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국길모임 운영위 군산회의- 구불길 6-1 탁류의 채만식과 시인 고은을 만나다.

by 이성근 2013. 6. 10.

 

지난 13일과 14일 한국길모임 운영위 2012년 2차 회의가 군산 사)구불길에서 있었다. 

회의는 올해 초 대전회의를 통해 결의된 사업중의 하나인 한국 길 모임 소속 트레일  안내책자 발행과 4월 군산 구불길 축제와 관련 세미나 주제를 잡기위해서였다.  핵심내용은 한국의 대표적인 길 20개의 트레일을 알리고 가장 잘 즐길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과 앱을 어떻게 만들고 비용을 조달할 것인가 였다.  동기를 부여하고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실용정보로서의 안내책자 만들기는 여러 가지 흥분되는 상상력을 불러 일어켰다.  현재의 출판시장에 대한 조사와 함께 주요 대상 독자층을 비롯하여  SWOT분석까지 더해진 알찬 회의였다.   기본안을 넘어서는 뛰어 넘는 기발한 안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날 회의 내용을 취합 정리하여 조만간 방침이 정해질 것이다.

저녁시간을 한참 넘긴 뒤에야 시내에 있는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홍어탕을 시켰더니 홍어회 서비스로 나왔다.  특유의 코끝을 아리게 하는 맛을 기대하고 한점 먹었는데, 삭힌 홍어가 아니었다.

기분 좋을 만큼 반주를 겸해 저녁을 먹은 뒤 숙소인 구불길 안내센터에서의 1박,

일대의 산동네는 재해지구?로 지정되어 철거중이었다.  공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간밤의 숙취를 해소할 겸 해장을 하러 가는 길

군산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한일옥에서 무우국을 맛 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쇠고기국 혹은 소고기무국 정도일 듯 싶다. 멀건 국물은 콩나물과 무우가 우러난 탓인지 담백하고 시원했다.  대파와 토란, 여기에다 벌건 고추가루를 타면 경상도식  쇠고기국밥이 된다.    

그리고 마을 한 바퀴, 기와 지붕에 미닫이식 문을 단 가계의 모습은 예전에 흔히 보던 점방의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기와지붕의 수막새며 암기와등에 새겨진 문양도 볼 거리다.

슬레이트지붕으로 교체하긴 했지만 집의 본틀은 초가나 기와였을 법한 지붕의 함석 장식 또한 반갑다.  여기도 아파트가 대표적 주거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골목을 만나면 정겨운 이유는 뭔가?

군산에 와서 구불길 하나 쯤은 걸어보리라 작정하고 왔지만 얼쩡거리다가 왔다.  예전에 새만금 반대 할 적 기억도 되살아 났지만 그 기억도 쫒아가지 못했다

이 나들목은 아침에 눈뜨자 마자 산책삼아 걸었는데, 하필이면 이길을 걷게 되었다.  지역 문화유산 해설사이기도 한 홍강석 국장이 동행하며 가능한 보이는 것 마다  그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려고 했다.

이 길은 구불길 6-1 코스로 탁류길이라 불린다. 기점은 백년광장이다. 

월명공원 수시탑, 배와 햇불을 상징한다.  군산시를 지켜주길 바란다는 뜻인  지킬守 가 들어 간 탑명이다.

그 탑 아래서 채만식 문학비 쪽으로 난 능선길을 따라 간다.

 지도를 통해 보면 콩나물고개까지는  가지 못했던 길이다. 다음으로 미룬다.

건너다 보이는 바다가 1380년(고려 우왕6) 8월에  진포해전(鎭浦海戰) 혹은 진포대첩이 벌어졌던 곳이라고 한다.  여말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할 때 였다.  이 해전이 주목받는 이유는 해상에서 화포를 세계최조로 사용된 전투라는 사실과 고려 수군 100척과 왜구 500척이라는 대규모 선단을 대상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이 화약으로 전투에 쓰는 경우는 있었지만, 해상에서 선단에 부착한 화포는 없었다. 서양은 화약의 개념조차도 없었던 시절이다.


진포는 고려대에는 지금의 금강하구 서천군 장항 일대로 한산면 신성리에서 장항읍 원수리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이 위치하였으며,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배치되었던 군사적 요지였다. 일제시대 이전까지 군산 지역은 수심이 얕고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토사가 쌓이는 지형이고, 반면에 서천 지역은 강물의 유속이 빠르고 깍이는 지형으로 수심이 깊다. 일제시대 군산항이 준설되어 항구로서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서천지역이 항구로써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염조선-전통무기의 과학적 재발견’을 쓴 박재광 성균관대 교수에 따르면 “진포해전은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무장한 고려 수군이 치룬 최총의 해전이었다는 점과 함께 해전술상 화포로 무장한 함선이 함포전술을 위주로 공격을 가해 승리했다고 기록된 세계 최초의 전투라는 점이다.”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전의 기본적 틀은 뱃전에 적선에 충돌시켜 적선을 파괴하거나 피해를 주는 당파전술(撞波戰術) 중심이었다. 진포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정지(鄭地)의 남해대첩과 더불어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른 4대첩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아무튼 이 해전으로 말미암아 왜구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잔당들은 옥천, 상주, 영동,  성주, 함양, 운봉, 남원 등으로 도주하며 약탈을 일삼다 그 해 9월 이성계의 황산대첩에서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당시 일본은 역사상 최대의 혼란기라고 하는 남북조시대가 진행중이었다.  헤아려 보면 동아시아 3국 모두가 혼란기였다.  고려로 보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가 망하고, 중국은 원명교체기였다. 

 

북한 개성의 고려박물관에 금강 진포대첩의 명장 ‘최무선 장군’관이 있고 그의 무덤은 개성 교외에 있다고 전한다.  경희대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총통(고려말~조선 세종이전 추정)

월명호수를 중심에 두고 사방 100m 남짓한 구릉으로 연결된 월명공원의 존재는 군산사람들에게 더 없이 고마운 언덕이다. 내려다 보는 곳은 금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곳이다, 해풍을 막아주며 군산을 감싼 형국이다.  

철쭉길을 따라 오르면 백릉 채만식의 문학비가 있다.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되었던 군산시가와 금강을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수시탑 뒤 순환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00m 가량 내려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인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4년에 세운 문학비에는 “탁류는 한 시대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세태의 혼탁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인간의 탐구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제 유서깊은 이 고장 도도히 흐르는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에 정성을 모아 여기 영구불망의 한 돌을 세워 그 업적을 길이 추모하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 그지없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언 "  상여는 쓰지말고, 리어카에다 관은 산국화, 들국화로 덮어 달라"고 했던 말도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  군산역 가는 길 군산하구둑이 바라보아는 곳에 '채만식 문학관'이 있다.  아래글은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있는  군산 소설 '탁류'배경지 소개글이다.

 

전라북도 북서부에 위치한 군산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해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근대 소설 문학의 거장인 소설가 백릉 채만식(1902∼1950)은 임피면 축산리 31번지에서 출생하였고 중앙 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의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하였다. 1925년에 단편 [세길로]가 [조선문단]에서 추천을 받았고, 그 후 지속적으로 단편과 장편소설 그리고 희곡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1937년에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장편소설 [탁류]를 조선 일보에 연재하였고 1945년 4월에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지속적으로 글을 쓰다가 건강을 잃고,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

* 개요
소설 '탁류'는 1937년 12월부터 1938년 5월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채만식(蔡萬植)의 장편소설이다. 모함과 사기, 살인 등 부조리로 얽힌 1930년대의 사회상을 풍자와 냉소로 엮은 작품이다. 군산 지방을 배경으로 식민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일인 중심의 신흥 도시와 한국인들의 거주지로서의 빈민가를 대립적 구도로 설정하여 도시 하층민들의 몰락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힘겨운 사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탁류'라는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처음에는 맑던 강물이 점차 탁하게 바뀌어 가는데, 이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민족의 기구한 운명과 가혹한 수탈로 인해 비참해진 초봉 일가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식민치하의 지주 계급들은 급성장한 반면 자작농이나 소농가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는 당대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리얼하게 포착한 것이다.   

* 줄거리
이 작품은 금강 하류에 위치한 항구 도시 군산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군(郡)의 고용원을 지낸 정주사의 딸 초봉이는 정주사가 미두(米豆)에 미쳐 가세가 기울어지자 약국 제중당에서 일을 했다. 나이가 찬 데다 용모가 예쁜 초봉이를 탐내는 남자가 많았다. 초봉이를 서울로 유인하려던 약국 주인 박재호는 그의 아내의 훼방으로 실패한다. 매파에게 홀린 부모의 권고로 초봉이는 호색가인 은행원 고태수와 결혼한다. 그러나 꼽추인 장형보의 흉계로 남편을 잃고 꼽추에게 몸을 버린다. 무작정 서울로 가던 초봉이는 박재호의 유혹으로 그의 첩이 된다. 얼마 후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딸을 낳는다. 장형보가 자기의 아이라면서 아이와 함께 초봉이를 빼앗아간다. 초봉이는 마침내 장형보를 살해하고 경찰서에 자수한다.

이쯤에서 마을로 내려 선다.

이곳도 부산 산복도로처럼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집을 짓기 시작하며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소설 탁류에 주인공인 정초봉이 나왔다는 군산여고,  장문과 후문에 내걸린 구호가 거시기 하다.  예컨데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는 거

너무 한 거 아닌가 싶다. 하긴 이 정도는 약과이리라.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거나 미쳐 있는 증거다.  솔직히 저런 표현을 보면 화가 난다.  지금 아이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무수한 좌절을 생각하면 그렇다. 언제까지 아이들을 볼모로 장사를 할 것인지. 아이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아이들을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 아닌가.  늘 소수의 상위 1%를 위해 살기를 강요하는 지금의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더이상의 악순환은 끊어져야 한다.        

군산시는 일본식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건축물을 매입하거나 복원하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인천, 목포, 구룡포가 떠올랐고 부산시를 생각하게 했다.   뒤에 언급하겠만 부산만큼 일제의 흔적이 뿌리깊게 내린 곳도 없다.  그 역사도  가장 오래되었건만 그에 대한 투자는 늘 후 순위다.    

골목길 안쪽 권투선수가 그려진 벽화가 있다.  한 70~80년대 쯤 모습이다.

동국사 가는 길 초입에 있는 할머니 야채 가게

군산 창작 레지던시 여인숙

이 분이 준 명함을 잃어 버렸다.

 

입혀진 벽화는 실제 유화용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그리고 동국사길 입구 도로변에 이런 냇가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기억의 재생 아닐까  

동구사 입구,  동국사는 1909년(명치24) 일본 조동종 승려 우찌다가 금강선사(錦江禪寺)로 창건한 절로 광복 후 윤명스님이 동국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골목 입구에 시인 고은의 청소년기를 떠올리는 시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 동국사로 출가하여 전쟁의 참상과 폐허, 그리고 승려가 되었다 다시 환속하여 살아내기까지의 자전적 일대기를 쓴 '나, 고은'에  동국사가 꽤나 등장한다.  그때 그의 법명이 일초였다. 전체 세 권인데 단숨에 읽힌다. 보다가 웃기도 한다.  그리고 해방전후사의 한 단면이 보인다.  어린 고은은  심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거기 군산의 40~50년대가 훤히 보인다.  

 

낭비의 노래-고은

지난해 나는 폴란드의 한 축제에 다녀왔다
전체인구 98퍼센트 가톨릭의 나라
중세 대학 자유토론에서
한 대학생이 물었다
당신은 무신론자인가 하고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퍼부었다
물을 끼얹었다
나는 신을 낭비하지 않는다라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폴란드의 밤 어디에도 붉은 십자가는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비행기를 갈아타고 돌아왔다
한국의 저녁은 모든 십자가 들이
일제히 붉은 십자가로 솟아오르면서 시작된다
보혈인가
충혈인가
왜 나는 신이거나 하느님이거나 고래고래 낭비하는 나라의 백성인가
만날 때마다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이었다
왜 나는 공자 맹자만을 목터지게 외워대는 백성인가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저 혼자 조용히 섬기노라면
얼마나 깊이 아름다운가

왜 나는 빼앗긴 직지심경 이래
구텐베르크 은하계 이래
종이란 종이
활자란 활자 억수장마로 낭비하는 나라의 백성인가
날이 날마다 책과 아트지 광고들이
저 자신밖에 모르는 무더기 신문들이
모든 선의의 아침과 저녁을 뒤엎어버리는
오랜 멍석말이 문화의 폭력이 판치는 나라의 백성인가
이 시집 초판 3천 부는
보루네오의 인도네시아 나무들의 죽음 아닌가
한국시인 5천명은 누구인가

왜 나는 내 고향과 내 모교
내 역대 혈통을 낭비하는 6백 년 세월의 백성인가
지난날
나는 밀양 박씨가 아니라
조선 박씨라고 말한 한 젊은 혁명가가 있었다

왜 나는 서구 이데올로기를 낭비하는 나라의 백성인가
삶의 갖가지 이내 진실따위 경멸하는 당원들 인텔리겐차들
왜 거대담론
왜 뻥 튀기는 공리공론 먹물에만 늘어붙어 어쩔 줄 모르는가
왜 나는 정의이고 너는 불의인가

왜 나는 노래를 낭비하는 나라의 백성인가
몇 10만 개 노래방마다
한낮에는 바퀴벌레가 놀고
한밤중에는 유치찬란 비디오 풍경 동영상과 함께
과장된 감정을 내뱉은 남녀노소가 놀아난다
애 나는 술을 낭비하는 나라의 백성인가
왜 나는 5차 6차를 과시하는 구역질나는 풍류잡이가 되었는가

간밤꿈 화산이 폭발하였다. 다 죽어버렸다
화산재 날리는 페허였다
그곳에서 새로 시작하였다
나의 공화국을
모든 화려한 제단의 기옥을 없애버리고
한 그릇 찬물의 정성이면 되는
너의 공화국을 시작하였다 꿈속이었다

왜 나는 원리주의 배타주의 또는 사대주의만이 확고한 나라의 백성인가
왜 나는 종파 정파가 조국인 나라의 백성인가
그 지긋지긋한 조선 4음8색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왜 나는 4백년 동안 청백리 2백 명밖에 없는
만성 부패의 나라의 백성인가
왜 나는 공이 사의 연장인 나라의 백성인가
아 어느 거리나 구호뿐이다
왜 나는 가든과 파크만이 문턱 없는 나라의 백성인가
욕망조차
여기저기서 병들고 있다

왜 나는 산더미로 산더미로 물질과 물체들을 낭비하는 나라의 백성인가
오 소음들
오 쓰레기들
아 왜 나는 나만이 우리 동네만이 1등이라고 으시대는 나라의 백성인가
새로운 공화국은 언제인가
한없이 높은 문화가 있는
그리운
그리운 공화국의 청춘은 언제인가
                                                                              ('실천 문학 2001 봄'호에서 )

경내로 들어서니 확실히 우리내 절집과는 다른 분위기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일본식은 아닌 것 같은,  뭐랄까 조선화 된 일본식 절이랄까.  단청은 없다.

복도와 내실,그리고 벽면에 바른 석회는 또 일본식이다.   건축에 쓰인 목재는 삼나무으로 전량 일본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정면5칸 측면 5칸으로 일본 에도시대 건축양식으로 지붕 물매가 75도로 급경사를 이룬다.  

현재 동국사에는 보물 1718호  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을 비롯 묘법연화경, 선문염송, 오보병 등이 있고 아래 칠성탱화와 산중탱화는 그린지 얼마 되지 않는다.  1992년

종각은 일본식이다.  아마도 明治 라는 글자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파내어 져 뭉개어 졌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 역시 잔재다.  

다시 마을 구경이다. 건물의 상당수가 이른바 적산가옥(敵産家屋)인듯 하다.  그들이 도망가며 버리고 간 건물, 원래 우리땅 아니었든가.  

히로쓰가옥 > 호남제분 사장집 > 근대역사유물로 지정된 신흥동 일본식 가옥

군산의 영화동에서 포목상을 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다. 건물은 근세 일본 무가(武家)위 고급주택인 야시키 형식의 대규모 목조주택으로 2층 본채 옆에 금고건물과 단층의 객실이 비스듬히 붙어 있으며 두 건물 사이에는 일본식 정원이 조성돼 있다.  실제로 규모로  보아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큰 건물이었을 것 같다.

현관  안쪽의 주옥도 양편에 온돌방과 부엌, 식당, 화장실 등이 배열되어 있고

여기서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자'등을 찍었다고 한다.

편 복도 중간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지나면 다다미방 2칸이 있다.

내부 창살이 눈길이 간다.

원형의 창은 대나무를 격자로하거나  뿌리의 곡선을 살리기도하여 소박한 멋을 부렸다.

금고 건물이라고 하는데 뭘 숨겼을까. 그리고 그 내용물은 어디로 빼돌렸을까. 패망과 함께 급히 떠나면서 남아 있던 조선인 누군가 챙겼을까.  군산 일본가옥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저 창고.   

군산 곳곳에 남아있는 그 잔재를 보면서

부산의 거리를 생각했다.  아래 지도는  1970년 대 초 발행된 관광책자에 소개된 부산항 주변지도다.  부산 역시 남포동과 중앙동, 광복동을 중심으로  일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 부산의 가로 풍경이다. 아래 그림들은 부산국제건축문화제 10주년 기념 '사진으로 보는 근대부산의 기록'에 실린 사진들로서 원사진 소장자에게는 사용에 대한 배려를 구했다. 아무튼 부산을 이해하기 위해선 전근대의 부산과 근대의 부산을 나누어 볼 필요가 있고 그 중심에 왜관이란 특수한 지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왜관은 1407년 설치되어 1872년 왜관 접수가 있기까지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의 포소를 중심으로 존치되어 왔다. 조선의 대일외교기조인 교린체제를 전제로 전 기간 조-일 상호 외교와 무역을 이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임란 이후에는 부산에만 왜관이 설치되는데 부산포 왜관, 절영도 가왜관, 두모포 왜관을 거쳐 용두산 터 중심의 초량왜관시대가 열리므로서 국제적으로도 보기 드믄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초량왜관이 들어섰던 자리에 일본 외무성이 1872년 점령하고, 뒤이어 전관교류지가 들어서는 일제의 조선침략 과정에서 왜관에 대한 좋지 못한 선입견이 만들어 졌다. 이와 관련 정예정 신라대 박사는 “ 왜관과 전관거류지는  구분되어야 한다. 왜관의 건축 및 운영은 모두 조선정부의 주체로 이루어졌으며 정당한 교섭 없이 어떤 방법으로도 일본인들이 주체가 된 건축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량왜관은 ‘대마번’대 조선의 외교관계를 표상하는 전근대적 산물로 보아야 마땅하다. 반면 전관거류지는 일본 외무성이 무단으로 왜관을 점령하고 설치한 근대적 일본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군산에 와서 부산 왜관터를 들먹임은 조금이라도 초량왜관에 대한 정신과 의미가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물론 여전히 속썩히는 일본의 나쁜 집단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정한다. 

전차가 다니고 서구식 건물이 꽤나 들어 와 있다.

그들은 원래 조선사람의 터전에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집과 관광서, 학교, 병원, 도서관, 공회당 등의 구락부를 비롯하여 백화점, 상가, 극장,영화관, 호텔을 세웠다.  그들이 안전하게 마실 물을위해  수원지와 댐도 만들었다.

일제강점 초기까지 남포동 중앙동 일원의 산지 지형은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용두산과 허리에 해당하는 용요(龍腰)인 복병산(伏兵山), 그리고 용미산(龍尾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일제는 그들의 식민도시계획을 위해 용두산에는 쇠못을 박고 신사를 세웠으며, 복병산을 잘라 대청로를 내었다.  용두산 들어선 신사는 당시기준으로 가장 오래된 일본신사로 그 연원은 1678년 두모포 왜관을 초량 용두산 기슭 초량으로 옮기면서 쓰시마 번주(宗義眞)가 금도비라신(金刀比羅神)을 모시는 사당을 지으면서부터다.  이후 세 개의 신사가 추가로 들어섰다 광복 3개월 뒤 불에 타 버렸다. 


지금의 롯데월드자리는 용미산(:松峴山 이라고도 불렀음)이 있던 자리로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일본인들은 1892년 정상부에 부산거주 일본인의 거류지신사(居留地神社)를 세웠다 옛 부산시청인 부산부청사를 신축하며 용두산으로 옮겼다. 솔밭이 우거졌던 이곳에는 부산 최초의 부산전등(두) 발전소가 1902년 세워지면서 제빙공장과 어시장이 들어 섰다.

1876년 2월2일 강화도 조약이라고 부르는 ‘병자수호조규’가 맺어지고 조약에 의거 부산항이 개항하게 된다. 이듬해 1월30일 ‘부산구조계약조약(釜山口租界條約)’이 동래부사와 일본관리 사이 체결됨으로써 초량왜관터 약 11만평이 일본인이 거주하며 관리하는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가 되었다.  조선에서 외국인에게 땅을 빌려주는 조계설정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1890년 일본은 전관거류지의 입법, 사법,경찰 권한을 가진 영사(領事)가 상주하는 영사관을 설치하는 한편 거류민의 자치조직과 행정업무를 위한 부산거류민단(釜山居留民團)을 발족했다.  1906년 12월 제2차 한일조약에 따라 통감부(統監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뺏앗은 뒤 각 도시의 영사관을 이사청(理事廳)으로 개칭하여 사용하다 1910년 8월22일 강제병합에 따라 부산부(釜山府)로 개편하였다.

점심 때 추천받아 간 집 일해옥  콩나물국밥집, 남아 있던 숙취를 여기서 털어 냈다.  사실 복성루의 짬뽕을 기대했는데 ...  

귀가를 앞두고 홍국장이 바빴다.  올레팀 공항 실어다 주고 서울팀 군산역 실어다 주고 마지막으로 시외버스터미널 가는 길, 잠깐 내린 곳   경암동 철길마을 

그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전업 길 활동가로서의 생활이 팍팍하기 때문이다.  참  4월20일~22일 군산에서는 '2012 군산구불길 전국대축제'가 있다. 21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4개 코스 중 택해서 걷는다. 문의 구불길 063-467-9897

그와 헤어지고 부산행 4시간 반짜리 긴 버스에 올라 익산들을 본다.  저 들처럼 넉넉했으면 한다. 그 길에 선 사람

 

Perry Como - And I love you so 올드팜 매니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