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순국, '553 vs 7,509'
‘조선소요사건일람표’ 1919.10.2.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및 조선헌병대사령부 작성, 송부
‘조선소요사건일람표’
100년 전인 1919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와 헌병대 사령부가 이 땅에서 일어난 3.1운동의 규모와 내용을 일자별로 총정리 하여 집계한 자료다. 이 자료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848번의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져 587,641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13,157명을 검거했다는 것이다. 또 당시 만세 시위 과정에서 일제 군경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은 553명, 다친 사람은 1,409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일제가 집계한 이 같은 3.1운동의 규모는 사실과 부합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이다. 95쪽(표지와 목차는 제외)에 이르는 이 일람표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일제가 3.1만세 시위를 얼마나 축소, 왜곡해 집계했는지 알아챌 수 있다.
‘제암리 학살 만행 누락’
무엇보다 1919년 당시 일제의 만행이 드러나 국제적인 비난을 샀던 경기도 화성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의 내용은 ‘일람표’에 들어있지 않다.
1919.4.17. 조선헌병대사령관 일일 보고
‘군대가 진압에 종사한 사건의 사상표’ 1919.9.29. 조선군사령부 작성, 송부
사건 발생 이틀 후인 4월 17일, 조선 헌병대 사령부는 본국에 전한 일일 보고를 통해 제암리 학살의 희생자가 사망 20명, 부상 12명로 예측된다고 밝혔다. 또 그 해 9월 말, 학살의 총책임자였던 조선군 사령부가 집계한 사상표에는 무려 29명이 숨졌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 해 10월 조선총독부와 헌병대 사령부의 총 집계에서는 사건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모두 제외하였다.
‘사상자 축소, 누락’
사상자를 애초보다 축소, 정리한 흔적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군대가 진압에 종사한 사건의 사상표’ 중에서 ‘조선소요사건일람표’ 중에서
앞서 언급한 조선 주둔군 사령관 ‘우쯔노미야’가 작성한 ‘사상표’에는 3월 19일 ~ 20일 사이 있었던 경남 함안 군북 만세 시위의 희생자는 ‘사망 20’이지만, 조선총독부가 최종 집계한 ‘일람표’에는 ‘사망 16’으로 표기돼 있다. 3월 21일 경남 산청 단성 시위도 조선군 사령부의 보고보다 사망자가 1명 줄어 있다.
1919.3.28. 조선군사령관 일일 보고 ‘조선소요사건일람표’ 중에서
3월 27일 충북 옥천 이원도 마찬가지. 첫 보고에서는 시위 도중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다쳤다는 보고가 시위 다음날 있었지만 역시 ‘일람표’에선 사망자 표시가 없다.
‘만세 시위 누락’
사상자 뿐만 아니라 발생했던 만세 시위조차 집계하지 않은 흔적도 허다하다. 가령 경기도 포천 지역을 예로 들면, 일일 보고에선 등장하는 3월 13일과 24일에 있었던 3번의 만세 시위가 ‘일람표’에는 모두 빠져 있는 식이다.
1919.3.16.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일일 보고 1919.3.26. 조선헌병대사령관 일일 보고
‘검거자 수도 축소’
검거자 수 1만 3천여 명도 크게 축소해 집계한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총독부가 1920년 1월 작성한 ‘망동 사건 처분표’에 따르면 일제 검찰이 3.1운동 사건과 관련해 다룬 인원은 총 19,054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람표'의 검거 인원보다 6천명이 더 많다. 그런데 이 숫자는 경찰이 입건을 한 다음 검사국으로 넘긴 사람들의 수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제 경찰이나 헌병에 체포된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시위 참가자 수를 추론해 볼 수도 있다. 3.1운동에 실제 참가한 사람은 체포된 인원보다 적어도 5배에서 10배 이상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1919년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은 최소 백만 명에서 많게는 2백만 명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도 절대 무리한 셈법이 아니다.
‘우리 측 3.1운동 통계가 더 현실적!’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상해임시정부라든가 박은식 등 애국지사들이 작성한 3.1운동 통계는 ‘조선 소요 사건 일람표’와 크게 다르다.
◀독립운동 일람표. 1919. 9월. 상해임시정부, ‘한일 관계 사료집’ 중에서 ▶독립운동 일람표. 1920. 박은식, ‘한국 독립운동의 혈사’ 중에서
우리는 보통 박은식 선생이 쓴 ‘한국 독립운동의 혈사’에 나온 일람표를 주로 많이 인용하는데 3.1운동 당시 2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시위에 참가했고, 7천 명이 넘는 순국자가 발생했다고 적고 있다. 중국 망명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작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조선총독부가 이듬해 작성한 ‘망동 사건 처분표’를 토대로 추론한 시위 참여 인원과 매우 비슷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KBS 3.1 운동 특집
[단독] “만세운동에 함께하면 독립될 거란 생각에 기쁘게 참가”
이화학당 학생들이 1910년쯤 서울 정동의 학교 본관 앞에서 교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은 3·1운동의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산파이자 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이화여대 제공
“펑”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의 굉음이 1919년 3월 1일 적막에 싸여 있던 이화학당 교정을 갈랐다. 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이 뛰어나왔다. 담장 밖에서 움트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맨 처음 만난 건 교문을 막고 서 있던 룰루 프라이 학당장이었다. “여러분의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나가면 큰일 납니다.” 막는 자와 나가려는 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지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나갈 겁니다.” 절규에 가까운 호소였다. “내 시체를 넘고 가세요. 살아서 학생들이 당하는 참변을 볼 수 없습니다.” 학당장도 물러설 뜻이 없었다. 학생들은 결국 담을 넘어 본대가 있던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 상당수는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이들 중 노예달 유점선 신특실 등 주동자들의 재판기록을 최근 국민일보가 단독입수했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 ‘3·1운동과 이화학당’을 다음 달 15일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3·1운동과 이화, 여성’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학당장의 만류를 뒤로하고 거리로 나섰던 학생들은 판사의 질문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유점선은 6월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시종 단호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하면 독립될 것으로 생각해 기쁜 마음으로 참가했습니다. 독립이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홀로 서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착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교수는 10대 학생들이 이처럼 당당했던 이유를 이화학당의 교육에서 찾았다. 이 교수는 17일 “이화학당이 추구했던 ‘근대 여성의식’과 ‘민족의식’ 교육이 학생들을 훌륭하게 길러냈다”면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고 교육받은 학생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일에도 주역으로 참여하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재판을 받았던 신특실도 판사의 질문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판사가 일본이 10년 가까이 은혜를 베풀고 있지 않냐는 취지로 묻자 “이처럼 속박을 당하고 자유가 구속돼 있는데 무엇이 은혜인가”라면서 “만세를 부르는 것까지 간섭받고 있다. 만세를 부르는 것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따졌다. 배후 세력을 의심하는 판사에게는 “학식이 넓어짐에 따라 사상도 깊어져 자연스럽게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며 의혹을 일축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노예달은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다. 여러 가지를 배운 결과 혼자 생각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면서 “앞으로도 이런 운동이 있으면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자가 이런 일에 왜 참여했냐고 묻자 “남자나 여자 모두 독립은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응수했다.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들은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생들은 온갖 가혹 행위를 당하면서도 독립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이 재판을 받는 중 이화학당은 독립의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총독부의 임시휴교령이 촉매제였다. 3월 10일부터 학교가 문을 닫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관순은 천안, 손진실은 평양, 김복희는 아산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이 교수는 “이화학당의 휴교는 ‘독립 디아스포라’를 양산하는 계기가 됐고 구속됐던 학생들의 복귀는 이화를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만들었다”면서 “애국부인회와 YWCA 창립을 이화 출신들이 이끌었고 임시정부도 지원했다”고 평가했다. 2.18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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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이유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선(線)을 넘은 사람들
3.1독립선언 10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의 기억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 김신부로(金神父路, 오늘날 瑞金路)에서는 독립운동가 40여 명이 모여서 3.1독립선언의 적장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 때 지금의 국회와 같은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헌장 10조를 작성하여 대한민국이 비록 영토와 인민은 없지만 엄연한 망명 정부임을 대외에 천명하였다.
지금의 헌법인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과 같다. 대한제국 융희황제가 일왕 메이지(明治)에게 넘겼던 주권을 민(民)이 찾아서 민이 주인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발로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었다.
한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은 마치 산소처럼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1운동이 없었다면 민주공화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국무위원회를 통하여 3.1운동을 '3.1절'이 아닌 '독립선언기념일'로 1920년 3월 1일부터 해마다 기억을 소환해 국경절로 기념했다.
중국인들이 기억하는 3.1운동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천두슈(陳獨秀)는 3.1운동에 대해 베이징대 학생들에게 "일본제국주의에 강점되었던 조선이 9년 만에 독립을 선언"했다며, 중국의 현실이 과연 신해혁명 이후 민주공화국으로 나가고 있는지 강렬한 자기비판을 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두 번의 황제로 복벽(復辟)했던 중국 입장에서 3.1운동 소식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중국 각종 언론을 통해서 3.1운동의 소식은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전달됐다. 베이징의 <국민공보>(國民公報)에서는 3.1운동의 원인을 일본의 폭정과 학정에서 찾았으며, 한국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기는 이것을 뛰어넘었다고 평가하였다.
창사(長沙) <대공보>(大公報)에서는 고종의 독살설과 함께 3.1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자세하게 전달했다. 3월 9일부터 4월 말까지 지속적인 3.1운동 소식을 중국의 독자들에게 알렸다. 뿐만 아니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직접 서울을 방문해 3.1운동의 열기를 느끼고자 했다. 1919년 7월 말의 일이다. 毛澤東(마오쩌둥) 역시 3.1운동에 대한 어록을 남길 정도로 우리 민족사의 거대한 물줄기에 대해 기억했다.
한중호조사로 반제국주의 투쟁에 동참
후난성 창사는 한국인들에게는 장쟈지에(張家界)를 여행하기 위한 비행장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에게는 가장 매운 음식이 있는 곳으로, 또 마오쩌둥(毛澤東)의 고향으로 각인된 지역이다. 이곳은 1937년 말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청사를 마련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중국인들과 함께 제국주의에 공동 대항하고자 한중호조사를 만든 곳이다. (한중호조사란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민간 사이에 한중 양측의 친선과 한국의 독립 지원, 반제국주의 활동 등을 위해 결성한 민간단체를 의미한다. 편집자.)
<독립신문> 1921년 3월 26일 자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부로부터 한국 독립운동의 선전 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황영희가 창사시 관민들과 함께 한중호조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크게 보도됐다. 뿐만 아니라 <신한민보> 1921년 5월 19일자 기사에도 창사시에 한중호조사가 조직됐다는 소식이 크게 실렸다.
창사 한중호조사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참여해 발족한 곳으로, 1921년 3월 14일 한중호조사 중 가장 일찍 설립되어 다른 호조사의 모범이 됐다. 설립 대회에서 명칭‧취지‧입사조건‧조직구도‧경비 출처 등의 내용을 포함한 '호조사 약칙'을 통과시켰다. '한중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을 깊이 하고 양국 국민의 사업을 발전'한다는 취지 아래 '한중 양국 국민으로서 남녀・종교를 막론하고 본사의 취지에 동의하며, 2명 이상의 회원들의 소개가 있으면 바로 가입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 한중호조사의 임정 요원들과 중국 대표들 ⓒ위키피디아
창사 한중호조사의 활동은 양국 국민의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 서로 단결하여 제국주의,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투쟁하는 업무를 전개하는 데 있어 일정한 사회적 토대 및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한중호조사는 계획대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한국의 선전 목적이 반일 독립운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한국 측은 후난성(湖南省)에서 망국의 아픔을 강연하고 반일주의를 선전하며 반일 선전내용을 게재한 신문이나 잡지를 배포하는 데 목적을 뒀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지와 지원을 얻어 일본에 함께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측 인사 들은 사상운동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사상의 전파를 통해 민중을 일으키는 것을 중시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정신을 배우는 동시에 한국 지사들의 항일투쟁에 동정과 지지를 표했던 것이다. 이렇듯 양국 지도자들의 행동과 사상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으나, 교류를 지속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양국의 입장은 점차 적극적인 항일로 일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 국민정부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인적‧물적으로 지원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늘날 창사의 한중호조사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지난해 12월 25일 후난 자수대학 옛터, 장사시문물고고연구소 정문을 지나 선산학사로 향했다. 내부에는 창사 한중호조사의 옛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나 표지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이곳이 학교 건물의 일부였다는 것 외에 한중호조사와 관련해서 달리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조선의용대원들 추모에 나타난 한국 독립운동의 타자화
영화 <암살>과 <밀정>이 상영되면서 독립운동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도 했다.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사가 기억의 소환을 넘어서 일상사에서 누군가에게 대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들은 의열단원들이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과 함께 활동했던 윤세주는 1942년 5월 태항산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순국하였다. 중국의 국치일이었던 9월 18일 성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의 추도사가 뒤를 이었다.
그는 조선의용대가 숭고한 국제정신에 입각해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데 그 애국적 기개의 위상을 강조했다. 국제주의 연대와 한국의 독립을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였다. 여기에는 조선의용대의 5년 동안의 활동상도 크게 작용했다. 또한 그들의 희생이 한국과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며 조국 해방을 위해 일치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자유를 위하여 희생된 투사들의 생명은 영원할 것이다. 그들의 전투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싸우는 중국과 조선 국민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몸바쳐 싸운 위업은 더 많은 투사들에 의하여 계승 완수될 것이다.
우리들은 조선의 우수한 투사들의 희생을 몹시 애석히 여긴다. 그러나 여명은 오래지 않아서 다가올 것이다. 우리들은 조선의 혁명 동지들이 화북의 우리 군민과 긴밀히 단합하여 화북의 20만 조선 인민과 더 널리 단결하여 오래지 않은 앞날에 긴 밤의 어둠을 물리치고 올 여명의 서광을 맞이하기 위하여 굳게 손잡고 용감히 적들을 무찌르고 전진하기를 희망한다."
(<해방일보> 1942년 9월 20일 자, '위자유이사 생명영존'「爲自由而史 生命永存」)
주더의 뒤를 이어 중공 정치위원 예젠잉(葉劍英)의 추도사가 있었다. 그의 추도사는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그 활동을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동방 피압박민족 연대 속에서 조선의용대의 위상을 강조했다.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나가 죽음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조선의용대원들의 정신은 반파쇼 투쟁에서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과거를 딛고 미래로
2019년 3.1독립선언 100년, 국제사회는 북미 대화에 온 관심이 쏠려 있다. 100년 전 오늘 한민족은 국내는 물론이며 전 세계에서 자주민임과 자주국임을 선언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강점의 역사 또한 완전히 불법적이며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일제의 한국강점이 "정당한 절차에 따른 국권의 양여"가 아니며, 이를 시행한 일본 제국주의는 문명의 전도자가 아니라, 강탈자이며 무법자로서 국제 강도 행위였다.
3.1독립선언은 강탈자와 무법자에게 일시 우리의 소중한 국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기 위한 위대한 독립선언이었으며, 오늘날 국제사회의 정의를 밝히는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자존의 바탕 위에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100년 전 중국인들이 3.1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3.2 프레시안
Silence Is Golden (Frankie Valli & Four Seasons)(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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