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다"…이스라엘은 나치 독일에 무엇을 배웠나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3]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홀로코스트 ①
지중해에 맞닿은 중동 팔레스타인 가자(Gaza)는 비전투원들을 마구 죽이는 전쟁범죄가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곳이다.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전쟁에서 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전시국제법(jus in bello)의 기본 원칙은 내팽개쳐졌다. 하마스 '테러분자'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 군은 비무장 민간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훼손해왔다. 이는 무력충돌 때에 민간인 보호를 규정한 제네바협약(1949)과 그 부속협정인 추가의정서(1977)을 어기는 전쟁범죄 행위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와서 세월호 유가족을 만났을 때다. 누군가 교황에게 '가슴에 단 노란 리본이 정치적이니 떼는 게 좋겠다'고 하자,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우리 한국인들도 '중립'을 지키기 어렵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잊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국가 안보' 논리보다는 생존의 벼랑 끝에서 '인간 안보'와 '평화적 생존권'을 되찾겠다는 팔레스타인의 목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비례의 원칙' 어긴 대량 학살
어느 전쟁이든 사망자 규모를 둘러싼 또 다른 '전쟁'(통계전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번 유혈분쟁도 예외는 아니다. 하마스(Hamas)와 이스라엘의 집계가 다르다. 2023년 10월7일 첫 희생자가 나온 이래 8개월이 다 되가는 지난 5월 말까지 사망자는 3만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다(이스라엘 1200명). 팔레스타인 쪽은 여성과 어린이 희생자의 70%를 넘는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 다 민간인이 얼마나 죽었는가를 둘러싼 논란은 전부터 늘 있어왔다. 관련 국제기구인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United Nations 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 OCHA)는 희생자 숫자를 정확히 밝히는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 이름이 확인된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2만5000명이다. 이스라엘 국방부는 지금껏 하마스 무장대원 1만2000명쯤을 제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나머지 사망자 1만3000명(최대 2만3000명)은 비전투원인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라는 얘기가 된다.
지난해 10월 이래 가자지구에서 벌어져온 유혈분쟁의 희생자 규모는 지금까지의 통계 수치를 훌쩍 넘어섰다. 이스라엘 인권단체 베첼렘(B'Tselem, 이스라엘 점령지역 인권정보센터) 집계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난 1987년 12월9일부터 (이번 유혈사태 직전인) 2023년 9월30일까지 33년 동안 사망자는 약 1만5000명이었다(https://www.btselem.org/statistics).
이 가운데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1만3200명, 이스라엘 사망자는 1800명이었다. 사망자 비율로 따지면, 이스라엘 사망자 1명 대 팔레스타인 사망자 7.3명(전체 희생자 가운데 팔레스타인 사망자 비율은 88%). 절대 숫자나 비율에서 팔레스타인 쪽이 훨씬 큰 희생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이-팔 분쟁으로 팔레스타인 쪽 피해가 크게 늘어남으로써 사망자 비율은 이스라엘 1 대 팔레스타인 15로 바뀌었다.
사람 목숨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귀하기 마련인데, 현실에선 너무 차이가 난다. 이른바 정의의 전쟁(just war) 이론가들이 말하는 '비례의 원칙'(principle of proportionality, 과잉 금지의 원칙, 내가 1대 맞았다고 10대 때려선 안 된다는 원칙)은 이곳에선 찾아보기는 어렵다.
▲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칸 유니스 주거지역은 이스라엘군의 잇단 포격으로 처참하게 파괴됐다. ⓒⒸNaaman Omar / APA Images
촘스키 "이스라엘은 중동의 깡패국가"
일반적으로 전쟁 연구자들이 받아들이는 '전쟁의 양적인 개념'은 '1년 동안 전쟁사망자가 양쪽 다 합쳐 1000 명'을 넘는 것이다. ('전쟁의 질적인 개념'은 19세기 초 프러시아 군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말했던, '전쟁은 물리적 수단을 동원한 정치적 관계의 연장'이다. 전쟁은 곧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폭력임을 뜻한다). 전쟁의 양적인 개념 잣대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유혈분쟁에 들이대면, "이 지역은 2023년에 이어 2024년 두해 거푸 전쟁을 벌여왔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동유럽의 발칸반도를 '세계의 화약고'라 일컬어 왔다. '20세기 화약고'가 발칸 반도였다면, '21세기 화약고'는 중동 지역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이라크, 시리아, 예멘, 리비아 등 중동 지역 곳곳에서 전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특히 팔레스타인은 끊임없이 피를 흘려왔다. 2차례에 걸친 '인티파다 intifada'('저항' 또는 '봉기', 제1차는 1987~1993년, 제2차는 2000~2005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침공(2009년, 2014년)과 최근의 유혈사태(2023년 10월~현재)가 말해주듯, 피가 피를 부르는 유혈충돌이 이어졌다.
2023년 10월부터 팔레스타인의 지중해변 지역인 가자(Gaza)를 중심으로 벌어진 유혈사태는 21세기의 국제사회가 지혜를 모아 풀어야 할 국제정치적 과제 가운데 하나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가 사우디-이스라엘의 외교관계 수립을 막기 위한 전략적 방편으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고 알려졌으나, 뿌리를 캐보면 21세기 이스라엘의 억압과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하는 식민정책이 근본 원인으로 꼽힌다.
21세기에 식민지를 두고 있는 유일한 국가로 꼽히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파괴하고 평화적 생존권을 망가뜨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걸핏하면 레바논을 비롯한 이웃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 주거지와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함으로써 '중동의 깡패 국가'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스라엘 뒤에는 친이스라엘 일방주의 정책을 펴온 미국이 있다. 유대인 출신의 미국 지성인인 노엄 촘스키(MIT대 명예교수, 언어학)조차 미국과 이스라엘을 싸잡아 '위험한 깡패국가들'(dangerous rogue states)로 불렀다(https://chomsky.info/20131204/).
'전쟁이 아닌, 일방적 학살'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역에서의 무력충돌이 이-팔 양쪽의 군사력이 엇비슷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해마다 탱크, 전폭기 등을 포함해 최소 30억 달러 규모의 공짜 군사원조를 미국에게서 받아왔기에) 이스라엘 군사력은 하마스에 견주어 압도적이다. UFC 격투기 선수와 동네 어린이의 싸움이나 다름없기에, 전쟁 희생자는 팔레스타인 쪽이 훨씬 더 많다.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란 말조차 나온다.
두 번째 문제는 사망자 가운데 절대 다수가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비무장 민간인들이라는 점이다. 비전투원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이스라엘의 강공책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를테면 '일렉트로닉 인티파다'(https://electronicintifada.net) 편집인 모렌 머피는 "지난 6개월 동안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은 민간인들을 '산업적 규모'로 살해했고, 병원들을 전략적 군사 목표물로, 식량을 전쟁 무기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이미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을 '전쟁범죄 국가'로 낙인찍었다. 프란체스카 알바네제 유엔 팔레스타인 인권특별보고관은 이스라엘이 집단학살(genocide)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면서 '제노사이드 해부(Anatomy of a Genocide)'라는 제목을 단 보고서를 3월26일 유엔 인권이사회(UNHRC)에 제출했다. 25쪽 분량의 보고서는 '이스라엘의 대량학살 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기준치를 충족한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바탕으로 유엔 인권이사회는 열흘 뒤(4월5일) 이스라엘의 전쟁범죄 행위를 '우려'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판매를 중단하라는 결의안을 냈었다.
▲ 팔레스타인 저항조직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 2004년 이스라엘 헬기가 쏜 미사일에 죽은 그는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배운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재명
네타냐후, 이번 전쟁의 '최대 수혜자'
그뿐 아니다. 한 달 보름 뒤인 5월20일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나섰다. 카림 칸 ICC 수석검사는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도자들과 더불어 이스라엘 지도자들(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을 전쟁범죄자 목록에 올려놓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미국이란 든든한 후견인을 믿고 있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ICC 피고석에 서는 모습을 우리가 언젠가 볼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강대국 쪽에 줄을 선 지도자가 ICC에 선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유혈분쟁은 길어야 1~2개월을 끌다가 휴전으로 포연이 가라앉는 단기전 양상을 보여 왔었다. 이번은 다르다. 이른바 '중동전문가'들조차 이토록 길게 끌면서 심각한 재앙을 낳으리라 내다보지 못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하마스와의 휴전안을 거듭 거부해온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고집스런 군사적 강공책이다.
네타냐후 총리에겐 개인비리와 맞물려 이스라엘 안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전쟁이 이어지는 한, (뇌물 등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상태인) 네타냐후를 몰아내긴 어려운 일이다. 전쟁을 '국가 안보'가 아닌 '개인 안보' 차원에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과 아울러 '이번 유혈사태의 최대 수혜자'라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개인비리 혐의로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네타냐후를 살려낸 것이 이번 전쟁이기 때문이다. '네타냐후를 살려낸 구원투수는 하마스'라는 말도 들린다.
이스라엘 국가테러에 맞선 '테러의 균형'
필자는 지금껏 20차례 가까이 중동을 다녀오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 과정에서 주요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이스라엘 총리를 3차례 지낸 시몬 페레스(1923-2016),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창립자이자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던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1936-2004)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이스라엘 정치군사 지도자들의 태도는 팔레스타인과의 유혈충돌을 거듭 할수록 완강해졌다.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절인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길을 열어준)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시몬 페레스도 그러했다. 2000년 필자와의 예루살렘 현지 인터뷰에선 "동예루살렘의 영유권을 비롯한 중요 논의사항은 협의를 통해 풀어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대통령(2007-2014) 시절의 그는 "동예루살렘은 나눌 수 없는 이스라엘의 도시"라는 완고한 자세로 돌아섰다. 지난날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준 오슬로 평화협정문은 이미 휴지통에 내버려진 듯한 모습이었다.
이스라엘의 강경책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의지도 굳어졌다. 특히 가자지구를 '해방구'로 삼은 하마스의 존재감은 아무리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이스라엘로서도 부담스럽다. 하마스의 투쟁을 이스라엘은 '테러 행위'라 몰아붙여왔다. 하마스의 논리는 다르다.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한 하마스의 투쟁을 '테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 테러'에 맞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른바 '테러의 균형론'이다.
2004년 3월 새벽기도를 마치고 모스크(이슬람사원)에서 나오던 야신은 이스라엘 아파치 헬기가 쏜 미사일에 맞아 숨졌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이스라엘의 행위는 국제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평화적 해결방안을 찾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난했지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감쌌다.
야신 "유대인은 나치에게 배운 짓을 저지른다"
야신이 죽기 전인 2001년 5월과 2002년 5월, 필자는 가자지구 그의 집에서 두 차례 인터뷰를 했었다. 야신은 15살 때 철봉을 하다가 허리를 다쳤다. 이스라엘 감옥에서 8년(1989-1997)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건강이 악화돼 손과 하반신이 마비됐다. 휠체어에 앉은 그는 "살고 죽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의지라기보다는 알라(신)의 뜻에 달려 있다"고 목쉰 소리였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이 유대인들을 우리 땅으로 몰아준 게 잘못이고, 지금은 미국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유대인은 나치 학살의 희생자들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그들이 나치에게 배운 짓을 그대로 저지르고 있다. 대대로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 난민으로 만들고, 다시 총으로, 대포로, F-16으로 죽이는 것은 국가 테러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우리의 저항운동을 테러라 부른다면 일종의 '테러 균형'이 이루어지는 셈이다"(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미지북스, 2019년 개정증보판, 292-293쪽).
야신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한국도 한때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알고 있다. 그 시절 일본에 저항했던 운동가를 당신들은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하마스의 주요전술로 알려진 '자살 폭탄테러'라는 용어가 잘못됐고 '순교'(殉敎) 행위라 주장했다. 야신이 이스라엘 헬기 공격으로 사망하자, UN과 EU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비난했다. 이스라엘은 '테러 왕초'를 제거했을 뿐이라고 우겼다(2004년 5월말, 야신이 죽은 2개월 뒤 가자지구 야신의 집에 가보니, 미사일에 맞아 불에 타 그슬린 야신의 휠체어가 눈길을 끌었다).
하마스의 시각에선 대이스라엘 투쟁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위한 민족해방투쟁이다. 하지만 서구의 언론은 팔레스타인의 무장 투쟁을 '테러'(terror)라 몰아붙였고, 이스라엘 탱크가 민간인을 죽이면 '실수'(error)라며 감싸곤 했다. 영어 알파벳 't'가 들어가느냐 빠지느냐에 따라 평가는 180도 달라진다.
▲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철조망. 홀로코스트 유대인 희생자 600만 명 가운데 100만 명이 이곳에서 죽었다고 알려진다. ⓒ김재명
중동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
지구촌 평화와 인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의 '평화적 생존권'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다시 난민이 됐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거리도 부족하다. 팔레스타인은 1948년 이래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정치군사적 공세로 고통 받아왔다. 이들이 고전적인 의미에서 '민족 자결'을 외쳐도 이스라엘은 (최대 동맹국 미국의 뒷심을 믿고) 못 들은 체 해왔다.
미 바이든 행정부는 이번 유혈사태 동안에 3차에 걸쳐 유엔 안보리의 휴전안을 막으면서 무기 원조를 이어갔다. 따라서 이스라엘군의 학살을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 트럼프 행정부처럼 예루살렘에다 미 대사관을 옮기는 등 노골적으로, 또한 지금의 바이든 행정부처럼 네타냐후 총리의 강공책에 끌려가며 친이스라엘 정책을 편다면, 중동 평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결국 중동평화의 길목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착이다. 미 국제개발처(USAID)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1946-2022년 사이에 무려 3179억 달러의 원조를 받는 최대 미 원조 수혜국이다. 미-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를 비롯한 유대인 압력단체의 파워와 정치헌금, 공화당-민주당 차이 없는 미 정치권과 언론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미국의 친이스라엘 흐름이 하루아침에 바뀌길 바라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를 가져오는 해법은 큰 틀에서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땅을 바라는 팔레스타인에게 땅을 나눠주고, 이스라엘은 평화를 되찾는다는 이른바 '땅과 평화의 교환' 원칙이다. 이른바 '오슬로 평화협정'(1993)을 맺을 때 합의했던 원칙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스라엘 강경파들이 그들의 신 야훼(여호아)가 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더러운 아랍놈들'(팔레스타인)과 나눠 갖지 않겠다는 고집이다. 지금의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바로 그런 완고한 생각을 지녔다. 이에 맞선 하마스의 투쟁은 곧 땅과 생존권을 되찾기 위한 극한적인 저항이다.
나치 홀로코스트가 남긴 교훈
2024년에도 멈추지 않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은 생각이 깊은 유대계 지식인들마저 분노하게 만들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라즈 세갈(미 스톡턴대, 역사학)은 '대량학살의 교과서 같은 사례'(A Textbook Case of Genocide)이란 제목을 단 글에서 가자 지구에서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것을 '홀로코스트의 교훈에 대한 수치스러운 오용'이라 비판했다(https://jewishcurrents.org/a-textbook-case-of-genocide).
1948년 지구상에 없던 나라가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중동 한복판에 들어선 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난 80년 가까이 엄청난 고통과 설움을 겪어왔다.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35년 동안 가혹한 억압과 착취를 겪었던 우리 한국인들의 DNA는 팔레스타인의 분노와 아픔을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지난날 침략전쟁을 벌이던 일본인들이라면 이해하기 더딘 대목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주 들었던 질문이 있다. "유대인들은 나치 히틀러 정권의 독일에게 그토록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도대체 어떤 역사적 교훈을 배웠는가?" 하는 질문이다.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니 힘을 키워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한 차원 높은 교훈은 어떤 것일까. 힘이 있다고 약소민족을 억누르는 것은 사악한 범죄이므로, 이웃과 타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참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교훈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가자에서 저질러지는 이스라엘의 전쟁범죄 행태를 보면, 그런 교훈과는 거리가 멀다.
인권 말하지만 '유대인만의 인권'
이스라엘은 물론 독일, 폴란드, 미국에는 '홀로코스트 뮤지엄'(Holocaust Museum)이란 이름의 전시관들이 곳곳에 있다. 추모관, 기념관 등등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 유대인이 어떻게 잡혀가고 어디서 얼마만큼 끔찍한 박해를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공간들이다. 피해 당사자인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그런 전시관들을 돌아보면 마음이 무겁고 슬퍼진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고난을 보면서 희생자들의 넋을 빌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헤르츨 언덕에는 아주 잘 만들어진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관이 있다. 야드 바셈(Yad Vashem) 국립기념관이다. 몇 해 전에 그곳 입구에 들어서자말자 놀랐다. 입장료만 비싸고 전시물은 허전한 다른 곳들과는 격이 달랐다. 현대적인 건축 기법에 조명과 사운드, 시청각적인 효과들을 더해 볼거리가 엄청 잘 정리돼 있다.
지난날 사진 자료도 풍부하고,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생생한 증언과 표정이 비디오 화면을 메운다. 이쪽 공간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면 또 다른 볼거리가 관람객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안에서 사진을 못 찍도록 엄격하게 막아서는 바람에 유감스럽게도 그곳 사진이 없다). 서너 시간 동안 보고난 뒤 출구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대체로 얼굴들이 불그스레 상기돼 있었다. 눈가가 촉촉한 사람도 보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유대인 젊은이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전시관에서 배운 역사의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이 뭐냐고. "우리 유대인들이 저토록 고난을 겪은 만큼, 앞으로 저런 상황이 다신 오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인권은? 하고 물으니, "인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는 얘기도 했다.
인권 질문은 '낚싯밥' 같은 것이었다. 곧바로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은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그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휙 돌아서 가버렸다. 그가 말하는 인권은 '유대인만의 인권'이었던 셈이다. 내 민족이 겪었던 지난날의 고통을 떠올리면서 나와 다른 민족, 타자의 고통을 생각하는 최소한의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피해자 기억'만 강조하는 '가해자'
지난날 대량학살(홀로코스트)를 겪었던 유대인들은 오늘날 더 이상 피억압자가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전쟁범죄자이자 가해자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게 됐다. 이스라엘은 1948년 이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구촌의 최대 난민집단으로 만들었다(최근에 나온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서 <Global Trends Report 2023>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난민은 600만). 뿐만 아니라 땅을 되찾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을 탱크와 공습으로 뭉개왔다. 그러면서 '중동판 홀로코스트'를 자아냈다.
'약자를 힘으로만 뭉개면 평화는 없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노력만이 평화를 일궈낼 수 있다'는 것이 히틀러가 남긴 단순 명쾌한 교훈이라 여겨진다. 나치 독일의 폭력은 20세기 중반에 벌어졌던 '국가테러'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600만이 죽었다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21세기에 '중동판 국가테러'이자 '중동판 홀로코스트'를 저지르는 '가해자'이면서 지난날 히틀러가 남겼던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되새기지 않는다. 오로지 '피해자 기억'만 강조할 뿐이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바탕에 깔고 앞으로 4개월 동안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와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여러 관심사항들을 다뤄보려 한다(16회 분량 예정). 이를테면, △독일의 평범한 시민들은 왜 히틀러를 지지했을까, 패전 뒤엔 생각이 바뀌었을까. △괴테의 문학전집을 읽고 베토벤의 음악을 즐겨 듣던 독일인들이 민간인 학살에 망설임은 없었을까. △유대인들은 왜 유럽의 백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왔는가. △유대인 600만 명이 죽었다는데, 혹시 부풀려진 것은 아닐까.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무슨 근거로 '유대인 학살은 없었다'는 주장을 펴는 것일까.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돼 예루살렘 재판 뒤 처형된 아돌프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표현대로)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악역을 충실히 해냈던 평범한 독일장교였나. △이른바 '홀로코스트 산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가짜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어떻게 이득을 챙겼나. △과거사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여전히 껄끄러운 동아시아에 견주어 독일 이웃나라 프랑스, 폴란드와의 역사 화해(교과서 포함)는 잘 이뤄졌나 등이다.
유대인 지식인들은 나치의 야만적 광기를 어떤 눈길로 바라봤을까.
디아스포라 신화의 허구,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뿌리는 중동 아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4]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②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가'라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1970년 이스라엘 재판소에서 이스라엘 시민권을 확보할 수 있는 유대인의 정의는 △유대인을 어머니로 둔 사람, △조부모 가운데 유대인을 둔 사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다. 만약 어떤 한국인이 종교를 유대교로 바꾼다면, 이스라엘 법에 따라 '유대인'이 될 수도 있다(이스라엘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는 나라다).
이스라엘이 '중동의 깡패국가'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 높다. 이스라엘 법무부는 전세계로부터 몰려드는 '가짜 유대인'을 걸러내는 문제로 머리가 아프다.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에서 제2의 삶을 꿈꾸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려면 스스로를 '개종한 유대인'으로 꾸미는 것도 한 가지 묘책(?)이다. 개중에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원주민 땅을 빼앗아 차지하려는 시커먼 속셈을 지닌 '예비 불법 정착민'들도 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유대교 교리를 다 외우고 이민 심사과정을 헤쳐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가 유대인인가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가'는 20세기 중반 독일에서 특히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잣대였기 때문이었다. '독일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1935년 9월13일 나치 독일은 악명 높은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만들었다. 유대인으로 찍힌 사람은 독일 시민권을 빼앗겼다.
그 인종차별법은 일반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결혼을 막았다. 혼외 성관계조차 못하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순 없다'며 이를 어기면? '중범죄자'로 여겨져 감옥이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동성애는 더더욱 금지됐다. 나치 시절 유대인 연인들은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다.
그렇다면 누가 유대인인가. 나치 독일이 규정한 유대인은 '완전한 유대인'과 '혼혈인'(Mischling)로 나뉜다. 100% 완전한 유대인은 △혈통상 인종적으로 완전한 유대인 조부모를 세 명 이상 둔 사람, △조부모가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다(당사자가 유대교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었다). '혼혈인'은 유대인 조부모를 한 명이나 두 명 둔 사람으로 다음 사항에 해당되면 '유대인'이다.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 △유대인과의 혼인으로 태어난 사람 △유대인과의 혼외 관계로 태어난 사람 △유대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 등이다(명칭만 '1급 혼혈인' 또는 '2급 혼혈인'으로 나뉘었고, 나치에게 끌려가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규정이 애매하고 포괄적이었기에 "당신은 유대인이야"라고 찍히면 그냥 '유대인'이 됐다. 이에 따라 독일의 유대인 숫자는 56만으로 집계됐다(유대인임을 숨긴 이들도 적지 않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적지 않은 숫자의 유대인 젊은이들이 독일국방군으로 총을 잡았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유대인 판정을 받은 이들은 '제국(Reich) 시민'이 못 되고 2등 시민으로 떨어졌다(이즈음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녔음에도 '2등 시민'으로 차별 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처지와 같다. 이들은 이스라엘 총인구의 20% 쯤이다).
당연히 반발이 컸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과 유가족들도 그러했다. 그 전쟁에서 독일제국을 위해 싸우다 숨진 유대인은 1만2000명쯤이다. 부상병은 더 많았다. 이들 참전 유족이나 당사자들은 "독일을 위해 싸우다 죽고 다쳤는데 이제 2등 시민으로 차별 대우를 하느냐?"는 불만을 품었다. 유대인 공무원들은 "독일 유대인을 상대로 한 무지막지한 조치를 거두어들이라"고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나치 정권의 험악한 기세에 밀려 불만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1940년대 들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행 기차들이 바삐 움직일 때에 유대인 참전 군인들과 유가족들은 수용소로 가는 순번에서 뒤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그야말로 잠시 늦춰졌을 뿐이다. 끝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일반 유대인들과 같았다.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이어지는 기찻길. 이곳에서만 유대인 1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김재명
세 부류로 나뉜 유대인
전세계 유대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유대인 사회 안에서조차 논란 사항이다. 대체로 전세계 유대인 총인구는 1500~1600만, 이스라엘 유대인은 680만, 미국 유대인은 600만 명쯤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유대인은 세 부류로 나뉜다. △터키계 카자르인의 후손인 아쉬케나짐(Ashkenazim, 최대 1200만 명), △아브라함의 후손인 세파라딤(Sepharadim, 최대 450만 명), △에티오피아계인 팔라샤(Falasha, 2만 명) 등이다. 유대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쉬케나짐은 폴란드와 독일 등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지금의 미국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엘리트 집단이 대부분 아쉬케나짐 출신이다. 이들은 유럽인들과 피를 섞으며 오랫동안 머물렀기에 겉모습도 전형적인 백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많다.
세파라딤 유대인은 지난날 정복자인 로마제국에 맞섰던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이다. 혈통상 선조는 아브라함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중동이나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으로 흩어졌다.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지명이 '몬주익'이다. 몬주익은 '유대인의 산'이란 뜻이다. 1992년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이 자리한 곳이 바로 몬주익이다.
세파라딤 가운데 절반쯤을 차지하던 이베리아 유대인들은 15세기에 일어난 기독교도들의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려는 운동)으로 말미암아 큰 위기를 맞이했다.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든지, 싫으면 떠나라"는 압박을 받았다. 일부는 개종을 해 눌러 앉았지만, 다수 셰파라딤은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와 중동으로 옮겨갔다. 세파라딤 가운데에서도 특히 예멘이나 오만 지역 출신의 유대인들을 (동쪽 방향이라는 뜻을 지닌) '미즈라히'라고 일컫는다.
유대인도 다 같은 유대인 아니다
말로는 '유대인 운명 공동체'라고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어디 출신의 유대인인가를 둘러싼 차별과 갈등은 늘 문제가 돼 왔다. 아쉬케나짐은 이스라엘 상층부를 이루는 갑이고, 세파라딤은 을이다. 특히 미즈라히는 천민처럼 알게 모르게 멸시를 받곤 한다. 사례 하나를 보자.
1995년 11월4일 지중해변 텔아비브 시청 앞 광장에서 10만 명이 모인 가운데 중동평화를 기원하는 정치집회가 열렸었다. 그 집회가 끝나자말자 총성이 세 번 잇달아 울렸다. 이스라엘의 집권 좌파 정당인 노동당 지도자이자 오슬로 평화협정(1993)을 이끌었던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겨냥한 총격이었다. 총리는 등에 총알 1방이 박힌 채 병원으로 실려가는 길에 숨을 거두었다.
라빈을 죽인 암살범 이갈 아미르(25)는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땅의 일부라도 팔레스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무기징역을 받고 지금도 복역 중이다). 그는 예멘에서 살다가 이스라엘로 옮겨온 '미즈라히' 출신이다. 아쉬케나짐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려 했지만, 여자의 아버지가 "미즈라히와 결혼해선 안 된다"며 반대하는 바람에 헤어졌다. 프로파일러는 그의 범행 동기 밑바닥에 개인적 좌절감이 깔려 있음을 알아챘다. 이렇듯 유대인도 다 같은 유대인이 아니다.
"유대인은 우리 선조가 베푼 은혜 기억해야"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끈 '마법의 주문'은 매우 길다. 요약하자면 다음 두 가지다. 첫째, 기원전 2100년쯤 유대인의 선조인 아브라함이 그가 믿는 유일신 야훼(여호아)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받고 그곳에 살았으니 그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둘째,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 침략자들에게 강제로 쫓겨나 그들이 히브리어로 말하는 갈루트(galut, 유배) 또는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離散)가 됐지만, 20세기 들어 야훼의 뜻에 따라 오랜 시련을 끝내고 '약속받은 땅'으로 돌아오는 알리야(aliyah, 귀환)로 나라를 세울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땅'(Eretz Israel)에서 나름의 안정된 삶을 누렸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빼고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어두운 기록들로 차 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른바 바빌론 유수(幽囚)의 치욕을 겪었다. 노예 상태로 있던 유대인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낸 이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였다. 몇 년 전 이란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우리 이란의 선조들이 베푼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지나가며 하는 말이 아닌, 뼈있는 말로 들렸다.
고대 로마제국의 지배에 저항한 3차에 걸친 반란(서기 66년, 115년, 132년)은 유대인들이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 전세계로 퍼진 결정적인 계기였다(유대인 반란군이 끝까지 저항했던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 학생들의 애국심을 키우는 필수 견학코스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바그다드에 갔더니, 그곳에 유대인 시너고그(synagogue, 유대인 예배당)가 있었다. 이란 테헤란에도 유대인들의 옛 주거지역 흔적들이 있어 놀랐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현지 토착민들의 멸시와 경계 속에 폐쇄적인 공동체를 꾸려가면서 종교적 정체성을 이어 나갔다. 그들만의 예배를 위한 작은 시너고그를 세웠다. 유대인 연구자들의 길고 긴 설명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서유럽에 머물던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하거나 억압을 하는 지역들을 피해 이곳저곳 옮겨 다녔고, 그나마 유대인들을 너그럽게 대했던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쪽으로 많이 가게 됐다는 것이다(폴란드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이 대목은 논란거리다. 아래 글에서 다시 살펴보자).
▲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 안의 여윈 수감자들. 체력이 떨어져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Private H. Miller
나치 희생자의 다수는 동유럽 유대인들
1933년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올랐던 해다. 바로 그 무렵 나온 미국 유대인협의회 연감(The American Jewish Yearbook)에 따르면, 1933년 현재 유럽의 유대인은 약 950만 명이었다. 국가별로는 폴란드 300만, 소련 252만, 루마니아 98만, 독일 56만, 헝가리 45만, 체코·슬로바키아 36만, 오스트리아 25만, 프랑스 25만, 리투아니아 15만 명 등이다.
이들 유럽 유대인 가운데 87%에 가까운 약 825만 명의 유대인들이 동유럽 지역(폴란드, 루마니아, 소련, 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발트 3국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었다. 소련 유대인 252만 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110만 명은 폴란드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에 살았다. 폴란드 300만과 우크라이나 110만을 합하면 이 두 지역의 유대인은 유럽 전체 유대인의 43%쯤이다.
12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유대인 희생자가 600만으로 집계됐다. 유럽 유대인 950만 가운데 3분의 2가 숨진 셈이었다. 특히 폴란드 유대인의 피해가 컸다. 1933년 폴란드 유대인 숫자는 300만 명이고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1939년 폴란드 유대인숫자는 335만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5년 뒤인 1950년 통계로는 4만 5000명에 그쳤다. 엄청난 차이가 난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다른 곳으로 피란을 가거나 국내에 숨어 지내면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있다. 유대인 연구자들의 집계상으론 폴란드 유대인 300만, 우크라이나 유대인 90만 명이 전쟁 중에 숨졌다.
유럽 유대인들의 뿌리는 카자르
여기서 크게 논란이 되는 사실이 있다. 지난날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가 흩어졌던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들(셰파라딤)이 나치 학살 희생자의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다수는 아쉬케나짐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이름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르낭(1823-1892),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유대인 역사가'로 일컬어지는 살로 W. 배런(미 컬럼비아대, 역사학, 1895-1989)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은 아쉬케나짐 유대인들의 선조가 살던 곳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카자르(Khazar) 지방이라 말한다.
카자르는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남러시아 초원지대의 옛 이름이다. 8세기 무렵 그곳에는 카자르족이 왕국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740년 무렵 카자르 왕국의 불란(Bulan) 왕은 유대교를 국교로 삼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다스리던 국민들을 유대교로 집단 개종시켰다. 카자르 왕국은 세계사에서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유대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단 하나의 독특한 보기를 남겼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 1905-1983)는 헝가리 유대인 출신의 영국 소설가이자 비평가다. 한국에는 그의 소설 <한낮의 어둠> 번역판이 있다(후마니타스, 2010년).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체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다룬 소설이다. 말년에 파킨슨 병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쾨슬러가 남긴 책 가운데 이스라엘에선 쉬쉬 하며 금서 목록에 올려진 것이 하나 있다. <제13지파>(The Thirteenth Tribe)라는 책이다.
쾨슬러는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바로 앞에 소개한 프랑스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르낭과 미 역사학자 살로 배런 등의 연구 결과물들을 독자들이 읽기 쉽게 잘 정리해냈다. 이 책에 따르면, △유대인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아쉬케나짐 유대인은 8세기 카자르 왕국을 세웠던 터키(돌궐족)계 카자르인의 후손들이고, △아쉬케나짐의 뿌리가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카스피해로 이어지는 지금의 러시아 남부 지역이라는 것이다. 쾨슬러는 당시 카자르 왕국의 상황을 이렇게 풀이했다.
[8세기 초 세계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대표하는 두 초강대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들의 이념적 교리는 선전과 파괴, 군사적 정복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힘의 정치'(power-politics)와 관련돼 있었다. 카자르 제국은 적국이나 동맹국으로서 두 세력 가운데 어느 쪽과도 동등함을 입증해보인 제3세력을 대표했다. 카자르왕국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중 어느 쪽도 받아들이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 어느 쪽이든 한 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로마 황제나 바그다드의 칼리프의 권위에 자동적으로 종속되기 때문이다](Arthur Koestler, <The Thirteenth Tribe : The Khazar Empire and its Heritage>, Random House, 1976, 58쪽).
카자르 왕국의 지배계층이 유대교를 받아들인 까닭은 (이슬람이나 기독교를 믿는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오늘날의 스위스처럼 중립국으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를 믿는 서쪽의 유럽 세력과 남쪽의 신흥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자, 카자르 나름의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 내부적 결속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고 풀이된다. '카자르 제국과 그 유산'이란 부제목을 단 책에서 쾨슬러는 카자르 지배층의 당시 생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카자르의 지배자들이) 유대교를 받아들이는 데 정치적 동기가 작용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슬람 지역 지배자인) 칼리프에게 정신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뜻했고, 그렇다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로마 제국의 종교적 신하가 될 위험성이 있었다. (카자르 지배층의 생각에는) 유대교가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가 존중하는 성스러운 책을 바탕으로 하는 명성 있는 종교였다. 유대교는 카자르의 지배자를 이교도 야만족보다 우위에 서게 해줄 뿐만 아니라 칼리프와 로마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Arthur Koestler, 59쪽).
쾨슬러에 따르면, 카자르 왕국은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지역이었고, 호전적으로 신앙을 맹신하는 지역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개종이나 기타 다른 이유로 위협받는 비잔티움 통치하의 유대인들의 주기적인 탈출을 (카자로의 집단이주를) 이끈 천국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 8세기에 유대인 국가로 바뀐 카자르 왕국 지도. 13세기 몽골족을 피해 폴란드 쪽으로 옮겨간 카자르 인들은 20세기 나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됐다.
몽골족 피해 왔다가 나치에 당했다
그렇다면 카자르인들이 어떻게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으로 옮겨가게 됐을까. 유대교를 받아들인 카자르 왕국은 10세기 말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고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 뒤 13세기에 아시아로부터 몽골족이 유럽으로 쳐들어오자 두려움을 느낀 카자르인들은 지금의 독일과 폴란드 등 동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부모가 나치 학살 때 살아남아 1948년 이스라엘에 닿은 폴란드계 유대인의 아들 슐로모 산드(텔아비브대, 역사학, 1946년생)는 그의 역작 <만들어진 유대인>(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 2009)에서 카자르인들의 이주 과정을 이렇게 그렸다.
[13세기 초 칭기즈칸과 그 아들들이 이끈 몽골인들의 폭풍 같은 침략에서는 그들이 가는 길에 눈에 띈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사람들이 도주하는 바람에 대평원에서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그러한 이주민들 중에는 카자르 유대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으로 들어갔고 자연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땅으로도 들어갔다. 카자르 왕국은 역사의 망각 속으로 가라앉았다](슐로모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 사월의책, 2022, 421쪽).
폴란드 음악가의 고난을 다룬 영화 <피아니스트> 장면에 보이듯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 300만이 넘는 유대인이 살게 된 것도 그런 사정으로 이해된다. 13세기에 동쪽에서 밀려드는 몽골족의 살육을 피해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으로 옮겨갔던 카자르인들은 20세기 중반에 더 잔인한 괴물(나치 히틀러 집단)을 만나 홀로코스트의 대량 희생자가 됐다.
디아스포라 신화의 허구
여기서 짚고 넘어갈 중요한 역사적 사실 하나. 아쉬케나짐의 카자르 기원설에 따르면, 현대 유대인 인구의 75퍼센트를 차지하는 아쉬케나짐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와 로마제국에 정복당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세파라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2000년 전 떠났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 이스라엘을 세우자는 시오니즘의 주창자들이 디아스포라 신화를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그 허구의 논리에 따라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을 쫓아낸 셈이 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볼 때 현재 유럽과 미국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의 다수는 '약속의 땅' 이스라엘(팔레스타인)로 돌아갈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 그들이 제대로 뿌리를 찾아간다면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남러시아 지역이 될 것이다. 이는 오늘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매우 민감한 주제다. 아서 쾨슬러는 <열세 번째 지파>를 출간한 뒤 유대인 시오니스트들로부터 인신공격이나 다름없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이 주제를 얼마나 예민하게 여기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 옛날 로마제국에 정복당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동유럽 땅에서 벌어진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직접 관계가 없다는 대목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또한 선조가 살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오니즘과도 정면으로 부딪친다.
하지만 이스라엘 교과서에선 이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다. 교실에서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 갈 때마다 유대인 젊은이들에게 물어봤지만, '처음 듣는 얘기'라며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마치 일본 학교에서 '위안부' 성노예 문제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에 젊은이들이 일제 침략전쟁의 '더러운 과거사'를 잘 모르는 상황을 떠올린다. 중동판 역사의 부인이자 왜곡이다
예수를 팔아넘겨 '병원균'된 유대인? 고리대금업이 미움을 더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5]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③
영국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유산을 꼽을 때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와 <베니스의 상인>, <햄릿>, <리어왕>, <맥베스> 등 그의 문학 작품들이 빠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19세기 영국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이 그의 <영웅숭배론>에서 "셰익스피어는 인도하고도 안 바꾸겠다"라고 했을까 싶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지 않았어도, 또는 칼라일이란 역사가 이름을 몰라도,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것은 누구라도 한번쯤 들어본 말일 듯하다.
몇 해 전에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마을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영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인 버밍엄 남쪽에 자리 잡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본(Stratford-upon-Avon)이다. 이름이 길기에 현지 사람들은 그냥 '스트랫퍼드'라 일컫는다. 영국에는 스트랫퍼드란 이름을 지닌 곳들이 여럿이다. 2012년 하계 올림픽이 열렸던 곳도 런던 스트랫퍼드다.
16세기 중반 스트랫퍼드 마을에서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난 셰익스피어는 20대 초반 결혼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태어난 집도 그대로 있다. 인구 3만쯤의 이 작은 도시를 먹여 살리는 인물이 400년 전에 죽은 셰익스피어다. 그의 어린 시절 흔적을 보려고 해마다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런던에서 차로 2시간 반쯤 걸리는 스트랫퍼드를 하루 투어 일정으로 오고간다.
▲ 1944년 5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막 도착한 유대인들이 선별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실어오면서 퇴거 비용과 열차 운임을 물리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악역을 유대인에게 떠맡긴 셰익스피어
방문객들은 맨 먼저 셰익스피어 생가를 둘러본다. 그 다음 바로 가까이에 있는 셰익스피어 기념관에 가서 이런저런 빛바랜 관련 자료들을 살펴본다. 그리곤 가게에서 셰익스피어란 글자가 새겨진 공책이나 커피 잔 등을 사들고 돌아간다. 그곳 기념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40대 초반의 여성을 만나 궁금해 하던 점을 하나 물어봤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돈을 빌려가고 못 갚을 경우 1파운드 살을 뜯어내겠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나오는데요, 셰익스피어도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나 보죠? 그런 악역에 유대인을 떠맡겼으니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일까, 큐레이터는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저도 가끔 생각해오던 흥미로운 물음인데요, 뭐라 답을 하기가 어렵네요."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모습이 이해가 됐다.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호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많은 백인들처럼 유대인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을 솔직히 털어놓긴 어려운 노릇이다. 자칫하면 그를 '반유대주의자'(anti-semitist)로 낙인찍히도록 해선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유대인 하면 대부업 떠올리는 유럽인들
무덤 속의 셰익스피어로선 할 말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쓰던 16세기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부업이나,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 같은 일을 유대인들이 많이 했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유럽 백인사회에서 이방인 집단인 유대인들을 '게토'(ghetto) 안에 머물도록 주거지역을 제한하거나, 직업의 자유도 부분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담보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대부업만큼은 막지 않았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저술가인 폴 존슨은 유대인의 역사에 관한 두꺼운 책을 냈다(A History of the Jews, 1987).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었던 1980년대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한 그의 이력이 말하듯, 폴 존슨은 보수 성향을 지닌 가톨릭신자다. 유럽에서 유대인 하면 대부업을 떠올리게 된 배경을 존슨은 이렇게 적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이자를 죄악시 여겼으며, 1179년부터 이자를 받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파문했다. 기독교 세계의 법률은 실제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차별했다. 그래서 유대인은 대금업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유대인을 거론할 때마다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직업인 대금업을 떠올렸다. 15세기 후반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았던 요세프 콜론(유대인 랍비)에 따르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이 '대금업'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직업을 거의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300쪽).
위에 옮긴 글에서 '유대인들이 대금업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는 유대인 랍비의 주장은 실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대금업이란 현금이 많아야 되는데, 유대인들이 모두 부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거리의 행상이나 날품팔이, 농장이나 소규모 수공업체에서 저임금 노동을 했을 것이다. '유대인은 대금업 이외의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는 주장은 '어쩔 수 없이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변명으로 들린다.
'유대인 티'를 낸 고리대금업
이스마 엘보겐은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유대교리 및 유대역사를 강의했던 유대인 학자다. 엘레오노레 슈텔링은 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 역사학자다. 엘보겐이 오래 전에 쓴 것을 슈텔링이 수정·보완해 펴낸 책(원서명은 Die Geschichte der Juden in Deutschland, 1996)에도 유대인이 오래 전부터 고리대금업을 해왔고 그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12세기 기록들은 처음으로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중세 수도원장, 십자군 전도사로 활약했던) 베른하르트 폰 클레르보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이 없는 곳은 어디에서든 기독교도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냉혹하게 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또한 'judaicare'(유대인의 장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비난했다. 이렇듯 금전거래와 관련된 불길한 이미지는 수세기 동안 유대인에게 붙어 다녔다](이스마 엘보겐/엘레오노레 슈텔링, <유대인의 역사: 로마제국에서 20세기 홀로코스트까지>, 새물결, 2007, 49쪽).
위의 두 유대인 역사학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중세 시절에 유대인들의 생업활동에서 유별나게 '유대인 티'가 났던 것은 고리대금업 빼고는 없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옛날 유럽의 유대인들은 행상을 비롯한 중소상인으로, 또는 주물공장에서의 기술자, 농장과 포도원에서의 노동 등으로 먹고 살았다.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는 의사나 학자로, 또 다른 일부는 곳곳에 퍼져 있는 유대인공동체 인맥을 바탕으로 동방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이 때문에 베니스의 상인을 비롯한 현지 백인 경쟁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결국 초점은 유럽 백인사회에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이미지(유대인=예수를 팔아넘겨 죽게 한 사악한 이교도)를 일부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이 더 악화시켰다는 데 모아진다.
셰익스피어가 21세기 개정판 낸다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는 악착같은 배금(拜金)주의자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그와 같이 사는 집을 '지옥'(hell)이라 한탄한다. 기독교를 믿는 청년 로렌조와 사랑에 빠진 제시카는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려 한다. 급기야 제시카는 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아버지의 돈과 보석(금)을 훔쳐 로렌조에게로 달아난다. 충격을 받은 샤일록은 "아이고 내 딸, 내 돈, 내 보석"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거나 그에 바탕한 연극을 보는 유럽인들은 야릇한 쾌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400년 전에 죽은 셰익스피어가 무덤에서 나와 그의 <베니스의 상인>을 21세기의 분위기에 맞춰 개정판을 낸다면 어떨까.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역에 유대인을 그대로 배치할까? 엄청 망설일 것이 틀림없다. 무엇 때문에? 옛날에 견주어 압도적으로 영향력이 커진 유대인 집단으로부터 '반유대주의자'로 몰려 손가락질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대인 파워가 강해져 함부로 유대인을 비판하기 어렵다. 미국 사회에서 대학교 교수나 정치인, 또는 언론사의 논설위원이 반이스라엘 발언 또는 비난 글을 썼다간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히기 마련이다. 대학이나 언론사에서 쫓겨나고 정치인은 선거에서 낙선운동의 표적이 된다. 이미 여러 희생자들이 나왔다.
지난해 10월부터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마구 벌이는 전쟁범죄 행위를 미 주요 언론사들이 따끔하게 지적하지 못하는 것도 다 그런 사정에서다(유대인 파워가 미국을 어떻게 휘어잡고 있는지는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유럽에선 지난 2천년 동안 반유대주의가 대세를 이뤘다. 아돌프 히틀러가 '끝판왕'인 셈이다.
▲ 161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게토에서 일어났던 유혈사태를 그린 삽화. 유럽인의 반유대인 정서는 때때로 대규모 폭력과 학살을 낳았다. ⓒ위키미디어
"이방인에겐 이자 받아도 된다"
오래 전부터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이자를 받는 것을 죄악시했다. <출애굽기> 22장 25절에는 이자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 <레위기> 25장 36절도 이자를 금지한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한 것은 가난한 유대인들을 도와주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유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종교지도자들의 뜻이 담겼다.
같은 유대인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율법은 엄격했다. 이자 대신에 선물이나 다른 그 무엇을 주는 것을 유대인들은 '이자의 먼지'라 일컬었다. 유대인 공동체의 선지자들은 탈무드를 통해 '이자의 먼지'마저도 금지했다. 이자를 받는 것을 숨기는 것도 죄이고, 이를 알고도 그냥 모른 체 하는 것도 죄라고 했다. 어긴 자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엄격하게 지켜지지 못했다).
구약성서의 첫 다섯 편(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은 유대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토라'의 구성 요소다. 그런데 <신명기>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겐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했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받아도 좋다. 그러나 친족에게서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23장 20절). 유대인들끼리는 이자를 받는 일을 막으면서도, 나와 다른 민족에게는 이자를 허용하는 이중적인 율법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에게 이자를 받을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문제는 돈을 빌리는 쪽에서 터무니없는 고리(高利)라 여겨질 때다.
유대인을 보는 유럽인들의 눈길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이 유럽 땅에서 멸시를 받았던 까닭엔 고리대금업자라는 더러운 이미지와 더불어 유럽이 기독교 문명권이란 점도 크게 작용했다. 삼위일체 하느님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로 여기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예수를 부정하고 로마군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든 유대인들을 좋게 보기 어려웠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기독교 신학의 거두이자 성인으로 추앙받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유대인에 대해 여러 비판적 기록을 남겼다. 그의 시각에서는 '몇 닢의 은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가리옷 사람 유다)이야말로 유대인의 상징'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영원토록 예수를 죽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유다가 유대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중동 현지 취재를 갈 때 자주 머물렀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민박집 주인 부부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민자다. 그들은 매우 독실한 유대교도다. 유대교 예배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다. '사바트'(Sabbat)라 부르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 밤(정확히는 해가 진 뒤) 시너고그에 가서 밤새도록 예배를 드리곤 했다.
이들 유대인 부부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예수를 배신한 유다 탓이 아니다. 유대민족이 유일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타민족들의 질시와 박해를 받아왔다고 여긴다. 이들 부부는 함께하는 아침 식사 때마다 유대민족이 어떻게 고난의 역사를 헤쳐 왔는가를 길게 들려주곤 했다. "인터뷰 약속이 있어 지금 서둘러 나가야 한다"며 손목시계를 쳐다보는데도 하고 싶은 말을 잇곤 했다.
위 부부의 주장처럼, 여러 기독교 교리학자들도 미운 털이 유대인에게 박힌 가장 큰 이유는 (배신자 유다가 1차적 원인 제공자이긴 했지만,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도 그를 인정하길 거부했고, 그 후손들도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해온 데 있다고 본다. 영국 역사저술가 폴 존슨의 글을 보자.
[(중세)기독교 변증가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선조들의 죄 때문에 유대인들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논점은 이러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예수가 행한 기적을 목격하고 그가 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고도 그가 그리스도인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그 시대 유대인의 죄였다. 그리고 후세대 모든 유대인은 자기 선조들처럼 똑같이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다](폴 존슨, 354쪽).
유대인에게 대재앙이 된 십자군운동
유대인에게 따르는 부정적인 이미지(△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질 않고 팔아넘긴 이력이 있는데도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면서 △고리대금업으로 물욕에 사로잡힌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유럽 백인사회의 유대인 차별과 멸시를 합리화시켜줬다. 안 그래도 비호감인 유대인을 더 미워할 구실을 찾는데 고리대금업만큼 딱 들어맞는 흠결은 없을 듯하다.
유대인을 바라보는 유럽 기독교인들의 싸늘한 눈길은 유럽이 격동기를 맞을 때마다 피를 불렀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십자군운동은 유대인에겐 흑역사로 기록된다. 십자군이 소집될 때마다 유대인의 피가 뿌려졌다. 십자군 무리들 사이에선 "유대인을 죽인 자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채권자를 없앤다면 빚도 없어지는 셈이니 큰 유혹을 느꼈을 법하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앞서, 유럽의 유대인 주거지를 습격해 피바람을 일으켰다. 시너고그에선 금은으로 만든 쟁반과 촛대 등을 약탈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노잣돈으로 챙겼다.
[보아라. 우리는 무덤을 찾아가서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보아라. 여기 우리 가운데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을 이유 없이 죽였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이들에게 복수하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더 이상 입에 오르지 않도록 그들의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우리 편이 되든지 우리와 같은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이스마 엘보겐/엘레오노레 슈텔링, 42쪽).
위에 옮긴 글은 십자군 무리들이 내걸었던 격문(檄文) 가운데 하나다. 1095년부터 산발적으로 벌어졌던 십자군 원정이 시들해가던 시점인 1199년과 1213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기독교도들에게 다시 한 번 십자군에 동참하라고 외치면서, 한편으로 유대인들을 향해 "십자군 원정대원들이 갚아야 할 이자가 있다면 받지 말라"고 명령했다. 여기서 짚어볼 점 하나. 대금업을 크게 하는 유대인 뒤에는 그 지역의 세력가(국왕, 봉건 영주, 귀족)들이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유대인은 왕실(또는 성주)의 재정 관리인이나 세금 징수원이 됐다. 영국 폴 존슨의 글을 다시 보자.
[이론상으로 그리고 실제로도 왕은 광범위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생기는 막대한 이윤의 수혜자였다. 12세기에 영국 앙주(Anjou) 왕가의 왕들이 부유한 유대인 대금업자들 덕분에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 특별 재무성은 각 도시에서 유대인 공동체와 함께 금고를 운영했다](폴 존슨, 364쪽).
유대인과 유착한 지배계급이 실속을 챙겼지만 욕은 유대인이 얻어먹었다는 사실은 '독일 반유대주의 연구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볼프강 벤츠(베를린공대, 반유대주의연구소장)의 연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한국에도 번역본으로 소개된 <홀로코스트>(Der Holocaust, 2001)의 저자인 벤츠 교수는 그의 책(Bilder vom Judem, 2001)에서 이렇게 썼다.
[유대인은 기독교에 기초해 만들어진 신분 질서와 길드(Guild 중세 상인 또는 장인의 조합)로 말미암아 생산과 상업(농촌 소매업은 제외)에서 배제되었으므로 (기독교인들에게 고리대금업이라고 금지된) 대금업에만 종사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독점하게 된 전당포는 막대한 뇌물을 제공하는 대가로 왕과 제후의 보호를 받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오로지 유대인 대금업자만이 채무자들로부터 원성을 샀으며 정작 이런 금융제도를 통해 이득을 보는 왕과 제후는 온전했다](볼프강 벤츠,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푸른역사, 2005, 34쪽).
이런 글을 읽다보면, '유대인을 위한 변명'같이 느껴지기도 한다(물론 벤츠 교수에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믿고 싶다).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고 약간의 이자를 받을 수는 있다. 문제는 고리대금이라는 것이다. 지배계급에게 뇌물과 세금을 내는 비용보다 더 뜯어내야겠다고 작정한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반유대인 정서가 악화될지 모른다는 걱정은 아예 처음부터 접어둔 것이나 다름없다.
▲ 중세 유럽사회는 지배계층(왕, 영주, 귀족)과 결탁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횡포로 논란을 빚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중세 도시 전경. ⓒ김재명
루터, "고리대금업자는 무시무시한 괴물"
14세기 유럽 땅을 휩쓴 흑사병(페스트)은 유럽의 인구 가운데 1/4에서 1/2 가량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으로 기록된다(적어도 7,500만 명, 많게는 2억 명 사망). 페스트는 유대인에게 악몽으로 다가왔다. 유럽의 반유대주의적 정서는 유대인이 이 재앙을 일으켰다는 쪽으로 몰아갔다. 유대인이 우물이나 샘에 독을 풀어 '만들어낸 페스트'(pestis manufacta)란 소문이 널리 퍼져갔고, 고문에 못 이긴 유대인들은 '내가 그랬노라'며 허위자백을 했다.
그 참에 고리대금업으로 미운털이 박혀 있던 유대인들이 덩달아 붙잡혀 죽었다. 자료에 따르면,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서 3백 개 이상의 유대 공동체가 이로 말미암아 파괴됐다. 독일 마인츠에서 6,000명, 스트라스부르크에서 2,000명이 희생됐다(폴 존슨, 372쪽).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 바람은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희생을 강요했다. 루터는 처음엔 유대인들이 개종과 더불어 자신의 종교개혁에 동참해줄 것을 바랐다고 한다. 1523년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란 소책자를 내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루터의 성경 이해가 탈무드(유대교 율법모음집)보다 못하다"는 둥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루터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그의 유대인 비판은 고리대금업에 집중됐다. 유대인의 재산은 터무니 없는 높은 이자로 독일인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니 유대인의 재산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유대인)고리대금업자는 도둑과 살인자로서 악에 깊이 물든 자다. 타인의 자양분을 먹어치우고, 타인을 망쳐놓고 재산을 훔치는 자는 누구든지 살인에 준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고리대금업자는 늑대 인간처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얼마나 더 많은 고리대금업자를 추적하고 저주하고 참수해야 하는가](폴 존슨, 419쪽에서 재인용).
1543년 루터가 '유대인과 이들의 거짓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했던 설교도 위와 비슷한 내용을 담았다. 루터는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행동에 나서도록 촉구했다. 이미 1537년 작센 지방에서는 유대인들이 살던 곳을 떠나야 했고, 1540년대에는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과 시너고그를 겨냥한 약탈·살육과 추방이 이뤄졌다. 베를린 유대인들은 쫓겨날 때 퇴거비용마저 물어내야 했다(400년 뒤 나치도 퇴거비용과 수송열차 운임을 유대인들에게 받아냈다).
독일지역에서 쫓겨난 이들은 그나마 유대인에게 상대적으로 포용적이라 알려진 폴란드 쪽으로 많이들 옮겨갔다. 하지만 그곳 폴란드에서도 현지인들의 폭동이 잊을 만하면 일어났다. 러시아에서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다. 오죽하면 학살과 박해를 뜻하는 '포그롬'(pogrom)이란 단어가 생겨났을까(이에 대해선 다시 살펴볼 예정이다).
글이 길어져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 우리는 지금껏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으로 유럽 백인들의 원성을 샀고, '예수를 팔아넘겼다'는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유대인 이미지를 더 악화시켰다는 점을 여러 기록에서 살펴봤다.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가리켜 '병원균'이니 뭐니 했던 것은 인종차별적인 아주 못된 발언이다. 하지만 유럽 사회를 오랫동안 휘감았던 반유대인 정서에 비춰 뜬금없는 돌출발언은 아니었다.
문제는 나치 히틀러 정권이 그런 반유대인 정서를 악용해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에 나섰고 많은 생목숨을 앗아갔다는 점이다. 나치가 저질렀던 인류사 최악의 전쟁범죄인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들이 모두 고리대금업자의 후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많은 유럽인들(특히 독일·폴란드·우크라이나인들, 파시즘 아래에 있던 스페인·이탈리아인, 독일군 점령정책에 협력했던 프랑스인)들이 큰 망설임 없이 유대인 탄압에 함께 나섰던 데엔 '유대인=고리대금업자'를 비롯한 해묵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한몫 했다고 보인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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