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여름 에디션,김초엽 장편소설) 저자 김초엽 출판 자이언트북스 출간2021.08.
김초엽 -1993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2018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방금 떠나온 세계』,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논픽션 『사이보 그가 되다』(공저) 등이 있다.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목차
프롤로그 _007
1장 모스바나 _023
2장 프림 빌리지 _111
3장 지구 끝의 온실 _245
작가의 말 _387
참고문헌 _390
출판사 서평
“악마의 식물이 내 정원에 자라고 있는데, 이거 혹시 멸망의 징조 아니야?”
덩굴식물이 뻗어 나가는 곳, 그곳에 숨겨진 기묘한 이야기
소설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모스바나’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인물은 2129년 더스트생태연구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식물생태학자 아영이다. 그는 느리지만 멀리까지 뻗어 나가는 식물들, 그리고 그 안에 깃든 놀라운 생명력과 기묘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과학자로서의 원칙을 잊지는 않지만, 남몰래 괴담을 좋아하여 ‘스트레인저 테일즈’에 접속하는 게 취미인 그다.
어느 날 아영은 폐허 도시 해월에서 덩굴식물 모스바나가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증식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알 수 없는 푸른빛까지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어린 시절 이웃에 살던 노인 이희수의 정원에서 본 풍경을 떠올린다. 방치된 듯 잡초가 무성한 한밤의 정원, 그 위에 마법처럼 떠 있던 푸른빛들을. 대체 왜 갑자기 모스바나가 이상 증식하기 시작한 걸까, 그리고 푸른빛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모스바나를 채집하여 분석하는 한편, 스트레인저 테일즈를 통해 이 식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수소문한다. 마침내 그는 더스트 시대에 모스바나를 약초로 활용하면서 사람들에게 ‘랑가노의 마녀들’이라고 불려온 아마라, 나오미 자매에게 닿게 된다. 아영은 그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반드시 듣고자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곳이 있는 거예요?
다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돔 바깥에서는, 모두 다 죽었다고요.”
멸망한 세계 속 유일한 도피처, 그리고 비밀스러운 온실
‘2장 프림 빌리지’에서 독자가 만나는 인물은 2058년 더스트로 멸망해버린 세계를 헤매는 아이 나오미다. 붉은 안개와 함께 찾아오는 더스트는 살아 있는 존재라면 무엇이든 순식간에 죽게 만든다. 사람들은 돔을 씌워 그들만의 도시를 만들고, 유지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더스트에 내성을 가진 탓에 피를 원하는 사냥꾼들에게 쫓기고, 실험 대상이 되어 고통받아온 나오미는 언니인 아마라와 함께 소문 속 도피처를 찾아 숲으로 향한다
마침내 자매는 돔 없이, 내리는 비와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프림 빌리지에 도달한다. 이곳은 거창한 이념이나 명분 없이 그저 사람들의 충실한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리더인 지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언덕 위 온실 속에 사는 식물학자 레이첼이 건네는 작물들과 더스트 분해제가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나오미는 믿을 수 없이 생기로운 숲속의 마을에 점차 스며든다.
하지만 평화란 영원할 수 없는 법. 프림 빌리지에 침략자들이 나타나고, 지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준비해둔 식물들을 나누어주며 멀리 떠나라고 이야기한다. 숲 바깥으로 가서 식물들을 심고,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라고. 마을을 떠나며, 나오미는 아마도 마음이 평생 이곳에 붙잡혀 있으리라 예감한다.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떻게 이처럼 작은 우리가 서로를 구할 수 있는 걸까?
‘3장 지구 끝의 온실’에서 독자들은 아영을 다시 만난다. 세계가 재건된 이후를 살아가는 아영은 멸망의 시대 한복판을 지나온 나오미의 증언을 들으며, 이제껏 머릿속에 따로 존재해왔던 수많은 퍼즐들이 하나의 온전한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오미의 증언을 정리하고 데이터들로 뒷받침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아영은 묻혀 있는 진실을 찾아야 하는 과학자로서, 또 내밀한 기억과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서 각각 뚜렷한 결론에 도달한다. 독자들이 아영과 함께 이 결론에 다다랐을 때, 마음속에서는 어떤 작용들이 일어날까.
한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 품고 있는 것들은 말하자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순수한 탐구심으로 쓸모없어 보이는 대상에 열과 성을 다하는 과학자들, 세대를 달리하는 인물들이 존중과 존경으로 함께 나누는 대화,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완전히 바꿔놓은 식물들의 모습, 매일같이 지구의 위기를 실감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품음직한 태도, 예상하지 못했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 하지만 무엇보다 『지구 끝의 온실』이 향하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389쪽)라는 작가의 말처럼 바로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독자들은 이미 작가의 첫 작품집을 통해 그가 얼마나 정확하고 부드럽게 이 마음을 탐구하고, 미처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지점에 가 닿게 하는지 경험한 바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우리가, 어떤 마음들 때문에 어긋나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를 구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지구 끝의 온실』은 구하는 이야기, “탁월한 개인, 위대한 발견,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서로를 기억하며 지킨 작은 약속, 매일을 함께하는 동안 다져진 우정, 시간에 깎여나가지 않고 살아남은 사랑”(황예인 문학 평론가)이 서로를 구하게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중에서
아영은 그렇게 느리고 꾸물거리는 것들이 멀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천천히 잠식하지만 강력한 것들,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정원을 다 뒤덮어버리는 식물처럼. 그 런 생물들에는 무시무시한 힘과 놀라운 생명력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영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82쪽
“좋아요. 딱 한 번만 더 이야기를 해볼게요. 어쩌면 당신이 말한 정원의 주인은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당신은 답을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답을 찾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를 알지요. 그곳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있고요.”-109쪽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준 것,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서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242쪽
어떤 기묘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하고, 그 현상의 근거를 끈질기게 쫓아가보는 것 역시 하나의 유효한 과학적 방법론일지 모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놀라운 진실을 그 길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257쪽
소설인가 현실인가…‘장르’로 정착한 기후소설이 온다
15m 올라온 해수면, 눈사람을 모르는 아이들
해수면 상승하고, 식량이 고갈되고, 먼지 덮인 지구 배경의 기후소설
사고실험 바탕으로 ‘장르’로 정착… 인류가 가야 할 길 탐색
미국의 대표적인 기후소설가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뉴욕 2140>(New York 2140, 국내 미출간)에는 2140년 뉴욕의 맨해튼이 거대한 해상도시로 그려진다. 맨해튼의 풍광이 변한 건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무려 15.25m 상승했기 때문이다. Orbit
기후위기 시대엔 어떤 일도 일어난다. 2012년 미국 뉴욕을 강타한 초대형 허리케인 샌디의 진로는 기상 관측 사상 전례가 없는 형태였다. 샌디는 대서양에서 북상 중 서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바꿔 미국 동부 연안을 강타했다. 100명 넘게 숨졌고 수백만 명이 이재민이 됐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선 2019년 9월부터 무려 5개월 동안 초대형 산불이 계속됐다. 남한 면적의 2.4배나 되는 숲이 불탔고 야생동물 5억 마리가 숨졌다. 남아시아의 방글라데시는 2020년, 파키스탄은 2022년에 국토의 3분의 1이 잠기는 홍수 피해를 입었다.
2022년 여름, 폭우로 한국 서울의 강남대로가 침수돼 차들이 물에 잠기고 반지하 집에서 사람이 숨지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우리 시대의 기상 현상은 ‘있을 법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한다. 있을 법하지 않고 전례 없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이 기후위기다. 기후위기 시대엔 문학의 고민도 깊어진다.
❶영국의 이언 매큐언이 쓴 <솔라>(2010년, 2018년 국내 출간)는 기후변화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물리학자가 주인공이다. 문학동네 제공
❷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리치가 쓴 <승산 없는 미래>(Odds Against Tomorrow, 2013년, 국내 미출간)는 가까운 미래 미국 뉴욕이 배경이다. 맨해튼의 빌딩들이 바닷물에 잠겨 있다. Picador USA
전례 없는 사건들 앞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문학에선 ‘개연성이 떨어지는 일’로 여긴다. 이런 소재는 주로 하위 장르문학의 것이지만, 이젠 현실에서 더 흔하다. 현실에 발 디뎌야 하는 문학이 피해갈 수 없다.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상을 받은 인도 작가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2021년)에서 “어떤 주제의 시급성이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기준이라면, 기후변화가 실제로 지구 미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려하는 것은 전세계 작가들이 깊이 고민해볼 주요 관심사여야 한다”고 했다. 정통 문학도 기후위기를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는 고시의 충고를 따르는 작가들은 꽤 여러 해 전부터 나타났다. 최근엔 이런 작품을 묶어 기후소설(Climate Fiction, Cli-Fi)이라 부른다(영화는 이와 구분해 ‘Cli-Fi Movie’라 한다). 기후소설은 미국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댄 블룸이 2011년 처음 별도 장르로 분류했다.
기후위기 담론이 그러하듯, 역사적으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한 영미권에서 이런 흐름이 시작됐다. 영국의 지넷 윈터슨이 쓴 <돌의 신들>(The Stone Gods, 2007년, 국내 미출간)은 기후변화로 고통받는, 지구와 흡사한 가상 행성 ‘오버스’(Orbus)를 다룬다. 역시 영국의 이언 매큐언이 쓴 <솔라>(2010년, 2018년 국내 출간)는 기후변화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한 물리학자가 주인공이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리치가 쓴 <승산 없는 미래>(Odds Against Tomorrow, 2013년, 국내 미출간)에선 가까운 미래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기후재난에 대비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계산하는 젊은 수학자가 등장한다. 이 수학자의 계산이 거의 끝나갈 무렵 뉴욕 맨해튼에 그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제로 덮쳐온다.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연설하기도 한 미국의 킴 스탠리 로빈슨은 최근 가장 손꼽히는 기후소설가다. 소설 <뉴욕 2140>(New York 2140, 2017년, 국내 미출간)에는 2140년 뉴욕의 맨해튼이 거대한 해상도시로 그려진다. 맨해튼의 풍광이 변한 건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무려 15.25m 상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후소설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기후나 기상 이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다.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을 쓴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이 1889년에 펴낸 <위아래 없는>(Sans Dessus Dessous, 국내 미출간)을 보면, 지구 축의 기울기가 변하면서 3년 동안 급격한 기온 하락을 경험하는 20세기의 한 도시가 등장한다. 1939년에 나온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도 작품이 쓰인 시기 미국과 캐나다 중서부에서 일어난 ‘더스트 볼’이란 기상 재난을 배경으로 했다. 가뭄에 농토가 황폐화하고 모래바람 때문에 농사짓지 못하게 된 이들은 이재민이 돼 고향을 떠난다.
❸1940년 미국의 존 포드 감독이 영화로 만든 <분노의 포도> 포스터. 20세기 폭스사
❹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스탠리 큐브릭 프로덕션
언젠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이들은 흔히 넓은 의미의 과학소설(SF)로 묶인다. 과학소설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사변’이다. 경험이 아닌, 생각만으로 사물이나 현실의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사고실험을 이른다. 이런 작업은 과학소설의 수식으로 잘못 붙곤 하는 ‘공상’이 아닌, 과학적 추론에 따른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과 함께 세계 3대 과학소설가로 꼽히며 미래학자이기도 한 아서 클라크(1917~2008)가 이 사고실험을 강조한 대표적인 예다. 그는 최초의 인공위성이 등장하기 10여 년 전인 1945년에 정지위성궤도(고도 3만6천㎞)에 위성을 쏘아올려 대륙 간 통신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지구 위성 중계망은 그로부터 19년 뒤에야 실현된다. 1968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클라크의 동명 작품이 원작인데, 우주의 무중력 상태와 우주정거장 모습 등이 거의 정확히 구현돼 있다. 실제 영화가 개봉한 1년 뒤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들이 클라크의 소설을 참고로 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라크가 <낙원의 샘>(1979년)에서 묘사한 ‘우주 엘리베이터’는 정지위성궤도의 우주정거장과 지상을 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인데, 지금의 로켓보다 훨씬 효율적인 운송수단으로 묘사된다. 이 또한 언젠가 현실이 될지 모른다.
기후소설의 사고실험은 기후위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측하려는 시도이면서 기후위기를 막을 담론 확산의 매개가 된다. 부커상을 두 차례나 받은 캐나다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과학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친 아담’ 3부작도 그런 경우다. 3부작의 첫 편인 <오릭스와 크레이크>가 나온 해는 2003년이다. 소설엔 환경오염으로 자연의 상당 부분이 파괴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유전자 조작과 복제 생물을 이용해 식량 고갈을 해결하고 영생을 얻으려는 인류가 등장한다. 해수면이 상승한 바다엔 이전 시대 물건이 무질서하게 떠 있고, 유전자가 조작된 아이들은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어 눈사람이 무엇인지 모른다. 주인공의 부모는 “어떤 곳에서든 운전할 수 있던 때,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 어느 곳이든 비행기로 여행할 수 있던 때, 진짜 불고기를 쓰던 햄버거 체인점과 핫도그 판매대를 기억하느냐”며 한탄한다. 애트우드는 이 3부작의 집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기이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한편에서는 온갖 생물학, 로봇공학, 디지털 기술이 매 순간 발명과 발전을 거듭하며 한때 불가능이나 마법의 영역에 있었던 위업들을 실현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물학적 터전을 숨 막히는 속도로 파괴하고 있다. ‘미친 아담’ 3부작은 여기서 몇 걸음 더 나간 후 탐색에 들어갔을 뿐이다.”(<타오르는 질문들>, 2022년)
❺부커상을 두 차례나 받은 캐나다의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과학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 그의 ‘미친 아담’ 3부작도 대표적인 기후소설로 꼽힌다. 민음사 제공
모두의 책임을 묻는 소설
애트우드의 사고실험은 소설에 등장하는 신인류의 특질에서 더 분명해진다. 이들은 구인류(현재의 우리)처럼 지구를 파괴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유전적으로 설계됐다. 이들의 신체는 모두가 균등하게 아름다우며 자외선이 차단돼 옷이 필요 없다. 따라서 목화 재배, 양 사육, 유독성 염료가 필요하지 않아 산업혁명의 필요 자체가 없다. 이들은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자가 치유를 하고 채식한다. 축산이나 양계를 할 이유도 없다.
이와 유사한 미래 인류의 특질은 이보다 앞선 미국 작가 어슐러 르 귄(1929~2018)의 <어둠의 왼손>(1969년)에서도 등장한다. 외계 행성인 게센인들은 평소엔 성별이 없다가 한 달에 한 차례 발정기인 ‘케메르’ 때 성이 정해진다. 누구도 자신이 어떤 성별이 될지 알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다. 여성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임신하면 호르몬 분비가 출산과 수유기까지 계속된다. 누구나 ‘출산에 묶일’ 수 있기에 사회적 부담과 특권을 동등하게 나누어 가진다. 이들은 다툴지언정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평화롭고 신중하며 인내심 있고 사려 깊다.
르 귄은 <어둠의 왼손>의 1976년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엄격한 외삽(맥락상 사고실험)을 이용한 SF의 결과물은 대부분이 로마클럽이 내린 결론과 비슷한 어딘가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인간 자유의 점진적인 소멸과 모든 지상 생물의 멸종 사이 어딘가에.” 지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로마클럽이 1972년 낸 보고서 <성장의 한계>는 세계 인구와 산업 생산이 한계에 이르러 인류 문명이 붕괴할 것으로 내다봤다. 애트우드나 르 귄의 기후소설 실험은 우리의 미래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소설 형태로 구체화했다.
최근 영미권 기후소설은 단순히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정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로 번져간다. 미국 작가 존 레이먼드의 <부정>(Denial, 2022년, 국내 미출간)이 그런 예다. 2052년이 배경인 소설에서 인류는 재앙적 기후변화를 가까스로 막는데, 이보다 20년 앞선 2032년 ‘토론토 재판’을 통해 기후변화에 책임 있는 주요 인물을 ‘생명에 반하는 범죄’로 유죄 판결한다. ‘화석연료 재벌’로 살다 20년째 숨어 사는 소설 속 등장인물은 이렇게 호소한다. “지구상에 죄가 없는 자가 어디 있나. 이 죄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
(왼쪽부터) 로마클럽이 1972년 낸 보고서 <성장의 한계> 초판본 표지. 김기창의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2021년). 김초엽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2021년). 로마클럽 누리집 갈무리. 민음사 제공. 자이언트북스 제공
실천과 참여를 고민할 때
기후소설의 흐름은 국내에서도 나타났다. 소설가 김기창은 2021년 단편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에 본격적인 기후소설을 표방하는 작품을 냈다. 소설 속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어부로 사는 소년이 산호초의 죽음, 어종 변화로 생존이 어려워지자 결국 살인자로 둔갑하는 비극이 그려진다. 거주불능 상태가 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가 건설한 투명 태양열 패널로 둘러싼 ‘돔시티’도 등장하는데, 소수가 그 도시 안에 살고 더 많은 이가 그 밖에 머문다. 한국 과학소설계의 총아로 떠오른 김초엽도 노출되면 죽음에 이르는 먼지 ‘더스트’로 멸종한 미래 인류를 다룬 <지구 끝의 온실>을 2021년 펴냈다. 국내에서도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조만간 본격적으로 나올 전망이다.
문예지 <월간문학>은 2022년 10월호에서 ‘문학과 재난대응’을 특별기획으로 다뤘다. 이 주제로 발표한 이들은 “감염병과 기후변화라는 엄중한 상황에 맞닥뜨린 한국문학이 실천과 참여, 상상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강호삼은 관련 글에서 “쥘 베른은 <달세계 여행> <해저 2만리> 같은 과학소설을 발표해 과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오늘날 우주여행과 인공위성 발달을 실현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며 “당면한 기후변화와 전 지구적으로 예견되는 재난에 있어 우리 문학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함께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당부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기후소설(Cli-Fi)이 급부상하고 있다
SF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Kim Stanley Robinson)의 소설 ‘뉴욕 2140, 맨해튼(New York 2140, Manhattan)’을 보면 2140년 미국 뉴욕은 거대한 해상 도시로 변해 있다.
격자무늬의 수로 위에는 형체가 너무 훼손돼 알아보기 힘든 증기선들이 짐을 실어 나르고, 지금의 맨해튼 6번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곳에서는 아이들이 스킴보드를 타며 물놀이를 즐기는 장면이 등장한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15.25m까지 상승했기 때문이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최근 해수면 상승과 관련된 과학자들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지금처럼 해수면이 올라갈 경우 2140년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경고하는 내용의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이런 장면들이 미래 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기후변화가 더 심각해지면서 최근 기후소설인 ‘Cli-Fi’ 출간이 늘고 있다. 기후 문제의 심각성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은 인공위성이 촬영한 허리케인. ⓒNASA
대중은 논문보다 기후소설 더 좋아해
2018년 UN 보고서에서 기후과학자들은 인류가 지금 대재난을 향해 가고 있지만 대재난이 다가오고 있다고 실감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지금의 현실을 개탄했다.
16일 ‘BBC’에 따르면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킴 스탠리 로빈슨과 같은 소설가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과학적인 데이터에 의거해 미래 인류가 직면할 상황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기후변화를 함께 실감하고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19세기 문화와 미국소설 분야에서 저명한 인물인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아고 캠퍼스의 셸리 스티비(Shelley Streeby) 교수는 “과학자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소설가들이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게 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예감하게 한다.”는 것.
최근 ‘Cli-Fi(Climate Fiction)’로 불리는 기후소설의 출간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 Pixaba
실제로 최근 ‘Cli-Fi(Climate Fiction)’로 불리는 기후소설의 출간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16년 미국 문학비평가 리뷰에 따르면 인간으로 인해 발생한 기후변화를 다루고 있는 ‘클리-피(Cli-Fi)’의 수가 50편에 달했다.
이중 20편은 지난 5년 동안 발생한 재난을 다룬 내용이다. 존 란체스터(John Lanchester)의 작품 ‘더 월(The Wall)’이 대표적인 경우다. 매우 불안한 상황이지만 동시에 매우 재미있는 스토리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현실에 좇기는 현대인의 삶에 있어 미래 예측은 매우 힘든 일이다. 스티비 교수는 그러나 “많은 독자들이 기후소설을 통해 미래를 미리 체험하고 있으며, 소설가들이 대중을 통해 미래를 이끌고 있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스토리 너무 음울, 희망적인 소설 등장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지금의 소설처럼 미래에 항상 재난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도 일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이다.
미국 뉴멕시코 출신의 소설가 사레나 올리바리(Sarena Ulibarri)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암울한 분위기의 ‘반이상향적인(dystopian)’ 소설과는 다른 매우 희망적인 소설을 준비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공급이 늘어나면서 우려했던 기후변화가 완화되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신세계가 펼쳐진다는 내용이다.
사레나 올리바리가 준비하고 있는 기후소설은 신재생에너지 공급이 늘어나면서 우려했던 기후변화가 완화되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신세계가 펼쳐진다는 내용이다. ⓒ Pixabay
이런 내용의 소설이 출현한 것은 2012년 한 브라질 출판사에서 희망적인 내용의 한 단편소설을 출간하면서부터다. 이후 유사한 내용의 소설이 계속 등장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텀블러(Tumblr)’를 비롯 다양한 블로그를 통해 쏟아져나오고 있다.
소설가 사례나 올리바리는 “기후소설은 픽션이 아니라 현실을 다뤄야 한다.”며, “기존의 우울한 분위기의 기후소설을 밝은 분위기로 바꾸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을 통해 정치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점 역시 최근 기후소설에서 나타나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다.
킴 스탠리 로빈슨의 소설 ‘뉴욕 2140, 맨해튼’을 보면 한 인물이 경제 시스템을 맹비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탐욕적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 때문에 세계가 쓰레기통이 되고 있다는 것. 이 멍청한 인간들을 극복해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대사를 보면서 독자들은 2018년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2140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것이다.
로빈슨은 이런 표현을 통해 ‘분개한 낙관론(angry optimism)’에 접근해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래 더 나아지는 현실을 기대하고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며, “기후소설을 비롯한 SF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가 로빈슨은 “미래 더 나아지는 현실을 기대하고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며, “기후소설을 비롯한 SF를 통해 이를 실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 Pixabay
심각해지는 기후변화와 병행해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기후소설이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그러나 기후소설에서 전개되고 있는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백인이 이 소설 장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유색인종들이 기후소설을 기피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기후소설의 백인우월주의 문제는 기후소설을 포함한 SF(공상과학소설) 전체의 문제다. SF 출현서부터 지금의 작품 출간에 이르기까지 SF 장르를 주도하고 있는 소설가들은 대부분 백인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캘리포니아대학 스티비 교수는 “SF에서 백인 외에 유색 인종을 다양하게 출현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과학과 관련, 기후변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래가 다양한 인종을 통해 전개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이 만들어가는 미래를 인류 전체가 공유하면서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이언스타임즈 이강봉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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