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어느 세계에 달도할 뭇별 -김뱅산 시인 (현대시 기획선 2021.9)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께끗한 하늘로 오라.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문학동네, 1999)
사랑法
떠나고 싶은 者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者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時間)은
침묵(沈默)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沈默)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者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者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시문학》(1973)
풀 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풀잎》(민음사, 1974)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들어와
환한 바다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문학동네, 1999)
고 독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빗방울 하나가 1
빗방울 하나가
창틀에 터억
걸터앉는다
잠시
나의 집이
휘청 – 한다
빗방울 하나가 5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별똥별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
《현대시》(2003), 《초록거미의 사랑》(창작과 비평, 2006)
너를 사랑한다
그 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네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네
그때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네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네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초록거미의 사랑》(창작과 비평, 2006), 제18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막다른 골목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사는 나의 애인을 지독히 사랑했네
막다른 골목에서 늘 헤어지던 인사
막다른 골목에서 만져보던 애인의 손
끝없는 미로의
미래의 단추를 사랑했네
오늘 밤은 미로에 갇힌 애인의 꿈을 불러보네
애인의 꿈속을 뛰어다니네
풀처럼 풀떡풀떡 뛰어다니네
사랑하는 나의 애인 사라진 벼랑
아, 숨 막히는 삶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시인생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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