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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이안 앵거스 -기후정의 外

by 이성근 2014. 1. 11.

 

 

 

 

이안 앵거스의 <기후 정의>

 

생태사회주의는 사회정의와 생태적 균형이라는 비금전적 가치에 기반하는 다른 사회에 뿌리를 둔다. 지구의 평형과 한계를 무시하는 자본주의적인 ‘시장 생태주의’와 생산력주의적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한다. 사회주의로 이르는 길과 목표를 생태적이고 민주적인 틀 속에서 재정의한다 --- 본문 중에서

 

서평: 녹색당은 단지 협소한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반자본주의적이지 않다. 우리가 아는 한 자본주의는, 어떻게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더 많은 생산과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좀 더 안정적인 경제를 향해 나가는 것과 공존할 수 없다."

 

위의 인용문은 잉글랜드-웨일스 녹색당 대표 캐롤라인 루카스가 <가디언>과의 대담에서 말한 것이다(2011년 9월 9일). 녹색당과 녹색 운동이 왜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간명하게 표현해 준다.

 

이제 우리는 '환경'과 '녹색' 담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국제회의, 정상 회담, 정부 발표, 심지어는 아파트와 화장품 광고에까지 '환경'과 '녹색'이 등장한다. 참 이상한 일은 그러면 그럴수록 애초에 '환경'과 '녹색'이 담고 있었던 문명 위기와 생존의 문제는 점점 희석되어 간다는 것이다. 한편에서 과학자들이 내놓는 시나리오는 재앙을 넘어 이번 세기 안에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을 정도의 공포다.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은 제3세계 인민들에게 이러한 재앙은 이미 현재형임을 보여준다. 원인은 분명하다. 소위 선진국의 낭비적이고 과도한 생산과 소비이며,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가 그것이다.

 

나는 분명 이제 많은 사람들이 환경 위기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 변화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수많은 종의 멸종에 대한 정보가 없다고 하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기후 패턴, 폭염과 한파, 거기다가 핵 위협까지, 환경 위기는 이제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해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과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는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을 어렵게 한다. 물론 합리를 가장한 무수히 많은 대응책들이 제시된다. <기후 정의>(김현우·이정필·이진우 옮김, 이매진 펴냄)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듯이 탄소 배출권 시장, 청정 에너지 개발 체제, 탄소 포집, 바이오 연료 등.

 

 

 

▲ <기후 정의>(이안 앵거스 엮음, 김현우·이정필·이진우 옮김, 이매진 펴냄)

 

하지만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기후 변화와 환경 위기라면 이러한 대응은 합리적이지 않다. 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은 소위 주류 학자와 정치인이 선호하는 아주 간단한 경험적 증거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기후 변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온실 기체 배출 감축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

 

기후 변화의 양상이 이미 걷잡을 없는 단계에 이르고 있고 지금 당장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미 오래전에 대안적인 조치들이 논의되고 추진되었어야 한다. 도대체 왜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극히 간단한 이러한 생각이 현실에서는 부정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기후 변화의 환경 위기를 나약한 인간으로서 경험한다. 홍수, 가뭄, 기아, 폭염, 한파 등. 하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특수한 사회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모두 소비자이며 투자자이며 자본가들인 것이다. 누군가의 통찰처럼 구조적 효과로서의 자본가와 인간 그 자체는 전혀 다른 범주이다. 자본가의 존재 이유는 이윤 추구와 축적에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보통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임노동을 파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을 통해 욕구와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상품을 구매해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자본의 끝없는 확대 재생산에 의해 유지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소비 또한 '욕망'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야 한다.

 

한 사람을 가정해 보자. 그는 녹색당원이다. 환경 위기에 대해 걱정하고 기후 변화를 위해 지금 당장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캐롤라인 루카스처럼 자본주의는 이러한 조치들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평범한 회사원이다. 삶이 팍팍하다. 두서너 개의 카드로 소위 돌려막기를 하면서 살고 있다. 집값 때문에 직장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승용차를 운전해야 한다. 수입 수준과 주변 환경 때문에 대부분의 먹을거리는 대형 할인점에서 구매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뒤처지는 것이 두려워 무리를 해가면서 사교육을 시킨다. 2년마다 이사를 하거나 집값을 올려주어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대출을 받아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리고 은퇴 후가 너무 불안해 보험을 들고 약간의 주식 투자를 한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다.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환경 위기에 대한 높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 자체가 환경에 위협적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결론에 도달하기에는 자본주의가 지탱하고 있는 삶의 구조가 너무 단단하다는 것이다. 대중 매체를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는 '이데올로기', 그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국가권력은 이 단단한 구조에 때로는 더 단단한 외피가 되고 때로는 부드러운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기후 정의>에 실려 있는 글들은 분명 이러한 단단한 구조에 도전해야만 하는 당위, 도전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도전하고 있는 구체적 실천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단 한 문단이 모두 절박한 인민들의 투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비판의 타깃은 선진국의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이지만 투쟁의 근거는 제3세계로부터 나온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다르게 살고'자 하는 열망을 읽어내지 못하는 반자본주의적 전략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제3세계로부터의 도전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 자체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소비주의적 삶의 방식 안에 존재하는, 소비주의에 의해서는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욕구와 필요에 근거하는 사회적 투쟁에 주목해야 한다. 작지만 흩여져 있는, 그래서 종종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반자본주의적, 또는 탈자본주의적 삶의 실험들 말이다.

 

반자본주의적 녹색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 경제와 사회에 대한 공적 개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공적 개입의 주체는 국가 또는 정부이다. 녹색 사회주의자들은 공히 국가의 공적 개입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그 국가권력은 자본주의 체제의 옹호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국가 권력의 성격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투쟁의 경로가 밝혀져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앞에서 언급한 반자본주의적/탈자본주의적 삶의 실험들에 근거한 밑으로부터의 사회적 투쟁과 이에 근거한 국가권력의 말단으로부터 잠식이 없다면, 국가를 반자본주의적인 공적 개입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러한 구체적 분석과 전략이 없다면 국가는 '자본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이념형만이 존재하게 된다. <기후 정의>의 필자들과 녹색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넘어서야할 현실적이지만 대단히 이론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흔히 빠지게 되는 유혹은 '명확한 해답'이다. 하지만 '명확한' 답은 현실의 복잡함과 모순을 놓치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반자본주의와 녹색 사회주의라는 너무도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명 그 길만이 현재 인류가 처해 있는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고통받는 가난한 나라들의 인민들과 선진국의 빈곤층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그들의 투쟁과 공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머나먼 치아파스 정글의 사파티스타 농민 반군의 투쟁에 공감하고 지지하면서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소비주의적이고 지극히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그들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생태주의적 삶을 꾸려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주 작고 사소할 것일지라도. 녹색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이렇듯 작고 사소한 '몸부림'이 가지고 있는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는 사회적 운동을 연결하고 그 힘을 통해 국가의 공적 개입을 방향을 전변시켜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일시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이변'이 아니라, 21세기의 '일상'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물론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 책의 메시지가 특별히 묵직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책의 저자인 다이앤 듀마노스키가 철저한 과학적 탐사를 통해 환경 호르몬의 위험성을 경고함으로써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도둑맞은 미래>(권복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공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영표 성공회대학교 강사

 

 

적색과 녹색 | 롭 존슨

서문 | 데릭 월

편집자의 글 | 이안 앵거스

 

1부 기후 비상사태

내일은 늦으리 | 피델 카스트로

지구 온난화의 몇 가지 영향 | 기후와 자본주의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 이안 앵거스

기후 부정과 인권 | 옥스팜 인터내셔널

사회주의가 실패한다면 - 21세기 야만이라는 유령 | 이안 앵거스

 

2부 굶주리는 가난한 나라들

세계 빈곤, 농산업 그리고 식량주권 대안 | 이안 앵거스

새로운 국제 질서가 필요하다 | 에스테반 라조 에르난데스

식량위기는 체제와 구조의 문제다 | 호세 라몬 마차도 벤투라

소작농과 소농이 지구를 살릴 수 있다 | 비아캄페시나

식량 생산자로서 우리의 유산은 인류의 미래에 중요하다 | 식량주권을 위한 닐레니 포럼

부자들은 굶주림을 모른다 | 피델 카스트로

 

3부 잘못된 설명, 잘못된 해결책

인구 과잉? | 사이먼 버틀러

‘공유지 비극’의 신화 | 이안 앵거스

마법의 해결책 1 - 에탄올 사기 | 니콜 콜슨

마법의 해결책 2 - 탄소 포집과 저장 | 이안 앵거스

새로운 지구 전쟁? | 존 벨라미 포스터

 

4부 녹색 자본주의의 환상

녹색경제학의 실패 | 조엘 코블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 데이비드 트래비스

녹색 케인즈주의의 한계 | 숀 톰슨

자본주의의 반생태적 러닝머신 | 테리 타운센드

 

5부 대기의 사유화

탄소 거래에 대한 더반 선언 | 기후정의 더반 그룹

탄소 총량 규제와 거래 제도 | 크리스 윌리엄스

탄소 거래의 외설 | 케빈 스미스

탄소시장이 세계를 구할 수 없는 이유 | 앤드루 심스

탄소 거래를 반대하는 여섯 가지 주장 | 래리 로만

 

6부 남반구의 외침

지구 대지를 보호하라! | 에보 모랄레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코차밤바 성명) | 라틴아메리카 운동

우리는 완전하고 유효한 참여를 요구한다(발리 성명서) | 원주민 기후변화 국제포럼

기후정의네트워크의 두 개의 성명서 | 기후정의네트워크

미주정상회의에 관한 알바 성명서 |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

부유한 국가들이 생태 부채를 지불해야 한다 | 볼리비아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의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 우고 블랑코

 

7부 기후정의 운동의 형성

정치적 행동과 계급투쟁만이 지구를 구할 수 있다 | 패트릭 본드

기후변화 - 위기와 도전 | 앤 피터만ㆍ오린 랑겔

어떻게 효과적인 운동을 건설할 수 있을까 | 카마라 이매뉴엘

노동자와 기후변화 | 그린 레프트 위클리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는 세 가지 결정적인 사회적 힘 | 사회주의자 저항

기후변화는 노동조합의 문제다 | 토니 키언스

계급투쟁과 생태주의 | 리엄 맥 유아이드

 

8부 자본주의의 생태 학살에 맞선 생태사회주의의 대응

녹색을 더 적색으로 그리고 적색을 더 녹색으로 만들기 | 이안 앵거스

훌륭한 조상들의 사회를 위하여 | 이안 앵거스

기후변화 헌장 | 사회주의동맹

벨렝 생태사회주의자 선언 | 생태사회주의 국제 네트워크

기후위기 - 21세기 사회주의는 생태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 | 다니엘 타누로

 

더 읽어볼 자료들

옮긴이 후기

부록 | 기후정의연대 출범 선언문

 

 

 

▲ <긴 여름의 끝>(다이앤 듀마노스키 지음, 황성원 옮김, 아카이브 펴냄). ⓒ아카이브 

 

 

1. 긴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 눈앞의 미래

위험한 문명 │예측 불가능성 │중요한 갈림길

 

2. 우리는 이제 막 지구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 행성의세기

살아있는 행성│폭발적인 경제 성장│부의 물리적 기반│보이지 않는 위험│변화의 속도

 

3. 근대 문명이 지구를 위협하는 법 - 오존 구멍에서 얻은 교훈

기적의 냉매│오존의 발견│진화의 문│거대한 변화│순환의 고리│파괴의 시작│

인간은 운이 좋았다│잘못된 가정의 역사

 

4. 지구의 기후는 급격하게 바뀔 것이다 - 자연의 귀환

낙관적인 가정│급격한 기후의 변화│야수와 괴물│깜빡이는 경고│생각하지 못한 것들│

우리는 이미 넘어섰다

 

5. 인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 폭풍 속의 진화

두 가지 태도│인간 진화의 토대│팔방미인의 생존│문화와의 상호 작용│

세계를 이해하는 두 방식│생존과 소멸│문화적 함정

 

6. 과학기술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 기술적 해법의 유혹

기계가 된 자연│기후 조작의 시도들│지구공학│위험한 도박│새로운 문제들│

책임의 전가│남겨진 선택

 

7. 세계는 더 위험해지고 있다 - 취약성과 생존 가능성

불안정한 시스템│문명의 이면│문명의 역설│위험한 통합│복원력과 적응 가능성│

다양성과 다각화│근본적인 대응

 

8. 행성의 세기를 위한 새로운 문화 지도 -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

맥락의 위기│암묵적 가정들│진보의 서사│부분과 전체│가이아│지배라는 환상│

지구로의 회귀

 

9.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 정직한 희망

혼란 속의 길

 

서평: '긴 여름'(The Long Summer)은 미국의 선사학 권위자 브라이언 페이건이 처음 쓴 말로서 과학자들에게는 '홀로세'라고 알려진 "비정상적일 정도로 길고 안정된 간빙기(間氷期)"를 일컫는 말이다. 약 1만2000년간 지속된 이 예외적으로 온후하고 은혜로운 시기 동안 인류는 지금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지구적 규모의 '실험'을 이어올 수 있었다. 특히 듀마노스키가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듯이 현재 7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한 규모로 확대된 '농업'이야말로 이 '긴 여름'의 축복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과학의 발달과 현대 산업 문명, 인구의 증가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진우 외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 "지구는 인간 조건에 있어 핵심적 본질이며,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지구의 자연은 인류에게 노력하지 않고도, 또 도구가 없이도 움직이고 숨 쉴 수 있는 주거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주에서도 독특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그 인간 조건의 '핵심적 본질'이자 '우주에서도 독특한 곳'의 조건은 바로 '긴 여름'의 온후함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예외적인 간빙기는 '전체로서의 지구'가 거대한 "물질대사를 통해 스스로를 생성해 내고 꾸준히 유지하는 과정에서 생명의 근원이 되는 행위"를 지속해 온 과정의 일부이다. 대기의 진화를 비롯한 지구 행성의 물질대사의 역사를 방대한 과학 지식을 동원해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의 전반부는 마치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듯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류가 이 행성 전체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이제 이 온후한 시기는 끝나가고 있다. 오늘날 산업 자본주의의 지나친 성장과 인구 증가에서 비롯된 부담은 그 파괴력에서 지구의 역사를 뒤바꿔 놓았던 소행성 충돌과 빙하기에 비견될 만한 '행성 수준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바야흐로 '문명의 세기'에서 '행성의 세기'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연일 등장하고 있는 기상 이변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세기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조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앞으로 몇 십 년 안에, 20만 년 인류의 진화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조건과 마주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진부한 선내 방송?

재일(在日)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에서 현대 문명 시스템 속의 인류를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는 승객들에 비유하면서도, 실제 일어난 타이타닉 호의 재난과 비유로서의 타이타닉 얘기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덧붙인다. 오늘날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는 우리들은 빙산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선내 방송에서 몇 번이나 '빙산에 부딪힙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왔습니다. 그 말이 진부할 정도로, 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말을 하면 사람들은 '또 그 얘기?'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타이타닉 호의 비유가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타이타닉 호의 경우는 하나의 빙산이 있고, 거기에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인 타이타닉 호, 즉 우리들의 정치 경제 시스템의 경우, 빙산은 장래에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재난은 이미 시작되었고, 말하자면 차례차례 빙산에 부딪히기 시작하고 있는 셈입니다."

 

<긴 여름의 끝>은 바로 우리가 탄 타이타닉 호(이 책이 묘사하고 있는 장구한 지구의 역사와 행성의 거대한 물질대사의 규모를 읽다 보면, 우리의 타이타닉 호는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떠있는 가랑잎 같은 배라는 실감이 든다)가 이미 부딪히고 있는 수많은 빙산들에 대한 보고서이자, 임박한 충돌과 좌초를 경고하는 다급한 '선내 방송'인 셈이다.

 

경제 성장의 '성대한 잔치'와도 같았던 최근 20년간, 우리는 "오존층 파괴, 기후 변화, 세계적인 규모의 종의 상실, 해양에 대한 위협의 증가, 지구의 모든 곳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먹이 사슬에 대한 화학적인 오염"과 같은 빙산들에 끊임없이 부딪혀 왔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핵 참사로 인한 '행성적 규모'의 방사능 대재앙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듀마노스키는 "이런 것들은 더 폭넓은 행성 수준의 고통 가운데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근본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런 특정 증세 이상의 것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이 책에 '진부한 선내 방송'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왜 타이타닉 호의 엔진을 멈추지 못하는가

무엇이 "엔진을 멈추고 이 배를 세워야 한다"는 경고를 무시하게 만드는가. 비근한 예로 "북극의 얼음이 예상보다 세 배나 빨리 사라지"고 있는데도 "1992년 기후변화협약 이래로 탄소 배출 총량은 연간 61억 톤에서 2007년 85억 톤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여기에는 근원적으로 "낡고 위험한 두 가지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의 범위"에 대한 오해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자연의 성격"에 대한 오해이다.

 

과학기술의 힘이 자연의 위기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래된 통념은 우리가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여전히 가로막고 있다. 그 때문에 온갖 지구 공학적 처방들(가령 햇볕 차단이나 공기 중의 탄소 포집 같은 거대한 계획들)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공학적 프로그램들을 "경솔하고 무책임하며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일축한다. 무엇보다도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부유한 5억 명이 가장 큰 부담을" 지는 정치적 노력이 앞서야 함에도, 국제 정치의 현실은 이러한 합의를 끝없이 유보하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상식' 역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가령 "지구 온난화가 에스컬레이터처럼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이에 '적응'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합당하다는 오래된 주장은 저자가 보기에 '자연의 성격'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기후학(古氣候學)의 최신 연구 결과들은 지구의 기후가 "점진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여기서 '급격하다'는 표현은 지구의 시간대, 즉 '지질학적 시간대'에 비추어 급격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애라는 시간 폭에서 급격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10년 이내' 정도로 아주 갑작스러울 수도 있다."

 

후쿠시마

이 지점에서 잠시 의문을 하나 제기해야겠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전체로서의 지구'(살아있는 유기체와 유사한 물질대사를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는 지구 시스템)라는 아이디어는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학자 중 한 사람도 역시 제임스 러브록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러브록은 꽤 오래 전부터 핵 발전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핵 발전을 옹호하는 논리는 단순하다. "(비록 여전히 위험하긴 하지만) 핵 발전이 온실 기체를 방출하지 않으므로,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변화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길게 말할 여유는 없지만, 이 문제는 이미 완전한 '난센스'라고 비판받고 있는 논리이다(강양구, "원자력을 둘러싼 일곱 가지 신화",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사이언스북스 펴냄), 294~313쪽)). 아니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야말로 듀마노스키가 비판하고 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의 범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서 듀마노스키는 시종일관 제임스 러브록의 이론과 언급들에 기대고 있으면서도, 러브록의 이러한 치명적 오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고 있지 않다. 혹시 이 책의 원서가 '후쿠시마 이전'의 시대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굳이 주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후쿠시마'야말로 지구 행성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개입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을 '기습적으로' 불러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태가 아닌가? 듀마노스키든 러브록이든 이제 이런 의문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종말은 시간문제?

우리의 '항로 수정'을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는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절망과 숙명론"이다. 이러한 인식은 환경 문제에 관한 연구와 실천에서 상당한 업적을 쌓아온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환경의 가치에 관한 하버드 세미나에서 "인간은 자멸할 운명인가?"라는 질문이 튀어나왔을 때, 한 저명한 생물학자는 "묘한 만족감을 드러내며 인간의 종말은 시간문제"라고 예견했다. 또 어떤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가 '잡초 같은 종'이며 인간은 '지구상의 암' 같은 치명적인 질병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풍경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저자도 말하듯이 "그런 어두운 생각의 유혹"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거니와, 실제로 이러한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곤 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듀마노스키가 동시에 비판하는 장밋빛 낙관이나 숙명론(또는 환경 종말론)은 따지고 보면 모두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다. 그것은 결코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다.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제9장의 제목처럼,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일상을 영위해 가는 전 세계의 풀뿌리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문제는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안락하고 친숙한 세계의 문은 이미 우리 뒤에서 쾅 하고 닫혀버렸다. 지구 온난화를 '예방'하거나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러나,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공포, 절망, 부정 따위"는 지금 "우리에게 걸맞지 않은 사치다. 이제 고개를 들고 눈앞의 미래를 바로 볼 때가" 온 것이다.

 

정직한 희망, 희망의 근거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메시지는 '희망의 근거'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때 '희망'은 '타이타닉 현실주의'(더글러스 러미스)가 아닌 '냉철한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정직한 희망'이다.

 

듀마노스키는 25년간 수많은 환경 문제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절망이라는 '어두운 생각의 유혹'에 익숙할 만큼 참담한 현실들을 수없이 경험해 왔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폭넓은 인간의 행적과 문화들을 접하다 보니 '인간 종'에 대한 판단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인류의 진화사(進化史)를 통해 보건대, 지금의 인류는 급격한 기후 변화와 같은 위기에 대처해 가면서, 온갖 시련에 굴하지 않음으로써 진화하고, 단련되고, 살아남아 온 저력(복원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저자는 종말 운운하는 "본질적인 숙명론에 굴복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례 없는 도전에 대응하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진화 유산의 일부이다."

 

특수한 환경에 이미 적응해 있는 '적자(適者)'보다는 '유연성'을 갖춘 종이 '기후 지옥'의 여러 사건을 견디고 살아남는 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생물학과 인류학의 연구 결과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미 행성 차원의 위기라는 급격한 환경변화 앞에서 도시화·산업화·기계화된 현대 문명에 '적응'한 존재로서 안주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생존의 가능성 측면에서 너무나도 취약한 태도이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었으며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인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경제 성장과 같은 "현대 문화의 실험이 근거하고 있는 가치와 목적을 문제 삼기를 꺼린다."

 

그러나 인간의 진화 유산 속에는 "곤경을 피할 수 있는 유연성, 상상력, 창의력 같은 내재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정직한 희망'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산이다. '희망의 근거'를 당위나 신념, 종교적 열망이 아닌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대목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숙연함과 감동을 준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러한 '희망'은 때가 되면 저절로 현실로 드러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듀마노스키가 강조하는 '정직한 희망'은 우리의 '용기'와 '선택'에 달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몇 해 전 출간된 리베커 쏘울닛의 <어둠 속의 희망>(설준규 옮김, 창비 펴냄)의 한 대목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전쟁이 터질 것이고, 지구의 온도가 올라갈 것이며, 종들이 죽어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전쟁이 터지고, 얼마나 지구가 뜨거워지고, 무엇이 살아남을 것인가는 우리의 행동 여부에 달려 있다. 미래는 어둡지만, 그 어둠은 무덤의 어둠인 동시에 자궁의 어둠이다.

 

당연히 새로운 항로를 모색하는 '생존 가능성 전략'이 필요하다. 듀마노스키는 "오로지 효율만을 추구하는 세계화"에서 시급히 탈출할 것을 권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식의 세계화는 특히나 요즘처럼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대에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국지적 위기가 단 일주일 만에 전 지구를 마비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통합"인 것이다. 특히 그는 에너지 고갈과 아울러 세계화된 농업과 식량체계의 위험성에 대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경고하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은 점점 줄어들고 수천 년의 시험을 견뎌온 국지적인 생존 전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듀마노스키는 "기능적 잉여와 다양성, 모듈식 구조(구획화)" 같은 생태계의 생존 비법이야말로 '행성의 세기'에 우리가 다시 주목하고 선택해야 할 방책이라고 강조한다. 생태계 안에서는 다양한 종들이 똑같거나 서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기능적 잉여', 즉 일종의 보험 역할을 한다. 만일 주요한 행위자였던 어떤 종이 기후가 변해 쇠퇴하면 새로운 조건에 더 잘 견디는 종들이 그 역할을 맡아 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또 생태계의 종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단일한 시스템 속에 통합되지 않고, 다른 무리와의 연결을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 제한한다. 마치 선박의 하부를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한 곳에 물이 새 들어오더라도 다른 칸까지 쉽게 잠기지는 않도록 하는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전략은 세계화의 추진력과는 정반대의 해법이다.

 

 

이것은 아래에 인용하는 시 속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전 세계의 가난한 소농과 풀뿌리들이 자신과 후손의 생존을 위해 취했던 전략, 즉 "계란을 결코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오래된 지혜와 "농사꾼은 굶어 죽더라도 씨앗자루를 베고 죽는다"는 도저(到底)한 희망의 원리를 닮은 것이다.(글: 변홍철 물레책방 인문학연구실장·산자연학교 교사

 

 

 

인디오의 감자

                                           윤재철

 

텔레비전을 통해 본 안데스산맥

고산지대 인디오의 생활

스페인 정복자들에 쫓겨

깊은 산 꼭대기로 숨어든 잉카의 후예들

주식이라며 자루에서 꺼내 보이는

잘디잔 감자가 형형색색

종자가 십여 종이다

 

왜 그렇게 뒤섞여 있느냐고 물으니

이놈은 가뭄에 강하고

이놈은 추위에 강하고

이놈은 벌레에 강하고

그래서 아무리 큰 가뭄이 오고

때아니게 추위가 몰아닥쳐도

망치는 법은 없어

먹을 것은 그래도 건질 수 있다니

 

전제적인 이 문명의 질주가

스스로도 전멸을 입에 올리는 시대

우리가 다시 가야 할 집은 거기 인디오의

잘디잘은 것이 형형색색 제각각인

씨감자 속에 있었다  <세상에 새로 온 꽃>(윤재철 지음, 창비 펴냄)

 

 

 

 

 

▲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크리스천 퍼렌티 지음, 강혜정 옮김,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1부 환상에서 깨어날 시간

1장 누가 에카루 로루만을 죽였는가?

2장 군사 분야의 예언가들

3장 작은 전쟁: 군사적인 적응

2부 아프리카

4장 어느 가축 약탈의 지정학

5장 고장난 하늘과 지상의 삶

6장 왜 동아프리카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

7장 소말리아 대재앙

8장 파탄 국가 이론

3부 아시아

9장 아프가니스탄의 기후 전쟁: 마약, 가뭄, 지하드

10장 키르기스스탄의 작은 기후 전쟁

11장 인도와 파키스탄: 빙하, 강, 그리고 물 전쟁

12장 인도의 가뭄 반란군

4부 라틴 아메리카

13장 리우의 비애: 지구를 뒤덮은 빈민가

14장 멕시코의 골고다 언덕: 기후 난민과 마약 전쟁

15장 미국의 장벽과 선동가들

16장 또 다른 미래는 가능하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후주

 

 

서평: 기후변화를 다루는 이야기라면 열에 아홉, 주인공은 북극곰이다. 수영선수를 능가하는 북극곰이 잠시 쉴만한 유빙을 찾지 못해 익사를 하거나, 먹이가 사라져 동족을 먹이로 삼는 것은 이제 새롭지도 않을 정도다. 지구상 생물종 중에 공룡 정도를 제외하면 북극곰보다 더 많은 하이라이트를 받은 동물이 있었을까 싶다.

 

덕분에 우리에게 기후 변화란 북극이 녹아내리는 이미지로 제한되어 있다. 조금 더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집중호우나 가뭄을 떠올리는 정도일까. 2008년 MBC가 야심차게 준비한 <북극의 눈물>에 이어 2012년 <남극의 눈물>까지 방영되면서 이런 이미지는 더욱 관성화되었다. 여전히 환경단체들의 캠페인에는 처연한 표정의 북극곰이 등장하고, 표어는 매양 "북극곰을 살려 주세요"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한 가지 모습으로만 귀결되다 보니 그만큼 관심도 쉬이 사라진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는 정작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기후변화란 말에 너무 피로해져 있다.

 

'북극곰'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

물론 북극곰이 소중한 친구이자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기후변화 문제를 우리 생활과 괴리시키는 순간, 위기는 남의 얘기가 된다. 북극곰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자위를 하거나 상황을 축소해 무마시키기 위한 선전도구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그런 점에서 "저를 광고에 쓰지 마세요. 저와 제 가족을 지켜주지 못할 거라면…"이라는 카피로 유명해진 모 석유기업의 광고는 흉악하기까지 하다.

 

이런 의아한 상황은 지금도 여전하다. MBC가 야심차게 준비한 <남극의 눈물>이 다큐멘터리로서는 보기 드문 12%의 시청률을 올리면서 끝난 2012년,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크리스천 퍼렌티 지음, 강혜정 옮김, 미지북스 펴냄)라는 긴 이름의 책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책은 초판도 다 소화하지 못한 채 1000여부 정도만 팔리며 서점에서 사라져 갔다. <쇼크 독트린>(김소희 옮김, 살림Biz 펴냄)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나오미 클라인 등 유명 인사들의 추천이 쏟아졌다는 걸 감안하면 초라한 성과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미덕이 더욱 빛이 난다. 저자 크리스천 퍼렌티는 '기후변화=극지방 해빙'이라는 인간들의 관성적인 인식에 통렬한 비판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실증 사례를 보여주며 우회하고 있는데도 꽤 성공적이다.

 

시대의 비극, 기후변화로부터 오다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는 케냐 작은 부족의 청년, 에카루 로루만을 과연 누가 죽였는지부터 시작한다. 저자가 에카루를 발견했을 때 그의 사체는 훼손되어 있었고 몸에 지녔던 소품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이건 아프리카에 만연되어 있는 부족 간의 다툼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목축이 중심인 에카루의 부족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풀과 물을 찾아 이동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이웃 부족과의 경계지역이었다. 기후변화로 인해 기후가 황량해지고 가축이 줄어들자 에카루의 부족과 이웃 부족은 서로 죽고 죽이는 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 이제 그럼 이 시점에서 생각해보자. 에카루는 과연 누가 죽인 걸까?

 

비근한 예가 적지 않다. 21세기 최악의 인종청소 사건으로 꼽히는 수단 다르푸르 사태는 최초의 기후전쟁으로 꼽히기도 한다. 수십 년간의 가뭄이 찾아들자 목축이 중심이었던 북수단 사람들은 에카루의 부족처럼 물을 찾아 남하했고, 남수단에 위치한 사람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피부색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두 집단은 이내 전쟁을 벌였다. 이 와중에 수만 명의 남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여성들은 조직적으로 성폭행을 당해야만 했다. 씨를 아예 바꿔버려 해당 종족을 말살해버리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수단 다르푸르 사태를 인종과 종교가 빚어낸 참사라고 얘기하지만, 그 이전에 기후변화가 없었다면 과연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나 했을까.

 

기후변화는 '파멸적 수렴'으로 귀결 된다

기후변화는 그 자체로도 폭력적이지만, 발화점이 되어 "파멸적 수렴"을 부르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전 지구적인 것이기도 하다. 크리스천 퍼넬리는 아시아의 대국인 인도에 가뭄 반란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인도 북부 안드라프라데시 산악지대는 소규모 게릴라 전쟁이 많기로 유명하다. 마오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반군이 활동하는 지역을 묶어서 '붉은 회랑'이라고 하는데 동시에 '가뭄 회랑'이기도 하다. 인도의 강수지도와 시기, 그리고 폭력 지도를 대조해보면 가뭄이 심한 곳에서 반군의 활동도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 패턴이 예전과 달라지면서 농민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기후변화가 단순히 강수량의 변화를 넘어 사회ㆍ경제적으로 어떻게 전화되어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 보라고 강변한다. 이들 지역의 약자계층이 이런 정치적 변화의 최대 피해자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가하면 남미 지역은 기후변화로 삶의 터전을 잃은 원주민들이 대거 난민으로 내몰렸다. 가뭄으로 농업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전업 벌목꾼이 되었다. 하지만 나무가 사라지자 다시 일자리를 잃었고, 결국 고향을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됐다. 엘니뇨가 위력을 행사한 어업 쪽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하지만 저자는 피해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 점을 강조한다. 과도한 벌목으로 인해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수단을 잃어 기후변화가 더 위력적으로 변하는 악순환이 남미 전체를 휘감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듯 저자가 말한 파멸적 수렴은 현실이다. 그래서 더 뼈아프다.

 

자본주의와의 위험한 동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기후변화가 사회적 변화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책은 많다.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 역시 그저 그런 책 중에 하나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기후변화를 인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에 있지 않다. 더 나아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체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까지 던진다는 데에 있다.

 

그런 고민의 흔적은 기후변화와 서구의 근대성, 자본주의가 결합될 때 각각 어떤 파국적 결말을 가지고 왔는지를 고찰하는 데서 나타난다. 저자는 냉전시대의 군국주의와 신자유주의적 병리 현상들이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왜곡시켰고, 기후변화로 인해 부정적인 변화가 더해져 작금의 위기가 발현됐다고 보고 있다. 아프리카의 가축 약탈은 부족의 부의 축적 수단뿐만 아니라 무역 시스템의 일환으로 확장되면서 가혹해졌다고 지적하며, 또 인도 '가뭄 회랑'의 비극은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농민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파장이 커졌다고 쓴다.

 

이런 시각은 여타 기후변화 저서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의 현장 분석과 포괄적인 고찰이 힘을 발하는 순간이다. 책을 드는 순간 우리는 기후변화가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현대 문명의 구조적 고리에서 파생됐고, 따라서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선명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일사천리로.

 

개인 노력이 아닌 체제 변화가 해답

우리는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기를 아끼자는 구호에 맞춰 전등을 끄고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자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광폭해지는 그들의 비극을 막을 수도, 무의식중에 우리가 가해자가 되는 상황을 회피할 수도 없다. 내가 오늘 즐긴 스마트폰 게임 하나가 총알로 바뀌어 저 아프리카 소년병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물론 의도한 것이 아니니 죄의식을 가질 필요까진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책임이 있다.

 

기후변화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관점에 동의한다면 <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프레드 맥도프·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황정규 옮김, 도서출판삼화 펴냄)이나 <기후정의>(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기획, 이안 앵거스 엮음, 김현우·이정필·이진우 옮김, 이매진 펴냄)를 함께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두 책은 모두 체제 변화가 기후변화의 해답이 되는 이유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기후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사례를 더 알아보고 싶다면 <기후전쟁>(하랄트 벨처 지음, 윤종석 옮김, 영림카디널 펴냄)을 추천한다.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처럼 복합적인 관점은 덜하지만, 기후변화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알기에는 더욱 슬픈 내용이 담겨져 있다.

 

 

북극을 넘어 기후변화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책들이 쏟아지는 건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전국 각지에 산재해도 1000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일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글: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누가 에카루 로루만을 죽였는가

내가 방문했던 투르카나 부족 무리는 극심한 가뭄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들의 전통적인 부족 영역으로 간주할 수 있는 영토의 최남단까지 내려와 가축에게 풀을 뜯긴다. 그들의 적인 포코트 부족이 지척인 곳이다. 길고 좁게 형성된 동아프리카의 목축민 회랑 지대에는 아주 기본적이고 확실한 패턴이 하나 있다. 가뭄이 들면, 물과 목초지가 귀해지고, 가축이 병들고, 많은 소가 죽는다. 그리고 줄어든 가축을 보충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이웃 부족을 습격한다. --- p.14

 

요새 국가 대 파탄 국가

정치적 적응은 냉혹한 선택을 제안한다. 한편에서는 나머지 세계가 붕괴 일로로 치닫는데, 경제적으로 발전한 강대국들은 외국인 혐오, 인종 차별주의, 경찰 진압, 감시, 군국주의와 같은 손쉬운 수단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를 요새화된 사회로 바꾸어간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선진국들은 혼돈의 바다에 떠 있는 비교적 안정적인 신파시스트들의 섬으로 변해갈 것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붕괴 일로에 있는 나머지 세상이 그들을 가만둘 리 없다. 기아, 질병, 범죄, 광신, 폭력으로 인한 사회 해체 등으로 점철된 나머지 세상이 결국에는 ‘무장한 구명정’을 전복시킬 테고, 모두가 같은 늪으로 빠져들 것이다. --- pp.42~43

 

메마른 평화로운 마을

샴바리 마을 주변의 죽어가는 초원은 워낙 광대하고 메마른 상태였다. 훔친 소를 데리고 이곳을 가로질러 마을로 돌아온다는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이곳에서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씨족들은 찌는 듯한 더위와 모래투성이 황야에 발이 묶여서 각자의 시추공, 타나 강의 제방, ‘구호 식량’ 배급지 주변으로 형성되는 노변의 ‘구호 캠프’에 사실상 격리되어 있는 신세였다. 이들 목축민은 본질적으로 가축 약탈을 포함한 유목 생활의 모든 것, 말하자면 소를 중심으로 하는 유목생활 자체를 포기하는 과정에 있는 낙오자들이기 때문에 평화롭다. --- pp.113~114

 

무기 확산: 창 대신 총

수백 년 동안 이곳 사람들의 무기는 창이었다. 그들은 창을 무기로 서로의 소를 훔치면서 생계를 꾸려왔다. 하지만 무기고 약탈로 가축 약탈이 창끝을 겨누던 데서 총구를 겨누는 싸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 p.135

 

아편 재배의 정치 경제학

가뭄과 홍수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작물만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주었다. 학명으로 파파베르 솜니페룸, 즉 양귀비이다. 왜 하필 양귀비일까? 일반적인 대답은 마약이 살구, 건포도, 밀보다 훨씬 높은 금액에 팔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생각해 보라. 밀 재배에 필요한 물의 6분의 1만 있으면 양귀비 재배가 가능하다. --- p.182

 

탈레반도 양귀비 재배로 이득을 보는 집단이다. 첫째, 탈레반은 다른 모든 거래와 마찬가지로 마약 거래에도 세금을 물린다. 둘째, 탈레반은 양귀비 재배를 막지 않는다. 탈레반에 충성하는 지역에서는 농민이 박멸 작전이나 이를 빙자한 권력 남용과 뇌물 요구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 p.185

 

마약 전쟁: 초읽기에 들어간 혼돈

이곳이 바로 후아레스다. NAFTA가 만들었고 이어서 죽이기 시작한 도시. 그러나 도시 죽이기 임무도 머지않아 종식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종결자는 기후 변화가 될 테고, 시기는 2050년 즈음이 아닐까? 기후 변화가 사람들을 땅에서 밀어내기 때문에,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오고, 다시 국경을 건넌다. 젊은이들이 이곳 후아레스에서 국경을 건널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지하의 마약 경제가 그들을 재빨리 삼켜버린다. --- p.336

 

이념을 외치는 연단

때때로 오라일리의 전쟁 발언은 한층 노골적이 된다. “국경의 무력 강화 이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종의 인종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상황이 그렇습니다. 인종 전쟁입니다. 지금 우리는 로스앤젤레스에 50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들이 나타나 멕시코 국기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봐, 우리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다고.’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불법으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여기 있을 권리가 없지요.” --- pp.370~371

 

남회귀선과 북회귀선 사이에 ‘혼돈의 열대(Tropic of Chaos)’가 놓여 있다. 지구의 중위도 지방을 벨트 모양으로 둘러싼 이 국가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난타당하는, 식민지 상태에서 갓 독립한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에 기후 변화가 심각한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파탄 국가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북방 선진국은 열대 지방의 혼돈과 사회 해체, 난민 이동에 대비하여 군사적 적응, 즉 무장한 요새의 길을 택했다. 인류의 미래는 가시철조망과 원격 무인 공격기의 시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탄소 배출 완화와 지구적 부의 재분배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기후 변화와 새로운 폭력의 시대

흔히 기후 변화 하면 빙하가 녹고, 북극곰이 유빙에 고립되고, 섬나라가 물에 잠기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런데 크리스천 퍼렌티에 따르면, 기후 변화는 자연의 변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는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에서, 이미 기후 변화가 지구 곳곳에서 갈등과 전쟁, 이민과 배척, 기아와 죽음을 야기하고 있음을 생생한 언어로 증명한다. 그리고 그곳 나라들의 재앙을 바라보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빈곤과 폭력, 기후 변화가 한 곳에 만나 만들어낸 ‘파멸적 수렴(catastrophic convergence)’이 바로 그 재앙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남회귀선과 북회귀선 사이에 그러한 기후 변화의 재앙에 난타당하는 ‘혼돈의 열대’가 놓여 있다. 퍼렌티는 재앙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인 문제이며, 기후 변화가 가속화함에 따라 점차 전 세계를 아우르는 새로운 폭력의 지형도를 낳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요새 국가 대 파탄 국가

지구 반대편의 남방 개발도상국들이 경제적 파탄와 반군 게릴라, 난민들로 국가 붕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면, 북방 선진국들은 요새 국가로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기후 변화로 곤경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하나 같이 냉전 시대의 대리전쟁과 군국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역사적 왜곡을 겪은 나라들이다. 기후 변화로 인해 산업이 파탄 나고 유목이 불가능한 환경 속에, 난민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빈민이 되거나 반군 게릴라가 되어 사회의 파탄성을 더욱 가속화한다.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교두보조차 상실한 채 미래로 흘러가고 있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발전한 선진국들은 안전할까? 기후 변화로 붕괴 일로에 있는 나머지 세상이 그들을 가만둘 리 없다. 기아, 질병, 광신, 폭력으로 점철된 나머지 세상이 결국에는 ‘무장한 구명정’을 전복시킬 테고, 모두가 같은 늪으로 빠져들 것이다.

 

케냐­ “누가 에카루 로루만을 죽였는가?”

케냐의 투르카나족 에카루 로루만이 살았던 동아프리카의 목축민 회랑지대에는 아주 기본적인 패턴이 하나 있다. 가뭄이 들면, 물과 목초지가 귀해지고, 가축이 병들고, 많은 소가 죽는다. 그리고 줄어든 가축을 보충하기 위해 서로의 부족을 습격한다. 원래 케냐에는 일 년에 두 번의 규칙적인 우기가 있었다. 케냐의 모든 산업과 사람은 이 두 번의 우기에 맞춰 활동하는데, 최근 케냐의 우기를 결정하는 열대 수렴대의 이동과 강우 패턴이 고장났다. 비 오는 시기도 수량도 모두 예측을 빗나가고, 가뭄이 점점 심해졌다. 그에 따라 동아프리카 목축민 회랑지대의 오랜 패턴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케냐의 독립 이래 한동안 감소 추세에 있던 가축 약탈이, 최근 가뭄이 심해지는 것에 비례하여 점점 증가하고 있다. 에카루 로루만이 살해됐던 가축 약탈과 거의 똑같은 장면이 매일 같이 재현되고 있다.

 

소말리아­ 기후 변화의 재앙을 증폭하는 파탄 국가.

파탄 국가는 기후 변화 앞에서 무력하다. 재난에 대처하여 자원을 동원하고 제도를 실현할 국가 역량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퍼렌티에 따르면, 파탄 국가들이 공통으로 경험한 역사적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냉전 시대의 대리전쟁과 군국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이다. 소말리아는 냉전 시대의 경험이 치명적이었다.

1977년 소말리아의 지도자 시아드 바레는 에티오피아 내의 소말리아족 거주 지역인 오가덴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쟁은 소말리아의 의도와는 달리 곧 냉전 특유의 대리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동아프리카 지역에 견고한 사회주의 진영을 건설하길 원했던 소련과 이러한 열망을 분쇄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던 미국에 의해 소말리아는 냉전의 대리전쟁터가 되었다. 전쟁 후 소말리아에게 남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외채와 수십 만 명의 난민, 넘쳐나는 총기들과 초법적 무장 세력들이었다. 시아드 바레 정부는 1991년에 결국 무장 반군 세력들에 의해 전복되었다. 이후 소말리아는 제대로 기능하는 정부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프가니스탄­ 양귀비가 최선의 적응이 되어버린 나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정부는 양귀비 재배를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양귀비 재배와 아편 거래로 발생하는 수익이 아프가니스탄 공식 GDP의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양귀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최고의 인기 품목이다. 20세기 후반 이래 물이 말라버린 나라에서, 농민들은 밀 재배에 필요한 물의 6분의 1만 있으면 충분한 양귀비를 재배한다. 이러한 주민들의 대응은 사실 능동적이라기보다는 피동적이다. 30년에 걸쳐 계속된 무력 분쟁으로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잃었고, 지뢰밭에 둘러싸인 채 농지에 접근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많은 관개 시설이 파괴되고 유지 관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반복적으로 가뭄과 홍수가 일어난다. 가뭄과 홍수는 기후 재앙에 대처할 인프라를 더욱 파탄 내는 한편으로 사람들의 빈곤을 심화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파탄은 탈레반을 살찌우고 있다. 새롭게 자라나는 청년들은 빈곤과 불만과 절망 속에 떠밀리듯 탈레반 군대에 합류한다.

 

인도-파키스탄 분쟁­ 물이 흐르지 않으면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히말라야의 4만 6298개 빙하는 수십억 인구가 쓸 물을 냉동 보관하는 형태로 저장하고 있다. 이 히말라야 빙하가 급속도로 녹고 있다. 이 빙하가 줄어듦으로 인해 이곳 강들의 강수량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긴장을 높이고 있다.

카슈미르는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을 받아 인도 아대륙에 공급하는, 일종의 급수탑 역할을 하는 요충지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물로 인한 스트레스가 높은 나라인 파키스탄이 바로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인도는 카슈미르에 있는 강 상류에 쉼 없이 댐을 건설하고 있다. 인도가 수력 발전용 다목적 댐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파키스탄인은 없다. 현재 인더스 수자원 조약에 의거하여 파키스탄은 일정량의 강수량을 보장받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댐들은 인도의 의지와 상관없이 적절한 양의 물을 흘려보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파키스탄은 바로 그들의 머리맡에서 물을 가둬버린 사악한 댐을 저주한다. 서로의 적대감 너머에 자리 잡은 기후 변화가 이들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인도­ 가뭄이 들면 부활하는 가뭄 반란군.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는 오랜 역사를 가진 게릴라 운동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바로 낙살라이트(Naxalites)라고 알려진 마오주의 반군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반란은 1967년에 서벵골 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애초에 낙살바리라는 마을에서 토지를 둘러싸고 소작농과 지주 계급의 무력 충돌에 기원을 둔 세력이다. 오늘날 인도의 농촌은 실패한 면화 농업과 고리대금업자들에 의해 파탄난 상태다. 여기에 기후 변화로 인한 심각한 가뭄이 들면, 수만 명씩의 농민이 자살하는 사태가 빚어진다. 자살하지 않은 이들은 낙살 게릴라가 되거나 그들을 지원하는 세력이 된다. 이런 식으로 가뭄이 들면, ‘은퇴’했거나 ‘반쯤 은퇴’했던 낙살라이트들이 다시 총을 쥐고 게릴라전을 시작한다. 이들의 전쟁은 지금도 인도의 동부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키르기스스탄­ 댐의 물이 말라버리자 나라 전체가 마비되었다.

수력 발전소가 무력화되면, 나라 경제 전체가 절름발이 신세가 되는 나라가 있다. 바로 키르기스스탄이다. 기후 변화는 중앙아시아의 이 작은 나라도 강타했다. 2010년 4월 정부는 수력 발전량 감소를 반영하여 공공요금을 20퍼센트 인상했다. 하지만 이미 잦은 단전과 단수에 시달려온 바슈케크의 시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들은 거리로 나와 바슈케크 시내를 가득 메웠다. 그들은 곧 폭도와 무장 갱단으로 변했고 정부 건물을 공격했다. 이윽고 경찰이 실탄을 쏘기 시작했고, 시위대도 이에 맞서 총을 쏘았다. 60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광기는 곧 키르기스스탄 내부에 상존하던 인종 갈등으로 옮아갔고, ‘인종 청소’ 분위기 속에 소수민족인 우즈벡족에 대한 살인이 자행되었다. 현재로선 오직 비만이 이 폭력을 억누를 수 있다.

 

브라질­ 지구를 뒤덮은 빈민가.

리우데자네이루 시의 빈민가에서는 갱단을 진압하기 위한 ‘평화 회복 작전’이라는 군사 작전이 한창이다. 이에 반해 메마른 북동부 지역의 노르데스치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리우데자네이루의 그곳 빈민가로 마치 연료를 주입하듯이 수많은 기후 난민을 보내고 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노르데스치는 열대 수렴대 패턴의 고장으로 안정적인 농업 활동이 힘들어지고 있다. 극단적인 날씨와의 사투 끝에 결국 생업을 버리기로 결정한 농민들은 스스로 기후 난민이 되어 리우데자네이루나 상파울루 같은 대도시를 찾아 남쪽으로 이동한다. 대도시에서 그들은 파벨라라고 불리는 빈민가에 정착한다. 파벨라는 정부의 공권력과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무법지대이며, 무기와 마약의 세상이다.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주민들은 지하 경제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최근 빈민가를 대상으로 군사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멕시코­ 5만 명이 죽어도 사그라들지 않는 마약 전쟁.

총알에 몸이 숭숭 뚫린 시체들이 밤마다 대여섯 구씩 발견되고, 때로는 한번에 열여덟 명까지도 죽는 대량 학살이 일어나는 도시 후아레스를 간다. 마약중독자에서부터 멕시코의 시장, 경찰관, 언론사 기자에 이르기까지 살인에 성역은 없어 보인다. 2012년 AFP 통신은 멕시코의 마약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가 5만 명에 달한다고 보도한 바 있는데, 멕시코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폭력의 제단은 아직도 더 많은 희생자를 원하고 있다.

얼핏 보면 멕시코의 현 사태는 기후 변화와 무관해 보인다. 마약 밀매업자들이 열대 수렴대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경찰관을 살해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기후 변화는 멕시코에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기후 변화는 이미 경제 자유화 기치 아래 한 차례 파탄 났던 멕시코의 농업과 어업, 임업을 다시 한번 거덜내며, 사람들을 그들의 땅을 떠나 북쪽으로, 약속의 땅 미국으로, 혹은 지하 마약 경제의 덫으로 밀어넣고 있다. 후아레스의 반대편에는, 국경만 넘어가면 살인율이 극적으로 감소하는 미국 텍사스 주의 엘패소 시가 보인다. 그러나 이민은 쉽지 않다.

 

미국­ 담벼락을 두르고, 총을 쏘라.

미국을 보면, 기후 변화에 대한 그릇된 적응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은 물리적 담벼락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마음에도 담벼락을 세우고 있다. 미국의 석유 재벌은 성공적으로 기후 변화 부정론을 확산하고 있고, 미국의 주요 방송인들은 연일 시청자 앞에 외국인 혐오 정서를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한편으로 기후 난민들의 이민을 차단하기 위해 국경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구금 시설을 늘리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애리조나 같은 주에서는 반이민법 등을 입법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미국은 자신만만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군사적으로 세계 최강국이며, 냉전 시대의 아수라 속에서 수없이 많은 대게릴라전을 거치며 단련해 온 특수 부대를 갖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냉전 시대의 이론대로 각국의 소요와 반란, 게릴라에 대응할 태세다. 그렇지만 퍼렌티에 따르면, 대게릴라전의 승리란 또 다른 파국의 이름일 뿐이다.

 

환상에서 깨어날 시간

크리스천 퍼렌티는 비극적인 재앙의 현장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한 해법을 모색하는 데에도 뜨거운 심장과 냉철한 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기후 변화 ‘완화’와 ‘적응’의 원래 의미를 되새기면서, 북방 선진국이 기존의 배제와 진압을 기본 개념으로 삼는 ‘무장한 구명정’ 방식의 적응이 아니라 적극적이고도 진보적인 ‘완화’와 ‘적응’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극적인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에 동참하고, 전 지구적인 부의 재분배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북방 선진국은 기술적 재정적으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의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역사적으로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나라들일 뿐 아니라, 장차 그들 역시 기후 변화의 재앙 앞에 선 당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추천사

 

“사실 읽으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무서운 생각도 드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현재 우리가 처한 곤경이 완벽하게 이해된다. 한편에는 기후 변화, 자원 부족, 만연한 빈곤으로 야기된 무시무시한 지구적 위기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특히 미국인들이 매달리는, 군사력을 노련하게 활용하면 선진국들이 이런 문제와 거리를 두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신념이 있다. 하지만 저자 크리스천 퍼렌티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이 맞다. 이 책이 나온 이상, 우리는 몰랐다고 발뺌을 할 수는 없으리라.”

­앤드류 J. 바세비치(Andrew J. Bacevich), 『미국 패권주의 : 영원한 전쟁으로 가는 미국(Washington Rules : America's Path to Permanent War)』의 저자

 

“풍부한 자료조사를 통해 현대 사회 여러 분쟁에서 기후 변화가 이미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가장 두려운 미래를 헤아리게 해주는 이런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 『충격요법(The Shock Doctrine)』의 저자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는 자연 재앙과 이를 일으킨 사람 모두를 날카롭게 꿰뚫는 명저다. 작가는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뒷받침된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독자를 지구 곳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사회가 만들어내는 재앙을 폭로한다. 감히 손에서 내려놓지도, 무시할 수도 없는 책이다.”

­수디르 벤카테시(Sudhir Venkatesh), 『괴짜사회학』의 저자

 

“기후 변화의 새로운 차원을 부각시키는 주목할 만한 저서다. 흔히 기후 변화 하면 생물 종 다양성, 빙하, 섬나라 등이 사라지는 상황을 연상한다. 하지만 작가 크리스천 퍼렌티는 기후 변화는 또한 갈등과 폭력, 혼란의 새로운 시대와도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퍼렌티는 기후 변화가 이미 지구 곳곳에서 전쟁과 침략을 유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저자는 또한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걷잡을 수 없는 기후 변화에 대한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대안을 생각하도록 독자를 유도한다.”

-파블로 솔론(Pablo Sol?n), 볼리비아 기후변화협상단 대표이자 유엔 주재 볼리비아 대사

 

“크리스천 퍼렌티의 철저한 연구가 돋보이는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는 기후 위기를 유발한 종족이 결국은 거기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종족일 되리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기후 변화로 야기된 폭력이 점점 거세지는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면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우리가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종말론에나 나올 법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마이클 브룬(Michael Brune), 환경단체 시에라 클럽 사무총장

 

 

세권의 서평은 2014년 1월 10일 프레시안  "미국의 이상 한파, 한국은 안전할까?'  기사를 재편집한 것임

 

 

노래출처: 다음블로그 아름다운 음악여행

김광석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