정, 2009

권순회, ‘김천택 편 청구영언의 문헌특성’, <청구영언>(주해편), 국립한글박물관, 2017

이상원, ‘김천택 편 청구영언과 후대 가집의 관계’, <청구영언>(주해편), 국립한글박물관, 2017

신경숙, ‘근대학문 100년 속에서 김천택 편 청구영언이 걸어온 길’, <청구영언>(주해편), 2017

김용찬, ‘김천택의 삶과 작품세계’, <어문논집> 39, 민족어문학회, 1999

김수업, ‘김천택에 대하여’, <배달말> 18, 배달말학회, 1993

김복영, ‘만횡청류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2001

강혜정, ‘만횡청류의 형성 기반과 여항가요와의 친연성에 대한 고찰’, <어문논집> 62, 민족어문학회, 2010


간다고 하지마오 - 김정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