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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by 이성근 2022. 9. 14.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히틀러와 독일, 미국의 자본가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자크 파월 저/박영록 역 | 오월의봄 | 201910

 

목차

서문 7

 

1부 독일 재계와 히틀러

1장 제국, 전쟁, 그리고 혁명 21

2장 산업, 민주주의, 그리고 독재 36

3장 경제적·정치적 위기 48

4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 61

5장 좌파 숙청 69

6장 나치 독재: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80

7장 제3제국: 복지국가였나? 106

81939~1945: 히틀러의 전쟁? 124

9장 끝까지 함께! 142

10장 만족하지 못했던 수혜자들 161

 

막간

다른 곳에서는?: 그들 또한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169

 

2부 미국 재계와 나치 독일

11장 달러의 독일 공세 203

12장 미국 내 히틀러의 지지자와 동업자 217

13로젠펠트보다 히틀러 237

14미국산전격전 258

15장 진주만 공격 이후: ‘평시와 다름없이’ 280

16장 전쟁=수익 294

17장 은행가와 정보요원의 역할 306

18장 폭격, 피해와 보상 315

19장 모겐소와 모스크바 사이 326

20장 나치의 과거, 미국의 미래 334

결론: 파시즘과 1945년 이후의 전쟁 348

후기: 역사는 허풍인가? 355

 

옮긴이의 말 369

373

참고문헌 397

찾아보기 423

 

 

출판사 리뷰

대자본과 히틀러 사이의 협력 관계

자크 파월은 전작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2017년 출간)에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는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자본가들과 특권층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극히 호의적이었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구축했다. 파월은 이런 대자본가들의 행보를 통해 미국이 말한 좋은 전쟁(Good War)’이란 미국의 대기업(자본)’에게만 좋은것이었을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또 다른 얼굴을 고발한 바 있다.

 

신간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에서 자크 파월은 전작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기막힌 밀착 관계를 파헤친다. 히틀러가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미국의 자본가들이 그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독일 지배층 중 한 명은 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치기도 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정치 경력 초기부터 그를 지원했고,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데 협력했다. 또 히틀러가 정복 전쟁을 벌이고 약탈을 저지르며 홀로코스트를 자행할 때 도움을 주었고, 그 과정에서 전례 없이 높은 수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몰락했을 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에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와중에 자신들의 부와 권력, 특권까지 지켜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흔적까지 지울 수 있었다. 미국 정부와 독일 내 미국 점령군 당국의 주요 결정권자 대부분이 미국의 대기업과 은행의 대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용 역사학자를 고용해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삭제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히틀러가 집권하도록 돕지 않았고, 히틀러에게 협력하지 않았거나 협력했다고 해도 강요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었다. 히틀러를 희대의 악마로 포장하고,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히틀러는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가능케 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부자들이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 그로 인해 죽는 이들은 빈자라고. 독일과 미국의 특권층과 자본가들의 선택 때문에 힘없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와 서민들이 전선에서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다. 수백만 명이 살해된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히틀러는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가?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게 하나 있다. 히틀러가 1934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 유권자 다수의 표를 받은 적이 없었다. 1933년 내각의 수장 총리가 된 것도, 1934년 총리 겸 대통령이 되면서 무한한 권력을 누리게 된 것도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게 아니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은 1932년 총선에서 오히려 이전보다 의석을 잃었다. 히틀러를 지원했던 독일의 자본가와 권력층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권력층은 히틀러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3년 히틀러를 기어코 총리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집요하게 설득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한 보수 정치인은 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고 외친 바 있다. 1934년에 대통령이 된 것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군 장성들이 히틀러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히틀러가 그 자신의 힘으로 집권했다는 것은 당시 나치스가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었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권력 위임또는 권력 양도일 따름이었다.

 

전직 최전선 군인이었던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에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배, 러시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 허약한 바이마르식 민주주의의 탄생을 비롯한 여러 충격적인 사건이 뒤섞여 있는 맥락에서였다.”

 

1923년 히틀러는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리고 1934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꾸준히 독일의 권력층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의 기간이 길었고 그 과정에서 부침도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히틀러가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의 대기업과 대형 금융기관, 그리고 이들과 협력했던 경제적 특권층은 히틀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들이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부상해 마침내 권좌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이 대가로 독일 재계, 즉 대자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익이라는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 열매는 히틀러의 퇴행적인 정치, 대규모 재무장 프로그램, 정복 전쟁, 점령국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 그리고 유대인 재산 몰수 및 학살 등 각종 그로테스크한 범죄로 얼룩진 땅 위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를 지원했나?

그렇다면 독일의 권력층과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를 지원했을까? 사실 1920년대와 1930년대,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파시스트 또는 유사 파시스트 독재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비롯한 많은 서방 국가에서 출현했다. 즉 히틀러의 등장은 독일에서 발생한 희한한 교통사고같은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와 나치즘은 무솔리니, 프랑코, 피노체트 등 독재자들의 파시스트 정권과 더불어 독일, 유럽 전반, 그리고 나머지 서방세계의 역사 진행 방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치즘은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독일에서 자본주의가 그 근본 목표-수익의 극대화와 자본의 축적-를 실현하기 위해 취했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체제가 불러온 하나의 징후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는 서방세계의 중심에서 탄생했지만 불과 한두 세기 만에 진정한 세계체제로 변모해왔는데, 이 역사에서 그들은 전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나치즘, 더 나아가 파시즘은 사실 자본주의의 징후였다.

 

19세기 독일제국은 산업화를 이뤄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로 부상했지만,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많은 것을 잃었다.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기는커녕 상당한 규모의 영토와 해외 시장마저 잃게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벨기에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곳곳에서 대규모 혁명이 발발했다. 당시 시대정신은 좌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1929년 말에는 세계에 재앙과도 같은 경제 위기, 즉 대공황이 발생했다. 독일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무렵 위기감을 느낀 독일의 기업계와 금융계의 대표급 인사들이 히틀러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히틀러는 자신들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독일의 심각한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타개할 의지와 능력을 지닌 독재자가 될 만한 인물로 비쳤다. 또한 히틀러가 자신들의 적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을 파괴해줄 거라는 기대가 컸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줄 적임자로 보였다.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노동조합원유대인

히틀러는 독일의 자본가들에게 거듭 자신의 정책을 홍보했다. 자신이 집권하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몰아낼 것이며, 노동조합을 무력화할 것이고, 소유주들은 다시 자기 집의 주인이 될 것이며, 임금을 올리지 않은 채 노동시간을 늘릴 것이고, 사회적 비용 또한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더불어 재무장 프로그램을 통해 강한 독일을 만들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업가와 은행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차츰 히틀러를 지원하는 자본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마르틴 니묄러의 유명한 시에 잘 나타나 있듯이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공산주의자를 탄압했고, 이어서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 유대인을 차례차례 탄압했다. ‘나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독일 재계는 좌파적인 모든 것, 즉 극좌파 공산주의자, 온건 좌파 사회주의자, 유사 좌파 나치당원, 그리고 좌파 노동조합 등이 제거된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다. 독일에서 한때 강력했던 노동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기업가와 은행가가 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었다. 기존 정당들이 실현해주지 못했던 이 꿈을 히틀러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버렸던 것이다.

 

 

나치 독재,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히틀러의 나치즘, 그리고 파시즘은 미국 자본가들에게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이것이 1945년 이후에도 그들이 계속해서 프랑코, 수하르토, 피노체트 등이 이끌었던 파시스트 (그리고 다른 형태의) 독재 정권을 선호했던 이유이다. 그런데 파시즘보다 자본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전쟁이었다. 전쟁이 미국의 대기업과 대형 은행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미국은 1945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최근 자신의 이력서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내용을 추가한 대통령하에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나치 독재로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경제 위기가 닥치자 수요와 공급 사이에 불균형이 생겼고, 이 문제는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보다 독일에서 더 심하게 나타났다. 사실 독일 산업계는 생산성이 매우 높았지만, 식민지가 없었기 때문에 값싼 원료 공급처나 수출품과 투자자본을 위한 시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히틀러가 제안한 해결책은 재무장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기업가와 은행가가 꿈꿔왔던 방식이기도 했다. 자본가들은 재무장이 국제사회에서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재무장 프로그램이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자본가들도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재무장 프로그램에 주목했고, 거기에 차츰 투자를 하게 된다. 또한 히틀러를 직접 만난 언론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소유한 통신사와 신문사의 기사, 출판사의 출판물 등에서 히틀러는 지속적으로 우상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곧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자본가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과 미국의 재계는 전쟁에 적극 협력했고, 그 덕에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히틀러를 지원한 미국의 기업과 자본가들

미국에서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미 민주주의가 단단히 뿌리를 내려, 파시즘이 발흥할 기회가 없었을 거라고 너무 쉽게 추정하고들 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미국 기득권층도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이 촉발하고 대공황이 악화시킨 예의 문제들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파시즘의 싹은 미국 땅에도 퍼지고 있었고, 미국 권력층 일부는 실제로 자국의 파시스트 조직을 지원하고 해외의 파시스트와 교분을 나누며 파시스트 옵션을 고민하기도 했다.”

 

미국 자본 역시 초기 단계부터 히틀러를 지원했다. 그리고 독일에 수많은 지사 공장을 세워 나치 정권이 사용할 무기와 기타 전쟁 물자를 생산하고, 나치스에 엄청난 양의 연료와 고무, 기타 전략 원료를 공급해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미국 기업들의 이러한 공급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무시무시한 전격전을 결코 실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에도, 심지어 진주만 공격 이후에도, 미국 재계는 나치 독일과 중요한 거래를 지속했다. 그 거래로부터 엄청난 수익이 창출되었다. 그리고 이 수익은 점령국에서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과 수용소 수감자 등을 활용한 강제노동을 통해 극대화되었다.

 

일례로 헨리 포드의 가족기업인 포드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헨리 포드는 널리 존경받던 미국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지만, 히틀러만큼이나 과격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포드는 나치 독일에 트럭과 광범위한 전쟁 물자를 공급해 돈을 벌었다. 그중 일부는 미국에서 수출되었지만, 대부분은 쾰른에 위치한 포드-베르케라는 이름의 자회사에서 생산되었다. 포드의 독일 내 투자는 전쟁 기간 동안 노예노동을 활용한 덕분에 더욱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제너럴모터스의 회장이었던 앨프리드 P. 슬론도 히틀러를 찬양한 미국의 많은 거물 중 한 사람이다. 제너럴모터스의 독일 지사 공장인 오펠은 나치 군대가 사용할 트럭, 비행기, 기타 전쟁 물자를 생산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아이비엠의 회장이었던 토머스 J. 왓슨 또한 히틀러 숭배자였다. 그 또한 공업 생산 자동화를 가능케 한 펀치 카드를 제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 밖에 언론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스탠더드 오일 책임자였던 월터 C. 티글, 본인과 이름이 같은 트러스트의 창업자인 이레네 듀폰 등 산업계의 거물도 히틀러의 숭배자들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 그리고 노예노동에 시달린 사람들

나치즘은 노동의 자유를 억압해서, 즉 독일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들의 부자유를 극대화해서 자본의 자유를 극대화한 술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파르벤, 지멘스 운트 할스케, 데베엠, 다임러-벤츠, 베엠베, 메서슈미트, 클뢰크너 등 전쟁 물자를 만들던 공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예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코카콜라, 포드, 코닥 등 미국 기업들도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을 활용해 수익을 올렸다. 대기업의 뒤에는 푼돈을 받고 그 대가로 규율을 강제해주던 친위대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문자 그대로 죽도록 일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동유럽 사람들과 유대인들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유대인과 동유럽인이 노예노동과 기아로 또는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동유럽의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과 13세 이하 어린이들도 노예노동에 시달렸다. 전쟁 기간 동안에 유럽 내 유대인 수백만 명이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등의 절멸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그들은 죽기 전까지 노예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한 예로, 바이엘, 회흐스트, 바스프 등 대기업들로 구성된 트러스트 이게파르벤을 들 수 있다. 이 트러스트는 히틀러의 집권에 도움을 주었고, 재무장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자사 공장, 특히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바로 옆에 지은 거대한 시설에서 노예노동을 악용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다. 게다가 이게파르벤은 데게슈라는 지사를 통해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 등의 절멸수용소 가스실에서 사용한 독가스 치클론 베Zyklon-B를 공급하기도 했다.

 

수감자들은 대부분 거칠고 위험한 일에 투입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부실한 식사를 했고, 겨울에는 추위에 여름에는 더위에 노출되었으며, 매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지내면서 혹사를 당했기 때문에 매달 약 5분의 1 정도가 죽음을 맞이했다. 노예처럼 일할 만큼 건강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살해되었다. 하지만 사망한 이들조차 나치스와 나치스를 도운 기업과 은행에겐 쓰임새가 있었다. 시신에서 옷, 현금, 보석, 시계,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을 약탈하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심지어 금니까지 수거했다. 죽음이 예정된 사람들마저도 수익 창출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독일 산업계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었던 생체 실험 및 기타 연구 실험에 기니피그 같은 실험동물로 쓰였던 것이다.

 

이런 노예노동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의 최신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비엠이 홀러리스 계산기 등 여러 장비를 제공했기 때문에 나치스에서 유대인 등의 희생자 명단을 만들 수 있었고, 수감자를 등록하고 노예노동을 관리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모든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는 홀러리스 부서라고 불렸던 아이비엠 사무소가 있었다.

 

책 속으로

히틀러의 계획이 필연적으로 끔찍한 전쟁을 초래할 게 분명한데도 독일의 기업가와 은행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일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충분히 강해서 어떠한 전쟁에서도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볼 때, 그리고 히틀러가 볼 때, 1918년에 독일이 패전한 것은 배신 때문이었다. 독일 내부의 적색 혁명론자와 유대인이 등 뒤에서 칼을 꽂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음 전쟁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이러한 배신자들을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독일 지배층 역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는 총알받이가 될 사람이 자신들이 아니라 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 p.53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것은 우리가 자주 들어온 바대로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는 독일 유권자 다수의 표를 받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심하게 조작되었던 193335일 선거에서조차 그는 과반이 넘는 표와 의석을 얻는 데 실패했다. 광범위한 폭력과 협박, 그리고 독일 재계의 엄청난 재정 지원으로 실행한 프로파간다와 대규모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은 43.9퍼센트라는 실망스러운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다. 1933년 초 히틀러가 집권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1934년 여름에 총리 겸 대통령이 되면서 무한한 권력을 누리게 된 것도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게 아니었다. --- p.78

 

히틀러 정권은 독일에서 자본주의체제를 결코 위협했던 적이 없다. 이 정권이 여러 의미에서 사실상 독일 자본주의의 산물 그 자체라는 사실 또한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많은 역사학자의 주장과는 다르게, 나치스는 민간기업을 국영기업으로 전환하여 독일의 자본주의체제를 위협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가 없다. --- p.90

 

이 자본주의, 20세기의 자본주의는 소규모 사업가들을 위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대기업과 대형 은행의 대기업가들을 위한 자본주의였다. 전문용어를 쓴다면 독점기업독점자본을 위한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나치즘하의 독일 경제에 대한 책을 집필한 샤를 베틀레임은 약간의 과장을 섞어 이렇게 설명한다. “나치 정권하에서, 독일 경제는 점점 더 몇몇 독점기업에 장악되어갔다. …… 나치 정부가 기반으로 삼았던 재산이, 나치 정부가 유지·보호·옹호·육성했던 재산이 바로 독점자본가들의 재산이었던 것이다.” --- p.113

 

전쟁 기간 동안에 유럽 내 유대인 수백만 명이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등의 절멸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어린이나 노인처럼 노동할 만한 힘이 없는 사람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가스로 살해되어 화장되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독일 기업들은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수용소 근처에 공장을 지었다. 이게파르벤은 아우슈비츠에 이른바 부나베르크Bunawerk라는 거대한 공장을 지어 합성고무를 생산했다. --- p.130

 

독일에서 나치즘과 자본주의의 역사는 친밀한 관계의 연대기이자 일종의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을 향해 가는 동안, 그 관계는 힘겨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전쟁이 끝난 바로 그 순간까지, 독일 재계는 나치 정권에 충실했고, 히틀러가 절망적일 만큼 참혹한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물자를 생산했다. 역으로 나치 정권도 몰락하는 그날까지 거대 기업과 은행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보여주었다. --- p.155

 

역사책이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1922년에 무솔리니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집권에 성공한 걸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11년 뒤 히틀러가 그랬듯이 무솔리니도 특권층에 고용된 것이었다. 그가 권력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건 이탈리아의 기득권층, 즉 왕가, 바티칸 성직자, 대지주, 군 수뇌부, 그리고 은행가와 기업가의 솜씨였다. 그들 기득권층은 일반 대중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내줘야 하는 민주주의체제에 대한 혐오, 혁명에 대한 공포, 노동조합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파시즘 옵션을 선택했다. --- p.170

 

1930년대에 미국 재계의 반유대주의는 반사회주의 및 반마르크스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이른바 빨갱이 사냥이라고 불리던, ‘붉은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로 표출되었다. --- p.248

 

나치 독일에 지사를 둔 미국 기업의 소유자와 경영진은 히틀러의 승전에 기여한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일정 부분 자랑스러워했는데, 히틀러의 승리가 곧 그들 자신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치가 승전을 자축할 때, 제너럴모터스, 포드, 아이비엠 등의 기업이 그들과 함께했다.

--- p.267

 

미국, 마피아는 '칭찬' 레지스탕스는 '거부'?

'전쟁국가 미국' <3> 자크 파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두 번째

2차 대전은 영국, 소련, 미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 간의 생사를 건 일대 결전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대결 구도가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대 소련으로 바뀌었다. 왜 그런가?

 

2차 대전에서 전사, 부상했거나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숫자는 135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1000만 명 이상이 동부전선에서 희생됐다. 즉 소련과 벌인 전투에 의한 것이었다. 독일군 전사자의 90퍼센트가 소련과 벌인 전투에서 발생했다. 당연히 소련군의 인명 피해도 막심했다. 1300만 명이 전사했다. 민간인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3000만 명에 이른다. 당시 소련 인구의 15퍼센트다. 이에 비해 일본을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까지 포함해 미군과 영국군 전사자는 60만 명에 불과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군 전사자 대 소련군 전사자의 비율은 1 53이었다고 한다. 인명 피해로 따지면 소련은 나치 격퇴의 9할 이상을 담당한 셈이다.

 

2차 대전이 미국과 소련에 미친 경제적 결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대부분의 전투를 자국 영토에서 치른 소련의 경제는 치명적 타격을 입은 반면, 미국 본토는 전쟁 피해를 전혀 겪지 않은 데다 막대한 전쟁 특수로 사상 유례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소련의 전쟁 피해는 1280억 달러에 이른다. 당시 소련 GDP25년치에 해당된다. 1945년의 GDP1941년 대비 20퍼센트나 감소했다. 반면 미국 정부의 국방 예산은 193930억 달러에서 1945450억 달러가 되며 15배로 늘어났고, 영국, 소련 등 연합국에 대한 무기 대여(Lend-Lease)의 총 규모는 자그마치 500억 달러나 된다. 현재 가치로는 6560억 달러에 이른다. 2차 대전 수행에 필요한 전쟁 물자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이 생산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뉴딜로도 해결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2차 대전을 통해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이 독일로부터 받아낸 전쟁 배상금은 51억 달러에 불과하다. 실제 피해액의 4퍼센트가 채 안 된다. 얄타회담 당시 미국과 영국이 약속한 100억 달러의 절반을 받아냈을 뿐이다. 나치 격퇴의 최대 유공자인 소련은 왜 고작 4퍼센트의 피해 보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국제적으로 고립돼야 했을까?

 

1차 대전은 19181111일 오전 11시를 기해 모든 전투 행위가 종료됐고, 1919628일 베르사유 강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법적으로도 마무리됐다. 반면 2차 대전의 전투 행위는 194558(유럽)815(아시아)에 종료됐지만, 법적인 마무리는 훨씬 뒤에야 이루어졌다. 태평양전쟁은 19519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소련과 중공이 불참한 미일 단독 강화였다), 유럽 전쟁은 19909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이른바 '2+4 회담(·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 이후 독일의 운명에 관해 합의를 이루지 못했으며 동독이 무너진 이후 사후적으로 전쟁의 공식 종료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독일의 운명과 유럽의 평화는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패배가 확실해진 이후에야 결정됐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은 2차 대전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분단과 냉전의 시작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번 주에는 자크 파월의 책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에 서술된 2차 대전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면서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편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영국은 왜 스탈린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유럽 대륙을 통한 대나치 공격(2전선)1942년이 아닌 19446월에야 시작했는가, 미국과 영국이 해방한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세력이 철저히 배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치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19452월 군사적 중요성이 거의 없는 드레스덴을 무차별 공습한 이유는 무엇이며 얄타 회담의 진실은 무엇인가, 19453월 이후 미국과 나치가 힘을 합쳐 소련을 무찌르겠다는 이른바 '독일 옵션(German Option)'의 실상, 트루먼의 소련에 대한 핵 외교, 그리고 독일 분단과 냉전의 기원 등에 대해 알아본다.

 

유화정책의 본질 : '히틀러여, 소련을 쳐라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뮌헨'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뮌헨'1938930, 영국·프랑스 및 독일·이탈리아가 체결한 뮌헨협정을 말한다. 당시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를 만나 나치의 체코 수데텐란트 강제 합병을 용인하는 대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체임벌린 총리는 이로써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지켰다고 자랑했지만, 1년 후인 1939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대전이 시작된다. 히틀러는 1933년 집권 이후 19363(1차 대전 이후) 프랑스에 빼앗겼던 (독일의 산업 중심지) 라인란트를 무혈점령하고 19383월에는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데 이어 19388월 체코의 독일인 거주 지역인 수데텐란트를 강제 합병하는 등 영토 확장을 거듭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용인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이러한 태도를 '유화정책(Appeasement)'이라고 부른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뮌헨'을 잊지 말자"고 강조한 것은 당시 영불의 유약한 태도가 전쟁을 불러왔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뮌헨'은 소련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이유로, 나아가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활용돼왔다.

 

그렇다면 1930년대 후반 영국과 프랑스는 왜 히틀러의 영토 팽창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일까? 이에 대해 파월은 영불이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난 호에 얘기했던 것처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들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보다 스탈린의 공산 소련을 더 큰 위협으로 인식했고 이에 따라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할 것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서방권에서 자신이 반공 전선의 최대 전사로 떠오른 점을 활용하여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하는 등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도 서방측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 미국의 지도자들이 반공의 선봉인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로이드 조지 전 총리를 비롯해 핼리팩스 경, 몬태규 노먼 영국은행 총재, 심지어 왕족까지 영국의 엘리트들은 히틀러 집권 초기부터 그의 동방 야욕(러시아 침략)에 지지를 표했다. (한때 에드워드 8세였고 미국인 심슨 부인과 결혼해 왕위를 포기한) 윈저 공작은 1936년 독일 남부 바바리아 산속 히틀러 휴양지를 방문해 함께 차를 마시며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을 부추겼다. 1966년 윈저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내게 공산 러시아가 유일한 적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영국 등 모든 유럽은 독일을 도와 소련 공산주의를 완전히 끝장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 나는 머지않아 나치가 대소련 전쟁에 나서는 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유럽 지도자들이 나치가 소련을 박살낼 것을 기대했다. 캐나다 역사가 클레멘트 라이보비츠와 앨빈 핀켈에 따르면 유화정책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적 협력을 하자는 스탈린의 제안을 묵살했다. 오히려 온갖 외교적 술책과 엄청난 양보를 통해 히틀러로 하여금 소련을 침공하도록 만들려 했다. 19389월 뮌헨협정은 이러한 유화정책의 절정이었다. 히틀러는 체코를 합병했고, 이는 모스크바로 진군하기 위한 교두보가 됐다.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했다. 폴란드를 양보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9년 늦여름 '폴란드 위기'를 불러왔다.

 

대독 유화정책의 진짜 목적이 나치의 소련 침공임을 알아챈 스탈린은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조약(1939823)을 맺어 나치의 침공에 버텨낼 수 있는 귀중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한다(나치의 소련 침공일은 1941622).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양보를 거부하자 영불에 속았다고 판단한 히틀러가 스탈린과 거래를 한 것이다.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정책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다. 우선 소련이 멸망하지 않았고,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 점령한(193991) 직후 소련을 침공하라고 부추긴 프랑스와 영국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1940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시작으로 5월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 대한 공격에 나서 불과 2개월 만에 유럽 대륙 전체를 석권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전격전(Blitzkrieg)의 승리였다.

 

그런데 폴란드가 무너진 19399월 이후 독일이 서유럽 정벌에 나선 19404월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왜 독일에 대한 전쟁에 나서지 않은 것일까? 파월은 이렇게 말한다.

 

"유화정책은 1939년 늦여름(8) 폴란드 위기로 사실상 파탄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 총리 등 유화주의자들은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기대했다. 국민 여론에 떠밀려 대독일 선전포고를 했으나 그것은 말뿐이었다. 19404, 나치가 서유럽 정벌에 나설 때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이상한 작은 전쟁', 독일에서는 '전투 없는 전쟁(sitting war)'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가 독일에 점령당하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영불은 히틀러가 결국은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 경우 히틀러를 도울 준비를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391940년 겨울 동안 분주하게 온갖 종류의 공격 계획을 세웠는데, 공격 목표는 독일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예컨대 중동을 통해 (소련의) 바쿠 유전을 장악하는 계획 등을 세웠다."

 

미국의 지도급 인사들도 히틀러가 조속히 영국 및 프랑스와 협정을 맺고 소련을 침공하기를 고대했다. 독일의 폴란드 점령 이후 독일 주재 미국 대사 휴 윌슨은 영국 및 프랑스가 독일과 빚은 불편한 갈등을 청산하고 히틀러가 소련의 공산주의 실험을 끝장내게 하는 것이 '서구 문명'에 도움이 된다고 언급했다.

 

194034, GM 부회장 제임스 무니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공식 특사 자격으로 베를린의 히틀러를 방문해 영국, 프랑스와 화해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미국은 생활공간(Lebensraum)을 확보하려는 독일의 관점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즉 독일이 동유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주영 미국 대사였던 조셉 케네디(F.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도 같은 의견을 표명했다.

 

미국과 영불 모두 소련의 멸망을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 프랑스만큼 유화정책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영불은 소련 침공으로 나치의 보복(1차 대전 패배에 따른 연합국의 가혹한 배상 요구에 대한)이 서유럽으로 향하지 않게 될 것을 기대한 반면 미국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소련에 대한 수출 확대가 대공황 탈출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 세력이 미국 내에 있었다. 193311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련과 국교 정상화를 한 것도 바로 이런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무부 내의 친독일, 반소련 성향 관리들의 반대로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려웠다.

 

한편 미국의 주류 언론은 국민들에게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보다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국제 공산주의가 훨씬 더 큰 위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파시즘이 더 큰 위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련의 선전에 놀아난 얼간이로 낙인찍힐 정도였다. 1940년 서유럽에 대한 파시스트의 침략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미국에는 새로운 반공·반소 열풍이 불었다.

 

유럽 전쟁과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

19406월 프랑스 점령을 끝으로 유럽 대륙을 석권한 히틀러는 7, 공습을 통한 영국 정벌에 나선다(Battle of Britain). 당시 미국은 불과 2개월 만에 서유럽을 굴복시킨 나치 전격전의 기세로 보아 영국이 독일의 공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유럽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말까지 영국이 독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자 전쟁 참여를 고려하게 된다. 19401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고(Arsenal of Democracy)'가 될 것(대독일 전쟁을 위한 전쟁 물자를 미국이 생산하겠다)을 선언했고, 19411월부터 영국과 비밀리에 참전 문제를 논의한다. 영국 정벌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히틀러는 19401218일 소련 침공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독일의 영국 공습은 19415월에 종료되고 독일은 622일 소련 침공에 나선다.

 

미국이 영국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한 것은 1941311일 영국과 렌드리스(무기대여법) 계약을 체결하면서부터였다. 1차 대전 때 외상으로 영국 등에 무기를 공급했다가 낭패를 볼 뻔했던 미국은 193911'캐시 앤 캐리(Cash & Carry, 무기 대금을 현금으로 내고 무기 수송도 알아서 하라)라는 엄격한 조건으로 영국에 무기를 제공했었다. 그러나 영국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자 훨씬 관대한 조건으로 군수물자를 공급한 것이다. 이로써 영국은 미국의 최대 고객이 된다.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한 주된 이유로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꼽는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경제적 고려도 깔려 있었다. 1차 대전 당시 미국의 영국 및 프랑스에 대한 수출은 19148.24억 달러에서 191633억 달러로 4배가량으로 늘어난다. 반면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수출은 고작 100만 달러였다. 여기에는 미국이 영국, 프랑스와 같은 민주국가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로 독일에 대한 수출이 불가능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2차 대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호에 소개했던 것처럼 미국의 대기업은 2차 대전 기간 동안에도 나치 독일과 경제적 거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국은 결정적으로 영국에 기울게 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요인이 있었다.

 

우선 2차 대전 이전, 영국은 미국 수출의 40퍼센트를 소화하고 있었다. 즉 영국은 전쟁 이전에도 미국 경제의 최대 고객이었다. 게다가 19413월 렌드리스가 시행되면서 엄청난 액수의 전쟁 물자가 영국에 공급된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미국은 연합국에 총 500억 달러에 이르는 전쟁 물자를 공급했는데 이 가운데 영국의 몫이 가장 컸다(영국 314억 달러, 소련 113억 달러, 프랑스 32억 달러, 중국 16억 달러). 이는 현재 가치로 6560억 달러에 이르며 미국이 지출한 2차 대전 전쟁 비용의 17퍼센트나 된다. 또한 렌드리스 외에 미국의 대영국 수출도 크게 늘어난다. 19395.05억 달러에서 194010억 달러, 194116억 달러, 194225억 달러, 194345억 달러, 그리고 1944년에는 52억 달러로 전쟁 초기에 비해 10배로 늘어난다. 한마디로 영국은 미국이 도저히 내쳐버릴 수 없는 최대 고객이 된 것이다.

 

2차 대전을 통해 미국이 누린 경제적 혜택은 영국이라는 해외 시장을 개척한 데 그치지 않는다. 대영제국의 특혜관세를 폐지하게 함으로써 그동안 영국이 지배해온 해외 시장으로 미국이 침투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미국 역사가 저스투스 도네츠케와 존 윌즈는 이렇게 말한다.

"렌드리스는, 오랫동안 알려져 왔던 것처럼, 무상 공여에 가까운,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가가 현금이나 같은 종류의 물건일 필요는 없었다. (미국의 요구는) 대영제국 내의 특혜관세를 폐지해, 이제까지 영국이 지배해 왔던 수많은 해외 시장에 미국 상품이 더 쉽게 진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이후 미국의 정치·경제 지도자들은 "해외 교역이야말로 미국 번영의 핵심"이라고 믿어왔다. 특히 20세기 초 이후 대량 생산 체제(포디즘)에 의해 엄청난 생산능력을 갖게 된 미국 경제가 대공황이라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외 시장 진출이(즉 새로운 수요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렌드리스는 이제까지 미국이 침투해 들어갈 수 없었던 대영제국의 경제권에 침투할 수 있는 결정적 교두보가 됐다. 한마디로 미국의 문호 개방 정책, 즉 미국 기업인들의 꿈이 현실화된 것이다.

 

하지만 1930년대 헨리 포드를 비롯한 미국의 대기업가들은 나치즘을 열렬히 찬양했었다. 그들은 왜 나치 편을 들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도 경제적 이유가 있었다. 미국의 대기업들은 세계 전체가 미국의 수출 시장이 되길 원했던 반면, 나치는 폐쇄적 자급자족 경제(Autarky)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미국 수출품에 대한 문호 개방이라는 미국 경제의 절대적 명제를 나치는 거부했던 것이다.

 

미국의 수출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19338.4퍼센트에서 19383.4퍼센트로 뚝 떨어진다. 수출액 역시 192810억 달러에서 19384억 달러로 급감한다. 게다가 독일은 미국의 뒷마당인 브라질, 칠레, 멕시코 등 남미 시장을 집중 공략해 미국의 경쟁자로 나선다. 남미 지역의 수입 중 독일 수출의 비중은 19299.5퍼센트에서 193816.2퍼센트로 크게 늘어난다. 반면 미국의 대남미 수출은 같은 기간 38.5퍼센트에서 33.9퍼센트로 하락한다. 게다가 1938년에서 1940년에 걸쳐 독일이 동유럽 대부분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서유럽을 점령해 자신의 경제권으로 편입하면서 미국의 해외 시장은 축소된다.

 

결국 미국 수출의 최대 시장인 영국과, 미국의 수출 시장을 잠식하는 독일 중 영국을 지원하는 편이 미국 경제의 이익에 맞았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 수출의 최대 고객인 영국의 패망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자크 파월은 "영국과 교역 규모가 커지면서 영국보다는 독일에, 처칠보다는 히틀러에 더 호감을 가졌던 미국의 기업인들이 점차 영국에 기울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의 대기업들이 영국의 조속한 승전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영독 간의 전쟁이 장기화돼 미국의 무한정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헨리 포드는 "언합국도 추축국도 승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국은 "둘 모두 패망할 때까지 싸우는 데 필요한" 전쟁 물자를 양측에 모두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2차 대전에서 맹활약한 독일 폭격기, 슈투카. 위키미디어커먼스

 

독일의 소련 침공과 일본의 미국 공격 : 진정한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은 1941622일 소련 침공을 단행했다(바바로사 작전). 파월은 "독일이 1년만 빨리 소련을 침공했더라면 미국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미국은 소련의 멸망을 원하고 있었다. 당시 미영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은 독일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다. 19404월부터 6월에 걸쳐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짧게는 몇 시간, 길어봐야 6주 안에 정복한 독일군의 위력을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영국군 합참의장 존 딜 원수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불에 달궈진 칼이 버터를 잘라내듯" 손쉽게 제압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육군 전문가들도 46주 내 소련군의 패배를 예상했다. 늦어도 8월초에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는 얘기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친구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히틀러는 "소련을 계란 깨듯 격파할 것"이라고 했다. 루스벨트는 소련이 194110월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봤다.

 

나치의 승리를 예상했던 미국은 시베리아 등 독일에 점령되지 않은 소련 영토에 비공산 정권의 수립을 추진했다. 소련 침공의 주요 목표는 핵심 전쟁 물자인 석유의 확보에 있는 만큼, 소련의 유럽 쪽 영토 정복에 그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1917년 소련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케렌스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1941년 가을이 되면서 소련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드러냈다. 나치의 전격적 승리는 물 건너갔다.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소련군이 1941125일 최초의 반격에 나섰다. 파월은 이 반격이야말로 2차 대전의 진정한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소련은 미국의 유용한 우군임을 입증했다. 미국의 최대 고객인 영국의 군사적, 경제적 생존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련과 교역하는 것은 미국 기업에 도움이 될 터였다.

 

194111, 미국은 소련과 렌드리스 계약을 체결한다. 대나치 항쟁의 우군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소련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는 194112월 신임 주미 소련 대사로 부임한 막심 리트비노프에 대해 미국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전에 없는 환대를 베푼 것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브링클리는 "이제 러시아는 우방으로 받아들여졌다. 적의 적은 곧 우리의 친구라는 얘기"라고 말한다.

 

이제 소련에 대한 나치의 승리는 바람직하지 않게 됐다. 미국의 기업 활동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미국 엘리트들은 반공(소련)에서 반파시즘(독일)으로 태도를 바꾸었지만 소련의 승리를 바란 건 아니었다. 독일과 소련이 서로 최대한 많이 파괴하기를 바랐다. 소련 침공 이틀 후인 1941624일 당시 해리 트루먼 상원의원은 "독일이 이길 것 같으면 소련을 돕고, 소련이 이길 것 같으면 독일을 도와서 양측에서 최대한 많은 사상자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5일 미국 신문 <시카고 트리뷴>의 만평은 "나치와 소비에트라는 두 위험한 야수가 서로 최대한 파괴하는 것이 인류 문명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여하간 유럽의 전쟁 덕택으로 미국은 대공황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이제 영국과 소련은 미국 상품의 주요한 해외 시장이 될 터였다. 미국이 2차 대전에서 겉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자국 경제의 해외 팽창을 꾀한 데 대해 미국 역사가 윌리엄 애플만 윌리엄스는 "우리는 제국의 진실을 자유라는 수사로 포장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중국, 동남아 등 태평양 지역은 미국 상품의 수출 시장인 동시에 고무, 석유, 주석 등 값싼 원자재와 노동력의 공급지로 미국 경제에 긴요했다. 미국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륙 팽창을 도왔지만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미국은 문호 개방의 원칙에 따라 중국 진출에 대한 열강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에 대환 미국의 경제적 진출을 거부했다.

 

미국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일본은 미국이 중남미에 대한 일본의 경제 진출을 허용한다면 중국에 대해서도 똑같은 혜택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미국은 거부했다. 일본이 독점하고 있는 중국 시장에 대한 진출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독점해온 중남미에 대한 일본의 진출은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내 것은 나 혼자 먹고, 네 것은 나와 나눠 먹자'는 심보였다. 문호 개방 원칙의 기만성을 드러낸 것이다.

 

1941년 여름, 미국은 동남아에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 네덜란드와 함께 석유 수출 금지 등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를 발동했다. 이어 1126일에는 일본군의 중국 철수 등 10개 항을 요구했다. 핵심 전쟁 물자인 석유 금수와 중국 철수 요구는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자는 초대장이나 다름없었다. 미국 정부와 군은 이것이 전쟁을 초래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파월은 말한다. 전쟁 기간 동안 일부 미국 대기업이 히틀러와 경제 협력을 지속했던 반면 일본과는 전쟁을 불사한 것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독점적 지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경제적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112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을 기습했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독일을 상대로 한 유럽 전쟁에 뛰어들 명분은 없었다. 루스벨트는 194011'2차 대전 불참'을 공약으로 대통령 3선에 성공한 데다 미국 내 반전 여론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주만 기습 나흘 후인 1211, '고맙게도' 히틀러가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미국은 유럽 전쟁에도 참전할 수 있게 됐다.

 

히틀러는 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을까?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패배는 전쟁 말기 미국의 참전 때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일본의 대소 전쟁 참여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소련에 대한 전격전이 성공하지 못했고, 진주만 기습 이틀 전인 125일 소련군이 첫 반격에 나섰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히틀러의 초조함을 알 수 있다.

 

독일 역사가 한스 가츠케에 따르면 히틀러는 "독일이 일본의 대미 전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일본이 독일의 대소 전쟁에 참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일본이 지난 3000년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나라로 대미 전쟁에서도 이길 것으로 생각한 반면,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소식을 듣고 '이제 승기를 잡았다'며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국의 승리를 확신한 것이다.

 

'불행히도' 일본은 히틀러가 던진 미끼를 물지 않았다. 대소 전쟁에 나서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경제·군사력으로는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미국은 아시아, 유럽의 전쟁에 모두 참여하게 된다. 진정한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 역사가 스티븐 암브로스는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한(enter) 것이 아니라 끌려 들어갔다(pulled in)"고 말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전쟁 물자 공급으로 경제적 이득만을 취하려 했으나, 일본 옥죄기-진주만 기습-미일 전쟁-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2전선

1942년 내내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에 대해 유럽 서부에 제2전선을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으로 상륙해 서쪽에서 니치와 대적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소련 단독으로 나치를 대적하기가 힘에 부쳤기 때문에 서쪽에 제2전선을 열어 동부전선의 군사적 부담을 덜려는 것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동부전선에 260개 이상의 정예 사단을 배치했다. 서부에는 2급 수준의 59개 사단을 배치했을 뿐이다. 영국 역사가 앤드류 데이비스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소련군은 "독일 병력의 5분의 4, 최소한 4분의 3 이상을 대적했다." 그만큼 소련군의 군사적 부담이 컸다는 얘기다.

 

1942년 여름 미국과 영국은 상륙작전이 가능할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425, 루스벨트는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에게 1942년 안에 제2전선을 열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실제로 연합군이 제2전선을 연 것은 2년이 지난 1944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의해서였다. 왜 그랬을까?

 

처칠의 주장 때문이었다. 처칠은 제2전선을 여는 대신 북아프리카를 돌아 이탈리아로 진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소련 혼자 독일과 싸우게 놔두고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 등에서 영국의 전략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 관한 한 처칠이 선배라는 점에서 이 같은 처칠의 주장은 관철됐다.

 

미국과 영국은 대신 이른바 제3전선을 열었다. 미국과 영국 공군에 의한 독일 공습이었다. 목표는 공습을 통해 독일 산업을 마비시키고 독일 시민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별명이 '폭격기(Bomber) 해리스'로 전략 폭격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아서 해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전략 폭격의 위력을 시험했다. 그러나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이 소요된 제3전선은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1946년 미군이 발표한 <전략 폭격 조사> 보고서는 "폭격은 부정확했으며 독일의 산업 생산은 1944년 말까지 계속 증가"했고, "독일 국민의 사기를 꺾기는커녕 오히려 히틀려 아래 단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3전선에 의한 공습은 무고한 독일 시민 30만 명을 살해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미군 측 피해도 컸다. 4만 명이 전사하고, 비행기 6000대가 손실됐다. 유럽 전장 미군 전사자 10만 명의 40퍼센트가 공습 도중 발생한 것이다. 19437월 대낮 공습 때는 단 한 번의 작전에 비행기 100대가 파괴되고 승무원 1000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전략 폭격은 기대했던 성과를 결코 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 자원으로 제2전선을 여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게다가 제3전선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이 낭비되면서 제2전선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 결과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벌인 독일 점령 경쟁에서 뒤처지게 된다.

 

19421943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마침내 소련군은 독일군에 패배를 안긴다. 이 전투로 독일의 패배는 사실상 시간문제가 됐다. 이제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에 제2전선을 열어달라고 애걸할 필요가 없어졌다. 소련 단독으로 유럽 전체를 석권할 가능성마저 보였다.

 

영국 역사가 클라이브 폰팅에 따르면 2차 대전에서 미군과 영국군은 독일군의 10퍼센트와 대적했을 뿐이다. 전사, 부상, 포로 등 독일군의 인명 피해 1350만 명 중 1000만 명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독일군 전사자의 90퍼센트가 소련군에 의한 것이었다. 소련군 전사자 대비 미군 전사자의 비율은 53 1이었다. 태평양전쟁을 포함해 미군과 영국군의 2차 대전 전사자는 60만이었던 데 비해, 소련군 전사자는 1300만이나 됐다. 레닌그라드 전투의 전사자만 해도 미군과 영국군의 2차 대전 전사자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유럽 전장에서 전사한 미군은 10만 명이었는데, 소련군은 전쟁 막바지 베를린 점령을 위해서만 10만 명의 전사자를 냈다.

 

연합국의 승리가 보이기 시작한 1943522, 스탈린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부인 코민테른을 해체한다. 1943년 말 미국 주간지 <타임>은 스탈린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다. 스탈린이 코민테른을 해체함으로써 좌파의 위협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의구심을 덜어주었다면, <타임>은 스탈린을 2차 대전의 최고 영웅으로 치켜세워 이에 화답한 것이다. 이때가 미소 관계가 가장 좋았을 때였다. 이에 앞서 19431월 미국, 영국, 소련은 카사블랑카 회의를 통해 독일의 항복을 공동으로 받는다는 데 합의한다. 전후 처리를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국은 이때부터 자국의 전쟁 목표를 추구하면서 물밑 경쟁을 벌였다. 경쟁의 목표는 독일 수도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한 각국이 군사 점령한 국가의 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도 관심의 초점이었다. 카사블랑카 합의의 정신대로 미국, 영국, 소련 합의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 점령한 국가의 마음대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아가 19418월 루스벨트와 처칠이 발표한 대서양헌장에 명기된 '민족 자결'의 원칙이 지켜질 것인지도 곧 드러날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한 전후 처리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자기들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자국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 처리를 단독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 피점령국 국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대서양헌장이 약속한 '민족 자결'은 공수표였다. 그 첫 사례가 이탈리아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 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전투였다. 이미지는 2013년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영화 <스탈린그라드>의 한 장면. 아트픽처스스튜디오

 

연합국의 '민족 자결' 약속은 거짓이었다

1943년 여름,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시실리 섬을 거쳐 로마에 입성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점령한 미국과 영국의 이탈리아 처리는 피점령국 처리의 선례가 될 터였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참여를 배제한 것은 물론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세력을 무장 해제하고 국내 정치 참여를 철저히 막았다.

 

이탈리아에는 상당한 정도의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세력이 군사·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외국인 침략자에 대한 항전인 동시에 국내 보수 세력에 맞선 내전이기도 했다. 전통 엘리트, 즉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그리고 교황청 등은 1922년 무솔리니의 집권을 도왔고 그로부터 커다란 혜택을 입은 세력들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이들 보수 세력을 권력에서 몰아내려 했다.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반파시스트 세력과 협력하는 것을 일체 거부했다. 미국과 영국이 보기에 이들의 지향이 너무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반파시스트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왕정 폐지를 비롯해 사회, 정치, 경제 분야의 급진적 개혁을 원했다. 특히 처칠은 알프스 너머 유럽 대륙에서 급진적 개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반파시스트 세력을 소련의 볼셰비즘과 동일시했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요구를 이탈리아의 공산화로 본 것이다.

 

결국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는 무장 해제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해졌다. 이탈리아 국민의 소망과 기대, 반파시스트 세력의 열정과 능력은 전후 이탈리아 복구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교황청 등과 협력했다. 이들은 무솔리니에게 협력한 대가로 커다란 혜택을 입었던 세력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 이전 이탈리아의 구질서를 복원했다.

 

미국과 영국의 점령 이후 최초의 이탈리아 지도자는 무솔리니의 부역자였던 바돌리오 원수였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이라고 개탄했다. 무솔리니만 사라졌을 뿐, 과거의 억압적 구질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시실리 등의 마피아를 '반공의 보루'로 칭찬하면서 이들과 결탁했다. 이른바 마피아 작전(Operation Mafia)이 그것이다. 뉴욕의 전설적 갱 럭키 루치아노와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한통속이 돼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의 전복 공작 등을 추진했다. 미국 정보기관과 국제 범죄 조직이 마약 거래를 중심으로 비밀공작을 펼치는 것은 이후 현재까지 미국 대외 정책의 비밀스런 전통이 됐다. 미국은 카스트로 암살 시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전복 공작 등 의회 승인을 받을 수 없는 CIA의 불법적 반혁명 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국제 범죄 조직의 마약 거래 대금으로 충당했다.

 

미국과 영국은 점령된 이탈리아를 자신의 독점적 영역으로 간주해 점령 정책에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서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었다.

 

'점령국 마음대로, 해방자는 피점령국에 자신이 원하는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을 건설할 수 있다.'

 

유고 작가이자 공산당 고위 관리였던 밀로반 질라스에 따르면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전쟁은 과거의 전쟁들과 다르다. 영토를 장악한 세력이 자신이 원하는 사회체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의 군대가 장악한 지역에 자신의 체제를 도입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프랑스에서는 어땠는가? 미국과 영국은 19448월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이탈리아는 미국과 영국의 교전 상대국이었던 반면 프랑스는 어엿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드골 장군이 자유 프랑스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를 이탈리아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한편 프랑스 본국에는 나치에 부역한 페탱 원수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19443'레지스탕스 헌장'을 발표하면서 전후 프랑스의 급진적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페탱과 드골은 매국노와 애국자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보수적이었다. 반면 레지스탕스는 급진적이었다. 레지스탕스는 페탱을 경멸했고, 드골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며 보수적이라고 보았다. 레지스탕스 내에서 드골 추종자는 극소수였다.

 

전후 프랑스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서로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다. 2차 대전으로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을 잃고 작은 섬나라로 전락한 영국의 처칠은 전후 드골의 프랑스와 함께 미국과 소련에 맞설 수 있는 독자적 유럽 세력의 구축을 구상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드골이나 레지스탕스보다는 페탱과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다. 레지스탕스는 원천적으로 협력이 불가능한 상대였고, 드골은 처칠의 하수인(전후 프랑스가 미국보다는 영국에 기울 것을 우려)으로 보았던 것이다. 미국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19406)에도 비시 정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미국과 비시 정권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은 194111월 비시 정권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1차 대전으로 산산조각이 난 세계 경제를 다시 한 번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 고분고분하고 보수적인 인물이 프랑스 지도자로 적격이었다. 페탱을 선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드골의 집권을 막기 위해 드골을 마다가스카르 총독에 임명하자고 영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상륙 후 미국은 비시 정부가 임명한 현지 총독 프랑수아 다를랑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드골은 격노했고, 미국 내에서도 나치 부역자와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때마침 다를랑이 알지에에서 암살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드골파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결코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했다. 당시 미국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신의 일기에 드골에 대해 "잘난 체하는 데다 야망만 많은 속 좁은 인물"이라고 썼다.

 

그러나 드골은 첫째 다를랑과 같은 비시 정권 부역자가 아니었고, 둘째 레지스탕스 세력처럼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애국자인 동시에 보수파라는 점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프랑스 국민에게, 후자는 미국과 영국에 필요한 것이었다. 스팀슨은 "드골은 나쁘다. 하지만 그 외의 선택은 더 나쁘다"고 실토했다. 특히 프랑스 공산주의자와 좌파가 소련과 관계 강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를 차단해야만 했다. 드골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미국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프랑스를 좌파로부터 구해낼 누군가가 필요했다", "미국은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를 훨씬 더 싫어했다"고 말한다. 19441023, 미국은 드골을 프랑스 정부의 합법적 지도자로 인정했다.

 

연합국이 파리를 해방하기 수일 전, 레지스탕스는 자력으로 파리를 탈환하겠다는 목표 아래 무장 봉기했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다. 며칠만 기다리면 이루어졌을 파리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가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영국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드골을 지도자로 내세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파리를 장악한다면 전후 프랑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점에서 수도 장악은 정치적 영향력과 직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의 봉기는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드골의 집권에 대해 "단 한 번도 전투를 하지 않은 장군, 단 한 번도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정치인"인 드골이 전후 프랑스의 권력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드골이 레지스탕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상당한 정치적 개혁을 했지만, 그가 아닌 급진적 정부가 들어섰다면 레지스탕스 헌장에 제시된 더 급진적 개혁이 현실화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방 후 미국과 영국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해방자는 해방된 국민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대서양헌장의 민족 자결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프랑스의 피해는 그리스가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이탈리아 및 독일 파시스트에 대한 피어린 항쟁의 결과로 전후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처칠과 스탈린의 밀약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194410월 처칠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비밀 협상을 벌인다. 1944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그해 9월 라인강 도하를 위한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에 실패함으로써 베를린 점령을 놓고 소련과 벌이던 경쟁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처칠은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몸소 모스크바까지 날아간 것이다. 이 비밀 협상에서 양측은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은 소련의 세력권(소련이 90퍼센트), 그리스는 영국의 세력권(영국이 90퍼센트)으로 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50 50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합의한다.

 

이 비밀 합의에 따라 영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 우파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미국에 SOS를 쳤다. 이에 따라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바로 냉전의 공식적 기원으로 얘기되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다. 핵심은 국제 공산주의의 음모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게 된 그리스 국민을 위해 그리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스탈린은 처칠과 맺은 밀약을 '충실히' 지켜 그리스 내전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에게 패배했고 이후 그리스는 군부 독재 등 숱한 고난을 겪게 된다. 결국 그리스는 미국, 영국, 소련 등 강대국 간 흥정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의 고난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국제 문제에 개입한다는 미국의 주장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 미국과 영국이 1943년 여름부터 1944년 여름에 걸쳐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을 해방시키는(즉 자신의 영향권 안에 편입하는) 동안, 소련은 1944년 여름까지 자국 영토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소련은 1944년 가을에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 차지한 프랑스, 이탈리아와는 비교되지 않는, 보잘것없는 전리품이었다.

 

1945년이 되면서 미국·영국과 소련은 누가 먼저, 누가 더 많이 독일 영토를 점령하는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나아가 미국은 나치 독일과 개별 평화조약을 맺고 소련을 침공하겠다는 계획까지 추진하는 등 미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간다.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 2015.03.27.

 

2차 대전 연합군 최종 표적은 히틀러가 아니었다

<4> 자크 파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세 번째

소련군의 성공과 얄타 회담

 

19452월 초, 소련군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프랑크푸르트안데오데르까지 진출했다. 서쪽에서 진군해오던 미영 연합군은 라인강도 건너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발이 묶여 있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소련군이 독일 전역을 해방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194411,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유럽 대륙 전체가 소련 세력권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미영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 독일 처리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1943년 이탈리아, 1944년 프랑스 해방에서 드러났듯이, 그리고 스탈린이 지적했듯이 먼저 "영토를 장악한 세력이 자신이 원하는 사회체제를 도입"할 수 있으며 "누구든 자신의 군대가 장악한 지역에 자신의 체제를 도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을 향한 경쟁에서 소련에 한참 뒤처진 미국과 영국은 전후 처리 문제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미영의 대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협상을 통해 전후 독일 문제를 미국, 영국, 소련이 공동으로 처리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얄타 협약). 다른 하나는 미영의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탈린이 일방적 독주를 하지 못하도록 경고장을 보내는 것이었다(드레스덴 공습). 1945년이 되면서 전후 처리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미영과 소련의 치열한 암투가 시작된 것이다.

 

194466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영군은 독일군의 완강한 반격에 부딪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한다. 미영이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의 도움 덕택이었다. 622일 소련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 맹공을 가함으로써(바그라티온 작전) 미영의 군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소련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동부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9월경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해방한다. 이때까지 자국 영토에서 전투를 벌였던 소련은 이후 동유럽을 넘어 독일을 향해 진군한다.

 

한편 미영은 19449, 공중과 지상을 통한 라인강 도하(마켓가든 작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거침없이 진군하는 동안 미영은 라인강 서쪽에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게다가 19441219451월에는 독일의 폰 룬데스타트 원수의 아르덴 반격으로 미영군은 위기에 몰린다(영화 <발지 전투>). 1월 말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영은 소련군의 개입으로 간신히 패배를 모면한다. 미군의 긴급 구조 요청에 따라 소련군이 예정보다 1주일 빠른 112, 폴란드 공세에 나선 때문이었다.

 

19452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림반도의 휴양지인 얄타에 미국, 영국, 소련 정상이 모인 것은(얄타 회담) 이런 배경에서였다. 소련의 군사적 독주가 정치적 독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3국 공동 합의를 이끌어내자는 것이 미영의 목표였다.

 

이에 앞서 미국과 영국은 1944년 가을, 런던에서 소련과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협상을 벌였다. 미영은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을 미국, 영국, 소련 세 지역으로 분할 지배하자고 제의했다(나중에 프랑스 점령 지역이 추가돼 4개국 분할 점령이 됨). 소련의 독일 독식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영의 우려와 달리 스탈린은 이 제의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게다가 수도 베를린의 분할 지배에도 동의했다.

 

미국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한마디로 소련은 임박한 군사적 승리로 독일 전체를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영과의) 공동 지배를 받아들였다"고 지적한다.

 

베를린은 소련의 점령 지역이 될 동부 독일에 있기 때문에 소련이 굳이 분할 점령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이후 동독 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은 이른바 '자유의 전초기지'로 이후 동독과 소련의 골칫거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미영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나름대로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미영이 나치 독일과 힘을 합쳐 소련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스탈린은 1917년 러시아혁명 직후 혁명을 파괴하기 위한 서방의 무력 개입, 그리고 1930년대 나치에 대한 영불 유화정책의 목표가 소련 멸망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서방에 심어둔 스파이 등을 통해 미영의 속셈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독일과 미영의 합작은 스탈린에게 그야말로 악몽의 시나리오였다. 따라서 스탈린은 처칠이나 루스벨트에게 무력 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소련의 안보를 해치지 않는다면, 미영의 웬만한 요구는 다 받아들였다.

 

다른 하나는 전쟁 배상이었다. 19426월부터 2년 이상 자국 영토에서 피어린 전투를 벌였던 소련은 인구 3000만 명을 잃고 경제는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따라서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독일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따라서 얄타 회담에 임하는 스탈린의 입장은 소련의 안보와 전후 배상 문제만 보장된다면 다른 모든 것은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 자크 파월은 "전쟁 말까지도 소련의 관심은 생존", 소련이라는 "일국사회주의의 생존"이었으며 "1944년 런던 합의와 이를 추인한 얄타 협약은 (당시) 미영의 군사적 열세, 그리고 소련의 군사적 우세 속에서 독일에 대한 최소한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미영의 시도가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얄타 협약에 대한 서방측의 일반적인 평가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이른바 '얄타 밀약'이라는 비밀 협정을 통해 노회한 스탈린이 병약한 루스벨트를(412일 사망) 농락해 동유럽과 한반도 등에서 엄청난 양보를 받아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방의 평가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가? 파월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파월에 따르면 우선 얄타 회의를 간절히 원한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다. 회의 장소가 소련 영토인 얄타로 정해진 것도 당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스탈린은 협상이 필요 없었다. 19452월 초의  군사적 상황에서는 소련이 독일 전체를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협상 결과도 미영에 유리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는 회의가 끝난 후 "소련은 우리가 양보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양보했다"고 말했다. 미국 역사가 캐롤린 우즈 아이젠버그에 따르면 당시 미국 대표단은 소련의 합리적인 선택 덕분으로 미국과 인류가 "처음으로 평화의 위대한 승리를 얻었다""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전했다.

 

얄타 회담은 독일 문제와 관련해 1944년 런던 협정의 내용을 추인한 것이었다. 이는 미영에 매우 유리했는데, 더 넓고 경제적으로 더 발전된 독일의 서쪽 지역(동독의 약 3)을 미영이 갖게 됐기 때문이다.

 

얄타 회담에서는 전후 배상 문제도 합의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독일의 배상 금액을 대략 200억 달러로 산정하고 그중 절반을 소련 몫으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200억 달러라는 금액은 많은 건가? 독일 역사가 빌프리트 로스는 실제로는 "매우 약소한 금액"이라고 말한다. 1947년 추산에 따르면 소련의 전쟁 피해 금액은 1280억 달러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전후 미영과 소련이 독일 처리 문제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소련이 실제로 동독과 서독에서 받아낸 배상금은 고작 61억 달러에 불과했다.

 

스탈린에게 전후 배상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 분할 점령에 동의한 것도 전후 배상 문제에서 미영의 협력을 기대한 때문이었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대일 전쟁에 참전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당시 헨리 모겐소 미국 재무장관은 독일의 '유목국가화'를 주장했다. 독일의 모든 산업 역량을 제거해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미국의 기업가나 주요 정책 결정자들의 생각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독일의 경제적 재건을 원했다. 전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산업화된 독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독일과 무슨 교역을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또한 독일의 유목국가화에 따른 가난과 혼란은 공산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나아가 미국 기업의 독일 내 자회사들의 운명도 걸린 문제였다. 독일이 유목국가가 된다면 독일 자회사들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목국가화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GM의 알프레드 슬로언 회장이었다. 소련으로서도 유목국가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독일이 부유해져야 전쟁 배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목국가화 계획은 포기됐고, 모겐소 장관은 19454월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교체됐다(715).

 

얄타 협약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동유럽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파월에 따르면 동유럽의 공산화는 소련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얄타 회의 당시 소련의 요구는 소련과 폴란드의 기존 국경을 서쪽으로 물려 폴란드 동부의 이른바 '커존(Curzon) 라인'으로 하되, 폴란드-독일 국경을 독일 동부의 오데르 나이제강으로 해 폴란드의 영토 손실을 보전해준다는 것이었다. 커존 라인은 러시아혁명 직후 영국 외무장관 커존 경이 제안한 것으로, 1920년 폴란드는 신생 볼셰비키 정부와의 전쟁을 통해 커존 라인 동쪽까지 영토를 확장한 바 있었다. 스탈린의 요구는 과거 폴란드에게 빼앗겼던 소련의 서쪽 영토를 되찾고 폴란드에게는 독일 영토 일부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1920년 폴란드와의 전쟁, 1941년 폴란드를 통한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등 과거의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폴란드 등 동유럽에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는 정권이 수립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같은 스탈린의 요구는 루스벨트나 처칠도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파월은 지적한다.

 

반면 미영은 동유럽에 공산체제가 들어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영 측의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미영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얄타 회의에서 미영이 동유럽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소련에 허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파월의 설명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동유럽에는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정부가 들어섰다. 얄타 협약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뭔가? 첫째, 트루먼의 핵 외교 때문이다. 포츠담 회담이 진행되던 19457, 미국의 첫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트루먼은 소련에 대해 고압적 태도를 취하면서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일방적 양보를 요구했다. 둘째, 폴란드 망명정부(런던)의 비현실적 반소 태도 때문이다. 주로 귀족 출신인 이들은 극단적 반소, 반공 태도를 취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했던 커존 라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의 태도는 곧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을 의미했다. 결국 스탈린은 공산 세력(루블린 폴즈)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자신의 안보에 위협만 되지 않는다면, 인접 국가에 비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핀란드, 오스트리아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나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는 미국과 폴란드 망명정부의 고압적이며 경직된 태도가 이를 가로막았다.

 

저자 파월은 "미영은 소련이 자유선거를 치르지 않고 폴란드에 공산 괴뢰 정권을 세웠다고 비난하지만 그리스, 터키, 중국에 대한 미영의 정책은 어떠했나?"라고 반문한다. 미영은 자신의 세력권인 이들 지역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를 묻기보다는 무력에 의해 자신의 체제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드레스덴 공습 : 스탈린에 대한 무력시위

얄타 회담 직후인 1945213, 미영의 폭격기 800여 대가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에 대해 대규모 공습을 단행했다. 사흘 밤낮 동안 소이탄을 비롯해 75만 발의 폭탄이 투하됐고 이로 인해 202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드레스덴 공습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공격보다 더 잔인한 공격이었다. 역사상 최악의 공습이라는 평가도 있다. 미군 병사로 참전했다 독일군에 잡혀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감금돼 있던 미국 작가 커트 보네거트(19222007)는 후에 이 공습을 소재로 <5도살장>이라는 작품을 써냈다. 한마디로 인간 도살이었다는 얘기다.

 

영국 언론인 겸 역사학자 필립 나이틀리는 당시 드레스덴 공습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폭탄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인공 폭풍은 갈수록 사나워졌다. 섭씨 1000도가 넘는 폭심 속으로 사람은 물론 모든 것들이 시속 160킬로미터의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화염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사람들은 수천 명씩 태워지고 질식됐다. 다음 날 미국 전투기들이 드레스덴에 나타나, 살기 위해 엘베강둑을 따라 뛰어가는 생존자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독일의 플로렌스'로 불리는 문화 도시, 이렇다 할 군수공장도 없고 전략적 요충지도 아닌 드레스덴, 게다가 독일의 패망이 사실상 기정사실화된 전쟁 말기에 이토록 잔인한 공습을 퍼부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스탈린에 대한 처칠과 루스벨트의 무력시위였다. 미국 역사가 마이클 셰리는 "공격할 만한 군수공장도 거의 없는" 드레스덴에 대한 미영의 과도한 공습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폭격으로 인한 불길은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당시 소련군은 드레스덴에서 100킬로미터 이내에 있었으며, 드레스덴을 지날 예정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밤하늘의 무시무시한 화염을 목격했을 것이다. 또한 미영은 나중에라도 소련군이 폭격의 참상을 현장에서 직접 보길 원했던 것이 분명하다.

 

전쟁 말기 미군이 소련군보다 먼저 드레스덴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처칠은 한사코 이를 만류했다. 독일 땅을 한 치라도 더 점령하기 위해 미영과 소련이 경쟁하는 판국에 왜 처칠은 미군의 드레스덴 입성을 말린 것인가? 소련이 먼저 드레스덴의 참상을 보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이 드레스덴에 입성한 것은 58일이었다.)

 

드레스덴 공습이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라는 점은 드레스덴 공습이 당초 얄타 회담 개최일인 24일로 예정됐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기상 악화로 213일로 연기됐을 뿐이다. 미영은 얄타 회담 개최일에 맞춰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스탈린의 양보를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미영은 드레스덴 공습이 소련의 진군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련은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다. 나아가 2차 대전 내내 미영이 소련을 도운 적은 없다. 설사 소련이 협조를 요청했다 해도 미영은 결코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파월은 지적한다.

 

이어 파월은 "드레스덴 공습은 실수가 아니었다.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당시 공습에 참여했던 캐나다 출신 승무원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폭격의 목표가 무엇이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당시 소련군은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고 미영은 이런 소련군에게 한 가지 경고를 하려 했다. '우리 육군도 대단하지만, 공군력은 훨씬 더 막강하거든. 그러니까 까불지 마. 안 그러면 우리 공군이 소련 도시들에 어떤 피해를 줄 수 있을지를 보여주지.' 이것이 처칠과 그 일당들의 목표했다. 계산된 학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독일 공습을 주도했던 아서 해리스는 자서전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에서 드레스덴 공습은 "나보다 훨씬 고위층에서" 결정됐을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전략 폭격의 황제(czar)로 불리는 해리스보다 훨씬 고위층이라면 처칠이 결정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처칠이 드레스덴 폭격을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는 것보다는 스탈린을 겁주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역사가 알렉산더 매키는 "처칠은 드레스덴의 밤하늘에 (소련에 대한) 경고장을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 "나치를 작살냄으로써 소련 공산주의자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또한 영국 공군의 한 기록도 이러한 의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드레스덴 공습은 "(독일)을 타격하는 것 외에 소련군이 드레스덴에 도착했을 때 우리 공군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공군 참모차장 데이비드 쉴레터 장군은 얄타 회의 1주일 전(129)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공군력은 전쟁이 끝난 후 협상 테이블에서 최고의 카드가 될 것이다. 이번 드레스덴 공습 작전은 우리의 협상력을 말할 수 없이 크게 높여줄 것이다. 또는 러시아로 하여금 자신의 힘이 얼마나 약한가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드레스덴 공습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미영의 경고장이었다. 이를 위해 30만 가까운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야 했다. 독일의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 그리고 동유럽의 수많은 난민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냉전 기간 동안 서방에서는 소련이 2차 대전을 통해 유럽 전체를 정복하려 했으나 미영이 이를 막았다는 얘기가 통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소련은 나치의 침공에서 그야말로 간신히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소련군과 시민들의 초인적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쟁 말기까지도 소련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의 생존이었다. 과연 이런 나라가 유럽 정복을 꿈꿀 수 있었을까?

 

2차 대전에 의한 소련 희생자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3000만 명에 이른다. 전쟁 이전 소련 인구의 15퍼센트가 희생됐다. 또한 국토의 대부분이 파괴됐다. 이런 상태에서 소련이 또 다른 (정복)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을 공격할 엄두를 낼 수 있을까? 스탈린은 미치광이가 아니다. 소련군은, 엄청난 공군력에 핵무기까지 가진 미영의 군사력에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아가 미영과 대결하기보다는 양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미영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 낫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미국 자신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실질적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45년 초 미국 합참 보고서는 소련은 "영국 및 미국과의 갈등을 피해야만 할" 엄청나게 많은 이유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태에서 1945년에 소련이 전 유럽을 석권하려 했다는 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공격하는 연합군(영국)의 랭카스터 폭격기. 위키미디어커먼스

 

독일 옵션 : '나치와 함께 소련을 쳐부수자'

19452월까지 소련에 유리했던 유럽의 전황에 3월부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미영 연합군의 동진 속도가 갑작스럽게 빨라진 것이다. 37일 미군이 코블렌츠 부근의 레마겐에서 라인강을 넘었고, 323일에는 영국군이 북쪽 베젤에서 라인강을 돌파했다. 종군 특파원 할 보일이 "이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군"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후 미영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거침없이 동쪽으로 진군했다. 서부전선 독일군의 저항은 '봄날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역사가 캐롤린 우즈 아이젠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3월 말 현재, 서부전선에서는 30개 사단 미만의 독일 병력이 미영을 대적한 반면 동부전선에서는 150개 사단 이상의 독일군이 소련에 저항하고 있었다. 이로써 미영 연합군이 소련군보다 영토 점령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할 즈음(412), 미영과 소련은 각각 서쪽과 동쪽에서 같은 거리를 두고 베를린에 다가가고 있었다."

 

3월 초까지만 해도 소련군이 북유럽의 덴마크까지 해방시켜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으나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저항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영국군이 먼저 발틱해를 따라 뤼벡 부근까지 진출했다. 한편 남쪽에서 미군은 체코 프라하까지 진군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신속한 진군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소련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적개심을 잘 알고 있던 나치 독일이 미영과의 단독 강화를 추진한 때문이었다. 즉 서부전선의 전쟁을 끝내고 나치와 미영이 힘을 합쳐 소련을 치자는 것이었다. 전쟁 말기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내놓은 이러한 아이디어는 '괴벨스 시나리오', 또는 '독일 옵션'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때부터 OSS(전략첩보국, CIA의 전신) 등 미국 정부 일각에서 '독일 옵션'이 추진된다.

 

독일 역사가 유르겐 브룬은 OSS의 독일 옵션 추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비밀 조직은 미국 기업의 최고경영자, 월스트리트의 금융가와 변호사, 과학자, 군 고위 장성, 정치가, 그리고 이른바 '국방 전문가(defense intellectual)들의 집합체다. 확실히 OSS는 미국의 지배 계층을 대표하는 조직이다. () OSS는 한편으로 나치즘 격퇴를 추진하면서도 동시에 소련의 '소멸', 또는 전후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OSS를 이끄는 기업가, (존 포스터 덜레스와 같은) 변호사, 그리고 정치인들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친파시스트, 반공산주의 성향을 분명히 드러냈으며 전쟁 기간 동안에도 "존경할 만한" 독일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은 군사 쿠데타를 통해 히틀러를 제거하고 신망 받는 군인을 지도자로 앉힌 다음, 소련 정벌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4720일 히틀러 제거를 위한 군사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많은 반히틀러 인사가 제거된 탓에 적임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45430일 히틀러가 권총 자살한 후 미영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됐다. 후계자로 임명된 되니츠 제독은 열혈 나치 당원이 아니라 비교적 신망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독일판 바돌리오 정부(무솔리니 없는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없는 나치 정부의 수립)의 가능성이 보였던 것이다. 영국 몽고메리 원수는 전쟁 말기, 처칠로부터 소련군과의 전투에 대비해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전투 역량을 보존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195411). 실제로 포로로 잡힌 독일군은 군복과 무기의 소지가 허용됐으며 독일 항복(58) 후인 513일에는 독일군 장교 포로가 자신의 무기로 탈영하려던 부하 2명을 즉결 처형하기도 했다. 또 히틀러의 후계자로 임명된 되니츠 제독은 취임 라디오 연설에서 향후 독일은 소련군과 전투를 계속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되니츠는 자신이 미영 연합군의 독일측 파트너로서 소련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되니츠 제독은 523일 연랍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명령에 의해 체포된다.

 

또한 미영은 포로로 잡힌 독일군 장교들에게 소련군과의 전투 경험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러시아 삼림과 늪지대에서 치른 전투', '최북단 극한 지대에서 치른 전투' 등의 보고서가 제출됐다.

 

패튼을 비롯한 주요한 미군 지도자들도 소련과의 전쟁을 원했다. 패튼 장군은 아이젠하워 최고사령관의 직속 부하인 조셉 맥나니 장군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조만간 소련군과 싸워야 할 것이오. ()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소? 우리 미군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아 전투에 지친 러시아 놈들을 3개월이면 쫓아버릴 수 있을 텐데. 독일군을 무장시켜 우리 편에 합류시킨다면 소련군 깨부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요. 독일 사람들은 러시아 놈들을 미워하거든. 내게 열흘만 준다면 저것들과의 전쟁의 빌미를 만들어 내겠소. 그것도 소련 놈들 책임인 것처럼. 그렇게 되면 완전히 정당하게 저놈들을 공격할 수 있을 것 아니오."

 

나치 독일과 합세해 소련을 치겠다는 것은 패튼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미국 역사가 러셀 부하이트와 윌리엄 크리스토퍼 하멜에 따르면 미국의 많은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1945년에 (소련에 대한) 예방전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은 미국이 "잘못된 적"과 싸우고 있다고 개탄했다. 태프트 상원의원은 "공산주의의 승리가 파시즘의 승리보다 미국에 훨씬 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군사 엘리트를 길러내는 웨스트포인트의 고위 장성들은 "유태인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잘못된 적을 골랐다며 "우리는 히틀러가 아니라 빨갱이들과 싸웠어야 했다"고 불평했다.

 

이에 따라 독일군의 미영군에 대한(즉 소련을 배제한) 개별 항복 협상이 비밀리에 벌어졌다. 19453, 중립국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OSS 요원 알렌 덜레스와 나치 친위대(SS)의 악명 높은 칼 볼프 장군 간에 협상이 있었다. 볼프는 동부전선에서 소련인 30만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1급 전범이었다.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이 협상(작전명 Operation Sunrise)에서 양측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1943년 여름 무솔리니가 패망한 후 미영군에) 저항 중인 독일군의 항복을 논의했다. 미국은 두 가지 이득을 노렸는데, 하나는 항복한 독일군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공산주의 빨치산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북동쪽 유고슬라비아에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로 세력을 넓혀오던 티토 휘하의 공산 빨치산을 격퇴하는 것이었다.

 

베른 협상을 알아챈 소련은 협상 참여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미영과 소련은 19431월 카사블랑카 회담 이래 독일의 항복을 공동으로 받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는 합의 위반이었다. 스탈린은 거칠게 항의했고, 소련과의 갈등을 우려한 루스벨트는 조용히 협상을 접었다.

 

19455월 초부터 미군은 독일군의 개별 항복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당시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던 수십만 명의 독일군이 (소련군이 아닌) 미군에게 항복했다. 이는 당시 동부전선에서 싸우던 독일군의 절반에 해당된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힘을 합쳐 소련을 치겠다는 미국 정치, 경제, 군사 엘리트들의 계획은 일반 미국인, 특히 전투에 참가한 미군들의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19453월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55퍼센트가 전쟁 이후에도 소련과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군 병사들도 소련군에 대한 우호와 존경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소련군이 동부전선에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다는 것, 독일군을 격퇴한 진짜 주역은 소련군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소련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큰 희생과 고난을 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들을 좋아했다. 만일 우리가 소련군을 만나게 된다면 서슴없이 그들에게 키스하자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우리 병사들 사이에서 단 한마디라도 소련에 대한 험담을 들은 적이 없다. 만일 우리가 소련군과 싸운다면 우리가 질 것이다. 그게 현실적 판단이다. 전쟁 말기 나는 패튼 휘하에 있었는데, 패튼은 우리가 모스크바까지 진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소련군은 우리를 박살낼 것이었다. () 나는 우리 미군이 소련군과 맞서 싸울 만큼 깡다구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실상에 대해서 알 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5월 베를린에 입성해 깃발을 내건 소련군. 멀리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위키미디어커먼스

 

트루먼의 핵 외교

19454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트루먼 부통령이 그 뒤를 잇는다. 루스벨트는 소련에 대해 협상과 강압, 즉 당근과 채찍을 병행한 반면 트루먼은 강압 외교로 일관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지도자의 개인적 성향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1945년 봄 이후 전쟁을 둘러싼 상황이 미국에 크게 유리하게 바뀐 때문이었다.

 

우선 3월 이후 독일 점령을 위한 미군의 진군 속도가 소련을 크게 앞질렀다. 앞에 말한 대로 나치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미군에 대한 저항을 사실상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716일 미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루스벨트가 소련에 유화적 태도를 보였던 것은 첫째 19452월까지 소련군의 독일 진군이 미국보다 훨씬 앞섰기 때문이었고, 둘째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 소련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단독으로 수행한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은 일본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유럽 전장에서보다 훨씬 많은 인명 손실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루스벨트는 소련의 요구를 일정하게 들어주는 유화적 태도를 견지했다. 하지만 루스벨트 사후 상황은 급변한다. 독일 점령을 위한 소련과의 경쟁에서 미군이 갑자기 앞서게 됐고 7월에는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한마디로 미국은 더 이상 소련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트루먼의 소련에 대한 강압 외교의 배경이 된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5425일 원폭 개발 비밀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최초 보고를 받는다. 미국 역사학자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에 따르면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원폭에 대해 "만능의 환상(Fantasy of Omnipotence)"을 품었다고 한다. 즉 핵폭탄만 있으면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를 소련에 강요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전후 처리를 위한 포츠담 회담(71782)이 독일 패망(58) 후 두 달 이상이 지난 다음에야 열린 데는 미국이 원폭 개발의 성공을 기다린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포츠담 회담이 열린 직후 트루먼은 원폭 실험의 성공 소식을 듣는다. 이제 미국은 소련에 어떤 양보도 할 필요가 없다고 트루먼은 생각했다.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개발 소식을 알리면서 소련의 일방적 양보를 요구했다. 트루먼의 핵 외교(공갈)는 독일 및 동유럽에서 소련의 일방적 철수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의 요구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전체가 공산화되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파월은 "트루먼의 핵 외교로 미국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핀란드의 사례는 스탈린과의 협상이 불가능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핀란드의 경우, 협상을 통해 핀란드가 소련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대가로 자본주의 체제 및 비공산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반면 핵무기를 앞세워 소련의 일방적 철수를 요구했던 동유럽에서는 미국의 목표가 달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파월은 "트루먼의 핵 외교가 없었다면 유럽의 분단(철의 장막)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핵무기를 앞세운 미국의 강압 외교가 동유럽의 공산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전후 독일의 운명 : 분단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전후 독일을 점령한 미국(그리고 영국 및 프랑스)과 소련의 정책 목표는 서로 달랐다. 소련은 독일이 통일되고 민주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또한 통일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확보하고, 소련에 대한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스탈린은 이것이 소련에 가장 유리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소련이 전후 내내 독일의 분단을 반대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단일한 독일',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 확보', '소련에 대한 독일의 안보 위협 제거'를 원했다. 스탈린은 세계를 대상으로 한 공산혁명(스탈린의 정적이었으며 그에 의해 암살된 트로츠키의 노선)보다는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서방 지도자들에게 "독일에게 공산주의란 암퇘지에게 안장을 올리는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반면 미국의 정책은 경제적 요소에 의해 결정됐다. 1차 대전 이후 갈가리 찢긴 세계 경제를 미국 주도 하의 자본주의 질서 아래 통합하는 것이었다. 또한 과잉 생산에 의한 미국의 경제 위기를 막기 위해 막대한 미국 생산품을 소비할 해외 시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소련에 대해 전쟁 배상을 한다는 것은 독일 내 미국 기업의 이윤이 소련 공산주의 건설에 이용됨을 의미한다. 독일의 전쟁 배상은 독일 내 미국 투자가들에게는 손해였던 것이다. 파월은 "트루먼 등 미국의 지도자들은 (나치 격퇴에 가장 많은 희생을 했던) 소련의 정당한 요구보다는 미국 기업들의 요구에 훨씬 더 민감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독일 분단에 이르는 모든 주요한 과정의 결정은 워싱턴이 주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통일 독일보다는 분단된 독일이 미국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통일 독일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 또는 독립적 노선을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미국은 소련의 경제적 재건을 원치 않았다. 즉 독일의 대소련 전쟁 배상을 최대한 막으려 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경제적으로 앞선 독일의 서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의 점령 지역은 독일 영토의 4분의 3에 이르렀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과 함께 단일한 독일을 건설하는 것보다는 경제적으로 앞선 서부 독일을 자신의 확실한 지배 아래 두는 것을 원했다.

 

19465월 서독의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을 무기한 유보한 미국 군정장관 클레이 장군의 결정은 독일 분단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얄타 회담 때 미국, 영국, 소련 3국 정상들이 합의한 소련에 대한 전쟁 배상마저 거부한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소련 경제의 재건을 방해한 것이다.

 

얄타 회담 당시 미국, 영국, 소련은 소련의 전쟁 피해를 200억 달러로 산정하고 그중 절반인 100억 달러를 독일로부터 받아낸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의 실제 전쟁 피해는 무려 1280억 달러였다. 얄타 회담 당시 미국 국무부는 전후 독일은 소련에 매년 65억 달러씩 전쟁 배상금을 갚아야 할 것으로 추산했다. 또한 한 연구에 따르면 1945년의 소련 경제는 1941년 대비 20퍼센트 축소됐고, GNP 25년치에 해당되는 전쟁 피해를 봤다(영국 역사가 클라이브 폰팅).

 

그러나 소련이 실제로 동서독으로부터 받아낸 전쟁 배상금은 51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것도 서독에서는 고작 6억 달러, 동독으로부터는 45억 달러를 받아냈을 뿐이었다. 인구나 영토 규모에서 서독이 동독의 3배나 되는 데다 경제적으로도 훨씬 앞서 있었다는 점에서 전쟁 배상의 부담을 사실상 동독 홀로 짊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미국의 고의적 방해에 의해 전쟁 배상금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소련은 자력으로 경제 재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배상 부담의 대부분을 거의 홀로 감당해야 했던 동독도 커다란 경제적 곤경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국은 이른바 '지적 도둑질(intellectual plunder)'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자신의 점령 지역에서 열혈 나치 당원이자 V-2 등 로켓 기술자였던 베르너 폰 브라운 등 우수한 독일 과학기술자들을 발굴해 미국으로 보내는 한편 독일 기업들의 온갖 특허 기술들을 빼돌림으로써 전후 미국의 눈부신 기술 및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브라운은 이후 미국 우주 개발의 아버지가 된다.

 

파월은 "독일의 분단은, 전쟁으로 막대한 이윤을 남긴 반면 전후 평화 정착으로 큰 위협을 받게 된 미국 자본주의를 살찌우고 새로운 활력을 준 반면,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겪고 평화 분담금을 기대했던 소련은 빈털터리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독일의 분단은 군사적으로도 미국에 유리했다. 1954년 아데나워 총리가 재무장한 서독을 나토에 가입시킴으로써 서독을 서방 패권 하의 반소 진영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완료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서독을 미국 주도 하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아래 편입시키는 한편 대소 군사기지로 만들 수 있었다. 반면 소련은 1953년까지 동독을 해체하고 단일한 중립국가 독일의 건설을 끈질기게 제안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독일의 분단으로 말미암아 소련은 안보 확보와 경제 재건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을 박탈당한 것이다.

 

1차 대전은 19181111일 오전 11시를 기해 전투가 종료됐고, 1919628일 체결된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의해 법적으로 마무리됐다. 2차 대전 가운데 미국과 일본 간의 태평양전쟁은 1951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소련과 중공은 불참)에 의해 법적 마무리가 지어졌다. 또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와도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그러나 대나치 전쟁을 마무리 짓는 평화조약은 전후 45년이 지난 1990912일 모스크바에서 2+4(동서독+미영불소) 회담에서 체결됐다. 그동안 승전국 간에 독일의 운명에 대해 합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년 후 소련은 해체된다. 이는 소련의 멸망이야말로 미국이 2차 대전을 통해 이루려 했던 궁극적 전쟁 목표였음을 말해준다.

194558일 베를린의 소련군 사령부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독일군 원수 빌헬름 카이텔. 위키미디어커먼스

 

1945년 이후 : 좋은 전쟁에서 영구 전쟁으로

파월은 "냉전은, 미국 지도자들이 핵무기로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때에 시작됐다"고 말한다. 19457월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핵 공갈을 가한 때에 사실상 냉전은 시작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19458월 일본에 대한 미국의 핵 공격은 사실상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였으며 이로써 미소 간의 군사·정치적 대결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86일과 9,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해 인류 최초의 핵 공격을 단행한다.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핵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당초 예상보다 일찍 종식됐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미국 정부가 작성한 '미국 전략 폭격 조사' 보고서는 "원폭 공격이 없었어도, 소련의 참전이 없었어도, 그리고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이 없었더라도 일본은 19451231일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 분명"했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이로 미루어 미국의 핵 공격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한 것보다는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강하다고 말한다.

 

사실 미국에게 전후 소련과의 동맹보다는 소련과의 적대가 훨씬 더 유리했다. 첫째, 좌파 등 미국 내부의 적을 없애는 데, 둘째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정당화하는 데 유용한 빌미가 됐기 때문이었다.

 

역사가 로버트 그리피스에 따르면, 전후 미국에서 복지국가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파워엘리트가 사회 개혁의 압력을 회피할 수 있는 좋은 빌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소련과의) 냉전이었다. 미국의 대기업 경영자들은 자유기업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경제 체제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회주의 경향'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파월은 "전쟁 기간 소련은 동맹으로서 미국에 유용했고, 전후에는 적으로서 유용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미국은 새로운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 파워엘리트의 입장에서 냉전은 완벽하게 좋은 것이었다. 첫째, 완벽한 적과 싸우기 때문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웨스트포인트의 장군들이 말했듯이 2차 대전은 "잘못된 적과의 싸움"이었고 "미국은 빨갱이들과 싸워야 했다." 2차 대전은 미국 파워엘리트가 원했던 것도, 주도했던 것도 아니었다. "반면 냉전은 미국 제도권이 매우 원했던 것이며 주도한" 전쟁이었다.

 

둘째, 소련이라는 새로운 적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비 지출을 정당화함으로써 전시의 경기 호황을 이어나갈 수 있게 했다. 또한 냉전은 사실상 소련의 전후 복구에 대한 방해 공작(사보타지)이기도 했다. 미국은 소련을 미국과의 끝없는 군비 경쟁에 끌어들임으로써 미국 경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했던 소련 경제를 파멸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냉전은 소련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의적 군비경쟁"이라는 독일 작가 위르겐 브룬의 지적은 정확한 것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실험은 시작부터 끝까지 대규모 군사 개입 등 서방 외부세력의 조직적 방해에 시달렸다. 외부 개입의 궁극적 목적은 소련의 완전한 파괴였다. 그리고 결국 소련은 미국과의 끝없는 군비 경쟁 끝에 스스로 무너졌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의 평화공존은 불가능했을까? 실제로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닉슨 등은 소련과의 평화공존을 추구했으나 국내 강경파의 반대와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파월은 경제적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 현재의 미중 관계를 보면 미소의 평화공존도 결코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윌슨 대통령은 1차 대전에 대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윌슨의 이 같은 주장은 실현되지 못했다. (2차 대전이라는) 더 큰 전쟁이 이어졌고, 민주주의는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파월은 냉전에 대해 "자본주의의 모든 대안을 끝장내기 위한 전쟁", "자본주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파월은 이어 냉전의 승리자는 미국이 아니라 펜타곤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펜타곤 시스템'이란 가상의 외적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끝없는 군비 확장을 통해 일부 전쟁 세력이 이득을 보고 대다수 국민이 피해를 보는 체제를 말한다. 있지도 않을 전쟁을 위해 "대중이 돈을 내고 극소수가 이익을 보는" 체제이다. 2차 대전에 이어 냉전이 계속되면서 미국에서는 펜타곤 시스템이 사회를 장악하게 된다. 흔히 2차 대전을 민주주의의 승리로 얘기하지만 이후 세계사의 흐름은  여전히 '(가상의) 전쟁 공포'가 사회를 억누르고 있다. 소수의 전쟁 세력이 다수의 민중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저명한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지난 1월 초 보스턴에서 열린 '평화와 안전을 위한 경제학자들' 모임의 올해 주제는 '2차 냉전의 예방'이었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기조연설에서 "절박한 의료, 교육, 복지 서비스를 고갈시키면서 '상상된 위험들'을 경계하기 위해 수천억 달러를 쏟아 붓는 일의 사악함"을 질타했다. 그가 염두에 둔 주된 상상된 위험은 러시아 팽창주의였다.

 

스키델스키에 따르면, 냉전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조지 캐넌은 죽음을 몇 년 앞두고는 냉전이 지속된 이유가 서방이 '무조건 항복'에 버금가는 것을 얻을 때까지 소련과의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묻는다. 1952년과 1954년 소련이 독일의 중립을 전제로 독일 통일을 용인했고, 1954년에는 모든 체제에 열린 보편적 유럽집단안보조약을 제안했으며, 1955년에는 흐루쇼프가 나토 가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 몇 명인가? (소련 주도의) 바르샤바조약이 체결된 1955년은, 나토 창립 6년 후 이 모든 제안들이 거절된 직후였다.

 

스키델스키는 또 질문한다. 고르바초프가 나토를 독일 밖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찬성했고, 나토와 바르샤바조약을 대체할 새로운 대서양-유럽 집단안보체제를 제안했다는 사실, 그리고 2001년 푸틴이 러시아의 나토 가입을 원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고려대 고세훈 교수, <다산포럼> 741201523)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 2015.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