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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근 .현대사 이야기

ⓒ NARA 1945.9.9 ~

by 이성근 2019. 8. 18.

조선총독부에 들어선 미군, 일렬로 서 항복하는 일본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 미군, 조선에 진주하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전경(2017. 10. 4차 방문 때 촬영). 박도

 

다시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2004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미국 워싱턴D.C. 근교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Archive)과 버지니아주 노퍽의 맥아더기념관을 방문하여 한국 관련사진을 검색, 입수했다.

 

12004. 1. 31. ~ 3. 17.(46일간) 511, 22005. 11. 29. ~ 12. 10.(12일간) 785, 32007. 2. 27. ~ 3. 10.(12일간) 658, 42017. 10. 22. ~ 10. 29.(8일간) 380매 등 78일간 미국에서 모두 2334매의 사진을 가져왔다.

 

나는 이 사진들을 그동안 <오마이뉴스>를 통해 네 차례에 걸쳐 공개, 연재해 왔다. 1<사진으로 본 한국전쟁> (2004. 2. 14.~2004. 5. 4.) 30, 2<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017. 6. 13.~2017. 9. 27.) 30, 3<박도 기자의 사진 근현대사> (2017. 10. 16.~ 2018. 7. 1.) 50, 4<NARA의 북한 측 노획물> (2018. 12. 13. ~ 2019. 1. 21) 10회 등 모두 120회를 연재한 셈이다.

 

최근 그동안 입수해온 자료들을 총정리해 봤다. 그 결과 아직도 500여 점의 사료가 공개되지 않은 채 나의 NARA 앨범 속에 묻혀 있었다. 그래서 미공개 사진을 중심으로 연재 <박도 기자의 NARA 앨범>을 시작한다.

 

이번 연재는 매주 2회로 한 회에 10장 안팎의 사진을 실을 예정이다. 가능한 주제별로 연재하겠으나 그렇게 분류하기에는 애매한 사진도 많고, 또 주제별로 게재하기에는 이미 연재 게재한 사진이 많기 때문에 그때그때 주제별 또는 시기별로 적절히 풀어나갈 예정이다.

 

내가 감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제1차 방미를 위해 성금을 보내주시고 성원해 주신 <오마이뉴스> 독자들 덕분이다. 그래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남은 사진도 모두 <오마이뉴스>를 통해 공개 연재한다. 미국 현지 사정에도 어둡고, 영어에도 서툰 내게 갈잡이가 돼 주신 재미동포 박유종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곁에서 도와주신 이도영 박사, 방선주 박사, 이흥환, 이선옥 연구사님에게도.

 

연재 속 사료가 언론인, 영상예술가에 1차 자료로 이바지하길 바란다. 이 연재가 순항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크나큰 성원을 바란다.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 박도

 

이양선 출현

19세기 중반부터 조선 연근해는 모양이 이상한 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사람들은 시꺼먼 연기를 내뿜는 이 배의 정체를 제대로 모른 채 '모양이 이상한 배'라 이름해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렀다고 한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눈부신 부국강병의 결과를 낳았다. 그들 나라들은 '원료공급''시장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이어 아시아 여러 지역에 '이양선'을 앞세워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양선'은 상선에 무장을 한 것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기선이었다. 아래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 사진은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 침략 당시 사진들이다. 그들은 강화도 침략 5년 전, 미국 상선 한 척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불에 태워진 제너럴셔먼 호 사건을 구실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조선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강화도 초지진과 광성진을 지키던 조선 군인들은 그들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미국 함대는 전면 전쟁도 불사한 조선의 항쟁에 당황한 나머지 결국 뱃머리를 돌렸다.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사진이다.



1. 강화 앞바다에 정박한 이양선이다. 무장한 미 상선 콜로라도(Colorado). NARA

 

2. 미 상선 콜로라도(Colorado)호에서 조선에 상륙하고자 하는 승무원들이 작전을 논의하고 있는 모습(1871.6.). 콜로라도호는 모선으로 모노카시(Monocacy)호 등 지선을 거느린 것으로 보인다. NARA



3. 모노카시(Monocacy)호 승무원들(1871. 6.). NARA



4. 모노카시(Monocacy)호 승무원들에게 살해된 조선수비군(1871. 6.). NARA

 

5. 미 무장 상선 콜로라도(Colorado)호에 오른 첫 번째 조선 관리(1871. 6.). NARA

 

 

일본의 항복과 미군의 진주

194599,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로(阿部信行)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이날 오후 4시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 35년간 나부끼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곧이어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성조기가 게양됐다. 그 시각부터 미군정이 실시됐다.

 

조선점령군 미 제24군단 사령관 육군중장 존 하지는 1945911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틀 전 발표된 태평양미국육군 최고지휘관 맥아더의 포고문 1, 2, 3을 발표했다.

 

포고령 1호는 미군이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하며, 군정기간 중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것. 포고령 2호는 포고 명령을 위반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의 군율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에서 결정하는 대로 사형, 또는 다른 형벌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군정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면 부정하거나 무시한 채, 직접 통치했다.여섯 번째 사진부터는 194599일 미군의 서울 입성과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미군들이 조선총독부로부터 항복을 받는 장면들이다.

 

(* 기자의 기억력 한계와 매 기사 주제를 살리기 위하여 일부 사진은 이미 연재된 사진들과 겹칠 수 있음을 밝힙니다.)

 

6. 미 육군 24군단 선발대가 서울에 입성하자 시민들이환영하고 있다(1945. 9. 9.). NARA

 

7. 서울,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1945. 9. 9.). NARA

 

8. 서울,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가운데 아베 총독)들이 미군 앞에서 항복하고 있다(1945. 9. 9.). NARA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미군 측 카메라맨들이 촬영하고 있다(1945. 9. 9.). NARA

 

10.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일본 측 카메라맨이 촬영하고 있다(1945. 9. 9.). NARA

 

11. 서울, 일본항복 조인식 이후 가장 먼저 행해진 일은 조선총독부 광장의 국기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온 일이다. 미군이 일장기를 내리고 있다(1945. 9. 9.). NARA

 

12. 서울, 조선총독부 광장의 국기게양대에 미국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이로써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에서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미군정이 실시됐다(1945. 9. 9.). NARA

 

 

미군 상륙에 시민들은 환호했지만... 힘들어진 민중들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 미 군정기 당시 이런저런 일들



1. 서울, 한 미군(왼쪽)이 일본군(오른쪽)에게 성냥을 빌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1945. 9.). NARA

 



2. 서울시민들이 미군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1945. 9. 9.). NARA

 

'고문정치' '통역정치'가 극성을 부리다

194599일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서명식이 끝난 그날 오후 4시 미군이 조선총독부 광장에 도열한 가운데 국기게양대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이어 미 성조기가 올라갔다.

 

그 장면을 본 조선의 백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일제로부터 해방의 기쁨과 자주 독립의 부푼 꿈에 젖은 조선 백성들은 통치자만 바뀐 모습에 먹먹했다. 하지만 그게 당시 현실이었다.

 

미군이 서울로 입성한 194599일부터 사실상 미군정은 시작됐다. 한국 실정에 어두운 그들은 군정기간 동안 '고문정치' '통역정치'38도선 이남의 조선을 통치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다.

 

해방 직전까지 조선총독부는 소위 '대동아전쟁'을 치르느라 정치·경제·사회 등 전 분야에 엄격한 통제정책을 폈다. 일제는 조선백성들에게 모든 생필품(생활필수품)조차 최소 수준으로 공급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이런 내핍 통제 경제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게다가 고급 기술을 장악했던 일본인들이 자국으로 물러가자 생산설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모든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더욱이 조선총독부나 미 군정당국은 무분별한 통화량 남발 정책을 펴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틈에 친일 정상배를 등에 업은 모리배들은 이를 치부의 기회로 여기고 활개를 쳤다.

 



3. 서울, 7사단 장병들이 군정청(옛 총독부) 앞 시가지를 행진하자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1945. 9. 9.). NARA

 

4. 부산, 미 해군 상륙 환영 부산시민 대회(1945. 9. 21.). NARA

 

5. 인천, 썰물로 바닷물이 빠져나가자 미군 함정들이 본체를 모두 드러내고 있다(1945. 9. 16.). NARA

 

조선인의 생활을 안정시키지 못한 미군정

그들은 혼란의 그 시기를 자기 배를 불리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백성들은 식량과 생필품 부족으로 아우성인데, 그들 창고에는 가득했다. 또한 그들은 일본인의 적산을 가로채기에 급급했다.

 

미군정기에는 생필품, 특히 식량 부족이 가장 심각했다. 미 군정청은 이를 해결하고자 미곡수집령을 발동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게다가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와 북에서 월남한 동포의 폭증으로 식량 절대량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 데다가 모리배들의 장난으로 그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도시민들은 '먹을 쌀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으며, 또 농민들은 시중가보다 낮은 수매로 불만이 증폭했다.

 

미 군정청이 조선 통치에 이력이 있는 친일관료들을 요직에 앉히자 해방 후 숨죽이던 그들은 다시 활개를 치며 설쳤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백성 위에 군림했다.

 

그러자 백성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19469월 미군정의 식량, 노동정책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대구 '10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유엔감시 아래 남조선 단독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는 '제주 4.3사건'를 불러 일으켰다.

 

다음은 10월 항쟁과 '4.3사건' 당시 쏟아진 구호들이다.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내놓아라!"

"미국의 식민지 정책을 반대한다!"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미군정을 타도하자!"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망국 단독 선거 절대반대!"

"이승만 매국도당 타도하자!"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철수!"

"한국 통일 독립만세!"

- 조성오 지음, 돌베개 발행 <우리역사이야기 3> 25, 36쪽 인용

 

6. 30년 전, 미국인 기술자의 손으로 건설한 인천항 도크에 미군 군함이 들어오고 있다(1945. 9. 28.). NARA



7. 개성 인근 38선 미군 초소(1945. 10.). NARA

   


8. 대구 10. 1. 항쟁(1946. 10. 1.). NARA

   

9. 개성, 북에서 월남한 동포들이 심사를 받고자 미군부대 막사 앞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1947. 6.). NARA

 

10. 서울,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리고 있다. 국기게양대에는 왼쪽부터 미 성조기 태극기, 소련기가 걸려 있다(1947. 10. 3.). NARA



11. 제주도, 산으로 간 주민들이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1948. 5.). NARA

 

 

"텅텅 비다 배급소" 해방 직후 유행어에 담긴 사연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 해방 직후 우리 사회의 모습



1. 북한에서 남하한 이들이 38 선 남쪽 문산리 부근에서 검문검색을 받고 있다(1947. 5.). NARA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

3회는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 비친 해방 후 미군정 시기의 모습들로 꾸며 보았다.

하루 종일 정거장

흐지부지 우체국

먹자판 재판소

깜깜 절벽 전기회사

종이쪽지 세무서

가져오라 면사무소

텅텅 비다 배급소

고드름 장작 때고 냉수 먹세

-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1182

 

위의 내용은 해방 직후 무능한 미군정과 부패상, 사회상을 풍자한 유행어라고 한다. 그 시절 실업자가 넘쳐나는 가운데 매일 수많은 피난민들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경제가 더욱 어려워졌다. 1945년에서 1949년 사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인구가 12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해외동포도 속속 귀환했다. 재일동포 150만 명, 재만(만주)동포 60만 명, 중국 기타 지역 10만 명 가량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해방 당시 남한 인구는 1006만여 명이었는데, 1949년에는 2017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인구폭발도 문제였지만 민생을 괴롭힌 것은 살인적인 물가폭등이었다. 19458월부터 194612월 사이 소매물가는 10배로 올랐으며, 도매물가는 28배나 뛰었다고 한다.

 

이밖에 미군 주둔과 함께 교회가 새로 지어지고, 기독교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전에 없던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2. 성경과 찬송가를 든 아낙네들 NARA

 

3. 해방 후 교회가 우후죽손처럼 늘어났다. 사람들이 교회의 첨탑을 세우고 있다. NARA

 

4. ()시장 풍경 NARA

 

5. 도시의 넝마꾼들 NARA

 

6. 신구 풍습이 혼합된 결혼식 모습 NARA 


 

7. 무당들의 춤 NARA

 

8. 대전, 삼호 방직공장의 여공들 NARA

 

9. 서울, 영등포 시장 상인들 NARA

 

10. 인천, 중국에서 귀국선을 타고 돌아온 동포들(1948. 3. 7.). NARA

 

11. 장에 가는 한국인들, 여인들은 짐을 주로 머리에 이고 다닌다(1948. 5. 21.). NARA

 

12. 제주도의 여인들, 제주도는 바람이 센 고장으로 지붕을 굵은 밧줄로 여몄다(1948. 5. 24.). NARA

 

 

어수선한 해방정국이었지만... 서울 꼬마들의 표정은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 대한민국 정부수립

 

1. 서울, 개구쟁이 어린이들. NARA



2. 서울, 영등포 시장(1947). NARA

 

해방 직후 38선에는 '철책선'이 없었다

이번 회에서는 5.10 총선, 대한민국 정부수립, 북에서 내려오는 민간인과 자동차를 검문 검색하는 장면 등으로 구성해봤다.

 

미군정 기간 중 우여곡절 끝에 1948510일 초대 국회의원을 뽑는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됐다. 유엔의 감시 아래 치러진 총선거로 38도선 이남만의 선거였다. 그나마 김구 진영이나 중도파와 좌파는 불참한 가운데 치러졌다.

 

1948531일 최초의 국회가 열리고, 그해 717일 새 헌법을 만들었다. 그런 뒤 그해 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한편 38도선 이북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일찍 권력을 장악한 뒤, 19489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남북으로 오르내렸다. 그때는 38선은 있었으나 철책선이 없었기에 물자 교류 및 공식 또는 비공식 통행도 가능했다.

 

3. 옹진, 경찰과 주민들이 마을 어귀에 모래가마니를 쌓아두고 자체방어하고 있다(1948. 4. 27.). NARA

 

4. 전남, 한국 전통 장례식 운구 장면(1948. 5. 8.). NARA

 

5.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일에 유권자들이 기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있다(1948. 5. 10.). NARA

 

6. 투표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유권자들(1948. 5. 10.). NARA



7. 제주도, 기마경찰들(1948. 5. 21.). NARA

 

8. 경찰이 38선 남쪽 35마일 지점에서 북에서 내려오는 민간인과 자동차를 검문검색하고 있다(1948. 8.). NARA

 

9.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1948. 8. 15.). NARA 


 

10. 대한민국 정부수립 경축일 날 광화문 일대(1948. 8. 15.).

 

 

몽둥이 들고 논둑 걷는 사람들, 그들의 정체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 폭풍전야, 1949

 

1.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이 중앙청광장에서 열리고 있다(1949. 8. 15.). NARA

 

'좌익 게릴라' 준동에 전전긍긍하는 남한 사회

1948, 한반도에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섰으나 해방정국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친일파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반민특위의 해체되고, 제주 4.3사건에 이은 여수 순천 사건, 국가보안법 제정 등으로 흑백논리가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1949년은 폭풍 전야와 같았다. 1948년 말,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미국에게도 남한에서 군대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자 19496, 미군도 남한 땅에서 철수했다. 그러자 한반도에는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소련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은 북한 지도부는 이때를 무력 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아무런 군사적 준비도 없이 '북진통일'만 외쳤다. 이는 마치 한 선로 위에 두 열차가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꼴이었다.

 

이번 회에서는 백범 김구 장의행렬, 미 군사고문단의 교육, 좌익 게릴라 준동에 전전긍긍하는 치안, 북한인민군 탱크부대 사열장면 등의 사진들을 모아 봤다.

 

2.. 백범 김구 선생 운구 행렬이 장례식장이었던 서울운동장을 출발하고 있다(1949. 7. 5). NARA

 

3. 미군 철수 후, 미 군사 고문단이 남아 국군에 병기교육을 하고 있다(1949. 7. 16.). NARA

 

4. 미 군사 고문단이 국군에게 자동차 교육을 하고 있다(1949. 7. 19.). NARA

 

5. 대한민국 정부수립 1주년 기념식이 중앙청광장에서 열리고 있다(1949. 8. 15.). NARA

 

6. 국방경비대의 교육 장면(1949. 9.). NARA

 

7. 경북의 한 마을, 좌익 게릴라의 침투를 막고자 만든 방호벽(1950. 3. 5.). NARA

 

8. 경북의 한 마을, 주민들이 좌익 게릴라를 막아내고자 방호벽을 쌓고 있다(1950. 5. 3.). NARA

 

9 경북의 한 마을, 좌익 게릴라를 방어하고자 조직된 마을자위대가 출동하고 있다(1950. 5. 11.). NARA

 

10. 좌익 게릴라 침투를 막고자 세운 나무 울타리(1950. 5. 11.) NARA

 

11. 경북의 한 마을 주민들이 좌익 게릴라를 막아내고자 조직한 자위대 (1950. 6. 3.). NARA 

 

12. 소련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은 인민군 탱크부대의 사열 장면. NARA

 

한국전쟁 터지기 전... 긴장감 도는 일촉즉발 전선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 한국전쟁 발발 직전과 직후의 모습

 

1. 한국전쟁 발발 직전. 국군이 38선 부근 초소에서 적진을 경계하고 있다(1950. 6.). NARA

1950년 봄은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1949년 내내 38선상에서 울리던 포성과 총성도 거의 멈췄다. 흡사 태풍 직전의 고요 같다고 할까?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을 반복하던 산골 마을에서도 총성이 멎었다. 무슨 이유인지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19505월의 선거를 앞두고 최대한 선거 시기를 늦춰보려는 이승만과, 시간 내에 선거를 실시하고자 하는 미국 및 유엔한국위원단 사이에 일반인에겐 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   그해 5월의 두 번째 국회의원 선거는 수많은 무소속 후보들이 난립한 가운데 치러졌다. 국민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그저 찍어야 한다니까 찍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두지 않았다.



2. 미 군사고문단이 한국조종사들에게 F-52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1950. 6.).  NARA

 

3. 한국전쟁 발발 직전. 국군 병사가 옹진지구에서 적진을 경계하고 있다(1950. 6.). NARA

 

4. 방한한 덜레스 국무장관이 북한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 덜레스(중앙), 왼편 유재흥 장군,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1950. 6. 18.). NARA

 

5. 방한한 덜레스 국무장관이 전방의 적진을 살피고 있다(1950. 6. 18.). NARA

 

6. 방한한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국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오른쪽 무초 주한 미 대사(1950. 6. 18). NARA

 

전쟁이 터졌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전쟁이 될지 걷잡을 수조차 없었다. 대한민국의 고위직 인사들과 공무원, 경찰들은 서둘러서 짐을 싼 뒤 피란을 떠났다. 하지만 일빈 백성들은 여느 때처럼 그저 38선상의 충돌이겠거니 하며 피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쟁이 자신들의 삶을 얼마나 할퀴고 지나갈지 알지 못했다. 이때 피란 가지 않은 것이 나중에 비도강파, 또는 부역자로 몰리는 빌미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박태균 지음, 책과함께, <한국전쟁> 183쪽 참조).

 

이번 회는 전쟁 발발 직전과 직후의 이미지로 꾸며봤다.

 

7. 한국전쟁 발발 다음날의 서울 태평로. 태풍 전야처럼 한적하다(1950. 6. 26.). NARA

 

8. 한국전쟁 발발 직후 덜레스 국무장관이 도쿄 하네다 공항으로 날아오자 맥아더 장군이 영접하고 있다(1950. 6. 27.). 맥아더기념관

 

9. 수원, 한국전쟁 발발 보고를 받고 방한한 맥아더 장군(1950. 6. 29.). 맥아더기념관

 

10.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울 남쪽 한강 유역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1950. 6. 29.). 맥아더기념관

 

11. 한강대교 폭파 후 모습. NARA

 

[박도 기자의 NARA 앨범 ] 19506, 워싱턴 정가 및 해외동정



1. 장면 주미대사(사진 왼쪽)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트뤼그베 리(Trygve Lie)씨에게 한국전쟁 발발소식을 전하면서 도움을 청하고 있다.(1950. 6. 25. 뉴욕타임스 게재.) NARA

 

2. 루이스 존슨 미 국방장관이 군 수뇌들과 함께 한국전쟁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1950. 6. 26.). NARA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북한군 철수 결의안 통과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간은 1950625일 새벽 4시이지만, 미국 워싱턴 시각으로는 624일 오후 3시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 별장에서 휴가 중이었다. 하지만 미국 워싱턴 정가는 마치 이 전쟁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신속하게 대응했다.

 

미국 워싱턴 시각으로 625, 애치슨 국무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유엔에서 한국전쟁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곧바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아래 유엔안보리)에 제출할 결의안을 작성했다. 트루먼이 워싱턴D.C.에 도착하기 전에 이 결의안은 유엔안보리를 통과했다.

 

그 내용은 '북한이 평화를 파괴하고 있으며, 적대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북한군은 38선 이북으로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이미 북한은 국제적으로 침략국으로 규정됐으며, 유엔군을 조직할 명분이 마련됐다.

 

그런데 소련은 유엔안보리에서 상임이사국인데도 참석치 않아 북한에 대한 결의안은 쉽게 통과됐다. 소련 대표가 유엔안보리에 불참한 것은 당시 유엔안보리에서 중국대표를 타이완 국민당정부에서 공산당정부로 바꿔야 한다고 참석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국은 유엔에서 소련과의 첫 승리를 거둔 후, 기세등등하게 주일미군의 한반도 파견을 결정했다. 이번 회에서는 긴박하게 돌아갔던 당시 워싱턴 정가와 장면 주미대사의 활약상을 담았다.

 

3. 장면 주미대사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미국의 도움을 청하고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뒤 백악관을 떠나고 있다(1950. 6. 26.). NARA

 

4. 주미대사관 무관이 한국전쟁 전황을 브리핑하고 있다(1950. 6. 27.). NARA

 

5. 장면 주미대사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쟁에 우방의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1950. 6. 27. 뉴욕, 사진 맨 오른쪽). NARA

 

6. 워싱턴, 트루먼 대통령이 각료들과 오찬을 나누면서 한국전쟁에 관하여 토의한 뒤 백악관으로 돌아오고 있다(1950. 6. 27.). NARA

 

7. 소련 대표가 유엔안전보장회의에서 유엔군 참전 의결에 불참하고 있다(1950. 6. 27.). 박도

 

8. 루이스 존슨 미 국방장관이 한국전쟁 문제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자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로 가는 도중 기자들에게 에워싸여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1950. 6. 27.). NARA

 

9. 워싱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 파병안이 통과되자 백악관 프레스룸 기자들이 본사로 급전을 하고 있다(1950. 6. 27.). NARA

 

10. 런던,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 경이 한국전쟁 문제를 보고하고자 다우닝 가 수상관저로 가고 있다(1950. 6. 29.). NARA

 

11. 임마누엘 사인 웰 영국 국방장관이 한국전쟁 문제를 보고하고자 다우닝 가 수상관저로 가고 있다(1950. 6. 29.). NARA

 

12. 프랑스 파리시민들이 한국전쟁 신문 기사를 보고 있다(1950. 6. 27.). N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