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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 PD수첩

by 이성근 2019. 11. 18.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 PD수첩 저자 정용재, 정희상, 구영식|책보세 |2011.04

그리고 못다한 이야기, 견검에서 떡검 그리고 섹검까지 대한민국 검찰, 굴욕의 빅뱅

 

목차

추천사 (최승호)

저자서문 (정희상, 구영식)

1부 검사들의 스폰서 정용재, 분노와 눈물의 고백

1장 검사들의 스폰서 나는 왜 그들을 고발하게 되었나

검사들이 노는 꼴을 보며 환멸을 느꼈다

검찰은 나를 구속시켜 입을 막으려 했다

검찰의 힘이 그토록 막강한지 미처 몰랐다

 

2검사와 스폰서방영 막전막후

정 선생을 보호해주세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스폰서 특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다

아직도 나의 절규는 끝나지 않았다

 

3장 나는 어떻게 검사들의 스폰서가 되었나

아버지와 검사들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시작된 스폰서 생활

검사들과의 끈끈한 나날들

 

4장 검사 접대 일지 대한민국, 검사들 이렇게 놀았다

검사들의 술자리 즉석 막장놀이

검사와 스폰서,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

경남 도의원 그리고 김 검사

박 검사와 고급 중국술

진주에서 부산 그리고 서울까지 검사들의 향연

밤만 되면 가면을 벗는 검사들

검사들 접대 내역을 생생하게 서술한 자필 수기 (정용재)

대한민국 검찰의 빅뱅 _ ‘견검에서 떡검그리고 마침내 섹검까지 (구영식)

 

2부 그러나 묻어버린 진실

5스폰서 검사에 관한 언론 인터뷰·기사

검사들이 떠날 때 순금 마고자 단추를 선물했다”(정용재 인터뷰, 오마이뉴스, 2010. 4. 19.)

스폰서를 잘 두어야 부하검사한테 인정받는다”(정용재 인터뷰, 시사IN137, 2010. 4.)

모델들도 검사 접대 자리에 나갔다”(전직 모델에이전시 대표의 증언, 오마이뉴스, 2010. 10. 12.)

대한민국과 국민이 정용재 씨에게 감사해야 할 점 있다”(MBC 시사교양PD, MBC·KBS·SBS 교양 다큐 작가들 탄원서)

검사들만큼 취재 어려운 직종도 없다”(최승호 PD 인터뷰, 오마이뉴스, 2010. 10. 23.)

 

6진실 은폐에 최선을 다한 진상조사위원회 및 진상규명특별검사 발표문

특별검사팀의 스폰서 검사특검 결과 공식 발표문

진상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결과 공식 발표문

부록 MBC ‘검사와 스폰서

검사와 스폰서’ 1나는 룸살롱 마담의 사위로소이다

검사와 스폰서’ 3탄 가재는 게 편, 묻어버린 진실

 

 

출판사 서평

스폰서 검사 특검 결과 (뇌물수수 또는 직무유기로 기소된 4명의 검사 말고는) 모두 내사종결 또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진상규명위에 이어 특검마저도 진상규명은커녕 진상은폐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나마 기소된 검사들마저도 무죄판결을 받음으로써 사법부는 국민을 한껏 우롱하고 기만했다. ‘법치를 외치는 정권 아래서 법은 너무도 허망하게 죽었다.” 법 앞에서 만인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너무도 명백한 물증(접대내역을 구체적으로 특정한 자필 문건)과 숱한 증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폰서 검사들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전원 무사했다. 과연 검찰공화국이다. 그리하여 검찰을 포함한 사법부는 공권력으로서 존재이유를 상실하였다. 이에 우리는 이 책을 발간하여 (정용재 리스트에 오른) 스폰서 검사 전원을 시민법정에 세우기로 했다. 독자 여러분이 배심원이 되어 엄정한 판결을 내려주시길 바란다.

 

스폰서 검사전원 실명 공개, 이제 이들을 시민법정에 세운다!

 

정용재 증언 / 정희상.구영식 정리

지난 20104월 중순, ‘검사와 스폰서편이 방송되어 검찰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전 국민의 공분을 산 지 얼마 후인 512, 김준규 검찰총장은 사법연수원 강연에서 검찰만큼 깨끗한 데를 또 어디서 찾겠느냐며 작정하고 어깃장을 놓았다. 이후 행해진 진상규명위원회와 특검 활동도 결국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 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1년이 흐른 20114, 검찰은 (국민 앞에서는) 더욱 오만방자해졌고 (권력 앞에서는) 더욱 비굴해졌다. ‘스폰서 검사를 취재해온 정희상?구영식 두 기자는 이런 검찰의 후안무치한 작태를 지켜보면서 이대로 진실이 묻히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책으로 고발하겠다며 (지난해 취재 자료를 바탕으로) 심층취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이 못 다한 많은 이야기와 새로운 사실을 이 책에 담을 수 있었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그 소회를 피력했다.

 

그동안 계속 정씨를 취재해온 우리도 막을 내리는 검사 스폰서 사건앞에 아쉬움이 컸다. 고민한 끝에 정씨의 증언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구속집행정지 상태였던 정씨를 다시 부산에서 만나 수차례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정씨를 취재해왔던 내용과 그때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정씨가 접대했던 검사들의 이름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한두 번 접대 받은 검사들 이름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위의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졌을 때 공개된 일부 고위직 검사들뿐 아니라 일반 검사들조차도 스폰서 문화에 포획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선택이 검사들의 실명 공개.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스폰서 검사들전원의 실명을 공개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 한명숙 전 총리 조사 때 검찰이 입에 달고 살던)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공직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책을 한참 편집하고 있던 3월 무렵 검찰에서는 이 책이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 검사는 자신은 당시(1990년대 중반) “발기부전 환자라서 성 접대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처지라고 변명하기도 했다. 45일 저자와 편집자가 안동교도소로 정용재 씨 면회를 갔는데, 정씨는 부산구치소에 있을 때 부산지검 검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 책 초고를 입수하려고 내 방으로 들이닥쳤지만 간발의 차이로 우편으로 내보낸 뒤여서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고 털어놓았다. , 눈물겹다.

 

지난 41, 이귀남 법무장관은 국회 사법개혁위가 내놓은 중수부 폐지안을 거부하며 사실 더 이상 검찰에서는 고칠 게 없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는 한편에서 경북 경산시청의 한 공무원은 검찰의 폭력적인 조사를 견디다 못해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는데, 그 유서마저 검찰이 은폐하려 했다.” 신정아 씨는 거짓진술을 강요하는 검사가 무서워 앉은 채로 오줌을 쌌다고 고백했고, 가수 구창모 씨는 “‘PD사건’(1990) 당시 피의자도 아닌 (단순)참고인으로 밤샘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검찰로부터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해 그 충격으로 가요계를 떠났다고 폭로했다.

 

검사들의 스폰서정용재 씨도 스폰서 검사폭로 후 검찰이 가해온 치졸하고도 집요한, 그리고 몸서리쳐지는 보복과 불법적 작태를 이 책에서 상세하게 털어놓고 있다. 장관과 총장의 말대로 검찰이 정녕 고칠 게 없는, 가장 깨끗한집단인가? 이 책이 명확한답을 줄 것으로 보인다.

 

 

책속으로

원고를 읽어보니 새로운 사실이 많다. 게다가 거의 실명을 공개했다. 저자들은 일부 고위직 검사들뿐 아니라 일반 검사들조차도 스폰서 문화에 포획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줄 필요가 있어서실명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검찰뿐 아니라 경찰, 군 등 과거 정용재 씨의 스폰을 받은 다른 부문의 고위 인사들도 실명으로 등장한다. 이 책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 pp.6-7

 

더 놀라운 증언도 나왔다. 부산의 한 모델에이전시에 소속된 모델들을 불러 원정 접대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 호송차의 호위를 받았다는 얘기다. 경찰도 검사 스폰서의 손아귀 안에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공권력이 검사 접대를 위해 움직인 것은 정씨가 검사스폰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검사 스폰서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일은 검사의 어두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씨가 증언한, 술자리에서 보여준 검사들의 행태는 차마 글로 옮기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 p.9

 

지난 46, 책 출간을 앞두고 안동교도소에 수감된 스폰서 정씨를 면회했다. 수감 상태에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검찰의 주시 대상이었다. 안동교도소로 이감되기 직전 부산구치소에 있을 때, 그의 구속을 지휘한 부산지검 검사가 이 책 초고를 손에 넣으려고 구치소 내 그의 방에 들이닥쳤지만 간발의 차이로 원고를 우편으로 내보낸 뒤여서 허사로 끝났다고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꼴이다. 검찰이 지난 1년간 그런 열성으로 환골탈태를 위해 각고했다면 아마 이 책은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p.12

 

폭로 이후 하루에도 수십 번 자살을 생각하며 지냈다. 내가 지금까지 직접 수백 명의 검사를 겪어왔지만 이렇게까지 야비하고 치졸하게 보복을 가할 줄은 몰랐다. 공익 제보라는 게 힘들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겪어보니 검찰을 상대로 하는 제보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들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도 모르게 내 주변 인물 누구를 겁박하고 있을지, 나를 옭아매기 위해 어떤 공작을 펼치고 있을지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할 뿐이다. --- p.25

 

검찰 조사의 또 다른 치졸함은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방대한 계좌 추적과 압박이었다. 한 검사는 구치소로 찾아와서 출정과장 자리에 앉아 내게 압박을 가했다. 지난 수십 년간 나의 금융계좌를 추적해 거래한 흔적이 있는 명단을 전부 펼쳐놓고 홍길동 씨 알지요?” “김개똥 씨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하는 식으로 은근히 압박을 가했다. 내 계좌 추적과 진상조사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따져 물었더니 당신 자금원을 추적해 돈이 나와야 검사들에게 술을 샀다는 신빙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핑계를 댔다. 나는 이들의 후안무치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사건 관련 제보자이자 가장 중요한 참고인이었다. 그런 사람 전화기를 압수해가고 본인 통장은 물론 아내와 자식들 통장계좌까지 전부 추적했다. 은행에서 나중에 날아온 자료를 보니 계좌추적 영장을 청구해 뒤진 시점이 모두 54일과 6일경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내 통장에 한 번이라도 이름을 걸친 사람은 모두 계좌추적을 당했다. 가족만이 아니라 내 지인들과 집안 형님들도 전부 다 계좌추적을 받았다고 6개월 뒤 은행에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알고 보니 검찰 자체 진상조사단의 조사는 결국 나에 대한 먼지 털기식 보복수사로 흘러간 것이다. 또 검찰은 나중에 조사가 끝난 뒤 조사에 협조했던 중요 참고인이던 나의 한 선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선배 부부는 물론 초등학교 3학년 아이까지 다 뒷조사를 당하고, 계좌추적을 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 pp.55-56

 

서울에 올라가 조사를 받을 때는 검찰에서 특검에 파견된 현직 여검사로부터 심지어 성희롱에 가까운 모욕도 당했다. 서울중앙지검 강수산나 검사는 내게 성관계를 어떻게 하냐?” “한 달에 몇 번 하냐?” 하는 식으로 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립성비대증을 앓고 있는데 관련 진단서까지 있다. 내가 어이없어 하며 강 검사에게 왜 묻느냐?”고 반문했더니 그녀는 김철 부장검사를 성 접대했다고 제보했지만 김 부장검사는 성 매수를 당신이 해놓고 자기에게 덮어씌운다고 하더라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검사님, 내가 성기능이 좋으면 그날 내가 한 것이고 성기능이 안 좋으면 내가 안 한 것입니까? 이런 질문이 어디 있나요?”라고 따져 물었다. 강수산나 검사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는 순간 검찰 계장 두 명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강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때 나는 궁금하시면 성기능 실험을 해보시지요라고 답하려다가 꾹 참았다. --- pp.65-66

 

내가 직접 나서서 연을 맺기보다는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나를 찾아왔다. 예를 들어 경찰서 정보? 과장이나 담당주임이 서장을 모시고 온다. 그렇게 서장하고 자리 한번 하면 경찰의 날 행사에 후원을 해달라” “초소를 하나만 지어달라등의 부탁을 내놓는다. 경찰뿐 아니라 안기부 주재관, 보안부대장과 요원들에게도 스폰서 활동을 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라 안기부나 보안부대의 힘이 셌다.

또 나는 사천에 있는 비행단장(준장)과 비행대대장(중령) 등 고급장교들의 스폰서이기도 했다. 진주교육사령부도 생겼는데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은 거의 다 공군참모총장이 됐다. 김홍래·김성일·이양호·조근혜 장군 등이 이곳을 거쳐 갔다. 조근혜 장군만 빼고 대부분 성 접대도 받았다.

 

또 사천에 골프장이 있었는데 골프 행사를 주최해달라고 요청하면 골프 행사도 후원했다. 그렇게 해서 나도 골프를 배웠다. 당시 부산·경남에서 20대에 골프를 친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각 기관장들, 진주 시장, 진양 군수, 삼천포 시장, 사천 군수를 비롯해 진주KBS 총국장, 진주MBC 사장, 안기부 진주분실장 등과 골프를 치러 다녔다. 전남 곡성 컨트리에 주로 갔는데, 경찰서장이나 검사들을 모시고 새벽에 출발하기도 했다. 항상 돌아오는 길에 광양에 들러 유명한 광양불고기를 먹고 진주에 도착하여 2차 술자리를 가졌다. 당시 기관장들은 나이가 젊은 편이어서 대부분 성 접대도 받았다. 다만 교육장들은 연세가 많아 성 접대는 하지 않았다.

 

경남에 종합건설회사가 30군데밖에 없었는데, 지역에 공사가 나면 30개 건설회사가 담합을 했다. 담합은 그 시대의 관행이었다. 황기준 사천 군수는 돈을 바라면서 경쟁을 시켰다. 과장이나 계장한테 지시를 내리면 우리 회사에 온다. 그러면 할 수 없이 거액을 준다. 그러면 경쟁분위기는 사라지고 공사가 남한건설에 떨어진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각 건설사가 소재한 지역의 공사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그 지역 건설회사가 도맡았다.

각 자치단체에서 경리관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 부군수와 부시장(총무국장)이다. 부군수와 부시장이 예정가격을 책정하고 보안을 유지하고 입찰을 진행한다. 황완수 부군수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공사를 따내려면 예정가격을 알아내야 하는데, 전날까지도 안 가르쳐 준다. 오전 11시에 입찰이면 전날 저녁 또는 입찰 직전까지 담판에 들어간다. 그러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딸 결혼식을 치른다 어쩐다 하는 명목이었다.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분양가를 낮춰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pp.88-90

 

우리 재미있는 놀이 한번 하자. 여기서 자기 파트너하고 즉석 섹스를 하는 아가씨한테 2차비를 다 몰아주자. 물론 쌍방이 합의해야 한다.”

2차비가 10만 원이었기 때문에 이 놀이에 참여하는 아가씨는 50만 원이라는 큰돈을 벌게 되는 셈이다. 내가 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김 검사가 자원했다. 그의 파트너도 동의했다. 그래서 병풍 뒤에서 옷을 벗고 성관계를 맺었다. 당시 벌인 놀이에는 조건이 있었는데, 실제로 성관계를 하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짓을 하는 광경을 병풍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유독 섹스와 술을 좋아했던 김 검사는 성 접대를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pp.101-102

 

모델들이 부산에서 진주로 내려올 때 고속순찰대의 호위를 받았다. 고속순찰대 6지구대에서 호위를 해주었다. 그러면 모델들도 기분이 업됐다. 내가 부탁했고 검사들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당시 순찰대장이던 어청수 씨가 알아서 해주었다. 대원들이 40명쯤 됐는데, 그렇게 모델들을 진주로 부르는 행사를 할 때마다 촌지를 주었다. 당시 차가 많은 시절이 아니긴 했지만, 순찰대원들은 나와 우리 회사 차를 다 기억하고 단속을 안 했다. 내가 어청수 순찰대장을 고속순찰대 본대 대장으로 발령 나도록 부탁을 했다. 서울에 올라가 당시 교통을 총괄하고 있던 치안본부 치안감을 현재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강남구 역삼동 소재 오죽헌에 불렀고, 내가 어청수 순찰대장을 인사시키고 부탁했다. 당시 어청수 순찰대장은 서울 경찰국 작전계장으로 있었다.--- p.110

 

 

검사들은 나는 새만 떨어뜨린 게 아니다. 나는 비행기도 날지 못하게 했다. 스폰서 검사 사건의 핵심 인물인 박기준 검사가 진주지청을 떠난 후 서울지방검찰청 형사부에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토요일이 쉬는 날이 아니라 오후 1시까지 근무했다. 박 검사가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서울 김포공항에서 경남 사천공항으로 와서 다음날 지리산 등반을 위해 나를 방문했다. 당시 부장검사였던 유재성·박기준·문성우 검사, 또 다른 검사 1명이 동석했다. 훗날 유재성 부장검사는 창원지검장으로 재직했고, 문성우 검사는 법무부 고위직으로 재직한 바 있다. 이때 사천 가산횟집에서 민물장어구이와 장어탕으로 식사를 하고 내가 소유했던 지하 룸살롱에서 술 접대를 하고 더 나아가 유재성 부장검사를 제외한 세 사람은 역시 내가 소유한 위층의 숙박시설에서 성 접대도 받았다.

 

당시 나는 사천의 한 단체를 후원하는 회장이었다. 그 단체의 사무국장이 고향 선배였는데, 지리산 지리와 등반코스에 능통했다. 그 사실을 알고 그 선배에게 부탁해 검사들의 지리산 등반에 동행시켰다. 당시 등반 안내를 맡았던 강 선배는 그 이후 의료보험공단 지사장 등으로 재직한 뒤 정년퇴임했다. 등반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차량으로 이동했다. 승용차는 정원이 초과되고 산길이라 내가 경영하고 있던 회사의 봉고차량을 이용했다. 당시 운전은 회사의 모든 차량을 관리하면서 내 운전기사로 일했던 김아무개 부장이 맡았다. 김 부장은 아버지 때부터 약 30여 년간 무사고 운전을 기록한 베테랑 직원이었다. 지금은 은퇴한 이 직원은 내가 진주는 물론이고 부산과 서울 등에서 검사들을 만나고 접대할 때마다 운전을 도맡았다. 그는 검사 접대의 산증인 셈이다.

 

당시에는 사천공항에서 김포공항까지 오전, 오후 두 편의 항공기만 운행되었다. 비행기 탑승 수속을 간소화한다 해도 일요일 지리산 등반을 마친 검사들이 비행기가 이륙하기 10분 전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지리산에서 출발이 늦었고, 일요일이라 차량까지 밀려 비행기를 타지 못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때 검사들이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이 생생하다. 각 공항에는 경찰이 상주 근무하는 103호실이란 곳이 있다. 당시 이 103호실에서 모든 승객이 탑승한 후 비행기 이륙시간을 30분 이상 지연시켜주었다. 검사들은 수속도 생략한 채 급하게 비행기에 올랐고, 비행기는 30분 늦게 이륙했다.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검사들이지만 지금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승객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검사들의 힘은 굉장히 셌다.

(114-116, “<4> 대한민국 검사들, 이렇게 놀았다중에서)

 

그동안 접대한 검사님 휴대전화 번호는 제 전화기에 입력된 것만 기재한 것이며 일부임을 밝혀둡니다. 여기 거론된 검사님들 저와 대질하면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접대 수기와 문건에 적시된 검사 명단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강길주, 강민구, 구본진, 김근수, 김상봉, 김종로, 김진오, 김창환, 김철, 김태희, 김훈, 노성수, 문규상, 문성우, 문효남, 민기호, 민유태, 박기준, 박민호, 박영관, 박영권, 박정식, 박종환, 박충근, 반종욱, 손진영, 송기오, 신승기, 안종택, 안혁환, 예세민, 오세경, 옥준원, 이기영, 이상철, 이승환, 이정수, 이종민, 이준오, 이희종, 임무영, 임상길, 임윤수, 정택화, 조정환, 차순길, 최근서, 최임열, 최준원, 최해종, 하만석, 하용득, 하은수, 한승철, 황희철. _편집자 주 ). (145, “검사들 접대 내역을 생생하게 서술한 자필 수기중에서)

 



자신들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인데 검사들이 취재에 잘 응해줄 리 없었다. 최 피디도 검사들만큼 취재가 어려운 직종도 없다고 털어놓았다. 해명이나 반론을 듣기 어려웠다.

전화통화도 잘 안되고, 그나마 전화를 받으면 바로 끊어버리고. 개별 검사들은 그렇다고 해도 검찰조직도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대검에 질문지를 보내도 답변을 하지 않고 무시했다. 대검에 10여 차례 전화를 했지만 모른다거나 담당자가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참 답답했다. 검찰은 검사와 스폰서’ 1편부터 3편까지 방영하는 동안 시종일관 답변하지 않았다. 답변을 안 해도 되고, 안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은 언론을 무시하고, 곧 국민을 무시하는 행위다.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맘대로 방송하라는 식이다.”  (194, 최승호 PD 인터뷰 검사들만큼 취재 어려운 직종도 없다중에서)

 

'피의자와 성관계 검사'가 보여준 절대 권력의 민낯

[대한민국 검찰실록 6] 검사의 권력과 도덕성

판사뿐 아니라 검사도 '판관' 역할을 한다. 혐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서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형사재판에 넘길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검사 역시 판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현행 형사소송법 제246조는 "공소는 검사가 제기하여 수행한다"고 함으로써 기소권을 검사에게 일임했다(기소독점주의). 공소(公訴)는 기소와 같은 표현이다.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기소독점주의가 시행된 것은 아니다. 고대 게르만족 사회에서는 피해자나 친족이 범죄자를 재판에 넘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현대 독일에서는 검사가 기소권을 갖는 게 원칙이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공인이 아니라 사인(私人)인 피해자가 검사와 함께 공동원고가 돼서 재판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재상 이화여대 교수가 쓴 <형사소송법>"독일 형사소송법은 국가소추주의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주거침입죄나 비밀침해죄 등의 경미한 범죄에 관하여 예외적으로 사인소추를 인정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소추(訴追)는 기소보다 넓은 개념이지만, 기소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검사들은 기소권을 독점할 뿐 아니라 상당한 재량권도 갖는다. 범죄 혐의가 있고 소송 요건이 갖춰지면 무조건 재판에 넘기는 게 아니라, 독자적 재량에 따라 불기소 처분을 내릴 수도 있다(기소편의주의).

 

형사소송법 제247조는 "검사는 형법 제51조의 사항을 참작하여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했다. 피의자의 상태, 피의자와 피해자의 관계, 범행 동기 및 과정, 범행 후의 반성 여부 등을 참작하여 '혐의가 있지만 기소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 검사들은 기소독점주의에 더해 기소편의주의에 입각한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다. 거기다가 원래 경찰의 몫인 수사권 혹은 수사지휘권까지 ''으로 행사한다. 조국 일가 수사에서 활용됐듯이, 압수수색이나 구속 같은 강제수사권도 행사할 수 있다. 피의자의 유·무죄를 실질적으로 판단할 뿐 아니라 수사에 더해 강제수사까지 할 수 있으니, 유무죄만 판단하는 판사에 비해 실질적으로 더 막강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극소수 일부만 그럴 뿐, 대다수는 그렇지 않아?

 

20121123일 자 <한겨레> 기사 한겨레

 

민사도 아니고 형사사건에서 이처럼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한다면, 여타 공직보다 훨씬 더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와 신체에 영향을 주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데다가 이를 재량적으로 행사하는 검사들이 도덕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국민들이 불안에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이 목격해온 검찰의 현실은 기대 이하일 때가 많다. 높은 도덕성을 견지해야 할 검사들이 돈과 성적 욕망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진 사례들을 숱하게 지켜봐 왔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계속 맡겨도 괜찮을까 하는 우려가 들 정도였다.

 

일례로, 201211월에는 실무수습 중이던 30세의 남자 검사가 절도 혐의로 입건된 43세의 여성 피의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 일이 서울동부지방검찰청 조사실에서 벌어졌다. '성추문 검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안에서, 검사는 피의자의 심리적 위축을 이용해 검찰청 조사실뿐 아니라 모텔에서까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물론 이 사건은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평소보다 한적한 토요일이라서, 불미스러운 일이 청사 내에서 벌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은 공직자가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통제하지 못할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이 사안은 잘 보여줬다.

 

국가기관에 대한 지탄이 쏟아질 때마다 흔히 나오는 말이 있다. "극소수 일부만 그럴 뿐, 나머지 대다수는 그렇지 않아"라는 말이다. 그런데 검사들의 부적절한 처신이 과연 극소수에만 국한된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대다수의 선량한 검사들한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2010년에 건설업자 정용재에 의해 폭로된 '검사 스폰서 사건'이 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검찰 직원들에게 '월급' 지급한 건설업자

이 사건 주인공 정용재는 경남·부산 지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규모 건설업자로서, 2010년까지 20여 년간 10억 원 이상을 들여 검사들에게 술과 성적 향응을 제공했다. 그가 돈을 쓴 시점이 1980년대부터이므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원을 훨씬 상회할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작성한 자필 수기가 구영식 <오마이뉴스> 기자와 정희상 <시사인> 기자가 공저한 <검사와 스폰서 묻어버린 진실>에 실려 있다. 이 책에 있는 '검사들 접대 내역을 생생하게 서술한 자필 수기' 편이 바로 그 기록이다.

 

정용재는 검사들의 실명과 휴대폰 번호까지 일일이 언급한 이 수기에서 "장소, 일시, 당시 부장검사 및 평검사분들의 명단과 계산서 및 모든 자료는 제가 보관하고 있고, 관계된 100여 명이 넘는 전·현직 검사들과의 대질신문으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리라 100퍼센트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진주지청을 거쳐간 검사 중 저의 돈을 안 받아본 검사, 향응(술 및 성 접대) 제공 안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라면서 지청장에게는 매월 200만 원, 평검사 및 사무과장에게는 매월 60만 원씩 제공했다고 진술했다. 국가가 아닌 건설업자가 검찰 직원들에게 '월급'을 꼬박꼬박 지급한 셈이다. 그는 진주지청뿐 아니라 부산지검을 상대로도 비슷한 일을 했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저의 촌지·향응·접대를 받은 검사님이 부산지검 검사 총 60~70명 중 최소 20명 이상은 됩니다."

 

한번은 검사들 술자리에 불려 갔더니, 자기 말고 다른 스폰서가 더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은 술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됐다고 한다. 그 대신, "밴드비·숙박비·3(성 접대) 비용은 제가 다 부담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자청해서 제공한 경우뿐 아니라 검사들의 요청으로 제공한 일도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검사들을 접대할 목적으로 경찰 헬기나 경찰 호송차까지 불러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정용재 자신의 수기가 아니라 두 기자의 취재 결과를 담은 '저자 서문'에서 소개된다.

"검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날 때면 전별금과 함께 순금으로 만든 마고자 단추를 선물했고, 심지어 검사들이 제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경찰 헬리콥터를 띄우기도 했다. (중략) 더 놀라운 증언도 나왔다. 부산의 한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된 모델들을 불러 원정 접대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 호송차의 호위를 받았다는 얘기다."

도덕성을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집단이 도덕성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검사 개인이 아니라 검찰 차원에서라도 도덕성이 발휘된다면, 이런 사건이 일회성으로 끝나고 재발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검찰 차원의 자정 노력마저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은, 수많은 검사가 연루된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용두사미로 끝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 사회는 최근 들어 공직자의 도덕성을 더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도덕성을 가르칠 만한 곳이 별로 없다. 이런 구조에서 배출된 검사들이 국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검사는 성직자 못지않게 도덕성이 요구되는 위치다. 이런 검사들이 실질적으로 판사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도 이들의 도덕성을 제고할 시스템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사법연수원 역시 법조 실무자를 양성하는 기관일 뿐, 신라시대 화랑도나 조선시대 서원처럼 도덕을 가르치는 곳은 아니다.

 

공직자들의 도덕성을 제고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노력이 앞으로 전개돼야겠지만, 그런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검사들의 권력을 제한하거나 견제하는 것뿐이다.

 

국회 패스트트랙에 올라 있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나 공수처 설치법안은, 검사들의 도덕성을 보장할 수 없는 현재 상황에서 검찰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는 현실적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성(qqqkim2000 / 오마이뉴스

 

검찰은 어떻게 무소불위 권한을 가지게 되었나

[검찰개혁의 시간 ] 검찰공화국 탄생의 역사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무소불위 권한을 가진 대한민국 검찰,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 것인가? 참여사회

 

'정치검찰'이라는 운명

우리나라의 검찰은 현대 정치사의 맹점을 정확히 꿰뚫는다. 국가의 모든 권력이 대통령이라는 하나의 점에 수렴되어 그가 세상을 휘어잡을 때는 충성을 하다가도 대통령의 권력이 약간이라도 느슨해지면 스스로 권력을 확장해 칼을 휘두른다.

 

권위주의적 군사정부나 그 연장이라 할 정부에서 검찰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그러다 권위주의적 정권이 물러난 뒤 정부가 검찰권력 위에 법과 국민을 두려고 하자 여지없이 돌아서 독립과 중립이라는 방벽을 내세워 완강히 저항하고 반발했다.

 

오늘날 검찰이 이른바 '괴물'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든 건 그래서 한국 정치다. 국민의 정부 초기 김대중 대통령은 검찰청을 방문해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경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검찰이 바로 서지 못한 이유는 검찰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검찰의 형사사법 권력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려고 했던 정치의 패악 때문이었다.

 

검찰의 역사 : 민주화 이전

통치수단으로서 경찰이 전횡을 일삼던 일제강점기나 자유당 정권기에서조차 '반공검사' 오제도(1917~2001) 같은 인물이 법외적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식민통치의 수족이던 검찰이 해방 이후 이념대립을 빌미로 집권한 독재권력에 빌붙었기 때문이다. 이는 "7인의 범죄자를 검거하기 위해 100명을 잡아들인다"(<동아일보> 1929. 12. 6)는 당시 기사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검찰은 경찰 권력을 견제하고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혹은 법치의 지엄함을 빌미로 한편으로는 경찰권력에 편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폭력의 주체가 되어 국민 위에 군림했다.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당시 검찰 출신 국회의원 엄상섭의 발언(주석1)에서 알 수 있듯이 경찰파쇼를 억제하기 위해 검찰에 부여한 기소독점, 기소편의주의, 경찰수사 지휘권, 검사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등의 장치들은 고스란히 '검찰파쇼'의 토대가 되어 언제든 독재정권이 동원할 수 있는 검찰이라는 권력을 낳았다.

 

검찰이 안정적으로 정치권력의 통치 밑으로 들어간 것은 군사정권 때였다. 군대와 중앙정보부 그리고 공화당이라는 사유화된 정당을 통치의 핵으로 삼았던 군사정권은 다른 여러 공무원들처럼 검찰과 법원조차 관료의 틀 속에 묶어서 합법성의 외관을 갖추고자 했다.

 

사법연수원을 설치하여 국가가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교육체제로 모든 검찰과 법관을 찍어냈으며, 유신체제에서 구속적부심사(주석2) 제도 폐지, 재정신청 제도 최소한 축소 등 언제든 긴급구속이 가능하도록 형사소송법을 개정했다. 무소불위로 치닫는 정치권력의 한편에서 검찰권력도 극대화된다. 이후 신직수(1927~2001), 김기춘(1939~) 등으로 이어지는 소위 '정치검찰'의 계보는 이렇게 틀을 잡아갔다.

 

그에 이어 등장한 군사정부는 애초부터 검찰을 관료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다.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법을 통한 지배가 관철되는 억압적 사회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군사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중앙수사국 설치 등 대통령의 하명수사가 가능한 대검체제를 강화하였고 영장신청권을 검사에게만 부여했다.

 

검찰의 역사 : 민주화 이후

19876월항쟁으로 촉발된 민주화는 안타깝게도 이러한 검찰권력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우선 그 자체가 신군부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타협에 의해 이뤄진 체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과정에서 검찰 출신 정치인들이 적지 않게 양산되었고 또 이들이 향후 등장하는 새로운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검찰 권력은 더 세졌다. 과거 군사정권의 통치술 행사 과정에서 군대나 안기부 등이 갖고 있던 몫이 현저히 줄어들고 그 자리를 검찰이 대체했다.

 

권력의 정점이었던 안기부 수장 자리에 배명인, 서동권 같은 검찰 출신이 임용되는가 하면, 범죄와의 전쟁(1990~1992)에서는 검찰의 수사 실적이 특별히 부각되었다. 3당 합당 이후 대통령에 대한 탈당 요구와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 등 당시 노태우 정권이 겪던 정치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검찰이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1992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검찰 권력이 민주화와 전혀 무관한 공백 영역에 자리하는 동시에 여전히 통치술의 한 영역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물론 전두환·노태우의 처벌 과정에서 '실패한 쿠데타'론을 제기한 것도, 이들을 수사하고 처벌로 이끈 것도 모두 검찰이라는 점에서 검찰권력의 양면성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일관되게 진행된 것은 '검찰권력의 강화'였다.



검찰개혁의 시간 참여사회

 

검찰권력은 '실패한 쿠데타'론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보호할 수 있는 동시에, 법과 정의를 내세우며 이들을 처벌하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까지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정치권력을 넘어서는 또 다른 권력을 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이런 양상은 국민의 정부 시절에 와서 극대화된다. 1999년 검찰이 대전 조폐공사의 파업을 유도하였다는 발언이 터져 나오고, 모 재벌 회장의 구명운동 과정에서 검찰총장을 비롯한 고위층에 고가의 옷을 로비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검찰은 최대 위기에 몰렸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최초의 특별검사가 임명되는 한편 범국가적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도 검찰의 수사도 이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알아낸 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라는 농담만 남긴 채 사건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검찰개혁을 향한 국민의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레임덕을 걱정한 정치권력은 검찰개혁보다 그들의 안위를 위해 검찰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는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에 대한 구속이었다. 당시 검찰총장은 취임사에서 '진정한 무사는 곁불을 쬐지 않는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제기된 사법개혁 논의 역시 검찰권력을 순치하는 데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검사와의 대화'는 오히려 검찰권력의 위상만 확인시켰으며, 검찰권력의 핵심인 중수부 폐지 시도는 "내가 먼저 내 목을 치겠다"는 검찰총장의 반발만 야기했다.

 

이어 발생한 송두율 교수 구속 시도(2003)에 대한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 사태는 검찰총장의 사퇴로 이어졌지만, 동시에 "아버지와도 같은 '검찰총장'"이라는 검찰의 강고한 가부장적 조직주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거의 전국가적·전사회적으로 진행되었던 사법개혁의 논의조차 검찰에 관해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어서 공판중심주의라는 원론도 제도화하지 못했다.

명실상부 검찰공화국의 탄생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통치 시기는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 시대였다. 이미 노무현 정부에서부터 전략적 유연성 문제라든가 이라크파병, 대통령탄핵, 행정수도이전사건 등 정치적 의제들이 하나같이 사법적 판단으로 처리되면서 정치의 사법화 내지는 사법에 의한 정치의 식민화 현상이 나타났지만, 이 두 정부는 그러한 사법 만능의 틀을 검찰권력을 통해 재편하였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검찰공화국의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 시기,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된 '법질서 정치'(law and order politics)의 통치술은 정치적 반대나 주장은 물론 시민사회의 집단적 요구나 민원조차도 업무방해죄나 교통방해죄, 명예훼손죄 등의 형사 문제로 만들어 검찰의 손에 맡겼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먼지떨이식 수사는 '법질서 정치'의 첨병으로 나선 검찰이 자신의 권력을 시민사회에 재확인시키는 작업과 다름없었다.

 

이런 검찰공화국은 정치권력과의 야합뿐 아니라 검찰제도 그 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영장신청권을 비롯한 수사(지휘)권에서부터 기소권, 행형지휘권은 물론이고 지자체의 송무사건에 대한 지휘권까지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은 막강한 권력에도 어떤 견제나 감시도 받지 않는다.

 

외청인 검찰청을 감사하고 견제하여야 할 법무부는 애초 검찰의 식민지가 되어 있고, 국정원 등과 같은 권력기관을 비롯하여 외부 주요기관에 파견한 검사들은 검찰의 정보원이자 인적 네트워크의 관리자가 되어 우호적인 외부환경을 조성한다.

 

그뿐만 아니라 검사 출신 의원들의 영향력이 절대 적지 않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중요한 고비마다 그들의 든든한 방호막이 되어 주기도 한다. 정치권력이 법의 이름으로 검찰을 동원하기 위해 만들어준 그 많은 권력이 이제는 괴물이 되어버린 검찰의 고유한 권력이 되어 뼈와 근육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 검찰개혁

최근 터져 나온 검찰개혁 요구는 이러한 검찰공화국을 직격한다. 공수처 설치나 검경수사권 조정 문제는 검찰이 독점하던 권력을 쪼개고 분산하는 것이기에 중요하며, 인권수사준칙이나 특수부 폐지 등은 검찰 조직과 관행에 대한 일대 수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런 논의가 야기하는 정치권과 검찰권력 간의 갈등과 결별의 조짐들, 그리고 그 시끄러움에서 문득문득 각성하게 되는 시민들의 검찰개혁 의지, 이것이야말로 불가역적 개혁의 물꼬를 여는 중대사건이다.

 

검찰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검찰의 권력을 정치기관인 법무부로 이전하는 눈가림의 개혁이 아니라 시민들이 검찰권력에 대한 감시자이자 견제자로 스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가장 두드러진 인식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시작으로부터 우리는 민주적 검찰개혁이라는 창대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법사위 국정감사를 앞두고 법사위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희훈


주석 1. 195419일 국회 형사소송법안 공청회에서 엄상섭 의원은 "기소권만을 가지고도 강력한 기관이거늘 또 수사의 권한까지 푸라스하게 되니 이것은 결국 검찰 파쇼를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우리나라는 경찰이 중앙집권제로 되어 있는데, 경찰에다가 수사권을 전적으로 맡기면 경찰 파쇼라는 것이 나오지 않나, 검찰 파쇼보다 경찰 파쇼의 경향이 더 시지 않을까? 오직 우리나라에 있어서 범죄수사의 주도권은 검찰이 가지는 것이 좋다는 정도로 생각을 했든 것입니다. 그러나 장래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도 조만간 수사권하고 기소권하고는 분리시키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주석 2. 피의자에 대한 구속의 적부를 법원이 심사하여, 그 구속이 위법·부당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구속된 피의자를 석방하는 제도

한상희(achampspd / 오마이뉴스

 

검찰 개혁, 박정희의 용인술 참고하면 답 보인다

[검찰개혁의 시간 ] 공수처 도입 이후의 검찰을 사유한다

'이제야' 제정된 인권보호수사규칙

최근 검찰개혁과 관련해 법무부와 대검찰청 사이에서 벌어진 여러 논란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얻은 한 가지 구체적인 소득은 검찰개혁의 주요 의제들이 실제로 시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 1014일 오전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법무부-대검찰청 협의와 고위 당··청 협의를 거쳐 법률개정사항을 제외한 개혁 방안들을 발표했다. 크게는 특별수사부의 명칭 폐지와 부서 축소가 한 축이고, 인권보호수사규칙(법무부령)의 제정이 다른 한 축이다. 그밖에 검찰에 대한 법무부 감찰의 실질화, 국민 중심의 검찰 조직 문화 정립도 중요한 꼭지로 추가되었다. 이 가운데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것은 두 번째, 즉 인권보호수사규칙의 내용이다.

 

1회 조사는 총 12시간(열람·휴식 제외한 실제 조사 시간은 8시간)을 초과할 수 없고, 조사 후 8시간 이상 연속 휴식을 보장

심야 조사를 '21시부터 06시 이전 조사(열람시간 제외)'로 명시하고, 자발적 신청이 없는 이상 심야 조사를 제한

부당한 별건수사를 제한하는 규정을 신설하고, 부당한 별건수사 및 수사 장기화에 대한 실효적 통제 방안을 마련

부패 범죄 등 직접 수사의 개시, 처리 등 주요 수사 상황을 관할 고등검사장에게 보고하고 사무 감사로 적법절차 위반 여부 등을 점검

전화·이메일 조사 활용 등 출석 조사 최소화, 출석 후 불필요한 대기 금지, 수용자 등 사건 관계인에 대한 지나친 반복적 출석요구 제한, 출석요구 과정을 기록하도록 규정을 신설

사건 관계인을 친절, 경청, 배려하는 자세로 대하고, 모멸감을 주는 언행을 금지

 

수사의 대상이 대부분 헌법의 주어이자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임을 감안하면, 위 내용은 그야말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내용을 법무부장관이 대검찰청과 고위 당··청 협의를 거쳐, '이제야' 검찰개혁 방안으로 국민 앞에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단언컨대, 이 인권보호수사규칙의 내용은 결코 개혁이 아니며, 그저 지독한 비정상이 늦게나마 정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뒤늦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의 결단에 따른 업적으로 칭송하는 것은, 그래서 솔직히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처럼 그저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이 결단만 하면, 고위 당··청 협의만 거치면 정상화시킬 수 있었던 것을 지금까지는 짐짓 모른 체하며 뭉개왔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수십 명의 법률가가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단 한 명도 그와 같은 결단과 협의와 정상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들에게는 혹시 국민 중심의 검찰 조직 문화를 반대하고, 절제된 검찰권 행사와 피조사자의 인권 보호를 미루어야 할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헌법이 말하는 대로 검찰의 수사 대상이 헌법의 주어이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 주권자 국민이라는 사실을 단 한번이라도 떠올려보기만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은 이와 같은 뒤늦은 개혁 방안을 발표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동안 주권자 국민 앞에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였음을 자인하고 깊이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도 검찰개혁은 이제 출발점에 섰을 뿐임이 분명하다.

 

공수처를 넘어서는 권력개혁 방향

현 시점에서 검찰개혁의 화두는 단연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의 설치에 관한 법안의 국회통과 여부이다. 이미 민주당과 세 야당(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합의한 두 개의 법안(백혜련 의원안, 권은희 의원안)이 패스트트랙에 올라가 있어, 절차가 요구하는 시한이 채워지는 대로 본회의에 상정되면 곧 투표가 가능하다.

 

물론 자유한국당은 모든 논리를 총동원하여 공수처법안의 통과를 무산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껏 수많은 지면에서 다루었고, 지금도 여러 미디어의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서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는 찬반의 입씨름을 여기서 재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단지 공수처의 설치 여부를 주권자인 국민의 입장에서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기본적인 시각을 공유하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그래야만 공수처를 설치한 뒤에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공수처를 넘어서는 검찰개혁의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생경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잠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래 권좌를 유지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력운용술을 생각해 보자. 잘 알려져 있듯이, 박정희 전 대통령은 18년에 이르는 집권 기관 동안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이른바 2인자를 두지 않는 특유의 용인술을 썼다. 김종필, 김재춘, 정일권, 김형욱, 이후락, 박종규, 윤필용, 강창성, 김재규, 차지철 등 한 때나마 2인자 소리를 듣던 인물들은 그래서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러한 용인술은 정보 및 수사기구의 활용에 관해서도 유사한 모습으로 관철되었다. 집권 초기에는 중앙정보부가 압도적인 우위를 구가했지만, 중반기부터는 국군 보안사령부가 위세를 떨쳤고,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청와대 경호실이 권력을 휘둘렀다. 세 기관들은 독재 권력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서로 견제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제 나는 한 가지 사유 실험을 독자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야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리에 헌법의 주어인 주권자 국민을 놓아보자. 그리고 2인자의 자리에 민정수석이나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을 놓아보자. 그리고 중앙정보부, 국군 보안사령부, 청와대 경호실의 자리에 법무부, 검찰, 공수처를 놓아보자. 어떠한 그림이 펼쳐지는가?

 

물론 독자들 중 누군가는 민주화된 사회는 독재 정권의 용인술이나 권력운용의 노하우를 참고할 이유가 없다고 강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하여 공부를 계속할수록 나는 그와 같은 주장에 동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권력은 어디까지나 권력이기 때문이다. 민주화된 사회든 아니든, 모든 권력은 스스로를 확대하고 그래서 부패하려는 속성을 벗어버릴 수 없다. 그나마 권력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권력을 분립시켜, 권력들끼리 견제하고 균형하게 만들 때뿐이다. 그것도 주권자 국민이 조금만 방심하면 권력의 확대와 부패는 또 다시 벌어지고 만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민주화된 사회에서 주권자 국민은, 필요하다면 독재 권력이 활용했던 용인술이나 권력운용의 노하우까지도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국민이 부여한 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공소유지권 등이 너무 한 기관에만 집중되어 그 기관 자체가 도무지 권력 남용과 인권 침해를 피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상황이라면, 주권자인 국민이 개입하여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 해야만 여러 권력이 주권자 국민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서로 견제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독재 권력도 자신의 권력을 보전하기 위하여 과대한 권력을 나누고 권력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도모한다. 그렇다면 민주화된 한국 사회에서 주권자 국민이 앞장서서 형사 사법 권력 체계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을 회복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과 우리나라 검사의 권한 비교 경찰청

 

주권자의 검찰권력 통제 방안, 검사장직선제

현재 패스트트랙에 올라있는 공수처법안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그동안 수사의 대상에서 사실상 빠져 있었던 판검사 등의 고위 공직자를 전담하는 점에 관하여 국민의 지지가 높다. 일각에서는 국회의원을 수사대상에 포함해 공수처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을 뺀다면,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나 공수처의 구성원들의 부패 문제에 대해서는 기존 검찰의 특수부, 아니 반부패수사부가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 검찰에게 맡기기 부적절한 상황이라면, 그동안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상설 특검법을 활용하여 특별검사를 임명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수처법안의 통과가 검찰개혁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수처는 그저 검찰개혁의 알파, '시작'일 뿐이다. 형사사법체계의 개혁 전반으로 시야를 넓히면, 비정상의 정상화, 그것도 매우 뒤늦은 정상화로 불러야 할 여러 의제들이 법제화를 기다리고 있다. 이 가운데 검·경수사권 조정과 자치경찰제의 실시는 사실 개혁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측면을 가지고 있다. 수사권의 조정을 통해서 검찰과 경찰 사이에 견제와 균형의 체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나, 치안 유지를 각 지방자치단체의 소관 사무로 삼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이루어졌어야 할 과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의제는 일단 정상화의 방향을 굳건하게 잡고, 난마와 같은 관할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면서, 적어도 20년 정도의 과도기를 거친다고 생각하면서 매우 실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형사사법체계의 개혁에 있어서 그 주도권이 주권자 국민에게 있다는 점을 어떻게 확인하고 또 각인시킬 수 있을까? 오래도록 이 점을 깊이 고민하면서, 나는 형사사법절차의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검찰의 조직과정에 주권자 국민이 직접 개입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바로 각 지방검찰청 검사장을 4년 임기로 해당 지역의 주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현재의 검찰청법과 공직선거법의 일부 조항을 손보기만 하면, 당장 2022년의 지방선거에서부터 지방검사장의 주민직선제를 실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검찰 조직을 중앙의 정치권력이 합의에 의하여 구성하는 대검-고검과 공수처,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이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지검들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며, 대검-고검과 공수처는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과 국회를 통하여, 각 지검은 각 지역의 주민이 직접 선거를 통하여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대검-고검과 공수처가, 또한 각 지역의 지검들이 국민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개혁 경쟁을 벌이는 모습도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국운(achampspd) / 오마이뉴스

 

'영웅 검찰'의 추락, 국민이 등돌린 3가지 이유

[주장] 도쿄지검 특수부 붕괴 원인, 그리고 멈출 수 없는 검찰개혁

"검사는 수사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제도를 바꾸려하면 검찰 파쇼가 된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일본 전후(戰後) 18대 검사총장 요시나가 유스케


어느 모임 참석자들이 중국음식점에 주문을 하려 한다. 4명이 자장면, 3명이 짬뽕, 2명이 볶음밥, 그리고 나머지 1명은 우동을 원하고 있다. 이때 주문방법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 모임의 최고연장자가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으로 통일시키는 방법이다. 연장자가 짬뽕을 원한다면, 식성이 같은 두 사람은 다행이지만 나머지 7명은 원하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것은 독재정치(dictatorship).   

둘째,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표결에 따라 음식을 통일하는 방식이다. 투표결과 만약 자장면으로 결정이 된다면, 결국 자신이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게 되는 사람은 4명뿐이다. 이것은 대의민주정치(representative democracy).  

마지막 방법은 10명이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이다. 주문자가 각자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음식을 배달시킨 마지막 방식은 직접민주정치(direct democracy)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의 정치질서는 기본적으로 대의민주정치를 따르고 있다. 대표자에게 권리를 일정기간 양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리를 양도하는 그 순간부터 혹시 우리는 권리를 갖지 않은 자, 즉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는 이런 대의민주주의의 맹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정치란 대의민주주의의 논리를 넘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독재정치나 대의민주정치는 사실은 민주주의 이념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직접민주정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이다.

이상은 철학자 강신주 박사가 과거에 펴냈던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 - 치안으로부터 정치로, 랑시에르 <정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 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그런데 투표를 통한 권력의 위임문제와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강신주 박사의 성찰에서 빠진 부분들이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 국회의 직무유기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찰의 정치개입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12일 오후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9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권우성

 

24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표창원 의원은 총선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이번 20대 국회를 '최악의 국회'라고 표현했다. 맞다. 최악의 국회다. 지난 916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가 밝힌 바, 20대 국회의 법안 처리율은 겨우 30.5%에 불과했다(1752.1%, 1845.4%, 1942.82%). 그동안 자유한국당이 감행했던 국회 보이콧은 무려 18회나 된다. 광장의 직접민주주의 대신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애초에 복원할 정치가 대체 언제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자유한국당은 자신들이 주도해서 만들었던 국회 선진화법을 스스로 어겼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당 의원을 감금하고 국회를 폭력의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도 반성은커녕, 국회 선진화법 위반행위에 대해 공천 시 가산점을 주겠다는 방침과 함께 표창장을 나눠주며 자축연을 벌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 대신, 민주당 소속 의원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불출마선언을 하는 현실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서초동의 촛불은 검찰개혁뿐만 아니라 직무유기와 폭력으로 국회의 정상기능을 마비시킨 자유한국당에 대한 광장의 직접민주정치, 국민적 분노의 표출이었다.

 

인사청문회 전후 압수수색을 통해 법무장관 가족과 그 주변인들에 대한 먼지떨이식 수사가 진행됐다. 조국 전 민정수석이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지 않았거나 혹은 검찰개혁을 전면에 내걸지 않았어도, 과연 검찰은 이런 대대적인 압수수색과 수사를 진행했을까? 지금, 검찰의 정치개입 문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검찰개혁의 올바른 방향을 위해, 교훈과 반면교사가 될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도쿄지검 특수부 붕괴의 원인 - 가찰(苛察)'극장형 수사'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는 1948년 쇼와전기 사건을 시작으로 1976년 록히드 사건, 1988년 리크루트 사건, 1992년 사가와규빈 사건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권력형 비리들을 파헤쳐 일본 국민들 사이에 영웅으로 일컬어진 바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도쿄지검 특수부는 더 이상 영웅이라 불리지 않는다. 국민들로부터의 신뢰를 그들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일본 법조계와 도쿄지검 특수부 취재를 맡았던 산케이 신문 기자 이시즈카 겐지가 몰락의 원인을 추적하여 2010,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본인의 취재수첩에 대동소이하게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듣고 반복해서 기록했던 다음의 내용들을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했다.

 

"처음 작성한 시나리오에 억지로 끼워 맞춰 사건을 만들고 있다. 공갈적인 취조가 도를 넘어섰다." - 전 도쿄지검 특수부 간부

 

"더 이상 프로 수사집단이 아니다. 제공받은 정보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인재가 없기에, 정보를 덥석 물어 안이하게 사건을 짜 맞추고만 있다." - 경시청 관계자

 

'증거가 있어야 기소한다'는 원칙을 충실히 따랐던 도쿄지검 특수부가, 이제는 시나리오를 설정해서 증거를 조작하는 형편없는 집단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아울러 전 특수부 검사이자 도인요코하마 대학 법학대학원 교수인 고하라 노부오의 말을 인용함과 동시에, 문제점을 크게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상의하달형', '악인 중심형', '극장형' 수사가 그것이다.

 

"특수부는 1976년의 록히드 사건에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수상을 기소하여 국민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승리의 체험'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악한 정치가와 대결한다는 구도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상의하달형 - 상층부에서 기획한 시나리오에 억지로 맞춰서 조서를 꾸미는 수사관행   

악인중심형 - 처음부터 특정 인물을 '악인'으로 지목해 놓고, 관계자들의 진술에 따라 악인 중심의 뻔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방식  

극장형 - 억지로 단순화한 스토리에 따라서 수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강제 수사를 감행함과 동시에, 언론에 정보를 흘려 여론을 조작해가면서 수사를 진행하는 방식

 

이와는 반대로 일본 검사들 사이에는 후배들에게 '가찰(苛察)'이라는 단어를 통해, 잘못된 수사관행을 나름 경계하려는 전통이 있었다. 원래는 '사소한 일에까지 파고들어 자세히 관찰한다'라는 의미이지만, 일본 검사들이 사용한 가찰이라는 단어는 '검찰'의 검()자를 '가혹하다'는 의미의 가()로 바꾼 조어였다. 검찰권의 행사가 강압적인 방법으로 기울어 적정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필요 이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잘못된 권력행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언 유착 철저히 경계했던 일본 검사총장의 '수사 밀행주의'

'복도에 서 있거나 얼쩡거리는 것을 엄히 금함. - 검사정 요시나가 유스케.'

 

198812, 일본 최고검찰청, 도교지검, 도쿄 지방검찰청이 있는 옛 합동청사 복도에 이상한 종이가 하나 나붙었다.

 

당시는 리쿠르트가 가격 상승이 확실한 자회사의 미공개 주식을 나카소네 이에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미야자와 기이치 등 90명이 넘는 정치인과 고위관료들에게 양도했다는 소위 '리쿠르트' 사건이 정계를 강타하고 있던 시점이다.

 

이때 각 언론사 법조계 담당기자들은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검사들을 붙잡고 매달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리고 검찰청사 복도에 진을 친 채 오가는 검사들의 움직임을 좇으면서 극성을 부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심지어는 외출하는 검사를 미행하기까지 했다. 특수부가 지검의 지원을 받아 검사 숫자를 늘리자, 복도에 모여 있는 기자들 역시 잔뜩 늘어났다. 그러자 취재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된 것에 대해 화가 났던 검사정 요시나가가 직접 종이에 써서 기자들에게 경고를 했던 것이다.

 

요시나가는 1932년 오카야마 출생으로, 대학 재학 중에 사법시험에 합격, 23세의 나이에 검사에 임관했다. 1964년 도쿄지검 특수부에 배속된 이래로, 특히 전 수상인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기소했던 록히드 사건(1976)의 주임검사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래서 특수부 내에서는 수사현장파 검사들의 상징처럼 숭상을 받았고, 당시 언론이 붙여 줬던 칭호는 '미스터 특수'였다.

 

이후 198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동안 우리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일본 검사총장에 모두 도쿄대 출신이 취임한 가운데, 1993년 유일하게 요시나가 유스케만이 지방대(오카야마 대학) 출신으로 검사총장에 올랐다. 그때 검사총장 취임 후 기자회견장에서 그가 말했던 "검사는 수사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수사로 세상이나 제도를 바꾸려 하면 검찰 파쇼가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명언은 그의 지론인 '수사 밀행주의'와 함께 두고두고 세간에 회자됐다.

 

요시나가의 수사 밀행주의는 단순히 수사대상에 대한 배려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론을 통해 수사의 움직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자칫 특수부 수사가 퇴로를 차단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실질적인 이유였다.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놓고 '수사결과, 사건이 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시나가의 수사 특징을 '시나리오를 현장에 강요하지 않는 수사'라고 했다. 강제수사에 들어가기 전, 그만큼 조사와 수사에 신중을 기해서 모든 증거들을 확실히 확보해야 한다는 '증거주의 수사'가 핵심이다. 그래서 요시나가는 가택수색조차 떠들썩하게 보도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당시 한 도쿄특수부 간부는 언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검찰은 말하지 않는다'라는 얘기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법정에서 할 뿐이다. 이후 우리가 한 일을 세상에 전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맡긴다."

 

최근 우리 정부는 일본 검찰특수부와 마찬가지로 특수부가 있는 전국 7개청 가운데 서울·대구·광주 3개 검찰청을 제외한 나머지를 폐지하는,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바 있다. 1973년 대검찰청 특수부가 설치된 이후 46년 만에 간판도 '반부패수사부'로 바뀌었다.

 

물론 이런 조치도 자체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일본의 사례를 살펴본다면, 도쿄지검 특수부가 가장 빛나던 시기를 이끌고 존경받았던 요시나가 유스케의 경우를 참고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검찰 역시 도쿄지검 특수부처럼 '가찰(苛察)''극장식 수사'의 폐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은 성찰과 함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차후 검찰 기자실을 없애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대신, 법원과 법무부를 통해 수사가 아닌 재판 중심의 사실들을 알리는 관행이 정립되어야 한다. ·언 유착 문제의 해결은 검찰개혁의 핵심과제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이후 언급할 '무죄추정의 원칙'과도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문명국가의 징표인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사실 공표 문제

 

12일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9차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이희훈

 

라틴어 'in dubio pro reo(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문구는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아울러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Beyond a reasonable doubt)' 증거제시가 기본 전제가 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1789년에 일어났던 프랑스 시민혁명의 산물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9, '누구든지 범죄인으로 선고되기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에서 비롯됐다. 그 전까지는 이른바 규문주의(糾問主義, inquisitorial system)에 의해 수사권·기소권·사법권 모두를 왕의 권한에 귀속시켰고, 왕이 임명한 관리가 범죄를 수사하고 형벌까지 내렸었다. 이런 규문주의식 재판에는 유죄 인정을 위해 흔히 자백이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곤 했는데, 마녀사냥식 재판과 고문이 횡행했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고문과 마녀사냥식의 야만적인 재판을 대체한 무죄추정의 원칙은 문명국가임을 증명하는 확고한 징표로 작용했다. 이후 무죄추정의 원칙은 19481210UN이 제정한 '세계 인권 선언' 11조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이 된 바 있다. 이를 반영하여 우리나라 역시 헌법 제274항과 형사소송법 제307, 325조에 무죄추정의 원칙을 재판의 기본으로 명시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잘못된 관행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검찰에 의한 '피의사실 공표 의혹'이 바로 그것이다. 조국 장관의 경우 외에도 여야 유불리를 막론하고 그 이전부터 피의사실 공표로 의심될 만한 사례들은 수없이 존재해왔다. 재판의 측면에서, 우리는 과연 문명국가에 살고 있는가?

 

일부에서는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이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기본 전제임을 감안한다면 납득하기 힘든 주장이다. '검찰과 언론이 유착할 권리', 혹은 '언론의 검찰발 기사 받아쓰기의 권리'에 국민의 알권리를 갖다 붙여서는 안 된다. 장관 후보 딸의 학교 내신 성적에 대해 국민이 대체 언제 알고 싶어했다는 것인가?

 

멈출 수 없는 '검찰개혁 대전'과 차기 법무장관 임명문제

검찰은 대통령이 지명한 장관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회 도중 수사의 칼날을 휘둘렀다. 필연적으로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명권에 대한 도전이자 국회의 인사청문기능을 훼손한 과도한 정치개입이라는 비판을 낳았다. 임기가 유한한 지도부 때문에 검찰 전체가 국민들로부터 부정적인 방향으로 인식되는 것은 검찰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불행이다.

 

지극히 나쁜 선례라는 점을 놓고 볼 때, 문재인 정부가 이를 앞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해결해 나갈지는 아마도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수사를 통해 제도를 바꾸려하면 '검찰파쇼'라는 요시나가 일본 검사총장의 의미심장한 지적이 떠오르는 상황이다.

 

공수처 도입 등 국회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은 앞으로 정치권에서 협상을 통해 풀어 나가면 된다. 반면 차기 법무장관 임명문제는 검찰개혁의 또 다른 시험대로 작용하면서, 개혁과제들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사검증이나 국회청문 과정을 통과할지 모르지만 임은정 검사가 차기 법무장관에 적격이라는 여론도 있다. 기수중심의 서열문화나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에 제동을 거는 데 앞장서서 노력해 왔다는 점이 배경이다. 현재 윤석열 검찰체제가 지닌 문제점과 검찰 내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점 역시 또 다른 강점이다.

 

아울러 참여정부 시절부터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일을 해온 전해철 의원도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당초 총선을 위해 고사하던 입장에서 검찰개혁을 위해서라면 장관직을 맡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선회한 배경이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어찌되었건 차기 법무장관은 국민적인 열망과 함께 검찰에 대한 문민통제, 그리고 검찰개혁 완수의 과제를 굳건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번에도 검찰개혁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조국 장관 전에도, 그 이후에도 '검찰개혁 대전'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한다.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고자하는 국민들의 직접민주정치, 그 뜨거운 열망이 피어오르고 있다. '검찰개혁 대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정소앙(jsakor)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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