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되는 이유
흐린날 바다에 서면
늘상 바다를 헤메이던 그것들
일제히 달려와 바람되는 이유
알 것 같다
아, 억눌린 날의 생애여
체념처럼 아문 상처 되살아나
다시 이글거리는 저 분노
떨쳐 일어서 나아가는
해방의 함성이여
흐린날 바다에 서면
저 바다 아우성치는 말발굽소리
흰갈기 천만갈래 나부끼며
끊임없이 몰려오는 파도의 몸짓
바람이 되는 이유
내 비로소 알 것 같다
축하공연 석갑주
부산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 안하원(목사)
부산그린트러스트 공동대표 강동규(변호사)
전연숙 시마루예술협회 전무이사
꽃등 들고 강둑길 걷는 남자
박정애(시인)
1980년대부터 2천대까지 년차별로 묶은 2백여 편의 시가 메일로 왔다. 붙임 말에 ‘누나 제발 부탁인데, ‘이미 시인’이란 말은 하지 마.’였다. 나는 동의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래전 그러니까 9십년대 초, 부산환경운동연합에서 처음 만나 지금까지 오면서 내 눈에는 그는 등단코스를 밟지 않았지만 ‘이미 시인’이었다. 또 그렇게 불러왔다.
평론가의 매운 눈으로 눈치체지 않게 슬쩍 건드려주면 더 깊은 울림으로 빛나게 될 작품들이다. 나는 여기서 시적 이론이나 성립구조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시와 시인이 일치하는 시가 있는가 하면 글과 사람이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시인은 누구에도 간섭받지 않는 독자적 목소리를 가졌다.
사람은 오감을 통해 자신과 주변이 이어진다. 다채로운 정보가 오가고 경험이 축적된다. 시의 원형질은 선험적 익숙함에서 신명과 리듬으로 직조되는 이미지언어의 예술이다.
엽기적인 영상문화가 정신문화의 파산을 초례할 것이란 두려움은 오래전부터 였다. 詩의 불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근원적 심성인 詩의 메시지는 혁명도 해탈도 구원도 아니다. 다만 새로운 느낌, 새로운 깨달음인 신생의 원천이기도 한 詩는 감성이다. 향기의 느낌이다. 감성을 예민하게 하는 느낌은 사물이나 타인 나 자신까지도 낯설게 하는 깨달음이다.
시의 유형은 여러 가지다. 시의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경험해보지도 않은 황당한 요술 같은 시, 마치 도 닦은 선인처럼, 훌륭한 스승처럼 독자를 가르치러는 시, 나 여행 좀 하고 왔다는 시, 나 시인인데 하면서 뽐내기 음풍농월하는 시, 징징거리거나 울기부터 하는 시, 사랑, 사랑하는 사랑 시 벼리별 등등.
이 시인의 시는 새벽물안개 같다. 고요한 물속에 반영된 피사체처럼 부드러우나 구체적이다. 거대한 짐승의 잔등 같은 산머리 위로 여명처럼 밝아오는 더운 열기와 담장이 없는 집 마당에 선 감나무 새순 같다. 아무튼 詩는 설명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냐면 시의 느낌은 읽는 사람의 몫이자 독자의 상상력을 방해하니까.
지난겨울 파낸 흙더미에 앉아
말뚝 박는 소리를 듣는다
깡 깡 깡 끝없이 이어지는 소리
오늘 하루만도 강바닥에는
얼마나 많은 못들이 박혔을까
가봤자 헛걸음인줄 알면서도
다시 찾은 강변 마을
언제나 반겨주던 뱃머리 갈대숲
그 너머 눈에 익은 철새떼 다시 볼 길 없고
훍먼지 자욱한 을숙도 퇴사위엔
보금자리 삶터 쫒겨난 가나한 사람들
잡초처럼 어지럽게 피었다
-을숙도 85년 봄 전문-
쾌청한 날
낙동대교에 서면
말이 되고 싶다
보아라
수수만년 물길이 만든
저 편한 땅과 바다에 누운 하늘을
마냥 달려도 모자랄 듯
가슴을 온통 열어두어도
에누리가 없는 곳
쾌청한 날
낙동대교에 서면
나는 말이 된다
-낙동대교에 서면- 전문
85년도 이 무렵 을숙도 하구언 수문공사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껏 열리지 않는 수문은 말문을 닫고 있다. 그리고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낙동강 수난시대가 되었다. 낙동강페놀 사건으로 식수 파동을 경험했고, 인체에 치명적인 중금속이 배출될 염색공장과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낙동강 본류에 인접한 위천공단문제는 식수문제와 직결된 중대 사안이었다.
지역경제를 살리겠다는 개발지상주의적 경제논리와 죽음 일보직전에 이른 낙동강을 살리기 위한 몸부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석포제련소 등 이명박의 4대강 사업으로 인한 낙동강은 아프게 울고 있고, 강을 살리겠다는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다.
어머니 말하신다
열불이 채여 속 타는 소리로
지지리도 못난 놈 복장이 터져 미치겠다고
돈 안되는 짓 골라가며 한다고
사람구실 못한다고
이웃마을 바보 같은 후배 영식이도
오늘 장가갔다며
다 저녁 전기밥솥에 쌀 앉히며
이 좋은 세상에, 이 좋은 세상에 하시며
제 집에 약수 물 한 번 안 길어다 주는 놈이
환경운동, 아나 이놈아 하신다
-이 좋은 세상에- 전문
자연보전을 위해 동식물이 주체가 되어 이들을 대신하여 소송할 수 있는 그런 법은 없을까. 동식물을 포함한 대자연과 공생 공존하는 우리 인간은 한 몸 아닌가. 그러니 저 말 못하는 동식물과 자연을 대변하고 공동으로 원고가 되어 대판싸움을 한다면 상대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싸움이다. 일찍부터 환경운동가 이자 ‘이미 시인’인 그는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개인의 이익보다 댐건설이나 멸종위기에 몰린 동식물을 앉아서 한숨만 쉬고 탄식만 하는 것이 아닌 발로 뛰어 다니고 틈틈이 시를 썼다. 어머니한테서 ‘환경운동, 아나 이놈아 하신다.’는 말을 들어가면서.
아직도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을 친구
자네의 초청으로 집들이 갔던 날
술 끝에 자랑처럼 틀어준 비디오며 사진을 생각한다
신혼여행지 제주도에서의 4박 5일
화면이 바뀔 때 마다
자네는 설명까지 곁들어 가며
수줍어하는 신부와의 농밀했던 시간을 얘기했지만
나는 더불어 즐거울 수 없었다
........
아마도 정방폭포의 시원한 물줄기며
표선의 백사장과 민속촌
성산포의 일출봉과 함덕의 해수욕장은
사진찍기에는 더없이 좋은 배경이 되었겠지만
......
민망한 사진을 박은 제주의 관광명소가
생각조차 끔찍한 도륙의 현장이라면
그렇다 그곳은 낮에는 빨갱이, 밤에는 반동분자로
총소리만 들리면 푸른 군복만 보이면
밥상머리 앉았다가도 밭을 갈다가도
보리타작을 하다기도 신을 삼다가도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제주 사람들
.....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제주도 전토에
휘발유를 뿌리고 거기에 불을 놓아
30만 도민을 한꺼번에 태워 없애야 한다"
당시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처럼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길 없는
잔인무도한 대학살의 현장이었다
이승만 매국도당과 미제에 의해
철저히 짜여진 사전계획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이었다 제주도 169개 마을중에
130개 마을에 행해진
발악 같은 야수적 만행이었다
.......
그리하여 산자는 살기 위해 산으로 올랐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 안고
산으로 올랐다 한라산으로 올랐다
오욕과 굴종, 두려움 떨쳐 버리고
산사람이 되었다
빨갱이가 되어 싸웠다
.......
결코 한순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방편의 산행이 아니었음을
그들은 싸우며 죽어가며 알았다
그들은 반제전사였다
그들은 해방전사였다
그들은 통일전사였다
최후의 일각까지 , 최후의 일인까지
죽어서도 제주의 흙으로 남아
봄이면 피빛 진달래로 타올랐다
실로 오랜 항쟁이었다
기억하는가
자네가 치를 떨며 분노해 하던 80년 광주를
하지만 이미 광주는 40년전 제주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불과 30년 전의 일이었다
......이하
-제주도는 하와이가 아니다-중에서
제주 4.3은 분노와는 다르고 슬픔과도 차원이 또 다른 치명적이다. 이 사건은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우리의 현대사를 돌아보면 화날 일투성이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 버리려 해도 배출구가 없다. 상처를 다스리고 보살피는 건 도인들만 하는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참았던 가슴에 뭉친 상처의 덩어리가 병을 만든다. 이것은 한국인에게 만 있는 한(恨)이라는 병이다. 그 한이 문화와 예술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러한 분노와 슬픔이 오히려 시를 쓰게 하고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예술적 표현이 노골적이면 야하고 지나치게 야하면 말썽이 된다. 말썽을 타면 뜬다. 화젯거리는 될 수 있지만 명작은 될 수 없다. 난해시의 상징성은 그 직조의 가닥을 풀 해석이 필요하지만 서사는 전체적인 줄거리로 지탱된다. 그의 시는 구체적이고 노골적이다. 인위적 외향중시 추구에 바쁜 세상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돌장승 같은 독자적 목소리이다.
무슨 기계며 무엇 때문에 설치하는지도 몰랐어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지
처음에는 하도 시끄럽게 울어서 잠도 못자고
고장 난 줄 알고 몇 번이나 철거시켜 달라고 하니
구식이라 원래 소리가 난다고 하는기라
나중에 사 알았는데 그놈의 측정기가
빨간 불 빤짝이며 빽빽거리며 울 때는
방사능이 기준치 이상이라는 경보음인기라
한전 가서 따지고 항의 안했나
이놈들 우리가 못 배웠다고 영어며 전문용어 섞어가며
설명을 하는데 우리가 뭘 알아야제
그러면서 먼저 있던 담당자는 딴데 보내고
새로 온 놈은 자기는 잘 모르는 일이라카고
오리발 내미는데 얼마나 부아가 치미노
한전 본사 올라가 대장 잡고 이야기 하니
그럴 리가 없다며 전자식으로 기계를 바꾸더만
헌데 이놈은 또 완전 멍텅구린기라
작년에는 비가 오나 태풍이 부나 일년내 0.009더니
올해는 지금까지 자나깨나 0.008인기라
이럴 수도 있냐고 물으니
그냥 믿어달라데
신통치 않는기라
최근에 우리 마을서 암으로 여덟명이 죽었는데
내 아무래도 저놈의 핵발전소 때문이지 싶어
안 그렇나 마을하고 핵발전소하고 이백미터 거리니,
-효암리멍텅구리(방사선탐지기)-전문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솟구쳐 오르는 수중기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연기들
공포가 드리운 하늘에 바람이 관통한다
무차별 방사능 공포가 예고되고
시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가능한 멀리멀리 도망쳐야 한다
돌아오지 못할 땅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보이지 않으나
실로 무섭고 두려운 것들
백약이 무효다
시방 그것들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다.
-두려움-전문
일본을 강타한 쓰나미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은 체르노빌에 이은 지구적 재앙이자 참사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밥상까지 위협하고 있는 방사선폐해는 앞으로 백년까지도 영향을 끼치되 될 거라는 환경운동가들의 예상이다. 일반인들은 이런 불편한 진실의 심각성에 대해 이 시인의 ‘두려움’만 하겠는가.
땅은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시다. 땅에서 잡초처럼 일어난 생명 중에 소위 생각을 가졌다는 인간이 편리를 위해 개발해낸 문명은 그 어머니에 대한 패륜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것에 대해 못 견뎌한다. 그의 두려움은 풀과 나무와 짐승들이 지상에서 사라진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있다. 이 땅에 일어날 재앙은 인간에도 닥칠 것이므로.
아무리 사람 좋기로 누구나 한 가지는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약한 자에게 약하고 강한 사람 앞에서 오히려 더 강해지는 그는 우직하다. 그가 화나는 건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다. 그가 관심하는 것들은 나는 새, 기는 짐승 곤충과 풀 한포기까지 지구생태환경에 어떤 연결고리로 동화되고 작용하는지를 목걸이 구슬처럼 꿰고 있다. 만물은 서로 영기하며 공생하는데 짐승에게 일어난 일들이 인간에게도 똑 같이 일어난다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를 견제하고 대응하는 사회적 활동에도 과격한 격문 대신 시를 썼고, 근 30년 동안 묵혀 두었던 시를 이렇게 책으로 묶게 됐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시적영감을 억지로 잡겠다고 몸부림친 시가 아닌 자연스럽고 가을 저수지 물위를 건너가는 바람소리와 같은 시다.
80년대 우리는 노래했다
그날이 오면을 혹은 그날이 올 때까지를
거리에서도 부르고 운동장에서도 부르고
술집에서도 그날이 오면을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90년대
분명한 것은 아직도 그날이 오지 않았다는 것인데
과연 그날은 있기나 한 것인지
억압과 착취가 없는 평등 해방세상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새로운 세상 열릴까 우리 세상이 올까
그렇다면 오늘은 누구의 세상이며
어제는 누구의 세상이었든가
-그날이 오면-전문
그가 꿈꾸는 세상은 보편적 상식이 일상인 세상일 것이다. 삼라만상이 그저 순조롭고 건강한 세상일 것이다. 인간만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오만성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자연과 더불어 서로 구속하지 않고 구속당하지 않는 공생공존을 자연스럽게 누리는 세상일 것이다.
그는 김용택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꽃등 들어 님 오시면'을 자주 불렀다.
‘긴 어둠을 뚫고 새벽 닭울음소리에 안개 낀 강둑 따라 꽃등 들고 가는 흰 옷 입은 행렬을 보았나, 때론 흐르는 무이 막히고 때론 흐르는 길이 멀다 해도 아, 흐르는 일이야 행복하질 않나 우리네 땅 되살리고 그 길 따라 꽃등 들고 가는...’ 그렇게 천천히 너울너울 흘러가는 물처럼. 가끔은 개울을 치뜨는 은어처럼 치열하게.
걸어서 가는 퇴근길
끝없이 이어진 차량들을 본다
때 아닌 봄장마에 꽃은 주눅이 들었다
시나브로 석유의 종말이 가깝고
지구는 거듭 경고를 보내지만
직립보행의 도시민은 안중에도 없다
배설과 배출이 있을 뿐이다.
하늘을 더럽히고
강과 바다를 병들게 했다
숲을 집단으로 유린하고
갯벌을 파묻었다
갯지렁이, 모시조개, 엽랑게, 길게, 칠게가
마늘하늘 날벼락처럼 압사 당하고
새들은 둥지를 버리고 더 깊은 숲으로 달아났다
회유하는 어족들이 고향을 잃고
거북의 목에는 플라스틱 올가미가 걸렸다
하늘은 별을 지웠다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오로지 소비하고 소진시킴으로서 죄를 짓는다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
-도시민-전문
그의 발바닥에는 부산 갈맷길이 지문으로 박혀있을 것이다. 보행도시 걷고 싶은 부산을 위해 갈맷길 24코스의 개발과 탐사로 지도를 만들었다. 부산시내 곳곳을 두발로 누비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줄자를 가져다 대었다. 갈맷길의 태동에서부터 공헌을 했고 [걷고 싶은 부산]의 사무처장으로 현장을 뛴 그의 사회적공적은 대단했다.
자연의 권리와 보전논리로 자연과 인간의 공생원리를 입으로만 꽃처럼 난발하는 말잔치가 아니다. 온전히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시는 읽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든다.
지금 그가 몸담고 있는 [그린트러스트]는 도시공원에 관한 것으로 ‘공원 일몰제’ 문제로 속이 탄다. 누구보다 길을 사랑했던 그로썬 개인 사유지를 공공이 이용하는 산책길이나 도시민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질까 노심초사 속이 타는 사람이다.
신갈나무, 서어나무, 생강나무, 진달래, 철쭉
어둑한 숲 그늘 아래
노루,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 멧돼지 더불어
진퍼리새, 둥굴레, 비비추, 애기나리
부들부들 떨었다
저 건너
포크레인 불도저 막무가내로 밀어부친
생목들 아비규환의 골짜기
널부러진 주검의 잔해
뿌리 채 뽑혀 흔적 없다.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다면
머리띠 동여 메고 들고 일어나
규탄집회라도 했을 거다.
수만 그루의 나무들도 뚜벅뚜벅 걸어 나와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멱살잡이를 할거다.
풀이란 풀은 독기 머금은 풀씨 날리며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사람의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이따위 엉터리가 어디 있냐며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별빛 아래
언제나 잠들지 못하는 도회의 불빛이 두려웠다.
때때로 어둠을 할키고 가던 자동차 헤트라이트가
그 징조인줄 알았으나
이런 참극 대학살인줄 꿈에도 몰랐다.
-골프장 환경영향평가서-전문
자연에게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일하고 있는 그는 지금 아름다운 목신(木神)들과 함께 잘 놀아주고 있다. ‘나무나무 무슨 나무, 벌벌 떤다 사시나무, 솔솔 부는 소나무, 십리절반 오리나무, 거짓 없는 참나무, 젊어서도 단풍나무, 사철 푸른 사철나무, 낮에 봐도 밤나무, 질기고도 오래 산다 가죽나무, 귀신도 겁이 난다 엄나무’, 온갖 나무의 목신을 불러 어르는 박수무당이 읊어대는 굿거리사설보다 더 많이 알고 나무에 관한한 대단히 해박한 전문가였다.
그는 부산의 오래된 거목 ‘어르신 나무’들을 조사했다. 시내와 변방 기장군 곳곳을 찾아다녔고, 김해 가덕도까지 팔품을 팔았다. 그는 그런 일들을 아주 신나고 즐겁게 하고 있다. 마치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저 우락부락 이가 시를 써?
구영기(전 생명그물 대표)
솔직히 말해 나는 시를 모른다. 아니 좀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모르게 돼 버렸다고 하는 게 옳겠다. 누구나 그랬듯 나도 시를 써보겠다고 꽤나 심각했던 한때가 있었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또 시랍시고 슬쩍 꺼내 든 것도 몇 편은 된다. 그들이 보기에 유치하고 같잖았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분명히 감동이고 절절한 삶이었다.
그 당시, 시건은 지금보다 더 없었지만 김소월이나 윤동주 등 이전 시인들이 쓴 시는 그냥 알아들었다. 백석의 시도 낯선 단어가 널려 있지만 재차 찬찬히 읽으면 어느 순간 그림으로 변환되어 가슴 속으로 쑥 들어왔다. 김광균의 시 ‘심심할 때면 저무는 언덕에 올라/ 어두워 오는 하늘을 향해 나발을 불었다.’ 이 구절을 외면 미쳐 나갈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나도 나발을 하나 구해 이 젊은 시절 날 저무는 언덕에서 허파가 터지도록 불어 대고 싶었다.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더 들고나서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들을 접한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절벽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분명 한글 우리말로 쓴 문장이지만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고 잘 썼다고 추어댄 평도 더더욱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말하자면 서랍 속에서 비행기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거나 아니면 너무 어려운 관념의 용어 몇 개가 되는대로 꼬여있어서 고차선형미분방정식처럼 그 해를 머리 속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그만 내가 시를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게 부끄러워서 그들이 시를 말해도 나는 가만 있었다. 그러니 시 쓸 생각은 언감생심 아예 할 수 없었다.
나도 내 나이대 기본의 학력은 되고 글도 나름 짓는다 생각하지만 그런 내가 요즈음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시란 잘난 그들만의 소통 도구거나 유희 거리로 훌륭히 자리매김한 셈이다. 솔직히 말해 어떤 재미도 감흥도 없다. 그러니 시를 읽는 독자는 점점 더 제한되고 고립될 수밖에 없으리라 싶다.
어느 분이 퇴직하고 취미 삼아 작법 공부를 한다 해서 아 좋은 일이라 추어드렸다. 그 뒤 시를 썼다며 주시길래 감탄부터 하고 읽어봤더니 정말 미안하지만 초등학생 습작만도 못 한 느낌이었다. 차마 솔직한 말은 못 했다. 몇 년 지나 등단하고 시집을 냈다며 돌리셔서 받고는 어디 처분하느라 많은 고심을 했다.
이렇게 나는 시를 모른다. 젬병이다. 게다가 요즘의 시라는 것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이성근의 시는 엊그제 썼다 해도 받아 읽는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와 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그냥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성근 시가 시 같잖은 졸작이어서 딱 내 수준에 맞는 셈인가 모르겠다.
돌이켜보니 이성근과의 인연도 오래되었다. 생긴 건 영판 산적 떨거지인데 속은 한없이 따시고 여리다. 멍게라 비유할까 했는데 멍게는 속이 따숩지 않아서 베맀다. 심성이 그러니 어쩌지 못하고 성결대로 마냥 어리석게 산다. 그러니까 그가 쓴 시가 좋을 수밖에 없다. 부산에서 굴러먹은 지 오래지만 영락없는 촌놈이다 보니 촌말로 시를 쓰는데 그게 또 맛이다. 이렇듯 내게 있어서 좋은 시는 쉬운 말로 쓴 담박한 글이다. 이성근 시가 애나 그렇다.
구자상 선배
성인심 부산YWCA사무총장 김혜정 전 환경운동연합 시무총장 안종영 부산그린트러스트 이사 (부산외대 교수)
손정옥 해운대 시민모임 (전 교사)
김수진 부산그린트러스트 이사
친구 석갑주, 천기호
정미란 환경운동연합 부장
강변호사 내외
박정주 전 부산환경연합 활동가
시집을 만들기 위해 작당했던 후배들
My sweet Lord- George Har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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