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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오래된 미래

가덕 동선에서 발견한 오동나무 거목과 소나무 ... 어쩌면 최고의 오동

by 이성근 2025. 3. 3.

가덕 답사에 들었다 첫 번째 장소에서 우연히 산쪽을 바라보다 주변 나무보다 덩치가 큰 나무가 눈에 들어 왔다. 동묘산 133m 이 눌차만으로 흘러내리는 가장자리 무덤가 주변이었다.  일정을 변경하여 바로 확인에 들었다. 작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었고 과수원이 있었다.  주변 우점 교목은 곰솔군이었다. 

동선새바지길에서 직선거리 50~80m 거리였다.  그동인 숫하게 지나다녔지만 의식하지 못했다. 그걸 눌차만 가장자리에서 죽도를 비롯한 만쪽이 아닌 산지쪽을 뒤돌아 보면서 '어? 큰나무가 있네' 가 되면서 확인된 것이다.  

사실 가덕의 노거수는 웬만큼 조사했다 여겼지만 한편으론 발견하지 못한 나무는 또 있을 것이라 판단해 왔고 3.5 오동나무와 2.6/2.5 소나무는 그런 나무에 해당한다. 

발견된 소나무는 일종의 도레솔에 해당된다. 조상들은 사람이 살다 죽으면 무덤에 들게 하고 주변에는 소나무를 심어 영혼을 달랬다고 한다. 키가 큰 소나무들은 하늘과 맞닿아 있으므로 영혼이 그 숲을 이용해서 천상계와 지상계를 오르내리며 스스로를 위로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숲이 없으면 영혼은 안정을 잃고 묘지 밖으로 탈출하여 후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또한 저승으로 간 사람이 이승이 보이면 후손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음 편히 가지 못할까봐 이승을 가리기 위해 심었다고도 한다. 도래솔은 가덕 여러 곳에서 볼 수 있고 거기 선 나무들은 대개 소나무들이고 제법 수령이 되는 개체가 많다.  

도래솔의 연원은 고구려때 까지 올라 간다 

처음 멀리서 보았을 때 참나무류인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니 오동나무였다.  사실 목재로서의 오동나무가 가지는 여러 다양한 효능은 오래전에 증명된바 있다.  다만 그렇게 빨리 자라는 만큼 장수목은 아니었기에 노거수 대상에서는 그 이름 찾기 어려웠다.  

오동나무는 원래 머귀나무로 이 머귀나무의 머귀가 (오), 나무가 머귀 (동)이기 때문에 한자로 오동이라 한다. 1천여 종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나무 중에 이보다 더 큰 잎사귀를 갖는 나무는 없다. 바람에 찢어지기 쉽고 벌레가 눈독 들일 이 커다란 잎사귀를 갖고 있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은 햇빛을 받아 더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리겠다는 속셈이다. 그래서 오동나무는 15~20년이면 쓸만한 재목이 된다. 짧게는 40~50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나 되어야 겨우 '나무구실'을 하는 보통의 다른 나무들이 눈 흘기고 질투할 만하다.

1년에 나이테 지름이 2~3cm나 되는 초고속 성장을 하지만 세포 하나하나를 쓸모있게 만들어 넣을 수 있는 오동나무의 능력은 그야말로 '슈퍼트리'이다. 그래서 자람의 속도에 비하여 훨씬 단단한 나무가 된다.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도 적고 잘 썩지 않으며 불에 잘 타지 않는 성질까지 있다. 당연히 쓰임새가 넓어서 장롱, 문갑, 소반, 목침, 상구 등 생활용품에 오동나무가 쓰이지 않은 곳이 없다. 악기를 만들 때 공명판의 기능은 다른 나무들은 감히 널 볼 수도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가야금, 거문고, 비파 등 우리의 전통악기는 오동나무라야만 만들 수 있다.
명종15년(1559) 영천 군수 심의검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항교의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벼슬에서 쫒겨난 것은 물론 죄를 주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아 간신히 면하였다. 현종 11년(1670)에도 남포 현감 최양필이 거문고 만들 재목으로 향교의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파직 당한 기록이 있다. 가야금 만들기에 적합한 오동나무는 향교에 주로 있었는데, 고급관리들이 이를 탐내었다가 나무 한 그루 때문에 가문의 영광인 벼슬마저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렇게 쓰임새가 많은 오동나무에 대한 옛 사람들의 사랑이 각별하여 동이란 이름이 들어간 가짜 오동나무가 여럿 있다. 벽오동, 자동, 유동, 의동, 야동, 개오동 등 오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무들도 잎만 비슷하면 모두 오동이란 접두어나 집미어를 하사받는 영광을 얻었다. 또 민가에서는 신혼부부들이 결혼기념으로 오동나무를 심었는데 훗날 자녀가 장성하여 시집 장가 갈 때 그 나무를 베어 혼수를 담는 함도 만들고 농, 궤 등등 살림에 필요한 여러 가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옛말에 '봉황새는 대나무 열매만 먹고 집은 오동나무에만 짓는다'라고 할 만큼 귀하게 여기던 나무였다. 나막신을 오동나무로 만들면 가볍고 발이 편하고 땀이 차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열매에서 짠 동유는 한방에서 음창 · 오림 · 구충 · 두풍 · 종창 등에 쓰였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 그것으로 가구를 만들어 시집을 보내고 아들을 낳으면 대들보감이 되라고 소나무를 심는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잎은 살충효과가 뛰어나서 재래식 화장실에 넣어두면 벌레가 생기지 않으며 햇볕을 좋아하며, 병충해와 공해 등에 강하고 아무곳에서나 빨리빨리 잘 자라므로 공원의 조경수 또는 풍치림으로 좋다. 게다가 주변 수목의 각종 병해충을 막아주는 효과도 있다. 자료제공 : 단양국유림관리소

위에 언급한 바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야  만들수 있기에 그럴려면 크게 자란 나무를 통으로 베어야 가능했다. 

거문고라 하면 조선 후기 유학자이자 유명 서예가로 활동한 옥동(玉洞) 이서(1662~1723)가 소장하며 즐겼던 거문고 중에 옥동금(玉洞琴)이라고 있다. '벼락 맞은 오동나무'로 만들었다 하는데, 옥동금 뒤판에 음각으로 '옥동(玉洞)'이라 새겨져 있다. 2014년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옥동금의 유래는 옥동 이서가 지은 '봉래금명 병서(蓬萊琴銘 幷序)', 옥동 이서의 동생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이 지은 '벽력금(霹靂琴)''삼형옥동선생가전(三兄玉洞先生家傳)', 수당(修堂) 이남규(1855~1907)의 문집인 '수당집(修堂集)' 등에 전한다. 옥동금은 군자금(君子琴), 봉래금(蓬萊琴), 벽력금(霹靂琴) 등으로도 불렸다.

'봉래금명 병서'에 따르면, 이서는 나사(懶士) 이숙(1658~1693)에게 금강산 바위 위에서 자란 벼락 맞은 오동나무를 선물 받아 문현립(文玄立)이라는 장인에게 맡겨 거문고를 만들었다. 옥동금은 이서의 생몰 연대에 근거하여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이서에게 오동나무를 선물했다는 이숙이 세상을 떠난 해가 1693년임을 감안해 볼 때 제작 시기를 17세기 후반으로 올려 잡기도 한다.

이서는 자신이 소장하게 된 거문고에 봉래산(금강산)에서 온 나무로 만들었다 하여 봉래금(蓬萊琴), 벼락 맞은 나무로 만든 거문고라 하여 벽력금(霹靂琴), 음양의 조화를 갖춘 거문고라는 의미에서 감리금(坎琴음양금(陰陽琴), 경계의 도구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풍계금(諷戒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야금이며 거문고 등 악기를 제작함에 유독 오동나무를 선호한 이유는 울림이 좋고악기가 뒤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신 신흠은 오동나무는 1000년이 지나도 가락를 품고 있다’(桐千年老恒藏曲)고 노래한 바 있다.

그렇다고 크게 대접 받는 나무는 아니었다.

"심은 지 십년이면 넉넉히 자라 목재로 쓸 수 있고, 단단하고 가벼워 책상이나 옷장 따위를 만들 때 만만하게 쓰인다. 심지어 오동나무로 만든 관을 뜻하는 동관삼촌(桐棺三寸)’은 가장 보잘것없는 관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물을 보관할 때 오동나무는 무척 귀하게 쓰인다. 오동나무의 뛰어난 습도 조절 능력 때문이다. 오동나무는 습한 환경에서 수분을 흡수하고 건조한 환경에서는 수분을 배출해 실내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킨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오동나무는 고서를 보관할 때 더욱 요긴하게 쓰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장서각 수장고의 바닥과 벽면이 모두 오동나무로 마감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우드플래닛 김수정 기자)

발견된 오동나무는 흉고 3.5m/ 1.2m 근원부 5.5m에 이른다.   문헌 조사 및 소개된 오동나무에 견주어 지금까지 발견된 오동나무 치고는 천국 최고일 수도 있다.  그동안 제법 굵다 싶어도 오동나무의 특성, 예컨데 빠른 자람 때문에 한번도 동정하지 않았다.  오동나무인지 참오동나무인지는 꽃이 필때 확인이 가능해서 오동나무로 기록했다.  오동나무보다 털이 많이 많고 잎이 좀더 크다지만 현장에서 마주치면 꽃필 때 말고는 솔직히 판단하기 어렵다. 꽃은 참오동이 4월말에서 5월초 순이고 오동은 5월 중순에서 6월 초다.  굳이 보태자면 그 꽃들의 수술이 참오동은 4개에다 꽃실이 노란색인 반면 오동은 수술 5개에 꽃실은 황갈색이다. 

안타깝게도 학명에 paulownia coreana라고 명명했던 한국 자생 특산종 오동나무는 참오동나무에 비해 발견되는 빈도는 열에 아홉에 이를 정도로 참오동나무가 월등히 많다.  

참오동나무 ( Paulownia tomentosa)의 경우 속성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산지는 일본과 울릉도 설이 있다. 아무튼 참오동은 어릴 때는 1년에 12.5 m씩 자란다. 그래서 일찍 키를 높인다. 이처럼 빠른 생장 속도는 늦은 목질화 때문이다. 생성 초기부터 목질화가 시작되는 일반적인 나무들과 달리, 참오등은 푸른 줄기와 크고 아름다운 잎을 뽐내며 빠르게 자란 뒤에 목질화가 시작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zI7lGbvAQsM&t=5s

16m 성장! 전세계 가장 빨리 크는 '이 나무'

생명력도 끝내줘서 베어내도 그 자리에 어느샌가 순식간에 다시 자라난다. 심지어 영양 상태가 좋은 땅에서는 밑동까지 잘라내도 거기서부터 다시 자라는 정신나간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이를 완전히 없애려면 뿌리에 약을 치거나 뽑아내야 한다. 씨앗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광야에서 싹을 틔우도록 진화했으나, 오늘날엔 드넓은 들판 같은 곳이 없어서 엉뚱한 곳에서 싹을 틔운다. 도시에서는 공터, 건물의 틈새 등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 나무를 제때 제거해주지 않으면 점점 건물의 틈새에 균열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나무워키

울산 두서면 인보리서 참오동나무 어른나무 발견

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 뿌리목 둘레 433국내 최대 추정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 야산에서 발견된 전국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참오동나무 어른나무.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에서 전국에서 가장 굵은 것으로 추정되는 참오동나무 어른나무가 발견돼 이목을 끌고 있다.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은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 야산에서 전국에서 가장 오동나무류 어른나무로 추정되는 참오동 어른나무를 발견했다고 25일 밝혔다.

보전연합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참오동나무는 가슴 높이에서 크기가 비슷한 줄기 두 개가 난 쌍간목으로, 뿌리목 둘레는 433cm, 20m, 너비 15m이다. 가슴 높이에서 분지된 두 줄기 가운데 큰 줄기는 기부 둘레가 262cm, 작은 줄기는 기부 둘레가 247cm.

정우규 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 대표는 오동나무나 참오동나무는 어릴 때 생장이 빠르고 줄기의 지름이 60~85cm 되면 가구재나 관재로 벌채하기 때문에 큰 나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데 이 같은 어른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예라며 뿌리목 둘레가 433cm인 나무는 한국의 오동나무와 참오동나무들 가운데서 가장 큰 나무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울주군과 문화재청 등 관계 기관에서는 생명 문화재와 유전자 자원으로서 보존과 활용을 위해 인보리 참오동나무 어른나무의 자생 현황을 파악하고, 보존 및 활용 계획을 수립해 실천에 옮길 것을 건의한다고 덧붙였다.

출처 : 울산매일 2020.05.25

오동나무 또는 참오동나무 노거수는 드물다. 검색해보니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 수령 200년된 참오동나무가 심지대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한경변 마사리 마사동에 수령 100년의 오동나무도 등징한다.  

그리고 한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해제 된 울동도 오동나무의 기록도 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울릉군 서면 남양리 석문동 오동나무 1962 12.3 지정 1967.11.1. 해제

오동나무의 세월

고향 집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태어난 집도 아니고 유년을 보낸 집도 아니다. 열일곱부터 스물여섯까지 고작 십 년도 안 되는 세월을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고향, 하면 그 집이 떠오르는 건 우리 가족이 난생처음 가져본 집이라서일 것이다. 그전까지 우리 가족은 월셋집이나 전셋집을 전전했다. 집을 사고 어머니는 사다리에 올라 콧노래를 부르며 반 토막 난 놋숟가락으로 부엌 천장의 그을음을 닥닥 긁어냈다. 아버지는 손바닥만 한 마당에 내가 좋아하는 파리똥(보리수)이며 석류를 심고, 마당가에는 앵두나무를, 뒤란에는 오동나무를 심었다. 멋대가리 없는 오동나무는 뭐하러 심냐고 했더니 아버지가 그랬다.

"니 시집갈 제 장 한나 짜줄라고 근다."

그때 내가 열일곱, 오동나무가 아무리 빨리 자란다 해도 그 시절 결혼 적정 연령이 스물서넛이었으니 턱도 없는 소리였다. 예전에는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이 태어나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동나무를 심는 것으로 자기 집 가진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아무도 살지 않는 집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파리똥과 석류, 앵두나무는 물론 뒤란의 오동나무도 흔적조차 없었다. 오동나무는 성장 속도가 빨라 십 년 정도면 키가 십 미터를 넘기고, 둘레는 한두 아름에 이른다. 자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수령 사십 년이 되었을 테니 그 크기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제야 최근 들어 오동나무를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시골 어디서나 흔하게 보던 나무였다. 오월 초쯤 피어 한 달 넘게 가는 연보랏빛 꽃이 그닥 예쁘지 않은 데다 이용 가치가 없어 다 베어낸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가을만 되면 아이만 한 잎사귀를 뚝뚝 떨궈 마당을 어지럽히는 탓에 오동나무를 볼 때마다 툴툴거렸다. 그 큰 잎사귀가 들이나 산에서 놀던 아이들에게는 유일하고 소중한 우산이었다. 오동나무 구박하는 어머니도 언젠가 모내기를 하다 그 잎사귀 덕에 비 젖은 생쥐꼴을 면하기도 했었다.

아름답지 않거나 쓸모없는 것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시절이 된 듯하다. 개망초나 코스모스 무성하던 길가에는 철 따라 이름도 잘 모르는 어여쁜 꽃들이 질서정연하게 심겨 있다. 더 어여쁜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간혹 슴슴한 된장국 같던 볼품없는 것들이 그립다.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다.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쓸모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여자들은 간혹 노란 고무줄을 찾는다. 아무도 보는 이 없으니 머리 질끈 묶고 편히 놀고 싶은 것이다. 긴 머리 여성들은 씻을 때도 고무줄이 필수다. 그 고무줄, 청소하면서 보일 때마다 일고의 여지도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나는 짧은 머리라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고무줄이 긴요하게 쓰인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고무줄 없이 세수하다 긴 머리를 다 적신 누군가 노란 고무줄을 한 묶음이나 사다 놓았다.

오동나무도 한때는 쓸모가 많았다. 무늬가 예쁘고 견고하여 장롱을 짜는 데 적격이었고, 오동나무로 가구나 악기를 만들면 천년을 간다 하여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요즘은 가구도 악기도 대량생산된다. 오동나무가 대량생산에는 적절치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천지사방 쑥쑥 잘 자라던 것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일 테다. 쓸모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인간의 욕망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한동안 사람들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빠져 엘피판이니 씨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쓰레기 취급했다. 디지털의 시대가 반세기 남짓, 사람들은 슬슬 아날로그에 향수를 갖기 시작했다. 엘피판이 고가에 거래되고, 심지어는 워크맨을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쓸모없다고 해서 쓰레기 취급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대로 낡은 것은 낡은 대로, 예쁜 것은 예쁜 대로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언젠가는 다 쓰일 데가 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나 다 언젠가 쓰일 데가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정지아 소설가/ 무등일보 2022.05.22.

조사를 마치며 나오는 길에 2m 남짓 할 것이라 여기며 지나쳤던 곰솔을 혹시나 재어보니 이 또한 2.5m였다. 

가덕의 평화 가덕이 그 빛깔 그 모양으로 유지되기를  가덕본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